우리에게는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 <여성파업 첫발떼기> 토론회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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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우리에게는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 <여성파업 첫발떼기> 토론회 발제문

 

‘페미니즘 리부트’ 그 후,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르게는 2015년 말부터 늦게는 2016년 초까지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가 막 박차를 가하고 나아가던 시기를 기억한다. 그맘때를 떠올리면 SNS를 새로고침할 때마다 갱신되던 미투 챌린지의 게시와 다양한 여성 집회의 참여 후기 사진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보며 느꼈던 경이로움 비슷한 감정이 생각난다. 왜냐하면 2016년 이전까지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적 개념이 운동으로 눈앞에 나타난 경험은 전무했던 까닭이었다. 그즈음 내 또래 여성들은 누구나 페미니즘 운동이 일구어낸 뜨거운 사회적 논의와 변화에 고취되어 있었다. SNS에 각 대학교 이름을 검색하면 학교에 소속된 페미니즘 학회나 동아리들의 홍보 계정이 가장 먼저 올라오던 때였다. 우리 세대는 이미 페미니즘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가부장적 체제를 향한 이 분노가 영구적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가에서 페미니즘은 어떤가? 페미니즘 리부트 당시 왕성하게 활동하던 페미니즘 학회와 동아리들은 대부분 재생산에 실패해 사라졌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간신히 최소한의 인원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다. 뉴스에서는 날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 사례가 나오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던 빼곡한 포스트잇처럼 대중적 규모의 행동은 눈에 띄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페미니즘 운동을 그만두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여성들이 많다. 그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답은 언제나 같다. 이제 지쳤다는 것이다.

 

끝을 모를 것 같던 페미니즘 리부트의 열기는 왜 사그라들었는가. 왜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가 그저 세련된 형태로 약간 발전한 것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전과 같은 대중적 규모로 청년 여성을 조직할 수 없는가.

 

누가 누구에게서 해방될 것인가

 

“이 가운데 여성에 대한 차별에 대항하는 집합행동이 등장한 것을 넘어 여성‘만’ 참여할 수 있는 집합행동이 등장했다. 2017년 10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진행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 <비웨이브(BWAVE·임신중단 합법화를 위한 모임)>는 남성의 집회 참여를 제한한다고 공지하며 “해당 시위는 당사자주의를 채택”하며, “생명의 창조는 여성만이 지닌 고유한 권한”이고 따라서 “여성이 주체가 된 시위를 기획했”다고 밝혔다.1) 또한, 2018년 5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이어진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불편한 용기>(이하 <불편한 용기>)는 남성의 참여를 제한한 것을 넘어 ‘생물학적’2) 여성만의 집회 참여를 규칙으로 공표했다. 이들은 “시위에 참여하는 여성의 안전”을 보장하고 “시위의 주체가 여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규칙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3) 주목할 점은 ‘생물학적’ 여성만의 집회를 최초로 주장한 집회가 한국 여성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 동원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집회 측 추산에 따르면 <불편한 용기>는 8개월간 약 30만 명의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조선일보』 2018년 12월 24일, 『한겨레』 2018년 12월 29일)4)

1) “Q&A (자주 묻는 질문)” (cafe.daum.net/myboddymychoice/FguP/328 최종 검색일 2021.10.02)

2) <불편한 용기>는 무엇을 기준으로 ‘생물학적’ 여성을 판별하는지 제시하지 않았다. 여기서 “생물학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과학적·의학적 엄밀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따옴표 표기를 통해 일종의 기호(記号)로서 ‘생물학적’ 여성을 사용하고자 한다.

3) "본 시위는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가능합니다" (cafe.daum.net/Hongdaenam/ig3k/27 최종 검색일 2021.10.02)

4) 이하 박영민. "'여성' 집회 전략의 모순적 성공과 역동." 국내석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 대학원, 2022. 서울. 인용 표기는 논문 안에서 재인용하였음.
 

(“이부진 사장님 딱 1억만" 홍보 문구 논란에 여성의당 사과”, YTN, 2020년 3월 13일)

 

‘페미니즘 리부트’와 관해 떠오르는 다른 말들도 분명 있다. 친자본주의적 시선, 트랜스젠더 배제 페미니즘. 바로 이 두 가지다. 트랜스젠더 배제 페미니즘으로 여성의 ‘생물학적’ 당사자성을 획득한 ‘래디컬’의 역사는 단순히 분리주의 페미니즘 진영과 그들의 지지자뿐 아니라 대학가 페미니즘 사회에도 악영향을 남겼다는 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오늘날 대학가 페미니즘 세력의 분열과 양극화는 분명 앞서 언급한 “당사자성” 논쟁에 상당 부분 기반하고 있으며, 단순히 ‘트랜스젠더를 여성에 포함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하는 생산성 없는 토론에 서로를 결박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문제적이다.

 

더불어 분리주의 페미니즘(래디컬) 세력의 중심부에 있던 여성의당이 창당 후 공식적인 정당 홍보에서 인지도 있는 여성 자본가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투자를 요구하는 식으로 지지자들과 자본의 심리적 거리를 좁혔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당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를 옹호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사과문을 내놓긴 했지만, 사과문 내부에도 친자본주의적 시각에 대한 반성과 개선책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분리주의 세력에겐 △ 가사노동 전가 △ 돌봄 노동 전가 △ 재생산 기능을 통한 노동 인구의 무조건적 창출 등 자본이 의도적으로 여성 및 성소수자를 억압해 이윤을 증진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의식이 부재했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하러 왔지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김진아 전 여성의당 대표의 에세이집이 이미 암시하듯. 어느 순간부턴가 분리주의 세력에게 있어 노동자계급의 총생산량은 ‘파이’로. 여성해방이란 ‘생물학적 여성’ 노동자가 더 많은 ‘파이’를 가져가는 것으로 각인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의당과 주요 인사들은 SNS를 주요 선전 매개로 삼아 여성 청년층을 상대로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 곧 여성해방임을 격려하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일련의 선전은 실제로 유효한 효과를 보여 지지자층 사이에 신라호텔 주식 사기, 이부진 따라하기 같은 소비자주의에 입각한 행위가 유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성 자본가들이 여성 노동자를 위해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법적으로 여성이며 막대한 사적 부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여성해방의 영웅이 된 셈이었다.

 

혹은, 질문을 바꾸어 : 우리는 정말로 선동할 수 없는가?

 

학생이라는 신분의 특성이 대개 그렇지만, 특히 여성과 성소수자 학생의 경우 학창 시절에 이미 대부분 아르바이트 노동을 통해 저임금 노동과 불안정 노동을 하고 일터에서 많은 성폭력 위협에 시달린다. 그러나 학생사회에서는 그러한 고통을 단지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자기 공간에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발전 불가능한 여성운동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침체된 대학가 페미니즘 운동을 재정립할 수 있는 정치적 노선을 발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치적 노선은 어디에서 만들 수 있을까? 답은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노동자와 함께하는 노동자 운동에 있다. ‘스쿨 미투’의 학생층이 이전까지 사적 터부로만 취급되던 성폭력 경험을 공적 장에서 발화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보다 앞서 ‘미투 챌린지’의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결탁이라는 삼엄한 체제에서 여성, 성소수자 학생들은 절망적인 자기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실존하는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가 앞장서 투쟁하는 순간, 그것은 학생 집단들에게 매우 큰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왜냐하면 억압받고 차별받아온 여성·소수자들이 노동자 투쟁 속에서 사회 변혁을 위해 앞장서는 모습은 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를 넘을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올해 중순 프로젝트 문 사상검증 부당해고에서 시작되어 넥슨 ‘집게손’ 사태에 이르기까지 게임업계의 사상검증은 2016년 클로저스 성우 김자연 부당해고 시기부터 반복된 일이지만 이번 연속 사태에서 여성 연대자들이 집중하는 키워드는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사회 초년생 등으로 구성된 여성 게이머 연대자들은 페미니스트 사상검증이라는 여성혐오적 측면과도 더불어 노동자로서 권리가 침해당한 부분에까지 충분한 관심을 기울인다. ‘프로젝트 문’에게는 프리랜서 특수고용 형태로 계약을 맺은 업계 초년생 작가들에 대한 갑질을 묻고. ‘넥슨’에게는 이미 8차례 이상 원청 검수를 마친 하청업체 작업물에 대한 책임을 왜 하청업체 직원에게만 떠넘기는지 질문한다. 프로젝트 문 사태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한 여성노동자를 지지한 경험은 여성 청년층에게 단순한 연대가 아니라 ‘내가 해고당하지 않을’ 세상을 향한 투쟁의 경험으로 남았다. 물론 아직 이러한 연대 형성에 있어 소비자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는 극복해나가야 할 지점이지만, 양극화와 생산성 없는 여성운동의 정치적 방향성에 지친 여성, 성소수자 청년층에게 노동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받아들일 충분한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사료되는 것은 뚜렷한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한 지금 학생들은 노동자의 관점에서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를 사유해야 한다. 학생들이 자본가가 되는 헛된 환상을 꾸게 할지,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며 지금의 체제를 변혁하는 꿈을 꾸게 할지는 우리의 투쟁에 달려있다. 여성파업에 누구보다 먼저 연대하고 함께해야 할 집단은 학생들이다. 바로 지금 “여성이 멈추면 세계도 멈춘다”라고 외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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