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의 젠더적 대안은 ‘탈성장’ 아닌 ‘노동자계급의 생산과 재생산 통제’ -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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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기후위기의 젠더적 대안은 ‘탈성장’ 아닌 ‘노동자계급의 생산과 재생산 통제’ -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을 향하여

  • 정은희
  • 등록 2023.11.23 11:00
  • 조회수 463

 

2005년 미국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일대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대피소로 이동한 여성들이 당한 강간 비율은 지역 기준보다 53.6배 높았다. 2015년 네팔 지진 이후 인신매매 피해자의 수는 15년 전보다 약 4배 증가했다. 2021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한 뒤 여성 10명 중 7명은 파트너에 의한 언어적 또는 신체적 학대가 더 흔해졌다고 밝혔으며, 10명 중 6명은 공공장소에서 성희롱이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미국 남성의 실업률은 2020년 2월에서 4월 사이 355만 명에서 1,100만 명으로 증가한 반면, 여성의 실업률은 같은 기간 270만 명에서 1,15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세계 성별 식량 안보 격차도 2019년 6%에서 2020년 10%로 확대됐다. 국내서도 팬데믹 이전 여성 노동자들의 자녀 돌봄 시간은 주당 43.7시간, 남성 노동자들의 자녀 돌봄 시간은 주당 41시간이었지만, 팬데믹 이후 여성 노동자들의 자녀 돌봄 시간은 63시간으로 늘었다. 성별임금격차 역시 2020년 66.6%에서 2021년 65.8%로 더 증가했다.

 

기후위기가 여성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기후위기는 성 중립적이지 않고, 성차별을 강화한다. 기후위기는 성별에 기반한 폭력을 확대하고, 임신성 합병증을 비롯해 여성의 성과 재생산 건강을 더욱 위협한다.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는 부족해지며, 무급 가사·돌봄 노동은 늘어난다. 즉, 기후위기는 여성억압과 같은 말이며, 이를 더 심화한다.

 

하지만 모든 여성이 기후위기에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클라라 체트킨이 여성 문제는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고 명징하게 지적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후위기의 결과 역시 계급에 따라 달라지며, 그로 인해 더 악화한 젠더불평등을 경험하는 이들은 오로지 노동자계급 여성일 뿐이다. 자본가계급 여성은 기후위기가 여성에게 전가하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들 대부분은 기후위기로부터 안전한 공간에 있거나 생계를 위협받지 않는다. 기후위기가 심화한다고 더 많은 가사·돌봄 노동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녹색자본주의를 외치며 새로운 이윤을 찾고 있을 공산이 크다.

 

반면, 노동자계급 여성, 특히 도시빈민이나 농어촌,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 여성의 생존권은 더 위태로워진다. 여성의 다수는 비공식부문, 병원이나 관광 서비스 등 저임금 불안정 일자리에서 노동하여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서처럼 기후위기로 인한 폐업과 실직에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또 공적 자원을 이용할 기회도 적어진다. 아울러 전 세계적으로 여성 노동자의 4분의 1이 종사하는 농업, 임업, 어업에서는 가뭄과 불규칙한 강우를 비롯한 기후위기로 인해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이동할 권리나 독립적으로 생활할 권리를 제한당해 온 장애여성의 생존권은 더욱 위태롭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이 같은 상황에서 11월 말 COP28을 앞두고 ‘페미니스트 기후정의 선언(이하 선언)’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선언은 페미니즘 관점이 기후정의 담론의 주요의제가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제안되었으며, 특히 기후위기가 가부장제와 결탁한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선언은 기후위기의 원인을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 찾으면서도 그 주요 문제나 대안은 탈계급적이라는 점에서 토론이 필요하다.

 

선언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가 ‘남성중심의 경제 시스템’으로 ‘성장’과 ‘개발’만을 사회의 중요한 목표로 상정했고, 그 과정에서 생태계가 무차별적으로 파괴됐으며,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노동은 비가시화되고, 저평가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기후위기의 해법으로 “여성·지역민 등 사회적 소수자가 주체가 되는 탈중앙집권적 기후위기 대응책”과 함께 ‘탈성장 돌봄사회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즉, 선언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라는 말로 기후위기에 젠더와 계급적 관점을 제기하지만, 대안에서는 젠더적 관점만 유지할 뿐 계급적 관점은 비켜간다. 아울러 대안도 ‘성장체제’에서 ‘탈성장 돌봄사회로의 전환’이라고 전제하여,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가치 착취를 통한 자본가의 ‘이윤’ 창출을 최대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본질을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면 과연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는 어떤 체제일까? 가부장적 자본주의라는 말은, ‘가부장제’라는 억압적 젠더 체계를 포함한 체제 규정이다. 여기서 자본주의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한 줌의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계급사회라는 점을 전제하면, 가부장적 자본주의란 가부장제라는 젠더억압질서를 활용해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관철하는 자본가 중심의 계급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 야기된 기후위기가 여성에게 불균형적으로 전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여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떠맡은 노동자계급 재생산이라는 역할에 있다. 리즈 보걸에 따르면, 계급사회가 지속되려면 착취 가능한 노동력이 재생산되어야 하지만, 자본가들은 생산과 재생산을 갈라놓고 후자를 전자에 종속시킴으로써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간접적으로 이윤을 늘리는 조건을 확보한다. 임신출산하는 여성은 그 기간의 생계를 남성 부양자와 자본주의 국가에 의탁하게 됨으로써 종속적인 위치에 놓인다. 그러나 여성은 임신출산 뒤에도 가부장제 속에서 여전히 가사노동의 굴레에 얽매인 상태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노동력으로 취급되어 노동자계급의 하층으로 배치된다. 그 결과 직장을 구하더라도 고용이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며, 다양한 유형의 직장 내 성차별이 뒤따른다.* 결과적으로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여성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불완전한 성별로 존재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이 용인되고, 여성의 노동력은 저평가되며, 무급 가사·돌봄 노동을 떠안는다. 그리고 기후위기는 이 같은 조건을 더욱 심화하여 젠더폭력이나 무급 가사·돌봄 부담, 실업과 빈곤 등 기후변화로 초래되는 위기를 더 많이 떠안게 된다.

*오연홍, 사회 재생산 이론과 계급 환원론, 전진 내부토론회, 2023.7.25

 

이를 전제하면, 기후위기에 필요한 페미니즘 관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이 떠맡은 노동력 재생산 역할과 그에 따른 노동력 평가절하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이 여성에게 전가한 무급 가사·돌봄 노동을 사회화하고 여성의 노동권을 방어하는 것이 기후위기로부터 여성을 방어하는 핵심적 대안이 된다. 또한 궁극적으로 여성해방은 자본가들을 위한 체제인 가부장적 자본주의 변혁을 우회할 수 없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아울러 이는 남성을 포함한 모든 성별의 노동자계급이 단결투쟁해 쟁취해야 하는 과제라는 점도 누락돼선 안 되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경제의 규모가 아니라 계급관계다

 

그러나 선언은 기후위기의 대안을 ‘탈성장 돌봄사회로의 전환’이라고 전제하여 계급적 질문을 누락한다.

 

선언이 말하는 탈성장 담론은 자본주의가 환경 파괴와 생태 위기를 유발했다는 관점을 취하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탈성장 담론은 계급적 관점을 누락해 자본주의 대량생산시스템의 근본 모순을 비껴간다. 즉, 경제체제가 누구를 위해, 어떻게 기능하는가의 문제임에도 생산의 규모에 관한 문제로 원인을 비틀어 버린다. 단적으로, 에코페미니즘을 말하는 반다나 시바는 대자본에 비판적인데, 그 맥락은 기술회의주의와 자급경제 선호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극히 한계적이다. 이는 기술을 둘러싼 계급관계를 누락함으로써, 논의를 기술 자체로 소급한다. 스페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호세피나 마르티네스가 지적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수중에서 과학기술 발전이 노동자를 위해 더 많은 자유시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잉여노동을 창출할 뿐이며, 노동자에게서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더욱 육중한 쇠사슬로 묶어버리고, 노동자에게 규율을 강제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말했다. 또 시바는 “금융 중심의 성장 경제를 멈추고 생태 경제와 사회 경제를 늘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녹색자본주의나 민영화된 돌봄체계를 떠올리면, 무력한 주장일 뿐이다. 실비아 페데리치가 말하는 소규모 공동체의 상호부조도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누락한 복고주의에 다름 아니다. 사이토 고헤이가 말하는 탈성장 코뮌주의 역시 계급투쟁이란 이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일부 탈성장론자들도 인정하듯, 문제는 생산의 규모가 아니다. 단순히 생산의 규모를 조절하는 것으로는 현재의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도, 여성억압을 없앨 수도 없다. 단적인 사례가 코로나 팬데믹 기간 나타난 여성억압 심화다. 이 기간 세계는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여성은 오히려 더 큰 부담과 폭력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경제성장률은 둔화하여 왔고, 그럴수록 자본가들은 저개발 국가의 노동력 착취와 자원 수탈을 재촉해 왔다.

 

노동자계급의 생산과 재생산 통제

 

결국 자본주의가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노동을 비가시화하고, 저평가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본주의가 ‘성장’과 ‘개발’만을 추종하기 때문이 아니다. 즉, 생산과 재생산의 지배구조 문제이자 생산과 재생산의 주인이 누구인가의 문제, 즉 자본가계급인가 노동자계급인가의 문제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를 위해 상품화할 수 있는 것만 개발하고 이를 위해 노동력을 위계화하고 착취하여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의 존재와 이들의 노동을 저평가하고 비가시화한다.

 

그러나 선언이 말하는 “여성·지역민 등 사회적 소수자가 주체가 되는 탈중앙집권적 기후위기 대응책” 역시 대안이 될 수 없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계급은 ‘남성’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이며, 피지배계급은 노동자계급이다. 그리고 이 노동자계급에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과 지역주민, 사회적 소수자 역시 포함된다. 물론 자본가계급에도 여성과 지역주민, 사회적 소수자가 존재하지만, 그들은 기후위기를 유발하는 당사자일 뿐이다. 이에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계급적 관점에 기초한 주체화가 필요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갈아엎을 투쟁 역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우회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후위기를 둘러싼 투쟁은 바로 계급투쟁의 문제라는 점을 누락하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더욱더 잦아지고 있는 태풍이나 장마, 산불과 가뭄을 비롯한 기후재난을 생각하면 탈중앙집권적 기후위기 대응책이란 대안이 얼마나 무력할 것인지 알 수 있다. 비인간동물을 비롯한 전 지구적 생태계를 위협하는 문제 역시 ‘남성중심 경제체제’나 ‘성장체제’의 문제가 아닌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수탈’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선언이 제안하는 대로 '남성중심의 경제시스템'이 문제이거나 '탈성장' 역시 대안이라고 볼 수 없다.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양산한 기후위기, 그리고 이에 따라 심화하는 여성억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생산과 재생산을 통제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 생산과 재생산을 노동자계급이 통제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기후위기를 가속하는 생산부문을 폐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에게 전가된 가사·돌봄 노동을 사회가 떠맡고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해 현존 생산력을 계획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여성에게 더 가혹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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