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8월 12~13일 진행된 전진의 정치캠프 세 번째 세션, “페미니즘과 노동운동의 결합: 노동자, 페미니스트로 서다” 참가자께서 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노동운동에 왜 페미니즘이 필요한지, 페미니즘에 왜 노동운동이 필요한지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노동운동 현장에 가보면 자연스럽게 여성 조합원이나 연대자들이 음식 준비나 행사 보조 등 고정적인 성역할을 하고 있다. ‘예쁘네’, ‘화장을 했네, 안 했네’ 외모를 평가하며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도 종종 보인다. 몇몇 중년 활동가들은 젊은 활동가들에게 먼저 반말하는 등 무례하게 대하거나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태도를 보인다. 솔직히, 노동운동은 여전히 ‘중년 남성’들의 무대다.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가? 페미니즘 리부트로 곳곳에서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되살아난 많은 페미니즘 주체들은 다시 곳곳으로 흩어졌다. 해방의 전망을 잃어버리고 개인적 성취를 통해 문제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만연해졌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젠더나 난민 등을 배제하는 보호주의, 분리주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노동운동, 페미니즘 운동을 해야 할까?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이하 전진)은 <위기, 전쟁, 혁명> 정치캠프를 8월 12일부터 13일까지 1박 2일간 진행했다. 13일 세 번째 세션에서는 “페미니즘과 노동운동의 결합: 노동자, 페미니스트로 서다”가 진행됐다. 발제자와 토론자를 포함해 20여 명이 참여했고, 변혁적 여성운동을 위한 여러 고민과 사례, 질의응답이 활발하게 공유됐다.
사회는 전교조 유천초분회 남정아 활동가가 맡았다. 전진 여성운동위원회의 정은희, 홍희자 활동가는 메인 발제를 진행했다. 전국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장 박순향,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이혜정, 성공회대 학생 이훈 활동가는 자신이 듣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갔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임용현, 변혁적 여성운동 네트워크 ‘빵과장미’ 이소연 활동가는 변혁적 여성운동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중 억압과 착취 속 여성 노동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과의 임노동 관계 속에서 수없이 차별과 억압, 불안정, 빈곤을 겪는다. 이는 여성 노동자에게는 더 가혹하다. 여성 임금노동자 2명 중 1명은 비정규직(47.4%)에 최저임금을 받는다.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의 71%도 여성이다. 성인 여성 10명 중 4명은 임신, 출산, 돌봄노동 등의 이유로 경력 단절을 경험하며, 이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더 심해졌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속 여성 노동자들은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이중의 억압과 착취를 당해 온 것이다.
일터 안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차별을 보자. 한국도로공사는 비정규직 일자리 대다수를 여성으로 채용했다.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모두 비정규직이었다.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까지 청춘을 바쳐 일했지만, 사장이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야 했다. 여자라서,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하는 경우도 숱했다. “한 조합원은 새벽 5시에 출근해, 갓 지은 밥만 먹는다는 관리자를 위해 돌솥밥을 해야 했다. 업소 식당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하고 일하는 수납원을 불러 대낮부터 술에 노래까지 부르게 했던 이들도 있었다.” 박 지부장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여성 차별이었구나 싶다고 회상했다.
노동운동에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여성 차별과 억압이란 문제는 직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이혜정 활동가는 여성 노동자들의 르포를 쓰는 과정에서 들었던 숨겨진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만나 온 여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노조 간부 활동을 해왔다. 그만큼 일터에서는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당찬 그녀들에게도 가정은 ‘작은 감옥’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 여성 노동자들은 남편에게 학대를 당해 왔지만, 쉽사리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물론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남편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있으니 가정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웠다.
일터, 공적 영역에서의 차별만으로는 여성의 억압을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여성 억압은 가장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부터 우리 주변 곳곳에 공기처럼 존재한다. 심지어 운동 사회 내부에서도 말이다. 사실 활동가들이라 해도 사회 통념과 괴리된 유토피아에 살 수는 없다. 특히 중장년 남성이라면 말이다. 이훈 활동가는 운동 사회 내 ‘나이주의’를 지적한다. 중년 활동가는 젊은 활동가와 조금만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반말을 한다. 젊은 활동가의 진지한 의견은 ‘미성숙한 의견’으로 치부되기도 쉽다. 젊은 활동가와 중년 활동가의 관계에는 엄연한 권력이 존재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쉽게 대상을 판단한다. 권력은 뭐든 수월하게 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은 차별받아 왔다.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유색인종, 청소년, 노인, 비인간 동물 그 모두가 말이다. ‘생산적 인간’, ‘정상적 인간’이 아닌 이들은 뭐 하나 수월한 게 없다. 능력이 없다 치부되고 이에 따라 자행되는 모든 차별을 감수하며,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 그 꼭대기, 생산성/정상성의 기준에는 ‘백인, 건장한, 남성’이 있다. 자신들이 이윤을 낸다고 여기는, 이 세상의 주인이라 여기는 자본가, 특권층들은 ‘비정상적’인 이들의 착취를 딛고 살아간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 노동자도 힘들다. 끊임없이 생산성을 내야 하는 존재가 되도록 등 떠밀린다. ‘남성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거나 다치는 등 정상성에서 조금만 삐끗해도 쉽게 퇴출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는 계급뿐 아니라 다양한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노동운동 주체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문제를 함께 타파하기 위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실천해야 한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움직인다면 더 빠르고 강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에는 노동운동이 필요하다
2021년, 자칭 타칭 페미니스트였던 신지예가 국민의힘에 영입되었던 사건은 상징적이었다. 생물학적 여성만의 문제를 강조하거나 주류에 통합됨으로써 여성해방이 가능하다 여겼던 보수적,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그렇게 해방의 전망을 찾을 수 없었다. 여성 문제, 우리의 문제는 개인 혹은 ‘여성’만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앞서 강조했듯이 오늘날 여성이 겪는 문제들은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윤이 우선인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을 비생산적이고 취약한 존재로 치부하며, 그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공략하는 변혁적 여성운동을 해야 한다. ‘여성’만이 아니라 이 체제로 인해 차별받는 모두와 함께 말이다.
홍희자 활동가는 변혁적 여성운동의 좋은 예시를 소개했다. 국제 여성운동 조직 ‘빵과장미’는 아르헨티나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파업을 조직했다. 한 여성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파업을 조직했다. 한국에서도 변혁적 여성운동의 가능성은 있다. 2019년,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겪은 차별에 대한 분노로 투쟁을 시작했다. 217일간의 끈질긴 투쟁으로 그들은 주체가 되었다. 이제는 남성 관리자들에게 고분고분했던 여성 수납원들이 사소한 문제에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변혁적 여성운동이란 결국 페미니즘 관점에서 반자본주의를 지향하고, 자본주의로 인해 억압 착취당하는 모든 이들과 연대하여 해방의 전망을 찾아가는 운동일 것이다. 그 운동에서 주목할 주체는 여성 노동자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가장 최전선에서 맞닥뜨린다. 항상 불안하고,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누군가와 관계 맺지 못하는 상태 말이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은 사회 생산, 재생산 영역 전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자본은 여성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함으로써 더 높은 이윤율을 낼 수 있었다.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졌고 무급이나 저임금으로 수행되던 돌봄은 거의 모든 것의 기반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성 노동자의 몸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바꿔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