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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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연재_ 노동자계급 속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길을 개척하는 ‘빵과 장미’의 도전⑤

  • 오연홍
  • 등록 2023.01.18 20:27
  • 조회수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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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여성의 날 시위를 벌이는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

 

 

1917년 노동자혁명으로 러시아 여성의 삶에 전례 없는 도약이 이뤄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폭넓은 동의가 있다. 이혼할 권리, 임신 중지권, 일자리 보장,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위한 조치 등은 볼셰비키 당이 도입한 개혁의 일부 사례일 뿐이다. 소련 여성의 삶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가 세계 곳곳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여성의 권리와 진보적인 공공 정책을 아로새긴 법령에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가), 여성 교육 지지자, 심지어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그 밖의 진보적인 세력까지도 박수갈채를 보냈다.

 

세계적인 시야에서 이들 진보적인 조치를 볼 때 가장 신기한 점은, 러시아 즉 경제적, 문화적으로 뒤처졌다고 여겨진 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가부장과 차르, 보드카에 절어있는 코사크족, 글을 배우지 못한 소작농, 채찍을 휘두르며 부를 쌓은 쿨락[부농]의 나라에서 여성이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 건,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만신창이가 되고 제국주의 군대에 포위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가뭄, 질병,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누가 보더라도 문화적, 정치적으로 풍성한 진보를 누리기 힘든 불모의 땅에서 남성과 여성의 법적 평등이 확립됐다. 사실혼 관계가 승인받았고, 이혼할 권리와 임신 중지권이 보장됐으며, 어린이집과 공공 빨래방, 공동 식당이 들어섰다. 동성애 처벌과 성매매 여성에 대한 박해가 사라졌다.

 

러시아 여성, 가정, 가족의 일상을 혁명적으로 뒤집은 이와 같은 혁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열기 속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도 아니다. 레닌이 이끈 정당에서는 여성해방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육아가 사회화되고 나면 어머니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모든 애정 관계에서 국가의 개입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가 결혼증명서를 발행해야 할까? 이런 여러 쟁점에 대해 볼셰비키 내에 통일된 입장은 없었으며, 다양한 입장 간의 개방적인 논쟁이 있었을 뿐이다.

 

볼셰비키는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노예 반란의 오랜 역사에서 영감을 끌어냈다. 그들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발상을 계승했고, 주요 저작인 <공산당선언>에서 부르주아적 결혼과 가족을 가차 없이 비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영향받았다.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역사 유물론에 기원을 둔 이데올로기와, 유럽식 대도시의 산업 중심지에 대규모로 결집한 여성이 연결되면서 중대한 정치적 계기가 마련됐다. 이 새로운 여성 노동자계급이 해방을 지향하는 선진 의식으로 충만한 혁명적 지도력과 결합하면서, 볼셰비키 당이 채택한 대담한 법령, 정부 계획, 사회정책의 기반이 됐다.

 

자유로운 사랑

 

중세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랑의 방식을 심사숙고해왔다. 계약 결혼, 중매에 의한 결혼, 애정 관계에 교회나 국가가 간섭하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14세기 이후로는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발상을 제기하는 집단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결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간통에 관한 규범, 피임과 임신 중지 금지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자유로운 사랑에 찬성한 운동이 대부분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예속에도 이의를 제기한 건 이 때문이다. 그들은 여성의 자유 박탈에 항의했고, 이에 따라 대개 여성해방을 지지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노동자혁명을 토론하는 맥락이라면, 아마도 자유로운 사랑보다는 자유결혼을 거론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애정 관계를 러시아 정교회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혁명 이전에는,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혼외 자녀는 재산권을 인정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회에서 무시당했다. 볼셰비키는 이에 맞서서 교회의 구속이나 승인을 배제하며, 모든 형태의 결혼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혼을 허용한 새로운 법령은 자유결혼에도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러시아에서 이런 조치는, 기나긴 세월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온 여성의 삶에 부정적 효과도 미쳤다. 많은 여성에게 결혼이란 가부장적 사회에서 일종의 생존방식이었다. 따라서 자유결혼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생산적인 노동에 참여하게 하고, 경제적 독립과 법적 평등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여성해방을 촉진하는 게 필요했다.

 

볼셰비키 지도자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질투와 소유하려는 욕망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부르주아적 이상에 대조되는 것으로서, 동지적인 사랑의 성립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낭만적인 사랑이 자본가계급의 출현과 함께 등장했고, 개인들 간의 관계에 투영된 사적소유의 개념을 구현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뿌리 깊은 소유욕의 강화와 애정 관계에서의 권리는 곧 다양한 형태의 폭력의 원천이 됐다. 권력 장악 이후에 콜론타이와 그 밖의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그동안 토론해온 혁명적 구상을 실행할 기회를 얻었다.

 

불꽃이 튀어 불길로 타오르다

 

차르 체제하의 여성들은 갓 등장한 러시아 노동자계급 속에서 광범한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생존권 요구를 걸고 싸웠을 뿐 아니라 공장 내 보육, 유급 출산휴가, 신생아 수유를 위한 휴식 시간 등을 요구하면서도 투쟁했다. 경찰 보고서와 공장 기록에 따르면, 고용주와 같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나 관리자의 학대를 중단시킬 것을 요구하는 여성 파업 사례가 많았다.

 

1910826, 27, 2차 국제 사회주의 여성대회가 코펜하겐에서 열렸다. 주요 토론 의제에는 여성 참정권과 출산휴가, 임신을 이유로 한 해고의 금지 등 어머니의 권리 개선 문제가 포함됐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대표해 참가한 클라라 체트킨과 카테 둥커는 국제 여성의 날 제정을 제안했고, 1913년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이를 기념하는 시위가 열렸다. 멘셰비키는 여성의 날 시위에 오직 여성만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해 볼셰비키는, 여성해방은 모든 피착취 민중이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 전체가 시위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은 여성에게 또 다른 짐을 짊어지게 했다. 거의 천만 명에 이르는, 대부분 농민인 남성이 징집돼 전쟁터로 보내지자 여성이 농사를 떠맡았고, 농촌 노동인구의 72%를 차지했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다.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력이 50% 가까이 늘어났다. 이것은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떠맡으면서 이중 노동을 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볼셰비키는 여성 노동자를 당으로 조직하기 위한 대담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이 당은 여성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그러는 동안 전쟁은 극심한 식량부족을 낳고 사망자 숫자를 엄청나게 늘리면서 격렬하게 이어졌다. 1915년에는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여성이 들고일어나 전쟁에 반대하는 필사적인 사보타주를 벌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여성들이 식료품 물가 폭등에 항의해 투쟁하며 상점을 약탈했다. 그 해와 그다음 해에 모스크바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차르 경찰은 러시아 민중이 굶주리고 묘지에 시신이 쌓이면서 누적되는 위험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썼다. “가게 앞에 늘어선 끝없는 대기 행렬에 지치고, 굶고 병든 자녀를 보며 고통을 겪는 어머니들이 이제는 밀류코프와 로디체프일당보다 더 혁명에 우호적이다. 당연하게도 이 여성들이 더 위험한데, 이들은 불길이 타오르게 만들 수 있는 불꽃이기 때문이다.”(1)

[* 밀류코프와 로디체프: 러시아 입헌민주당(카데트)의 리더들. 입헌민주당은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꿈꾸면서 볼셰비키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 경고는 너무 늦었다. 1917년 국제 여성의 날에 섬유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인근 공단을 행진하며, 공장 유리창에 눈덩이와 돌멩이를 던지면서 다른 노동자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점점 더 많은 남성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해 평화, , 전제 정치 종식을 외쳤다. 이 요구들은 한 해 전부터 전쟁의 고난 때문에 일어난 시위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 노동자들이 시작한 자발적인 시위는 이틀 뒤 총파업으로 번져나갔다. “223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집회, 연설, 유인물 같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날을 기리려 했다. 그날이 혁명의 시작점이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2)

 

여성해방은 혁명의 기둥

 

여성의 권리가 그렇게 거대하게 변화한 것은 전적으로 권력 장악 덕분이었다. 이 혁명 자체가 여성들이 불을 붙인 것이었다. 굶주림, 전쟁, 고립 등 이제 갓 태어난 노동자국가를 짓누른 역경보다 더 강력하고 거침없었던 볼셰비키의 상상력 또한 영향을 미쳤다.

 

혁명이 일어나고 일 년도 채 안 된 1918, 가족법이 제정됐다. 웬디 골드먼*은 이를 세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가족법이라고 불렀다. 새 가족법은 결혼을 개인 간의 사안으로 규정하면서 교회가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혼이 합법적인 것으로 허용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사유서를 제출할 필요 없이 누구나 진행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이 법은 사유재산에 대한 남성의 특권을 보장하는 낡아빠진 규정을 폐기했다. 혼외 자녀를 포함해 모든 자녀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여성의 성적 파트너 모두가 자녀 양육의 책임을 나눠야 했다. 미국에서조차 통과되지 못한 법률개정을 거쳐 남성과 여성이 법적으로 동등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새 가족법을 작성한 알렉산드르 고이키바르크는 이 법을 국가나 가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조치로 여겼다. 오히려 이 법은 가족의 소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 웬디 골드먼: 역사 연구자로서, 러시아혁명 이후 여성의 권리 변화를 포괄적으로 다룬 책 <여성, 국가, 혁명: 1917~1936년 소련의 가족정책과 사회생활>을 썼다.]

 

그러나 레닌이 주장했듯이 법적인 평등은 시작에 불과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위해 혁명이 이뤄내야 할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주도, 자본가도, 상인도 없는 곳, 이들 착취자 없이 노동자의 정부가 세워지고 있는 곳, 그곳에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 법률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법적인 평등과 삶에서의 평등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여성 노동자가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남성 노동자와 평등을 누리기를 원한다.”(3)

 

혁명은 진정한 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법적인 변화가 효과를 얻으려면, 여성을 혹사시키며 무보수로 이뤄지는 가내 노예제를 끝장내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이 대규모로 수반돼야 한다. 볼셰비키는 노동자국가를 활용해 집안일을 남성과 여성 모두가 수행하는 산업화한 임금노동으로 전환하려 했다. ‘가사노동 임금 지급운동이 벌어지기 한참 전에 볼셰비키는 가사노동을 유급 노동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뿐 아니라, 여성해방을 위한 필수 요소로서 이 노동을 집단화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도 간파했다. 이렇게 전환함으로써, 낡은 가부장적 관계가 강요하는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의 발판을 만들었다.

 

사회복지부 장관이 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다양한 개혁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이 노동자국가의 장관이 옹호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소련 여성이 직업 선택의 자유, 모든 공직에 진출할 기회,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임신 여성 해고가 금지됐다. 또한 여성에게 이혼할 권리와 남녀공학에 입학할 권리가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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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여성부와 사회복지부를 이끈 콜론타이(왼쪽)

 

 

이러한 진보적인 변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여성에게 진정한 평등을 보증하기에는 여전히 불충분했다. 민법상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볼셰비키 당내에서, 그리고 폭넓은 사회적 차원에서 여성해방,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족의 역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사회로 전환하는 방식에 관한 길고 심층적이며 흥미로운 논쟁이 이뤄졌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역사적인 불평등을 의식하면서 볼셰비키는 전통적인 가족에 훨씬 큰 자유를 도입한 새로운 법률이 여성에게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지 않도록 주의했다.

 

역사가 웬디 골드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비교해서 본다면, 1918년의 가족법은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성평등, 이혼, 친권, 재산권 등을 다루는 유사한 법령이 미국이나 다수의 유럽 나라에서는 아직 제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새 가족법이 파격적인 혁신을 담고 있는데도 법학자들은 이것은 사회주의 법령이 아니라 과도기의 법령일 뿐이라고 빠르게 지적했다. 그 가족법이 혼인 신고, 이혼 수당, 자녀 양육과 그 밖의 생계유지를 위한 대비 등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가족 단위에 필요한 항목들을 남겨놨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법학자들은 그들 스스로 곧 유명무실해질 거라고 여기는 법령을 만들어내는 특이한 처지에 있었다.”(4)

 

가족법을 둘러싸고 드러난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은, 이 혁명은 이제 1막을 지났을 뿐이며 그것은 수천 년간 재생산된 가치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볼셰비키의 관점을 보여준다. 레온 트로츠키가 그의 책 <연속혁명>에서 지적하듯이,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적인 속성에는 이렇게 모든 사회관계를 집어삼키고 변화시키는 부단한 내부 투쟁을 거쳐 사회가 탈바꿈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몇 세기에 걸쳐 여성을 종속시키고 짓눌러왔던 굴레에서 여성이 해방되는 건 사회관계가 급진적으로 바뀌는 데에서 근본적인 요소다.

 

볼셰비키는 계급 환원론 관점을 취하기는커녕, 여성해방을 노동자혁명의 중심 과제로 여겼다. 레닌은 여성의 완전한 자유를 쟁취하지 않는 한 노동자계급은 완전한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5) 볼셰비키는 한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그 사회 전체의 수준을 측정하는 척도로 여겼다. 여성이 온전한 평등을 쟁취했을 때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이 진실로 성공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 반혁명

 

모스크바의 테르미도르 반동”(원문 보기)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혁명과 내전을 거친 후 신생 노동자국가인 소련은 국제적으로 고립됐고, 다수가 목숨을 잃거나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 고립 탓에 볼셰비키 당내에서, 그리고 소련 국가 내에서 정치적 특권층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국내의 결핍 상황을 관리했다. 여성의 권리 영역에서든 다른 영역에서든, 이는 볼셰비키가 도입한 조치들에 대한 반혁명을 뜻했다.

 

정치에서 발생한 이런 전환이 쉽게 또는 저항 없이 이뤄진 건 아니다. 볼셰비키 혁명은 스탈린주의에 질식당했고, 1917년 혁명 세대는 궤멸됐다. 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다른 이들은 추방되고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혔으며, 또 다른 이들은 총살당했다.

 

스탈린은 새로운 세대로 형성된 출세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볼셰비키 당과 국가의 지도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출세주의자들은 혁명 이후에 당에 들어왔으며, 가장 낡고 후진적인 사고방식을 같이 끌고 들어왔다. 스탈린의 지휘 아래 가부장적 이해관계와 소부르주아 심성이 당내에 번져나갔다.

 

가사노동을 대체한 사회 서비스가 기이하게도 사회주의의 이름 아래 제약됐다. 오직 결혼한 부부 관계만 국가가 공식적으로 승인했고,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회의 여성부는 해체됐다. 성매매는 범죄화됐으며, 성 소수자들은 박해받으며 감옥에 끌려갔다. 임신 중지는 금지됐다. 혁명 초기 몇 년간 볼셰비키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토론했던 여성해방에 관한 모든 논의는 완전히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됐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부르주아 가족제도와 낡은 모성 관념을 떠받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스탈린 정권 아래에서 국가는 여성이 오직 어머니, 아내, 주부 같은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했다. 1944년에 스탈린은 얼마나 많은 자녀를 낳았는가를 기준으로 여성에게 호칭을 부여했다. ‘명예로운 어머니 훈장을 제정해 여성을 분류했고, 10명 이상의 자녀를 낳은 여성에겐 어머니 영웅이란 호칭을 부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전통적인 가족을 사회의 기강을 잡는 기본 토대로 간주했는데,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도 가족이 그런 역할을 맡았다. 혁명 초기 몇 년간 자유로운 사랑과 가족의 소멸에 관한 해방적인 사고가 정점에 달했지만, 이제 그 모든 게 부도덕하고, 무정부주의적이며, 소부르주아적인 선전이라고 매도당했다.

 

웬디 골드먼이 자신의 책 <여성, 국가, 혁명>에서 거듭 강조했듯이, 스탈린 정권이 저지른 모든 범죄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스탈린 관료체제가 현실 사회주의라고 온 세계가 믿게 만든 것이다. ‘노동자계급 내의 노동자계급인 여성에게 사회주의 혁명이란 곧 위대한 승리를 뜻했고, 여성은 러시아혁명에서 영웅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노동자국가의 전면에 스탈린이 등장한 뒤 이 역사가 지워지기까지는 채 반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1789년 프랑스혁명,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러시아혁명을 포함해 역사 속의 혁명에서 여성은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맡아왔다. 이 거대한 격변 속에서 여성은 인내와 용기, 영웅적 행동의 풍부한 사례를 남겼다. 그 뒤 100년 동안에도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여성은 혁명적 변화와 거대한 사회적 격변을 이끌어갈 주인공으로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보여줬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레온 트로츠키도 지적한 바, “새로운 것을 향해 더 큰 활력과 끈기로 투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낡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고통을 겪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6)

 

1. 바르바라 푸네스, “혁명가”, <투사들 역사를 만든 여성 이야기>.

2. 레온 트로츠키, “5일간”, <러시아혁명사> 1.

3. V. I. 레닌, “여성 노동자에게”, <전집> 30. 1920222<프라브다>에 먼저 발표.

4. 웬디 Z. 골드먼, <여성, 국가, 혁명: 1917~1936년 소련의 가족정책과 사회생활>

5. V. I. 레닌, 앞의 글.

6. 레온 트로츠키, “모스크바 여성 노동자 대회에 보낸 편지”, 19231128<프라브다>에 발표.

 

 

글쓴이 안드레아 다트리, 201835

옮긴이 오연홍

*로 표시한 각주는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women-in-the-revolution-the-revolution-in-women-s-lives/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 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 착취, 가난, 전쟁, 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 국적, 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코스타리카,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네트워크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 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여성 자본가에 맞서는 여성 노동자들(타티아나 코차렐리)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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