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 기후정의행진 - 노동계급의 기후정의운동, 그 시작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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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 기후정의행진 - 노동계급의 기후정의운동, 그 시작을 알리다

  • 백종성
  • 등록 2022.10.19 18:30
  • 조회수 607

924 기후정의행진 전날, 조직팀이 참여단체 전수조사로 집계한 조직현황은 야심차게 설정한 조직목표에 한참 모자랐다. ‘애초 어려운 목표였을까? 그래도 이만하면 성공인가?’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잠든 다음날 2만 명을 훌쩍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참여자 40%는 단체나 조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며 이는 조직현황 집계와 참여인원 설문조사 모두에서 교차검증 되는 바다. 다양한 대중의 광범한 참여, 기후위기에 대한 광범한 우려와 기후위기를 가속하는 ‘체제’에 대한 분노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924 기후정의행진은 무엇이었고, 또한 무엇을 남겼을까. 다소 시간이 흐른 지금, 필자가 9월 기후정의행동 조직팀에서 일하며 느낀 바들을 글로 남기고자 한다.

 

 

기후위기를 낳은 체제에 대한 광범한 분노

 

돌아보자. 언론은 물론 운동진영에서도 ‘기후변화’라는 말을 더 자주 쓰던 시기, 3년 전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정하라’는 요구로 열린 9.21 기후위기비상행동에는 334개 단체, 5천여 명이 참여했다(2019년 10월 10일 기후위기비상행동 전체회의 자료).

 

2022년 9월, 기후운동은 더 넓어졌다. 아직 널리 알려졌다고 보기 힘든 ‘기후정의’를 내건 조직위원회에 413개 단체가 가입하고 행진에 3만여 명이 참여했음을 감안하면,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과 그 해결에 대한 요구는 급격히 확장하고 있다.

 

또한 참여자 4할이 조직이나 단체에 속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잠재된 불안과 분노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광범하다. 필요한 것은 대중운동 속에 뛰어드는 것, 주장하고 각축하고 경합하는 과정에서 그 분노를 조직할 의지이고 계획이며 행동이다.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반자본주의 대중운동, 그 시작

 

9월 기후정의행동은 넓어졌을 뿐 아니라 더 깊어지기도 헸다. 제안문과 요구 역시, 단지 화석연료 사용 금지와 통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반자본주의 지향에 근거했다.

 

“화석연료는 …  기업과 자본이 필연적으로 선택한 에너지일 따름입니다. …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 기계의 부속품처럼 쓰고 버리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여성, 장애인, 이주민, 지역주민 등 차별받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에 대한 폭력 아래 가능했습니다.”

- 9월 기후정의행동 제안문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이를 지속하게 만든 것은 자본주의 성장체제 때문이다. …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고 자본축적을 통해 성장을 지속하려는 기업들은 급속하고 지속적인 온실가스 배출을 낳아 기후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 9월 기후정의행동 요구

 

9월 기후정의행동은 인간 때문에 지구가 파괴되고 있으니 모두 손을 맞잡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자본주의 성장체제’를 지목하고, 기후위기에 맞설 주체로 ‘노동자’와 ‘여성, 장애인 이주민, 지역주민 등 차별받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호명한다.

 

 

적과 동지를 가르는 보다 분명한 주장과 함께, 9월기후정의행동은 ‘기업과 기업 관련 단체’, 민주당과 국민의힘 등 보수정당, 국가행정기구의 조직위 참여를 배제해 자본과 국가로부터 독립적 운동을 추구했다. 나아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조직적 2차 가해를 저지른 단체를 배제해 동지적 연대의 원칙을 세우고자 했다. 이렇듯 기준을 높였음에도 조직위 참여단체는 더 다양해졌고, ‘사전행동’과 ‘기후정의 주간’의 다양한 행사와 집회 등에서 드러나듯 참여의 적극성도 높았다. 413개 참여단체의 분담금 납부비율은 90%를 상회했는데, 공동투쟁기구에서 이런 경우는 드물다.

 

 

물론 9월 기후정의행동 요구가 기후위기 원인으로 지목한 ‘자본주의 성장체제’라는 복합어는 균열적이다. 당연하게도 일부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강조하고, 일부는 ‘성장체제’의 문제를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일부는 생산통제와 대안적 노동체제를, 일부는 유통과 소비의 변화를 강조한다. 기후정의 운동이 전진할수록, 기후정의 대중운동 내부의 경합과 각축 과정을 통해 어떤 입장이 더 적확한지가 실천으로 증명될 것이다.

 

더 분명한 반자본주의 기조가 더 많은 참여를 낳았다

 

9월 기후정의행동의 반자본주의 지향은 문서는 물론 행진 참여자들의 발언들에서도 확인된다. 행진차량 발언자들의 말을 인용해 본다.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재앙에 대항할 힘이 없는 사람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작 이 기후위기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집에 살고요. 이게 정말 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인가요?”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로서 더 이상 기후위기를 초래한 기업과 정부, 자본주의 체계에 세상을 맡길 수 없습니다”

 

“돈을 위해 나무를 자르고, 숲을 훼손하고, 강물을 오염시키고, 탄소를 배출해 자연의 생태적 안전망과 회복력까지 복구 불가능하게 망가뜨린 자본이 농업위기 주범이고 식량위기 주범이며 이 기후위기의 주범입니다. 이 재난의 이름은 자본주의 입니다. …  더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끝내자고 외치기 시작할 때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이 그 시작입니다.”

 

자본주의체제를 겨냥한 2022년 기후정의행동이 2019년 행진의 주축을 이룬 환경·종교단체는 물론 인권운동·여성운동·성소수자운동·장애인운동·반빈곤운동·노조운동·비정규운동, 사회주의정치운동까지 폭 넓은 참여를 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기후위기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9월 기후정의행동은 더 분명한 주장을 내세웠기에, 자본과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반자본주의 대중운동을 지향했기에 더 넓어졌다. 9월 기후정의행동은 탄소배출을 통제하고 금지해야한다는 주장에서 멈춘 것이 아니다. 기후위기가 불평등한 체제에서 비롯된 것임을, 또한 그 위기가 다시 불평등을 심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분노는 깊고 넓다. 9월기후정의행동은 체제를 겨냥한 대중투쟁을 강조함으로써 더 많은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한 노동자의 후기를 옮겨본다.

 

“‘커피 주문할 때 텀블러 사용부터 실천해 봅시다’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 가장 흔하고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얘기하고 실천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더이상은 개인이 아껴쓰고 산다고 해서 지구환경이 나아지는데 1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하루에도 수십톤씩 산업폐기물을 쏟아내는데 내가 아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인가? 이제는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환경문제를 신경을 쓰고 대책을 내놓도록 해야 한다.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게 된 이유도 그런 것이다.”

- 924기후정의행진에 다녀와서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서진ENG 해고자 변주현, 전국모임 소식지 2호)

 

 

노동자가 기후정의운동의 주체로 서기 위하여

 

노동계급도 기후위기는 현실이고, 그 피해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안다. 8월 초 폭우로,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을 부양하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간부가 익사했다. 기후재난은 자본이 만들었는데, 피해는 노동자 민중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아직 일터건 지역이건 자본에 맞서 함께 싸울 방법을 찾기는 힘들다. 노동계급 운동이 아니라 중산층 운동 같아서 민망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나아가 다수 노동자가 ‘기후악당 기업’에서 일한다. 이런 상황에서 옆 조합원에게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민주노총 역시 기후특위를 설치하고 2022년 기후정의행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등 진일보했음에도 아직 지역 현장에서 대중운동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자. 기후위기를 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계급의 이미지는 ‘준 기후악당’과도 같다. 즉 ‘없어져야할 기후악당 기업에서 불철주야 잔업특근에 목매며 결과적으로 기후위기 가속에 일조하는 사람들’로 비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잔업특근에 목매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산량과 연동된 임금 때문이다. 생산량과 관계없이 생활임금을 보장하라는 대중투쟁을 확대하지 않는 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지 물을 틈도 없이 기후악당기업에 종속된 채 일해야 할 뿐이다.

 

 

기후위기 앞에 노동자도, 기후정의운동도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기후정의운동은 노동계급과 함께 생산과 산업을 통제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착한 기업을 만드는 운동이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지를 함께 결정하자는 운동으로, 즉 민주적 계획경제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혁명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잠시 한 노동자의 일기를 옮겨보자.

 

“본사는 철저한 품질관리와 생산원가를 고객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 생산과정을 소개하여 드립니다. 고객 여러분께서는 생산원가에서 얼마간의 이익을 붙여 주시면 됩니다. 이윤은 기업주와 종업원이 공평하게 분배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인, 종업원을 건강부터 교육까지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본사의 모토는 정직입니다. 종업원을 기업주와 하등의 차이 없이 대우하고도 사업을 해나갈 수 있다는 기본을 보이기 위한 기업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양심적이며, 실용적인 상품은 논할 것도 없으며, 모든 기업체의 모범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위는 1969년 11월 1일, 전태일의 일기다. 전태일은 윤리적 경영자가 운영하는 ‘태일피복’이라는 이름의 ‘모범업체’를 꿈꿨다. 자본금은 한쪽 눈을 실명자에게 기증해 마련하려 했다. "저의 한쪽 눈을 김형께 드리겠습니다. 형님과 저 사이의 조그만 일이 사회를 위해서 이로운 행위가 될 것을 바라면서 속답을 기다립니다.”

 

 

인체에 무해한 탈탄소 공정에서, 8시간 일하고 생활임금을 보장받는 100% 정규직 기업을 가정해보자. 전태일이 1969년 꿈꾼 ‘태일피복’의 2020년대 판본은 이런 기업일 것이다. 이런 기업은 가능한가? 한정된 상품 영역에서, 선한 사람들의 지원으로 잠시 존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생산이 자본주의에서 일반화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모범업체 태일피복을 꿈꾸던 69년 11월의 전태일과, 개인의 선의에 기댄 모범기업 설립이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은 70년 11월의 전태일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싸우는 노동자는 ‘불꽃’의 전태일을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풀빵’과 ‘모범업체’의 전태일을 말한다.

 

 

기후위기를 두고도 마찬가지다. 체제에 맞서지 않을 경우 대안은 마찬가지로 ‘모범업체’와 ‘풀빵’이 된다. 정부는 탄소배출에 세금을 매기거나 배출을 줄인 기업에 보조금을 주고, 기업은 탄소배출권으로 기후위기를 가속할 권리를 사거나 탄소중립 제품을 내놓고, 대중은 소비자로서 ‘탄소중립 인증제품’을 구매하고 자원재활용에 앞장서는 것이 대안이 된다. 일부는 탄소세를 거둬 기본소득으로 지급하자며 국가 차원의 풀빵지급을 주장한다. 어차피 자본주의 너머 세상은 없거나 까마득히 멀고, 그 속에서 권력과 정치는 정부와 의회의 소관이고, 경영권은 애초 자본의 고유권한이며, 대중은 ‘소비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 하에 다다를 수 있는 곳은 국가-자본과의 ‘협치(거버넌스)’일 뿐이다. 그래서 일부는 ‘탄소중립 조례’를 지자체 당국과 함께 만들고, 기업과 ‘줍깅(플로깅)’ 행사를 벌인다. 싸우는 노동자에게는 낯설고 분노스러운 풍경이다. 물론 그 분노는 정당하다. 노동계급이 기후정의운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생산’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노동계급 또한 기후위기 앞에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생산과 산업을 통제하는 운동에 나서야 한다.

 

 

기후위기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 산업통제운동으로 나아가자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을 출범한 세 조직은 9월 기후정의행동에서 현장노동자들과 함께 <정의로운 에너지전환을 위한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공동선언>을 알리고자 했고, 산업통제운동 형성을 위한 방안과 요구를 토론했으며, 발전·에너지산업 등 기간산업과 좌초산업 국유화, 공공교통 전면확대, 산업전환 총고용보장과 원청대자본에 대한 공동투쟁 확대, 노동시간 단축 등 요구를 들고 행진했다.

 

우리는 이 운동을 더 확대하고자 한다. 기후재난의 다른 이름,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계급의 실천은 산업통제운동이며, 그 지향은 민주적 계획경제 건설이다. 9월 기후정의행동은 “이대로 살 수 없다”는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을 전면에 걸며 노동계급의 주체화를 촉구했다. 노동자가 앞장서서 기후정의 실현하자!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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