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윤석열 비상계엄 발표 사진:로이터
1. 윤석열 12·3 친위쿠데타의 성격
12월 3일 저녁 10시 23분, 윤석열이 느닷없이 대국민담화를 시작한 뒤 10시 28분 ‘반국가세력 척결’을 내걸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11시 23분, 계엄사령관이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다. 그러나 4일 새벽 1시 1분,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을 통과시켰다. 4시 27분 윤석열이 비상계엄 해제를 선언했다. 비상계엄 선포로부터 5시간 59분 만이었다.
1)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압살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12·3 담화와 극우세력의 궐기를 촉구한 12·12 담화를 통해 반국가세력의 핵심으로 민주당을 지목했다. 또한 부정선거 진실규명을 계엄령 선포의 주된 이유로 밝혔다. 3일 밤 정보사령부에는 북파공작부대(HID)를 포함한 38명의 요원들이 다음날 출근하는 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하여 B1 벙커로 이송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방첩사령관이 국정원1차장과 경찰청장에게 제시한 체포대상자 명단에는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에게 부정선거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들이 포함돼 있었다. 윤석열은 선관위 직원들과 체포된 인사들을 고문하여 부정선거 증거를 조작해 낸 뒤 4월 총선을 무효화하고 국회를 해산하면서 민주당을 절멸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을 비롯한 민주당계 인사들이 체포대상 명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또한 민주당이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체포대상 명단에 한동훈까지 포함된 것은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적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동훈은 ‘국회에 가면 체포되고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전화를 계엄 선포 직후 누군가에게 받았다고 밝혔다. 체포대상 명단에 국회 의장과 부의장이 포함된 것, 전·현직 대법관들과 이재명 무죄선고 판사가 포함된 것은 입법부를 완전히 무력화하고 사법부 또한 겁박하려 했던 노골적인 의도를 보여준다.
계엄선포 직후 발표된 포고령 제1호는 △국회·지방의회·정당의 활동 금지 △결사·집회·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언론과 출판에 대한 계엄사의 통제 △파업·태업·집회 금지 △영장 없는 체포·구금·압수수색 등 광범한 기본권 박탈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압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가짜뉴스·여론조작·허위선동 금지 △포고령 위반자 처단 등 모든 비판과 저항을 반국가세력의 국가전복 행위로 규정하여 난폭하게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2) 노동자·민중의 기본권에 대한 압살
그런데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결과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것은 노동자·민중이었을 것이다. 체포대상 명단에는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포함돼 있었다. 포고령은 특히 파업·집회·언론·정치활동의 자유를 압살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박탈하려 했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파업과 민주노조가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민주노총도 존재할 수 없고, 좌파정치조직·진보정당·노동단체·시민단체 등도 모두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본가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이 쟁취해 온 모든 성과들을 박탈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3)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군사파시즘 부활 시도
12월 3일 낮 국방부장관 김용현은 점심을 먹으면서 “탱크로 국회를 밀어버리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전차부대를 지휘하는 제2기갑여단장은 3일 밤 선관위 공격을 위해 요원들이 대기 중이던 정보사령부에서 별도 대기했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계속 진행됐다면, 전차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을 휘젓고 다녔을 것이라는 얘기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박정희의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 10·17 쿠데타, 전두환의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재현하려 한 시도였다. 만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1961~1987년의 군사파시즘이 전면적으로 부활했을 것이다.
1961~1987년 한국을 지배했던 군사정권은 (파시즘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압살했을 뿐만 아니라 자주적인 노조결성권과 파업권 등 노동자계급의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파시즘의 한 형태, 즉 군사파시즘이었다. (1920~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등장했던 고전적인 파시즘과 1961~1987년 한국에 존재했던 군사파시즘 사이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고전적인 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혁명 근처까지 다다른 상황에서 이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군사파시즘은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매우 미약한 상황임에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1972년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수립하며 단행했던 10·17 비상계엄이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을 짓밟으며 군사파시즘 체제를 재수립하는 과정에서 단행했던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매우 닮은꼴이다.
결론적으로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노동자·민중이 피로써 쟁취한 모든 권리들을 일거에 박탈하고서 군사파시즘을 전면적으로 부활시키려 획책한 친위쿠데타였다. 또한 1987년의 제한된 민주화에 입각한 현 헌정체제마저 반인민적 음모와 무력을 통해 일거에 전복시키려 한, 인민에 맞선 ‘내란’이었다.
2. 윤석열 12·3 친위쿠데타가 발생한 이유
1) 윤석열의 정치적 위기
윤석열이 2022년 3월 대선에서 0.73% 근소한 차이로 승리해 5월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민주당 등 야권은 국회의 63%(189석)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취임 2년 뒤에 치러진 2024년 4월 총선에서도 야권이 압승해 국회의 64%(192석)를 장악했다.
윤석열이 4월 총선에서 대패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반동적 정책들 때문이었다. 윤석열은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등을 상대로 광포한 탄압을 자행했다. 여론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멈춰서긴 했지만 주69시간 노동제 도입을 시도했다.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폐지 등 젠더평등에 반하는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동조하고,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대법 판결을 무력화했으며, 한미일 동맹 강화와 전쟁연습 확대로 전쟁위기를 고조시켰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워 놓고서 본인과 부인의 의혹에 대한 수사는 철저히 거부했다.
윤석열은 화물연대와 건설노조 등을 상대로 광포한 탄압을 자행했다
4월 총선에서 대패한 결과, 윤석열의 대통령 취임 이후 12월 3일까지 2년 7개월 동안 한국 정치사에서 전례없는 여소야대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동안 윤석열은 25번의 거부권을 행사하여 민주당이 주도한 각종 법률과 특검법 등을 무산시켰다. 윤석열의 수하 노릇을 한 검찰은 이재명을 상대로 압수수색 376회 등 전방위 수사를 진행하여 5건의 형사재판에 회부한 반면, 윤석열과 김건희의 의혹에 대해서는 철저히 수사를 회피했다. 윤석열의 거부권 행사 대상에는 본인과 김건희의 의혹을 수사하기 위한 특검법들이 여러 차례 포함됐다. 반면 민주당은 22건의 탄핵소추를 통해 정부 관리들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민주당의 탄핵소추 대상에는 윤석열과 김건희의 의혹 수사를 회피한 검사들과 이재명 수사를 담당한 검사들이 포함됐다. 이 과정은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비리를 폭로하고 사법체계를 동원하는, 부르주아 정치질서 안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어 온 암투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암투에서 상황은 윤석열에게 점점 더 불리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동훈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한동훈은 윤석열의 최측근이었으나 차기 대권을 꿈꾸며 정치에 뛰어든 뒤 김건희 의혹에 대한 해법을 둘러싸고 윤석열과 일정한 차별화를 시도했다. 윤석열과 한동훈의 관계는 끝없이 악화되었고, 국민의힘 내 한동훈 세력이 김건희 특검법 재의결에 동참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윤석열 대선 때 깊이 관여한 정치브로커 명태균과 관련된 폭로였다. 10월 31일 윤석열의 불법적인 공천개입을 시사하는 녹음파일이 공개되었다. 12월 2일에는 구속된 명태균이 자신의 휴대폰을 민주당에 제공할 수 있다면서 윤석열·김건희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계엄을 선포한 12월 3일에 이르기까지 윤석열의 정치적 위기가 어떻게 심화하였는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윤석열의 정치적 위기가 45년만의 비상계엄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많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윤석열 개인의 성향과 기질도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윤석열이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비상계엄이라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게끔 영향을 미친 사회적·정치적 변화일 것이다.
2) 파시즘의 잔재 위에서 극우세력의 재성장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되어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은 군사정권과 야합한 부르주아 보수야당의 배신에 가로막혀 절반의 승리만을 거둔 채 멈춰 섰다. 민주주의는 껍데기로만 쟁취되었고, 군사파시즘은 온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세력의 주류였으며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전두환을 떠받치던 극우세력은 1987년의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군대·경찰·행정·사법 등 국가기구 곳곳에서 강력한 기반을 유지했다. 파시즘의 잔재는 ‘1987년 체제’라는 제한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으로 스며들었고 지속되었다.
1990년 전두환·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민주공화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의 합당을 통해, 즉 군사정권 주역들과 보수야당 온건파의 결합을 통해 (오늘날 국민의힘의 원조라 할)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처음에는 군사정권 후예들이 민주자유당의 주류였지만, 1993년 김영삼 정권에 의해 군부 내 하나회 세력이 제거되고 1995년 전두환·노태우가 5·17 쿠데타로 내란죄 처벌을 받으면서 주도권이 보수야당 출신의 공화주의 보수파에게 넘어갔다. 지도부를 잃고 중핵이 와해된 군사정권의 잔존 세력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 공화주의 보수파로 변신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를 전후해 김대중이 이끌던 보수야당 급진파가 신자유주의 중도우파로 재정립할 때, (군사정권 잔존세력을 포괄한) 공화주의 보수파는 신자유주의 우파로 재정립했다. 이후 두 세력은 1998년의 김대중 정부부터 2024년의 윤석열 정부까지 자본가정당이라는 근본적 본질에서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공세를 집행한다는 핵심 정책에서도 엇비슷한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두 세력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우파가 집권할 때마다 그 속에 내재한 극우적 본성을 드러내면서 노동자·민중을 더욱 거칠게 공격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2009년 쌍용차 파업에 대한 살인적 진압, 2010~12년 금속산업 민주노조들에 대한 와해 공격,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계속된 KBS·MBC 방송 장악, 박근혜 정권 시기 문화계 블랙리스트, 2015~16년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공세, 2022~24년 윤석열 정권의 화물연대·건설노조 등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극우적 공격은 노동자·민중으로부터 거센 반작용을 낳았다. 2016~17년 박근혜 퇴진투쟁이 폭발하고 결국 탄핵으로 귀결되었던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극우적 공격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반격이 축적되고 결집한 결과였다.
그런데 박근혜의 탄핵은 다시 극우세력이 새롭게 성장하는 반작용을 낳았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의 탄핵이 최종 확정될 무렵, 극우세력이 결집한 이른바 ‘태극기집회’는 거리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99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 우파라는 외피에 봉인돼 있던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군부에게 노골적으로 쿠데타를 호소하는 등 거리에서 거침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극우세력의 재성장은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복음주의 우파가 주도했고 예비역 군 장성 등 군사정권 후예들이 결합했다. 극우세력의 기세는 문재인 정권 내내 지속되었고, 극우세력의 대중적 기반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서 극우 유튜버들과 부정선거 음모론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극우세력은 2020년 총선 등에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시도했지만,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입당전술을 통해 국민의힘 안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국민의힘에 대한 극우세력의 영향력 강화는 한동안 김종인과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공화주의 보수파의 영향력 확산과 병행해서 진행되었다. 검찰이라는 핵심 관료조직을 틀어쥔 윤석열은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영입되면서 극우세력의 중심으로 부상했지만, 공화주의 보수파의 외피를 쓰고 대선을 치렀다. 윤석열은 집권 직후 이준석을 내쫓고 당권을 장악하면서 극우세력의 본성을 드러냈고, 이후 국민의힘의 주도권은 윤석열을 중심으로 한 극우세력에게 확연히 넘어갔다.
이후 윤석열은 노골적으로 국민의힘 대표선거에 개입하고 대표에게 사퇴를 강요하는 등 불법적이고 반공화주의적인 당무개입을 지속했다. 그러나 친윤계라는 이름 아래 국민의힘의 다수 정치인들이 윤석열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줄서는 행태는 변하지 않았다. 2023~24년 윤석열이 공식 석상에서 ‘반국가세력 척결’을 되풀이해서 외치며 극우세력의 목소리를 점점 더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동안, 친윤계 또한 공화주의 보수파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극우세력의 본성을 노골화하는 방향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었다.
이처럼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개인적 동기를 넘어 사회구조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자면, 군사파시즘의 잔재 위에서 2017년 이후 극우세력이 다시 성장해 온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반영하는 사건이다. 또한 그러한 조건 위에서 군사파시즘의 부활이라는 극우세력의 잠재된 열망을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3) 세계적인 극우세력 부상과의 관련성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그리고 그 사회적 기반이 된 2017년 이후 극우세력의 재성장은 최근 10여 년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극우세력이 부상해 온 세계적 경향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미국 등과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 즉 복음주의 우파가 최근의 극우세력 성장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복음주의 우파는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와 함께 이스라엘기를 휘날리고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을 극렬하게 펼쳐 왔는데, 이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우파가 강력한 시온주의 지지 세력이자 성소수자 혐오 세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극우세력의 논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도 미국이나 브라질에서 나타난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부정선거 진실규명’을 주된 명분의 하나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부정선거를 주장했던 2021년 미국 의사당 폭동, 2023년 브라질 의회·대법원·대통령궁 폭동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2021년 미국 의사당 폭동 사진: EPA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세계적인 극우세력의 부상은 대체로 자본주의 위기 심화에 따른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빈곤화로부터 역설적으로 가장 큰 동력을 얻고 있으며, 트럼프의 재집권이 보여주듯 많은 나라에서 상당히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획득해 가고 있다. 또한 극우세력의 집권은 노동자·민중에 대한 극심한 사회경제적 공격을 뜻하긴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파시즘으로는 쉽게 진화하지 않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부상은 아직까지는 파시즘의 잔재와 연결된 정치의식의 요소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회적 기반 또한 과거 군사파시즘에 향수를 느끼는 60대 이상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쏠려 있다. 또한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극우세력의 성장이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12·3 친위쿠데타와 같은 파시즘 부활 시도로 매우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3. 윤석열 12·3 친위쿠데타가 실패한 이유
1) 어설픈 준비와 자기정당성의 결여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왜 실패했는가? 일차적인 이유는 계엄선포 직후 수천 명의 노동자·민중과 국회의원들이 계엄해제를 위해 국회로 달려간 속도에 비해 군대와 경찰이 국회를 봉쇄하러 달려간 속도가 밀렸다는 데 있다.
그런데 만일 동원된 군대와 경찰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해서라도 국회를 마비시키고자 했다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실제로 윤석열은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했고, 수방사령관에게 “4명이 들어가 1명씩 끌고 나오라”고 지시했으며, 경찰청장에게도 여섯 차례나 국회의원 체포를 지시했다. 그러나 군대·경찰 지휘관들은 국회를 봉쇄하라는 윤석열의 명령을 기본적으로 실행하면서도 유혈사태를 야기할 정도의 명령은 이행하지 않았다. 유혈사태와 그에 따른 사후 책임을 감수할 정도로는 의식적으로 준비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대·경찰 지휘관들이 유혈사태를 감수하지 못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유혈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선 병사들과 경찰들이 집단 항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 12·3 비상계엄을 총괄기획한 국방부장관 김용현은 9월 2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계엄준비 의혹을 제기하는 민주당 의원에게 “지금 대한민국 상황에서 과연 계엄을 한다고 하면 어떤 국민이 이를 용납하겠나. 우리 군에서도 따르겠나. 저는 안 따를 것 같다”고 답변한 바 있다. 그의 답변은 계엄준비 사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계엄에 대한 군대의 불복종 가능성을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의 계획에 심각한 역효과를 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그 핵심 주동자들 사이에서조차 자기정당성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년 이상 친위쿠데타를 논의하고 준비했지만, 윤석열 개인의 위기 타개나 부정선거 음모론을 넘어서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극우세력의 성장이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와 집권당 국회의원 수십 명을 휘어잡을 정도에 이르렀고, 이것이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조기에 파시즘 부활 시도로 이어졌지만, 친위쿠데타를 주도한 자들의 역량 부족과 충동적 성격 때문에 너무 어설프게 준비하고 실행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실패해 버린 것이다.
2) 광주민중항쟁이 남긴 역사적 힘
그런데 만일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어떤 식으로든 일단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노동자·민중의 항쟁이 이번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항쟁이 성공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령 그 항쟁이 다시 한 번 군홧발의 폭력에 짓밟혔을지라도, 1980년 5월 광주의 혁명적 패배가 1980년대 한국을 혁명의 시대로 만들었듯이, 학살당한 이들의 붉은 피를 머금고 군사파시즘의 압제에 맞서는 새로운 혁명의 시대가 펼쳐졌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패배가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부활하고 전진했던 그 과정이 이번에도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1980년대보다 훨씬 더 폭발적이고 거대한 양상을 띠었을 가능성이 높다. 1980년 광주에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민중항쟁을 앞장서 책임졌지만, 그들은 그전에 어떤 조직적 무기도 갖고 있지 못했다. 1987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노동자계급은 조직적 무기를 갖고 있지 못했고 따라서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중추적인 영역을 중심으로 110만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으로 조직되어 있다. 비록 심각한 관료적 후퇴로 고통 받고는 있지만 민주노조운동의 잠재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친위쿠데타에 맞선 항쟁 과정에서, 그리고 설령 패배하였더라도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지금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은 거대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설령 성공했을지라도 군사파시즘은 결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1980년대를 훨씬 능가하는 거대한 혁명적 파도가 한국을 휩쓸었을 것이고, 노동자계급은 1980년대보다 훨씬 더 멀리 전진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즉 설령 성공하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국회를 봉쇄하러 동원된 군대와 경찰의 지휘관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제한적인 민주화에 그치긴 했지만,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역사 속에서 보여준 극적인 부활과 승리를 모르거나 무시할 수 있는 한국인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군대·경찰 지휘관들을 머뭇거리게 만든 진정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어설픈 대의명분을 갖고도 훨씬 쉽게 유혈사태를 감수했을 수 있다. 그러나 친위쿠데타가 성공하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수 있다면 유혈사태까지 감수하기에는 훨씬 더 선명한 대의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3) 국지전 불장난의 실패
12·3 친위쿠데타의 주모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명분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북한을 자극하여 국지전을 유도해 내는 것이었다.
10월 11일 북한은 한국이 10월 3일, 9일, 10일 세 차례에 걸쳐 평양 상공에 무인기를 침투시켜 대북전단을 살포했다고 발표했다. 12·3 친위쿠데타가 실패한 이후 바로 이 무인기 침투 사건은 국지전을 유도하여 비상계엄의 명분을 확보하려는 윤석열 정권의 의도된 도발이었음이 확인되었다. 11월 18일 국방부장관은 북한 오물풍선 원점타격을 지시했지만 합참의 반대에 막혔던 것으로도 알려진다. 12·3 친위쿠데타를 실무기획한 노상원의 수첩에서는 “NLL 북한 공격 유도”라는 메모가 발견되었다.
대북전단 살포 무인기 잔해
국지전을 유도하려는 윤석열 정권의 시도는 왜 실패했을까? 10월 31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9’ 발사가 그 이유를 압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러시아와의 군사적 밀착, 중·러·북 동맹의 작동으로 자신감이 높아진 북한은 조급하게 국지전에 말려드는 대신 오히려 대담하게 ‘전쟁을 원한다면 전면전을 하자’고 (윤석열 정권이 아닌) 미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로 지금의 국제정세 속에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국지전으로 제한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과 중국을 정점으로 제국주의 패권대결이 매우 격화되어 왔으며, 그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는 대만과 함께 세 번째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한반도는 대만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걸려 있지만, 대만과 달리 미·일·한과 중·러·북의 국제적 대치구도가 이미 팽팽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양의 강력한 무기들이 서로를 겨눠 왔다. 따라서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자칫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가 모두 뛰어드는 대량파괴 국제전으로, 나아가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정확한 과정은 아직 알 수 없지만,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갖는 이 위험성 때문에 윤석열 정권의 국지전 유도 시도는 실패했을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정권 교체기에 준비되지 않은 방식으로 한반도 전쟁에 휩쓸려 들어갈 수는 없었을 테니까.
윤석열 정권의 국지전 유도 시도는 한편으로 국제정세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파시즘만이 아니라 전쟁 또한 얼마나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며, 그야말로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극심한 위기가 파시즘과 전쟁을 부르는 시대, 따라서 노동자·민중이 생존을 위해서라도 혁명으로 떨쳐 일어서지 않을 수 없는 시대, 즉 위기·전쟁·혁명의 시대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다시 한 번 너무나 명징하게 보여준다.
4. 새로운 계급투쟁 지형의 성격과 전망
1) 극우세력에 맞선 전선의 돌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로 한국의 계급투쟁 지형이 하루 밤 사이에 급변했다. 극우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전면 박탈하는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획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형 위에서 노동자계급은 극우세력에 맞서기 위해 불가피하게 민주당을 비롯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한 편에 서서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현 상황은 1917년 8월말 러시아에서 코르닐로프 반란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임시정부와 한 편에 서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형국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19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노동자·민중과 부르주아 보수야당이 한 편에 서서 싸웠던 전선이 재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존의 계급투쟁 지형은 이와 달랐다. 노동자·민중은 신자유주의 우파(국민의힘)와 신자유주의 중도우파(민주당)라는 두 자본가세력 모두에 맞서 투쟁했다. 둘 사이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기존의 계급투쟁 지형에서는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견결히 고수하면서 두 자본가세력 모두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발전시켜 나가야 했다.
그와 같은 기존의 계급투쟁 지형은 1987년 제한된 민주화와 함께 형성됐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군사정권 잔존 세력이 공화주의 보수파로 변신하고 부르주아 정치질서가 신자유주의 우파 대 신자유주의 중도우파의 대결구도로 재편되면서 지형이 고착됐다. 이후 3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기존의 계급투쟁 지형이 12·3 친위쿠데타와 함께 새로운 지형으로 바뀐 것이다.
새로운 지형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독립성과 투쟁력을 견결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극우세력만이 아니라 민주당 등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에 맞선 투쟁도 당연히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새로운 지형의 특징은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이 핵심 과제라는 데 있다.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민주당을 능가하여 주도권을 장악할수록 광범한 대중 속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고, 따라서 민주당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 또한 더욱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1917년 8월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이끈 소비에트는 코르닐로프 반란군을 무력화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거둔 성과는 소비에트로 결집한 노동자·민중의 자신감을 극대화했고, 결국 두 달 뒤 껍데기만 남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가볍게 제압하고 소비에트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10월 혁명으로 귀결됐다. 마찬가지 원리가 지금 극우세력에 맞선 전선에서도 작동한다.
2) 극우세력의 목표와 방법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는 도발적으로 새로운 전선을 열었지만, 곧바로 허망하게 실패하면서 극우세력을 매우 불리한 위치로 내몰았다. 그러나 정치적·사회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는 극우세력은 만만치 않은 저항과 반격에 나서고 있다.
처음에 윤석열을 비롯한 극우세력은 한동훈과의 타협을 통해 탄핵소추를 피하면서 전열정비의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러나 한동훈이 ‘3~4개월 내 조기퇴진’이라는 항복을 요구하자 타협을 깨고 정면대결의 길로 선회했다. 윤석열은 12·12 담화에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했고, 12월 14일 탄핵소추가 가결될 때 국민의힘 의원 85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거나 12·3 비상계엄은 내란이 아니라는 응답이 여론조사에서 20~25%를 유지했다. 전광훈 등은 거리에서 극우 총궐기를 조직하기 위해 광기어린 선동에 나섰다.
탄핵소추 가결 이후에도 윤석열과 극우세력은 버티기를 통해 세력관계 반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는 최대한 지연시킬 작전을 펴면서 내란죄 수사는 일체 거부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헌법재판관 추가선임 절차를 보이콧하고 친윤계 일색으로 지도부를 재정비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는 헌법재판관 추가임명과 내란 상설특검 후보 추천을 거부하면서 탄핵심판과 내란죄 수사를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현 정세에서 국민의힘을 비롯한 극우세력의 핵심 목표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윤석열의 파면과 내란죄 처벌을 막아내는 것이다. 저들의 논리는 ‘12·3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통치행위로서 내란이 아니다’로 요약된다.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시도했던 12·3 비상계엄을 본질적으로 옹호하면서 준엄한 단죄를 무산시키려는 것이다. 윤석열의 파면과 내란죄 처벌이 확정될 경우 자신들에게 미칠 후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사파시즘 부활 시도를 정당화하여 이후에도 다시 시도할 길을 열어두려는 극우적 의도 때문이기도 하다.
3) 민주당의 목표와 방법
현 정세에서 민주당의 핵심 목표는 민주당 정권의 재창출이다. 한편으로는 12·3 친위쿠데타가 성공했을 경우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말살과 끔찍한 개인적 고초들을 겪을 뻔했기 때문에 민주당 또한 윤석열 파면과 내란죄 처벌에는 진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발전과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권리 쟁취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집권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또한 집권할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로서 노동자·민중을 거세게 공격할 것이라는 본질에도 전혀 변함이 없다. 당연하게도 민주당 정권의 재창출은 노동자·민중이 결코 공유할 수 없는 목표다.
사실 윤석열 국민의힘 정권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민주당 정권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2016~17년 촛불항쟁으로 표출된 노동자·민중의 열망과는 반대의 길을 갔다. 또 하나의 자본가정권답게 최저임금을 찍어 눌렀고, 집값 폭등을 방조했으며, 특권층의 부패를 감쌌다. 윤석열 정권의 광포한 건설노조 탄압을 먼저 시작한 것도 문재인 정권이었다. 윤석열 정권은 오로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실망과 환멸을 토대로 집권할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등장시킨 것 또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다. 1998년부터 10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펼친 신자유주의 공세는 대량 정리해고의 충격과 함께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을 불러왔다. 권력의 단맛을 본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반동적인 주류 지배세력의 일부가 되었다. 민주당 정권 10년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실망과 환멸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연속 집권을 가능케 했다.
너무나 긴박한 현 정세에서도 재집권에 몰두하는 민주당의 본질은 윤석열 탄핵소추 가결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에게 국정안정협의체를 제안하며 여당 노릇을 하려 했던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 안정을 내세워야 다가오는 대선에서 중도층의 표심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얕은 계산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윤석열·한덕수와 국민의힘에게 전열정비의 시간과 명분만 제공하는 중대한 실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170석(56.7%)을 갖고 있는 자신의 의회 권력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군중집회는 자신들의 의회권력 행사를 정당화해 줄 보조수단으로서만, 또한 자신들이 그어놓은 정치적 한계 안에서만 작동하기를 원한다. 만일 민주당의 의도가 그대로 관철된다면,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은 결정적으로 약화될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의 압살을 꿈꾸는 극우세력을 제압할 힘은 의회 다수의석에서 나오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이 총파업이라는 고유의 수단을 동원하며 민중항쟁의 주도자로 나설 때에만 극우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4) 노동자계급의 목표와 방법
현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의 핵심 목표는 윤석열의 파면·퇴진과 내란죄 구속·처벌을 가장 단호하고 철저하게 관철하는 것이다. 또한 극우세력의 결집체가 되어 뻔뻔스럽게 윤석열의 파시즘 부활 시도를 옹호하고 있는 내란동조정당 국민의힘을 해체하거나 궤멸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군사파시즘의 부활을 획책하는 쿠데타가 한국 사회에서 다시는 시도될 수 없도록 확고하게 뿌리를 뽑아야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을 왼쪽으로 크게 이동시킴으로써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광범하게 쟁취하고 노동자운동과 노동자정치를 획기적으로 전진시킬 길을 열어야 한다.
동시에 노동자계급은 12·3 친위쿠데타 제압 이후 활짝 열린 광장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요구들을 함께 쟁취해야 한다. 노동자·민중은 12·3 비상계엄 이전에도 본질적으로 기본권을 박탈당한 삶을 강요당해 왔다. 노동자·민중의 삶은 비정규직 초과착취와 노동기본권 부정으로,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차별로, 기후위기 가속화와 환경 파괴로, 제국주의 진영 간 패권대결과 전쟁위기로 이미 심각하게 유린당해 왔다. 오죽하면 한국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을 갖고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윤석열 정권에서나 과거 민주당 정권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분쇄해 낸 바로 그 힘으로 이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권리 쟁취를 위한 거대한 투쟁으로 전진해야 한다.
아울러 노동자계급은 최근 사태와 관련된 급진적 민주주의 요구들을 함께 쟁취해야 한다. 사문화된 줄로만 알았던 비상계엄이 현실로 튀어나와 군사파시즘 부활을 획책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재발을 막으려면 이제 계엄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 찬성률이 75%에 이르는 데도 소수 헌법재판관에게 탄핵심판을 맡겨놓고 기다리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다. 국민투표에 의한 대통령 파면제를 도입해야 한다. 유권자의 의사와 다르게 85명의 국회의원이 탄핵에 반대했으나 다음 선거 전까지는 이들을 응징할 방법이 없다. 국회의원 상시 주민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 국회를 봉쇄하라는 명백한 불법 명령 앞에서도 군대와 경찰이 한편으로는 주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령을 이행했다. 군대·경찰에게 불법 명령에 대한 거부의무를 명시해야 한다. 윤석열은 관료적 국가기구인 검찰조직을 장악함으로써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검찰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검찰의 지역분권화를 통한 상호감시 및 지휘부에 대한 주민직선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
한편 현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은 위력적인 총파업이라는 고유의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폭발적인 민중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한다. 한편으로는 그것만이 극렬 저항에 나서고 있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비롯한 극우세력을 실질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 정세에서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함으로써, 또한 실질적으로 주도할 때에만, 노동자계급이 윤석열 탄핵과 내란죄 처벌에 찬성하는 70~75%의 광범한 대중 속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하면서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관철할 힘과 노동자운동의 힘찬 전진을 보장하는 미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2016~2017년 촛불항쟁의 경험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5~16년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에 맞선 민주노총의 투쟁은 2016~17년 촛불항쟁의 문을 열었지만, 민중항쟁을 주도할 만한 총파업을 조직하는 데 실패하면서 탄핵을 성공시킨 민주당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탄핵소추 이후 헌법재판소 결과가 나오기까지 세 달 동안 열린 광장에서 노동자·민중의 요구가 폭넓게 제기되었지만, 대중적 탄력은 결코 받지 못했다. 촛불항쟁의 승리자가 된 민주당의 정치가 큰 틀에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고 제한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선의 핵심 과제, 즉 극우세력의 저항을 진압하며 윤석열 파면·퇴진과 내란죄 구속·처벌을 관철하고 국민의힘을 해체·몰락시키는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수록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요구들을 제기하고 관철시킬 힘이 확대된다. 역으로 노동자계급이 또 다시 핵심 과제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다시 한 번 민주당의 부르주아 의회권력이 결정적인 해결사로 기능한다면, 민주당의 정치를 넘어서는 노동자·민중의 요구는 대중적 호응 없는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분출하기 위해 다양하게 노력해야 하지만, 핵심 과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 없이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 연합뉴스
5) 예상되는 세 가지 시나리오
새로운 계급투쟁 지형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큰 틀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 번째, 윤석열 파면·퇴진과 내란죄 구속·처벌 및 국민의힘 해체·몰락이 모두 실현되는 시나리오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번 기회에 극우세력을 궤멸시키는 것으로서, 현 정세에서 노동자계급이 최선을 다해 추구해야 할 투쟁목표다. 이러한 성과는 민주당의 부르주아 의회권력을 중심으로 해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 오직 노동자계급이 위력적인 총파업으로 폭발적인 민중항쟁을 주도함으로써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 낼 때에만 쟁취할 수 있다. 만일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한다면,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요구들과 급진적 민주주의 요구들을 관철해 나갈 수 있는 거대한 동력이 형성될 것이다. 노동자운동과 노동자정치가 그야말로 획기적인 전진을 시작할 것이다. 민주당의 재집권이 아닌 노동자정부 수립과 노동자세상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는 노동자계급의 전망까지도 상당한 대중 속에서 유의미한 대안으로 부상하기 시작할 것이다.
두 번째, 국민의힘 해체·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윤석열 파면과 내란죄 처벌조차 실패하는 시나리오다. 그 형태가 윤석열의 복귀든, 내각제 개헌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결론은 같다. 극우세력의 목표가 실현되는 것으로 노동자계급으로서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물론 여론의 70%가 12·3 친위쿠데타에 대해 강력한 분노를 갖고 있고 군중집회가 계속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 그러나 극우세력이 궤멸의 위기 앞에서 필사적인 저항과 반격에 나서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여론을 넘어 물리력으로도 극우세력을 제압해 나가야 한다.
세 번째, 윤석열 파면과 내란죄 구속·처벌은 실현되지만 국민의힘 해체·몰락은 실현되지 않는 시나리오다. 윤석열을 단죄함으로써 파시즘 부활 시도에 상당한 경종을 울리기는 하겠지만, 극우세력 또한 국민의힘을 지켜냄으로써 추후 반격을 도모할 진지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세력관계를 크게 바꿔내지 못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극우세력에 맞선 투쟁이 민주당의 부르주아 의회권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의 총파업과 민중항쟁이 충분히 강력하게 전개되지 못한다면, 이 시나리오로 귀결될 것이다.
이 시나리오로 간다면, 이후 상황은 매우 위험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 시나리오는 민주당의 재집권으로 귀결될 것인데, 민주당 정권 아래서 노동자·민중의 삶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머지않아 노동자·민중 속에 거대한 실망과 환멸이 다시 조성될 것이다. 살아남은 극우세력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세를 불려 더욱 강력해진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특히 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점점 더 깊은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은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극우세력 성장은 과거 군사파시즘에 향수를 느끼는 60대 이상에 크게 쏠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양상처럼 극우세력이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빈곤화로부터 역설적으로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제공받으면서 전 세대에 걸친 세력을 구축하게 될 수 있다. 극우세력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관계도 바뀔 수 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극우세력의 성장은 자본가계급 전반의 지지를 얻지 못한 가운데 이루어졌고,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실패한 또 하나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향후 경제위기가 심화된다면 자본가계급 전반이 극우세력의 집권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할 가능성도 있다.
만일 극우세력이 재집권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 노동자·민중에 대한 극심한 사회경제적 공격을 의미하게 되겠지만, 다시 한 번 파시즘 부활을 획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이번에 확인했듯이, 군사파시즘의 역사와 잔재 때문에 극우세력의 집권이 매우 빨리 파시즘으로 진화하는 게 한국 사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로 가게 되더라도 상황이 무조건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설령 민주당이 재집권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노동자계급의 독립성과 투쟁력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이후 사태 전개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민주당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과 환멸이 윤석열 국민의힘 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된 것은 노동자운동·노동자정치의 위축과 민주당에의 종속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에 가능했다. 만일 민주당 정권 아래서 노동자계급이 독립성과 투쟁력을 단호하게 발전시켜 나갔다면 민주당 정권에 대한 실망과 환멸은 극우세력이 아니라 노동자운동·노동자정치가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결국 실천적인 요점은 이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를 현실화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의 위력적인 총파업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민중항쟁을 주도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은 설령 투쟁이 목표한 만큼 이루어지지 못해 세 번째 시나리오로 귀결되더라도 그에 대한 최선의 준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 노동자계급의 투쟁방향 수립을 위하여
2016년 박근혜 퇴진 투쟁 때에는 10월 24일 최순실 태블릿PC가 폭로되고부터 46일 만에 탄핵소추가 가결되었다. 당시 군중집회 흐름 안에서는 민주당의 거국내각 타협 시도와 탄핵 추진을 비판하면서 ‘대중투쟁의 힘에 의한 퇴진’을 추구하는 노선이 한동안 우위에 섰었다. 하지만 11월 30일 민주노총 총파업이 초라하게 실패하자 민주당 중심의 탄핵 추진으로 분위기가 급선회했다. 12월 9일 민주당이 주도적으로 탄핵소추를 성공시킨 뒤 촛불항쟁의 모든 성과를 가져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12·3 친위쿠데타 시도 후 11일 만에 탄핵소추가 가결되었다. 2016년과 달리 처음부터 ‘대중투쟁의 힘에 의한 퇴진’이 아니라 ‘부르주아 제도에 의한 탄핵’으로 길이 잡힌 것이다. 왜 그랬을까? 첫 번째는 2016년 경험에 의한 학습효과일 것이다. 두 번째는 다시 한 번 민주노총이 ‘대중투쟁의 힘에 의한 퇴진’을 주도적으로 관철할 만큼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12·3 친위쿠데타 이전 민주노총의 상태는 2016년 최순실 태블릿PC 폭로 이전보다 더욱 좋지 않았다. 세 번째는 민주당이 처음부터 모든 타협을 거부하고 탄핵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제2의 계엄령 선포에 대한 공포 때문에 윤석열의 직무를 하루라도 빨리 중단시켜야 한다는 대중적 공감대가 매우 강력했기 때문이다.
비록 ‘대중투쟁의 힘에 의한 퇴진’ 경로를 가지 못하고 ‘부르주아 제도에 의한 탄핵’ 경로를 밟아 왔을지라도,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지금까지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비상계엄 선포로부터 2시간 33분 만에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힘은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듣자마자 국회로 달려갔던 수천 명의 노동자·민중에게서, 또한 전국 각지에서 그들을 응원했던 수백만, 수천만의 노동자·민중에게서 나왔다. 12월 7일 이후 지속되고 있는 군중집회는 윤석열 탄핵소추가 가결되게 한 결정적인 힘이었으며, 윤석열의 파면과 내란죄 구속·처벌 및 국민의힘 해체를 향해 전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힘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금까지 투쟁에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상당한 역할을 해왔지만, 자신의 잠재력에 비해서는 매우 제한된 수준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12월 4일 새벽 3시를 기해 ‘윤석열 퇴진시까지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5일, 6일, 11일 세 번에 걸쳐 금속노조와 철도를 중심으로 5만에서 10만 정도가 참여하는 제한된 총파업에 그쳤다. 민주노총은 군중집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고 있고 상당수 조합원들이 군중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군중집회에서 경찰 바리케이드를 밀어내고 길을 열어낸 모습은 광범한 미조직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낸다면, 군중집회는 폭발적인 민중항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민주노총 내 공식 단위는 물론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이에 관한 논의들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군중집회에서는 2030 여성들의 주도성이 눈에 띄게 부상했다. 양적 기준에서는 2008년이나 2016년의 군중집회에서도 비슷한 면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과거보다 훨씬 강력한 적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21~22일 남태령에서 경찰에 가로막힌 전봉준투쟁단에 2030 여성들 주도로 아래로부터 전투적 연대를 조직하여 28시간 만에 승리를 쟁취한 것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다. ‘남태령 대첩’의 감동은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이동권 투쟁 장애인들에 대한 자발적 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차별과 억압에 맞서 스스로 연대를 조직하며 광장의 주역이 된 2030 여성들이 현 정세에서 전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 정세에서 가장 핵심은 민주노총이 윤석열 파면·퇴진과 내란죄 구속·처벌 및 국민의힘 해체라는 핵심 요구와 함께 노동자·민중의 다양한 요구들을 내걸고 위력적인 총파업을 조직해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폭발적인 민중항쟁을 주도하며 정세를 이끌고 나가는 것이다.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민주노총의 위력적인 총파업을 촉구하고 선도하는 활동을 아래로부터 긴급하게 조직해 나가야 한다. 좌파 정치조직들, 전투적·변혁적 현장 활동가들,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먼저 주체로 일어서서 그 절실한 필요성을 광범한 조합원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해 나가야 한다. 동시에 민주노총 공식 기구에 전면적인 토론을 제기하고 단호한 결의를 끌어내야 한다. 관료적으로 후퇴한 노동자운동의 상태 때문에 당장에는 충분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같은 역동적인 정세에서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도약이 일어날 수도 있다. 결과가 무엇이든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야 할 시점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번에 극우세력을 궤멸시키지 못한다면,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빈곤화가 역설적으로 극우세력 성장에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는 세계적인 양상이 이제 한국에서도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으로 가장 위험한 부분은 2030 남성이다. 2030 남성은 대체로 2030 여성에 비해 상당히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향후 2030 남성 사이에서 실업·비정규직에 따른 경제적 고통이 심화되고 여성·소수자 혐오성향이 강화된다면, 그 상당수가 극우세력의 강력한 사회적 기반으로 포획될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것이 현실화한다면 극우세력의 파괴력이 몇 곱절 배가될 것이다. 이미 60대 이상이 극우세력의 중요한 기반이 돼 있는 상황에서 OECD 최악의 노인빈곤도 주목해야 한다. 당면한 정세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과정에서 이러한 위험에 맞선 투쟁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핵심적으로는 노동자운동이 청년실업·비정규직·노인빈곤 문제를 해결할 계급적 요구를 전면에 제기하는 것, 2030 여성운동이 분리주의가 아닌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뻗어나가면서 2030 남성을 견인해 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