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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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3

  • 최종현
  • 등록 2025.07.01 10:14
  • 조회수 99

 

[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


자브라 니콜라와 팔레스타인의 연속혁명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 초기부터 참여한 팔레스타인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하면서, 이 지역 노동자계급이 해방을 위한 투쟁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을 규명했다. 자브라 니콜라는 1912년 하이파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인 1930년대 초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일찍부터 스탈린주의 정책을 비판했고, 좌익반대파1)의 기치 아래 당내에서 계속 활동하던 소규모 반대파 트로츠키주의 그룹에 가까워졌다. 이 그룹은 이후 1940년에 유대인 트로츠키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요청으로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과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1) (편집자 주) 좌익반대파는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소련 공산당 내에서 레온 트로츠키가 주도한 정치적 경향으로,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국제적 혁명 전략을 강조하며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당내 집권파(트로이카)에 맞서 싸웠다. 1927년 말, 주요 지도부가 당에서 축출되고 트로츠키는 추방당했다. 이후 1930년 국제좌익반대파(ILO)를 거쳐 1938년 제4인터내셔널 건설로 이어졌다.

 

니콜라는 제4인터내셔널 운동에 합류한 후, 아랍 혁명의 과제에 대한 전략적 대응을 수립하기 위해,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의 인식틀과 연속혁명 이론을 통해 팔레스타인 분쟁(palestinian conflict)을 이해하는 이론적 과제를 수행했다.

 

1944년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통치 당시 자브라 니콜라의 모습, 사진은 니콜라의 기자증

 

니콜라는 비록 미완성이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아랍 국가와 아시아적 생산양식’ 서문에서, 중동의 사회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동의 사회구조는 발전중인 내재적 역사 경향과 야만적 제국주의의 침투라는 거대한 외재적 힘이 충돌한 결과로, 팔레스타인의 경우 내재적 역사경향이 시온주의 식민화와 충돌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현재 중동 전역의 아랍 사회는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위기는 종종 1967년의 패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 위기는 이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고 발전해 왔으며, 전쟁은 이 위기의 증상에 불과했다. 패배는 위기를 더 심화시키고, 선명하게 만들며, 드러냈을 뿐이다.

 

이 ‘위기’는 단지 경제 발전의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발전국들의 경제위기가 아니다. 이 ‘위기’는 단지 제국주의에 지배 받는 국가들의 정치적 위기도 아니다. 즉,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져, 여전히 재정적·군사적으로 유지·지원받아 잠재적 저항국들에 대한 채찍 역할을 하도록 의도된 식민주의적·팽창주의적 이웃 국가의 영구적 위협에 직면한 국가들이 겪는 단순한 정치위기도 아니다. 이 ‘위기’는 주로 이들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위기다. 이는 단순한 저발전의 경제위기도, 정치위기도 아닌, 전 세계적인 사회 위기이며, 이는 전통 아랍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역사적 산물일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오랜,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관계의 산물이다. 이 위기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기반과, 그 위에 강제 부과된 외국 상부구조 사이 모순의 표현이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확보한 영토(짙은 청록색이 전쟁 이전, 연한 청록색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 쿠웨이트, 레바논을 상대로 6일만에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점령한다.

 

니콜라는 아랍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극심한 지배 - 팔레스타인의 경우 제국주의 거점인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와 결합된 - 와 지역 부르주아지의 약점과 종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멍에로부터 팔레스타인과 아랍의 해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나 '민족 혁명'의 틀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토착 지배계급은 제국주의 세력에 전적으로 의존적이거나, 제국주의 세력 앞에서 극도로 약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에게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의 주체는 농민과 동맹을 맺은 아랍 노동자계급이었다. 그는 “중동 혁명에 관한 테제 Theses on the Revolution in the Middle Ea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랍의 혁명은 ‘민주주의 Democratic’ 민족혁명이나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연속혁명으로만 가능하다. 노동자계급이 빈농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적 조치를 시행하지 않는 한, 대중의 긴박한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민족적 민주주의 과제도, 급속한 산업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

 

니콜라의 저술 전반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아랍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설명하려는 매우 분명한 시도를 볼 수 있으며, 제국주의가 강요한 국경을 넘어선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잠재적인 강력한 단결에 대한 깊은 이해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매우 진지한 시도도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의 중동 침투가 불균등 결합발전에 따라 다양한 사회구조를 만들어낸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회와 그 사회경제적 구조도  이스라엘 국가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달 피토(Dal Fitto) 는 니콜라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신생 시온주의 사회는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의 다양한 계급과 충돌했다. 시온주의는 유럽에서 자본, 기술적 해법, 근대적 지식을 가져왔다. (대개 시온주의 기금의 지원을 받은) 유대 자본은 단순히 토지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봉건적 요소를 점차 대체했고, 시온주의 법규는 아랍인에게 토지를 재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재정적, 경제적 우위를 갖게 된 시온주의 자본주의 경제는 아랍 자본가계급의 형성을 차단했다. 아랍 농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추방하며 이들과 충돌한 시온주의는, 유대인 경제 부문에서 (강력한 팔레스타인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 또한 막았다. 아랍 부문의 자본주의 발전이 지연되고 방해받았기 때문에 농민들은(아랍 지식인들 또한) 영국 위임통치 행정부와 공공 서비스 분야를 제외하면 일자리를 찾기가 극도로 어려웠다. 시리아와 매우 유사한 조건에서 발전해 오던 아랍 팔레스타인의 사회경제적 구조는 시온주의 식민화로 완전히 왜곡되었다. 이러한 왜곡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좌) 1967년 6월 7일, 예루살렘 바위의 돔으로 진격하는 이스라엘군

(우) 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점령과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엔조 달 피토는 니콜라의 사상을 해석한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토지를 취득하고, 때로는 그 가치 이상으로 비싸게 토지를 구입하며, 연속적인 이민 물결로 유입된 유대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필요는 산업 부문에서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 고용과, 아랍인에 대한 토지 판매 금지에 기반한 인종차별적 정책을 정당화했다. 이 정책은 농업 경제의 봉건적 구조를 약화시키는 한편, 일부 유대인 대기업들이 아랍인 노동자 고용을 금지함으로써 아랍인의 프롤레타리아화도 저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건제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발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강력한 아랍 정치 지도세력의 형성을 가로막았다.

 

니콜라가 보기에, 시온주의 식민화의 '왜곡'으로 인해, 명확히 구분된 계급사회로의 발전이 차단된 것은 팔레스타인 정치적 상부구조 구성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경제적 왜곡은 정치적 영역에도 반영되었다.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트, 농민은 정상적인 발전 경로를 밟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한 역량을 갖춘 정당과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아랍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지도력은, 시온주의자들에게 토지를 팔아넘기며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청산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 거래로 막대한 재정적 이익을 얻은 지주들의 손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니콜라가 보기에, 연속혁명의 논리를 적용할 때, 정착민 식민주의의 멍에 아래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구조의 취약성은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과 농민들이 민족해방 투쟁을 (아랍) 지역 차원으로 확대하여,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아래 아랍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을 필수적으로 만들었다. 만약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이 자국 자본가계급의 족쇄를, 또한 많은 경우 독재 정부의 족쇄를 벗어 던진다면, 아랍 노동자계급의 '국경 없는' 연대야 말로 팔레스타인 대의에 물질적,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의 분석은 급진적 민주주의 투쟁(즉, 팔레스타인 해방 문제)의 열기 속에서 만들어진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반제국주의 동맹이라는 전략적 전망, 명백히 국제주의적인 전망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그는 이러한 단결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연결시키며 그 전망을 확고히 견지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그의 구상은, 항상 제국주의에 묶인, 또한 제국주의에 따른 착취와 억압에 묶인 부르주아 민족국가의 한계를 넘어 민족해방 문제를 창의적으로 사고함으로써, 국가적 틀을 초월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구상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대치시켰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아부 고쉬(Abu Ghosh)에 모여 집회를 연 팔레스타인 노동자들

 

"5월 1일, 노동자들과 투사들에게 영광을!", 팔레스타인 노동총연맹, 1969년 레바논에서 발행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아랍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 동맹의 중요성에 대한 니콜라의 이해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그의 관점(연속혁명의 관점)을 팔레스타인 공산당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그 기원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좌파에 (당시에도 현재에도) 가해진 엄청난 민족주의적 압력에 굴복해왔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압력은 지역 내 반혁명 세력으로서 시온주의에 근거하며, 정도는 다르지만 아랍 민족주의나 근본주의 지도부로 구성된 반시온주의 저항세력으로부터도 기원한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해방의 전망도, 팔레스타인과 아랍 대중 해방의 전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니콜라에게 시온주의 국가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이었다. 시온주의 국가는 다른 정착민 식민주의 국가와 달리 고도로 발달된 내부 계급 층위를 특징으로 하며, 명확히 구분된 프롤레타리아트, 중산층, 부르주아지가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 이스라엘은 국경 내에 거주하며 무권리 상태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아랍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제국주의 국가의 무기로 무장한 군대와, 팔레스타인 주민을 폭력으로 위협하고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기 위해 조직된 무장 민간인에 의해 강압적으로 존속하고 있다.

 

니콜라는 군사화된 이스라엘 사회의 파시즘적 특징과 시온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이해했다. 하지만 달 피토가 설명하듯,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세력이다.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의 후견을 주변 아랍 세계와의 협력과 통합으로 대체한다면 얻을 것이 많다. 따라서 계급 분석은 아랍 팔레스타인 계급 구조의 단일한 내부 분화가 아니라, 중동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부문 간 이해관계의 연대에 주목해야 한다. 니콜라가 볼 때, 계급 분석은 잠재적으로 이스라엘을 내부로부터 파괴할 수 있는, 이스라엘 국가 내부의 긴장을 밝혀내야 했다.

 

그러나 니콜라는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에 대한 투쟁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프롤레타리아 간의 잠재적 동맹을 조건으로 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가 식민지 국가의 사회적 기반이며, 그 안에서 발전하는 모든 혁명적 정치는 팔레스타인 민족자결권을 위한 투쟁을, 또한 이스라엘 노동계급과 시온주의의 완전한 단절을 수반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더욱이, 니콜라에게 팔레스타인 해방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잠재적 동맹의 출현에 종속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은 먼저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기 위한 아랍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단결을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을 구축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아랍) 지역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억압 민족이다.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이자, 아랍 혁명에 대해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역할을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한 아랍 사회주의 혁명의 의미는 시온주의의 패배와 시온주의 국가의 전체 구조의 파괴, 중동에서 제국주의 지배와 영향력의 청산, 팔레스타인의 권리 회복을 의미한다.

 

1963년 니콜라는 1962년 이스라엘 공산당과 결별하며 등장한 반시온주의 단체인 마츠펜(Matzpen)에 합류했다. 니콜라는 이 단체의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강령적 접근에 연속적(permanent) 성격을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니콜라의 영향 아래, 이 젊은 조직은 시온주의 식민지화와 이스라엘 국가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책임에 대해 심도 있는 평가를 내렸다.

 

창립 초기에 마츠펜은 팔레스타인 연속혁명의 고유한 특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또한 강령에서는 식민국가의 구조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시온주의와 단절해야 할 필요성, 시온주의적 세뇌에 맞선 투쟁에 기초한 아랍과 유대인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을 강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적 주체로써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세력 간의 필수적인 지역적 동맹을 강조했다. 이는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 규정이 니콜라나 마츠펜의 정치적 관점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2)

2) 우리는 니콜라의 이론적 관점과 마츠펜의 혁명적 조직으로서의 궤적 모두에 대해, 몇몇 지점에서 견해차가 있다. 마츠펜의 경우, 두 국가 해법에 명확히 반대하지 않는 등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강령에 있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그들의 정치적 관점과 강령, 특히 니콜라의 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전략적 나침반으로서 연속혁명 이론의 재확인이다.

 

유엔이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을 선언한 지 반세기가 넘었다. 그 이후 아랍 세계에서 여러 시기에 계급투쟁의 영웅적 사례들이 발생했고, 항상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배경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배신한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새로운 근본주의 지도부의 등장을 통해, 니콜라의 사상과 연속혁명 이론은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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