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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배송 제한 논쟁 2 - 천현우 작가의 전제는 쿠팡과 중소기업 노동 현실 둘 다를 바꿀 수 없다.좀 뒷북이다 싶지만 얼마 전 온라인에서 논쟁이 된 천현우 작가(이하, 천현우)의 얘기를 소재로 새벽 배송에 제한 논쟁을 다시 짚어보자. [쇳밥일지(청년공 펜을 들다)]를 쓴 천현우 얘기는 이렇다. “쿠팡은 평균적 중소기업보다 좋은 일자리다…나도 새벽 배송을 없애고 싶지만, 전제가 있다. 노동자가 여타 중소기업에서 쿠팡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뱀처럼 교활한 조선일보는 “키보드 진보, 진짜 노동자에게 당했다” 운운하며 천현우의 글을 새벽 배송 제한 반대 여론 형성을 위해 활용했다. 천현우는 ‘쿠팡 배송 일자리가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상당수 중소기업 일자리가 열악하다’는 뜻에서 얘기했을 거로 짐작한다. 그런데 쿠팡 배송 분야도 일자리의 종류가 다양하다. 다단계 하청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퀵플렉스라 불리는 단기 알바도 있다. 중소기업 일자리와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정규직 배송 기사라 하더라도 산업재해, 노동강도를 생각하면 평균적 중소기업보다 좋은 일자리라고 쉬이 단정하기 어렵다. 물론 쿠팡보다 열악한 중소기업 일자리는 엄청 많다. 수많은 택배 노동자들은 다른 나은 선택지를 찾을 수 없어 택배에서 일한다. 내가 작년까지 택배하면서 만난 20~30대 젊은 택배 노동자들은 “어딜 가나 최저임금”이란 말로 택배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바닥을 향한 경쟁은 노동자들의 선택지를 계속 좁힌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핵심 지점은 “노동자가 여타 중소기업에서 쿠팡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새벽 배송 제한의 전제”라는 주장이다. 쿠팡이라는 거대 자본, 거대 플랫폼이 먼저 양질의 일자리가 될 수는 없는가? 중소기업 현실이 나아지지 않으면 새벽 배송 제한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인가? 그렇다면 중소기업 현실이 얼마나 나아져야 새벽 배송 제한도 가능하다 말할 수 있는가? 혁명적 변화 지난 글에서 얘기했듯, 최근 택배 노동자들에게 일어난 혁명적 변화는 2020년 이른바 ‘사회적 합의’에 따른 분류 인력 투입이었다. 택배 노동자들이 ‘까대기’라 부르는 분류 작업의 부담을 덜었기에 노동시간이 줄고 노동강도가 약화했다. 쿠팡을 제외한 CJ대한통운, 한진, 롯데 등에서 과로사가 감소한 이유는 바로 분류인력 투입 때문이었다. 택배 자본들은 이윤 감소를 이유로 반대했지만, 택배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과 과로사를 막으려는 노동자 민중의 지지로 분류인력 투입이 이뤄졌다. 분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지만, 분류 인력 투입으로 택배 기사들의 이직률은 대폭 감소했다. 택배 노동자의 일자리 감소도 당연히 없었다. 이 원리가 새벽 배송 제한에도 적용되어야 하고, 적용될 수 있다. 민주노총 택배노조는 ‘자정부터 오전 5시까지의 초심야시간대 배송을 제한하고 오전 5시에 출근하는 근무조가 새벽배송 물품을 배송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2020~2021년 코로나가 유행하여 물량이 산더미처럼 쌓일 때도 노동자들은 ‘코로나 관련 긴급 물품’이라 표시된 물품은 다 당일 배송했다. 이때는 물량이 너무 많아 생수나 휴지, 쌀 등까지 당일 배송하라는 압력은 지금처럼 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량이 너무 많아, 대부분의 택배 기사가 허덕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코로나 긴급 물품은 다 당일 배송했다. 명절 때처럼 각 플랫폼에 배송 스케줄을 미리 공지해, 소비자들의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만들고, 긴급 물품과 아닌 물품을 구분한다면, 노동자들이 물량과 배송 시간을 조절·통제할 수 있다면, 새벽에 소비자들이 꼭 받아야 하는 물품은 충분히 배송할 수 있다. 택배 노동자들은 택배 자본가들보다 몇십 배 더 소비자들의 편리를 생각하며, 고객에 대한 책임감으로 일한다. 이 고귀한 마음을 착취에 이용하는 게 바로 자본가들이다. 1인 배송을 2인 배송으로 바꾸는 것, 노동자들에게 물량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 그렇게 해 초심야시간 노동이 아니더라도 배송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 등, 노동자를 위한 대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오직 더 강한 착취 방안만 모색하는 게 바로 자본가들이다. 현장에서는 일자리 감소, 물량 감소 때문에 새벽 배송 제한을 꺼리는 노동자들도 많다. 그런데 일자리를 충분히 늘릴 수 있는데도 늘리지 않는 건 쿠팡을 비롯한 택배 자본가들이다. 건당 수수료 방식으로 임금을 지급하기에 노동자들이 물량에 목맬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것도 자본가들이다. 만약, 일자리가 지켜질 수 있다면, 건당 수수료가 아닌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임금체계를 가질 수 있다면, 새벽 배송을 제한하고서도 기존의 임금을 보전할 수 있다면, 생명을 위협하는 새벽 배송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노동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노동시간 단축, 대대적인 인력 투입 등 노동자 건강과 생명을 위해 조치를 하려는 의지다. 버티기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작년 가을 봉천동에서 밤늦게까지 배송할 때 같은 구역에서 자주 마주치는 쿠팡 기사에게 쿠팡의 배송 수수료 삭감 얘기를 들었다. 쿠팡이 120원을 삭감했다고 해서 “그런데도 한 마디 못 하냐?”라고 물었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불만 있으면 나가, 일할 사람 줄 서 있으니”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배송을 위해 골목을 뛰어 올라갔다. 제주 쿠팡 새벽배송 택배노동자 故 오승용씨가 지난 4월 대리점 관계자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 사진=유족 제공. ©제주의소리 천현우는 이렇게 일자리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얘기했을 수 있다. 그런데 천현우의 논리를 따라가면 “쿠팡보다 열악한 현장이 있다”는 결론만 나올 뿐, 쿠팡과 중소기업 노동 현실 둘 다를 낫게 할 방도는 보이지 않는다. 천현우의 전제(“중소기업에서 쿠팡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자본주의 구조를 유지하고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전제다. 재벌 대기업들은 하청·비정규직 구조를 활용해 천문학적 이윤을 긁어모아 왔다. 이것이 한국 대기업들이 국제 경쟁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재벌과의 수직계열화·종속성은 수많은 중소기업의 생존조건이었다. 납품단가 인하 등 대기업의 압력은 중소자본의 이윤 하락으로 이어졌다. 중소자본가들은 비정규직 확대, 착취강화로 이윤을 확보하려 했다. 한국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이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에게 더더욱 이 길을 강요한다. 쿠팡을 비롯한 플랫폼 산업의 고강도 착취는 마치 플랫폼 산업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현실이 바뀔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열에 아홉은 망하는 경쟁의 정글이 우거지고, 위장된 실업자들이나 마찬가지인 수많은 영세 자영업자가 몰락한 후, 무산자들은 흐르고 흐르다 플랫폼 산업으로 집적되었다. 플랫폼 산업의 성장은 이런 불행한 상황을 배경으로 이뤄졌다. 이런 불행한 상황을 이용해 플랫폼 자본들은 이 산업의 임금을 최저 수준으로 묶어둘 수 있었다. 일반적인 산업의 평균임금을 주지 않고, 정규직으로 고용해서 노동기본권을 보장하지도 않으면서도, 택배, 라이더, 대리운전, 가사서비스, 간병, 학습지 등 플랫폼 산업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자본이 플랫폼 산업에 뛰어들었고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출처: 슬로우뉴스 택배 산업에서도 자본가들의 경쟁 격화는 노동자들의 경쟁 격화로 뒤바뀌어 더 치열해지고 있다. 택배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구역에 따라 매우 다르다. 사실상 터미널이 아니라 구역이 가장 중요한 ‘일터’다. 예를 들어 한 시간에 50~60개를 배송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와 한 시간에 30개 배송하기도 힘든 빌라 밀집 지역,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없는 지역은 노동조건이 확연히 다르다. 평지인가, 교통 혼잡지역인가도 중요하다. 이 때문에, 좋은 구역을 둘러싼 경쟁이 존재한다. 아파트와 지번을 섞어 구역을 배정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역과 물량에 대한 결정권은 자본가들이 틀어쥐고 있고, 노동자 사이의 경쟁도 영향을 미치기에 공평한 배정은 쉽지 않다. 열악한 구역에서 계속 일하는 노동자들은 노동강도를 견디지 못해 그만두고, 수시로 담당자가 바뀐다. 여기에 쿠팡이 불붙인 당일 배송 경쟁, 배송 속도 경쟁은 노동자들을 더 극한 경쟁으로 몰아붙이고 있고, 그만큼 노동자들의 단결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버티기만 해야 하는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심야 배송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가? 플랫폼 산업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현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가? 단연코 아니며, 노동자들은 저항의 길을 찾아왔다. 노란봉투법이 제정된 이유도 학습지, 택배, 라이더 등 수많은 특수고용노동자의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노동자들이 다른 기업, 다른 산업의 현실을 이유로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요구를 미뤘다면 플랫폼 산업의 저임금, 과로사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체 노동자의 노동 조건 상향은 치열한 계급투쟁 없이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 노동자가 여타 중소기업에서 쿠팡보다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새벽 배송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면, 새벽 배송은 평생 제한될 수 없다. 그리고 쿠팡의 노동자들이 싸우지 않고 기다린다고, 누군가 중소기업 노동자의 현실을 개선해주지 않는다. 중소기업 노동자의 현실을 개선하는 건 쿠팡 택배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가 계급적 요구를 내걸고 함께 총자본에 맞서 투쟁할 때에만 가능하다. 중소기업과 쿠팡 노동자 모두의 현실을 개선하는 투쟁 먼저, 새벽 배송을 전기, 수도, 통신, 교통, 응급의료 등과 똑같이 볼 수 없다. 전기, 수도, 통신, 교통, 응급의료 등 분야에서 지금도 수많은 야간노동이 존재한다. 사회를 위해 필요하고 긴급한 야간노동을 없앨 순 없다. 대신 이러한 필수 야간노동의 표준노동시간은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4시간 이하로 단축되어야 하며, 인력이 대폭 충원되어야 한다. 그런데 심야 배송까지 필수노동이라 볼 수는 없다.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기후정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의 모든 시간이 과잉생산과 이윤 축적, 속도 경쟁을 위해 조직되는 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전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향상을 위해서라도 심야 배송은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새벽배송 논쟁은 다른 산업의 야간노동 단축과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 보호라는 논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국민의힘 한동훈은 새벽 배송 제한이 “목숨을 각오하고서라도 새벽 배송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라고 주장한다. 극도로 위험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노동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 자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실업자, 가난한 노동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동훈의 말대로 새벽 배송을 유지하면 노동자들의 실업과 가난이 사라지는가? 결코, 아니다. 노동생산성의 발전, 사회적 수요의 변동, 경기 상승과 하강으로 취업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건 자본주의 역사 내내 끊이지 않았던 일이다. 개별 자본, 개별 산업 부문 간의 무정부적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노동인구를 노동생산성의 발전과 사회적 필요에 따라 합리적으로 재배치할 능력이 없다. 실업은 한 줌 자본가들이 사회적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이윤 획득을 위해 무정부적 경쟁을 일삼는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새벽 배송 제한이 기존 노동자의 일자리 박탈로 이어지지 않고 일자리 유지·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말이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0시 이전, 오전 5시 이후로 기존인력을 재배치(충원)하면 된다. 노동자 동의 아래 구역과 업무를 조정하는 방식을 쓸 수도 있다. 장시간 노동의 대명사인 택배 산업은 노동시간 단축이 꼭 필요하다.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면 자본은 기존 배송량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해야만 한다. 택배만이 아니라 화물, 물류 산업에서도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요구로 뭉쳐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 요구가 희생해야 하는 건 단 하나, 자본가들의 무제한적인 이윤축적의 욕망이다. 이 요구는 취업 노동자들과 실업 노동자들, 예비 노동자들을 아우르는 노동자계급의 단결 요구라는 결정적 의미가 있다. 물론 이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거대한 투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전망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방어하고 향상할 다른 전망은 없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윤을 침해하는 과감한 투쟁 없이는 질 좋은 일자리와 노동조건 개선은 불가능하다. 분류 인력 투입을 택배 자본이 기를 쓰고 막은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이윤이 침해당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쿠팡을 비롯한 자본가들은 소비자들의 편리를 앞세우고 부추기며, 더 많은 이윤을 거둬들이기 위해 당일 배송, 주 7일 배송, 새벽 배송을 마구잡이로 밀어붙이고 있다. 노동자와 노동자 간의 갈등,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의 갈등을 유도하면서 말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로 죽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새벽 배송 제한 논의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다른 요구도 중요하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새벽 배송 제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택배노조는 △과도한 속도경쟁 규제 △노동강도 완화 △노동시간 단축 △택배기사 휴식권·건강권 보장 △적정 수입 보전을 위해, 쿠팡에 △일요일 및 법정공휴일 의무휴업 실시 △휴일배송과 새벽배송은 꼭 필요한 경우로 한정하고 이에 대한 추가 수수료 보장 △분류작업(통소분)은 택배사가 책임지고 담당 △프레시백 회수·처리 별도 인력 운영 △다회전 배송 폐지 △클렌징(임의 계약 해지)제도 폐지 △배송마감시간 완화 등 배송마감시간(PDD) 제도 개선 △주간 근무시간을 주간 60시간, 야간 46시간으로 제한 △주 5일근무 제도화 △부피와 무게에 따른 표준 수수료 도입 △최저수수료제 도입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 모든 요구는 꼭 필요하고 실현가능하다. 자본의 이윤 논리에 갇히지 않고, 단결과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붓자. -
[성명] 학생인권조례 날치기 폐지한 서울시의회, 농성장 침탈한 중구청과 경찰을 규탄한다!지난 11월 17일,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가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기습 상정하여 가결시켰다. 서울시의회는 국민의힘 의원들 주도로 이미 작년 4월에 의원발의안 형태로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통과시킨바 있다. 대법원이 작년 7월에 이에 대한 집행정지를 인용하며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제동을 걸자, 주민조례발의안 형태로 다시 동일한 내용의 폐지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에 12월 1일 아침, ‘학생인권후퇴저지 긴급행동’은 서울시의회 앞에 농성장을 설치했다. 그러나 중구청과 경찰은 농성장이 설치되고 1시간도 되지 않아 농성장을 칼과 니퍼 등을 이용해 폭력적으로 철거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철거되던 학생인권후퇴저지 긴급행동 천막 근처에는 다른 사안으로 농성중이던 천막이 버젓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폭력적 농성장 강제철거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강행하는 서울시의회에 반대하는 저항에 대한 명백한 정치적 탄압이다. 2022년 국민의힘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뒤, 시의회의 극우세력들은 거리의 극우와 결탁해 학생인권에 대한 공격을 이어왔다. 잇다른 학생인권조례 폐지 강행시도는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서울만이 아니다. 2024년 4월 충청남도 의회는 충남학생인권조례를 폐지안을 가결시켰고, 충남교육청의 반발로 한달 뒤 대법원에 의해 집행정지되어 현재까지 법원에 계류되어 있다. 저들의 사고방식은 충남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요구한 충남도의회가 법원에 요구한 내용에 분명히 드러난다. “인권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성적자유·소아성애·조기성애화를 조장하고 소수자 보호를 빙자해 사회주의 계급투쟁적 인권관을 주입해 진영 갈등을 부추기므로 도 교육청의 청구를 기각해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해야 한다.” 즉, 학생인권조례 폐지 시도는 학생의 인권을 탄압하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구조를 유지하고, 착취에 저항하지 않는 고분고분한 노동자를 재생산하기 위한 극우적 공격이다. 국민의힘 의원들과 연합한 거리의 극우들은 소수자 청소년들을 향한 혐오발언을 쏟아낸다. 학생인권조례가 ‘동성애를 조장하고 이슬람을 믿게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어떤 청소년도, 성소수자라는 이유로도, 특정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도 차별받아선 안된다. 저들의 말이 분명하게 학생인권조례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영원히 나중으로 밀리고, 성소수자들이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이 국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길거리를 모여서 걷는다고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정작 이주노동자들은 폭력범죄나 마찬가지인 국가의 강제단속에 의해 죽어가는 이 국가에서, 학생인권조례는 노동자의 국제적, 페미니즘적 단결을 위해 반드시 쟁취해야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구청과 경찰의 농성장 강제철거 규탄한다!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서울시의회의 학생인권조례 폐지시도 규탄한다! 학생인권조례 존치하라! 어떤 청소년도 차별받아선 안된다! 차별금지법 즉각 제정하라!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체류권과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 -
[정세집담회] 트럼프 경제약탈과 노동자계급의 대응방향※위 발표는 2025년 10월 31일(금) 월례 정세집담회에서 진행되었다. -
[주간 여성뉴스 브리핑] 국제 트랜스젠더추모의날, ‘트랜스젠더 노동자의 권리는 인권이다’1. 국제 트랜스젠더추모의날, ‘트랜스젠더 노동자의 권리는 인권이다’ 11월 20일은 국제 트랜스젠더추모의날을 맞아 세계 곳곳에서 집회와 행사가 벌어졌다. 참가자들은 차별과 혐오로 희생된 트랜스젠더를 추모하며 트랜스젠더의 인권과 평등을 요구했다. 국제노동조합협의회(CGU, Council of Global Unions)는 이날 성명을 통해 ‘트랜스젠더 노동자의 권리는 인권’임을 밝히고 트랜스젠더 노동자를 둘러싼 폭력과 차별이 여전히 심각한 수준임을 경고했다. 트랜스젠더 혐오살인 감시 프로젝트(TMM)에 따르면, 2024년 10월부터 2025년 9월까지 최소 281명의 트랜스젠더와 다양한 성별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살해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피해자의 90%가 트랜스여성이었으며,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 사건이 집중됐다. 성노동자와 인권 활동가도 표적이 됐다. 국제노동조합협의회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공격은 곧 노동자와 시민권 전반에 대한 공격”이라며 극우 이데올로기 확산 속에서 인권 후퇴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모든 노동조합이 직장 내 트랜스젠더 혐오를 막고 포용적 환경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노조 운동은 트랜스포비아(트랜스 혐오)가 단체교섭권, 결사의 자유, 노동안전과 건강권 등에 대한 공격으로도 이어진다는 사실을 더 많이 알리고 투쟁을 조직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노동조합협의회 성소수자위원회 의장 미셸 케슬러는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모든 이의 삶이 소중히 여겨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자”고 강조했다. <참조 기사> https://www.ei-ie.org/en/item/31706:transgender-day-of-remembrance-defending-trans-people-in-the-workplace 2. 작업장 위험성평가에도 젠더관점이 필요하다 산업안전보건법 제36조는 사업장의 유해ㆍ위험요인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평가하여 관리ㆍ개선하는 등 노동자의 참여를 전제로 한 사업주의 안전보건 관리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작업장 위험·유해 요인에서의 성별 차이가 면밀히 고려되지 않고 있어 여성노동자가 마주하는 위험이 쉽게 간과되거나 과소평가되는 경우가 현실에서는 허다하다. 산업안전보건의 기준은 오랫동안 제조업 남성 노동자의 몸을 ‘표준’으로 전제해 왔다. 오랜 시간 일해도 무리가 없고, 기계를 다룰 때 팔 길이·악력·어깨 너비 같은 조건이 규격과 잘 맞고, 보호복이나 안전화도 표준 크기에 자연스레 맞아 떨어지는 몸이다. 그 결과 생식독성 물질처럼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노출, 지방조직에 축적되는 화학물질, 호르몬 교란 물질, 성희롱·성폭력 등 젠더 기반 위험은 오랫동안 ‘핵심 위험’이 아니라 ‘부수적 위험’으로 취급돼 왔다. 이 구조에서는 여성 노동자의 위험은 개인적 불편, 감정적 스트레스 정도로 축소된다. 근골격계 부담, 성희롱과 성폭력, 화학물질 노출, 감정노동으로 인한 정신건강 악화 같은 실질적 위험은 제대로 기록되기 어렵고, 사업장의 개선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나기 십상이다. 남성의 신체와 정신을 표준으로 여기는 성차별적 구조의 문제를 인식하는 한편, 젠더관점의 위험성평가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다. <참조 기사>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111716215662103?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 3. “침묵을 끊은 7년 …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길 선택했다” 대한항공 노동자 장유정(가명)씨는 2017년 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해 회사에 신고했지만, 회사는 조사나 징계 없이 가해자를 단순 사직 처리해 책임을 회피했다. 그는 이후 조직 내 고립과 2차 가해를 견디며 2020년 대한항공을 상대로 성범죄 방지 의무와 관리·감독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회사가 성범죄 예방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배상 판결을 내렸고, 2심에서는 관리·감독 책임까지 인정해 배상액을 늘렸다. 회사의 상고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이를 확정해 ‘가해자 무징계 사직 관행’과 ‘2차 가해 방관’이 사용자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투쟁의 공로로 그는 제12회 김경숙상을 수상했다. 장씨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가 개인 문제로 축소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피해자가 당당히 일터로 복귀할 수 있어야 국가와 조직의 책무가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산업재해 인정을 받고 요양 후 복귀한 그는 피해자 보호조치 마련까지 요구하며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있다. 또한 그의 투쟁을 뒷받침한 민간고용평등상담실의 역할도 부각됐으며, 예산 삭감으로 약화된 고평실의 복원이 필요하다는 노동현장의 지적이 제기됐다. <참조 기사>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230199.html 4. 가나 대통령, 반(反)LGBTQ+ 법안 서명 의지 재확인… 지지자·동맹까지 처벌하는 강경 조치 논란 가나의 대통령 존 드라마니 마하마가 의회에 계류 중인 일명 반-LGBTQ+ 법안(Human Sexual Rights and Family Values Bill)이 다시 상정돼 통과될 경우, 지체 없이 서명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해당 법안은 성소수자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의 권리 신장을 지지하거나 관련 활동을 도운 ‘동맹(ally)’까지 형사 처벌 대상에 포함하여 국제사회에서 강한 우려를 낳고 있다. 문제의 법안은 동성 간의 관계를 범죄화하며, 젠더 확정 치료나 트랜스젠더 의료적 지원을 제공·촉진하는 활동도 금지하고 있다. 위반 시 동성 관계나 성소수자 관련 활동에 최대 3년 징역,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옹호하거나 홍보하는 행위”에 대해선 최대 10년형을 부과하는 강력한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 또한 기존의 LGBTQ 단체 폐쇄와 새로운 단체 설립 금지 조항도 포함돼, 사실상 시민사회 영역에서 성소수자 관련 활동을 전면 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마하마 대통령은 보수적 종교계와 전통적 가족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지지 기반을 의식하며, “결혼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결합”이라는 기존 입장을 재강조했다. 그는 성별 역시 “태어날 때 결정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밝히며 법안 취지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이는 앞선 정부에서 해당 법안을 거부한 전임 대통령 아쿠포-아도와는 다른 태도다. 이 같은 움직임은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HRW) 등 인권단체는 이 법안이 표현의 자유·결사의 자유·프라이버시 권리 등 국제 인권 기준을 명백히 위반한다고 비판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우려가 제기되는데, 일부 전문가들은 법안 통과 시 세계은행·IMF 등 다자개발은행과의 협력 및 금융 지원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법안의 향방이 향후 가나의 국제적 위상과 인권 정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참조 기사> https://www.them.us/story/ghana-president-sign-anti-lgbtq-bill-allies-family-values-bill?utm_source=chatgpt.com 5. 기혼여성 고용률 67% 최고 … “외벌이로는 살기 힘들어” 국가데이터처가 18세 미만 자녀를 둔 기혼여성 고용률이 64.3%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6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최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고 고용률 상승을 여성이 주도하는 흐름, 정부의 육아·출산 정책이 영향을 미쳤다고 정부 관계자는 설명했다. 다만 자녀가 많을수록, 어릴수록 경력 단절 여성 비율은 높았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한 언론은 고물가가 여성 취업의 주된 동력이라고 진단했다. “고물가와 자녀 교육비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더는 한 사람의 소득으로는 살림이 어렵다고 판단해서”라는 것이다. 해당 매체는 기혼 여성이 주로 진출한 업종에 대해서도 “보건업 및 사회복지서비스업(47만5,000명·17.8%), 교육서비스업(41만7,000명·15.6%), 도매 및 소매업(33만4,000명12.5%) 순”이라며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간병인, 요양보호사 등에 주로 취업하는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참조 기사>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0248 -
[기고][서평] 파치: 쓰다 버려지는 삶을 거부한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쓰다『파치』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현 아사히글라스지회)의 9년 투쟁기를 싸람(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소희가 엮은 책이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던 때부터 공장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수천수만 개의 사건 속에서 이십여 개의 장면을 골라내어 보여준다. 얼마나 큰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노동조합을 만들며 느꼈던 해방감이, 투쟁의 통쾌함이, 자본의 더러운 수작을 마주하며 느낀 분노가, 순수한 연대에 대한 의심과 의심에 대한 미안함, 다른 사업장의 동지들과 함께하며 느낀 기쁨과 슬픔,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파라락 눈앞을 스쳐가는 것은 본래 영상을 통한 기록을 의도했었기 때문일지도. 유난히 생생한 글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의외로 웃음이 나는 구간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유치장에서 칫솔 두 개를 받아낸 오수일의 일화 같은 거. ‘인정머리 없는 서울 경찰’이라는 묘사도 왠지 웃겨서 줄을 그어놨다. 정말 백번 공감한다. 지방 경찰이라고 상냥한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책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아사히비정규직지회 22명의 이름과 간단한 프로필이 쭉 적혀있는 페이지였다. 그 장의 끄트머리를 접어두고 이름 하나가 나올 때마다 프로필 페이지로 돌아가서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고 찾아보며 읽었다. 그 목록에 없는 이름이 나올 때면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그 페이지를 봤을 때 나는 이유도 없이 좀 눈물이 났다. 그 낯선 이름들의 목록이 뭐라고 그랬나 싶기도 한데, 아무튼 눈물이 났다. 사람의 이야기라는 건,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를 결심하는 이야기라는 건 왜 이렇게 늘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누구 하나 지우지 않고 꼭꼭 이름을 적어넣은 저자의 마음을 생각했다. 수없이 내밀어졌을 질문을 생각하고, 서투른 인터뷰를 생각하고, 오래 고민하고 깊이 바라보며 함께했을 시간을 생각한다. 나는 그런 걸 다정함이라고 여긴다. 나는 저들을 모르고 그들도 나를 모르지만 이름의 목록을 안고 책을 읽다 보면 그 낯선 사람들이 꼭 잘 아는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느껴진다. 프로필들에 이제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꽃길만 걷자, 하는 말들이 몇 차례 눈에 밟혔다. 3,000일을 넘긴 긴긴 싸움이 남긴 상처들이 정말 다 아물 수 있는 걸까, 괜한 걱정을 하게 되고야 마는 것은 역시 내가 겁 많은 종자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괜찮았으면 좋겠다. 투쟁은 싸움이고 상처를 남기지만 그만큼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그리고 22명이 함께니까. 나는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투쟁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그들의 투쟁이 아닌 다른 무언가와 함께 기억하려 애쓴다는 게 그것이다. 취미라든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농담 취향이라든가 습관이나 한때의 장래희망이나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이나…. 우습지만, 나에게는 꽤 중요한 일이다. 그 사람을 무심코 타자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뭐 숙명적인 투사, 이상적인 혁명가, 그런 거 말고 인간으로서의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에 대해 내가 가진 제일 인상적인 기억이 뭐였냐면(나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시절의 그를 모른다), 옵티칼지회에서 몇몇 동지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떠들다가 (거통고지회에서) 투쟁만 하면 비가 온다는 얘기를 하니 “왜 그런지 알아요? ‘비’정규직이라서”라고 했던 일이다. “정규직이 되니 비가 안 오던가요” 하고 물으니 “정규직은 밖에서 집회할 일이 없다”고 했던 것도. 그런데 이제는 또 회사에 휴직을 신청하고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에서 상근을 시작한다고 한다. 복직도 하고 정규직도 됐으니 이제 힘든 일 그만하고 꽃길만 걷자, 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이렇게 뚜벅뚜벅 꽃길을 벗어나 비 내리는 길거리에 서는 사람이라니. (사진=황상윤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 ‘박근혜가 탄핵되자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은 멈췄다.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리라고 기대했지만 해고자는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권리를 잃은 상태였다. 대선을 치러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여기서 박근혜를 윤석열로 바꾸기만 하면, 2017년의 문장은 고스란히 2025년으로 옮겨온다. 지난 겨울, 탄핵 광장을 한창 지나오던 와중에, 세종호텔 고진수 동지는 또다시 고공에 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거기에 있다. 삼백일이 다 되어간다. 탄핵, 촛불, 광장, 민주당의 집권과 변한 게 없는 노동자의 삶, 고공농성까지, 거의 십 년이 지났는데 어쩜 이렇게 상황이 똑같단 말인가.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화도 났지만, 그에 앞서 몹시 부끄러웠다. 사실 2016년에 나 역시 광장에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가 탄핵된 뒤 일상으로 돌아갔다. 촛불광장의 약속이 얼마나 지켜졌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촛불에 ‘탄핵’ 말고 다른 의제가 엮여있으리란 생각조차 못 했다. 나는 내가 정의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던 거다. 팔 년여의 시간을 건너 나는 또다시 광장에 나왔다. 이번에는 노동자들의 곁에 섰다(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은근슬쩍 낑겨’있었다). 뭐랄까, 신기했다. 신기한 사람들이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생을 갈아 넣어 세상을 전진시키는 사람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 아사히글라스는 오랫동안 불법파견 범죄를 저질러왔다.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고용하고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를 대했다. 참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내니 문자 한 통으로 178명을 해고하고, 수십 건의 고소고발로 사람을 괴롭히고, 매달 수천만 원을 낼지언정 길바닥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내줄 돈은 없다고 했다. 끝의 끝까지 책임을 외면했다. 이것은 물론 불법이고, 범죄지만, 그 이전에, 악(惡)이다. 나는 우리가 법이 아니라 윤리와 정의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서 ‘제조업 현장에서 합법 파견이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불법과 합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게 ‘합법적인’ 도급이든 간에 ‘불법적인’ 파견이든 간에. 하청이든 협력사든 계약직이든 촉탁직이든 물량팀이든 특수고용이든 프리랜서든 아르바이트든 일용직이든 기간제든 간접고용이든 단기고용이든 플랫폼이든 간에. 어떠한 단어로 표현하든 그것의 본질이 ‘비정규직’이며 ‘불안정노동’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그럼 그건 사회의 악이다. 비윤리적인 고용방식이다. 설령 법이 유연한 고용이니 경제성장이니 노사협력이니 뭐니 하는 입에 발린 말을 내세워 그것을 ‘합법’으로 포장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노동을 존엄하게 여기지 않고, 노동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필요할 때는 편하게 싼값에 쓰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파치처럼 내다 버리겠다는 자본의 선언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난 일 년간 나는 법과 제도란 게 때로 대단히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그건 지금 권력을 가진 인간들이 지금의 사회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투쟁은 그 테두리를 넘고 깨고 넓혀가는 일이어야지, 이미 그어진 선 안에 주저앉아있어 봐야 눈 가리고 아웅이지 않나. 근대를 지나며 우리는 인권을 천부인권이라며, ‘하늘이 부여해준’ 것이라 모든 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글쎄. 같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2급 인간’들에게도 인권은 주어지는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이 달라진다’는 건 사회를 작동시키는 법과 제도, 구조의 변화 그 자체보다도 그 세계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노조는 현장을 바꾸고 동시에 사람을 바꾼다. 자본주의의 톱니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인간성을 지키고, 우리가 공장의 부품이 아닌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배우게 한다. 아사히지회의 투쟁은 사람을 바꾸는 투쟁이었다. 더는 착취당하지 않겠다고, 이번에야말로 후회 없이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더 나은 일터를 찾아 떠나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좋은 일터로 만들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투쟁. 몇 번을 지고 몇 번을 이기든, 몇 년을 싸우든 22명이 함께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조직을 만드는 투쟁. 자본과 권력을 상대로 그토록 치열하게 악착같이 싸워내는 와중에도 대화와 토론의 의의를 잊지 않는 투쟁. ‘노동조합 만들어서 인간답게 살아 보자’에서 ‘민주노조 사수하고 현장으로 돌아가자’까지, 패배하더라도 승리하는 싸움이 있다는 믿음으로 수없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달려가는 투쟁. 깨진 유리 조각은 보다 더 날카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투쟁. 지금의 우리가 지켜나가야 하는 민주노조 정신이란 이런 것이라고 알려주는, 현장의 투쟁. (사진=아사히글라스지회) 그래서 이 책을 누가 읽으면 좋겠는가. 일단 일하다가 열 받아서 사장 얼굴에 물건을 집어 던지고 싶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읽으면 대리만족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광장에 발을 디뎠다가 도로 멀어졌던 사람에게도 인상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무엇보다 사람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이 읽으면 더 좋겠고, 그렇지 않았어도 읽고 나서 그럴 용기를 얻는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겠고.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두 번 읽었다. 처음은 후루룩 읽은 뒤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왕창 써놓았고, 다시 읽으면서 생각과 글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읽으면서는 마스킹테이프로 인상적인 문장들에 표시를 남겼다. 그런데 15번째 테이프를 붙이며 문득, 아, 서평 진짜 어떻게 쓰면 좋지, 싶어졌다. 내가 뭐라고 이 책을, 이 이야기를 감히 평(評)한단 말인가. 노동운동이 뭔지 민주노조가 뭔지 하다못해 투쟁이 뭔지도 제대로 말할 자신 없는 새파란 초짜 주제에. 덥석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아주아주 약간 후회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솔직히 다시 돌아간대도 제안을 거절하진 못할 것 같아서 약간만 후회하기로 했다). 재독을 마치고 세어보니 표시는 총 36개였다. 초독 때 조합원들의 이름 목록을 접어놓았던 것을 포함하면 37개. 그 문장들 하나하나가 역사였다. 가타부타 말 붙이는 대신, 꽃이라도 몇 송이 따다가 그들의 길 앞에 뿌려주는 심정으로, 다만 이 멋진 동지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
트랜스젠더의 권리는 노동자의 권리다!“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트랜스여성은 끊임없이 여성의 범주에서 배제되고, 탈락되며,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1)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트랜스젠더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숨 쉬고, 밥 먹고, 잠자고, 노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의 일터에도 트랜스여성이, 트랜스남성이, 그리고 논바이너리인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노동자는 하나다’,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2) 2024년 3월 8일, 한국에서 첫 여성파업을 벌인 집회장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노동자이자 활동가이신 이연수 동지가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2025년 3월 8일 여성파업 대회장에선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고 이연수동지와 우리를 죽음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2024년 3.8 여성파업 집회 당시 고 이연수 동지 발언 장면 | 스튜디오 알 11월 20일, 트랜스젠더추모의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TDoR)은 매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트랜스젠더들을 추모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평등을 위한 연대를 다지는 날이다. 트랜스젠더 혐오 살인사건을 계기로 1998년 제정되었다. 올해 한국에서는 11월 22일, <동네북, 두드릴수록 크게 울리는>이라는 제목으로 이태원광장에서 성소수자·여성·인권 등 58개 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집회와 행진을 개최한다. 성별이분법과 정상가족의 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 중 한 집단이다. 과거 고대노예제 사회는 트랜스젠더를 제3의 성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21세기 지금의 사회는 인구 20명 중 1명꼴인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 사람들3)이 거리낌 없는 동료이자 이웃으로 평등하게 살아가기는커녕 혐오의 과녁이 되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의 뼈저린 외침을 아는 노동자라면, 이 사회가 한 사람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차별하고 비난하고 혐오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 일인지 어렴풋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쇠퇴기 자본주의는 최근 ‘트럼프’로 대표되는 극우 정치를 강화하며 사회적 소수자에게 불평등한 체제에 대한 분노를 돌리게 한다. 특히 이주민과 트랜스젠더 혐오를 핵심고리로 삼아 노동자계급을 마구 갈라놓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숨이 멎게 만드는 이 사회의 실체와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제를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다. 편의점 알바도 화장실 사용도 한국에서는 2001년 연예인이던 트랜스젠더 여성 하리수씨가 알려지고 나서야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편견이 조금씩 개선되었다.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 뒤에야 허들이 높음에도 트랜스젠더들의 성별 정정이 인정되었다. 하지만 2020년 자신의 성별대로 군 복무를 하려던 변희수 하사의 강제 전역과 죽음, 같은 해 숙명여대 입학이 결정된 트랜스젠더 여성이 교내외의 반발로 입학을 포기한 사태는 트랜스젠더가 처한 차별과 억압의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었다. 한국은 트랜스젠더를 포함해 성소수자 인권 지수가 국제적으로 매우 낮다. 한 연구회4)가 발표한 ‘한국 LGBTI(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인터섹스) 인권 현황 2020·2021’을 보면,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지수(무지개지수)는 10.56%로 전체 유럽 국가5)와 비교해 꼴찌며, 인권 후진국으로 불리는 벨라루스의 12.06%보다 낮았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젠더차별을 노동자계급의 분열과 착취의 주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아울러 노동자민중의 수많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성소수자를 더 차별하는 현실에 노동자운동이 더 나서지 못한 결과 우리는 28년째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 세계 1위, 초저출산 세계 1위라는 끔찍한 현실을 감내하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성소수자의 현실은 오죽할까. 한 조사에서 한국인의 70%가 “트렌스젠더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많은 차별을 받는다”고 응답했다.6) 대부분 노동자인 트랜스젠더는 채용의 문턱에서부터 외모와 주민등록상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기 일쑤다. 밖에서는 화장실도 맘 편히 사용하지 못한다. 원가족 내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죽을 때까지 차별과 혐오, 실업과 빈곤의 굴레를 강요받는다. 어떤 연구에서 트랜스젠더의 소득을 평균의 1/4 수준으로 보고하고 있다. “보통 편의점이라든지 단기 알바가 좀 심하거든요. 이제 면접 다 보고 등본 가져다주면 어, 여자가 아니었네? 하기도 하고. 등본 보고 이거 네 것 맞냐고 하기도 하고. 그래서 떨어진 게 꽤 있어요.”7) “내가 트랜지션(성별 정정)하기까진 내가 불편하더라도 남자 화장실을 가야 하는 거고 그런 거죠. 나는 남자 화장실 가도 이상하고, 여자 화장실 가도 이상한 거야. 붙임머리 할 때는 여자 화장실을 썼는데. 웬만해선 화장실 안 가려고 참아요. 회사에서도 동일해요. 그래서 MTF(트랜스젠더 여성) 트랜스젠더들이 방광염이 많이 걸려요.”8) 돈을 모아서 집을 계약하려 해도 문제가 생겼다. 계약서에 적은 주민등록번호상 성별과 외양의 성별이 달라 트랜스젠더인 것을 알아차린 집주인이 계약을 파기한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성별정정 이전에 월세를 계약했던 트랜스젠더 남성 ㄷ씨는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도 ‘신분증 내’라고 먼저 하니 집 구하는 것도 무서웠다”고 말했다.9) 트랜스젠더는 병원 이용을 꺼린다. 겉보기 성별과 주민등록상의 성별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칠 때마다 원치 않는 아웃팅을 당하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에 편견을 가진 의료진을 만나면 진료를 거부당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 성정체성과 맞지 않는 입원실이나 탈의실을 이용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알음알음 젠더 친화적이라고 알려진 병원을 찾아 먼 거리를 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몸의 불편함보다 시선의 따가움이 더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10) “이 가부장제 사회는, 아직도 일터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낡은 기준을 들이대며 트랜스젠더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박탈시키고 있습니다”11) 국가인권위원회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2021년) 결과를 보면 65.3%가 최근 1년간 차별을 경험했다. 57.1% 구직 포기 경험을, 40.9% 공중화장실 이용 어려움, 57.1% 우울증, 24.4% 공황장애를 호소했다. 이러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억압은 트랜스젠더 인구의 건강도 심각하게 위협한다. 영국 글래스고대학 연구팀이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논바이너리를 포함한 트랜스젠더 인구의 50%가 평생 한 번 이상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는 지정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같은 시스젠더에 비해 3.48%나 높은 수치다. 29%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비자살적 자해 경험률은 47%에 달했다. 호주의 한 연구에서 트랜스젠더의 평생 우울증 유병률은 57.2%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윤석열’과 ‘계엄’으로 대표된 극우 정치의 발화는 내란 1년을 경과하며 민주노조 혐오, 이주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으로 세력을 결집하고 있다. 이들은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정과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거나 ‘하나님이 창조한 남성과 여성의 질서를 부정하는 사탄’이라고 비난한다. 남성이 성별을 바꿨다고 선언한 뒤 곧바로 여자화장실에 간다거나,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른 공공시설을 사용하면 성범죄가 늘어나서 여성 인권이 위협받는다며 혐오를 선동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올해 8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추천한 이상현 숭실대 국제법무학과 교수는 트랜스젠더를 ‘정신질환’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혐오 정치는 구조적 젠더차별의 주범을 은닉한다. 민주당 세력은 ‘중도 보수 자본가정당’으로서 독점기업과 자본의 이익만 수호하며 비정규직 문제 해결, 일자리 창출, 모두의 노동권 보장, 차별금지법 제정, 의료와 돌봄의 공공성 등을 외면하고 있다. ‘민생·경제가 우선, 차별 금지는 나중’이라고 한다. 터무니없다. 어떠한 노동자든 당신이 노동자로 태어났으니 차별받아야 마땅하다는 게 어떻게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문제인가. 착취와 억압의 주범인 자본가계급이 트랜스젠더를 포함해 사회적 소수자 뒤에 숨어 그들을 탓하고 혐오하는 온갖 주장은 ‘사탄’이니 ‘나중’이니 표현은 달라도 같은 말이다. ‘노동자민중은 자본의 이윤과 권력을 위해 더 많이 착취당해라’, ‘우리가 차별하는 대로 잠자코 차별당해라’, ‘자본이 갈라치는 대로 쪼개져 단결 투쟁은 포기하라’는! 계급투쟁의 항복 요구와 같다. 독버섯처럼 퍼지는 글로벌 혐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필두로 자본가계급의 극우 정치는 세계 곳곳에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빼앗는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부터 ‘여성 보호’를 내세워 성별을 공식적으로 남성, 여성만 인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를 시작으로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배제하며 공격하고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이제 여성 화장실 사용도, 여권의 여성 성별 표기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권은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의료서비스 접근, 군 복무, 화장실 이용, 공공서비스 접근, 스포츠 출전, 성별 표기 등의 다방면에서 권리를 빼앗고 있다. 2025년 9월 19일을 기준으로 총 616개의 반성소수자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법안의 내용은 대부분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으로 사실상 반트랜스젠더법이다. 트럼프가 지난 2월 5일 ‘트랜스 여성은 여성 스포츠 출전 금지’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7월, 미국올림픽위원회(USOPC)는 그에 따른 조치로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 종목 출전을 전면 금지했다. 정부는 연방지원금 중단을 내걸고 모든 스포츠 종목 연맹에 트랜스 배제 규정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은 11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여성 경기의 공정성을 이유로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의 출전을 전면 금지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영국 대법원은 지난 4월 16일 평등법12)상 여성의 정의는 ‘생물학적 여성’만이라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을 사실상 합법화한 것이다. 이후 성소수자 권리보장과 평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졌으나 28일 곧바로 영국 평등위원회가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제한을 권고하는 등 인권 후퇴 조치를 거듭 발표하고 있다. 입소스 인구조사에 따르면 캐나다는 인구의 10%가 성소수자고 논바이너리를 포함한 트랜스젠더는 인구의 3%다. 캐나다는 2017년 인권법에서 젠더차별을 금지했으나 앨버타주 등 일부 지역에서 반트랜스젠더 법안을 도입하고 있다. 퀘벡주에는 트랜스 여성이 교도소에서 남성 수감자방에 수용되기도 했다. 프랑스는 작년에 17세 이하 청소년 트랜스젠더의 성별확정 호르몬 치료를 금지했다. 러시아는 2023년 성소수자단체를 ‘극단주의’로 규정하고 불법화했다. 성별확정수술을 한 트랜스젠더를 정신질환자로 취급해 운전을 금지한다. 중국은 1997년 동성애를 비범죄했으나 경제와 인구 위기 속에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있다. 2020년부터 퀴어퍼레이드가 중단되고 2023년에는 베이징 성소수자센터가 15년 만에 폐쇄되었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 성소수자 커뮤니티도 해산, 폐쇄당하고 있다. 성별확정치료는 부모의 동의를 반드시 거치게 하여 제한이 많다. 청소년 트랜스젠더에게 전환치료를 강요하는 경우도 보고되고 있다.13) 라틴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멕시코, 페루, 우루과이는 모두 트랜스젠더를 보호하는 차별금지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는 트랜스젠더 살인 사건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밀레이 극우 정부는 미국 트럼프대통령이 2025년 1월 28일 성별확정치료에 대한 연방지원을 중단하자, 곧바로 아르헨티나에서도 성별확정치료 지원 중단 결정을 발표했다. 트랜스젠더 혐오 공세의 이유 자본가계급은 많은 나라에서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와 탄압으로 사회적 차별을 강화하고 있다. 그럴수록 트랜스젠더 노동자는 더 가난해지고, 더 위험해지고 있다. 사회가 구조적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기에 혐오 범죄 피해를 겪는 경우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저들은 왜 트랜스젠더 혐오를 선동하며 차별과 억압을 강화하는가? 첫 번째 이유는 노동자계급 내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서다. 자본가계급은 불평등의 원인을 자본가가 아닌 트랜스젠더라 탓하도록 조장한다. 트랜스젠더의 차별이 약간이라도 줄어드는 상태를 노동자민중이 자신의 몫을 빼앗기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감추게 조장하는 것이다. 여성의 차별이 줄어드는 것을 남성이 역차별당한다고 선동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 장학금을 받는 극소수의 트랜스젠더 운동선수가 다른 학생 선수의 대학 진학 기회를 훔쳤다고 비난하면서 높은 교육비용과 제한된 교육 기회,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구조의 문제를 감추면서 노동자계급 내부를 분열시킨다. 저들은 학교에서부터 대부분 노동자의 자녀인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성별이분법, 성역할규범과 성소수자 배제, 경쟁, 차별과 혐오를 강요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가 성별 불일치14)를 인식하는 나이는 평균 12세다.15) 그러나 학교에는 입시와 성적만 있을 뿐, 포괄적 성교육이 없다. 인권, 평등도 형편없다. 성평등 도서도 빼앗는다. 이를 제기하는 교육 노동자와 노동조합, 학생, 양육자 커뮤니티는 공격당하기 일쑤다. 국가인권위 조사를 보면 트랜스젠더 응답자의 무려 67.0%가 중고등학교 수업 중 교사로부터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들은 경험이 있고, 21.3%는 교사로부터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응답했다. 자본가계급은 교육 현장에서부터 청소년에게 트랜스젠더 청소년을 낙인찍고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차별당하게 길들이고 있다. 또한 일터에서도 반트랜스젠더 정서를 부추겨 트랜스젠더 노동자와 다른 노동자 사이에 위화감을 조장한다. 노동자 투쟁이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평등에 나서는 활동을 제한하려 든다. 트랜스젠더 노동자가 투쟁이나 노조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비난하고 제한하면서 노동자계급 내부의 불신과 분열을 키운다. 트랜스젠더 권리와 하나로 연결된 노동자 투쟁의 단결력을 훼손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부르주아 가족, 재생산의 위기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다양한 위기는 노동자계급의 빈곤과 다양한 사회적 위기를 빚어내며 가족, 재생산의 위기를 낳고 있다. 자본가들은 착취할 노동자계급의 다음 세대가 필요하다. 여성에게 저평가된 사회적 생산과 무급 가사돌봄 사회 재생산이라는 이중굴레를 강요하며 다음 세대 노동자를 이어가게 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계급과 성소수자 운동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착취에 꾸준히 도전해왔다. 여성 노동자의 노동권, 임신중지 비범죄화, 동성결혼 합법화, 트랜스젠더 성별 정정 등 부분적 권리를 쟁취해왔다. 이는 자본가계급에게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자본은 심각한 재생산 위기를 성별 이분법대로 타개하기 위해 지정성별을 수용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를 더 극심하게 공격한다. 트랜스젠더 차별과 배제 심화는 임신중지권에 대한 공격, 전통적 여성성 강화, 출산 장려 정책, 사회적 소수자 차별 강화, 가사돌봄 시장화 등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노동자계급 여성에게 다음 세대 노동자의 출산과 양육을 강요하는 시도다. 저들의 방식대로 가족, 재생산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공격이다. 국제 노동운동이 이에 맞서려면 노동자계급 분열 책동에 맞서 트랜스젠더를 괴롭히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자본에 맞서 ‘노동자는 하나다’는 정신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트랜스젠더 혐오의 뿌리, 즉 노동자민중을 시장성 있는 인구학적 집단으로 나누고,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서로 싸우게 하며, 이분법적 성별 규범에 의존하여 후세대 노동자를 무상으로 재생산하라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 트랜스젠더와 단결하는 노동자운동 트랜스젠더 차별의 이유를 성소수자 차별, 이주민 차별, 장애인 차별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대입해도 내용은 똑같다. 젠더차별이 심하고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이 초저출산국인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자본의 노노분열 전략, 특히 젠더적 분열을 활용하는 착취 전략을 더 유심히 살펴야 한다.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가 더 차별당하고, 여성이자 장애인일 때, 이주민이고 트랜스젠더일 때 더 차별당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하나의 투쟁으로 나서는 계급의식이 필요하다. 트랜스젠더 혐오 공격이 격화된 곳에서는 자본이 트랜스젠더의 공공의료 서비스, 성중립 시설 이용 비용을 삭감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이것이 전체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 삭감으로 이어지는 점을 제기한다. 그러나 한국은 트랜스젠더 동료와 이웃이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민주노총 30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광장에서 무지개 깃발을 들지만, 우리는 일터와 사회를 제대로 바꾸지 못했다. 2025년 트랜스젠더추모의날은 노동자에게, 민주노조에게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날로 만들자. 성중립 화장실을 일터와 사회에 요구하는, 모든 성별확정치료에 건강보험 적용을 요구하는, 좋은 일자리와 공공돌봄을 요구하는 노동자운동이 ‘여성 보호’니 ‘나중에’라는 자본의 기만을 깨뜨릴 수 있다. 차별과 억압을 단결투쟁으로 허물어 갈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 여러 성별과 성적지향을 가진 노동자, 사업장과 업종·지역을 넘어 노동자가 단결하는 것이 성별 정체성대로, 성적 지향대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한 개의 사다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사다리만 내놓은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맞서자. 더는 젠더 정체성, ‘내가 나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죽지 않는 평등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 [각주] 1) 트랜스젠더는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지정성별’과 본인의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와 달리 ‘지정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포괄적 용어다. 고 변희수 하사나 연예인 하리수씨, 풍자씨처럼 태어날 때 남성 지정성별에서 여성으로 정체화한 트랜스젠더 여성도 있고, 그 반대인 트랜스젠더 남성도 있다. 성별 이분법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지 않는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등 다양한 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2) 고 이연수님(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트랜스인권팀), 2024.3.8.여성파업대회 발언 중 3) 글로벌 리서치업체 입소스, 2023년 세계 30개국 성소수자 인구비율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계인의 9%가 자신을 성소수자라고 답변했다. 한국의 성소수자 비율은 7%로 일본 5%보다 많았다. 4) 성적지향·성별정체성법 정책연구회(Sexual Orientation·Gender Identity·SOGI법정책연구회) 5) 덴마크(73.78%), 벨기에(71.51%) 등은 상위권을 기록했다. 6) 입소스(Ipsos), ‘LGBT+프라이드 2023 글로벌 서베이 리포트’ 7) 비판사회정책 제77호·2022, 트랜스젠더 노동 경험 연구 : 생존을 위한 터전 짓기-김종빈, 고태은, 한인정. H님 발언 8) 비판사회정책 제77호·2022, 트랜스젠더 노동 경험 연구 : 생존을 위한 터전 짓기-김종빈, 고태은, 한인정. L님 발언 9) 한겨레 기사,“집주인이 트랜스젠더라며 계약 파기”…‘스위트홈’은 어디에-성소수자주거권네트워크 연구보고서(2023/02/24),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1081110.html 10) 경향신문 기사, “의사는 편견이 있어도 진료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2022/04/15), https://www.khan.co.kr/article/202204151042021 11) 고 이연수님(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트랜스인권팀) 2024.3.8.여성파업대회 발언 중 12) 2010 평등법(Equality Act 2010) 13) https://www.reuters.com/article/world/trans-chinese-teens-forced-into-conversion-therapy-study-idUSKCN1VR1YD/ 14) 트랜스젠더는 지정성별과 자신이 인지하는 성별 정체성 불일치 탓에 △몸에 대한 혐오감 △자신과 타인이 인식하는 성별이 다른 데 따른 불편함을 느끼는데, 이를 성별위화감(젠더 디스포리아)이라고 한다. 15) ‘2024년 트랜스젠더 코호트 구축 및 건강 추적관찰 연구’,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KALM, Korean Association for LGBTQ Medicine),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11901220000473 -
[사회주의 기초학습#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1. 들어가며 오늘,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쟁은 동유럽과 중동을 불태우고 있다. 세계 각국 극우세력은 이민자, 여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선동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저출생에도 재생산 책임은 노동자 민중의 몫으로 맡겨진다. 기후재앙은 일상이 되었고, 그 피해는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민중에게 집중된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분노 역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개혁인가, 혁명인가. 선거를 통해, 제도를 조금씩 고치며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이 체제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혁명이 필요한가? 개량주의는 말한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피를 흘리지 않고 점진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다면 그 편이 낫지 않겠냐고. 더 나은 법, 더 진보적인 정권, 더 세련된 정책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자고.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점진적 개혁의 약속이 어디로 향했는지,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에 똑똑히 목격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조직된 노동자 정당이, 전쟁과 학살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 그날이었다. 2. 1914년 8월 4일, 노동자당이 자본가들의 전쟁에 뛰어들다 1914년 8월 4일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날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 전원은 1차 세계대전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 “우리는 위험의 순간에 조국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함께. 뒷날 독일 혁명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동료 혁명가 칼 리프크네히트조차 전날 확인된 사회민주당 의원단 당론을 거스르지 못하고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노동자당은 그렇게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독일정부의 전쟁에 찬동했다. 1889년 창립 이래, 제2인터내셔널은 거의 모든 대회에서 전쟁반대 결의안을 채택해왔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 인터내셔널의 기둥이었다. 전쟁공채 찬성 표결 불과 5일 전인 1914년 7월 하순에조차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지를 다지는 한편, 세르비아 사태가 격화되어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종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던 차였다.[1] 그런 독일 사회민주당이 독일 황제와 나란히 섰다는 소식은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날벼락이었다. 스위스에서 소식을 받아본 레닌은 이를 ‘가짜 뉴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군사 공채에 찬성 투표를 던졌다는 기사가 담긴 <전진>이 스위스에 도착하자, 레닌은 이것은 독일의 참모본부가 적을 속이고 위협하기 위해 찍어낸 가짜 신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판적인 정신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믿음이 아직도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2]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모범으로 추앙받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뛰어든 이후 각국 노동자들은 조국방어를 외치며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동자계급 국제주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다음을 보자. 「곳곳의 사회주의자들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면서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람들은 동부의 전제정에 맞서 유럽문화를 수호한다고 했고, 독인인들은 차르의 폭정에서 여러 민족을 해방시킴으로써 유럽문화를 지킨다고 했으며,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프로이센의 족쇄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방어한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민족주의적인 목적에 맞게 혁명전쟁이라는 자코뱅의 유산이 개조되었고,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는 차르정에 대한 민주주의의 저주가 개작되었다. …… 1915년 빈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독립과 러시아에 맞선 방어’ 따위의 미사여구를 들먹였지만, 독일군의 벨기에 진격으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도덕적으로 크게 불리해졌다.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 등의 사회주의자들은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군사침략을 승인했다고 비난했다. 1915년 2월 14일에 런던에서는 프랑스, 벨기에, 영국의 사회주의 정당과 러시아의 사회혁명당이 모여 자신들의 전쟁 참여의 명분을 다듬었다. 그것은 독일에 맞선 전쟁이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고, 독일의 패배가 민주주의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했다.」[3] 물론, 마르크스 본인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전쟁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해방 전쟁을 비롯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 등, 더 진보적인 편의 승리가 진보적 역사 발전을 촉진하는 경우 해당 편을 지지했다.[4] 그러나 1914년 유럽 열강 간의 전쟁은 시장과 식민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진보적 성격도 없었다. 제국주의 전쟁에 국경을 초월하는 노동자의 단결로 맞서자고 결의하던 2인터내셔널은 완전히 파산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 거대한 배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사상적 기반 위에서 준비되고, 어떤 일상적 실천 속에서 그 맹아가 확대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단지 지도자 몇 명의 배신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정치노선과 조직 구조가 이미 개량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사회민주당 내부 노선투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3. 혁명인가 개량인가 - 베른슈타인과 독일 사회민주당 수정주의 논쟁 1) 독일 사회민주당의 형성과 성장 ‘1914년 8월 4일’이라는 비극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준비되어 왔다. 잠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자. 19세기 중후반 이후 유럽 노동운동은 대중적, 정치적, 국제적 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는 1889년 각국 노동자 정당의 국제 결사체인 제2인터내셔널 창립으로 이어진다.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바쿠닌, 프루동, 블랑키 등과 내부 논쟁을 겪으며 체계적으로 형성된 맑스주의는, 이제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그 2인터내셔널 중심에 1875년 창립된 독일 사회민주당이 있었다. 1850~60년대를 거치며, 독일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산업화 진척과 함께 1850년대 말에는 프로이센 왕정의 정치 탄압도 완화되어, 1848년 혁명 패배 이후 붕괴되었던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조직들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 탄압이 다소 완화되었을 뿐, 여전히 의회는 결정력을 가진 기구가 아니라 국왕의 자문기구 수준에 불과했으며 그 의회조차도 재산(세금 납부액)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선거권에 차별을 두는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의회나 내각에 진출하기도 했고 보통선거권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거부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의 권익도 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근면하게 일하고 교육 받으며 협동조합 등을 설립하는 자조(自助) 방식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은, 전제왕정에 저항하거나 비판적이었던 지주, 자본가, 지식인 등과 노동자계급 자신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요구가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1863년 지식인이자 노동운동가인 라쌀레(Ferdinand Lassalle)의 지도하에 “독일 노동자총연맹”이 창설되었다. 1869년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 주도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이 결성되었다. 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같은 목적의 정치조직이 별개로 건설되었는가? 라쌀레가 지도하는 독일 노동자총연맹 강령(1867년)과 베벨·리프크네히트가 지도하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강령(1869년) 모두 ‘자유로운 인민 국가’, ‘자본주의 생산양식 폐지’, ‘민주주의 국가 건설’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건설의 방법과 경로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독일노동자총연맹은 ‘의회 진출과 국가의 도움을 통한 생산자 협동조합 확대’를 목표로 했다. 라쌀레는 자본가들에 맞서 생산자 협동조합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라쌀레 세력은 보수주의자들, 즉 대지주들과의 타협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맑스주의에 따라 국가를 지배계급의 도구로 보고 ‘계급투쟁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했으며,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하지 않는 이상 협동조합만으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독일 통일[5]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제시한 독일 노동자총연맹의 강령과,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의 강령은 사회주의 건설의 방법론에 있어 차이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18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이르러 격렬해지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조합의 결성으로 양 조직은 실질적인 공동투쟁을 하고 있었고, 더욱이 1871년 프랑스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과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에 놀란 비스마르크 정부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함에 따라 두 조직의 통합이 요구되었다. 마침내 1874년 12월 통합협상이 시작되었고, 강령 합의가 이루어졌다. 1875년 5월, 튀링겐의 고타(Gotha)에서 통합대회가 열리고 강령이 통과되면서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탄생했다. 이 당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다.[6] 19세기말, 독일 노동자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잘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성장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Reichstag) 선거 득표율 수치는 다음과 같다. 제국의회 선거 독일 사회민주당 득표 1877년 선거 49만 3,447표 (9.1%, 13석) 1887년 선거 76만 3천 표 (10.1%, 11석) 1890년 선거 142만 7천 표 (19.7%, 35석) 1907년 선거 325만 9천 표 (29.0%, 43석) 1912년 선거 425만 표 (34.8%, 110석) 1914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원 수는 108만 6천 명이나 되었고, 당은 260만 조합원이 속한 노동조합(자유노련)의 지지를 받았다. 사회민주당은 독일의 모든 도시에 유통되는 일간지, 소비조합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동자 우표수집 동호회, 노동자 토끼사육 동호회 등도 있었다. 노동자 합창단 회원은 20만명, 노동자 사이클 클럽의 회원은 13만 명이나 되었다.[7] 이대로라면 사회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승리는 역사의 필연으로 보였다. 「노동자당과 사회주의당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극도의 주의와 주목을 끌었다. 과거의 성장세에 근거하여, 그들의 지도자들은 승리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인민의 다수가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들 정당에 참여하고 있다. … 1880년대 이래로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들의 급격한 부상이 정당들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의 지지자나 구성원들에게도 흥분과 희망, 즉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장과 작업장 그리고 광산에서 직접 노동하던 이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그와 같은 희망의 시대가 있어본 적이 없었다.」[8] 그러나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서, 어떤 이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데, 혁명은 과연 필요한가? 2) 자본주의는 진화하는데, 붕괴는 대체 언제 온다는 말인가? - 베른슈타인의 문제 제기 독일 사회민주당이 성장하던 19세기 말, 당 이론가 그룹의 일원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사회주의의 문제들’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당 기관지에 연재했다. ‘수정주의 논쟁’의 시작이었다.[9] 이 논문은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커다란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1898년 슈투트가르트 당대회는 베른슈타인에 대한 격한 비판과 함께 다음 해 당대회에 베른슈타인의 해명서를 요구한다. 이에 1899년,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를 출판하며 자기 견해를 변호했다.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이 전제하던 자본주의 붕괴론을 비판했는데, 비판의 주된 근거는 자본주의의 적응 능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가 자기 모순에 따라 필연적으로 붕괴한다고 전제해왔으나, 베른슈타인이 보기에 그 믿음에는 근거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맑스가 살아있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카르텔과 트러스트 등 독점자본의 기업조직이 시장경쟁을 제한하여 경제공황의 규모와 빈도를 완화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금융 수단의 발달, 통신수단 등의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식회사의 발전에 따라 자본의 소유가 다수에게 분산되는 한편, 인구 대다수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는 ‘계급의 양극분해’가 나타나지 않고 중간계급이 두텁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 투쟁의 성과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고 있다는 점, 이에 더해 민주주의 제도가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당의 과제는 혁명[10]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내에서 노동자의 경제적 처우를 개선하고 의석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식민지 획득에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다른 제국주의 열강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점점 더 식민지 생산물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식민지는 개발·보호되어야 하며, 독일 같은 문명국은 미개민족의 영토에 대해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11] 수정주의 논쟁에 착수한 베른슈타인의 중심 문제의식은, 당의 실천은 자본주의 ‘개혁’으로 굳어져 있음에도 당의 이론은 ‘혁명’이라는 문구에 매달리고 있으니 현실에 맞게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늘날 중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으며 점진적 개혁이 당의 과제다. 즉, 사회민주당은 ‘목표’를 폐기해야 한다! 베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을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 목표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에게는 무(無)이며, 운동이 전부이다.」 ‘사회주의의 교황’ 칼 카우츠키, 독일 사회민주당에 갓 입당한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더 파르부스, 프란츠 메링 등이 베른슈타인을 비판했다. 심지어 당내 우파들 역시 당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민주당 우파들에게 이론과 원칙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실천과 무관한 당내 분란’에 불과했으며, 골치 아픈 논쟁 없이도 충분히 의회주의적-개량주의적 실천을 주요 흐름으로 만들고 있었다. 독일 사회민주당 우파의 일원 이그나츠 아우어(Ignaz Auer)는 베른슈타인에게 “친애하는 에데(베른슈타인의 애칭),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표결에 부칠 일이 아닙니다. 그냥 조용히 그렇게 실천하면 될 일입니다”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이론’은 여전히 혁명을 지지했다. 1899년 하노버 당대회에서 카우츠키와 베벨은 베른슈타인의 견해를 강력히 비판했고, 베벨은 수정주의 비판 결의안을 제출해 216대 21로 가결되었다. “당은 계속 계급투쟁의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자유는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1901년 뤼벡 당 대회에서, 베벨은 다시 베른슈타인을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은 “나는 당의 프로그램이나 실천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론을 비판했을 뿐”이라며 항변했지만, 대회는 203대 31로 비판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다. “베른슈타인은 앞으로 당의 다수 결정에 따라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 베른슈타인은 당대회에서 혹독히 비판받았고, 1900년 초 사회민주당 기관지 편집진에서 사임했다. 이렇듯 표면적으로는 수정주의가 철저히 패배한 것으로 보였으나, 앞서 말했듯 수정주의자들의 실천과 수정주의 비판자들의 실천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사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상적 실천을 이론으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개량주의적 실천과 함께 언젠가 올 혁명을 기다리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노선이라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목표를 간직하는 것이 대체 왜 중요하다는 말인가? 베른슈타인이 쓴 것은 하나의 ‘논문’이었지만, 사회민주당의 다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말로는 혁명을 외치되, 실천은 개량으로 귀결되는 이중성. 독일 사회민주당의 위기는 바로 이론과 실천의 괴리, 즉 이데올로기로만 혁명을 유지한 채 실천에서는 제거한 모순에 있었다. 4. 수정주의 대두의 배경 1)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강대국 대열에 합류했다.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은 노동자계급에게 물질적 양보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민주적 제도의 발전은 ‘계급투쟁이 완화되고 있다’는 진단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성과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있고, 실제로 고쳐쓰고 있다’는 착시를 심어주었고, 자본주의의 진화에 조응하는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즉, 자본주의의 성장은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혁명적 전망을 희미하게 만들었고, 이미 존재하던 ‘실천적 수정주의’를 ‘이론적 수정주의’로도 돌출시켰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붕괴론이며 또한 현재 독일의 경제발전 수준과 도시와 농촌에 있는 노동자계급의 성숙도를 감안할 때 사회민주당이 급작스런 독일자본주의의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며 특히 끊임없이 이어져온 내 견해로는 독일 자본주의가 지속적인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보다 더 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우리는 선진국 도처에서 계급투쟁이 점차 완화된 형태를 띠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것은 별로 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지 않다.」[12] 실제로 1차대전 발발 전 반세기 동안 유럽은 발칸반도 변경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쟁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화로웠다. 유럽은 거의 반세기에 걸친 평화의 기간 동안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의회주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가 동시에 번성하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두 세대에 걸쳐 유럽인들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 논의, 화해, 그리고 다수결에 따른 투표를 통해 사회환경을 변화시키고 완성시킬 정도로 진보했다는 낙관적 믿음 속에서 성장했다. 유럽 전체에서 부의 축적은 너무나 인상적이고 빨랐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계급들에게 번영의 증대를 보장하고 격렬한 사회 갈등을 배제하는 듯했다.[13] 2) 본격화하는 제국주의 시대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의 인식은 당대, 그리고 닥쳐올 시대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인식조차 결여하고 있었다. 바로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식민지 획득을 둘러싼 열강 사이의 투쟁이 격화하고 있었고 세계는 초유의 ‘대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1884년 열강 사이의 아프리카 분할을 조정하기 위한 베를린 회의가 있었고, 1898년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충돌하는 파쇼다 사건이 있었으며, 1899년 영국이 오늘날의 남아공을 병합한 보어전쟁, 1900년 독일을 포함한 8개 열강의 베이징 점령이 있었다. 다음은 1900년 7월 27일, 중국으로 떠나는 군대를 향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연설이다. 소위 ‘훈족의 연설’로 불리는 이 연설은 학살을 주문하는 잔인성으로 유명하다. 「적을 만나면 반드시 물리쳐라! 자비를 베풀지 마라! 포로를 만들지 마라! 너희 손에 떨어지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천 년 전 훈족이 그들의 왕 아틸라 아래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역사와 전설 속에 위대하게 남겼듯이, 너희도 중국에서 독일이라는 이름을 그렇게 각인시켜라. 다시는 어떤 중국인도 독일인을 곁눈질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라.」[14] 시대적 상황은 명확했다. 세계는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15]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1871년 독일 제국 통일 이후, 독일은 뒤늦게 식민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며 식민지를 통해 값싼 원자재를 확보하고 투자처를 넓히려 했다. 이렇듯 독일 제국주의가 본격화하는 상황에서도 베른슈타인은 식민지 확보를 비판하기는커녕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심지어 식민지 민중을 유럽의 문명화 대상으로 놓는 시각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시각과 하등 다르지 않다. 「독일이 현재 매년 상당량의 식민지 생산물을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언젠가 그 일부를 자국 식민지에서 조달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무리 사회주의자들이 독일에서 자신들의 발전 속도를 낙관적으로 본다 해도, 다른 수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로 전환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그리고 열대 농장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면, 우리가 직접 열대 농장을 경작하는 것도 비난받을 일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부(whether)”가 아니라 “어떻게(how)”이다. 유럽인이 열대지방을 점유하는 것이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해치는 결과를 반드시 초래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실제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미개인들(savages)의 권리는 조건적 권리로만 인정될 수 있다. 보다 높은 문명이 결국 더 높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16] 심지어 베른슈타인은 1897년 독일의 칭다오 점령과 교주만 조차(租借, 타국 영토 일부를 일정 기간 빌려 통치하는 행위. 유명 사례로 영국의 홍콩 조차)까지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들어 합리화한다. ‘독일이 중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도, 중국은 어차피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자본주의 속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에 예속되었을 것이다, 교주만 조차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것이 베른슈타인의 논리였다. 이런 흐름은 독일 국가의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과도 맞물렸다. ‘복지국가’의 원형은 스웨덴도, 영국도 아닌 1880년대 독일이다. 독일 국가는 1883년 건강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노령 및 장애연금법을 제정했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비스마르크가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한 목적은 계급투쟁 격화의 방지였다. 사회주의자들의 세력 확대를 막고, 혁명을 예방하려고 했던 것이다.[17] 1871년 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이 지배계급에 남긴 두려움 역시 중요한 배경이다. 물론 사회보장제도 확대 같은 ‘당근’뿐만이 아니라 ‘채찍’ 또한 있었다. 독일은 1878년 ‘사회주의금지법’을 제정해 사회주의자들의 집회·결사, 출판 등을 금지했다. (사회주의금지법은 사회민주당을 강제 해산하지는 않았으나, 정당 활동을 의회로 제한했다.) 즉, 비스마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자계급을 제도 내로 유인하고 국가가 정한 경계 안에 가두고자 한 것이다. 3) 독일사회민주당에 고질적인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의 분리, 이론과 실천의 분리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흔히 최대강령으로 불리는 첫 번째 부분은 칼 카우츠키가 작성한 것으로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주의로의 지향을 서술하고 있다. 최소강령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부분은 베른슈타인이 작성한 것으로 당면 실천과제로서 일반적 민주주의적 요구들과 노동자계급의 복지를 위한 개량적 조치들을 정식화했다. 당 강령은 분명 사회주의적 전망과 현실 개량을 동시에 담고 있었지만, 두 영역은 별개의 궤도로 움직였다. 문제는 양자의 연결이었다. 최대강령에 표현된 사회주의적 원리와, 당시 사회의 법적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는 민주주의적 실천과제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었으나, 카우츠키를 비롯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사 발전에 따라, 언젠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저절로 그 간극을 메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혁명은 필연적인, 그러나 먼 훗날의 일에 불과했다. 엥겔스의 비판을 보자. 「가재가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는 것 같이 사회도 필연적으로 낡은 사회 체제로부터 성장하여 그 낡은 껍질을 폭력적으로 깨뜨려야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자문해 보지 않고, 게다가 마치 독일 사회는 여전한 반(半) 절대주의적 족쇄와 더 나아가서는 형언할 수 없이 혼란한 정치적 질서를 깨뜨릴 필요가 없는 것처럼, “오늘날의 사회는 사회주의로 성장해 갈 것이다”라고 자신들과 당에게 그럴싸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들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정치적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워 당면한 구체적 문제들, 즉 일찍이 없었던 대사건들이나 일찍이 없었던 정치적 위기가 도래하면 저절로 일정에 오르게 되는 문제들을 덮어두고 있다.」[18] 엥겔스의 예언적 비판은 1차대전으로 현실이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부터 나오는 개량과 환상에 절여져있었고 그 결과는 양자의 정치적 파산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그 이데올로기, 표어, 상징을 지난 세기의 혁명기로부터, 1848년의 대격변으로부터, 1871년의 파리코뮌으로부터, 그리고 비스마르크에 맞선 독일 사회주의의 지하투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 표어와 상징은 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과, 부르주아 정부의 타도를 지향하는 가차 없는 계급투쟁을 주창했다. 그런데 그 이래 오랫동안 사회주의 정당들의 실제 활동은 이런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가차 없는 계급투쟁은 평화적 거래와 의회주의적 개량주의에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런 방식이 점차 성공을 거둠에 따라, 사회민주당·노조와 정부·고용주 단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국가적 이익과 관점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국제주의 표어보다 더 우세하게 퍼져나갔다. 1914년까지 사회주의 정당들은 여전히 습관화된 혁명용어로 그들의 개량주의적 활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했다.[19] 노동자당이 체제에 길들여져온 결과는 1차 대전 동조라는 대재앙이었다. 4) 독일사민당 총파업 논쟁이 드러낸 것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총파업이 차르 전제정을 위협할 정도로 확산되자, 그 파장은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도 거세게 미쳤다.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독일 좌파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당내 좌파는 총파업을 혁명 전략의 핵심 전술로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을 관찰한 그녀는, 대중파업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혁명으로 나아가는 긴 과정의 일부이며, 혁명의 발단이자 그에 필요한 조직과 의식을 창출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대중파업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구분을 지우며 종합함으로써, 양자를 계급투쟁으로 고양하는 매개라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은 ‘정당의 입법 정치투쟁’, ‘노동조합의 임단협 경제투쟁’이라는 기계적 역할분담을 지양한다. 계급투쟁은 착취를 제한하는 투쟁이자, 착취를 폐지하는 투쟁이다. 「정치적·경제적 투쟁의 분리와 그 각각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의회주의 시기의 인위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 평화롭고 '정상적인' 흐름 속에서는 경제투쟁이 각각의 작업장과 생산 부문에서 수많은 개별 투쟁으로 분열되어 흩어진다. 반면 정치투쟁은 … 부르주아 국가의 형식에 맞춰 대의제 방식, 즉 입법기관의 대표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수행된다. 그러나 일단 혁명적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고 대중이 투쟁 무대에 등장하면, 경제투쟁의 분절화도, 정치투쟁의 간접적인 의회적 형태도 사라진다. 혁명적 대중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가 되며,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라는 노동운동의 두 조직을 서로 분리하고 완전히 독립된 형태로 놓는 인위적 경계선도 쓸려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대중운동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의회주의 시기에도 현실 속에서는 사실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은 단지 혁명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회주의 시기에도 실제 현실로 존재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에는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두 별개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계급투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착취를 제한하려는 투쟁이자,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와 함께 착취를 폐지하려는 투쟁이다.」[20] 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반응은 일치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독일 노동조합 지도부는 정치총파업을 극렬히 반대했다. 이들은 1905년 루르 지역 광부 2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광산 파업과 그 여파로 벌어진 파업 물결을 조직 확장의 계기보다는 재정적‧정치적 부담으로 인식했다. 1905년 쾰른에서 열린 노동조합(자유노련) 대회는 압도적 다수의 결의로 총파업 전술에 반대했다. “아나키스트들이나 경제투쟁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자들이 주장하는 총파업은 대회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대회는 노동자들에게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일이 일상적인 조직강화 활동을 저해하지 않도록 경고한다.”[21] 흥미롭게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포함한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정치총파업에 일정한 지지를 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개혁, 예컨대 보통선거권 쟁취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서, 통제 가능한 전술에 불과했다. 그들의 정치총파업론은 혁명의 촉진이 아니라, 협상력 제고 수단에 가까웠다. 이에 비해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현지에서 목격한 경험을 통해 다른 전망을 제시했다.[22] 그녀는 『대중파업론』에서 러시아 혁명의 총파업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의식과 조직을 혁명적으로 성장시키는 결정적 계기라고 주장했다. 대중파업은 가장 낙후된 노동자들도 스스로 투쟁 주체로 등장하게 만든다. 이는 단지 의회 압박의 도구가 아니라, 혁명적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1905년 9월 예나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당대회는 논쟁 끝에 총파업을 당의 전술 중 하나로 공식 채택했다. 그러나 당대회는 총파업이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막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는 점을 인정하되, 혁명적 투쟁 수단으로 보는 것은 거부했다. 이는 좌파(로자 룩셈부르크), 중앙파(아우구스트 베벨), 우파(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간 절충된 합의였다. 하지만 그 제한적 합의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906년 2월, 당 지도부는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비공식 회담을 통해 총파업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확약했고, 9월 만하임 당대회에서는 노동조합의 전술을 결정할 권리는 노동조합에 있다고 결정한다. 이로써 예나 당대회에서 총파업을 전술로 채택한 결의는, 만하임에서 ‘노조 자율’ 원칙이 확정됨으로써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우리는 당과 노동조합 간의 평화와 조화를 최우선으로 추구한다” - 독일 사회민주당의 구심 중 하나인 아우구스트 베벨의 말이다. 그러나 노조의 일은 노조가, 당의 일은 당이 맡아 각자 수행하자는 노선 속에서 정치투쟁은 의회입법으로 한정되고, 노동조합 투쟁은 임단협으로 한정된다. 이런 역할분담론은 당의 정치투쟁을 의회 개혁으로, 노조의 투쟁을 임금교섭으로 제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전망 자체를 폐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병행 행동”(parallel action)을 하며 “동등한 권위”를 지닌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라는 환상에 기초해 있다. 이 시기에는 사회민주당의 정치투쟁이 의회투쟁으로만 소모되어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노동조합 투쟁과 마찬가지로 의회투쟁도, 부르주아 사회 질서라는 토대 위에서만 수행되는 투쟁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경제개혁 작업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본질상 정치개혁 작업이다. … 최종 목표는 의회투쟁이나 노동조합 투쟁 그 너머에 있다. …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동등한 권위”라는 이론은 단순한 이론적 오해나 혼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표현이다. 이 경향은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의회투쟁으로 축소시키고,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소부르주아적 개혁정당으로 바꾸려 한다. …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 조직을 정당에 흡수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운동 전체와 그 일부인 노동조합 간의 실제 관계에 상응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간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23]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을 통해 보려 했던 것은,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성장해가는 과정이었다. 일상의 개량과 미래의 혁명을 분리하지 않는 계급투쟁 속에서, 대중은 체제의 본질을 자각하고 조직을 만들어간다는 사상이었다. 반면, 지도부와 노동조합 관료층은 기존 제도 안에서 조직을 보존하고 개량적 성과를 쌓는 것을 최우선시했다. 이로 인해 당은 보수적 실용주의의 길로 기울어갔다. 5. 혁명과 개량에 관하여 1) 혁명은 모험주의적 폭동이 아니다 개량주의자들은 흔히 혁명을 ‘무책임한 모험’이나 ‘파괴적 동란’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혁명은 단지 무장 봉기나 유혈 충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낡은 지배계급이 더 이상 옛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고, 피지배계급이 더 이상 그대로 살 수 없는 조건 아래, 억압받는 계급이 그 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질적 단절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단순한 결단이나 소수의 선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혁명은 사회의 모순이 극도로 격화되고, 기존 제도가 해답을 줄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계급의 대중적 행동으로 분출된다. 혁명은 비이성적 격변이 아니라, 계급의식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의 합리적 실천이다.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보자. (1) 1917년 2월 혁명, 러시아 혁명의 발발 1914년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은 1912년 이래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러시아 노동운동이 급격히 후퇴하는 계기였다. 애국주의는 전 국가를 휘감아 혁명적 정치운동을 질식시켰다. 투쟁적인 노동자들은 전선으로 차출되었고, 파업은 가혹하게 처벌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낳은 운동의 퇴조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황은 패색이 짙었고, 이는 짜르체제에 대한 환멸로 이어진다. 이제, 노동자들은 전쟁이 억누른 자신의 생존권 요구를 내걸고 1915년 이후 격렬한 투쟁에 나선다.[24] 독일과의 전쟁은 계급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쟁은 노동계급에게 생존 위기를 야기한 반면,[25] 군수산업 팽창은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1915년 여름, 자본가들은 군사산업위원회를 만들어 거세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로 가두는 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애국주의 아래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지배 체제는 이미 노동자 투쟁을 체제 안에 붙잡아 둘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1916년 말 이후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요는 점증하고 있었다. 1917년 1월 26일 밤, 전제정치 종식을 주장한 군사산업위원회 중앙노동자그룹 대표들이 체포되었고, 이는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26] 2월 18일 푸틸로프 금속공장 노동자들은 2월 22일 다른 공장의 연쇄파업을 촉발했고, 정세 고조 속에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러시아 구력. 신력으로는 3월 8일)을 맞아 여성노동자들이 진행한 거리시위는 2월 혁명의 결정적 포문을 연다. 당시 어떤 혁명세력도 이것이 혁명으로 이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지구조직 중 가장 전투적인 비보르그 지구위원회조차 애초 2월 23일 파업을 반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날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만도 12만 명에 달했다. 다음 날에는 시위가 더 발전해 2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2월 25일, 투쟁은 총파업으로 발전했다.[27] 그리고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일부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로 합류한다. 2월 27일,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대부분이 반란에 합류하고,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구성된다. 그리고 3월 2일, 러시아를 지배하던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한다. 러시아를 300년간 지배하던 로마노프 왕조가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붕괴하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노동자 민중의 자치 기구인 소비에트, 그리고 입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였다. 누가 러시아 혁명의 진로를 결정할 것인가? 소비에트인가, 임시정부인가? (2) 소비에트, 노동자 민중 자신의 권력 1917년 2월 혁명과 함께 대중은 자신의 투쟁기관을 건설했다. 1905년 혁명에서 이미 등장한 소비에트가 다시 건설되었다. ‘평의회’를 뜻하는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 공장과 병영, 농촌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건설한 자치기관으로, 대중은 자신이 선출한 대의원을 소비에트로 보내 자신을 대표하게 했다.[28] 3월 17일까지 49개 도시에서 소비에트가 있었다. 5일 뒤에는 77개가 되었으며, 6월에는 519개가 되었다.[29] 소비에트는 삶의 공간으로부터 구성되었고 공장, 군대, 우편, 철도 등 러시아의 근간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명령 제1호’[30]는 평의회로 조직된 대중의 힘을 여실히 드러낸다. 1917년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페트로그라드 지구 주둔군에게 내리는 제1호 명령 수비대, 육군, 포병, 해군의 모든 병사들은 즉시 이 명령을 완전하게 이행해야 하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도 이를 널리 알려야 한다.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모든 중대, 대대, 연대, 포대, 기병대 및 각 군부의 독립 부서들과 해군 함정에서는, 위 부대 병사들 중에서 즉시 위원회를 선출해야 한다. 2. 아직 노동자 소비에트에 대표를 선출하지 않은 모든 부대는, 각 중대에서 한 명의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이들은 신분증을 소지하고 1917년 3월 2일 오전 10시까지 국가 두마(duma, 의회) 건물에 도착해야 한다. 3. 모든 정치적 행동에 있어, 각 부대는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및 자기 부대 위원회의 지시에 복종한다. 4. 국가 두마의 군사위원회가 발행한 모든 명령은 이행하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발행한 명령 및 포고와 상충되는 명령은 제외한다. 5. 소총, 기관총, 장갑차 등 모든 종류의 무기는 중대 및 대대 위원회의 통제 하에 두며, 장교들의 요구가 있더라도 절대 그들에게 넘겨져서는 안 된다. 6. 진형을 갖추고 근무 중일 때 병사들은 엄격한 군사 규율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비근무 시간 및 진형 외에서는 정치적·시민적·개인적 생활에서 일반 시민이 누리는 권리를 완전히 향유해야 한다. 특히, 비근무 시간에 거수경례 및 경례 의무는 폐지된다. 7. 장교에 대한 호칭은 '각하', '존경하는' 등의 표현 대신, '장군님', '대령님'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병사에 대한 무례한 언행, 특히 '너'(thou)라고 부르는 행위는 금지되며, 이러한 규율 위반이나 장교와 병사 간의 갈등은 병사들이 중대 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이 명령은 모든 중대, 대대, 연대, 수병, 포대 및 기타 전투 및 비전투 부대에서 낭독되어야 한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1905년 만들어졌던 소비에트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것, 1917년 소비에트는 1905년과는 달리 군대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 또한 1905년과는 달리 처음부터 매우 정치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짜르체제가 심각하게 붕괴했다는 것을 뜻했고, 이는 1917년 2월 혁명이 단지 부르주아 혁명에 그치지 않을 전조였다. 레닌은 1917년 4월 3일 망명지에서 러시아로 귀국한 이후 ‘혁명은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넘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권력의 주인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소비에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가들을 위한 임시정부는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으며,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해야 한다.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영토 전역에서 선출된 노동자, 농업노동자와 빈농의 대표가 구성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혁명의 목표이다. 이에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대한 모든 협력을 거부해야 하며, 소비에트만이 유일한 혁명적 정부임을 대중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31] 그러나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 당파들은 소비에트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멘셰비키[32]는 소비에트를 임시정부를 보호하고 대중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멘셰비키, 니콜라이 치헤이제는 소비에트를 “혼란과 파괴의 와중에서 대중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며 …… 수백 년 묵은 질곡이 벗겨져 버렸을 때 국민의 기본적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멘셰비키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의 임무를 새로운 민주적 기구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획득한 자유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에트를 수동적으로 보는 관점은 진행 중인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기본적 입장에서 기인했다. 멘셰비키는 2월 러시아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에 머물러야 한다고 사고했고, 이는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에 대한 멘셰비키의 입장과 같았다. 소비에트 안에는 이처럼 당면 정세에 대한 노선을 달리하는 당파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내에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경합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로 세력을 확대했다. (3) 2월 혁명 이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실현할 수 없는 임시정부 대중이 구성한 평의회 권력, 소비에트 반대편에 임시정부가 있었다. 소비에트로 결집한 대중의 요구는 ‘빵, 토지, 평화’로 집약되었으나, 자유주의자들과 입헌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대중의 요구를 실현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전쟁의 한 복판에서 혁명이 벌어졌음에도 임시정부는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러시아의 1차대전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당연히 러시아의 전쟁 지속을 원했다.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제국주의 전쟁과 긴밀한 이해관계로 얽혀있었다. 첫째,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전쟁을 계속해야 ‘혁명을 심화하는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애국주의 정서를 확대하며 토지문제와 사회입법 등 노동자 민중이 원하는 혁명적 조치를 늦출 방법이 바로 전쟁 지속이었다. 둘째,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제국주의적 열망을 공유했으며, 1차 대전에서 승리할 경우 러시아가 확보할 전리품을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병합이 1차 대전 당시 러시아의 주요 목표였다. 러시아는 남하하여 지중해, 나아가 대서양으로 진출하려는 오랜 야망을 품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오스만 제국의 해협 지대가 필요했다.[33] 이렇듯 러시아 황제의 퇴위 이후 임시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임시정부는 전쟁을 중단하고 대중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의사가 없었고, 이는 노동자 민중의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행위였다.[34] 그리고 임시정부가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는 사실은 ‘밀류코프 각서’를 통해 대중 앞에 드러난다. 1917년 4월, 임시정부 외무장관인 파벨 밀류코프는 1차 대전 동맹국들에게 각서를 보내 임시정부는 차르 정부가 맺은 모든 조약을 존중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임시정부는 … 우리 연합국들에 대한 의무를 전적으로 이행할 것이다.” 다음은 당시 레닌의 글이다. 「외국 영토의 점령은 자본가들에게 필요하다. 그들은 새로운 시장, 자본을 수출할 새로운 장소, 그들의 아들 수만 명에게 수익성 있는 일자리를 마련할 새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러시아 자본가들의 이익은 영국 및 프랑스 자본가들의 이익과 일치한다. 바로 그것, 오직 그것만이 차르가 맺은 조약이 러시아 자본가들의 임시정부에게도 소중한 이유다. …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이 나라에 단 하나의 권력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언해야 한다 - 바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다. 소수 자본가들의 정부인 임시정부는 이 소비에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35] (4) 이중권력과 10월 혁명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 임시정부는 대중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을 수행할 능력도, 소비에트로 결집한 대중을 통제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대중의 자치기구인 소비에트와 ‘공식’ 권력인 임시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권력’ 상태였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형성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이중권력 상태는 결국 10월 혁명을 통한 임시정부의 타도와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으로 마무리된다. 그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1917년 4월, 서방 동맹국들에게 전쟁 지속을 약속하는 밀류코프 각서가 불러일으킨 분노가 ‘4월 위기’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임시정부의 해산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요청에 따라 시위를 해산했다. 대중시위가 일으킨 정치적 위기에,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내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임시정부 장관으로 수혈해 소비에트를 달래려 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대중의 간극은 커지고 있었다. 6월, 임시정부는 전쟁 종식은커녕 러시아군에게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명령했고, 제국주의 열강의 공조 아래 노동자 민중을 총알받이로 밀어넣는 임시정부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6월 18일 시위에는 40만명이 넘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자본가 장관 10명 물러나라!”, “공격 정책 집어치워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슬로건을 들고 행진했다. 7월 3일, 분노한 대중이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봉기는 임시정부의 발포와 함께 해산당했다. 볼셰비키는 봉기를 말렸지만, 책임을 뒤집어쓴 것은 볼셰비키였다. ‘레닌은 독일 첩자’라는 비난과 함께 볼셰비키는 불법화됐고, 볼셰비키 축출에 성공한 임시정부는 대중집회 규제와 전선 사형제 부활을 통한 소비에트 억압에 이어, 우익의 희망 코르닐로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은 이중권력을 적당히 두고볼 생각이 없었다. 민간 사형제 부활, 철도와 방위산업 군사화, 노동자 단체활동 금지 등에 이어 마침내 수도를 점령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쿠데타였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노동자들은 모든 조치로 쿠데타를 막았기 때문이다. 반혁명 군대가 보내는 전보의 차단,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군대의 규모와 목적지 파악, 쿠데타군 이동 선로의 폐쇄…. 수도 전역에서 경종이 울렸고 노동자들은 무장한 채 전투를 준비했다. 7월 봉기를 주도한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다시 혁명의 수도를 지키고자 페트로그라드에 정박했다. 이제, 혁명 세력이 쿠데타 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반격을 앞장서서 조직한 주체가 볼셰비키였고, 이들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8월 31일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최초로 다수를 확보했다. 리가, 모스크바 등 다른 도시도 페트로그라드의 뒤를 따랐다.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10월 혁명은 이런 흐름의 연속선 위에 있었다. (5) 혁명은 파괴와 건설의 통일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소비에트로의 권력이양 요구는 혁명의 연속적·안정적 발전과 직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혁명은 권력에 굶주린 볼셰비키가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한 조치가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의 확대 발전을 위한 조치였다. 레닌이 7월 중순에 쓴 ‘슬로건에 관하여’를 보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옮겨야 한다”는 슬로건의 지지자들 모두가 그것이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슬로건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생각해본 것 같지는 않다. 평화적이라는 말은 누구도, 어떤 계급도, 약간이라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어떤 세력도 당시(2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에는 소비에트로 권력이 옮겨지는 것에 저항할 수도 없고 그것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라는 뜻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국가권력 전체가 곧바로 소비에트로 넘겨지기만 하면 소비에트 내부의 계급과 정당들의 투쟁이 매우 평화롭게 고통 없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당시에는 평화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 소비에트가 분할되지 않은 독점적 권력을 행사했다면, 소비에트 내에서 권력을 쥔 계급과 정당들의 변화도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36] 레닌 자신이 명시적으로 설명하듯,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과 직결되어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1917년 8월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분쇄한 이후 정치 무대에 복귀한 볼셰비키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경로를 다시 모색했다. 이는 카메네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우파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좌파 모두 마찬가지였다.[37] ‘사회주의정당들과 부르주아정당의 결별을 전제로 사회주의자들만으로 구성된 혁명정부를 구성하자’, 이것이 8월 말 군부 쿠데타를 대중의 힘으로 분쇄한 이후 볼셰비키가 전개한 전술이었다. 즉, 자본가들에 맞선 사회주의자들의 공동전선이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부르주아와 결별하고 사회주의자들만의 정부를 구성했다면, 소비에트 권력은 사회주의 정당 사이의 협력과 견제 속에 더욱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9월 ‘민주협의회’는 다시 한번 부르주아와의 연립을 결정하며, 사회주의 정당들로만 구성된 혁명정부의 평화적 구성 역시 물거품이 된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연루 의혹을 받는 입헌민주당은 여전히 버젓이 내각에 참여했다. 사회주의 정당들로만 구성된 연립정권의 무산, 이는 독일과의 전쟁 지속과 임시정부-소비에트 이중권력 상태의 불안한 지속을 뜻했다. 이런 조건에서 10월 9일, 임시정부는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전선 차출, 즉 혁명을 지지하는 군대를 수도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소비에트 권력의 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였다. 그 결과가 바로 1917년 10월 25일 봉기였다. 봉기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 경로가 소멸한 상황에 대한 냉엄한 인식에 근거했다. 곧, 봉기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볼셰비키의 야욕이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라 볼셰비키에게 불가피하게 강요된 선택에 가까웠다. 9월 중순 이후 레닌이 아무리 편지로 당 주도의 봉기를 독촉했다 하더라도, 이는 타 당파를 제외하고 권력을 독식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 10월 봉기의 군사지도자 트로츠키조차 소비에트가 평화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면 봉기는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38] 누구나 혁명의 연속적·평화적 발전을 원하며, 이는 100년 전 러시아 혁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가 10월 25일 볼셰비키 봉기 전에 사회혁명당, 멘셰비키와의 협력을 통해 실현되었다면 가장 좋은 상황이 창출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볼셰비키는 역사적 단절을 택했다. 봉기의 성공이라는 조건 위에서 행해진 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는 이를 열렬히 환영한다. 소비에트 권력이 창출되었다. 이상에서 드러나듯, 혁명은 단지 구체제의 파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구체제 안에서 형성된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재료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가는 연속적 과정이기도 하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권력기관을 형성하고 사회 전체에 헤게모니화 하는 과정이다. 2) 진정한 개량은 혁명적 계급투쟁의 결과다 많은 개량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데 집중하자. 그렇게 하나하나 바꾸다 보면 결국 다른 세상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양보한 적이 없다. 진정한 개량은 투쟁과 저항, 때때로 혁명적 위협의 산물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입법 개혁과 혁명은 역사의 진열대에서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뜨겁거나 차가운 소시지를 선택하듯 취사선택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역사 발전 방식이 아니다. 입법 개혁과 혁명은 계급사회 발전의 서로 다른 요소들이다. 이들은 서로를 조건짓고 보완하는 동시에, 북극과 남극,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처럼 서로를 배제한다. 모든 법적 헌정체제는 혁명의 산물이다. 계급들의 역사에서 혁명은 정치적 창조의 행위이며, 입법은 이미 형성된 사회의 정치적 표현이다. 개혁을 위한 활동은 혁명과 무관한 독자적인 힘을 갖지 않는다. 모든 역사적 시기에서 개혁을 위한 활동은 오직 마지막 혁명이 부여한 방향 속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혁명의 추진력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동안에만 지속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각 역사적 시기에서 개혁 활동은 언제나 마지막 혁명이 만들어낸 사회 형태의 틀 안에서만 진행된다. 여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39] 즉, 진정한 개량은 체제 내의 협상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투쟁의 산물이다. 앞서 보았듯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 확대 조치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예방조치로서 이루어졌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줄이는 경우는, 이윤을 줄이지 않을 경우 체제 자체가 흔들릴 위험에 직면했을 때다. 8시간 노동, 사회보장제도, 보통선거권, 여성 참정권, 주 5일제나 최저임금도, 모두 계급투쟁ㄸ 결과로 쟁취된 것이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파견법과 기간제법을 폐지하고 싶다면, 그에 준하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싶다면, 그에 준하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때로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할 수 있다. 마르크스 역시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더욱더 확대되는 단결이다.」 즉,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은 항상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진정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으로서의 단결이다. 이를 통해 혁명이라는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힘을 가지는 것이다. 3) 배신적 개량과 진정한 개량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 노동자들은 일정한 개량을 성취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에 기초한 개량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초과착취에 기생하는 개량이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위기가 다시 도래하고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개량을 빼앗겨 왔다. 이제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지면서 심각한 공격에 맞닥뜨리고 있다. 한국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려온 약간의 개량은 투쟁의 성과인 측면도 있지만 비정규직 초과착취를 묵인하고 그것에 기생해 온 측면도 있다. 역시 지속될 수 없는 개량이다. 이런 부류의 개량들이 계급투쟁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투쟁에 기초한 개량은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여는 개량이다. 혁명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배신적 개량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과 투쟁에 입각해 획기적인 개량을 과감하게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혁명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 6. 국가권력의 문제, 점진적인 이행은 가능하지 않다 1) 파리코뮌, 노동자계급은 기존 국가권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18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수립된 파리코뮌은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이는 단지 ‘정부’ 교체가 아닌, 기존의 국가기구 자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창출한 사건이었다. 배경을 살펴보자. 1848년 2월, 프랑스를 지배하던 루이 필립의 왕정[40]이 혁명으로 붕괴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와 한 대열에서 공화정을 수립했고, 주도적이었던 세력은 프롤레타리아였다. 2월 혁명에서 파리 노동자들은 '사회공화국'을 외쳤다. 노동자계급이 요구한 ‘사회공화국’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노동할 권리,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에 대한 지향을 담은 슬로건이었다. 노동자계급이 공화국을 세운 2월 혁명의 핵심 동력이었음에도, 혁명으로 세워진 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을 배제했다. 맑스 말마따나 노동자계급이 혁명으로 쟁취한 것은 해방을 위한 투쟁의 지반이었을 뿐, 해방 자체는 아니었던 셈이다. 노동자계급이 세운 공화국에 노동자계급의 자리는 없었다. 임시정부 내 노동부서는 무기력했고, 미약한 개혁에조차 ‘사회주의’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나마 임시정부가 노동자계급에게 내준 국민작업장[41] 마저 곧 폐지될 예정이었다. 「노동자 대중은 다음과 같이 외치며 파리 시청으로 행진하였다 : 노동을 조직하라! 별도의 노동부를 설치하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와 공동으로 2월 혁명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 부르주아지와 나란히 그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노동을 조직하라! 그러나 임금노동, 그것이야말로 현존하는 부르주아적 노동조직이다. … 별도의 노동부를 달라! 그렇지만 재무부, 상업부, 공공사업부, 이것들은 부르주아적 노동부처들이지 않은가? 부르주아적 노동부처들과 나란히 서 있는 프롤레타리아적 노동부란, 하나의 무력한 부처, 천진난만한 소망의 부처 … 일 수밖에 없었다. … 국민작업장 … 반쯤은 소박하고 반쯤은 고의적인 파리 부르주아지의 혼동에 의해, 그리고 인위적으로 조장된 프랑스와 유럽의 언론에 의해, 저 노동수용소는 사회주의의 최초의 실현인 것으로 되었고, 그것과 함께 사회주의는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국민작업장은 그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칭을 통해서, 부르주아 산업과 부르주아 신용과 부르주아 공화국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의 증오란 증오는 모두 이 국민작업장에 쏟아졌다. … 소부르주아들의 온갖 불안과 온갖 불만이 공동의 표적인 이 국민작업장을 향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처지가 날로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되어 갈 때 프롤레타리아 부랑아들이 삼켜버린 액수를 분노에 차서 계산하였다. 일만 하는 척만 하면 국가가 연금을 주는 것, 이것이 사회주의로군! 그들은 이렇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1848년 6월, 국민작업장 폐쇄 방침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파리에서 봉기하자, 부르주아 공화국은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했다.[42] 그리고 이 유혈 진압은 반동의 길을 열었다. 봉기를 진압한 장군, 까베냑은 국민작업장을 공식 해산하고, 노동시간 제한법을 폐지하며, 모든 클럽(토론장)을 폐쇄하고,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등 반동 정책을 전면화했다. 부르주아는 노동자계급의 급진화가 두려워 '질서'를 원했고, 결국에는 공화국마저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모두가 동의할 법한 목표 뒤에는 적대적 계급 사이의 치열한 이해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패배와 함께 반동의 길로 접어들고, 1848년 12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조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는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구호 아래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해체하고, 이듬해 자신을 ‘나폴레옹 3세’로 선포하며 제2제정을 열었다. 이 체제는 산업 부르주아지와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관료적 독재체제였다. 맑스는 이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이름 붙이며 상이한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 속에서, 비대해진 자율적 국가권력이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국가 형태로 분석했다.[43] 제2제정 후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제국적 위신을 높이고 아메리카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멕시코 원정(1861-1867)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라틴 아메리카에 프랑스의 위성국가를 세우고자 군대를 파병했고,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이는 현지 민중의 격렬한 무장 저항과 미국의 강경한 반발에 부딪혀 완전히 실패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철수했고, 막시밀리안은 고립된 채 민중군에게 붙잡혀 1867년 처형당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큰 외교적 타격과 굴욕을 입었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는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자 모두와 협정을 맺고 양자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으나, 프랑스는 국제무대에서 고립되었다. 내부적으로도 1866년의 경제 위기와 식량 가격 폭등은 도시 노동자와 하층민의 삶을 파탄에 몰아넣었고,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확산되었다. 특히 파리에서는 제2제정 최초로 파업 진압을 위해 군대가 투입될 정도로 대중의 분노가 높아졌고, 정권은 외교, 경제, 정치 모든 면에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나빠르뜨는 모든 계급들에게 가부장적 은인으로 나타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급에게서 빼앗지 않고서는 그 어떤 계급에게도 줄 수 없다”[44]는 맑스의 말이 집약하듯,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여러모로 인기 없고 취약한 정부였다. 제국의 권위와 통치력은 급속히 흔들렸고, 이를 만회하려는 도박이 바로 전쟁이었다. 1870년 7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한다(보불전쟁).[45]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던 프로이센은 떠오르는 강국이었다. 프랑스는 연전연패 끝에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당했고, 프랑스 제2제국은 붕괴했다. 9월 4일, 온건 공화파들이 주도해 제2제정 종말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제3공화국).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수립된 ‘국민방위정부’였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히고 퇴위했지만 프로이센은 파리를 향해 계속 진군했다. 1870년 9월 이후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했고, 파리 노동자 민중은 프로이센 군대에 맞서 장기 방어전에 돌입했다. 두더지와 쥐까지 잡아먹을 정도의 처절한 항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파리의 부르주아들 사이에서는 “비스마르크가 블랑키보다 낫다”는 말이 떠돌았다. 부르주아들은 파리를 떠나기 시작했고, 노동자 민중이 파리 국민방위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1871년 1월 28일, 양국의 강화 협정이 이루어진다. 프로이센이 내건 조건은 가혹했다. 프랑스는 알사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할양하고, 5년 동안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프로이센과의 강화 교섭은 파리 노동자 민중 몰래 진행되었다. 이 강화 협상을 주도한 인물이 ‘아돌프 티에르’였다. 이제 비스마르크와 티에르가 합의한 ‘전후질서’를 공식 추인하고 굴욕적 평화를 프랑스에 관철할 체계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2월 8일 프랑스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총선거는 독일의 침략군이 43개 도를 점령한 가운데서 실시되었다.[46] 비스마르크의 의도에 따라 진행된 선거에서, 반동적 왕당파가 대거 의회로 진출했고, 공화파는 위축되었다. 이렇게 보수파가 장악한 국민의회가 출범했고, 파리는 더욱 고립되었다. 그러나 파리는 무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1871년 3월 18일, 티에르는 파리 노동자 민중에 대한 무장해제에 나섰다. 정부군이 파리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400여 문의 대포를 몰수하려 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수비대 병사들은 무기를 지켜내고 파리 주요 거점을 점거했다.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망쳤고, 파리의 실권은 노동자 민중 손에 들어갔다. 파리코뮌의 출범이었다. “파리의 반동배는 3월 18일의 승리에 전율하였다. 그들에게 그것은 인민의 복수가 마침내 몰려온다는 신호였다. 1848년 6월의 날들부터 1871년 1월 22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손에 살해된 희생자들의 그들의 눈앞에 일어났던 것이다.”[47] 3월 26일에는 파리 20개 행정구별로 주민 대표를 선출하는 코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9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파리코뮌 의회”가 탄생했다. 이어 3월 28일, 붉은 깃발 아래 첫 총회가 열렸다. 파리코뮌은 모든 공직자를 직접 선출했고, 언제라도 소환 가능해짐에 따라 관료제의 특권은 폐지되었다. 상비군은 해체되었고 무장한 민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었으며, 교육은 공공 무상교육으로 전환되었다. 파리코뮌은 기존 국가기구를 인수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원칙에 기초한 권력기구를 창출했다. 단순히 정부의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성격이 바뀐 것이다. 파리코뮌은 다음을 보여주었다. “노동자 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접수하여 이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은 중립적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조직이다. 경찰, 군대, 관료제, 사법부 등은 노동자계급이 그 지배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행동을 억제하는 억압기구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기존 국가기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진보적 법안’을 통과시키고, ‘공공 정책’을 확대해 나가면 혁명 없이도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면, 이는 파리코뮌의 교훈을 완전히 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코뮌의 경험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고타강령’ 초안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그는 국가의 ‘자유로운 인민국가’라는 표현을 비판하며, “국가는 본질적으로 계급 억압의 도구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 억압기구의 철폐를 목표로 한다”고 단언했다. 노동자계급의 국가, 파리코뮌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포화 앞에 고립된 채 맞서야 했다. 베르사유에 도피한 티에르 정부는 파리코뮌을 ‘무정부적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프랑스 지배계급에게 파리코뮌은 프로이센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티에르 정부는 파리 진압을 위한 군대를 프로이센에 요청했다. 승전국 지배계급과 패전국 지배계급이 노동자계급 진압으로 하나가 되었다. 5월 중순, 베르사유군은 파리 외곽을 돌파했고,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일주일’이라 불리는 참극이 벌어졌다. 거리마다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파리 노동자 민중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기를 들고 저항하다 학살당했다. 파리코뮌은 실패했다. 단지 군사적 패배 때문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전역의 민중과 연대하지 못했고, 재정적‧군사적으로 고립되었으며, 결정적으로 반동 베르사유 군대에 맞서 선제공격을 주저했다. 그러나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여준 새로운 국가형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남아있다. 2) 칠레의 경험 1970년 9월, 칠레 노동자 민중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옌데는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등 좌파와 중도좌파 정당이 결성한 ‘인민연합’(Unidad Popular, UP) 소속으로 출마하여 토지개혁, 대외 종속 탈피, 기간산업 국유화, 교육·보건 공공성 강화 등 개혁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아옌데 정부는 집권 이후 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던 구리 산업을 비롯해 은행, 석유, 통신, 제약 등 주요 부문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1971년 7월 11일 의회가 만장일치로 의결한 헌법 개정에 기초한 것으로, ‘초과이윤 조항’을 통해 미국 자본에 대한 보상을 최소화했다.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을 내건 아옌데 정부는 이러한 개혁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 채 합법적으로, 즉 기존 헌정질서의 틀 내에서 추진하려 했다. 사실 인민연합정부는 출범부터 의회제도를 비롯한 기존질서 유지를 ‘보장법’으로 약속했다.[48] 현존 정치체제와 사법체제, 교육제도·노동조합·사회조직의 사회주의 지향으로부터의 독립, 출판과 대중매체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독립 등을 서약하며 제도 내에 존재할 것을 다짐하고서야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골격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자본은 아옌데 정부에 극렬한 반격을 개시한다. 칠레 자본가계급은 보수 언론과 정당, 교회, 자본가 단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아옌데 정부를 흔들었다. 특히 1972년 10월에 발생한 '트럭 소유주 연맹'의 대규모 파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파업은 CIA가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기획한 것으로, 물류망을 마비시켜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의회 다수와 사법부는 인민연합 정부의 경제 개입 조치를 '합법성 결여'라 비판하며 사보타주에 나섰고, 1973년 8월 22일에는 하원이 아옌데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미 그 무렵 칠레 군대는 우익 쿠데타 세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칠레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가 정한 틀 내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경제를 마비시키려는 자본의 사보타주와 군부의 쿠데타 위협 속에서, 1972년부터 1973년까지 노동자 민중은 공장과 지역에서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권력기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산업조정위원회(cordones industriales, 직역하면 ‘산업 벨트’)이었다. 코르돈(산업조정위원회)은 작업장과 지역 단위를 잇는 노동자 조직으로 공장점거, 생산통제, 분배 조정, 쿠데타에 맞선 방어조직 형성 등을 수행했다. 유통부문에서는 노동자와 주부, 학생들이 '민중공급위원회'(공급과 물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식량과 필수재의 배급을 자율적으로 조정했다. 산업조정위원회와 민중공급위원회처럼 노동자 민중이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고자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들이 전국으로 확장되고 이것이 정부의 지지, 지원과 결합할 경우, 이것이 ‘이중권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옌데 정부는 이런 조직을 잠재적 권력기구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놀라게하는 성가신 존재들로 취급했다. 1973년 6월,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하자 코르돈 조직은 수십 개의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과 물자 이동을 자체적으로 통제하며 반격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는 이 흐름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화된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했고, 위기 타개를 위해 피노체트를 내무장관으로 기용하는 타협을 선택했다. 이는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쿠데타를 단행했고,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자결했다. 칠레 군부는 대대적 학살을 자행했고,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에서 밀턴 프리드먼에게 학습한 신자유주의 교리로 무장한 경제학자 집단,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가 있었다. 이들은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고삐 풀린 시장 개방,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동권 축소, 복지 철폐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이후 IMF가 세계 곳곳에 강요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원형이었다. 아옌데 정부가 추구한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로운 길’은 무참히 짓밟혔고, 군부와 자본의 연합은 칠레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으로 몰았다. 칠레의 비극은 단지 민중연합의 적들이 악랄해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중립성’에 대한 환상, 부르주아 헌정질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에 대한 집착, 그리고 노동자 민중이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투쟁과 기구에 대한 방기. 이것이야말로 ‘체제 내 사회주의’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혁명이 배제된 사회주의는, 자본이 허용하는 만큼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3) 그리스의 경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이어진 유럽 재정위기는 남유럽 국가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그리스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였다.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구성된 ‘트로이카’는 그리스 정부에 퇴직연령 상향, 연금 삭감, 최저임금 삭감, 단체교섭 제한, 해고 요건 완화, 공공부문 축소 등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그리스 실업률은 30%에 가깝게 치솟았고, 청년실업률은 50%를 넘겼다. 분노한 대중은 기존과는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49] 이런 상황에서 ‘시리자’(SYRIZA)와 같은 급진 좌파 정당들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급진좌파연합’ 이라는 뜻의 시리자는 2004년 여러 좌파정당의 연합체로 결성되었고, 이후 2012년에 하나의 통합 정당으로 재편되었다. 시리자는 긴축정책에 맞선 대중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면서 지지층을 빠르게 넓혀갔다. 시리자는 2012년 5월 1차 선거에서 16.8%, 6월 2차 선거에서 26.9%를 얻어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를 제치고 제2당으로 부상했다. 2009년 선거에서 4.6%를 획득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결국 시리자는 2015년 1월 총선에서 36.3%를 득표하며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트로이카가 강요하는 긴축안에 맞선 대중투쟁이 시리자의 집권 배경이었다. 긴축을 둘러싼 협상이 시작되었다. 트로이카는 강경하게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고, 그 강경함 뒤에는 다른 채무국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7월 9일, 시리자는 굴욕적 긴축안을 트로이카에 제출한다. 2015년 7월 5일 긴축 찬반을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긴축 반대'를 결정하고 단 4일이 지난 뒤였다. 7월 12일, 그리스와 트로이카가 합의한 긴축안은 △연금 삭감 △노동유연화 △해고 공무원 재고용조치 등 구제금융 합의에 위배되는 법률 철회 △500억 유로 규모 국유자산 민영화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대중의 기대를 품고 집권한 시리자는 트로이카의 긴축안 집행자로 전락했다. 시리자의 몰락은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몰락 경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급투쟁의 발전 전망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시리자의 굴복이 남긴 상처는 더 컸다. ᅠ 명백히 드러났듯, 긴축의 중단은 열강의 대리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리자는 트로이카와의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힘에 호소했어야 한다. 또한, 유럽노동자계급의 연대를 구하며 트로이카의 악랄한ᅠ강요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어야 했다. 그 힘과 함께 ‘유로존 탈퇴’라는 도약을 감행하지 않고, ‘긴축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ᅠ 시리자가 부상하던 당시, ‘혁명과 개량의 이분법을 넘어서자’는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는 지금, 시리자의 몰락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7. 왜 다시 혁명을 말하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낡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제도를 바꾸고, 점진적인 개혁으로 사회를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나가자는 생각의 한계는 앞서 살펴본 역사적 경험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 법과 제도에 순응한 채로는 결코 스스로의 해방을 실현할 수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 극우의 부상, 확산하는 전쟁 위기, 기후재앙, 지구적 불평등은 모두 자본주의가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는 신호다. 우리가 다시 혁명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이상적 구호가 아니라,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 씨앗, 혁명의 가능성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대중투쟁 속에 자라고 있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이 파업과 광장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직접적인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전체 노동자 민중의 요구로 투쟁의 범위를 확대할 때,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 단결할 때, 우리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에서 목격한다. 그것은 의회나 정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 스스로가 만드는 힘이다. 노동자계급이 사회를 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며, 억압과 착취 없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이다. 혁명은 여전히, 아니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참고로 읽어보면 좋을 자료 정성진,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 (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중, 한울 아카데미) 프리드리히 엥겔스, 1891년 사회민주주의당 강령초안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중, 박종철출판사) 칼 마르크스, 프랑스 내전, 박종철출판사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풀무질 .footnote-ref, .footnote-target { scroll-margin-top: 200px; color: #E60012; text-decoration: none; } .footnote-ref:hover, .footnote-target: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1] 황동하,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 사회민주당의 방어전쟁과 로자 룩셈부르크」, 2014 [2] 트로츠키, 『나의 생애 上』, 범우사, pp.370-371. [3] 제프 일리, 『THE LEFT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1848~2000』, 뿌리와이파리, pp.245-247. [4] 맑스는 1864년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서한을 보내 재선을 축하한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이 중간계급의 권력을 신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제친 것처럼, 아메리카의 노예제 반대 전쟁이 노동자 계급의 권력을 신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 맑스,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5]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 여러 제후국들로 쪼개져 있었다. [6] 독일 사회민주당은 실천적 필요에 의해 탄생했으나, 당 내 이론적 차이는 지양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7] 정성진,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아카데미 [8]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pp.247-248. [9] 수정주의는 노동자의 권력 장악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으나 혁명에는 반대했다. 즉, 점진적인 사회개혁과 선거를 통한 집권이 그들의 노선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은 권력 장악 자체에 반대했다. 물론 오늘날 양자의 큰 차이는 없다. [10] 베른슈타인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블랑키주의적 봉기로 생각했다. ‘블랑키주의’는 소수의 비밀스러운 혁명가 집단이 봉기로 국가권력을 전복하고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다는 이념을 뜻한다. 이런 사고는 19세기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로부터 비롯되었다. [11] 사회민주당의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동조적 입장은 이미 증기선 보조금 논쟁에서 드러난바 있다. 1884년, 독일 제국은 서아프리카의 토고, 카메룬 등의 영토를 식민지로 편입하면서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작했다. 해외 식민지 방어와 통상 보호를 명분으로, 독일 정부는 증기선 구매 예산안을 제국의회에 제출했다.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후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개정)은 이 예산안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특히 항만 도시 함부르크 출신 의원들은 찬성 입장을 보였는데, 증기선 건조와 통상 확대가 노동자 고용 확대와 지역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실용적 이유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당은 증기선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이 논쟁은 식민지 획득 경쟁에 대한 사회주의 정당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대한 정치적 시험대였다. 제국주의 문제를 놓고 사회민주당 내 균열은 커지고 있었다. [12]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한길사, p.59. [13] 아이작 도이처,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pp.293-294. [14] https://en.wikipedia.org/wiki/Hun_speech [15] “황제들과 제국들은 오래된 것이지만 제국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1883년 사망한 마르크스의 저술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제국주의란 단어는 1870년대에 영국에서 처음 정치적 용어로 등장했으며 1870년대의 마지막 무렵까지도 새로운 용어로 간주되었다. 그것이 일반적 용법으로 사용된 것은 1890년대였다.” 에릭 홉스봄, 한길사, 『제국의 시대』, p.159. [16]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bernstein/works/1899/evsoc/ch03-3.htm#n33 [17] “논리적인 비스마르크는 이미 1880년대에 야심에 찬 사회보장계획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선동 기반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으며, 그의 이러한 경로를 오스트리아와 1906~1914년의 영국 자유주의 정부가(연금, 공공노동교환, 의료·실업보험), 그리고 몇 차례에 걸친 주저 끝에 프랑스가(노인연금 지급, 1911년) 뒤따르게 되었다. 매우 흥미롭게도, 최근에 ‘최고의 복지국가’라 불리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당시에는 이러한 경향에 매우 뒤처져 있었고 다른 여러 나라들은 그저 형식적인 태도만을 취하고 있었으며, 카네기와 록펠러와 모건의 미국은 그와 같은 정책들이 전무했다.”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p.224. [18] 엥겔스, 「1891년 사회민주주의당 강령초안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박종철출판사, pp.347-348. [19] 아이작 도이처,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pp.293-294. [20]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6/mass-strike/ch08.htm [21] https://de.wikipedia.org/wiki/Massenstreikdebatte [22] 1905년 12월,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언론인을 가장해 러시아로 잠입해 러시아 대중파업을 직접 관찰했다. [23]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24] “미숙련 노동력의 공장유입과 전쟁이윤에 대한 탐욕스러운 각축은 모든 곳에서 노동조건의 하락을 초래하고, 가장 야만적인 착취방법들을 등장시켰다. 생활비의 증가는 자동적으로 실질임금을 하락시켰다. 경제파업은 이에 대한 대중의 불가피한 대응이었다. 특히 이 투쟁이 개전으로 유보되어 왔기 때문에 그 규모는 폭풍우와도 같았다. 파업은 집회, 정치선언문의 채택, 경찰과의 대치, 그리고 종종 발포와 희생자 발생으로 이어졌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풀무질, pp.74-75. [25] “농민들은 공산품을 입수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는 급속히 가치가 떨어져 가는 지폐를 받고 농산물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물건이 심각하게 부족해짐에 따라 임금과 뛰어오르는 생활비 사이의 격차가 커졌다. … 생필품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서 실질임금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수준의 3분의 1정도로 줄어들었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교양인, pp.34-35. [26] 오스카 안바일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지양사, 116p. [27] 오스카 안바일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지양사, 116p. [28] 1905년과 달리,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연합 평의회 형태였다. [29] 페로(M. Ferro), 《1917년 2월 러시아혁명》, 60p, 페로, 《10월혁명》, 183p. 도니 글룩스타인, 『서구의 소비에트』 28쪽에서 재인용. [30] https://www.marxists.org/history/ussr/government/1917/03/01.htm [31] 볼셰비키 역시 ‘다가올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우선 부르주아 혁명을 거친 후, 한참 뒤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다가올 것이었다. 하지만 1917년 4월, 레닌이 돌아오자마자 이 입장을 뒤집는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이 테제는 볼셰비키는 물론, 당시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테제는 레닌의 이름으로만 발표되었다. … 레닌과 함께 이 문서에 서명한 조직, 그룹, 개인은 하나도 없었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 풀무질, p.422. [32]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분열 후 형성된 온건 사회주의 세력. 1917년 당시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의 완성을 주장했다. [33] 이 해협 지대는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3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해협을 차지해 지중해 진출 경로를 확보할 예정이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북아프리카 등 지역을 차지할 예정이었다. [34] 「“전쟁을 끝내라!” … 이 구호는 여성 시위대, 뷔보르그지구 노동자들, 근위병 연대에서 터져나왔다. 3월초 의회의원들이 전선을 순시했을 때, 특히 나이 많은 병사들은 계속 이런 질문을 했다 : “토지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오가고 있습니까?” 의원들은 토지문제는 제헌의회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그러나 여기서 모두가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공공연히 드러내지 못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 “글쎄, 토지는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필요 없지요.” 먼저 평화, 다음에 토지! 이것이야말로 혁명을 일으킨 병사들의 원래 강령이었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풀무질, pp.370-371. [35] 레닌, 「임시정부의 각서」, 1917.4.20.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apr/20f.htm [36] 레닌, 「슬로건에 관하여」, 『지젝이 만난 레닌』, 교양인, pp.102-103. [37] “이즈음 볼셰비키의 운세는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 코르닐로프 사건 이후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는 다수를 확보했다. … 레닌이 4월 테제에서 예견한 대로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의 이행을 정당화시킬 제 조건이 꾸준히 성숙하고 있었다. 레닌의 첫 태도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의 부활이었다.“ E.H.카, 『볼셰비키 혁명사』, 화다, p.111 [38] “소비에트 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소비에트에 권력이 집중되었다면, 볼셰비키당은 소비에트의 다수파가 될 완벽한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자신의 강령에 기초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무장봉기는 필요 없었을 것이며, 정당 간의 권력 이양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4월부터 7월까지 당은 소비에트를 통한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라“ ― 이것이 볼셰비키당 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7월 시기로 인해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中』 , 풀무질, 410p. [39]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0/reform-revolution/ch08.htm [40] 1830년 7월 혁명으로 등장했다는 이유로 ‘7월 왕정’이라고 불렸다. [41] 말하자면 당대의 공공근로 사업장이라고 할 수 있다. 1848년 2월 27일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국민작업장은, 파리 및 다른 도시의 실업노동자들을 위한 공공 구호시설로,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빵과 소금을 받았다. [42] “부르주아 공화제가 승리를 거두었다. 금융 귀족, 산업 부르주아지, 중간층, 소부르주아들, 군대, 기동방위대로 조직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지식인들, 성식자들, 농촌 주민 등이 부르주아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한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 승리 후에 3,000명 이상의 폭동 가담자들이 학살당했고, 15,000명이 재판도 없이 추방되었다. 이 패배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무대의 뒷전으로 물러선다.”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43] “강력하고 무제한적인 정부는 이 ‘물질적 질서’를 폭력으로 옹호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모순으로 가득 찬 임무는 그의 정부의 모순들, 즉 이번에는 이 계급 다음 번에는 저 계급을 때로는 획득하려 하고 떄로는 굴복시키려 함으로써 결국 모든 계급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드는 불명확한 암중모색을 설명한다.” - 같은 책 [44] 같은 책 [45]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은, 프로이센 왕가(호엔촐레른 가문)에 속한 레오폴트 후작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프랑스가 반대하면서 격화된 외교 분쟁이었다. 스페인 왕위를 호엔촐레른 가문이 계승할 경우, 프랑스는 남쪽과 동쪽 모두에 적을 두게되는 셈이었다. [46]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까치, 291p. [47] 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4권』, 박종철출판사, p.57 [48] 1970년 9월 4일, 아옌데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당시 칠레 헌법에 따라,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국회가 상위 두 후보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했다. 아옌데의 인준을 위해서는 기독교민주당(PDC)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은 아옌데 정부가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을 요구했다. [49] 기존 그리스 정치판도는 중도우파 신민주주의당(ND)과 중도좌파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 (PASOK)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던 구조였다. [앞선 시리즈 읽기] #2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 [다음 시리즈 읽기] #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
[정치캠프] 홍보영상오프닝세션: 내란 사태 1년, 나는 왜 연대시민에서 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하는가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2일차 전체세션: 약탈과 전쟁 • 학살로 치닫는 자본주의 국제질서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2일차 선택세션: 폭발하는 아시아 민중투쟁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2일차 선택세션: 학생운동 재건,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3일차 전체세션: 이재명 정부에 맞선 투쟁,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3일차 선택세션: 노동자 운동으로 빵과 장미를!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3일차 선택세션: 임박한 발전소 폐쇄, 노동자 기후총파업으로 돌파하자!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
[주간 여성뉴스 브리핑] 건보고객센터지부, “정부 약속 지키지 않으면, 26일부터 총파업”1. 건보고객센터지부, “정부 약속 지키지 않으면, 26일부터 총파업” [사진 | 노동과세계] 경기지역 총파업 결의 대회 장면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가 정부가 정규직 전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총파업에 돌입할 전망이다. 지부는 5년째 정부에 요구해 온 정규직 전환 약속이 이행되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조건이 후퇴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지부에 따르면, 정부는 2021년 비정규직 전환 TF에서 상담 노동자 1,633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으나,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이를 1,615명으로 축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공단은 본사 관리직을 늘리는 대신 상담 노동자 수를 86명이나 줄이는 안을 내놔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지부는 공단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식 조치로 상담 품질이 저하하고 국민 불편이 가중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지부는 7월 15일부터 순환파업을 이어왔으며, 지난 10일에는 서울, 강원, 경기, 대구, 부산 등 전국 5개 지역에서 '노동이 바로 서야 국민이 건강하다! 생활임금 쟁취! 정규직 전환 쟁취!'를 내걸고 전국동시다발 총파업 결의대회도 진행했다. <참조 기사>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8404368 https://m.blog.naver.com/newsfield_/224071475482 2. 중국, 성소수자 콘텐츠 단속 강화 속에 인기 데이트앱 삭제 중국 정부는 애플과 안드로이드 앱스토어에서 중국 최대 퀴어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게이 데이트앱)인 블루드(Blued)와 핀카(Finka)를 삭제했다. 이번 서비스 중단으로 중국 정부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대한 단속과 통제를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즉각 우려를 표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성소수자 커뮤니티 창립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성소수자의 일상공간이 줄어들고 있는데, 온라인까지 줄고 있다”며 “블루드 같은 앱은 공동번영에 기여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한 위챗 사용자는 “(블루드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중국은 1997년 동성애를 비범죄했다. 오랫동안 ‘동성애에 대해 인정하지도, 반대하지도, 장려하지도 않는다’는 소위 ‘3불정책’을 시행해 왔다. 그러나 중국에서 성소수자는 차별받아 왔고 경제와 인구위기 관리 속에 점점 억압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해산되고, 2020년부터 퀴어퍼레이드가 중단되고 2023년에는 베이징 성소수자센터가 15년 만에 폐쇄되었다. 중국사이버공간관리국은 ‘만리장성’으로 알려진 거대한 정부 차원의 온라인 검열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성소수자에 관한 콘텐츠를 단속하고 있다. 이번 데이트앱 삭제 전에도 단메이*를 문제 삼아 대부분 여성인 작가들을 체포, 심문하고 온라인 사이트를 폐쇄하기도 했다. (*단메이는 중국에서 인기 있는 동성애 소설 장르다. 청년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 사회의 압력을 받으며 이상적이고 평등한 사랑을 꿈꾸며 즐겨 본다) 노팅엄 대학교에서 중국 퀴어 문화를 연구하는 바오 홍웨이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국 정부는 민족주의적 담론을 지지하고 있으며 성소수자 문화는 서구 이념에 동조하는 매우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밝혔다. 노르웨이 북극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인 마크 랑테인은 “인구에 더 큰 순응성을 조성하기 위해 전통적인 가족적 가치관, 남성적 가치관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제기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미래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성애 대가족을 장려하며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쉬운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참고 기사> https://www.france24.com/en/asia-pacific/20251114-bars-pride-and-dating-apps-how-china-is-closing-down-its-lgbt-spaces?utm_source=chatgpt.com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5/nov/11/china-removes-gay-dating-apps-blued-finka-apple-android-lgbt-rights?utm_source=chatgpt.com 3. 여성 공무원 백댄서 논란에 시민단체 ‘장기자랑 강요’ 신고 접수 광주 북구청 여성 공무원들이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구청장의 ‘백댄서’로 춤을 춰 논란이 일자, 시민단체가 장기자랑 강요 문제를 근절하겠다고 나섰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연말 장기자랑 강요’ 신고센터를 오는 12월 16일까지 운영한다고 밝혔다. 단체는 “사회복지시설을 포함한 다양한 일터에서 직원에게 장기자랑·공연을 사실상 강요하는 사례를 접수해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근로감독 청원 등 후속 조치를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앞서 이 단체는 지난 2월 18일∼3월 19일 사회복지종사자 414명을 설문한 결과 28.1%가 ‘회사에서 장기자랑이나 공연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전했다. 6월 1일∼7일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직장인 1천 명에게 조사했을 때도 ‘회식이나 단합대회에서 분위기를 띄우려면 직원의 공연이나 장기자랑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참조 기사>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2016930 4. 지난해 여성고용률 62.1%, 역대 최고치 … 고용의 질적 측면 고려해야 16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간한 ‘최근 여성노동시장 주요 특징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5세~64세 여성고용률은 62.1%였다. 이는 조사 이래 가장 높은 수준으로, 여성고용률 고공행진에는 ▲미취학자녀(0세~6세)가 있는 여성 비중의 감소 ▲가구독립 ▲미혼증가 ▲고학력 증가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일자리의 질적 측면에서는 남녀 격차가 여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성 취업자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그중 ‘양질의 일자리’를 얻은 여성은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성희 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여성의 경우 상대적으로 취업이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어 기대 임금 수준을 낮게 잡고, 고용 안정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비교적 취업의 장벽이 낮아 보이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참조 기사> https://www.news1.kr/economy/trend/5969005 5. 젠더퀴어의 화장실 사용 지침을 둘러싼 법적 공방, 영국 고등법원 심리 진행 영국 고등법원은 평등인권위원회(EHRC)가 올해 4월 발표했다가 철회한 젠더퀴어의 화장실 사용 지침에 대해 굿 로 프로젝트(GLP)를 비롯한 세 명의 익명 원고가 제기한 소송을 심리했다. 해당 지침은 병원·상점·식당 등에서 지정 성별(출생 당시 의료진이 지정한 성별)에 따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고 명시해,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이용 제한 논란을 불러왔다. 젠더퀴어는 성별 이분법과 시스젠더 규범성에 벗어난 성 정체성을 말한다. 지침에 따르면 트랜스 여성은 여성용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고, 남성용 또는 성중립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이는 대법원이 같은 달 ‘여성’과 ‘성(sex)’을 생물학적 성별로 해석한 판결을 내린 직후 발표됐다. 원고 측은 지침이 과도하게 단순화돼 법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트랜스젠더의 생존권 침해 과정에서 수반되는 “공포감”을 조성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원고 중 한 명인 트랜스 남성은 외형상 남성이지만 지침 발표 후 직장에서 남성용 화장실 사용을 금지당해 큰 불편을 겪었다고 밝혔다. 반면 EHRC는 해당 지침으로 인한 실제 권리 침해 사례가 없고, 지침은 이미 사실상 철회됐으므로 소송은 기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 측이 지침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 가운데, 영국 내 일부 단체들은 지정 성별에 의거한 화장실 공간 사용이 개인 프라이버시와 안전에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EHRC는 평등을 촉진하고 차별과 불이익 근절을 담당하는 영국 공공기관으로 국내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사하다. 판결은 추후 서면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참조 기사> https://www.bbc.com/news/articles/cddrjq9764yo 6. 육아·집안일, 여성이 남성의 3배 … 정부 지원 확대해야 저출생과 여성의 경력단절, 남녀임금격차 해소 방안으로 가사돌봄서비스에도 세제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가사돌봄플랫폼협회와 민주당 서영교 의원실은 14일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인공지능(AI) 기반 가사돌봄 벤처기업과 함께 인구위기 답을 찾다’를 주제로 ‘제4차 인구미래포럼’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가사 돌봄 시장의 미래와 대응 과제’에 대한 발제를 맡은 김경선 한국공학대학교 석좌교수(전 여성가족부 차관)는 “여자가 혼자 돈을 버는 경우에도 여자가 더 오래 가사노동을 한다”면서 가사 서비스 활성화를 위해 세제 혜택 지원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하루 평균 가사 노동시간은 2024년 기준 남성 69분, 여성 206분이다. 문제는 인구미래포럼 참여자들이 제시한 여성의 가사돌봄 부담완화 해법이다. (인구미래포럼은 서영교 의원 주도로 저출생·고령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가·정책당국자들과 논의를 이어가는 연속포럼이다.) 이들은 “가사·돌봄 서비스 플랫폼의 등장으로 이용자가 원하는 시간에 합리적 비용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며 AI(인공지능) 기반 가사·돌봄 스타트업 서비스의 등장과 기대효과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가사‧돌봄 체계 수립을 위해 국가 책임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안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구상일 뿐이다. 영리 추구를 본령으로 하는 민간기업을 육성‧지원하겠다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조 기사>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9682 -
[사회주의 기초학습#2]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자본주의의 출현 우리는 자본주의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우리는, 자본가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특정한 기능과 역량을 습득해서 어딘가에 취업을 하고, 월급을 받아서 그 돈으로 나의 경제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해 생활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길게 놓고 볼 때, 자본주의 생산양식(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자본주의 생활양식)이 출현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약 2~300만 년이라고 보면, 그 중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선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해 본격적인 식민화와 수탈로 상업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을 시작한 시점으로 보더라도 약 500여 년이고, 산업혁명을 거치며 비약적으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보면 대략 300여 년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출현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1강에서 살펴보았듯, 인류의 생산력 발전과 함께 원시적 공동소유가 사라지고, 국가와 함께 계급사회가 출현했다. 이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사회는 그 구체적 형태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계급사회였다. 그런데 이 계급사회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들이 있다.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생활상을 잠시 살펴보자. <타작>, 김홍도 <타작>을 보면 갓 쓴 양반이 누워 누가 열심히 하고 누가 농땡이를 피우는지, 농민들이 수확하는 걸 감시하고 있다. <타작>에 나오는 양반과 농민은 오늘날 사장과 노동자처럼 자유로운 근로계약을 체결한 관계가 아니다. 태어나 보니 누구는 양반이고, 누구는 상민이며, 계급적 차이는 혈통과 법률 속에 명시적으로 선언됐다. 농민은 양반의 논밭에서 일하고 일한 것 중 일부를 양반에게 갖다바쳐야만 했다. 양반과 농민이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은 모두에게 분명했으며, 양반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소비수단이 농민의 노동의 일부를 떼어간 것이라는 점은 명확했다. <길쌈>, 김홍도 <길쌈>을 보면, 아기를 업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길쌈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월급을 벌어서 필요한 옷을 비교해가며 사입는 게 당연하지만, 조선시대 때는 많은 농가에서 직접 길쌈을 하고, 마름질을 해서 옷을 재단해 입었다. 1년에 두 번 어렵게 만든 그 옷감으로 새로 옷을 지은 것을 ‘설빔’과 ‘추석빔’이라 불렀다. 즉 상품판매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을 했다. 당시에도 나에게 필요한 재화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품판매는 전면화 되어있지 않았고, 부분적으로만 상품교환이 이뤄졌으며, 핵심적인 경제생활은 자급자족을 통해 이뤄졌다. <타작>은 당시 조선이 봉건적 신분관계에 기초한 사회였음을, <길쌈>은 아직 상품교환이 전면화되지 않은, 자급자족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이러한 ‘전근대적 생산관계’에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만 형성된다. (1강에서 ‘이중혁명’으로 요약하였듯이) 이런 봉건적 생산관계로부터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노동자들을 ‘신분제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신분제가 타파돼야 한다. <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 - 장 피에르 위엘(Jean-Pierre Houël)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으로, 봉건제적 신분관계를 혁명으로 뒤엎은 상징적 사건이다. 세계 곳곳에서 이와 유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봉건적 신분관계가 타파되었고, 노동자들은 신분의 구속에 얽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두 번째로, 노동자들을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이다. 인클로저란 ‘울타리치기’를 의미하는데, 농사를 짓던 땅에 지주가 울타리를 쳐서 농민들을 쫒아내는 걸 의미한다. 17세기 경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면서, 지주는 울타리를 치고 농민을 쫒아낸 뒤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농민들로부터 잉여농산물을 수취하는 것보다 양털을 깎아 파는 게 더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토지로부터 쫒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와서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된 ‘노동자계급’이 됐다. 즉 인클로저 운동은 대량의 무산계급(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를 낳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발전을 가속화하는 계기였다. 자급자족적 생산이 보편적인 사회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기 노동을 투여해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의 탄생과정과 함께,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도시로 밀려들어 노동자계급이 됐다. 가내수공업에서 매뉴팩쳐, 기계제 대공업까지 협업과 분업, 노동수단의 발전은 개별 노동자들을 오로지 전체 생산과정에서 부분적 기능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부품으로 전락시켰다. 이로써 근대의 노동자는 이전 시대 노동자가 갖고 있던, 다양한 생산물을 직접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자본에게 고용되어 ‘부속품’으로 역할하지 못하면 스스로 생계수단을 생산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자본주의의 평등하고 불평등한 풍경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제 ‘자유로운 계약관계’를 체결하게 된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고, 노동자는 노동력을 소유한 계급이다. 둘은 서로 ‘임금’과 ‘노동제공’을 등가물로 교환한다. 노동계약관계가 체결되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일을 시킬 권리가 있지만, 대신 임금을 지급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줘야하는 의무가 있지만,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는 강제계약이 아닌 ‘자유계약’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보고 “너 이 회사에 들어가서 일해야 해”라고 감금하거나, 협박하거나, 납치한게 아니다. 형식상 노동계약은 언제나 노동자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다.[1] 그러나 노동자라면 노동경험으로부터 자연스레, 이것은 형식적으로만 자유계약이고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불평등계약이라는 걸 체감한다. 노동계약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조건은 ‘노동제공과 임금의 교환비율’이다. 다시 말해 ‘일을 얼마나 할지’ ‘댓가를 얼마나 줄지’를 정하는 것이고, 간단히 말하면 ‘임금과 노동시간’의 결정이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대등한 계약이기 위해서는 마치 당근마켓에서 중고물품을 살 때와 같이, 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해 협상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개별 자본가와 노동자의 노동계약 과정에서, 임금과 노동시간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매우 특수한 기술적 능력이 있는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보편적으로 노동자는 그저 자본가가 시키는 대로 순응해야한다. 자본가가 “얼마 줄테니 와서 일해”라고 하면 노동자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할 뿐이고, “우리는 출근시간이 9시까지야”라고 하면 “네 늦지 않게 나갈게요”라 답하고 출근한다.[2] 자본가는 생산수단이 있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이 있는데, 왜 협상에서 양자 간 권력관계가 발생할까? 사회의 다수를 점하는 노동자들은 취업하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야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가 어떤 식으로든 협상을 해보려고,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거나,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자본가는 대개 “당장 그만두라”고 한다. 자본가 입장에서 개별 노동자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이 노동자를 해고해도 노동시장에서 이 노동자의 업무를 대체할 사람을 손쉽게 고용할 수 있다. 반면에 노동자는 취업상태에서 노동계약관계가 단절되면 당장 생존의 위협에 내몰린다.[3] 노동자들이 노동계약관계에서 구조적 약자인 일차적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며,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판매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급이라는 데 있다. "At the end of the day it's another day over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또 하루가 지나가지 With enough in your pocket to last for a week 일주일 먹고 살 정도의 돈을 주머니에 넣고 Pay the landlord, pay the shop 집세 내고, 외상 갚고 Keep on working as long as you're able 몸이 성할 때 일해 Keep on working till you drop 짤릴 때까지 일을 해 Or it's back to the crumbs off the table그렇지 않으면 빵부스러기나 주우며 살아야 할걸"[4]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은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의 상태를 대비해 보여주고 있다. 도시로 밀려든 농민은 노동자가 되었는데, 취업을 하지 못한 노동자는 거리를 방황하며 생존의 벼랑에 내몰려 있다. 반면에 취업을 한 노동자는 관리자가 노골적으로 성추행을 해도, “일할 수 있어 복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이 구조가 고착화되며 노동자들이 이제는 취업을 해 먹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 자본주의 생산관계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오늘날 자본주의의 작동모습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겉으로는 ‘임금’과 ‘노동제공’의 평등한 교환관계에 기초해보이는 자본주의 생산과정이, 실제로는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exploit)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과정인지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의 논의를 따라 설명하려 한다. 이상향을 계획하는 대신 자본주의의 원리를 밝혀낸 마르크스 산업혁명을 전후한 시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빈부 격차와 사회적 대립이 극심하게 벌어졌다. 기존 인류 역사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생산력 발전이 이뤄질 때 자본가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들은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다. 오늘날은 ‘사회주의자’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심각한 생활조건과 자본주의의 폐해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 백가쟁명식 의견을 내고 있었다. (1강에서 살펴보았듯) 대표적으로 생시몽, 푸리에, 오언 같은 이들이 있었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본주의라는 비인간적인 체제를 철폐하고, “효율적이고 공정하고 계획되는” 사회주의라는 이상향을 실현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마르크스도 물론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택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방법은 예컨대 아래와 같았다. “필요한 모든 것은 이상적인 사회를 계획하고,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을(또는 둘 다를) 그 계획에 끌어들이고, 소규모로 그것을 실험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자상한 분별력에 의지하는 것뿐이라고 그들은(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믿었다. 그리하여 유명한 영국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은 제목만으로도 주제를 짐작할 수 있는 《새로운 도덕적 세계에 관한 책》을 썼다. ... 책의 끝머리에서 오웬은 대영제국의 국왕인 윌리엄 4세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본서는 ... 새로운 도덕적 세계의 근본 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사회를 재건하고 인류의 품성을 재창조하기 위한 새로운 토대를 놓고 있습니다. ... 사회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상상력에서 출발했으며, 세계에 관한 인간의 모든 관례와 사회 제도는 이러한 잘못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 폐하, 폐하가 통치하시는 동안, 온갖 사악한 결과를 낳은 이 제도가 자명한 진리에 토대를 두며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보장하는 다른 제도로 반드시 변하리라 믿습니다.”[5]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또한 유물론적 역사파악을 통해 해석한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활동하던 19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고, 이를 반영하는 노동자의 계급투쟁도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다. 계급투쟁이 미발전된 상태였기에,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노동자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자력 갱생의 능력이 없으므로 기껏해야 외부로부터나 위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신분”으로 보였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미성숙 상태, 미성숙한 계급 상황에 미성숙한 이론들이 조응”했고, “사회적 과제들의 해결은 발전하지 못한 경제적 관계들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산출”됐다. 즉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미발전, 그리고 계급투쟁의 미발전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조건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수단을 계급투쟁으로부터 찾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계급투쟁이 들어가야할 자리를 “새롭고도 한층 완전한 사회 질서의 체계를 발명하는 것, 그리고 선전을 통해서, 가능하면 모범적 실험들의 실례를 통해서 그 체계를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하는 것으로 대체했다.[6] 이런 다양한 사회주의자들과 비견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표현했다. (1강에서 살펴보았듯)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위에서 역사를 만든다’는 유물론적 역사관을 정립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바탕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머리로(공상으로)’ 수행했던 과제를,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했다.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은 왜 중요한가? 노예제와 봉건제 시대에 노동하는 인간(노예와 농노)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자신의 노동의 일부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은 너무 명백했다. 노예는 애초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고, 농노는 나흘은 자기 토지에서 일하고 이틀은 영주의 토지에서 일하는 등,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이 분명히 구분됐다. 그러나 노동자는 외견 상 자유롭다. 일을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고, 일하는 댓가로 약정된 임금을 받는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는 외견 상 드러나지 않고 은폐돼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착취를 은폐하고 있는 장막을 찢어버렸다.”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에 대한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밝힌데 있다.[7]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체계적인 착취와 수탈에 기반하고 있고, 이윤 축적을 위해 착취와 수탈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자본의 운동이 차별과 혐오, 공황과 전쟁, 기후재난 등을 끊임없이 불러오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는 특히 당시에 노동자계급을 향해 일체의 ‘투쟁무용론’을 제기하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일차적으로는 노동자가 투쟁을 통해 착취를 제한하고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끝내는 주체로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의 필요성과 가능성, 그리고 정당성을 입증했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이란 철학적 개념을 사용해 역사의 유물론적 전개과정을 규명해낸 대표적인 책이 『독일 이데올로기』라면,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은 잉여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을 폭로해낸 책이다. 2강에서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파헤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다룰 것인데, 특히 『자본론』 1권에서 마르크스가 전개한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자본론』은 어떤 책인가? 마르크스는 1867년에 독일어로 『자본론』을 처음 발간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아주 상세한 자료조사에 기초하고 있다. (1강에서 확인하였듯이)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뒤집었고’,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생각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구체적이고 귀납적인 방대한 조사로 복잡다단한 현실, 즉 “재료의 상이한 발전형태들을 분석”한 뒤,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해 이를 추상화한 이론, 즉 “이 형태들의 내적 관련”을 규명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선험적 논리구성을 하고서 이에 현실을 껴맞춘 게 아니라, 반대로 구체적인 사실들을 종합한 결과로서 자본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선 모든 것이 상품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본론』은 상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경제적 세포형태”이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이 세포형태에 대해 먼저 탐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론』에서 가장 추상적인 부분으로, 마르크스도 서문에서 “제1장, 특히 상품분석이 들어 있는 절을 이해하기가 가장 힘들 것”이라 했다. 이번 강의 또한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자본론』 제1권은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핵심적 과정인 ‘자본의 생산과정’에 대해 다루고, 제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 제3권은 ‘자본의 총과정의 각종 형태들’을 다룬다. 마르크스가 끝내지 못한 작업을 엥겔스가 마르크스 사후에 편집해 제2권과 제3권을 출판했다. 마르크스는 제4권에서 ‘경제학설사’를 다루고자 했지만, 초고를 작성하는데 그쳤다. 제2권과 제3권을 포함한 『자본론』의 모든 내용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기초학습 과정에 해당하는 이 교육자료에서는 가장 중요한 제1권 중 자본의 생산과정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하며, 나머지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둘 것이다.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본격적으로 들어가보자. 자본주의에서 부는 ‘방대한 상품더미’로 나타난다. “상품은 부의 기본형태다” 『자본론』을 따라 자본주의를 이루는 ‘세포’라 할 수 있는 ‘상품’을 분석해보자. 모든 상품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상품은 인간에게 ‘유용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우리가 소비하는 일상적인 상품들을 떠올려보면, 하나같이 어떤 유용성, 즉 쓸모를 갖고 있다. 이 유용성으로 인해 상품은 보편적으로 ‘사용가치’(use-value)를 갖는다. 어떤 물건의 유용성은, “상품의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기타의 자연적 속성” 때문이다. 예컨대 옷은 인간에게 보온성과 심미성을 제공하고, 자동차는 인간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게 해준다. 사용가치는 “그 유용성을 취득하는 데 인간노동이 많이 드는가 적게 드는가 하고는 관계가 없다.” 예컨대 스마트폰 1개를 만드는 것은 목도리를 하나 만드는 과정에 비해 분명하게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마트폰과 목도리의 쓸모를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 둘의 가치는 질적으로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각 상품이 가지는 사용가치는 질적으로 모두 다르며, 따라서 사용가치 간의 양적 비교는 불가능하다. 둘째,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함께 ‘교환가치’(exchange-value)를 지닌다. 교환가치는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이를 이해할 수 있는데, 모든 상품에는 ‘가격’이 붙기 때문이다. 예컨대 옷은 5만원, 핸드폰은 100만원, 자동차는 1000만원에 판매된다. 그렇다면 옷 20벌 = 핸드폰 1개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렇게 등식을 성립하게 하는, 상품의 내재한 공통의 속성을 ‘교환가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교환가치’는 어떻게 결정될까? 질적으로 서로 다른 물체인 옷과 핸드폰과 자동차 사이에 양적인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 상품들 안에 비교가능한 어떤 ‘공통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통의 무엇’은 “상품의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기타의 자연적 속성일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상품마다 질적으로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들은 각각의 상품이 각각의 유용성, 즉 ‘사용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속성이긴 하나, ‘교환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속성이 아니다. ‘사용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온갖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기타의 자연적 속성’을 무시한다면, 상품에는 오직 하나의 속성만 남는다. 바로 “그것이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이다. 즉 교환가치는 모든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노동생산물’이라는 점에서 기원하며, 그 공통된 속성 덕분에 양적으로 비교가 가능해진다. 좀 더 고찰해보자. 어떤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질적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휴대폰을 조립하는 노동’과 ‘옷을 재봉하는 노동’은 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노동은 언제나 이런 “구체화된 노동” 혹은 “노동생산물에 체현된” 노동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런 구체적인 노동을 유용노동(useful labor 또는 concrete labor)이라 불렀다. 예컨대 쌀은 쟁기질을 통해, 저고리는 재봉질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쟁기질’과 ‘재봉질’이라는 각각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노동행위는 ‘유용노동’이다. 특정한 사용가치는 특정한 유용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질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유용노동은,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소비이고, 이 의미에서 모두 (공통된) 인간노동이다.” 그래서 “생산활동의 명확한 질, 따라서 노동의 유용한 성격을 무시한다면, 생산활동은 다만 인간노동력의 지출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각각의 구체적 유용노동의 질적 차별성을 제거한,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을 생산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노동의 속성을 추상노동(abstract labor)이라 불렀다. 바로 이 공통의 요소, “노동의 상이한 구체적 형태”를 제거하고 그 모든 구체적 형태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인간노동”이, 모든 종류의 노동생산물(혹은 상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유일하게 비교가능한 속성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노동생산물에 공통적으로 “응고되어 있는” 이 인간노동의 양을 ‘가치(value)’라고 불렀다.[8] 그리고 가치가 화폐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나는 것이 ‘교환가치’다.[9] ‘사용가치’와 달리 ‘가치’는 “노동의 양”에 의해 양적으로 비교가능하다. “노동의 양은 노동의 계속시간으로 측정하고, 노동의 계속시간은 시간, 일, 주 등을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다. 어려운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을 비교해, 상품의 양적인 교환비율을 정하는 과정은 관념속에만 존재하는 추론이 아니라, 실제로 인류 역사에 걸쳐 늘상 생산자들이 관습적으로, 경험적으로 해오던 행위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농민이라고 상상해보자. 농민은 농사를 지어서 쌀을 수확한다. 그 중에 우리 가족이 먹을 분량을 빼고, 일부 잉여생산물을 갖고 시장에 나가 교환을 한다. 예컨대 한 말의 쌀을 잉여생산물로 가지고 나갔다고 가정하자. 장터에서 한 말의 쌀을 다른 유용한 상품, 예컨대 농사만 짓느라 옷 지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저고리 한 벌을 사려고 한다고 가정하자. 저고리랑 쌀을 교환하려 하는데, 이 때 저고리 한 벌을 사기 위해 얼마만큼의 쌀을 댓가로 줄 것인가, 이것이 교환가치의 문제다. 농민은 손해를 보기 싫기 때문에, 저고리 상인과 흥정하면서 자기가 이 쌀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었는지를 설명한다. 저고리 상인도 마찬가지로 손해를 보기 싫기 때문에 저고리를 만드는데 한땀한땀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이 교환가치의 비율을 정하게 되는 관습적 과정이다. 이 때 생산자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품을 손해보지 않고 교환하기 위해, 나와 상대방이 생산물에 투입한 ‘노동의 양’을 계속 비교한다. 즉 내가 쌀을 생산하는 데 ‘얼마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들였는지’, 그리고 ‘만약 같은 노력과 시간으로 저고리를 만들었다면 몇 개나 만들었을지’를 생각하며 비교한다. 다시 말해, 농민은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투여된 자신의 노동의 양을, 저고리를 만드는 노동의 양과 비교한다. 노동의 양을 서로 비교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상품들 간의 교환비율이 결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교환비율은, 사람마다 다른 개별적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Socially necessary labour time)”, 즉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과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숙련도와 노동강도에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데 드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예컨대 평균적 숙련과 노동강도로 농사를 지을 때 한 말의 쌀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노동시간이 10시간 소요된다고 하자. 그런데 나는 농사를 처음 지어보는 초보농사꾼이라, 실수도 많이하고 새로운 걸 익히는데 시간도 오래걸려 50시간을 투여해 한 말의 쌀을 지었다고 하자. 내가 50시간을 투여했다고 해도, 시장에 나간 나의 한 말의 쌀은 50시간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쌀을 구매하려는 자는 10시간 분의 가치로 판매하는 다른 쌀을 구입할 수 있으니, 나에게 50시간 어치의 가치를 주며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교환이 이뤄질 때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따져 교환이 이뤄진다. 다시 말해 어떤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한가지 짚고 가자면 ‘사용가치’를 지니는 물건이라고 해서, 즉 유용한 물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교환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공기 중 산소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엄청난 유용성을 지니고 있지만, 가치가 없고 따라서 가격도 없다. 산소의 유용성을 우리가 소비하는데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 만약 기후위기와 환경파괴가 지금보다 더 심각해져서, 산소를 획득하기 위해선 공기여과장치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 산소가 인간노동의 투입 없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성이 아니게 되면, 그 때부터 산소는 ‘상품’이 될 것이다. 또 어떤 생산자가 오로지 자신의 자급자족을 위해 생산한 경우, 즉 시장을 매개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소비하기 위해 생산한 물건 또한 ‘교환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예컨대 가사노동은 “자신이 수행되는 바로 그 사적영역 안에서 ‘생산적 소비’로 행해진다.” 그래서 “가사노동은 교환가치는 되지 못하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0] ” 화폐의 등장과 일반화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용가치와 달리 교환가치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돌려가며 만지면서 조사해 보더라도 그것이 (교환)가치를 가진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교환가치는 “순수히 사회적인 것”이고, “오직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환가치는 현실에서는 ‘화폐’를 매개해 표현된다. 예컨대 옷과 핸드폰의 교환가치는, 옷은 5만원, 핸드폰은 100만원이란 형태로 표현된다. 마르크스는 원시적 상품거래에서 출발한 단순한 가치형태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화폐형태로 발전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를 축약해 설명해보겠다. 아까 우리는 조선시대 농민의 삶을 상상했는데, 그 때 1말의 쌀이 1벌의 저고리와 교환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를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단순한, 개별적 또는 우연적 가치형태(simple form of value) 1말의 쌀 = 1벌의 저고리 이러한 표현을 통해 쌀이라는 상품은 저고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 저고리와 비교할 수 없다면, 쌀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방도가 없었지만, 이제 “상품 A(쌀)는 ... 사용가치 B(저고리)를 자기 자신의 가치의 표현재료로 삼는다.” 그런데 농민인 나는 쌀을 저고리하고만 교환하지 않는다. 점차 상품거래가 발전하면서, 이제 농민은 시장에 나가 쌀을 계란, 고등어, 금 등등 다양한 상품과 교환할 수 있다. 이걸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총체적인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Expanded form of value) 1말의 쌀 = 1벌의 저고리 = 30개의 계란 = 5손의 고등어 = 1돈의 금 = 기타 등등 이 관계를 그대로 뒤집어서 표현해보자. ●일반적 가치형태(General form of value)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말의 쌀 1돈의 금 기타 등등 이 때 쌀은 “일반적 등가물(universal equivalent)”의 성격을 가진다. 즉 온갖 상품들이 쌀을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재료로 삼고 있으며, 온갖 상품들을 비교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교환을 거듭할수록, 교환을 빨리, 용이하게, 편리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물품의 가치를 하나의 상품으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그래서 다양한 여러 상품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 상품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바로 그 상품이 ‘화폐’가 된다.[11] 그런데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사회에서 귀금속이 화폐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는 무게만 측정하면 되고, 어느 부분을 떼어내도 질이 동일하다는, 귀금속이 가진 고유한 질적 특성 때문이다.[12] 그래서 예컨대 1말의 쌀이 1돈의 금과 교환된다고 가정하고, 화폐의 자리를 금에게 넘겨주면, 아래와 같은 수식이 나온다. ●화폐 형태(Money form of value)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돈의 금 1말의 쌀 기타 등등 여기서 1돈의 금을, 금본위제[13]에서 10만원이라는 명칭으로 표현한다면, 이 다양한 물품들은 10만원이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가격’을 가지게 된다.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00,000원 1말의 쌀 기타 등등 이렇듯 가장 초보적인 교환관계를 드러내는 ‘단순한 가치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해 ‘화폐형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화폐가 일반적 등가물로서 특수한 기능을 하게 되면서, 화폐에 대한 ‘물신(fetishism)’이 자라난다.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 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인데, 마치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여기서 마치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계약론과 유사하게, 어떤 상품을 화폐로 사용할 것인지를 “인간의 보편적 찬성 아래에서 자의적으로 지어낸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화폐가 된 물건(주로 금이나 은 등의 귀금속)은 화폐이기 이전에 노동생산물이고 상품이었다.[14] 상품과 화폐는 우리가 조선시대를 예로 들었듯이, 아직 상품생산이 전면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부터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상품유통의 발전 초기에는 “사용가치의 잉여분만이 화폐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급자족적 생산을 하고 남은 잉여물을 상품으로 내놓으며, 다른 상품을 사기 위해 화폐를 잠깐 활용하고, 곧바로 다른 상품을 취득한다. 그런데 상품생산과 유통이 점차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자급자족적 생산을 하기보다 더 많은 상품을 시장에서 구매하게 되고, 여러 상품을 언제든 필요할 때 구매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화폐를 늘 수중에 지니고 있을 필요성이 늘어난다. “상품생산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상품생산자는 누구나 사회가 제공하는 담보(즉 화폐)를 확보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유통의 확대에 따라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사회적 형태의 부인 화폐의 권력이 증대한다” 화폐는 갈수록 일반화된다. 상품마다 서로 다른 생산기간의 차이를 조율하기 위해 ‘신용화폐’가 등장하고, 지대나 조세 등도 현물납부로부터 화폐지불로 변한다. 특정한 지불결제일이 생겨나고, 국가수준을 넘어 ‘세계화폐’가 (처음에는 금와 은으로) 등장한다. 화폐의 확대와 함께 점점 유용한 상품을 소비하려는 욕구보다, 화폐를 많이 보유하려는 욕구가 늘어난다. 왜냐하면 “(화폐를 포함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이 물질적 부의 모든 요소를 어느 정도 지배하는가를 나타내며, 따라서 그 상품소유자의 사회적 부의 크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폐를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려 하고, “근면과 절약과 탐욕이 그의 주된 덕목”이 된다.[15]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 지금까지 상품에 내재한 속성(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그리고 상품생산과 유통의 발전에 따라 화폐가 등장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 과정에 우리는 부분적 상품교환이 이뤄지던 조선시대의 농민을 상상했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는 아직 고찰하지 않았으며, 이제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출발점에 서있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 그리고 상품유통의 발달된 형태인 상업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을 이룬다.”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때로부터 자본의 근대사가 시작된다.” 자본은 “언제나 처음에는 화폐의 형태로” 무대에 등장한다. 앞서서 고찰한 화폐가 ‘상품을 구매하려는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했다면, 자본으로 변화한 화폐는 이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16] ‘상품’은 더 많은 화폐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도식화해 상품유통의 형태가 ‘상품(C)-화폐(M)-상품(C)에서 화폐(M)-상품(C)-화폐(M)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C-M-C’에서 나의 목적은 어떤 유용성을 소비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근대사회의 농사꾼인 내가 쌀(C)을 시장에 팔아 10만원(M)을 얻어 저고리(C)를 살 때, 내 목적은 저고리를 입는 것(사용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업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상업자본가가 된 나의 목적은 이제 더 많은 화폐를 갖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나는 내가 가진 초기자본 10만원(M)을 갖고 쌀(C)을 사서 11만원(M’)에 판매하려고 한다. 바로 이 증가분,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surplus-value)”라고 부른다. 이 잉여가치 증식이라는 속성이, “이 가치(즉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 운동의 의식적 대표자인 화폐소유자는 자본가가 된다.” 자본가는 “끊임없이 화폐를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더 많은 화폐의 획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상품유통 과정에서의 ‘구두쇠’와는 다른 존재가 된다. 구두쇠가 집안 금고에 화폐를 안전히 모아두는 동안,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투자해 상품으로 바꾸며 화폐의 증식을 꾀한다. “부에 대한 무한한 탐욕, 정열적인 교환가치 추구는 자본가와 구두쇠에게 공통되지만, 구두쇠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자본가는 합리적인 구두쇠다. 구두쇠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냄으로써 교환가치의 쉴 새 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더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한다.” 이윤의 비밀(1): 상품은 각각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잉여가치(이윤) 창출의 비밀에 대해 탐구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 운동의 핵심인 잉여가치는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즉 유통과정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발생한다. 앞서 우리는 16세기 무렵부터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상업자본가들의 욕망(더 많은 화폐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에 대해 얘기했다. 이와 함께 이들의 이윤축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인 중상주의 이론이 발전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자본의 최초의 해설자”라 불렀다. 이들은 상인자본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이유(즉 M이 C를 거쳐 M보다 많은 M’가 되는 이유)에 대해, ‘상품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현실에서는 독점의 영향이나, 사기를 치는 등 다양한 사유들로 인해 상품을 그 가치(또는 자연적인 가격)보다 비싸게 팔아먹는 일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상품교환법칙의 위반”인 특수한 사례일 뿐, 일반적 법칙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중상주의 관점은 개인의 관점에서 부의 증대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 전체의 부의 증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누군가 교활하게도 어떤 물건을 실제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파는 데 성공했다 치자. 그러면 바로 그만큼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돼있다. 이는 가치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비율을 바꿀 순 있지만, 사회 전체의 총가치는 하나도 증대시킬 수는 없다.[18] 그리고 상품소유자인 판매자는 다른 관계에선 곧 구매자이며, 구매자는 다른 관계에서 곧 판매자다.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상품을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팔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도 나에게 어떤 상품을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팔 수 있다. 마르크스가 볼 때 이러한 이론을 철저하게 주장하려면, “판매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따라서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급이 있다고 가정”해야한다. 그런데 이는 공납같이 전근대적인 방식, 즉 서로 자유롭지 않은 신분관계에서나 가능하다.[19] 즉 강압에 의한 수탈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윤의 일반적 본성을 설명하려면” “이윤은 상품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데서, 요컨대 상품에 실현된 노동량에 비례하여 판매하는 데서 생긴다는 정리로부터 출발해야한다.” 다시 말해, ‘상품이 각각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는 것은 유통과정에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윤이 실현되는 순간, 즉 자본가가 최종적으로 이윤을 획득하는 순간은 상품을 판매해 돈을 거둬들였을 때다. 즉 상품(C)이 화폐(M’)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윤(잉여가치)이 처음 ‘탄생’하는 순간은 그곳에 있지 않다. 마르크스는 그 모순을 이렇게 표현한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사서 그 가치대로 팔아야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에 던져 넣은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나비로 성장하는 것, 즉 완전한 자본가로 되는 것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20]”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생산과정에 있다. 이에 대해 잠시 뒤에 살펴보자. 이윤의 비밀(2) : 노동력 상품의 고유한 특성 첫 번째 비밀에서 우리는 이윤창출이 유통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아님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이윤창출의 핵심적인 두 번째 비밀은, 바로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재료로 구매하는 ‘노동력’이란 상품의 고유한 특성에 있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속성에 대해 좀 더 깊이 분석해보자. 앞서 우리는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했다. ‘노동력’ 또한 상품으로 거래될 때, 고유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무엇일까? 물을 사용하면? 마심으로써 인간을 생존하게 한다. 옷을 사용하면? 입음으로써 보온성을 제공한다. 자동차를 사용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력을 사용하면? ‘노동’을 할 수 있다. 노동력은 인간의 노동을 담은 그릇이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의 신체 속에 있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통해 가치(교환가치)를 생산해내는 능력”이다. 앞서 살펴본대로, 모든 상품은 그 속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만큼의 가치(교환가치)를 지니고, 이에 따라 양적으로 비교되고 교환될 수 있다. ‘노동력’이란 상품은, 그것을 사용할 때 새로운 가치(교환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상품이다. 이 점에서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과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노동력의 ‘사용가치’가 ‘노동제공을 통해 교환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면,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무엇일까?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상품의 교환가치를 규정하는 일반적 법칙이 적용된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상품의 생산을 위해 투입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을 뜻한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량(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이란 무슨 말일까? 한 마디로 노동자가 먹고 자고 내일 다시 노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노동력의 발휘인 노동에는 인간의 근육, 신경, 뇌 등의 일정한 양이 지출되는데, 그것은 다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노동력의 소유자가 오늘의 노동을 끝마친다면, 그는 내일도 오늘과 동일한 힘과 건강을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총량은 노동하는 개인을 정상적인 생활상태로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그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소비수단과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죽은 뒤 태어난 새로운 노동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 즉 노동자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래야 노동자가 늙어서 죽어도, 노동력의 동일한 양이 유지될테니 말이다. 또 복잡하여 훈련과 숙련이 요구되는 노동의 경우, 필요한 기능을 익히기 위한 훈련비용과 교육비용도 노동력의 가치에 포함된다. 바로 이 노동력의 사용가치(‘노동제공’)와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 사이의 불일치가, 잉여가치 착취의 핵심적인 비밀이다. 여기서 잠시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한가지 특징을 짚고 넘어가자. 바로 노동력의 가치를 이루는 생활수단의 총액이라는 건,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영양분을 섭취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입거나 집이 필요하다는, 인간이 생명체이기에 발생하는 자연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수준과 발전단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음식물, 의복, 난방, 주택 등과 같은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계급이 어떤 조건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도덕적(정신적) 요소가 포함된다.[21]” 이것은 이미 현실에서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한국노총, 민주노총, 통계청 등 여러 기관에서 노동자들의 ‘실질 생계비’를 다양한 방식으로 추산하고 있다. 노동자가 하루에 평균적으로 필요한 영양소의 양에 근거한 식료품비, 의료비, 교통비, 통신비, 문화생활비 등 ‘노동자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각종 상품의 양을 통계적 방식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적절한 노동력의 가치)가 얼마냐’라는 물음에 절대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력 가치의 최저치는 있지만 최대치는 없으며, 그 적정수준은 역사적, 도덕적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주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입장에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아이도 낳아 제대로 기를 수 있어야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각하는 ‘적정한 임금수준’에는 늘 간극이 있으며, 이 때 적정한 임금수준을 결정하는 건 결국 계급 간 힘의 관계이다. 잉여가치(이윤)[17]는 생산과정에서 어떻게 창출되는가? 지금까지 노동력이란 상품의 고유한 특징을 고찰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잉여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본이 노동력을 소비해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 즉 ‘생산과정’으로 들어가보자. “...우리는 화폐소유자, 노동력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영역을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 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22]” 생산과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제빵업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어느 제빵 자본가가 빵을 만들어서 팔아 돈을 벌려고 한다. 자본가는 먼저 자신의 자본(M)을 사용해, 시장에서 세 가지 재료(C)를 구매해야한다. 실제로는 빵을 만드는데 아주 여러가지 생산요소가 필요하지만, 단순화하여 노동대상(원료)을 대표해 ‘밀가루’, 노동수단(기계)을 대표해 ‘오븐’, 그리고 이 둘을 이용해서 실제로 빵을 만드는 노동자의 ‘노동력’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치자. 빵을 30개 만드는데 원료인 밀가루는 10kg가 필요하다고 하자. 밀가루 10kg의 가치는 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다.[23] 그렇게 환원한 밀가루 10kg의 가치가 사회적 노동시간 12시간이라고 가정하자. 이하 계산 상 편의를 위해, 1노동시간이 1만원의 화폐적 가치로 표현된다고 가정하겠다. 즉 밀가루 10kg의 가치는 12만원이다. 빵을 만드는데 오븐이 사용된다. 빵을 굽기 위해 오븐을 사용하면서, 오븐이 일정부분 마모된다. 이 오븐의 감가상각비가, 빵 30개를 굽는다고 할 때 사회적 노동시간 10시간에 해당된다고 가정하자.[24] 우리는 ‘법칙의 교란’을 제거한 정상적 상태에서 이윤의 창출을 고찰하려 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밀가루를 12시간보다 싸게 살 수는 없다. 밀가루 판매자가 손해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가루를 비싸게 살 이유도 없다. 밀가루를 정상가격으로 파는 다른 사람에게서 구입하면 되기 때문이다. 오븐도 같은 이유로 그것의 정상가격으로만 구매할 수 있다. 다음으로 빵을 만드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하루 임금, 다시 말해 ‘노동자가 노동을 하고서 먹고 자고 자신을 재생산해 다음날에도 출근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비용’, 즉 ‘노동력의 가치’가 (이 예시 속 세계에서 당시 계급투쟁의 역관계를 반영해) 4시간으로 형성돼있다고 하자. 밀가루와 오븐을 구매한 자본가는 제빵노동자를 4만원의 하루 임금을 주고 고용한다. 자본가가 지출한 비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밀가루 10Kg(12노동시간) + 오븐 감가상각비(10노동시간) + 제빵노동자의 하루임금(4노동시간) = 26만원(26노동시간) 그리고 자본가는 빵 30개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에게 일을 시킨다. 주어진 평균적 숙련도로 기계를 작동시켜 원료를 가공해 빵을 만든다고 할 때, 빵 30개를 만드는데에는 8시간이 든다고 하자. 오늘 8시간의 노동을 통해 ‘빵 30개’라는 사용가치가 생산됐고, ‘빵 30개’에는 이를 만드는데 투여된 사회적 노동시간 만큼의 ‘가치’가 포함돼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밀가루 10Kg(과거의 12노동시간) + 오븐 감가상각비(과거의 10노동시간) + 노동자의 제빵노동(현재의 8노동시간) = 빵 30개(30노동시간) 생산과정을 거치며 자본가는 30만원 어치에 해당하는 상품(빵)을 갖게 되었다. 자본가가 이렇게 만든 빵 30개를 본래 그 가치대로 판매하면, 자본가는 30노동시간에 해당하는 화폐, 즉 30만원을 손에 쥐게 된다. 처음에 자본가가 투자한 자본은 26만원이었는데, 이제 자본가는 30만원을 손에 쥐었으니 4만원의 이윤을 얻게 된다. 잠깐,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 비밀의 핵심은, ‘노동력의 가치’(노동력의 교환가치)와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창출되는 가치’(노동력의 사용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밀가루와 오븐이 빵에다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이전’하기만 한 것과 달리,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임금으로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지출된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의 생명을 24시간 유지하기 위해서 4시간 만큼의 임금이 필요하다는 사정은, 결코 노동자가 4시간을 넘어 일하는 것을, 심지어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자본론』의 원문을 조금 더 같이 읽어보자. “...노동력에 포함되어 있는 과거 노동(past labour)과, 노동력이 제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노동(living labour)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매일의 유지비[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의 매일의 지출[노동력을 사용함으로서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가치의 양]은 그 크기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양이다.” “...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노동력]의 독특한 사용가치[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교환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노동력의 판매자는 [다른 모든 상품의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실현하면서 그 사용가치를 넘겨준다. 그는 사용가치를 넘겨주지 않고서는 교환가치를 받을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 노동 그 자체는, 팔린 기름의 사용가치가 기름장수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판매자의 것이 아니다.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 사용, 하루의 노동은 그의 것이다. 노동력은 하루 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는데도, 노동력을 하루 동안 유지하는 데는 1/2 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 사용이 창조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25]”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다른 모든 종류의 상품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며, 그로 인해 잉여가치 창조의 원천이 된다. 다른 상품은 모두 그것이 자본으로 투입됐을 때,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에 ‘이전’할 수 있을 뿐이지만, 노동력 상품은 그것이 자본으로 투입됐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즉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이라 부르고, 그 밖의 기계나 원료 등을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이라 불렀다. 이렇듯 노동자가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필요노동시간을 넘어 잉여노동을 하고, 그로 인해 생산된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전유하는 것이 ‘착취(exploit)’다. 그리고 앞선 예에서 노동자는 4만원을 받고 8시간 노동을 통해 8만원의 가치를 생산했는데, 따라서 자본가가 노동자가 창출한 총가치(8시간) 중 잉여가치로 가져가는 몫이 4시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투여한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 중 4시간은 노동자의 임금을 재생산하기 위해 쓴 시간이고, 나머지 4시간은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 쓴 시간이다. 마르크스는 나의 노동력(임금)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 자본가의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을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비율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 또는 ‘잉여가치율’을 계산할 수 있다. 이 경우 잉여가치율(=착취율)은 4시간(잉여노동시간)/4시간(필요노동시간) = 100%이다.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필요노동시간을 넘어 노동을 시킴으로서 획득한 이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에서 완성된 상품을 판매해 화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면 ‘이윤’이 된다.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 노동시간 연장 지금까지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와 노동력의 사용가치(노동제공을 통해 만들어낸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한 착취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까지 아주 단순화한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자본주의 생산의 풍경은, 이렇게 단순화한 예시만큼 목가적이지 않다. 자본주의의 풍경은, 자본가는 26만원을 투자해 30만원을 얻어 4만원을 벌고, 노동자도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수준’인 임금 4만원을 받아서, 열심히 일하면서 일가족이 생계유지가 가능한, 그런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다. “자본가가 인격화한 자본인 한, 그의 활동 동기는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인류에게 무자비하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제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사회 생산력의 발전과, 또 [각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로운 발달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조건의 창조에 박차를 가한다. ...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한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그리고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각 개별 자본가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써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그는 누진적 축적에 의해서만 자기 자본을 확대할 수 있다."[26]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들이다!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27]” 자본은 안정적으로 소소하게 벌면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본은 서로 경쟁하며, 경쟁에서 도태되는 순간 자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자본가들은 돈이 생기면 다시 투자를 해서 기업규모를 키우고, 다시 경쟁에서 이겨서 다른 기업을 잡아먹으며 몸집을 무한히 불려야한다. 이윤의 축적이 지상목표가 된 자본, 그리고 그 인격화된 존재인 자본가에게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을 활용한다. 무엇보다 먼저 직관적으로 활용하는 건, 임금은 더 주지 않으며 노동자가 더 오래 일하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노동 시간의 연장으로 만들어진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했다. 앞선 제빵 자본의 사례에서, 4만원의 임금을 주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시키면 4만원의 잉여가치가 발생하지만, 같은 임금을 주고 하루 10시간 노동을 시키면 6만원의 잉여가치가 발생한다. 간단히 말해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장시간 노동 강요이다.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로 노동자를 쥐어짜려는 시도는 오늘날까지 자본주의 역사의 모든 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아직 조직된 저항에 나서지 못하는 곳에서, 자본의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노동자의 생명력을 완전히 파괴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28] 『자본론』에는 마르크스가 영국의 공장감독관 보고서에서 인용한 자료들이 나오는데, 그 중 당시 아동 노동 상황에 대한 자료를 몇가지 읽어보자. “이 공장주들 중 일부는 12세 내지 15세의 소년 5명을 금요일 오전 6시부터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4시까지 식사시간과 한밤중의 한 시간의 수면시간 이외에는 조금도 휴식을 주지 않고 혹사시켰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그런데 이 아동들은 ‘넝마 구덩이’ 속에서 30시간을 쉴 새 없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곳은 모직 누더기를 찢는 곳으로, 그 안의 공기는 성인노동자라도 계속 손수건으로 입을 가려 폐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티끌과 털 부스러기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고인들은 ...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즉 그들은 크나큰 자비심을 베풀어 이 불쌍한 아동들에게 4시간의 수면을 허용하려 했으나, 이 완고한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침대에 누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퀘이커 교도들은 £20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이 도시의 주민들 중 레이스 제조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영국의 다른 곳 또는 문명세계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할 정도의 궁핍과 고통이 지배하고 있다 ... 9세부터 10세까지의 아이들이 새벽 2,3,4시에 그들의 불결한 잠자리에서 끌려나와 겨우 입에 풀칠만이라도 하기 위해 밤 10,11,12시까지 노동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데, 그들의 팔다리는 말라비틀어지고 신체는 작아지며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목석처럼 무감각상태로 굳어져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 성인남자의 노동시간을 하루 18시간으로 제한해 달라고 청원할 목적으로 공청회를 열고 있는 이런 도시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아홉 살 되는 윌리엄 우드가 ”노동하기 시작한 것은 만 7세 10개월 되던 때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릇 만드는 틀을 날랐다.“ ...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저녁 9시쯤에 일을 끝마치곤 했다. ”저는 1주에 6일 동안 날마다 저녁 9시까지 일합니다. 나는 최근 7,8주일 동안 그렇게 해왔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15시간 노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릇 만드는 틀을 운반하며 물레를 돌립니다. 내가 일하러 오는 것은 아침 6시인데, 4시에 올 때도 있습니다. 나는 어젯밤 밤을 새워 오늘 아침 6시까지 일했습니다. 그저께 밤부터 자지 못했습니다. 어젯밤은 나와 함께 8, 9명의 다른 소년들도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오늘 아침에도 모두 왔습니다. 나는 1주일에 3실링 6페니를 받고 있습니다. 밤을 새워 일해도 그 이상은 받지 못합니다. 지난 주일에 나는 이틀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자본론』 집필을 위해 연구하던 1850년대 무렵에 나온 보고서의 내용들이다. 175년 전 영국 노동자들은 일곱 살 때부터 하루 15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와 같은 살인적인 노동강도는 노동자의 생명력을 극심하게 갉아먹었고, 노동인구의 정상적 유지가 불가능할 수준에 이르렀다.[29] 그런데 이것은 1850년대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은 노동운동의 저항이 분쇄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절대적 잉여가치의 무제한적 증대를 꾀한다. <자본>에 적힌 보고서와 비슷한 이야기를 사실 우리는 가까운 과거, 가까운 장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평화시장은 약 2만명의 젊은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는 그 중 약 90%가 14세에서 20세 사이의 여성노동자들이며, 의류판매점들과 소규모 봉제공장들이 뒤섞여 있는 4층 짜리 미로로 이루어진 작은 지역이었다. 노동자들은 햇빛이 들지 않고, 환기도 되지 않으며 천장이 1.2m 혹은 1.5m 이하인 비좁은 다락방에서 일했다. 하루 평균 14시간 일하도록 강요받았고, 한달 임금은 평균 3천원(1970년 기준) 미만이었다. 견습공이 전체 노동자의 반수 이상이었고, 그들의 임금은 정규미싱사의 1/5수준 (한달 3천원)에 불과했다. 견습공의 평균연령은 15세였으며, 저임금으로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30]” “국제상사는 작업시간이 아침 7시 5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인데 이것은 형식상의 시간일 뿐이며 책임 작업량이라 하여 목표달성을 못하면 아침조출과 연장근무가 허다하다. 철야만도 일주일에 2~5번 정도를 해야 하는 데 가을에서 봄에 이르는 시기에는 월간 15회 이상의 철야를 강행하는 형편이다. 관리자들의 온갖 폭언도 가관이다. 하루에도 집합이 2~6번 정도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욕설과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어쩌다 몸이 아파 결근이라도 하게 되면 사무실에 불려가 폭행, 구타, 폭언 등의 수모를 당한다. (『민주노동』 제4호에 실린 글을 이태호 1986b, 125면에서 재인용)[31]” “작업장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냄새다. 원단 더미에서 풍기는 포르말린 냄새가 익숙하게, 그러나 매번 아리게 코를 찌른다. 밖이 환한데도 작업장은 침침하다. 눈앞에 매달린 백열전등이 날카로운 빛을 뿜는다. 이 빛에 익숙해진 사람은 밝은 햇살 아래 눈을 뜨지 못한다. 작업대에 몸을 굽히고 있는 열세 살짜리 시다들의 눈은 핏물이 든 것처럼 빨갛다. 재봉대와 시다판들로 꽉 찬 다락방에서 사이사이 끼어 앉은 여공들이 실밥을 뜯고 자크를 단다. 옷감에서 피어오르는 먼지 때문에 어두운 다락방은 더 어두워 보인다. 재봉틀 소리 사이로 기침소리가 발작처럼 울린다. 퇴근 시간까지 이들은 종일 닭장 같은 곳에서 재봉틀을 밟아대는 것이다. 나이 어린 시다들은 재봉일을 하는 틈틈이 미싱사의 잔심부름까지 해야 한다. 이들은 천정이 낮은 탓에 허리조차 똑바로 펴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십 번씩 다락방을 오간다. 우리 작업장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열세 살 영희가 다락방에서 내려온다. 사다리를 잡은 하얀 팔뚝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위태롭다.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먼지구덩이 속에서 애쓰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32]”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주의가 득세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좌익운동과 자주적 노동운동이 완전히 파괴됐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조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본은 120년 전과 같은 무제한적인 착취를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질문해보자면, 이것이 1850년과 1970년 과거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1990년대부터 섬유산업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의 나라로 이전했다. 오늘날 방글라데시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실태에 관한 기사는 노동운동이 저항을 하지 못하는, 혹은 저항이 약한 곳에서 언제든지 자본은 인간의 생명력을 완전히 갉아먹을 때까지 노동시간을 연장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방글라데시에서 Lidl, H&M, Gap을 위해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과도한 초과 근무를 하고 있으며, 일부는 하루에 15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고 BBC가 월요일에 조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슈퍼마켓 리들(Lidl)을 위해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한밤중에 공장에 갇혀 있는 모습을 몰래 촬영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 다음 날 오전 2시 30분까지 공장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소매업체인 갭(Gap)과 H&M을 위한 의류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근무일이 오전 7시에 시작되어 오후 10시 30분에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초과 근무 시간이 근로자의 급여 명세서에 표시되지는 않았습니다.[33]” “방글라데시의 지역 뉴스 사이트(Textile Today, Apparel Resources)에 최근 게재된 기사들에 따르면, 4월 13일에 발표된 노동고용부(Ministry of Labour and Employment)가 공문을 통해, 의류 수출 공장에서 직원들이 하루에 2시간의 초과 근무를 추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총 4시간의 합법적인 초과 근무 시간을 허용합니다. 새로운 초과근무 규정은 4월 17일부터 시행되었으며, 6개월 동안 유지될 예정입니다. 즉, 이제 공장에서 근로자가 하루 12시간, 주 6일, 주당 총 72시간 일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지침이 발표되기 전에는 합법적 한도가 하루 10시간, 주당 총 60시간이었습니다.[34]” “공장 소유주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안전 문제, 환기, 위생에 관한 부분을 간과합니다. 초과 근무 수당을 지급하지 않거나, 부상 시 도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감 기한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노동자들을 강하게 몰아붙입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중 일부는 대량 주문을 하고 '대량 주문이기 때문에 생산 라인을 확장하고 수익을 개선하라'고 말하는 브랜드 소매업체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2~3센트 차이로도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지만, 이런 회사들은 [노동권과 안전] 준수를 비용 산정에 반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 이 문장들은 마치 150여 년 전에 쓰인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직접 가져온 것 같습니다. 글로벌 상품 체인에 의해 설정된 가혹한 조건 때문에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노동자가 일하기 가장 힘든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023년 1월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 동안 다국적 의류 회사들이 하청업체를 압박하여 비용을 절감했고, 그 결과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 더욱 열악해졌습니다.[35]” 같은 국가 내에서도, 노동자를 분열시키는데 성공한 자본은 어떤 노동자에겐 주 40시간 5일제 노동과 연차휴가를 보장하지만, 어떤 노동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아래는 2019년 한국의 어느 냉장고 생산공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수기다. “결국 탄력근로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 그날 오후, 발 빠른 친구들이 9~11월 계획표를 알려줬다. 기가 찬다. 이렇게 일하라고? 진심으로? 9월에 추석 연휴인 목, 금, 토요일만 쉬고 모두 출근이다. 평일은 잔업이 일주일에 2~4일이 기본으로 들어간다. 주말에도 출근한다. 10월에도 마찬가지다. 공휴일과 18일과 27일을 제외하고 전부 일주일에 2~4일 모두 잔업에 주말 출근이다. 그러다가 11월 3일부터 일이 없다. 평일 잔업 없이 금, 토, 일요일 출근을 안 한다. 월급이 반의 반토막이 나겠지. 고정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주거비, 식비 등을 제때 내려면 똥줄이 좀 탈 것 같다. 그보다 내가 무사히 11월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다.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겁이 너무 많이 난다. ... 산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다른 라인에서 일어나도 소름 끼치게 무서운데, 이번에는 내가 있는 건물의 내가 보이는 기계에서 일어났다. ... 더 깊게 알라고 하지 말라는 순간 ‘심각한 산재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장 난 줄 모르고 설비에 들어가서 작동시키려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이 잘렸고, 봉합이 잘 안 되었으며 앞으로 손가락을 예전처럼 쓸 수 없을 거라고 진단받았단다. ... 이튿날 아침조회 때 들어 보니 사고 원인을 모른단다. 사고가 일어난 시간에 설비나 파악할 수 있는 기계들이 갑자기 꺼져서 원인 확인이 어렵고 아마 작업자의 변칙이 가장 큰 원인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작업자는 회사에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단다. 그 시점에서 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 아무도 책임 안 져주고 돈이나 쥐어주고 산재 신청도 어렵고. 본인 안전은 본인이 책임지는 겁니다. 오늘 하루도 안전한 작업 하시고.[36]” 오늘날 한국에서 윤석열이 주 80시간 노동제를 꺼내들고, 이재명은 반도체특별법으로 주52시간 제외를 얘기한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계급의 전쟁은 아마 자본주의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늘 진행형일 것이다. 상대적 잉여가치 증대: 기술혁신 자본가는 늘 호시탐탐 노동시간의 연장을 꾀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첫째, 노동자의 육체적 한계에 부딪친다. 노동자를 기계처럼 하루 24시간 가동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면 노동자는 재생산이 불가능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가는 필히 계급투쟁의 저항에 부딪친다. 노동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순순히 자본가의 노동시간 연장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에 더해, 즉 노동시간을 무조건 늘리는 것 외에, 잉여가치를 늘릴 수 있는 다른 방식을 고민하게 된다. 수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필요노동시간에 대한 잉여노동시간의 비중을 늘리는 것으로, 마르크스는 이를 ‘상대적 잉여가치 증대’라고 불렀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건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와 마찬가지의 한계에 부딪친다. 최소한의 생존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임금을 하락시키면 노동자가 굶어죽기 때문에 체제가 유지될 수 없으며, 더군다나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 노동자는 최소한의 생존 그 이상의 권리를 쟁취해왔기 때문에, 그 도덕적, 역사적 권리를 무시하고 낮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면 노동자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는 노동강도를 높여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양을 생산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임금으로 지급해야하는 양은 정해져있으므로, 생산량이 늘어나는 만큼 잉여노동시간의 상대적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본질적으로 같은 한계에 부딪친다. 먼저 노동자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가 있다. 일정 수준까지는 노동강도를 높여 노동자의 에너지를 더 빨리 고갈시킴으로써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겠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노동자가 극심한 노동강도를 따라갈 수 없어 (불량률이 늘어나고, 품질이 떨어지고, 사고가 발생하는 등) 생산성이 저하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삶의 에너지를 더 빨리 소모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노동자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다. 임금을 줄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이는 건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정해진 생산조건 아래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강도를 높이는 방식이란 점에서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노동시간 증대)와 유사하다. 그런데 착취도 증가 외에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는 중요한 방법이 있다. 바로 주어진 생산조건 자체를 바꾸는 것, 즉 기술혁신이다. 기술혁신은 질적으로 다른 생산성 향상을 가능케하여, 단지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을 늘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개별 자본가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찬양하는 이데올로그들은 기술혁신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특히 1차 산업혁명기에 수공업에서 매뉴팩처로, 기계제 대공업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낸 생산성 증대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시작 이후 생산력 발전 수준은 그 이전의 모든 시기를 압도한다. “서기 1000년에서 1500년, 중세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년에 0.12%씩 증가했다. 이 말은 서기 1500년에 살던 사람들은 서기 1000년에 살던 사람들보다 수입이 82%밖에 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연평균 성장률이 11퍼센트인 중국이 2002년에서 2008년까지 6년 동안 경험한 성장 수준이라고 말하면 큰 그림을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즉 물질적 발달 정도만 놓고 보면 현재 중국의 1년은 중세 서유럽의 83년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겠다. ... 아시아와 동유럽(러시아 포함) 국가들에 비하면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가히 일취월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머지 지역은 그 속도가 3분의 1인 0.04%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500~1820년 사이 서유럽의 1인당 소득 성장률은 여전히 0.14%에 지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면에서 1000~1500년 기간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 1820년경부터 자본주의는 비상을 시작했다. ... 이 50년 동안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퍼센트 성장을 보였다. ... 1500년에서 1820년 사이에 0.14% 성장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경제에 터보 엔진을 달고 고속 주행을 한 셈이었다.[37]” “(자동식 뮬 방추는) 약 366파운드의 면화가 면사로 전환되는 데 불과 150노동시간 또는 15개의 10시간 노동일을 흡수한다. 물레로는 [손방적공이 13온스의 면사를 60시간에 생산한다면] 동일한 양의 면화는 2,700개의 10시간 노동일 또는 27,000노동시간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종래의 목판 날염법(손에 의한 날염법)을 기계에 의한 날염이 쫒아낸 곳에서는, 단 한 대의 기계가 1명의 성인노동자[또는 소년공]의 협조로 1시간에 이전에는 200명의 성인노동자가 하던 것과 같은 양의 4색 날염직을 날염한다. 위트니가 1793년에 조면기를 발명하기 전에는 1파운드의 면화에서 씨를 뽑는 데 평균 1노동일이 걸렸다. 그의 발명 덕택으로 흑인여자 1명이 하루에 100파운드의 면화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 동력으로 소, 증기, 물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기계에 원료를 넣는 사람으로 몇 명의 소년과 소녀가 필요할 뿐이다. 소가 움직이는 기계 16대는 이전에 하루 평균 750명이 하던 작업을 한다.[38]” 기술혁신에 성공한 개별 자본은 일시적으로 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획득한다. 기술혁신에 성공한 자본가는 경쟁하는 다른 자본가에 비해 같은 상품을 훨씬 더 적은 노동시간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기술혁신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아직 상품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이전의 기술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시장가격도 이에 따라 형성돼있다. 따라서 시장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할 경우 자본가는, 기술혁신으로 자신이 절약한 노동시간만큼 ‘특별이윤’을 얻을 수 있다. 또는 보다 현실에 가깝게는 시장가격보다 좀 더 낮은 가격에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특별이윤을 획득함과 함께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고 다른 경쟁자본을 제압할 수 있다.[39] 우리가 아까 살펴본 제빵업의 예를 다시 살펴보자. 예컨대 과거에는 빵 30개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노동시간 8시간이 요구됐는데, 어떤 자본가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빵 30개를 만들 때 필요한 노동시간이 4시간으로 단축되면 어떻게 될까? 달리 말하면 8노동시간 동안 이제는 예전보다 2배의 빵, 즉 60개의 빵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제빵기술의 혁신과 무관하게 밀가루 10kg과 오븐의 감가상각비는 변동없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빵 30개를 만드는데 밀가루는 12만원, 오븐의 감가상각비는 10만원이 든다. 8노동시간을 투여해 빵 60개를 만들기 위해선 밀가루는 24만원, 오븐 감가상각비로는 20만원을 투여해야할 것이다. 노동자에겐 이전과 동일하게 8시간 노동을 시키며, 필요노동시간인 4노동시간 분의 임금을 지급한다.[40] 이 때 자본가가 지출하는 금액은 아래와 같다. 밀가루 20KG(24만원) + 오븐 감가상각비(20만원) + 노동자임금(4만원) = 48만원 이 때 자본가가 생산하는 빵 60개에 대상화된 가치는 다음과 같다. 밀가루 20KG(24만원) + 오븐 감가상각비(20만원) + 노동자의 제빵노동(8만원) = 52만원 즉 자본가는 이제 약 0.86노동시간(52노동시간/빵60개)을 들여 빵 1개를 생산할 수 있다. 기술혁신 이전에 빵 1개의 교환가치는 1노동시간(1만원)이었는데, 기술혁신의 결과로 이 자본가가 만든 빵 1개는 0.86노동시간(0.86만원)의 교환가치를 지니게 됐다. 그런데 아직 기술혁신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빵 1개는 시장에서 1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이 자본가가 시장가격(1만원)으로 빵을 판매하면, 빵 1개당 0.14만원의 특별이윤을 얻는 셈이다. 실제로는 예컨대 0.95만원 정도에 빵을 판매해서, 경쟁 자본가의 시장점유율을 빼앗아오면서, 개당 0.09만원의 특별이윤도 챙기는 선택을 할 것이다. 도식적인 예를 들어서 특별이윤을 쉽게 설명했다. 이것은 실제 현실을 매우 단순화한 설명이라, 사실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특히 비현실적인 부분은 오븐의 가치인데, 기술혁신은 일반적으로 기계의 개량과 발전으로 나타나고, 이는 더욱 복잡한 기계의 사용으로, 즉 기계(이 경우 오븐)의 상대적 가치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뒤에 설명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연결된다. 그런데 기술혁신으로 얻어진 이런 특별이윤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다. 경쟁하는 다른 자본가들도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기술혁신을 연구하고 도입하게 되며, 따라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기술이 보편화된다. 신기술이 보편화되면 기존에 개별 자본가가 얻던 ‘특별이윤’은 사라진다. 그리고 높아진 노동생산성으로 인해 같은 노동시간 동안 더 많은 상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상품 하나에 대상화된 노동시간은 줄어든다. 즉 상품의 가치가 하락한다. 예컨대 앞선 제빵 사례에서는 빵 1개 당 가치가 1만원에서 0.86만원으로 하락한다. 상품(특히 일반적 생활수단)의 가치하락은 임금의 상대적 비중을 줄이는 효과를 낳는다. 예컨대 빵 1개가 1만원이던 때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빵 4개에 해당하는 임금을 줘야했다면, (즉 노동자의 시장임금이 4만원이었다면), 빵 1개의 가치가 0.86만원으로 줄어들게 되면,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동일한 양의 생활수단을 지급하더라도 이는 3.44만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혁신을 통해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하락시키지 않고서도 잉여가치율을 높일 수 있다. 또 기술혁신은 같은 양의 생산을, 또는 심지어 더 많은 양의 생산을 더 적은 노동력으로, 또 더 단순한 노동으로 가능케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숙련노동자를 미숙련노동자로, 더 적은 수의 노동자로 대체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변자본 비율을 낮추며 산업예비군(실업자)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산업예비군의 증대는 노동자들 간 경쟁을 강화해 임금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41] 이렇듯 기술혁신은 개별 자본가에게 획득하는 ‘특별이윤’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착취율(잉여가치율)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복잡한 영향을 다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기술혁신을 통해서 착취율 증대, 특별이윤 획득, 시장지배력 증대 등 자본가가 경쟁에서 무수히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기술혁신이 낳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평균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경향 기술혁신이 여러 측면에서 자본가를 아주 행복하게 한다는 점, 그래서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기술혁신을 맹렬히 추구하게 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회세력이 되듯이, 끊임없는 이윤의 축적을 위해 추구하는 기술혁신, 즉 생산성의 증대는 자본가계급을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끌고 들어간다. 기술혁신은 기계의 개량과 발전으로 나타나며, 이전과 비교해 매우 적은 노동력의 투입으로 훨씬 더 많은 생산을 가능케한다. 이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고도화’로, 즉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기계의 사용으로 나타난다. 또한 동일한 노동으로 훨씬 더 많은 양을 생산하기 때문에, 같은 노동량 대비 원료투입량도 늘리게 된다. 기술적 구성이 고도화된다는 것, 즉 기계가 복잡하고 다양해지며, 같은 시간 대비 원료투입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자본의 총 투자액 중 불변자본(원료와 기계)의 상대적 비중이 가변자본에 비해 늘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불변자본의 비중이 가변자본에 비해 늘어나는 것을 ‘가치 구성의 고도화’라 불렀으며, ‘가치 구성의 고도화’가 ‘기술적 구성의 고도화’를 반영하여 나타날 때,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The rising trend of the organic composition of capital)’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윤축적의 관점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피할 수 없는 저주와 같다.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 총 투자액 중 가변자본의 비중이 줄어들게 되는데, 투자액 중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부분은 오직 가변자본 뿐이다. 불변자본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이전할 뿐이다. 따라서 착취율이 동일하다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총 투자액 대비 이윤의 비율, 즉 이윤율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42] 이것을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회적 관점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저주가 아니다.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이전에 비해 동일한 양의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량이 현저히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측면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인류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행하는 필요노동시간이 단축되고, 더 많은 시간을 자유로운 여가와 활동에 투여할 수 있다는 뜻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의 저하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축적을 위한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는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은 아주 긴 시기를 놓고 보지 않으면 분명하게 관찰되지 않는다. 자본이 다양한 층위에서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하려는 필사적인 분투를 하기 때문이다. <자본>에서는 이러한 상쇄요인을 ▲노동착취도의 증가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인하 ▲불변자본 요소들의 저렴화 ▲상대적 과잉인구 ▲대외무역 ▲주식자본의 증가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상쇄요인을 위와 같이 분류하긴 했지만, 사실 다양한 상쇄요인에 대해 『자본론』에 충분히 자세하게 서술돼있진 않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하려는 자본의 주요한 방법은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 정도, 착취와 수탈의 결합방식,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역량의 성숙 정도 등 다른 요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평균이윤율 저하경향과, 이에 저항하려는 자본의 분투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큰 역사적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각 시대별로 자본주의가 어떻게 평균이윤율 저하에 저항하며 자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분투해왔는지, 그리고 위기해소를 위한 자본의 분투가 어떻게 또 다른 위기 혹은 인류적 재앙을 만들어왔는지, 그럼에도 결국에는 평균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이 어떻게 관철돼 왔는지에 대해 이번 교육자료에서는 대략적으로만 설명하고자 한다. 이후 9강과 10강 ‘자본주의 역사 꿰뚫어보기’에서 정치적, 사회적 측면을 포괄해 보다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자유경쟁과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1776~1871년) 식민지 약탈과 노예노동에 기초한 상업자본주의, 그리고 공장제 수공업의 시대를 거쳐, 1700년대 후반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한 산업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1776년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이 일반화되고, 미국의 독립혁명이 시작된 해이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약 10년 앞둔 해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발간된 해이기도 하다. 이때로부터 100여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일부와 동부해안 중심의 북미대륙 일부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한 산업 자본주의가 발전돼 나갔다. 축적된 자본들은 아직 중소규모를 벗어나지 못했고, 산업마다 자본 간의 경쟁이 자유로이 펼쳐졌다. 국가는 경제에 개입하지 않은 채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만을 담당했다. 이 당시 서유럽에선 공황이 반복해 나타났는데, 이는 자유경쟁이 지배하는 무정부적 상태에서 주기적으로 벌어진 생산과잉의 결과였다. 그 이전까지 공황은 예컨대 가뭄이 들어 흉작이 드는 등 보통 자연적 재해에 의한 생산의 결핍으로 인해 나타났다. 그러나 기계제 대공업이 본격화된 19세기부터 공황은 생산의 위축이 아니라 생산의 ‘과잉’ 때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은 왜 발생하는가? 간단히 설명하면 시장에서 판매가 실현되기 전까지는 생산물이 판매될지를 알 수 없다라는 시장의 무정부성과, 경쟁자본을 무너뜨리고 시장점유율 확대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경쟁적 속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과잉생산, 과잉축적이 누적되면 소비와 생산의 격차로 인해 판매되지 않는 재고가 쌓인다. 재고가 쌓이니 자본가는 추가적인 생산을 중단하게 되고, 생산이 위축되면서 필요없는 노동력이 해고된다. 실업자가 늘어나며 소비력은 더욱 떨어지고, 이는 판매부진을 악화시킨다. 과잉생산에서 출발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결국 기업이 파산하는 공황으로까지 나아간다. 19세기에 주기적으로 발발했던 공황에 대해 엥겔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최초의 전반적 공황이 발발한 1825년 이래로 상공업계 전체는, 즉 모든 문명 민족들과 그 부속물을 이루고 있는 다소 미개한 민족들의 생산과 교환은 대체로 십 년에 한 번씩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교류는 정체되고, 시장은 포만 상태가 되고, 생산물은 팔리지 않아서 산더미같이 쌓이게 되고, 현금은 볼 수 없게 되고, 신용은 소멸되고, 공장은 조용히 서 있게 되고, 근로 대중은 생활 수단을 너무 많이 생산한 탓에 생활 수단이 부족하게 되고, 파산이 속출하게 되고, 강제 경매가 속출하게 된다. 마침내 산처럼 쌓여 있던 상품들이 대폭 혹은 소폭 인하되어 팔려 나가게 될 때까지, 생산과 교환이 점차 원래의 걸음을 하게 될 때까지, 이렇게 정체는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생산력들과 생산물들은 대량으로 허비되고 파괴된다. 이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져서 속보로 변하고, 이 산업상의 속보는 구보로 넘어가고, 이 구보는 다시 더욱 속력을 높여 공업, 상업, 신용, 투기의 장을 마구 내달리는 본격적인 장애물 경마의 질주로 변하며, 그러다가 마침내 목숨을 건 도약 끝에 – 파산의 구덩이에 다시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우리는 1825년 이래로 이러한 과정을 꼭 다섯 번 경험하였으며, 이 순간(1877년) 여섯 번째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황의 성격은 매우 뚜렷해서, 푸리에는 최초의 공황을 모든 공황에 타당하게도 이렇게 부를 정도였다 : crise pléthorique. 즉 여분에서 오는 공황.[43]” 그런데 이 당시의 공황은 매우 파괴적이었지만, 동시에 한계기업을 파산시키고 임금을 하락시키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자본의 이윤율을 급격히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공황의 주기적 격렬성은 역설적으로 성장기 자본주의가 가진 활력의 표현이었다. 공황을 거쳐 살아남은 자본은 파산한 자본의 불변자본을 싼 값에 인수하고, 늘어난 산업예비군 덕택에 착취율을 높이며 새로운 호황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당시 공황은 자본주의의 위기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 위기의 해결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황이 무한히 도돌이표로 반복되는 건 아니었다. 10년 주기의 공황을 거칠 때마다, 자본은 경쟁자본을 먹어치우며, 독점자본으로 변모해갔기 때문이다. 주기적 공황을 거치며 자본주의는 점차 ‘자유경쟁시대’에서 ‘독점과 제국주의’의 시대로 변화해갔다. 독점과 제국주의 전면화의 시대(1871~1914년) “...따라서 독점의 역사를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860~70년대: 자유경쟁의 발전이 가장 높이, 정점에 도달한 단계. 독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맹아에 불과하다. (2) 1873년 공황 이후: 카르텔들은 장기간 발전했지만 아직 예외적이다. 그것들은 아직 견고하지 않으며, 일시적 현상이다. (3) 19세기 끝무렵의 호경기 및 1900~3년의 공황: 카르텔들은 모든 경제활동의 기초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44]” 18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집적과 집중의 결과로 등장한 독점자본이 특정 산업을 지배하게 되고, 나아가 이러한 독점자본이 은행자본과 융합돼 금융독점체를 형성하면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독점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독점자본의 등장은 석유, 철강, 전기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2차 산업혁명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으며, 후발주자인 독일과 미국이 영국을 급격히 따라잡는 통로가 되었다. 주요 선진국들 사이에서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와 같은 독점체가 발전했고, 독점체들은 큰 영향력을 갖고 국가기구를 직접 좌지우지했다. 자유무역을 장려하며 야경국가에 머무르던 각 국은 이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보호관세 등 자본의 집중과 독점의 형성을 촉진하는 정책들을 펼쳤다. 이 시기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기 위한 주요한 해법은 식민지로의 자본 수출이었다. 국내에서 성장할 대로 성장한 독점자본은 국내투자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이윤을 거둘 수 없었다. 이러한 ‘잉여자본’을 식민지에 투자하게 되면, 훨씬 더 높은 이윤을 거둘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산업의 발전단계가 낮은 식민지에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훨씬 낮았고, 노동력의 가격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억압을 통해 다양한 수탈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전보다 훨씬 맹렬한 속도로 식민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러시아 6대 강국이 확보한 식민지의 인구는 1876년 2억 7,380만 명에서 1914년 5억 2,340만 명으로 늘었다. 1914년 무렵에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사실상 나머지 세계 전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제국주의 정책은 독점자본의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해법임과 동시에, 식민지 쟁탈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전면전이라는 새로운 위기의 출발점이었다. 식민지를 나눠먹던 40년 간 ‘평화’를 유지했던 유럽대륙은, 지구를 거의 다 나눠먹은 시점부터 더 이상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다. “1876년에 그랬던 것처럼, 유럽 열강들이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10분의 1을 그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을 때는 식민정책은 토지를 비독점적으로, 말하자면 ‘선착순’으로 차지하는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10년 무렵 아프리카의 10분의 9가 정복되고 전세계가 분할되었을 때, 독점적인 식민지 보유의 시대가, 따라서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특히 첨예한 투쟁의 시대가 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45]” 독점자본의 전횡과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패권대결은 뒤이은 ‘세계전쟁과 대공황’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세계전쟁과 대공황, 노동자혁명의 시대(1914~1945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재분할 쟁탈전은 몇 차례 국지전과 첨예한 전쟁 위기를 거친 끝에 마침내 1914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계전쟁을 불러일으켰다. 1918년까지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을 희생시켰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11년 만에, 누적된 경제적 모순들 위에 금융투기의 파괴적 결과가 덧붙여지면서 1929년 세계대공황이 시작됐다. 세계 대공황에 대응하는 자본의 해법은 케인스주의였다.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심각하게 벌어진 상황에서, 케인스주의 정책은 정부의 재정확장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효수요를 증대시켰고, 이를 통해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여나갔다. 1933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효수요 확장 정책으로 대공황이 어느정도 수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다시 급격한 침체가 더욱 가파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소비가 활성화되자 유효수요 확장분 이상으로 생산이 확장되면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더 벌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막대한 생산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이 택한 해결책은 전쟁이었다. 전쟁은 어마어마한 인위적 소비와 거대한 생산능력 파괴를 뜻했다. 전쟁은 군비경제로 어마어마한 유효수요를 창출했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생산력 파괴를 일으켰다. 자본주의는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5,000만 명을 희생시키는 대량학살과 대량파괴를 통해 대공황에서 벗어나 ‘청춘의 몸으로 회생하여’ 다시 축적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전후호황과 개량주의의 시대(1945~1980년) 자본주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25년 간 안정된 성장을 이어갔다. 이 때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핵심 정책은 다시 케인스주의를 통한 유효수요 확장이었다. 유효수요 확장은 한편으로는 임금인상을 허용하고, 복지제도를 도입하는 등 노동자의 구매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 체제에서 대규모 군비경쟁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맹렬한 자본의 확대재생산으로 인해 1970년대에 다시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에 따른 이윤율 저하 경향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유효수요 확장 정책 자체의 모순은 심각한 불황과 물가상승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 위기는 왜 스태그플레이션이란 형태로 나타났을까? 첫째로 유효수요 확장정책의 한계가 불황을 낳았다. 유효수요 확장정책은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이는데 그 목표가 있으나, 1930년대의 경험과 유사하게, 시간이 지나며 생산과잉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유효수요 확장으로 소비를 늘릴 때마다, 자본가들은 늘어난 소비수준에 생산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수준을 더욱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결국 생산과 소비의 간극은 정부 재정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벌어졌다. 더욱 심각한 형태의 생산과잉이 1970년대 극심한 불황으로 연결됐다. 둘째로 유효수요 확장 정책을 위해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의 한계가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전후호황기 초반에는 자본가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재정확장을 위한 재원을 조달했다. 이는 러시아혁명 이후 계급투쟁의 역관계 변화를 반영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자본가에게 세금을 매기는 대신, 화폐발행량을 확대하는 것으로 주요 재원 조달방안이 대체됐다. 특히 미국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전쟁을 치르며 막대한 양의 달러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달러의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고, 그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시행한 금태환 폐지는 달러의 가치 하락을 전 세계 화폐의 가치하락으로 확산시켰다. 거기에 오일쇼크라는 공급충격 사건까지 겹쳐, 높은 인플레이션이 불황과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다. 전후호황을 통해 빠르게 성장한 자본주의는 다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에 부딪혔고, 케인스식 유효수요 확장 정책은 더 이상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노동자계급의 패배와 함께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라는 새로운 해법으로 대체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의 시대 (1980~2022) 1970년대 노동자계급의 세계적 반란을 잠재운 자본가계급은 1980년대 이후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로 압축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란 정리해고, 임금삭감, 비정규직화, 복지축소, 노조무력화, 자본가감세, 규제완화, 기간산업사유화 등의 세부정책을 포괄하는 것으로, 착취를 최대한 강화하고 자본가에게 온갖 특혜를 줌으로써 자본의 이윤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데 그 목표가 있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중후반 칠레 군사정권의 실험을 거쳐,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의 보수주의 정권에 의해 본격화하여 1990년대 전 세계로 확산됐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개별 기업이 이윤율을 회복할수록 노동자는 더 가난해진다. 이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심화시켜 다시 이윤율 회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에 세계화와 금융화가 덧붙여졌다. 세계화는 ‘생산’과 ‘시장’ 양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시장의 세계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가속되다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함께 전면화했다. 1980년대 중국의 시장경제 전환, 1989~1991년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는 스탈린주의 진영을 소멸시키며 세계를 단일 공급망, 단일 시장으로 통합시켰다. 시장의 세계화는 시장을 획기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간극 확대를 완화했다. 중국산 저렴한 수입품으로 선진국 노동자들이 하락한 임금으로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임금하락이 노동자투쟁으로 연결되는 고리도 차단했다. 한편 생산의 세계화는 생산의 거점 전체 또는 일부를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이동시켰다. 저개발국으로의 공장이동은 임금비용을 획기적으로 하락시켰고, 선진국에서 노조를 무력화하는 주요한 전략이 됐다. 미국, 서유럽, 일본에 집중돼있던 공장들은 남미, 동유럽, 동아시아로 빠져나가고, 최종귀착지인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세계 자본주의는 중국의 생산과 미국의 소비라는 양대 축으로 재편됐다. 금융화를 설명하기 위해 금융자본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금융자본은 본래 산업자본에 대한 대부나 주식투자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나 배당의 형태로 나눠받음으로써 수익을 얻는 자본의 한 부류이다. 금융자본은 잉여가치를 직접 생산하지 않지만, 사회의 유휴자본을 수집해 산업자본에게 공급함으로써 산업자본의 가치증식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이자나 배당을 분배받는다. 그런데 주가가 지속적으로 폭등한다면, 금융자본은 이자나 배당보다 주식 매매차익으로 훨씬 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 금융자본은 투기적 불로소득에 대한 환상으로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 상층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고금리대출을 통해서도 수익을 올리며, 이후 실질가치를 크게 벗어난 주가가 폭락할 때는 시세차익을 실현하고 개미들에게 손실을 전가한다. 이것이 금융수탈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는 자본이 이러한 금융수탈을 광범위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금융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임금하락과 고용감소에 대한 보완책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로 감소한 선진국의 소비를 주식부동산 거품과 막대한 신용대출을 통해 인위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금융수탈은 시세차익으로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할 수 있지만, 매우 큰 부작용이 있다. 주식가격이 폭락할 때 많은 사람들이 파산하고, 그 충격으로 은행들까지 파산하며 경제 전반이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 1929년 10월 대공황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 그래서 1930년대 대공황을 수습하면서 미국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여러 가지 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런 규제들을 1999년에 대대적으로 풀어버렸다. 금융수탈의 수단은 주식과 부동산은 물론 기업, 외환, 원자재, 선물, 암호화폐로 확대됐다. 금융부문이 비대하게 팽창했고, 쓸만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자본은 가공할 수익률을 제공하는 금융부문에서 새로운 활기를 찾았다. 자본은 점점 더 생산적 투자처가 아니라 금융수탈에 몰두하게 됐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주식시장 거품이 2000년에 닷컴버블로 터졌고, 이후 주식시장에서 옮겨간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2008년 금융위기로 폭발했다. 파생상품을 매개로 미국과 세계 금융기관 다수가 부동산 부실채권과 연결돼있었기에, 파산의 파급효과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008년 9월 5대 투자은행과 최대보험사가 줄줄이 파산 또는 파산국면에 접어들었고,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전면에 부상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사건으로, 금융수탈의 최종결과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집행하던 자본가계급은 천문학적인 구제금융을 금융기관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소비시장이 빠르게 위축됐다. 경기부양을 위해 각국 정부가 엄청난 재정을 투여했다. 주요국 중앙은행은 대규모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정책을 장기간 실시했다. 이를 통해 2008년 금융위기가 폭발적인 대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은 차단했다. 그러나 대신 대불황이 닥쳤다. 2008년부터 2019년까지 12년 동안 세계 경제의 평균 성장률이 2.5%를 기록했다. 극심한 투자기피 현상이 벌어졌다. 대불황은 모순의 해소가 아니라, 모순의 축적과 악화를 통해 대규모 폭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세계화는 리쇼어링, 보호주의, 패권대결로 역전됐고, 금융화는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폭등으로 더욱 거대한 금융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 강력한 충격을 안기며, 신자유주의 시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시대, ‘위기와 전쟁과 혁명의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이전 시대 동안 축적된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위기가 격렬하게 분출할 시대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전 시대 동안 축적된 모순들로부터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충돌과 전쟁이 일상화할 시대다. 나아가 경제위기와 전쟁이 서로 맞물리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과 인류를 끝없는 고통 속으로 몰고 들어갈 시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전진할 것이며 나아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노동자혁명의 전망이 다시 한번 미래의 막연한 전망이 아니라 눈앞의 구체적인 과제이자 가능성으로 떠오르게 될 시대다.[46]”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하여는 11강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평균이윤율 저하경향 지금까지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에 자본이 어떤 주된 전략을 택하며 저항해왔는지를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자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따르면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이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에스떼반 에쎄끼엘 마이또는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869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스웨덴, 네덜란드 여섯 개 핵심 국가의 이윤율 평균치를 실제로 계산한 것이다. 그 결과를 보면, 1870년 무렵 40%대에서 출발했던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하락을 거듭한 결과 2010년 무렵 10% 근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짧은 기간을 놓고 보자면 등락을 거듭했지만, 긴 시간을 놓고 보자면 이윤율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그대로 이윤율 저하는 ‘경향적으로’ 관철됐다.[47] ---------------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 오늘날까지 자본주의의 큰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오늘 배운 자본주의 착취의 비밀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어느 책에서 재밌게 읽은 짧은 농담을 통해 짚어보려 한다. 아래의 질문에 답해보자. 질문: “백열전구 하나를 갈아 끼우는 데 자본가가 몇 명 필요할까?” 정답: “한 명(또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들은 노동자를 고용해 전구를 갈아 끼우게 한다.”라고 대답한 학생은 F학점을 받고 이 강좌를 재수강한다. 이번에는 절대 페이지를 건너뛰면 안 된다. “한 명도 필요 없다.”라고 대답한 학생은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일을 하는 데도 자본가는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우등생 표창과 함께 졸업하고 이제 나가서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된다.[48]”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이 폭로하는 진실은 이러하다.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자본주의가 발전시켜온 생산력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자본가는 1명도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의 혁명적 의의가 담겨있다. 그러나, 1강에서도 언급하였듯, 자본주의는 절대 자동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직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반복되는 위기와 전쟁을 중단시키고 자본가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올 때만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 이것이 ‘3강: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에서 다룰 문제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자료 카를 마르크스. (1997). 임금 노동과 자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카를 마르크스. (1997). 임금, 가격, 이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3. 카를 마르크스. (2015). 자본론 (김수행, Trans.). 비봉출판사.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프리드리히 엥겔스. (1997). 잉글랜드 노동 계급의 처지(발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김경민. (2023). 미르의 공장 일지. 숨쉬는책공장. 양준석, & 백종성. (2023). 자본주의 시대전환과 한국 노동운동. 거인의발걸음. .footnote-ref, .footnote-target { scroll-margin-top: 200px; color: #E60012; text-decoration: none; } .footnote-ref:hover, .footnote-target: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1] 강제에 의한 노동관계는 자본주의적 규율에서도 금지하고 있다. 법률의 존재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제노동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근로기준법 제7조(강제 근로의 금지) 사용자는 폭행, 협박, 감금, 그 밖에 정신상 또는 신체상의 자유를 부당하게 구속하는 수단으로써 근로자의 자유의사에 어긋나는 근로를 강요하지 못한다.’ ‘ILO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 제1조 1. 이 협약을 비준하는 국제노동기구 회원국은 가능한 한 조속히 모든 형태의 강제 또는 의무 노동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약속한다. ... 제2조 1. 이 협약의 목적상 강제 또는 의무 노동은 어떤 사람이 처벌의 위협하에서 강요받았거나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모든 노동이나 서비스를 의미한다.’ [2] 노동계약이 형식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불평등계약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본론의 한 구절은 이렇게 묘사한다:“노동력의 매매가 진행되는 유통분야 또는 상품교환분야는 사실상 천부인권(innate rights of man)의 참다운 낙원이다. 여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벤담(공리주의)이다. 자유! 왜냐하면 하나의 상품, 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로운 인격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공동의지가 하나의 공통된 법적 표현을 얻은 최종 결과다. 평등!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등가물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것만을 마음대로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 이득, 사적 이익 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공익,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이제 이 분야를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32p. [3] “그들은” (12시간 이상 일하기 보다는) “차라리 더 적은 임금을 받고 10시간 일하는 쪽을 훨씬 더 좋아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들 중에는 많은 사람이 실업상태에 있기 때문에(방적공들 가운데는 어쩔 수 없이 실이나 잇는 노동자가 되어 아주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만약 그들이 노동시간의 연장을 거부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즉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선택은 더 장시간 노동하느냐 아니면 해고되느냐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387p. [4] Hooper, T. (Director). (2012). At The End Of The Day. (2012), Les Miserables[Film]. Relativity Media, Working Title Films, and Cameron Mackintosh. [5]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276p. [6] 엥겔스는 이러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을 비판했으나, 동시에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사회적 모순과 부정의, 불평등을 직시하고 바꾸려고 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진정성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환상적 껍질 아래 도처에서 분출하고 있으나 저 속물들은 보지 못하는 천재적 사상의 맹아와 천재적 사상을 보고 기쁨을 느낀다.”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엥겔스. (1997).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 [7]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8] 여기서 잠시 ‘가치’라는 표현이 불러오는 한가지 오해에 대해 짚고 가려한다.“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생산적’ 또는 ‘가치’라는 표현은 도덕적 가치판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어떤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노동이 쓸모없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사실 마르크스는 무역과 금융의 비생산적인, 즉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속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자본 순환에 필수적이지만 잉여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따라서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누구도 『자본론』의 저자가 자본주의에서 무역과 금융(이들 부문은 가사노동과 달리 확실히 엄청난 수익을 창출한다)의 필수 역할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Celeste murillo, & Andrea d’atri. (2023). 생산과 재생산: 자본주의는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 빵과장미의 도전, 138p. [9] 이 글에서 우리는 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말 사이에 큰 구별을 두지 않을 것이다. [10] Celeste murillo, & Andrea d’atri. (2023). 생산과 재생산: 자본주의는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 빵과장미의 도전, 138p. [11]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 등가형태로 여겨지는 특수한 상품종류(이 경우에는 쌀)는 이제 화폐상품으로 된다. 다시 말해 화폐로 기능한다. 상품세계 안에서 일반적 등가물로 일하는 것이 그 상품의 독특한 사회적 기능으로 되며, 그 상품이 그 일을 사회적으로 독점하게 된다. 제2형태에서 아마포의 특수한 등가물로 기능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그리고 제3형태에서 자기들의 상대적 가치를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상품이 이 특권적 지위를 역사적으로 차지했다. 그것은 금이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89p. [12]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면, 예컨대 고등어를 화폐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등어는 고등어마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균일하지 않다. 게다가 고등어는 귀금속과 달리 금방 부패한다. 고등어를 화폐로 사용한다면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거래비용이 발생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고등어 화폐’는 비역사적인 상상으로나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13] “통화의 표준 단위가 일정한 무게의 금으로 정해져 있거나 또는 일정량의 금 가치에 연계되어 있는 화폐 제도. 금본위제의 초기 형태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금화로 발행하여 시장에 실제로 유통시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금속화폐는 운반의 불편성, 도난의 위험성 등 단점이 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자 금지금본위제가 나타났는데, 중앙은행이 금화 대신 금화의 가치와 같은 가치의 지폐와 보조화폐를 발행하는 제도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인 은행권을 금으로 교환하는 것을 금태환이라 하고, 이 은행권을 태환 화폐라고 한다.-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각 국은 전비 조달을 위해 통화를 증발하였고 금태환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영국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하게 되었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각국은 경쟁적으로 자국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평가절하를 하기 시작했고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기획재정부. (2020, November 3). 금본위제. 시사경제용어사전. https://www.moef.go.kr/sisa/dictionary/detail?idx=666) [14] 미국이 금태환 폐지를 선언한지 50년 넘게 지난 오늘날의 현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마르크스가 “지폐의 발행은 실제로 유통될 금량(또는 은량)을 지폐가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범위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보건대, 금본위제, 금태환제가 폐지된 상황에 대해 가정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금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상징(예컨대 토큰이나 지폐)으로 어떻게 대체될 수 있는가’에 대해 마르크스가 설명한 아래의 구절은 오늘날 미국이 어떻게 금태환제를 폐지한 뒤에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화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화폐의 상징(예컨대 지폐)은 자신의 객관적인 사회적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지폐는 이 정당성을 강제통용력에서 얻고 있다. 이런 국가적 강제는 한 공동체의 국내 유통 분야에서만 유효하다”. 이 중 뒷 문장은 오늘날의 현실과는 다르다. 역사는 미국과 같이 세계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존재하는 경우 이러한 ‘국가적 강제’가 ‘국내 유통’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허나 앞 문장은 오늘날에도 사실이다. 오늘날 달러의 ‘사회적 정당성’은 순전히 미국이란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독보적인 지위에 따른 신용이란 점은 명확하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가 “지폐가 자기의 한도[즉 실제로 유통했을 같은 명칭의 금화의 양]를 초과한다면, 지폐의 신용이 일반적으로 손상될 위험”이 있다고 한 것은 옳다. 달러는 금본위제 폐지 후 오로지 미국의 패권이라는 ‘신용’에 의존하고 있고, 2008년 금융위기처럼 달러의 지위가 흔들릴 때마다 금본위제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강화된다. 오늘날 점차 심화하는 미중 간 패권대결과 다극화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화된다면, 그래서 ‘국가적 강제’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50년 간 이어져 온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는 무너질 수 있다. [15] “금은 놀라운 물건이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물건을 지배할 수 있다. 금은 영혼을 천국으로 가게 할 수도 있다.” (콜럼버스, 『자메이카로부터의 편지』)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171p. [16] “단순상품유통[구매를 위한 판매]은 유통의 외부에 있는 최종목적[사용가치의 취득, 욕구의 충족]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의 내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198p. [17] 이 글에서는 잉여가치(surplus-value)와 이윤(profit)을 엄밀히 구별할 필요성이 없으므로, 개념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18] “상품소유자 A는 대단히 교활해서 자기 동료인 B 또는 C를 속일 수 있지만, B나 C는 아무리 해도 보복할 수가 없다고 하자. A는 B에게 40원의 가치가 있는 포도주를 팔고 그 대신 50원의 가치가 있는 곡물을 얻었다고 하자. A는 자기의 40원을 50원으로 전환시켰다. 적은 화폐를 많은 화폐로 만들었으며, 자기 상품을 자본으로 전환시켰다.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 A의 수중에는 40원어치의 포도주가 있었고, B의 수중에는 50원어치의 곡물이 있어, 총가치는 90원이었다. 교환 뒤에도 총가치는 동일한 90원으로 변함이 없다. 유통 중의 가치는 한 푼도 증가하지 않았으나 A와 B 사이에 그 가치의 분배는 변했다. 한 쪽에는 잉여가치로 나타나는 것이 다른 쪽에는 가치손실로 되며, 한 쪽에는 플러스로 되는 것이 다른 쪽에는 마이너스로 된다. 이와 동일한 변동은 A가 [교환이라는 위장된 형태에 의거하지 않고] B로부터 10원을 직접 훔쳤다 하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유통 중의 가치총액은 그 분배상의 어떤 변화에 의해서도 증가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 일국의 자본가계급 전체가 서로를 속여서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14p. [19] 마르크스는 소아시아 도시들이 고대 로마에 매년 화폐공납을 바치고, 로마는 이 화폐로 소아시아의 상품을 구매했던 사례를 든다. 이런 경우 진실은 로마가 소아시아의 생산물을 댓가없이 수탈하는 것에 불과하다. [20]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18p. [21]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26p. [22]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32p. [23] 밀가루의 생산과정은 원료(밀), 기계(제분기), 노동력의 조합으로 추상화하여 설명할 수 있다. 밀의 생산과정은 원료(밀의 종자), 기계(호미나 낫 등), 노동력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제분기 또한 제분기를 만들기 위한 원료(철 등), 기계(금속성형기), 노동력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앞선 단계의 원료와 기계에 대한 분석을 이어가면, 인간 노동이 들어가지 않는 어떤 자연적 원료로부터, 최초로 인간 노동을 투여해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순간으로 소급할 수 있다. 즉 어떤 생산과정에 사용되는 노동대상(밀가루 등)과 노동수단(오븐 등)은 소급하면 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자연적 원료와 이에 더해진 과거의 노동의 합으로 환원할 수 있다. 따라서 밀가루와 오븐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동안 사용된 모든 과거의 사회적 노동량의 합이다. [24] 밀가루 같은 원료는 일반적으로 생산과정에서 빵이 되며 사라진다. 반면 오븐과 같은 기계는 한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조금씩 내구도가 닳아, 언젠가 못쓰게 된다. 이런 경우 오븐은 그 사용으로 인해 잃어버린 내구도만큼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한다. 예컨대 어떤 오븐을 평균적으로 1만 번 돌리면 망가진다고 하고, 오븐의 가치는 1만 시간의 노동량과 같다고 하자. 빵 30개를 만들려면 오븐을 10번 돌려야한다. 이 경우 빵 30개를 만들 때 오븐은 자신이 가진 가치의 10/10000(즉 0.1%) 만큼을 빵에 이전하며, 이 경우 10시간(1만 시간*0.1%)의 가치를 빵에 이전한다.“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은,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증식과정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는 사실이다. 기계는 마멸에 의해 평균적으로 상실하는 가치 이상으로는 결코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23p. [25]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58p. [26]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807p. [27]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812p. [28] “자기 주위에 있는 노동자 세대의 고난을 부인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자본은, 인류는 장차 퇴화할 것이라든가 인류는 결국 사멸해버릴 것이라는 예상에 의해서는 그 실천적 활동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태양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의해서는 자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이것이 모든 자본가와 모든 자본주의국의 표어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사회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 퇴화, 조기사망, 과도노동의 고통 등에 관한 불평에 대해 자본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쾌락(이윤)을 증가시켜 주는데 어째서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가 하고 대답한다. 사태를 전체적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은 개별 자본가의 선의나 악의 때문은 아니다. 자유경쟁 아래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들이 개별 자본가에 대해 외부적인 강제법칙으로 작용한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365p. [29] 『자본론』 1권의 제 10장 ‘노동일’부터 제15장 ‘기계와 대공업’까지 당시 자본주의의 추악한 현실에 대한 노동자의 증언과 사례들, 그리고 비용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이것이 ‘불가피함’을 주장하는 자본가들의 뻔뻔한 증언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30] 구해근. (2002).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112p. [31] 구해근. (2002).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85p. [32] 조영래. (2009).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재단). (정찬일. (2019). 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책과함께, 392p.에서 재인용) [33] Sarah butler. (2013, September 23). Workers for Lidl, H&M and Gap in Bangladesh Work 15-Hour Shifts. The Guardian. https://www.theguardian.com/fashion/2013/sep/23/workers-in-bangladesh-long-hours [34] Guy stuart. (2022, June 9). Excess Work Hours, Part One. Global Worker Dialouge. https://workerdiaries.org/excess-work-hours-part-one/ [35] Tricontinental: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 (Ed.). (2023, April 20). The Death of over a Thousand Garment Workers in Bangladesh: The Sixteenth Newsletter (2023). Tricontinental. https://workerdiaries.org/excess-work-hours-part-one/ [36] 김경민. (2023). 미르의 공장 일지. 숨쉬는책공장. [37] 장하준. (2014).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부키, 57p. [38]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29p. [39] “기계가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감소시키거나 [아동노동과 여성노동의 사용, 성인 남성노동자의 노동력 가치감소 등에 의해], 또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을 싸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노동력을 싸게 하는 것에 의해서뿐 아니라, 기계가 처음에 아직 산발적으로 도입될 때는, 기계 소유자가 고용한 노동은 강화된 그리고 더 효율적인 노동으로 전환되어 생산물의 개별 가치를 그것의 사회적 가치보다 싸게 함으로써, 자본가가 하루의 생산물 가치 중 더 작은 부분으로 하루의 노동력 가치를 보상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기계의 사용이 일종의 독점상태에 있는 이 과도기에 이윤은 엄청나게 크며, 자본가는 이 ‘첫사랑의 시기’를 가능한 한 노동일을 연장함으로써 철저히 이용하려고 한다. 많은 이윤은 더 많은 이윤에 대한 갈망을 격화시킨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49p. [40] 기술혁신이 보편화되면 생필품인 빵의 가치가 낮아지고, 이에 따라 필요노동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 예시는 특별이윤을 설명하기 위함이므로, 편의를 위해 필요노동시간이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41] “기계는 아동과 여성을 대량으로 노동자계급에 추가함으로써, 성인 남성노동자가 매뉴팩처 시기 전체를 통해 자본의 독재에 대항했던 반항을 드디어 타파하게 된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44p.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부분적으로는 노동자계급 중 종전에 자본가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층들을 자본가에 복종시킴으로써, 또 부분적으로는 기계가 쫒아낸 노동자들을 하는 일 없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과잉노동인구를 생산한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51p. [42] 예컨대 1000만원 중 500만원은 불변자본, 500만원은 가변자본에 투하되었고 착취율이 100%라면 생산을 통해 자본이 얻는 이윤은 500만원으로 이윤율은 50%(잉여가치 500만원 / 총투자액 1000만원)이다. 반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1000만원 중 900만원이 불변자본에 투하되고 100만원만 가변자본으로 투하될 경우, 착취율이 동일할 때 자본이 얻는 이윤은 100만원으로 이윤율은 10% (잉여가치 100만원 / 총투자액 1000만원)에 불과하다. [43] 엥겔스. (1997).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 [44]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35p. [45]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206p. [46] 양준석, & 백종성. (2023). 자본주의 시대전환과 한국 노동운동. 거인의발걸음. [47] Esteban Ezequiel Maito. (2014). The Historical Transience of Capital The Downward Trend in the Rate of Profit since XIX Century. [48] 버텔 올먼. (2012). 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 모멘토. [앞선 시리즈 읽기] #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다음 시리즈 읽기] #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