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채 상병 사망 1년, 노동자계급 주도로 윤석열정권 퇴진투쟁에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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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해병대 채 상병 사망 1년, 노동자계급 주도로 윤석열정권 퇴진투쟁에 나서자

사진: 연합뉴스

 

국방부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사망한 대한민국 장병은 95명에 달한다. 3.8일에 한 명꼴로 군대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장병들은 여러 이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다. 훈련 중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하고, 군대 내 폭력으로 죽음을 맞거나 스스로 생을 놓는 경우도 있다. 규정에 어긋난 ‘군기훈련’으로 목숨을 잃기도 하고, 작전이나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음을 마주하기도 한다.

 

해병대 채 상병 역시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7월 8일, 경찰이 ‘임성근 전 해병1사단장은 채 상병 사망사건에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이를 신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2023년 7월 19일 채 상병 사망 이후 1년을 앞둔 지금, 채 상병 사건은 윤석열 퇴진투쟁의 발화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채 상병 사건의 경과와 주요 쟁점을 살펴보자.

 

채 상병의 죽음이 말하는 것 - 병사들에게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보장하라

 

2023년 7월 19일, 해병대 채수근 상병은 경북 예천 수해 현장에서 실종자를 수색하다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고, 실종 14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장병들은 수색작업을 하는지도 모른 채 작전 지역으로 이동했고, 채 상병의 직속 대대장인 포7대대장이 ‘위험해서 현장수색을 하면 안 된다’고 보고했음에도, 해병1사단은 사단장 명령에 따라 수색을 강행했다.

 

사단장에게는 관할 부대가 잘 드러나는 것이 중요했을 뿐, 병사들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수색 당시 채 상병을 비롯한 병사들에게는 구명조끼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문제의 임성근 사단장은 ‘빨간색 해병대 티셔츠로 복장을 통일하라’는 지침을 내렸을 뿐이다. ‘해병대’가 잘 보여야하기에 구명조끼를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투입 예정이던 장갑차까지 철수할 정도로 물살이 강한 상황에서, 병사들은 그 어떤 안전장비도 없이 ‘인간띠’ 수색을 해야 했고 채 상병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당시 해병대 현장지휘관은 채 상병이 떠내려가자 직접 신고하는 대신 주민에게 신고를 요청했다. “해병대 간부 한명이 다급하게 뛰어와 119 신고를 요청해 오전 9시 11분쯤 신고 … 구급대는 체감상 10분 안에 왔지만 해병대원은 이미 떠내려간 뒤”, 최초 신고 주민이 언론에 밝힌 내용이다. 왜 현장지휘관은 채 상병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고도 직접 신고하지 않았을까? 병사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왜 주민에게 신고를 부탁하느라 시간을 허비했을까? 해병대 측은 현장지휘관이 직접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 향후 진상이 규명되어야 할 일이나, 분명한 것은 해병대 현장 간부는 자신이 군 외부의 사건 개입을 초래한 당사자로 기록되는 것을 저어했으며, 이는 군의 폐쇄성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군은 군 외부 조직에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 군 내부의 일을 바깥에 알리는 행위를 철저히 억압하고, 이를 통해 군의 억압적 질서를 유지한다.

 

이렇듯 군대는 가장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공간이다. 채 상병과 동료 병사들에게는 안전장비도 없는 수중수색이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병사들은 사회와 단절된 채 고립되어 있고,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부당한 명령이 내려와도 저항할 수 없다. 양심적인 지휘관이 있었다면 채 상병이 죽지 않았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병사들이 죽어나가지 않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가뭄에 콩 나듯 나타나는 ‘양심적 지휘관’의 선의가 아니라 병사들의 권리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병사들에게 보장해야 한다. 이런 권리는 한국 현실에서 엄두도 못 낼 만큼 낯설게 들린다. 그러나 이미 독일과 미국,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 그리고 국제법은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을 병사의 권리로 명시한다. 이는 주로 2차대전 당시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전범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론했다. 나치 전범들의 변론에서 드러나듯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병사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거대한 전쟁범죄도, 군대 내의 억울한 죽음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일부 국가에서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나치 전범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자신을 변론했다

 

이렇듯, 병사에게 복종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물론, 병사의 불복종을 권리로 명기한 국가들에서 실제 병사들이 불복종의 권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이라크 전쟁 파병을 거부한 병사에 대한 미 군사법원의 처벌1)처럼 말이다.) 이 권리는 단지 병사 개인의 권리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병사들에게 단체를 만들고 집단행동에 나설 권리를 보장해야 비로소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할 권리가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 채 상병의 죽음이 드러냈듯, 병사들에게는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필요하다.

1)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 불복종 사례로 아구스틴 아구아요(Agustín Aguayo)의 사례가 있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인 아구아요는 학비를 벌고자 2002년 미군에 입대했다. 입대 당시 그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군대에서의 경험으로 전쟁에 반대하게 되었다. 그가 파병되기 전인 2004년 2월, 아구아요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지위를 소급해 신청했으나 거부되었고, 결국 전투의무병으로 이라크에서 1년을 복무한다. 2005년, 다시 양심적 병역거부자 지위를 요구하며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되었다. 2006년 독일 주둔 중이던 그는, 부대가 이라크로 복귀한다는 통보를 받고 기지를 떠났다. 2007년 3월, 미 군사법원은 탈영죄로 유죄판결을 내렸고, 그를 불명예 제대시켰다. 아구아요는 6개월간 복역했고 앰네스티는 그를 양심수로 지정했다.

 

윤석열 정권의 외압, 특검과 탄핵청원을 둘러싼 공방

 

채 상병의 죽음 이후 전개를 보자. 사건 수사 책임을 맡은 박정훈 당시 해병대 수사단장이 사건을 조사했고, 국방부 장관 결재를 거쳐 경상북도경찰청에 수사자료를 이첩했다. 박정훈 단장에 따르면 임성근 해병대1사단장 등 8명에게는 과실치사 혐의가 있고, 임성근 역시 사퇴를 결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후 ‘외압’이 시작된다. 수사자료 이첩 후, 국방부 장관은 자신의 결재를 뒤집고 ‘경찰 이첩 보류’를 지시했고, 국방부 법무관리관 등은 해병대 수사단에게 ‘관련자 혐의사실을 삭제하라’고 연락했다. 이어 국방부 검찰단은 수사자료를 경찰로부터 회수하고 박 대령을 항명과 상관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발했으며, 수색을 명령한 임성근 사단장을 혐의에서 제외한 채 사건을 경찰에 다시 넘겼다.

 

한 병사를 죽음으로 몬 주모자가 면죄되는 비상식적인 과정에, 권력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이 번지는 것은 당연하다. 일파만파 번지는 의혹에 대해, 정권은 강행돌파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대사에 임명해 국외로 빼내려는 윤석열의 시도는 노동자 민중의 더 큰 분노를 불렀을 뿐이다.

 

국방부 장관이 입장을 바꾼 배경, 박정훈 대령이 해임되고 ‘항명 수괴’ 혐의로 고발된 배경, 임성근 해병1사단장에게 어떤 혐의도 적용되지 않은 배경에 윤석열의 ‘격노’가 있었다는 것, 격노의 이유와 이후 과정을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 채 상병 특검이 제기되는 이유다. 심지어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임성근 사단장이 사임하지 않은 배경에 김건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사건 피의자의 임성근 사단장 구명을 위한 청와대 로비가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통령 배우자의 금융범죄자 지인이 주도해 국가권력을 움직여냈다는 것이다. ‘공정’을 내건 정부의 국가권력은 ‘비선’을 통해, 그야말로 추잡하게 행사되었다.

 

정부와 여당은 사건 은폐에 여념이 없다. 2024년 5월 2일, 국회는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채 상병 특검법을 통과시켰으나 5월 21일 윤석열은 10번째 거부권을 행사해 법안은 다시 국회로 돌아갔다. 5월 28일, 국회는 채 상병 특검법을 재표결했지만 재석 294인, 찬성 179표로 부결됐다. 결국 21대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은 거부권 행사법안 재의결 요건, 즉 재적의원 과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폐기되었다.

 

38일 뒤인 7월 4일, 22대 국회 7월 임시국회 본회의는 채 상병 특검법을 찬성 189표, 반대 1표로 가결했다. 7월 9일, 윤석열은 예상대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윤석열 정권에, 기를 쓰고 진실 공개를 막아야만 하는 중대한 이유가 있음이 명백해지고 있다. 물론 정권이 사건을 은폐할수록, 이를 규명하라는 대중의 요구도 커지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7월 폭우 피해 실종자 구조 중 사망한 해병대 채수근 상병 사건을 수사하던 박정훈 수사단장에 외압을 행사했습니다. 또 박정훈 수사단장에게 항명죄를 뒤집어씌워 사건 수사를 가로막았습니다. 이는 군사법원법 위반으로 명백한 탄핵 사유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윤석열은 채해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 140만명을 돌파한 윤석열 탄핵 국민청원의 첫 사유가 채 상병 사건에 대한 정권의 외압 행사다.

 

종합하면, 상황은 다음과 같다. 부당한 명령으로 병사가 죽었고, 진실을 밝히려는 군대 내부의 시도가 윤석열 정권과 군부에 의해 가로막혔으며, 정권의 외압 배경에 대통령 주변인의 로비가 있었음이 알려지는 등 국가권력의 악취나는 작동이 드러나고 있고, 분노한 대중은 특검을 통한 진상규명과 탄핵을 청원하고 있다. 오는 7월 19일과 26일, 윤석열 탄핵 청원 심사를 위한 국회청문회가 열린다.

 

 

윤석열 퇴진투쟁을 아래로부터 확대하자

 

진실을 조금이라도 밝히기 위해, 특검은 필요하다. 그러나 특검이 문제를 해결하는가? 탄핵 국민청원을 수용해 국회가 탄핵에 나선다면 문제는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현 국면과 2016~2017년 박근혜 퇴진투쟁 당시의 중요한 차이점은, 2016년 당시에는 가두투쟁이 기회주의적 야당을 왼쪽으로 견인하며 박근혜 퇴진 요구를 대중화했음에 반해, 현재는 ‘대통령 퇴진’의 경로가 처음부터 국회로 잡히고 있다는 점이다. 돌아보자. 2016년 10월 26일은 당시 여야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특검을 합의한 날이다. 당시 민주당 입장은 ‘우선 특검과 추후 국정조사 추진’, 정의당 입장은 ‘특검과 국정조사 병행’, ‘청와대 참모진 전면 교체와 내각 총사퇴를 통한 거국 중립내각 구성’, 국민의당 입장은 ‘문고리 3인방 배제’에 지나지 않았다. 2016년 11월 초까지만 해도 보수야당의 요구는 ‘국회추천 총리임명, 특검, 국정조사’에 지나지 않았고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얼마든지 ‘거국중립내각’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즉, 광장의 투쟁이 없었다면 박근혜 탄핵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당시 민주노총의 정치총파업이 보다 위력있게 전개되며 광장투쟁과 결합되었더라면, 투쟁의 주도권은 민주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고, 노동자 민중은 박근혜 정권을 자신의 손으로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어느 것 하나 바꾸어내지 못한 문재인 정부 5년의 환멸 또한, 따라서 윤석열 정부의 등장 또한 없었을 것이다. 핵심은 박근혜 퇴진투쟁 국면 노동자계급의 역할이 미약했다는 것, 따라서 박근혜 퇴진투쟁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정상화’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채 상병 특검법, 노조법 2·3조 개정안, 전세사기특별법 …. 임기가 절반도 지나지 않은 이 정부가 행사한 거부권만 15번이다. 정부는 거부권 남발의 효과를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다른 방안을 선택할 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지배계급 내부 분열이 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 내부의 위기가 곧 노동자 민중의 기회인 것은 아니다. 지금, 엄중한 정세에 비해 노동자 민중의 주체 역량은 미약하다. 연대를 확대하며 다가올 격돌에 대비해야 한다. 아리셀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투쟁, 노조법 2·3조를 온전히 개정하는 투쟁, 일터의 경계를 넘어 생존권 쟁취투쟁을 확대하자. 노동자계급 주도로 윤석열 퇴진투쟁을 확대하며 ‘체제의 정상화’, 그 너머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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