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대결 멈추고 공공의료를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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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숫자 대결 멈추고 공공의료를 말하라

  • 안종호
  • 등록 2024.03.19 15:06
  • 조회수 442

 

민중의 건강을 볼모로 한 의정 대립

 

정부의 2,000명 의대 정원 확대 발표와 이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집단사직으로 시작된 의료대란이 벌써 한 달째에 접어들고 있다. 정부와 의사들의 강 대 강 대립은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되고 있다. 제때 진료나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정된 수술조차 기약 없이 연기되고 있다. 사태가 길어지면 중증 또는 응급질환 환자들에게 언제 심각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고 제때 치료받지 못한 후유증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의정 대립이 파국으로 치달으면 보건의료 체계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조차 배제할 수 없다.

 

의사들은 의사 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의사 한 명이 진료하는 환자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점, 의사들의 장시간 노동 및 현격히 높은 노동강도, 보건의료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에 의존하는 의료기관의 현실 등은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분명한 징후다. 한국이 자랑하는 높은 의료접근성이나 짧은 진료 대기 시간도, 본인 부담 의료비 비중이 높고 지방의 응급 및 필수의료 역량이 상당히 취약하다는 점 등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의사들은 필수의료의 붕괴나 지방의 의료공백이 의사 수가 아니라 의료인력 배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장 경쟁 질서를 유지한다는 전제에서 의료인력 배분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건강보험 의료수가(醫療酬價)를 인상하자’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필수의료 분야에 더 많은 수가를 지급함으로써 해당 의사 수를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가 인상을 통한 유인책은 이미 실패한 정책이다. 흉부외과 수가를 2배로 늘렸어도 흉부외과 지원율은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감소했다. 수익성과 경쟁이 지배하는 시장 질서에서 의료인력이 수익성이 높은 곳으로 쏠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더구나 얼마나 의료수가를 올려야 필수의료와 지역의료가 살아날지도 알 수 없다. 수가 인상은 필수의료 파탄과 지역의료 붕괴를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거대 의료자본의 이윤만 증대시킬 것이고 건강보험 재정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의사들의 맹목적 반대는 대다수 노동자 민중에게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집단이기주의로 비칠 뿐이다. 공공의대 설립 반대 등 한국 사회에서 의사들이 그릇된 특권의식을 내비쳐 온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의대 정원 확대라는 포퓰리즘

 

물론 이 사태의 일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정부는 현재 3,000여 명인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린다면서도 확대 규모에 대한 과학적 근거도, 확대된 의료인력의 배치에 관한 구체적 로드맵도 내놓지 않았다. 정부는 한국 보건의료 문제의 핵심이 의사 수 부족이며 의사 수만 늘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굴고 있다. ‘어떤 의사’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사라지고, ‘얼마나’ 존재하느냐만 남은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찬성한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로드맵도 없이 오직 ‘기승전 의사 수 확대’로 몰아가는 정책은 포퓰리즘일 뿐이다. 증원 발표 전 내놓은 ‘필수의료 패키지’ 역시 예산이나 구체적 계획 없이 희망 사항만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심지어는 기존에 실패했거나 실현 가능성 없는 정책들을 나열해 놓았을 뿐이다.

 

갑작스러운 대규모 의대 증원 발표가 불러올 파장을 정부가 몰랐을 리 없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이것은 선거용 기획이다. 마치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유도한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일방적 발표와 밀어붙이기식 행태가 이를 드러낸다. 2022년 화물연대 파업을 탄압하면서 재미를 본 정부가 이번에도 ‘이권 카르텔’로 의사들을 악마화하면서 지지율 상승이라는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사태가 결국 일종의 정치적 쇼로 끝나지 않겠냐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정책을 내지르고, 긴장이 극대화된 시점에서 타협안을 제시하는 영웅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다. 만약 정부가 정말 정치적 쇼로 이 사태를 기획했다면 이는 민중의 건강을 볼모로 지지율 장사를 하는, 정말 치졸하고 간악한 정권이 아닐 수 없다.

 

보건의료 산업화를 위한 의사 수 증원?

 

한편 정부의 의대 증원 확대 정책이 소위 ‘의료민영화’, 즉 보건의료 산업화를 위한 의료인력 확충이라는 분석도 있다. 윤석열 정부 집권 후 보건의료 부문에서는 ‘공공’이란 단어 자체가 사라졌다. 코로나19 유행 기간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역할했던 지방 의료원들에 정부는 6개월의 회복기 손실보상금 외에 아무런 지원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또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울산의료원과 광주의료원 설립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반면 건강보험 보장성 약화와 실손보험의 확대를 야기하는 ‘건강보험 개편안’, 의료영리 플랫폼을 허용하는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 추진, 건강관리를 산업화하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과 '비의료 건강관리서비스 시범사업', 개인 건강정보와 보건의료 데이터에 민간 보험회사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건강정보 고속도로 플랫폼’, 디지털 헬스케어와 바이오헬스 산업 육성을 위한 각종 규제 폐지 등 보건의료 산업화를 위한 정책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의대 증원을 보건의료 산업화 정책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수도권에서만 8~9개 대학병원이 2027년~2028년 개원을 목표로 500~1,000병상 규모의 총 10개소 분원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도 대학병원들이 500~1,500병상 규모의 분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 울산과기대 등에서 바이오·헬스산업에 필요한 의과학자들을 위한 의대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이 정부가 주장하는 ‘필수의료’, ‘지역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하는 보건의료 시장화, 바이오·헬스산업 등의 이윤 증대를 위한 인력 공급이라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문제는 공공의료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대립은 한국 보건의료의 진정한 문제를 오로지 의사 수 논쟁으로만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붕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과 의료전달체계의 붕괴, 과잉 진료, 낮은 건강보험 보장률 등 한국 보건의료가 드러내는 심각한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한국의 보건의료 체계의 특징은 공적 재원으로 마련된 건강보험 제도와 시장 질서에 근거한 민간 의료자본 중심의 의료공급체계 간의 모순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필수의료 붕괴, 의료전달체계의 파탄은 ‘의료 시장 매커니즘’ 자체가 붕괴했다는 징조이고 한국의 의료공급체계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한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해결책은 보건의료 부문에서 영리추구 행위를 근절하고 무상 공공의료체계를 확립하는 데 있는 것이지,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데 있지 않다. 시장주의에 기반한 의료공급체계에서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은 의료자본의 이윤을 늘릴 뿐이다. 의사 수가 아무리 늘어나도 시장 경쟁 질서, 의료산업에서의 영리 추구 행위를 그대로 두고서는 의료인력의 합리적·계획적 배치란 불가능하다.

 

이제는 의사 수를 둘러싼 정부와 의사의 치킨게임에 가려진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진정한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 전면적 무상 공공의료체계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저출생으로 지방 소멸이 현실화된 한국에서 각종 의료공백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이 문제에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의료자본을 포함해 자본의 이윤 증식을 자기 사명으로 하는 자본가 정부나, 자신들의 특권을 한 치도 내놓을 생각이 없는 의사들이 무상 공공의료체계를 도입할 리 만무하다. 아플 때 돈 걱정 없이 당당히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는 모든 민중의 기본권이다. 노동자들이 앞장서 공공의료체계로의 전환을 쟁취해야 한다.

 

1977년 의료보험 도입은 박정희 정권이 국민의 건강을 생각해 시행한 시혜적 정책이 아니다. 1970년대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노동자 민중의 불만 고조,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 증가라는 배경이 있었다.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 확대 시행에는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2000년 국민의료보험의 통합에는 1996~97년 총파업과 1994년부터 시작된 ‘의료보험통합일원화와 보험적용확대를 위한 범국민연대회의’를 통한 노동자 투쟁이 있었다. 민간자본 중심의 의료공급체계를 전면적 무상공공의료체계로 개편하는 것도 오로지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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