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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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

연재 | 노동자계급 속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길을 개척하는 ‘빵과 장미’의 도전⑦

  • 오연홍
  • 등록 2023.02.01 14:53
  • 조회수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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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빌딩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실비아 페데리치는 <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 등의 저작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다. 호세피나 마르티네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자율주의와 페데리치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           *           *

 

<혁명의 영점>1) 머리말에서 실비아 페데리치는 자신의 작업을 되돌아보며, 1970년대에 정립하기 시작한 이론 그리고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이 수행한 전략을 부분적으로 재고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은 가사 노동자를 핵심적인 사회 주체로 간주했다. 그 전제로서, 가사 노동자의 무급 노동을 착취하고 무급이라는 조건 위에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세워졌다는 사실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조직하는 기둥이라고 봤다. 하지만 세계 노동시장의 엄청난 팽창과 함께 세계 차원에서 시초 축적이 재개되고, 복합적 형태로 이뤄진 수탈의 결과를 보면서, 나는 1970년대 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더이상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이 페미니즘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을 위한전략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됐다. 현실에서는 급격한 평가절하 탓에 모든 민중의 자산 가치가 사실상 사라지고, 토지 사유화 계획이 빠르게 확장되며, 모든 천연자원이 상업화되고 있었다. 이는 생산수단의 환수와 새로운 사회적 협력 형태의 창출이라는 문제를 긴급하게 제기한다. 하지만 이런 목표가 [가사노동]임금을 위한 투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단은 페데리치의 가장 중요한 작업에 포함된 몇 가지 측면과 더불어 그의 시각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압축해서 보여준다. 다른 글2)에서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 문제, 가사노동에 관한 자율주의 페미니즘과의 논쟁, ‘결정적인 사회 주체로서 주부의 위치라는 문제를 살펴봤다. 좀 더 최근에 쓴 글3)에서는, 실비아 페데리치에 앞서 나온 마리아 미스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자본주의가 일으키고 있는 강탈과 시초 축적의 구조를 다뤘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열쇠를 남반구 여성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마리아 미스의 주장을 분석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내재한 경향으로서 강탈이라는 현상은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혁명전략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재확인한다고 우리는 설명했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은 더 늘어났고, 인종차별에 더 많이 시달리며, 여성의 비율도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모든 억압받는 이들과 동맹을 맺으며 자본주의에 맞서 강력한 사회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페데리치가 제시하는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의 최종 목표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공유재란 무엇인가? 왜 페데리치는 그것을 공산주의에 대치시키는가? 자본주의와 단절하는 혁명 없이 생산수단을 되찾고 새로운 사회적 협력 형태를 창출하는 게 가능한가? 이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우리는 페데리치의 자율주의 페미니즘 사상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간의 또 다른 논점을 다루고자 한다.

 

공유재란 무엇인가?

 

실비아 페데리치의 책 <세계를 다시 매혹시키기> 서문에서, 피터 라인보우4)는 공유재에 대한 첫 번째 규정을 내놓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공유재란 무엇인가? 페데리치는 이에 대해 추상적인 답변을 피하면서, 두 개의 논점 즉 우리가 분열된 과정을 넘어서기 위한 집단적 재전유(reappropriation)와 집단적 투쟁을 주로 다룬다. 여러 가지 사례가 나온다. 때때로 그는 네 개의 요점을 제시한다. 1) 모든 부를 공유해야 한다. 2) 공유재에는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따른다. 3) 돌봄 공유재는 모든 사회적 위계에 반대하는 저항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4) 공유재는 국가형태와는 다른어떤 것이다. 사실 공유재에 관한 논의는 국가의 위기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국가는 이제 공유재라는 용어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변질시킨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공유재는 특히 돌봄을 위한 협력 방식을 우선시하면서, 국가 외부에서 사회적 협력 방식을 만들어내는 시도다. 페데리치는 공유재의 정치란 사회 운동의 다양한 실천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사회적 협력을 강화하고, 우리의 삶에 대한 시장과 국가의 통제를 약화시키며, 부의 공유를 촉진하고, 이렇게 해서 자본의 축적에 한계선을 긋는 것을 추구한다.”5)

 

그의 구상은 존 홀러웨이가 20년 전에 정식화한 권력 장악 없이 세상을 바꾼다는 자율주의적 발상에 바탕을 둔다. 이 경향은 국가를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회피하면서 이 체제의 변방에 비자본주의적 협력 방식이라는 대안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종의 반-전략적인 사고인데, 철학가이자 트로츠키주의 사상가인 다니엘 벤사이드는 이를 신자유주의 공세 기간에 나타난 정치의 쇠락을 특징짓는 현대의 유토피아로 묘사했다.

 

이런 발상이 새롭지는 않다. 이는 마르크스 이전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적 상호부조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이런 주장을 논박했다.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의 추종자들은 상호부조를 위한 은행[프루동은 인민은행 설립을 제안했다]의 재정 지원을 받는 생산·소비 협동조합의 확대를 촉구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혁명 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을 점진적으로 극복하려 했다.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연설에서 마르크스는 그런 입장에 반대하면서, “노예나 농노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임금노동은 과도적이고 낮은 단계의 노동 형태일 뿐이며, 연합한 노동 앞에서 사라질 운명이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였다. “노동 대중의 해방을 위해서는 협동조합적 노동을 전국 차원으로 조직해야 하며, 따라서 국가적 수단을 동원해 조성해야 한다.” 이것은 토지와 자본의 주인들이 그들의 경제적 독점을 영구적으로 수호하기 위해 언제나 그들의 정치적 특권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저항에 부딪힐 것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자본가들의 권력을 깨부수기 위해 노동자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시대에 상황이 이랬다면, 오늘날에는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그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유통의 세계화가 확대되면서, 지역 차원의 소규모 공동체를 만들어보려는 그 어떤 발상도 공허한 게 돼버렸다. 게다가 1세기 이상의 계급투쟁 경험을 거치면서, 그들의 특권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자본가들과 그들의 국가가 모든 반혁명적 무기를 들고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화와 세계화는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이 공산주의를 향한 혁명적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페데리치에게는 그렇지 않다. 생산자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을 손에 넣어야 할 필요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의 목표는 역사라는 시계를 뒤로 돌리는 것이다. 그는 현대 기술을 포기하고 우리의 삶을 전원생활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기술을 비관하며 변방에서 저항하기

 

이 문제에 대한 페데리치의 관점은 이탈리아 사회학자 토니 네그리가 대표하는 자율주의의 다른 경향과는 180도 다르다. 네그리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술-과학적인 발전과 디지털화 덕분에 인지(cognitive) 노동이 최고 지위를 갖게 된다고 본다. 이런 변화가 공산주의를 지금 여기에서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는 생각이다. 페데리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 가설을 비판한다.6) 첫째, 그는 네그리가 남반구 여성의 가사노동과 비공식 노동을 시야 밖으로 밀어낸다고 논박한다. 만약 네그리가 이 점을 고려했다면 인지 노동의 우위를 주장할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이런 면에서는 네그리보다 페데리치의 입장이 남반구와 북반구 간에 존재하는, 그리고 가부장제와 인종차별이 빚어내는 자본주의 세계의 뿌리 깊은 불평등을 더 잘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페데리치가 제기한 비판의 다른 측면에는 문제가 많다. 페데리치가 보기에, 기술은 공산주의 전망의 토대를 형성할 수 없고, 협력의 새로운 형태로 이어질 수도 없다. 기술의 기원과 발전이 자본주의와 연계돼 있으며 그 논리와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술 발전의 성격을 지배와 파괴로 규정함으로써 페데리치는 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주의로 빠져든다.

 

페데리치가 마르크스의 주장을 상당히 왜곡하면서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으므로, 그 논지를 하나씩 추적해 보도록 하자.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을 분석하면서 마르크스 혁명 이론의 주요한 신조, 즉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모든 형태의 노동이 산업화할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와 현대 산업이 착취로부터 인간이 해방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가정을 재고하게 됐다고 말한다. 첫 번째 논점으로서, 그는 모든 노동이 산업화된다는 주장을 마르크스의 신조로 규정했는데, 비공식 노동, 가사노동, 농촌의 생계노동 등 다양한 비임금 노동 형태가 있다는 점을 볼 때 마르크스의 주장은 틀린 것으로 입증된 듯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페데리치는 마르크스가 절대 법칙이 아니라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한다. 그 점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관계가 대단히 넓게 확장됐으며, 농촌 지역은 19세기와 비교할 때 (또는 하다못해 30년 전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산업화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대 산업과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입장을 숙명적으로 공산주의로 이어지는 일종의 기술 결정론으로 치부한다. 페데리치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일단 이 과정이 종료되면, 일단 현대 산업이 사회적 필요노동을 최소한으로 감소시키면, 마침내 우리가 우리의 존립과 자연환경의 주인이 되는 시대가 시작될 것이며,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좀 더 수준 높은 활동을 위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먼저 우리는, 자동으로 공산주의에 도달하게 될 기술적 필연성 같은 얘기를 마르크스에게 덮어씌우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주장도 없을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이들을 이어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한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그람시는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독립한 정치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름 아니라 이런 역사적 도약이 그냥 보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데리치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 발전이 사회주의를 가능케 해준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틀렸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주장이 틀린 이유는 이런 것이다.

 

<자본론> 1권이 출판된 지 150년이 지났고, 마르크스가 사회혁명에 필수적이라고 여긴 객관적 조건은 성숙한 정도를 뛰어넘은 상황인데도, 자본주의는 녹아내릴 조짐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녹아내릴거라고 말한 적이 결코 없다는 자잘한 측면은 제쳐놓을 수 있다. 이 문제에서 페데리치는 마르크스보다는 네그리와 더 논쟁을 벌이는 것 같다. 페데리치는 기술 결정론이 마르크스주의의 특성이라고 주장하지만, 기술 결정론에 빠지는 걸 피하고자 한다면, 계급투쟁의 지형 위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전략적 투쟁이라는 지형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자본주의가 왜 아직 무너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설명을 찾고자 한다면, 최소한 20세기를 관통하며 일어난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패배와 퇴행을 유발한 노조 관료들의 역할, 사회민주주의에서 스탈린주의에 이르는 정치 관료들의 역할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페데리치는 그런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러시아혁명이나 20세기에 일어난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혁명적 투쟁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기술 결정론을 둘러싼 논의만 무성하게 이뤄진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생산수단을 우리가 다른 목적을 위해 손쉽게 넘겨받아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국가를 장악할 수 없고, 자본주의적인 산업과 과학, 기술을 장악할 수도 없다. 그것은 착취를 목표로 만들어졌고, 그 점이 국가, 산업, 과학, 기술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수탈자를 수탈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생산수단을 장악하려는 투쟁이 가망 없는 것이라면, 어떤 미래가 가능할까? 기술에 대한 페데리치의 비관은 과거에 결박된 유토피아적 반자본주의로 귀결된다. 마치 21세기 기술 발전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피난처가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는 땅, 농촌 지역, 공동의 돌봄노동과 연결된 생존을 위한 공간 만들기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페데리치는 라틴 아메리카의 채굴산업 확장에 저항하는 농민과 원주민 공동체의 투쟁, 빈민가의 비공식 노동 협업기구, 그 밖의 일부 아프리카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 경험을 바라본다. 문제는 그가 결국 빈곤을 미덕으로 탈바꿈시킨다는 점이다. 그는 에너지 자원에서 식수 공급 시설까지, 농업 기술에서 공공의료까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할 재화와 기술 자원에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한 공동체의 생존 경험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중심부 나라들이라면 그의 공유재 구상은 시간은행*, 도시에서 텃밭 가꾸기, 물물교환 경제로 표현될 것이다.

[* 시간은행(Time Bank):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그 시간만큼의 시간 화폐를 적립해, 그것으로 자신이 필요할 때 타인의 도움을 얻는 일종의 마을 공동체 운동.]

 

이와 같은 기술에 대한 비관과 생활의 농촌화를 지향하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초래한 생태 위기에 관한 논쟁에서 유명해진 탈성장이라는 구상과 겹친다.7) 탈성장 경향의 다수는 기술이 누가 사용하는가에 좌우되는 수단또는 중립적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주의 지배구조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분적으로는 이 말이 옳다. 자본주의가 기술 발전의 형태를 규정한다. 독점자본가들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수히 많은 발견이 폐기되거나 봉인되며, 오직 상품화 가능성을 가진 것만이 개발된다. 팬데믹을 겪는 동안 우리는 이 사실을 입증하는 방대한 증거를 목격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수중에서 과학기술 발전이 노동자를 위해 더 많은 자유시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잉여노동을 창출할 뿐이며, 노동자에게서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더욱 육중한 쇠사슬로 묶어버리고, 노동자에게 규율을 강제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을 분석했다.

 

자본가들의 수중에서 기술이 끔찍한 파괴력, 대중을 절멸시킬 수단, 생태 위기로 이어지는 모든 추세를 만들어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동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마치 기계 자체가 일종의 영혼을 지닌 것처럼 이런 추세가 발생하도록 예정된 것은 아니다. 독점자본가들이 인간의 공유자산을 사적으로 전유하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과학과 기술을 포기해야 한다면, 이는 몇백 년에 걸친 인간 노동의 성과를 포기한다는, 또는 자본가계급에 헌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술에 대한 이런 비관적인 생각은 어디까지 뻗어나갈까? 우리는 백신, 암 연구, 인공지능, 태양열 전기에너지, 로봇공학을 내버려야 할까? 페데리치는 공유재의 정치가 과거로 회귀하자는 불가능한 약속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에서 우리의 운명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공유자산을 부정하는 그의 태도가 이 집단적 가능성을 제약한다.

 

우리는 그와는 반대되는 입장을 지지한다. 자본주의는 산업 발전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우리는 자본가들 없이도 현대 산업과 과학 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 과학 연구의 토대를 새롭게 조성하면서 생산을 재편하는 것도 가능하다. 많은 분야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급격하게 축소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산업은 무공해 대중교통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생산의 배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광고와 계획적 진부화를 이용해 소비지상주의와 인위적인 수요를 창출한다. 그 반대편에서 자본주의는 가난의 바다를 만들어낸다. 사적 이윤에 생산이 좌우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어떤 분야에서는 탈성장을 시도하고 또 다른 분야에서는 새 기술을 적용하며 생산을 확대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런 문제는 사회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하고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의 민주적 계획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사회화와 자동화: 가사노동에 대하여

 

돌봄노동이나 가사노동의 경우 기계가 제공할 수 없는 스킬, 감정, 애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완전히 자동화할 수 없다고 페데리치는 주장한다. 모든 사회적 노동이 자동화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강령은 쓸모없게 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페데리치는 우리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요구하는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이 업무의 완전한 자동화를 뜻하는 것처럼 그릇되게 가정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반드시 전면적인 자동화를 뜻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가사노동을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떼어내 사회 전체가 떠맡고 조직하는 업무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들 업무가 노동력 재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 사회화는 물론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손으로 하는 일을 상당 정도로 자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초 소련에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공동 빨래방, 어린이집, 공동 식당 등의 형태를 취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재생산 업무의 상당 부분이 민간부문(식당, 패스트푸드 체인, 빨래방 등)과 공공부문(병원, 공립학교 등) 모두에서 이미 임금노동이라는 방식으로 사회화됐고, 부분적으로 자동화됐다. 그렇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가사노동의 무거운 짐이 가정 내에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남아 있으며, 당연히 여성의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 일의 상당 부분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구내식당, 빨래방, 어린이집, 양로원 등의 형태로, 즉 전문 인력을 갖추고 있으며 누구나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질 좋은 공공시설의 형태로 사회화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사적 영역에 남아 있는 가사노동을 최소치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돌봄노동을 사회 구성원 전체가 자율적으로 조직한 노동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돌봄노동은 더이상 짐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 수반되는 애정과 감정은 더 이상 돈 문제, 급여를 받아야 할 필요, 불안정한 형편, 가부장적 억압, 인종차별, 자유시간의 부족함 등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애정은 새로운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상상력의 빗장이 풀릴 것이고, 도시의 재구성, 무공해 에너지 자원 개발, 천문학 연구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창의력이 폭발할 것이다. 사회 전체가 그런 사회적 노동의 혜택을 누릴 것이다.

 

공산주의의 과거와 미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들이 자기 활동을 실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생존 자체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현존하는 생산력의 총체를 전유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전유는 우선 전유되는 대상 즉 생산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 생산력은 총체로 발전해왔으며, 오직 보편적 교류 속에서만 존재한다.

 

추정에 따르면, 2022년 말에 이르면 가장 부유한 상위 10%가 모든 사회적 부의 76%를 차지하는 반면, 86천만 명이 극빈층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한다. 다양한 국제단체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식량 부족의 결과로 파국적인 기근 사태를 겪을 거라고 경고한다. 이 같은 조건에서 인류의 상당수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자율주의 페미니즘이 제안한 생존 공동체로는 이 상황에 탈출구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들은 자본의 축적에 한계선을긋고 현실의 빈곤을 사회화한다는 유토피아적 발상을 넘어서지 않는다.8)

 

페데리치는 16세기 독일의 토마스 뮌처와 이단 종파가 이끈 농민 반란과 더불어 전자본주의 사회의 농민 공동체 경험을 예로 든다. 여기에서 그는 공유재의 선례를 찾아낸다. “모든 재산은 공동으로 가져야 한다(Omnia sunt communia)”는 것이 재세례파 농민과 도시 평민이 군주와 로마 교황청에 맞서 치켜든 구호였다. 실제로 여러 차례의 거대한 반란은 계급 사회에 맞선 공동체주의의 씨앗처럼 보일 수 있다. 엥겔스는 뮌처의 발상이 상상 속에서 공산주의를 예견한 거라고 설명했다.9) 그는 [뮌처가 생각한]신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는 것은, 사적 소유가 없고 사회 구성원 위에 군림하는 국가권력이 없는 사회, 즉 계급 차별이 없는 사회의 건설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 의지와 영웅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인 시대의 배타적이고 파편화된 운동은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깨뜨릴 수 없었으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사회를 건설할 수도 없었다. 귀족과 신흥 자본가계급의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됐다는 사실이 이 농민 반란의 한계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증거다. 어쨌든 페데리치가 공유재의 정치를 위한 선례를 찾기 위해 16세기 농민 투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와 동시에, 페데리치는 지난 150년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이뤄진 수없이 많은 노동자와 농민이 발산한 거대한 역사적 창조력을 간과하는 듯하다. 거기에는 부르주아적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를 뒤흔든 파리코뮌 사례가 있다. 러시아혁명에서는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14개국 연합군을 물리친 노동자와 농민이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으며, 새로운 토대 위에서 경제를 재편하고 세계혁명의 도약대가 되고자 했다. 스페인혁명,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공장을 비롯한 여러 현장에서 이뤄진 노동자 통제와 자주 관리의 다양한 경험 등 자기조직화의 또 다른 수많은 사례가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거머쥔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최근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공장 자주 관리 경험도 포함된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지역 주민, 학생, 빈민과 함께 생산 운영을 장악한 사례다.

[*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 1974425일 좌파 청년 장교들이 독재정권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시민들이 이 반란을 지지하는 의미로 병사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면서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벤사이드가 현대의 유토피아라고 표현한 페데리치 식의 관점은 계급과 국가가 없는 사회로 전진하는 수단으로서 노동자계급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런 경향이 재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공세뿐 아니라 스탈린 관료체제의 지배라는 끔찍한 경험이 있다. 이를 고려할 때, 그 관료체제가 등장한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고 일국 사회주의이론의 역사적 실패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잘 알려진 문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에게 공산주의란 조성돼야 할 어떤 상태, 현실이 자신을 꿰맞춰야 할 어떤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페데리치는 이 문구를 언급하면서, 공유재가 바로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과 연계돼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정말로 현 상태를 넘어서려면 운동은 해방된 사회라는 목표와 분리되면 안 된다. 공유재의 정치는 눈앞의 과제만을 붙들고 이 목표를 거부함으로써, 현존하는 사회의 변방에서 자잘한 개혁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팬데믹, 경제위기, 환경위기, 거기에 더해 전쟁과 군국주의까지,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이 계속해서 가차 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착취당하는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수탈자를 수탈해야 하며, 현존하는 생산력 전체를 장악해야 한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갖는사회를 향한 열망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다.

 

1) Silvia Federici, Revolution at Point Zero(Oakland, CA: PM Press, 2012).

2)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3) Josefina L. Martínez, “Patriarcado, acumulación de capital y desposesión,” Contrapunto, May 7, 2022.

4) 미국의 역사가이자 E. P. 톰슨의 제자인 피터 라인보우는 페데리치, 조지 카펜치스와 함께 미드나잇 노트 콜렉티브(Midnight Notes Collective)의 구성원이다. 이 모임은 역사적 공유재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5)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Oakland: PM Press, 2018).

6) 페데리치에 따르면,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그룬트리세(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과도하게 매혹돼 있다.

7) 최초로 탈성장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내놓은 사람으로는 프랑스의 세르주 라투슈가 있다.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타이보가 탈성장을 옹호하는 주요 인물이다.

8) 안드레아 다트리도 이 점을 다뤘다. Andrea D’Atri, “El capital nos empuja a la lucha por la subsistencia, pero no puede ser el horizonte estratégico de nuestro feminismo,” La Izquierda Diario, November 13, 2021.

9) Friedrich Engels, The Peasant War in Germany, 1850.

 

 

글쓴이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2022717

옮긴이  오연홍

꺾쇠괄호[  ] 안의 문구는 옮긴이가 추가한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feminism-and-communism-a-debate-with-silvia-federici/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착취가난전쟁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국적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볼리비아브라질칠레코스타리카스페인미국프랑스이탈리아멕시코페루우루과이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자본가에 맞서는 여성 노동자들(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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