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주었듯이 노동 계급의 권력 장악이란 부르주아지가 운용하던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구를 단순히 넘겨받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준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 계급은 후퇴하고 사회 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탓에,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조차 레닌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상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일당 체제, 그리고 어디에나 스며 있는 관료제의 지배는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에 맞서 옹호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아래 글은 아르헨티나 사회주의 사상 연구소(IPS)에서 곧 출간될 V. I. 레닌의 『국가와 혁명』(The State and Revolution) 스페인어판 신간에 실린 크리스티안 카스티요의 서문이다.

『국가와 혁명』은 레닌이 1917년 8~9월에 쓴 글이다. 이때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여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수립하기에 이른 혁명적 위기의 직전이었다. 역사적인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이 글은 미완으로 남았다. 레닌은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부터 8월까지 벌어진 일에 대해서 끝내 쓰지 못했다.
은신 중이던 레닌은 이 결정적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의 국가 개념을 명료하게 세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에 핵심 쟁점이었고, 카를 카우츠키 같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주요 이론가들은 이 문제를 온갖 혼란과 왜곡으로 오염시켜 놓았다. 이 지도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회 계급과 함께 국가도 “소멸”(extinguished)할 것이며 그것이 어떤 자의적 결정에 따라 “폐지”(abolished)될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언급하지 않은 한 가지는, “소멸”하는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가 아니라 혁명 이후 등장하는 국가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계급 권력의 도래가 곧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 더 정확하게는 그것의 근본 기둥인 관료제와 군사력의 파괴를 함의한다고 보았다는 점도 그들은 숨겼다. 따라서 『국가와 혁명』은 당대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의 지배적 견해(당시 러시아 멘셰비키의 견해와 견줄 만한)를 교정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을 면밀히 재구성해서 담고 있다.
1871년 파리 코뮌이 보여주었듯이 노동 계급의 권력 장악이란 부르주아지가 운용하던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구를 단순히 넘겨받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국가와 혁명』은 보여 준다. 그것은 국가 기구를 완전히 파괴한 다음 성격이 전혀 다른 새로운 기구로 대체하도록 요구한다. 말하자면 소수의 자본 소유자들이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지배할 수 있도록 구조가 설계된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 계급이 그저 “점유”하는(occupying)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 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의 지배에 적합한 다른 종류의 국가로 대체해야 한다.
파리 코뮌은 상비군과 경찰을 무장한 대중으로 대체했다. 코뮌 구성원들은 그 어떤 정치 공직자도 숙련 노동자보다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없으며 공직자는 선거권자들에 의해 언제든 소환될 수 있음을 확고히 했다. 국가 행정부의 집행 기능을 선출된 대표들이 직접 수행함으로써,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 외부에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부르주아 의회들의 “순전한 사기극”과 달리 코뮌은 “일하는 단체”가 되고자 했다. 계급 사회를 종식시키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 국가는 정치·경제 업무를 관리하는 일에 점차 사회 전체를 참여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폐지”하게 될 것이었다.
레닌의 이 책이 어째서 지금도 유효한가?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 계급은 후퇴하고 사회 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탓에, 좌파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조차 레닌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상 낯선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관료적 전체주의의 중요한 차이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후자는 레닌이 열망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에 관료적 전체주의라는 어둠이 내려앉은 데는 몇 가지 핵심 요인이 작용했다. 10월 혁명은 고립되었고, 내전 중에 혁명 간부들과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사망했으며, 러시아 사회가 전반적으로 “후진성”을 벗지 못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현실은 혁명 이후 탄생한 새로운 국가가 관료화하도록 추동했다. 일당 체제, 그리고 어디에나 스며 있는 관료제의 지배는 이후 발생한 20세기의 혁명들에 “본보기”가 되었으나, 이는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에 맞서 옹호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오늘날 정치 지형은 자본주의적 지배가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변호하는 두 부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보통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첫 번째 부문은 부르주아 국가의 기능을 치안과 통제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기업들이 더 전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모든 사회적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 동시에 그들은 2008년 위기에서 보았듯이 거대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를 대규모 부채로 몰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이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부문은 국가가 계급 화해 기관이라는 국가 숭배(fetishism)를 고수하면서 그것이 지배 장치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승리한 사회 혁명 없이 수십 년이 흘러온 지금,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진보적 변화든 국가라는 틀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이 갈망하는 변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만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겨지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그 자체”로 신비화되었다. 그러나 진실은 이러하다.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중 운동(movilizations), 항거(Revolts), 혁명 운동들이 전면적 혁명 과정으로 전환되면 봉기한 노동자 대중의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기구들이 틀림없이 발전해 나올 것이다.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이 지배 계급의 탄압에 맞서 자기방어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권력의 여러 표현 형태를 보여 주었다. 러시아의 경우, 소비에트는 투쟁하는 노동자·농민 공동전선의 가장 위대한 표현으로 출발했고, 혁명 승리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 권력의 토대로 변모했다. 이는 파리 코뮌의 교훈과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제시한 전망에 근거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모든 혁명다운 혁명은 이 같은 기구들의 출현을 수반할 것이며,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적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레닌과 이후에 트로츠키가 분명히 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쟁점은, 가장 개방적인 자본주의 민주주의보다도 “천 배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현할 새 국가의 물질적·경제적 토대였다.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은, 실로 “모두”가 국가 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전제 조건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 가운데 몇몇은 다음과 같다: 가장 선진적인 여러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미 달성된 보편적 문해력, 그리고 우편·철도·대공장·대상업·은행업 등의 거대하고 복합적이며 사회화된 장치에 의한 수백만 노동자들의 “훈련과 규율”, 등등.
이러한 경제적 전제 위에서 “자본가들과 관료들을 타도한 다음, 즉각, 하룻밤 사이에, 생산과 분배의 통제, 노동과 생산물의 계산 업무에서 그들을 무장한 노동자들, 무장한 인민 전체로 대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 뒤, 레닌은 이렇게 덧붙인다.
계산과 통제—그것이야말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의 “원활한 작동”, 올바른 기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평등하게 일하고, 자기 몫의 일을 하며,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계산과 통제는 자본주의에 의해 극도로 단순화되어, 지극히 단순한 작업으로, 즉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감독, 기록, 사칙 연산, 적절한 영수증 발급으로 축소되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자. 과학 기술 일반, 특히 의사소통 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한 21세기의 우리는 레닌이 언급한 것보다 훨씬 우월한 전제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텔레비전, 라디오, 컴퓨터, 휴대전화, 소셜 네트워크는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정보를 쉽게 전달하고 어떤 경제적·정치적 결정을 내릴지 토론하도록 돕는 수단들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경제 자원을 민주적으로 계획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며, 불평등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고 노동일을 단축하여 과학적·문화적 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은 비합리성을 이 같은 민주주의 안에서 오래지 않아 억제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사회에서는 다세대 주택과 빈민가에 빽빽하게 몰려 사는 수백만 명을 위한 주택 대신에 아무도 살지 않을 집을 짓자는 계획 따위는 제안할 수 없을 것이다. 수억 명이 굶주리는데 한 줌의 인간이 수십 년 쓰고도 남을 부를 축적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라면, 어떤 사람들은 하루 10시간, 12시간 일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거리를 얻지 못하고 생존하기 위해 복지제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깨달을 것이며, 그 대신 더 분명한 계획으로 모든 가용한 일을 모든 가용한 노동자에게 나눌 것이다. 누구도 실업 상태로 남지 않고, 누구도 과로하지 않을 것이다. 소수의 배를 불리기 위해 지구의 미래의 삶을 저당 잡아 환경을 파괴한다는 발상은 한심하게 들릴 것이다. 물론 이 사회는 아직 공산주의는 아니며, 우리는 “각자 자신의 능력에 따라”에서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라는 분배 원칙으로, 다시 말해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옮겨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낳은 모든 치욕과 추악한 것들을 사회에서 철저히 씻어내고 더 전진하기 위한 필수 단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 구성원 전체, 또는 적어도 압도적 다수가 스스로 국가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고, 이 일을 자기 수중에 쥐고, 보잘것없는 소수 자본가와 자본주의적 악습을 보존하려는 지주 신사층과 자본주의에 의해 철저히 부패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조직하는 그 순간부터, 어떤 형태의 정부든 그 필요성은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민주주의가 더 완전할수록, 그것이 불필요해지는 순간은 더 가까워진다.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지고 “더 이상 엄밀한 의미의 국가가 아닌” 그 “국가”가 더 민주적일수록, 모든 형태의 국가는 더 빠르게 시들어간다.
2008년 이후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새로운 세대는 이 체제가 자신들에게 점점 더 어두운 미래만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착취하고 억압하는 이 체제에 맞서서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적·혁명적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투쟁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9년 10월 10일, 일간좌파에 스페인어로 처음 게재됨.
2019년 11월 4일, Left Voice에 게재된 영문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Christian Castil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