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심판으로 끝난 22대 국회의원 선거
4월 10일 실시된 22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부 여당의 참패로 끝났다. 민주당·민주연합 175석, 국민의힘·국민의미래 108석, 조국혁신당 18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이 최종 성적표다. 이론의 여지 없이, 윤석열 정부를 심판하겠다는 정서가 이번 선거를 압도했다. 윤석열 정부는 선거 승리를 위해 몇 달간 김건희 씨를 잠적시키고, 전국 순회 민생토론회를 스물네 차례 개최하며 총력을 다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정부 여당 참패의 핵심 원인은 물론 윤석열이다. 윤석열은 반동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자신의 인생 책으로 꼽는다. (아마 인문사회도서 중에서 윤석열이 유일하게 읽은 책일 것이다.) 최저임금제를 반대했던 프리드먼을 좇아 윤석열은 대선에서 최저임금 미만을 받고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옹호했다. 집권 후에는 철 지난 신자유주의 부자 감세 정책을 펼치면서 재정 건전성 타령을 그치지 않았다. 카르텔 타도 운운한 윤석열의 한마디에 R&D 예산이 33년 만에 삭감된 게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랬던 윤석열이 민생토론회에서는 무차별적 재정 투입을 공언하고 다녔으니, 이것만큼 구역질 나는 일이 또 있겠는가? 민생토론회에서 제시된 240개 정책을 모두 집행하려면 900조 원이 넘게 든다고 한다. 선거에 악영향을 줄까 봐 법정 기한까지 어겨가며 뒤늦게 발표한 ‘2023회계연도 국가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재정 적자는 87조 원이다. 적자 규모가 예산상 계획이던 58조 원보다 29조 원이나 늘었는데, 물론 부자 감세로 인한 세수 감소가 주 원인이다. 윤석열은 일말의 부끄럼도 없이 현실성 없는 공수표를 남발하며 관권선거를 벌인 것이다.
선거기간 내내 진행된 민생토론회. 사진: 대통령실
이런 철면피한 뻔뻔함을 생각하면, 875원 대파 논란과 이종섭 도피 출국 건은 소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해 보일 지경이다.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두 사안이 아니더라도 노동자 민중의 생활조건을 개선할 수 없는 윤석열 정부의 몰락은 예정된 일이었다. 물가 폭등, 2년 연속 실질임금 하락, ‘건폭’ 몰이로 대표되는 노동조합 탄압, 선거용으로 기획됐던 의대 증원 카드의 실패, 황상무의 언론인 회칼 테러 발언, 연이은 입틀막 사건 등 윤석열 정부를 심판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만약 윤석열 정부에 맞설 정치적 대안이 뚜렷했다면 윤석열 정부는 훨씬 더 참혹하게 몰락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중이 현 정부에 맞서 선택할 수 있었던 대안은 고작 민주당이었다. 불과 2년 전, 부동산 폭등과 내로남불 입시 비리 등으로 윤석열에게 권력을 내줘야 했던 바로 그 민주당 말이다.
진보정당 운동의 한 시대가 끝났다
2년 전 민주당을 심판했던 대선에서도, 윤석열 정부를 심판했던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진보정당은 대중에게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의당은 이번 선거에서 원외정당으로 전락했다. 정의당은 4년 전 비례정당 투표에서 9.67%를 득표해 5석을 획득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2.14% 득표로 한 석도 얻지 못했다. 박근혜 탄핵 촛불 직후 2017년 대선에서 6.17%를 득표했던 4선 의원 심상정은 이번엔 자신의 지역구에서 3위(18.41%)에 그치며 정계 은퇴를 선언해야 했다.
정의당의 몰락은 문재인 정부 시절 내내 민주당 2중대로서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정의당은 민주노조 운동이 침체하자 조직 노동자들과의 조직적 연대를 강화하기보다는 더 많은 득표를 위해 무정형의 대중에 영합하려는 전략을 취했다. 조국의 입시 비리 논란이 대두했을 때 이도 저도 아닌 갈지자 행보를 보인 이유다. 정치적 계급으로 조직되지 않은 대중이 민주당이 아니라 정의당에 표를 줄 리 만무하다. 정의당의 몰락이 예견됐을 때 제일 먼저 당을 탈출한 것은 이 시기 영입됐던, 단지 대중에게 상품성이 있었던 정치인들이다.
사진: 연합뉴스
진보당의 굴종은 더 처참하다. 진보당은 조직 노동자 운동에 상당한 기반을 갖췄다는 점에서 정의당에 비견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진보당은 민주당의 위성정당에 참여하며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깃발을 스스로 짓밟아 버렸다. 진보당은 민주당과 연합하며 '윤석열 정권 심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노동탄압으로 일관해 온 민주당 역시 노동자들이 심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선거를 통해 대중의 정치의식이 단계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여기는 건 큰 착각이다. 이번 선거엔 윤석열을 심판했으니, 다음 선거엔 좀 더 왼쪽으로 이동해 진보정당에 표를 주겠다고 생각할까? 아니다. 민주당을 심판한다며 다시 국힘에 표를 던질 것이다. 이미 노무현 정부 이후 이명박 정부의 등장, 문재인 정부 이후 윤석열 정부의 등장에서 반복되었던 역사적 경험이다.
사진: 울산시의회
한국전쟁 이후 노동자운동이 절멸됐던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이 다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다. 일체의 자주적 노동자투쟁이 봉쇄됐던 1987년에는 민주노조 건설과 최소한의 노동조건 개선 투쟁도 곧바로 국가권력과의 일전(一戰)을 불사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깃발을 움켜쥐었던 이유다. 1996~97 총파업은 민주노조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노동자계급이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던 투쟁이다. 그 성과물의 하나가 진보정당의 건설이었다. 2004년 단번에 10명의 의원을 국회에 입성시켰던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타당성은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후대의 역사가는 진보정당 운동의 한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할 시점으로 이번 선거를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의당이 몰락하고 진보당이 민주당에 굴종한 원인으로, 과거 민주노동당 분당, 통합진보당 사태 등의 정치적 사건을 지목한다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진보정당 운동 몰락의 근본 원인은 노동자 계급투쟁의 퇴조에 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1996~97 총파업까지, 국가권력에 맞선 전투성과 사업장 울타리를 뛰어넘는 연대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악법을 어겨서 깨뜨리던’ 민주노조 운동의 활력이 사라진 지 오래다. 관료주의의 강화, 사업장 내 임단투에 갇히는 ‘합법’ 파업 등이 한국 노동자운동의 현주소다. 노동자계급이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이 되자, 진보정당 운동 역시 덩달아 방향성을 상실한 것이다.
미국식 자본가 양당체제의 확립,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성
한국은 이제 미국식 자본가 양당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뒤늦게 시작된 한국 노동자투쟁의 첫 번째 시기는 결국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채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노동자계급이 독자적 노동자정당의 건설에 실패하고 민주-공화 양당체제에 손발이 묶였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계급도 자본가 양당체제에 결박된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유지하는 데서 민주당, 국힘 양당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최저임금을 아예 업종별로 차등 적용하자고 지껄이는 국힘이나, 이를 반대한다면서도 국회 다수 의석으로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개악하고 제도의 거대한 사각지대를 남겨두는 민주당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단지 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유연성이라는 외양을, 국힘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비타협성이라는 외양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노동자 민중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기 힘든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대중이 현 정부에 격렬한 반감을 터뜨리는 일은 늘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 양당이 권력을 교대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노동자 민중의 반정부 투쟁을 항상 체제 내로 묶어두는 안전장치가 된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 양당의 비본질적 차이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자본가 정치세력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불변의 원칙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 추구가 더 보수적인 세력의 당선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반박했다. “반동에게 승리의 가능성을 줄지 모른다고 하는 민주주의자들의 허튼소리에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모든 공문구들은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들이다. 독자적인 진출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당이 이루게 되는 진전은 몇 명의 반동 분자들이 대의 기관에 들어감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불이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의 1850년 3월의 호소>). 월 100만 원에 가사 노동자를 도입하자는 조정훈이나, 페미니즘을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라 떠들었던 이준석이 아무리 꼴 보기 싫다 해도, 그 대안이 민주당에 투표하는 것일 수는 없다.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익은 모든 종류의 자본가 정치세력과 명확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한편 겉으로는 확고해 보이는 한국의 자본가 양당체제가 내적으로는 상당한 불안정성을 보인다는 점도 아울러 주목해야 한다. 2022년 윤석열이 당선됐던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최초로 5년 만에 상대 당에 정권을 내준 선거였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 역시 1987년 이후 집권 여당이 가장 무력하게 참패한 선거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22석으로 제2당이 되었지만, 제1당인 민주당의 123석과 차이가 크지 않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이 속출하고(최근의 농산물 가격 급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저출생으로 사회 소멸이 예견되는 시대,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에게 사회적 지원 대신 멸시와 혐오가 쏟아지는 쇠퇴기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정치세력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청년층의 정치의식이 급선회하는 현상은 이를 잘 드러낸다.
청년들을 어느 깃발 아래 서게 할 것인가?
20세기 후반까지 한국의 선거판에서 가장 주요한 변수가 지역주의였다면, 21세기에는 지역주의가 한결 옅어졌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민주당과 국힘이 박빙의 접전을 펼쳤던 부울경 선거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현재 지역주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세대별 정치의식이다. 경제성장의 과실을 체험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6~70대 이상 고령층은 확고하게 국힘을 지지한다. 다른 한편 80년대 민주화투쟁 등 집단적 정치 경험을 공유하는 4~50대 중년층은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다. 이들이 양당의 고정 지지층 35%를 각기 차지한다.
반면 경제성장도, 민주화 투쟁의 경험도 없는 2~30대 청년층은 현 집권 세력을 심판하기 위해 상대 당에 투표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물론 2010년대 페미니즘 리부트를 거치며 집단적 정치의식을 형성한 여성들은 계속해서 민주당에 견고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래도 지난 대선에서 20대 여성의 33.8%, 30대 여성의 43.8%는 윤석열에 투표했다.) 반면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당선의 일등 공신이었던 2~30대 남성들(지난 대선에선 20대 남성의 58.7%, 30대 남성 52.8%가 윤석열에 투표했다)이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선회는 자못 두드러진다.
2022년 대선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이번 선거 출구조사에 따르면, 비례대표 선거에서 20대 남성의 투표 결과는 민주당 26.6%, 조국혁신당 17.9%, 국힘 31.5%이다. 20대 여성은 민주당 51%, 조국혁신당 18.5%, 국힘 16.7%다. 30대 남성은 민주당 28.8%, 조국혁신당 23.6%, 국힘 29.3%이며, 30대 여성은 민주당 38.2%, 조국혁신당 23.2%, 국힘 20.3%였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에 표를 던졌던 상당수가 반대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특히 2~30대 청년층이 최우선시하는 ‘공정 경쟁’의 원칙(이것은 비인간적 경쟁으로 고통받는 청년층이 가장 일그러진 형태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을 훼손한 조국에게도 18~23%의 지지를 보낸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청년층이 경험하는 고통의 객관적 크기를 실감하게 한다.
2024년 총선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청년층이 선거마다 보여주는 급선회는 앞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정치적 불안정성을 상수로 하게 될 것이란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왜 이들 청년층이 고작 자본가 양당 사이에서 정치적 대안을 찾아야 하는가? 청년층은 자본의 이윤 질서를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양당에서는 절대 진정한 대안을 찾을 수 없다. 이들에게 경쟁, 혐오, 차별이 아니라 협력, 연대, 단결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안을 알려야 한다.
청년층에서 정치적 불안정성이 확대되는 것은 이들 사이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부상할 수 있는 공간이 창출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트로츠키는 “모든 혁명정당은 상승하는 계급의 젊은 세대로부터 가장 주요한 지지를 획득한다. 부패한 정치세력은 청년을 자신의 깃발 아래로 결집시킬 능력을 상실한다. 정치의 전선에서 차례로 후퇴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들은 청년층을 혁명이나 파시즘에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썼다(<배반당한 혁명>).
실제로 청년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혁명의 서막을 뜻했다. 1917년 10월 혁명 직전 개최된 볼셰비키 6차 당대회(1917년 8월 6~16일)에 참석한 대의원 171명 중에서 18세~29세까지의 대의원은 46%, 39세까지의 대의원은 92%에 이른다. 이들 청년층이 당에 가입한 기간은 평균 8년 3개월이었으며, 절반에 가까운 79명(46%)이 2월 혁명 당시 투옥, 유배, 망명, 수배 상태에 있었을 정도로 단련된 투사들이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계급의식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양당이 가진 35%의 고정 지지층, 상대 당에 대한 혐오 정서는 한동안 한국 정치판을 좌우하는 기본 변수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특히 청년 노동자들이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역으로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어떠한 자본가 정치세력도 노동자 민중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산·소득의 불평등 심화, 혐오와 차별의 확대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진정한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4~50대 중년층이 확고한 민주당 지지세를 보이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자. 윤석열과 곧 손절할 것으로 보이는 <조선일보>는 4~50대 중년층을 ‘진보 중년’이라 부르며 탄식을 늘어놓는다(<조선일보>, “누릴 거 다 누리고 깨어있는 척… ‘진보 중년’을 아십니까(2024. 3. 24.)”). “통상 40대는 자산을 모으고 자녀를 키우며 안정을 희구하는 경향과 함께 보수화되는 연령 효과(age effect)가 나타나는 시기”인데도, “이 땅의 4050은 연령 효과를 거스르는 첫 변종 세대”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조선일보>가 한탄할 만도 하다. 바로 윗세대는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를 재건하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는 4~50대는 뚜렷한 반국힘 정서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중의 정치의식이 어떻게 생명력을 획득하고 견고해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4~50대는 1980년대 민주화 투쟁, 1990년대 초반 민주노조 투쟁과 1996~97 총파업, 2002년 미군 장갑차 촛불과 노무현 당선, 2008년 광우병 촛불, 2016~17년 박근혜 탄핵 촛불 등을 경험해 온 세대다. 바로 집단적 정치투쟁의 경험이 이들의 확고한 정치의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향한 정치적 계급의식 역시 이러한 대중투쟁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노동자들은 자본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이 모든 종류의 자본가 정치세력과 구별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각인한다.
그러나 자본에 맞선 투쟁이 법과 사업장의 테두리 내에서 관료적으로 통제되는 형식적 파업 정도에 그친다면 이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 내로 순치(馴致)된 투쟁을 통해서는 민주당에 의존하는 악습만 더 강화될 뿐이다. 자본가들의 이윤 획득에 전면적 타격을 가하는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줄 때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계급의식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노동자 운동은 지금도 최저임금 인상을 내걸고서는 ‘합법’ 파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후진적 법 제도에 고통받고 있다. 사업장 범위를 넘어 정치적 요구를 내세운 파업이나 연대 파업이 불법인 것도 여전하다. 자본주의 체제의 전면적 위기가 아니고서는 노동자계급의 상층 부문이 실제 투쟁에 나서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투사들이 확고한 목표의식 아래 더욱 분발해야 함을 뜻할 뿐이다. 노동조합 내부에서 관료적 통제에 반대하고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을 철저하게 관철하는 것, 협소한 조합주의적 이익이 아니라 전체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투쟁을 헌신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 이주민에 대한 차별에 단호히 반대하며 노동자계급의 총단결을 호소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사업장 울타리를 넘어 가장 열악한 밑바닥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실천적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활력은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킬 것이며, 선거를 노동자 정치를 널리 알리는 정치적 공간으로 자리잡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