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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운사 연재 2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일제강점기에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과 조직화를 토대로 해방공간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최대 50만의 조합원을 포괄하며 등장했지만, 미군정의 거센 탄압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절멸됐다. 이후 20여 년의 공백을 건너뛰어 1970년 전태일 열사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이 다시 시작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섬유·전자 등 경공업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1979년 YH노조 투쟁이 보여준 결기는 강고해 보이던 유신체제가 내부로부터 허물어지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목차]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1) 아름다운 청년노동자, 전태일 전태일은 1948년 9월 대구에서 가난한 봉제노동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도 3년밖에 다니지 못했고, 항상 굶주림을 떨치지 못했다. 1964년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이, 신문팔이, 우산장사, 리어카 뒤밀이 등을 하며 떠돌이 노동자로 살다가 1965년 가을 평화시장의 한 작업장에서 시다(보조원)가 됐다. 그런데 전태일이 마주친 평화시장은 한마디로 노동지옥이었다. 대부분이 여성인 2만여 노동자들이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 차고,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15시간 동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일했다. 사장들은 수시로 철야작업까지 강요하며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부려먹었다. 여름에는 찜통 같은 더위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영양실조, 만성 소화불량, 신경성 위장병, 만성 피로, 진폐, 기관지염, 폐결핵, 눈병, 신경통 등에 걸리지 않은 노동자가 없었다. 어느 날 전태일과 같이 일하던 여성 미싱사가 새빨간 핏덩이를 왈칵 토해내며 쓰러졌다. 급하게 돈을 걷어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성노동자는 곧바로 해고당했다. 전태일은 이 끔찍한 노동지옥을 바꿔보기 위해 몇 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다.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비를 털어서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두세 시간 걸어가기를 예사로 했다. 재단사가 된 뒤에는 여공들을 일찍 퇴근시키고 혼자 남아서 시다들의 일까지 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아버지와 얘기하던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그 내용을 알게 됐다. 어머니를 졸라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샀는데, 한자로 쓰인 법률 용어들이 수두룩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생 친구라도 있었으면”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전태일은 포기하지 않고 밤낮을 안 가리며 노력한 끝에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터득했다. 암흑의 동굴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발견한 듯 희망과 환희를 느꼈다. 이렇게 좋은 규정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사장이 시키는 대로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정말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전태일은 젊은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를 만들었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일대 3만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근로기준법대로 준수되도록 하기 위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설문지가 곳곳에서 업주들에게 발각되고 회원들이 탄압을 받았다. 전태일은 회수된 설문지를 모아 결과를 분석하고 이를 근거로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해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성의 없이 ‘서류를 두고 가라’는 말만 내뱉는 근로감독관 앞에서 전태일은 깊은 실의와 낙담에 빠졌다. 바보회는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전태일 자신도 해고당했다. 그동안 바보회를 꾸려 나가느라 상당한 빚도 졌다. 지친 전태일은 평화시장을 떠나 막노동판에서 일하면서 고뇌와 좌절과 자학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 혹독한 시련의 시기는 전태일의 ‘사상’이 벼려지는 시기가 됐다. 전태일은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하다가, 돈 많은 독지가의 투자를 받아서 평화시장 안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하나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사람대접해 주고도 얼마든지 사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꿈을 품고 평화시장으로 돌아갔다. 전태일은 바보회를 삼동회로 바꾸고 이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행동하는 조직’으로 강화했다. 삼동회는 지난해의 경험을 살려 설문지의 배포와 회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를 근거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장에게 제출했다. 다음날 <경향신문>에 평화시장 노동자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삼동회 회원들은 기쁨에 겨워 신문사로 달려가 신문 300부를 사서 팔았는데, 삽시간에 다 팔렸다. 허리조차 마음대로 펼 수 없는 2층 다락방, 뿌연 먼지 날리는 작업장, 커피 한 잔 값의 임금을 받고 10대의 어린 여공들이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 철야 노동을 하고 있었다.[1] 다음날 전태일 등 세 사람이 삼동회를 대표하여 요구조건을 적은 건의서를 갖고 평화시장 주식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사기가 충천한 삼동회와 달리, 사장들과 노동청은 안절부절못했지만, 적당히 회유하면서 삼동회를 깨려고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할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진정과 호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삼동회는 시위를 계획했다. 애초에 10월 24일로 계획했던 시위는 11월 7일까지 해결해 주겠다는 정보과 형사의 회유로 무산됐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삼동회는 11월 13일에 다시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전태일은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고 힘주어 말했다. 목숨을 건 결연한 투쟁만이 유일한 활로라고 생각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40분경,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는 시위를 위해 모인 노동자 500여 명이 경찰과 경비원들의 방해에 가로막혀 시위를 벌이지 못한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스물두 살의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이 담긴 법전을 가슴에 안고 기름을 뒤집어 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채 달려 나갔다. 화염에 휩싸인 전태일은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전태일의 분신은 강렬한 충격이 되어 노동자들의 굴종과 지식인들의 침묵을 흔들어 일깨웠다. 전태일의 동료들은 11월 27일 최초의 민주노조인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를 건설했다. 이어 대학생들의 농성과 시위, 종교인들의 각성과 지지, 노동자들의 죽음을 불사하는 격렬한 투쟁이 잇따라 일어났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은 민주노조운동의 원년이 됐다. 전태일에서 시작된 결연한 투쟁은 전투적 기풍을 형성하며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이 됐다. 민주노조운동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88년 이후 매년 11월 13일 전후에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있다. 전태일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언짢아지는 심성을 가졌고 모두가 용해되어 있는 상태의 참된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눈에 비친 사회 현실은 노동자들이 단지 생존을 위해 노동하고, … 어린 소녀들이 … 더러운 부자의 거름이 되는 비참한 것이었다. 전태일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이 참혹한 세상에 대하여 분노했고, 이 분노 때문에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버리고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라며, 전태일이 승리의 환희보다도 오늘의 헌신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일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전태일은 ‘나의 일부인 너’가 자신의 뒤를 따를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전태일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참다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무한한 헌신, 남은 사람들이 자신이 못다 한 일을 이루리라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물려주었다.[2] 2)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는 노동자운동의 부활을 알리는 위대한 외침이었다. 11월 27일 전태일 열사의 피를 머금고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조(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 탄생했다.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대 암흑의 시대에 세상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았다. 경찰의 감시, 연행, 구속, 고문 등 온갖 탄압이 빗발쳤지만, 청계피복노조는 목숨을 건 투쟁들로 스스로를 지켜내면서 노동자운동을 선봉에서 이끄는 ‘불굴의 결사대’ 역할을 했다. 전태일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 던진 충격과 함께 1971년 들어 급속한 경제침체로 기업의 도산과 임금체불이 급증했다. 1971년 내내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생존권 투쟁, 중간계급의 민주화 투쟁이 터져 나왔다. 4월 연세대와 고려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교련반대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4월과 5월 동아일보를 비롯한 14개 언론기관에서 언론자유수호 선언운동이 벌어졌다. 6월부터 9월 국립의료원을 시작으로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전국 국립대병원에서 수련의들이 처우개선과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7월 전국 판사의 36%에 해당하는 지방법원 판사 153명이 시국사건 무죄판결 판사 구속영장 청구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주장하며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8월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대단지 판자촌으로 쫓겨난 도시빈민 수만 명이 부동산 투기와 살인적인 불하가격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8월과 9월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국공립대학들과 사립대학들에서 교수들이 학생들의 교련반대투쟁을 지지하며 대학 자치를 위한 대학 자주화 선언에 나섰다. 9월 한진상사 베트남 파견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대한항공 빌딩에 불을 지르면서 시위를 벌였다. 10월 전국의 대학생 5만 명이 고려대에 난입해 학생을 연행·구타한 군인들의 처벌을 요구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들에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10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했다.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특히 그 법에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또는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고 그 조정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노동자들로부터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박정희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엄혹한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과 민주노조 건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72년 4월부터 8월까지 원풍모방 노동자 600여 명이 명동성당 농성 등의 조직적 투쟁을 통해 어용노조 민주화를 쟁취했다. 1972년 5월 동일방직노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어용 남성 지부장을 물리치고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이 당선되면서, 선거를 통해 노조민주화를 이뤄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1966년부터 진행한 소그룹 활동의 결실이었다. 1973년 9월 서울 영등포 삼립식품 노동자 1천여 명이 8시간 노동, 임금인상, 주1일 휴무 등을 요구하며 어용노조 집행부의 통제를 벗어나 사흘간 비공인파업을 벌였다. 1973년 10월과 12월 인천 부평4공단 삼원섬유 노동자 120명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뒤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3년 12월 컴퓨터 기억장치를 생산하는 미국계 기업 콘트롤데이타 노동자 600명이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4년 2월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 파업을 벌인 뒤 4월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 2백여 명이 ‘언론자유 실천’을 선언하고 ‘외부간섭 배격,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연행 거부’를 결의하자 35개 언론사 기자들이 선언에 동참했다. 언론자유 실천운동으로 기자 146명이 해고됐다. 1975년 5~6월 YH무역 노동자 2천 명이 민주노조를 건설한 뒤 지부장·부지부장 해고 등 사측 탄압을 이겨내고 노조를 안착시켰다. 이렇게 속속 등장한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대체로 섬유·전자·가발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속해 있었고, 대부분의 조합원이 여성이었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남성 관리자들에 의한 성희롱과 성폭력까지 겪어야 했기 때문에 그만큼 분노가 응어리져 있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들은 형성과정과 일상활동, 투쟁과정에서 도시산업선교회·가톨릭노동청년회 등 기독교 단체들과 학생운동 출신 지식인 운동가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단체들의 지원은 특히 소그룹 활동과 노동자교육에서 큰 역할을 했다. 노동운동을 위하여 교회단체들이 지원한 가장 중요한 사업은 소그룹활동이었다. 교회의 지붕 아래에서 서로 접촉하게 된 6~8명의 노동자들이 샛별, 소나무, 청년클럽, 승리, 다이아몬드, 소띠모임 등의 이름을 가진 소규모 비공식집단들을 결성했다. 소모임 참가자들은 신부, 목사, 혹은 대학생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정기적으로 만나서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활동과 문화 활동에 참여하였고, 자신들의 공장생활과 현장의 문제들을 토론하였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더 예리한 사회의식을 얻었고,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각성해나갔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대개 이런 소모임 활동의 산물이었다.[3] “70년대 초중반기 처음 활동을 시작하는 모임들은 주로 취미활동 … 교양문제를 많이 취급하였으나 70년대 중반기 이후에는 그룹을 시작한 지 3~4개월이 지나면 이런 것들보다는 자기들 회사의 노동문제, 노동법, 정치, 경제 등의 토픽을 스스로 선택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처음에 산업선교는 노동자를 위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 곳으로 알고 무엇인가 자기들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것을 얻으러 왔다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처해 있는 열악한 상황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고 이에 분노하는 ‘노동자 의식’이 생기게 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자 스스로 힘을 만들어 해결해야 함을 깨닫고 같은 회사의 다른 동료노동자를 조직하여 산업선교에 오게 하는 일에 열심하게 되곤 하였다. 어떤 노동자의 경우, 저 사람이 돈을 벌려고 공장에 다니나 아니면 그룹 조직하러 공장에 다니나 할 정도로 조직활동에 열심을 다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그룹은 그룹 확장을 위해 아예 그룹원 전원(7~9명)이 흩어져서 각기 한 그룹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노동자들과 산업선교는 조심스럽게 그 회사에서 최우선적으로 개선해야 할 노동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의논하고 …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그 회사에 속해 있는 전체 그룹들이 함께 모여(예, 수련회)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하고 행동에 대한 최종 결정을 하였다.” (「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 전략」)[4] 1970년대 후반에는 대학교의 이념서클이 급성장하면서 사회과학 이론으로 의식화된 지식인 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이들이 야학에 참여하면서 시혜 차원의 검정고시야학이 사회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야학으로 바뀌어 갔다. 노동야학은 영어와 수학보다는 국어, 사회, 역사를 중심으로 교과목을 편성하고 사회과학의 기초를 가르친다. 사회의식이 깃든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사는 것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등을 주제로 토론하기도 한다. 일부 노동야학에서는 졸업 후에 후속 모임을 만들어 더 높은 의식화 교육을 실시한다. 이렇게 하여 노동야학은 의식화된 노동자들을 배출한다. 학생운동가들은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며 현장감을 익히고 노동자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한다. 노동야학은 노동자들의 초기 의식화를 담당하고 노조 교육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해 민주노조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5] 민주노조는 기독교 단체들 및 지식인 운동가들과 협력하면서 조합원을 상대로 다양한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교육 내용은 주로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의식과 단결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것들이었다. 강의 외에도 토론, 노래, 율동, 연극, 촛불의식 등 다양한 교육방식을 활용했다. 민주노조들은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 성공했다.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지만, 결연하게 단체행동을 조직해 요구조건을 쟁취해냄으로써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강화해 나갔다. 이를테면, 청계피복노조는 1975년 12월 주휴제 철저 이행과 저녁 8시 작업 종료 등을 요구하며 ‘시간 단축 투쟁’에 들어갔다. 50여 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등 노조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78년 추석을 앞두고 원풍모방노조는 사측의 신입사원 상여금 체불 방침을 전면파업으로 철회시켰다. 이 투쟁으로 노조에 대한 조합원들의 절대적 신뢰가 형성됐다. 노조는 막강한 조직력을 토대로 매년 임금인상 때마다 인상액의 일주일분을 적립하고 상여금이 나오면 특별조합비를 내서 파업기금을 조성했다. 1982년 신군부에게 강제해산 당할 무렵 파업기금이 1억 5천만 원 넘게 적립돼 있었다. 민주노조들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정권과 자본에다가 어용 상급단체까지 나서서 전방위적인 민주노조 파괴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조간부들과 조합원들이 권력기관에 연행·구속되거나 수배되었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하면서 숱한 고초를 겪었다. 한국노총과 산하 산별노조들도 극심한 견제와 탄압을 가했다.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도 권리의식과 주체의식에 스스로 눈을 떠 국가와 자본의 탄압에 맞서 강인한 투쟁을 벌였다. 활동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구사대나 회사에 고용된 깡패들에게 매를 맞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이고, 여성 노동자는 성폭행의 위협에 떨어야 하고, 심지어는 살의를 띤 폭력에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 사소한 일을 빌미로 해고하고 회사측만의 진술로 구속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합법적인 활동조차 폭력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는 헌신적인 의지를 필요로 한다. ‘악으로 깡으로’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지킨다는 자세로 싸운다.[6] 정권·자본·한국노총이 합작하여 획책한 노조파괴 공작에 정면으로 대항한 대표적인 사례는 1976~78년 동일방직노조(전국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 투쟁이었다. 1976년 7월 동일방직지부의 지부장 등 노조간부 10명을 경찰이 연행한 가운데 회사측 대의원들만 참석해서 어용 지부장을 선출했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지부장 석방, 노조활동 보장, 대의원대회 무효 등을 주장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농성 조합원 연행에 나서자 여성노동자들이 속옷까지 벗어던지며 저항했다. 결국 노동자들이 승리하여 3대째 민주파 여성지부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 1978년 2월 동일방직지부 총회가 예정된 날 조합원들의 선거 참여를 막기 위해 회사측 노동자 6명이 여성노동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바르고 심지어 여자 기숙사까지 쫓아가 똥이 든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씌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국섬유노조는 조직행동대를 보내 지부 사무실을 점거하여 총회를 방해한 뒤 동일방직지부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집행부를 해산시켰다. 회사는 124명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1980년 5월까지 줄기차게 현장복귀 투쟁을 전개했다. 전국섬유노조 본조는 해고자들의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 사업장에 배포하여 이들의 취업을 막았다. 1976년 11월에는 원풍모방 지부장이 ‘국가원수 모독죄’를 이유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조합원 1,500여 명이 지부장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인 끝에, 결국 7일 만에 석방되어 지부장으로 복귀했다. 1977년 7월 경찰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법정모독으로 구속하고 청계피복노조의 평화시장 노동교실을 폐쇄하려 시도했다. 노동자 2천여 명이 경찰을 쫓아내고 교실을 장악했다.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자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팔목의 동맥을 끊고 유리로 배를 가르는 등 극렬하게 저항한 끝에 노동교실을 지켜냈다. 민주노조 간부들은 기업과 지역을 넘어 서로 교류하면서 긴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한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의논하여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고자 함께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노조 간의 연대보다는 종교계 및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보호·지원과 사회 여론의 지지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더 강했다. ‘독재정권이 강요한 희생 때문에 노동자들이 궁핍해졌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면 여론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개별노조 차원을 넘어서는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시도했다. 1977년 7월 10일 협신피혁 노동자 민종진의 가스 질식사에 항의하는 연대시위, 1978년 3월 20일 기독교방송국 점거시위, 1978년 3월 26일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장 시위 등이 그 사례였다. 민주노조의 등장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통제를 벗어난 새로운 노조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한국노총은 박정희의 철권통치 아래서 정부 정책에 적극 협력하며 어용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종되던 한국노총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즉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노총은 1973년 “국가 이익 우선주의에 입각하여 계급투쟁적인 극렬한 운동 방향을 배제하고 임금인상 일변도의 활동노선을 지양하고 생산성 향상 운동을 통한 분배원천의 증대라는 노사 공동 이익의 영역을 찾아 서로 협력”하기로 운동 방침을 정했다. 한국노총 위원장은 1974년 1월 ‘한국노총 산별 위원장 및 시도협의회 연석회의 개회사’에서 “도시산업선교회 같은 불순분자의 조직침투행위에 대해서 전체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지난날 전평을 타도한 그 기개로써 단호히 분쇄할 것을 다짐”했다. 노사협조주의를 선언한 한국노총은 노동자의 단결된 투쟁을 포기하고 정부와 기업에 건의하거나 진정하는 방식으로 1970년대를 일관했다. 뿐만 아니라 유령노조 설립, 민주노조에 대한 사고지부 처리, 노조파괴 등으로써 자본가에게 적극 협력했다. 한국노총 간부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지부장 선거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등의 비민주적 행위를 자행하고, 이권이 큰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자리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노총의 재원을 확보하고 직위 상승에 필요한 자기 패거리를 늘리기 위해 신규노조 결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1970년대 초반 60만이었던 조합원 수가 후반에는 115만으로 급증했다. 1970년대 민주노조의 수는 10여개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서울, 인천 등 경인지역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조는 사용자와 대등하게 마주서서 자신들의 요구를 당당하게 주장함으로써 사용자의 말 한마디에도 오금 저리던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됐다. 민주노조들이 지향한 것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민주노조들은 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적 역량을 구축하여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운동의 자주성과 민주성의 원칙을 관철하고자 했다. 민주노조는 권력과 자본의 탄압 실태를 폭로했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사회 전반에 노동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켰고, 또한 기층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에 불을 지폈다. 민주노조들은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과도 연대했다.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화운동의 폭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반독재라는 자유화운동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이 그 자체의 존재를 통해서, 또한 다른 민중운동의 선구가 됨으로써, 민주화운동에 계급적 성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운동은 유신체제에 끊임없이 타격을 가했고, 마침내 붕괴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는 전태일의 헌신성과 치열함, 인간에 대한 믿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1970년대의 노조 활동가들은 인간을 신뢰하며 시대 상황의 어려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고, 참담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이런 전통은 전태일에서 시작했고 1990년대 초반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분명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유주의 보수야당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했다. 또한 고립분산적 활동을 넘어 확고한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1974년 현대조선 파업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경공업의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동안, 남성 위주의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대기업들이 형성되면서 젊은 남성노동자들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중화학공업 대기업 자본가들은 안정적인 인력 관리를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그만큼 높은 노동강도로 일을 했다. 중소사업장에서의 노동자통제가 대체로 가부장적이었다면 대기업에서의 통제는 군대처럼 강압적이었다. 당연히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지만 이직률이 매우 높아서 불만 세력이 축적되지 않았다. 또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절대 안 된다’는 대자본가들의 완고한 태도와 대기업 노동자의 조직화를 우려하는 국가기관의 통제정책 때문에 대기업에서의 민주노조 결성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그 불만이 투쟁으로 표출될 때에는 아주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1971년 9월 한진상사 베트남 파견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사건, 1974년 9월 울산 현대조선(훗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 1977년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파견노동자들의 현지 파업시위 등이 그 대표적 투쟁들이었다. 신진자동차(훗날 대우자동차-한국GM) 부평공장에서는 1967년, 1969년, 1971년 세 차례나 노조결성 시도가 실패했다. 1971년 4월에 노조가 결성되기는 했지만 열성조합원 208명이 무더기로 해고당하면서 흐지부지됐다. 1974년 9월 19일, 울산 현대조선에서 발생한 파업은 1970년대 최대 규모의 노동쟁의였다. 노동조합도 없고 합법적인 단체행동권도 없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격렬하게 투쟁에 나섰다. 1972년 3월 기공식을 가진 현대조선은 세계 처음으로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유조선을 건조하는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하지만 그 신화의 실체는 지옥 같은 작업환경이었다. 현대조선에서 1973년 한 해에만 34명의 노동자가 중대재해 사고로 사망했다. 1973년 7월 회사는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를 도입했다. 사원 대우를 해주겠다며 모집한 직영 기능공의 대다수를 사내하청으로 전환하는 조치였다. 1974년 10월까지 순차적으로 위임관리제 전환이 진행된 결과, 전체 기능직 가운데 직영공은 3,929명(26.6%), 사내하청은 10,852명(73.4%)이 됐다. 1974년 9월 선각부 직영공 2,400명을 위임관리제로 전환한다는 회사의 방침이 발표되었을 때, 19일 오전 8시부터 노동자들이 신분보장과 처우개선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시작했다. “도급제 폐지하라” “사원과 기능공의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시간당 임금을 100% 인상하라” “노동조합 결성을 보장하라” 등의 투쟁구호를 외치며 시작한 집단적 항의는 한 회사간부의 자극적인 발언에 의해 파업시위로 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중심에 섰던 조장급들이 집단행동에서 빠져나가고 일반 노동자들이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야간 작업조와 건조부 이외 노동자들이 합세하면서 파업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경찰과 노동청의 중재 아래 오전 10시부터 노사 간의 ‘협상’이 시작됐다. 형식을 갖춘 정식 협상이 아니라 회사를 대표하는 일부 간부가 메가폰을 들고 노동자들을 설득하려 하고, 노동자들은 그를 둘러싸고 중구난방으로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경찰과 노동청 관료들은 회사와 노동자 사이에서 절충을 시도하는 식의 난상토론이었다.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회사 측이 노조결성, 위임관리제 폐지 등 일부 사항에 대해 완강하게 수용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오후 5시 30분경 노동자들과 정주영 그룹회장이 만났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이 위임관리제 만큼은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이 요구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발표를 하며 노동자들을 자극했고 이것이 폭동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1,200여 명 경찰 저지선을 뚫고 정문 경비실에 걸려 있는 사기(社旗)를 불지른 후, 구내식당, 5층 본관건물 유리창 200여 장을 부수고 사무실 집기를 파괴하였다. ‘회사기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산시설인 철판절단기 1백여 대가 망가지고 경영진들의 승용차가 불타는가 하면 외국인 기술자 숙소에서는 TV, 라디오, 심지어 바르던 로숀까지 없어졌다.’ … 이날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경남도경찰국장의 지휘로 진압이 시작되어 노동자 총 877명이 연행되고, 이중 20명은 구속, 21명은 불구속 기소되고 나머지 인원은 훈방되었다.[7] 정부는 9월 21일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고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분석한 후 회사에게 노사협의회 조직을 명령했다. 노사협의회(최초 명칭은 새마을협의회)를 통해 위임관리제 철폐와 노동조합 결성을 제외한 나머지 요구사항을 회사가 받아들이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74년 10월 5일 결성된 현대조선 노사협의회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직전까지 유지되면서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의 폭발을 지연시키는 고충처리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 노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8] 1974년 현대조선 투쟁은 중화학공업 대기업 노동자들의 폭발력을 보여주었지만, 비조직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폭동의 한계를 드러냈다. ◎ 1979년 YH투쟁에서 유신붕괴까지 1979년 8월 YH노조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은, 박정희 유신철권통치가 그 잔인함과 모순을 만천하에 드러낸 끝에 마침내 스스로 붕괴하도록 몰고 간 결정적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설립자 장용호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가발업체로 1966년에 창설됐다. 1970년대 초에는 4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면서 수출 순위 15위를 기록하는 한국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도급제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인 대우에 시달렸다. 결국 1975년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과 호텔을 설립해 외화를 빼돌렸다. 뒤를 이은 경영진들도 회사 자금을 빼돌리고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1977년부터 재무구조가 극도로 악화된 회사는 1978년 말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회사는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축소하더니, 마침내 1979년 3월 30일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YH노조는 부채상환 연기를 통한 회사 정상화나 3자 인수를 통한 고용승계를 목표로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갔다. 네 달 동안 노동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대책을 호소하고 항의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8월 1일부터 기숙사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던 YH 노동자들은 8월 9일 새벽 삼삼오오 짝을 지어 회사 기숙사를 빠져 나와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겼다. 오전 9시 30분 YH노조 187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는 각오로 택한 마지막 방법이었다. 아울러 “동일방직이 처참하게 깨지는 것을 보면서, 이왕 깨질 거라면 확실하게 왕창 깨져서 다시는 당국이 민주노조에 손댈 엄두를 못 내게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10일 밤, YH 노동자들은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마치 유서를 쓰듯 ‘노조 종결대회’라는 이름의 총회를 열었다. 경찰이 진입하기 몇 시간 전이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올린 뒤, “이제부터 어머님의 약값은 누가 댈 것이며, 동생의 학비는 누가 보탤 것입니까?”라며 오열했다.[9] 11일 새벽 2시, 기동경찰과 폭력배 2천여 명이 신민당사에 투입됐다. 4층 강당 농성장에서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며 끌어냈다. 격앙된 몇몇 노동자들이 깨진 유리조각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10여 분 만에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 나갔다. YH 노동자 김경숙이 당사 뒷마당에서 왼팔 동맥이 끊긴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항의의 뜻으로 동맥을 끊었다가 진압 도중 추락한 것으로 추정됐다. 2층 회의실에서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10여 명의 국회의원, 기자, 당원들이 폭력배들에게 무차별로 구타당했다. 9월 들어 대학교가 개강하자 학생들이 연일 군부독재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16일 김영삼은 외신 인터뷰에서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 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멀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라고 규탄했다. 10월 4일 박정희 정권은 공화당과 유정회를 동원하여 제1야당 총재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시켰다.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들까지 합세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경찰력이 무력화됐다. 박정희 정권은 18일 부산에 계엄령을 발동하여 군대를 투입했다. 20일에는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그러나 24일 대구에서도 수천 명이 시위를 벌이는 등 사태가 계속 확산됐다. 위기를 맞은 지배세력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됐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대로 계속 가면 4·19 이상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하루빨리 수습책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선 300만 명을 죽여도 끄떡없다’며 ‘우리도 100만 명 정도 죽여 버리면 잠잠해질 것’이라면서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각하가 무서운 줄 알고 더 이상 대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시위가 확산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면서 차지철을 옹호했다. 결국 26일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1961년 이후 18년 이상 지속된 박정희 군사정권, 특히 1972년 이후 7년 동안 지속된 유신체제가 스스로 막을 내렸다. 1979년 박정희 유신통치를 자기붕괴로 몰고 간 YH노조의 투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YH 노동자들의 그 목숨 건 결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것도 지도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180여 명이나 되는 농성대오가 그런 결기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민주노조’였다. 열서너 살에 고향을 떠나와 ‘공순이’의 서러운 삶을 살아가던 YH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와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시작할 수 있었다. 유신의 엄혹한 철권통치 아래서도 민주노조로 단결한 노동자들은 감히 임금인상투쟁이란 것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사장의 오만한 콧대를 납작 찌그러뜨릴 수도 있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구가 인간이 가진 다른 어떤 욕구나 두려움보다 소중하고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릎을 꿇고 사느니, 차라리 민주노조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YH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가 자기 목숨과도 바꿀 만큼 소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주노조를 통해서 그야말로 진정한 단결을 이뤄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소통과 우애를 통한 하나됨이 노동자들에게 삶을 송두리째 던질 만한 감동과 희열로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YH노조 조직체계는 조합원 의견을 늘 듣기 위해 [의장단 논의·대책마련 → 상집위원 논의 → 대의원 그룹토론 → 대의원과 상집위원 중 그룹진행위원을 선발(16명)하여 조합원을 16개 소그룹으로 나눈 뒤 모든 그룹에 참가하여 토론을 주도(나머지 대의원과 상집위원들은 보조역할) → 모임 뒤 그룹진행위원이 평가회를 통해 조합원의 반응·결정사항·요구내용 등 종합토론]하는 5단계 토의방식체계를 운영했다. 이는 조합원들이 차례로 그룹토의에 참가하여 참여의식을 높이며, 함께 문제를 발굴하여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10] YH노조는 노조원을 대상으로 모집 인원 60명인 녹지중학교를 설립하여 1984년까지 운영한다. 신민당사 농성 투쟁 중 사망한 김경숙은 이 학교 출신이다. 녹지중학교 졸업생을 상대로 비공개로 운영되는 동일교회 야학에서는 노동, 사회, 정치, 경제를 교육한다. 주1회 소그룹으로 운영되는 영클럽은 월 1회 교양강좌, 연 4회 역사공부, 연 6회 타 노조와의 연합모임을 가진다. 노조는 월 1회 대의원 모임을 열고 분반토론으로 논의를 활성화하고, 합창단과 탈춤반을 운영하며 노조원들이 노조에 쉽게 친근감을 가지게 하고, 상조회를 설립하여 우애를 돈독하게 한다. 이런 활동들에서 대학생 출신의 활동가가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고 노동자들은 이들과 연계하여 헌신적으로 모범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런 활동의 성과는 1979년의 일사불란한 신민당사 농성 투쟁으로 나타난다.[11] [미주] [1] 경향신문, 1970/10/07,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2]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22~23쪽. [3] 노동사회교육원, 2008,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93쪽. [4] 이광일, 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122~123쪽. [5]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49~50쪽. [6]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26~27쪽. [7] 신원철, 2003, 「사내하청공 제도의 형성과 전개: 현대중공업 사례」, 『산업노동연구』 제9권 제1호, 111쪽. [8] 현대중공업노동조합, 2007, 『현중노조 20년』, 59쪽. [9] 경향신문, 2003, 「실록 민주화 운동 (24) YH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10] 유경순, 2012,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형성과 분화에 관한 연구」, 65쪽. [11]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50쪽.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전쟁범죄 동조자 유발 샤니 교수는 고려대를 떠나라!1월 19일 오후 1시 고려대학교 SK미래관 앞에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고려대 구성원 및 시민사회 일동'이 '고려대학교의 유발 샤니 이스라엘 교수 초빙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같은 날 오후 2시부터 휴먼아시아와 고려대 국제인권센터, 국제대학원 등이 주최하는 '국제 AI 인권장전 세미나'에 기조강연자로 유발 샤니(Yuval Shany)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법학교수가 참여하는 것을 규탄하고 이를 보이콧하기 위해서였다. 재한 팔레스타인 학생, 고려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강사,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시민사회 구성원 등 다양한 이들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참여하며 유발 샤니 교수와 고려대학교를 목소리 높여 규탄했다. 기자회견 전후로 유발 샤니 초청에 맞선 항의행동이 고려대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강연 5일 전부터 주요 게시판에 유발 샤니와 그를 초청한 고려대를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고, 학내 구성원 대상연서명이 진행되었다. 기자회견 직후에는 강연장 입구에서 ‘고려대는 이스라엘 전쟁범죄 동조자와 학술협력 동결하라!’, ‘집단학살 옹호하는 유발샤니 규탄한다!’ 등 항의 구호를 함께 외치고, 강연 후에는 캠퍼스를 떠나는 유발 샤니를 쫓아 항의 피케팅을 진행했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팔학(@studentcoalition.kr)님의 공유 게시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점령과 집단학살이 지속되는 와중에, 집단학살을 정당화하는 이스라엘 학자를 초청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것도 ‘인권’을 주제로! 이스라엘이 학교, 대학 등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무차별적 폭격과 학살, 이른바 교육학살(Scholasticide)을 자행했음을 고려하면, 고려대를 비롯한 한국 대학과 이스라엘 학계의 교류는 그 자체로 규탄 대상이다. 이 기사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과 유발 샤니 교수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이들의 진상이 드러날수록, 이들과 협력하는 한국 대학과 학계가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에 얼마나 깊숙이 공모하고 있는지,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에 얼마나 무책임하고 근시안적인지 드러날 것이다. 대자보 문구를 일부 인용하자면, “강의실이 호화로운 만큼, 그럴싸한 이론이 마이크를 통해 또렷하게 전달되는 만큼, 연사들의 높은 명망만큼, 커져가는 참여자들의 박수소리만큼, 팔레스타인의 비참한 현실과의 대조는 강연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축제 같은 분위기 아래 펼쳐지는 공허한 ‘인권과 평화’의 아우성이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을 외면하는 침묵을 더욱 부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의 씽크탱크 유발 샤니가 재직 중인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은 어떤 곳인가. 2024년 9월 20일, ‘팔레스타인 대학교수 및 직원 노조연맹’(PFUUPE)과 ‘팔레스타인 과학기술 아카데미’(PalAST)는 이스라엘 대학들이 어떻게 팔레스타인 점령과 집단학살에 기여하고 있는지 각 대학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이에 대한 보이콧과 협력 중단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공동으로 발행했다. ‘교육학살’에 직면한 팔레스타인 학계 구성원들은 호소문을 통해 “모든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하는 이스라엘의 76년 정착민 식민지 분리주의 통치, 그리고 현재 국제사법재판소가 점령지 가자지구에서 23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집단학살이라고 판결한 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해왔으며, 이스라엘 학술기관들이 국제법을 위반해 왔기 때문에 윤리적 고려와 국제법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모든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호소문은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이 팔레스타인 집단학살과 교육학살에 대한 직접적 공범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유발 샤니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스코푸스산(Mount Scopus) 캠퍼스에 재직 중이다. 스코푸스산 캠퍼스가 위치한 동예루살렘은 1967년 이스라엘이 군사점령한 땅으로, 이곳에 점령국 시민들이 거주하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이다. 점령지에 세워진 캠퍼스 역시 이스라엘 정착촌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가 제4차 제네바협약을 위반하는 중대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기 속한 교수 등 종사자 개인 역시 적극적인 전쟁범죄 공모자로서 보이콧 대상이다. 히브리대학교는 고교졸업자 중 소수 엘리트를 선발하여 첨단 군사과학 인재로 육성시키는 ‘탈피오트’ 군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해당 프로젝트는 이스라엘 공군과 육군의 후원을 받는다. 탈피오트 프로그램을 졸업한 이들은 군복무와 고등교육을 병행하며 이스라엘군의 R&D와 정보전에 동원된다. 탈피오트 프로그램은 이명박정권 시기 국방부 주도로 고려대학교에 설립된 계약학과인 사이버국방학과 설립과 운영에 롤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잠시 동예루살렘에 주목해보자. 202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동예루살렘·서안지구·가자지구) 군사점령이 불법이라고 결정하고, 이에 따라 2024년 9월 유엔총회가 각국에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지에서 철수하도록 경제, 외교, 군사, 기타 모든 수단을 동원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바로 지금 동예루살렘에서는 정반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점령과 통제, 정착민 폭력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심지어 1월 19일 이스라엘 식민당국은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UNRWA) 본부를 철거했다.[1] 이는 이스라엘 당국이 2024년 UNRWA를 불법화하고, UNRWA 직원들을 표적 살해하고, 산하 학교, 병원 등 구호시설을 파괴해온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휴먼아시아는 불과 며칠 전 요르단 제라시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구호활동을 진행했다고 SNS에 게시했다. 물론 이러한 구호행위까지 부적절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활동은 필연적으로 다음 질문에 직면한다. “‘팔레스타인 난민’이란 무엇인가?” 팔레스타인 난민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나크바에서 기원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저지른 인종청소와 원주민 추방의 결과가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등 아랍과 전 세계에 퍼진 팔레스타인 난민이다. 비참한 현상유지가 아닌, 팔레스타인 고향 땅으로의 귀환이야말로 세대를 초월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염원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결권과 귀환권은 유엔총회결의 194에 명시되어 있지만, 그 실현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시온주의 체제의 철폐다. 시온주의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지탱하는 대학 등 이스라엘 국가기구에 대한 단호한 거부는 시민사회와 NGO에게도 요구되는 책임이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유주의적 시온주의자 유발 샤니 교수: 이스라엘군의 집단학살을 정당화하다 「국제 AI 인권장전 세미나」의 주최측은 유발 샤니를 예루살렘 히브리대 법학교수, 옥스포드 대학교 AI 윤리 연구소 석좌연구위원, 전 유엔 자유권위원회 위원장 등 화려한 직함으로 소개했다. 이는 여타 학술행사에서 공개된 유발 샤니의 이력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유발 샤니를 환대하는 이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이력이 있다. 유발 샤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실과 이스라엘군, 이스라엘 법무부의 자문을 맡아왔다. 학살자 네타냐후와 이스라엘 점령군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 법무부 역시 점령과 학살의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기관의 핵심이다. 이스라엘 군과 정부부처와 함께 일한 경력으로 인해 2018년 유발 샤니가 유엔 자유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될 당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선택적으로 나열된 경력이 그의 손에 묻은 피까지 지울 수는 없다. 법률학자로서 유발 샤니의 ‘전문성’과 학술적 권위는 이스라엘군의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을 옹호하는 데 쓰인다. 유발 샤니는 국제법 전문매체인 〈저스트 시큐리티〉에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정당화하는 논설을 꾸준히 기고하고 있다. 이러한 논설은 202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기한 집단학살(Genocide) 소송, 2024년 국제앰네스티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보고서, 유엔 등 국제기구의 집단학살 규탄 등을 주로 겨냥한다. 2023년 10월 논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10월 9일 사용한 “전면 봉쇄(total siege)”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이스라엘군이 민간인들이 가자 남부로의 이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했기에 국제법을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이 민간 시설을 표적 삼아 공격하고 공공 서비스로의 접근을 차단한 행보에 대해 유엔 사무총장이 언급한 “집단처벌”[2]에 관해서도, 집단처벌 규정이 합법적 조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이스라엘군에 면죄부를 부여했다. 2024년 10월 국제엠네스티 보고서 반박기고에서는, 이스라엘이 민간인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으며, 여러 건의 국제인도법 위반이 발생하여 보호대상집단 구성원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만으로 집단학살이라고 추론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같은 매체의 팟캐스트에서는 ‘이스라엘이 민간인들에게 특정 지역을 떠나라고 미리 경고를 하는 등, 피해 최소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집단학살이 2년 넘게 지속되는 지금, 우리는 이러한 옹호가 철저히 거짓임을 보고 있다. 가자 남부 라파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무참하게 파괴되었고, 이후 벌어진 것은 가자지구 전역의 끔찍한 기아였다. 이스라엘군은 병원, 학교, 주거지 등 생존에 필수적인 민간 시설을 파괴했으며 가자지구 주민들은 최소한의 생존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군은 민간 시설 폭격 후 민간인을 구조하러 오는 구급대원 등을 공격하는 ‘더블 탭’ 전술을 시험하기도 했다. 유발 샤니 초청강연 주제가 ‘AI의 윤리적 활용’이라는 사실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AI기술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효율적'으로 학살하고, 식민점령을 공고화하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7월, 유엔 팔레스타인 점령지 특별보고관 보고서 "(가자지구) 점령 경제에서 집단학살 경제로"는 이스라엘 점령군이 데이터 처리 및 표적 목록 생성에 각종 인공지능 시스템을 개발해 활용하고 있으며, 빅테크 기업과 대학은 이스라엘과 협력하며 이윤을 쌓고 있음을 지적한다. 강연 직후,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강연장을 나서는 유발 샤니에게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대한 입장을 묻자, 유발 샤니는 ‘나는 AI에 대해 말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AI를 집단학살에 활용 중인 자국의 책임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대답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쓴 「국제 AI 인권장전의 필요성과 실현가능성 백서」에서도 드러난다. 백서는 다양한 법령과 사례를 들어 AI의 윤리적 이용에 대해 역설하나, AI를 집단학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문제제기는 단 한마디도 없다. 이러한 유발 샤니의 입장과 행보는 소위 ‘자유주의적 시온주의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에 부합한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유대인의 민족자결권과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모두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2. 종종 이스라엘 정부 또는 정착민들을 비판하지만, 절대 시온주의 이념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3. 팔레스타인 귀환권 보장을 거부하고 정착민 식민주의 폭력을 경시하면서 ‘두 국가 해법’을 주창한다 자유주의적 시온주의는 유대 국가와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도 지지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유대민족국가체제를 옹호할 뿐이다. 가자 구호선단에 참여한 한국 시민 납치까지 선동하다 2025년 10월 초, 이스라엘군은 구호물품을 싣고 가자지구로 향하던 ‘천개의 매들린 호’ 선단에 참여한 한국인 활동가 해초를 공해상에서 납치하고 강제 구금했다. 해초 활동가뿐만 아니라 ‘글로벌 수무드 함대’ 등 선단 수십 척이 이스라엘에 의해 나포되고 그레타 툰베리를 비롯한 활동가 수백 명이 강제 구금과 잔혹한 폭력을 겪었다. 이 피랍에 대해 유발 샤니도 한마디를 얹었다. 유발 샤니는 가자 구호선단 나포에 대해, ‘가자지구 봉쇄가 무기반입을 막으려는 군사적 목적이라고 정당화될 수 있기에, 선박들이 이 봉쇄를 깨려는 의도를 가졌다면 사전경고 후 나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자 봉쇄는 정당하며 이스라엘군의 구호활동가 납치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군의 구호활동가 납치마저 정당화한 인물을, 인권 주제 강연에 기조강연자로 세우는 고려대학교의 행보를 도대체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군/정부 자문 이력을 누락하고, 학살과 점령에 이어 구호활동가 납치까지 정당화하는 유발 샤니 교수의 과오에 대한 침묵은 또 하나의 학살 공모행위이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식민점령을 정상으로 포장하는 모든 시도에 저항하라 필자는 이스라엘 대학과 학술기관이 집단학살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복무하고 있으며, 이들이 보이콧의 대상임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 있다. 이스라엘 기관에 속한 개인까지 보이콧하는 것은 과도하지 않은가? 학술보이콧으로 학문의 자유와 독립성이 과도하게 침해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일란 파페처럼 시온주의 체제 철폐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출신 학자들도 있지 않은가? 기자회견 후, 고려대학교 국제인권센터장이자 휴먼아시아 대표이사인 서창록 고려대 교수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학생 공동행동>에 보낸 메일도 이러한 논지다. “이러한 이유로, 국적이나 소속을 이유로 학술행사 자체를 중단하거나 발언의 기회를 사전에 제한하는 것은 학문의 자율성과 대학의 기본 원칙과 양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학술행사는 특정 국가나 정부의 정책, 군사행위, 또는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유발 섀니 교수는 오랫동안 국제 인권 규범의 형성과 발전을 연구해 온 학자로, 유엔 자유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또한 디지털 기술과 인권의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이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입니다. 그의 국적이나 소속 기관을 이유로 이번 학술행사에서의 참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인권 규범의 진전을 이끌어 온 학문적 논의의 취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는 진부하고 태만한 변명이다. 이런 변명은 ‘이스라엘 학술·문화 보이콧 팔레스타인 캠페인’(Palestinian Campaign for the Academic and Cultural Boycott of Israel; 이하 학술 보이콧 캠페인) 속에서 숱하게 반박되어왔다. 학술보이콧 운동은 특정 개인의 정체성이나 견해만으로 개인을 보이콧하지 않는다. 학술 보이콧 캠페인 가이드라인은 이스라엘 학자들이 이스라엘 연구기관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보이콧을 적용할 근거가 될 수 없으며,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에 해당할 수 있음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학술 보이콧 캠페인 가이드라인은 이스라엘의 점령과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공모하거나 연루된 개인은 보이콧 대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앞서 설명했듯, 유발 샤니가 보이콧 대상인 이유는 단순히 이스라엘 학자라서가 아니다. 인권과 국제법을 다루는 강연에 이러한 인사를 기조강연자로 초청하는 것은, 학술보이콧 가이드라인이 명시하듯 점령과 학살을 ‘정상화’(normalization)[3]하려는, 즉 점령과 학살을 정상으로 포장하려는 기획이다. 이러한 정상화 기획은 직접적 집단학살 가담, 노골적 학살 선동에 비해 간과되기 쉽다. 그러나 정상화 기획은 자기 논거를 ‘국제법’, ‘인권’, ‘학술적’ 중립 따위에 두기에, 시온주의를 보다 교묘하게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에 다니는 팔레스타인인 타렉 함단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학계의 책임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교육학살이 지속되는 와중에)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법학부 유발 샤니 교수를 ‘국제 인공지능 인권장전’ 세미나 연사로 초청한 모욕적 결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인권’을 함께 논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이스라엘이 인권을 무시하고 직접 유린하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경우일 뿐이지, 그 어떠한 방식으로건 학술적 의미의 인권을 논할 발언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계가 조작된 합의를 받아들이도록 방치할 수 없습니다. 거리는 저항 행렬로 가득합니다. 지금 필요한 논의는 더 이상 “너무 복잡하다”가 아니라, “그들이 아이들을 또 살해하다니 믿을 수 없다”입니다. 우리가 인권을 설파하면서도 국제적 살인자들을 학문의 전당에 초청해 인권을 이야기하게 한다면, 우리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고려대학교가 세미나를 열고자 한다면, 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절단장애 아동이 발생하는 곳이 팔레스타인이라는 현실을 다루는 세미나를 요구합니다. 저는 팔레스타인에서 학교, 어린이집, 대학을 겨냥한 직접적 폭격을 논의하는 세미나를 요구합니다. 저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를 다루는 세미나를 요구합니다.“ 유발 샤니 초청은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박민상 공공운수노조 대학원생노조지부 고려대분회 조합원이 지적했듯, 학술적 중립과 학계의 권위를 명분으로 학살과 파괴를 묵인하고 연장하는 행위이다. 당면한 폭력과 부정의 앞에 침묵하는 학문은 잡담에 불과하다. 가자지구 학자들과 대학 책임자들의 공개서한을 기억하자. “우리는 전 세계의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점령된 팔레스타인에서 계속되는 교육학살에 맞서 저항하자고 호소합니다. 파괴된 팔레스타인의 대학 재건을 위해 협력하자고 호소합니다. 팔레스타인 학술기관을 무력화하고 훼손하며 약화하는 모든 계획을 거부하자고 호소합니다.” 더욱 철저한 학술보이콧 실천으로 한국의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을 확장해 나가자 이번 고려대학교 유발 샤니 교수 초청 규탄 기자회견과 항의행동은 한국 대학과 시온주의 학자의 협력에 저항한 첫 사례다. 학술보이콧 운동에 대한 이스라엘 당국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역설적으로 이 운동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의미있게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대학과 이스라엘 학계의 협력이 강화되는 지금, 학술보이콧 운동은 대학 내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확대하는 또 하나의 계기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싸움을 확대하자! [1] 철거에는 한국 기업인 HD현대가 생산한 굴삭기가 사용되었다. [2]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023년 10월 “하마스의 공격이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집단처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집단처벌은 제4차 제네바 협약에서 금지한 전쟁범죄로, 일부 개인의 행위에 대해 집단 전체를 처벌하는 것을 뜻한다. http://www.snujn.com/news/74022 [3] 학술 보이콧 가이드라인은 이스라엘 ‘정상화’ 프로젝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양자건 다자건, 팔레스타인인과(또는) 다른 아랍 지역인이 한편에, 이스라엘인이 다른 한편에 참여하는 문화활동, 프로젝트, 행사, 생산물 중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 대칭성/동등성이 존재한다는 그릇된 전제를 바탕으로 하거나, 식민 지배자와 식민 지배를 받는 자가 소위 ‘갈등’에 같은 책임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들은, 지적으로 부정직하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형태의 ‘정상화’에 해당하며 보이콧되어야 한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번역] 엥겔스, 여성 노동자,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역자: 김요한 글쓴이: 호세피나 마르티네스(Josefina L. Martínez) 친구의 죽음에 여전히 영향을 깊게 받고 있던 1883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런던에 있는 마르크스의 집에서 마르크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편지, 원고, 메모 더미를 살펴보고 있었다. 자료들 속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헨리 모건의 저작에 관해 남긴 일련의 메모를 발견했다. 모건의 마지막 책 <고대사회>가 바로 몇 해 전 출판된 터였다. 두 친구는 이 주제에 관해 여러 차례 의견을 교환했고, 엥겔스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들떴다. 마르크스의 인류학 메모를 기초로, 엥겔스는 친족, 가부장제 가족, 결혼제도, 일부일처제 형태의 변화와 특히 연관된 사회 조직들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전개했다.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이라는 엥겔스의 책이 1884년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출판 이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나는 아래에서 이 책의 근본적인 공헌뿐만 아니라 이 책이 야기한 논쟁 몇 가지에 관해서도 지적할 것이다. 그에 앞서 먼저 여성해방에 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으로 내놓은 입장의 전체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엥겔스는 1845년 출판된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처지>란 책에서 처음으로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이중 억압에 관해 기술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영국 노동자계급의 생활, 노동조건, 도시의 과밀상태, 거대한 고난을 직접 보여줬다. 엥겔스는 이것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주의 운동이 출현하게 된 토대로 보았다. 엥겔스는 당시 24세였는데, 엥겔스가 189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그가 훗날 마르크스와의 협력을 통해 발전시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관점은 그 책에서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처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훌륭한 시각적 비유로 시작된다. 엥겔스는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가 런던에 입성할 때 경험하는 충격에 대해 기술한다. 여행자는 도시의 놀라운 발전, 건물의 숫자, 선박들, 번영하는 문명의 모든 상징에 매혹된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 “슬럼(빈민가)”으로 이어지는 좁은 거리를 걸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 런던 사람들이 그들의 도시를 가득 채우는 문명의 온갖 경이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 본성의 가장 뛰어난 자질을 희생하도록 강요당해왔다는 것,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더 완전하게 계발하고 다른 이들과 연합해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 안에 가만히 잠들어 있는 백 가지 능력을 억눌러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1] 즉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잔혹한 불평등에 대해 언급하는데, “문명의 온갖 경이”는 사회의 거대한 부문, 즉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짓밟아 성취한 것이다. 엥겔스의 시선은 이제 노동자계급 이웃 속으로 한층 더 파고든다. 더럽고 비좁은 거리, 난방이 되지 않는 집, 식량 부족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이어 엥겔스는 섬유산업 종사자의 다수인 여성 노동자를 특별히 언급한다. 그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10~12시간을 일하고 있었지만,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또 위기가 닥치면 여성 노동자들은 제일 먼저 해고됐다. 여성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요리, 세탁, 육아 등의 돌봄을 해야만 했다. 비록 엥겔스가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 내 노동자계급 여성의 역할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반복해서 특히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현상을 강조했다. 엥겔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 질서는 노동자계급 가족의 해체를 초래하고 있었다. 그 존재 조건을 불가능하게 해서 말이다. “이런 사회질서 때문에 노동자가 가정생활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불편하고 더러워서 밤새 쉬기도 어렵고, 세간도 변변치 않고, 대개 지붕에서 물이 샐 뿐더러 따뜻하지도 않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탁한 공기가 방을 가득 채우는 집에서 안락하게 지내기란 불가능하다. 남편은 온종일 일을 하고, 형편에 따라 부인과 나이 많은 자식들까지 일을 한다. 일하는 장소는 모두 다르다. 그들은 밤과 아침에만 만나고, 모두 음주의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이런 마당에 어떤 가정생활이 가능하겠는가? 그럼에도 노동자는 가족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가족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 그 결과 부모와 자식 모두의 도덕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가족 간 갈등과 가정 불화가 끊임없이 잇따르게 된다.”[2] 15세~20세 사이의 여성들은 섬유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많은 수의 아동들도 그러했다. 엥겔스는 여성 노동자들이 매우 자주 “출산 후 3~4일 만에 공장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휴식 시간에 신생아 수유를 위해 일터에서 집으로 달려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12시간 혹은 13시간을 일하는 동안 아이들은 친척이나 이웃들이 돌봐주든지, 아니면 맨발로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게다가 작업장에서의 성적 학대가 만연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공장에서의 종속관계가 다른 종속관계와 마찬가지로, 심지어 그보다 더한 정도로 제조업자에게 초야권(初夜權, 중세 영주가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권리 – 옮긴이)을 부여한다는 것도 당연히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고용주는 피고용인들의 인신과 아리따운 용모를 지배하는 군주이기도 하다.”[3] 이런 이유에서 엥겔스는 “아내의 고용은 완전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가족을 해체시키며, 가족에 기반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가족의 해체는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4] 오늘날의 사회는 가족에 기반해 있지만, 동시에 가족을 해체하기도 한다. 가족의 존재가 불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서 말이다. 이러한 파괴적 모순은 여성 노동자들과 전체 노동자계급이 살아가고 투쟁하는 조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는 못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생각을 계속 이어나갔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돌아와,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정의, 가부장적 억압의 기원에 대한 분석, 가부장제 가족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내놓는다. <신성 가족>이란 책에서 그들은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푸리에는 “사회의 진보와 시대의 변화는 자유를 향한 여성의 진보라는 미덕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회의 퇴보는 여성의 자유가 줄어든 결과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수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전부터 여성 억압의 문제를 다뤄왔다. 어떻게 이를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이런 전통에서 가사노동의 사회화, 일부일처제의 종식, 자유로운 사랑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소규모 공산주의 사회의 청사진을 그리면서 개별 주택의 구조를 개조할 필요와 같은 문제들이 검토됐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고안했던 이러한 개요는 꽤 모호했다. 그들은 그 목적에 어떻게 다다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사회적 힘으로 달성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미국에서 오언주의 공동체의 경험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엥겔스가 이후 저작에서 지적했듯이, 오언의 글을 통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씨앗을 뿌렸다.[5]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인 플로라 트리스탄의 작업은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중간에 있었다. 그의 책 <노동자 연합>(1843년)에서, 그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정치적 조직에 대한 제안을 개괄했으며, 처음으로 계급과 젠더의 관계를 다뤘다. 이 책의 세 번째 장은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할애되었는데, 그는 여성들을 프랑스 사회의 “마지막 노예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책을 통해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숙고할 것을 요구했고, 여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인간해방의 과업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6]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거듭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 가족 구성원 모두를 동등하게 착취하고, 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작업장 안으로 밀어 넣어 노동자계급의 전통적 가족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들의 “이중 잣대”를 비난했다. 즉 부르주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부인 공유제”를 도입하기를 원한다고 비난하지만, 여성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면서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간통이나 성매매를 통해 이를 실제 실현한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자본>도 수차례에 걸쳐 여성 노동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산업예비군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또한 여성과 아동노동에 대한 잔혹한 착취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러나 가족 제도와 여성 억압의 원인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분석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엥겔스의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에서 전개됐다. 가족, 여성 노동자, 그리고 공산주의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은 여전히 필수 저작이다. 비록 모건의 연구가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고, 이 책이 역사 시기에 대해 다소 도식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 책은 무엇보다도 여성 억압의 역사적 기원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필수적이다. 여성 억압이 항상 존재했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인 것이란 점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베벨과 같은 다른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저작에 관해서도 논쟁을 벌였다.[7] 엥겔스의 책이 출판된 이후, 베벨은 모건에 대한 엥겔스의 참조를 포괄하며 자신의 저작을 수정했다. 카우츠키는 직전에 이 주제에 관한 저작을 출판했는데, 여성의 종속은 인류사회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마치 여성 억압이 언제나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엥겔스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 대신 엥겔스는 좀 더 평등하고 심지어 모권(母權)에 기반한 “원시 사회”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 역사를 강조하고자 했다. 엥겔스는 사적 소유의 등장, 사회의 계급 분할, 그리고 여성이 종속적 역할을 하는 가족 제도의 정립 사이의 관계를 입증했다. 결혼과 일부일처제의 성립을 통해, 여성과 아이들은 “남성의 사적 소유물”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남자는 집안에서도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여자는 지위가 하락하여 예속적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단순한 산아 도구로 전락하였다. … 아내의 정조, 따라서 자녀들 아버지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내는 남편의 무조건적 권력 하에 놓인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권리를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8] 게다가 이 책 초판 서문에는 엥겔스가 가족 문제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고찰한 중심점으로서,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 중요한 구절이 있다. “유물론적 파악에 따르면, 다음의 요인들이 역사를 종국적으로 규정한다.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 그런데 이것 자체는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생활 수단들의 생산, 즉 의식주의 대상들과 그것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와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 한편으로 노동의 발전 단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9] 이 구절은 여러 차례 인용됐으며, 다양한 이론적 입장에서 의문이 제기됐다. 엥겔스가 아직 생존해있을 동안,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을 사회주의 강령의 근본 요소로 방어하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받아들이기 꺼리는 사회민주당 내 보수적인 부문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예를 들어 1886년 10월 고타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대회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 노동자와 사회주의 문제에 대해 중요한 연설을 했다. 그는 여성해방을 향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과 연결돼 있으며, 따라서 여성들 속에서의 사회주의 선동과 노동조합 내의 여성조직을 늘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혐오적인 입장으로 유명한 영국 사회주의자 벨포트 백스는 그 연설을 거세게 비판했다.[10] 벨포트 백스는 클라라 체트킨에 맞선 논쟁 과정에서 엥겔스의 권위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 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관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칼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 마르크스(엥겔스와 매우 친밀했다)는 벨포트 백스에게 공개적으로 답변했는데, 이 문제에 관해 엥겔스와 체트킨이 일치해 있다는 것을 재차 단언했다. 엘리노어 마르크스는 가사노동 문제와 여성 노동자가 감당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강조했다. 그는 여러 유럽 국가들의 여성 노동자 수를 지적했다. 영국에서 약 450만 명, 프랑스에서 370만 명, 이탈리아에서 350만 명, 독일에서 500만 명 이상,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350만 명. 이처럼 주요 유럽 국가에서 여성 노동자 수가 2천만 명 이상이며, 많은 경우 이들은 노인, 아동, 또는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생계비를 버는 사람들이다. 엘리노어 마르크스는 한때 집에서 행해지는 많은 작업들이 현대적 생산 작업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양의 일들이 개별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 모순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공장노동과 기타 임금노동 외에도, 여성들은 가사노동 또한 수행해야 한다. 나는 벨포트 백스나 그의 의견을 따르는 누군가가 자본주의 산업화가 여성을 가정주부의 의무였던 여러 중요한 역할들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집에서 양말을 뜨개질하거나, 아마포를 바느질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으며, 다른 가사노동 일거리도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 세탁, 요리 등 해야 할 가사노동이 남아있다. 자본주의는 아직 가사노동 기계를 발명하지도 못했고, 동시에 실직한 남편이 집과 아이들을 돌보는 수준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아내가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가정적”이 되도록 하지도 못했다. 그렇다, 벨포트 백스 동지. 클라라 체트킨은 엥겔스와 함께 여성은 “가정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 클라라 체트킨은 이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 여성은 이중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했어야 했다. 여성은 두 종류의 해야 할 일이 있다. 공장에서 생산자로서의 일과 가정에서 주부, 아내, 어머니로서의 일 말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근육과 혈액은 한편으로는 자본가의 즉각적인 이윤을 위해 소모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의 미래 이윤을 위해 소모된다.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를 낳고 키우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일하고, 여기서도 일해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단호한 대답에서 엥겔스가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엘리노어 마르크스와 클라라 체트킨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도 이후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여성의 사회적‧정치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데 집중했다. 가정에서 수행되는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을 규탄하면서 말이다. 수십 년 후 러시아혁명은 이런 사상을 실제 현실로 만들려 시도했다. 러시아혁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조치들을 가능하게 했다. 임신중절과 이혼의 합법화, 혼외자녀에 대한 인정, 여성에 대한 동등한 임금,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위한 조치로서 유아원‧급식소‧어린이집‧세탁소의 설립. 나중에 특히 1930년대에 이 분야에서 나타난 후퇴는 내부 반혁명의 맥락에서 일어났다. 스탈린의 억압적 독재가 공고해지는 동안, 여성을 전통적 가족 내 “가정의 수호자”로 여기는 반동적 이데올로기가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공산당들이 여성들의 투쟁이 마치 노동자계급 투쟁보다 부차적인 것처럼 계급투쟁과 분리하는 정책을 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애초부터 이 문제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료적 입장과 계급 문제에 대한 경제주의적 해석을 정당화하려는 목표로 이뤄진 마르크스주의의 보수적 수정에서 비롯된 것이다.[11] 가부장제, 생산과 재생산 1960~70년대에 2세대 페미니즘과 함께 엥겔스의 책에 대한 또 다른 논쟁이 등장했다. 한편으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케이트 밀럿 같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은, 가족 제도를 당연시하지 않고 여성 억압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개념화한 것은 엥겔스의 공헌이라고 썼다. 동시에 그들은 역사적 유물론 일반이 일종의 “경제주의”인 것처럼 비판했다. 일례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별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새로운 역사적 유물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하는 데까지 나아갔다.[12] 파이어스톤은 경제주의 버전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를 섹슈얼리티 문제에 초점을 맞춰 뒤집는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은 사회적 관계의 물질적‧경제적 현상의 중요성을 삭제하거나 줄이면서 관념적 개념으로 나아가는데, 그에 따라 변화의 가능성은 문화 운동으로 국한된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 후 몇 년간 급진주의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생겨난 분리주의 경향들은 사회에서 억압받는 다양한 부문들 사이의 어떠한 공동 투쟁에도 반동적인 방식으로 반대했다. 앞에서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으로부터 인용한 바로 그 구절은 생산 영역을 삶의 재생산 영역으로부터 과도할 정도로 분리하는 계속되는 오류의 근원이라고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비판받았다. 엥겔스가 생산 영역을 재생산 영역과 “이원론적으로” 분리했다는 생각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리즈 보걸이 1983년 발간한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 단일 이론을 향하여>에서 내놓았다.[13] 이 비판은 좀 더 최근에는 수잔 퍼거슨과 같은 다양한 작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재생산 이론으로 정의한 이론을 발전시켰다.[14] 퍼거슨이 보기에 엥겔스의 저작이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근본적 공헌을 했다 하더라도, 엥겔스 저작이 제공한 관점은 이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공산당들이 여성들의 “특별한” 투쟁은 노동자계급 투쟁과 분리될 수 있다거나 심지어 혁명 이후로 “연기”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관점에서는, 자주 인용되는 엥겔스의 구절은 그런 분리를 상정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것은 두 영역 사이의 관계를 수립하는데, 아리아네 디아스가 지적하듯이 이것은 “엥겔스의 분석에서 정확히 새로운 것이다. 엥겔스는 여성 억압의 문제를 사회적 생산이라는 이론적 수준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관심사의 일부로 끌어올렸다.”[15] 그리고 여성 억압을 사회적 현상 및 생산과 재생산과 연관시켜, 여성의 종속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어떤 형태의 생물학적 결정론에서도 이 문제를 해방시킨다. 지난 몇 년간 여러 새로운 기고가 이뤄진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수많은 전체 논쟁을 여기서 다룰 생각은 없다. 이 주제에 관한 자세한 분석을 위해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여러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16] 그러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아래 재생산이 생산에 종속된 것을 강조하는 것은 투쟁의 전략을 세우는 데 필수적”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17] 가족 안에서 여성들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에 대한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화가 1960~70년대(다양한 이론적 입장들과 정치적 전략들이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 논쟁을 벌였다) 2세대 페미니즘 논쟁의 맥락 속에서야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전에는 여성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이 민주적 권리 획득과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도록) 더 평등한 노동시장에의 참여로 제한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여성 억압은 근본적인 주제였고,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향한 투쟁 역시 그러했는데, 여성들은 또한 “가정의 프롤레타리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투쟁들은 자본주의를 끝장낼 사회주의 전략과 연결돼 있었다. 엥겔스는 이런 관점을 1885년에 쓴 편지에서 드러냈다. “남성과 여성의 진정한 평등은 남녀 쌍방에 대한 자본의 착취가 폐지되고 사적인 가사 노동이 공적인 산업으로 전화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18] 엥겔스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남긴 유산과 관련해서, 가부장제 가족과 결혼제도에 대한 엥겔스의 날카로운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유효함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전통적(가부장제적) 가족의 역할을 무조건 복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이고 “가족주의”적인 입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특히 그러하다. 엥겔스는 가족 제도가 “자연적”이지도 않고 폭풍 한복판의 “오아시스”도 아니며, 경제적 의존에 기반해 있고 가부장적 위계 관계가 스며들어 있으며 그 안에서 사회적 모순들이 재생산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가부장적 제도와 남편이 여성을 “소유”한다는 관념에 대한 비판을 중심에 두지 않고서는 젠더에 기반한 폭력에 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 동시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는 노동자 가족의 생활 조건을 저하시키는데(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집과 직업 같은 권리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가족을 이 사회의 기둥 중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것은 엄청난 모순을 만들어낸다. 엥겔스의 관점에서는 가족과 결혼이 강제적인 경제적 의존의 단위로 존재하기를 그쳤을 때, 그리고 재생산 노동이 사회화되었을 때, 더 나아가 “아동에 대한 돌봄과 교육이 공적인 업무”가 되었을 때만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억압을 극복할 것이었다.[19] 엥겔스가 이렇게 썼을 때 세계의 많은 곳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집에서 자기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때는 보편적 공교육이나 유치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부르주아 여성들만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 노동을 통해 자신의 아이를 돌보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역사적 차이를 넘어 이것은 여전히 핵심적 의제로 계속되고 있다. 유치원, 아동의 생애 최초 몇 개월간 무상보육을 보장하지 않는 자본가 정부의 정책이 시행된 결과로 교육과 공중 보건에서 일어난 퇴보를 고려하면 말이다. 좀 더 최근에는 팬데믹 기간 아이들의 온라인 교육을 도와야 했던 많은 수의 여성 노동자들이 삼중 부담을 감당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인간 사이의 감정적‧성적 관계를 규제하고 제약을 가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은, 이런 장애물들이 극복된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사적 소유와 인류 대다수에 대한 착취로 지배되는 사회가 강제하는 제약으로부터 개인적 관계가 해방될 수 있는 사회, 따라서 사랑, 섹슈얼리티, 우정이 새로운 기반 위에 재건될 수 있을 사회를 떠올리도록 한다. 2022년 1월 2일 노동해방투쟁연대(준)에 게재되었던 기사를 재발행 [후주] [1] ‘대도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64쪽 [2] ‘결과’,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179쪽 [3] ‘산업의 단일 부문들: 공장노동자’,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200쪽 [4] 같은 책 [5]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중앙기관지 <전진>에 1876~1878년 처음 연재되었다. 책으로는 1880년 폴 라파르그의 프랑스 번역으로 처음 출판되었다. [6] “플로라 트리스탄: 망치와 장미”, 2019년 3월 4일자 <일간좌파(La Izquierda Diario)> 기사 [7] 베벨의 책 <여성과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검열 아래 라이프치히에서 비밀리에 인쇄돼 몇 년간 비합법적으로 유통되었다. 이 책은 1895년까지 독일에서 25차례 인쇄됐고, 이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폴란드어, 플랑드르어, 그리스어, 불가리아어, 루마니아어, 헝가리어, 체코어로도 출판됐다. 이 책은 분명히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8] 엥겔스, ‘대우혼 가족’,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옮긴이 - ‘대우혼(對偶婚)’이란 한 혈족의 형제자매와 다른 혈족의 형제자매가 교차하여서 짝을 짓는 혼인 형식을 말한다. [9] 엥겔스, 같은 책 초판 서문 [10] 벨포트 백스는 <여성의 종속(1869)>(존 스튜어트 밀이 쓴 책으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출발점이라고 평가 받는다 – 옮긴이)을 두고 여성운동에 맞선 모든 종류의 주장이 담긴 <남성의 법적 종속(1908)>이라는 자극적 제목의 책을 썼다.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11] 엘리노어 마르크스, <가정의 프롤레타리아(1896)> [12]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 페미니즘 혁명을 위하여> [13] 리즈 보걸,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 단일 이론을 향하여> [14] 수잔 퍼거슨, <여성과 일 : 페미니즘, 노동,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2019년)> [15] 아리아네 디아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16] 안드레아 다트리‧셀레스테 무리쇼, “우리, 프롤레타리아트” / 아리아네 디아스, “사회적 재생산의 정치경제학 I : 노동과 자본” / 파울라 바렐라, “현재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존재하는가? 오늘날 여성운동, 노동자계급,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메모” [17] 호세피아 마르티네스·신티아 루스 부르게뇨,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 페미니즘, 계급, 그리고 다양성> [18] ‘엥겔스가 보이텐의 게르트루트 기욤-샤크에게’, <저작 선집 6>, 박종철출판사, 473쪽 [19] 엥겔스, ‘가족’,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지엠부품물류지회 투쟁승리를 위한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1박2일 연대한마당1월 16일과 17일,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이 주최하여, GM세종물류센터에서 지엠부품물류센터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1박2일 연대한마당이 진행되었다. 다양한 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 연대시민들이 함께 참여해 해고된 120명의 세종물류센터 노동자들의 원직 복직 쟁취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GM과 폐업하지 않은 다른 하청업체인 정수유통은, 우진물류가 맡아오던 물량을 몰래 빼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꼼수를 쓰고 있다. 이에 지엠부품물류지회와 GM부품물류투쟁승리공대위 공대위는 불법적인 부품 빼돌리기를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해오고 있다. 문화제가 열릴 예정이던 이날 저녁에도, 정수유통은 은밀하게 기습적인 물량반출을 시도했다. 이에 연대한마당 참여자들은 7시에 예정되어있던 문화제를 미루고 물량반출 저지투쟁을 함께 했고, 2시간 여의 대치 끝에 물량반출 저지에 성공했다. 이후 9시경에 지연된 연대문화제를 시작했다. 한국지엠 노래패 참소리가 문화공연으로 원하청 연대투쟁을 실천했다. 이어 교섭창구단일화 강제로 원청교섭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노조법 시행령 폐기를 위해 서울고용노동청에서 농성투쟁을 이어가던 아사히글라스지회, 자동차판매연대지회, 쿠팡물류센터지회,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이수기업 해고노동자들이 단상에 올라, GM부품물류 투쟁 승리가 곧 원청사용자에 맞선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3권 쟁취투쟁의 전진임을 역설했다. 이어 시민사회단체를 대표해 발언한 김용균재단 김미숙 동지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가 보장되었더라면, 용균이가 그처럼 죽지는 않았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라며 말하며, GM부품물류지회의 투쟁이 故 김용균 노동자를 비롯해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죽음을 막기 위한 투쟁과 연결되어있음을 드러냈다. 노래패 ‘노래로 물들다’의 힘찬 공연에 이어 GM부품물류지회 투쟁을 다룬 영상이 상영되었고, 이어 지엠부품물류지회 노래패가 ‘촛불하나’를 개사해 부르며 청중에게 벅찬 감동을 선사했다. 이어서 단상에 오른 김용태 지엠부품물류지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단결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드러냈다. 지역 연대를 구축하고 있는 ‘GM부품물류지회 투쟁승리 공대위’ 구성원들이 모두 단상에 올라 연대투쟁을 확대하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선지현 공동대책위원장은 “GM부품물류지회, 총연맹, 산별노조, 지역과 시민사회단체, 정당이 각자의 사명을 다하며 싸울 때, 민주노조를 지키고 혁신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이 투쟁을 함께 승리로 이끌어, ‘우리가 이렇게 싸워야겠구나’라는 걸 전국의 노동자와 사회운동에 알릴 것”이라고 밝혔다. 고용승계와 한국지엠 원청 책임을 요구하며 굳건히 세종물류센터를 사수하고 있는 GM부품물류지회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모든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로, 세종물류센터 노동자 집단해고를 철회시키고, 한국지엠 직접고용을 쟁취하자!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English]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
[한노운사 연재 1회] 1부 폭압과 저항(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한국노동자운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절멸됐다가 1970년대 이후 부활했다. 현대 한국노동자운동의 역사는 자본주의가 자신을 무덤으로 보낼 노동자계급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사실,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는 한 노동자운동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므로 자본주의야말로 노동자운동의 진정한 모태이자 영원한 숙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운동의 역사를 이해할 때만, 우리는 운동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큰 틀에서 인식할 수 있다. 투쟁의 역사 속에 담긴 수많은 경험과 교훈을 연구할 때만, 우리는 당면한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다. 1970년부터 2025년까지 한국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목차]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1] 민주노조운동의 태동 [2] 1980년의 분출 [3] 민주노조운동의 파괴와 재건 [4] 1987년의 대폭발 1부. 폭압과 저항 (1970-1987) 한국전쟁으로 노동자운동이 절멸당하면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착취·억압에 내몰렸다. 1970년 전태일의 처절한 분투를 밑거름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시작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결기는 철옹성만 같던 박정희 유신정권을 자멸로 내몰았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광주민중항쟁을 주도한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민주노조운동 말살에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노동자들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군사정권을 무릎 꿇리며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세상을 뒤흔드는 거인의 모습으로 다시 일어섰다. [시대배경] 군사정권이 주도한 산업화 한국전쟁 이전 시기에 한반도 남쪽에서 이루어진 약간의 산업화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송두리째 파괴됐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모색되기 시작한 산업화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된 자본주의 산업화가 수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가 주도의 고도성장과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특징으로 하는 박정희 정권의 성장 전략은 1960년대에 섬유·전자 등 노동집약산업, 1970년대 조선·철강·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된 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계승되어 재벌 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20세기 후반에 한국은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빠르게 변모했다. 수출 지향적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들을 극단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시켰으며,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 또한 벼랑으로 밀어붙였다. 그래서 해마다 3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노동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다. 놀라운 속도로 진행된 자본축적의 비밀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매우 높은 수준의 착취에 있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과 통제였다. 자주적인 노동자조직은 군사정권에 의해 사실상 금지되었고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국가 발전’을 절대화하는 이데올로기는 끔찍한 착취와 억압·통제를 정당화했다. 노동자들은 ‘공돌이·공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사장과 현장관리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수시로 구타를 일삼을 정도로 폭압적이었다. 정권과 자본이 고도성장을 자축하며 흥겨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병영식 노동통제 체제’가 노동자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1) 1960년대 박정희 군사쿠데타와 경제개발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쿠데타를 정당화하려 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울산공업지구 기공식을 성대히 거행한 게 그 시작이었다. 산업화를 위한 자금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조달했다. 미국은 한국을 냉전시대 서방 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로 삼고자 했다. 1945년부터 1970년 한국을 원조지원 대상국에서 제외할 때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는 무상원조 44억 달러, 유상원조 4억 달러로 총 48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제공한 원조가 68억 달러임을 감안할 때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미국의 원조는 소비재와 식량에 집중되었고, 이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노동력을 이전하는 도구이자 저임금을 유지하는 원천이 됐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더 막대한 자금지원과 혜택을 얻기 위해 베트남전쟁 파병을 단행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 5만여 명을 베트남에 상시 유지하기 위해, 총 32만여 명이 파병됐다. 파병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 전쟁준비금으로 10억 달러, 개인별 파병수당으로 2억 4천만 달러를 지급했는데, 그 금액의 대부분이 산업화 자금으로 활용됐다. 이와 별도로 미국은 공공차관으로 5억 2천만 달러, 상업차관으로 2억 4천만 달러를 제공했는데, 각각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중화학공업 설비투자에 집중적으로 투입됐다. 미국은 한국에 시장도 활짝 열어주었다. 1964년 3천 5백만 달러이던 한국의 대미 수출은 1972년 7억 6천만 달러로 성장했다. 외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한일 국교정상화도 추진했다. 1964년 타결된 한일회담에 따라 1965년 한일협정이 조인됐다. 일본은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골자였다. 식민통치에 대한 아무런 사과와 보상도 얻지 못한 졸속 정상화였다.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은 한국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은 1960년대에 산업구조를 노동집약적 부문에서 자본기술집약적 부문으로 전환하면서, 퇴출되는 잉여자본을 한국으로 수출했다. 1960년대 내내 섬유, 신발, 가구, 전자 등 일본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한국으로 대규모로 이전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첫 번째 산업군을 형성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일본은 중공업 분야의 일부 잉여자본을 한국으로 이전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수입함으로써 자본축적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은 철저히 국가가 주도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철도, 전력, 수도, 철강, 도로, 해운, 우편,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을 행정기관 또는 국유기업을 통해 국가가 제공했다. 정부가 기능공을 직접 양성하고, 기업에 헐값으로 산업단지를 제공했다. 간접세 중심으로 세제를 개편하고, 국내산업 보호를 위한 수입금지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민간자본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했는데, 특히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끌어들인 외자를 정부 보증 아래 민간자본에게 쏟아 부었다. 1964년 말, 9대 재벌의 총 대출금이 177억 환이었는데. 이는 화폐발행고의 82%, 통화량의 43%에 달했다. 정권의 보호 속에서 민간자본은 빠르게 덩치를 키워 나갔다. 1960년대 수출의 주력 상품은 섬유, 봉제 등의 경공업 부문이었다. 수출 시장에서 한국의 가장 큰 무기는 값싼 노동력이었다. 품질에 비해서 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저곡가를 강요했다. 1969년 한국은 수출목표 7억불을 달성하고, 경제규모에서 세계 30위권에 진입했다. 2) 1970년대 유신체제와 중화학공업화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요동치고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몰려왔다. 1971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유일한 중국 대표’로 유엔에 가입하면서 중화민국(대만)을 축출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했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신생 독립국들이 대거 유엔에 가입하면서 유엔 총회 표결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1972년 2월에는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주석 마오쩌둥과 전격 회담을 가졌다. 이후 20여 년 동안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소련을 고립시켜 나간 전략의 출발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중국의 유엔가입 등을 구실로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비상대권을 부여하면서, 노동자들로부터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을 채택하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합의한 뒤, ‘평화통일’ 추진을 명분으로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서 유신 헌법을 제정했다. 이른바 ‘유신체제’의 시작이었다. 대통령선거가 간선제로 변경됐고, 대통령 연임제한이 사라졌으며, 대통령의 초법적 긴급조치를 통해 최소한의 민주적 권리마저 억압됐다. 민방위대, 학도호국단, 새마을운동 같은 국민 동원 체제가 더욱 강화됐다. 한편, 1971년 8월 미국 대통령 닉슨은 악화되는 경제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달러의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다. 1973년에는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세계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미국은 경공업 제품 수입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한국에게도 차관을 갚으라고 재촉했다. 그동안 외자로 성장해 온 한국 기업들의 휴업, 도산, 은행관리 사태가 속속 발생했다. 경제성장률이 1969년 14.6%에서 1970년 10.0%, 1972년 7.2%로 하락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일련의 경제적 조치들을 취했다. 특히 1972년 8월 3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는 사채동결 조치를 시행했다. 모든 기업은 사채를 정부에 신고해서 3년 거치 후 5년 분할 상환할 수 있게 됐다. 금리인하, 환율안정화, 산업합리화 정책들도 추진했다. 1973년 1월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을 수출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7월에는 포항종합제철을 준공했다. 정권은 중화학공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기업들은 앞 다투어 중화학공업에 뛰어들었다.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 비중은 1967년 33.2%에서 1978년 55.2%로 늘어났다. 1960년대 섬유, 봉제, 신발이던 주요 수출산업이 1970년대 조선,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으로 전환됐다. 1977년 한국 경제는 수출 1백억 달러, 국민소득 1천 달러를 달성했다. 그 과정에서 재벌은 전체 경제보다 더 빨리 성장했으며, 큰 그룹일수록 훨씬 더 빨리 성장했다. 현대, 삼성, 럭키, 대우, 쌍용이 5대 재벌을 이뤘고, 정부의 지원 아래 빠르게 대자본으로 성장했다. 3) 1960~70년대 농촌을 떠나온 노동자 1960년 86만 명이던 노동자수는 1975년 367만 명에 이르렀다. 그 시절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촌을 떠나온 이들로서, 농민의 자식이었다. 1960년대에는 영세한 농민 가족 전체가 고향을 떠난 반면, 1970년대에는 대부분 15~25세의 청년이 홀로 농촌을 떠났다. 1960~70년대 노동자들의 삶은 너무나 참담했다. 엄청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노동시간은 하루 12~16시간이나 됐으며, 하루 24시간 꼴딱 밤을 새워가며 철야노동을 할 때도 많았다. 임금은 굶어 죽는 걸 겨우 면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고도성장 밑에서 높아가는 국민소득은 평균치일 뿐, 그 혜택은 모두 자본가들의 차지였다. 1960년대 노동생산성이 연평균 12%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연평균 2.4%만 상승했다. 노동자는 인간이 아닌 기계로 취급당했다. 1960년대를 거치며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30배로 증가하였고, 1970년대부터는 단연 세계 1위를 기록하면서 세계적인 ‘산재왕국’이 됐다. 자본가들이 돈을 하늘 높이 쌓아갈수록, 노동자들은 피눈물만 늘어나고 있었다. 농촌의 딸, 빈민촌의 아들이 1970년대 노동자의 다수를 이룬다. 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노동자라서, 어릴 때부터 노동자의 생활과 정서를 접해 온 지금의 노동자들과는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다르다. 회사는 가부장적인 권위와 강압적인 노무관리로 어린 노동자들을 맘껏 부려먹고, 농민층에서 대거 유입된 나이 어리고 학력 낮은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는다. 회사에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회사의 규칙이 곧 법이다. 권리를 주장해야 할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이 있는지조차 모르니 사업주가 노동관계 법률을 제대로 지킬 리도 없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기숙사에 넣어 놓고 외출도 통제하고, 현장에서는 인격을 무시하는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구타하는 일도 예사로 일어난다. 임금을 떼이고 거리를 헤매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배우지 못한 것이 죄’라고 자신을 한탄하며 열악한 조건을 감수한다. 하루 14시간 이상을 미싱 대가리에 고개 처박고 일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 노동자라는 동질성이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되는 곳은 회사 밖 술집뿐이다. 사회에서 자본의 힘이 안 뻗치는 곳이 어디 있으랴마는 회사라는 자본가의 울타리에만 들어서면 노동자들은 쉽게 분열한다. 회사가 승진, 호봉, 성과금 등을 미끼로 인사고과 점수를 매기며 노동자들의 분열을 조장할 때, 노동자들은 담당 반장이나 계장의 평가와 자신의 시급이 얼마인지에 더 관심을 쏟는다. 같은 또래나 입사 동기와 비교해서 자기가 더 나으면 은근히 으스대고, 그렇지 못하면 자기의 실력을 몰라준다고 푸념이나 늘어놓으면서, 정작 자신들을 반목하게 하는 자본가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못한다.[1] 1976년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미국과 영국의 5배였고, 일본의 15배였다. 자본가들은 작업장의 안전조치를 위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아마 울산의 현대중공업일 것이다. 조선소가 가동된 초기 3년간(1972~75) 2천 건 이상의 산재사고가 발생했으며, 그로 인하여 83명의 조선노동자가 사망했다. 그뿐만 아니라 열악한 노동조건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해를 끼쳤다. 대부분의 공장노동자들은 기준치를 넘는 소음, 먼지, 열, 가스 때문에 많은 직업병을 앓았다. ‘죽음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원진레이온 공장 중에서는 2차 대전 중에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데 사용했다는 이황화탄소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안전시설은 전혀 없었고, 노동자들은 방독면을 쓰고 매월 정규노동시간 2백 시간 외에도 평균 1백 20시간씩 초과 노동을 해야 했다.[2] 4)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와 재벌 체제의 확립 1970년대 말 제2차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한국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연 평균 10% 내외이던 경제성장률이 1980년 -1.7%로 추락했다. 그런 상황에서 재벌들의 중화학공업 중복투자는 대기업들을 대거 위기로 몰아넣는 역할을 했다.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7 쿠데타를 연쇄적으로 단행하여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재벌들의 중화학공업 중복투자를 강압적으로 조정했다. 자동차(현대·대우), 전자(삼성), 중전기(현대·효성), 철강제련(럭키), 발전설비(공기업) 등 각 산업마다 이를 담당할 재벌을 지정해 주면서 나머지 재벌은 손을 떼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7개 부문, 26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강제 인수합병을 통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각 산업마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재벌의 수익성을 원활하게 보장해 주기 위한 조치였다. 정권은 또한 해외 건설, 해운업, 조선, 합판, 제지,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부실기업을 정리했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게는 부채를 탕감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특혜를 주었다. 국가소유의 은행들을 하나씩 민영화하면서 재벌들도 은행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했다. 이제 재벌은 경공업, 중화학공업, 전자산업과 같은 제조업뿐만 아니라 금융, 건설, 골프장, 호텔 등 모든 분야를 다 가지게 됐다. 재벌은 전두환 정권 시기를 거치며 전체 경제를 지배하는 독점자본으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총매출에서 12대 재벌의 매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2년 14.6%에서 1987년 33.4%로 늘어났다. 소수 재벌들이 한국 경제를 좌우하는 재벌 체제가 확립됐다. 5) 1980년대 최대 계급이 된 노동자 1980년대 재벌이 거대한 독점자본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노동자 수도 엄청나게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 구성에서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확고한 최대 다수 계급으로 올라선 것이다. 1960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민(65.2%)으로 노동자(11.4%)를 압도했다. 그런데 1980년 노동자(37.2%)의 비중이 농민(33.5%)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도시중간계급(25.8%)도 상당한 비중에 이르렀다. 1985년에 이르면, 노동자(41.5%)의 비중이 농민(23.9%)의 거의 두 배에 이를 정도가 됐다. 도시중간계급(32.0%)도 농민을 능가했다. 노동자 수는 1980년 473만 명에서 1985년 637만 명으로 늘었다. 1980년대에도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재벌에게는 천국과 같은 세상이었지만,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착취와 억압에 시달렸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임금인상 억제 정책을 강도 높게 폈다. 1984년 공무원 봉급을 동결하는 등 공공부문부터 임금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여 민간기업까지 확장했다. 1980년대 중반 4인 가족 최저생계비로 월 52만 원이 요구되었지만, 대기업 생산직의 통상임금은 월 21만 원에 그치고 있었다. 노동시간은 길고 임금은 적었다. 자재 결품으로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을 제일 신나는 날로 여길 정도였다. 시간으로 임금을 책정하다 보니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할증률과 더불어 임금이 올라갔다. 일을 적당히 하고 건강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렸다. 할증률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았다. 휴일 없이 잔업과 특근을 하며 기계처럼 일하다가 과로사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회사에서 나눠준, 청바지 원단으로 만든 작업복은 두꺼워 몸에 감겼다. 하루 종일 선풍기 하나 없는 공장에서 일하고 나면 속옷과 온몸에 시퍼런 물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는 양말과 장화에 고인 땀을 짜냈고, 접촉성 피부염을 달고 살았다. 겨울에는 나무를 집어다 불을 때 공장을 데운 후 일을 시작하곤 했다. 용접용 안경은 유리로 만들어져 무겁고,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크기도 맞지 않았다. 컨베이어 속도가 빨라 관절 이상, 디스크, 위장병 등에 시달렸다. 늘 과로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식사는 보잘 것 없었다. 식당에 가면 관리자와 노동자가 서로 구분된 공간에서 밥을 먹었다. 노동자 대다수가 미혼 남성인데, 독신자 기숙사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부분 두세 명이 자취방을 얻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며 생활하거나 하숙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주변 술집에서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달랬다. 공장 주변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조그만 선술집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은 막걸리집에 들러 안주 하나 시켜놓고 술을 마신 후 기숙사로 자취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공장 안은 군대 같았다. 정문을 통과할 때부터 경비가 장발을 단속했고, 회사복 착용자만 통과시켰다. 조반장 위계질서가 확실했고, 어쩌다 불량이라도 내면 정강이를 차고, 쥐어박는 건 일상이었다. ‘안전과’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안전과 수칙을 안 지켜 적발되면 그 기록이 고과에 반영되어 보너스, 시급 차이로 나타났다. 출근할 때 경비반장에게 잡혀도 감점이었다. 불만이 목까지 차 있었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술자리에서도 조심스러웠다. 술 마시고 화풀이하거나 대들면 그대로 짐을 싸야 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불만을 호소할 조직도 없었다.[3] [1] 안승천, 2002,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13~16쪽. [2] 노동사회교육원, 2008, 『금속노동자를 위한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84~85쪽. [3]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서영호 편.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고] 이주노동자 뚜안 사망사건 대책활동 및 투쟁경과와 앞으로의 과제들어가는 글 한 이주노동자가 공권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살해당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이주노동자가 죽었고, 또 그 과정에 국가공권력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해당한 이주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 죽음의 배경이 된 제도와 정책을 폐기하든가, 최소한 전향적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이주노동자 모두의 죽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글이 끝나지 않은 투쟁, 포기할 수 없는 투쟁에 대한 우리 모두의 다짐으로 읽히길 바란다. 1. 뚜안 사망사건의 발생 경과 지난 10월 28일 베트남 출신 청년 노동자가 공장으로 들이닥친 법무부 출입국단속반을 피해 2층 창고 구석 실외기 뒤에 숨어 있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3층에서 추락해서 목숨을 잃었다. 윤석열 정권에서 수립된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23-27)’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재명 정권은 25년 4월에 이 계획에 따라 1차 합동단속(4월15일-6월30일, 77일간)을 실시하였고, 지난 9월 30일 ‘APEC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2차 합동단속’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 보도자료를 본 전국의 이주단체와 민주노총은 여러 경로를 통해 성명서를 내고, 합동단속 계획을 철회하고 이주노동자 노동권보장, 미등록노동자의 체류권 보장을 위한 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10월 17일 공식 출범한 ‘사람이 왔다-이주노동자 차별 철폐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10월 28일 전국의 각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일인시위 혹은 다인시위를 진행하였다. 단속추방이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밖에 없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부상 혹은 사망을 막아보겠다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러나 관계 당국이 이를 비웃기나 하듯, 대구 성서공단의 한 업체에 단속반이 들이닥쳤고 이 단속 과정에서 한 청년 노동자가 결국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청년이 단속을 피해 숨어 있으면서 남긴 SNS 메시지가 가슴을 저민다. -15:26 나는 숨어 있다, 무섭다 ㅜㅜ -16:35 무섭다 -17:20 죽겠다. 어떻게 ㅠㅠ- 그동안 법무부 출입국단속반의 단속으로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또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표1: 단속으로 인해 사망, 중상을 당한 미등록 이주민) 물론 이 표는 어떤 식으로든 드러난, 혹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사고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묻혀 버린 이주노동자의 비극은 이 표를 통해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2. 뚜안 사망사건의 발생원인 ① 윤석열정부의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 2022년 연말 법무부는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단속 할당량에 따른 목표치를 세우고 단속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보도자료를 통해 상/하반기로 나누어 연 2차례 합동단속을 실시하고 2027년까지 약 43만 명이 넘는 미등록노동자(2023년 9월 기준)를 약 20만 명까지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연도 목표 2023 58,400 (단속+자진출국) 2024 70,760 (단속+자진출국) 2025 86,645 (단속+자진출국) (표2) 2022년 법무부가 수립한 단속 목표치 윤석열 정부와 당시 법무부장관이던 한동훈에 의해 세워진 이 잔인한 계획은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12월 ‘법무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 일부 개정령안 입법예고’를 통해 출입국단속반 인원을 증원하고 그 증원된 인원만큼 단속 실적을 올릴 것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이재명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 실적위주의 폭력적 단속은 그대로 계속됐다. ‘그동안 단속 과정에서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죽는 비극이 반복되었으므로 불가피하게 단속을 하더라도 증원된 인원은 이주노동자들의 안전을 담당하는 안전요원으로 배치를 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은 하지 않고, <표2>에서 보이듯이 오히려 더 숫자채우기가 강화되어 왔다. ② APEC의 성공적 개최라는 허황한 명분 앞에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2025년 9월 30일 법무부는 ‘2025년 2차 불법체류 외국인 정부합동단속 실시’라는 보도자료를 발표한다. 9월 29일부터 12월 5일까지 66일간 정부 5개부처(법무부, 경찰청, 해양경찰청, 고용노동부, 국토노동부)가 합동으로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단속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합동단속은 그 명분이 ‘엄정한 체류질서 확립을 통한 ’APEC 2025 KOREA’의 성공적 개최‘였다. 도대체 미등록노동자들이 APEC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어서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APEC의 성공적 개최에 목을 매는 관료들의 전형적 탁상행정이 이 비극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이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이 보도자료 중의 한 문장은 참으로 궁색하다. “…이번 정부합동단속 기간에는 ‘APEC 2025 KOREA’ 성공적인 개최를 지원하기 위해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단속을 실시하는 한편,…” 그래서 바로 다음 날인 10월 1일 민주노총 경주지부, 금속노조 경주지부, 경주이주노동자센터는 ‘이주노동자 정책의 전면적인 전환을 요구하며 우리 지역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침해를 막기 위해 공동 대응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③ 이주노동자에게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복잡다단한 비자 제도 비자 제도는 근대 국민국가가 고착화된 이후 국민/비국민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정규직/비정규직, 정주 노동자/이주노동자, 등록노동자/미등록노동자, 헤아릴 수 없이 우리를 갈라치기하고 이를 통해 울타리 안의 성원을 관리하고 이윤을 착취하는 자본과 정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국민/비국민의 갈라치기를 강요한다. 국민/비국민의 갈라치기가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를 잡아야만 그 모든 갈라치기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비자 종류는 세분하면 260개가 넘고, 취업과 관련한 비자 종류도 대분류만 무려 34가지이다. 이렇게 복잡한 비자는 이주노동자 혹은 이주민의 신분을 규정한다. 어떤 비자를 발급받는가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된다. 비자 제도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주노동자는 자칫 잘못하는 순간 비자를 잃게 되고 미등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주노동자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사업장 변경의 자유’도 결국 사업장을 변경하는 문제와 비자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자별로 업종별 취업이 제한되거나 금지되기도 하고 지역별 이동이 제한되기도 한다. 결국 이주노동자는 부여받은 비자의 종류에 따라 노예의 삶을 살든가 아니면 강제추방되든가의 선택만이 강요될 뿐이다. 유학생이었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던 뚜안님이 발급받은 비자는 D-10 비자인데 이는 구직활동비자라고 불린다. D-10 비자는 제조업종(구체적으로 소위 3D업종으로 불리는 뿌리산업이나 건설업 등) 취업이 원칙적으로 제한된다. 대학을 졸업했으니, 전문인력이므로 단순한 업무를 반복하는 업종에 취직해서는 안 된다는 비현실적 이유다. 이런저런 일자리를 찾다가 결국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성서공단에서 일했던 그는, 취업이 제한된 업종에서 일하다가 단속에 적발되면 이후 체류에 문제가 생기거나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단속을 피해 숨을 수밖에 없었다. ④ 지방대학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유학생 유치계획 최근 유학생이 급증하고 있지만 유학생을 재정확충의 수단으로 여기고 그들의 졸업 이후의 삶이나 유학생활 등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는 지방대학의 현실도 문제이다. 유학생들을 옥죄는 비자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전혀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은 것은 물론, 졸업 이후에 한국에서 이후의 삶을 계획하는 학생들에게 안정적 체류가 가능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할 말은 많지만, 이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간략히 언급만 하고 이하 줄인다. 3. 대책활동 및 투쟁 경과 10월 28일 비극적인 사고 소식을 접하고 대구, 경북지역 시민 사회 노동 이주단체들이 함께 모였다. 더 이상의 비극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마음들이 모여 ‘‘이주노동자 뚜안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강제 단속 중단을 위한 대구/경북 대책위원회(이하 뚜안 사망사건 대책위)’를 결성하였고 바로 대구 출입국외국인사무소 앞에서 24시간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11월 16일에는 금속노조 성서공단 지역지회 조합원들과 많은 베트남 이주민, 유가족이 함께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행진이 대구 성서공단에서 있었고, 11월 20일에는 대구 시내에서 많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이재명정부 강제단속 규탄, 이주노동자 故 뚜안 대구추모제’를 열었다. 철야농성을 전후하여 대구 출입국 관계자들을 두 차례 면담했으나 ‘법적 절차를 지켰고, 뚜안님의 사망은 단속이 종료된 이후에 벌어진 일이므로 책임이 없다’는 무책임인 답변만 되풀이했다. 이에 ‘뚜안 사망사건 대책위’는 투쟁의 수위를 끌어올려 단속추방 일변도의 현 정부 정책의 기조에 변곡점을 만들어 내고, 체류권 보장 정책으로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12월 9일부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하였다. 대통령집무실 앞 노숙 농성이 시작되며 뚜안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단속추방 정책에 분노하는 많은 이들이 노숙 농성에 함께 결합하고 이 투쟁에 동참하였다. 매일 중식 선전전에 각 단체의 활동가들과 연대시민, 이주노조 조합원들이 함께하여 이 투쟁을 알렸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서울 대통령집무실 앞과 대구시내, 부산출입국 앞에서 성탄절을 전후한 예배와 미사 등을 열었다. 정치권에서도 이 사건의 대책마련을 위해 나서기도 했다.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로 옮기고 난 뒤에는 청와대 앞에서 유가족이 함께하는 108배를 시작했다. 유가족이 함께하는 투쟁은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이 투쟁을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지난 10월17일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왔다-이주노동자 차별 철폐 네트워크’는 이 사건을 알리고 전국적인 항의행동을 조직하여 매주 수요일 전국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일인시위를 중심으로 한 항의행동을 이어가도록 하는 한편, 서울 출입국 세종로 출장소 앞에서 매주 추모문화제를 열면서 뚜안의 죽음이 묻히지 않고 단속추방 중단과 미등록 이주민 체류권 보장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투쟁을 이어갔다. 유가족과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11월 30일 오체투지,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을 기념하여 열린 12월 14일 전국이주노동자대회 등을 통해 ‘정부의 사과, 책임자처벌, 진상규명, 단속추방중단, 미등록 이주노동자 체류권 보장’ 등을 요구하였다. 12월 23일에도 ‘불법사람은 없다. 더 이상 죽이지마라. 뚜안님 추모 및 강제 단속 중단 투쟁문화제’가 열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100명 남짓 동지들이 함께 모여 투쟁의 결의를 이어 나갔다. 이날의 투쟁 발언은 다 가슴을 저미는 내용이었지만 류금신동지가 공연을 하면서 ‘지금 내리는 비는 뚜안님과 고통당한 혹은 살해당한 이주노동자들이 흘리는 눈물이다. 함께 비라도 맞자’라고 호소하면서 분위기를 숙연하게 했다. 이날 오전에는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뚜안 사망사건 진상조사 중간 보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10월28일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 등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단속종료 시점과 뚜안님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법무부가 사건을 은폐하려는 다양한 정황 등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 무엇보다 이날 대구의 성서공단에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나와 증언 형식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고발하는 발언을 했다. 그중 한 명, 미등록 신분의 이주노동자가 한 발언은 보고회 참석자 모두를 울게 했다. 그 발언의 일부를 옮긴다. “우리 미등록이지만 버리지 않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뚜안 소식 들으니까 뚜안 아니고, 나도 언제든 이런 일 당할 수 있구나 해서 불안합니다. 어디 나가지도 못합니다. 어디 나가면 뒤를 보게 되고 경찰 등 다른 친구들이 너 동네 경찰 있다고 하면 만약 나가고 싶어도 숨어서 다시 집에 왔습니다. 지금 한국 정부에는 초등학교 들어가면 부모님도 합법화된다는 소식은 있는데, 저도 2년 더 기다려 보자, 애도 합법화되고 부모님도 합법화된다고 생각했는데 뚜안 생각해서 나도 2년 동안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 한국에서 기대 없이 살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대한 미운 마음 가지고 저는 베트남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단순히 미등록인데 범죄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뚜안도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뚜안 꼭 잡아야 한다고 하는 거 들어보니까 뚜안이 위험한 범죄자도 아닌데. 자기 생활 좀 나아지고 그리고 부모님도, 남동생도 도와주려고 자기 비자 때문에 숨겨야 했었지만 범죄자가 아닌데. 한국에 범죄자가 많아요. 그런데 그들은 안 잡고 우리 미등록만 잡습니까. 그건 너무 밉습니다. 밉고, 한국 밉고 그리고 예전에 너무 사랑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미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동지들 우리 미등록자 버리고 관심 끄면 안됩니다. 감사합니다.” 4. 대책활동 및 투쟁의 성과와 한계 마침내 2025년의 마지막 날 법무부 이민조사과장과 대구 출입국 외국인사무소 소장이 뚜안의 유족 앞에 고개를 숙였다. 법무부의 공식적인 사과 방침을 전한 이들은 뚜안님 부모님들의 안정적 체류와 이후 대책활동을 위한 체류비자 발급을 약속했고, 대책위 활동가들에게 단속을 중단할 수는 없지만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을 우선시한 단속활동이 되도록 전면적인 검토를 하겠다고 했다. 또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 일변도의 정책을 점검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겠다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대책위 활동가들은 이주민 정책의 전반적인 문제, 특히 미등록노동자의 단속과 관련하여 대화 테이블을 구성해 보자고 제안했지만, 검토하겠다는 답변만 듣고 그 자리를 일어서야 했다. 이후 남은 숙제이기도 하다. 이번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번 투쟁을 사실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뚜안님의 아버지 부반숭 동지가 당국의 사과를 받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저희 가족은 기관의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과가 저희 가족만을 위한 것으로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 65일 동안 뚜안과 우리 가족을 지켜보며 함께 아파하고 연대해 주신 모든 분들께서도 이 사과를 함께 들을 수 있기를, 그리고 이를 통해 관계기관의 책임과 성찰 그리고 변화의 의지를 사회 전체가 함께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 뿐인 사과가 되지 않도록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1월 2일에는 용산 대통령실 앞 농성단을 해산했고, 1월 9일에는 대구출입국 앞 농성장도 해단했다. 1월 9일 해단식에는 200여 명의 동지들이 함께 모였고 뚜안님 유가족들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이후 과제로 남겨진 투쟁을 함께 이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번 투쟁이 가지고 있는 성과와 한계는 농성단을 해단하면서 발표한 투쟁결의문과 성명서로 대신한다. [투쟁결의문] 불법인 사람은 없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故 뚜안 사망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중단 촉구 농성 해단식 투쟁결의문 농성은 마무리되지만, 투쟁은 계속된다. 지난 10월 28일 베트남 청년노동자 故뚜안님이 대구 성서공단 내 제조업체에서 4시간 가까이 이어진 토끼몰이식 정부 합동단속을 피하다 추락 사망한 이래 대구경북대책위와 사람이왔다_이주노동자차별철폐네트워크를 비롯한 전국의 이주, 노동, 인권, 시민사회 운동 진영은 이 사건이 △윤석열정부의 단속기조를 이은 이재명정부의 합동단속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고 △APEC을 빌미로 미등록을 희생양 삼은 반인권적 행태이자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억압 정책이며 △법무부의 인권보호 준칙조차 지키지 않은 야만적 단속으로 규정하여 강력히 규탄하였고, 故 뚜안님 사망에 대한 정부 사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미등록 강제단속 중단을 요구하며 쉼 없이 싸워 왔다. 스물다섯 해 동안 애지중지 키워 온 딸을 잃은 유가족도 원통한 마음을 안고 투쟁에 앞장섰다. 우리는 사건 직후부터 규탄 성명 발표, 대통령실 앞 이주인권단체 규탄 기자회견, 11월 13일부터 진행 중인 대구출입국 앞 천막농성과 매주 벌어진 전국적인 출입국사무소 항의행동, 네 차례 촛불 추모행진과 문화제, 오체투지 행진, 12월 9일부터 시작된 대통령실 앞 노숙농성, 국회 토론회, 전국이주노동자대회,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전국 동시다발 공동행동, 진상조사 중간 보고회, 종교계 기도회, 청와대 앞 릴레이 108배 등을 통해서 사안을 전 사회적으로 알리고 투쟁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 각계각층에 공감대가 확대되었고 뚜안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는 뚜안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정의를 바라는 이들의 염원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가능했으며 이 사회에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다시금 분명한 의제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부름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출입국은 단속반이 떠나고 난 뒤의 일이므로 개인 과실이라며, 사과와 진상규명을 외면했다. 최소한의 자료 요구에도 법무부는 응하지 않고 국회의원실 등의 요구에만 찔끔찔끔 내놓았을 뿐이다. 이에 대책위와 이주인권, 시민사회는 투쟁을 진행하면서, 대통령실 경청수석실, 국회의원실, 노동부 등을 통해 다각적인 경로로 요구를 제기하였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법무부 측은 유가족과 농성단을 만나 사과를 표명했고, 유가족 체류 보장, 현재와 같은 미등록 이주민 강제단속 정책 일부 변경 및 논의 테이블 구성 검토, 자료제공 검토 등을 밝혔다. 이는 우리 투쟁의 성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요구의 온전한 수용은 아니며 명시적 책임을 인정한 사과는 아니었다. 뚜안 아버님도 사과를 받아들이면서도 “사과는 받았지만, 죽은 딸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단속하고 구금하는 제도와 절차 전반에 대해 반드시 개선이 이루어져, 더 이상 ‘제2의 뚜안’이 발생하지 않기를, 그리고 우리 가족처럼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는 부모가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버님의 말처럼 다시는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강제단속과 추방 중심 정책이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오면서 수십 명의 사망자, 수백 수천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뚜안 아버님 말대로, 정부의 사과가 뚜안 가족만을 위한 것으로 남아서는 안되며 모든 피해 이주노동자와 가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서울 대통령실 앞에서 진행된 故뚜안 사망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촉구 농성투쟁은 일단락하지만 앞으로 더욱 힘을 모으고 연대를 넓히고 사회적 의제화하여 남은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중단의 과제를 현실화하고자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근기법·파견법·산안법·중처법에 대한 고소고발을 통한 노동부 조사, 故뚜안 산재승인을 위한 과정들이 산적해 있고, 윤석열 정권에서 시작한 ‘불법체류 50% 감축 5개년 계획’중단 투쟁,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안정적 체류권 보장을 위한 투쟁 또한 계속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며 투쟁의 결의를 밝히는 바이다. - 이재명 정부는 故뚜안 사망사건 제대로 진상규명 실시하라! - 윤석열정부의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 폐기하라! - 강제단속 중단하고 미등록 이주민 체류권 보장 정책 수립하라! - 노동부는 사업주, 파견사업주 철저하게 조사하고 처벌하라! - 투쟁은 계속된다! 단속 중단과 미등록 이주민 권리보장 연대투쟁 확대하자! 2026년 1월 2일 故 뚜안 사망 진상규명과 강제단속 중단 촉구 농성 해단식 참가자 일동 5. 앞으로의 과제 ① 철저한 진상규명 법무부 당국자가 사과를 하러 온 자리에서 ‘단속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대구출입국 앞에서 열린 금요추모 집회에 참석하여 발언했던 민주노총 부위원장 동지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언급했다.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다치고 죽는 이주노동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번 뚜안님의 죽음이 더욱 그렇다. 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의 진상을 밝혀야만 사람을 죽이는 ‘미필적 고의’인 단속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다. ② 단속추방 중단 최근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있는 미등록노동자를 찾아가는 모임인 ‘마중’의 활동을 그만두고 새로운 오솔길을 모색해 보겠다고 소회를 밝힌 한 활동가가 그렇게 말했다. ‘보호소가 있는 한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단속될 수밖에 없다고....’ 보호소는 단속된 미등록이주노동자를 구금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지만 현실은 보호소가 있기 때문에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단속된다는 이 역설은 역설이긴 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친다.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양산하는 제도의 불법성이 먼저다. 불법적인 제도를 만들어서, 복잡다단한 비자제도를 설계해서 이주노동자를 벼랑으로 내몰고 그 벼랑에서 떨어진 이주노동자를 오히려 불법으로 낙인찍고 보호란 명분으로 보호소에 구금하거나 아예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여 격리시킨다. 불법적인 제도 안에는 그 제도의 불법적 폭력을 감수하는 노예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표1>에서 보여준 이주노동자의 현실이 그렇다. 우선은 이 정부가 윤석열 정부의 ‘불법체류 감축 5개년 계획’을 포기하거나 전면 수정하도록 해야 한다. ③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안정적 체류권 확보 복잡다단한 비자제도를 단순화하게 만드는 투쟁과 아울러 이 비자제도의 희생양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공동체의 정당한 시민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묵인한 비자제도로 인해 불법으로 내몰린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은 우리의 남은 과제이다. ④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자에게 국경은 없다.’라는 외침을 다시 가슴에 담았으면 한다. 이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고 폭력적인 제도와 정책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자고 간절히 호소한다. 35명의 비극(표1)이 반복된 이후에 결국 또 한 명의 이주노동자가 죽었다. 이제 우리가 이 비극을 끝내야 한다. 故 뚜안님의 명복을 빈다. -
[번역] 이란의 혁명: 노동자만이 하메네이와 팔라비에게 맞서 흐름을 바꿀 수 있다번역: 레비 2026년 1월 12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 이란 봉기가 확산하는 가운데 미국이 개입 위협을 고조시키자, 레자 팔라비는 트럼프와 이스라엘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현 운동의 방향을 틀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메네이(Khamenei) 정권과 친제국주의적인 샤(Shah)왕정 복고 시도 모두에 맞서, 오직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대중운동만이 진보적인 길을 열 수 있다. 한 테헤란 주민은 르몽드(Le Monde)에 이렇게 전했다.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엄청난 인파가 모였고, 그들의 용기는 귀감이 될 만했습니다. 저는 밤 8시부터 자정까지 테헤란(Tehran) 도심에서 북부까지 행진했으며 보안군은 최루탄과 펠렛건으로 공격했습니다. 대다수의 구호는 레자 팔라비를 지지하는 문구와 '독재자에게 죽음을'이었습니다." 이 증언은 현 국면의 거대한 규모와 그 안에 내재한 모순을 동시에 보여준다. 역사적인 규모의 민중 운동이 열어낸 기회와, 그 운동이 마주한 심각한 위협 말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레자 팔라비를 지지하는 공세적인 캠페인을 통해 운동의 일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한편, 제국주의에 완전히 종속된 정권을 세우기 위해 이란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개입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치명적인 위협은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바로 하메네이에 대한 반란이 과연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하는 하메네이의 공포 정치 목요일 밤을 지나 금요일로 넘어가면서, 이슬람 공화국의 반동 정권에 맞선 시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수만, 어쩌면 수십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란의 양대 도시인 테헤란과 마슈하드(Mashhad)에서 정권의 민병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소셜 미디어에 공유되는 영상들은 질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시위대는 더 이상 경찰의 돌격에 흩어지지 않고 억압에 직접적으로 맞서고 있다. 여러 영상에서는 시위대가 자신들의 진군을 가로막는 보안군과 경찰 바리케이드를 향해 차량으로 돌진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러한 격화는 이란 쿠르디스탄의 코말라당(Komala in Iranian Kurdistan)을 비롯한 쿠르드계 조직들이 호소한 파업 이후에 나타났다. 이는 쿠르드 지역의 본격적인 저항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마흐사 아미니 피살 이후의 봉기를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일람(Ilam) 주는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테헤란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으며, 상인들, 특히 바자르(Bazaar, 상점가)의 상인들이 시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인권운동가통신(HRANA)에 따르면 12월 28일 이후 31개 주 111개 도시에서 약 350건의 시위가 기록되었다. 학생들 또한 대학 내에서 시위를 조직하며 청년 대중운동과 노동자계급의 도시 봉기를 연결하는 등, 더욱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시위 11일 차인 1월 7일 수요일에는 10개 대학이 동참했으며, 12월 말부터는 총 35개 이상의 대학이 시위에 참여했다. 1월 9일 금요일 연설에서 하메네이는 시위대를 "외세에 복무하는 용병"이라 비난하며 봉기의 정당성을 깎아내리려는 익숙한 수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전술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까지는 바시즈(Basij) 민병대가 시위 진압의 주력이었지만, 이러한 규정은 최고지도자 직속의 '군대 안의 군대'인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소속 공격부대의 투입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IRGC는 2022년 봉기 당시 제한적으로 투입된 이후, 이미 이란 쿠르디스탄 지역에 배치된 상태다. 전국적인 인터넷 차단은 대규모 탄압이 임박했음을 암시한다. 가장 잔혹했던 사건 중 하나는 다친 시위대가 치료받고 있던 일람의 한 병원을 급습한 일이다. 또한 테헤란과 동맹 관계인 이라크의 시아파(Shiite) 민병대가 개입했다는 보고도 잇따른다. 보안군이 실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현재까지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흔들리는 정권 이번 시위의 새로운 물결은 석유 노동자 파업이 두드러졌던 2019년 운동과 2022년 봉기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는 하메네이 정권의 취약성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란은 이스라엘 및 미국과의 대치를 거치며 약화되었다. 지역 내 동맹 간 결속은 큰 타격을 입었고, 경제 제재는 이미 허약한 경제를 초토화했으며, 내부 분열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다. 곧 닥쳐올 후계자 문제는 하메네이의 40년 통치 자체에 대한 광범위한 심판으로 번지고 있다. IRGC가 연이어 패배하면서 정규군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미국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개혁파"는 세력을 얻고 있다. 분석가들은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와 하산 호메이니(Hassan Khomeini) 같은 인물들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꼽는다. 정치 분석가 캄란 보카리(Kamran Bokhari)가 지적했듯이, 정권은 전쟁 이후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회적 통제 완화나 미국과의 외교 재개 같은 '통제된 개혁'을 모색하는 한편, 제국주의 자본에 대한 부분적인 개방을 추진해 왔다. 이러한 경향은 봉기가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Mohammad Javad Zarif)가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란 민간 부문 발전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핵 합의, 안보 협정, 경제 협력을 제안했다. 현상 유지든 개혁이든, 지배층 내부의 역학 관계는 대중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무력에 의존하는 통치, 즉 보나파르티즘적 귀결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제국주의 개입의 위협 외부의 압박은 빠르게 거세지고 있다. 베네수엘라를 공격하고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납치한 지 불과 며칠 만에, 미 제국주의는 이란에 대한 개입을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란이 시위대를 탄압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정권의 수뇌부를 제거한 뒤 "개혁파"와 협상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는 이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스라엘 지도부 역시 베네수엘라를 경고의 사례로 명시하며 비슷한 위협을 가했다. 이스라엘은 이미 공격 계획을 승인하고 군에 최고 경계 태세를 발령했다. 이와 동시에 제국주의는 레자 팔라비를 다시 무대 위로 소환했다. 네타냐후와 트럼프의 오랜 동맹이자 서방 및 이스라엘 언론이 적극적으로 띄우고 있는 샤의 후계자는, 이란 내 지지 기반이 과장되었음에도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복귀는 엄청난 위험을 내포한다.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를 받는 팔라비는, 1979년 성직자 계급이 혁명을 가로채기 전 노동자 평의회가 타도했던 바로 그 독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복귀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완전한 종속, 이란 자원의 약탈, 그리고 노동자 착취의 심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가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하든, 팔라비가 제공하는 것은 이란 민중들이 이미 겪어 본 낡은 독재의 잔재에 불과하다. 제국주의로부터 독립된 노동자계급의 중심 역할 이번 봉기에는 리알화 붕괴로 급진화된 상인과 바자르 소유주, 그리고 마흐사 아미니 봉기를 겪으며 성장한 청년 세대 등 새로운 계층이 합류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힘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에게 있다. 오늘날 노동계의 참여는 아직 고르지 않지만, 사우스 파르스(South Pars) 가스 시설의 파업, 자그로스(Zagros)와 로레스탄(Lorestan) 지역 정비 노동자들의 투쟁, 교사, 트럭 운전사 및 석유 노동자들의 연대 성명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만약 이란 노동자계급이 하메네이와 제국주의 모두에 맞서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나선다면, 팔라비에 의한 봉기 가로채기를 막고 리비아식 참사를 피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정치 총파업은 이제 오직 폭력적인 탄압으로만 연명하는 정권을 무너뜨리고, 계급의 힘에 뿌리내린 진보적 결실의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승리는 중동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켜 계급투쟁을 재점화하고 팔레스타인 투쟁을 강화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위험은 실로 막대하지만, 가능성 또한 그에 못지않게 크다. 단, 그 가능성은 하메네이에 맞선 투쟁이 제국주의로부터, 그리고 1979년의 패배를 지우고 꼭두각시 왕정을 복원하려는 자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전개될 때만 현실이 될 수 있다. -
[기고] 캠퍼스는 탈정치의 꿈을 꾸는가2025년 3월 11일 <윤석열 퇴진을 위한 충북대학교 학생공동행동> 결의대회에 난입한 극우세력 사진: 뉴시스 지금의 캠퍼스는 확실히 병들었다. 발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점점 낮아지는 학생회와 자치기구 선거 투표율, 소극적이 되어가는 학생회 활동, ‘외부인’과 ‘학생’을 구별하며 고립을 자처하고(실제로 완전한 구별이 가능한지도 의문스럽다), 포스터와 대자보를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을 철거하며 흘러간 긴 시간 동안, “탈정치”라는 병이 캠퍼스를 좀먹어 왔다.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주제를 언급하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입막음 당하는 것이 최근 캠퍼스의 유행이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적 세력과 무관하다”는 문구가 없으면 인쇄하거나 게시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참여한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폭력적인 대응을 주도한 학생이 차기 총학생회장으로 당선하기도 했다. 캠퍼스는 완전히 탈정치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 다양한 캠퍼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흐름을 기반으로 말하자면, 전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공간과 마찬가지로, 캠퍼스는 좌도 우도 아닐 수는 없다는 사실, 정치적 진공상태일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캠퍼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입장, 캠퍼스는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은 캠퍼스 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바로 학내에서 점잖게는 ‘좌파’, 혹은 경멸 섞인 호칭으로 ‘빨갱이’라고 불리는 진보적 학생 진영을 억압하는 도구다. 학생자치기구 탄압, 백래시의 끝과 시작 ‘탈정치’의 이름으로 휘둘러진 탄압은 제일 먼저 학생자치기구로 향했다. 정치적인 색을 띠는 학생자치기구들을 폐지하거나 통폐합하는 등의 논의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고려대학교에서는 여학생위원회와 소수자인권위원회가 통폐합되었고, 성균관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도 중앙 동아리 재등록이 부결되어 정식 학내 단체에서 제외되었다. 경희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는 이준석 강연 초청 비판 대자보를 게시했다는 이유로 폐지 논의를 거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포항공과대학교 총여학생회가 국내 마지막 총여학생회로서 자취를 감추었다. 기존 기구가 총여학생회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 폐지의 근거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생활자치도서관은 12.3 비상계엄 관련 성명문에서 윤석열을 ‘내란 수괴’라고 표현했다는 이유로 특별기구로서 재인준을 받지 못해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지지 금지, 정치적 사안 언급에 대한 암묵적 금지가 탈정치화 중인 캠퍼스의 주된 경향이라면, 특정 정치인 초청 강연은 허용되고, 이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특정 대통령 후보들에게만 강연 요청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비상계엄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하는 것은 왜 정치적이고, 탄핵에 반대하는 것은 왜 정치적이지 않은가? 성균관대 여성주의 교지를 중앙 동아리로 재등록할 수 없게 저지하는 이유가 ‘정치적이기 때문’이고, 전체 회원이 36명이나 되며 매년 교지를 발간하고 세미나를 개최하는 단체의 활동과 활동 인원이 부족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캠퍼스 내 소수자, 여성, 장애인 등의 복지에 힘쓰는 것이 왜 정치적이며, 그들의 복지를 가로막고 캠퍼스에서 고립되도록 두는 것은 왜 정치적이지 않은가? 허용되는 정치가 있고, 허용되지 않는 정치가 있다면, 이는 ‘탈정치’라고 할 수 없다. 현 상황은 명백하게, 그렇지 않아도 보수주의로 물든 캠퍼스에 더해진 극우화의 물살이다. 이러한 백래시의 흐름은 학생자치기구 탄압으로 시작된 듯하지만, 동시에 아주 오래 전부터 쌓여온 치우친 탈정치 담론의 결과이기도 하다. 대학은 수십 년 동안 시장화되어 왔다. 학생들은 대학과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고객처럼 다루어졌다. 학습의 공간이자 정치적 주체 형성의 공간이어야 할 대학에 대한 자본의 직·간접적 지배가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강의와 학습, 취업과 관련된 범위 외의 모든 활동이 ‘불안 요소’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탈정치 담론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자본, 대학 당국을 비판하는 정치로부터는 ‘탈(脫)’해야 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이 지금의 탈정치 담론이다. 비상계엄 전까지는 이러한 탈정치 담론이 아주 견고한 것처럼보였다. 그러나 12.3 계엄과 탄핵은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극우세력은 계엄에 저항했던 광장의 청년 세대가 지닌 정치적 잠재력을 실감했고, 따라서 캠퍼스를 최우선으로 선점해야 할 공간으로 판단했다. 우파 정치인 강연 초청, 진보적 교지 폐간, 인권기구 폐지 공세 등은 각각 분리된 우발적 사건들이 아니라 일종의 ‘제2의 백래시 물결’ (2018년을 전후로 전국 여러 대학에서 총여학생회가 ‘남성혐오적’ 및 ‘편향적’이라는 이유로 존폐 위기를 맞거나 실제로 폐지되었던 것이 제1의 백래시다) 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공격이었다. 이들은 탈정치 담론을 한 번 더 이용하여, 특정 정치인의 강연은 ‘학술 활동’으로 인정하고, 그를 비판하는 대자보는 ‘정치적 행위’로 규정하여 금지하는 등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 탈정치 프레임은 캠퍼스를 보수화시키는 가장 편리한 명분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캠퍼스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흔들리는 공간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자치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축소되었고, 대표성과 투명성, 책임성이라는 민주적 절차들도 무력화되었다. 정치적 논쟁을 피하려는 태도는 결국 인권, 성평등, 복지와 같은 의제까지 ‘민감한 정치적 주제’로 분류하여 언급할 수조차 없게 했다. 충북대학교 차기 총학생회 PRO(프로)의 당선자의 경우, 캠퍼스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표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선거 과정 전후로 규정상 금지된 선거운동을 하는 등 투명성 또한 상실된 상태였다. 특정 정치성향 학생들을 ‘빨갱이’ 등 모욕적 언사로 공격한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캠퍼스 내 집회를 방해하고자 폭력과 방화를 저지른 극우 유튜버들과의 연관성도 제기되었다. 당선자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하지만, 극우세력이 캠퍼스에서 자행한 노골적 폭력에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은채 침묵한 것은 밝혀진 정황상 결코 우연이 아니며, 당시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조차 저버린 행위다. 토론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드러난 실무적 능력 부실 또한 책임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해당 선본은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다. 극우세력의 폭력적인 집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인권, 성평등 등 진보적 의제는 외면하는 선본의 태도는 정치적으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중립적, 내지는 탈정치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허용되는 말과 행위, 금지되는 말과 행위를 구분하는 기준은 언제나 특정한 정치적 진영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이 기준을 형성하고 통제하는 이들은 국가 및 자본과 깊숙이 결탁한 학교 당국과 우파세력이다. 이처럼 탈정치 담론의 실상은 정치적·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진보적 세력을 제거하는 우파의 무기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캠퍼스 내 진보진영은 이렇듯 극우진영은 캠퍼스 내에서 소리 없이 세력을 확장해 왔다. 특히 박근혜 퇴진 정국에 비해 한층 심화한 탈정치 담론은 극우의 성장과 불가분하다. 박근혜 퇴진 정국, 특히 ‘정유라 사태’까지만 해도 캠퍼스 내 주된 담론은 ‘공정성’에 관한 것이었다. 정유라 사태가 캠퍼스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자가 경쟁에서 승리하고, 그에 걸맞는 사회적·경제적 보상―예컨대 대기업 정규직 등―이 주어진다는 환상이 순리인 양 여겨진 시기였다. 그러나 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윤석열 정권까지, 이러한 능력주의와 경쟁주의의 환상은 점차 힘을 잃었다.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여겨지거나, 이미 쟁취했다고 여겨진 이들 다수도 심화하는 경쟁과 노동유연화를 피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일부 학생들은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품고, 경쟁구조를 철폐하자고 나섰다. 경쟁구조 편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소수자·약자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와서 싸우게 되었다. 극우진영은 이들을 ‘탈정치’ 담론으로 찍어 누른다. 소수자, 약자, 차별, 체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과도하게 ‘정치적’이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낙인찍는다. ‘정치’라는 단어는 이렇게 오염되어 왔다. 이들에게 이미 존재하는 구조, 체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것은 정치적이지 않고,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정치적이다. ‘정치적 갈등’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능력을 길러야 할 대학생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본질은 점점 붕괴하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의문과 도전을 봉쇄하는 억압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탈정치 담론은 ‘위’를 공격하지 않게 하고, ‘아래’는 외면하는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점차 캠퍼스의 학생들은 자신을 경쟁하게 하는 체제, 이를 부추기는 국가와 자본을 내면화하고, 차별 등의 문제로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아예 경쟁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소수자, 약자의 싸움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해진 우파적 흐름은 진보진영을 아직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했다. 계엄 이후 청년들, 그리고 캠퍼스의 학생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저항력과 결집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몇몇 대학에서는 다시 학생자치를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폐지 공세에서 살아남은 학생자치기구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 각자만의 능력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학생들의 지지와 동참을 기반으로 부활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경유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크고 작은 모임과 스터디가 캠퍼스 곳곳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학생자치기구가 폐지되고, 중앙 동아리가 재등록을 거부당하고, 개개인의 정치적 목소리가 억압당해도, 이를 비판하는 학생들의 성명과 연대 활동 또한 이어지고 있는 것 역시 중요한 변화이다. 이러한 흐름은 비록 미약해 보일지언정 탈정치 담론이 완성될 수 없다는 증거이자, 캠퍼스 내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능성이다.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학생회장은 개인 명의 대자보에서 문과대학 인권복지위원회를 신설한 이유로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의 ‘과도한 정치적 행위’를 언급했다. 해당 대자보는 학생자치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학생회는 단순한 ‘복지기구’로 전락했고, 이는 학생들의 학생사회에 대한 참여가 저조하며 각자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복지기구도, 정치적 활동도 학생자치의 적절한 길이 아니라면 그 중도의 길은 어디 있는가? 캠퍼스 내 모든 학생의 동의를 얻는 정치적 활동은 없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정치적 활동이 허용되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캠퍼스를 만드는 것이 학내 구성원들의 진정한 ‘참여’를 가능케 하는 길이다. 정치적 활동이 가능한 대학을 향한 싸움이 학내 구성원들의 학생사회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확대할 수 있다. 탈정치 담론에, 자본주의 체제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아가 탈정치 담론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목소리 높이고 싸워야 한다. 동아리, 학회, 학생회, 노학연대 활동, 캠퍼스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서자. 어떤 정치적 행동이든 시도해보아야 한다.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정치적’ 행위를 더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캠퍼스에, 가까운 캠퍼스에 스피커와 확성기를 대자. 방식과 규모는 당장에는 중요하지 않다. [참조] - 대학가에 불어닥친 ‘급진화된 보수주의’ (시사IN, 김다은 기자) - 극우 집회서 마이크 잡고 윤어게인‥몇 달 뒤 충북대 학생회장? (MBC, 김은초 기자) - 충북대 총학 선거 후폭풍, 학생총회 소집 운동으로 확산 (충청리뷰, 최산 기자) -
[후기] 세종호텔, 고진수동지 고공농성 해제 후 로비 농성 돌입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동지가 고공농성 336일만에 땅으로 내려왔다. 고공해제 이후 세종호텔 오세인 대표와 7차 교섭에 들어갔지만, 세종호텔 측은 복직과 관련한 어떠한 안도 갖고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1월 29일로 예정된 8차 교섭장소로 세종호텔은 안된다는 말까지 했다. 이에 50여명의 동지들이 함께 세종호텔 로비에 앉아 세종호텔의 실소유주 주명건이 교섭에 나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은 코로나 시기 경영 상 어려움을 명목상의 이유로 해고됐습니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하며, 실제 이유는 노조파괴이다. 세종호텔 노조는 오랫동안 어용노조에 맞서 싸우며, 호텔의 비정규직화에 맞서 싸워왔다. 단지 정규직 노동자만의 권리가 아니라, 청소노동자 등 외주하청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앞장서 싸웠다. 세종호텔 노조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싸우는 게급적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세종호텔 실소유자 주명건은 세종호텔 노동조합을 반드시 파괴하고 싶어했다. 해고된지 4년이 넘었고, 호텔은 그 어느때보다 호황이다. 더 이상 코로나로 인한 경영상 위기라는 핑계는 일말의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호텔은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세종호텔 노조 고진수 동지는 윤석열의 내란 쿠데타에 맞선 투쟁이 한창 벌어지던 지난해 2월 13일, 교통통제판 위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고진수 동지를 비롯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은 정당한 자신들의 요구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계급적 연대를 위해, 모든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맞선 요구에 연대하며 투쟁해왔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린 날 고진수 동지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모든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했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맞서 ‘Free Palestine’을 함께 외쳤다.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죽음 앞에, 고진수 동지는 죽음을 막지 못해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세종호텔 노동자들이 늘 세종호텔 복직과 함께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제 철폐를 요구해왔다. 언제나 계급적 연대를 위한 자신의 역할을 고민했다. 이제 우리가 336일 동안 고공농성을 이어온 고진수 동지의 염원을 이어받아 싸우자. 이제 우리가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계급적 연대를 통해, 반드시 복직을 쟁취하자. 그리고 고진수 동지와 함께,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복직을 쟁취하고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제 철폐 투쟁으로 나아가자. 착취와 차별, 억압이 없는 세상을 향해 함께 싸워가자! ※세종호텔 투쟁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영문 영상을 게재하였다.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marchtosocialism)님의 공유 게시물 -
[번역] 미국 제국주의는 베네수엘라에서 물러나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미 대륙 총파업과 국제적 대중운동을 위해!트럼프의 신식민주의적 도발에 맞서, 미주대륙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 국제조직인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은 노동조합과 사회·정치 운동이 미주 전역 노동자계급 총파업에 나서자고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노동자민중의 자기조직화와 미주대륙 총파업을 통해, 권위주의 베네수엘라 정부와 독립적으로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자는 CPR-FI의 성명을 지지하며, 해당 성명을 번역해 소개한다. 작성자: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 2026년 1월 10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 미국 군대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라틴아메리카를 겨냥한 제국주의 공세의 도약이다. 이는 단순히 한 국가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워싱턴의 명령에 도전하는 모든 민족에게 보내는 잔혹한 경고이다. 이러한 신식민주의의 확대에 맞서 외교적 규탄과 추상적인 평화의 호소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중적, 국제주의적, 계급적 기반의 대응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과 일간좌파 국제 네트워크는 노동조합 연맹과 사회·정치 운동 단체들, 특히 이번 공격을 규탄한 단체들을 중심으로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노동자 계급 파업을 촉구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저지하고, 미국 제국주의를 베네수엘라에서 추방하며,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대중 투쟁을 열 수 있는 국제적 대중운동의 핵심이 될 것이다. 1월 3일 새벽부터 세계는 미주대륙에서 미군의 베네수엘라 공격이라는 범죄적 침략을 목격하고 있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신식민주의 공세의 재앙적 전환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실리아 플로레스를 납치하고 베네수엘라 영토를 폭격하여 최소 80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전쟁 행위이자 주권 침해는 베네수엘라의 전략적 부를 장악하고 전 지역 및 그 너머에 위협적 메시지를 보내면서, 추출주의적 약탈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무력으로 강요하려는 것이다. 연속혁명경향-제4인터내셔널(CPR-FI)은 이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 가장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를 높인다. 비록 우리는 베네수엘라 정부에 반대하는 좌익이며 반제국주의 세력이지만, 미국 제국주의 국가와 그 사법 체계가 그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기에 마두로와 플로레스의 석방을 요구한다.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군사적 진영에 분명히 서며, 이를 물리치기 위해 국제 노동계급과 세계 민중의 대중적 결집을 촉구한다. 이는 현재 델시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마두로 정부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부여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것이다. 이 정부는 노동자와 민중 운동을 탄압하면서 경제 위기와 제재의 부담을 노동자 계급에게 전가한 극도로 반노동적인 부르주아 정권이다. 이 정부는 자본과 제국주의에 대한 협정, 양보, 항복을 통해 국가 자원을 넘겨주었고, 이로써 이번 개입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정부는 선거 사기와 권위주의적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이 지역 전체에서 좌파 정치를 불신하게 만드는 우익의 가장 효과적인 선전 도구가 되었으며, 오늘날 대중적 반제국주의 결집 가능성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유산을 남겼다. 우리는 베네수엘라에서 제국주의를 패배시키는 것이 세계의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중대한 이익임을 주장하지만, 반제국주의를 명분으로 정권을 방어하는 것은 민중을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시키고 민중 저항을 국가 탄압과 혼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경고한다. 공격의 본질: 가면을 벗은 제국주의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가한 군사 작전은 이 지역의 최근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표면적 명분인 이른바 “마약 밀매와의 전쟁”과 “마약 테러리즘”은 무력 개입, 점령,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재활용된 낡은 제국주의 변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제 그 어떤 수사적 가면도 벗어던지고, 베네수엘라를 미국이 관리해야 할 영토로 간주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먼로 독트린의 최악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각이다. 이와 함께 베네수엘라에 대한 식민지적 폭격으로 대담해진 트럼프는 콜롬비아, 멕시코, 심지어 그린란드까지 위협하며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이 지역들이 미국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또한 쿠바가 “곧 무너질 것”이라며 쿠바의 경제 위기를 베네수엘라 석유 의존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발언들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공격과 함께 제국주의적 압박과 개입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어떤 공격에 직면하더라도 우리의 입장은 분명하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맞서 쿠바를 방어한다. 쿠바에서 손 떼라! 제국주의 봉쇄와 금수 조치를 중단하라! 미국은 관타나모에서 철수하라! 미국은 마약 밀매와의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약 밀매에 있어 미국은 세계 최대규모의 시장이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공격은 정치적 통제를 강요하고, 지역적 규율을 강제하며, 공유자원을 약탈하기 위한 특권적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러시아, 중국 등 다른 강대국들을 밀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미국과 중국이 라틴아메리카를 두고 벌이는 경쟁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 광물, 희토류 매장량과 지정학적 위치는 이 나라를 핵심 표적으로 만든다. 이 나라를 거대한 석유 식민지로 만들려는 것이 바로 진정한 '전환'이다. 따라서 베네수엘라 침공을 저지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은 모두의, 특히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에 사는 이들의 시급한 과제다. 한편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제법”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도, 트럼프의 공격을 거의 직접적으로 지지했다. 트럼프의 그린란드 관련 위협은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서 국제적 역할이 쇠퇴하고 있는 EU에 경보를 울렸다. EU 역시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의 석유 및 자원 약탈의 몫을 차지하려 하며, 레프솔, BBVA, 토탈 에너지 등 그들의 다국적 기업을 위해 EU-메르코수르 협정을 추진 중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유럽 제국주의와 그 다국적 기업들에 맞서 싸우며, 수십 년간 라틴아메리카에서 약탈당한 기업과 자원의 무상 반환을 요구하는 이유다. 군사 공격 이후 베네수엘라 정부의 정치적 파산 이처럼 예외적인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베네수엘라 정부의 대응은 그 정치적·전략적 파산을 여실히 드러냈다. 니콜라스 마두로의 납치와 델시 로드리게스의 새 집권층으로의 등극은 외세의 공격과 제국주의적 강요의 심각성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 정권을 극도의 취약 상태에 놓이게 했다. 혁명적 관점에서, 필수적으로 마두로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제국주의의 힘에 맞닥뜨렸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정치적·전략적 한계가 이끈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 마두로, 정부 지도부, 군 고위 지휘부는 어떤 한계도 없이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적 앞에서 대중을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시킨 채 국가를 극도의 취약 상태로 몰아넣은 책임이 있다. 초기 차비즘은 미국 제국주의와의 공개적인 마찰을 특징으로 하는 반제국주의적 수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차비즘 정권은 국가의 종속적 자본주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타파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다. 국제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남은 것은 급진주의의 허울뿐이었으며, 그 이면에서는 외국 자본(부채 상환 및 신규 차입, 국내에서 창출된 모든 이익의 해외반출 허가, 석유 거대 기업에 대한 거의 완전한 세금 면제, 광물 자원 제공)과 국내 유산 계급(전통적 부유층과 차베스주의와 함께 등장한 신흥 부르주아지 모두)의 이익이 충족되었다. 베네수엘라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도 자원이 부족해진 상태가 되었고, 노동권 해체, 볼리바르 화폐 가치 붕괴, 임금 및 연금 삭감, 가격 완전 자유화, 달러화 정책, 노동운동 및 민중불만에 대한 탄압으로 노동자계급과 빈곤층에게 그 부담을 전가했다. 노동자계급이 경제위기와, 이후 제국주의 제재의 주된 타격을 감당하는 동안, 새롭게 부유해진 고위 민간·군사 관료들로 구성된 통치 계급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점점 더 대중적 지지를 상실해갔다. 친제국주의 야당의 포위 공격에 직면한 정부는 군대와 경찰, 준군사 조직의 행동을 통치의 축으로 삼아 억압적 국가 기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방향성은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했으며, 대중적 기반을 물질적·정치적으로 훼손했다. 노동운동을 자본주의 통치 전략에 종속시키고, 점차 민간 자본과 탄압에 의존함으로써 정부는 결국 미국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적 욕망 앞에서 민중의 무장 해제를 자초했다. 그 결과 대중의 의식적·조직적 지지의 부재 아래 직접적 공세에 저항할 수 없는 국가 기구만 남았다. 이러한 방향성은 노동자 계급이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할 실질적 역량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정부는 제국주의와의 강제 협상보다 결집하는 대중을 더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공격을 받더라도 아래로부터의 조직적 대중 저항을 촉구하기보다 협상적 해결책 모색, 외교적 중재 호소, 합의 탐색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공식적 대응은 형식적 성명, 제도적 차원의 규탄, 반복되는 추상적 ‘평화’ 호소로 축소되었으며, 델시 로드리게스가 서한을 통해 “트럼프 정부에 협력 의제 마련을 위한 공동 작업 초대”를 제안할 정도로 협상 채널 재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마두로주의자(Madurista) 기구는 제국주의에 저항할 어떤 의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권력을 쥔 차베스주의의 권위주의적 퇴보가 초래한 논리적 결과다. 차베스주의는 우고 차베스 정부 시절 누렸던 선거적 정당성을 점차 내버리고, 대신 지난 대선 때와 같이 사기에 의존해 왔다. 이러한 궤도의 또 다른 결과는 수백만 베네수엘라인의 대량 이주로 드러났다. 수년간 종속적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하며, 민중 조직을 포섭·무력화하고, 독립적인 좌파를 탄압하며, 러시아·중국·유럽 자본(셰브론 같은 미국 다국적 기업을 포함)과의 동맹을 심화시킨 끝에, 정부는 일관된 저항을 제공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 정부는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 대중 저항을 촉발하기보다는 항복하는 것을 선호한다. 군대는 다른 부르주아 기관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국가 방위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 자신들의 사업과 생존에 더 관심이 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내세워온 '군복을 입은 민중'이 아니라 억압의 도구일 뿐이다. 제국주의에 복무하는 부르주아지: 자신들의 학살자를 찬양하다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 같은 인물들은 미국 제국주의에 완전히 복종하며, 외국 세력의 직접적인 대리인으로서 자국민을 학살한다.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지의 침략에 대한 반응은 하인 같은 비열함 그 자체였다. 바로 이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지의 광범위한 계층과 노골적으로 친제국주의적인 정부들의 반응은 이 사태에서 가장 역겨운 측면 중 하나였다. 대통령들, 외무장관들, 언론들은 침략을 축하하거나 개입을 정당화하거나 공모적인 침묵을 유지했다. 이러한 노골적인 비굴함은 역사적 진실을 확인시켜 준다: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지는 그 이익이 구조적으로 제국주의 자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주권을 일관되게 수호할 능력이 없다. 20세기 전반에는 멕시코의 카르데나스(Cárdenas), 브라질의 바르가스(Vargas), 아르헨티나의 페론(Perón)(초기 대통령 재임 시절)과 같은 부르주아 정부가 제국주의적 야욕에 부분적으로 맞서기도 했지만,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지는 1960~70년대 노동운동의 부상에 점차 겁을 먹고, 세계경제의 변화(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대외 부채 부담, 민영화 등)에 직면하면서 자국민을 약탈하는 제국주의의 동반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심화시켰다. 아르헨티나의 밀레이를 비롯한 지역 내 우파 정부들은 군사 공격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제국주의 자본의 하위 파트너인 이들 토착 부르주아지는 워싱턴에 대한 복종을 자국 노동계급을 깨부수고 국가 자원을 더욱 잔혹하게 착취할 수 있는 보증으로 본다. 그들의 역할은 약탈을 위한 지역 경찰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트럼프에게 복종하는 조건을 협상해 온 룰라(Lula)나 셰인바움(Scheinbaum) 같은 지역 내 ‘진보적’ 정부들의 무기력함을 규탄한다. 이들은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하고 지역 여러 국가들을 위협하는 동안 미지근한 성명만 내놓고 있다. 룰라의 경우 군사 개입 비판에서조차 트럼프와 미국을 언급하지 않으며, 미국의 카리브해 봉쇄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워싱턴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진보적’ 정부들의 정책은 단계적 항복에 불과하며, 이는 결국 미국이 지역에서 새로운 공세를 강화하는 데만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세는 조만간 그들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룰라와 같은, 트럼프에 대한 화해적 정책은, 역사적으로 실패할 운명이다. 행동하는 국제주의: 세계의 거리에서,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연대 이러한 제국주의 군사 침략에 맞서 전 세계 노동자 계급, 청년, 운동 진영에서 비록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국제적 대응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미국, 유럽 및 여타 지역에서 제국주의 공격을 규탄하는 집회, 시위, 성명,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마두로 정권의 노골적인 반동적 성격은, 수십 년 만에 이 지역을 겨냥한 미국의 첫 번째 폭력적 공격에 맞선 대규모 대중운동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어왔다. 그렇기에 세계를 움직여왔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행진, 학생 점거, (가자로 향하는)함대, 이탈리아의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가장 선진적 요소들에 의지하여, 계급 독립성을 바탕으로 국제주의 관점의 일관된 반제국주의 대중운동를 재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공격에 맞서, 일간좌파 국제 네트워크와 CPR-FI는 거리에서의 전투적 행동을 촉구하며 대응해왔다. 미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까지, 멕시코에서 프랑스까지, 브라질에서 독일까지, 우리는 제국주의 침략을 규탄하기 위한 대중운동, 피켓팅, 집회를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우리는 공동행동, 조정(coordination), 대중운동 호소를 촉진하며, 수사적이지 않으며 전투적인 국제주의를 재확인했다. 이 아래로부터의 연대는 제국주의 공세에 맞서는 근본적인 지지점이다. 미국에서는 좌파의 목소리를 통해, 괴물의 심장부에서 우리는 적이 내부에 있음을 고발하며 요구한다: 베네수엘라 침략을 위한 단 한 푼의 달러나 총알도 허용하지 말라!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손 떼라! 미국 제국주의를 타도하라! 트럼프가 미국 제국주의의 쇠퇴를 다루기 위해 투사하려는 강경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트럼프 정부의 다중적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그는 2025년 말 선거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지지율도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MAGA 운동으로 표현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사회적 기반조차도 내외 정책을 둘러싸고 점점 더 격렬해지는 분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수백만 명이 “왕은 없다”는 구호로 미국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ICE(이민세관단속국)의 급습은 로스앤젤레스의 봉기, 시카고의 저항, 그리고 최근 ICE 요원에 의해 살해된 이민자 권리 운동가 르네 니콜 굿에 대한 미니애폴리스 시위에서 드러났듯 점점 더 큰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우리 모두는 미국 내외를 막론하고 적진에서 일어나는 이 동요를 인식해야 한다. 전 아메리카 대륙을 아우르는 대중운동만이 제국주의의 재식민화 시도를 저지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수억 명의 억압받는 민중들의 힘 앞에서, 거대한 미군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회운동, 페미니스트 운동, 환경운동, 학생 단체, 원주민 운동을 포함한 거대한 양대륙의(bicontinental) 운동이 트럼프와 우익 세력을 패배시켜야 한다. 미주 전역의 대규모 노조들은 트럼프와 제국주의에 맞서 일어나야 하며, 미국 내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손 떼라'는 ‘노킹스(No Kings)’ 시위를 통해 결집한 수백만 명, ICE에 저항하는 수백만 이민자,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반란을 일으킨 거대한 반인종주의 운동, 대학·학교·직장에서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맞서 일어난 청년들과 함께해야 한다. 저항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어, 제국주의의 진격을 막을 수 있도록 우리는 단결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몰아내자! 이것이 우리의 국제주의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성명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와 그 모든 대리자들을 물리칠 유일한 방법으로서,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대응을 촉진하며, 대중과 함께 싸우러 나간다. 제국주의에 맞선 우리의 투쟁은 마두로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국주의의 공격은 실상 전 세계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인민에 대한 공격이며, 워싱턴의 지시에 반대하는 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새로운 침략의 서막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틀 안에서, 엘리트들 간의 협정, 궁정 외교를 통한 해결책은 없다. 오직 독립적으로 조직된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민중들의 국제적 연대만이 이 진격을 저지하고 진정한 해방적 전망을 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 조직, 노동조합, 청년 조직, 페미니스트 조직, 풀뿌리 활동가들에게 소위 “진보적” 부르주아 정부나 군부 계층에 대한 어떤 환상도 없이, 각국에서 투쟁의 조직화와 행동을 촉진할 것을 촉구한다. 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세계의 억압받는 이들의 의식적이고 독립적인 결집 속에 있다. CPR-FI는 명확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우리는 베네수엘라의 군사적 편에 서서 미국에 대항하지만, 베네수엘라 국가를 운영하는 부르주아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억압적인 정부에 어떠한 정치적 지지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권을 지지함으로써 반제국주의 대의에 대한 서반구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이들의 지지와 결집을 이뤄낼 수 없다. 우리의 과업은 자본주의 질서 내의 계급 화해 프로젝트나 대안적 해결책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독립성을 촉진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침략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교훈을 재확인한다: 종속적 자본주의 내에서는 지속적인 민족 해방이 불가능하다. 진정한 주권은 오직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토대 위에서 사회를 재조직함으로써만 쟁취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이 전망은 제국주의, 지역 부르주아지 및 그 정부들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서 전 라틴아메리카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건설을 위한 투쟁 속에서 구체화된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국주의 공격에 맞서, CPR-FI는 라틴아메리카와 세계의 노동자계급 및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긴급한 전략적 행동 강령을 제시한다: 우리는 미국의 공격을 규탄한 단체들을 시작으로, 노동조합, 사회운동 및 좌파 세력이 노동자계급의 대륙 총파업을 호소할 것을 요구한다. 대륙적 규모의 노동자계급 행동을 통해 트럼프의 진격을 저지해야 한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노동조합(아르헨티나의 CGT-CTA, 브라질의 CUT, 칠레 CUT 등)이 베네수엘라를 겨냥한 제국주의 전쟁 기계를 저지하기 위한 대륙 총파업의 일부로서 각국에서의 대중운동과 함께 전국적 파업을 선언할 것을 호소한다. 군사적 침략의 즉각 중단을 요구한다! 항만 노동자들은 라틴아메리카 자매형제들을 죽이는 무기 선적을 거부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와의 연대를 위해 운송부문부터 공장까지 모든 것을 중단시켜야 한다.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최근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서 국가를 마비시키고 반(反)식민 투쟁을 벌인 위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제 대륙 총파업을 통한 반제국주의 투쟁을 제기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갈 때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의해 납치된 니콜라스 마두로와 그의 아내 실리아 플로레스의 자유를 요구한다. 우리는 그들을 재판할 미국 법원의 사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베네수엘라 노동자민중만이 그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의 평회원들이 민주적으로 조직한 각국의 행동 위원회(action committees)를 기반으로, 베네수엘라에 대한 침략에 맞서 싸우는 자기조직화 운동을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노동자와 민중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주권을 무조건적으로 수호한다. 베네수엘라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몰아내자! 우리는 모든 미군 병력, 함정, 항공기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와 대륙 내 모든 외국 군사 기지의 해체를 요구한다. 우리는 외채 상환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베네수엘라와 우리나라의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민중은 우리를 약탈하기 위해 억압자들이 발생시킨 빚에 대해 한 푼도 갚을 의무가 없다. 셰브론을 비롯한 모든 다국적 석유, 광업, 농업 기업을 비롯한 제국주의 기업들의 무상 몰수를 요구한다. 라틴아메리카 땅에 있는 모든 미국 소유 기업들은 침략에 대응하여 노동자 통제 하에 국유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미국과의 모든 무역 및 안보 협정 및 조약(USMCA, 번영동맹(Alliance for Prosperity, TIAR 등)의 종료를 요구한다. 경험은 어떤 민족 부르주아지도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해방의 유일한 보장은, 노동자와 억압받는 이들의 정부를 통해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위해 투쟁하며, 빈곤, 종속, 환경 파괴, 자본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경제를 민주적으로 계획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