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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Tạm biệt — 뚜안님 100일재에 동행하여 남기는 기록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뚜안님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우리 노동자 민중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감각. 계속 되는 자본의 갈라치기와 대상화의 홍수 속에서, 범람하는 탈인간화에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두고 가야 하는 기억이 있다. 그런다고 나에게서 온전히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순간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전부 짊어지고 살아가기에는 결국 침잠되어버리기에. 상실을 겪으면 나는 특히 그런 강박을 느낀다. 그 순간들을 따로 떼어두고 가지 않으면 내가 잡아먹힐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난 2025년 10월 28일,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폭력적 단속으로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뚜안님의 가족들도 그러한 마음이 아니었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사건이 발생하였던 당시에 나는 개인적으로 두고 가야 할 오래된 기억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저 공교롭게 이 일에 함께 하게 되어, 개인 연대 시민의 자격으로 대책위가 주도한 거의 모든 투쟁의 순간에 자리했다. 1인 시위부터 100일재 참여까지 최선을 다한 동지들과 유족들이 있어 나 역시 그들과 심적으로 더 가까워지고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영적으로 민감한 편이라 망자와 관련된 일이나 종교 의식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리하고자 했던 오래된 기억 또한 망자에 대한 일이었기에, 사건들이 닥친 김에 직면하고자 좀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들여다 봤다. 세상을 사랑할 줄 알던 이들의 이른 죽음,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고자 열망하던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살아가는 일조차 허락받아야 하고 숨죽여 떨어야만 하는 삶을 알고 있습니다. 살아서 만난 적이 없어도, 나 또한 당신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하늘 아래에는 나만 남아 숨쉬고 있지만, 앞으로의 날들에는 누구도 이런 고통을 다시 겪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부디 편히 쉬시길.」 — 대구 출입국 사무소 앞의 뚜안님 분향소 방명록에 남긴 말 뚜안 대책위가 서울에서의 농성을 정리하던 날, 뒤풀이 자리에서 활동가인 태은 동지가 2월에 있을 100일재를 지내러 베트남을 가자는 말을 꺼냈다. 분위기에 취해, 그리고 뚜안님이 살던 곳이 궁금하여 같이 가고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대책위의 사람도 아니고 재정이 준비된 상태도 아니라 현실적으론 어려울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대구의 분향소를 정리하는 날에 금속노조 성서공단지역지회장 희정 동지에게 동행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대책위 사람들 또한 갈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가능하면 좋겠지만 못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1월의 어느 날 눈을 뜨기 전 아침, 꿈에 뚜안님이 등장했다. 이렇게 대화하게 되어 너무 좋다고, 소개시켜 줄 사람이 많다며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꿈에서 본 사람들은 그의 조상들이었던 거 같은데, 일어난 뒤에 신나서 돌아다니던 뚜안님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베트남을 가야할 성 싶어 결심이 섰다. 곧바로 희정 동지에게 동행하겠다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내고 여권을 만들러 밖으로 나갔다. 내란으로 정신없던 시기에 만료됐던, 돈도 시간도 여의찮아 해외 갈 일이 망연하다고 방치해 둔 여권이었다. 그 날이 뚜안님 아버지인 부반숭 동지의 생신이었다는 걸 저녁에 알게 되자, 뚜안님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초대를 했는데 안 간다면 정말 속상해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가는 건 현실성 운운하며 따지고 재는 일과 발 빼는 일이라니 부끄럽다. 뚜안님은 먼저 도전하고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었을 거 같다.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그랬기 때문이었다고, 중간 보고회에서 그의 친구였던 혜인님이 말했다. 내가 나고 자란 이 대한민국이 그렇게 도전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인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뚜안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겐 그랬던 모양이다. ‘어메리칸 드림’에 이은 ‘코리안 드림’이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허황된 꼴을 좋게 포장한 거 같아서 그런 표현을 듣는 마음이 불편했다. 호치민에서 만났던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에 호의적이라서 사실 더 괴로웠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취급했는지. 그리고 제국이 되고 싶어하는 한국의 정부와 자본가들이 떠올랐다. 호치민 곳곳에 뿌리내린 한국 자본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미국이 한국전쟁 이후 원조한 방식을 그대로 써먹은 게 뻔했다. 베트남도 오래도록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내전으로 끔찍한 날들을 보냈다는 점에서 한국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곳곳에 서양식의 건물이나 주변의 집들처럼 개방되어 있지 않은 ‘저택’들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기후가 따뜻해서 그런지 집들도 가게들도 1층은 벽보다 창문이나 문의 면적이 넓은 편이었다. 문이 있어도 대다수가 유리문으로 내부가 잘 보이는데, 저녁에는 대문을 닫는다 쳐도 생활하는 시간에는 대부분 문을 활짝 열어놓는 식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제 일제 목조 건물이나 강점기 당시에 지어진 건물을 아직도 쓰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박물관이나 특수한 목적의 건물로 거의 보존해 놓는 편이라, 그 시대를 일상과 분리시킨 듯도 하다. 마치 과거의 편린은 박제가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혹은 옛날 일은 남 얘기인 것처럼. 유사한 맥락으로 한국에서는 빈자와 부자가 철저하게 분리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 부분들 때문인지, 나는 베트남 땅에서 어떠한 여유를 느꼈다. ‘사회주의 국가’라기엔 제국의 자본에 의존도가 크고 수도인 호치민시 역시 땅값이 비싼 곳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에게서는 한국에 만연한 조급함이나 짜증을 본 적이 없었다. 고작 며칠 머무른 걸로 하나의 나라를 다 파악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소통이 어렵지 않았고 왠지 ‘괜찮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나는 가게와 집집마다 놓인 작은 재단 때문에 초반에 자주 어지러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가졌기 때문인지 그들에게서 선함과 거기에서 오는 여유가 느껴졌던 거 같다. 뚜안님이 고향을 그리워 하셨던 이유를 왠지 알 듯도 했다. 나도 그곳에서 어릴 적 살던 동네와 그 시간의 향수를 느꼈다. 단순히 저개발지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뚜안님이 나고 자랐다는 동네에는 사람들이 서로 용인하고 신뢰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집집마다 걸린 화초나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풀과 나무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집을 지을 때 먼저 심어진 나무를 베거나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희정 동지가 얘기해 줬다. 이런 걸 비롯해서 한국에선 어림도 없는 일들을 보고 들었더니, 험지에서 도대체 무슨 고생들을 사서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존엄이 그들에겐 더 싼 값이었을지. 아니, 그 누구도 자신의 존엄이 그렇게 싸게 팔릴 거라 예상하며 이주 노동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단지 거기까지 왔기에 버티기를 각오했을 뿐.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지역을 옮기며 그런 각오를 해봤어서, 감히 짐작한다. 비록 나에겐 이렇게 아늑해서 그립고 돌아가고픈 고향이 없어도 말이다. 비록 자본의 침식이 많이 진행되었지만, 부디 이 곳의 사람들은 한국이 간 끔찍한 제국의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랐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나와 태은 동지를 공항 앞에서 부반숭 동지가 마중 나오셨다. 호치민에는 공항이 하나 뿐이었고, 공항 건물 내에는 공항을 직접 이용하거나 근무 등의 명확한 용건이 있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몇 겹의 인파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드셨다. 한국에서 뵀던 때보다 표정이 훨씬 좋아 보였고, 염색도 하셔서 더 젊어 보이셨다. 우리 짐을 계속 들어주려고 하셨어서 말리느라 애썼다. 뚜안님의 어머니 후옌님이 한 시간 뒤쯤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도착한대서 공항 밖에 딸린 카페에 앉아 기다렸다. 반숭 동지는 날이 덥고 사람도 많은 데서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는 말을 번역기로 써서 전하셨다. 우리 쪽으로 뚜안님의 외숙모 후에님이 오셔서 반숭 동지와 말을 나누시다가, 후에님이 우리를 먼저 숙소에 데려다 주라하여 반숭 동지가 택시를 불러 동행하셨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서, 뚜안님의 외할머니와 다른 분들이 계시는 집으로 가서 동지들을 기다렸다. 호치민에서 뚜안님이 지내시던 외할머니 댁이라 들었다. 뚜안님의 외할머니 흐엉님은 딸인 후옌님과 확실히 닮으셨는데, 왠지 세월을 견뎌오신 듯한 무거움이 느껴졌다. 뒤에 동지들과 도착한 후옌님을 7년 만에 만나셨을 때 우는 딸의 손을 잡아주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셨다. 인자하게 웃는 모습도 자주 보이셨지만 감정 기복이 크지 않으셔서, 집안을 지탱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뉴스민의 박중엽 기자님 기사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들을 건사하셨다는 인터뷰가 실린 걸 봤다. 반숭 동지는 흐엉님의 집에서 접이식 밥상 상판 두께의 알루미늄 판을 네 개나 들고 나오셨다. 우리와 함께 투쟁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씩이 출력된 물건이었다. 그 중에 둘은 성서지회 사무실에 걸도록 가져가라 하셨다.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과 지인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를 소개하셨는데, 투쟁의 순간들을 자랑스러워 하시는 듯했다. 유족이 직접 나섰기에 기존과는 다르게 좀 더 나은 결과가 있던 투쟁이라 생각했는데, 그가 투쟁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거 같다. 풀어낼 수 없는 커다란 감정들을 투쟁을 하면서 좀 더 감당하실 수 있게 됐을 지도 모른다. 후옌님은 도착하여 흐엉님을 붙잡고 울며 한참을 말씀하시다가, 2층에 올라가서 뚜안님과 외가 조상님들의 사진이 걸린 곳에서 또 한참을 울며 말씀하셨다. 향을 피우고 초를 켜둔(귀신들을 부르는) 곳이라 나는 가급적 빨리 나오고 싶었는데, 뚜안님의 영정 앞에 합장하고 선 후옌님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베트남어를 거의 모르지만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뚜안님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 잘 되진 않을 지라도 노력할 거라는 말, 그리고 앞으로 뚜안님처럼 세상을 뜨는 사람이 없도록 할 거라는 말. 북베트남 사람인 다혜 동지가 통역하기로, 후옌님이 이제야 뚜안님을 보낼 마음이 들어 처음으로 편히 쉬라는 말을 꺼냈다고 했다. 그 날은 후옌님의 마음이 충분히 극복할 힘을 낼 수 있어 보이지 않아서 안쓰러웠다. 뚜안님의 남동생인 득안님은 오후 늦은 때 귀가했지만 낯선 손님들이 가득해서 안쪽 부엌에 들어가 혼자 식사했다. 얼굴이 뚜안님과 많이 닮아서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방을 썼던 태은 동지는 숙소에 돌아와서 그가 뚜안님과 너무 닮아서 속상했다 말했다. 내가 뚜안님의 부모라도 그를 볼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이 떠올라 힘들 거 같아 많이 공감했다.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자 득안님은 반숭 동지와 함께 호치민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거리로 우리를 안내해 줬다. 도시의 밤이 화려한 불빛으로 밝은 건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그곳은 여기저기에 꼬마 전구를 두른 장식이 많은 게 아기자기해서 예뻤다. 도로는 오토바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인도에도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없어도, 활기찬 밤거리를 걷는 게 즐거웠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많은 곳도, 화려하게 밝은 곳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누비던 뚜안님이 그 시간의 거리를 활보하던 모습을 상상하자, 마음이 아리면서도 흐뭇했다. 득안님이 뚜안님의 SNS에 게시된 적 있는 응우옌후에 거리로 데려가 줘서 넓은 공터에 멈춰 바람을 쐬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보름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100일재를 지내는 날 즈음에 뜬 보름이라 한국 무속에서 보름달의 빛이 망자들을 이끌어 준다 믿는 게 떠올랐다. 휴대폰 카메라로 달 사진을 찍는 나에게 박기자님이 베트남에서 보는 달은 다르냐고 물었다.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대답하면서, 변함없는 어떤 걸 생각했다. 어디에서 보든 같은 달처럼, 어디에서 왔든 모두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낯선 거리에 가득 찬 낯선 사람들이 저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밤풍경이 새삼 소중했다. 옆에 나란히 선 동지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불교의 장례를 잘은 몰라도 49일재면 끝인 셈인데 100일재를 또 지내는 이유를 박기자님이 물어보니 저승에서의 심판을 잘 치르게 부탁드린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게 장례의 진짜 끝이라 앞으로는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일만 있다 들었다. 내가 느낀 바로는 뚜안님을 조상들이 다 잘 데려가셨고 일도 거진 마무리 되었기에, 100일재는 뒤풀이 같은 의식이었다. 그래서 첫 날부터 쏟아진 후옌님의 눈물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체투지 날이나 서울 농성 해단식 날처럼 울진 않았던 거 같다. 첫번째 100일재는 유골함이 안치된 린손하이호이 절에서 이튿날에, 두번째 100일재는 그 다음 날 흐엉님의 집에서 치뤄졌다. 이틀에 걸쳐 두 번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당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친척들을 위해 집에서 한 번 더 하는 거라고 들었다. 린손하이호이 절이 숙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동지들이 걸어 가자고 했다. 희정 동지는 가는 길에 뚜안님 영정 앞에 놓을 꽃을 사려고 꽃을 파는 곳이 있나 내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 전 날에도 두바이 쫀득 쿠키가 한국 젊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이란 걸 알고 하노이에서 사온 그 간식을 뚜안님 영정 앞에 올려 놓으셨다. 걸어가는 길은 인도와 도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좁은 인도 여기저기의 시멘트가 깨져 있어서, 나는 거의 바닥만 보며 걸었다. 도로에는 쉴새 없이 오토바이가 다니고 가끔 군데군데 도로 보수 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신호등은 고사하고 횡단보도 표시도 흐려 도보로 다니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쉽게 보이는 지하 대공사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국에서 지하 환풍구를 비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철망 위를 걸어다닐 때면 발밑의 빈 감각에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그 때문인지 베트남의 길에서 되려 안정감이 느껴졌다.(물론 보도 경사에 미끄러져 한 번 거하게 넘어지긴 했다.) 비록 베트남의 절은 린손하이호이 한 군데 밖에 가보지 못했지만, 한국의 절 대부분이 산에 있거나 납골당의 접근성이 좋지 않은 것과 차이가 있어서 신기했다. 절의 규모가 비교적 작았는데, 바로 앞에 한국 대형 마트가 엄청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게 거슬렸다. 호치민 땅값이 비싸도 거대 자본들은 과세의 치외법권인 거처럼 넓은 면적을 자랑했다. 빨간 바탕에 노란 낫과 망치 그림의 깃발이 황성적기와 함께 거리 곳곳에 나부꼈지만, 그 혁명의 색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뚜안님을 비롯한 망자의 유골함이 봉안된 탑에 올라가 인사를 하고 내려와 법당에서 예불을 드렸다. 한국의 절이 대부분 목재로 지어진 것과 다르게 베트남의 절은 다른 건물들과 비슷한 대리석 바닥에 석조 건물이었다. 더운 지방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절에서 맨발로 다니는 게 문제되지 않아서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어는 잘 모르지만 불경을 외는 말에서 익숙한 산스크리트어가 들렸다. 천수경을 읊고 반야심경도 읊고 관세음보살도 찾은 거 같다. 시간마다 드리는 예불과 달리 뚜안님의 가족들이 의뢰한 의식이라 그런지 반숭 동지와 후옌님, 흐엉님에게 스님이 불경을 읽는 도중에 향을 비롯해서 뭔가를 건네셨다. 한국의 절에서보다 사용하는 타악기의 종류가 많았던 거 같고, 금속 악기나 큰 북을 중간중간 자주 쳤던 거 같다. 예불이 끝나고 뒷편의 선대 주지 스님이셨던 것 같은 분들의 영정 앞에서도 인사를 드린 후, 봉안탑으로 올라가 뚜안님의 영정 앞에 차려진 상에서 제를 지냈다. 뚜안님의 유골함은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유골함과 다르게 생겼다고 태은 동지가 말했다. 둘러보니 정말 다른 유골함들은 연꽃 봉오리처럼 생겨서 녹색이나 흰색, 옥색같은 차분한 색에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뚜안님의 유골함은 분홍색인 데다 금색 펄이 들어갔는지 상당히 화려해서 눈에 띄었고, 사진이 앞에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아끼던 친구의 납골당을 갔을 때 본 바에 의하면, 한국의 유골함에는 가운데 이름만 새기고 이름표나 사진을 붙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에서 장례를 치렀는지에 따라 유골함의 모습이 다르게 남는 걸 알았다. 뚜안님 부모님이 한국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진공 유골함으로 골랐다는 얘길 희정 동지에게서 들었다. 가격을 듣고 판매자가 상당한 바가지를 씌웠다 싶었지만, 자식의 마지막 길에 구태여 돈을 아끼고자 셈을 할 분들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처음에 봉안탑에 올라왔을 때부터 눈물을 보이던 후옌님은 결국 의식 내내 우셨고, 뚜안님의 사촌 언니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뚜안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맨 앞에서 뭔가를 해줘야 했는데 득안님이 참여하지 못해 그 사촌 언니가 자리했다. 염불 외는 스님들 뒤로 두툼한 작업복을 입은 반숭 동지가 보였다. 예복같은 단정한 옷을 입은 다른 가족들과 차이나는 복장을 고집하신 이유는 뚜안님이 사준 옷을 입어서 그렇다고, 희정 동지에게 들어 마음이 아팠다. 제를 지내는 동안 우는 사람들이 늘어가더니 태은 동지도 온통 눈물에 젖은 얼굴로 향을 꽂았다. 참여한 사람들 모두 향을 하나씩 받아 향로에 꽂은 뒤 차려진 상 앞에 서서 음식을 한입 먹고 의식이 끝났다. 나도 마지막에 뚜안님의 사촌 언니와 나란히 서서 용과 한 조각을 뚜안님의 영정을 보며 먹었다. 망자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라고 했다. 유족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뚜안님도 속상해서 같이 부둥켜 안고 우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더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에 대한 마음은 슬프지만 생자도 망자도 각자가 가야 하는 길이 있다 생각해서 그런지 나도 함께 울지는 않았다. 뚜안님 또한 가족들이 계속 슬픔에 잠기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 마음이 후옌님에게 잘 전달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는 눈물을 좀 덜 보이셨던 듯도 하다. 두고가야 하는 기억, 감정. 죽은 사람도 남은 사람도 자신 몫의 삶은 계속되는 걸 알고 있어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좀 고민되기도 했다. 봉안탑에서 내려와 상에 올렸던 것들을 마당의 소각장에서 태우는 모습을 보다가, 후에님이 안쪽에 상이 차려져 있으니 먹으라 하셔서 식사를 하러 자리에 앉았다. 절에서 마련한 음식이라 모두 채식이라고 했는데 한 상 가득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올라와 있어서 신기했다. 한국의 절 밥이라면 메뉴나 조리 방식이 거의 정해진 편이었지만 베트남의 절에서는 채소 전골에 콩고기조림, 볶음밥, 채소 모듬 무침 등의 여러 요리를 볼 수 있었다. 양도 많았는데 부처님이 주신 음식이라 남은 건 포장해서 가야 한댔다. 식사에 후식으로 수박까지 주셔서 나는 팔레스타인 티셔츠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엄청 많이 울던 사람들 모두 다행히 식사는 잘 했다. 반숭 동지는 한국에서의 굳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고 후옌님도 슬픈 표정이었다. 희정 동지가 한국에서 그들과의 첫 식사를 했을 때는 사고가 벌어지고 며칠 지나지 않은 때여서 한 숟갈도 뜨지 않고 계속 울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럴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트남에 온 두 분이 잘 먹고, 울더라도 많이 웃고, 가족들도 만나니 좀 나아 보여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뚜안님을 잃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던 반숭 동지의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그들의 마음에 난 구멍을 채워줄 수는 없어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인간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상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에 적응할 거 같아서, 그리고 그 과정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거 같아 안심됐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뚜안님의 가족들은 우리를 엄청 먹이려고 했다. 마치 뚜안님에게 먹이고 싶었던 걸 우리한테 먹이려는 듯이, 계속해서 뭔가를 대접해 주셨다. 한국에 가면 이런 거 못 먹는다며 먹일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다 내오신 거 같다. 후에님이 우리 식사를 다 감당하시느라 쉬지 못하시는 거 같아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가족 분들과 반숭 동지 친구 분들 또한 우리에게 뭐를 먹이는가에 대한 토론을 하는 걸 보고 약간 포기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대접을 하고싶은 마음이 고생스럽고 귀찮은 것보다 큰 거구나.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 때 충분히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거도 필요한 일이라 나는 그 뒤로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물론 뚜안님이 나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어 그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날에 반숭 동지의 친구인 홍님이 우리를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셨는데, 그 날 뚜안님이 본인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시켜 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홍님이 식사를 하기 전에 잔을 들고 이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말씀을 하신 때 그런 생각이 들어, 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거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 느꼈다. 절에서의 일이 다 끝나고 동지들과 앞의 한국 대형 마트를 구경 갔다가 저마다 기념품이나 선물 등을 사서 귀가는 그랩 택시로 했다. 매장 안에는 한국어도 많고 한국에서 파는 물건에 베트남어 라벨만 붙은 채로 판매 되기도 했다. 마시멜로를 쓰지 않은 듯한 두바이 쫀득 모찌도 팔고 있었다. 마치 한국이라는 작은 왕국이 그곳에 있는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섬유 제품들은 한국 가격의 반도 안되어서 자본이 값싼 노동력 어쩌고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또 불리는지만 확인해 분노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눈으로 확인하니 속이 답답했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만족하는 낯빛이라 한국어로 판촉 홍보를 하는 직원들에게 애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K팝을 좋아한다는 뚜안님의 사촌 언니에게 그러했듯, 한국 그렇게 좋아할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몇 번이고 삼켰다. 식당이 많은 거리의 야외 테라스에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고깃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요리가 있었고, 채식을 하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었다. 뚜안님의 가족들은 매 끼니마다 채식하는 나를 먼저 챙겨줬어서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도 더러 채식하는 사람들이 있는 편이라 한국만큼 비건 음식을 구하기 어렵지는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나았다. 첫날에도 후옌님이 보름 때는 채식을 한다고 해서, 베트남 사람들은 종교적 이유로 채식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나는 락토오보 비건이라 생선도 먹지 않고, 채식을 하기 전에도 비린내 때문에 생선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운데 나온 흰 살 생선을 보니 되게 먹음직스럽고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고싶은 마음이 든 게 아닌 거 같아 혹시 뚜안님이 생선을 좋아하냐고 후옌님에게 여쭤보니 그렇다고 하셨다. 뚜안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도 너무 많고 시끄러워 정신이 혼미했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득안님이 내 뒷쪽에 지나가다가 맥주를 쏟으며 잔을 깼는데, 그때 조금 정신이 들어서 옷에 술도 묻었으니 숙소로 돌아가고자 벌떡 일어났지만 반숭 동지는 우릴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윽고 비가 쏟아져 우리가 앉아 있던 야외석의 지붕에 굵은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났다. 나는 빗물에다 옷에 묻은 술을 씻길 겸 가겠다 했으나 여전히 그들은 우릴 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술 묻은 부분이라도 씻어내려 옷을 지붕 밖에다 휘둘렀다. 반숭 동지는 급기야 뚜안이 우리를 가지 말라고 해서 비가 내리는 거라 했다. 이 시기는 우기가 아니라 비가 오는 일이 흔치 않다는 거다. ‘제발’이라는 감정으로 ‘얼른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며 옷에 빗물을 떨구었다. 숙소에 돌아와 태은 동지가 그 모습을 보고 내가 귀신을 쫓는 줄로 알았대서 아니라곤 못하겠다 대답하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망자가 생자와 너무 오래 어울리는 건 좋지 않고, 나는 그걸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반숭 동지에게 남은 미련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 다음 날 오전, 스님들이 흐엉님의 집에 오셔서 더 많은 가족들과 2층의 영정이 있는 방에 모두 모였다. 이번에는 득안님도 참여하신 자리라, 그가 맨 앞에 앉아 어제 뚜안님의 사촌 언니가 했듯 뭔가를 받고 그릇에 수저를 꽂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한둘씩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결 나아진 거 같았다. 전날에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스님들이 읽는 축문에 대구의 주소를 읋는 게 들려서 다혜 동지에게 물어보니 사망한 자리에 대한 주소가 들어간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생자의 거주지가 축문에 들어가는 게 생각나서, 이 곳의 사람들도 망자가 자기가 죽은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첫 날에 후옌님이 올라온 때 함께 있었을 때는 어지럽고 눈앞도 깜깜해졌었는데(그날 상당히 피곤했던 것도 맞긴 하지만), 스님들이 와서 제를 지내는 때엔 더 많은 사람들이 왔어도 꽤 괜찮았다. 물론 망자들도 많이 온 거 같았고, 왠지 뚜안님의 조상님들이 안전히 잘 데리고 간 느낌이었다. 다혜 동지에게 베트남에서도 죽은 사람을 조상들이 데려간다고 생각하냐 물으니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아시아 문화권이 대부분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언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제례의 대부분이 낯설지 않았던 듯하다(시작하기 전에 창문을 여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축문과 경문을 읊는 일이 끝나고 스님들이 가족들을 위로하는 말을 전하고 떠나셨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사람은 모두 죽으니 적당히 슬퍼해야 망자도 자기 갈 길을 잘 간다는 얘기였다. 부처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이제 편안해졌으니 망자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슬픔을 잘 달래어 이겨내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확실히 장례도 제례도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일이라, 가족들에게 이 모든 게 충분히 위로가 되었길 바랐다. 점심 식사는 육수를 쓰는 쌀국수 집에서 먹기로 얘기되어 채식하는 나는 제사 상에 올렸던 음식으로 식사했다. 흐엉님과 후에님과 그 아들인 바오, 딸 아이를 안은 뚜안님의 사촌 언니와 반숭 동지 친구 응우웯님과 함께 집에서 밥을 먹었다. 응우웯님은 한국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번역기로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며 단어를 서로 가르쳐 줬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 내 모국이 그들에겐 좋은 대상이라는 걸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애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 그에 부정적인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한국에 자주 간다는 응우웯님이 한국에서도 보자고 하셔서 좋다고 했다(이후 페이스북 메신저로도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점심을 먹고 좀 쉰 뒤 저녁 식사 때가 되자 출장 식당 업체에서 상과 의자와 필요한 음식에 얼음 일체를 들고 흐엉님의 집에 왔다. 아침에 봤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그러니까 일가 친척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가 마련된 거다. 분위기는 잔치 같아서 큰 일을 치르고 난 뒤의 뒤풀이 같은 느낌이었다.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골목에까지 상을 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다들 데면데면한 게 하나도 없었다. 득안님도 사촌들과 대화를 하며 웃고 즐거워 해서 신기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10살 아이가 나와 대화를 하려 했는데, 네다섯 살인 바오가 이제 낯가림을 안하는지 계속해서 말을 했다. 그 사촌들이 기억하는 뚜안님은 어떨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사건 이후로 어플로 베트남어를 조금씩 배워봤지만 무슨 대화를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친척 가족들도 다 보내고, 반숭 동지의 친구 분들이 우리와 함께 놀러 나가자 하셨다. 태은 동지는 전날에 후에님한테 받은 아오자이를 입었고, 나도 응우웯님에게서 받은 아오자이의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희정 동지가 이 사람들이 우리를 갖고 논다고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아무튼 신이 난 베트남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한참 택시를 타고 나가 굉장히 넓은 야외 카페에서 어렵사리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예쁜 카페 다니는 걸 좋아하던 뚜안님이 왠지 확실히 좋아했을 거 같은 곳이었다. 연못도 있고 조화 나무도 있고 진짜 나무도 있고 정원 바위들도 있는 광활한 카페였으니, 이제 보니까 호치민은 자본가에게만 후한 거 같았다. 국가 자본주의에 분노하는 것도 잠시, 곧 그들은 한국의 다른 대형마트를 구경 가자고 한다. 나가는 길에 발견한 셀프 포토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자고 해서 열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어떻게든 네 장에 한 번씩은 다 나오게 만들었다. 홍님이 우리에게 한 장씩 뽑아 주시고 다른 사람들은 사진을 링크로만 가졌다(물론 우리도 링크를 공유 받았다). 또 택시를 타고 가기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근처에 있으니 가볼만 하다 싶어 가는 길이 전날에 절에 가며 걷던 동네 길이랑 달랐다. 신호등은 여전히 드물었지만 응우옌후에 거리를 다니던 때처럼 잘 닦여진 인도 곳곳에 2주 뒤의 중추절을 축하하는 큰 장식물들이 있어서 포토존 삼아 또 사진을 찍었다. 사실 나는 자본이 사람들이 실제 살아가는 삶보다 포장된 것을 보여주기 좋아하는 게 국가 불문 똑같은 거 같아서 한편으로는 맥 빠졌다. 후에님이 태워주는 오토바이도 타고 하면서 베트남의 번화가를 누볐다.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마 그때부터 그들이 계속 내년(베트남에서는 음력 달력을 써서 아직 2025년이다.) 뚜안님의 기일에도 오라고 했던 거 같다. 홍님이 다음 날에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을 전하자 희정 동지는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해 골치 아파 했다. 그러나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는 말이 가볍게 무시되는 거처럼, 우리의 거부 의사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던 거 같다. 갚을 길 없는 호의와 환대를 받아 부담스러워 하셨지만, 다혜 동지도 사실 베트남 사람들은 다들 정이 많아 이러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나도 홍님의 집에서 뚜안님이 우리가 뚜안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걸 원하는 거처럼 느꼈다고 말을 전하긴 했지만, 그의 마음에 쌓이는 부채감을 덜어주진 못했다. 결국 홍님의 동네를 구경 다니고 점심을 대접받은 뒤에야 우리는 풀려날 수 있었다. 희정 동지는 호치민에서 그래도 전쟁기념 박물관에는 한 번 가보는 게 좋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동지들과 그곳을 들렀다. 한국에서 동지들이 상경 농성을 한 장소도 전쟁기념 박물관 앞인 게 떠올랐다. 게다가 거기에는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가담해서 학살한 주제에, ‘그들을 죽이는 게 당연하고, 절멸시켜야 한다’는 당시의 문구를 베트남어로 기재해놔서 한베 평화 재단이 시정 요청을 한 바가 있다. 도무지가 자랑스러울 법한 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한국을 베트남의 전쟁 기념관에서는 전쟁을 도와줬다는 거처럼 포장해 놔서 구역질이 났다. 들어가면서 보이는 미군의 탱크나 무기 같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자랑스럽게 전시해 놨지만, 호치민은 전체적으로 사실상 미국의 꼭두각시인 한국을 선망하는 거 같은 느낌이라 비위가 상했다. 북베트남인 하노이 지역은 남베트남인 호치민과 분위기가 다른 편이라고 들어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반숭 동지도 흐엉님도 원래는 고향이 하노이 쪽이라고 들었다. 전쟁 이후 호치민이 산업화가 많이 되고 공장이 들어서며 일자리를 찾으러 이쪽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흔했던 거 같다. 마지막 전시관이 전쟁의 아픔, 상흔 등의 얘기로 고엽제 피해자들과 그 자손들의 장애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베트남의 정부 또한 베트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고 느꼈다. 그들이 걸어놓은 낫과 망치 깃발이 별 의미 없는 것처럼, 학살당한 사람들을 애매하게 넘긴 그곳이 기묘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분명 그런 곳이 전쟁의 잔혹성을 기억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걸 텐데 아무도 그런 걸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공허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산 산업으로 야금야금 돈을 벌고 있던 한국. 전면적으로 시작된 침공에 치솟는 방산산업 주가. 자본의 개처럼 미쳐버린 제국 꿈나무인 나라를 호치민 사람들은 좋아해줬다. 그런 현실이 너무 끔찍하다. 도로에서 식탁을 펼친 가게의 반쎄오를 마지막 식사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반숭 동지와 홍님이 함께 나와 태은 동지를 데려다 주시고, 공항 안으로 같이 들어가지 못해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 돌아온 날은 하루 종일 자고, 그 다음 날에도 저녁쯤에야 겨우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베트남 땅을 밟자마자 들은 세종호텔 로비 농성 동지들의 연행 사건이 마무리되고 열린 체크인 집회에 자리했다. 반숭 동지에게 진수 동지가 땅으로 내려왔고 다른 사람들과 경찰에게 단체로 잡혀갔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진수 동지가 고공에 있을 때 반숭 동지에게 전화로 인사를 하다가 목이 메여 우시던 날이 생각나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 페이스북으로 베트남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 친구 요청을 했다. 논바이너리 젠더퀴어라서 ‘여성스러운’ 옷을 입지 않는 내가 그들과의 시간이 그리울 때면 응우웯님이 준 아오자이를 입어 본다. 태은 동지는 후옌님의 딸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여유가 될 때 베트남어 기초 수업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잃고 나서 얻게 되는 것, 살아있는 사람으로의 책임, 주어지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에 대해 생각한다. 희정 동지가 농성 투쟁 때 하셨던 말처럼, 우리 노동자들은 서로 동등한 관계니까 나는 동지도 친구라고 해 본다. 친구의 말과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어플로 좀 더 열심히 학습해 본다. 뚜안님의 사건을 처음 접했던 날처럼, 그의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서 베트남어를 공부하고자 했듯. 살아있는 사람이, 혹은 죽어서 떠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고자 그 투쟁에 함께했다. 또한, 애도하는 일의 감각을 알고 싶어서도 매번 자리했다. 그러한 결과로 나는 뉴스나 보도자료에 적히는 글자나 숫자가 아닌, 실재하던 인물을 느끼고 기억하는 일은 소식으로만 접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뚜안님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여러 번 깨달을 때마다, 나는 우리 노동자 민중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감각. 계속 되는 자본의 갈라치기와 대상화의 홍수 속에서, 범람하는 탈인간화에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한사람 한사람, 각자의 우주가 더는 무너지지 않길 바라며 우리를 스쳐간 많은 목숨들에 조의를 표한다.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2026-03-09 | 조회 13,409 -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3) 이탈리아, 스위스, 다시 한국이탈리아 - 로마, 베네치아, 볼로냐 다음날 낮에는 로마로 이동. G 동지와 만날 장소를 모색하며 메시지를 나누다 '좋은 데'로 데려가 주겠다기에 로마 구도심에서 강 하나 건넌 트라스테베레 지구로 나설 채비를 한다. 짐을 줄일 겸 모자에 조끼를 바로 걸치고 나서면 문득 조끼는 여행 중 도난방지에 유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파란 모자에 머리띠는 합류할 때도 눈에 띄고 말이지. 박물관에서 일어를 할 줄 아는 C 동지를 데리고 오느라 좀 늦는다고 해 젤라또 가게도 들르고 공원이며 유적지를 가로지르며 구경도 하다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사이에도 이런저런 그래피티와 스티커와 심볼들이 눈에 들어와 넋을 놓고 셔터를 눌러대고, 한 시간 남짓 경로의 어디를 둘러봐도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연대의 메시지가 전날 시위에서의 환대를 떠올리게 한다. 트라스타베레로 넘어가는 강둑 성당 앞 작은 광장에서 두 동지와 만난다. C 동지는 일어를 3년, 한국어를 1년 정도 공부했다고 한다. 간단한 의사교환이 큰 지체없이 일어나는 것에 감사한다. C 동지의 첫 마디는 역시나 “한국에도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단체가 있어?”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에 가입된 단체 숫자와 좌파 운동에서의 팔레스타인 문제의 중요도에 대해 말해 주었다. “다행이다”라는 반응도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향한 바의 입구에는 팔레스타인기 스티커가 붙어있으며, 옆의 벽에는 울고 있는 수박과 다양한 메시지들이 쓰여있었다. 바에 자리가 없어 크래프트 콜라를 한 손에 들고 바로 앞 분수대 계단에 C 동지를 중간에 두고 셋이 나란히 앉아 번역기로 이야기한다. 이번에는 긴 호흡으로 좀 더 길고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번역기 입력창에서 최근 한국의 정세를 축약하다 보면 모든 걸 담았지만 건조하고 맥락 없는 문장이 넷플릭스 프로그램 소개문을 닮아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트라스타베레는 '로마의 홍대'라고 한다. 그러니까 동지는 정말로 외국인을 '좋은 곳'에 데려가 준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안 외에도 어떤 투쟁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4B 운동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해외에 한국발 페미니즘으로 대표되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4B 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을 줄이야. C 동지는 한국의 페미니스트 작가의 인스타그램 계정도 보여준다. 기존의 좌익운동과의 분리, 해당 의제를 주로 하는 페미니스트 그룹의 배제주의 노선, 여성-재생산 파업이라는 개념에 대한 공감의 존재 등으로 설명한다. 더불어 우리야 뭐 이것저것 한다, 기후정의, 장애인이동권, 노동권, 젠더/성소수자 이슈 등등…정도의 맥아리 없는 대답을 돌려주자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탈리아는 2023년경 임신중절 범죄화와 같은 여성과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백래쉬가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항하는 연대의 물결에 동참했다.” 전날 시위에서 남성 동지의 백팩에 달려있던 '임신중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라는 인상적인 뱃지와, 벽에 적혀있는 임신중단권을 옹호하는 문구에 대해 납득한다. 이 이전에도 후에도 본 수많은 여성과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심볼이며 문구이며 인클루시브 프라이드 플래그 등등에 대해 이 설명이 없었다면 많이 혼란스러웠으리라. 동시에 이탈리아는 한국에 비해 중심적인 거대담론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로니 정부가 저출생에 대한 대응으로 이주민 유입을 일부 확대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는 G 동지에게, 한국의 극우들 사이에서 북풍몰이를 대신해 확산되고 있는 혐중정서나 이주민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국의 저출생 대응에는 그러한 정책적 흐름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왜곡된 페미니즘 이론을 우파적 선전에 이용하는 이들도 있으나 주류 정치에서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의제는 여전히 주변부적 위치라거나, 그런 대답을 늘어놓는다. C 동지가 G는 역사지리학 교수라고 소개하며, 이탈리아와 이탈리아의 사회에 대해 궁금하거나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묻는다. 10월 초 우정국 파업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이탈리아는 지금까지 방문했던 국가들 중에서 비교적 설명하기 힘든 방식으로 감성적이고 고맥락적이라 한국(아시아권 국가)과 약간 닮은 부분도 있다. 친절하고, 타인과의 거리감이 가깝고, 아주 강하게 조직될 수 있는 사람들로 여겨지며, 동시에 그것이 정반대의 진영에서도 일어나리라 예상된다고 답하자 나름 수긍하는 표정을 한다. 이야기가 길고 복잡해지자 G 동지가 잠시 난감해하다 스마트폰을 수평으로 들어 올려 번역기에 음성인식으로 입력하는 것도, 그것이 제법 잘 인식-번역된 결과물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G 동지가 건네오는 질문은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 엄청난 주어이다. 기대에 서툰 성격 상 평소에 너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부분이라 뭐라 답할 수 없어, 대신 근 1년여간 봐온 것들, 만나온 사람들, 좌파 운동과 그 안에서의 사회주의 의제, 동시에 그것들에 대한 탄압의 현주소를 이야기한다. 나는 내 생애 그것이 가능할지 너무 기대하지 않고, 나의 노조와 함께 '내 일한 만큼 받는 세상', 더 나아가 '능력껏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세상'을 위해 힘쓸 뿐이라는 말과 함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미사를 시작하기 전의 성당을 구경하러 간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 오면서 여러 번 보며 신경 쓰였던 원과 화살표의 심볼을 떠올리고 사진을 보여준다. “자율주의Autonomism. 노조나 정당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가까운 방식을 추구하는 노동자 운동.” 혼란에 빠진다. 일주일 안 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노조 바깥의 사회주의자들을 만나며 세계관을 넓히고 있었지만 여전히 현장중심적 노동운동에서 노조운동 외를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는 나는 기존의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나 냉소 같은 안티-테제적인 개념만을 한참 더듬다가, 일종의 아나키즘적-노동자 운동이라는 결론을 제시하고는 적당한 수긍을 듣는다. 그렇다면 그만큼 급진적인 사상이라는 거겠지. 트랜스 심볼과의 결합이며 함께 그려져 있던 서클 A들을 떠올리며, T 동지의 ‘뒤숭숭한 세상에서 극좌가 부상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탈리아는 정말로 어떤 곳일까. 답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질문이 시작된다. 따뜻한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회랑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C 동지와 실없이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크리스천이냐는 질문에 “크리스천적인 인간이지만 더이상 종교로서 믿지는 않는데, 나 같은 사람을 냉담자라고 하더라”고 답하자, C 동지는 “나도 그렇다”고 말한다. 예상 외의 대답이었기에 그 한마디가 어떤 의미일지 곰곰히 생각하면서 크지 않은 회랑에서 빠져나온다.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직전에 한국의 연대시민들이 만든 팔레스타인이나 노동 의제 스티커를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C 동지에게 넘겨준다. C 동지가 “티켓을 살 필요는 없다”고 한 버스에 올라타면 피렌체의 트램에서 본 것과 같은 티켓 리더기가 있어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도덕의 기준이나 문화적 규범은 유동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간다. 트라스테베레의 로마 최고最古의 성 마리아 성당 다음 날에는 사람에 치이며 바티칸을 관광한다. 시스티나 성당 예배당 천장의 '천지창조'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적 세계관 속의 인간과 신의 도달 불가능한 간극에 대해 듣는다. 기념품점에는 새 교황의 호쾌한 얼굴이 마치 슈퍼스타처럼 늘어서 있다. 가족을 위해서는 삼중관과 열쇠가 그려진 묵주를 산다. 희년(禧年, Iobeleus)을 맞은 베드로 대성당은 성당은 고사하고 광장 바깥에서부터 사람으로 가득 차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바티칸 바로 옆의 집값은 로마의 다른 곳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가이드로부터 듣는다. 구글 지도의 경로 안내가 버스 파업으로 갱신되고 우체국이 점심때 닫는 것을 보며 로마 구도심의 유적들로 다시 향하면, 이 성당에서는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됐고 저 성채에는 교황님이 피신하셨으며 저 성당의 성문(聖門, Porta Sancta)을 통과하면 죄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들이 발에 채일 듯이 널려있다. 우리나라의 극우 컨트롤 타워 중 하나는 개신교와 해당 계열 컬트라고 했을 때 G 동지는 “억압적인 사상의 가톨릭 국가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가톨릭 신자 비율이 80퍼센트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것은 더 이상 나의 믿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C 동지의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해방신학에 대한 흥미를 표했을 때 별 답을 듣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저 허공에 매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일지도. 일기예보를 본다. 변경된 일정에 따른 기상 악화의 가능성으로 고심 끝에 인터라켄 방문을 취소하고 로마에서 하루를 더 보낸다. 이런 일정을 짤 때는 앞으로는 주말을 동지들과 보내는 것을 염두에 두기로 한다. 달리 할 일이 없어 찾아간 국립 미술관에서 팜플렛 표지서부터 나오는 적장의 목을 따는 유디트는 결국 찾지 못하고 대신 인상적인 그림을 본다.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여행 속에서 나름 기독교 예술을 질리도록 접한 뒤라 흔치 않은 시점과 구도라는 설명에 공감한다. 고통에 찬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유대인들의 왕'과, 만면에 띄운 조롱의 미소이며 가시관을 씌우는 우악스러운 손길이 생생하게 대비된다. 이 그림의 감상은 '이 이야기의 올바른 편'이 어느 쪽인지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완성되리라.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부담도 주저도 없는, 반성도 사과도 들을 수 없는 탄압과 살해에 스스로 용서를 주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닌 '사람의 아들'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야간열차로 로마를 떠나 새벽에 베네치아에 떨어진다. 역을 나서자마자 바닷물이 보이는 도시에서는 자동차의 역할을 모두 배가 한다. 경찰 보트가 넓은 운하를 가로지르고 운구-선이 관을 공동묘지-섬으로 옮기며 정비소 역할을 하는 아주 작은 조선소에는 아주 작은 크레인이 있다. 잘못 탄 수상 버스 차창 너머에서, 바닷물 한가운데에 뻗은 기둥에 멋들어지게 적힌 'Free Palestine'이 눈에 들어와 잠을 깬다. 사람 없는 시간에 자기 배를 몰고 온 누군가는 이것을 그리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벽에 이것저것 쓰여있다거나 심볼이 있다거나 물가에 면한 가정집 창가에 팔레스타인기를 걸어놓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오히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것들의 종류며 빈도가 로마보다 더욱 밀도가 높은 느낌도 든다. 로마의 '관광객은 집으로'에 이어 '베네치아를 베네치아인에게'라는 문구를 벽에서 찾는다. 그린피스 스티커나 관광객 안내도의 금지사항들을 보며 기후위기의 국면을 맞은 수상-관광도시가 처할법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Stecco: 본명 Luca Dolce. 25년 4월에 3년 6개월의 징역을 구형받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활동가. 현재 복역 중. 이 사람들에게 축구 팀이란 무엇일까 (‘1312’는 ‘ACAB’(모든 경찰은 후레자식이다)의 은어로 쓰인다.) 'Venezia FC 파이팅' 아담한 크레인. 구글 지도에 조선소라고 적혀있는 이곳은 아마 자동차 정비소 정도의 개념인 듯 하다. 여섯 색 무지개는 물론 인클루시브 프라이드 플래그가 어엿하게 자리잡은 사회가 신기하다 관광도시의 주민이 드러내는 정치적 실천은 세계를 향한 스피커로 기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밤늦게 출발하는 열차로 베네치아를 떠나, 볼로냐 중앙역에서 짧은 밤을 보낼 숙소로 이동한다. 역 인근에서 10여 분을 걸었을 뿐인데도 아주 많은 말, 지금까지의 명료한 단어나 심볼을 넘어서는 난해한 문장들이 사방에 펼쳐진다. 런던에서의 익숙한 폰트와 재회한다. 영국에 비하면 이탈리아의 '혁명 공산당'은 상당한 신생정당인 것으로 보인다. Camp Unil Palestine: 스위스 로잔의 대학교 UNIL–Géopolis를 거점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연대 단체. 이스라엘에 대한 학술 보이콧 활동을 하고 있다. A Foras: 사르데냐 군사점령 반대 단체. 사르데냐에는 이탈리아와 NATO의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으며 분리주의 의제의 정당(사르데냐 행동당)이 존재한다. Rami Elgaml: 이집트계 19세 청년. 24년 11월 밀라노에서 친구와 스쿠터 운전 중 고의적 경찰폭력으로 추락사. 해당 사건에 대한 재판은 현재까지 진행 중. 인터라켄의 예정이 사라졌으므로 마지막 날은 볼로냐 중앙역에서 밀라노 중앙역으로, 거기에서 스위스의 취리히 중앙역으로, 다시 취리히 공항역으로 이동. 밀라노 중앙역에서 탄 국제선 교통약자 칸에서는 뒷좌석의 할아버지들이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드문드문 들려온다. 국경을 넘기 직전에 잠시 정차한 기차 안에서 이것저것 돌이켜본다. 햇살이 뜨겁고 사람들이 정열적인, 국가 단위의 거대담론이 건재하고 강하게 조직된 동지들이 살고 있는 음식이 맛있는 나라. 동시에 전체주의와 조직폭력단을 일컫는 일반명사가 태어난 나라. 축구 경기에 관심이 많고, 거리감이 가까워 처음 만난 이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튀는 사람으로 살기에는 고생스러울 것 같다고 생각되는 나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격하게 이행하는 불연속점이 시스템 전반에서 눈에 띄는 나라. 더운 날씨 때문인지 방문했던 다른 국가들에 비해 확연하게 밤이 늦은 나라. 카톨릭과 가부장제가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는 나라. 고생하시는군요, 서로 힘냅시다 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프랑스에서 느꼈던 서러움과는 정반대의 어딘가 익숙하고도 가까운 기분이 드는, 어딘가 지금의, 혹은 좀 더 이전의 한국에 대한 기억과 닮은 나라. 아직 다 해석되지 않은 한 무더기의 사진들과 함께 나는 한동안 이 땅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스위스 기차에서 내리면 언어와 화폐와 물가가 다른 땅. 마지막 식사를 위해 역을 나선다. 강풍주의보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강을 따라 내려가며 느낀 첫 감상은 '표백된 것 같다'였다. 풍요로운 마트와 맛있는 간식 가게와 예쁜 경치가 있고, 큰길을 따라 내려가면 별 눈에 띄는 낙서도 스티커도 없이 평화로운 광경. 여러 곳에서 본 여러 선전물들이 있을 법한 자리의 공백이 어색하게 느껴지고, 여섯 색깔 무지개와 환대의 표현이 종종 보이는 것 정도가 두드러지는. 그러나 역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음식점을 찾아 몇 걸음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조금이나마 익숙한 문구들이 보이고, 인근 거주자들이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쓰레기 수거함은 좋은 선전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탈리아에 이어 다시금 깨닫는다. 하여튼 어디든 경찰 싫어하는 것만큼은 똑같은 것 같다. 짧은 시간 체류했지만 산지가 많고, 문화적 특징보다는 청정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자부심이 두드러지고, 물가가 인근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높고, '일단은' 중립국인 작은 이 연방공화국으로부터 자의적으로건 타의적으로건 어딘가 고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식의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에게 자연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다양한 사회의 형태를 접하고 그것이 운영되는 방식을 엿보는 것은 언제나 경이롭다. 대한민국: 그리고 남은 이야기 공항 구석에 있는 국적기 카운터의 직원이 수하물 위탁은 받지만 체크인은 모바일로 해오라고 하거나(영국이라면 이런 건 무인-기계-위탁으로 돌렸을 텐데!), 기껏 이탈리아어에 익숙해졌더니 독일어에 당황하거나 하는 일들을 거쳐 열 한시간을 날아 인천으로 돌아간다. 손가방에 배인 러쉬 워터멜론(수익의 70%가 팔레스타인의 절단장애인 의료지원에 사용된다고 한다)의 강렬한 향이 눈빛이 부드럽고 색소가 옅은 검역견과의 짧은 만남을 주선한다. 아뇨, 과일은 없어요. 가방에 든 음식은 과자랑 파스타 뿐입니다. 세관을 통과해 공항 로비로 나오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인천공항 재파업을 목전에 둔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의 조끼 위의 몸자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고민을 하고 돌아온 여행의 마무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나의 삶과 운동의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느껴진다. 날짜를 확인하면 빌려왔던 하루가 사라진 것이 묘하게 손해 본 기분이 든다. 여행 내내 셔터를 눌러 댄 필름 여섯 통분의 사진이 수동카메라의 조작 미숙으로 찍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현상소에서 깨닫고 절망한 다음(내 베스트 컷들이!) 사진을 기대한 L 동지 일행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대신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 중 괜찮은 것들을 보내준다. 아직 시차에 고통받고 있는 동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감상평 하나가 눈을 끌어 심야 티켓을 끊는다. 초반부터 '아나키스트 활동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반정부 투쟁을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동시에 T 동지의 '너희 나라 아나키'의 취급에 대한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도, 우리나라에는 '극좌'가 존재하지 않는다던 누군가의 평가마저도 이해한다. I 동지가 고공농성과 도크 점거를 보고 감탄한 다음 “그 사람들은 감옥에 갔어?”라는 물음부터 꺼냈던 것이 어떤 논리에서 온 것인지도 생각한다. “감옥은 안 갔어. 우리가 안 가게 탄원했어. 가끔 조사는 받았어.”라는 대답에 얼굴에 번지던 미소도.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고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파리에서도 런던에서도 혁명의 전운을 느끼고 앞으로의 세계가 어디로 나아갈지, 이 역동이 한국에는 언제 어떻게 다다를지 상상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길거리며 시위 한복판을 걷는 동안 나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는 현재진행형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혁명은 한순간의 커다란 완결이 아니라 작은 변화들이 만드는 흐름에 대한 정의라는 것. 매일매일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변화'들이 서로 연결되어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다다르는 발걸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것이 내가 자리한 곳이 아닐 이유는 없으며, 오늘 우리의 집회도 몇십 년 후에는 혁명의 흐름 위에서 이야기될지도 모른다는 것. '연속혁명'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러시아 혁명이며 한국 노운사 따위의 성공과 실패, 반복되는 진전과 퇴보를 떠올리며 '말이 쉽지. 혁명이란 순간 같아도 전후 몇십 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데, 지금의 우리에게 그런 큰일을 연달아 터뜨릴 기반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좌파 운동이나 체제전환에 대한 이해 없이 장엄한 수사로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냉소도 커져만 갔다. 세계가 나빠져만 가는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라는 무력감에 짓눌려왔다. 지금은 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이유는 사실은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할 때조차 언제나 같은 적과 함께 싸워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혁명이란 연표 위의 한 점이 아니라 시공간적인 연속성이 만들어내는 흐름 그 자체이며, 역사라는 이야기의 모든 사람들이 연루되고 또 구성하는 것이며, 오늘 나의 한 걸음 또한 돌아갈 수 없는 변화를 만드는 데에 가담하였다면 나는 이미 '라 비바 레볼루시옹'의 일원이라는 것을. 말 그대로의 투쟁, 영원한 투쟁One Battle After Another. 여행을 떠나는 길에는 막연하게 '집회에 나간다'거나, '활동가를 만난다'라는, 마치 세상 어디서든 일요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의 심정으로 내가 평소에 해 오던 것을 하러 가리라고 생각했다. 막상 현지에서 만난 동지들은 어엿한 사회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공통된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회상이나 운동의 양상, 방향성의 차이 등을 감안하더라도 스스로의 이론적 토대의 부실함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 간극을 곱씹는 동안 '사회주의자 동지들의 관심사를 듣는 것도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지만 어쩌면 나는 노조활동가를 만나서 노조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다음 목적지는 독일의 금속노조 사무실이 될지도 모르겠군' 같이 자신의 관심사의 좌표가 점차 선명해져가고,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 운동, 사회주의 운동에서 노조운동의 범주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방향성에 대해 시야에 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 즐겁고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얻게 된 의문과 해답들을 좀 더 이해하거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전체상 위에서 나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운동의 목표와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연결될 필요성을 느끼거나, 누군가에게 여러가지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개념과 언어를 가지거나 하고 싶은 마음이 사회주의의 이론과 역사를 공부하는 일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좀 더 알고 싶다. 배우고 싶다. 먼 나라의 먼 시대의 사람들이 해왔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전진의 교육은 새로 조직된 이들에게 지식과 통찰을 제공하였다'고 T 동지에게 스스로가 한 말을 믿는다면, 한국과 세계의 운동사에 대한 개괄적 이해가 실제로 먼 나라의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므로 이 모든 게 강단 위의 헛소리가 아니라 실재하는 역사이고 삶이며 운동의 실천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지식이고 누군가를 키우고 또 연결하는 일이라면 조금만 더 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다양한 사회 속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며 계속해서 생각했던 것은, '어딘가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은 어딘가에서는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또 어딘가에서 당연하다고 믿는 것도 다른 곳에서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 골목길의 가게나 마트의 진열대에 수많은 종류의 햄이나 치즈가 밑반찬처럼 늘어서 있는 풍경, 몇백 년씩 된 낯선 모양의 건축물들. 혹은 터무니없이 들릴 만큼 강력한 총파업과 봉쇄 행동, 관광지 한복판에 나타난 트랙터와 그에 대한 경찰의 태도, 거리를 메운 상징과 포스터의 전쟁. 좌파 정치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아나키스트와 마오주의자가 있는 나라. 우리가 쿠바의 미군정과 혁명에 대해 아는 만큼만 북한의 정세에 대해 아는 사람들. 그리고 거기서 열 몇시간을 날아가면 옛 왕궁 근처의 빌딩에서 사회주의의 기초를 가르치기 위해 '중국과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라는 챕터에 한 강 전체를 할애하는 분단국가가 나온다. '멀리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인지도와 동의도의 차이. 우리가 물리적인 세계를 산다는 것이 빚어내는 간극들. '지정학'이라는 개념의 무게에 대해 새삼 느끼며 역사지리학자인 G 동지가 수업에서 할 법한 이야기들도 생각해본다. 다음에 그를 만날 때엔 좀 더 괜찮은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결국 동화 속 공주님이 뾰족한 성에 사는 것도, 에펠탑이며 모나리자도, 선진국에서는 허구한 날 파업으로 지각한다는 소문도, 사회주의 혁명을 삶의 목표로 삼고 내다보며 준비하는 사람들도, 어떤 이야기나 메타포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손을 거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나에게 그건 정말로 그곳에 가서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어쨌거나 직접 보고 만 이상 다시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고,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진짜인'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이며 결정 같은 것들과 이전에도 앞으로도 상호작용하리라는 진실이리라. 떠올릴 때마다 심란해지는 사실이지만 이론에 선행하는 경험을 부정할 재간은 없다. 이따금 피렌체 시위에서의 영원한 돌림노래가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집회에서 찬바람 부는 이태원을 행진하며 만난 외국인들의 환대에 이어진 하늘 너머 어느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의 그것을 떠올린다. 다른 장대한 목표들과 함께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것'을 사회주의자의 현시점에서의 중요한 과제라고 하는 강의자료를 보며 바다 건너 '제국'의 동지들의 진지한 고민들을 떠올린다. 돌아온 곳을 새로운 눈으로 마주하며 여행은 다시금 이어진다. 일곱 시간 뒤에서, 혹은 두 세기를 넘어서, 사십 오 년 전으로, 어쩌면 바로 지금. 바다를 건너서, 철조망을 넘어서, '제국'이 그은 금에도 신경 쓰지 않으며, 우선은 이 손이 닿는 곳에서부터. 백만 가지의 모습으로 서로에게 손을 뻗고 그렇게 누구도 선 뒤에 남겨두지 않아야만 비로소 내일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혁명은 시작된다.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인터내셔널'일지니, 기립하는 것 외의 선택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끝) [지난 글 보기]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2) 이탈리아 피렌체2026-01-27 | 조회 8,682 -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2) 이탈리아 피렌체이탈리아 - 피렌체 아침에 출발한 비행기가 약간의 연착을 거쳐 피렌체 공항에 도착한 것은 정오 남짓. 작은 도시의 작은 공항인데도 바로 앞의 정류장에서부터 군인들을 마주쳤다. 아, 지금 온 트램은 시내로 안 간다고요? 파리에서 런던으로 넘어갈 때의 영어가 이렇게나 친근한 언어였던가 하는 기분과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어는 한 문장 중에 한 단어만 정도 귀에 들어온다. 이후 이탈리아 여행 내내, 어쩌면 경찰보다도 많은 군인을 길에서 마주친다. 밤에는 검문에 걸린 듯 군인에게 둘러싸인 사람들도 본다. 마지막 날 들른 볼로냐 중앙역에는 군용 인식표를 만들 수 있는 기계까지 있었다. 관광도시라서? 혹은 착륙하자마자 외교부가 칼같이 보내온 ‘치안과 마약에 주의하라’는 문자와 같은 맥락으로? 캐리어와 함께 매장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건너와 체크인을 하고 시간을 보니, G 동지가 연결해 준 오늘 시위에 참석하는 L 동지를 미리 만나 설명을 듣겠다는 계획은 물 건너간 듯하다. 시작 전까지는 도착하겠다는 연락을 보내고 간단한 세부사항을 묻는다. “공장을 점거하여 집단해고된 노동자들이 친환경적이고 자주적인 공장 운영을 위한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는 시민사회의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런 종류의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며, 대개 경찰과의 충돌은 없다.” 좋군요, 우리도 노동자-자주관리 기업이 드물지만 존재합니다. 첫 끼로 햄과 치즈가 든 피자-빵(아마도 파누오초)을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해치우고는 버스에 오른다. 숏폼으로 시위 영상을 보는 승객의 옆자리에서 금속노조 조끼를 입는다. 10월인데도 아직 여름이라는 기분이 들 정도로 햇살이 따갑고 날씨가 더워서, 노조 모자도 가져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 Collettivo di fabbrica GKN 주최.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는 다비드 상이 전시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려 대학 뒤편의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경찰이 둘쯤 보이고, 가방에 여러 개의 퀴어 플래그 뱃지를 달거나 쿠피예를 걸치거나 노란색 깃발(나중에 현장의 동지에게 유명한 반군사 단체의 깃발이라고 듣는다)을 든 사람들이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걸 보고 안심하고 따라붙는다. 졸업 시즌이라 붐비는 대학교 앞을 돌아 샛길로 들어가면 광장에 도착한다. 집회 시작 전부터 투쟁 굿즈 가판대며, 동지들이 선전물을 나눠주는 작은 테이블, 모금함을 든 사람이며 책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 아나키즘이나 반-시온주의 상징 등과 함께, 한 손에는 팔레스타인기를, 한 손에는 투석구를 든 유명한 시위대의 사진이 뱃지로 판매되는 것을 보며 문화의 차이를 느낀다. 동시에, 그 모습이 오늘 시위의 테마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매대 앞에서 가진 현금을 가늠하다 슬로건이며 핀버튼이며 마그넷 같은 것을 몇 종 산다. 배포대를 접을 준비를 하는 동지들과 인사하고 유인물을 받아든다. 동지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는 'Solidarlity' 한 단어만이 귀에 꽂혀온다. 다양한 단체의 깃발들이며 행진을 위해 길게 펼쳐진 현수막들은 붉은색과 흰색이 주된 색조로, 천 위에 손으로 쓰고 그린 것이 생각보다 많다. 확성기를 들고 행진 내내 노래를 부르게 되는 영어를 잘하는 동지가 '우리를 잃어버리면 이 못생긴 깃발을 따라오면 돼'라고 했던 오늘 함께하게 될 조직의 깃발도 붉은 천 위에 손으로 쓰여있다. 크기가 크거나 깃대가 길지 않아서인지 대부분의 깃발이 마치 손깃발을 키워놓은 양 흰색 플라스틱 깃대에 천 전체가 걸려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비드가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노동 의제 시위이겠거니 한 것 치고는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상징들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행진이 시작되면 동지들이 내내 부르는 노래들 또한 그러하다. 필름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자니 행진이 시작할 때쯤 '저런 걸 찍어야지'라며 한 동지가 앞쪽을 가리킨다.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저게 뭐냐고 기겁하자 '스포츠 경기 응원 등에서도 사용되는, 근사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덕덕고(DuckDuckBot. 구글 등과 달리 개인정보 보호를 모토로 계정 기능, 검색어 수집 없음을 특징으로 하는 일부-오픈소스 검색엔진)로 'Fumogeno'의 이미지 검색 결과를 보여줘서 에펠탑 앞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납득한다. 한편으로는 화기로 오인되지는 않는 것인가? 경찰에게 제지받지 않아? 하고 한국에서 온 연대자로서는 머리가 멍해진다. Insorgiamo: '기립하라, 봉기하라'. 시위의 주최단위인 GKN 피렌체 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사회적 운동. 기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구호. 눈부신 햇살 아래 어느 단위든 씩씩하게 행진하지만, 나의 일행들은 한눈에 봐도 작은 단위인데도 쉼 없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하고 북을 두드리는 모습이 대오 안에서도 존재감 있게 느껴진다.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클라이맥스. 영원히 불나비를 부르며 진격하는 말벌부대를 상상해보라. 탄핵 정국의 '축제 같은 시위'에 대한 누군가의 엄중한 지적이 한층 더 공허하게 느껴진다. 잠시 대오가 멈추고 노래가 잦아드는 쉬는 시간에도 지치지도 않고 서로 장난치고 입을 맞추고 방금 전까지 부르던 네타냐후를 규탄하는 노래를 어깨에 힘을 빼고 흥얼거리는 것을 보며 그 활력에 감탄한다. 동시에, 시위의 행선지도 종료 시간도 모르고, 불리우는 노래도 구호도 평소와는 모두 다르고, 몇 시간 전에 처음 밟은 땅의 말은 제대로 알아듣지도 외치지도 못해서 동지들의 성량에 뒤지지 않기 위해 조끼 주머니의 '응급용 카주'를 꺼내 열심히 불던 입장에서는 '나도 저런 동지들이 있는데, 저런 거 할 줄 아는데' 하고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고, 동시에 내가 광장에서 만나온 동지들을 하나씩 겹쳐보며 나름대로 마음으로 다가서 보기도 한다. 파리와도 런던과도 다른 직선적인 건축양식.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오래된 건물들 위로 맑은 날씨의 빛과 그림자가 드리우며 풍경을 만들고, 몇 시간에 걸쳐 걷다 보면 해가 기울어 감에 따라 시가지는 점차 얼굴을 바꾸어간다. 통일감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은 평범한 가정집에 내건 팔레스타인 깃발이며 인클루시브 프라이드 플래그, 낯익은 배색으로 늘어놓은 빨랫감, 무심하게 난간에 걸쳐진 쿠피예, 때때로 육교 위에서며 가게 위층이며 열린 창 너머로 환호를 보내오는 사람들. 생각 이상으로 대오는 컸고, 경찰은 보이지 않았고, 퀴어문화축제나 퇴진광장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종류의 환대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와 빈도로 접해서 얼떨떨해진다. 여기서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좌파 운동 바깥에서도 이렇게나 지지를 얻고 있단 말인가? 대오가 잠시 멈추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모자의 머리띠는 무슨 의미인가?” 단결, 투쟁, 노동조합 내셔널 센터 로고입니다. “어디서 왔나?” 한국입니다. “한국의 팔레스타인 연대는 어떤가?” 어, 오늘 열린 2주년 집회에 천명 정도 왔습니다. “좋군. 오늘 뉴욕에서 열린 No Kings 시위에는 10만 명 이상이 모였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인터내셔널?) 그래, 인터내셔널, 당신은 이 이야기의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시위에 나와 우리를 지지해줘서 고맙다.” '이 이야기의 올바른 편'이라는 단어가 서정적으로 들림과 동시에 아주 높은 곳에서 스스로를 내려다보는 듯한, 유럽에서 내내 느껴왔던 오늘의 나의 운동이 시공간을 넘나들며 연결된 거대한 흐름 위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만든다. 얼마쯤 지나자 같은 노래가, 같은 구호가, 반복되는 단어가 점차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하고,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광장이며 이스라엘이며 팔레스타인이며 평화이며 종식 같은 단어들을 '고맙습니다'나 '미안합니다'보다 먼저 익히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시위대의 기세도 약간은 잦아들어 대오가 잠시 멈추면 차도에 앉거나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이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프랑스도 한국에 비해 흡연에 관대하기는 했지만, 행진 한복판에서? 전노대며 결의대회 때마다 들리는 사회자의 '흡연은 대오 밖에서'라는 잇따른 고지와, 대오가 멈추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옆으로 빠졌다가 어느새 돌아오는 금속노조의 아저씨들을 떠올린다. 운동의 실천과 면면에서는 의제만 조금 바뀌어도 언제나 새로움을 느껴왔지만, 정말로 함께 걸으며 무언가를 외친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낯설다. Scuola per la Palestina: '팔레스타인을 위한 학교'.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이탈리아 교사 네트워크 Società operaie di mutuo soccorso (SOMS): 이탈리아 노동자 상호부조협회. 1848년 혁명의 영향 하에서 탄생함. '마르완 바르구티를 석방하라' '투쟁하는 GKN 노동자들과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FLC-CGIL Università di Firenze: '피렌체대학교 이탈리아 노동총연맹(Confederazione Generale Italiana del Lavoro, CGIL) 지식노동자연맹(Federazione Lavoratori della Conoscenza , FLC)' '공공재 수호를 위해 단결' '누구든 경찰을 싫어한다(프랑스어)' 몇 시간씩 걸어 슬슬 지쳐갈 때서야 하루 동안 그다지 먹은 게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조금 긴 휴식 이후 행진이 다시 출발하기 시작하자, 기운을 찾은듯한 시위대와 대조적으로 나이든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인도 쪽으로 빠져나와 대오를 배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언제 끝나는지 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점차 시가지를 벗어나, 해가 기울어 서늘한 색으로 변한 하늘 아래 아스팔트가 깔리고 근처에서 차가 다니는 황량한 국도 같은 곳을 걷고 있었다. 가드레일을 몇 번 넘다 보니 일행들과도 흩어지고, 그럼에도 여전히 앞뒤에서 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 대오를 따라간다. 걷다 보면 머리 위에 걸린 표지판의 공항 마크가 눈에 들어와 불현듯 오늘의 목적지를 깨닫는다. 아, 공항. 사람도 많고 좋지. 뭔가…선전전이라도 하는 건가? 한참을 걷다 보면 예상대로 오늘만 두 번째 보는 낯익은 공항이 보이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건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상상 이상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작은 도시의 작은 공항의 유리문을 들어서자 모든 곳에 사람이 차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접한 새로운 전략, '주요시설 점거'. 이 정도의 시위대가 이 정도의 공간에 들어가면 물리적으로 공항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밀집한 사람들의 냄새와 열기. 쉼 없이 공간 안을 울리는 구호와 노랫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거나 가끔 양 주먹을 쥐어 보이는 일종의 항의행동을 한다. 주최단체의 긴 현수막이 공간을 만들며 선전물의 역할을 한다. 드문드문 나갈 길을 찾지 못해 당황한 이용객들이 보인다. 시위대를 따라 앞으로 나가다 보면 공항의 반대쪽 끝에 가까워진다. 한쪽 끝에는 한 무리의 세룰리안 블루 색의 헬멧과 검은 슈트로 온몸을 감싼 사람들-아마도 이 나라의 기동대가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 젠더를 인식할 수 있는 기호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인지 생각보다 여성의 비율이 높다고 느껴 약간의 의문에 빠진다. 머잖아 그들이 삼단봉으로 나보다 조금 앞 열에 있던 참가자들을 구타한다. 순간 얼어붙기도 잠시 곧이어 사람들이 기동대 쪽으로 움직이며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이 사람들에게 밀집 사고 트라우마는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 반, 항의 반의 생각을 머릿속에 띄우면서도 앞뒤의 사람들에 섞여 속절없이 한 사람분의 부피를 보탠다. 얼마지않아 압력이 사라지고-대치가 풀리고-저지선을 넘는 데에 성공해 그때까지 기동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오른쪽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로 걸음을 옮긴다. 기동대 몇몇만이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난간 너머로 삼단봉을 휘두르며 때늦은 저지를 시도한다. 2층에는 탑승 게이트가 보이고(도착했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작은 공항이다), 여전히 팔레스타인 깃발 한 쌍이 시위대의 머리 위에서 힘차게 춤추고, 1층보다 더 좁은 공간에서 여전히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른다. 영상을 촬영하자 몇몇이 저지하는 제스처를 건네 스마트폰을 내리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습을 화면에 담고 있는걸 보고 눈치를 보며 다시 카메라를 켠다. 넋이 나간 상태로 아직 본 적 없는 채증 카메라를 뒤늦게 염두에 두고 구호가 적힌 슬로건으로 얼굴을 가리자 누구는 손짓으로 내리라고 하지만('테러리스트'를 연상해서?) 막상 해산할 때 보면 여러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원이 공유하는 명확한 룰은 성립하기 힘들다. 갑자기 누군가가 큰 소리로 선언하고 사람들이 중간중간 환호한다. 한층 기세를 얻은 노래와 구호가 이어지고, 그것이 잠잠해지면 대오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올라온 계단으로 천천히 질서 있게 내려온다. 이 많은 인원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사고가 없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기동대의 저지선 뒤쪽에 있던 작은 카페의 진열장 유리가 산산조각 나 계단 앞부터 쏟아져 있다. 아마도 충돌에 휘말려 부서진 거겠지. 혹은 시위대에 대한 반감을 염두에 두고 기동대가 부쉈거나. 'Sigfrido Ranucci(이탈리아의 언론인. 이 시위가 있기 이틀 전 마피아에 의한 차량 폭탄테러의 표적이 되었다.)는 우리들 중 한 사람이다. 기립하라!' 부서진 진열장. 바닥에 유리조각이 쏟아져 있다. 나가는 길은 들어올 때와는 반대쪽 출구라 내려오면 머잖아 자동문을 마주친다. 공항을 나서기 직전 인파 속에서 L 동지가 나타난다. 나의 얼굴을 보며 걸어온 첫마디는 “나는 몰랐다”. 생각지 못한 강도의 현장을 맞닥뜨린 충격과의 간극에 뭔가 따지고 싶어졌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게릴라 행동이 모든 참가자들에게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주차장에서 다시 북소리와 음악과 구호를 발산하며 대오가 모이기를 한동안 기다리고, 공항을 나와 아스팔트 도로 위로 오르면 먼 하늘에서부터 희미한 저녁노을이 번져온다. 아까의 선언 같은 것으로 힘을 얻은 모양인지 시위대는 다시 목청껏 노래하고, 이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는 나는 동지들 곁에서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터덜터덜 걸으며 이제는 뇌리에 지져진 돌림노래를 카주로 따라 연주한다. 그런 와중에도 하늘은 시시각각 얼굴을 바꾸어가고 공항을 나오면서부터 심심찮게 피어오르던 붉은 색과 녹색의 연기며 때때로 쏘아 올리는 불꽃 또한 허공을 가르며 감색으로 깊어져 가는 배경을 점차 아름답게 수놓는다. 여러 가지 생각은 들지만 역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처음 출발했던 곳 인근에서 대오 정비를 하고 해산할 즈음엔 이미 밤이 깊어 사위가 어둑하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네 명 정도의 동지들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서다, 행진 진행 방향의 끝에서 경찰 밴 몇 대와 삼단봉과 방패를 들고 있는 십수 명의 기동대를 찾아내어 등골이 서늘해진다. 상상 이상의 현장이었음에도 아무도 연행되지 않은 것에 새삼 안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2층의 열린 창 너머로 환호하며 인도를 걷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가족(아마도 아래층 가게를 운영하는)들과 거기에 응답하는 동지들의 대화가 퍽 다정하게 들린다.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다 창 아래의 피자가게로 별 고민 없이 들어선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나에게 돌아온 첫 마디는, “그 옷은 무엇인가”. 우리 노조 유니폼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조끼가 노조의 상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매번 설명하면서 다시 놀란다. “한국의 전쟁무기 수출은 팔레스타인 학살에 기여하고 있다” 어, 우리 '진짜 사장'은 한화인데, 한화는 '한국 화약'의 약자이고 당연히 전쟁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고 있다. “한국의 팔레스타인 연대는 어느 정도인가” 음…오늘 2주년 집회에 천 명쯤 왔다. 그래도 작년보단 많아진 것이다. “괜찮네, 잠깐, 몇천? 아니면 일천?” 일천(현장의 동지로부터 시작 시에 집계된 인원만 들었다). “적군…. 하지만 거긴 머니까 말이지” 이 대답에 새삼 지정학적 요건이라는 변수를 상기한다. 지중해의 맞은 편. 가자행 선단을 출발시킬 수 있는 위치. 수무드 선단의 안전에 따라 파업을 결의한 바다 위의 항만노동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정말로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대체로 번역기를 사용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행동력이나 언어나 IT능력과 같은 교섭력이 좋은 비교적 젊은 동지 한 명이 소통을 맡고, 연장자로 여겨지는 차분한 인상의 한 명 정도가 토의의 중심이 되어 의견을 내거나 취합하거나 하는 흐름으로, 이와 비슷한 모습은 다음날 로마에서도 보게 된다. 골판지 상자 위에 무심히 올려져 나온 나폴리 피자에서는 앤초비의 짠맛이 두드러진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람 하나당 피자 한 판으로, 일행과 나누거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접시의 튀긴 공 같은 것 중 붉은 색은 아란치니. “삼성 노조가 파업한 것은 팔레스타인 연대의 의미인가?” T 동지도 전국삼성노동조합의 파업 이야기는 알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새삼 삼성의 인지도와 영향력에 놀란다. 더불어, 이러한 관점의 차이에서 현재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가 얼마나 주된 담론으로 여겨지는지를 체감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의 파업은 아니라는 대답에 이어 겸사겸사 삼성의 무노조 경영방침이나 전삼노 간부들의 비리며 한국에서는 정치파업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거쳐 노조 간부들의 총파업에 대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까지 흘러간다. 노조관료주의는 아직 국적과 소속을 불문하고 어느 테이블에서도 실패한 적 없는 주제로, 대화를 통해 이탈리아 또한 비슷한 문제가 있음을 확인한다. “오늘 시위는 마음에 들었나?” 마음에 들었지만,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공항 점거는 사전에 계획된 건가? 우리는 오늘 시위에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퇴각했나? 왜 공항 2층에서 사람들이 기뻐했나? 일단 나는 이 시위를 공장 자주관리를 시도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의제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계획되었지만 고지되지는 않았다. 기뻐한 것은 아니고 점거를 통해 우리의 강력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대한 동의의 의미로 환호했다. 오늘 우리가 옹호한 공장의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기 위한 파업을 했기 때문에 해고되었다.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 하진 않지만, 최근 몇 주간 교착된 정세로 인해 가중된 압력이 터져 나온 것이다.” 요컨대 위력 행사이군. 왜 해고노동자를 지지하는 시위가 동시에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인지 납득했다고 전한다. 점거현장의 분위기와 대답을 겹쳐보며 '데모'가 무엇의 약자인지 새삼 깨닫는다. 시위에서 나온 구호나 노래들을 정확하게 알려주면 감사하겠다고도 말한다. “'멜로니 정부는 물러가라, 모든 것을 봉쇄하자, 파업하라, 파업하라' 같은 반정부 구호를 많이 외쳤다.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맞서 '강에서부터 바다까지,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 같은 구호도 외쳤다. 파업을 주도한 노동자들을 위한 구호도 많이 외쳤다.” 이탈리아어 원문을 훑어보며 그게 이런 뜻이었군. 하고 끄덕인다. 나는 이제 이탈리아어로도 '파업하라'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감사합니다'는 어떻게 말하는지 모른다. 말이 나온 김에 좋아하는 민중가요도 물어본다. 이탈리아 파르티잔들이 부른 'Fischia il vento'를 제일 좋아하지만 인터내셔널도 좋아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가?' 고민 끝에 임정득 가수님의 '벨라 차오' 번안이나 금속노조가, 팔레스타인 정기집회에서 자주 듣던 'Leve Palestina, krossa sionismen' 등을 답한다. 한국에서 '파르티잔(빨치산)'은 과격파 좌파 운동가를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금속노조가의 가사에 흥미를 보이기에 영상을 찾는 김에 나온 김형수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지회장의 고공해제 영상도 보여준다. 내친김에 2022년 파업 당시 부지회장의 사진도 보여준다. 눈빛이 형형한 다박수염의 남자가 올라간 이유를 대답하다 보면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현실을 거쳐 한국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조조직률 이야기까지 넘어간다. “북한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좌파 전반의 통일에 대한 희망, 우파의 전쟁 위협과 매카시즘의 수단,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 이북에서 온 조부의 이야기는 이 땅에서 드물지 않다는 설명을 한다.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북한이 주변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가?” 한국인으로서는 의외의 접근에 잠시 멍해진다. 오늘만 몇 번을 이렇게 되는 것인지. 북한이 기근과 빈곤을 거치며 퇴보한 이유 중 하나로 소련의 붕괴를 꼽을 수는 있겠으나, 북한에 이미 자유시장경제가 자리를 잡았으며 돈이 있다면 외국의 문물도 어느 정도 접할 수 있다는 것, 나의 관점에서 현재의 북한은 단순한 세습독재국가에 가까우며 매체에서도 자본주의의 영향보다는 내부의 모순이나 병폐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나면 저쪽에서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심화된 질문이 들어온다. “그 사람들이 굶고 있는가?” 북한 내에서 외국 통화가 더 가치가 높은 현상이며, 외국 친지로부터의 송금이나 외국 주재 요리점, 단속을 피해 중국으로 일하러 다녀오는 등이 GDP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설명한 다음, 음식이 아예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으나 가치체계의 붕괴와 불평등이 결과적으로 인민의 배를 고프게 한다고 말한다. 국가보안법 등에 대한 설명과 함께 몇 년에서 몇십 년이 지나서야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참고하므로 현재 정세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고도 말한다. 동지들이 접하는 주류 언론에서는 북한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설명을 듣자, '굶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은 나에게 어릴 적부터 좌우를 막론하고 이야기되어온 익숙한 이미지이지만, 어쩌면 저 동지들에게는 오늘 새롭게 듣는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뒤늦게 생각한다. 한국에는 사회주의자 K-팝 스타가 있는지도 물어온다. 표정을 보니 이전보단 격의 없는 질문이라고 느껴져 짧은 대화 속에서도 거리감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정치적 지형 때문에 가수가 자신의 정치신념을 밝히기는 쉽지 않으며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없지만 부적절한 노동환경에 대해 고발하기 위해 국회에 출석한 아이돌은 있다고 말한다. 시간은 이미 10시가 넘어 해산할 때가 다가오고,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우리의 전략에 대해 묻는다. 피로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한국의 분단이 미-소의 대리전에서 왔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며 사회주의의 국제주의적 측면,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확실하다고 말하자 좌중은 일제히 환호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돌아가는 길에 천과 깃대가 분리되지 않은 깃발을 말아쥐고 어떻게 할지 의논하다 누군가가 받아들고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어딘지 익숙한 풍경처럼 느껴져, 다음에 또 봐요, 하고 인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돌아가는 길에 신나서 셔터를 눌렀지만 이 정도는 서막에 불과했다 두어명의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검문(같은 것)을 겪고 있는 장면을 마주친다 [지난 글 보기]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1) 프랑스, 영국 [다음 글 보기]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3) 이탈리아, 스위스, 다시 한국2026-01-27 | 조회 8,300 -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1) 프랑스, 영국프랑스 가족의 개인전으로 10월 초 파리 방문 예정이 잡혔다. 유럽 여행에 대한 생각은 전부터 있었지만 급하게 계획을 시작해, 가이드 북 한 권에 기대어 파리-런던-로마-인터라켄 루트로 일정의 개요만 정한다. 마침 9월의 파리는 한창 총파업으로 떠들썩했다. 9일 아침에 출발해, 태양의 운행을 거슬러 열 네시간을 날아가면 현지 시각으로 같은 날 오후에 착륙한다. 줄곧 밝기만 한 창 옆에서 내내 졸면서 마비된 시간감각까지 더해져 하루를 득본 기분을 느낀다. 시내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가족과 함께 시내에 머무르며 숙소와 갤러리가 있는 파리 3, 4구역 위주로 움직였다. 남쪽으로 강을 끼고 상대적으로 도시의 부가 집중되는 지역으로, 관광지나 미술관이나 브랜드 매장, 그리고 실외기도 설치되지 않아 에어컨이 없는 오래된 건물들이 잔뜩 있었다. 3구의 퀴어 씬에 관심이 있어 LGBT 센터에 방문하고 싶었지만 일정이 허락하지 않고, 대신 인근의 문 앞에 프라이드 플래그를 다섯 개쯤 건 성인용품점이나 횡단보도의 무지개 정도만 눈에 담는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커다란 그림 곳곳에는 프랑스 국기의 모티프가 산적해 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술과 혁명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파리 3구 인근에서 찍은 사진. FREE PALESTINE(팔레스타인에 자유를), EAT The Rich(부자를 잡아먹자), ACAB(모든 경찰은 후레자식이다), Fuck le macronisme(마크롱주의 엿먹어라) 같은 낙서들이 눈에 띈다. 13일 오후에야 혼자가 되어 런던행 유로스타가 있는 10구의 파리 북역 근처 도미토리로 이동했다. 이전 일정에서도 가끔 경찰에 대한 반감이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를 표시하는 그래피티나 스티커를 보긴 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역(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승을 기리는 의미라고 한다)에서 내려서 도미토리로, 또 거기에서 북역이며 생드니의 무역노조 사무실 등을 오가는 이 하루 저녁 동안에는 그동안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양의 좌파적 색채의 포스터나 연대의 슬로건을 볼 수 있었다. 파리 북역에서 파리 북역은 '이민자와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는', '치안이 나쁜' 지역이라는 인터넷의 '경고'를 떠올린다. 파리 북역 인근은 세계요리점이나 수입 식료품점, 전통의상점 등이 있는 서아시아계 이민자 거리로, 담배 같은 물건들을 파는 행상인들이 종종 있었다. 도미토리에 도착할 무렵 다음날 북역 인근에서 만나게 될 T 동지에게 저녁의 집담회 일정을 추천받아, 일정을 변경해 체크인 후 바로 출발한다. 목적지는 북역에서 고속열차로 한 정거장을 가면 나오는 93번 지역인 생드니. 역에서 무역노조 사무실까지는 북역보다 피부색이 어둡고 아프리카계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고, 파리 중심가보다는 좀 더 현대적이고 개량된 건축양식의, 길에는 트램이 다니고 통속적인 품목이 늘어선 슈퍼나 저렴한 빵집 등이 있는 한적한 주택가였다. 교통이나 입지, 주변 환경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고 파리 시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위성도시로 느껴졌다. 생드니에서 역에서 주택가로 들어가자 T 동지가 연결해준 집담회 참가자 I 동지가 근처까지 나와 같이 올라갔다. 긴장한 탓에 동지의 유창한 영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사무실을 향했지만, 무역노조 사무실을 보고 웃으며 카메라를 꺼내 들자, 시선을 따라간 끝을 보고 같이 웃는 것으로 서로가 동지임을 확인한다. 생드니의 무역노조 사무실. 이탈리아에서도 종종 보게 될 스프레이로 그린 낫과 망치를 이때 처음으로 보았다. 집담회가 이루어진 공간은 작고 조명이 약했다. 참가자들은 철제 테이블을 ㅁ자로 두고 둘러앉았고, 문이 열려있어 방 안으로 다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입구 쪽에 의자를 두거나, 비치되어 있는 남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젊은 여성으로 보이는 사회자가 노트북을 보며 긴 이야기를 끝마친 다음 다른 동지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 이어졌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통역 앱을 켜거나 I 동지에게 묻거나 하면서 포착한 개념들: [9월 사회운동과 그 결과 | 노조관료화(투쟁을 꺼려하는 간부들) | 마크롱의 재선 요구와 제도권 좌파 정당들의 선거만능주의 | 투쟁을 통해 급진 민주주의 요구를 제시할 필요성 |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이탈리아의 총파업 | 9월 운동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로 조직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의 조직의 사후전략 | 마린 르펜에 대한 비판(이베리아 포퓰리즘(스페인 복스당)과의 연관?) | 제5공화국의 끝 | 마크롱에 대한 반감(탄핵이라는 단어가 나옴) | 2019년의 영향(체념? 소진?) | 학생들의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 파편적인 정보들이었지만 시위와 총파업을 기대하고 도착한 파리가 생각보다 조용해서 의아했던 부분들이 어느정도 정리되었다. 그들은 지난 정국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방향성을 계획하고, 9월에 조직된 사람들, 특히 많은 젊은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요컨대 나는 4월 20일의 서울에 도착해 비상행동 시위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6시 반부터 시작된 집담회는 8시 반 정도까지 이어졌고, 우리 이후에는 다른 팀이 회의실을 이용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뒤풀이는 인근의 프렌치프라이가 맛있는 노천 바. 프랑스는 야외 테이블이 있는 식당이 많다. I 동지와 번역기로도, 또 영어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부르주아지bourgeoisie'나 '레짐Régime'과 같은 단어들이 프랑스어의 발음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느껴지는 혁명의 나라라는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22년 도크게이트 점거와 25년 고공농성을 포함한 거통고의 투쟁 이야기를 하자 멋지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감사와 함께 따라오는 석연찮음을 말로 만들어, “그러나 우리는 선진 노동자와 후진 노동자 간의 간극이 크다. 프랑스처럼 다 같이 안전한 총파업을 하고 싶다. 당신들은 어떤 강력한 투쟁을 해왔는가?” 하고 되물었다.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는 동지에게 “Dangerous?” 하고 묻자 “위험한” 투쟁은 아니라고 하며 예시들을 들어 보였다. “이를테면 연료를 수송하는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한다면 경찰차도 도로 한복판에서 서버린다”는 말을 하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결정적 액션'으로 주요 도로나 식료품점을 봉쇄하는 것을 언급했다. 한국의 노조운동에 결합한 관점에서 '봉쇄'라는 개념에 의아함을 느끼고 되묻는다.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점거할 수 있어? 실패한 총파업 같은 건가?” 하고 물으니 I 동지는 조금 난감해하다, “9월과 같은 정치, 경제적 요구가 결합한 대규모 운동에서는 수십만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와 기업 봉쇄 등이 연계되어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내일 동지들과 만나서 더 나은 설명을 듣도록 하라”고 이야기한다. 자리를 정리하며 건넨 “마지막으로, 당신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동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철도노동자인 A동지(모로코계 프랑스인으로 철도노조 파업을 포함한 다양한 캠페인을 주도했다.), 변호사인 E동지(노동 변호사이자 운동가.), 고등학교에서의 T와 대학 시절의 동지” 같은 사람들을 언급한다. “T 동지와 고등학교 동기였어요?” 하고 되묻자 어떤 체제나 구조와 관련된 것 같은 전부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 문장의 의미는 다음 날 T 동지와의 만남에서 대략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다음 날, T 동지와 만나기 전에 에펠탑과 마르스 광장을 구경한다. 마르스 광장 쪽으로 발을 옮기자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란색의 큰 슬로건 현수막, 뭔가 타는 냄새와 회색의 연기. 이어지는 환호성. 이것은…트랙터? 그리고 멀찍이 서 있는 방패를 든 경찰들…. 구경하느라 약간 늦을 것을 고할 겸, 연기와 타는 냄새에 놀란 마음으로 T 동지에게 “마르스 광장인데, 트랙터가 있다. 무언가의 데모인가?” 하고 설명하니 ‘좌파 농민단체의 데모’라고 했다. 발언 사이사이에 “oui(프랑스어로 ‘그렇다’라는 뜻)” 같은 화답을 들으며, 파리에도 전봉준투쟁단과 ‘맞습니다!’가 있군…같은 생각을 하며 떠나려는 찰나 시위대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곧이어 EDM이 나오며 몸을 들썩이거나 바닥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중에 T 동지는 “이들이 파리에서 시위를 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최근 조직된 한국의 젊은이들은 다들 트랙터를 좋아한다”고 말하니 “우리 쪽에는 농민 의제 시위에 그렇게 쿨한 이미지는 없어서 의외”라 한다.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지요. 방패를 들고 각반을 찬 경찰(기동대?)들. 검은 베레모를 쓰고 있다. '유기농 식품이 암을 예방한다' 농민연맹Confédération paysanne의 EU와 메르코수르 4개국의 무역협정에 대한 반대 북역 근처의 소박한 알제리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T 동지에게로 서둘러 향한다. T 동지는 일어가 유창한 일본계 프랑스인으로, 대화하는 동안 다른 프랑스 동지들의 질문도 일어로 번역하여 전달해주었다.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역사를 언급하며, 아프리카에 가지 않는 한 이런 제대로 된 알제리 음식을 먹어볼 일은 없으니 가족이나 친지들이 파리를 방문할 때에는 데려온다는 설명에서 연속혁명의 반제국주의적 지향이 생활속에 녹아서 드러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패스트리로 고기나 야채 등을 감싸 튀긴 알제리 요리 부렉Bourek 자리에 앉아 들은 첫 번째 질문은 “한국은 수험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 들었는데, 이에 대응하는 당사자 단체가 있어?” 예상을 벗어난 질문에 얼떨떨하며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느꼈다. 뒤이어 도착한 다른 동지의 첫 번째 질문은 “한국의 소자고령화(저출생 고령화의 일본식 조어) 문제는 수험압박과 관련이 있어?” “물론, 당연하게도.”라고 답했다. 이날 자리한 동지들은 (기억하기로는) 조직 산하 학생단체의 학생 운동가들로, 대학 내에서의 활동이나 조직화는 물론이고, “우리는 고등학생들을 조직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고등학교에서의' T. 간밤의 I 동지의 이야기의 퍼즐이 맞춰지는 동시에 고등학생 운동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조어였다. “한국의 대학생 운동은 어때? (일본의 전학련과 같은) 관련 단체들은 있어?” 라던가, 일본의 6,70년대 학생운동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의 전국 대학 단체 선거에서 동지들이 속한 조직 쪽의 사람들이 많은 득표수로 당선되어 대학 사회에서의 약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곧 올 동지는 파리 8대학에 버금가는 우수한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것과 같은 '대학 이름이 정체성이 되는' 설명을 들으며 여기에서조차…라는 생각과 동시에 우리 쪽에서 대공장노조의 이름이 거론되듯 학생운동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활과 운동의 주된 무대가 곧 정체성이 될 수 있으리라는 묘한 납득을 얻기도 하였다. 내가 나온 대학은 재학 당시 총여학생회를 폐지하는 행렬의 선두에 있었기에 소속감이나 주위 환경등의 영향으로 당사자로서의 대학생 운동은 참가한 경험도 아는 바도 관심도 많지 않았으므로,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지와의 만남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동시에, 관심사가 명확한 동지의 질문들에 '좀 더 잘 아는 사람이 설명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사회가 뒤숭숭해지며 마린 르펜과 같은 극우가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아나키스트나 마오주의와 같은 극좌(이 단어를 건조한 지칭으로 들은 것은, 살면서 사회주의 기초학습을 포함해 세 번째였다) 사상 또한 힘을 얻고 있으며, 우리 조직 또한 그들을 고려하여 활동의 전략을 짜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범좌파 자체가 세가 적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극좌라는 구분조차 잘 안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마오주의자 개인과 아나키스트 단체를 본 일이 있다”고 답하자, 한국의 '빨갱이' 탄압의 설명을 들은 T 동지는 놀라며 “그 사람들은 경찰이나 국가로부터 탄압받거나 하지 않아?” 하고 물었다. “딱히? 아나키스트라니, 그게 뭐야? 라는 느낌이지. 애초에 아나키스트라 긴밀하게 조직되지도 않고.”라고 답했을 때 그가 느꼈을 황당함에 대해서는 귀국 후 한 영화를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회원 규모가 몇 백명에 달하지만 파리의 물가 때문에 올해 말에야 사무실을 얻게 되는, '고등학생을 조직하고' '극좌를 염두에 두며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들. 이야기를 잔뜩 나누고 여러 가지를 알게 되어 즐거웠으며, 지구 반대편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같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에 설레는 시간이었다. 다른 사회에서 보이는 진보적 단면들이며 프랑스의 정치지형과 그 위에서의 생각치 못한 운동의 방식 등은 여러 가지 통찰과 스스로를 깨치는 경험들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험한' 투쟁과 '강력한' 투쟁은 같은 단어가 아니라는 깨달음이며, “정치파업은 금지되어 있으며, 경제파업을 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교섭과 조정을 거치고 국가기관에 신고 후 심사를 통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 거나, “아이가 셋 이상이면 출국할 때 줄을 안 선다는 것 따위가 우리의 저출생 정책이다”라거나 “우리나라 극우는 기독교와 그 계열 컬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식민지배의 영향인지 통상의 자국우월주의보다는 미국과 일본을 숭상하는 경향을 보인다” 같은 부분을 들을 때마다 T 동지와 그 일행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고 열 네시간을 가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은 당연하지 않고, 당연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 당연하게 되는 곳이 있다는 것.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영국 프랑스를 뒤로하고 유로스타를 통해 육로로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프랑스 동지들과 함께하다 보니 나의 동지들이 생각나 실례를 무릅쓰고 런던에 계시는 아는 동지께 연락 해봤다. 체류 기간 중에는 아쉽게도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대답을 듣고 결합할만한 단체나 시위를 추천해달라고 말하니, 영국의 팔레스타인 연대 행동 인스타그램 계정(@palestinesolidarityuk)과 더불어 '영국 정부가 시위자들을 보호하지 않고 있다. 경찰력을 동원해 대규모 체포가 이루어졌다. 신변 보호를 위해 집회 참가를 추천하지 않는다.'라는 답을 들었다. 계정을 둘러보니 현재 가장 가깝게 예정된 시위는 토요일로 참가일정이 맞을 것 같지 않고, 프랑스에서 집회에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과 팔레스타인 총파업이 강력하다는 이탈리아의 정세에 대한 기대를 안고 현지의 활동에 결합할 방법을 찾다 이탈리아의 한 사회주의 조직의 동지들과 연락이 닿게 된다. 런던에서는 특별히 예정된 만남이 없으니 짧은 일정동안 쉬어가는 시간을 갖기로 생각한것도 무색하게, 아침의 찬 공기를 가르며 킹스 크로스 역 인근의 숙소에서 빨래방으로 가는 길에 심상찮은 외관을 한 서점과 마주친다. '1945년부터 영업한 급진적 서점' Housmans 세탁이 끝나고 둘러본 내부는 외관 이상으로 굉장해서, 한국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담론들도 아동/청소년 도서나 그래픽 노블 등의 낮은 접근성을 가진 매체로 비치되어 있었으며,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과 관련된 유인물을 배부하고 굿즈를 장식하거나 판매하고 있었고, 직접수유 친화/반-인종차별적 '안전공간'으로서의 명시나 청소년을 위한 할인이나 다른 손님이 책값을 대신 내주는 시스템 등 여러 방식으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인칭대명사 뱃지가 He/Him밖에 없는 것에 아쉬워하는 동시에 좌파 서점 고객의 성비에 대해 생각해보며 이런저런 뱃지나 '래디컬 플레잉 카드(역사의 진보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나 작은 책자를 사서 나온다. 이후에 목적없이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 저녁 만에도 거리에서 메시지 카드 전문의 문구점이며 크고 작은 서점과 다양한 문구류들을 마주치고 그때마다 즐거워했지만, 다음 날 영국박물관을 나와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에 의도도 노력도 없이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아무리 서점이 많다고는 해도 이게 이 도시에서는 얼마나 일반적인 일일지 가늠해보며 혼란에 빠졌다. '사회주의 서점' 이라고는 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쉽고 짧은 이론서 등이 눈에 띄고, 입지 때문인지 좀 더 가게가 작고 구성이 간결하며 현대적인 인테리어라는 것 외엔 범좌파적 의제의 폭이나 내용의 관점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 한눈에 봐도 좌파언론 같은 제목에 뒤표지까지 기사가 적힌 잡지들을 둘러보다 작은 '붉은 별' 뱃지와 책 몇 권을 구매한다. '사회주의 서점' Bookmarks 런던의 성이며 사원 같은 관광지들은 4시 반이면 영업을 종료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아 의아해한다.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갈 곳은 없어도 중랑천을 닮은 템즈강도 보고, 저녁 하늘에 불을 밝히는 빅 벤도 보며 거리를 방황하다 보면 다양한 스티커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지나간 시위나 기후위기 관련 서적의 북 토크 홍보 전단 같은 것들이 고전적인 방식의 조직화가 아직도 유효하게 여겨진다는 놀라움을 준다. 파리와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세속적이고 고도화된 이 도시가 왕과 서점과 메시지 카드로 대표되는 아날로그적 문화 속에 있다는 것은 이런 부분에도 적용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불충분한 의료복지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런던에서 항상 보였던 영국 혁명 공산당(RCP.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의 선전물은 대부분 QR코드가 훼손되어 있었다. 칼 마르크스 워킹 투어. 매주 일요일 출발. 코비드 19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벽.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상징들. 하마스에 구금된 인질의 귀환을 바라거나, 팔레스타인의 행동들을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족히 20여 종은 될 팔레스타인 연대의 스티커와 곳곳에 보이는 공산당의 선전물. 동시에 그중 절반 이상은 뜯겨나가거나 덧칠되거나 다른 스티커로 덮혀 있었고, 방문한 나라들 중 이스라엘 측을 대변하는 메시지 또한 가장 구체적이고 다양했다. 래쉬와 백래쉬 모두 강하고 그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국지적으로 퍼져나가는 장과 장이 거리 곳곳에서 부딪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영국 정부가 시위대를 보호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반영하는 이 도시의 정세를 상상해본다. 근위병 교대식을 관람하러 버킹엄 궁을 향했을 때, 금요일 낮치곤 유독 붐비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같은 역에서 다 같이 내리고, 전철 안에서 코스프레를 닮은 검은 정장에 높은 실크햇을 쓴 남성이 생활감 넘치는 비닐봉지를 든 것을 목격한다. 의아해하던것도 잠시 열차가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몇몇 남성들, 심지어 겉보기 남성이 아닌 사람까지 '영국 신사'의 차림을 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경찰의 통제가 필요할 정도로 인근을 가득 메워 정작 교대식은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대다수가 전형적인 코카서스계 백인의 인상에 유아차를 끌고 나온 생활감 넘치는 가족들도 심심찮게 보이는 것이 마냥 관광객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행사가 끝나고 바로 옆의 버킹엄 궁 정원에서 시민들의 관심을 익숙하게 무시하는 수많은 새들과 다람쥐에 둘러싸여서도, '왕실 납품' 티 브랜드의 매장 맨 위층에서 차를 마시면서도, 이 차갑고 세속적인 도시에서 이토록 존중의 대상이 되는 고루한 개념, '이 사람들에게 왕이란 무엇인가'라는 얼떨떨한 의문은 가시지를 않는다. 사진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군중들. 비수기의 유럽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았던 장소이다. 무지개들. 축구 팀 이름으로 여겨왔던 단어들이 전부 런던의 지명이라는 것에 놀랐는데, 지지하는 팀의 이름으로 사회적 가치를 드러내는 모습도 신기하다. 방문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영국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대도시 특유의 개인주의와 영어권-제국의 다문화적인 배경의 구성원들을 고려한 것인지 식이지향에 대한 고려를 일상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것. 고통받는 생명으로서의 동물을 묘사하며 비거니즘을 촉구하는 스티커들, 맥도날드의 비건 메뉴 탭, 식당에서의 알러지 여부를 묻는 질문 같은 것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같은 미식으로 유명한 나라들에서는 도리어 찾기 힘든 광경이었다. 포장은 물론 상품에서도 콩기름 잉크나 재생지, 혹은 생분해성 플라스틱 등이 비교적 보편화된 것도 눈에 띄었다. 재료를 전부 선택할 수 있는 파이브가이즈의 탄생이며 써브웨이의 패스트푸드 점유율 1위, 비거니즘이나 생태주의를 필두로 하는 진보적 가치를 세일즈 포인트로 삼는 러쉬(Lush)가 만들어진 토양 등에 대해 나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맥도날드의 비건 메뉴. 병아리콩으로 만든 너겟 같은 것Dipper과 소스에서는 커리 맛이 난다. 런던의 거리를 걸으며 마주한 시위 선전물의 날짜가 모두 주말인 것을 보아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순서를 바꾸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반쯤 도달한다. 마침 이탈리아 조직의 G 동지로부터 '18일 피렌체 시위가 볼만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날 로마에서 취리히로 가는 환승편을 취소하고 대신 18일 아침에 출발하는 런던발 피렌체행 항공편을 예약한다. 시위 장소까지의 경로를 찾다 '피렌체 공항은 시내와 가까워 도보로도 접근이 가능하다'라는 정보를 보고 무슨 효용이 있는 건지 고민하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밤을 새워 다시 짐을 꾸린다. [다음 글 보기] [기고] 유럽투쟁기행: 날짜변경선을 넘어서 (2) 이탈리아 피렌체2026-01-27 | 조회 7,9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