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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제국주의 진영에 밀착하는 윤석열 정부, 지금 당장 국제연대를 조직하자사진: 대통령실 지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G7 정상회의가 열렸다. G7은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제국주의 진영의 국제기구다. 20일 발표된 G7 공동성명은 이들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위선자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예컨대 저들은 ‘핵무기 없는 세상이 궁극적 목표’라 밝혔지만 정작 실전 배치한 핵탄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이다(2022년 기준 1,744기). 또 G7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한다고 떠벌리지만, G7 회원국 이탈리아의 정상은 파시스트 멜로니 총리다. 멜로니는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며 자국에서 난민과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중이다. 기후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들이 “빈곤 감소와 기후 및 자연 위기 해결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했다고 떠드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이번 G7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는 러시아 제재와 중국 견제 문제였다. 이번 정상회의에는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와 7개 회원국 외에도, 한국, 호주,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베트남, 코모로연방(아프리카), 쿡제도(태평양) 등 8개 초청국이 참여했다. 이것은 중국‧러시아에 맞서 서방 진영의 결속을 강화하며,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영향력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G7은 공동성명에서 “러시아의 불법 침략 전쟁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필요한 기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 공동성명과는 별도로 ‘우크라이나에 관한 G7 지도자들의 성명’도 발표됐는데, 여기서 G7은 “우크라이나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인도적, 군사적, 외교적 지원을 필요한 만큼 제공”할 것이며 러시아와 러시아를 지원하는 세력을 추가 제재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G7 회의 개최 직전 미국과 서방 동맹국은 미국산 F-16 같은 4세대 첨단 전투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무기만 대주면 이번에 상실한 영토의 수복을 넘어 2014년 빼앗긴 크림반도를 되찾을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젤렌스키의 요구가 일정 부분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나토의 동진과 러시아의 침공으로 촉발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갈수록 제국주의 대리전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을 간과한 채, 러시아 침공의 부당성을 규탄한다며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 진영을 편드는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좌파를 자임하는 사회진보연대는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지원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책무”라며, 윤석열이 지난 4월 19일 ‘조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쟁에 살상무기를 지원할 수도 있다’고 입장을 밝힌 것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전쟁은 단지 다른 수단의 개입에 의한 정치적 관계의 계속”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수용해, “어떠한 전쟁도 주어진 시기에 관련 강대국들의 – 그리고 이들 나라 내부의 각 계급들의 – 정치의 계속(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이라고 이해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쟁 발발 이전 나토의 동진으로 상징되는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개입이 전쟁 원인의 절반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러시아와 서방의 패권 경쟁이야말로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다. 설령 전쟁이 우크라이나의 승리로 끝난다 해도(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이지만),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이에 결탁한 우크라이나 지배계급이 권력을 되찾는 방식을 통해서는 우크라이나에서 궁극적인 평화를 실현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라면 미소 대리전 성격을 띠었던 1950~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미제국주의의 전초기지가 된 남한에서 노동자 민중이 군사독재 체제의 야만적 탄압을 받았음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물론 러시아 제국주의는 전쟁을 중단하고 즉각 철수해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주의의 패배는 핵심적으로 자국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대중적 반전 투쟁의 전개 여부에 달려 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노동자들의 임무는 자국 지배계급에 반대하는 국제연대를 건설하는 것이지, 서로 대립하는 제국주의 진영 중 그나마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고르는 데 있지 않다. 미중 패권경쟁 이것은 미중 쟁투에 대한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G7은 공동성명에서 “우리의 정책 접근은 중국을 해하거나 중국의 경제적 진보와 발전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며, 중국과 “디커플링’(de-coupling, 관계 분리)” 대신 “디리스킹(de-risking, 위험 감소)”을 추구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표현에는 미국과 달리 중국과 균형적 관계를 모색하려는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다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G7은 대만 문제에서는 기존과 다르지 않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공동성명에서 G7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 태평양을 지지하고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당연히 중국은 강력히 반발했다. 20일 중국 외교부는 “주요 7개국들이 대만해협의 평화를 수호한다고 매번 말하면서 ‘대만 독립 반대’를 일절 언급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대만 독립’ 세력을 묵인하고 지지하는 것”이라며, “강렬한 불만과 결연한 반대”의 뜻을 드러냈다. 미국과 서방 진영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진영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권위주의’에 기반한 비민주적 통치체제로 구별한 뒤, 그래도 후자보다는 전자가 낫지 않냐는 식으로 정치적 태도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노동자계급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민주적 권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민주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그 헌법에 노동자를 향해 군대를 출동시킬 가능성, 계엄령을 선포할 가능성 등을 자본가계급에게 보장하는 단서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지 않은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패권 쟁투를 벌이는 제국주의 진영 사이의 비본질적 차이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제국주의 자본가계급 사이에 놓인 본질적 적대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 자본가계급의 어느 한 분파에 의탁하는 방식으로, 노동자계급 운동은 절대 성장할 수 없다. 미제국주의 진영의 선봉이 된 윤석열 정부 노동자계급이 견지해야 할 국제주의 원칙은 향후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가 미중 제국주의 양강이 벌이는 패권전쟁의 실제 전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사활적 원칙이 된다. 즉 대만독립을 둘러싼 미중전쟁이 현실이 될 경우 미중 모두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남북 지배계급의 적대적 대립이 변수로 끼어들면 동아시아 노동자 민중의 안위는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상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노회한 부르주아 계급의 두뇌들마저 잇따라 경고를 보내는 실정이다. 특히 이들은 한국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도 중국과 대립 일변도로 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한국 자본주의가 중국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상대적 안정을 얻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윤석열 정부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미제국주의 진영에 밀착하는 일에 일말의 주저함이 없다. 한미일 안보협력을 위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제3자 변제’라는 기상천외한 해법까지 내놓았던 윤석열 정부는, 더 나아가 미국의 도청 묵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용인 등 한미일 삼각 동맹의 강화를 위해서는 양잿물도 마시겠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같잖은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한미일이 ‘자유와 민주주의’란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 정도 표현으로는 모자랐는지, 국민의힘 김민수 대변인은 이번 G7 회의를 통해 “대한민국이 심리적 G8 국가 반열에 올랐다”는 21세기 버전 소중화(小中華)론을 내세웠다. 저들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국뽕’ 정서를 자극하고, 나아가 대중의 반중 혐오정서를 십분 활용해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단결의식을 흐트러뜨릴 것이 뻔하다. 국제주의 노동자계급 연대운동, 지금 당장! 동아시아 노동자계급 국제연대의 수준이 아직 높지 않음은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것은 제국주의 양 진영 모두와 단호히 결별하고 자국의 지배계급에 맞선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국제주의자들의 주장을 마치 무기력한 양비론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다른 대안은 없다. 자국의 지배계급에 결연히 맞서며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를 실현하는 것만이 위기의 시대로 접어드는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다. 바로 지금 당장, 이를 향한 실천을 체계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전면적 위기의 시대가 닥쳐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3)”2023-05-23 | 조회 1,648 -
[번역] 아파르트헤이트 아래 민주주의는 없다사진: Photo: Ohad Zwigenberg/AP 건국 75주년이 된 지금,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거대한 시위가 이스라엘을 뒤흔들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결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고,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도 없다. - 너새니얼 플라킨, 사데우스 그린 2023년 5월 15일 지난 몇 달 동안 이스라엘은 75년 역사상 가장 큰 내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수십만 명이 텔아비브, 예루살렘 및 기타 도시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며 거리에 나섰다. 총파업으로 공항이 하루 동안 폐쇄되었고, 예비군들은 근무 신고를 거부하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이 내전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이 운동은 정부의 ‘사법개혁’ 계획에 대응해 시작됐다. ‘사법개혁’이란 네타냐후와 그의 극우 연합 파트너들이 대법원을 이스라엘 의회 크네세트(Knesset)의 직접적 통제 아래 두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법원의 반대를 넘어 그들의 우익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사법부의 독립,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한다. 제국주의 매파이자 시온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인 미국의 논평가 토머스 프리드먼은 사법개혁이 “우리가 알던 이스라엘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고 경고했다. 프리드먼은 자칭 “유대인 국가”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칭송해왔다. 그러나 독립된 법관으로 상징되는 “법치(法治)”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사라질 것이다. 역설 “이스라엘 민주주의”를 위한 이 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역설적이다. 핵심 요구는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기관인 대법원이 (앞으로도 - 옮긴이) 민주적 통제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늘 주장해 왔듯이, “독립적인” 사법부는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법관을 민주적 통제에서 독립시키는 것은, 법관이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미국 대법원은 그 극적인 실례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데, 판사들은 유권자와 멀어질수록 우익 억만장자들과 가까워지고 있다.) 프리드먼이 지적했듯이, 이스라엘 법원이 민주적 의사결정의 성가신 간섭 없이 일관되게 작동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은 주로 투자자들, 즉 자본가들이다. ‘천년왕국’ 광신자들로 구성된 현 정부에 비하면 이스라엘 대법원은 몇 밀리미터 왼쪽에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법복(法服)을 입은 판사들이 자유주의 원칙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역시 반대다. 최근 몇십 년에 걸쳐 이스라엘 사회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왔다. 대법원은 몇십 년 전에 있었던 힘의 균형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자유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불과 2년 전에 이 “민주적” 법원은 이스라엘이 모든 시민이 아니라 “유대인의 국가”임을 선언하는 ‘유대민족 국가법(State of the Jewish People)’을 승인했다. 여러 친제국주의적 인권 단체가 지적하듯이, 한 민족에게만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이런 종류의 민족 분리정책에는 명칭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그것이다. 피터 베이나트는 <뉴욕타임즈>에서 “유대인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라는 개념은 현실에서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베이나트는 “민주주의란 인민에 의한 정부를 말한다. 유대인 국가는 유대인에 의한 정부일 뿐이다.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 유대인이 인민의 절반을 구성할 뿐인 나라에서, 두 번째 원칙(유대인 국가)은 첫 번째(민주주의 국가)를 집어삼킨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이스라엘 시민들, 즉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약 700만 명의 유대인들과 기껏해야 이등 시민으로서 이스라엘 여권을 가진 20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아가 사실상 아무런 권리도 없는 수십만 명의 이민자가 있다. 또 다른 20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 지구라는 야외 감옥에 살면서 이스라엘 미사일에 의해 정기적으로 살해되고 있다. 3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정착촌으로 영토가 분할된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군사 점령하에 살고 있다. 1948년과 1967년의 시온주의 강제 이주 전쟁으로 쫓겨난 약 40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국경 밖에서 살고 있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기본 요구는 팔레스타인인이 자신의 출신 도시와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에후드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는 2007년 “동등한 투표권”이 “이스라엘 국가의 종말”을 뜻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전 수장(首長)의 주목할 만한 자백이다. 즉 가장 기초적인 민주주의 원칙이 이스라엘 국가의 근본적 성격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시온주의 오늘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대는 네타냐후 정부가 성소수자의 권리를 공격하고, 여성의 권리를 후퇴시키고, 파시스트 민병대를 무장시키고,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는 것을 올바르게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국가기관인 대법원에 유권자 다수의 결정(현 정부 – 옮긴이)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가장 확실한 민주적 해법은 민족과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팔레스타인인에게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는 것은 시온주의 국가 자체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원칙과 시온주의 원칙은 상반된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은 오른쪽으로 거대한 선회를 해왔다. 시온주의 국가의 건국자들은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무신론자로 여겼다. 처음 수십 년 동안은 좌파 정당들이 크네세트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런 자유주의적 합의는 무너져 내렸고, 가장 최근의 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아보다(Avoda)’는 단 4석에 그쳤다. 또 좌파 정당 ‘메레츠(Meretz)’는 의회에 입성조차 하지 못했다. 과거 유대인 무신론자들이 세웠던 나라는 극우 종교 광신도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토마스 프리드먼은 자유주의 시온주의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애도하지만, 자유주의는 언제나 환상이었다.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 오스트리아 제국의 유대계 언론인, 시온주의의 주창자 – 옮긴이)로 돌아가 보면, 시온주의 운동의 목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라 없는 민족을 위한, 민족이 없는 나라”를 발견한 것처럼 가장하고 싶어 했지만,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면 원주민을 추방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이 1948년에 벌어진 일이다.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라는 뜻 – 옮긴이) 기간 7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심지어 스스로를 마팜 마르크스주의자(마팜은 히브리어 약자로, 통합노동자당을 뜻한다 – 옮긴이)라 불렀던 이들까지 시온주의의 모든 세력이 이 범죄에 가담했다. “좌파” 시온주의는 언제나 환상이었다. 그들은 집단 농장(키부츠)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원주민을 축출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그런 게 있다면 반동적 “사회주의”에 불과하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국가는 언제나 더욱 반동적인 형태의 유대인 정체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극우 이데올로기는 헤르츨과 벤 구리온(Ben Gurion, 1886~1973, 시온주의자, 이스라엘 초대 총리 – 옮긴이)이 시작한 일의 궁극적 결과다. 비록 그들은 사악하고, 냉소적이며, 파시스트적인 후손들을 보면 분명히 경악하겠지만 말이다. “자유주의” 시온주의는 식민주의 정책과 민족 청소를 실행하면서 언제나 인도주의적 문구를 늘어놓았다. 이 거짓 담론은 세계 제국주의 패권국가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서 중요했다. 미국 국무부에게 이스라엘은 미국이 중동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불침항모(不沈航母)다. 제국주의자들은 자기 졸개들이 인도주의적 목소리를 내길 원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스라엘 파시스트들은 인권 구호를 기꺼이 내다 버릴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느낀다. 그들은 시온주의 국가가 무엇에 기반해 있는지를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다. 무력으로 보장되는 유대인 우월주의가 그것이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가 항상 알고 있던 바로 그 이스라엘이다. 계급 적대감 이스라엘 국가는 항상 자본주의 사회였지만, 초기에는 강력한 조합주의적 요소와 심지어 사회주의적 문구도 존재했다. 키부츠 외에도 히스타드루트(Histadrut) 노동자 연맹은 노동조합이자 주요 고용주 역할을 하는 거대한 조합주의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이스라엘 유대인 대중은 팔레스타인인을 수탈하고 착취해 어느 정도 이익을 얻었고, 유대인들 사이 부의 격차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빼앗은 토지가 많을수록, 이스라엘 사회는 더 많은 식량을 재배하고 판매하고 소비할 수 있었다. 75년 동안 이스라엘 국가에서는 조합주의 구조가 약화되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도입됐다. 한때 두 번째로 큰 고용주이자 노동자 대다수를 “대변하던” 히스타드루트는 완전히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 이스라엘 자본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공세를 펼쳤다. 긴축정책과 자유시장 경제가 부상하면서,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계급 경계를 따라 점차 양극화되었다. 2011년 이스라엘 텐트 시위가 보여주듯이 말이다. 2021년 <예루살렘포스트>는 이스라엘 유대인의 17%가 빈곤율 이하로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CNN>이 지적했듯이, “미국과 이스라엘은 선진국 중 최악의 불평등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상위 10%의 임금 노동자가 가장 가난한 계층보다 약 15배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스라엘 여권을 소유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경우 빈곤율이 훨씬 높은데, 그들은 이스라엘 유대인보다 약 50% 적게 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대중의 지속적인 빈곤과 불평등 심화는 시온주의가 현재 위기에 처한 근본 원인 중 하나다. 유대인 노동자들은 유대인 우월주의 체제에서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주류 정당들에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줄고 있다. 대략 70명의 이스라엘 억만장자가 부를 바탕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1인당 억만장자 수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다. 사기가 저하되고, 분노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주의 지도력을 갖지 못한 많은 이스라엘인은 정치적으로 우경화했다. 팔레스타인인을 시온주의 국가의 결점을 감추는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이런 흐름은 미국에서 우익 포퓰리즘이 부상하는 것과 유사하다. 수십 년 동안 생활 수준이 저하되면서 상당수 미국 백인이 이민자, 흑인, 성소수자, 기타 소수자를 사회의 근본적인 병폐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유대인 노동자들은 권력을 쥔 억만장자 계급보다는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의 형제자매들과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반시온주의 운동을 향한 투쟁 미국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유대인 노동자계급은 수십 년 동안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적 세뇌에 중독돼왔다. 제국주의 군사 보조금은 이스라엘의 영구적인 전쟁 경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인은 이웃 국가와 벌어지는 끝없는 분쟁 때문에 거의 이익을 얻지 못한다. 이스라엘 노동자들이 군사주의, 민족 청소, 빈곤, 문화적 적대감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투쟁에 연대해야만 한다. 최근 시위운동에서 드러난 매우 진보적 발전 중 하나는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연합’의 결성이다. 이 깃발 아래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의 활동가들이 시위에 참여한다. 소수이지만 눈에 띄는 움직임이다. 장군, 스파이, 우익 정치인이 이끄는 “민주주의” 운동 속에서, 반(反)시온주의 활동가들은 팔레스타인과 공산주의 깃발을 흔들며 유대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용감한 활동은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들이 시위대의 소수를 차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인, 사회주의자, 성소수자 등은 저항 행동을 할 때 언어적, 물리적 공격의 위협에 맞닥뜨린다. 공격은 극우 정부 지지자뿐만 아니라 경찰, 심지어 시위 주최자들로부터 행해진다. 반(反)시온주의 운동은 이스라엘에서 소수의 견해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미국에서 진정한 반제국주의 운동이 소수의 견해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많은 팔레스타인인과 반(反)시온주의 좌파들이 지금의 “민주주의” 시위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 시위는 이스라엘 국기로 가득하고, 부르주아계급의 주요 부문, 심지어 보안 기구의 요소들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사회주의 어린 시절부터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가 너무 강력해 박해를 피하려면 유대인의 민족국가가 필요하다고 배운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는 유대인을 시온주의 국가의 범죄와 동일시하게 만들어 반유대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이스라엘 국가 밖에서 살고 있으며 갈수록 더 많은 유대인 청년이 시온주의와 그 범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지역의 민중은 끝이 없어 보이는 전쟁과 증오의 순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천년왕국’ 세력은 세계 자체가 수천 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성경의 천지창조설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는 고작 수천 년이다 – 옮긴이) 다른 종교 종파 사이의 분쟁이 영원할 거라고 확신한다. 물론 실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결과로,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관점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모든 개인이 정치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 세기 동안 제국주의 열강은 이 지역의 광대한 자원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왔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모든 제국주의 기업을 몰수하고 이 부를 민중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 반동적 독재 정권을 세우고,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을 이용해 온 주류세력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혁명적 수단과 사회주의 전망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이스라엘 국가는 오직 배타적 민족국가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가 기록된 반유대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민중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시온주의의 역사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정착 식민주의(settler-colonial) 정책은 유대인을 끊임없는 위협에 처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자기 주변 수억 명 사람들과 영원한 분쟁을 겪으며 거대한 벙커에서 살아야 한다고 듣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최대 백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인들이 외국 여권을 취득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큰 신뢰 표시는 아니다. 유대인 혁명가들이 수세대에 걸쳐 주장했듯이, 반유대주의를 끝장내는 진정한 방법은 세계혁명을 통해 계급사회를 폐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온주의라는 반동적 민족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종종 그 지역의 노동자계급 형제자매들에 비해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민주주의” 시위가 주변 국가의 노동자와 억압받는 민중들 사이에서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중동에서 계급투쟁이 상승할 때마다 적어도 이스라엘 노동자 중 소수는 모두를 위한 평화와 민주주의를 가져다줄 사회주의 변혁을 위해 전적으로 싸울 준비가 돼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1968년 이후 이스라엘 신좌파가 정확히 보여준 일이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하고 이스라엘 노동자들이 시온주의에서 벗어나 그 투쟁을 지지하도록,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전 세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민족과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주의 팔레스타인을 위해 항상 싸워왔다. [원문] https://www.leftvoice.org/theres-no-democracy-under-apartheid/2023-05-20 | 조회 2,036 -
[번역] 혼란에 빠진 빅 테크: 자본주의의 주요 성장 엔진이 멈추다(IT 스타트업의 절반이 이용하는 은행이었던 실리콘밸리 뱅크가 지난 3월 10일 파산했다) 사진=NPR - 케이샤 테일러, 에디 맥케이브 2023년 3월 30일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 붕괴 이후 최악의 위기에 직면한 IT산업은 혼란 상태다. 주가는 큰 폭으로 변동하고 이윤은 축소됐으며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해고됐다. 미국의 IT 기업들은 2022년에 해고를 649% 증가시켰으며, 전 세계적으로 161,411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2023년에는 첫 3개월 동안 155,462명이 해고되었으며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2022년 10월 일론 머스크가 440억 달러에 트위터를 인수한 후, 트위터 직원들의 상황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머스크는 자신의 터무니없는 금융 거래를 만회하기 위해 인력을 절반(3,700명)으로 감축하는 결정을 내렸고, 남은 직원들에게 '하드코어한' 업무 환경에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많은 직원이 이 제안을 거부하고 자진 퇴사하여, 트위터에는 전체 인력의 30%만 남게 되었다. 다른 유명 대기업들도 비슷한 비용 절감 조치를 취하고 있다. 11월 이후 Amazon은 2만 7,000명, Meta는 2만 1,000명, Google의 모기업인 Alphabet은 1만 2,000명, Microsoft는 1만 명을 감원했다. 수천 개의 소규모 테크 기업들도 규모를 축소하고 있으며, 많은 스타트업이 파산하고 있다. 빅 테크 위기는 자본주의 경제 전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며, 이는 최근 일련의 은행 파산, 특히 "벤처캐피탈의 지원을 받는 IT 스타트업의 거의 절반이 이용하는 은행이 된" 실리콘밸리 은행의 파산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영국 가디언지는 전했다. IT 및 금융 분야의 위기는 공급망 붕괴를 비롯한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제국주의적 긴장의 심화, 기후 변화, 수년에 걸친 빈혈성 성장과 이윤율 하락 등 자본주의 경제의 여러 다른 문제로 비롯된 산물이며,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전 세계 중앙은행의 정책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IT 부문의 호황은 저금리와 이로 인해 부추겨진 투기로 인위적으로 부풀려졌다. 많은 IT 기업의 성장은 (그리고 심지어 그 존립은) 실질적인 수익성이 없는 상황에서 값싼 신용에 의존해 왔다. 이러한 신용이 없다면 이들 기업은 지위를 유지하는 게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생존하는 것조차) 매우 힘겨울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기업들의 다운사이징은 그러한 사실이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사진=Greater Pacific Capital 빅 테크의 급부상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위기는 IT 분야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IT 산업의 시장 가치는 약 5조 2,000억 달러로 전 세계 GDP의 5%에 달한다. 2022년 시가총액 기준 세계 10대 기업 중 7곳이 IT 기업인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아마존, 엔비디아, TSMC, 메타였다. 2020년까지 매년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기하급수적으로 기업가치가 상승하는 등 여러 면에서 IT 기업과 닮은 테슬라까지 포함하면 8개가 된다. (테슬라는 2020년까지 매년 적자를 기록했고, 심지어 자체 전기차를 판매하는 것보다 다른 자동차 제조업체에 탄소 배출권을 판매하여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20년 전만 해도 이 목록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이라는 두 개의 IT 회사만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들일 뿐만 아니라, 이들의 부상과 업계 전반의 성장은 극적이었다. Amazon은 1995년에, Google은 1998년에 설립되었고, Facebook은 2004년에, Uber는 2009년에, Zoom은 2011년에 설립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라. 이제 이 회사들은 거의 독점 기업처럼 다양한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또한 이 회사들에 지난 10년간 전 세계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1위까지 차지한 창립자 및 CEO가 있다는 점도 생각해보라. 이들의 개인 재산 축적은 놀랍고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예를 들어, 2010년 마크 저커버그(메타)와 제프 베조스(아마존)의 재산은 각각 69억 달러와 126억 달러였지만, 전성기였던 2021년에는 1,400억 달러와 2,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일론 머스크는 2012년에 억만장자가 되었고, 2021년에 그의 재산은 3,400억 달러로 평가되었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이 절정에 달했던 그 말도 안 되는 정점 이후, 이들의 개인 재산은 다시 크게 감소하여 2023년 2월 머스크의 순자산은 1,870억 달러로 추정된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지구상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이다. 이러한 금액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이다. 하지만 그 급격한 변동성(2022년에 머스크가 잃은 재산은 인구가 거의 천만 명에 달하는 헝가리의 국내총생산(GDP)에 해당한다)은 그들 비즈니스의 핵심에 있는 불안정성을 반영한다. 사진=Guardian 근본적인 취약성 IT 부문은 인터넷 시대가 커뮤니케이션을 변화시킨 이래, 점점 더 일상 생활의 많은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최근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문이었다. 혁신과 기술 발전도 분명 그 일부이긴 하지만, IT 부문의 성장에 있어 보다 중요한 요소는 금융 투기이며, 이는 지속적인 현금 유입으로 이어져 주가를 부풀리고 실제 혁신이 보장하는 수익보다 훨씬 더 많은 투자로 이어진다. 암호화폐의 급격한 상승과 하락은 이러한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전반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계속 성장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은 분야인 IT 산업에 큰 베팅을 해왔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통화 공급 확대)와 저금리(값싼 신용 공급) 정책을 추진하면서 투자자와 기업들은 앞다투어 투자에 나섰다. 여기에는 혁신과 생산성을 뒤로 하고 그저 단기간에 부자가 되는 걸 추구하는 투자방식도 포함됐다. 예를 들어, 한때 세계 최고의 디지털 통신 회사였던 Cisco는 지난 20년 동안 주가를 부양하기 위해 자사주 매입(말 그대로 자기 회사 주식을 사는 행위)에 같은 기간 수익의 95%에 달하는 1,523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경쟁사, 특히 R&D에 실제로 투자한 중국 5G 기업들에 비해 뒤처지게 됐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주요 기업, 특히 IT 분야의 기업들은 이와 유사한 관행에 종사하고 있다. 그 결과 장기간에 걸쳐 수익이 (심지어 매출조차)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정상적으로는 파산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생존하는 '좀비 기업'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업들은 저렴한 대출 공급 덕에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1990년에는 세계 주요 경제 상장 기업 중 1.5%가 좀비 기업으로 간주되었지만, 2020년에는 그 비율이 7%로 증가했다. 현재 금리를 인상하고 있는 여러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변화를 고려할 때, 이들 기업은 분명히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으며, 현금 투입으로 크게 부양됐던 IT 부문 전체도 더 이상 값싼 현금 투입이 불가능해지며 마찬가지 위험에 처해 있다. 물론 그 영향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닥쳤을 때 상황이 얼마나 더 심각해질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것임은 분명하다. 금리 인상의 동기 중 하나는 인플레이션에 맞서 더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원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 경기 침체를 유발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장이 아닌 노동자가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 모든 자본주의 위기가 그러하듯,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윤율 회복을 위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해고를 당하거나 임금 하락과 노동조건 악화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이다. 이 노동자들의 노동이 없다면 현금 투입과 값싼 신용도 아무 소용이 없고 매년 수천억 달러를 벌어들일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일이 잘못되면 이러한 기업들이 경쟁사에게 표출하던 무자비함은 기업 내부의 노동자에게 향한다. Slack의 전 최고 인사 책임자였던 나디아 롤린슨은 뉴욕 타임즈에 실린 기사에서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정리해고는 새로운 보스주의 시대의 일부입니다. 경영진이 그간 너무 많은 통제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직원들로부터 다시 통제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개념인 것이죠. 20년 동안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싸워온 최고 경영자들은 이제 수년간의 관리 방종을 조정하여 자격을 갖춘 노동자 세대를 남기기 위해 이 시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및 디자인과 같은 IT 직종은 일반적으로 보수가 높고 인기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착취를 당하고 있다. (임금이나 복리후생으로 받는 것보다 고용주에게 더 많은 가치를 가져다 준다). 이번 위기 이전에도 IT 기업 내 주요 트렌드는 직접고용된 직원을 훨씬 적은 권리와 열악한 조건을 가진 계약직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2018년부터 구글에서는 계약직 직원 수가 정규직 직원 수를 넘어섰다. 또한, 이들의 업무는 종종 매우 압박적이고 까다로우며 자신의 업무가 생각만큼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등 번아웃이나 지치는 경우에 대한 보고가 많다. IT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회를 위해 기술을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거나, 대량 감시에 가까운 데이터 수집 행위 등 광고주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광고를 노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엑손모빌과의 단 한 번의 계약으로 연간 34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추가로 배출하며 '탄소 네거티브' 목표를 한 번에 박살냈다.) 사진=TVC NEWS 이윤 창출을 위한 IT 활용에서 벗어나기 이러한 IT 기업들은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2018년, 수천 명의 직원들이 구글의 미군 프로젝트용 기술 개발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구글은 행동 강령에서 "악이 되지 말라"는 유명한 모토를 조용히 삭제했다. 빅 테크 기업들은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 탄소 배출량 감축, 신기술 개발의 선두주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은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는 쉘, BP, 셰브론, 엑손모빌 등의 기업이 화석 연료를 더 빠르고, 더 효율적이고, 더 수익성 있게 발견하고 추출할 수 있도록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엑손모빌과의 단 한 번의 계약으로 연간 34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추가로 배출하며 '탄소 네거티브' 목표를 한 번에 박살냈다. 빅 테크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가장 은밀한 사례 중 하나는 소셜 미디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플랫폼은 연결, 소통, 표현을 위한 거의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플랫폼은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든 아랑곳하지 않고 (특히 광고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발됐다. 검색, 클릭, 심지어 스크롤을 잠시 멈출 때마다 우리의 불안감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불필요한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타겟 광고가 쏟아진다. 이러한 앱은 광고 매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도파민 보상 반응을 악용하여 사람들이 스크롤을 계속 내리며 가능한 한 오랫동안 광고를 보도록 설계되었다. 소셜 미디어가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정신 건강의 해악은 점점 더 분명히 규명되고 있으며, 청년들의 섭식 장애를 고의적으로 조장하는 알고리즘도 점점 더 많이 밝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우익 및 극우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훨씬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광고 및 모니터링 데이터로 인해 저장 및 처리 시설의 필요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개의 데이터센터가 확장되고 있으며, 각 시설에는 수천 또는 수만 대의 서버가 있어 국가 전체보다 더 많은 환경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현재 전 세계 에너지 관련 온실가스 배출량의 거의 1%를 차지한다. 비교해 보자면 항공 산업은 배출량의 2%를 차지한다. 효율성이 크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터센터는 전 세계 전력 사용량의 약 1%를 차지하며(암호화폐 채굴은 제외), 2030년까지 아일랜드 에너지 수요의 최대 30%까지 소비할 수 있어 아일랜드 국내 에너지 공급을 위협하고 있다. (옮긴이 주: 아일랜드는 낮은 전기료, 정부의 제도적 지원, 서늘한 날씨 등으로 미국 IT 기업들이 데이터센터를 집중적으로 건설하는 지역이다.) 새로운 기술은 커뮤니케이션, 조직, 교육, 창의성 측면에서 인류에게 엄청난 잠재력을 제공하지만, 이윤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완전히 파괴적이다. IT 산업이 사적 이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공공 소유로 전환되고 사회적, 환경적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며 노동자와 사용자(user)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된다면 산업 전체가 변화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IT 산업은 광고, 데이터센터의 낭비, 정신 건강에 대한 파괴적인 영향, 파괴적인 화석 연료 산업과의 결탁을 제거할 수 있으며 안정된 일자리와 노동조건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끝없이 파괴당하는 지구를 구하면서 인류를 발전시키려는 목적 아래 민주적으로 관리된다면, 모두를 위한 진정한 무료 오픈소스 자원이 될 수 있다. 원문 : Big Tech in Turmoil: Capitalism’s Main Growth Engine Stuttering / International Socialist Alternative ( https://internationalsocialist.net/en/2023/03/global-economy) 역자 : 양동민2023-05-20 | 조회 1,649 -
[최저임금30%인상 연속기고] 최저임금을 둘러싼 세계적 수준의 계급투쟁“후보로 최저임금 1만원을 내세우면 당선은 확실하겠네요.”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분위기가 실제로 그랬다. 모든 정당의 후보들이 실현 시기만 차이가 있을 뿐 최저임금 1만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5~6년 만에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2022년에 연거푸 치러진 대선과 지자체 선거에서 최저임금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정당의 후보가 시기의 차이만 있을뿐 최저임금 1만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사진=KBS) 어쩌다가 최저임금은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것일까. “최저임금 오르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반짝 하고 최저임금이 잠시 오르긴 했지만, 이내 산입범위가 망가지며 오히려 임금이 깎이는 일이 벌어지고, 최저임금법이 적용되지 않는 플랫폼·특수고용을 비롯한 사각지대가 늘어나는 부작용을 겪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 제도로서 갖고 있던 실효성·보편성이라는 힘이 사라지자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전세계에서 유사하게 벌어진 과정 사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에 뒤이은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의 대량 실직, 월가와 광장 점거운동을 거치며 전세계 노동계급운동은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래서 2010년대에 시작된 한국의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은 미국의 15달러 운동에서 영감을 크게 받은 것이고, 독일에서 법정 최저임금제가 부활하고 영국에서 생활임금 제도라는 형식으로 최저임금이 대폭 오르는 일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처음에 자본가계급과 정부들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노동계급의 공세적 요구와 새로운 운동 조직화에 놀라 양보 조치를 통해 뒷걸음질을 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적으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최저임금이 가진 실효성·보편성이라는 힘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산입범위가 개악된 것처럼 그리스에서는 경제위기를 틈타 25세를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차등적용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요구 자체는 들어주되 이를 몇 년에 걸쳐 점진적인 방식으로 실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매년 새로운 최저임금 협상이 벌어지며 운동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역동성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 결정구조를 이원화하는 개악을 밀어붙였던 것, 최근 최저임금위원회가 사실상 교섭을 무력화시키는 최저임금 결정 공식을 활용하고 있는 점, 윤석열 정부가 업종별 차등적용을 밀어붙이는 것 모두가 사실 자본가계급과 자본가정부가 세계 곳곳에서 벌이는 공격과 맞닿아 있다. 2010년대 미국의 15달러 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의 최저임금 운동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불과 5~6년 만에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사진=장그래대행진) 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노동계급운동 2010년대 초부터 전세계로 퍼진 최저임금 대폭 인상운동은 2010년대 말쯤에 가면 자본가들의 반격에 맥을 못 추고 가라앉게 된다. 설상가상 2020년부터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며 최저임금운동은 세계적으로 자취를 감춘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노동계급이 가만히 앉아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팬데믹 과정에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처음으로 15달러 운동을 조직했던 그룹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직한 15달러 운동이 역동적으로 뻗어갔음에도 왜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되돌아보게 된다. 첫째, 대부분의 주들에서 최저임금 15달러를 수용했으나 5~6년에 걸친 점진적 인상이라는 방식으로 역동성을 제거당하게 되었다는 점. 둘째, 지불능력 있는 원청사의 책임이 모호하다는 한계를 남겼다는 점. 그렇다면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소산별(업종) 교섭 그들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면서 새로운 운동을 조직했다. 지난 몇 년간의 지속적인 요구와 투쟁을 통해 지난해 말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AB257이라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이 법안은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결정할 수 있는 교섭틀을 법제화한 것으로, 총 10명의 교섭단을 구성해 교섭구조를 만들도록 규정하고 있다. 프랜차이즈(원청사)를 대표하는 2명, 프랜차이즈 점주를 대표하는 2명, 노동조합 대표 2명, 노동시민단체 대표 2명에다 캘리포니아주 정부 대표 2명으로 총 10명의 대표단이 구성되어 교섭을 진행하며 시간당 22달러로 최저임금을 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15달러 운동이 가졌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표적인 저임금 사업장인 패스트푸드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목표로, 프랜차이즈 원·하청 자본 모두를 교섭틀로 끌어들이며 사업장을 뛰어넘는 집단교섭을 법제화하고 여기에 주 정부까지 끌어들임으로써 실효성을 높인 것이다. 만일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강제할 수 있는 소산별(업종) 교섭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여기서 실효성 있는 임금인상을 실현해낼 수 있다면, 가장 낮은 곳의 노동자 임금인상은 전체 노동자의 자신감 회복으로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AB257 법안의 통과는 자본가들로 하여금 그동안 잠시 잊고 살았던 최저임금 대폭 인상운동의 공포를 다시 느끼게 만들었다. 곧바로 이 법에 반대하는 점주들이 법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주민투표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점주들의 ‘자주적·자발적 행동’이라기보다 원청인 프랜차이즈 자본의 사주가 있었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은 그저 항의시위나 기자회견만 하고 앉아있지는 않았다. 점주들의 서명운동이 시작된 직후인 지난해 11월 15일 하루 파업을 벌였으며, 주민투표 발의가 이뤄지던 올해 1월 27에는 1박 2일간의 파업을 조직했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원·하청 자본이 수십~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으며 주민투표 발의에 열을 올려 가까스로 주민투표 발의에 필요한 서명지를 채워내고 말았다. 미국법에 따르면 내년 미국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 11월, 이 법안의 개폐 여부를 묻는 캘리포니아 주민투표가 진행될 예정이다. 안타깝지만 그때까지 법안의 효력은 잠시 정지된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제 다시 한 번 최저임금을 놓고 치열한 계급 간 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노동자들도 그저 손놓고 기다리며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안 발의와 투쟁, 입법 성공 이후 자본가들의 무력화 시도에 맞선 파업을 전개해온 것처럼 다시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직화에 나서며 반격을 시작할 것이다.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결정할 수 있는 교섭틀을 법제화하기 위한 AB257 법안 통과 운동 (사진=Fight For 15$) 뉴욕과 워싱턴에서 조직된 새로운 저항 뉴욕시에서 택시기사 생활고로 인한 자살률이 심각해지자 2000년대부터 10여년간의 조직화와 투쟁 노력이 이어지게 된다. 특히 뉴욕 택시기사노조는 우버, 리프트 등 승차공유 호출 앱 기사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며 뉴욕택시노동자연합(NYTWA)을 결성했다. 2018년 말 뉴욕시 택시-리무진 위원회(Taxi Limousine Committee, TLC)는 앱 기사들의 최저 표준 운임(minimum pay standard) 제도를 도입해 시간당 최저 표준 임금을 $17.22로 결정했는데, 이 과정이 이뤄지도록 지속적인 투쟁을 이끌어온 것이 바로 NYTWA였다. TLC의 새로운 제도 도입에 우버를 비롯한 승차공유 업체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지난해 말 법원에 이 제도의 시행을 중단시켜 달라는 소송을 제기해 일시 중단 가처분을 받아내기도 한다. 이에 NYTWA는 이 법안의 애초 시행 예정일인 작년 12월 19일에 맞추어 하루 파업을 조직했으며, 항소심이 벌어지던 1월과 2월에도 법원 심리가 열리는 날마다 파업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로 TLC는 자료를 보강하여 3월에 새롭게 의결절차를 거쳤으며 3월 13일부터 위 제도가 시행되게 되었다. 3차례의 파업, 브루클린 다리 통행을 마비시켰던 대규모 차량 시위 등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이 제도 시행을 만들어낸 것이다. 워싱턴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미국의 경우 각 주별로 결정되는 최저임금은 대부분의 경우 팁 받는 노동자에게 차등 적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워싱턴 DC의 경우 주 최저임금은 시간당 16.1달러인데, 팁을 받는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5.35달러로 1/3 수준에 불과하다. 자본가들과 정부의 논리는 사장이 지급하는 임금과 별도로 팁을 받으니 최저임금 수준을 낮춰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저임금 차등적용은 제도 자체를 갉아먹을 수밖에 없으며 각 주별로 이러한 차별을 없애자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왔다. 작년 미국 중간선거와 함께 워싱턴 DC주에서 팁 받는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폐지하는 법안 ‘Initiative 82’가 발의되어 주민투표가 이뤄진 결과, 2/3 주민의 동의를 얻어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현재 미국 50개의 주 중에서 워싱턴 DC는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폐지한 8번째 주가 되었다. (오리건주, 미네소타주 등) 파업중인 NYTWA 소속 뉴욕 택시 노동자들. (사진=NYTWA 트위터 갈무리) 워싱턴 DC주에서 팁 받는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폐지하는 법안 ‘Initiative 82’ 찬성투표를 독려하는 포스터 최저임금이라는 삼손이 가진 힘의 원천 미국 노동계급운동이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 액수만 대폭 인상하는 취지의 최저임금 운동이 맞닥뜨린 한계, 바로 거기에 한국 노동계급운동도 함께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상황 아닌가. 2010년대 전세계 노동계급운동이 자본가계급과 정부를 잠시나마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최저임금을 둘러싼 계급투쟁, 도대체 최저임금 제도의 어느 대목이 그들을 주춤거리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최저임금이라는 삼손이 가진 힘의 원천은 이 제도가 가진 보편성이다. 노동을 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성별·국적·나이·신념·고용형태나 장애 여부를 가리지 않고 차별 없이 동일하게 작동되는 제도의 성격 말이다. 자본가들과 정부는 최저임금이 가진 이 삼손의 머리칼을 잘라내야만 힘을 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적용을 밀어붙이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반대로 노동계급운동이 새롭게 찾은 길은 무너진 보편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팁 받는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것, 플랫폼과 특수고용 노동자에게도 차별 없이 최저임금 법·제도가 적용되도록 만드는 것, 원청과 하청 모두를 교섭 테이블로 불러내 실효성 있는 최저임금 인상을 밀어붙이는 것. 2023년 한국 노동계급운동이 최저임금 투쟁에서 참조해야 할 훌륭한 참고서 아닌가. 머리칼이 잘려 힘을 잃은 삼손처럼, 최저임금 또한 차등적용, 적용제외로 힘을 잃었다. 최저임금의 힘을 되찾는 길은 무너진 보편성을 되찾는 것이다.2023-04-17 | 조회 2,318 -
[동영상] "연금개악에 가장 먼저 영향받는 건 이민자들이 될 것입니다"프랑스 우파가 파리 8대학의 알제리 학생이자 '치켜든 주먹' (연속혁명의 학생사회주의조직)과 '연속혁명'의 회원인 메흐디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메흐디 젠다는 프랑스의 연금 개혁과 다르마닌 내무부장관의 이민법(정부가 서류 미비자를 추방할 수 있는 더 큰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고, 현재 우파는 그의 추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연금 개악과 이민법을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이민자들이 될 것이고, 우리 부모님들이 될 것이고, 우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확장해야 합니다." - 메흐디 자료참조 : Instagram @Leftvoice2023-04-05 | 조회 1,682 -
중국 노동자와 청년들이 점점 더 대담한 시위에 나선다지난해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시위 반중 정서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대한 정당한 반감도 뒤섞여 있을 테다. 하지만 ‘반미’라는 구호 아래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회주의자들의 활동, 미국 내 정치적 급진화 흐름을 지워서는 안 되는 것처럼, ‘반중’ 감정에 휩싸여 중국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투쟁과 저항, 그것이 중국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에 주목하고 연대해야 할 필요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많은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초의 이야기다. 2022년의 주요 시위 대출 상환 거부시위: 지난해 6월 허난성 정저우 등에서는 아파트 공사중단과 은행의 대출 상환 압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집을 마련한 이들에게 아파트 시공이 중단됐다는 소식은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머물 곳이 없어 전기도 안 들어오는 미완공 아파트에 이불만 갖고 들어가 밤을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와중에 은행은 대출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시위에 참여한 수천 명이 “건설 중단에는 대출 상환 중단으로! 집을 내놓고 돈을 갚으라 하라!”고 외쳤다. 또 한 명의 탱크맨: 2022년 10월에는 중국공산당 20차 당 대회를 며칠 앞두고 수도 베이징에서 시진핑을 규탄하는 1인 시위가 있었다. 시진핑의 국가주석 3연임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시위가, 그것도 수도에서 일어났다는 건 그 자체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시위자는 고가도로 위에서 현수막을 걸고 불을 피우면서 “독재자, 반역자 시진핑을 파면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는 금방 경찰에 연행됐지만, 시위를 벌이는 모습이 SNS를 타고 빠르게 전파됐다. 1989년 톈안먼 항쟁 당시 홀로 탱크의 진격을 가로막은 이를 떠올리게 한다며 ‘또 한 명의 탱크맨’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폭스콘 공장 시위: 한 달 뒤인 11월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이폰 생산 공장인 정저우의 폭스콘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지급하라”, “관리자 나와라” 하고 외치며 공장 집기를 부수고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이 일이 벌어지기 한 달 정도 이전에는 노동자 상당수가 공장에서 ‘탈출’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폭압적인 봉쇄조치가 이어지면서 노동자들은 사실상 감금된 상태로 일을 했다. 음식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고, 소량 지급된 도시락을 두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장 안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는데도 적절한 조치 없이 계속 봉쇄하기만 해 노동자들은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부 노동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면서 공장 문을 뚫고 탈출했으며, 교통편도 없었던 탓에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백지 시위: 그리고 곧바로 2022년 11월 말 중국을 뒤흔든 ‘백지 시위’가 시작됐다. 우루무치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 사고가 일어났을 때 거주자들이 빠르게 대피할 수 없었고 화재진압도 어려웠다고 한다. 건물 출입구까지 막아버리는 혹독한 봉쇄조치 때문이었다. 이 화재로 10명이 목숨을 잃자 전국 수십 개 도시와 대학에서 폭압적인 제로 코로나 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가 번져나갔다. 시위 참가자들은 중국 정부의 검열과 탄압에 항의하면서 백지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흰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지만, 그들이 외치고 싶은 모든 구호가 담겨 있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중국공산당을 규탄하며 시진핑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 투쟁이 현재의 체제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향한 전망을 뚜렷하게 붙잡지 못한 건 사실이다. 투쟁의 수위를 과장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규모에서 1989년 톈안먼 항쟁 이후 최대 시위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수도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중국 주요 대도시 전부가 이 시위의 무대가 됐다. 중국공산당과 시진핑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터져 나온 것 역시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장면이다. 백지 시위는 시진핑 정권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으며, 중국은 이 시위 이후 급격하게 그간의 봉쇄조치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2023년에도 계속된 시위 흐름 백지 시위가 사그라든 뒤 시진핑 정권은 적극적인 집회 참가자들을 추적해 은밀하게 체포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행자가 100명 이상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2023년 들어서도 또 다른 계기를 통해 시위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충칭 지바이오 노동자투쟁: 1월에는 충칭에서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코로나19 진단키트를 만드는 제약회사 지바이오(ZYBIO) 공장이 그 현장이다. 2만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지바이오 사측은 올해 설을 앞두고 8,000명가량을 해고한다고 발표했다. 임금도 체불됐다. 필요할 때 불려왔다 헌신짝처럼 버려진 노동자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위 장면은 한국에서 노동자 운동이 한창 전투적인 면모를 보였던 시절처럼 격렬했다. 노동자들은 경찰과 충돌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여러 대의 경찰 차량을 전복시켰다. 제품을 담는 플라스틱 상자, 의자, 교통통제용 시설물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졌으며, 진압경찰은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의료보조금 삭감 항의 시위: 2월이 되자 후베이성 우한에서 의료보조금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 참가자 상당수가 우한제철소 또는 다른 국유기업에서 일하다 은퇴한 고령의 노인들이어서 ‘백발시위’라는 별칭이 붙었다. 우한에서 ‘의료보험 개혁안’을 추진하면서 월급의 6%를 지급해왔던 의료보조금을 기존 대비 70%나 삭감하자 의료보험금을 돌려달라며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2월 8일 우한 정부청사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사람들이 15일까지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나, 여전히 제대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서 15일에 또다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가 벌어졌을 때 시내 지하철 역사를 폐쇄하고, 15일에는 우한의 대학들이 봉쇄됐다는 소식도 나돌았다. 비슷한 시위가 우한뿐만 아니라 랴오닝성 다롄 등 다른 몇몇 도시에서도 벌어졌다고 한다. 최근의 여러 시위: 베이징 시진핑 규탄, 광저우 폭스콘, 우한 의료보조금 삭감 항의, 충칭 지바이오 공장(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지난해에서 올해로 이어지는 이런 연쇄적인 투쟁은 계기도 다양하고 참가자들의 면모도 다양하다. 중국 사회에 누적된 모순이 다면적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지방정부 차원의 충돌을 넘어 베이징을 포함한 주요 대도시에서 시진핑 정권을 규탄하는 정치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고, 무엇보다 저항의 전통과 기억에서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였던 젊은 세대가 (특히 백지 시위에서)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지금 보이는 흐름이 곧장 체제에 도전하는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과장하지는 않더라도, 중국 노동자 민중의 불만이 점점 더 대담하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양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이런 분위기 변화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이후 중국의 동향을 가늠해보도록 하자. 과도한 제로 코로나 정책 탓이었나? 예컨대 지난달 우한에서 의료보조금 삭감에 항의하는 시위가 터져 나오자, 언론이 주로 제시한 설명은 ‘제로 코로나 정책을 강행하면서 막대한 방역 비용을 의료보험 기금에서 충당한 결과 재정 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지방정부가 심각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는 건 널리 알려졌다. 헤이룽장성 등 일부 지역은 행정조직을 축소했고, 윈난성에서는 6개월 넘게 공무원 임금을 체불했다고 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의료보조금 삭감과 마찬가지로 주민 복지혜택이 축소되고 있다거나, 교사 임금의 3분의 1이 삭감됐다는 소식도 들린다. 코로나19를 겪은 몇 년간 도시들에 대한 반복적인 봉쇄가 이뤄지면서 사실상 경제가 마비되고, 그에 따라 세금 수입은 줄어드는 반면 방대하고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코로나19 검사로 막대한 경제적 지출이 이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 노동자, 학생, 퇴직자 등 대중 속에서 불만이 자라나고 행동으로 표출되는 이유를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렇게 비교해 보자. 근래 미국의 젊은 층 사이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성장하고 정치적 급진화로 연결되며 완곡하게나마 사회주의에 대한 우호적 반응이 늘어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젊은 세대의 삶이 자기 부모의 삶보다 더 열악해질 거라는 명백한 사실이 그들의 시야를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기본적으로 비슷한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몇십 년간 중국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동안에는 지방 관리들의 부패 같은 불만 사항이 생기더라도 중국 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통치가 어쨌든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대중의 기대감이 더 우월했기 때문이다. 10%를 넘나드는 성장률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이런 경제 성장은 정권 안정의 물질적 기반이 됐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이 추세가 꺾였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의 파도 앞에서도 큰 틀에서는 중국 경제가 선방한 것처럼 보였지만, 2012년에 7%대로 내려앉은 성장률은 2015년에 6%대로 내려왔고, 계속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지난해 성장률은 3%에 불과했다. 2021년 청년(16~24세) 실업률이 국가 통계국 공식 발표로도 19.3%에 이를 정도로 일자리 문제가 암울하다. 사회 전반의 고령화와 한국 못지않은 저출생 양상도 심각하다.(1990년, 2000년, 2010년에 한국의 출생률 추이가 1.6 → 1.7 → 1.23인데 비해 중국은 2.87 → 1.56 → 1.63으로, 이 기간에는 중국의 출생률 낙하폭이 더 크다. 2012 유엔세계인구전망 참조.)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저출생은 젊은 세대가 느끼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의 증표다. 중국의 경제위기와 재정 적자 이 불안이 어느 정도의 폭발성을 지닐 수 있을 건가와 관련해 가장 큰 관심을 끌어모으는 지점은 정부의 부채 문제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의 파장으로 중국에서도 공장이 문을 닫고 수백만 노동자가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중국 지배계급은 과잉자본의 배출구를 찾기 위해 인프라 건설에 투자를 집중했다. 철도, 항만, 고속도로 등을 연결하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도 2013년부터 공식화했다. 중국 내에서는 지방정부를 앞세워 인프라 건설 사업을 부추겼다. 이는 일정 기간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률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가공할 만한 부동산 거품을 일으키고 부채를 누적시키며 위기를 초래하는 중심축이 됐다. 스페인에서 장기불황에 대처하기 위해 부동산개발에 자본을 집중한 뒤 그것이 거품을 일으키고 위기를 초래하면서 2011년 광장 점거 운동으로 나아갔던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현재 중국에서 부동산산업의 비중이 전체 GDP의 25%가량 된다. 2018년에 30%까지 치솟은 뒤 부동산 침체와 더불어 하락한 게 그 정도다.(‘부동산 공화국’인 한국의 경우 부동산 및 임대업, 건설업을 합한 비중이 2020년 기준 GDP의 13%가량 된다.) 그런 상황에서 2021년 중국 2위의 부동산 개발기업 헝다그룹이 364조 원의 부채를 짊어지고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364조 원은 한국 박근혜 정부 시절의 연간 정부 예산 규모와 맞먹는다(340조~380조 원). 280개 도시에서 1,300여 개의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8,400여 개의 연관 기업과 380만 개의 연관 일자리의 중심에 있는 헝다그룹이 파산하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공사가 중단돼버린 아파트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헝다그룹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2년 8월 기준으로 30개의 부동산 개발업체가 채무 불이행 상태라고 한다. 이 때문에 지난해 대출 상환 거부시위에서 본 것처럼 전국 각지에서 아파트 시공 중단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전체 미완공 아파트 규모가 200만 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덧붙여 영국의 컨설팅 기업 캐피털이코노믹스는 현재 3,000만 채의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이고, 잔금 미지급 등의 이유로 비어있는 아파트가 1억 채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중국 런민대학 원테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은행이) 목숨 걸고 부동산에 투자했다. 사실 부동산은 몇 년 전부터 넘쳐났다. 2018년, 2019년 계산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분양주택은 수요의 두 배에 이른다.”(KBS ‘세계는 지금’, 2022년 8월 6일) 그런데 이런 부동산 거품이 정부의 재정 적자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중국에서는 지방정부가 토지사용권을 부동산 기업들에 판매하면서 재정을 조달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이 2021년 기준 지방재정의 40%를 차지했고, 전국 재정수입의 25%에 이르렀다.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 곧바로 재정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과정을 지방정부는 지방정부융자기구(LGFV)라는 일종의 자회사,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수행한다. 공식적인 정부 기관이 아니라 별도의 기업이다. 그러다 보니 이 기구에서 쌓이는 부채는 ‘공식적’인 정부 부채로 집계되지 않고 ‘숨겨진 부채’가 된다. 그 규모가 얼마나 될까? 지난해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을 출간한 한청훤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중국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부채는 ‘공식적’으로는 51조 위안(약 9,732조 원), GDP의 45.8% 수준이어서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지방정부융자기구의 채무 총액이 2020년 말 기준 약 53조 위안(약 1경 113조 원)이어서, 이를 합하면 국가 부채 규모가 GDP의 100%를 뛰어넘는다. 여기에 더해 중국 국유기업의 부채 규모가 GDP의 140%인데, 이를 모두 합하면 중국 전체 GDP의 240%에 이른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최악의 경제 붕괴를 경험한 그리스에서도 그 시기에 정부 부채 규모는 GDP의 170~180% 수준이었다. 시진핑 정권의 발밑이 불안하다 시진핑 정권 입장에서는 이런 불안 요인을 어떻게 연착륙시킬 것인가가 관건일 테다. 상하이방과 공청단 등 권력 기구 내 경쟁 세력을 제압하고 만장일치로 국가주석 3연임에 성공하면서 절대권력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시진핑 정권은 자신의 장기집권 정당성을 무슨 재주로 입증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시험대에 스스로 몸을 던진 셈이다. 정권 안정성을 흔들 수 있는 모든 요인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묶어두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올해 3월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산당에 금융공작위원회를 20년 만에 부활시켜 금융 영역 전반을 당이 직접 관장하기로 한 것, 내무공작위원회를 신설해 기존 공안부와 국가안전부가 맡은 역할을 당이 직접 관장하기로 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런 상황이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좁게는 시진핑 정권이, 넓게는 중국 사회 전반이 작은 사건에도 크게 흔들릴 만큼 사회 안정성이 약해져 있다는 것이다.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화재 사망 참사가 전국을 뒤흔든 백지 시위의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말이다. 지난해와 올해 초 볼 수 있었던 중국 내의 다양한 시위 흐름은 앞으로도 다양한 계기로 재현될 수 있다. 그런 투쟁이 어디로, 얼마나 전진할 수 있을지 쉽사리 예측할 순 없다. 대규모로 퍼져나간 백지 시위에서 그만큼 더 두드러졌던 것처럼, 저항 운동 자체는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수 있지만 이 운동을 일관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 전망과 조직은 아직 준비돼 있지 않은 상태다. 노동자, 학생, 여성 등이 조직을 만들고 연대를 건설하며 투쟁에 나설 수 있는 권리가 심각하게 제약돼 왔기 때문이다. 중국 국가가 근본적으로 ‘인민의 국가’라고 믿거나 마오주의를 혁명적 전통으로 여기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의 잔재도 여전히 강력해 보인다. 시진핑 정권은 관료적, 억압적 국가기구를 강화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대한 국가적 통제와 탄압을 더욱 촘촘하게 가할 전망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결코 시진핑 정권의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다. 최근의 일련의 시위, 특히 백지 시위를 거치면서 중국 민중은 자신들이 집단으로 행동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이런 투쟁으로 정권을 움찔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지금 중국에서 가장 불안감을 느끼는 집단은 다름 아닌 시진핑 정권이다. 이런 상황이 중국에서 급진적 운동이 성장할 가능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안한 처지의 시진핑 정권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중국 사회 내에서 갈등이 고조될수록 그 압력을 외부로 배출하려는 시도가 강해질 것이다. 즉 지금껏 부추겨온 애국주의를 한층 더 고조시키며 모험적인 대외정책으로 나아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제국주의 세력이 자신의 패권을 지키며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기 위해 중국 봉쇄정책을 강화할수록 그 위험은 더 커진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조만간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 발발할 것인가를 따지는 건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정세를 뒤흔드는 불안정성은 더욱 커져갈 거라는 점이다. 그 불안정성을 날려버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각 나라 노동자와 민중의 폭발적인 투쟁과 국제적인 연대에서 자라날 수 있다. 중국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투쟁에 계속 주목하고 지지를 보내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2023-03-15 | 조회 1,814 -
프랑스 연금개악 반대 총파업 톺아보기사진: AFP=연합뉴스 지난 한 달 남짓, 마크롱 정권의 연금개악 추진에 반대하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총파업 시위 소식이 우리 시선을 끌었다. 무엇보다 100만을 훌쩍 넘어선 거대한 총파업이 며칠이 멀다 하고 몇 차례씩 거듭되고 있기 때문이다. 총파업과 더불어 에너지산업 노동자들의 ‘로빈 후드 작전’ 이야기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전기요금 폭등으로 허덕이는 가난한 민중들에게 ‘미터기를 조작해’ 전기를 무료로 공급해 주겠다면서, 이것은 “불법이지만 도덕적인 행위”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번 연금개악의 핵심은 연금수령 개시연령을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2년 상향하는 것이다. 연금을 100% 수령하기 위한 기여 기간을 현행 42년에서 (2027년까지) 43년으로 연장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198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 시위 프랑스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연금개악이 진행돼 왔지만, 이번 연금개악은 여러 모로 2010년 연금개악과 비교된다. 이번과 비슷하게 연금수령 개시연령이 60세에서 62세로 상향됐으며, 그에 맞서 198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 시위가 전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총파업은 이미 2010년 투쟁을 넘어서고 있다. 2010년에는 (경찰집계 참가자수가 100만을 넘어서는) 대규모 투쟁으로 불붙기까지 연금개악 쟁점화로부터 6개월여가 걸렸던 반면, 이번에는 2023년 1월 10일 연금개악안 발표 이후 불과 9일 만에 열린 첫 총파업 시위부터 대규모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또한 1월 31일 2차 시위 참가자수 127만(경찰집계 기준)은 2010년 최대치였던 10월 12일 123만을 훌쩍 넘어서 버렸다. 오늘날 프랑스 노동자운동을 주도하는 철도·정유·전기·가스·교사 등 공공부문 전반은 이번 투쟁에서도 높은 참여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침체돼 있는 민간부문에서도 뚜렷한 변화의 조짐이 확인되고 있다. 이를테면 어느 항공산업 하청업체의 경우 과거 총파업들에는 노동자 200명 가운데 5명 정도만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90명 정도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프랑스의 이번 총파업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양상은 중소도시 노동자들의 대규모 참여다.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진행된 대부분의 총파업들은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와 달리 중소도시들에서는 노동자운동과 좌파 정치가 전반적으로 허약했고 극우세력이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그런데 이번 총파업에서는 중소도시들에서 전체 주민의 20~30%가 총파업 시위에 나서는 일이 프랑스 전역에서 숱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1월 19일 16만이 거주하는 그르노블에서는 3만 5천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2월 16일 3천 명이 거주하는 무띠에에서는 1천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물론 220만 인구를 가진 파리에서 40~50만 명이 꾸준히 참가하는 등 이번에도 총파업을 주도하는 것은 대도시다.) 한편 르펜이 이끄는 극우파는 압도적인 여론 때문에 형식적으로 반대는 하고 있지만, 파업과 시위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번 투쟁은 중소도시의 노동자계급이 극우파와 관계를 단절하고 노동자운동의 한 부분으로 새롭게 정립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다. 2월 16일 프랑스 남동부의 소도시 무띠에에서 벌어진 총파업 시위 총파업에 거대한 동력이 붙은 이유 현지 여론조사 결과는 전체 프랑스인들 가운데 60~65% 정도가 연금개악에 반대함을 드러낸다. 노동자들만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는 반대율이 90%까지 나온다. 그렇다면 이처럼 거대한 동력이 이번 총파업에 붙은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연금을 받기까지 “2년 더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분노하고 있다. 노령연금은 프랑스에서 사회복지의 근간으로 간주된다. 흔히 프랑스 노동자들은 ‘5주간의 여름휴가’를 바라보며 1년을 일하고, ‘노령연금으로 뒷받침되는 안락한 노후’를 바라보며 평생을 일한다는 말이 있다. 모두 프랑스 노동자들이 숱한 혁명과 계급투쟁으로 쟁취한 성과들이다. (연금이 너무 허술해서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이 참 씁쓸하다.) 연금개악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가 아래로부터 뜨겁게 밀려 올라오자 전국단위 8개 노총 모두가 2010년 투쟁 이후 처음으로 총파업 공동행보에 나섰다. 그동안 여러 차례 친정부 입장을 취해 왔던 민주노동연맹(CFDT)조차 “지난 30년 동안 최악의 연금개악”이라는 일성과 함께 ‘노총연대’에 동참했다. 2020~21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사회를 움직이는 필수요소로서 노동의 의미가 재평가되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자부심이 전반적으로 상승한 점, 2022년 인플레이션에 맞서 광범한 임금투쟁이 펼쳐지면서 수많은 젊은 노동자가 생애 첫 파업을 경험한 점도 중요한 배경으로 꼽힌다. ‘이대로 가면 연금에 큰 적자가 난다’는 것이 연금개악을 추진하는 마크롱 정권의 명분이지만, 팬데믹 기간 자본가들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을 쏟아부어 놓고서 연금적자는 노동자들에게 다 전가하려 하는 정부의 이중성도 분노에 불을 지폈다. 연금개악에 대한 분노가 물가상승에 따른 실질임금 저하, 에너지 부족, 공공서비스 불만족 같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느끼는 온갖 사회적 고통이나 불만들과 버무려진 것도 큰 요인이다. 그래서 실제 총파업 시위에서는 연금개악 문제를 넘어서서 훨씬 광범한 분노들이 표출된다. 연금수령 개시연령 상향으로 특히 더 큰 타격을 입게 될 블루칼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더욱 거대한 분노가 표출되고 있다. 제조업·택배·청소·의료 등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기존에도 기대수명이 더 짧았고 그래서 연금수령 기간도 더 짧았던 터인데, 이제 2년을 더 일하라 하니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얘기냐”며 거친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다. 야간 노동, 중량물 운반, 독극물 노출 등 고강도 착취에 대한 강력한 분노도 역시 표출되고 있다. 시위에는 연금을 이미 수령중인 은퇴자들과 더불어 나이 어린 대학생과 고등학생들도 대규모로 참여하고 있다. 연금개악 법안의 처리 전망 2010년에 연금개악을 밀어붙였던 사르코지 정권과 달리 지금 마크롱 정권은 (제1세력이긴 하지만) 의회 과반수를 갖고 있지 못하다. 제2세력인 좌파 ‘생태사회신인민연합’(NUPES)과 제3세력인 극우파 ‘국민결집’(RN)은 연금개악에 반대한다. 제4세력인 우파 ‘공화주의자’(LR)는 연금개악에 긍정적인데, 만일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제1세력인 마크롱 정권의 ‘함께’(Ensemble)와 합쳐 과반수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는 연금개악 표결에 찬성했을 때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 때문에 매우 신중한 입장이다. 마크롱 정권이 ‘공화주의자’를 설득하지 못한다고 해서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이 정부에게 비상입법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 제49조 3항에 따르면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그로부터 24시간 이내에 불신임 당하지 않으면) 의회 표결을 생략한 채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종종 이 방법이 사용돼 왔다. 이를테면 2016년 사회당 정권이 노동법 개악안을 강행할 때 이 방법이 사용됐다. 하지만 이후 사회당의 지지기반이 충격적으로 붕괴한 것처럼, 위험부담이 많은 방법이기도 하다. 마크롱은 어떤 식으로든 이번만큼은 반드시 연금개악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히 표명하고 있다. 지난 2019년 첫 번째 임기 때 연금개악을 일차 추진했으나 강력한 총파업으로 고전하다가 코로나를 핑계로 물러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할 때도, 연금개악은 마크롱의 주요 선거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앞선 정권들이 노조의 반대 때문에 연금을 제대로 손보지 못하면서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뒤처지게 됐다’는 것이 마크롱이 줄기차게 떠들어온 논지다. 마크롱은 그래서 이번에는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고, 실제로 이번에도 물러섰다가는 조기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 하원에서 2월 6일부터 18일까지 토론을 벌인 데 이어, 3월 2일부터는 상원 토론 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다. 3월 하순경이면 표결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데, ‘공화주의자’의 태도에 따라 비상입법권의 발동 여부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승리를 향한 전망과 과제 프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연속혁명>의 후안 칭고는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전개된 어떤 운동도 이렇게 강력하게 출발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2010년 연금개악 반대 투쟁 때도 열두 번의 강력한 총파업 시위를 펼쳤지만, 의회에서 개악안이 통과됐을 때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패배했다. 지금 전개되는 운동의 약점과 한계도 분명하다. 전국단위 8개 노총 모두의 연대가 실현되면서 대규모 시위가 가능해지긴 했지만, 그 대신 언제라도 정부와 타협하며 뛰쳐나갈 수 있는 민주노동연맹(CFDT)이 노총연대 속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모순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CFDT의 깃발과 조끼는 거리 시위대 속에서도 3분의 1 가까운 규모를 차지하는데, 공공연히 계급협조주의를 표방하는 CFDT는 이번 투쟁에서도 의회 협상에 압력을 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노총연대가 주도하는 총파업 시위들은 대규모이긴 하되 과격하지는 않게 노동자들의 불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금 상황은 마크롱 정권의 첫 번째 임기 때 펼쳐졌던 상황들과 대비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2016년 사회당 정권의 노동법 개악에 맞선 투쟁 이후 마크롱 정권의 첫 번째 임기를 관통하며 상당히 격렬한 계급투쟁을 전개했다. 2017~18년 철도노조 파업, 2018~19년 노란조끼 운동, 2019~20년 공공부문 중심의 연금개악 반대 파업 등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이 투쟁들은 이번 투쟁보다 규모는 더 작았지만 훨씬 격렬하고 급진적인 양상을 보였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노조관료들의 통제를 상당 수준 극복하면서 아래로부터 주도성과 역동성을 발전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결국 이번 투쟁의 전망은 노총연대가 주도하는 하루짜리 총파업 시위를 넘어서서 아래로부터 강력한 역동성을 바탕으로 최대한 많은 노동자들이 무기한 총파업으로 전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회 내 협상이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상관없이, 또한 비상입법권이 발동되는가에 상관없이, 오로지 생산과 사회를 마비시키는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투쟁을 강력하게 조직할 때만 ‘연금개악 완전 철회’라는 노동자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길이 열릴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19년 투쟁의 경험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2019년 공공부문 중심의 연금개악 반대 파업이 펼쳐졌을 때 파리교통공단(RATP) 노동자들은 노조관료들의 소극성을 뛰어넘어 아래로부터 강력하게 무기한 총파업을 요구하고 스스로 조직해 나갔다. 이 흐름은 국영철도로도 확산됐고 50년 만에 최장기 파업 기록을 세우며 두 달 가까이 이어진 끝에, 결국 마크롱 정권이 뒤로 물러서도록 강제할 수 있었다. 이번 투쟁이 갖고 있는 거대한 규모는 무기한 총파업 운동이 2019년보다 훨씬 멀리 뻗어나갈 가능성 또한 보여준다. 2019년의 무기한 총파업 운동은 격렬하긴 했지만 운수부문에 한정됐다. 다른 조직노동자들은 일부가 며칠짜리 파업 정도에 머물렀고, 대다수 미조직 불안정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투쟁에서는 훨씬 다양한 노동자들이 거대한 규모로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훨씬 큰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이와 관련, <연속혁명>의 후안 칭고는 1995년 연금개악 반대파업 때의 (개악안을 철회시켜 냈던) 성공적인 경험을 잘 살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당시 총파업에서 파업에 나선 조합원들은 지인들의 작업장을 직접 찾아가 총파업에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전술로 파업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 전술은 무작위 대중에게 리플렛을 배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고 하는데, 특히 5인 이상이 집단적으로 방문했을 때 종종 직접적인 결과를 끌어낼 정도로 더욱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사업장마다 현장 노동자들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 총회를 기반으로 작동하면서 파업에 활력이 넘쳤다고 한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더 강력한 행동을 요구하는 상황에 떠밀리면서, 노총연대 지도부는 ‘정부와 의회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3월 7일에는 프랑스 전체를 마비시키겠다’고 2월 11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무기한 총파업이 아니라 하루 총파업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2월 7일 노동총동맹(CGT)에 속한 전기·정유·철도·항만 노동자들은 노총연대가 주도하는 하루 총파업 시위를 넘어서서 (무기한 총파업을 준비하는 성격으로) 48시간 파업을 전개했다. 파리교통공단의 노조합동위원회와 CGT 철도지부는 3월 7일부터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유 노동자들도 비슷한 계획을 논의 중이다. 이처럼 아래로부터 주도성을 갖고 무기한 총파업을 역동적으로 건설해 나갈 때 이번 투쟁을 승리로 이끌 길이 열릴 것이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모든 부문 속으로 다가가며 무기한 총파업을 널리 확산시킬 때 단지 연금개악 철회를 넘어서서 다양한 공세적 요구를 관철시킬 길이 열릴 것이다. 이와 관련해 <연속혁명>을 비롯한 프랑스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60세부터 (중노동 부문은 55세부터) 모든 노동자들에게 풍족한 연금 지급 △물가인상에 맞선 대규모 임금인상과 물가임금연동제 실시 △열악한 노동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노동자의 생산통제 △불안정노동 철폐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 △교육·의료·주거 환경 개선 △반이민법 폐지 등의 요구를 이번 투쟁 속에서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만일 이번 투쟁에서 프랑스 노동자들이 마크롱을 패퇴시킬 수 있다면, 세계 곳곳 노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 인플레이션으로 다시 한 번 ‘위기와 전쟁의 시대’가 시작된 상황에서, 세계 노동자계급 또한 ‘혁명의 시대’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역사적인 투쟁을 기대하며 우리 모두 응원의 마음을 함께 보내보자.2023-02-23 | 조회 1,823 -
성평등 개혁은 스페인처럼?지난 한 해 동안 스페인에서 추진되고 있는 성평등 개혁 뉴스가 종종 전해졌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 성 및 생식 건강과 자발적 임신 중지에 관한 법률: 정부 개정안이 2022년 5월 스페인 국무회의에서 승인됐다. 16~17세 여성과 장애가 있는 여성이 법적 보호자의 동의 없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병원에서 시술 지원, 숙려 기간 조항 삭제, 사후 피임약 무료 공급 등 광범한 내용이 포함됐다. • 성전환자 성별 정정 간소화 법안: 16세 이상이면 의학적 소견이 없어도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12월 22일 하원을 통과했다. 이 법안이 상원까지 통과하면 성 소수자 정체성을 질병으로 간주하는 ‘전환 치료’가 금지되고, 성 소수자를 겨냥한 공격도 처벌 가능하다고 한다. • 생리휴가 법제화: 한국은 근로기준법에 따라 월 1회 무급 보건휴가가 가능한데, 스페인에서는 월 최대 3일(애초 제안은 5일)의 유급휴가로 추진하고 있다. 12월 15일 하원을 통과했다. • 페미니스트 내각: 2020년 초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가 함께 구성한 연립정부 내각에서 22명의 장관 중 11명이 여성이다. 2018년 사회노동당 정부의 내각은 17명 중 11명이 여성이었다. 평등부 장관은 “스페인의 모든 새로운 법안과 정부 지출안은 페미니즘적이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개혁’ 세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구조적 성차별이라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는 윤석열 정부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천지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역사가 오래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고, 포데모스는 2011년 경제위기와 긴축정책에 항의하며 광장점거 운동이 분출한 이후 2014년에 결성된 느슨한 범좌파 경향의 개량정당이다. 이들이 연립정부를 구성해 추진하는 성평등 조치를 보면서 한편에서는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역시 이런 ‘개혁 세력’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급하게 그런 결론을 내리기 전에 살펴봐야 할 점들이 있다. 개혁적인 것처럼 보이는 스페인 정부의 조치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우선 페드로 산체스 총리 스스로 솔직하게 고백한 비밀이 있다. 2018년 6월 6일자 <가디언 The Guardian> 보도에 따르면, 산체스 총리는 성평등 문제에 관한 한 스페인의 역사는 2018년 여성 파업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며, “새 정부는 그 운동을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말했다. 2018년 스페인 여성 파업의 한 장면 스페인 여성 파업에서 노조들은 3.8 여성의 날에 2시간 파업, 24시간 파업, 대규모 집회와 행진 등의 방식으로 투쟁을 조직했고, 그 결과는 2018년과 2019년에 각각 530만 명과 600만 명의 참가자 규모를 기록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당시 최대 인원이 230만 명이었다고 한다). 학교, 병원, 버스, 철도, 공항, 공장, 언론사, 콜센터 등 다양한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성별 임금 격차를 비롯한 직장에서의 성차별, 가정과 거리에서의 성폭력을 규탄한 이 파업은 “우리가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는 대표 구호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증명해 보였다. 정부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이 거대한 대중적 열망에 응답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집권 사회노동당의 처지가 곤란했다. 대중을 들썩거리게 만든 근본적인 경제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기존의 우익정당들에 더해 복스(VOX) 같은 신생 극우 정당이 포데모스를 제치고 제3당으로 떠오를 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추세를 보였다. 반면 사회노동당은 포데모스와 손을 잡아야 가까스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취약한 상태였다. 요컨대 개혁적인 성향의 조치를 대거 풀어놓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기만과 그 결과 ‘그래도 어쨌든 이와 같은 성평등 개혁 조치는 환영할 만한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저런 조치 자체가 끈질기게 이어진 대중 투쟁의 성과인 만큼 이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현 정부를 절대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 연립정부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은,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여성들의 투쟁이 다시 터져 나오는 것을 결단코 억누르려는 그들의 기만적인 태도 때문이다. 2021년 3.8 여성의 날을 앞두고 정부는 모든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다음 날 진보 성향의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 EL PAÍS>에는 현 정부의 기만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실렸다. “[수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시장과 다수의 관중이 몰린 축구 경기장, 지하철 인파는 내버려 둔 채 오직 여성 집회만 통제했다”는 얘기다. ‘노동 존중 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를 핑계로 ‘핀셋 방역’ 운운하며 노동자 투쟁만 핀셋처럼 콕 집어 억압했던 것을 빼닮았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밀어붙이며 여성과 청년,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했던, 그래서 2011년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광장점거 운동이 터져 나오게 만든 바로 그 세력이라는 점이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정치는 다른 세상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또 하나의 절충적 방식을 지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절충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자본주의가 극심한 위기에 직면하면 결국 자본가들의 이윤 보호를 1순위에 놓고 노동자, 민중에게 손실을 전가하게 된다. 지금 사회노동당 정부가 보이는 ‘개혁적’인 겉모습은 2018년과 2019년 스페인을 뒤흔든 대규모 여성 파업의 위력에 압박을 느낀 결과일 뿐이다. 여성 장관의 숫자가 늘어나면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성격이 달라질까? 이런 성격의 정권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가는 그리스에서 시리자가 먼저 보여줬다. 절망적인 경제위기와 폭발적인 총파업 운동의 분출에 뒤이어 긴축정책 폐기를 내걸고 2015년에 집권한 시리자는 그 이름(‘급진좌파연합’이라는 뜻)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어중간한 정치 전망에 머물렀고, 대중 투쟁의 압력이 가라앉은 상황에서 스스로 긴축정책을 집행하는 자본주의 위기관리 대리인으로 우경화하더니 결국 2019년 기존 지배 세력인 신민주당에 도로 정권을 내줬다. 이런 결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 투쟁의 압력을 끌어올리는 것, 즉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정부를 자처하면서 여성 집회를 봉쇄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에 이를 기대할 순 없다. 광장점거 운동의 기세를 이어받아 탄생한 포데모스는 조금 다를까? 애초에 포데모스는 사회노동당 같은 특권 집단과는 손을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극우를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안정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며 대중 투쟁의 힘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정도로 우경화했다. 그들의 시야가 선거 정치에 완전히 함몰됐기 때문이다. 기만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그렇다면 2018~2019년 여성 파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 상황일까? 당시 여성 파업을 조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스페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호세피나 마르티네스는 이렇게 증언한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같은 최근의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은 우익에 맞서 ‘차악’을 지지하자는 생각 때문에 활력을 잃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스페인에서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의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대거 옮겨갔다.” 이 대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스페인의 거대한 여성 파업 운동이 사그라든 데에는 코로나 사태가 조성한 압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투쟁이 활력을 잃은 본질적인 원인은 ‘지금은 사회노동당과 포데모스 연립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타협적인 전망에서 찾아야 한다. 여전히 다수 여성이 더 높은 실업률과 임금 차별, 가사노동의 부담과 여성 살해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더 큰 투쟁을 조직해야 할 이유가 넘쳐나는데도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가 그런 타협적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고, 일부는 정부와 직접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대중 투쟁의 고삐를 놓아버리는 방식은 결국 극우세력이 더 기세등등하게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준다. 스페인은 위력적인 여성 파업을 일으킴으로써 여성 억압, 성차별에 맞선 투쟁이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 보여준 중요한 사례다. 또한 그런 투쟁이 활력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지금 한국에서 여성운동의 주류가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에 맞서면서 민주당을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면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힘은, 개혁 간판을 걸고 노동자 민중을 농락하는 민주당 같은 자들과의 제휴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물결 속에서만 살아날 수 있다.2023-01-20 | 조회 2,274 -
[연재]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 5부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 인플레이션은 마침내 세계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게 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다시 한번 전 세계가 위기와 전쟁으로 뒤덮이는 시대, 그래서 혁명으로 뒤덮여야 할 시대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세계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는 어떤 시대들이 있었는가? 자본주의 아래서 그와 같이 시대가 구분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지난 40여 년 세계 자본주의를 지배한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 시대는 어떻게 등장했고 어떤 내재적 모순이 작동한 결과 막을 내리고 있는가? 세계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위치와 함의는 무엇인가?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제목 아래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될 이번 연재는 그런 질문들에 답해 보기 위한 하나의 시도다. [1부]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 인플레이션이 열어젖힌 새로운 시대 [2부]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시대들이 구분되게 하는 요인 [3부] 앞선 네 번의 시대 [4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 (1980~최근) [5부]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5부]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거듭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도 체제 전반의 이윤율은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화는 점점 후퇴하며, 금융화는 더욱 거대한 금융위기를 향해 치달으면서,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가 근근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 강력한 충격을 안기며 이 시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무엇보다 이전 시대 동안 축적된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격렬하게 분출할 시대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전 시대 동안 축적된 모순들로부터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충돌과 전쟁이 일상화할 시대다. 나아가 경제위기와 전쟁이 서로 맞물리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과 인류를 끝없는 고통 속으로 몰고 들어갈 시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전진할 것이며 나아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노동자혁명의 전망이 다시 한번 미래의 막연한 전망이 아니라 눈앞의 구체적인 과제이자 가능성으로 떠오르게 될 시대다. 1) 패권대결과 보호주의가 만들어 낼 새로운 세계질서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이 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떤 배경 위에서 시작됐고, 또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을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 30년 동안 국가들 간의 세력관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91~2020년 세계 총GDP에서 국가별 비중의 변화를 살펴보면, 흔히 짐작하는 바와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중국의 눈부신 상승이고, 일본의 급격한 하락이다. 또한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의 전반적인 하락을 볼 수 있다. 미국은 상승하다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크게 하락한 뒤 다시 회복하고 있다. 인도·브라질·러시아의 추세적 상승도 확인할 수 있다. 1991~2020년 세계 총 수출에서 국가별 비중의 변화를 보면, 역시 중국의 눈부신 성장이 가장 눈에 띈다. 미국·독일·일본·영국·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캐나다·스페인 등 기존 선진국들은 공히 추세적으로 하락해 왔다. 한국·싱가포르·인도·멕시코·러시아·브라질·사우디·튀르키예 등 신흥국들은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한 성장 추세를 보여준다. 1991~2020년 세계 총 해외직접투자(자본수출)에서 국가별 비중의 변화를 보면, 중국·일본·독일·캐나다·한국·러시아의 성장과 미국·프랑스·영국·스위스의 하락이 교차함을 볼 수 있다. 브라질·사우디·인도·튀르키예는 계속해서 미미한 수준이다. 여기서는 수출에 비해 특정 국가로의 쏠림이 더 큰 것과 기존 선진국들과 신흥국들 안에서도 흐름이 서로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991~2020년 세계 총 군비지출에서 국가별 비중의 변화를 보면,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상황을 볼 수 있다. 미국의 하락과 중국의 상승이 교차했지만, 여전히 그 격차가 매우 크다. 또한 경제력 지표에서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사우디·인도·러시아가 꾸준한 성장 끝에 3~5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영국·프랑스·일본·독일·이탈리아·스페인은 꾸준한 하락을 보여준다. 한국·호주·브라질·캐나다·이스라엘·튀르키예·이란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해 왔다. 2016~2020년 세계 주요 분야에서 국가별 비중 비교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종합한 국가 간 세력관계가 지난 30년의 변화를 거쳐 오늘날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경제력에 비해 군사력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력에서 미국을 상당히 추격했고 심지어 수출과 해외직접투자에서는 추월하기까지 했지만, 군사력에서는 미국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경제력과 군사력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미국과 중국이 보여주는 차이는 미국의 군비지출이 GDP 대비 3.4%인 반면, 중국은 1.7%에 불과한 것으로도 나타난다. 또 하나 두드러지는 지점은 인도·러시아·사우디가 경제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핵무력은 미국과 쌍벽을 이루지만, 종합적인 군사력을 보여주는 데는 군비지출이 더 적절한 지표일 것이다.) 그러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세 국가는 GDP 대비 각각 2.5%, 4.3%, 9.3%에 이르는 군비지출을 했다. 중국이 아직까지 경제성장에 집중하면서 군비지출 비중이 1.7%에 머물러 있고, 상시적인 전쟁위기 아래 놓여 있는 한국의 군비지출 비중도 2.6%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또는 매우 높은 수치들이 아닐 수 없다. 튀르키예는 경제력도 군사력도 강하지 않지만, GDP 대비 군비지출이 2.4%라는 상당히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반면 영국·프랑스·독일·일본·이탈리아·캐나다·스페인 등 미국을 제외한 기존 선진국들은 경제력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프랑스가 나토가 요구하는 GDP 대비 2.0% 내외의 군비지출을 하면서 경제력과 엇비슷한 군사력을 보유한 반면, 나머지 국가들은 1.0~1.4%의 군비지출을 하면서 경제력보다 꽤 낮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최근의 국가 간 세력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중국의 급격한 추격과 미국의 견제로 미·중 패권대결이 본격화했지만 아직 군사력에서는 중국이 한참 밀린다.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미·중 패권대결은 국가 간 세력관계가 급격히 변화할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 급격히 군사력을 증강해 온 인도·러시아·사우디가 중국의 현저한 군사력 열세라는 빈 공간을 파고들며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배경과 이후 전개되는 사태들을 상당히 설명해 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나토의 동진에 대한 반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역으로 나토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장악한다면 영향력 강화의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는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주도 아래 중국을 포위하는 쿼드에 참여해 온 인도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불참하고 오히려 에너지 수입을 늘리면서 사실상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다. 미국의 굳건한 동맹이었던 사우디는 바이든의 요청을 거절하며 원유가격 유지를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더니, 미래도시 건설에 미국의 제재대상 화웨이의 참여를 허용하며 중국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큰 틀에서 보자면, 미국의 압도적 우위가 관철돼 온 세계질서가 미·중 패권대결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경제력에 비해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된 러시아·인도·사우디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를 붙잡기 위해 세계질서를 더욱 뒤흔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은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기존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이 나토를 이끌며 우크라이나의 대리전을 적극 지원하면서 반격해 온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러시아 등의 세계질서 재편 시도에 크게 자극받은 서방의 열강들이 적극적인 재무장에 나서게 만든 과정이기도 하며, 특히 일본과 독일은 공히 GDP 대비 2% 수준으로 군비증강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세 국가에게 신중하지만 분명하게 화답하고 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러시아에 대한 직접 지지는 삼가면서도 제재에 불참하고 에너지 수입을 확대하면서 러시아를 사실상 지원하고 있다. 인도와는 ‘한 세기 동안 볼 수 없었던 중대한 변화’를 놓치지 말자며 국경분쟁의 조속한 해결을 추진하고 있다. 사우디에게는 다량의 원유·가스를 안정적으로 수입하는 대신 위안화로 결제하는 방안을 제안하면서 (달러의 기축통화 유지에서 중요한 한 축인) ‘원유대금 달러화 유일결제’ 시스템에 균열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후 세계질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대결을 중심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진영과 중국이 주도하는 진영 사이의 대립구도로 재편될 것인가?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대결은 이제 그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겠지만, 다른 주요 열강들까지 그 패권대결의 하위 파트너가 되어 진영 간 대결구도로 포괄될 것이냐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일차적으로 러시아·인도·사우디가 중국의 하위 파트너가 되거나 확고한 동맹이 될 가능성이 여전히 높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세 나라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미·중 패권대결로 열린 공간을 활용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있을 뿐이다. 지금은 필요에 따라 중국과 관계를 개선해 나가고 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또 다른 필요에 따라 다시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또한 아직 중국은 세 나라를 휘하에 묶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더 중요한 이유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진영 내부의 모순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비판하며 ‘동맹복원’을 외쳤던 바이든의 정책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공동 대응을 통해 나토의 단결을 회복하면서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은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10년 동안 중국투자를 포기해야 보조금을 주겠다는) ‘반도체지원법’과 (전기차와 배터리의 생산시설을 북미지역으로 이전해야만 보조금을 주겠다는) ‘인플레이션 감축법’ 제정을 통해 트럼프 이상의 ‘미국 우선주의’를 실행했다. 심지어 미국 에너지 기업들이 러시아를 대신해 유럽에 가스를 수출하면서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데도 바이든 행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동맹국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미국의 행보에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당연히 크게 반발하면서, 반도체법·탄소국경세·핵심원자재법 등의 맞불 보호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보호주의가 강력한 대세로 자리를 굳힌 미국 내 정치상황과 점점 더 악화될 전반적인 경제상황은 앞으로도 미국이 당파를 초월해서 보호주의를 강화할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되면, 유럽 국가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맞불을 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진영은 심각한 균열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미국은 (특히 미·중 패권대결이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정리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더 이상 유럽의 열강들을 휘하에 묶어 둘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 세계질서는 한편으로 미국과 중국이 패권대결을 펼치지만 이와 별개로 여러 열강들이 보호주의에 입각해 독자노선을 추구하면서 다극 대립구도가 병행하는 양상으로 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러시아·인도·사우디는 이미 세계질서 재편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로 나서고 있다. 여기에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 보호주의가 맹렬히 확산하거나 극우 세력이 집권한다면, 주변 지역을 이끄는 맹주로 스스로를 재정립하면서 미국 패권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아직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하지 않지만 지역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 튀르키예도 복병이 될 수 있다. (반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지리정치적 조건 때문에 미·중 패권대결의 영향이 강력하게 미치면서 모든 나라가 그 구도 아래로 종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의 패권대결에 덧붙여 여러 열강들이 보호주의에 입각해 각자 영향력 강화를 추구하는 다극 대결구도는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를 가능케 했던 미국 유일 패권의 ‘단일한 세계질서’와는 상당히 다른 질서가 될 것이다. (만일 미국과 중국의 패권대결을 중심으로 각국이 결집하는 진영 간 대결구도로 재편된다 하더라도 역시 상당히 다른 질서가 될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충돌과 다양한 수준의 전쟁이 일상이 되고 나아가 점점 더 격화되는 격동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하이퍼인플레이션·금융대공황과 대규모 전쟁 만일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때, 각국 정부의 막대한 재정 투입과 중앙은행들의 제로금리·양적완화 정책이 시행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 결과는 거의 분명하다. 세계 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에 뒤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파산과 실업으로 가득 찬 폭발적인 대공황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발발 이후 1년 동안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발발 이후 1년 동안,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평균치는 각각 –0.3%와 1.2%를 기록했다. 만일 이 수치가 7% 이상 또는 심지어 10%를 넘나드는 수준이었다면, 그래도 막대한 재정 투입과 제로금리·양적완화 정책이 가능했을까? 또는 우리가 경험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간단치 않은 질문이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라면, 막대한 재정 투입과 제로금리·양적완화 정책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칫하면 인플레이션에 불을 지를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대공황으로 빨려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그러므로 아마 인플레이션에 불을 지르지는 않되 대공황은 차단해 낼 수 있는 어떤 기묘한 균형점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만일 그와 같은 상황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되풀이된다면, 그것도 점점 더 악화된 형태로 되풀이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두 번은 그 기묘한 균형점을 요행히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이퍼인플레이션? 금융대공황? 아니면 둘 다? 문제는 바로 그런 상황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그 가능성은 두 가지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첫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미 전 세계 주식·부동산 시장에 사상 초유의 거품이 조성돼 있어서 언제든 거대한 금융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데, 그럼에도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막대한 금융수탈을 끝없이 추구할 수밖에 없어서 계속해서 더욱 거대한 거품을 조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 세계화를 대신해서 패권대결과 보호주의가 지배하게 될 새로운 세계질서는 인플레이션의 파고가 거듭해서 세계를 강타하도록 만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세계질서 아래서 패권대결과 보호주의 때문에 훨씬 더 자주 발생하게 될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충돌은 꼭 전쟁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세계적인 공급망을 거듭거듭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나아가 공급망 자체가 경제 논리보다 패권대결·보호주의 논리에 의해 재편되도록 강제할 것이며, 이는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추가 비용과 비효율성을 뜻하게 될 것이다. 패권대결과 보호주의를 세계화보다 앞세우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논리는 사실 이미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2022년 상당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면서도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고율관세를 끝내 철회하지 않았다. 패권대결 일환으로 첨단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 하며, 보호주의를 앞세워 미국에서 생산하는 기업들에만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려 한다. ‘가장 저렴한 곳에서 생산’한다는 세계화의 논리는 바로 그 세계화를 힘으로 관철하던 미국에 의해 적극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가장 저렴한 곳에서 생산함으로써 가능했던 장기적인 저물가를 대신해서 이제 ‘인플레이션과 함께 사는 시대’가 장기적인 경향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22년, 미국 연준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빠르게 금리를 인상했다. 미국 연준의 경우 2022년 3월부터 12월까지 7차례에 걸쳐 4.25%포인트의 금리를 인상했다. 그 결과 6월 9.1%로 정점을 찍었던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2월 7.1%까지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하지만 물가는 아직도 높고 연준은 2023년에도 1%포인트 가량의 추가 금리인상을 예고하고 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번 인플레이션의 파고는 일단 잡혀갈 수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금리인상이 부채부담 증가, 기업신용 경색, 가계소비 위축, 주식·부동산 가격 하락의 고리를 거쳐 초래할 경제침체의 파고를 겪어야 한다. 다가오는 경제침체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미국 연준이 2004~06년 금리를 4.25%포인트 인상하고 2년 뒤에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한 점을 고려하면, 더 짧은 시기 동안 더 높은 금리를 올리게 될 이번 금리인상의 파고는 결코 작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 GDP 대비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2022년 3분기에 162.1%를 기록함으로써 정점을 찍은 2021년 4분기 211.4%로부터 이미 49.3%포인트나 하락했다. (닷컴붕괴 때는 12분기 동안 69.8%포인트, 금융위기 때는 7분기 동안 68.1%포인트 하락했다.) 주식 못지않게 거대한 거품을 조성했던 미국 부동산시장은 2022년 5월 정점을 찍은 뒤 아직은 소폭 하락한 상태인데, 향후 그 하락 폭과 속도가 어떻게 되는가 또한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경제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편 IMF에 따르면 가계·기업·국가를 망라하는 세계의 총부채가 2007년 195%에서 2020년 256%로 상승했는데, 이렇게 부채가 늘어난 만큼 금리인상에 따른 부담과 파장도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은 다가오는 경제침체를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번에는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잘 준비돼 있는 측면도 있다. 이를테면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거의 모든 주택담보대출을 고정금리로 묶어놓았는데, 이것은 금리인상에 따른 부담을 완화하는 데 (적어도 미국 안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미국 금리인상의 폭과 속도에 비해 과거와 달리 외환위기에 빠져든 국가가 아직까지 거의 없는 것은, 많은 국가들이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나름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2023년에 겪게 될 경제침체는 상대적으로 덜 심각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들도 있다. (반면 근원물가가 40년 만에 최고치인 3.6%에 이르렀는데도 GDP 대비 266%라는 세계 최고 수준 국가부채 때문에 마이너스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 그리고 거대한 부동산 거품 붕괴가 진행 중인 중국이 동아시아발 세계 경제위기를 촉발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2023년의 경제침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든, 아마도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일 수 있다. 이미 GDP 대비 국가부채가 세계 평균 100%에 이를 정도로 크게 누적돼 있다는 점 때문에, 또한 쉽사리 꺼지지 않는 인플레이션의 불씨 때문에, 막대한 재정 투입과 제로금리·양적완화를 통한 경기부양이 매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의 경제침체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게 출발했지만,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경기부양 정책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서 경제침체가 길게 늘어지고 점점 악화되다가 마침내 심각한 수준의 경제위기로 넘어가는 시나리오도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또는 무리해서 경기부양에 나섰지만, 그렇게 해서 다시 한번 거대한 거품을 부풀렸을 때 훨씬 빠르고 강력한 인플레이션이 덮치는 시나리오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지금 2023년 이후를 구체적으로 전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사태가 전개되는 양상과 속도는 우리가 지금 알 수 없는 많은 변수에 의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추세만큼은 우리가 예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경제가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금융대공황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다를 향해 나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 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그와 같은 파국적 상황에 이르렀을 때 자본가계급은 어떤 선택을 하려고 할까? 그런 상황에 이르렀을 때 자본가계급이 믿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탈출구는, 어마어마한 대량파괴와 대량학살을 실행함으로써 자본주의가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벗어나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경험일 것이다. 지구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는 가공할 핵무장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와 같은 장기간의 전면전이 쉽지 않을 테니, 자본가계급은 아마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다른 형태의 대규모 전쟁을 추진할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파국을 향해 치달아가는 동안 패권대결과 보호주의를 앞세우며 켜켜이 누적될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충돌은 그러한 전쟁을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충분한 계기와 명분을 자본가계급에게 제공할 것이다. 지극히 반동적인 그러한 전쟁을 반드시 관철해 내려면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철저히 제압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 자본가계급은 많은 국가에서 파시즘 정권을 세우려 할 것이다. 3) 계급투쟁의 재건과 혁명적 전진을 향해 1980년대 이후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 세계적인 노동자투쟁의 분출을 잠재운 토대 위에서 전개됐다. 그러므로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세계 전반의 노동자투쟁은 착취와 수탈이 상당히 강화됐는데도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침체에 빠져 있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강력한 노동자투쟁의 시대를 거쳤던 한국의 경험은 브라질·남아공 등과 함께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에 속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노동자투쟁의 양상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 세계 자본가계급이 금융위기에 따른 고통과 그 수습비용을 노동자계급에게 전가하기 위해 엄청난 공세를 지속적으로 퍼부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의 파고 속에서 수많은 노동자·민중들이 금융수탈의 집중적인 피해자가 되어 집을 빼앗기거나 파산했다. 금융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구제금융과 경기부양으로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한 각국 정부가 국가부채 폭증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기 위해 공공부문 정리해고·임금삭감, 복지지출 축소, 연금개악 등의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다. 세계 곳곳의 민간 기업들도 금융위기에 따른 신용경색과 소비위축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기 위해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섰다. 또한 대불황 시기를 가로지르며, 노동권의 후퇴와 노동조합의 약화를 노린 노동법 개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80년대 이후 확산돼 온 노동유연화를 한층 가속시켜 더욱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더욱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 노동자로 전락시켰다. 자본가계급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또한 파탄난 삶과 희망 없는 미래에 분노하며, 2010년 이후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거센 반격이 세계 곳곳에서 전개돼 왔다. 2010~12년에는 프랑스의 연금개악 반대파업, 아랍의 봄,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 운동, 미국의 월가점령운동, 그리스의 긴축반대 총파업 등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민중투쟁의 첫 번째 물결이 펼쳐졌다. 2018~2020년에는 프랑스의 노란조끼 시위, 홍콩의 민주화 투쟁, 칠레의 민중반란, 미국의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 등을 중심으로 두 번째 물결이 펼쳐졌다. 2022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사회를 위해 진정으로 필수적인 존재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노동자들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생존권 박탈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파상적인 임금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제 세계 노동자계급은 경제침체와 경제위기로 점철되다가 끝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금융대공황 같은 파국을 향해 치달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대, 또한 이와 맞물리며 패권대결과 보호주의를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들의 충돌이 거듭되다가 끝내는 대규모 전쟁을 향해 치달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대 앞에 서 있다. 앞으로 펼쳐질 ‘위기와 전쟁의 시대’는 세계 노동자계급을 극심한 고통과 절망으로 내몰 것이며, 이 암흑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집어엎는 데에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투쟁과 운동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집어엎을 수 있을까? 나라마다 계급투쟁의 양상과 발전정도에 차이가 많은 만큼 그 구체적인 답은 나라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핵심적인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우리는 특히 한국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계급적 요구를 전면에 내걸고 광범한 노동자대중이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계급적 노동자투쟁의 길을 열어야 한다.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든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든 이제는 눈앞의 협소한 변화에만 몰두하는 조합주의를 과감하게 박차고 떨쳐 일어서야 한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운명을 덮치는 큰 그림을 직시하면서, 노동자계급 전체의 요구를 세워내고 광범한 노동자대중을 끌어들이며 하나의 계급으로 뭉쳐 싸우는 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둘째, 노동자계급이 구심에 서서 광범한 민중을 단결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맞선 투쟁, 기후재난과 환경파괴에 맞선 투쟁, 사회적 생존권과 민주적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제국주의와 전쟁에 맞선 투쟁 등에서 노동자계급이 선두에 서야 한다. 특히 위기와 전쟁으로 치달을 자본주의 아래서 미래를 송두리째 빼앗기게 될 청년들이 노동자계급과 함께하는 투쟁 속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간절한 희망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셋째, 모든 자본가세력에 대한 모든 어리석은 미련을 깨부수고 오직 노동자계급 자신의 단결투쟁만을 믿는 ‘노동자계급 독립성’을 확고하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노동자투쟁의 재건과 계급적·정치적 전진, 나아가 혁명적 도약을 헌신적으로 주도해 나갈 수 있는 혁명적 노동자정치운동을 강력하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다가오는 파국의 고통과 절멸의 위험으로부터 노동자계급과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결국 세계적인 노동자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에 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국가·작업장·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어 민주적 계획경제와 생산자 자주관리를 결합시키는 사회주의 세계체제를 건설함으로써만 자본주의에서 끝없이 되풀이돼 온 착취와 억압과 차별을 그리고 빈곤과 야만과 전쟁을 끝장내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2023-01-20 | 조회 2,306 -
[연재]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 4부(왼쪽부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로널드 레이건, 마가렛 대처 (사진출처: american prospect)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 인플레이션은 마침내 세계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게 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다시 한번 전 세계가 위기와 전쟁으로 뒤덮이는 시대, 그래서 혁명으로 뒤덮여야 할 시대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세계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는 어떤 시대들이 있었는가? 자본주의 아래서 그와 같이 시대들이 구분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지난 40여 년 세계 자본주의를 지배한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 시대는 어떻게 등장했고 어떤 내재적 모순이 작동한 결과 막을 내리고 있는가? 세계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위치와 함의는 무엇인가?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제목 아래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될 이번 연재는 그런 질문들에 답해 보기 위한 하나의 시도다. [1부]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 인플레이션이 열어젖힌 새로운 시대 [2부]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시대들이 구분되게 하는 요인 [3부] 앞선 네 번의 시대 [4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 (1980~최근) [5부]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4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 (1980~최근) 1970년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이윤율이 매우 심각하게 하락해서 바닥까지 떨어졌다. 1970년대 노동자계급의 세계적 반란을 잠재운 자본가계급은 1980년대 이후 이윤율 저하를 상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매우 공격적으로 추진했다.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라는 한 묶음의 대책이 지난 40여 년의 세계를 지배했다. 1) 1980년대 이후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기 위해, 나아가 바닥까지 내려간 이윤율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가 가장 먼저 추진한 정책은 신자유주의였다. 정리해고, 임금삭감, 비정규직화, 복지축소, 노조무력화, 자본가감세, 규제완화, 기간산업사유화 등의 세부 정책을 포괄하는 신자유주의는 간단히 말해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최대한 강화하고 자본가에게 온갖 특혜를 줌으로써 자본의 이윤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그 목표가 있었다. 1970년대 중후반 칠레 군사정권의 실험을 거쳐,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의 보수주의 정권에 의해 본격화한 신자유주의는 1990년대를 거치며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은 특히 각국의 사회민주주의 정권들이 대거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가 되는 과정을 수반했는데, 이들은 흔히 노·사·정 협상에 입각해 신자유주의를 ‘민주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강제로 하락시키면서 자본의 이윤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는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78~2007년 미국 제조업의 시간당 산출량은 연 평균 3.26% 상승했지만, 노동자들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연 평균 0.37% 하락했다. 2007년 미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1974년 실질임금의 85%에 불과했다. 1972년부터 2018년까지 미국에서 시간당 노동생산성이 160.70%포인트 상승하는 동안, 시간당 실질임금은 24.28%만 상승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는 이윤율 회복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지만, 이내 한계에 봉착했다. 신자유주의 자체에 내장된 모순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힘입어 개별 기업이 이윤율을 회복할수록 노동자는 더 가난해졌고 따라서 사회 전체에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은 더 벌어졌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생산과잉은 구조적인 판매부진을 낳았고, 이는 이윤율 회복에 중대한 장애를 조성했다. 신자유주의가 지닌 결정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추가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세계화와 금융화가 덧붙여졌다. ‘생산의 세계화’와 ‘시장의 세계화’가 결합된 세계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가속되다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함께 전면화했다. 세계 총GDP 대비 해외직접투자(FDI)는 1985년 0.4%에서 2007년 5.3%로 늘어났다. 세계 총GDP 대비 수출은 1986년 16.9%에서 2008년 31.2%로 늘어났다. 특히 1980년대 중국의 시장경제 전환, 1989~91년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는 스탈린주의 진영을 소멸시키면서 세계를 단일 공급망과 단일 시장으로 통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생산의 거점 전체 또는 일부를,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자를 찾아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이동시킨 ‘생산의 세계화’는 자본의 이윤율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 저개발 국가를 향한 공장이동은 추가되는 물류비용을 충분히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임금비용을 획기적으로 하락시켰다. 공장이동에 대한 협박은 선진국에서 노조를 무력화하고 후퇴를 강요하는 자본의 필살기가 되었다. 국가 간 무역장벽을 허물어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시킨 ‘시장의 세계화’는 시장을 획기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간극 확대라는 신자유주의의 약점을 보완했다. 중국산으로 대표되는 저렴한 수입품은 선진국 노동자들이 하락한 임금으로도 그럭저럭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임금하락이 노동자투쟁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세계적인 공장이동은 자본주의의 지형을 크게 바꿔 놓았다. 미국·서유럽·일본에 집중돼 있던 공장은 남미·동유럽·동아시아를 향해 빠져 나갔고 최종 귀착지로 중국을 향해 몰려들었다. 세계 자본주의는 중국의 생산과 미국의 소비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금융자본은 본래 산업자본에 대한 대부나 주식투자를 통해 산업자본이 획득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나 배당의 형태로 나눠받음으로써 수익을 얻는 자본이다. 금융자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지만, 사회의 유휴자본을 수집하여 산업자본에게 공급함으로써 산업자본의 가치증식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이자나 배당을 분배받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주가가 지속적으로 폭등한다면, 금융자본은 이자나 배당으로 얻는 수익보다 주식 매매차익을 통해 훨씬 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 투기적인 불로소득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켜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 상층까지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이면, 주가는 자연히 한동안 오르게 마련이다. 금융자본은 주식시장 참여자들에 대한 고금리 대출을 통해서도 별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물론 실질가치를 크게 벗어난 주가는 언젠가 폭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체로 큰손들은 폭락 이전에 이미 차익을 실현하고, 폭락에 따른 손실은 대부분 개미들에게 전가된다. 이와 같은 금융수탈은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매우 큰 부작용이 있다. 주식가격이 폭락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파산하고 그 충격으로 은행들까지 파산하면서 경제 전반이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1929년 10월 미국에서 대공황이 시작될 때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미국은 1930년대 대공황을 수습하면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여러 가지 규제를 도입했다. 가장 중요한 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금지였는데, 예금을 취급하는 상업은행이 주식투자 같은 고위험 영역에 관여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대공황과 같은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이런 규제는 1990년대 후반까지 60년 이상 계속됐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이런 규제들을 1999년에 대대적으로 풀어버렸다. 대표적으로 상업은행·보험사·투자은행 사이의 겸업금지 조항을 없애 버렸다. 대중들이 가진 소액의 자금조차도 최대한 투기적인 고위험 영역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처럼 국가의 적극적 지원 아래 금융수탈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과정이 바로 금융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한 금융화는, 체제 전반의 이윤율이 바닥을 기게 됨으로써 잉여가치 생산을 통한 착취만으로는 충분한 이윤을 거둘 수 없게 된 자본에게 금융수탈을 통한 추가적인 수익을 보충해 주는 장치였다. 금융수탈은 주식 매매에 국한되지 않았다. 기업을 인수한 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가치’를 높여 다시 판매하는 기업 자체의 매매도 금융수탈의 중요한 영역이었다. 부동산시장에서는 주식시장과 비슷한 일이 훨씬 큰 규모로 벌어졌는데, 여기서는 주택담보대출의 규모가 압도적인 만큼 그를 통한 금융기관의 수익도 훨씬 컸으며, 주택가격 폭등에 따라 임대료 상승으로 얻는 수익도 상당했다. 금융화가 확산되면서, 금융수탈의 영역은 외환시장, 원자재시장, 선물시장, 나중에는 암호화폐시장까지 끝없이 뻗어나갔다. 금융화는 금융부문을 비대하게 팽창시켰다. 2006년 세계 총GDP가 51.8조 달러일 때, 세계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을 더한 규모가 119조 달러에 이르렀다. 2007년 금융화의 전위부대라 할 헤지펀드들이 운용하는 금액만 10.1조 달러였다. 영국에서는 2007년 제조업에 300만 명이 고용된 반면 금융부문에는 650만 명이 고용됐다. 미국에서는 GDP 대비 전체 금융기관 자산이 1985년 110.3%에서 2007년 224.2%로 치솟았다. 세계화와 금융화가 맞물린 결과, 미국에서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47년 25.6%에서 2009년 11.2%로 축소된 반면, 은행·보험·증권·부동산·임대업을 합친 금융업의 비중은 1947년 10.5%에서 2009년 21.5%로 성장했다. 체제 전반의 이윤율이 바닥에서 헤매는 까닭에 쓸 만한 투자처를 쉽사리 찾지 못하던 자본은 가공할 수익률을 제공하는 금융부문에서 새로운 활기를 찾았다.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거품을 바탕으로 금융부문에서 투기적인 수익률을 얻을 수 있게 되자, 제조업마저 생산적 투자가 아니라 금융수탈을 향해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대표적으로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 지엠은 1990년대에 자회사 지맥을 통해 금융수탈에 동참했다가,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수익이 전체 이윤의 절반을 상회하자, 지맥에 투자를 집중하기 위해 소형차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멀쩡한 공장들을 폐쇄시켜 버렸다. (2008년 금융위기에 따른 지맥의 파산은 2009년 지엠 전체의 파산으로 귀결됐다.) 금융수탈을 위해 주식·부동산 시장에 거품을 일으키고 이를 뒷받침하려고 막대한 신용대출을 제공하는 것은 선진국에서 소비를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구조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모순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과 시장의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점점 더 많은 상품이 세계시장에 쏟아져 나오는데, 세계시장의 중추인 선진국에서는 신자유주의 공세와 공장이동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임금하락·고용감소로 소비능력이 오히려 점점 더 위축됐다. (2010년 기준으로 미국·유럽연합·일본을 포괄하는 선진국은 세계 인구의 17.9%이지만 세계 GDP의 57.9%를 차지했다. 특히 미국은 세계 인구의 4.5%에 불과하지만 세계 GDP의 23.3%를 차지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축적구조가 마비되지 않고 원활히 작동할 수 있으려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인위적인 소비 확장이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미국에서 1990년대 중후반 주식거품과 2000년대 초중반 부동산거품을 국가가 은행을 매개해 막대한 신용대출로 뒷받침한 것은 그에 동승한 대중이 지갑을 열고 왕성한 소비에 나서도록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과정은 소득불평등이 빠르게 심화되는 과정이었다. 자본가들이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면서 이윤을 늘린 만큼 노동자들은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전체 국민소득에서 상위 1%가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 10%에서 2007년 23%로 치솟아, 1929년 대공황 발발 직전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는 자본가들에게 꿈과 같은 세상을 열어줬다. 뉴욕을 비롯한 금융 중심지들에 포진한 국제 금융자본은 마치 지구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기라도 한 것처럼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같은 국제기구들을 앞세워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흐름을 지구 구석구석까지 강제하면서 자본주의 세계 전반을 이끌었다.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흐름 속에서 소련·동유럽이 붕괴하고 중국·베트남이 개혁개방에 나서자 자본가들은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노래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를 앞세워 자본주의가 영원히 승승장구하리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2) 2008년 금융위기와 대불황 금융수탈을 위해 한껏 부풀려진 주식·부동산 가격은 필연코 실제 가치에 부합하는 가격으로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주식시장에서 부풀어 올랐던 이른바 ‘닷컴버블’이 2000년에 터졌다. 그러자 수많은 주식시장 파산자들을 뒤로 하고, 금융수탈의 주요 무대가 부동산시장으로 옮아갔다. 2000년대 초중반 부동산시장에서 더욱 거대한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은행들은 상환능력이 부족한 이들까지 광범하게 대출을 제공하며 주택 구입을 부추겼다. 주택소유자가 파산하더라도,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기 때문에 주택을 압류해서 팔면 오히려 이득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준이 3~4%대의 물가를 잡기 위해 2004~06년 금리를 1.00%에서 5.25%로 인상하자, 갑자기 불어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주택구매자들이 줄줄이 파산했고, 그에 따라 주택가격도 폭락했다.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한 은행들은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게 됐고, 하나 둘 위기로 내몰렸다. 게다가 파생상품을 매개로 미국과 세계의 금융기관들 다수가 부동산 부실채권과 연결돼 있었다. 마침내 2008년 9월 미국의 5대 투자은행과 최대 보험사를 비롯한 대규모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파산 또는 사실상의 파산 국면에 들어섰고, 그 충격으로 주식시장이 대폭락했다. 이른바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전면에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 사건이었다. 미국은 물론이요, 다른 나라의 거대 금융기관들도 줄줄이 파산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전체가 마비되기 직전이었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약탈적 대출을 통한 금융수탈은 200만 가구를 홈리스로 만들며 자본가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주었지만, 결국 금융위기의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본가들의 지배체제 자체를 파탄 직전까지 내몰았다. 자본주의 체제 전반이 붕괴할 위험에 직면하자, 그동안 신자유주의를 부르짖으며 ‘시장에 다 맡기라’던 자본가계급은 뻔뻔스럽게도 국가를 통해 천문학적인 구제금융을 금융기관들에게 제공했다. 2009년 11월 영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영국·유로존이 쏟아 부은 구제금융만 14조 달러로 2009년 세계 총 GDP의 4분의 1에 해당했다. 은행들의 파산은 간신히 막았지만, 선진국 소비시장이 빠르게 위축되었다. 금융위기가 터지고 불과 세 달 만에 전 세계 생산과 무역이 30% 이상 감소했다. 특히 중국에서는 금융위기 직후 세 달 만에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2천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경기부양을 위해 각국 정부들이 엄청난 재정을 쏟아 부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보조금과 세금혜택을 중심으로 소비를 진작시켰다면,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에서는 대대적인 토목·건설 공사가 활용됐다. 금융위기 이후 2년 동안 경기부양을 위해 각국 정부가 투입한 재정은 5조 달러를 웃돌았다. 한편 미국·유럽·일본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경기부양을 위해 대규모의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정책을 장기간 실시했다. 이를테면 미국 연준은 2008년 11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6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3.6조 달러 규모의 양적완화(은행들이 보유한 채권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중앙은행이 시중 통화량을 확대하는 정책)를 실시했다. 또한 연준은 2008년 1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7년 동안 기준금리를 제로(0.00~0.25%)로 유지했다. 이와 같이 전례 없는 대규모 구제금융과 경기부양 정책을 동원함으로써, 자본주의 국가는 2008년 금융위기가 (1930년대 대공황처럼 대규모의 파산과 실업으로 넘쳐나는) 또 한 번의 폭발적인 대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불황은 피할 수 없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9년까지 12년 동안 세계경제의 평균성장률이 2.5%를 기록했는데, 이는 1961~2007년 평균성장률 3.7%는 물론, 1995~2007 평균성장률 3.4%보다도 한참 낮은 것이었다. 더욱이 이 수치는 각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천문학적인 재정확장과 전례 없는 초저금리·양적완화 정책을 장기간 동원함으로써 겨우 달성한 결과였다. 대불황의 시기는, 부분적으로 애플 같은 빅테크 기업들, 아마존 같은 플랫폼 기업들, 테슬라 같은 이른바 ‘친환경’ 기업들의 눈부신 성장과 그에 따른 과감한 투자를 보여주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체제 전반의 이윤율이 바닥을 벗어나지 못함에 따른 극심한 투자기피 현상을 보여주었다. 체제 전반의 투자기피 현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대표적인 실례는 미국의 ‘자사주 매입’ 확산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해외투자를 미국으로 회수하는 기업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기로 함에 따라, 2018년 1분기 미국 기업들이 2,170억 달러를 미국으로 회수했는데, 이는 전체 해외투자금 2.1조 달러의 약 10%였다. 그런데 상위 15개 기업이 회수한 810억 달러 가운데 겨우 20억 달러만 생산적 투자에 지출됐다. 반면 2018년 2분기 미국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1,500억 달러로 1분기 대비 세 배로 급증했다. 즉 미국으로 회수된 해외투자의 대부분은 생산적 투자 대신 경영권 방어나 주가 견인을 위한 ‘자사주 매입’에 투입됐다. 투자기피 현상은 은행의 대출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상업은행들이 1970~81년 제공한 총신용 가운데 상공업대출의 비중은 25.0%였으나 2008~19년에는 16.1%에 불과했다. 반면 부동산대출의 비중은 같은 기간 19.1%에서 37.0%로 상승했다. 한국에서는 투자기피 현상이 재벌 대기업의 사내유보금 급증으로 나타났다. 2008년 221.6조였던 1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2019년 821.6조로 성장했다. 결국 대불황의 시기는 자본주의 축적체제에 발생한 모순을 해소함으로써 새로운 호황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모순을 더욱 축적하고 악화시킴으로써 대규모의 폭발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모순의 축적과 악화는 세계화와 금융화 양 측면 모두에서 진행되었다. 3) 세계화가 불러낸 리쇼어링·보호주의·패권대결 세계화는 선진국과 신흥국 모두에서 자본가들이 저임금을 강요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고 나아가 이윤율을 회복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는 수단이었다. 또한 낮은 물가가 유지되게 함으로써 저임금이 노동자투쟁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차단하는 기능도 했다. 그러나 대불황 시기를 거치며 세계화는 (특히 ‘생산의 세계화’는) 크게 후퇴했다. 세계 GDP 대비 해외직접투자의 비율은 1985년 0.4%에서 출발해 추세적으로 상승을 거듭한 끝에 2007년 5.3%까지 이르렀으나, 이후 추세적 하락을 거듭하며 2020년 1.3%를 기록했다. 세계 GDP 대비 수출(상품+서비스)의 비율은 1986년 16.9%에서 출발해 2008년 31.2%까지 상승했으나, 이후 추세적 하락 끝에 2020년 26.3%를 기록했다. 세계 주요국·지역에서 GDP 대비 해외직접투자 유입분의 비율은, 대부분의 경우 2006~10년보다 2016~20년에 그 수치가 하락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국 1.9%에서 1.5%, 유로존 5.8%에서 1.9%, 중국 3.7%에서 1.5%, 인도 2.4%에서 1.8%, 러시아 3.7%에서 1.4%로 하락했다. 브라질이나 동남아시아 등 일부 국가·지역에서는 양상이 약간 달랐지만, 여기서도 그 비율이 뚜렷이 상승하지는 못했다. 세계화의 후퇴는 특정 국가나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범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세계화가 이렇게 후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화 자체에 내장된 모순이 작동한 결과 리쇼어링, 보호주의, 패권대결을 불러냄으로써 강력한 역세계화의 힘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초기에 선진국 자본가들이 신흥국으로 생산거점을 대거 이동한 것은 무엇보다 신흥국의 현저한 저임금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선진국 임금과 신흥국 임금 사이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신흥국에서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노동자들의 단결과 임금투쟁이 확대되면서 임금이 빠르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에서 2010년에 터져 나온 대대적인 임금투쟁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덧붙여 선진국에서 전반적인 임금정체에 덧붙여 이중임금제까지 확산되면서 제조업 신규 노동력의 임금이 상당히 하락했다.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의 임금격차 축소는 물류비용 등까지 고려할 때 신흥국으로 생산거점 이동이 과연 장기적으로 이득인지에 대해 회의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대략 2010년을 분기점으로 많은 선진국 기업들이 신흥국을 향한 추가 생산투자를 보류하고, 심지어 신흥국에 있던 생산거점을 다시 선진국으로 되돌리는 이른바 리쇼어링에 나서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 정부가 등장하기 이전인 2010~16년에 이미 리쇼어링으로 43만 8천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리쇼어링이 비교적 조용한 경제적 현상이었던 것과 달리, 보호주의와 패권대결의 부상은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강력한 정치적 현상이었다.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는 소련·동유럽의 몰락과 중국의 시장경제 전환을 포괄하며 사실상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재통합해 냈는데, 그와 같은 단일한 세계질서는 반대로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가 원활하게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정치적 기반이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각국 정부들이 단일한 세계질서에 입각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한 것은 금융위기가 폭발적인 대공황으로 나아가지 않고 대불황 정도로 수습되게 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세계화는 이 단일한 세계질서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보호주의와 패권대결을 다시 불러냈다. 2009년 4월 런던에서 G20 제2차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각국 정상들은 금융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을 위해 ‘보호주의 저지’를 공식 결의했다. 1930년대에 세계 각국이 보호주의에 빠짐으로써 대공황을 크게 악화시켰던 경험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로 피폐해진 데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더욱 급격하게 삶의 후퇴를 경험한 미국과 유럽의 노동자·민중이 (이들을 이끌 역량 있는 혁명적 세력의 부재라는 조건 위에서) 보호주의 세력에게 거대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마침내 2016년 영국에서 유럽연합 탈퇴가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되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보호주의가 세계 정치와 국제관계의 전면에 부상했다. 보호주의 세력의 집권은 기왕에 진행되던 리쇼어링을 더욱 가속시켰다. 트럼프 정부가 해외투자를 회수하는 기업들에게 대규모 감세 혜택을 제공한 결과 2017~20년 리쇼어링으로 63만 7천 개의 일자리가 추가됐다. (앞서 본 것처럼 회수 자금의 대부분이 자사주 매입에 투입됐는데도 그 정도 결과가 나왔다.) 보호주의 세력의 집권은 세계질서를 뒤흔드는 정치적 힘으로도 기능했다. 트럼프가 내세운 ‘미국 우선주의’는 중국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유럽의 전통적인 동맹들과의 관계에도 큰 균열을 만들어냈다. 외국과 이주민을 혐오하는 보호주의의 득세는 세계 곳곳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온갖 극우 세력들을 강력하게 고무했다. 세계화로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은 빠른 성장을 거듭한 끝에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만큼 도약했다. 더 이상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미국과 추격의 시간을 단축하려는 중국 사이의 갈등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패권대결을 조기에 가시화했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1982년, 미국 GDP 대비 중국 GDP의 비율은 6.1%였다. 한동안 이 수치는 완만하게 증가해서 중국이 WTO에 가입하던 2001년에도 12.7%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후 6년 만에 이 수치가 두 배로 늘어나 2007년 24.5%를 기록하더니,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다시 4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나 2011년 48.4%를 기록했다. 게다가 2010년부터는 중국 GDP가 일본을 추월하며 세계 2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오랜 밀월을 대신해서 긴장과 갈등을 불러왔다. 2011년 오바마 정부는 ‘잠재적 적국’으로서 중국에 대한 견제와 포위를 뜻하는 ‘아시아 회귀 전략’을 미국의 최상위 대외정책으로 설정했다. 이에 맞서 중국은 추격의 고삐를 더욱 당겼다. 중국의 GDP가 처음으로 미국의 절반을 넘어서서 52.5%를 기록하던 2012년, 당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은 중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는 꿈, 즉 ‘중국몽’을 전면에 내걸었다. 나아가 중국의 GDP가 미국의 60.8%를 기록하던 2015년, 중국은 2025년까지 10대 핵심 첨단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중국제조 2025’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의 GDP가 미국의 3분의 2를 넘어서며 67.7%를 기록하던 2018년,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전면적인 무역분쟁으로 불붙었다. 2018년 7월 트럼프 정부의 선공으로 340억 달러 규모의 수입품에 대한 25% 보복관세를 주고받으며 시작된 미·중 무역분쟁은, 2019년 미국이 3천억 달러 규모의 추가 수입품에 대해 보복관세를 부과하고 화웨이를 비롯한 첨단기술 기업들을 제재하자 중국이 미국산 농산물 수입을 축소하는 양상으로 확대된 가운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무역분쟁을 거치며 미국의 중국산 수입품 가운데 관세부과 대상이 1.0%에서 66.4%로 크게 확대됐으며, 평균 관세율은 3.1%에서 19.3%로 상승했다. 미국은 무역분쟁을 활용해 2019년 중국과의 GDP 격차를 다시 벌릴 수 있었지만, 중국이 빠르게 대응력을 회복하면서 2021년 중국의 GDP가 미국의 77.1%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국의 강력한 견제와 중국의 왕성한 추격은 미·중 패권대결이 점점 더 격화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2008년 이전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의 결함을 보완하며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고 만회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세계화의 자체 모순이 전개된 결과 원래의 기능도 현저히 약화됐을 뿐만 아니라 보호주의와 패권대결이라는 (세계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며 자본주의 위기를 결정적으로 심화시킬) 정치적 힘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4) 더욱 거대한 금융위기를 향해 치달아 온 금융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물경제가 침체와 저성장에 갇힌 것과 달리, 세계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세계GDP 대비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2007년 4분기 115.5%로 정점을 기록한 뒤, 금융위기를 거치며 2008년 4분기 54.6%까지 추락했다가, 이후 추세적 상승을 거듭한 끝에 2021년 4분기 128.1%로 새로운 정점에 이르렀다. 새로운 정점의 수치는 금융위기 직전보다 12.6%포인트나 높다. 세계 주식시장에 금융위기 직전보다 더 큰 거품이 조성된 것이다. 미국 주식시장은 더 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GDP 대비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2000년 1분기 164.7%와 2007년 2분기 142.6%로 정점을 기록한 뒤, 각각 닷컴붕괴와 금융위기를 거치며 2003년 1분기 94.9%와 2009년 1분기 74.5%로 추락했다가, 이후 추세적 상승을 거듭한 끝에 2021년 4분기 211.4%를 기록했다. 새로운 정점의 수치는 닷컴붕괴 직전보다는 46.7%포인트, 금융위기 직전보다는 68.8%포인트나 더 높다. 미국 주식시장에서는 닷컴붕괴나 금융위기 직전보다 훨씬 더 큰 거품이 조성된 것이다. 미국 부동산시장도 심각하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 대비 주택가격지수는 2006년 5월 155.1%로 정점을 기록한 뒤, 부동산 가격폭락과 금융위기를 거치며 2012년 2월 99.4%까지 추락했다가, 이후 추세적 상승을 거듭한 끝에 2022년 5월 178.1%로 정점에 이르렀다. 새로운 정점의 수치는 금융위기 직전보다 23.0%포인트 더 높다. 미국 부동산시장에서도 금융위기 직전보다 상당히 더 큰 거품이 조성된 것이다.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도 심각한 수준의 부동산 거품이 조성돼 있다. 2022년 6월 블룸버그는 임대료 대비 가격과 소득 대비 가격을 합산해 본 결과 OECD 국가들 가운데 한국을 포함한 19개 국가의 부동산시장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전보다 더 큰 거품이 조성돼 있다고 분석했다. 2008년 이전,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금융화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따른 초과착취에 덧붙여) 금융수탈을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금융수탈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로 내몰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수단임을 여실히 입증했다. 그러므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적어도 한동안은 금융수탈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자본가들에게 최소한의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60년 이상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2008년 이후 금융수탈은 더 거대한 규모로 전개됐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자본주의에는 2000년 닷컴붕괴와 2008년 금융위기를 낳았던 두 거품보다 훨씬 더 큰 거품이 조성돼 있다.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금융수탈이 아니고서는 자본주의가 존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동안 착취를 강화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엄청난 신자유주의 공세가 퍼부어졌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이윤율은 여전히 바닥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게다가 착취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세계화는 2008년 이후 빠르게 후퇴해 왔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자본가들의 끝없는 이윤욕인데, 대규모의 금융수탈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이윤욕을 제대로 충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는 금융수탈 없이는, 금융수탈을 필사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2008년 이후 주식·부동산 시장 등에서 더욱 거대한 거품이 조성되고 그럼으로써 더 거대한 규모로 금융수탈이 전개된 데에는 금융수탈을 부추기고 지원하는 국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나라마다 여러 가지 법과 제도가 작용했지만, 경제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초저금리와 양적완화가 핵심이었다. 2008년 직후 미국 연준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이 초저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은 금융위기 충격으로 급격히 얼어붙은 실물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자본가들이 더 쉽게 생산적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시중에 충분한 화폐를 공급하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바닥을 기는 이윤율 때문에 자본가들은 생산적 투자에 잘 나서지 않았고, 결국 넘쳐나는 화폐는 주식가격과 부동산가격을 끌어올리는 데 더 많이 기여했다. 그런데 자본가계급 전체로 보자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생산적 투자로 충분한 이윤을 거둘 수 없다면, 금융수탈로 보충하면 될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구조가 고착되자, 초저금리와 양적완화는 주식·부동산 가격을 지탱하고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실상 변질됐다. 그런데 특히 주식거품이 맹렬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국 중앙은행들도 다시 금융위기가 터지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조심스럽게 금리를 다시 인상하고 양적긴축에 들어갔는데, 특히 미국 연준은 2015년 12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9차례에 걸쳐 2.25% 금리를 인상하고 2017년 9월부터 2019년 8월까지 0.7조 달러를 회수하는 미미한 양적긴축을 실시했다. 그 표면상 이유는 ‘점진적인 경제회복에 따른 정상화’였지만, 과도하게 부푼 거품이 격렬하게 터지기 전에 미리 바람을 빼는 것 또한 실제 목표에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준은 바람을 충분히 뺄 수 없었다. 약간의 금리인상과 양적긴축에도 미국 경제가 빠르게 하강했기 때문이다. 연준은 2019년 9월 금리인하와 양적완화를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져서, 일시적으로 초유의 위기 국면이 펼쳐졌다. 이를테면 2020년 4월 미국에서는 한 달 만에 일자리 2천만 개가 사라졌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2008년 9월부터 2009년 8월까지 1년 동안 사라진 일자리 670만 개의 세 배가 한 달 만에 사라졌다.) IMF에 따르면, 2020년 4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각국 정부가 9.9조 달러의 재정을 지출했으며, 각국 중앙은행이 6.1조 달러의 금융 지원에 나섰다. 이렇게 투입된 16.0조 달러는 2020년 세계 GDP의 18.8%에 이르렀다. 미국 연준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초래한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 2020년 3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제로금리를 유지하고 4.8조 달러의 양적완화에 나섰다. 이번에도 정책의 효과는 비슷했지만 그 정도는 훨씬 심했다. 다시 한 번의 제로금리와 대규모 양적완화는 생산적 투자의 활성화보다 주식·부동산 거품을 끌어올리는 데 훨씬 더 많이 기여했다. 그 결과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거품이 전 세계 주식·부동산 시장에서 조성됐다.2023-01-18 | 조회 1,8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