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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동자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다’ GM부품물류센터 부당해고 철회 투쟁의 기억도무지 질 수가 없는 기세로 싸워냈던 약 70일간의 부당해고철회 투쟁을 돌아본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 약간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은 그 어느 순간에나 전체 노동자의 싸움일 수밖에 없으니, 당신들이 고립되거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거. 세종시 연기면 공단로 6에는 ‘한국지엠세종중앙물류센터’가 있다. ‘중앙’물류센터라고는 하지만 국내에 한국지엠 물류센터는 세종시에 있는 것 하나뿐이다. 그간 한국지엠이 차근차근 부품·물류센터를 통폐합해왔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정비 등에 필요한 부품들이 전국으로 보내진다. 미국 등 해외 수출 업무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1차 하청업체인 우진물류에서는 120여 명이 일했다. 이 하청노동자들은 2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을 받을 정도로 열악한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2025년 11월 파업을 전개했다. 한국지엠은 하청노동자들의 노조와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업체폐업, 집단해고라는 칼을 꺼냈다. 2025년 12월 31일부로 하청노동자들은 전원해고됐다. 정수유통이란 업체가 새로 왔지만,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는 한국지엠과의 계약서에 들어가지 않은 내용이므로, 고용승계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20여 년간 수차례 업체가 바뀌면서도 이어져 온 (투쟁을 통해 쟁취해온) ‘고용승계 관행’이 깨졌다. 그 뒤 부당한 해고를 거부하고, 외투 자본인 원청의 횡포에 맞서겠다고 선언한 96명이 물류센터에 남아 싸움을 시작했다. 지역사회를 필두로 한 공동대책위가 구성되었다. 그렇게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해고된 날로부터 현장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단 하루도 물류센터를 비우지 않았다. (1월 16일 저녁, GM와 정수유통의 불법 물량반출을 저지하기 위해 GM부품물류지회 노동자들이 대열을 갖춰 이동하고 있다. - 편집자 주) ‘도급계약 종료’라든가, ‘정리해고’라든가. ‘희망퇴직’도 그렇고, ‘발탁채용’이나 ‘바이아웃’[1]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무해한가. 자본의 언어는 언제나 본질을 흐린다. 해고는 해고일 뿐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일터라는 단어 옆에 삶터라는 단어를 놓는다. 하루 열 시간, 열두 시간 머무는 장소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노동이, 매일매일 만나고 관계를 쌓는 내 곁의 사람들이, 삶의 주요 구성요소가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노동자다. 그래서 일터는 삶터고 해고는 살인이다. 학연, 지연, 혈연을 따져가며 관계를 맺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GM부품물류지회에 연대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지역의 일이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나는 평생 충청남도 이곳저곳을 오가며 살았고, 지금은 천안에 살고, 세종시 조치원읍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아무렴 120명이 집단해고 됐다는 데 ‘동네 주민’으로서 안 나설 수 없지. 늘 (서울을 포함한) 타지로 연대를 다니는 데 익숙한 내게 내 지역의 일에 결합하는 일은 새삼 낯설면서 또 기쁜 일이기도 했다. ‘찢겨진 노란봉투법을 정부로 보냅니다’라는 타이틀을 걸고 진행한 대정부 항의 행동도 한몫했다. 비록 우리 맘에 꼭 맞는 형태의 법안은 아니었지만, 또 나는 소위 ‘노동운동판’에 기웃대기 시작한 지 이제 일 년 갓 넘겼지만, 그간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 피눈물을 흘려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너무 간절하고 또 너무 소중한 법이었다. 그럼에도 첫걸음이었다. 암만해도 노동해방 사회가 당장에 도래한다거나 할 수야 없겠지만,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던 무게추를 이제야 되돌려놓는 첫걸음. 원청 한국지엠 모 상무가 지난가을 파업을 준비하던 세종물류센터 노동자들을 만나 ‘진짜 사장 나오래서 나오지 않았으냐’고 말했다고 한다. 수의계약은 늘 해오던 것이니 올해도 정상적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삼 년 뒤에는 정규직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초치지 말라’고. 한달 뒤 한국지엠은 하청노동자 전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글로벌 자본에게 노란봉투법쯤은 무시해도 좋을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이십 명 노동자들의 삶도, 그들과 연결된 수백 명의 삶도, 고작해야 노동자의 삶이므로, 도무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는 표어를 문득 떠올린다. 저들은 하청노동자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노동조합’이라는 불길을 꺼트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건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라는 말로, 다만 정 억울하면 ‘발탁채용’이나 ‘바이아웃’ 같은 방안도 고려해보겠다고, 선심 쓰듯 얼버무린 그 같잖은 언사들이 마음속 불꽃에 장작을 집어넣는 줄도 모르고. 작년 이맘때 나는 거통고(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동지들과 ‘무지개 조선소’에서 연대투쟁호를 만들고 있었다. 노동운동판, 이라는 곳에 본격적으로 기웃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작업이었다. GM세종물류센터에 상징물 제작 전 사전답사를 온 신유아 동지를 마주쳐, 작업을 함께하잔 제안을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것도 무지개 조선소였다. 멋모르고 함께하겠다고 나섰다가 단단히 코가 꿰이고 말았던 그거. 아무렴 그리기나 만들기는 늘 좋아해 왔으니까, 좋아하는 행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데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물류센터이니만큼 상징물은 지게차가 될 거라고 했다. 동지·연대·고용승계·투쟁·단결·원청교섭·정규직 전환이라고 적힌 일곱 개의 상자를 얹은 지게차. 그리고 파지 골판지를 오려 만든, 백수십여 개의 지게차 모양 피켓들. 작업 기간은 딱 이틀이었다. 일고여덟 명이 이틀 내내 달라붙어 큰 지게차를 만들고, (물류센터 사수조를 제외한) 다른 조합원들은 오전에 시간을 내 피켓을 만들었다.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에서 주최하는 1박2일 집회에서 내보이는 걸 목표로, 일정이 빠듯하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무탈하게 완성했다. 피켓은 이틀 내내 꼬박 만들 것을 각오했는데, ‘오후 잔업’을 하지 않겠다는 조합원들의 결의로 순식간에 완성해버렸다. 조합원들이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꾸미기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공대위 동지들을 포함해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나는 주로 피켓과 상자 작업을 했는데, 작업을 좀 하다 뒤돌아보면 (조립식) 지게차가 순식간에 턱턱 만들어져있어서 깜짝 놀랐다. 바퀴를 달 때는 고생을 좀 했지만, 노련한 동지들이 이런저런 재료를 가져와 시도해보고, 타카를 박고 덧댈 목재를 자르고 칼집을 내고 스티로폼을 끼워가며 ‘각’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일터의 노동자는 무적이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일터의 주인은 노동자, 라는 말을 이런 순간에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토지의 주인이든 건물의 주인이든. 계약서상 고용주든 실질적인 사업주든) 소위 ‘소유주’라고 불리는 그 누구를 데려와도 이런 일을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재의 위치와 용도, 목적과 쓸모를 기억하고 찾아내고 적절하게 배치하는 일. 각각의 자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해내고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일. 자르고 썰고 잇고 붙이고 결합하고 조립하고 생산하는 일. ‘이렇게 일 잘하고 일 좋아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려 들다니’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뱉으면서, 그 순간들에 함께할 수 있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우리 투쟁의 상징물이 곧 일터의 상징물이라는 거. 자본과 권력이 빼앗으려 했으나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어내서라도 손에 쥔 그거. 조명을 달아 반짝이는 그 주황색 지게차. (1월 16일, 불법 물량반출을 저지한 뒤 GM부품물류지회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지게차를 끌고 이동하고 있다 - 편집자 주) 비록 집회 당일 물량 불법 반출 문제로 또 한참을 싸우느라 우리 계획대로 대오 앞에서 짠하고 점등식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손길이 닿은 그 지게차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고작 이삼일이었지만, 하루종일 붙어서 뭘 했다고 괜스레 친밀해진 기분이 드는 것도 좋았다. 점거농성 중이기 때문일까, 매일 동고동락하는 지회 동지들의 관계도 무척 끈끈해진 듯 보였는데 그들 틈에 슬그머니 자리 잡고 같이 웃고 있다 보면 제법 즐거웠다. 나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건 부담일까 위안일까. 노조법 개정안 시행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시작된 이 싸움, 여기서 지면 지난 수십 년 애써 만들어낸 노조법 개정안이 유명무실해질지도 모른다든가 하는 게. 때로 내가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내 옆의 사람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끝까지 가볼 수밖에 없다는 게. 집단과 조직, 단체, 공동체의 조건에 대해서 종종 생각한다. 노동‘조합’은 그중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리고 흔히 중앙 내지 본조, 사무처라고 부르는 기관들과 현장의 조직이 지녀 마땅한 성격 또한 다를 테고. 여하간에 나는 현장의 노동조합이 ‘이익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 중요한 건 공동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규율과 규약, 원칙과 질서, 방향성…. 만큼이나, 우리가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는 존재라는 자각이. 언젠가 모 대의원 동지가 발언으로 했던 말을 자주 곱씹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라는 말. 어딘가 약간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은 그 어느 순간에나 전체 노동자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거, 그러니까 당신들이 고립되거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거. 지난 12월 말, GM부품물류지회와 공대위가 ‘고용노동부 장관 만납시다!’를 이야기하며 서울 고용노동청을 하룻밤 점거했을 때. 스튜디오 알 동지와 함께 점거 장소에 갔다가, 저녁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갔다가, 다음날 새벽녘에 일어나 출근길 선전전에 함께하러 다시 서울에 올라갔을 때. 노동조합을 만든 지 이제 다섯 달 되었다는, 그래서 노조 조끼가 아직 반들반들하고 깨끗한, 해고를 열흘 앞둔 그들을 만나러 가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거기에 왜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나. 무엇도 아닌 나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금속노조도 하물며 민주노총도 아니고, 어디 정당이나 시민단체 소속도 아니고, 딱히 활동가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도 않고, 이름 앞에 붙여 마땅한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나는 당신들의 싸움에 함께하고 싶었다. 나를 등 떠밀어 그들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은 오직 양심뿐이다. 자본이 틀렸고 노동자가 옳다는 믿음이다. 이 싸움이 정당하다고, 그러니까 지면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명절을 약 열흘 앞두고 GM부품물류지회는 한국GM으로부터 해고 철회 및 이후의 고용승계 등을 담은 합의서를 받아냈다. 해고 직후 동지들이 외쳤던 구호가 있다. ‘1월의 어느 날에 현장으로 돌아가자’. 내가 들은 구호 중 제일 낭만적인 구호. 일주일 정도 넘기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다짐대로 현장으로 돌아갔다. 나도 얼떨결에 여기저기서 축하를 잔뜩 받았다. 내가 뭘 했다고 축하를 받나, 싶은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승리보고대회에서 지게차를 같이 만들었던 동지가 악수를 청해오며 ‘수연씨, 고생했어요’라고 말했을 땐 솔직히 코가 찡해졌다. 물론 이들의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1차전이 끝났으니 2차전을 시작하겠다’는 동지들의 말마따나, 턱없이 낮은 기본급을 비롯해 바꿔내야 할 현장의 문제들이 있고, 불법 파견 문제도 있고, 직영정비소 폐쇄 등 한국GM 철수설과 관련된 사안들에도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내 동지들은 잘 싸울 것이다. 도무지 질 수가 없는 기세로 싸워냈던 약 70일간의 부당해고철회 투쟁을 겪었으니까. 우리는 함께 싸우는 법을 알고, 함께 승리하는 법도 안다. GM부품물류지회 동지들이 가장 좋아했고,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이거였다. 단결하는 노동자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호가 선언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냈다. 단결로 틔우고 연대로 지켜낸 불씨는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1] 바이아웃은 본래 주식시장에서 기업의 지분을 다량으로 인수하거나 아예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돈을 주고 통제권을 장악한다’는 의미가 파생하여 임대계약, 고용관계 등에서 돈으로 잔존권리를 사들여 임대기간을 조기종료하거나, 고용의무를 청산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즉 GM부품물류센터의 사례에서 ‘바이아웃’은 돈을 주고 고용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뜻하며, 실질적으로는 희망퇴직과 동일한 의미이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2026-02-23 | 조회 13,770 -
[기고] 서울여대 노학연대, 잿더미에서 투쟁의 불꽃을 피워내자서울여자대학교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여대분회 (이하 서울여대분회)는 지난 여름부터 이어졌던 청소용역업체 태가BM 퇴출 (재계약 반대) 투쟁을 16일간의 천막농성까지 감행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태가BM은 연세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의도적인 노조파괴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서울여대 내에서도 청소노동자들에게 폭언을 하는 등의 ‘악덕’ 용역업체였다. 투쟁 과정에서 대학본부 측의 갈등 조장 (갈라치기 등), 타 노조 (서울여대는 복수노조 상황이다) 의 논점 흐리기 등 많은 방해 시도가 있었지만, 2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서명으로 증명했듯 태가BM을 반대하는 학내 구성원들에 의해 용역 재계약은 결렬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번 2025년 태가BM 퇴출투쟁에 ‘노학연대준비위원회 청소노동자와 연대하는 슈니들 (이하 청연슈)’를 만들고 대표를 맡았다. 또한 학생들을 모아 서울여대분회와 연대하고, 행동하였다. 흐릿한 9년 전의 자취를 재구성하는 투쟁 서울여대분회는 9년 전, 타 업체의 재계약 반대 투쟁을 승리를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다른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교섭대표노조 권한을 잃어버린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아마도 학내 구성원, 특히 학생들의 무관심 때문일 것이다. 투쟁을 하면서 느꼈지만, 많은 학생들은 캠퍼스 내 노동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시적 연대로 큰 것을 이루어내기는 어렵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치이고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이번 태가BM 퇴출 투쟁은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내부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9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소환해서 우리의 이야기로 바꿔내는 작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가보는 노학연대의 길. 어떻게 연대해야 할까? 대응을 위해 생각해낸 것은 노학연대였다. 그동안 타 대학의 노학연대를 보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나도 저렇게 연대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누구와 이야기해야 할 지 등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여름방학이 한창인 어느 날, 학교를 잠시 들렸더니 곳곳에 ‘태가BM 퇴출 투쟁’을 외치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학교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려 수소문해보니 청소 용역업체 태가BM의 재계약 문제가 있고, 태가BM 재계약이 노동자에게 부당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이 무언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라고 고민하다가 두 가지 안을 생각했다. 우선 TF팀을 만들어서 이번 투쟁이 마무리될 때 까지만 어떻게든 (정말 말 그대로 어떻게라도) 연대하는 것, 그리고 노학연대 운동기구를 만들어서 이번 투쟁 뿐만 아니라 학내/외 다양한 노동/사회의제에 연대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직감적으로 이번이 노학연대 운동을 만들어야만 하는 때임을 느꼈다. 현재의 운동에서 출발해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운동을 추동하자고 판단했고, 그렇게 청연슈가 만들어졌다. 처음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 많아서 행동하고 연대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매주 화, 목요일에 있는 서울여대분회 주최의 피켓팅과 오프라인 연서명 요청 활동에 내가 아니더라도, 학생 단 한 명이라도 나갈 수 있도록 했다. 기자회견이나 행정관 내 시위, 집회에도 늦더라도 되도록 참석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투쟁 현장에 의제의 당사자(노동자)가 아닌 연대하는 다른 누군가(학생)가 있다는 것 자체로 힘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외롭지 않다는 것, ‘우리’가 ‘우리’이기에 결국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다짐이 현실이 되려면 연대가 필요하다. 청연슈는 그 연대를 하고 싶었고,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생각한다. 이미 타오른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재가 되더라도 2025년 12월 16일, 천막농성 16일차는 청소용역업체 입찰 결정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선전전을 진행하고 회의실 앞에서 우리의 투쟁이 승리로 끝나기를, 모두가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다. 다사다난했지만 그랬기에 더 소중했던 승리였다. 투쟁으로부터 한 달이 조금 넘게 지난 지금은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노학연대준비위원회’였던 청연슈를 <노학연대 청새치>로 정식 출범할 수 있도록 준비 중에 있다. 느리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하고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내는 작업은 필자가 이 대학을 다니며 계속 시도할 목표이자 가치이다. 서울여대분회는 대학 집단교섭을 진행 중이다. 또한 다시 교섭대표노조로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현재 청새치 회원들과의 인연도 일회성 만남이 되지 않도록 고민 중에 있기도 하다. 필자는 9년 전의 투쟁을 청소노동자분들을 통해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투쟁도 필자의 졸업 이후에 한참이 지나서라도 또 다시 우리가 들고 일어서야 할 때 안내 책자가 되어줄 것이다. 이번 투쟁에서,는 영상을 전공하는 서울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싸움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남기기도 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외침은 더 이상 사라지는 메아리가 아니다. 목소리는 쌓아지며 커지고 있다. 이 투쟁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모두 재가 되어버렸다고 생각되더라도 재 위에 남은 발자국을 통해 새로운 길을 걸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운동은 그렇게 진보해왔다. 필자 또한 잿더미 위에서 불꽃을, 불꽃 이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도록 계속 걸어갈 것이다, 노학연대 청새치(준)와 함께.2026-01-29 | 조회 9,032 -
[기고] 캠퍼스는 탈정치의 꿈을 꾸는가2025년 3월 11일 <윤석열 퇴진을 위한 충북대학교 학생공동행동> 결의대회에 난입한 극우세력 사진: 뉴시스 지금의 캠퍼스는 확실히 병들었다. 발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점점 낮아지는 학생회와 자치기구 선거 투표율, 소극적이 되어가는 학생회 활동, ‘외부인’과 ‘학생’을 구별하며 고립을 자처하고(실제로 완전한 구별이 가능한지도 의문스럽다), 포스터와 대자보를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을 철거하며 흘러간 긴 시간 동안, “탈정치”라는 병이 캠퍼스를 좀먹어 왔다.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주제를 언급하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입막음 당하는 것이 최근 캠퍼스의 유행이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적 세력과 무관하다”는 문구가 없으면 인쇄하거나 게시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참여한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폭력적인 대응을 주도한 학생이 차기 총학생회장으로 당선하기도 했다. 캠퍼스는 완전히 탈정치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 다양한 캠퍼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흐름을 기반으로 말하자면, 전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공간과 마찬가지로, 캠퍼스는 좌도 우도 아닐 수는 없다는 사실, 정치적 진공상태일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캠퍼스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입장, 캠퍼스는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은 캠퍼스 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바로 학내에서 점잖게는 ‘좌파’, 혹은 경멸 섞인 호칭으로 ‘빨갱이’라고 불리는 진보적 학생 진영을 억압하는 도구다. 학생자치기구 탄압, 백래시의 끝과 시작 ‘탈정치’의 이름으로 휘둘러진 탄압은 제일 먼저 학생자치기구로 향했다. 정치적인 색을 띠는 학생자치기구들을 폐지하거나 통폐합하는 등의 논의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고려대학교에서는 여학생위원회와 소수자인권위원회가 통폐합되었고, 성균관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도 중앙 동아리 재등록이 부결되어 정식 학내 단체에서 제외되었다. 경희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는 이준석 강연 초청 비판 대자보를 게시했다는 이유로 폐지 논의를 거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포항공과대학교 총여학생회가 국내 마지막 총여학생회로서 자취를 감추었다. 기존 기구가 총여학생회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 폐지의 근거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생활자치도서관은 12.3 비상계엄 관련 성명문에서 윤석열을 ‘내란 수괴’라고 표현했다는 이유로 특별기구로서 재인준을 받지 못해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지지 금지, 정치적 사안 언급에 대한 암묵적 금지가 탈정치화 중인 캠퍼스의 주된 경향이라면, 특정 정치인 초청 강연은 허용되고, 이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특정 대통령 후보들에게만 강연 요청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비상계엄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하는 것은 왜 정치적이고, 탄핵에 반대하는 것은 왜 정치적이지 않은가? 성균관대 여성주의 교지를 중앙 동아리로 재등록할 수 없게 저지하는 이유가 ‘정치적이기 때문’이고, 전체 회원이 36명이나 되며 매년 교지를 발간하고 세미나를 개최하는 단체의 활동과 활동 인원이 부족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캠퍼스 내 소수자, 여성, 장애인 등의 복지에 힘쓰는 것이 왜 정치적이며, 그들의 복지를 가로막고 캠퍼스에서 고립되도록 두는 것은 왜 정치적이지 않은가? 허용되는 정치가 있고, 허용되지 않는 정치가 있다면, 이는 ‘탈정치’라고 할 수 없다. 현 상황은 명백하게, 그렇지 않아도 보수주의로 물든 캠퍼스에 더해진 극우화의 물살이다. 이러한 백래시의 흐름은 학생자치기구 탄압으로 시작된 듯하지만, 동시에 아주 오래 전부터 쌓여온 치우친 탈정치 담론의 결과이기도 하다. 대학은 수십 년 동안 시장화되어 왔다. 학생들은 대학과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고객처럼 다루어졌다. 학습의 공간이자 정치적 주체 형성의 공간이어야 할 대학에 대한 자본의 직·간접적 지배가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강의와 학습, 취업과 관련된 범위 외의 모든 활동이 ‘불안 요소’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탈정치 담론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자본, 대학 당국을 비판하는 정치로부터는 ‘탈(脫)’해야 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이 지금의 탈정치 담론이다. 비상계엄 전까지는 이러한 탈정치 담론이 아주 견고한 것처럼보였다. 그러나 12.3 계엄과 탄핵은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극우세력은 계엄에 저항했던 광장의 청년 세대가 지닌 정치적 잠재력을 실감했고, 따라서 캠퍼스를 최우선으로 선점해야 할 공간으로 판단했다. 우파 정치인 강연 초청, 진보적 교지 폐간, 인권기구 폐지 공세 등은 각각 분리된 우발적 사건들이 아니라 일종의 ‘제2의 백래시 물결’ (2018년을 전후로 전국 여러 대학에서 총여학생회가 ‘남성혐오적’ 및 ‘편향적’이라는 이유로 존폐 위기를 맞거나 실제로 폐지되었던 것이 제1의 백래시다) 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공격이었다. 이들은 탈정치 담론을 한 번 더 이용하여, 특정 정치인의 강연은 ‘학술 활동’으로 인정하고, 그를 비판하는 대자보는 ‘정치적 행위’로 규정하여 금지하는 등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다. 탈정치 프레임은 캠퍼스를 보수화시키는 가장 편리한 명분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캠퍼스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흔들리는 공간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자치는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축소되었고, 대표성과 투명성, 책임성이라는 민주적 절차들도 무력화되었다. 정치적 논쟁을 피하려는 태도는 결국 인권, 성평등, 복지와 같은 의제까지 ‘민감한 정치적 주제’로 분류하여 언급할 수조차 없게 했다. 충북대학교 차기 총학생회 PRO(프로)의 당선자의 경우, 캠퍼스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표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선거 과정 전후로 규정상 금지된 선거운동을 하는 등 투명성 또한 상실된 상태였다. 특정 정치성향 학생들을 ‘빨갱이’ 등 모욕적 언사로 공격한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며, 캠퍼스 내 집회를 방해하고자 폭력과 방화를 저지른 극우 유튜버들과의 연관성도 제기되었다. 당선자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하지만, 극우세력이 캠퍼스에서 자행한 노골적 폭력에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은채 침묵한 것은 밝혀진 정황상 결코 우연이 아니며, 당시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조차 저버린 행위다. 토론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드러난 실무적 능력 부실 또한 책임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해당 선본은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다. 극우세력의 폭력적인 집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인권, 성평등 등 진보적 의제는 외면하는 선본의 태도는 정치적으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중립적, 내지는 탈정치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졌다. 허용되는 말과 행위, 금지되는 말과 행위를 구분하는 기준은 언제나 특정한 정치적 진영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이 기준을 형성하고 통제하는 이들은 국가 및 자본과 깊숙이 결탁한 학교 당국과 우파세력이다. 이처럼 탈정치 담론의 실상은 정치적·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진보적 세력을 제거하는 우파의 무기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캠퍼스 내 진보진영은 이렇듯 극우진영은 캠퍼스 내에서 소리 없이 세력을 확장해 왔다. 특히 박근혜 퇴진 정국에 비해 한층 심화한 탈정치 담론은 극우의 성장과 불가분하다. 박근혜 퇴진 정국, 특히 ‘정유라 사태’까지만 해도 캠퍼스 내 주된 담론은 ‘공정성’에 관한 것이었다. 정유라 사태가 캠퍼스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자가 경쟁에서 승리하고, 그에 걸맞는 사회적·경제적 보상―예컨대 대기업 정규직 등―이 주어진다는 환상이 순리인 양 여겨진 시기였다. 그러나 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윤석열 정권까지, 이러한 능력주의와 경쟁주의의 환상은 점차 힘을 잃었다.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여겨지거나, 이미 쟁취했다고 여겨진 이들 다수도 심화하는 경쟁과 노동유연화를 피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일부 학생들은 능력주의·경쟁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품고, 경쟁구조를 철폐하자고 나섰다. 경쟁구조 편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소수자·약자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와서 싸우게 되었다. 극우진영은 이들을 ‘탈정치’ 담론으로 찍어 누른다. 소수자, 약자, 차별, 체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과도하게 ‘정치적’이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낙인찍는다. ‘정치’라는 단어는 이렇게 오염되어 왔다. 이들에게 이미 존재하는 구조, 체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것은 정치적이지 않고,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정치적이다. ‘정치적 갈등’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능력을 길러야 할 대학생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본질은 점점 붕괴하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의문과 도전을 봉쇄하는 억압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탈정치 담론은 ‘위’를 공격하지 않게 하고, ‘아래’는 외면하는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점차 캠퍼스의 학생들은 자신을 경쟁하게 하는 체제, 이를 부추기는 국가와 자본을 내면화하고, 차별 등의 문제로 경쟁에서 패배하거나 아예 경쟁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소수자, 약자의 싸움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해진 우파적 흐름은 진보진영을 아직 완전히 붕괴시키지 못했다. 계엄 이후 청년들, 그리고 캠퍼스의 학생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저항력과 결집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몇몇 대학에서는 다시 학생자치를 복원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폐지 공세에서 살아남은 학생자치기구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 각자만의 능력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학생들의 지지와 동참을 기반으로 부활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경유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크고 작은 모임과 스터디가 캠퍼스 곳곳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학생자치기구가 폐지되고, 중앙 동아리가 재등록을 거부당하고, 개개인의 정치적 목소리가 억압당해도, 이를 비판하는 학생들의 성명과 연대 활동 또한 이어지고 있는 것 역시 중요한 변화이다. 이러한 흐름은 비록 미약해 보일지언정 탈정치 담론이 완성될 수 없다는 증거이자, 캠퍼스 내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능성이다.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학생회장은 개인 명의 대자보에서 문과대학 인권복지위원회를 신설한 이유로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의 ‘과도한 정치적 행위’를 언급했다. 해당 대자보는 학생자치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학생회는 단순한 ‘복지기구’로 전락했고, 이는 학생들의 학생사회에 대한 참여가 저조하며 각자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복지기구도, 정치적 활동도 학생자치의 적절한 길이 아니라면 그 중도의 길은 어디 있는가? 캠퍼스 내 모든 학생의 동의를 얻는 정치적 활동은 없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정치적 활동이 허용되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캠퍼스를 만드는 것이 학내 구성원들의 진정한 ‘참여’를 가능케 하는 길이다. 정치적 활동이 가능한 대학을 향한 싸움이 학내 구성원들의 학생사회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확대할 수 있다. 탈정치 담론에, 자본주의 체제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아가 탈정치 담론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목소리 높이고 싸워야 한다. 동아리, 학회, 학생회, 노학연대 활동, 캠퍼스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체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서자. 어떤 정치적 행동이든 시도해보아야 한다.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정치적’ 행위를 더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캠퍼스에, 가까운 캠퍼스에 스피커와 확성기를 대자. 방식과 규모는 당장에는 중요하지 않다. [참조] - 대학가에 불어닥친 ‘급진화된 보수주의’ (시사IN, 김다은 기자) - 극우 집회서 마이크 잡고 윤어게인‥몇 달 뒤 충북대 학생회장? (MBC, 김은초 기자) - 충북대 총학 선거 후폭풍, 학생총회 소집 운동으로 확산 (충청리뷰, 최산 기자)2026-01-15 | 조회 5,381 -
[기고] '이재명 정부 100일, 자유주의 정치의 한계와 극우세력의 부상' 강연회 후기2025년 9월 24일, 학생사회주의자연대 충북대모임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충남지역위원회 주최로 충북대학교에서 '이재명 정부 100일, 자유주의 정치의 한계와 극우세력의 부상'을 주제로 한 강연회가 개최됐다. 이날 ‘울산노동자배움터’의 양준석 강사의 강연을 들은 한 충북대 재학생 참가자의 후기를 글로 전한다. 좋은 기회로 가까운 교내에서 평소에 고민하고 있던 주제를 다룬 강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지 백 일이 넘은 지금, 광장에서 외친 내란세력 척결과 사회대개혁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가 닿았을까? 최저임금은 역대 정부 첫해 인상률 중 최저를 기록했다. 차별금지법은 민생과 경제 앞에서 우리가 십여 년 간 들은 “나중에”로 또 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광장은 청년과 같이 연령의 범주가 아니더라도 여성, 성소수자, 페미니스트처럼 평소 사회에서 소외 받은 사람들이 지켜낸 곳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최소한의 생존권과 차기 정부가 모색해야 할, 이제껏 빠르게 후퇴했던 의제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시민들을 광장에서 필요로 하던 것이나 부름에 응한 것처럼 발언하던 때가 무색하게, 이루어진 것들은 한참 부족하다. 정부는 여전히 자유주의 아래에서 자본가들을 대변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말 뿐이 아닌 진실로 광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극우세력의 부상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고충이다. 극우세력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며 정치뿐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 연관되어 있다. 그들이 결집하는 방식 중 하나는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앞세우는 것이기에, 공동체를 이루어 다 같이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데 해롭다. 극우 세력의 성장은 우리나라가 아닌 전세계적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상황을 어렴풋이 전해 듣고 있어 염려가 컸다. 이 가운데 찰리 커크의 죽음과 각지의 반응을 둘러싼 미국 정부의 본격적인 탄압에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극우를 이루는 세력은 누구이며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가? 이번 강연회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어 뜻 깊었다. 사는 곳이 달라 극우의 형태 또한 다를지언정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같이 기본 골자는 동일하다. 미국의 사례는 앞으로 우리가 꾸려 나가야 할 방향성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2025-10-20 | 조회 6,736 -
[말벌을 만나다#7] 단지 윤석열만 없을 뿐, 지금 정부가 하는 짓은 똑같잖아요 - 퀴어도 노동자라는 연대동지, 주드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사회주의를향한전진은 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습니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에 전진은 말벌동지들이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는지, 그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그리고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는지,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전망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8월 11일)에는 주드 동지를 만났습니다. 성 정체성을 부정당한 고교 시절을 지나 노동자로 살며 광장에 나온 그는, “퀴어도 노동자”라는 사실을 힘 있게 말합니다. 녹슨 민주노조 운동과 진보정치, 그리고 이 체제를 향해 망치를 두드리듯 목소리를 내는 그는, 사회주의 운동이 연대 동지들을 더 적극적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트랜스젠더 노동자로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투쟁,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투쟁, 지혜복 공익제보교사 투쟁, 반도체 특별법 저지 투쟁,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저지 투쟁까지 쉼 없이 달려 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사진: 인천퀴어문화축제)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와 퀴어팔레스타인연대 QK48(QK48) 활동가이고, 거통고지회 조합원입니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고요, 최근 해고된 노동자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부터 반항적이었어요. 특히 학교와는 맞지 않았죠. 경쟁적인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고, 결국 고등학교 때 자퇴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학업에 큰 공백이 있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보수적인 교수는 전자기기 사용도, 개별 질문도 금지했어요. 학생들이 너무 힘들어했죠. 저는 화가 났고, 그래서 필요한 동료들에게 무료로 개인 교습을 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육일을 시작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학원에서 파트타임 강사로 일했어요. 최근 (2025년 3월) 서울에 상경한 후로는 과외 강사로 일했습니다. 사교육 강사, 특히 파트타임 강사 노동은 상당히 불안정해요. 때문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추가로 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계속 교육업에 종사했다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연차로 치면 5-6년차 정도. 그러다 최근 해고됐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교육 강사는 노동환경이 상당히 불안정한데, 마찬가지로 그렇다 보니까 저처럼 갑자기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 동지는 내란 사태 이후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는데, 어떤 계기로 광장에 나오게 되었나요? 그전에도 가끔 집회에 참여하고는 싶었지만,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 당시에는 ‘내가 이 그룹에 포함돼도 되나’ 하는 조심스러움이 컸습니다. 12월 3일 계엄 소식을 늦게 알았는데, 서울 친구들이 국회 앞으로 갔다는 얘기를 듣고 대전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 계기를 통해 서울 상경 투쟁에도 결합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이 운동에 들어오려면 입장권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12월 초에서 초에서 중순까지는 탄핵집회에 주로 참여했고, 이후 2~3주 정도는 전국장애인철폐연대(전장연) 집회에, 그다음에는 한강진 터지기 전날이었던 1월 2일 다른 동지들은 그쪽으로 많이 갔지만, 저는 세종호텔 투쟁문화제 자유발언을 처음으로 받는다고 들어서 세종호텔로 갔어요. 퀴어퍼레이드 행진 때 응원하는 세종동지들의 모습을 봤던 기억이 있어서 애정이 있었거든요. 그걸 계기로 노동운동에도 더 결합하게 된 것 같아요.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는 먼저 긴급행동 실무팀에 결합했다가 나중에 함께하게 되었어요. 지역에서 뭔가 해보고 싶어서 막무가내로 긴급행동에 연락했는데, 그 인연으로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 활동회원으로 결합하게 되고, 3개월 정도 수습 활동을 하다가 활동가가 되었고, 지금은 여기에 더 집중하고 있어요. 광장이 정리된 뒤 제가 활동하면서 만나본 사람 중에는 개인 연대자가 아니라 좀 더 조직적으로 참가하거나 본격적으로 집중하여 연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생각되어요. 이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문을 열어주면 더 많이 올 수 있고, 우리 활동을 퍼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속노조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조합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조합원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일자리를 갖고 보니까 제 일자리에는 노조가 없었죠. 학원은 5인 미만 사업장이었고, 지금은 프리랜서예요. 민주노총에 문의도 해봤어요. 대전 일반노조에 가입할 수 있겠다고는 들었는데 서울로 옮겨서 진전이 딱히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민주일반노조 누구나노조지회에 가입했죠. 그런데 거통고지회 연대를 위해 거제에 내려갔는데 다른 동지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내 분야가 아니더라도 경험을 쌓아서 내 업종에서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가입하게 되었죠. 하지만 사실 조합원으로서 활동을 열심히 하지는 못했어요. 초반에는 열심히 했는데 3월부터는 팔레스타인평화연대에 가입했고, 현지 활동 때문에 인력이 비어서 여기서 열심히 했어요. 사교육 쪽에서 일해 왔지만, 이 업종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해요.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했지만 사교육 자체에 비판적인 입장이기는 해요. - 그동안 활동하시면서 가지신 인상적인 경험을 듣고 싶어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특별히 없었어요. 그나마 A학교 투쟁 때 연행됐던 거? 다른 하나가 전장연 연대 다니면서 겪었던 일이에요. 제가 국가폭력을 당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어요. 전장연에도 그랬고, 2차 남태령 때에도 그랬고, A학교 투쟁이나 이수기업에서도 그랬죠. 이수 때에는 경찰한테 방패에 다리가 눌려서 걷는 게 어려웠어요. 그 트라우마가 깊지는 않아요. 제가 가정 폭력 생존자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뽑자면, 전장연 출근 선전전 때였는데, 전장연 주황색 몸자보 조끼를 받아 들고 있었는데,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퇴거하라고 하고 그에 불응하자 끌고 나가는 과정에서 조끼 목덜미를 잡아서 목이 졸렸어요. 그날 사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려고 했는데, 목이 졸리니까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서 ‘목을 조르고 있다’고 말했는데 놓기는 했지만, 경찰은 계속 눈치만 보더라고요. 부상을 입었는데도 보고만 있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는 좀 충격이었죠. ‘그 사람들이 나를 정말 죽였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트라우마 때문에 한동안 4호선을 못 탔어요. 직원들이 있는 것만 봐도 힘들었죠. 저는 신체 폭력에 무감한 편이고, 그런 상황에 처하면 제가 앞장서 나서기도 하는 편인데요, 이 사건 자체가 국가폭력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자본이나 기득권에 국가가 얼마나 동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 전장연 선전전에 결합하지 못했어요. 시청에서 선전전 하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근처까지 간 적도 있었는데 못하겠더라고요. 국가폭력이란 게 정신을 부숴놓는 것 같아요. 국가가 앞장서서. 어느 정권이든, 국가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해 억압해 왔고, 이 사회는 그것을 방임해 왔는데, 그 부분을 직접적으로 느꼈어요. 그때 너무 충격적이었던 게 얼마 안 가서 김형수 동지가 똑같이 목이 졸리셨거든요. 당시 전장연 투쟁에 거통고 지회 동지들이 결합했는데, 전혀 개선이 되지 않았던 거예요. 이것이 의도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러한 국가폭력은 저나 일부 동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장연 동지들은 계속 겪고 있는 것이죠. 현대차 구사대도 그때만의 일이 아니었던 거고요. 너무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대중은 모르거나 이 부분이 잘려 나간 채로 정보를 접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출퇴근해야 하는데, 장애인들이 귀찮게 군다’라는 정도로요. - A학교 투쟁으로 연행된 적이 있었는데요, 연행 당시 무슨 어떤 상황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왜 지혜복 동지의 투쟁에 연대하게 되셨는지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연행 당시에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전전날 화장실 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출근 때문에 희망텐트에 못 왔다가, 미아리 주거권 투쟁 연대도 하고, 김진숙 동지 강연도 갔다가, 오전 선전전에 갔어요. 그런데 반쯤 졸린 상태로 화장실 가려고 별관에 갔는데, 누가 불법채증을 한다고 해서 말리다가 서재유 동지가 다리를 다치면서 재정신이 들었죠. 그런데 너무 당황스러웠던 것이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퇴거 명령을 내린 거예요. 부상자가 발행했고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인데 퇴거 명령만 내려진 거죠. 그리고는 갑자기 연행을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아는 게 없으니까 퇴거를 하라고 해서 퇴거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연행을 했죠. 4명 정도 남아 있었을 때였는데. 첫 연행이기도 했고 그래서 ‘어어’하면서 연행됐어요. 연행되면서도 당연히 모두가 금방 나오겠거니 했어요. 큰 문제도 아니고. 경찰이 대응을 제대로 못 한 게 몇 갠대요. 그런데 하루 이상을 구속했고, 유치장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한 동지들도 다수였죠. 경찰은 아직도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하고요. 원래 지혜복 동지 투쟁에는 마음속으로 연대는 계속하고 있었지만, 연대 일정이 겹치면 주로 다른 곳으로 갔어요. 공교육과 교사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멀리서만 연대했는데, 희망텐트 때는 어이가 없어서 왔었죠. 사교육이지만, 교육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지혜복 동지가 잘 보여주시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옳은 일을 함께하는 데 결의라는 게 꼭 필요하냐는 말. 당연히 맞는 말이에요. 고등학교 때 자퇴 시도도, 등교 거부도 했었어요. 고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배치고시를 보는데, 저는 서울 소재 사립 특목고를 나왔고,. 전형적으로 교사들이 좋아하는 상이었어요. 그런데 입시를 거부한다든가,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ysphoria, 지정 성별과 자신이 정체화한 성별이 불일치하는 트랜스젠더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겪는 고통을 의미) 속에서 사복 바지를 입고 다닌다든가 하면서, 모범생이었던 저에 대한 이상과 현실이 달라지니까 교사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죠. 교육의 민낯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지정 성별 여성이어서 교복 치마를 입어야 했는데, 치마를 잃어버려서 교복 바지를 사려 했는데 재고가 없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사복 바지를 입었죠. 이 문제로 교사와 부모와 마찰이 심했어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 나오는 데 거부감이 들었고, 등교거부를 했고, 그러면서 공황장애까지 겪었죠. 학교보다는 배우는 걸 좋아했어요. 학교 정문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학교가 싫어졌어요. 선생님들은 나를 보호한다기보다는 골칫덩이를 처리한다는 느낌이었죠. 그때부터 교육자들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제대로 된 교육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지혜복 동지는 앞장서서 발 벗고 나서신 것에요. 사회통념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런 지혜복 동지를 보면서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런 선생님도 있구나’라고 말이에요. -현재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하고 계시는데요, 그 이유를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연하니까요. 짧은 이유를 말한다면요. 긴 이유는, 저는 배우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요. 어렸을 때 논술잡지를 많이 읽었어요. 거기서 전태일 열사 이야기도 처음 접했고요. 거기서 노조나 근로기준법을 알게 됐고. 그 시기에 있었던 글 중 하나가 팔레스타인에 관한 글이었어요. 팔레스타인 민중을 학살하는 데 백린탄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죠.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고 국제법상 금지된 무기. 그 외에도 이스라엘에 한국 기업인 한화가 무기를 공급하고 있는데, 그 무기가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를 죽이고 있다는 것. 어린이 시절이었는데 너무 끔찍하고 충격적인 이야기였죠. 한화면 한국에서는 추앙받는 기업인데 직접적으로 전쟁에 이바지한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팔레스타인 소식을 많이 접하지 못했는데, 그러다가 10월 7일 작전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학살 강도를 높였죠. 말이 안 된다고 느꼈어요. 그 글을 봤을 때가 초등학생 때였는데 1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 해결이 안 되었고, 집단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데 소위 지도층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죠. 말이 안 되었죠. 그래서 계속 알아보게 됐고, 처음에는 전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죠. 애초 식민지 상태였고요. 이것을 알고 나니까 외면할 수가 없었어요. 많은 분이 2년 가까이 되어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특히 3월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기아 학살의 참상을 목격하고 팔레스타인 연대를 시작하시는 거 같아요. 저도 그런 면이 있고요. 다만 연대활동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저는 저와 제가 소속된 국가인 대한민국이 학살 동조국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어요. 일단 그럴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죠. 한국이 서구 열강이라 불리는 국가만큼의 영향력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래서 ‘그나마’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한 직접적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연대활동을 하다가 계속 느끼는 게…. 한국은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이자 동조국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다 보니 미 제국주의가 가담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학살에도 책임이 있는데, 과거의 저와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까진 생각하지 못하고 회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또한 한국의 경우 자본이 팔레스타인 학살과 이스라엘의 제국/식민주의를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고 있지요. 한화 등 방산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요, HD 현대의 굴착기가 이스라엘 불법 정착촌 건립과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의 가옥 파괴에 앞장서는데 사측은 모르쇠 중입니다. 최근에 이스라엘 불법 정착민이 팔레스타인인 활동가를 살해했을 때 그 배경에서 HD현대의 굴착기가 비치기도 했어요. 저희(팔레스타인평화연대)가 지금 압박하고 있는 매일유업을 포함한 많은 기업이 이스라엘산 과일을 사용하고 있고요. 사람 목숨값으로 장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또 사실 이런 부분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의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측면을 띌 수밖에 없고, 반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 바람은 아예 사회주의에 기반하여 조직되는 것이지만요. 일전에 노동자 민중, 그중에서도 비정규직/하청노동자/불안정노동자/이주노동자 등 더 열악한 노동환경에 있는 노동자 민중 조직의 필요성과 그들이 어떻게 사회 변혁의 원동력이 될지 대화를 나누었잖아요. 저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서도 이 노동자 민중의 조직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울산의 서진 동지들이나 이수 동지들의 경우에는 지역 팔레스타인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는 걸로 아는데요, 이걸 더 확대할 방법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민주노조 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이 있으실까요? 정체돼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개혁적인 집단이었는데, 점점 흐름이 정체되는 느낌 말이에요. 민주노총 자체가 예전에는 변혁적인 집단이었다면, 지금 그 주체는 불안정 고용 노동자, 플랫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억압받고, 불리한 조건에서 싸움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중요하다고 봐요. 민주노총도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처음에 ‘민주노총 부른다’라는 말이 있었잖아요?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밈화’되어서 많이 사용했어요. ‘말씀하신 오지랖을 우리는 연대라고 합니다’라는 트윗이 있었는데 이것에도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실제로 활동을 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변혁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많이 느꼈어요. 길을 열겠다는 말 이후에 보인 입장이 실망스러웠고. 간부 동지만 봐도 상당히 위계적인 사람들도 있었고요, 대선 때 결국 민주노총은 기권했고요. -현재 윤석열은 재구속되었고, 정권도 바뀌었는데요, 그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정치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윤석열이 당선됐던 대선 때 해외에 있었어요. 해외 거주자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게 투표를 했죠. 당시에는 이재명을 찍었죠. 그리고 진보당에 가입했어요. 한국 상황과 어떻게든 연결되고자 하여 진보당에 가입했죠. 그런데 2024년 총선 대 진보당이 말은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데, ‘민주당과 같이 간다? 이게 맞나?’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내란 청산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는데, 내란 청산이 끝이 아닌데 말이에요. 광장에서도 민주당이랑 활동을 많이 한 게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지금의 진보당은 이름값을 못하고 있죠. 민주당의 아류라고 할까요. 대선을 2번 겪었는데, 지난번이랑 이번이랑 가장 큰 차이가 결국 진보진영에서는 민주노동당 후보밖에 없었다는 거라고 봐요. 지난번에는 각 정당에서 후보를 냈는데 말이에요. 애초에 민주당이 다른 정당을 뽑으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하는 것도 짜증나는데요, 진보정당들이 단일화한 것도 아쉬웠어요. 민주당에 동조한 진보당의 아쉬움은 말할 것도 없고요. 진보당이 위성정당에 참여했을 때 완전히 반대했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행동을 하길래 미련 없이 떠났어요. 결국 권영국 후보를 찍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기대를 하지는 않았어요. 권 후보가 낸 공약이 엄청난 것은 아니었잖아요.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그런 물음이 들었죠. 지금 정부 인선도 그렇고 바뀐 게 없죠. 단지 윤석열만 없을 뿐. 평소 대한민국 정부가 하는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고 봐요. 노동자와 소수자들은 다 탄압을 하고 있고. 세상을 바꾸기는 데 필요한 정치는, 사실 제가 정치를 잘 몰라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권력을 잡을 수 있고, 이것은 잘 모르겠어요. 소수자들은 항상 버려진 패라는 것, 항상 나중이라는 것, ‘일단 이번 고비는 넘기고’라는 그런 느낌이죠. 소수자들이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정치판을 깨야 한다고 봐요. 사실은 굳어져 있는 자본주의 체제기 때문에 진보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똑같은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상 모두. 국회나 의회가 아니라 민중이 시작해야 한다고 봐요. 그 민중에서도 가장 동력이 될 수 있는 사람들, 가장 억압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요. 저는 성소수자 운동, 여성운동 쪽에서도 매우 많은 사람이 이 체제를 깨부수는 게 아니라 이 자본주의와 타협하거나 오히려 부역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고 봐요. 서울퀴어페스티벌조직위의 경우, 금전적인 이유로 영·독 대사관 부스 참여를 허용했던 사례처럼요. 퀴어도 노동자계급이 아닌가요? 여러 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자신의 노동자성, 그리고 노동자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 맥락을 잘라버리고 자본에 협력하려고 하고 거기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결국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런 한계 때문에, 제가 퀴어인데 퀴어 단체에 안 들어가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퀴어팔레스타인연대에 들어갔을 때 행복했어요. 팔레스타인평화연대도 그렇고. 계급성에 대해 사유하고, 반대하고 저항하려는 게 보였기 때문에 그랬죠. - 사회주의를향한전진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전진의 교육 프로그램을 몇 개 듣다보면 사회주의 혁명은 결국 혼자서, 혹은 소수의 결의가 아니라 오로지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만 쟁취할 수 있다는 걸 반복해서 깨닫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조직을 더 열심히 해 주세요. 특히 교육을 통한 선전활동에 많은 여력을 쏟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어렵다는 건 알지만, 그게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의적 의미로요 ㅎㅎ)2025-09-15 | 조회 8,722 -
[말벌을 만나다#6] 이윤 벌이 수단으로서의 대학을 넘어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의 대학으로 – 동덕여자대학교 재학생 연합 'A' 동지를 만나다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여덟 번째 인터뷰이는 동덕여대 재학생연합 A동지다. A동지는 학측의 남녀공학 전환 통보와 고소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 “이 싸움이 단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청년학생과 소수자 억압의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체감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총장 직선제를 비롯한 학내민주화 투쟁과 함께, 여러 투쟁 사업장과의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A동지를 만나 어떤 고민과 연대를 이어가고 있는지 들었다. 1.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단위 소개와 개인 동지의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희는 동덕여자대학교 재학생 연합이라는 이름의 단위이고요. 작년(2024년) 11월에 동덕여자대학교 학측에서 학생 20명을 상대로 소송전에 들어가면서 처음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저희가 고소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이미 신원이 특정된 고소 대상 학생들에게 "더 해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게 짐을 지우는 거란 생각을 다들 했던 거 같아요. 이제는 정말 신원이 특정되지 않은 학생들이 나설 때다. 그렇게 (같이) 싸울 마음을 먹었던 것 같고요. 그 형태라고 할 때… 개인으로 나서면 (고소당한 학생들처럼) 당연히 색출 당할 거라는 예상이 있었어요. 그래서 연합이 되어 서로를 지키잔 취지로 이렇게 모인 거예요. 지금까지는 꽤 많은 일을 해 온 거 같아요. 저희 학내 사안을 의제로 하는 대규모 집회도 몇 번 주최해 보았고요. 겨울에는 1인 시위도 진행했어요. 이번에 동덕여대에 등록금 인상 이슈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등록금 올려 (학생들이) 피 말려 죽는다" 이런 식으로. 파면 직후에는 프레시안에 기고 기사도 썼었네요. 금방 생각할 때도 많은 활동을 해왔던 거 같아요. 사실 사립대학 문제라는 게 저희 학교만 아니라 모든 학교를 대상으로 하겠잖아요. 그런 취지에서 총장직선제 청원도 받았었고요. 지원: A 동지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동덕여대 재학생연합에 같이 하게 되셨는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A: 제 개인적으로는, 이 사태가 터지고 바로 한복판에 있진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소동이 약간 잦아든 다음에 깊숙이 들어오게 됐죠. 처음에 같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학교 건물) 점거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수업 거부는 당연히 같이 하고요. 그때도 수업 거부를 할 때 이게 단순히 농땡이 치고 마는 걸로 남지 않으려면. 원래 수업을 하는 그 시간에 맞춰서 (점거) 공간에 가야 한단 생각이 있었어요. 근데 하다 보니까 이게, 만약에 학생들이 있는데 학측이 물리적으로 폭력을 써서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처음엔, 그런 걱정으로 시작한 게 큰 거 같아요. 그러면서 (학교의) 문제를 많이 알게 됐어요.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 본부에서도 탄압을 가하고, 네티즌이며 언론도 저희를 폭도 취급하고. 그런 상황이 심해졌어요. 그러니까 이대로 우리 싸움이 진 싸움이 되어버리면 실상 우리가 뭘 했든 그냥 폭도로만 남겠구나. 이거 절대 못 지겠다. 단지 나랑 내 학우들 뿐만 아니라 (진보적 의제에 목소리 내는 청년학생에 대한) 전체적인 사회 선례로 남겠구나. 싶었어요. 저희 학교 말고 다른 학교들에서도 되게 많은 투쟁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 투쟁들을 보면 대자보 부착 금지를 계기로 들고 일어났다거나, 학측이 학생을 일방적으로 고소했다거나. 그런 식으로 되게 양상이 비슷하거든요. 각 대학의 투쟁들이 동덕여대와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인데. 만약 동덕여대 사례가 만약에 학생 탄압의 성공 사례로 남아 버린다면 다른 모든 투쟁하는 학생들… 나아가 꼭 학생만 아니라도 기득권의 압박을 받는 소수자들이 전부 탄압받는 하나의 선례로 남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약간 판례 같은 느낌으로 자리 잡을까 봐서요. 그렇게 되지 않길 원하는 마음이 컸고, 큰 것 같아요. 2. 동덕여자대학교는 일방적 남녀공학 통보 전에도 학내에서 발생한 학생 사망사고를 자체 일단락하는 등 여러 문제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투쟁에 나서기 이전에도 동덕여대 내지는 사학 대학 형태에 문제 의식을 가지게 되신 경험이 있다면 소개 부탁 드립니다. A: 저는 사실, 많은 것들을 이번 투쟁하며 알게 됐어요. 전엔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기껏해야 어떤 학과들을 강제로 통폐합하려고 했다, 이 정도였죠. 이사장 이름도 잘 몰랐어요. (웃음) 3대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라는 것만 알았죠. 총장직선제? 필요하지. 이 정도 생각만 있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굉장히 오묘한 기분이에요. 이런 문제들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어쨌든 예전엔 사학대학이란 형태 그 자체에 문제의식을 가지진 않았어요. 많은 대학생이 지금도 그러지 않을까요? 학교 과정이나 구조엔 대부분 관심들이 없잖아요. 아르바이트, 학교, 아르바이트. 이런 일상 속에서만 사니까요. 게다가 스펙 쌓기만도 바쁜데, 이런 문제는 누가 따로 알려주는 것도 아니죠. 한편으로 저한테는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지난 투쟁의 경험은) 학우들이랑 같이 싸우면서, 사학재단 특유의 문제들이 많은 사회 구조의 문제들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이었어요.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거죠. 문제라고만 가볍게 알고. 알고 보니까 동덕여대에서 락카칠을 이번만 한 것도 아니더라고요. 광장에서 힘내라고 응원해주셨던 다른 학교의 선배 동지들이랑 얘기해보면 "본관 점거? 다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시고요. 총장실 점거만 해도, 특정 학번의 선배 동지가 말씀하시기를 우스갯소리로 총장실 점거는 연례행사였다 하시더라고요. 문제가 워낙 많았단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건 (학생들의 의사 표현에) 여태 가만 있다가 이제 와서 문제로 걸고 넘어졌다는 거죠. 54억이라는 게 정말 지울 수 없는 꼬리표예요. 인터넷에는 아직도 (동덕여자대학교가 기물 파손 복구 비용으로 학생들에게 청구한 비용이) 54억이다, 59억이다 이런 소리가 나와요. 학측에서 발 벗고 나서서 학생 상대로 꼬리표를 달았다고밖엔 생각할 수가 없는 거죠. (락카칠) 사태가 발생하고 일주일? 그 정도밖에 안 지났을 때였어요. 그렇게 사람들이 무섭게 걸고 넘어질지 몰랐어요. 강의실 책상 엎어만 둔 걸 부쉈다고 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수준이 이렇게나 떨어졌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3. 지난 11월, 동덕여자대학교 학측은 학생과 교내 노동자를 포함한 그 어느 학내 구성원과도 협의가 없는 일방적 남녀공학 형태 전환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관해 총학생회에서 입장문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일각에서는 대학이 수익 기구로 전락한 지금, 학교 경영을 그저 이윤의 수단으로 보는 시선이 강화되어 발생한 새로운 형태의 대학 구조조정이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동덕여대 재학생 연합 동지들은 이러한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총장을 비롯한 사학 경영진에 의한 일방적 남녀공학 전환에 처음에 어떤 문제의식을 갖게 되셨었는지 말씀 부탁 드립니다. A: 일단 그런 시선에 어느 정도 공감해요. 학교가 학생들을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요. 찍어누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히 (이사장 비롯한 경영진에게) 뭔가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작년에 처장단이랑 학생회가 면담을 다섯 번이나 했어요. 속기록 보면요. 처장단이 학생 말을 끊거나 존중 없이 대화하는 모습이 계속 보여요. 그런 걸로도 보이는 거죠. 정말 이윤 추구도 추구지만 일단 (학생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느껴요. 대학에도 각 정체성들이 강하게 있잖아요. 무슨 과가 뛰어나다든가, 이런 식으로요. 여러 정체성이 있을 텐데 전 동덕여자대학교의 주된 정체성 중 두 개가 동덕'여자'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인 거라고 느껴져요. 그 '여자' ‘대학’ 구성원들의 어떤 동의도 없이 학교의 정체성을 바꾸려는 행위에 큰 문제의식을 가졌고요. 사실 위기감도 만만치 않게 느꼈어요. 아, 우리(학생들의) 존재는 진짜 신경도 안 쓰네. 이걸 가만 두면 더 서슴없어지겠네. 이런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핵심적인 정체성도 아무 논의 없이 휙휙 바꾸는데 더 못할 짓이 어디 있겠나 싶었어요. 일종의 생존 문제인 거죠. 그래서인지 뒷세대 후배들을 위해서도 싸워야겠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이게 우리한테는 존엄의 문제라서요. 4. 한편 동덕여자대학교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자대학교에서 여대 문제를 논의하며 생물학적 여성만이 존재하는 여자대학이야말로 여성인권이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는 캠퍼스 형태라는 논의들이 오가기도 했는데요. 동덕여대 재학생연합 동지들은 이러한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동덕여대 재학생연합 동지들이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대학이란 어떤 형태인가요? A: 저희가 투쟁하고 있는 동덕여자대학교에서는 학측이 무단으로 대학 정체성을 바꾸려고 했어요. 그, 얼마 전에 SNS에서요. 그런 웃긴 장면이 돌아 다니더라고요. 어떤 익명의 계정이 여자대학교를 상대로 막 젠더 혐오, 젠더 차별 트윗을 뿌리고 다니니까. 다른 분이 "당신이 있어 여자대학교는 있어야 한다." 이렇게 올린 거예요.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지금 동덕여대의 투쟁이야말로 젠더 갈라치기와 혐오에 맞서 민주적 가치를 말하는 투쟁의 시발점이고, 이 투쟁의 의미들이 더 많은 대학과 공간으로 확장돼 가야 하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대학은… 우선 건물 자체에 대한 접근성이 높고, 또 건물뿐만이 아니라 교육의 장 내에서도 장애 접근성이 높은 곳이에요. 학생이든 교직원 노동자든 할 것 없이 수업 주체가 되는 곳이고요. 그 수업 주체들의 사고에서 학벌 중심주의, 외모 지상주의 같은 게 탈피되고. 그런 상황에서 아주 자유로이 지식을 논하는 곳. 학문량에 관계없이 모르는 것을 누구나 쉽게 질문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마련되는 곳. 그게 이상적인 대학이라고 생각해요. 또 교내 집회 시에 허가가 필요 없는 곳이요. 대자보 한 장도 막 떼면 안 되는 곳. 물론 학생을 언론의 먹잇감으로 던지는 곳은 안 되겠고요. 그리고 노후화된 시설도 재깍재깍, 좀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아니면 제보가 있기 전에 안전 점검을 수시로 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시설물이 괜찮은지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거죠. 교수도 충분히 많이 뽑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곳이 이상적인 대학이라 생각해요. 5. 동덕여대 재학생연합 동지들께서는 단순한 학내 투쟁을 넘어 다양한 투쟁사업장 동지들과 연대를 일구며 광장의 주역 중 하나로 부상하셨는데요. 거통고지회의 연대성명이 발행된 것도 그 결과 중 하나고요. 맨 처음에 어떻게 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연대를 만들게 되셨는지 소개 부탁 드리겠습니다. A: 이거는, 다른 데서도 여러 번 얘기했던 거 같은데요. 저희가 계엄 터지기 전에 이미 학내 사태가 시작됐고, 그 이후엔 학내 사안의 중간에 계엄 한복판에 놓인 상황이 되어 버렸죠. 사실 계엄 터지고 나서 학생 사이에서도 (광장 참여 여부를 두고) 말이 많았어요. 온 국민적으로 우리가 욕을 먹고 있는데 나가면 위험하지 않겠냐고요. 막 나가되 개인적으로만 나가잔 말도 있었어요. 근데, 어쨌든 최종 논의 결과는 "우리가 학내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거 아니냐. 근데 이건 학내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파괴된 상황이다. 나가는 게 오히려 당장 힘이 될 거 같다." 이거였어요. 그래서 12월 중순 즈음에 1,500명이 모여서 시국선언을 하고. 깃발 들고 나갔죠. 그땐 정말 광장에서의 행진 매 걸음마다 간식을 받고, 응원을 받았어요. 우리가 대중한테 전혀 지지를 못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받은 그 온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만 열심히 하다가 1월 2일에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다이인 시위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다이인 행동을 하고 행진을 하는데, 이게 웬걸. 시작한 역에서 동덕여대 혜화캠까지 행진을 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감사해서 학우들을 모아 갔죠. 마무리 할 때는 심지어 동덕여대 연대 발언까지 배치해 주셨어요. 그게 실은 자기 의제로만 채워도 모자란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저희를 챙겨주셨다는 게 너무 감사한 거예요. 다이인 행동 때 지혜복 선생님의 글이 대독되었던 게 기억이 나요. 그때 처음 지혜복 선생님 사안을 알게 되고, 여기에도 연대하러 가봐야겠다. 그 생각을 했어요. A학교 집회에 함께하고, 또 세종호텔 사안을 알게 됐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세종호텔 해고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됐죠. 점점 하나씩 사안들을 알게 되면서, 이 사안들이 우리가 받은 탄압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여겼던 거 같아요. 같이 승리하면 좋겠다 싶었죠. 고공농성 올라가셨을 땐 특히 마음이 너무 쓰이는 거예요. 저도 학교 본관점거할 때 학측이 난방을 끊어버리면서 너무 추웠던 기억이 있거든요. 하물며 저는 그때 외벽이라도 있었지, 이 동지들은 날도 추운데 혼자 올라가 계신 거잖아요. 저 동지들한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활동해 왔던 거 같아요. 6. 지금은 단순 공학 전환 이슈뿐 아니라 사학 대학 변혁 자체를 향한 투쟁에 더 중점화를 맞추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내부에서 어떤 토론과 논의를 통해 '총장 직선제'의 과제가 중점화되게 되었는지 말씀 부탁 드리겠습니다. A: 저희는 사실, 공학전환 반대랑 같이 총장 직선제를 계속 말해왔어요. 지난 학생총회에서 안건으로 부쳐진 총장직선제 시행 찬성률이 90%를 넘겼을 정도니까요. 물론 학측 때문에 시행은 안 됐지만요. 중요한 건 저희가 계속 민주적 학사행정을 원해 왔다는 거예요. 이상한 얘기가 아니고, 늘 있던 논의라는 거죠. 제가 아까 학생총회 말씀 드렸는데, 그게 작년 11월 20일 일이에요. 그때 안건이 두 개였어요. 하나는 남녀공학 전환 반대, 하나는 총장직선제. 그니까 이건 언제나 저희가 말하던 의제인 거죠. 총장직선제를 왜 이야기해왔냐면, 이번 총장 하나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현세대 학생들의 노력으로 공학전환 저지를 성공한다 해도, (공학전환 추친은) 이후에 언제든 다시 추진이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 이럴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추진해도 학측을 막거나 견제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죠. 총장직선제라는 저지선 역할을 하는 카드가 있어야 졸속행정, 반민주 행정을 막을 수 있어요. 학생이랑 학교랑 꾸린 협의체 구조 자체도 학생이 절대 소수예요. 협의체 인원이 총 12명이면 한 3명이 학생일까요. 나머지 9명은 죄다 학측 사람이고요. 비민주적인 구조체임에도 바뀌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요? 안 바꿔도 되니까요. 학교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되든 전혀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이사장 임명하면 그 비위만 맞추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더 민주적인 협의체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총장이나 학교 경영진들이 학생 눈치를 보게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 거고요. 저희는 총장 직선제를 원하는 것도 있지만. 민주적인 학생 위원이 더 많이 포함된 협의체, 학생의 의견이 더 원활하게 실질 결과에 반영될 수 있는 협의체 구성 비율을 원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민주적인 것들을 좀 전반적으로 원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7. 동덕여대 투쟁은 노학연대 복원, 사학비리 척결을 비롯한 대학의 자본화 거부 및 공공성 강화, 학내 민주주의 사수 등 지금의 청년학생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치를 가장 선봉에서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국민청원 이후 앞으로의 투쟁 계획이 있으시다면 어떤 내용일까요?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A: 저희가 현재로서는 급박한 일이 없는 이상, 휴식기 가지려고 해요. 황폐화된 일상을 조금 가다듬어 보려고 하고요. 저희 연합 동지 중엔 투쟁 과정에서 빚이 생긴 동지도 있고, 신체 건강이 악화된 동지도 있어요. 정신건강 악화나 아르바이트 시간 연장은 기본이고요. 물론 당연히 긴급한 사안이 학교에 생기면 나가겠지만. 그전까지는 한 템포 쉬어 가려고요. 물론 그렇다고 영영 안 나타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개인 차원에서는 연대를 다닐 계획이에요. 일상과 투쟁의 알맞은 밸런스를 찾아가면서요. 지금은 고공에 계신 동지들 내려오는 걸 가장 보고 싶네요. 싸워줘서, 버텨줘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씀드리고 안아드리고 싶어요. 거론하고 싶은 투쟁사업장이 너무 많지만 하나하나 거론하기 어렵네요. 지혜복 선생님이 학교로 돌아가시는 걸 꼭 보고 싶어요. 참, 이랜드 문제도 해결되어야겠고. 울산 쪽에서는 이수기업 동지들이… 현대차가 워낙 거대 자본이다 보니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 같아 마음이 많이 쓰여요. 지금 우선은 이 정도? (웃음) 8. 인터뷰를 읽으실 동지들께 남기고 싶으신 말씀이나 인터뷰 소감이 있다면 편히 들려주세요. A: 일단 저는, 이 인터뷰를 읽으실 모든 동지들이 아프지 않고 춥지 않고 외롭지 않고 힘들지 않으셨으면 해요. 작년 겨울에 제가 그랬기 때문에 그런 시간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요. 힘들면 옆에 있는 동지들에게 힘들다고 꼭 말해주세요. 저희 사안에 관심 가져주시거나 연대해주신 모든 동지들께 감사하고, 소중하단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이 계셔서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어요. 옆의 학우들도 저를 많이 지탱해줬지만.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예민하고 날카로워졌을 때 동지들이 함께해 주셔서 특히 기뻤어요. 무언가를 (간식이라거나) 주지 않으시더라도 안부를 물어봐 주시는 것, 더불어 보내주시는 눈빛 하나하나, 가슴에 있는 마음들 하나하나. 그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저한텐 충분하고 감사해요. 저희 학내 상황이 마무리된 거 같지만. 실은 전혀 마무리되지 않았거든요.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이 없어 보이고 당장 고소도 취하했다 하니까 다들 이제 일단락되는 거 아니냐고 말씀하세요. 실제론 그렇지 않아요. 공학전환 공론화 위원회 운영이 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사안이 실시간으로 계속 추진되고 있다는 의미거든요. 고소는 취하됐지만 수사는 계속 진행 중이기도 하고요. 학생 22명이 아예 송치된 상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광장에서, 민주노조 동지들이 "말벌 동지들이 부르면 민주노총이 간다" 고 하셨어요. 이것이 진정 실현되는 우리의 동지애들 가꿔 나가면 좋겠습니다. 동지들의 현장 투쟁, 노동자 동지들의 말 한 마디가 어떻게 언론을 통해 악마화되는지 저도 너무 잘 알게 되었으니까요. 손이 필요하다고 하면, 우리 서로 보내주어요.2025-09-15 | 조회 7,431 -
[기고] 푸르던 한여름, 이수기업 해고자 순회투쟁과 연대의 기록사실 연대자의 입장에서 순회투쟁 참여를 꽤 오래 고민했었다. 나는 이 투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도 아니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도, 해고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연대하는 명예조합원(말벌 동지)으로서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며 되돌아보니 함께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의 순회투쟁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내 나이 20살, 누군가 내 인생에서 청춘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순회투쟁 5일간의 이야기들을 하며 그 순간들이 내 인생 20년 푸르던 봄의 한 장면이라고 말할 것이다. 7월 14일 순회투쟁 1일 차 : 정문 앞을 채운 강고한 연대투쟁 우리는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으로 향했다. 마음속엔 설렘과 떨림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이 더 컸다. 아무리 같은 사업장이라고 해도 지역이 다르면 거리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혹시 우리끼리 외롭게 싸우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전주공장 앞에 도착하여 선전전을 준비하자 나의 불안은 모두 사라졌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정문 앞을 가득 메운 지역 대오. 수많은 연대 동지가 서 있는 모습에 순간 벅차올랐다. 피켓을 들고, 현수막을 들고 강고하게 구호를 외치는 모두의 목소리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었다. 현대차 전주공장 출근선전전 내 눈앞에 보인 장면은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 동지들이, 그리고 연대 동지인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같은 한 장면이었다. 울산공장에서는 보거나 느끼지 못했던, 늘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니, 마치 기적이 일어난 장면 같았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원청이든 하청이든 그 모든 것들을 떠나 한마음으로 뭉친 우리들이었다. 고용형태의 경계와 지역의 차이 등 모든 것을 뛰어넘은 우리들의 강한 연대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푸르던 7월의 여름. 내 눈앞의 장면은 마치 여름밤의 꿈 같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전주공장 앞에서 본 동지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가슴속에 새겼다. 현대차 전주공장 출근선전전 순회투쟁 2일 차 : 탄압에도 꺾이지 않는 연대의 함성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같은 사업장이지만 지역이 다른 이야기라면, 순회투쟁 2일 차에 찾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을 빼놓을 수 없다. 아산공장에 도착하여 투쟁가를 틀고, 선전전을 준비하는데 사측은 데시벨 측정기를 가지고 나오고, 아산서 정보과 경찰은 불법 촬영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런 상황들이 연대하는 입장에서는 꽤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이 상황이 나의 강고한 연대투쟁을 위축시킬 수는 없었다. 현대차 아산공장 출근선전전 사실 이날은 현대자동차지부가 아산공장 교섭과 출정식이 있던 날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현대자동차지부 활동가와 조합원은 참여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박정식 열사 추모제에 참여했던 현대자동차 열사회 이도한 동지가 함께해서 너무나 반가웠다. 이날 출근 선전전에는 우리가 외롭지 않도록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지회장과 동지들이 함께 연대해 주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맙고 따뜻한지...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지역을 넘어 마음을 모아주는 이 연대가 너무 감사했다. 그날 아산공장 앞에서 연대의 힘을 다시금 크게 느꼈다. 현대차 아산공장 출근선전전 순회투쟁 3일 차 :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멈출 수 없다. 순회투쟁 3일 차 아침, 아산공장 출근 선전전을 진행했다. 선전전에는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 동지들과 정규직 현장조직 새길 동지들이 함께해 주었다. 아산공장 동지들과 선전전을 마친 뒤 우리는 서울특별시교육청 앞 천막농성장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지혜복 동지를 만나러 출발했다. 전주와 아산에서 받은 따뜻한 마음을 이번에는 우리가 돌려줄 차례라는 생각으로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서울시교육청 점심시간에 지혜복 동지의 선전전에 함께한 후 간담회를 했는데, 지혜복 동지가 얼마나 외롭고 고된 싸움을 이어오고 있는지, 그 투쟁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직접 들으며 다시금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떠올랐다. 우리가 옳지만, 세상은 왜 등을 돌리는 걸까. 사측도, 서울특별시교육청도, 그 외면이 너무나도 화났다. 속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서울시교육청 앞. A학교 성폭력 사안 축소·은폐 규탄한다! 지혜복 교사 부당해임 철회하라! 간담회를 마치고 곧바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민주노총 총파업 대회로 이동했는데, 마침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 것인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하지만 비에도 우리는 멈출 수 없었다. 차에서 피켓을 내려 꺼내 들고 빗속에서도 꿋꿋이 서서 싸움을 이어갔다. 우리는 승리 없이 후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를 마친 뒤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으로 향했다. 이름 그대로, 꿀잠은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었다. 모두의 화장실을 시작으로 동지들의 따뜻한 환영, 그리고 내가 나로 있어도 여기서만큼은 괜찮다는 기분이 드는 곳. 이곳을 지나간 모든 동지가 참 행복했을 것 같았고, 나 역시 꿀잠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느꼈다. 순회투쟁 4일 차 : 비 속에서 피어난 연대의 꽃 꿀잠에서 한여름 밤의 편안한 잠을 청한 뒤, 순회투쟁 4일 차 아침이 밝았다. 꿀잠에서 동지들과 함께 서울고용노동청 기자회견장으로 향하려던 순간, 창밖으로 억수같이 내리는 비가 보였다. 전날 순회투쟁 중에 웹자보를 만들어 연대 동지들에게 급히 연락하며 미안한 마음으로 기자회견이 있다는 걸 알렸지만, 이런 날씨에 정말 누가 와줄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서울고용노동청 앞에 도착하자, 믿기지 않게도 동지들이 그 비를 뚫고 와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피어난 꽃들, 꽃들이 피어나 연대해 준 장면을 평생 고맙게 생각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울고용노동청 기자회견 기자회견을 마친 뒤 동지들이 노동부 장관 후보(현 노동부 장관)에게 면담 요청서를 제출하고 곧바로 국정기획위원회로 이동했다.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와 세종호텔 공대위 동지가 국정기획위원회 담당자와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바리케이드 바깥에 남은 동지들이 이수기업 피켓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피어난 연대의 꽃들이 이곳에도 또다시 싹을 틔운 것이다. 국정기획위원회 요구안 전달 국정기획위원회에 요구안 전달을 마친 우리는 다시 서울고용노동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투쟁 중인 금속노조 주얼리분회와 서비스연맹 이랜드노동조합 동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주얼리분회 동지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곳에도 나처럼 명예조합원(말벌 동지)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곳에도 또 다른 청춘의 한순간이 피어나고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금속노조 주얼리분회 연대방문 간담회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왔다. 금세공 일을 28년 했지만, 이력서에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고용보험에 가입한 단 5년의 경력만 남았다는 말. 23년의 세월이 유령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 박태성 동지의 “청춘을 바쳐 20년을 일했지만, 헌신짝처럼 버려졌다”라는 외침이 다시 귀를 스쳤기 때문이다. 유령이 된 23년의 경력, 헌신 끝에 버려진 20년의 청춘. 그 만남 앞에서 나는 노동운동의 의미를, 연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간담회를 마친 우리는 세종호텔지부 농성장이 있는 명동 세종호텔로 향했다.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지하차도 위 철골 구조물에 서 있는 세종호텔지부 고진수 지부장의 모습이었다. 20년 경력의 요리사인 그가 손에 든 것은 요리도구가 아닌 확성기였고, 그가 서 있는 곳은 주방이 아닌 지하차도 위 철골 구조물이었다. 고공 위에 내몰린 노동자, 모두의 내일을 위해 잠시 땅과 이별한 동지를 보며 나는 다시금 연대하여 싸울 힘을 얻고 투쟁의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세종호텔지부 연대방문 그날 마지막 일정은 고 김충현 노동자의 49재 추모제였는데, 비정규직 구조 속에서 끝내 죽음으로 내몰린 노동자를 생각하며 “산 자여 투쟁하라”라는 외침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였다. 더 이상 어떤 노동자도 죽지 않는 세상을 반드시 우리가, 우리들이, 우리 모두가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그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고 김충현 노동자 49재 추모제 순회투쟁 5일 차 : 승리 없이 후퇴 없다 우리는 서울에서 남양으로 이동해 순회투쟁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마침내 순회투쟁 5일차, 마지막 날 아침을 맞았다. 남양연구소로 향하는 길, 기쁘지만 마음속에는 작은 걱정이 있었다. 과연 연대 동지들이 오늘도 함께해 주실까? 우리만 외롭게 선전전을 진행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사측 관리자와 화성시 정보과 경찰의 격렬하고 기분 나쁜 환영이었다. 사측 관리자들은 집회 신고된 구역이 현대자동차 사유지라나 뭐라나 선전전 할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쳤다. 사측과 실랑이를 하는데 정보과 경찰이 끼어들면서 집회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라나 뭐라나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참 어이없는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그 어떤 걸림돌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비정규직지회 동지들과 힘차게 선전전을 이어갔다. 같은 사업장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묵묵히 연대를 위해 나와준 동지들의 결의에 찬 눈빛은 다시금 나를 뛰게 하였다. 함께 구호를 외치던 남양연구소 앞의 공기, 그 시간의 온도,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가 쉽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가슴에 남았다.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출근선전전 선전전을 마치고 남양연구소 비정규직지회 동지들과 근처 편의점에서 간담회를 진행한 후, 우리는 강고한 연대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나눈 뒤 구미로 향했다. 구미에 도착하자마자 맞이한 건 살을 태우는 듯한 땡볕이었다. 숨이 막히는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바로, 불탄 공장 위에서 550일 넘게 고공농성을 이어온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의 수석부지회장 박정혜 동지였다. 박정혜 동지를 생각하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사무실에 도착하니, 동지들이 따뜻하고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곳 동지들도 강고한 연대의 힘을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이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구나’ 느낄 수 있었다.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박정혜 동지를 만나러 고공농성장으로 이동하였다. 우리가 미리 준비해 온 “니토는 교섭에 나와라!”라는 슬로건을 머리 위로 높이 들자, 그 모습을 본 박정혜 동지가 불탄 공장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의 연대, 우리의 연대가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투쟁할, 내일로 나아갈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옵티칼하이테크지회 연대방문 나는 박정혜 동지를 향해 목청껏 외쳤다. “승리 없이 후퇴 없다! 고공에서 땅으로! 비정규직 철폐 투쟁! 결사 투쟁!” 그 외침에 박정혜 동지도 불탄 공장 위에서 주먹을 쥐고 함께 구호를 외쳤다.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담자, 나는 다시금 이 땅의 모든 노동자, 그리고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과 연대할 힘이 피어올랐다. 순회투쟁의 마지막 종착역인 울산으로 향하는 길, 전주부터 아산, 서울, 남양, 구미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 위에 피어난 연대의 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래, 연대란 이런 것이구나. 승리 없이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우리기에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다시금 뛰게 만드는구나. 울산에 도착해 동지들과 서로의 노고와 투쟁을 격려하고 손을 흔들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설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순회투쟁 5일간의 기억들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을 꾼 것 같다고. 내 인생 20년 가장 푸르던 여름, 가장 뜨겁고 가장 진심이었던 청춘의 한 장면이 이렇게 막을 내리고, 내일부터 새로운 막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승리 없이 후퇴 없다! 고용승계 쟁취하자!” 옵티칼하이테크지회 연대방문2025-07-29 | 조회 6,578 -
[말벌을 만나다#5] “입체안경을 쓰고 새롭게 세상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 IT노동자 동지를 만나다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다섯 번째 인터뷰이는 IT노동자 동지다. 주 100시간 노동을 견디며 살아온 IT하청노동자인 그는, 세종호텔 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입체안경을 쓴 듯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고 말한다. 지금은 일반노조 누구나지회 소속으로 연대 활동을 이어가는 IT노동자 동지. 7월 15일, 그가 어떻게 광장에 서게 되었는지, 어떤 고민과 실천을 이어가는지 들었다. 안녕하세요. 본인을 ‘IT노동자’로 표현하고 계신데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IT노동자’라는 닉네임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지은 건 아니고요. 1월에 허지희 동지가 만든 웹자보 보고 세종호텔 집회에 참여했어요. 집회에서 참석자 이름 확인하잖아요. 저는 온라인 활동을 안 해서 닉네임 같은 게 없어서요, 노동 현장이니까 노동자로 얘기해야겠다, 근데 IT쪽에서 일하니까 ‘IT노동자’로 해야겠다 해서 한 번 쓴 거에요. 근데 그때부터 계속 ‘IT노동자’로 기억을 해주셔서 쓰고 있습니다. 저는 강서구에 살고 있는 평범한 신혼부부이고요. 작년에 결혼했는데, 윤석열 내란 때문에 신혼생활을 6개월 만에 빼앗겼습니다. 전에 IT현장에서 근무할 때 1주 100시간씩 4주간 400시간까지 일해봤단 얘기를 하셨어요. 충격적인 얘기였는데요, IT노동 현장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저는 SI(소프트웨어 통합) 업무를 해요. 그러니까 쇼핑몰이라든지, 키오스크라든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서 소비자들에게 오픈할 때까지 개발하는 과정이에요. 제가 일하는 업체는 전체 규모로는 200명 정도 일하는 곳인데요, 정직원은 50명이고 프리랜서가 150명 정도입니다. 업력은 15년이니 업계에서는 중견기업 정도 되고요. 장시간 노동이 일상이라고 봐야 해요. 일하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PM(프로젝트 매니저)이 바뀐다든지, 다른 업체가 펑크를 내 전체 일정이 밀린다든지 하는 일들이 터지는데, 원래는 그럴 때 인원을 추가 투입해야 하거든요. 프리랜서를 계약해 데려오든지 해야 되는데, 그냥 어차피 월급 받는 정직원들이 땜빵하라는 식이죠. 코로나 때는 장시간 노동이 더 심각했어요. 그 전에는 진짜 심각한 프로젝트도 많았는데, 그나마 약간 나아져서 이제는 주 7~80시간까지 가는 프로젝트는 적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예전에는 밥 먹듯이 넘겼는데. 그래도 주 60시간 정도는 일합니다. 그건 명백하게 노동법 위반인데 문제 제기하는 동료들이 없었나요? 아무래도 우리 업체가 하청이다 보니까, 항의를 해도 원청에 책임을 떠넘기죠. “네가 갑(원청)에게 직접 따져서 오더를 내리게 해라” 뭐 이런 식으로요. 원청 대기업과 하청업체가 프로젝트 계약서를 쓰면요, ‘프로젝트 종료 후 2년간 무상으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런 조항까지 넣어요. 그래서 이미 끝난 프로젝트인데, 원청에서 애프터서비스 요구했다는 이유로 가서 일하는 경우도 있어요. 원청이 작업 일정 등을 통제하는 거니까 불법파견 소지도 있어 보이는데요. 하청업체 사장은 어쩌다 일 터지면 나와서 보는 수준이에요. 보통 6개월에 한 번이나 얼굴을 봤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너네 사장은 그래도 양심 있다”는 얘기를 해요. 우리 업체는 나름대로 팀이라도 꾸려서 프로젝트에 투입됐는데, 어떤 대기업은 하청을 주면서도 아예 원하청 노동자 자리 배치를 같이 하기도 하죠. 같이 일하지만 원하청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도 크다고 들었어요. 본인은 일하실 때 어떻게 대응하셨어요? 일단 너무 바빠서 대응도 힘들었어요. 사실 1주 100시간 일했을 때, 정말 안 되겠다 싶어 퇴사하려고 짐을 다 쌌어요. 그리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했는데 너무 바쁜 거예요. 일하는 곳은 광화문이고, 본사는 강남이거든요? 사직서를 내려면 강남까지 가야 하니까, 바빠서 사직서 낼 시간을 못 만들고 흐지부지된 적이 있어요. 워낙 힘드니까 동료들하고 전우 의식 같은 것도 생기기도 했고요. 일하며 힘들어서 민주노총 IT연맹 홈페이지 찾아가 보곤 했어요. 근데 처음에 프리랜서 노조 가입을 받을지 결정이 안 됐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프리랜서가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노조가 아니겠다 싶어서 가입을 안 했어요. IT업체는 정규직이 적고 프리랜서가 많은데 프리랜서까지 가입이 돼야 뭔가 협상이 가능하지, 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내란 터졌을 때 일반노조 누구나지회가 더 낫겠다 싶어서 거기로 가입했어요. 내란 사태가 터지고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요, 그때의 심경과 고민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세요. 저는 계엄령 발표되고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어요. 12월 3일에 친구 돌잔치 가려고 돌 반지까지 준비해서 나가려다가 취소하고요, 이틀 후에 집회에 나갔어요. 그게 생애 최초의 집회 참여였습니다. 저는 박근혜 때도 집회 안 나갔었거든요. 근데 계엄령은 진짜 나라 망한다고 생각했어요. 과거 6~70년대 현대사 시간에나 배웠고, 다른 비민주적인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죠. 막 국정원에 끌려가고 그럴 텐데, 못 살 것 같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12월부터 집회에 참여하면서 1월부터는 집회 자원봉사 활동도 하게 됐습니다. 남태령, 한강진, 민주노총 노숙투쟁 모두 참여했고요. 회사 다니면서 집회 다니고 그러다 보니 탄핵되고 나서 몸이 힘들더라고요. 회사에 퇴직하겠다고 하니까 일단 휴직을 쓰라고 해서 6월부터 9월 말까지 휴직을 쓰는 중입니다. 남태령 말씀을 하셔서 말인데요. 고백하자면 저는 그날 남태령 갈 생각을 아예 안 했거든요. 낮부터 집회를 했으니까요. 저녁에 명동에서 정리집회할 때 ‘남태령에서 농민들이 경찰에 막혀 있다’는 얘기가 방송차에서 나왔죠. 저는 그때 ‘아, 그렇구나’ 하면서 집에 갈 생각만 했거든요. 남태령까지 가실 때의 생각은 어떠셨어요? 그때 2차 계엄령을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긴장감이 있었잖아요. 한덕수도 탄핵해야 하느냐로 시끄러웠고요. 내란 세력과의 파워게임이 되고 있는데, 남태령에서 농민들이 밀린다면 그럼 우리가 밀리는 거다, 저분들이 밀리면 모두 손해를 보는 거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때 집회에서 같이 나간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저 혼자 남태령까지 갔어요. 근데 오래 활동하신 분들은 그때 약간 여유가 있으시더라고요. (웃음) 저는 그때 정말 나라 망하는 줄 알았고요. 윤석열 퇴진 광장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주장을 펼쳤죠. 그중에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들은 누구였어요? 세종호텔 투쟁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광화문에서 5년 동안 일했는데 세종호텔에 노숙 농성투쟁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거든요. 마치 입체안경을 쓰고 새롭게 세상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너무 무관심하고 몰랐구나, 하는 충격이요. 이렇게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구나, 내가 이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부채 의식이 생겼죠. 나는 그동안 내 살 길만 살았는데 이분들은 이런 사회운동을 했구나, 싶은.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일반노조 누구나지회도 가입하신 건데요. 실제로 노조 활동에 참여해 보니 어떠신가요? 사실 한국에서 노조활동은 사업장 단위로 단체교섭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게 중심 활동이거든요. 이를 위한 의결체계가 만들어지고요. 그런데 누구나지회 같은 형태에서는 의결체계를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활동이 쉽지는 않더라고요. 톡방에서 대화는 활발한데, 서로 얼굴을 익히기도 힘들고요. 두 달에 한번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교육을 하고요. 교육 내용은 민주노조의 형성 과정, 일반노조의 의미 같은 거요. 총회하면 오프라인으로 2~30명 정도? 줌으로 참여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사업계획으로 지역 연대활동을 얘기하는데, 개념은 좋지만 아직 좀 막연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동지는 ‘사회주의를향한전진’에서 진행 중인 사회주의 기초학습을 듣고 계시죠. 6강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오프라인으로 개근하셨어요. 교육 들으면서 어떠셨어요? 일단 신선해요. 왜냐면 정규 교육에선 못 들었던 얘기니까요.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에는 전공투 같은 사회주의 운동이 있다고 알았지만, 한국에도 사회주의 운동이 있는지 잘 몰랐거든요. 지인들에게 ‘사회주의’란 얘기는 직접 하긴 좀 그런데, 같이 집회 자원봉사했던 사람들에게 ‘너 이거 들었으면 되게 좋았을 거야’라는 말을 많이 하고 다닙니다. 그리고 미학 공부할 때 변증법 이런 게 관심이 있어서, 1강 철학 교육이 제일 재밌었고요. 지금 이재명 정부 지지율이 60% 중반대로 찍더라고요. 아마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던 사람들 상당수도 이재명 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앞으로 이재명 정부의 앞날이 어떨까요? 좀 어려운 질문이긴 한데요. 자원봉사를 같이 했던 사람들 보면, 처음에는 기대를 많이 했다가 실망한 것 같더라고요. 이재명이 당선되면 공격적으로 내란 청산을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광장에 나왔던 사람 중에 민주당원들도 있는데, 이들도 내란 청산이 빨리 안 되는 데 실망감 같은 게 있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9월에 복직한 후에 회사 내에서 노조 활동은 가능할 것 같으신가요? 글쎄요, 회사에서 노조활동 하면 회사가 없어지지 않을까요? (웃음) 사장님이 고령이어서 맨날 ‘회사 문 닫아야 하는데’라고 얘기하시는 분인데 노조가 생기면 진짜 문 닫을 것 같아요. 그래도 동료들을 누구나지회에 가입시킨다든지 이런 건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 노동자 투쟁 연대도 계속하고요. 윤석열 파면 때처럼 열심히는 못 해도, 일과 병행할 수 있을 만큼 투쟁 연대도 열심히 하고요.2025-07-26 | 조회 4,649 -
[말벌을 만나다#3] "해결이 안됐는데 냅두고 갈 순 없잖아요" 호랭이 글우 동지를 만나다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대선 시기에 들어서며, 광장에서 우리가 외쳤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집에서 민주당 지지안건 통과를 시도했고, 이미 전현직 간부와 단위노조의 민주당 지지가 줄지어 벌어졌다. 민주노총을 믿고 투쟁했던 말벌 동지들은 이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지금도 고공투쟁중인 3개의 투쟁사업장을 비롯해 여러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고 있는 말벌동지들 중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세 번째 인터뷰이는 글우 동지다. 최근 세종호텔 투쟁문화제에 왔다면 ‘세종호텔 호랭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글우 동지가 호랑이 탈을 쓰고 세종호텔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생일파티로 시작된 세종호텔과의 인연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는 글우 동지는 어떤 과정을 통해 노동운동을 함께 하게 되었을까? 광장이라는 두 글자로 압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글우 동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Q1. 12·3 내란사태 이전에도 사회의제나 활동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주로 어느 방면에서였나요? 집회에 참여해본 적이 있으셨나요? 혹은 아예 없으셨나요? 처음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광장 집회는 이번에 처음 나온 게 맞고요. 그 전에 집회, 시위에는 다녀본 적이 잘 없었어요. 예전에 혜화역에서 불법 촬영 반대집회나 미투운동 할 때 잠깐 참여했었는데, 제가 원래 연극 뮤지컬을 좋아해서 혜화역에 자주 방문하고, 가깝기 때문에 참여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거 외에는 솔직히 없었던 것 같아요. 12.3 내란 이후에는 언제 처음 나왔나요? 내란 터진 그 주의 주말 집회가 처음이었어요. 친구들끼리 같이 갔었는데, 그때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9호선을 타러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데,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내려서 걸어갈 때도, 도착했을 때도 사람이 정말 많았고요. 사실 저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고, 그런 곳을 잘 가지도 않는지라 그런 인파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는 ‘선결제’가 많아서 친구들이랑 국회로 가는 길에 누군가 선결제해준 음식을 수령해서 먹기도 했어요. 그 외에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 너무 오래 되어서 멀게 느껴져요. 그리고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인지하지만, 친구들과 먹고 떠들고 하느라고 그렇게 무거운 느낌은 아니었던지라 크게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군요. 세종호텔 투쟁, 혹은 넓게 보면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사안에 대해서 12.3 내란 이전에 무언가 알거나 또는 관심을 가지거나 그런 적이 있나요? 사실 알지 못했고, 제가 관심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 퀴어퍼레이드 행진할 때 세종호텔을 지나갔는데요, 그때 세종호텔 동지들이 피켓 만들어서 연대해줬잖아요. 저도 그때 같이 행진하면서 봐서 기억은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찾아보거나 하진 않았어서 제대로 모르고 있었죠. 퀴어퍼레이드나, 불법촬영 반대시위 등 페미니즘, 퀴어 의제와 연관된 일들에 참여하곤 하셨었군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제가 참여하는 무언가는 다 저랑 가깝기 때문에 간다고 생각해요. 불법촬영도 여성들이 주로 겪었던 것이고, 저랑 멀리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혜화역은 제가 자주 가는 곳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쉽게 접하고 참여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내란 이전에는 참 무지했다고 느끼기도 했고... 왜 몰랐고, 왜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자주 했어요. 지금도 사실 제가 가까운, 다닐 수 있는 곳들을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세종호텔은 어떻게 처음 알게 됐어요? 내란 이후 연대 시민들이 문화제에 참여하는 트윗을 보고, 세종호텔에서 매주 목요일에 문화제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세종호텔에 처음 가게 된 건 제 생일날 주간의 목요문화제였고, 다음날인 금요일이 생일이어서 농성장에 생일케이크를 들고 가서 먹었어요. 사실 ‘꼭 세종호텔에서 먹어야겠다’라는 생각이 있던 건 아니고, 그 전에 크리스마스날에 광장 집회에서 어느 분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가져와 나눠 드셨다는 트윗을 봤는데, 그게 저는 너무 부럽고 좋아보였어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맛있는 걸 나눠 먹고, 함께한다는 게 아름다워서요. 제 생일날에도 함께한다면 저에게 의미 있는 생일날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요. 세종호텔에 왔다가 ‘아 그래 이렇게 싸우는구나’ 하고 그냥 돌아갈 수도 있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계속 나오게 된 건가요? 그냥 돌아가는 경우는 상상이 안 가요. 생일날 저녁에 3시간 동안 농성장에 있으면서 세종호텔 동지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투쟁이 있었는지 고진수 동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많이 와닿았는데요. 기사와 선전물의 글도 봤지만, 글로만 읽을 때는 누군가의 투쟁이라고 생각했다면, 투쟁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상 누군가가 아닌 내 앞에 있는 동지의 투쟁이라고 느꼈고, 연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대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엄청난 걸 하겠다는건 아니고 그냥 ‘목요문화제를 열심히 참석하고, 세종호텔 투쟁을 알려야겠다’ 정도를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진수 동지가 고공농성을 시작하고 나서는 일주일에 7일을 세종호텔에 가게 됐죠. 저는 원래 정이 많은데, 그래서 이렇게 계속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 동지들이 이렇게 투쟁하고, 사람이 고공에 있는데 그냥 두고 살아갈 수는 없어서요. Q2.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고 난 후로 스스로 가장 변화했다고 느끼신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혹시 그것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연관이 있다면, 조금만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바뀌긴 했는데,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정치에 대해서 그 전보다 좀 더 관심을 갖게 된 건 있지만요. 저는 원래 누구랑 다투는 것도 싫어하고, 싸우는 것도 싫어하고, 분쟁이 일어나는 것도 싫어해요. 그래서 말하는 걸 잘 못하기도 하고, 보통 ‘그냥 내가 참고 말지’ 했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문제는 이제 그렇게 안 넘어가고 싶더라고요. 누군가 그런 싸움이 필요하다 하면 함께 싸울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예전엔 잘 행동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최근에 집에 가는데, 인도에서 오토바이 타신 분이 넘어지셨어요. 옛날 같으면 지켜보다가 그냥 갔을 것 같은데, 지금은 먼저 달려가서 돕게 되는, 그런 행동이 바뀐 것 같아요. 지금은 전보다 예민해진 것 같아요. 예민하면 피곤하잖아요 솔직히. 그래서 예전에는 좀 둔감하게 살려고 했고.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도, 한두번 힐끔거리다가 그냥 갔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번 더 신경 쓰게 되고, 어떤 상황인지 알려고 행동하게 된 것 같아요. ‘세상에 지지 말아요’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좀 더 예민하게 세상을 봐요”라는 가사가요. Q3. 윤석열 퇴진 광장 속에서 대안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개중에서도 노동자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이끌리시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특별히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이끌렸던 건 아니긴 해요. 원래는 성소수자와 장애인 인권운동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세종호텔 동지들과 함께하다 보니까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제가 하는 투쟁이, 그렇게 노동자 투쟁에 국한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니는 거 보면 그런 것 같긴 하네요.(웃음) 넓고, 다양한 문제들에 연대하고 싶은데, 투쟁은 많고 시간과 체력은 한정되어 있는걸 느끼곤 해요. Q4. 결국 윤석열은 노동자민중의 이름으로 파면을 선고받았습니다. 윤석열 파면 광장도 일단락되며 퇴진 이후를 향해가는 사회대개혁의 광장이 새로이 열렸고요. 그러나 혹시 개인적으로 평가하시는 윤석열 퇴진 투쟁에서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혹은 파면 이후 조직된 노동자 운동(민주노총)에 바라는 점 또는 조직된 운동(민주노총)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길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어느 순간 편 가르기가 되던 게 제일 아쉬웠던 것 같아요. ‘왜 응원봉을 갖다 쓰냐’, ‘퀴어를 갖다 붙이냐’ 같은 말들. 트위터에서 ‘퀴어 얘기하느라고 여성을 얘기 안 해준다’ 뭐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게 저는 사실 너무 이해가 안 가고 답답했거든요. SNS에서 사람들이 많이 싸우잖아요. 계정 뒤에 사람이 있는 걸 모르는 것처럼 공격적인 말과 혐오발언이 너무 많았어요…그런 글들을 보면서 좀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라고 고민도 해봤지만 이해할 수 없었고요. 민주노총은 양경수 위원장이 루프탑 파티를 한다는 걸 보고 정말 실망했었어요. 음식도 틀리고, 날짜도 틀리고, 장소도 틀리고. 세 가지가 다 틀려가지고. 비건 동지들도 있는데, 바베큐 파티에다가, (고공투쟁사업장 집회를 하는) 목요일이고, 루프탑에서. 그런데 글이 올라오고나서 많은 동지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냈는데도, 그 비판점에 대해서 ‘문제가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것도 참 화가 났어요. Q5. 최근 민주노총 중집에서의 대선방침 논의 이후 민주노총 전체 차원에서의 민주당과 정책협약 시도가 언론화되며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의 직전에 진보당 김재연 후보의 민주당 단일화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요. 동지께서는 보수양당과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지막 질문이 ‘사회주의를향한전진’에 대한 생각이잖아요. 그 질문을 보고 전진이 어떤 곳인지 잘 몰라서,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글을 읽어봤었거든요. 거기에 당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써 있던데 ‘사회주의노동당’이 만들어지면 괜찮지 않을까요?(웃음) 어떤 의미에서 괜찮을 것 같나요?(웃음)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해요. 민주당이나 다른 정당에서 해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제가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이어서, 질문을 듣고도 생각나는 의견이 없더라고요. 현재의 노동자 권리가 너무 낮고,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서, 그것에 대해 정치적으로 운동을 하려면 확실히 당이 있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전진이랑 민주노동당은 생각의 차이가 꽤 있는데, 민주노동당도 나름대로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얘기하고, 그래서 지금 민주당과 단일화 안 하고 따로 가고 있잖아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원래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진짜 없어가지고 잘 모르겠는데, 현장을 다니다 보면은 노동당 조끼나, 녹색당 대표님이나 이런 분들 많이 보잖아요. 오늘도 팔레스타인 집회에 있으셨고. 그런 걸 보면서, 투쟁현장에 어떤 정치인이 오고 또 발언해주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은 들어요. 그런 당을 지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근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어떤 정당에서 정치인이 와서 ‘투쟁을 지지해준다’라는 게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고요. 거꾸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잘 뭉치고 모여서, 그 힘을 바탕으로 당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투쟁하는 이들이 주체가 되는 당인 거죠. 이들의 요구가 당의 요구가 되고요. 당은 계급투쟁의 한 가지 수단인 거죠. 그래서 정치인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갖고 있어서, 그 힘을 주기 위해 지지하러 오거나, 도와주러 오거나, 이런 게 아니라 투쟁의 힘이 정치적 형태로 표현되면 그게 곧 당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당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가장 최종적으로 좋을 것 같긴 하네요. 지금은 일단 그런 당이 없다 보니까… 아직 그런 당이 존재하지 않아서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해봤던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Q6. 모두가 ‘사회대개혁’을 이야기합니다. 윤석열 퇴진 이후를 그리는 상도 저마다 각기 조금씩은 다른 만큼, 그 디테일의 차이도 천차만별인데요. 윤석열 파면 이후 ‘사회대개혁’을 말할 때, 동지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분 또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려 주세요. 거시적으로 말하면 ‘모든 차별과 배제가 없는 평등한 세상’이라고 생각하고요. 그걸 이루기 위해 제가 투쟁이나 집회에 나간다고 생각해요. 부당해고 당하거나, 피해 받은 노동자 분들이 복직하고, 투쟁사업장들 문제가 제대로 해결돼야 하고, 차별금지법도 당연히 제정돼야 하고, 장애인 이동권, 탈시설 권리도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미 광장에서 저희가 다 외쳤던 거잖아요. 근데 해결된 게 윤석열 탄핵밖에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해요. 그리고 윤석열 탄핵되고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는 게, 참 아쉬운 것 같아요. 동지는 앞으로 어떻게 활동하실 계획이세요? 활동이요..?(웃음) 계속 연대는 다니겠죠. 근데…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해결된 문제가 별로 없고, 진행상황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이게 참 답답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사실 제가 뭔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방안을 혼자서 생각해 보다가도, ‘내가 생각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라면 이미 (세종호텔) 공대위 쪽에서 뭔가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도 했어요. 나름대로 집회에 참여하고, SNS도 열심히 올리고 있긴 하지만, 가끔 ‘내가 하는 일들이 도움이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어떻게’라는 질문이 계속 머리를 맴도시는군요. ‘어떻게 하면 고진수가 이겨서 내려오나’ 그게 가장 크죠. ‘일단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면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주변 친구들한테 많이 얘기하긴 하거든요. “세종호텔 놀러와라, 명동와라” 근데 잘 안와주더라고요. 쉽지 않더라고요. 답답하고, 해결될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데도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해결 안 됐으니까 하는 거 아니에요?(웃음) 그렇다고…냅두고 갈 순 없잖아요. 우문현답이네요. Q7.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동지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나 소감이 있다면, 남기지 말고 전부 들려주세요. 어렵네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어요. 들어가서 단체 소개도 읽고, 홈페이지를 봤는데 이것저것 많은 글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왜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홈페이지 홍보를 안 했을까’라고 생각을 했고요. 진다 동지한테 얘기하니까 ‘그 사람들은 후원계좌도 홍보를 안 한다’고 얘기해 줬어요. 전진이 뭐하는 집단인지 모를 때부터 전진 멤버들은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제가 고진수 동지랑 처음 봤을 때 이청우 동지도 봤었고요. 양동민 동지도, 정은희 동지, 백종성 동지도 전진 소속이시고. 그래서 ‘주변 동지들 중에 전진 소속이 많구나. 뭐 하는 데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리고 광장에서 부스가 되게 구석에 있더라고요. 한번 봤었는데, 너무 구석에 있어서, ‘왜 저렇게 안 보이는 곳에다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안 보이는 데 있는 거를 눈여겨 봐주셨네요. 깃발이 커다랗고, 무지개였어서 잘 보였어요. 좀 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전진이 어떤 단체고, 어떤 걸 하는지. 홈페이지 들어갔다가 트위터의 여성뉴스브리핑 계정을 알게 되어서 구독하고 기사 잘 읽고 있습니다. 근데 팔로워가 14명이더라고요.. 사람들이 많이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많은 투쟁 사업장들도, 전진 단체도.2025-06-18 | 조회 4,668 -
[말벌을 만나다#2]‘“우리에겐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해요” 누구나노조지회의 시화 동지를 만나다12.3 내란 이후,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는 많은 말벌동지들을 만났다. 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된 뒤에도 많은 ‘말벌동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로 노동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기도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왔을까? 그 전에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이들은 왜 광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대오에 섰을까? 대선 시기에 들어서며, 광장에서 우리가 외쳤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집에서 민주당 지지안건 통과를 시도했고, 이미 전현직 간부와 단위노조의 민주당 지지가 줄지어 벌어지고 있다. 민주노총을 믿고 투쟁했던 말벌 동지들은 이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지금도 고공투쟁중인 3개의 투쟁사업장을 비롯해 여러 투쟁사업장에 연대하고 있는 말벌동지들 중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시화(김형은) 동지다. ‘단결 투쟁’이라 적힌 머리띠를 묶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고양이를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둔 그는 인터뷰이 요청에 망설임 없이 흔쾌히 응해주었다. 내란 사태 이후 광장을 경유하며 민주일반노조 누구나지회의 조합원으로 함께하게 된 그의 SNS 피드는 쿠팡 노동자의 선거권 보장을 요구하는 포스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청원 연대를 요청하는 포스터, 135주년 세계 노동절 맞이 고공농성 투쟁사업장과 비정규직 단위들이 함께한 1,000인 선언 라이브 영상 링크 등 온통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의 가장 최근 게시물에는 2025 퀴어퍼레이드를 홍보하는 해시태그가 들어있었다. #우리는결코멈추지않는다. 시화 동지는 어떤 과정을 통해 노동운동과 함께, ‘결코 멈추지 않을’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 광장이라는 두 글자로 압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화(김형은) 동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5년 3월 15일, 거통조선하청지회 지회장 김형수 동지가 고공농성을 시작한 날 밤, 시화(김형은) 동지를 비롯한 누구나노조지회 조합원들이 휴대폰 플래시로 하트를 만들고 있다.) Q1. 12·3 내란사태 이전에도 사회의제나 활동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주로 어느 방면에서였나요? 집회에 참여해본 적이 있으셨나요? 혹은 아예 없으셨나요? 처음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주로 페미니즘과 관련된 사회의제,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집회에 참여하거나 주변 사람들과 사회의제에 대해 말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퀴어문화축제를 한 번도 집회로 인식하지는 않았지만,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성실하게…? 참여했었어요. 박근혜 파면 이후로도 여성을 비롯해 소수자에 대한 정책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 뒤로) 개인의 정신건강도 좋지 않아져서 집회 참여를 한동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당일 계엄 포고 과정을 전부 봤으면서도 국회로 가지 못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광장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불안감과 죄책감, 미안함 등의 감정이 가장 큰 계기였던 것 같아요. Q2. 윤석열 퇴진 광장에 나오고 난 후로 스스로 가장 변화했다고 느끼신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혹시 그것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연관이 있다면, 조금만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타인에게 말을 걸고 다가가는 것, 인사를 하는 것이 조금 쉬워졌어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고, 광장에 나와서 외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외치는 말'들이 왜 진보 의제가 되었는지, 사회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지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을 되돌리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힘과 용기를 많이 얻었죠. 저들이 지치기 전에 함께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대선에는 살면서 처음으로 소신투표를 해볼 계획이에요. Q3. 윤석열 퇴진 광장 속에서도 대안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개중에서도 노동자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이끌리시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취업을 준비하며 다양한 곳의 취업 조건들을 비교해보았고, 내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직종에 정규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수가 많지는 않고 자격조건도 많이 걸려있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나만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가지면 되는 걸까?” 스스로 질문을 해봤는데, 모두에게 안정적이고 안전한 일자리가 생기지 않으면 내 일자리의 조건은 언제든지 나빠질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안정적이고 안전한 일자리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Q4. 결국 윤석열은 노동자민중의 이름으로 파면을 선고받았습니다. 윤석열 파면 광장도 일단락되며 퇴진 이후를 향해가는 사회대개혁의 광장이 새로이 열렸고요. 그러나 혹시 개인적으로 평가하시는 윤석열 퇴진 투쟁에서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혹은 파면 이후 조직된 노동자 운동(민주노총)에 바라는 점 또는 조직된 운동(민주노총)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길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사회대개혁의 광장이라고 말을 하지만, 자꾸 의회적인 방식으로만 풀이하려는 게 아쉽습니다. 퇴진 투쟁에서 나왔던 다양한 의제들 중 어떤 것들은 또다시 일부만 얘기하는 세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아쉬워요. 민주노총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되었을 때, 기존 산별 체계에서는 조직될 수 없는 다양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더 작은 사업장들에도 근로기준법이 적용되고, 안전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의 비중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나도록 같이 싸워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그 방법을 잘 홍보하고, 더 많이 조직하거나, 조직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잘 대변하는 노동자 운동이 되면 좋겠습니다. Q5. 최근 민주노총 중집에서의 대선방침 논의 이후 민주노총 전체 차원에서의 민주당과 정책협약 시도가 언론화되며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의 직전에 진보당 김재연 후보의 민주당 단일화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요. 동지께서는 보수양당과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의 노동자계급에게는)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책협약 시도나 김재연 후보의 단일화를 아쉽게 느낍니다. 자본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에 기대어서는 정책, 법안을 입안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령 재판에서 승리를 하더라도 자본이 그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마저 광장에서 종종 보게 되면서 일단 노동자계급이 정치세력화되지 않으면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변화를 일으키기는 어렵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얘기를 해주는 정치인이 필요해서였고요. Q6. 모두가 ‘사회대개혁’을 이야기합니다. 윤석열 퇴진 이후를 그리는 상도 저마다 각기 조금씩은 다른 만큼, 그 디테일의 차이도 천차만별인데요. 윤석열 파면 이후 ‘사회대개혁’을 말할 때, 동지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분 또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려주세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나 "차별금지법 제정"입니다. 우선은 차별금지법에 대해 말하는 권영국 후보가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도록 함께할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볼 예정이에요, 그 다음은, 차차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서 정확히 어떤 활동들을 해야 할지 제 안에서 명확하게 정리된 바가 없어서요. 먼저 투쟁을 시작한 사람들의 곁에서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Q7.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동지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이나 소감이 있다면, 남기지 말고 전부 들려주세요. 인터뷰를 비대면으로라도 시간 맞춰 진행했어야 했구나 싶은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멋진 질문이었습니다…! 작성하는 내내 많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별개로 전진 동지들이 열어주신 사회주의 기초학습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2025-06-03 | 조회 3,2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