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위원회 기획연재 - 노동자의 삶과 철학 4] 자본주의와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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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교육위원회 기획연재 - 노동자의 삶과 철학 4] 자본주의와 스포츠

  • 최영익
  • 등록 2023.02.02 17:03
  • 조회수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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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자본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골적인 착취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스포츠도 그중 하나다.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스포츠에까지도 자본가계급의 열망은 깊숙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스포츠를 얼마나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중국을 들 수 있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기 이전, 8년간 매년 4조 원 이상의 돈을 투입했다. 중국이 이처럼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한 이유는 중국자본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위상을 세계 속에 드높이고, 그와 함께 중국 국민들에게 제국주의적 야심을 심고 국가자본주의 체제와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불평등 확대에 따라 점차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중국 노동자들의 각성 및 중국에서의 계급투쟁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2002년에 김대중 정권은 “월드컵을 볼모로 파업을 해서는 안 된다”며 월드컵을 이용해 노동자의 투쟁을 가로막으려 했다. 월드컵의 창시자 줄 리메는 “축구야말로 계급이나 인종의 구분 없이 모두를 한마음으로 만들어 세계를 행복한 한 가족으로 단합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스포츠에도 사회 체제의 논리가 깊이 침투해 있다. 스포츠에 대해서도 우리가 계급적 관점으로 날카롭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

 

스포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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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레슬링

 

스포츠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건 스포츠에 대한 정치적 접근에서 좋은 출발이 될 수 있다. 역사적 분석을 통해 우리는 스포츠가 사회와 어떤 관련성을 갖고 발전해왔는지를 파악하고, 스포츠를 사회적 맥락에서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선사시대에는 레슬링이나, 집단 군무 같은 형태의 스포츠가 존재했다. 이것은 사냥이나 수렵과 같은 당시의 생산을 뒷받침하는 육체적 단련을 여가, 오락과 접목하는 형태였다. 또한 스포츠는 어린 아이들이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도구였다. 그런데 당시의 스포츠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군무와 같은 집단적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팀으로 하는 스포츠는 부족이 외적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을 훈련하고, 협동하는 능력을 키우고 소속감을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협동 작업이 필요한 사냥 노동을 훈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선사시대 스포츠는 당시의 생산방식 및 사회적 요구와 연결되어 작동했다.

 

스포츠에 미치는 이러한 사회적 요소는 당시의 성역할 분담도 반영되었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당시 성역할 분담을 반영해, 사냥·전쟁과 결합된 스포츠는 남성 스포츠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스포츠와 긴밀히 연결된 집단 군무에서는 여성들이 배제되지 않았다. 당시의 무계급 사회에서 여성들은 공동체의 당당한 일부였고, 당연히 공동체적 통합력을 키워가는 수단이었던 집단 군무에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선사시대 스포츠는 계급사회가 형성되면서 지배계급의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어갔다. 가령 고대 검투사 스포츠는 로마인과 비로마 식민지인, 노예주와 노예들을 구별하는 수단이었다. 아울러 스포츠는 노예들이나 식민지인의 저항 에너지를 스포츠를 통해 희석하고 ‘휘발’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가령 검투사 스포츠의 경우, 노예들을 서로 분열시키고 생존을 위해 서로 죽이도록 내몰아 노예들의 집단적 저항의지를 꺾어버리는 수단이었다.

 

생산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역할 분담을 넘어서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지배를 강화하고, 사실상 노예의 처지로 여성들을 내모는 수단이란 측면에서도 스포츠의 변화가 본격화되었다. 여성들은 모든 형태의 스포츠로부터 사실상 배제되었고, 집단 군무처럼 여성과 남성이 스포츠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소멸해갔다. 스포츠는 남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했으므로, 철저히 근육량이 많은 남성들에게 유리한 종목들, 가령 달리기·멀리던지기와 같은 종목들이 개발되었다.

 

근대 자본주의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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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함으로써, 스포츠는 계급적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큰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근대 스포츠와 관련된 대표적인 이론가 중 한 명인 알렌 구트만은 근대 자본주의 스포츠의 핵심은 프로테스탄트 윤리 의식이 스포츠에 접목된 것이라고 규정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가계급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인데, 그것은 자본가들은 이윤 축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노동자들은 근검절약하면서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 신의 소명에 부응하는 윤리적인 삶의 태도라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노동자들이 윤리적인 노동자가 된다. 이런 윤리관이 스포츠에 투영되면 “기록을 향한 경주”가 나타난다.

 

스포츠를 기록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으로 규정해 기록에 따라 순위를 매기고, 신기록 달성을 위대한 성과로 찬양하는 것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들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자본주의 축적의 속도에 맞춰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에도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처럼 기록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것은 “자본주의 공정성”을 유포하는 데서도 유용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에 비한 남성의 우월성을 부지불식간에 주입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특히 노동자들이 이룩하는 성과에 따른 “차등적 임금체계”를 정당화하고,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시키는 체제를 공정한 체제로 포장하는 데서 스포츠는 기여할 수 있었다. 공정한 룰에 따른 처절한 경쟁을 통해 승자를 축복하고, 공정하게 매겨진 순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가 부지불식간에 노동자들에게 주입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사시대 무계급 사회의 스포츠와는 명확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선사시대 스포츠는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협력하면서 집단주의를 발전시키고 생산에 적합한 능력을 자연스럽게 키워나가는 놀이였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는 냉혹한 경쟁의 링이 되었고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분리의 장이 되도록 강요되었다.

 

아울러 스포츠는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의 도구가 되었다. 19세기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은 산업 혁명만큼이나 스포츠에서도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는 전 세계에 크리켓, 축구·볼링·하키·승마·테니스, 그리고 많은 겨울 스포츠를 세계 전역에 보급했다.

 

세계인의 축제라고 치장되는 올림픽은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현대 올림픽은 유럽, 특히 영국의 스포츠를 기준 삼아 시작되었다. 이는 철저히 “백인 위주의 스포츠”, “유럽인 위주의 스포츠”, “남성 중심의 스포츠”가 스포츠의 주류이자 공식 스포츠로 승인되는 것을 의미했다. 올림픽에서는 “페어 플레이” 정신이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스포츠의 결과를 정당한 것으로 강요하기 위한 전제가 되었다. 이것은 백인, 유럽인, 남성의 우월의식을 유포하는 수단이 되었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우월적 장치로 작동했다. 스포츠의 공정한 결과에 순응하듯이, 우월한 백인 남성에 복종하는 것을 대중 특히 식민지인들에게 내면화시키는 도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냐하면 올림픽에서 채택된 스포츠 종목들 대부분이 백인 남성들, 특히 상류층 백인 남성들에게 유리한 종목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기 올림픽에서는 여성들의 참여가 배제된, 남성만의 올림픽으로 운영되었다.

 

올림픽의 이러한 정치적 의미는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쿠베르탱에게서 가장 극명하게 발견된다. 그가 올림픽을 부활시킨 목적은 강력한 프랑스 군대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강한 힘으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용맹한 군대를 키우고, 국수주의를 확대하기 위해서 그는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고대 올림픽 이후 오랜 기간 사라졌던 올림픽이 왜 19세기 막바지에 부활했는지 정확히 설명해준다. 19세기는 식민지를 정복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의 우월성을 확신시키며 세계를 피비린내 나는 경쟁의 링으로 전락시켜야 할 절실한 필요가 제국주의 지배자들에게 충만했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로의 진화와 근대 올림픽의 등장은 이렇게 맞물렸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다. 독일 파시즘은 베를린 올림픽을 ‘아리안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파시스트들의 유대인 대학살 정책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캠페인으로 악용했다.

 

스포츠와 헤게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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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는 스포츠가 기존의 경제적·정치적 지배 구조에 대중이 자발적으로 순응해가는 과정, 즉 자본가계급이 사회적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장치 중 하나라는 점을 제기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같은 자본주의 가치관, 식민지와 여성에 대한 지배의 정당화 수단으로 스포츠가 작동하는 것은 그람시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스포츠는 자본주의 질서가 자리잡는 데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포츠는 사교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선 스포츠를 통해 대지주 계층과 신흥 자본가 엘리트 계층이 융합했다. 골프나 테니스, 승마 등 시간이 많고 상당한 토지와 더불어 비싼 장비가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이른바 귀족 스포츠는 대지주들과 신흥 자본가들이 사교를 통해 하나로 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계급 내에서도 스포츠는 노동귀족적 정서를 확대하는 수단이었다. 금전적·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는 노동귀족층들을 중간계급과 동화시키면서 탈노동계급화시키는 문화적 장치 중 하나가 스포츠였다. 이들에게 노동자가 아닌 중간계급적 의식을 유포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일반 노동자들은 쉽사리 즐길 수 없는 부르주아적 귀족 스포츠에 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본주의 스포츠는 착취 계급들을 서로 융합시키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상층부인 노동귀족층을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이들을 노동자대중으로부터 떼어내는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 장치로 작동해왔다.

 

대량 생산, 그리고 대중매체의 발달이 관중 스포츠의 영역을 넓힌 것도 주목할 수 있다. 일반 노동자들이 직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므로, 그 대신 관중이 되어 스포츠를 게임처럼 즐기는 문화가 확대되었다. 관중 스포츠의 확대는 과도 노동으로 육체적 능력이 과도하게 소진되어 버린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서 관중 스포츠가 오히려 적합하다는 계산도 반영되었다. 이것은 몇 가지 효과를 낳았는데, 우선 스포츠가 운동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자리 잡으면서 프로스포츠와 스포츠 산업이 널리 확대된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기록을 향한 도전, 경쟁적 우월주의, 남성주의를 유포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다음으로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과거 검투사 경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중 스포츠는 노동자계급의 에너지를 스포츠 관람을 통해 휘발시키는 도구였다. 아울러 이러한 관중 스포츠는 노동자의 계급성을 스포츠 집단주의로 왜곡시키는 수단이었다.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들과 어깨 거는 게 아니라 같은 지역, 같은 국가의 타 계급과 일체감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배양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된 것이다.

 

나아가서 “지배자들은 ....... 권투, 축구, 경주 같은 스포츠로 이루어진 인위적인 통로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가장 뛰어난 열정을 부자연스럽게 억누르고 무마할 수 있었다”고 트로츠키는 지적했다. 오늘날 영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서 월드컵·축구 프로리그에 대한 열광의 물결은 그런 지적이 결코 낡은 게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 나라에서 축구는 노동자계급의 관심을 정치에서 스포츠로 이동시키고, 역동적인 저항 에너지를 스포츠라는 통로로 흡수해 정기적으로 태워버리며, 노동자계급의식을 마취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는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를 확대하고, 제국주의적 침략과 자본주의 경쟁시스템,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뒷받침하면서 노동자의 계급성과 저항에너지를 거세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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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는 새로운 가능성도 잉태하고 있다. 생산성 발전에 의해 늘어나는 여가 시간을 통해서 대중적인 스포츠가 탄생하는 토대가 열리고 있다. 소수 자본가들이나 중간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이 스포츠에 직접 참여하고 누릴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노동자계급의 집단주의적 문화의 일부로 스포츠가 재정립되면서, 노동자계급의 에너지를 사회주의를 향한 에너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스포츠가 기여할 여지가 존재한다. 실제로 유럽에서 혁명적 운동이 발전했을 때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대중 스포츠 조직들이 조직화의 거점이 되기도 했고, 특히 노동자민병대를 구성하는 한 구성 요소로 노동자 스포츠 클럽들이 작동하기도 했던 모범 사례가 있다. 즉 스포츠가 새로운 계급적 규정을 얻게 되면서, 노동자 헤게모니의 일환으로 작동할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배 계층의 의도와는 다르게 노동자 스포츠 문화가 발전할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스포츠라는 문화적 영역에까지 침투해 들어온 계급사회의 요소를 지워버리면서, 노동자의 집단적 문화를 확산하는 수단으로 스포츠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수단 중 하나로 발전시키는 전망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트로츠키와 그람시는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스포츠를 넘어서서, 스포츠가 노동자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반영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조직화의 거점 중 하나로서도 스포츠에 접근하려 했다. 가령 그람시는 공산당의 다양한 문화적 헤게모니 장치 중 하나로 노동자 스포츠 기구들이 당에 의해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전망을 구체화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건 오늘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투사들의 과제다.

 

‘기록주의’와 ‘경쟁주의’를 극복하고, 스포츠를 통해 육체와 정신의 균형적 발전을 꾀하며 집단주의적 의식을 강화하는 전망은 충분히 열려 있다. 최고의 기록을 목적으로 하고 타인과의 경쟁을 조장하는 스포츠가 아니라, 함께 어울리고, 유희의 기능과 함께 각각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의 발전을 꾀하면서 집단활동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야 말로 스포츠가 탄생한 역사적 의미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선 스포츠 활동이 시간적, 금전적 여유를 가진 이들만 향유하는 걸 넘어서서 노동자 대중이 직접 참여해 스스로 즐기는 대중문화로 발전해야 가능하다. 이것의 토대는 노동시간 단축이고, 노동자들이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공공적 스포츠 시설들을 확대하는 것이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장시간 죽어라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스포츠 활동을 통해 신체를 단련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생활임금을 보장하며, 다양한 공공 스포츠 시설들을 세움으로써 스포츠 활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려, 생산노동과 스포츠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회복시킬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스포츠의 발전을 통해서, 계급사회가 조장해온 기록주의·경쟁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스포츠는 각자의 개성을 발전시키고 생산노동에 대한 건강한 적응력을 확대하며, 새로운 집단주의적 세계관을 널리 확대하는 수단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것은 스포츠를 통해 인류가 얻고자 했던 진정한 목적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처럼 스포츠가 계급사회의 오물을 벗어던지고 참된 의미를 회복하게 될 때 대중스포츠와 고급스포츠 사이의 관계도 재구성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뛰어난 스포츠 능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엘리트스포츠가 성행하고 있다. 이것은 “대리주의적 문화”를 확산하면서 노동자 민중을 스포츠를 향유하는 주체가 아니라 관객으로 전락시킨다. 또한 자본주의 상업시스템과 연결되면서, 엘리트스포츠는 프로스포츠가 되어 상품 판매의 도구로 전락한다. 나아가서 이러한 엘리트스포츠는 “기록을 향한 열광”과 “무한한 경쟁”을 강력하게 부추기고, 그러한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유포하는 헤게모니 장치의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대리주의적 스포츠 시스템은 노동자 민중이 스포츠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다양한 대중적 스포츠를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뛰어난 스포츠 능력을 가진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스포츠를 추방하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훌륭한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항상 인류가 만들어낸 소중한 문화의 요소 중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스포츠 능력을 가진 이들이 만들어내는 스포츠 문화도 중요한 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며, 이것을 감상하는 것도 대중의 유희이자 권리 중 하나로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스포츠는 대중이 직접 향유하는 스포츠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재편될 것이다. 모든 문화의 발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중 스포츠의 발전은 고급 스포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지지대가 될 것이다. 가령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서 뛰어난 축구 선수들이 탄생할 수 있는 원동력은 그 나라들에서 축구가 넓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대중적 클럽들의 번성은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탄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스포츠가 진정으로 대중이 향유하는 스포츠로 발돋움하면 할수록, 그러한 대중적 기반 위에서 멋진 스포츠 능력을 가진 인자들이 더욱 많이 탄생할 것이다. 역으로 그러한 고급 스포츠의 발전은 대중의 흥미와 열정을 고무해서 스포츠를 더욱 대중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이처럼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는 서로 배제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고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사회주의는 그러한 상호관계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 대중스포츠와 고급스포츠 모두를 개화시킬 것이다.

 

다만 사회주의 사회에서 고급스포츠는 상업주의적인 스포츠 스타시스템을 극복하는 방향에서 수립될 것이다. 또한 “기록을 향한 경쟁주의”를 넘어서서, 함께 즐기고 노력하는 과정의 가치를 배우며 집단주의적 협력정신을 고무하는 과정으로 관중 스포츠도 재편될 것이다.

 

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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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맹아 중 하나는 페미니스트 운동이나 반인종주의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과거에 스포츠는 남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열등한’ 여성은 스포츠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예를 들어 1896년 올림픽에 여성은 한 명도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의 권리가 확대되면서, 여성의 스포츠 참여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922년 8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첫 번째 여성 올림픽이 열렸다. 이것은 스포츠는 남성만의 전유물이라는 계급사회의 규정을 돌파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올림픽에서 여성 종목들이 대폭 확대되었다. 베이징에서 열린 2008년 하계 올림픽에서 여성이 137개 종목에 걸쳐 출전하기에 이르렀다. FIFA 여성 월드컵과 같은 여성의 국제 스포츠 행사가 계속 성장하고 있다. 이처럼 스포츠 분야에서 여성이 참가하게 되면서, 스포츠를 통해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키고 가부장제를 확산시켜왔던 자본주의 스포츠 시스템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했다.

반인종주의나 반제국주의의 성과도 스포츠 분야에 반영되었다. 백인 위주의 스포츠 종목들에서도 유색 인종의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또한 올림픽 등에서 소수 인종들이 즐겨온 스포츠 종목들이 상당 부분 정식 게임에 포함되고 있다. 여전히 백인에게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포츠가 더 이상 백인의 우월성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수단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960년 로마에서 1회 대회가 열린 장애인 올림픽(패럴림픽)도 그 연장선에 있다. 여성과 장애인을 포함하는 이러한 스포츠 경기의 발전은 “기록주의”와 “경쟁주의”를 극복하고 스포츠의 참된 정신을 회복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스포츠가 갖고 있는 본질적 성격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건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는 노동자의 문화와 세계관을 스포츠 분야에서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이다.

 

그것을 위한 토대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이 노동자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대중 스포츠가 일정하게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노동자 투쟁의 결과, 노동자들이 쟁취한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 및 최소한의 임금인상 효과를 반영한다. 아울러 불구화된 노동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스포츠를 통해 해소하려는 노동자들의 열망도 반영한다. 마지막으로 스포츠 경기를 통해 집단주의를 형성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도 반영한다.

 

이런 성과와 열망들을 반영해, 노동자 스포츠 문화를 형성해가기 위해서는 다음의 지점들에 대한 실천적 고민과 다양한 창조적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1) 노동자계급의 에너지를 휘발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장치로 스포츠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2) 부르주아 엘리트 스포츠를 넘어서서, 노동자가 직접 누리는 대중적 스포츠를 확대하는 방안은?

3) 스포츠를 통해 주입되는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을 뛰어넘어, 스포츠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확대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4) 노동자의 세계 올림픽, 노동자(노동조합) 리그 등을 통해 기록 중심이 아니라 노력과 과정 중심의 스포츠, 집단주의를 강화하는 스포츠의 모범을 만들 수는 없을까?

5) 스포츠 동우회 등 다양한 스포츠 조직들을 관제 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연대와 조직화의 기구로 활용할 수 있는 전망은?

6) 스포츠에서 남성주의 극복 방안은?


이런 고민들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공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런 답을 내오기 위해서는 다양한 창의적 도전과 실천적 경험이 필요할 것인데, 이 글은 그것을 자극하기 위한 고민의 실마리 정도를 제기할 뿐이다. 이후 스포츠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시도들이 축적되면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 답을 누군가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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