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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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번역]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연재 | 노동자계급 속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길을 개척하는 ‘빵과 장미’의 도전⑥

  • 오연홍
  • 등록 2023.01.25 11:17
  • 조회수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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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수잔 퍼거슨의 책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에 대하여

 

2020년 플루토 출판사에서 수잔 퍼거슨의 책 <여성과 일: 페미니즘, 노동, 사회적 재생산>이 발행됐다.1) 이는 억압과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선 투쟁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그 밖의 여러 정치전략 간에 벌어진 논쟁을 파헤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다. 스페인 <일간 좌파> 편집자인 호세피나 마르티네스가 서평의 형식을 빌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을 둘러싼 여러 논점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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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펴내면서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쇄신”, “자본에 맞선 투쟁의 중심에 억압에 맞선 투쟁을 배치하는 변혁적 정치를 위해 더욱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 아래 퍼거슨은 책의 첫 대목에서 역사적 개괄을 시도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경향이 있다고 규정한다. 평등 페미니즘, 비판적 평등 페미니즘(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그는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내에서 진행된 다양한 논쟁을 다루고, 자율주의 페미니즘에 반론을 제기한다. 마지막 대목에선 ‘99%의 페미니즘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퍼거슨의 책은 자본주의 내에서 체계적으로 세워진 억압과 착취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역사를 관통하며 여성의 일에 관한 논쟁을 검토하면서 그간 덜 알려져 왔던 논의 성과들, 예컨대 19세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밝혀낼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은 가사노동과 가치법칙을 둘러싸고 자율주의 경향과 벌인 일부 중요한 논쟁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퍼거슨은 여성 억압의 문제가 자본에 맞선 투쟁의 중심에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에서 보조적으로 덧붙여지는 요소가 아니라 필수 구성요소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일반적 형태로 서술된 이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적 논쟁과 정치전략을 다룬 이 책의 다른 명제들에는 불분명한 지점이 있다.

 

궤적과 계보에 관하여

 

퍼거슨이 제시한 세 갈래의 역사적 궤적을 다루기에 앞서, 그의 책이 개입하고 있는 논쟁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94월 발행된 이론지 <급진철학>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자료들이 게재됐다. 여기에는 실비아 페데리치가 쓴 개괄적인 글2)과 알레산드라 메자드리가 쓴 분석적인 글3)이 포함된다. 이 글들에서 그들은 친지아 아루자, 티티 바타차리야, 수잔 퍼거슨 등 자기 입장을 사회적 재생산 이론으로 규정하는 논자들의 주장과 다양한 각도에서 논쟁을 벌인다.

 

메자드리는 이들의 시도4)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페데리치는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시각에서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분석을 위한 범주로서 사회적 재생산, 자신을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라고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접근과는 달리, 하나의 정치적 정체성으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페데리치가 보기에 사회적 재생산을 다루는 논쟁에서 특징적인 것, 1970년대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5)을 이끈 활동가들이 기여한 것 중 혁명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가사노동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그것을 모든 점에서 공장 노동과 똑같이 생산적인 노동 형태로 간주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가사노동이라는 영역에서도 자본주의적 착취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이 보기에 지금껏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해 왔다는 주장이다.

 

메자드리와 페데리치의 글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이론적-정치적 논쟁을 자율주의 경향과 마르크스주의자내지 마르크스 진영으로 거론되는 필자들 사이의 공개적인 논쟁으로 끌어간다.6) 그 논쟁이 펼쳐지는 지형 위에서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 자체의 계보, 즉 그가 자율주의 진영과 주류 사회주의 페미니즘 둘 다와 구별하고자 하는 전통을 제시하려 한다. 그는 엥겔스 이래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젠더와 계급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데에서 이중체계론의 오류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점을 다루기 전에,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공개적인 논쟁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사회적 재생산을 다루는 마르크스학파(퍼거슨이 쓰는 표현이다)가 리즈 보걸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7)을 참조 기준으로 인용하기는 하지만 그 관점이 모두 똑같지는 않다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퍼거슨은 자신의 위치를 주류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에서 멀리 떼어놓는다. 보걸 자신은 한편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업에서 중요한 오류, 실수, 누락이라고 판단한 것들을 지적하면서도, 더 전반적인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일부로서 여성 억압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여한 바를 옹호한다.8) 자신의 책에서 보걸은 초기 저작을 비롯해 <공산당선언>, <자본론>,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등 젠더와 계급 문제를 다루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업에 담긴 다양한 측면을 밝혀낸다.9) 그는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여러 사회주의 조직 내에 여성을 위한 특별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국제노동자협회 내에서 수행한 실천적인 투쟁에도 관심을 쏟는다.10) 이 투쟁은 노동자 운동이 억압에 맞선 투쟁에 나서도록 그들이 전개한 투쟁의 한 부분이었다. 퍼거슨은 이런 측면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제 세 갈래의 궤적이라는 발상을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퍼거슨은 페미니즘 사상의 세 가지 경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평등 페미니즘, 비판적 평등 페미니즘(여기에 주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포함된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평등 페미니즘은 이른바 여성 문제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8세기 말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맥락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올랭프 드 구주 등 당시 계몽된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고찰과 결부된다. 이 경향은 새로 등장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수모에 대한 이성적-도덕적 비판에 바탕을 둔다. 여성은 이성의 왕국에서 여전히 배제된 상태였고, 가사노동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밀려났다. 철학적, 법률적, 문화적 논의에서는 여성을 본래부터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면서 이런 종속을 정당화했다. 평등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에게서 독립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얻을 기회와 평등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 사상가들은 계몽된 최상류층에 속했기 때문에 계급 불평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퍼거슨의 책에 담긴 명제에 비춰 보면 둘째, 셋째 궤적이 더 중요하다. 퍼거슨은 자신이 말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간의 차이점을 규정한다.11) 그가 보기에 이 두 개의 궤적 또는 초점 간의 차이는 이론적인 세부 사항의 문제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에서 정치적 중점 사항의 차이가 왜,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설명의 문제다. 이것이 어떤 문제인지 살펴보자.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기 위해 퍼거슨은 여성의 상황을 다룬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을 재검토한다. 그는 1825<인류의 절반, 여성의 호소>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한 윌리엄 톰슨과 안나 윌러의 공헌을 강조한다.12) 퍼거슨에게 이들은 최초로 현대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생산적노동을 분석할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렌즈를 이용해집안에서의 여성 노동을 분석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성 억압을 재생산노동과 생산적 노동의 역학관계에 연결함으로써 페미니즘적인 노동이론의 역사에 전환점을 찍었다.” 혁신의 파급력이 크지는 않았다는 점을 퍼거슨도 알고 있지만, 그는 이것을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자본의 운동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다룬다. 가부장적 권력관계는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데, 이는 그에 맞선 투쟁이 단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 덧붙여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에 따라 페미니즘은 지금까지의 계급투쟁과 동시에 수행되거나 아니면 그것에 포괄되는 (나중에 회자된 공산당의 어법을 따르자면) ‘별도의 투쟁이 된다.

 

이와 같은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은 퍼거슨이 (여성들의 투쟁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며, 따라서 혁명 이후로 미뤄야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멀리 가버린)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들의 어리석은 입장과, 억압에 맞선 투쟁과 착취에 맞선 투쟁을 결합하려 한 혁명적 전통을 구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퍼거슨이 작성하고 있는 계보는 그런 게 아니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은 플로라 트리스탄에서 출발해 이후 여성 문제에 대한 베벨과 엥겔스의 이중체계론적 접근과 결합하면서 이와 같은 보수적인 입장으로 귀결됐다. 퍼거슨의 관점에서는, 방금 언급한 인물들이 나중에 계급 환원론이라고 규정된 이해방식으로 가는 길을 닦았으며, 노동자 운동 내에서 억압에 맞선 투쟁을 무시하는 풍토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몇 가지 이유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그는 베벨과 엥겔스를 똑같이 취급한다. 하지만 이는 엥겔스가 여성 억압이 자연적이거나 정신적인 요소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기원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부분적으로 베벨의 글에 맞대응하는 방식으로 가족에 관한 고전적인 글을 썼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13)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기원을 다루는 데에서 퍼거슨의 참조 문헌은 플로라 트리스탄에서 출발해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은 채 엥겔스와 베벨로 건너뛴다. 마르크스는 어느 계보에 포함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개가 이렇게 다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퍼거슨은 자본주의에서 생산적 노동과 무급 재생산노동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이론화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엥겔스 이래로, 여성 억압에 대해서는 평등 페미니즘의 입장에 더 가까운 설명 방식이 널리 퍼져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계급적 비판을 수반한 것일지라도 말이다(이 점 때문에 그는 이 경향을 비판적 평등 페미니즘으로 분류한다).

 

퍼거슨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가사노동을 단지 성별 노동 분업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분석하며, 고립된 개별 가정에서 고단하고 무거운 가사노동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여성의 문제로만 여성 억압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에서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노동의 관계를 제대로 이론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과 육아를 필수노동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에 필수적이지 자본의 운동에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퍼거슨의 주장은 핵심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노동이라는 두 요소를 별개로 분석하면서 그것의 체계적 연관성을 놓치고, 그 결과 계급투쟁을 앞세우면서 여성의 투쟁을 뒤로 미루는 정치적 입장에 길을 터준다는 것이다.

 

퍼거슨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클라라 체트킨의 작업에서만 약간의 예외를 언급하는데, 그들은 이런 경향을 거부하고 당원들의 성차별과 안티페미니즘에 맞서 싸움으로서 오류를 피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콜론타이와 체트킨이 여성해방은 자본주의의 타도를 조건으로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투쟁의 한 부분으로 여성 쟁점을 명확하게 다뤄야 하며 나중으로 미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비중 있게 내세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점을 지적한 뒤에 그는 체트킨과 콜론타이의 이론적인 틀은 그들이 설정한 과제에 충분히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인다. 즉 퍼거슨의 관점에서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은 가사노동을 이론적으로 잘못 이해한 탓에 출발점부터 결함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후의 이중체계론흐름과 계급 환원론이 등장하고 결국에는 노동자계급 여성의 투쟁에 완전히 보수적인 스탈린주의 입장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몇 가지 이유에서 그의 명제는 잘못됐다. 첫째, 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서 펼쳐진 정치적, 이론적, 전략적 투쟁의 총체적인 역사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추상적으로 떼어낸다.14) 이 일련의 투쟁은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스탈린주의의 등장, 그리고 스탈린 반혁명 집단에 맞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투쟁에 걸쳐 이어졌다. 퍼거슨은 이 두 개의 역사적 흐름을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는 듯하다.

 

평론가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각각 혁명 정치와 개량주의 정치에 복무한다는 점을 근거로 이들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잣대는 너무 뭉툭하다. 이것으로는 두 전통이 공유하는 가설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에 남아 있는 이론적 모호함을 포착할 수 없다.

 

퍼거슨은 (부르주아) 평등 페미니즘과 비판적 평등 페미니즘 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이에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있는 소위 이론적 동의 지점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그것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 간의 이론적, 전략적 차이는 내버려 둔 채 말이다. 결국 퍼거슨의 접근법이야말로 너무 뭉툭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여성 억압 문제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 스탈린주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잠시 계급 환원론이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퍼거슨은 계급 환원론의 책임을 거리낌 없이 엥겔스 이후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 전체로 돌린다. ‘계급 환원론이란 무엇인가?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공산당 역사에서 가져온 몇 개의 사례로 이를 설명한다. 미국 공산당 지도부는 현장 내에서든 노동자 운동 조직 내에서든 성차별에 맞선 여성의 요구를 막연한 미래의 문제로 돌리려 했다. 그런데 계급 환원론이라는 용어에는 난점이 있다. 마치 젠더요구를 계급요구에 대립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젠더냐 계급이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의 경제주의, 부문주의, 조합주의 관점이다. 계급적 관점에서라면, 노동자 운동 내의 분열과 모든 성차별, 인종차별, 그 밖의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 억압에 관한 공산당의 경제주의적 입장이 널리 퍼진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퍼거슨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이론에서 발생한 근원적인 오류인가? 아니면 다른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문제인가? 우리는 이런 입장의 물질적 기반을 20세기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전개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옹호한 경제주의적 환원론은 강력한 노동 관료제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노동 관료제는 여성, 가장 불안정한 처지의 청년, 이주민,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 등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부위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키려 한다. 퍼거슨은 이러한 사회주의 운동의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가 지닌 전체적인 양상을 생략해버린다.

 

러시아혁명과 가사노동의 사회화

 

퍼거슨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통에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페미니스트에게든 계급투쟁에서든 목표 또는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엥겔스는 생산수단이 사회화되면 개별 가족은 사회의 경제적 단위이기를 멈춘다. 사적인 가사 업무는 사회적 산업으로 전환된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아동 돌봄과 교육은 공적인 업무가 된다.”15) 비록 이 지점을 이론적으로 더 진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이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묶여있는 사회적 노동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했다. 더욱이 그는 공산주의 사회의 목표 중 하나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꼽는다. 그리고 이런 전망을 물질적인 힘으로 만들어낸 러시아혁명만큼 이 이론을 실천적으로 잘 검증한 사례가 있는가? 놀랍게도 퍼거슨은 이 혁명적 경험에 대해서도, 여성해방을 위한 볼셰비키의 강령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19198, 볼셰비키 당의 여성 투사들이 제노텔[여성부]을 설립했다. 제노텔은 여성 노동자, 농민, 주부로 구성됐고, 내전의 고난을 겪는 동안 여성들 사이에서 특별 활동을 수행하고자 했다. 192011, 임신 중지가 합법화됐고, 동성애가 비범죄화됐으며, 혼외 자녀의 평등한 권리도 인정됐다. 이 기간은 치열한 논쟁과 실험으로 가득 찼고, 여성해방, 성 해방, 개인적인 관계의 변화 등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의 필수 요소로 여겨진 시절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급 재생산노동과 총체적인 생산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탈바꿈시켜야 했다.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국립 어린이집, 유치원, 공동 식당, 빨래방 등 가사노동을 사회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가 제안됐다. 그 목표는 각 가정에서 가사노동을 최대한 줄이면서, 이런 업무가 사회적 생산의 새로운 부문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미국 역사학자 웬디 골드먼이 설명하듯이, “가사노동은 공적 영역으로 넘어갈 것이다. 무수히 많은 개별 여성이 각자의 가정에서 무급으로 수행한 업무를 공동 식당, 빨래방,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유급 노동자들이 넘겨받을 것이다.”16) 이와 관련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집안일이 제거될 것이고, 소비는 가족 내의 개인적인 활동이기를 멈출 것이다. 사적인 주방은 공적인 대형 식당으로 대체될 것이다. 광업, 금속 가공업,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바느질, 청소, 세탁이 경제활동으로 재편될 것이다.”17) 이네사 아르망 역시 가내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1918년 열린 여성노동자농민대회에서 그는 여성 노동자가 공장과 집에서 이중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현실을 규탄했다. 레닌 또한 “‘실질적인 여성해방을 이루려면 법적 평등만이 아니라 가사노동을 사회화된 노동으로 대대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여러 번 지적했다.18) 같은 의미에서 트로츠키는 세탁은 공공 빨래방에서, 음식 섭취는 공공 식당에서, 바느질은 공공 작업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모든 외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날 것이다.”19)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과 착취에 맞선 투쟁을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단일한 투쟁으로 결합하려 했다. 이는 그 중심 요소로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포함했다. 그 뒤 스탈린 정권 시기에 이뤄진 (여성의 권리에서 중대한 역행이 포함된) 반혁명적 퇴행을 마치 애초부터 마르크스주의에 내포된 문제인 것처럼 과거로까지 확대 적용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관한 자신의 서술을 구성하면서,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 내의 자율주의 진영이 마르크스주의에 가한 공격에는 대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런 공격을 정당화시켜준다.

 

가사노동과 사회적 재생산

 

사회적 재생산의 궤적에 초점을 맞추면서, 퍼거슨은 1960년대 말 페미니즘 운동의 두 번째 물결과 가사노동에 관한 논쟁으로 돌아간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래디컬 페미니즘,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 등을 포함한 다양한 경향이 이 쟁점을 토론했다. 그는 또한 1969년에 마거릿 벤스턴이 제출한 입장을 강조했는데, 이후에 다른 논자들이 그 입장을 이어갔다.20) 

 

자신의 책 2부에서 퍼거슨은 가치 창출과 삶의 재생산 간의 모순을 강조하는이들 논의의 흐름을 추적한다. 그런데 그의 결론은, 1970년대의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이 더 넓은 시각으로 사회적 재생산을 살펴보는 대신, 여성의 가정 내 무급 노동에 지나치게 집중했다는 점에서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1983년 출판된 리즈 보걸의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단일 이론을 향하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말한다. 리즈 보걸은 무급 노동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노동력 재생산이 자본의 축적과 맺는 필수적이지만 모순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작업의 윤곽이 폭넓게 그려졌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돌보는 것처럼 전형적으로 여성이 여러 세대에 걸쳐 매일 해온 일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자신과 타인들이 인간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들이 하는 노동, 기초적인 생활상의 업무를 해내기 위한 개인적, 집단적인 생존전략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회적 재생산노동의 목표가 삶을 지속시키는 것인 한, 동시에 그것은 자본을 지속시키는 데 충분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확실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로부터 질문이 제기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의미가 무급 가사노동으로 제한되는 걸 피하려고 하면서, 이제는 그 의미가 너무 확장되는 건 아닌가? 그 경계선이 다소 모호해진 게 아닌가?

 

예컨대 친지아 아루자는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 매장 노동자의 일을 사회적 재생산노동에 포함한다.21)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가정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플랫폼 노동자, 술집과 식당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도 여기에 포함해야 한다. 게다가 가족을 위해 식료품을 구매하는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슈퍼마켓 계산원을 포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면 그 식료품을 운송하는 노동자는? 우리는 이렇게 생활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일련의 직무를 계속 포함해 나갈 수 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확인했듯이 세상에 그런 직무는 아주 많다. 그런데 이렇게 그 의미가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면, 도리어 설명력을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또한 이는 폭넓은 사회적 재생산 범주에 속한 다양한 유형의 노동에 내재한 질적 차이를 다소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맨 끝에 언급한 문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자율주의 진영과 마르크스주의 진영이 가치문제를 둘러싸고 전개한 논쟁과 연관된다. 이어서 그 문제를 다루겠다.

 

자본주의, 가치, 가사노동

 

가사노동이 만들어내는 것은 사용가치인가 교환가치인가? 1970년대에 시작한 이 논쟁이 오늘날 다시 논의되고 있다.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이 마르크스 경향과 자율주의 경향이라는 두 개의 사상적 조류로 이뤄져 있으며, 이들은 어떻게 저항을 조직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전략을 채택할 것인지에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이 차이가 사회적 재생산노동이 가치 창출에 어떻게 연관되는지 이론화하는 데에서 불일치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자율주의 경향과 논쟁하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한다.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을 벌인 자율주의 이론가들은 가사노동이 노동자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며(이들은 노동자와 그들의 노동력을 구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치를 생산한다는 입장이다.22)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생산적인 노동이며, 자본가들은 주부들을 직접적으로 착취한다.23) 그들은 이것을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사회적 공장의 한 부분이라고 부른다.24) 따라서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것은, 그 노동이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한, 공장에서 벌어지는 파업 또는 그 이상으로 가치 창출을 막을 것이다. 그들이 이런 규정에서 끌어내는 전략은, 은폐된 착취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주부에게 임금을 지급하라는 요구와 동시에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것, 즉 가사파업이다.

 

퍼거슨은 이 주장을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마르크스 경향의 분석과 대조한다. 리즈 보걸과 마르크스의 입장을 따라, 이 경향은 가사노동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노동의 산물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용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가사노동은 생산적인 것도, 비생산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범주는 유급 노동에 적용되는 것이고, 자본주의적인 잉여가치 생산에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은 남녀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것들을 생산한다. 그것이 시장에서 비교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가치를 측정하는 데 쓰이는 추상적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가사노동은 사적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유용한 노동이다. 이것은 곧 가사노동의 지속시간, 반복 주기, 구체적인 할 일 등을 자본가들이 직접 통제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구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노동력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노동자와 달리] 노동력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를 때,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자율성을 유지하며, 자본의 통제에 종속돼 있지는 않다. 파울라 바렐라는 다음과 같이 옳게 설명한다.

 

가정이 정말 문자 그대로 노동력을 생산하는 공장이라면, 여기에서도 상품 생산의 논리가 똑같이 지배할 것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시장에서 쓸만하게 팔릴 수 있도록, 즉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노동력이란 상품에 관해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게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도 이 상품의 생산은 멈추지 않는다. 실업률이 높을 때에도 아이들은 계속 먹이고, 씻기고, 가르치고, 옷을 입혀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노동은 더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조건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에서는 과잉 공급 때문에 해고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25)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노동이 무급 가사노동으로 제한되지 않으며, 다양한 영역의 임금노동을 포함한다는 점을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관점에서 이미 지적했다. 사회적 재생산에 속하면서도 이렇게 그 유형이 구별되는 노동은 자본주의적 잉여가치 생산과도 아주 다른 관계를 맺으며, 따라서 자본가들의 통제에 대한 상대적 자율성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발생한다.

 

한쪽 끝에는 무급 가사노동이 있다. 그것은 유용한 노동이지만, 자본주의 관점에서 볼 때 생산적인지 비생산적인지 따질 수 없는 노동이며,26) 대체로 자본가들의 통제로부터 상당 정도의 자율성을 지닌다. 다른 쪽 끝에는 사회적 재생산에 속하면서 임금노동으로 이뤄지는 일자리가 있다. 개별 가정에서 이뤄지는 유급 가사노동은 가치 창출이라는 관점에서는 비생산적이며, 상당 정도로 (극악한 수준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고용주의 통제가 따른다. 가정에 입주해 일하는 노동자라면, 심지어 자기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휴식 시간에까지 통제가 가해진다. 그들이 일하는 집에서 그대로 생활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시간은 퇴근 후 집으로 가는 노동자에 비해 더 많이 규제되고, 제한되고, 강제가 따른다.

 

공적 영역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의 상황은 다르다. 그들의 업무에서 자율성의 여지는 사적 영역에서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의 경우보다 더 클 수 있다. 비교해 보자면, 공공병원보다 민간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나 미화원의 경우 업무, 스케줄, 생산성 등에 대한 통제가 더 강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문제와 부딪힌다. 두 집단의 구체적인 노동이 아주 유사하다고 할 때, 민간병원 노동자들의 업무는 자본가에게 생산적인 반면, 공공병원 노동자들의 업무는 비생산적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점점 더 많은 공공병원이 민간업체에 업무를 외주화하고 있으며, 그 결과 노동자들이 더욱더 불안정한 처지와 과중한 업무로 내몰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층 더 복잡해진다. 패스트푸드 식당 노동자의 경우는 또 어떨까? 두말할 나위 없이 이곳 노동자들의 노동 형태, 작업 속도, 강도 등에 대한 통제 수준은 공장 같은 전형적인생산적 부문에 비견할 만하거나 더 심하기까지 하다.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에조차 생산적, 비생산적 노동을 구별하는 것은 자의적인 게 아니라 이 업무가 자본과 맺는 관계를 가리키고, 따라서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데 어떤 역할을 맡는지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무급 노동, 개별 가정에서의 유급 노동, 공공이나 민간 영역의 사회화된 유급 노동 등 사회적 재생산 영역으로 간주되는 부문에서 나타나는, 비생산적일 수도 있고 생산적일 수도 있는 직무의 다양성을 보면 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생산 영역과 무 자르듯 구별되는 사회적 재생산이란 영역이 존재한다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분석하는가에 따라 그 경계선이 유동적이며 규정하기 어려운 것인가?

 

이론에서 정치로: 페미니즘 전략

 

퍼거슨은 자율주의 경향과 마르크스 경향이 자본에 저항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에서 사회적 재생산 파업이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에는 동의가 이뤄졌으며, 서로 다른 점은 사회적 재생산 파업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토대로 그는 실비아 페데리치가 옹호하는 전략을 반박한다. 페데리치는 자본의 논리 바깥에자율적인 공간, ‘혁명적 공유재의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협동조합, 공동 식당, 그 밖의 여러 유형의 연합체가 포함될 텐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관계 외부에서 사람들의 질서를 형성하며 자본을 넘어선 사회를 미리 보여줄 수있다는 것이다. 가사노동을 그만두고그런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때로는 여성을 위한 기본소득요구를 동반하는 것이 사회적 재생산 파업이라고 한다.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 내의 마르크스 경향 역시 사회적 재생산 파업을 중요하게 여길지라도, 문제는 자율적인공간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에 보건의료, 교육 등의 개선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부문에서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지역 차원의 시위가 필요하다. 그는 파업이 자본의 영토 안에서 자본에 대항하고, 연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도구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생산적 노동은 재생산노동과 같은 방식으로 자본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적 부문의 파업도 중요하다고 그는 덧붙인다. “오직 사회적 재생산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저항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지배계급을 충분히 위협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퍼거슨은 현장 파업을 향한 길을 찾아내 억압에 저항하는 정치를 세워내고, 억압에 저항하는 파업으로 현장에 기반한 요구를 세워내면서여러 전선에서 투쟁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연대를 건설하는 것이 파업의 수단이자 목표라고 결론 내린다. 퍼거슨이 보기에 협동조합, 공유재, 또는 페미니즘적 기본소득으로 자본에 의한 삶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삶을 위해 더 많은 재원을 요구하고 자본을 위해서는 더 적게 내주면서, 체제 그 자체 안에서 자본에 의한 삶의 지배에 반격하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파괴될 때까지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탈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퍼거슨은 이렇게 말한다. “혁명전략은 대중 운동을 건설해 지역과 거리에서의 투쟁을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연결하며 자본에 저항하는 복합적인 방식의 수립을 동반한다. 그런 운동은 다양하면서도, 이윤보다 필요를 우선시하며 자본을 위한 노동을 몰아내고 삶을 위한 노동을 수행하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목적으로 단결해 있다.”

 

전략을 둘러싼 이 논쟁에서 퍼거슨은, 이 체제의 변방에서 자본의 논리 바깥에공간을 만들어내자는 자율주의적 제안을 논박한다는 점에서 옳다. 협동조합들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계속 상품을 사들여야 하고, 자본주의 기업에 전기료를 내야 하는 등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쟁을 강요받거나, 그게 아니라면 단명하는 소규모 기획으로 끝날 것이다. 자본주의적 재난의 한복판에서 작은 유토피아적 오아시스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퍼거슨이 제안하고 ‘99%의 페미니즘과 동일시된 전략은 체제 그 자체 안에서 자본에 의한 삶의 지배에 반격하기 위해 자본에 맞선 대중의 저항운동을 창출한다는 구상에 집중한다. 그것은 동시에 연대 관계를 창출하는 데에도 힘을 쏟는다.

 

물론 ‘99%의 페미니즘이 호소하는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힘을 산산조각 내는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견고한 동맹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본에 도전할 수 있는 사회세력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제기된 방식으로는 전적으로 불충분하다. 연대와 저항의 운동을 강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깨부수기 위한 전략으로는 부족하다. 이 저항에서 공세로 넘어가는 시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세워져 있는가? 더 나은 공공의료와 교육을 위한 요구에 덧붙여 자본가들의 이윤을 문제 삼기 위해 우리는 어떤 강령을 옹호해야 하는가? 노동자 대중의 가장 긴급한 요구와 필요를 어떻게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과 연결할 것인가? 혁명전략에 관해 얘기해보자면, ‘연대 관계의 창출은 전략의 기초적인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 억압적 물리력을 쳐부술 수 있는 물질적인 세력을 창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략에 관한 논쟁이 관건이었다. 총파업,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지위, 자기조직화를 위한 기구의 필요성, 노동자계급과 동맹 세력의 관계, 공동전선, 승리를 향한 강령을 갖춘 혁명 정당 건설 등의 문제가 여기에 포함된다.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다른 피억압 민중과 동맹을 구축하고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헤게모니문제 역시 이 핵심 논쟁에 속한다.27) 2, 3인터내셔널에서는 이것이 핵심 쟁점이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농민 문제, 피억압 민족의 권리, 다양한 부문들의 민주적 요구, 여성 억압이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억압에 대해 말하자면, 여성 노동자와 인종차별을 겪는 노동자의 구체적인 요구와 나란히 민주적 요구를 (노동자계급만의 요구가 아닌 것으로서)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28) 

 

마무리를 위해 우리는 두 개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다. 첫째, 아래로부터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운동과 사회 운동에서 연대를 방해하는 관료집단의 조합주의 정치에 대항해야 한다. 사회 운동이 노조 관료들의 조합주의를 문제 삼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 운동 내에도 똑같이 조합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이며, 때로는 자본주의 국가에 포섭된 관료집단이 있다. 최근의 사례로 페미니즘 운동을 들 수 있는데, 여러 나라에서 페미니스트들이 거리 시위와 대중적인 여성 파업에 등을 돌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내각과 정부 기관에 들어갔다.

 

둘째,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운동과 페미니즘 운동 같은 최근의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은 우익에 맞서 차악을 지지하자는 생각 때문에 활력을 잃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스페인에서 사회노동당(PSOE)과 포데모스의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대거 옮겨갔다. 다시 말해서, [퍼거슨이 제시한] ‘연대전략은 계급 독립성을 앞세우며 동시에 관료제에 반대하는 정치가 없다면 제구실을 할 수 없다.

 

결론을 대신해

 

리즈 보걸에 이어서 사회적 재생산 문제에 집중한 이론가들의 많은 저작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과 착취의 체계적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아주 소중하다. 논의를 더 진전시켜야 할 요소들이 이 영역에 많이 남아 있다. 보걸의 작업이 중요하다. 그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필수 요소로서 가사노동을 자리매김하면서, 마르크스가 전개하지 못한 구체적인 분석 지점을 풀어가기 위해 <자본론>의 범주들을 활용했다.

 

현재 사회적 재생산 이론가들은 교사, 간호사, 노인 요양보호사 등 다양한 부문이 연대의 고리를 만들거나,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문 및 가난한 민중과 가교를 놓을 수 있는 잠재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의 노동은 노동자계급의 일상생활을 재생산하는 데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며, 계급 전체와 복합적인 경로로 연결돼 있다. 미국의 교사 파업에서 이런 측면을 볼 수 있었고, 팬데믹 기간에 보건의료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대중의 지지가 그랬다. 그러나 이 잠재력이 그런 연대가 실체를 갖도록 보증하는 건 아니다. 많은 경우에 노조 관료들이 그런 연대가 실현되는 걸 거부하고, 저지한다.

 

동시에 혁명적 정치는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문에서, 심지어 블루칼라노동자들이 일하는 생산적 부분에서 이 잠재적 헤게모니를 불러낼 수 있다. 그 사례를 프랑스 토탈 그랑퓌 정유공장 노동자들의 해고에 맞선 투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곳 노동자들은 환경운동 단체들과 연대의 고리를 맺었고, 노동자와 민중의 이해관계를 지키며 친환경적 전환 방식을 옹호했다. 또 다른 사례로 아르헨티나 네우켄지역의 세라믹 타일공장 사논이 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학생, 마푸체 원주민, 실업 노동자, 그 밖의 노동자들과 동맹을 구축했다. 궁극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잠재적인 헤게모니를 현실화할 수 있는가는, 그들의 사회학적구성이나 그들의 노동이 생산적 노동인가 아니면 사회적 재생산노동인가보다는, 노동자들이 채택하는 정치에 더 달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 혁명적 정치의 지평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젠더와 계급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해 사회적 재생산 이론 분야에서 이뤄진 많은 저자들의 다양한 공헌을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이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펼쳐진 150년 이상의 논쟁과 별개이거나 심지어 능가하는 하나의 전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모든 피억압 민중과의 동맹을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인 논쟁과 연결하면서 그간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에 관한 공헌을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연대는 단지 파업과 투쟁의 수단이자 목표에 그칠 수 없다. 다른 사회 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은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적 투쟁이라는 더 높은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될 때 비로소 전략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것이 이윤보다 삶을 더 중요시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강제한 폭력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 Susan Ferguson, Women and Work: Feminism, Labour, and Social Reproduction (Pluto Press, 2019).

2) Silvia Federici, “Social Reproduction Theory: History, Issues and Present Challenges,” Radical Philosophy, no. 2.04, series 2 (Spring 2019).

3) Alessandra Mezzadri, “On the Value of Social Reproduction: Informal Labour, the Majority World and the Need for Inclusive Theories and Politics,” Radical Philosophy, no. 2.04, series 2 (Spring 2019).

4) 친지아 아루자, 티티 바타차리야, 수잔 퍼거슨 등의 주장은 다음의 책에 실려 있다. Tithi Bhattacharya, ed., Social Theory Reproduction: Remapping Class, Recentering Oppression (London: Pluto Press, 2017).

5) 이 운동은 여러 페미니스트와 함께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실비아 페데리치, 셀마 제임스가 이끌었으며, 이탈리아 자율주의가 발전시킨 개념에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다.

6) Paula Varela, “La reproducción social en disputa: un debate entre autonomistas y marxistas,” Revista ARCHIVOS de historia del movimiento obrero y la izquierda 8, no. 16 (March–August 2020): 71–92.

7)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 2013년에 헤이마켓북스에서 역사유물론 문고 시리즈로 이 책을 재출간했다.

8) “계속하기에 앞서, 여성 억압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룰 때 포함해야 할 항목들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첫째, 여성해방과 모든 인간의 실질적인 사회적 평등에 대한 확고한 지향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여성의 현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하며, 그 현 상황이 어떻게 조성됐는지 연구해야 한다. 셋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다루는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 즉 여성의 지위를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것과 더불어 ‘이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여성의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는, 과거와 현재의 사회에서 여성의 종속을 다루는 이론과 역사에서 일관되게 뻗어 나온 미래 사회 여성해방이라는 시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실천적인 강령과 전략에서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작업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이런 지점들을 다룬다.” 앞의 책.

9)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Ariane Díaz, “Economía política de la reproducción social I: trabajo y capital,” Ideas de Izquierda, July 14, 2019; Ariane Díaz, “Economía política de la reproducción social II: patriarcado y capitalismo,” Ideas de Izquierda, July 21, 2019.

10) 이 점에서 리즈 보걸은 친지아 아루자, 티티 바타차리야와 입장이 다르다. 예컨대 다음을 보라. Cinzia Arruzza, Dangerous Liaisons: The Marriages and Divorces of Marxism and Feminism (London: Merlin Press, 2013). 이 책에서 친지아 아루자는 플로라 트리스탄, 마르크스와 엥겔스,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그리고 이후 스탈린 관료체제에서 이뤄진 후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키의 해방을 향한 강령 등의 기여를 검토한다.

11) 퍼거슨은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을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한 부류로 간주하면서도, 이들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궤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12) William Thompson, and Anna Wheeler, Appeal of One Half of the Human Race, Women, against the Pretensions of the Other Half, Men, to Retain Them in Political and Thence in Civil and Domestic Slavery.

13) Josefina L. Martínez, “Engels, Working Women, and Socialist Feminism,” Left Voice, November 28, 2020.

14) 게다가 노동자계급 내의 성차별에 문제 제기했을 뿐 아니라 계급과 젠더의 관계를 사고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트리스탄에 대한 태도는 다소 부당하다. 비록 그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사이에서 과도적 위치에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15) Friedrich Engels, 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16) Wendy Goldman, The State and Revolu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3.

17) 같은 책.

18) 같은 책.

19) Leon Trotsky, “From the Old Family to the New,” 1923.

20) 마거릿 벤스턴은 가사노동이 교환가치가 아니라 가정에서 직접 소비하는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 생산적인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자본주의에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전자본주의적(pre-capitalist) 노동이다.

21) Cinzia Arruzza and Tithi Bhattacharya, “Teoría de la Reproducción Social: Elementos fundamentales para un feminismo marxista,” Revista Archivos de historia del movimiento obrero y la izquierda 7, no. 16 (March–August 2020): 48.

22) Andrea D’Atri and Celeste Murillo, “Producing and Reproducing: Capitalism’s Dual Oppression of Women,” Left Voice, no. 4 (February 2019).

23) 마르크스의 용어에서 노동이 생산적이라거나 비생산적이라는 정의는 마치 어느 한쪽이 더 ‘값진’ 것이라거나 더 ‘중요한’ 것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 정의는 노동이 시장에 팔리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가, 따라서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를 다루는 것과 연관된다.

24)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은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을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operaismo: 노동자주의)와 마리오 트론티의 저작들에서 빌려왔다.

25) Paula Varela, “La reproducción social en disputa”.

26)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이 구분은 다른 형태의 임금노동을 가리킨다.

27) Matías Maiello and Emilio Albamonte, “Trotsky, Gramsci, and the Emergence of the Working Class as Hegemonic Subject,” Left Voice, March 13, 2021.

28) 혁명전략에 관한 논쟁을 더 깊게 보려면 다음을 참조. Emilio Albamonte and Matías Maiello, Estrategia socialista y arte militar (Buenos Aires: Ediciones IPS, 2019). 곧 영어판이 출간될 예정이다.

 

 

글쓴이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2021520

옮긴이  오연홍

꺾쇠괄호[   ] 안의 문구는 옮긴이가 추가한 것이다.

기사 원문

https://www.leftvoice.org/social-reproduction-feminism-or-socialist-feminism/#easy-footnote-bottom-1-24917

연재 소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남성 혐오나 갈라치기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전히 주류인 것도 맞다하지만 페미니즘에는 다른 길이 있다착취가난전쟁기후 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라는 체제 안에서 남성과 더 잘 경쟁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이를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성별국적인종의 노동자와 청년이 똘똘 뭉쳐 함께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페미니즘이 있다. 2003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볼리비아브라질칠레코스타리카스페인미국프랑스이탈리아멕시코페루우루과이베네수엘라에서도 활동하는 국제 빵과 장미’ 네트워크가 그것이다한국에서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변혁적 여성운동을 건설하려는 우리는 혁명적 페미니즘의 중요한 사례로 빵과 장미를 주목하면서이들의 주장과 실천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타티아나 코차렐리)

② 왜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③ 여성 자본가에 맞서는 여성 노동자들(타티아나 코차렐리)

④ 우리는 임신 중지권을 이렇게 쟁취했다(너새니엘 플라킨)

⑤ 혁명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안드레아 다트리)

⑥ 사회적 재생산과 사회주의 페미니즘(호세피나 마르티네스)

⑦ 페데리치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토론(호세피나 마르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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