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 3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라인신문

[연재]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 3부

[3부] 앞선 네 번의 시대

  • 양준석
  • 등록 2023.01.10 12:48
  • 조회수 379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 인플레이션은 마침내 세계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게 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다시 한번 전 세계가 위기와 전쟁으로 뒤덮이는 시대, 그래서 혁명으로 뒤덮여야 할 시대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세계 자본주의 역사 속에는 어떤 시대들이 있었는가? 자본주의 아래서 그와 같이 시대들이 구분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지난 40여 년 세계 자본주의를 지배한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 시대는 어떻게 등장했고 어떤 내재적 모순이 작동한 결과 막을 내리고 있는가? 세계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위치와 함의는 무엇인가? ‘다시 위기·전쟁·혁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제목 아래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될 이번 연재는 그런 질문들에 답해 보기 위한 하나의 시도다.


[1부]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 인플레이션이 열어젖힌 새로운 시대

[2부]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시대들이 구분되게 하는 요인

[3부] 앞선 네 번의 시대

[4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 (1980~최근)

[5부]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3부] 앞선 네 번의 시대


‘신자유주의·세계화·금융화의 시대’는 어떻게 등장했고 어떤 내재적 모순이 작동한 결과 막을 내리고 있는가? 지금 새롭게 열리고 있는 시대는 전체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와 함의를 갖고 있는가? 이를 해명하는 작업은 그보다 앞선 시대들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오늘날의 시대들을 해명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앞선 네 번의 시대가 가진 특징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1) 자유경쟁과 부르주아혁명의 시대 (1776~1871)


식민지 약탈과 노예노동에 기초한 상업 자본주의 그리고 공장제 수공업의 시대를 거쳐, 1700년대 후반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한 산업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1776년은,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출발한 시점으로서 여러 면에서 상징성을 갖는다. 무엇보다 그 해에 영국의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이 일반화됐다. 미국의 독립혁명이 시작된 해이자,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10여 년 앞둔 해였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발간된 해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거의 100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일부와 동부해안 중심의 북미대륙 일부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한 산업 자본주의가 발전돼 나갔다. 축적된 자본들은 아직 중소규모를 벗어나지 못했고, 산업마다 자본 간의 경쟁이 자유로이 펼쳐졌다. 국가는 경제에 개입하지 않은 채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만을 담당했다.


1825년 최초의 공황이 나타난 뒤, 대략 10년 주기의 전면적 공황이 펼쳐졌다. 공황은 매우 파괴적이었지만, 한계기업을 파산시키고 임금을 하락시키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자본의 이윤율을 급격히 회복시켰다. 공황의 주기적 격렬성은 역설적으로 성장기 자본주의가 가진 활력의 표현이었다.


1500년대 초반 대항해시대가 열릴 때부터 1800년대 중반 1차 산업혁명이 정점에 이를 때까지, 유럽은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를 구축하고 약탈과 노예노동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수탈했다. 그 사이 세계의 패권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넘어갔다.


210812-battle-tenochtitlan-jm-1444-452ca4.jpg

 

 

 

사진: 코르테스의 테노치틀란 점령, 1521.

 

가장 먼저 패권을 쥐었던 스페인은 오늘날의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을 식민지로 구축하고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약탈했다. 한때 전 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80% 가량을 소유할 정도였다. 스페인이 라틴 아메리카를 약탈하는 동안 선주민 90%가 전쟁, 광산노동, 전염병 등으로 학살당했다. 스페인은 넘쳐나는 금·은을 믿고 대규모 전쟁을 거듭했다. 필요한 재화는 수입으로 해결하면서 자체 산업화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금·은 약탈에 의존하던 스페인 경제는 시간이 흘러 금·은 유입량이 줄어들자 급격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스페인은 유럽의 후진국으로 밀려났다.


영국이 패권국가로 올라선 배경에는 면직물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이 있었다. 영국은 식민지 경영도 원료공급과 상품판매 기지로 식민지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물론 영국 또한 식민지에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지만, 중심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한 식민지 활용에 있었다. 영국은 착취를 중심으로 수탈을 결합시킴으로써,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하며 초창기 자본주의를 지배했다. 1800년대 초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라틴 아메리카 대륙 전반이 독립한 대신,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세계적인 식민지배의 주도권은 확연히 영국으로 넘어갔다.


산업혁명은, 상업 자본주의 시대에 식민지와 노예노동에 대한 약탈을 중심으로 형성된 광범한 상품시장을, 기계제 대공업에 입각한 사회적 생산을 중심으로 재편해 냈다. 마침내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 본격적으로 형성돼 나갔다. 경제를 주도하게 된 자본가계급은 국가를 자본가계급의 도구로 재편해 내기 위해 부르주아혁명에 나섰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의 정점이었다. 노동자계급은 자유·평등·형제애라는 이상에 이끌려 부르주아혁명에 적극 동참했다. 그런데 혁명을 주도한 자본가계급의 실제 목표는 봉건 지배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탈취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진정으로 자유·평등·형제애를 갈망한 노동자계급은 점점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고, 그에 두려움을 느낀 자본가계급은 점점 후퇴했다. 마침내 1848년 혁명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 맞서기 위해 봉건 지배계급과 함께 반혁명의 편에 섰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부르주아혁명을 대신해서 자본주의 산업화와 자본가국가 수립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모델이 나타났다. 봉건 지배계급에 기초한 국가 관료집단이 급격한 자본주의 산업화를 주도하면서 스스로 자본가계급으로 변신해 나가는 모델이다. 프로이센에서 대지주를 기반으로 한 국가 관료집단은 1850년대 이후 자본주의 산업화와 1871년 독일 통일을 주도하면서 이러한 경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1868년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봉건 무사계급 출신의 국가 관료집단 또한 이러한 독일식 자본주의 산업화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부르주아혁명의 성과로부터 소외당한 노동자계급은, 처음에는 부르주아혁명의 이상을 현실화하는 데서 답을 찾고자 했다. 그 실천적 결론은 보통선거권이었다. 1830년대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은 세계 최초의 노동자계급 정치투쟁이었다. 그런데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에서 마침내 보통선거권이 실현됐을 때, 그 실체를 놓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노동자·민중의 지배를 당연히 보장하리라 믿었던 보통선거권은, 실제로는 가장 보수적인 왕당파의 승리를 낳았고, 그렇게 등장한 정부는 노동자봉기를 유발하고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러한 패배 위에서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사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정립되었고, 노동자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대안적 전망이 수립됐다. 다양한 조류가 경쟁했던 1864~76년 제1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주의의 타당성을 국제적인 차원에서 실천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모든 자본가세력으로부터 독립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원칙을 정립했으며,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모든 노동자들의 해방을 향해 전진하게 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했다.


1871년 파리코뮌은 노동자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근본적인 사회경제 변혁에 나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파리코뮌은 노동자국가가 실현해야 할 노동자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전면적인 자기조직화를 실현해 낸 노동자대중은 통제받지 않는 관료기구들을 철폐하고 대신 집행기관들을 총괄함으로써 직접 모든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대표자들에게 평균임금을 지급하는 등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관료화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 모든 대표자들을 직접 선출할 뿐 아니라 언제든 소환될 수 있게 함으로써 대표자들이 언제나 대중의 의지를 표현하게 해야 한다!)


이 시대는 자본주의의 여명기였지만, 이미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노동자혁명과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참혹한 현실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착취와 억압의 사슬을 끊어낼 길을 갈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해방됨으로써 전체 인류를 해방하고자 했던 수많은 노동자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Illustration-of-the-Paris-Commune-from-Cassells-History-of-England.jpg

사진: monthly review


2) 독점과 제국주의 전면화의 시대 (1871~1914)


18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집적과 집중의 결과로 등장한 독점자본이 특정 산업을 지배하게 되고, 나아가 이러한 독점자본이 은행자본과 융합돼 금융독점체를 형성하면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독점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독점자본의 등장은 석유·철강·전기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2차 산업혁명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으며, 후발주자인 독일과 미국이 영국을 급격히 따라잡는 통로가 되었다.


독점자본주의 성립은 국가의 역할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 왔다. 거대한 독점체들은 큰 영향력을 갖고 국가기구를 직접 좌지우지했다. 국가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기 위한 정책들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 시대를 대표하는 정책은 ‘식민지로의 자본수출’이었다.


‘식민지로의 자본수출’은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는 데 획기적인 해법이었다. 국내에 투자해서는 만족할 만한 이윤을 거둘 수 없는 ‘잉여자본’을 식민지에 투자하게 되면, 훨씬 더 높은 이윤을 거둘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산업의 발전단계가 낮은 식민지에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훨씬 낮았고, 노동력의 가격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억압을 통해 다양한 수탈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따라서 기존에 주로 원료공급지와 상품판매시장으로 활용됐던 식민지는 이제 주로 자본수출 대상지로 활용돼 나갔다. 1890년에서 1913년 사이 새로 부설된 철도 가운데 유럽이 27.7%, 미국이 28.3%를 차지한 반면, 식민지·반식민지 나라들이 절반 가까운 44.0%를 차지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전보다 훨씬 맹렬한 속도로 식민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프랑스·독일·일본·미국·러시아 6대 강국이 확보한 식민지의 인구는 1876년 2억7,380만 명에서 1914년 5억2,340만 명으로 늘었다. 1914년 무렵에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사실상 나머지 세계 전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로 복속시켰다. (나머지 세계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은 지역은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 대륙과 중국 정도였는데,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뒷마당이나 다름없었고, 중국은 여러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주권을 절반쯤 빼앗긴 상태였다.)


이처럼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식민지를 침략하고 병합한 뒤 식민지에 대한 초과착취와 약탈을 자행하는 동안, 제국주의 열강들끼리는 상대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숱한 전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유럽 대륙에서 40여 년 동안 사실상 전쟁이 사라졌다.


하지만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에 대한 필사적 동기는 필연적으로 식민지 재분할을 둘러싼 대결을 불러일으켰다.


“금융자본은 식민지 정책의 수많은 기존의 동기에 덧붙여 원료자원, 자본수출, 세력권, 유리한 거래, 이권, 독점이윤 등을 위한, 나아가 경제영역 전반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냈다. (1876년의 경우처럼)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대륙의 10분의 1만을 식민지로 점유하고 있던 때의 식민지 정책은 ‘먼저 움켜쥔 자가 차지한다’는 식의 비독점적인 방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00년까지) 아프리카의 10분의 9가 장악되고, 전 세계가 분할되었을 때에는 불가피하게 식민지에 대한 독점적 소유의 시대, 따라서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특히 첨예화된 투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레닌, 1916, <제국주의론>, 제10장 제국주의의 역사적 위치)


이 시기 2차 산업혁명과 함께 사회적 생산력이 급격히 발전했지만, 제국주의 열강들 안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다수는 여전히 굶주림을 면하지 못했다. 한 줌 독점자본에게 사회적 부가 집중되면서 빈부격차는 과거보다 더 극심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초과이윤을 비롯한 독점적 초과이윤이 일부 노동자들에게도 스며들었다. 영국에서부터 시작됐던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화가 미국을 비롯한 나머지 제국주의 국가들로 확산됐고, 계급투쟁의 향방을 가르는 중대한 문제로 대두됐다. 숙련·남성·백인만을 위한 관료적 노동조합주의 대 미숙련·여성·흑인을 포괄하는 계급투쟁 노동조합주의 간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대다수 나라들에서 마르크스주의 노동자정당이 건설됐고, 그 결집체로서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이 건설됐다. 그 무렵 유럽의 정치상황은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다. 주기적으로 펼쳐지던 봉기와 바리케이드 전투가 사라지고 선거와 의회의 시대가 찾아왔다. 부르주아혁명이 일단락되고, 주기적으로 사회를 뒤흔들던 전면적 공황이 만성적인 장기불황으로 대체됐으며, 지배계급이 보통선거권을 허용하면서, 선거와 의회를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본격화한 것이다.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강령을 내걸고 부르주아 선거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며 노동자대중 속에서 꾸준히 조직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런데 독일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제2인터내셔널 앞에는 두 개의 함정이 있었다. 첫째, ‘자본주의 개혁’ 자체를 목표로 삼는 노골적인 개량주의였다. 베른슈타인은 ‘이제 자본주의가 공황을 극복했고 중간계급이 성장하고 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있는 만큼, 의회주의를 통한 점진적 개혁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 대다수는 ‘사회주의 건설은 혁명적 단절 없이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을 견지하면서 노골적인 개량주의를 거부했다.


둘째, 당이 선거와 의회를 중심으로 계속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적 단절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은폐된 개량주의였다. 그러나 훗날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권력을 둘러싼 계급 간의 격돌이 다시금 봉기와 혁명의 시대를 불러올 때 그 직접적인 물리적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정치투쟁 역량이 노동자 대중운동의 성장과정 속에서 구축돼 나가야 했다. 1905년 러시아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을 결합시킨 대중파업을 이끌면서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정치투쟁 능력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다수파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제2인터내셔널의 대다수 당들이 은폐된 개량주의에 철저히 함몰된 반면, 변방으로 취급되던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혁명과 반동의 시기를 가로지르고 합법과 비합법의 투쟁형태들을 결합시키며 거듭된 도전을 펼친 끝에 1912~14년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정치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수많은 정치파업을 앞장서 조직하면서 광범한 혁명적 노동자들을 창출해 냈다.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발생한 이 차이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제2인터내셔널 대다수가 무기력하게 제국주의 전쟁에 끌려들어가며 비참하게 파산한 것과 달리, 볼셰비키만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결의를 행동으로 연결시키면서 1917년의 혁명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게 했다.

 

4431.jpg

 

3) 세계전쟁과 대공황과 노동자혁명의 시대 (1914~1945)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재분할 쟁탈전은 몇 차례 국지전과 첨예한 전쟁위기를 거친 끝에 마침내 1914년 제국주의 세계전쟁을 불러일으켰다. 1918년까지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으로 1천만 명을 희생시켰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11년 만에, 누적된 경제적 모순들 위에 금융투기의 파괴적 결과가 덧붙여지면서 1929년 세계대공황이 시작됐다. 대공황은 세계 최고의 공업국이던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산업생산이 미국 46%, 독일 41%, 세계 38% 후퇴했다. 무역은 보호주의 때문에 더 극심한 결과를 맞아서 미국 70%, 독일 61%, 세계 66%가 후퇴했다. 실업률도 엄청나게 치솟아서 최대 실업률이 미국 25%, 독일 35%, 영국 22%를 기록했다.


1933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유효수요 확장 정책이 펼쳐지면서 대공황이 어느 정도 수습돼 나갔다. 대공황은 과잉생산과 과잉축적 때문에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심각하게 벌어진 상황을 뜻했는데, 정부가 재정확장을 통해 유효수요를 증대시킴으로써 간극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년 다시 급격한 침체가 더욱 가파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소비가 활성화되자 유효수요 확장분 이상으로 생산이 확장되면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더 벌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막대한 생산과잉을 해소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인위적 소비와 거대한 생산능력 파괴만이 대공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답은 군비경제고, 대규모 전쟁이었다. 특히 대공황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던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잇달아 벌이면서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성공한 것은 전쟁이 어떻게 대공황을 타개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대공황에 대응하고자 제국주의 열강들이 매달린 보호주의는 대공황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열강들 간의 긴장과 대결을 격화시키고 있었다. 대공황이 불러온 계급투쟁 고양에 대한 반동적 대응으로 등장한 파시즘이,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쟁의 불을 당겼다. 대규모 전쟁을 통해 대공황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열망은 마침내 두 번째 제국주의 세계전쟁을 전면화했다. 결국 193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적으로 5천만 명을 희생시키는 참혹한 대량학살과 대량파괴를 거치고서야 자본주의는 비로소 대공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914~45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점철됐던 이 30여 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시기이자,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그야말로 사활적 위기에 빠졌던 시기였다. 자본주의는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들조차 파괴하면서 노동자계급과 인류를 되풀이하여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일찍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역설한 대로 노동자계급 앞에는 오직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두 갈래 길만이 놓여 있었다.


이 시대에 세계전쟁과 대공황의 야만을 끝장내기 위해 세계의 수많은 노동자투사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혁명적 투쟁에 나섰다. 빛나는 승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제2인터내셔널의 대다수 지도자들이 각기 자기 나라 자본가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던 것과 달리,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전쟁을 강요하는 지배계급에 불굴의 투지로 맞선 결과 끝내 노동자혁명을 성공시켰다. 1917년 러시아 노동자혁명은 광범한 노동자대중의 혁명적 각성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결연한 행동들이 볼셰비키라는 뛰어난 혁명적 지도력과 결합한 결과였다.


혁명을 성공시킨 소비에트 노동자권력은 은행과 기업을 국유화하고 계획경제를 수립했다. 장군들이 이끌던 차르와 자본가의 군대는 병사소비에트가 이끄는 인민의 군대로 재편됐다. 농민들은 농민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재분배했다. 러시아 제국 내 소수민족들은 민족자결권에 입각해 각자의 소비에트 권력을 건설하고 자유 의지에 따라 소비에트연방 참여를 결정했다.


러시아 노동자혁명은 △여성에게 투표권과 노동권 부여 △남녀 동일임금 보장 △유급출산휴가제 도입 △임신중지 합법화 △가사노동 사회화 △자유롭고 평등한 결혼제도 도입 △동성애 합법화 등을 통해 여성과 소수자의 삶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약한 고리를 끊어낸 러시아 노동자혁명은 세계 자본주의 사슬 전체를 뒤흔들었다. 러시아 노동자혁명은 전 세계 노동자들과 식민지 대중들에게 스스로 당당하게 일어선다면 반동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고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파했다.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이어가고자 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역동적 투쟁들이 이 시대 내내 수많은 나라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18~23년 독일, 1919~20년 이탈리아, 1926년 영국, 1926~27년 중국, 1931~37년 스페인, 1934~36년 프랑스, 1934~37년 미국 등에서 펼쳐진 노동자투쟁들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대중의 혁명적 도전이 거듭해서 펼쳐졌지만 또 다른 노동자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문제였다. 파산한 제2인터내셔널에 뿌리를 둔 거대한 개량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은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자본가계급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동자대중의 혁명적 전진을 가로막았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러시아혁명의 성공을 토대로 조직된 코민테른마저 스탈린주의로 넘어가면서 수많은 좌충우돌 끝에 반혁명적 개량주의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세계혁명이 정체되면서 러시아 혁명이 일국에 고립되자 그 약점과 한계가 극대화한 러시아 노동자국가는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노동자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체계적으로 파괴해 나가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1930년대 중후반 남아 있던 볼셰비키 중핵대오를 전멸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서 권력을 찬탈하는 반혁명을 완성했다. 소련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국가를 앞세워 자본주의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스스로 착취와 억압의 주체로 기능하는 것과 함께 장차 통상적인 자본가계급으로 변신할 기회를 도모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되었다.


혁명적 노동자당들 내부에서 정치적 미숙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약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대 혁명적 노동자당들의 경험은 성공 못지않게 실패를 통해서도 미래의 혁명적 지도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활용돼야 할 중요한 교훈들을 남겼다. (파시즘에 맞서면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역량을 강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광범한 노동자들의 위력적인 대중투쟁을 발전시켜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 그를 통해 노동자대중이 개량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노동자 공동전선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자 헤게모니를 구축하여 광범한 피억압 민중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이되, 자본가 세력 일부와 연합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발을 묶는 인민전선의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의 혁명적 역동성을 극대화하여 아래로부터 피억압 대중을 견인하는 방식으로 전개해야 한다! 혁명적 노동자당은 노동자대중이 당면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절실한 투쟁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깨달아 갈 수 있도록 대중의 현 의식과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이행요구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위기 속에서 다양한 요인이 결합하여 온갖 위기를 발생시키고 있다. … 자본가계급의 경제, 국가, 정치, 국제관계는 사회 위기에 의해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다. …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은 깊은 불만에 차 있다. 수많은 대중이 다시 또 다시 혁명의 길로 나서고 있지만, 매번 자기 조직의 보수적 관료기구에 의해서 가로막히고 있다. … 전 세계 특히 스페인, 프랑스, 미국, 그리고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코민테른은 냉소를 머금으며 반혁명을 수행하였다. … 인민전선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깃발을 흔드는 척하면서 자본가계급과 화해하고 있다. 결국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거세되고 파시즘이 등장하였다. 제국주의 세력은 한편으로는 인민전선을 또 한편으로는 파시즘을 이용하여 노동자혁명을 침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은 무르익었으나 혁명의 주체적 조건인 노동자계급과 그 전위당은 조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의 구세대는 혼란과 좌절에 빠져 있으며 신세대는 경험이 부족하다.” (트로츠키, 1938, <죽음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와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결국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패배를 딛고 자본가계급이 제2차 세계대전의 대량살상과 대량파괴를 통해 자본주의에 새로운 원기를 불어넣으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사활적 위기가 해소되었다.

 

full.jpg

 

4) 전후호황과 개량주의의 시대 (1945~1980)


제2차 세계대전은 실물적 대량파괴를 통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낮추고 군수물자의 대량소비를 통해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해소함으로써 자본의 이윤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한동안 왕성하게 확대재생산 운동을 펼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하면서, 자본주의는 1940년대 후반부터 25년가량 안정된 성장을 거듭하는 이른바 전후호황의 황금기를 누렸다.


이 시대에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국가의 핵심 정책은 ‘유효수요 확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의 식민지 국가들이 대거 정치적 독립을 실현함으로써, 식민지에 대한 수탈은 (종속에 따른 수탈로 축소되면서)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핵심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대신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재정확장 정책을 중심으로 유효수요를 확장함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좁히려 했다. 유효수요 확장은 크게 (임금인상 허용과 복지제도 도입을 활용한) 노동자의 구매력 향상과 (냉전의 대립구도를 활용한) 대규모 군비경제 지속을 통해 이루어졌다. 케인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 ‘유효수요 확장’ 정책은 대공황을 극복했다는 허명과 함께 전후호황을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심각한 경제위기가 닥쳤다. 무엇보다 전후호황 동안 이루어진 자본의 왕성한 확대재생산 자체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에 따른 ‘이윤율 저하 경향’이 다시 본격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효수요 확장’ 정책 자체의 모순이 빚어낸 결과가 (심각한 불황과 물가상승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형태로 덧붙여졌다.


‘유효수요 확장’ 정책은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이는 데 목표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산과잉이 오히려 매우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유효수요 확장을 통해 소비를 늘릴 때마다 자본가들은 생산을 더욱 높이 끌어올렸다. 결국 생산과 소비의 간극은 정부 재정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정도까지 벌어졌다. 자본가계급의 소유권을 신성시하는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의 무제한적인 확장 욕구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생산과잉의 심화는 극심한 불황으로 연결됐다.


여기에 재정확장 재원을 충당하는 방법의 문제가 있었다. 유효수요 확장 정책의 초기에 국가는 자본가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재정확장 재원을 조달했다. 이때는 인플레이션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화폐발행량 확대가 주요 재원 조달방안으로 대체됐다. 특히 미국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양의 달러를 발행했다. 이것은 세계 기축통화이던 달러의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고, 그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시행한 금태환 폐지는 달러의 가치하락을 전 세계 화폐의 가치하락으로 확산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오일쇼크까지 겹치자 높은 인플레이션이 세계를 뒤덮었다.


그렇게 해서 1970년대에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이 세계를 휩쓸었지만, ‘유효수요 확장’ 정책은 어떤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었고 따라서 핵심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급격히 상실했다.


이른바 전후호황의 ‘황금기’ 동안 제국주의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에게도 얼마간 개량의 떡고물이 주어졌고, 이는 ‘복지국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널리 확산시켰다. 개량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은 자본가들에게 적극 협력하며 지속적인 이윤 확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개량과 환상의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전후호황 시기 자본의 지속적인 확대재생산은 노동자계급의 규모를 빠르게 확대시켰다. 특히 청년 노동자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세계 곳곳에서 개량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의 통제를 뚫고 아래로부터 거침없이 활력을 뿜어내며 자본의 권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억압과 차별에 맞선 학생들의 투쟁도 함께 어우러졌다. 게다가 1970년대에 경제위기가 전개되면서 그 부담을 전가하려는 자본가들의 공세까지 펼쳐지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란, 중국, 체코, 폴란드 등 세계 곳곳에서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대결이 펼쳐졌다. 특히 1968년 프랑스에서는 2천만 노동자들이 무기한 총파업으로 2주 동안 나라를 멈춰 세웠으며, 1972~73년 칠레에서는 코르돈, 1979년 이란에서는 쇼라, 1980~81년 폴란드에서는 연대파업위원회 등으로 노동자평의회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거세게 타오른 노동자투쟁들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지만 혁명을 향해 도약하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다. 노동자투쟁의 거대한 규모와 폭발력에 비해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지도력이 너무 취약한 탓이었다.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혁명적 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호황기를 거치며 매우 약화되었다가 이 시기에 펼쳐진 거대한 노동자투쟁에 힘입어 비로소 부활의 기지개를 펴는 상태였다.


혁명적 지도력을 갖추지 못한 노동자투쟁들은 두텁게 포진한 개량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철저히 가로막혔다. 특히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인민전선을 통해 자본가세력과 협력한 뒤, (기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국민정당 노선을 추구하며 떠나간 빈자리를 대신해) 노동자들에 기반을 둔 대표적인 개량주의 정당으로 따라서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로 기능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1968년 5월의 거대한 총파업을 부르주아 선거를 앞세워 잠재움으로써 허망한 패배로 이끌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0년대 후반 자본가세력과 ‘역사적 타협’에 나서며 10년을 이어가던 노동자투쟁의 ‘뜨거운 가을’을 종결시켰다. 한편 자본주의 위기 국면에서 집권의 기회를 맞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개량 없는 개량주의’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영국 노동당은 노동당 정부야말로 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그에 맞선 노동자투쟁을 가로막는 데서 가장 효율적인 도구임을 거듭 입증해 보였다.


노동자투쟁이 개량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에 가로막혀 허우적거리자, 자본가계급은 노동자투쟁을 완전히 잠재우기 위해 결정타를 날렸다. 1973년 칠레를 비롯해 수많은 나라에서 미국 CIA 후원 아래 쿠데타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군사정권들은 노동자투쟁을 철저히 진압했고 수많은 노동자투사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세계 곳곳에서 10여 년의 대격돌을 펼친 끝에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의 반란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대에 스탈린주의 체제는 냉전 구도 아래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동유럽 8개국과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진주를 토대로, 이후 중국·베트남·쿠바에서는 농민이 주도한 자체 혁명을 통해 스탈린주의 체제가 수립됐다. 스탈린주의 체제의 확산과 독자적인 세계질서 구축은 ‘사회주의’ 체제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그러나 어떤 노동자혁명도 없이 이들 나라에 수립된 스탈린주의 체제는 이미 반혁명이 완성된 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일 뿐이었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완전히 결여된, 그리고 노동자 자주관리와 결합하지 못한 ‘국유화와 계획경제’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관료집단이 착취와 억압의 주역으로서 자본가계급의 역할을 수행하는 ‘관료적 명령경제’로 현실화했다.


실제로 스탈린주의 체제들은 이 시대에 이미 심각한 모순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련은 1920~30년대의 급격한 성장과 달리 관료적 명령경제의 비효율성이 점차 고조되면서 1960년대 이후 구조적인 침체로 완연히 빠져들었다. 원자화됨으로써 무기력해진 노동자들은 깊은 냉소와 수동성에 빠졌고, 관료집단 스스로도 관료적 명령경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갔다.


중국에서는 관료적 명령경제에 내재된 관료적 실적주의가 1950년대 말 대규모 아사자를 발생시킨 가운데 관료적 명령경제를 고수하려는 관료집단과 시장경제로 전환하여 통상적인 자본가계급으로 변신하려는 관료집단 간의 충돌이 펼쳐지다가, 1966~73년의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통해 관료적 명령경제의 극단적 폐해가 확인된 후 관료집단 전반의 방향이 시장경제 전환으로 정리됐다.


한편 소련이 1956년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선언하고 나서자 중국은 이를 수정주의로 비판했고 그렇게 악화된 양국관계는 결국 1969년 군사적 충돌로까지 치달았다. 그런데 정작 중국은 1972년 미국과 전격 정상회담을 갖고 소련을 고립시키는 데 협력하는 대가로 미국에게서 시장경제 전환을 지원받기로 하는 역사적 거래에 나섰다.


결국 다음 시대에 우리가 보았던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시장경제 전환은 이 시대에 스탈린주의 체제들에서 펼쳐진 사태들의 필연적 결과였다.

 

201902171197070223_2.jpg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