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위한 계획경제, 반도체특별법을 폐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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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신문

자본을 위한 계획경제, 반도체특별법을 폐기하라

사진: 반올림

 

반도체특별법이 국회 통과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동안 여야 대립이 극심했던 ‘주 52시간 노동시간상한제 예외 조항’을 민주당이 삭제한 채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했지만, 불씨는 여전하다. 반도체산업 경쟁력 확보를 앞세워 ‘장시간 불규칙 노동’을 법정기준 이상으로 상향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계와 야당이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 법사위에 자동 회부된 반도체특별법안, 즉 ‘반도체산업 생태계 강화 및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안’은 민주당이 단독 처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해당 법안은 △대통령소속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위원회’ 설치 △전력·용수·도로 등 기반시설 조성에 관한 정부 지원 의무화 △RE100 실행을 위한 신재생에너지 설비공급 및 설치비용 지원 △반도체산업지원기금 조성 및 지역 상생협력 사업실시 등을 골자로 한다. 이상의 내용은 여야가 이미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룬 내용들로, 주 52시간제 적용예외 조항을 빼놓고도 기업규제완화 내용 일색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인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반도체특별법 자체에 인프라 지원 등 의미 있는 내용들이 있으니 일단 통과시킬 수 있는 법안부터 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한 이유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첨단산업에 대한 민간기업들의 투자 장벽을 철폐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세제혜택과 재정지원, 입지규제 완화 등을 패키지로 제공하겠다는 이 법안을 업계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주 52시간 적용제외 조항은 일단 빠졌지만

 

주 52시간제 적용예외 조항이 빠졌다고는 하나 반도체특별법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미 정부는 반도체산업 연구개발인력 특별연장근로 허용 단위기간을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려, 법개정 없이도 노동시간 연장 유연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도 했다. ‘재벌특혜 반도체특별법 저지·노동시간 연장반대 공동행동’을 비롯한 노동시민사회에서 누차 지적해 온 것처럼, 반도체특별법의 핵심 문제는 △대기업 특혜지원 정책 △입지규제 완화로 인한 환경파괴 △노동건강권 침해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여당이 이 법안을 강행 처리하려는 의도는 자명하다. 위기에 처한 반도체산업을 구하려면 국가적 대책 수립이 시급하다는 인식이다.

 

문제는 민주당이 이 법안에서 ‘주 52시간제 적용예외 조항’을 삭제한 이후 노동시민사회의 대응도 급격히 가라앉았다는 사실이다. ‘반도체특별법 폐기’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려 퍼져야 할 지금, 공동의 힘은 제대로 모이지 않고 있다.

 

여기엔 나름의 원인이 내재해 있다. 먼저, 반도체산업 노동자 노동시간 연장 조항에 비판이 집중되며 특별법의 다른 문제점들은 상대적으로 비가시화되거나 주변화되었다. 다른 한편, 특별법이 반도체‧전자산업에서 정부의 직접투자를 촉진해 고용 증대와 보상 확대의 계기를 제공하리라는 지역‧현장의 기대감 또한 일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감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논란에서, 재생에너지 문제와 맞물려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하고 있다. 이른바 지산지소(地産地消, 그 지역에서 생산한 것을 그 지역에서 소비함) 원칙에 따라 용인산단 계획을 전면 중단하고 재생에너지 주요 생산지역으로 산단을 이전하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조감도 

 

반도체산단 건설, 비수도권 지역으로 옮기면 정말 괜찮나?

 

최근 제기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재검토 및 호남권 이전 주장은 법안의 심각한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 반도체특별법은 공공재정을 대자본의 사적 이윤으로 바꾸는 제도적 장치다. 반도체특별법은 대통령 소속 ‘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위원회’를 설치하고, 5년 단위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명시한다.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전력망 및 용수 공급망 설치ㆍ확충에 관한 사항을 국가적 계획으로 마련하며, 특별회계를 설치하고 대규모 보조금과 인프라 조성 비용을 국가 부담으로 지원한다. 특별회계 자금이 부족할 경우 일반회계나 타 특별회계로부터의 전입도 가능하다. 산업인프라 조성, 보조금 지급, 조세 감면 등 세제 지원, 예비타당성조사 신속처리 및 면제, 인허가 신속 처리, 전문인력 양성까지 보장하는 반도체특별법안은, 사실상 공공 재정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자본의 이윤으로 이전하는 법적 장치이자, 이윤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의 전형이다. 반도체산업 국제경쟁 심화를 명분으로, 공공재정을 자본의 이윤으로 바꾸는 행위는 곧 대중에 대한 노골적 수탈이다. 이 정도면 가히 자본을 위한 계획경제 아닌가?

 

반도체특별법 아래 용인산단이 ‘호남산단’으로 바뀌어도 기업 규제완화 정책은 흔들림 없이 추진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기업투자와 성장을 가로막는 ‘킬러규제’로 지칭했던 신산업 관련 규제들은 이재명 정부 들어서도 ‘규제합리화’라는 기치 아래 제거 또는 완화해야 할 목표로 떠올랐다. 반도체특별법 역시 기업투자의 걸림돌을 신속하게 제거한다는 정부 계획의 일환이다. 신산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환경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경영계 주문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패스트트랙에 오른 반도체특별법은 기존 법률에 규정된 입지·용도·환경 등에 대한 규제 조항을 한꺼번에 무력화할 것이 분명하다.

 

둘째, 막대한 재정을 특혜지원 하면서도, 반도체특별법안에는 반도체산업 다단계 하청구조 개선, 정규직 고용의무, 이윤 환수, 노동안전보건 의무 준수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관련, 삼성전자 하청업체 ‘명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반도체산업 경쟁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삼성전자 하청업체 명일은 화성·기흥·온양 사업장 하청기업으로, 850여 명의 노동자를 간접고용하고 있다. 33년 동안 사업을 이어가며 320억원의 주주 배당을 시행하고, 사내유보금 538억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또한 2024년 이자비용이 53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재무적으로 안정된 기업임에도 126명의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이런 탄압에 노조간부를 표적으로 한 전환배치와 해고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주야 맞교대, 월 20일 이상 걷는 노동을 강요받았으나, 1년 단위 도급계약을 이유로 산재 신청조차 제한받았다. 명일 해고자들은 명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동일 업종 재취업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반도체산업에 ‘특별법’이 필요하다면, 그 법안의 중심은 자본을 위한 계획경제가 아니라 이런 처참한 다단계 초과착취의 근절에 있어야 한다.

 

사진: 서비스일반노동조합 명일지회 

 

셋째, 반도체특별법은 지역 고용창출을 앞세워 반도체산업 노동자의 권리를 희생시킨다. 현재 입법 추진 중인 반도체특별법안 3조(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등의 책무) 4항은 “반도체 특구 입주기업체의 사용주와 근로자는 노동쟁의에 관한 관계 법률상의 절차를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파업 금지’라는 노골적 용어로 표현하고 있지 않을 뿐, 이는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노동자들에게 사실상 무쟁의 선언을 강요하는 조항이다. 그렇지 않으면 해당 조항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 이미 광주글로벌모터스(GGM)라는 선례가 있다. GGM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 9월 출범한 기업으로, 광주시와 현대차가 민관 공동출자 방식으로 투자협정을 맺은 ‘광주형일자리’ 1호 사업체다. 당시 문재인 정부와 광주시는 대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적정임금’과 ‘상생협력’을 내걸었는데, 실제로 GGM은 동종 업계의 절반도 안 되는 저임금, 높은 노동강도로 악명을 떨쳤다. 고용지표 개선에 혈안인 정부와 지자체가 앞장서 ‘노사상생협약’으로 임금억제와 노동권 침해를 강제했던 것이 광주형일자리의 실체였다. 반도체특별법은 지역일자리 확대 명분의 노동권 침해 위험을 내재한다.

 

넷째,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재벌의 공공자원 전유 문제를 회피한다.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사업은 비단 용인 지역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반도체산업은 그야말로 ‘전기 먹는 하마’, ‘물 먹는 하마’다. 용인산단 완공 시 예상 전력수요는 10GW 이상으로 추산된다. 수도권 전력수요의 4분의 1에 달하는 막대한 양이다. 이조차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력수요만을 예측한 값이고, 인근에 들어설 300~500여 개 소재‧부품‧장비 업체까지 합치면 어림잡아 15~20GW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물 부족 문제 역시 심각하다. 용인산단이 가동된다면 앞으로 하루 167만t가량의 물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서울 1천만 인구 물 사용량의 60%에 달하는 규모다. 대규모 전력수요 집중 및 물 부족 문제를 해소할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지역 이전은 능사가 아니다. 일각에서는 용인보다는 재생에너지와 물 공급 여력이 충분한 호남권 이전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제기한다. 그러나 당장 호남에 ‘반도체 클러스터에 끌어다 쓸 공업용수’가 충분하다는 얘기는 극심해진 기후재난을 애써 외면할 뿐 아니라, 공적자원인 물 이용에 대한 우선순위(농업용수와 생활용수 등)를 면밀히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다시 반도체특별법 폐기를 위한 싸움을 점화하자

 

이상의 문제점만 살펴보더라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호남 이전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기업 규제완화 일변도의 반도체산업 육성·지원정책과 특별법이 과연 필요불가결한 것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과 법률은 모두 거대한 규모로 자원 추출과 생산을 가속하는 반도체산업 입지 규제, 노동안전 규제, 화학물질 배출 규제 등을 간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별법은 대부분 일반법이 정한 규제를 회피하고 보다 신속하게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말하자면, 국가와 자본의 입장에서 △환경 및 자원 한계를 고려한 배출량 제한기준 확립 △노동3권 보장과 안전한 작업환경 구축 등의 ‘규제’ 기준이야말로 기업 투자와 경쟁력 강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실제로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추진 과정에서도 반도체산업 재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입김을 행사한다. 최초 투자계획부터 부지 선정, 공사 기간은 물론이거니와, 산단 조성 규모와 팹(제조공장)의 개수, 소재‧부품‧장비 협력사 입주 공간까지 자본의 제안을 정부가 승인하는 형태로 모든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번 조성계획과 관련해서는 산단 조성 이래 최초로 정부・지자체・산업계가 함께 참여한 ‘범정부 추진지원단’이 2023년 3월 말 발족했다. 반면, 산업단지 조성과 맞물려 막대한 변화가 예상되는 지역주민과 노동자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수용 대상지역 원주민 피해보상에 초점을 둔 민관공 협의체가 가동되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 민중은 특정 기업에 물, 전기 같은 공적 자원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하지 않았다. 반도체산업에 대한 공공적 통제는 생태적 한계 준수와 노동권 확대를 위해 대폭 강화되어야 한다. 온갖 규제완화와 재벌특혜로 공적재정을 자본의 이윤으로 바꾸는 반도체특별법을 폐기해야 한다. 기간산업은 노동자 민중의 손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 민중의 싸움으로 반도체특별법 폐기투쟁을 재점화하자.

 

사진: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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