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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기초학습#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오늘날 여성과 성소수자의 현실은 어느 때보다도 모순적이다. 여성 정치인과 CEO는 해마다 증가하지만, 여성의 현실은 평등과는 까마득히 멀다.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 등 성차별은 법으로 규제되지만, 현실에서는 임금, 노동조건, 고용형태 등 모든 면에서 구조적인 성차별이 지속하고 있다. 가령 국내 여성 임금 노동자 2명 중 1명은 비정규직이며, 다수가 최저임금을 받는다. 초단시간 노동자의 70% 이상은 여성이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다수의 성별도 여성이다. 시간당 임금은 남성 정규직 > 남성 비정규직 > 여성 정규직 > 여성 비정규직 순이다. 여성 비정규직 월평균 임금은 남성 정규직의 38.8%일 뿐이다. 청소, 콜센터, 톨게이트, 가스검침, 요양을 비롯해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직장은 모두 최저임금 사업장이다. 이러한 성별 직종분리 추세는 확대돼 왔으며, 여성 비율이 많은 직종일수록 임금이 낮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원년부터 지금까지 내내 성별임금격차는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성 연금 수급액 수준은 남성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부는 필리핀 가사 관리사 시범사업의 사례처럼 이주 여성 노동자에게 더 불평등한 임금과 노동조건을 강요하고 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노동 운동가 클라라 체트킨이 20세기 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1]이 사회적 격변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현대 여성 문제를 촉발시켰다”[2]라고 지적했듯이, 구조적 성차별은 가부장제와 결탁한 자본주의 체제에 따른 결과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억압되는 구조적 배경을 살펴보자. 자본주의란 생산수단 소유 여부로 계급이 나누어지는 계급사회다. 마르크스가 분석했듯이 노동력만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생존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착취한다. 그리고 착취가 지속되려면 노동력은 재충전되어야 한다. 노동력은 한편으로는 가정을 비롯해 기숙사 등에서 회복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력은 출산을 통해 새롭게 공급돼야 한다. 자본가에게는 이주 노동자 도입이나 노예화도 노동력을 보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출산을 통해 노동력이 보충될 때는 아이를 낳는 다수인 여성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여성은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본가에게 출산은 노동자로서 여성이 생산하는 잉여가치를 감소시킬 위험이 있다. 이 때문에 출산은 당장에는 자본의 잉여 가치 착취에 방해가 된다. 그러나 노동력이 세대에 걸쳐서 보충되려면 출산이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지배계급 입장에서 노동력 재생산에는 잠재적 모순이 존재한다. 여기서 리즈 보겔은 “이러한 모순의 해결을 둘러싼 계급투쟁 과정에서 피착취계급 여성에 대한 억압이 발전한다”[3]고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은 노동력을 최대로 착취하면서도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가부장제를 동원해 출산시 여성을 남성이 책임지도록 하고, 남성에게는 임금노동에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하고 여성에 대해서는 무급 재생산 노동에 대한 부담을 지운다. 이렇게 아이들과 가족 구성원을 먹이고, 돌보고, 교육하는 재생산 노동은 여성에게 사적으로 떠맡겨지고 평가절하된다. 이렇게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이 분리된 것은 자본주의에서였다. 생산노동은 직장에서 수행되며, 재생산 노동은 갈수록 시장화(사회화)되고 있지만, 주로 사적으로 집안에서 수행된다. 이런 재생산 노동은 (계급투쟁의 결과에 따라) 국가가 자녀수당에서처럼 한편에선 지원하고, 다른 한편에선 결혼제도에서처럼 통제한다. 가부장적 억압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이 같은 메커니즘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고 여성을 규율한다. 여성의 성은 혼인에 구속되며 임신출산은 국가 인구정책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재생산 노동에 대한 국가나 자본의 지원은 늘 충분히 못하므로 임신출산과 가사돌봄을 사적으로 떠맡은 여성은 불완전한 노동자로 전락하여 채용에서부터 임금과 승진승급이나 불안정한 고용형태까지 다양한 차별을 받는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전 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개진된다. 나아가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성별과 신체와 출신과 능력에 등급을 매겨 서로를 경쟁시킨다. 그래서 어떤 노동에는 고가가 매겨지지만, 구조적으로 저임금 일자리로 떠밀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노동력을 팔고 싶어도 팔 수 없거나 노동을 해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도 존재한다. 이 같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 여성 노동자의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성소수자의 존재는 지워진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당연시되는 노동강도를 비롯해 남성 노동자 역시 성별을 이유로 억압된다. 그리고 그러한 억압을 통한 이득은 이 자본주의 체제가 비호하는 한 줌의 자본가들에게 돌아간다. 더불어 임금노동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은 빈곤한 재정적 여건으로 인하여 파트너에게 의존하게 된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이는 가부장적 폭력을 조장한다. 체트킨이 지적했듯, 자본가계급 여성도 가부장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급적 차이에 따른 여성 억압의 양상은 전혀 다르다. 자본가계급 여성의 현실은 직장과 가장에서 이중으로 착취되고 억압받는 노동자계급 여성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즉, 노동자계급 여성은 자본주의 고유의 생산양식에 의해 차별받는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란 이렇게 젠더에 따른 차별과 억압의 근원이 노동력 착취와 재생산을 위해 가부장제를 동원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고 보고 가부장적 자본주의 철폐를 위한 계급투쟁으로 젠더평등을 쟁취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즉,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성적 억압과 차별의 원인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을 직시하며, 이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맞선 계급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관점을 공유한다. 1. 세계 자본주의 변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대응 자본주의의 정치체제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낳은 프랑스혁명부터 인간의 평등은 부르주아 남성에 한정되었다. 대신 여성에게는 혼전 순결과 모성, 부권을 강요하는 부르주아의 성 규범이 뿌리를 내렸다. 서구에서의 이러한 여성 억압은 제국주의 시대를 경유하며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피식민지에 이식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구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제1물결은 이러한 부르주아 시민 혁명의 한계 속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도 여전히 불평등한 현실을 지적하며 참정권, 재산권, 혼인, 교육, 직업 등에서 남성과의 평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페미니즘 제1물결은 부르주아 여성의 삶의 조건에 치우쳐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속에서 임금 노동자나 빈민, 성 노동자로 살았던 국내외 노동자계급 여성의 삶은 철저히 외면됐다. 예를 들어, 1894년 독일여성단체연맹은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여성 단체의 가입을 거부했고, 1900년에는 사회민주주의 여성 운동과 협력하자는 운동에 반대했다. 영국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은 재산을 소유한 여성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4] 여성노동자들은, 착취당하고,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며, 여성운동이나 노동조합들에게도 버림받았지만, 19세기 계급투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대표적으로 1812년 밀가루 가격의 제한을 요구했던 노팅엄 봉기, 필로멘 로잘리 로잔이 이끈 리용의 비단 노동자 파업, 1888년 남성 노조들과 독립적으로 조직되어 요구를 쟁취했던 런던의 성냥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우리, 여성>이라는 소책자에서 성 평등의 이름으로 인쇄할 권리를 요구했던 에딘버러 여성 식자공 파업, 그리고 1857년 3월 8일 경찰의 공격을 받았고 수십 년 뒤 ‘세계 여성의 날’ 제정을 끌어냈던 뉴욕 직물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등이 있다.[5] 이후 제국주의 국가에 식민지배를 받던 지역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쿠바, 아르헨티나, 멕시코, 인도, 조선 등 식민지 여성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지배와 자본의 착취 아래 더욱 비참한 현실 속에서 투쟁했다. 조선에서는 대표적으로 1930년 8월 임금삭감과 보증금제도 및 불량품에 대한 벌금제를 이유로 일본 자본에 맞서 일어난 평양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다. 여성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주목한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은 여성억압이 자본주의 체제에 따른 구조적 결과라는 점에서 여성해방이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 과제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변혁운동의 과제로 여성해방을 강조했고,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 혁명가들은 부르주아 여성운동에 대비되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조직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여성 노동자의 권리가 단순한 권리의 획득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방향에서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여성대회를 소집했고, 계급투쟁 속에서의 여성해방 실현을 추구하며 여성 노동자를 조직했으며, 노동권, 동일임금, 유급 출산휴가, 무료 보육 시설, 여성교육 등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6] 1910년 8월 제2인터내셔널 사회주의자 여성대회에서 클라라 체트킨을 비롯한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여성의날을 제안한 배경도 이 같은 맥락이었다.[7] 이 같은 배경 속에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혁명에 성공하자 여성해방을 핵심 과제 중의 하나로 삼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가사노동 사회화, 그리고 성평등 조치에 나섰다. 이후 서구는 전후 자본주의 장기호황에 힘입어 정부 지출과 통화 공급을 증대해 질서를 유지했다. 더구나 주류 노동운동은 미국에서는 뉴딜을 정점으로 체제 내화한 지 오래였고, 냉전의 여파 속에서 갈등은 쿠바, 베트남 등 주로 제3세계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프랑스와 독일, 미국 등에서 국가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나 서구 사회를 뒤흔들기 시작했고, 민권 운동과 신좌파운동의 영향 속에서 분출한 혁명적 열기는 여성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구에서 여성의 선거권이나 재산권, 교육 등은 보장되었으나 여성은 여전히 현모양처로 호출됐다. 소비에트연합에서도 스탈린 반혁명에 가부장제가 강화된 지 오래였고, 서구의 공산당 운동은 스탈린주의를 표방했으며, 사민주의 운동도 가부장적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페미니즘 제2물결은 이 같은 조건에서 일어났다. 아르헨티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안드레아 다트리는 페미니즘 제2물결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에서 나타나듯이, “사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사이의 관계를 제기했다. 여성들은 자본이 제도화하고 안착시키려 애썼던 것, 즉 정치적 영역(생산/임금노동)과 사적 영역(재생산/무급노동) 사이의 분할에 의문을 제기했다”[8]고 표현한다. 또 낸시 프레이저는 당시 “여성해방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지배에 맞서 봉기”했으며, “다른 급진주의 조류와 합류하여 사회민주주의의 허상을 폭로했고, 자본주의의 깊숙한 남성 중심주의의 뿌리와 가지를 바꾸고자 했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당시 페미니즘 운동은 급진적 실천에도 신좌파운동이나 노동자운동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주류 페미니즘 운동은 체제 순응적인 제도화의 길을 걸었다. 제2 페미니즘 물결 이후 서구에서는 1970년대 시작한 자본주의의 장기불황 속에서 신자유주의 질서가 구축되기 시작하며 백래시가 밀려 왔다. 미국에서는 뉴딜 합의가 붕괴했고, 긴축, 규제 완화, 복지 축소, 노동유연화를 설교하는 ‘워싱턴 컨센서스’가 새로운 지표가 됐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함께 우파는 1960~1970년대 성장한 미국 신좌파와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진보적인 사회 흐름에 대한 백래시로 보수적인 성과 가족, 사회 질서, 국가안보를 옹호하는 신보수주의를 이끌었다. 반면, 자유주의 세력은 여성의 권리를 지지했지만, 사회적 평등은 오히려 후퇴시켰다. 더구나 주류 여성운동은 이 같은 자유주의 세력에 포섭돼 지배계급의 일부로 역할했다. 한편,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바이섹슈얼 등 기존 페미니즘이 소외시켰던 성 소수자들을 포함해 여성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인종, 계급, 성 정체성, 문화 등 다양한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제3 페미니즘 물결이 일었지만, 계급투쟁과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당시 두드러진 운동 담론인 정체성정치에 계급은 하나의 부문운동 이상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당시 지배계급은 페미니즘의 구호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신자유주의를 구축해냈다. 낸시 프레이저에 따르면, 페미니즘 제2물결은 경제 지상주의, 국가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을 비판했으나, 이는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를 구축되는 데 활용됐다. 즉, 경제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정체성 정치로 수렴되어 사회경제적 투쟁을 축소시켰고,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복지국가 해체로,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가족 임금 해체를 비롯해 보다 유연한 자본주의를 위한 도덕적 설명으로 치환됐다.[9]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2007~2008년 시작한 세계공황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저항에 직면하기 시작한다. 2010년대 이른바 아랍의 봄과 유럽 긴축반대 투쟁, 미국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멕시코 에너지 민영화 반대 투쟁, 칠레 펭귄시위와 무상교육투쟁 등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이 확산했으며, 이와 맞물려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 역시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아랍의 봄의 중심지였던 이집트에서는 집회 시위 중 벌어진 성폭력에 맞서 여성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니우나메노스(Ni Una Menos(“No one less”)는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는 뜻으로, 더 이상 젠더기반 폭력으로 살해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위가 전개됐다. 미국에서는 수십만 명이 참여한 여성대행진이 있었고, 스페인에서는 수백만이 여성파업을 일으켰다. 멕시코에서는 페미사이드 반대 시위, 칠레에서는 집회 시위 중 발생한 경찰의 성폭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폴란드와 아일랜드에서는 임신중지 억압에 반대하는 여성파업이 일어났다. 사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큰 희생자 중의 하나는 여성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여성 노동자의 수가 증가한 시기지만, 이들은 대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불안정해진 일자리에서 일해야 했고, 사회복지비는 축소되어 여성에 대한 무급 재생산 노동을 강화했으며, 젠더폭력 역시 배가됐다. 그러나 전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노조는 가부장적인 관료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주류 여성운동은 제도화되어 기층 여성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터져 나온 여성들의 시위는 이 사회를 생산하며 재생산하는 노동자계급으로서의 투쟁이자 다수가 그 전술로서 노동자계급의 무기인 파업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 열기는 계급운동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대개는 개량주의 정치세력에 흡수되며 산개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 위기 속에서 출현한 극우의 세계화 속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보다 폭력적인 자본주의를 대면하고 있다. 2. 한국에서의 여성운동 한국에서 여성운동은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와 여성운동의 동학과 맞물려 전개해왔다. 그러나 또한 식민지와 내전, 분단과 독재정권이라는 제3세계적 특수성 속에서 사회 변혁운동의 자장 속에서 태동했다.[10] 이러한 한국 여성운동은 1970년대 전투적인 여성노동자 투쟁과 인권, 노동, 학생운동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대투쟁은 여성운동의 이념과 조직적 정비를 부추기는 데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 노동자운동은 여성운동 안에서 중심축의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진보적 여성운동 단체인 1984년 여성평우회[11]도 여성운동의 주체를 ‘기층여성’으로 설정했다. 대표적으로 이화여대 출신 여성 지식인과 학생운동 출신의 운동가들이 창설한 여성평우회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결합되어 있다고 인식했고, 80년대 민족민주민중운동의 부문운동으로 여성운동의 위치를 규정하면서 여성해방을 추구하며 결혼퇴직제(25세 조기정년제) 철폐나 가사노동 등 여성 이슈를 의제화하는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운동 전체로 보면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운동을 도구화하는 경향이 강했고, 여성평우회 내적으로는 여성운동 내 지식인과 운동가 사이 민족민주운동과 여성운동의 관계에 대한 이견 때문에 1987년 해산했다. 이후 1980년대 여성운동은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민우회 등으로 분화했으며, 진보적 여성운동단체들의 연합체로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결성되었다.[12] 그러나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도 여성운동의 주체를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기층여성에 두고 이들의 생존권 투쟁 지원에 주력했다는 점에서 80년대 여성운동은 노동자계급 여성 이슈가 중심축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13] 한편으로 대학 사회에서는 80년대 초중반 대학 운동권 내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져왔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총여학생회가 설치됐다. 이들 역시 여성 억압을 군사 독재 정권, 식민 지배 역사, 자본주의 체제 등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 위치시키고자 하였다.[14] 그러나 90년대 문민정부 출현과 소비에트 몰락 이후 계급운동의 퇴조와 방향 상실 속에서 주류 여성운동은 탈계급화하기 시작해 기층여성 중심의 ‘노동자’ 정체성은 1990년대에 ‘여성일반’으로 전환됐다. 여성운동은 독자성과 대중성을 추구하며 성폭력과 성차별 등 문제를 대중화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대표적으로 성폭력특별법(1994년) 제정, 호주제 폐지(2005년 헌법 불합치 결정) 등의 제도 개혁을 이끌었다. 그러나 노동 등 사회 문제는 사안별 연대로 국한되었으며, 기층 노동계급 여성의 생존권에는 거리가 있었다. 한편 90년 중반 이후 여성운동은 성주류화 정책을 주요 전략으로 채택하며 본격적인 제도화의 길을 밟기 시작해 갔다.[15] 그리고 이는 당시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루며 자신의 정당성과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대거 흡수한 김대중 정권의 이해와 맞물렸다.[16] 이 같은 조건에서 김대중 정권은 여성부와 여성공천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 등을 제정하여 그동안 여성운동이 주장해 온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17]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구조개악을 밀어붙이며 전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을 후퇴시켰고, 이는 특히 노동자계급 여성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김대중 정권이 강행한 공공부문 매각과 정리해고 및 파견제 도입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자계급 여성을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 대거 밀어냈다. 대표적으로, 1998년 본격적으로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시작하면서 여성 임시/일용직 노동자는 57%에서 68.9%까지 증가했다.[18] 여연조차 2001년 1월 “김대중 정부의 여성정책 3년에 대한 평가에서 우리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며 “여성들의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시간제 노동이 가속적으로 증가하여, 대표적으로 9개 은행의 명예퇴직 여성의 비율이 74.5~95.5%를 차지했다”고 기록한다.[19] 둘째, 김대중 정권 시절 남녀고용평등법 전부 개정, 모자보건법 개정 등으로 도입된 일·가정 양립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여성정책으로 임신·출산, 가사돌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방기한 채 여성 노동력을 시장화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 여성은 가족임금제(남성부양모델)가 해체되고 유연화한 고용조건 속에서 임신·출산, 가사돌봄이란 이중의 부담을 떠맡으며 저임금 일자리로 밀려들었다. 셋째, 김대중 정권은 외환위기 이후 출생율이 급감[20]하면서 처음으로 저출산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해 신보수주의의 출산장려정책을 추진할 발판을 마련해주었다.[21] 마지막으로 김대중 시절 수립된 신자유주의적 여성노동·인구정책 기조는 이후 전 노동계급에 대한 노동유연화를 촉진하는 기조로 활용됐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6년 8월 수립된 1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을 시작으로 ‘근로형태 유연화’가 출산장려정책의 주요 과제로 자리 잡았으며, 주요 정책 과제 중 하나인 ‘가족친화적 기업 지원’에서도 기준 항목에 탄력적 근무제가 포함됐다.[22] 이명박 정부는 저출산 정책으로 유연근무제를 추진했는데, 이는 사실 단시간노동제로서 신규채용을 단시간 일자리로 전환하고 직무를 단시간화하여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조치였다.[23] 문재인 정권도 노동유연화 조치인 직무급제를 추진하며 내세운 명분 중 하나로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들었다. 이렇듯 그동안 여성운동이 이룬 성과는 적지 않지만, 여성과 퀴어의 성적 권리는 여전히 무거운 납덩이에 짓눌려 있다. 2019년 대중적 페미니즘 운동의 여파 속에서 낙태죄가 헌법에 불합치하다고 결정됐지만, 문재인 정부부터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는 대체입법에 나서지 않았다. 퀴어의 성적기본권은 다양한 음행매개, 음화반포와 제조, 공연음란죄(형법 제242~245조)를 비롯해, 군형법 추행죄, 에이즈예방법 상 전파 매개 행위 금지 조항 등으로 통제되고 있다. 차별금지법 역시 2007년 노무현 정부가 발의했고, 2021년에는 국민동의청원이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 소관위원회 회부 기준을 충족하기도 하였는데도, 기독교 우파, 근본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의 눈치를 보며 이번 민주당 이재명 후보 역시 외면하고 있다. 3. 마르크스주의자와 여성억압 그러면 여성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성억압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봤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여성해방을 추구했다. 특히 그들은 여러 지면을 통해 자본주의 여성억압의 물질적 토대를 분석하며 이론적 토대를 세워 갔다. 우선 마르크스는 1845년 <신성가족>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말을 의역하여, “역사적 시대의 변화는 여성의 자유를 향한 진보에 의해 항상 측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에서, 강자에 대한 약자의 관계에서, 잔인함에 대한 인간 본성의 승리가 가장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해방 정도는 일반적인 해방의 자연스러운 척도다”라고 봤다. 엥겔스는 당대 노동자계급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억압의 구조적 기원을 최초로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는 여성 억압이 단순히 문화적,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구조 속에서 등장하고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그는 24세였던 1845년 영국 노동자계급 여성들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하며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성적 학대 속에서 저임금 노동자로서 그리고 가정에서는 무급 가사 노동자로서 이중의 굴레를 지고 있다는 점을 제기했다. “여자들은 대개 분만한 지 사흘이나 나흘 만에 당연히 아기를 남겨둔 채로 공장으로 복귀한다. 저녁시간에 여자들은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자기도 뭔가를 먹는다.”[24] “이 외에 공장에서의 종속관계가 다른 종속관계와 마찬가지로, 심지어 그보다 더한 정도로 제조업자에게 초야권(중세 영주가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잠자리를 할 수 있는 권리)을 부여한다는 것도 당연히 문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고용주는 피고용인들의 인신과 아리따운 용모를 지배하는 군주이기도 하다. 고용주가 해고하겠다고 위협만 해도 어차피 순결을 단호하게 지킬 마음도 없는 소녀들 10명 가운데 9명은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제조업자가 몹시 비열한 사람이라면 그의 공장은 하렘이기도 하며, 공식 보고서에 그런 사례가 몇 가지 실려 있다.”[25] “공장노동은 여성의 체격에도 뚜렷하고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 장기간 노동이 초래하는 변형은 여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 장시간 노동은 흔히 골반의 변형을 일으키는데, 일부 변형은 엉덩이뼈의 비정상적인 위치와 성장으로 나타나고, 일부 변형은 척추 하부의 기형으로 나타난다. (...) 몇몇 산파들과 산과의사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보다 난산으로 고생하고 또 유산하기도 쉽다고 증언한다. 더욱이 여성 공원들은 모든 공원에게 공통된 전신 허약으로 고생하며, 임신을 해도 분만하는 시간까지 공장에서 계속 일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을 받지 못할뿐더러, 너무 일찍 일자리를 비웠다가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전날 저녁까지 노동하다가 이튿날 아침에 분만하는 일이 빈발하고, 공장의 기계들 사이에서 분만하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 않다.”[26] 특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후 인류학에 대해 그가 남긴 메모를 기초로 친족, 가부장제 가족, 결혼제도, 일부일처제 형태의 변화와 연관된 사회 조직에 대한 역사 유물론적 분석을 전개했다. 그것이 1884년 쓰인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인데, 이 책에서 엥겔스는 유물론적 관점에 따라 가족 문제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고찰하며,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관계를 강조했고, 여성 억압의 기원이 자연적인 게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점을 보여줬다.[27] 즉 여성억압의 기원이 사유재산의 축적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하며 계급사회의 산물임을 밝혀냈다. “유물론적 관점에 따르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는 궁극적으로 직접적 생활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생활수단, 즉 의식주의 대상과 이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의 생산, 즉 종족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 및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회 조직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하나는 노동의 발전 단계에 의해, 다른 하나는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의 발전이 미약할수록, 그 생산물의 양이 제한될수록, 따라서 사회의 부가 제한될수록 사회제도는 혈연적 유대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28] “이렇듯 재부가 증대함에 따라 가족 내에서 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화된 지위를 이용해 남편은 자녀들을 위해 기존의 상속 순위를 폐지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모권에 의해서만 혈통을 따졌던 시기에는 그것이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모권은 폐지되어야 했으며 또 폐지되었다. (...)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29]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른 것으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혈통이 확실해야 할 필요성은 아이들이 후에 직계 상속인으로서 아버지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기 때문이다.”[30]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리고 현대 사회는 순전히 개별 가족이라는 분자로만 구성된 집단이다. (...) 가정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지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 여성해방의 첫째 조건은 여성 전체가 사회적 노동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31] 무엇보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이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묶여 있는 사회적 노동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했고, 이에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공산주의 사회의 목표 중의 하나로 제시했고 이 같은 그의 제안은 현재까지 주요 과제로 다뤄진다.[32] “여자의 지위, 즉 모든 여자의 지위에도 극심한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생산수단이 공동소유로 됨으로써 개별 가족은 이제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사로운 집안 살림은 사회적 산업으로 전환되고, 아이들을 돌보며 교육시키는 것은 공공사업으로 전환될 것이다. 사회는 적자나 사생아를 막론하고 모든 아동들을 똑같이 돌보아 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처녀가 마음놓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몸을 맡길 수 없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사회적 계기 – 도덕적 및 경제적 –인 그 ‘결과’에 대해서 처녀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강요받지 않은 성교를, 따라서 또 처녀의 명예 및 여성의 수치에 관한 보다 관대한 여론을 점차 발전시키기에 충분한 원인으로 되지 않을까?”[3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 쓴 《공산당 선언》에서는 부르주아 가족 제도를 비판하며 이는 “자본이자, 사적 이득 위에 서 있다. 이 가족은 완전히 발전된 형태로 오직 부르주아지에게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 상태는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가족이 사실상 부재하다는 사실과 공창 속에서 그 보완물을 발견한다”라고 지적하는 한편,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의 도구로만 본다”고 비판하며, “현 생산 체제의 폐지가 여성의 공유, 즉 공창과 사창 모두의 폐지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자명하다”[34]라고 봤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가족은 사실상 해체됐다고 지적한다. 또 부르주아가 일부일처제를 명문화하면서도 아내를 출산 도구화하고 ‘공유’하는 위선을 비판하며, 노동자계급은 성매매가 가족을 대신하고 있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여성 노동의 착취적 측면에 대하여 분석했다. 기계가 육체적 힘의 차이를 지워버리며 임금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수단이 되었는데, 이러한 기술 진보가 노동자에게 야기하는 문제로 여성과 아동을 저임금 노동에 유입시켜 전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착취의 정도를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기계, 근육의 힘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근육의 힘이 약하거나 또는 육체적 발달은 미숙하지만 팔과 다리는 더욱 유연한 노동자를 사용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은 자본가에 의한 기계사용의 첫 번째 결과였다! (...) 노동력의 가치는 개별 성인노동자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뿐 아니라 노동자 가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기계는 노동자 가족의 전체 구성원을 노동시장에 내던짐으로써 가장의 노동력 가치를 그의 전체 가족구성원들에게로 분할한다. 그러므로 기계는 가장의 노동력 가치를 저하시킨다. (...) 이와 같이 기계는 처음부터 자본의 가장 특징적 착취대상인 인간적 착취재료를 추가할 뿐 아니라 착취의 정도를 증가시킨다. (...) 기계는 아동과 여성을 대량으로 노동자계급에 추가함으로써, 성인 남성노동자가 매뉴팩처 시기 전체를 통해 자본의 독재에 대항했던 반항을 드디어 타파하게 된다.”[35] 또 인용에서 “가족 기능의 어떤 것(예컨대 어린이를 돌보며 그들에게 젖을 먹이는 일)은 전혀 없애버릴 수는 없으므로, 자본이 징발한 어머니는 어떤 대체물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여성이 공장 노동과 함께 가정 내에서의 전통적인 역할과 의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아울러 현대의 ‘경력단절’ 여성과 같이, 더 많이 착취할 생각으로 부양가족이 있는 고분고분한 기혼 여성만 고용하는 사업주의 사례[36] 등도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자본론》에서는 여성억압의 물질적 기초로서 가사노동이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유일하게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이 되는” 즉,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이란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의 필요를 다루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재생산 노동의 위치 등을 제시했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 가치인 한, 노동력 그 자체는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평균노동을 표현할 뿐이다. (...) 노동력의 생산이란 이 개인 자신의 재생산, 즉 그의 생활의 유지다. (...)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및 도덕적[정신적] 요소가 포함된다. (...) 노동력 소유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그가 시장에 연속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판매자는 ”살아 있는 개체는 어느 것이나 생식에 의해 자신을 영구화하는 것처럼“, 생식에 의해 자기 자신을 영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모와 사망의 결과 시장에서 빠져나가는 노동력은 적어도 같은 수의 새로운 노동력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되어야 한다.”[37]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 플로라 트리스탄은 1843년 자신의 책 《노동자 연합》에서 처음으로 계급과 젠더의 관계를 다뤘다. 그는 여성이 프랑스 사회의 ‘마지막 노예’라고 부르며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숙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38] 또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여성은 노동자계급과 함께 손을 잡아야만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남성 노동자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투쟁의 기치 아래 여성과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지 않는 한 임금 노예의 멍에에서 해방되기를 열망할 수 없다고도 한다.[39] 이렇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억압이 자본주의에 따른 결과로 보면서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또 여성이 이미 사회 생산의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일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80년 신생 프랑스 노동자당 선거 강령에 조언하였는데, 이 강령 서문의 첫 문장은 “생산계급의 해방은 성별이나 인종의 구별 없이 모든 인간을 포함한다”였다.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조직해 온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계승, 발전시키며 자본주의의 여성억압에 맞서 투쟁했다. 특히 자본주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던 독일의 사회민주당(SPD) 여성 운동 지도자이자 초기 개량주의의 반대자였던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은 여성 노동자 조직에 사회주의 운동의 성사가 달려 있다고 주장할 만큼 여성 노동자 조직에 앞장섰다. 그는 특히 명시적으로 계급사회 내 여성의 종속 문제가 갖는 이론적 성격을 분석했는데, 생산양식과 계급에 따라 여성문제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제시했다. 1896년 독일 사회민주당(SPD) 여성회의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함께해야만 사회주의는 승리할 수 있다>에서 체트킨은 여성 억압을 ‘성별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문제로 분석하며,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부르주아 여성의 처지와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 문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산물인 특정 사회 계급들에서만 나타난다고 봤다. 체트킨에 따르면, 우선 상류계급 여성은 언제나 배우자, 어머니, 주부로서의 임무를 하인에게 떠맡길 수 있는 계급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롭게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다. 프티부르주아지, 즉 중간계급에서는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고 정신적 만족을 얻기 위해 사회로 진출할 수밖에 없는데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때문에 교육과 취업등 기회의 평등이 중요한 요구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에 관한 한 여성 문제를 창출하는 것은 끊임없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착취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필요다. 이들은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자본주의 생산이 적선하듯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만 할당받는다. 때문에 프롤레타라아 여성의 해방 투쟁은 부르주아 여성처럼 자기 계급의 남성에 맞서 싸우는 투쟁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전체 자본가계급에 맞서 자기 계급 남성과 공동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4. 볼셰비키 혁명과 여성해방 1910년 10월, 한 섬유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 시간 연장으로 인해 두 명이 사망하자 파업을 벌였다. 이들은 공장 내 노동자 5,000명의 지지를 얻었다. 1913년에는 또 다른 섬유 공장의 여성 노동자 2,000명이 임금 인상, 유급 출산 휴가 및 기타 요구 사항을 요구하며 50일 가까이 파업을 벌였다. 그 후 5,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고무 공장에서 파업을 벌였다. 또 다른 여성 노동자들은 사장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섬유 공장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또 다른 3,0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향수와 파스타 공장을 마비시켰다. 합판 공장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비위생적인 작업 환경과 관리자의 성희롱에 항의했다.[40] 이것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정치 조직화를 촉진하면서 투쟁을 조직했던 사례들이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결국 노동자혁명에 성공하자 자본주의의 여성억압에 맞선 조치를 현실화했다.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여성해방 문제를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적 일부로 생각하고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하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온전한 해방을 이룰 수 없다”라며 “자본주의는 형식적 평등의 문제에서조차 일관될 수 없다. 가장 분명한 사례 하나가 바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이라고 봤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망명 중 작성된 1903년 최초의 당 강령의 초안에 “남성과 여성의 권리의 완전한 평등”에 대한 요구로 포함됐다. 이후 레닌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여성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법률을 남김없이 모두 단숨에 일소해 버림으로써 완전한 법률적 평등을 즉시 보장했다”고 밝혔다. 레닌은 여성이 여성으로서 겪는 특별한 억압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레닌은 매춘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원인을 사회적 조건에서 찾고 처벌 중심의 자유주의적 해결책을 비판했다. 산아 제한 운동의 계급적 성격을 분석하며, 소부르주아 자유주의자의 심리와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의 관점을 대비시켰다.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아제한은 빈민과 유색인종에 대한 강제불임 등에서처럼 종종 빈곤과 여성 억압의 산물로 나타난다고 봤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해야 하며, 동시에 낳지 않을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임신중지나 피임의 제한을 없애는 모든 법 개정을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는 농민들의 ‘수세기 된 가부장적 전통’이 여성에게 특히 잔혹한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비판했다. 레닌은 또한 당시 남성 공산주의자들이 집안일에 대해 무관심하며 여성 동지들을 가사노동에 방치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남성 내부의 교육과 사상 개조 또한 필수적이라 강조했다.[41] 레닌과 함께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싸웠던 레온 트로츠키는 특히 볼셰비키 혁명 뒤 물질적 토대를 구축해야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여성 해방 조치의 실현을 위해 분투했다. 그는 또한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적 가족 구조를 사회적으로 대체하고 여성의 역할을 해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봤다. 이를 위해 그는 당사자로서의 여성들에게 가사 노동의 최대한의 사회화를 위해 투쟁할 것을 촉구했고, 무엇보다도 여성들에게 무기력과 맹목적인 습관에 맞서 의식적으로 싸울 것을 호소했다.[42] 한편 러시아 혁명가들은 부르주아의 젠더규범과는 다른 노동자계급의 성적 실천을 추구했다. 여기에는 최초 볼셰비키 사회위원이었던 콜론타이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평가되며, 그의 사상은 혁명 포고령에 반영됐다. 콜론타이는 봉건주의에는 기사도적인 사랑이, 자본주의에는 부르주아 결혼과 매춘이 있었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지배 시기에 적합한 성적 사랑의 형태는 ‘동지애적 사랑’이라고 제안했다. 이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성과 사랑의 사유화와는 대조적으로, 여성이 완전히 평등하고 독립적인 사회주의 집단에 성적 사랑을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동지애적 사랑’의 핵심은 ‘완전한 자유, 평등, 진정한 우정’이었다. “‘파트너’의 육체뿐 아니라 감정까지 완전히 소유한다는 원리를 면밀히 발전시킨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다. 그 결과 그들은 소유권의 개념을 타인의 정신과 감정 세계 전부에 대한 권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했다. 이렇게 해서 가족 구조는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하던 시기에 강화되고 안정됐다.”[43] “노동자 국가에서는 남녀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확립돼야 한다. (...) 여성의 예속 상태에 기초를 둔 영속적 결혼은 사랑과 존중으로 뒷받침되는 노동자 국가의 두 구성원 사이의 자유로운 결합으로 대체돼야 한다. 이런 결합에서 남녀는 권리와 책임을 똑같이 평등하게 나눠 가질 것이다. (...) 그 속에서 모든 노동자가, 모든 남성과 여성이 동지가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남녀 관계일 것이다. (...) 새로운 형태는 (...) 애정과 동지애로 맺어진 결합일 것이고, 공산주의 사회의 평등한 두 인간이 맺는 결합일 것이다.”[44] 러시아혁명가들은 이러한 방향 속에서 자본주의 변혁 운동을 조직했다. 대표적으로 볼셰비키당은 가장 진보적인 여성들과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볼셰비키가 1917년 10월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노동자계급을 조직화하고 통합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일례로 모스크바에서 노동조합은 초기에 여성이 더 후진적이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하여 여성 조합원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이러한 생각은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모든 국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점차 가장 진보된 노동자들은 성별에 따른 노동계급 내 분열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주로 남성 노동자들로 구성된 모스크바 노동조합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전단을 배포하며 노동계급의 단결 운동을 시도했다.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노동자들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자리를 마련하고 공공탁아소와 공동식당, 공공세탁소 등을 개설하여 가사노동을 사회화했다. 볼셰비키는 경제적 평등을 위한 조치를 취했을 뿐 아니라 여성억압적인 제도 역시 뜯어고쳤다. 그 결과, 남녀는 법 앞에 평등해졌고, 이혼 절차가 간소화되었으며, 임신중지가 합법화, 성매매는 비범죄화됐다. 동성애 역시 합법화되었으며, 나아가 동성결혼도 보장했다. 형법에 성 행위에 관한 언급은 1922년 사라졌으며, 성범죄는 개인의 “생명, 건강, 자유, 존엄”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됐다. 이전과는 다르게 비혼모의 자녀도 법적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완전한 자유, 평등, 진정한 우정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관계가 꽃을 피웠다. 이러한 여성해방 조치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보다 최소 60년 이상 앞선 조치였다. 볼셰비키 정부는 법적 개혁뿐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가 구현해야 할 성평등 문화를 여러 캠페인을 통해 알려나갔다.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아내 구타나 직장 내 성폭력을 금지하는 캠페인이 수많은 포스터, 영화, 연극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혁명은 스탈린의 반혁명에 질식당했고 1917년 혁명 세대는 궤멸됐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미국 러시아혁명 연구자 웬디 골드먼이 그의 책 <여성·국가·혁명>에서 “스탈린 정권이 저지른 모든 범죄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스탈린 관료 체제가 ‘현실 사회주의’라고 온 세계가 믿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볼셰비키 혁명은 스탈린의 반혁명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여성해방을 노동자혁명의 중심 과제로 여겼고 이를 현실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5. 20세기 하반기 사회주의 페미니즘 논쟁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서구 자본가 정부들에 의해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었으며, 남성중심적인 서구 사민당이나 공산당처럼 주류 좌파는 여성억압을 경제 문제로 환원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편견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이 같은 조건에서 1970년대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억압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논쟁을 벌였고, 그 영향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여성억압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무급 가사노동의 성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1972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자인 마리아로사 달라코스타와 셀마 제임스[45]는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이라는 책에서 마르크스가 ‘생산적 노동’만이 교환가치를 창출한다고 밝힌 것을 ‘남성적’ 편견이라면서 마르크스의 정의가 대부분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결여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특히 가사노동은 가정에서 직접 소비할 사용가치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 능력이라는 필수 상품 노동력을 생산한다며, 주부들이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착취당하는 '생산적 노동자'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주부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표적 자율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 역시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적’이란 말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을 말하는 사전적 의미다. 잉여가치란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된 가치를 초과하는 나머지 가치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적 노동이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임금을 받는 노동, 즉 유급 노동을 의미한다. 가사노동은 노동자의 생존에 꼭 필요한 사용가치를 생산하지만,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의 생산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노동자는 그가 무엇인가를 생산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 또는 자본의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이다. (...) 그러므로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은 노동활동과 그 유용효과 사이의 관계, 즉 노동자와 그의 노동생산물 사이의 관계를 내포할 뿐 아니라 노동자를 자본의 직접적 가치증식 수단으로 만드는 특수한 사회적/역사적 생산관계도 내포한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46] 위의 표현처럼,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가치증식 수단으로 만드는 특수한 사회역사적 생산관계 때문에 오히려 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것은 오히려 불운이라고 말했다. 그 사회역사적 생산관계란 임금 노동자를 창출하기 위해 지배집단이 농민에게서 농토를 빼앗은 인클로저 운동과 같은 사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스페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마르티네스의 설명을 보면 이 같은 성격을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유급노동’이 아니다. 사실 가사노동은 생산적인 것도, 비생산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범주는 유급 노동에 적용되는 것이고, 자본주의적인 잉여가치 생산에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은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것들을 생산한다. 그것이 시장에서 비교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 가치를 측정하는 데 쓰이는 추상적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가사노동은 사적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는 유용한 노동이다. 이것은 곧 가사노동의 지속시간, 반복 주기, 구체적인 할 일 등을 자본가들이 직접 통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구별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노동력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노동자와 달리) 노동력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를 때,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종속돼 있으면서도 자율성을 유지하며, 자본의 통제에 종속돼 있지는 않다.[47] 즉,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재생산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가 생산과 재생산영역을 분리하고 노동력 재생산에 따르는 부담을 사적으로 여성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다. 즉 자본은 여성에게 무급 재생산 노동이라는 굴레를 씌웠는데, 오늘날 이 부담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즉, 재생산 노동은 꼭 필요하지만, 가치나 잉여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논쟁의 갈래를 잘 살펴야 하는 이유는 가사임금을 말하는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생산하고 있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해방을 위해 어떠한 변혁 전략을 취할 것인가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라코스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억압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주부들을 결집시키고 가사노동을 중단함으로써 가사임금을 쟁취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생산영역이 아닌 재생산영역을 계급투쟁의 영역으로 보면서 노동력이 사회적 공장에서 생산된다고 말하는 페데리치의 자율주의 페미니즘과도 같은 궤를 형성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중단은 자본주의적 여성억압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할지라도 자본가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가사노동이 자본가계급이 원하는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페데리치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말하는 ‘자율적인 재생산 공동체’는 어떻게 이러한 사회로 이행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반자본주의 전략이 부재하다. 이들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리즈 보겔은 마르크스가 체계화한 분석틀에서 여성억압의 근원을 찾았다. 그는 자본주의적 여성 억압의 근원을 가정 내의 개별적, 사적 관계로 함몰시키는 대신 노동력 재생산이 이뤄지는 사회적 구조에 주목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의 관계를 다뤘고,[48]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수행되는 여성의 역할에서 여성억압의 근원을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계급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항상 잉여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착취 가능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영원히 살 수 없으며, ‘마모되고 죽고’ 새로운 노동력으로 최소한 똑같은 양의 신선한 노동력이 계속해서 교체되어야 한다. 세대교체를 통한 교체가 이루어질 때, 여성이 출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성의 노동 능력이 출산 기간 동안 다소 제한되면서 지배계급에게 모순을 초래할 수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은 남성에 더 큰 생계유지 책임과 여성의 더 큰 필수 노동 책임, 그리고 가부장제를 이용했다. 결국 이 같은 조건에서 여성은 가정에서는 가사, 출산, 돌봄의 부담을 떠맡고, 직장에서는 남성이 중심이 되어, 여성은 ‘남성 가장’을 보조하는 ‘생계 보조자’로 위치지어진다. 이에 여성은 더욱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받으며, 나아가 가부장제는 노동자계급 내 젠더 위계와 분열을 유발하여, 계급적 단결을 가로 막아 자본이 노동력의 가치를 감소시킬 수 있도록 한다. 둘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가부장제 간의 관계에 관한 토론이다. 1970년대 서구에서 하이디 하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는 화해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환원주의’라며, 여성 억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두 개의 억압 체계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여성 억압을 설명하려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체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가부장제는 자율적인 억압 체계이며, 자본주의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봤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 불렀다. 그러나 리즈 보겔과 같은 다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 특히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더 가까운 이론가들은 여성 억압은 자본주의 내에서 기능하며,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종속된 관계라고 봤다. 따라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별개의 체계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하나의 물질적 토대 위에서 여성 억압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전자는 이원론/이중체계론 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으로, 후자는 일원론이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혼용해 쓴다. 한편, 일부 좌파는 페미니즘을 잘못된 관점으로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동일하게 보아 자본주의 여성억압에 맞선 운동을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이라고 부른다. 전진이 말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내용은 ‘6.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략’에서 살펴보자. 셋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계급환원론이라는 딱지다. 자율주의 페미니스트나 이중체계론자 그리고 최근에는 사회재생산 페미니스트까지 마르크스주의를 계급환원론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논지를 편다. 그러나 스페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호세피나 마르티네스가 잘 지적했듯이, “‘계급 환원론’이라는 용어에는 난점이 있다. 마치 ‘젠더’ 요구를 ‘계급’ 요구에 대립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젠더냐 계급이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내의 경제주의, 부문 주의, 조합주의 관점이다. 계급적 관점에서라면, 노동자 운동 내 분열과 모든 성차별, 인종차별, 그 밖의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제기할 것”이다.[49] 여성 억압에 관한 경제주의적 입장이 널리 퍼진 이유는 각국에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가부장적인 경제주의적 환원론을 취했고, 노동운동에서도 강력한 노동 관료제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노동 관료제는 여성, 가장 불안정한 처지의 청년, 이주민,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 등 노동자계급 내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부분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지키려 한다.”[50] 6.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략 이제까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적 전개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다시 간추리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물론적 관점에 따라 여성억압의 기원이 사적 소유에 있다고 봤다.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하여 생산과 재생산을 분리하고 재생산은 사적으로 여성에게 전가한다. 여기서 재생산노동은 원래부터 여성에게 부합하는 일이라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동원되어 차별적인 성별 노동 분업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변혁을 우회할 수 없다고 본다. 이를 위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과 노동자계급이 동맹하여 여성해방을 노동자혁명의 중심 과제로 여겼던 러시아 혁명을 원류로 삼는다. 이때 노동자들은 가사노동을 사회화했을 뿐 아니라 동성결혼의 권리 등 현재도 접근하기 어려운 수많은 권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이후 “스탈린주의와 노조 관료주의, 국가기구로 넘어간 사회운동가와 비영리 단체의 탈정치적 분열로 노동자계급과 여성 간 동맹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페미니즘은 젠더에 따른 일체의 차별과 억압을 폐지하려는 사상이지만,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 필요하다. 즉,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는 과연 ‘어떤 정치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돼야 한다. 우리는 그 정치란 노동자계급정치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노동자 헤게모니에 기초하여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그 토대부터 뒤엎을 변혁 전략을 취한다. “계급투쟁에서 헤게모니란 한 계급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서 다른 계급들과 다양한 사회세력들을 이끌 수 있는 힘”[51]을 뜻한다. 노동자 헤게모니의 전략은 노동자계급 중심의 동맹을 건설하여 작게는 개별 페미니즘 사안부터 가부장적 자본주의 철폐와 사회주의 사회 건설까지 여성억압 문제를 계급투쟁의 과제로 삼고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이 전개되어 왔고, 그 성과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차별적인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구나 최근 인셀(‘비자발적 독신자[Involuntary Celibate]’의 줄임말로 여성혐오 관념을 내재하고 있다) 문화처럼 여성과 성소수자는 점점 더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각 페미니즘 진영의 정치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부르주아 페미니즘은 자유, 평등, 정의라는 자유주의 가치에 근거하여 남성과의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운동으로 특히 법적, 인습적 차별을 폐지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나 이들이 성차별을 폐지하려는 이유는 남성과 공정하게 경쟁하려는 데 있다. 때문에 이들이 원하는 체제는 ‘성평등한 자본주의’로 요약되지만, 자본주의는 애초 여성억압적이기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요구라 할 수 있다. 여성의 현실이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상층 계급의 여성에 한정된다. 급진주의(분리주의) 페미니즘은 이 체제를 남성지배체제로, 사회의 위계와 모순을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성차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사실상 가부장제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 외의 역사적 설명을 하지 못하며, 계급이 아닌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적대하여 트랜스젠더 혐오와 성차별적인 분리주의로 귀결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사회 불만을 약자에게 전가하는 지배질서에 의해 극우화 경향이 확산되는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2008년 자본주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새로운 저항 운동이 등장하면서 페미니즘 운동, 성소수자 권리 운동, 인종차별 철폐 운동 등 다양한 억압받는 집단 간의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서 ‘교차성’의 개념이 관심을 모은 데서 비롯됐다. 특히 국내에선 페미니즘 대중화와 맞물려 부상한 터프(TERF,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에 반대하여 선호되었다. 이러한 교차성은 터프 등 분리주의나 전체주의 세력에 반하여 다양한 하위계층이 겪는 억압을 조명하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교차성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변혁 전략이 모호하다. 이를테면 교차성은 여러 정체성 중의 하나로 계급을 취급하는 경향이 있으며, 인종이나 성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두지만 계급은 평가절하된다. 그러나 애초 1970년대 사회주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단체 콤바이 리버 콜렉티브(CRC)의 정체성 담론은 계급을 여러 정체성 중 하나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이면서 흑인여성이자 레즈비언으로서 경험하는 억압을 말하기 위해 정체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동구 붕괴 뒤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행 속에서 콤바히 리버 콜렉티브가 제기한 정체성에 관한 문제의식은 탈계급화한다. 물론, 여성과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모든 문제가 계급으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억압과 착취의 범주를 명확히 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계급은 착취의 영역이며, 성과 인종 등 이른바 정체성은 억압과 차별의 영역이다. 잉여가치 생산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은 다양한 정체성을 활용하여 차별과 억압을 재생산함으로써 착취를 강화한다. 이러한 페미니즘 진영과 다르게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억압의 원인을 찾는다. 이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변혁운동을 조직한다. 이를 위한 핵심적 과제는 노동자계급과 페미니즘 운동 간 역사적 동맹을 다시 세워내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페미니즘을 노동자계급 투쟁의 과제로 세워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혁명적 페미니즘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사회주의 여성단체 ‘빵과장미(Pan y Rosas)’”를 참조한다. 7. 빵과장미 사례 빵과장미는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창립해 지금은 수천 명으로 성장했고, 멕시코와 스페인, 프랑스 등 14개국에서도 생겨나 국제네트워크를 결성하고 있다. 이러한 빵과장미는 “이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만 전 세계 여성의 삶에 만연한 성차별도 끝장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기반으로 삼는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과 성소수자가 진짜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사회주의혁명만이 여성억압을 끝장낼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 주체는 자본주의 체계가 억압하고 착취하는 노동자계급 당사자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페미니즘 운동과 단결하고, 유색인종·원주민·성소수자를 비롯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운동과 단결하면 무적의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빵과장미는 페미니즘 운동을 노동자계급과 연결하고 이들의 요구로 채택하도록 밀어 올리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페미니즘 운동을 현장에서 일궈왔다. 빵과장미는 전국 곳곳의 공장과 작업장에 여성위원회(여기에는 여성 노동자뿐 아니라 남성 노동자의 배우자나 어머니, 딸도 포함된다)를 조직하기 위해 애써왔고, 성평등을 위해 수많은 계급투쟁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펩시코공장에서는 하청제도에 반대하고 출산휴가를 늘리며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이끌어 왔다. 남성만 고용했던 마디그라프의 한 공장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일했던 트랜스여성이 여성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업을 조직하기도 했다. 크라프트 공장에서도 한 여성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자, 여성위원회가 파업을 조직했다. 참혹한 여성살해에 떨쳐 일어나 아르헨티나를 뒤흔든 니우나메노스 시위에 이어 임신중지 권리 쟁취 투쟁에서도 현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노조 지도부가 여성파업에 가세하도록 끈질기게 압력을 조직했다. 또 나아가 “한 명도 더 일자리를 잃을 수 없다”, “하청제도는 (여성) 폭력이다”라는 구호를 비롯해 니우나메노스 운동 속에서도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조직했다. 결국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몇십 명으로 시작된 빵과장미는 이제 수천 명의 회원과 지지자를 결집해 단독으로 대중적인 집회까지 조직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러한 빵과장미는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위기 동안 벌어진 수많은 공장점거를 비롯한 노동자투쟁 속에서 태어났다. 그중 하나가 여성 노동자가 다수인 브루크만 의류 공장에서 일어났는데 이들은 경찰에 맞서 대결했고, 이 투쟁은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빵과장미 운동을 조직하는 데 주요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들에게 여성의 권리란 사회주의를 통한 노동자의 집단적인 해방 투쟁의 일부였다. 더구나 국내 민주당처럼 말로만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또 다른 자본주의 정치세력 키르치네르 정부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조직돼야 할 필요성은 점점 더 분명해지면서 빵과장미는 힘을 키워 나갔다.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을 우회할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략의 핵심은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반자본주의의 계급동맹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은 함께 여성억압, 성소수자 혐오,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양자의 연대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와 계급투쟁으로 이뤄지는 체제 변혁을 위한 전략이다. 노동자혁명으로 쟁취한 사회주의 사회는 여성해방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사적 소유와 임금 노동이 폐지된 사회에서 해방되어 노동자 자신이 생산과 재생산을 통제하여 여성억압의 물질적 기반을 제거하고,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생물학적 성 중심주의나 성별이분법이 아닌 연대적인 새로운 젠더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노동자계급과 페미니즘 운동과의 계급적 동맹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 운동, 즉 노동자계급으로서 여성과 퀴어, 청소년, 억압받는 우리 자신의 변혁적 여성운동을 조직하는 것이다.(끝) [참고]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여성운동위원회, 《변혁적 여성운동 네트워크 건설을 위한 토론회》 자료집, 2022.11 양준석,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전략》 오연홍 편, 김요한·양동민·양준석·오연홍·전해성 옮김,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2023 정은희, <식민지 조선의 낙태죄와 세계 자본주의>, 《검은 시위》, 무산여성, 2023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웅진씽크빅, 2010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재만 옮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2014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2012 Andrea D’Atri, Translated by Nathaniel Flakin, 《Bread and Roses》, PLUTO PRESS, 2021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Brill, 2013 ※'관련기사'란에서 기초학습 다른 시리즈를 찾아 읽어보세요. ------------------ [1]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고, 임금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이윤)를 창출하는 계급 사회의 경제 체제 [2] 클라라 체트킨, <오직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함께해야만 사회주의는 승리할 수 있다> https://www.marxists.org/deutsch/archiv/zetkin/1896/10/proletfrau.html [3]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Brill, 2013, 153p [4] Andrea D’Atri, Translated by Nathaniel Flakin, Bread and Roses, PLUTO PRESEE, 2021 [5] 앞의 책 [6] Honeycutt, Karen. "Clara Zetkin: A Socialist Approach to the Problem of Woman's Oppression." Feminist Studies, vol. 3, no. 3/4, 1976, pp. 131–144 [7]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제2 인터내셔널에 속한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자국 전쟁을 지지하면서 분열됐을 때 노동자 국제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도 이들 여성 혁명가들이었다. [8] 셀레스테 무리쇼·안드레아 다트리, <생산과 재생산>,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2023, 134쪽 [9]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 돌베개, 301-309쪽 [10] 강남식, 《한국 여성운동의 흐름과 쟁점》, 기억과 전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11] 여성평우회는 1920년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여성운동이 창설한 근우회를 조직 모델로 삼았다. 유경순, <1980년대 여성평우회의 기층여성 중심의 활동과 여성운동의 방향 논쟁>, 《역사문제연구》, 2020, vol.24, no.1, 통권 43호 pp. 457-499 [12] 앞의 글 [13] 최상림, <여성노동운동 지평확산을 위한 연대모색의 방향>, 《한국 여성노동자의 현실과 여성노동운동》, 전태일 35주기 기념 대토론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14] 정다울, 이나영, <대학 여성운동을 역사화하기: 대학 사회 및 한국 여성운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제28집 1권, 2020 [15] 1995년 북경대회가 주창. 강남식, 한국 여성운동의 흐름과 쟁점, 기억과 전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16] 대표적으로 김대중 대통령 취임에 앞서 평민당에 합류한 이우정, 박영숙은 1세대 여성운동가로 각각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대표, 부대표를 지냈으며, 초대 여성부장관으로 임명된 한명숙 의원도 여연 상임대표 출신. 이후 민주당 공직자나 정부 관료로 진출하는 여성운동가의 수와 단체는 여연에 이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정치연구소 등으로 그 폭이 넓어졌음. [17] 앞의 책 [18] 정성미, <비정규직 여성근로자의 고용특징>, 한국노동연구원, 2005 [19] http://women21.or.kr/policy/3623 [20] 앞선 20여 년간 합계출산율은 1.5~1.7명 사이로 유지했지만, 1998년에는 1.46명, 2002년에는 1.18명으로 급격하게 낮아졌다. [21] 2002년 국민연금발전위원회가 ‘저출산’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해 사회적으로 공론화했다. [22] https://www.betterfuture.go.kr/front/policySpace/basicPlanDetail.do;jsessionid=50834218BBCA6D108693F71F18E941BF.node20?articleId=1 [23] http://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3059713069 [24]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재만 옮김,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라티오, 2014, 193-194쪽 [25] 앞의 책, 200쪽 [26] 앞의 책, 213쪽 [27]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엥겔스, 여성 노동자, 사회주의 페미니즘>, 《빵과장미의 도전》, 숨쉬는책공장, 2023, 156쪽 [28]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2012, 8-9쪽 [29] 앞의 책, 92-94쪽 [30] 앞의 책, 104쪽 [31] 앞의 책, 125-126쪽 [32]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빵과장미의 도전》, 174쪽 [33] 앞의 책, 129쪽 [34]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웅진씽크빅, 2010, 249-251쪽 [35]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하), 533-544쪽 [36]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하), 534-544쪽 [37]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권(상), 223-224쪽 [38]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엥겔스, 여성 노동자, 사회주의 페미니즘>, 《빵과장미의 도전》, 154쪽 [39] Andrea D’Atri, Translated by Nathaniel Flakin, Bread and Roses, PLUTO PRESEE, 2021 [40] Andrea D’Atri, Translated by Nathaniel Flakin, Bread and Roses, PLUTO PRESEE, 2021 [41] Lise Vogel,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Brill, 2013 [42] 안드레아 다트리, <레온 트로츠키 저작 속의 여성 문제> https://www.leftvoice.org/the-woman-question-in-the-work-of-leon-trotsky/ [43]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 https://www.marxists.org/archive/kollonta/1921/sex-class-struggle.htm [44]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공산주의와 가족> https://www.marxists.org/archive/kollonta/1920/communism-family.htm [45] 그들은 뉴욕의 실비아 페데리치 등과 함께 국제페미니스트연합을 결성하고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을 벌였다. [46] 카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자본론》 1권(하), 688쪽 [47]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빵과장미의 도전》, 179-180쪽 [48] 사회주의를향한전진 내부토론회, <사회 재생산과 계급 환원론>, 2023.7.25 [49] 호세피나 마르티네스, <사회적 재생산 페미니즘인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인가>, 《빵과장미의 도전》, 172-173쪽 [50] 앞의 책 [51] 양준석,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전략》, 48쪽 [앞선 시리즈 읽기] #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 [다음 시리즈 읽기] #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2025-12-07 | 조회 14,032 -
[사회주의 기초학습#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1. 들어가며 오늘,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쟁은 동유럽과 중동을 불태우고 있다. 세계 각국 극우세력은 이민자, 여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선동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저출생에도 재생산 책임은 노동자 민중의 몫으로 맡겨진다. 기후재앙은 일상이 되었고, 그 피해는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민중에게 집중된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분노 역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개혁인가, 혁명인가. 선거를 통해, 제도를 조금씩 고치며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이 체제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혁명이 필요한가? 개량주의는 말한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피를 흘리지 않고 점진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다면 그 편이 낫지 않겠냐고. 더 나은 법, 더 진보적인 정권, 더 세련된 정책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자고.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점진적 개혁의 약속이 어디로 향했는지,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에 똑똑히 목격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조직된 노동자 정당이, 전쟁과 학살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 그날이었다. 2. 1914년 8월 4일, 노동자당이 자본가들의 전쟁에 뛰어들다 1914년 8월 4일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날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 전원은 1차 세계대전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 “우리는 위험의 순간에 조국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함께. 뒷날 독일 혁명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동료 혁명가 칼 리프크네히트조차 전날 확인된 사회민주당 의원단 당론을 거스르지 못하고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노동자당은 그렇게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독일정부의 전쟁에 찬동했다. 1889년 창립 이래, 제2인터내셔널은 거의 모든 대회에서 전쟁반대 결의안을 채택해왔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 인터내셔널의 기둥이었다. 전쟁공채 찬성 표결 불과 5일 전인 1914년 7월 하순에조차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의지를 다지는 한편, 세르비아 사태가 격화되어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종언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던 차였다.[1] 그런 독일 사회민주당이 독일 황제와 나란히 섰다는 소식은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날벼락이었다. 스위스에서 소식을 받아본 레닌은 이를 ‘가짜 뉴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8월 4일 제국의회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군사 공채에 찬성 투표를 던졌다는 기사가 담긴 <전진>이 스위스에 도착하자, 레닌은 이것은 독일의 참모본부가 적을 속이고 위협하기 위해 찍어낸 가짜 신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판적인 정신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믿음이 아직도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2]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모범으로 추앙받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뛰어든 이후 각국 노동자들은 조국방어를 외치며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동자계급 국제주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다음을 보자. 「곳곳의 사회주의자들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면서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람들은 동부의 전제정에 맞서 유럽문화를 수호한다고 했고, 독인인들은 차르의 폭정에서 여러 민족을 해방시킴으로써 유럽문화를 지킨다고 했으며,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프로이센의 족쇄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방어한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민족주의적인 목적에 맞게 혁명전쟁이라는 자코뱅의 유산이 개조되었고,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는 차르정에 대한 민주주의의 저주가 개작되었다. …… 1915년 빈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독립과 러시아에 맞선 방어’ 따위의 미사여구를 들먹였지만, 독일군의 벨기에 진격으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도덕적으로 크게 불리해졌다.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 등의 사회주의자들은 독일 사회주의자들을 군사침략을 승인했다고 비난했다. 1915년 2월 14일에 런던에서는 프랑스, 벨기에, 영국의 사회주의 정당과 러시아의 사회혁명당이 모여 자신들의 전쟁 참여의 명분을 다듬었다. 그것은 독일에 맞선 전쟁이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고, 독일의 패배가 민주주의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했다.」[3] 물론, 마르크스 본인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전쟁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해방 전쟁을 비롯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 등, 더 진보적인 편의 승리가 진보적 역사 발전을 촉진하는 경우 해당 편을 지지했다.[4] 그러나 1914년 유럽 열강 간의 전쟁은 시장과 식민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진보적 성격도 없었다. 제국주의 전쟁에 국경을 초월하는 노동자의 단결로 맞서자고 결의하던 2인터내셔널은 완전히 파산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 거대한 배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사상적 기반 위에서 준비되고, 어떤 일상적 실천 속에서 그 맹아가 확대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단지 지도자 몇 명의 배신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정치노선과 조직 구조가 이미 개량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사회민주당 내부 노선투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3. 혁명인가 개량인가 - 베른슈타인과 독일 사회민주당 수정주의 논쟁 1) 독일 사회민주당의 형성과 성장 ‘1914년 8월 4일’이라는 비극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준비되어 왔다. 잠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자. 19세기 중후반 이후 유럽 노동운동은 대중적, 정치적, 국제적 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는 1889년 각국 노동자 정당의 국제 결사체인 제2인터내셔널 창립으로 이어진다.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바쿠닌, 프루동, 블랑키 등과 내부 논쟁을 겪으며 체계적으로 형성된 맑스주의는, 이제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그 2인터내셔널 중심에 1875년 창립된 독일 사회민주당이 있었다. 1850~60년대를 거치며, 독일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산업화 진척과 함께 1850년대 말에는 프로이센 왕정의 정치 탄압도 완화되어, 1848년 혁명 패배 이후 붕괴되었던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조직들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 탄압이 다소 완화되었을 뿐, 여전히 의회는 결정력을 가진 기구가 아니라 국왕의 자문기구 수준에 불과했으며 그 의회조차도 재산(세금 납부액)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선거권에 차별을 두는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의회나 내각에 진출하기도 했고 보통선거권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거부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의 권익도 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근면하게 일하고 교육 받으며 협동조합 등을 설립하는 자조(自助) 방식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은, 전제왕정에 저항하거나 비판적이었던 지주, 자본가, 지식인 등과 노동자계급 자신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요구가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1863년 지식인이자 노동운동가인 라쌀레(Ferdinand Lassalle)의 지도하에 “독일 노동자총연맹”이 창설되었다. 1869년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 주도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이 결성되었다. 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같은 목적의 정치조직이 별개로 건설되었는가? 라쌀레가 지도하는 독일 노동자총연맹 강령(1867년)과 베벨·리프크네히트가 지도하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강령(1869년) 모두 ‘자유로운 인민 국가’, ‘자본주의 생산양식 폐지’, ‘민주주의 국가 건설’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건설의 방법과 경로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독일노동자총연맹은 ‘의회 진출과 국가의 도움을 통한 생산자 협동조합 확대’를 목표로 했다. 라쌀레는 자본가들에 맞서 생산자 협동조합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라쌀레 세력은 보수주의자들, 즉 대지주들과의 타협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맑스주의에 따라 국가를 지배계급의 도구로 보고 ‘계급투쟁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했으며,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하지 않는 이상 협동조합만으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독일 통일[5]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제시한 독일 노동자총연맹의 강령과,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의 강령은 사회주의 건설의 방법론에 있어 차이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18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이르러 격렬해지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조합의 결성으로 양 조직은 실질적인 공동투쟁을 하고 있었고, 더욱이 1871년 프랑스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과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에 놀란 비스마르크 정부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함에 따라 두 조직의 통합이 요구되었다. 마침내 1874년 12월 통합협상이 시작되었고, 강령 합의가 이루어졌다. 1875년 5월, 튀링겐의 고타(Gotha)에서 통합대회가 열리고 강령이 통과되면서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탄생했다. 이 당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이다.[6] 19세기말, 독일 노동자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잘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성장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Reichstag) 선거 득표율 수치는 다음과 같다. 제국의회 선거 독일 사회민주당 득표 1877년 선거 49만 3,447표 (9.1%, 13석) 1887년 선거 76만 3천 표 (10.1%, 11석) 1890년 선거 142만 7천 표 (19.7%, 35석) 1907년 선거 325만 9천 표 (29.0%, 43석) 1912년 선거 425만 표 (34.8%, 110석) 1914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원 수는 108만 6천 명이나 되었고, 당은 260만 조합원이 속한 노동조합(자유노련)의 지지를 받았다. 사회민주당은 독일의 모든 도시에 유통되는 일간지, 소비조합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동자 우표수집 동호회, 노동자 토끼사육 동호회 등도 있었다. 노동자 합창단 회원은 20만명, 노동자 사이클 클럽의 회원은 13만 명이나 되었다.[7] 이대로라면 사회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승리는 역사의 필연으로 보였다. 「노동자당과 사회주의당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극도의 주의와 주목을 끌었다. 과거의 성장세에 근거하여, 그들의 지도자들은 승리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인민의 다수가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들 정당에 참여하고 있다. … 1880년대 이래로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들의 급격한 부상이 정당들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의 지지자나 구성원들에게도 흥분과 희망, 즉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장과 작업장 그리고 광산에서 직접 노동하던 이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그와 같은 희망의 시대가 있어본 적이 없었다.」[8] 그러나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서, 어떤 이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데, 혁명은 과연 필요한가? 2) 자본주의는 진화하는데, 붕괴는 대체 언제 온다는 말인가? - 베른슈타인의 문제 제기 독일 사회민주당이 성장하던 19세기 말, 당 이론가 그룹의 일원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사회주의의 문제들’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당 기관지에 연재했다. ‘수정주의 논쟁’의 시작이었다.[9] 이 논문은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커다란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1898년 슈투트가르트 당대회는 베른슈타인에 대한 격한 비판과 함께 다음 해 당대회에 베른슈타인의 해명서를 요구한다. 이에 1899년,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를 출판하며 자기 견해를 변호했다. 베른슈타인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이 전제하던 자본주의 붕괴론을 비판했는데, 비판의 주된 근거는 자본주의의 적응 능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가 자기 모순에 따라 필연적으로 붕괴한다고 전제해왔으나, 베른슈타인이 보기에 그 믿음에는 근거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맑스가 살아있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카르텔과 트러스트 등 독점자본의 기업조직이 시장경쟁을 제한하여 경제공황의 규모와 빈도를 완화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금융 수단의 발달, 통신수단 등의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식회사의 발전에 따라 자본의 소유가 다수에게 분산되는 한편, 인구 대다수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는 ‘계급의 양극분해’가 나타나지 않고 중간계급이 두텁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 투쟁의 성과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고 있다는 점, 이에 더해 민주주의 제도가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당의 과제는 혁명[10]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내에서 노동자의 경제적 처우를 개선하고 의석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베른슈타인은 독일의 식민지 획득에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다른 제국주의 열강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점점 더 식민지 생산물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식민지는 개발·보호되어야 하며, 독일 같은 문명국은 미개민족의 영토에 대해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11] 수정주의 논쟁에 착수한 베른슈타인의 중심 문제의식은, 당의 실천은 자본주의 ‘개혁’으로 굳어져 있음에도 당의 이론은 ‘혁명’이라는 문구에 매달리고 있으니 현실에 맞게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늘날 중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으며 점진적 개혁이 당의 과제다. 즉, 사회민주당은 ‘목표’를 폐기해야 한다! 베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을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 목표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에게는 무(無)이며, 운동이 전부이다.」 ‘사회주의의 교황’ 칼 카우츠키, 독일 사회민주당에 갓 입당한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더 파르부스, 프란츠 메링 등이 베른슈타인을 비판했다. 심지어 당내 우파들 역시 당대회에서 베른슈타인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민주당 우파들에게 이론과 원칙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실천과 무관한 당내 분란’에 불과했으며, 골치 아픈 논쟁 없이도 충분히 의회주의적-개량주의적 실천을 주요 흐름으로 만들고 있었다. 독일 사회민주당 우파의 일원 이그나츠 아우어(Ignaz Auer)는 베른슈타인에게 “친애하는 에데(베른슈타인의 애칭),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표결에 부칠 일이 아닙니다. 그냥 조용히 그렇게 실천하면 될 일입니다”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이론’은 여전히 혁명을 지지했다. 1899년 하노버 당대회에서 카우츠키와 베벨은 베른슈타인의 견해를 강력히 비판했고, 베벨은 수정주의 비판 결의안을 제출해 216대 21로 가결되었다. “당은 계속 계급투쟁의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자유는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1901년 뤼벡 당 대회에서, 베벨은 다시 베른슈타인을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은 “나는 당의 프로그램이나 실천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론을 비판했을 뿐”이라며 항변했지만, 대회는 203대 31로 비판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었다. “베른슈타인은 앞으로 당의 다수 결정에 따라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 베른슈타인은 당대회에서 혹독히 비판받았고, 1900년 초 사회민주당 기관지 편집진에서 사임했다. 이렇듯 표면적으로는 수정주의가 철저히 패배한 것으로 보였으나, 앞서 말했듯 수정주의자들의 실천과 수정주의 비판자들의 실천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사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일상적 실천을 이론으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개량주의적 실천과 함께 언젠가 올 혁명을 기다리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노선이라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목표를 간직하는 것이 대체 왜 중요하다는 말인가? 베른슈타인이 쓴 것은 하나의 ‘논문’이었지만, 사회민주당의 다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말로는 혁명을 외치되, 실천은 개량으로 귀결되는 이중성. 독일 사회민주당의 위기는 바로 이론과 실천의 괴리, 즉 이데올로기로만 혁명을 유지한 채 실천에서는 제거한 모순에 있었다. 4. 수정주의 대두의 배경 1)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강대국 대열에 합류했다.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은 노동자계급에게 물질적 양보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민주적 제도의 발전은 ‘계급투쟁이 완화되고 있다’는 진단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성과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있고, 실제로 고쳐쓰고 있다’는 착시를 심어주었고, 자본주의의 진화에 조응하는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즉, 자본주의의 성장은 사회민주당 내부에서 혁명적 전망을 희미하게 만들었고, 이미 존재하던 ‘실천적 수정주의’를 ‘이론적 수정주의’로도 돌출시켰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붕괴론이며 또한 현재 독일의 경제발전 수준과 도시와 농촌에 있는 노동자계급의 성숙도를 감안할 때 사회민주당이 급작스런 독일자본주의의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이 물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며 특히 끊임없이 이어져온 내 견해로는 독일 자본주의가 지속적인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보다 더 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우리는 선진국 도처에서 계급투쟁이 점차 완화된 형태를 띠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것은 별로 변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지 않다.」[12] 실제로 1차대전 발발 전 반세기 동안 유럽은 발칸반도 변경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쟁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화로웠다. 유럽은 거의 반세기에 걸친 평화의 기간 동안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의회주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가 동시에 번성하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두 세대에 걸쳐 유럽인들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 논의, 화해, 그리고 다수결에 따른 투표를 통해 사회환경을 변화시키고 완성시킬 정도로 진보했다는 낙관적 믿음 속에서 성장했다. 유럽 전체에서 부의 축적은 너무나 인상적이고 빨랐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계급들에게 번영의 증대를 보장하고 격렬한 사회 갈등을 배제하는 듯했다.[13] 2) 본격화하는 제국주의 시대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의 인식은 당대, 그리고 닥쳐올 시대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인식조차 결여하고 있었다. 바로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식민지 획득을 둘러싼 열강 사이의 투쟁이 격화하고 있었고 세계는 초유의 ‘대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1884년 열강 사이의 아프리카 분할을 조정하기 위한 베를린 회의가 있었고, 1898년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충돌하는 파쇼다 사건이 있었으며, 1899년 영국이 오늘날의 남아공을 병합한 보어전쟁, 1900년 독일을 포함한 8개 열강의 베이징 점령이 있었다. 다음은 1900년 7월 27일, 중국으로 떠나는 군대를 향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연설이다. 소위 ‘훈족의 연설’로 불리는 이 연설은 학살을 주문하는 잔인성으로 유명하다. 「적을 만나면 반드시 물리쳐라! 자비를 베풀지 마라! 포로를 만들지 마라! 너희 손에 떨어지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천 년 전 훈족이 그들의 왕 아틸라 아래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역사와 전설 속에 위대하게 남겼듯이, 너희도 중국에서 독일이라는 이름을 그렇게 각인시켜라. 다시는 어떤 중국인도 독일인을 곁눈질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라.」[14] 시대적 상황은 명확했다. 세계는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15]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1871년 독일 제국 통일 이후, 독일은 뒤늦게 식민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며 식민지를 통해 값싼 원자재를 확보하고 투자처를 넓히려 했다. 이렇듯 독일 제국주의가 본격화하는 상황에서도 베른슈타인은 식민지 확보를 비판하기는커녕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심지어 식민지 민중을 유럽의 문명화 대상으로 놓는 시각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시각과 하등 다르지 않다. 「독일이 현재 매년 상당량의 식민지 생산물을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언젠가 그 일부를 자국 식민지에서 조달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아무리 사회주의자들이 독일에서 자신들의 발전 속도를 낙관적으로 본다 해도, 다른 수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로 전환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그리고 열대 농장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면, 우리가 직접 열대 농장을 경작하는 것도 비난받을 일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부(whether)”가 아니라 “어떻게(how)”이다. 유럽인이 열대지방을 점유하는 것이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해치는 결과를 반드시 초래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실제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미개인들(savages)의 권리는 조건적 권리로만 인정될 수 있다. 보다 높은 문명이 결국 더 높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16] 심지어 베른슈타인은 1897년 독일의 칭다오 점령과 교주만 조차(租借, 타국 영토 일부를 일정 기간 빌려 통치하는 행위. 유명 사례로 영국의 홍콩 조차)까지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들어 합리화한다. ‘독일이 중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도, 중국은 어차피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자본주의 속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에 예속되었을 것이다, 교주만 조차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것이 베른슈타인의 논리였다. 이런 흐름은 독일 국가의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과도 맞물렸다. ‘복지국가’의 원형은 스웨덴도, 영국도 아닌 1880년대 독일이다. 독일 국가는 1883년 건강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노령 및 장애연금법을 제정했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비스마르크가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한 목적은 계급투쟁 격화의 방지였다. 사회주의자들의 세력 확대를 막고, 혁명을 예방하려고 했던 것이다.[17] 1871년 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이 지배계급에 남긴 두려움 역시 중요한 배경이다. 물론 사회보장제도 확대 같은 ‘당근’뿐만이 아니라 ‘채찍’ 또한 있었다. 독일은 1878년 ‘사회주의금지법’을 제정해 사회주의자들의 집회·결사, 출판 등을 금지했다. (사회주의금지법은 사회민주당을 강제 해산하지는 않았으나, 정당 활동을 의회로 제한했다.) 즉, 비스마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자계급을 제도 내로 유인하고 국가가 정한 경계 안에 가두고자 한 것이다. 3) 독일사회민주당에 고질적인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의 분리, 이론과 실천의 분리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흔히 최대강령으로 불리는 첫 번째 부분은 칼 카우츠키가 작성한 것으로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주의로의 지향을 서술하고 있다. 최소강령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부분은 베른슈타인이 작성한 것으로 당면 실천과제로서 일반적 민주주의적 요구들과 노동자계급의 복지를 위한 개량적 조치들을 정식화했다. 당 강령은 분명 사회주의적 전망과 현실 개량을 동시에 담고 있었지만, 두 영역은 별개의 궤도로 움직였다. 문제는 양자의 연결이었다. 최대강령에 표현된 사회주의적 원리와, 당시 사회의 법적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는 민주주의적 실천과제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었으나, 카우츠키를 비롯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사 발전에 따라, 언젠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저절로 그 간극을 메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혁명은 필연적인, 그러나 먼 훗날의 일에 불과했다. 엥겔스의 비판을 보자. 「가재가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는 것 같이 사회도 필연적으로 낡은 사회 체제로부터 성장하여 그 낡은 껍질을 폭력적으로 깨뜨려야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자문해 보지 않고, 게다가 마치 독일 사회는 여전한 반(半) 절대주의적 족쇄와 더 나아가서는 형언할 수 없이 혼란한 정치적 질서를 깨뜨릴 필요가 없는 것처럼, “오늘날의 사회는 사회주의로 성장해 갈 것이다”라고 자신들과 당에게 그럴싸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 그들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정치적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워 당면한 구체적 문제들, 즉 일찍이 없었던 대사건들이나 일찍이 없었던 정치적 위기가 도래하면 저절로 일정에 오르게 되는 문제들을 덮어두고 있다.」[18] 엥겔스의 예언적 비판은 1차대전으로 현실이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부터 나오는 개량과 환상에 절여져있었고 그 결과는 양자의 정치적 파산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그 이데올로기, 표어, 상징을 지난 세기의 혁명기로부터, 1848년의 대격변으로부터, 1871년의 파리코뮌으로부터, 그리고 비스마르크에 맞선 독일 사회주의의 지하투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 표어와 상징은 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과, 부르주아 정부의 타도를 지향하는 가차 없는 계급투쟁을 주창했다. 그런데 그 이래 오랫동안 사회주의 정당들의 실제 활동은 이런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가차 없는 계급투쟁은 평화적 거래와 의회주의적 개량주의에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런 방식이 점차 성공을 거둠에 따라, 사회민주당·노조와 정부·고용주 단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국가적 이익과 관점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국제주의 표어보다 더 우세하게 퍼져나갔다. 1914년까지 사회주의 정당들은 여전히 습관화된 혁명용어로 그들의 개량주의적 활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했다.[19] 노동자당이 체제에 길들여져온 결과는 1차 대전 동조라는 대재앙이었다. 4) 독일사민당 총파업 논쟁이 드러낸 것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총파업이 차르 전제정을 위협할 정도로 확산되자, 그 파장은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도 거세게 미쳤다.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독일 좌파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당내 좌파는 총파업을 혁명 전략의 핵심 전술로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을 관찰한 그녀는, 대중파업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혁명으로 나아가는 긴 과정의 일부이며, 혁명의 발단이자 그에 필요한 조직과 의식을 창출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대중파업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구분을 지우며 종합함으로써, 양자를 계급투쟁으로 고양하는 매개라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은 ‘정당의 입법 정치투쟁’, ‘노동조합의 임단협 경제투쟁’이라는 기계적 역할분담을 지양한다. 계급투쟁은 착취를 제한하는 투쟁이자, 착취를 폐지하는 투쟁이다. 「정치적·경제적 투쟁의 분리와 그 각각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의회주의 시기의 인위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 평화롭고 '정상적인' 흐름 속에서는 경제투쟁이 각각의 작업장과 생산 부문에서 수많은 개별 투쟁으로 분열되어 흩어진다. 반면 정치투쟁은 … 부르주아 국가의 형식에 맞춰 대의제 방식, 즉 입법기관의 대표자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수행된다. 그러나 일단 혁명적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고 대중이 투쟁 무대에 등장하면, 경제투쟁의 분절화도, 정치투쟁의 간접적인 의회적 형태도 사라진다. 혁명적 대중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가 되며,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라는 노동운동의 두 조직을 서로 분리하고 완전히 독립된 형태로 놓는 인위적 경계선도 쓸려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대중운동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의회주의 시기에도 현실 속에서는 사실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은 단지 혁명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회주의 시기에도 실제 현실로 존재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에는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두 별개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계급투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착취를 제한하려는 투쟁이자,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와 함께 착취를 폐지하려는 투쟁이다.」[20] 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반응은 일치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독일 노동조합 지도부는 정치총파업을 극렬히 반대했다. 이들은 1905년 루르 지역 광부 2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광산 파업과 그 여파로 벌어진 파업 물결을 조직 확장의 계기보다는 재정적‧정치적 부담으로 인식했다. 1905년 쾰른에서 열린 노동조합(자유노련) 대회는 압도적 다수의 결의로 총파업 전술에 반대했다. “아나키스트들이나 경제투쟁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자들이 주장하는 총파업은 대회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대회는 노동자들에게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일이 일상적인 조직강화 활동을 저해하지 않도록 경고한다.”[21] 흥미롭게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포함한 일부 수정주의자들은 정치총파업에 일정한 지지를 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개혁, 예컨대 보통선거권 쟁취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서, 통제 가능한 전술에 불과했다. 그들의 정치총파업론은 혁명의 촉진이 아니라, 협상력 제고 수단에 가까웠다. 이에 비해 룩셈부르크는 러시아 현지에서 목격한 경험을 통해 다른 전망을 제시했다.[22] 그녀는 『대중파업론』에서 러시아 혁명의 총파업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의식과 조직을 혁명적으로 성장시키는 결정적 계기라고 주장했다. 대중파업은 가장 낙후된 노동자들도 스스로 투쟁 주체로 등장하게 만든다. 이는 단지 의회 압박의 도구가 아니라, 혁명적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1905년 9월 예나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당대회는 논쟁 끝에 총파업을 당의 전술 중 하나로 공식 채택했다. 그러나 당대회는 총파업이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막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라는 점을 인정하되, 혁명적 투쟁 수단으로 보는 것은 거부했다. 이는 좌파(로자 룩셈부르크), 중앙파(아우구스트 베벨), 우파(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간 절충된 합의였다. 하지만 그 제한적 합의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906년 2월, 당 지도부는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비공식 회담을 통해 총파업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확약했고, 9월 만하임 당대회에서는 노동조합의 전술을 결정할 권리는 노동조합에 있다고 결정한다. 이로써 예나 당대회에서 총파업을 전술로 채택한 결의는, 만하임에서 ‘노조 자율’ 원칙이 확정됨으로써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우리는 당과 노동조합 간의 평화와 조화를 최우선으로 추구한다” - 독일 사회민주당의 구심 중 하나인 아우구스트 베벨의 말이다. 그러나 노조의 일은 노조가, 당의 일은 당이 맡아 각자 수행하자는 노선 속에서 정치투쟁은 의회입법으로 한정되고, 노동조합 투쟁은 임단협으로 한정된다. 이런 역할분담론은 당의 정치투쟁을 의회 개혁으로, 노조의 투쟁을 임금교섭으로 제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전망 자체를 폐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병행 행동”(parallel action)을 하며 “동등한 권위”를 지닌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라는 환상에 기초해 있다. 이 시기에는 사회민주당의 정치투쟁이 의회투쟁으로만 소모되어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노동조합 투쟁과 마찬가지로 의회투쟁도, 부르주아 사회 질서라는 토대 위에서만 수행되는 투쟁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경제개혁 작업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본질상 정치개혁 작업이다. … 최종 목표는 의회투쟁이나 노동조합 투쟁 그 너머에 있다. …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동등한 권위”라는 이론은 단순한 이론적 오해나 혼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표현이다. 이 경향은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의회투쟁으로 축소시키고,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소부르주아적 개혁정당으로 바꾸려 한다. …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 조직을 정당에 흡수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운동 전체와 그 일부인 노동조합 간의 실제 관계에 상응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간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23]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을 통해 보려 했던 것은,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로 성장해가는 과정이었다. 일상의 개량과 미래의 혁명을 분리하지 않는 계급투쟁 속에서, 대중은 체제의 본질을 자각하고 조직을 만들어간다는 사상이었다. 반면, 지도부와 노동조합 관료층은 기존 제도 안에서 조직을 보존하고 개량적 성과를 쌓는 것을 최우선시했다. 이로 인해 당은 보수적 실용주의의 길로 기울어갔다. 5. 혁명과 개량에 관하여 1) 혁명은 모험주의적 폭동이 아니다 개량주의자들은 흔히 혁명을 ‘무책임한 모험’이나 ‘파괴적 동란’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혁명은 단지 무장 봉기나 유혈 충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낡은 지배계급이 더 이상 옛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고, 피지배계급이 더 이상 그대로 살 수 없는 조건 아래, 억압받는 계급이 그 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질적 단절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단순한 결단이나 소수의 선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혁명은 사회의 모순이 극도로 격화되고, 기존 제도가 해답을 줄 수 없는 조건 속에서, 계급의 대중적 행동으로 분출된다. 혁명은 비이성적 격변이 아니라, 계급의식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의 합리적 실천이다. 러시아 혁명의 사례를 보자. (1) 1917년 2월 혁명, 러시아 혁명의 발발 1914년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은 1912년 이래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러시아 노동운동이 급격히 후퇴하는 계기였다. 애국주의는 전 국가를 휘감아 혁명적 정치운동을 질식시켰다. 투쟁적인 노동자들은 전선으로 차출되었고, 파업은 가혹하게 처벌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낳은 운동의 퇴조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황은 패색이 짙었고, 이는 짜르체제에 대한 환멸로 이어진다. 이제, 노동자들은 전쟁이 억누른 자신의 생존권 요구를 내걸고 1915년 이후 격렬한 투쟁에 나선다.[24] 독일과의 전쟁은 계급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전쟁은 노동계급에게 생존 위기를 야기한 반면,[25] 군수산업 팽창은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1915년 여름, 자본가들은 군사산업위원회를 만들어 거세지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로 가두는 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애국주의 아래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지배 체제는 이미 노동자 투쟁을 체제 안에 붙잡아 둘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1916년 말 이후 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요는 점증하고 있었다. 1917년 1월 26일 밤, 전제정치 종식을 주장한 군사산업위원회 중앙노동자그룹 대표들이 체포되었고, 이는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26] 2월 18일 푸틸로프 금속공장 노동자들은 2월 22일 다른 공장의 연쇄파업을 촉발했고, 정세 고조 속에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러시아 구력. 신력으로는 3월 8일)을 맞아 여성노동자들이 진행한 거리시위는 2월 혁명의 결정적 포문을 연다. 당시 어떤 혁명세력도 이것이 혁명으로 이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지구조직 중 가장 전투적인 비보르그 지구위원회조차 애초 2월 23일 파업을 반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날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만도 12만 명에 달했다. 다음 날에는 시위가 더 발전해 2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2월 25일, 투쟁은 총파업으로 발전했다.[27] 그리고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일부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로 합류한다. 2월 27일,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대부분이 반란에 합류하고,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구성된다. 그리고 3월 2일, 러시아를 지배하던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한다. 러시아를 300년간 지배하던 로마노프 왕조가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붕괴하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노동자 민중의 자치 기구인 소비에트, 그리고 입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였다. 누가 러시아 혁명의 진로를 결정할 것인가? 소비에트인가, 임시정부인가? (2) 소비에트, 노동자 민중 자신의 권력 1917년 2월 혁명과 함께 대중은 자신의 투쟁기관을 건설했다. 1905년 혁명에서 이미 등장한 소비에트가 다시 건설되었다. ‘평의회’를 뜻하는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 공장과 병영, 농촌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건설한 자치기관으로, 대중은 자신이 선출한 대의원을 소비에트로 보내 자신을 대표하게 했다.[28] 3월 17일까지 49개 도시에서 소비에트가 있었다. 5일 뒤에는 77개가 되었으며, 6월에는 519개가 되었다.[29] 소비에트는 삶의 공간으로부터 구성되었고 공장, 군대, 우편, 철도 등 러시아의 근간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명령 제1호’[30]는 평의회로 조직된 대중의 힘을 여실히 드러낸다. 1917년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페트로그라드 지구 주둔군에게 내리는 제1호 명령 수비대, 육군, 포병, 해군의 모든 병사들은 즉시 이 명령을 완전하게 이행해야 하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도 이를 널리 알려야 한다.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모든 중대, 대대, 연대, 포대, 기병대 및 각 군부의 독립 부서들과 해군 함정에서는, 위 부대 병사들 중에서 즉시 위원회를 선출해야 한다. 2. 아직 노동자 소비에트에 대표를 선출하지 않은 모든 부대는, 각 중대에서 한 명의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이들은 신분증을 소지하고 1917년 3월 2일 오전 10시까지 국가 두마(duma, 의회) 건물에 도착해야 한다. 3. 모든 정치적 행동에 있어, 각 부대는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및 자기 부대 위원회의 지시에 복종한다. 4. 국가 두마의 군사위원회가 발행한 모든 명령은 이행하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발행한 명령 및 포고와 상충되는 명령은 제외한다. 5. 소총, 기관총, 장갑차 등 모든 종류의 무기는 중대 및 대대 위원회의 통제 하에 두며, 장교들의 요구가 있더라도 절대 그들에게 넘겨져서는 안 된다. 6. 진형을 갖추고 근무 중일 때 병사들은 엄격한 군사 규율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비근무 시간 및 진형 외에서는 정치적·시민적·개인적 생활에서 일반 시민이 누리는 권리를 완전히 향유해야 한다. 특히, 비근무 시간에 거수경례 및 경례 의무는 폐지된다. 7. 장교에 대한 호칭은 '각하', '존경하는' 등의 표현 대신, '장군님', '대령님'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병사에 대한 무례한 언행, 특히 '너'(thou)라고 부르는 행위는 금지되며, 이러한 규율 위반이나 장교와 병사 간의 갈등은 병사들이 중대 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이 명령은 모든 중대, 대대, 연대, 수병, 포대 및 기타 전투 및 비전투 부대에서 낭독되어야 한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1905년 만들어졌던 소비에트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것, 1917년 소비에트는 1905년과는 달리 군대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 또한 1905년과는 달리 처음부터 매우 정치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짜르체제가 심각하게 붕괴했다는 것을 뜻했고, 이는 1917년 2월 혁명이 단지 부르주아 혁명에 그치지 않을 전조였다. 레닌은 1917년 4월 3일 망명지에서 러시아로 귀국한 이후 ‘혁명은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넘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행하고 있으며, 권력의 주인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소비에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가들을 위한 임시정부는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으며,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해야 한다.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영토 전역에서 선출된 노동자, 농업노동자와 빈농의 대표가 구성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혁명의 목표이다. 이에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대한 모든 협력을 거부해야 하며, 소비에트만이 유일한 혁명적 정부임을 대중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31] 그러나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 당파들은 소비에트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멘셰비키[32]는 소비에트를 임시정부를 보호하고 대중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멘셰비키, 니콜라이 치헤이제는 소비에트를 “혼란과 파괴의 와중에서 대중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며 …… 수백 년 묵은 질곡이 벗겨져 버렸을 때 국민의 기본적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멘셰비키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의 임무를 새로운 민주적 기구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획득한 자유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에트를 수동적으로 보는 관점은 진행 중인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기본적 입장에서 기인했다. 멘셰비키는 2월 러시아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에 머물러야 한다고 사고했고, 이는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에 대한 멘셰비키의 입장과 같았다. 소비에트 안에는 이처럼 당면 정세에 대한 노선을 달리하는 당파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내에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경합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로 세력을 확대했다. (3) 2월 혁명 이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실현할 수 없는 임시정부 대중이 구성한 평의회 권력, 소비에트 반대편에 임시정부가 있었다. 소비에트로 결집한 대중의 요구는 ‘빵, 토지, 평화’로 집약되었으나, 자유주의자들과 입헌민주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대중의 요구를 실현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전쟁의 한 복판에서 혁명이 벌어졌음에도 임시정부는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러시아의 1차대전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당연히 러시아의 전쟁 지속을 원했다.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제국주의 전쟁과 긴밀한 이해관계로 얽혀있었다. 첫째,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전쟁을 계속해야 ‘혁명을 심화하는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애국주의 정서를 확대하며 토지문제와 사회입법 등 노동자 민중이 원하는 혁명적 조치를 늦출 방법이 바로 전쟁 지속이었다. 둘째, 임시정부의 자본가들은 제국주의적 열망을 공유했으며, 1차 대전에서 승리할 경우 러시아가 확보할 전리품을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병합이 1차 대전 당시 러시아의 주요 목표였다. 러시아는 남하하여 지중해, 나아가 대서양으로 진출하려는 오랜 야망을 품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오스만 제국의 해협 지대가 필요했다.[33] 이렇듯 러시아 황제의 퇴위 이후 임시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임시정부는 전쟁을 중단하고 대중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의사가 없었고, 이는 노동자 민중의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행위였다.[34] 그리고 임시정부가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는 사실은 ‘밀류코프 각서’를 통해 대중 앞에 드러난다. 1917년 4월, 임시정부 외무장관인 파벨 밀류코프는 1차 대전 동맹국들에게 각서를 보내 임시정부는 차르 정부가 맺은 모든 조약을 존중하고,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임시정부는 … 우리 연합국들에 대한 의무를 전적으로 이행할 것이다.” 다음은 당시 레닌의 글이다. 「외국 영토의 점령은 자본가들에게 필요하다. 그들은 새로운 시장, 자본을 수출할 새로운 장소, 그들의 아들 수만 명에게 수익성 있는 일자리를 마련할 새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러시아 자본가들의 이익은 영국 및 프랑스 자본가들의 이익과 일치한다. 바로 그것, 오직 그것만이 차르가 맺은 조약이 러시아 자본가들의 임시정부에게도 소중한 이유다. …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이 나라에 단 하나의 권력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언해야 한다 - 바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다. 소수 자본가들의 정부인 임시정부는 이 소비에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35] (4) 이중권력과 10월 혁명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 임시정부는 대중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을 수행할 능력도, 소비에트로 결집한 대중을 통제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대중의 자치기구인 소비에트와 ‘공식’ 권력인 임시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권력’ 상태였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형성된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이중권력 상태는 결국 10월 혁명을 통한 임시정부의 타도와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으로 마무리된다. 그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1917년 4월, 서방 동맹국들에게 전쟁 지속을 약속하는 밀류코프 각서가 불러일으킨 분노가 ‘4월 위기’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임시정부의 해산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요청에 따라 시위를 해산했다. 대중시위가 일으킨 정치적 위기에,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내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임시정부 장관으로 수혈해 소비에트를 달래려 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대중의 간극은 커지고 있었다. 6월, 임시정부는 전쟁 종식은커녕 러시아군에게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명령했고, 제국주의 열강의 공조 아래 노동자 민중을 총알받이로 밀어넣는 임시정부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졌다. 6월 18일 시위에는 40만명이 넘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자본가 장관 10명 물러나라!”, “공격 정책 집어치워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슬로건을 들고 행진했다. 7월 3일, 분노한 대중이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봉기는 임시정부의 발포와 함께 해산당했다. 볼셰비키는 봉기를 말렸지만, 책임을 뒤집어쓴 것은 볼셰비키였다. ‘레닌은 독일 첩자’라는 비난과 함께 볼셰비키는 불법화됐고, 볼셰비키 축출에 성공한 임시정부는 대중집회 규제와 전선 사형제 부활을 통한 소비에트 억압에 이어, 우익의 희망 코르닐로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은 이중권력을 적당히 두고볼 생각이 없었다. 민간 사형제 부활, 철도와 방위산업 군사화, 노동자 단체활동 금지 등에 이어 마침내 수도를 점령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쿠데타였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노동자들은 모든 조치로 쿠데타를 막았기 때문이다. 반혁명 군대가 보내는 전보의 차단,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군대의 규모와 목적지 파악, 쿠데타군 이동 선로의 폐쇄…. 수도 전역에서 경종이 울렸고 노동자들은 무장한 채 전투를 준비했다. 7월 봉기를 주도한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다시 혁명의 수도를 지키고자 페트로그라드에 정박했다. 이제, 혁명 세력이 쿠데타 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반격을 앞장서서 조직한 주체가 볼셰비키였고, 이들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8월 31일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최초로 다수를 확보했다. 리가, 모스크바 등 다른 도시도 페트로그라드의 뒤를 따랐다.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10월 혁명은 이런 흐름의 연속선 위에 있었다. (5) 혁명은 파괴와 건설의 통일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소비에트로의 권력이양 요구는 혁명의 연속적·안정적 발전과 직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혁명은 권력에 굶주린 볼셰비키가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한 조치가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의 확대 발전을 위한 조치였다. 레닌이 7월 중순에 쓴 ‘슬로건에 관하여’를 보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옮겨야 한다”는 슬로건의 지지자들 모두가 그것이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슬로건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생각해본 것 같지는 않다. 평화적이라는 말은 누구도, 어떤 계급도, 약간이라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어떤 세력도 당시(2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에는 소비에트로 권력이 옮겨지는 것에 저항할 수도 없고 그것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라는 뜻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국가권력 전체가 곧바로 소비에트로 넘겨지기만 하면 소비에트 내부의 계급과 정당들의 투쟁이 매우 평화롭게 고통 없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의미에서도 당시에는 평화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 소비에트가 분할되지 않은 독점적 권력을 행사했다면, 소비에트 내에서 권력을 쥔 계급과 정당들의 변화도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36] 레닌 자신이 명시적으로 설명하듯,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과 직결되어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1917년 8월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분쇄한 이후 정치 무대에 복귀한 볼셰비키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경로를 다시 모색했다. 이는 카메네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우파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좌파 모두 마찬가지였다.[37] ‘사회주의정당들과 부르주아정당의 결별을 전제로 사회주의자들만으로 구성된 혁명정부를 구성하자’, 이것이 8월 말 군부 쿠데타를 대중의 힘으로 분쇄한 이후 볼셰비키가 전개한 전술이었다. 즉, 자본가들에 맞선 사회주의자들의 공동전선이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부르주아와 결별하고 사회주의자들만의 정부를 구성했다면, 소비에트 권력은 사회주의 정당 사이의 협력과 견제 속에 더욱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9월 ‘민주협의회’는 다시 한번 부르주아와의 연립을 결정하며, 사회주의 정당들로만 구성된 혁명정부의 평화적 구성 역시 물거품이 된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연루 의혹을 받는 입헌민주당은 여전히 버젓이 내각에 참여했다. 사회주의 정당들로만 구성된 연립정권의 무산, 이는 독일과의 전쟁 지속과 임시정부-소비에트 이중권력 상태의 불안한 지속을 뜻했다. 이런 조건에서 10월 9일, 임시정부는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전선 차출, 즉 혁명을 지지하는 군대를 수도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소비에트 권력의 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였다. 그 결과가 바로 1917년 10월 25일 봉기였다. 봉기는 혁명의 평화적 발전 경로가 소멸한 상황에 대한 냉엄한 인식에 근거했다. 곧, 봉기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볼셰비키의 야욕이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라 볼셰비키에게 불가피하게 강요된 선택에 가까웠다. 9월 중순 이후 레닌이 아무리 편지로 당 주도의 봉기를 독촉했다 하더라도, 이는 타 당파를 제외하고 권력을 독식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 10월 봉기의 군사지도자 트로츠키조차 소비에트가 평화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면 봉기는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38] 누구나 혁명의 연속적·평화적 발전을 원하며, 이는 100년 전 러시아 혁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요구가 10월 25일 볼셰비키 봉기 전에 사회혁명당, 멘셰비키와의 협력을 통해 실현되었다면 가장 좋은 상황이 창출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볼셰비키는 역사적 단절을 택했다. 봉기의 성공이라는 조건 위에서 행해진 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대회는 이를 열렬히 환영한다. 소비에트 권력이 창출되었다. 이상에서 드러나듯, 혁명은 단지 구체제의 파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구체제 안에서 형성된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재료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가는 연속적 과정이기도 하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권력기관을 형성하고 사회 전체에 헤게모니화 하는 과정이다. 2) 진정한 개량은 혁명적 계급투쟁의 결과다 많은 개량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데 집중하자. 그렇게 하나하나 바꾸다 보면 결국 다른 세상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양보한 적이 없다. 진정한 개량은 투쟁과 저항, 때때로 혁명적 위협의 산물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입법 개혁과 혁명은 역사의 진열대에서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뜨겁거나 차가운 소시지를 선택하듯 취사선택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역사 발전 방식이 아니다. 입법 개혁과 혁명은 계급사회 발전의 서로 다른 요소들이다. 이들은 서로를 조건짓고 보완하는 동시에, 북극과 남극,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처럼 서로를 배제한다. 모든 법적 헌정체제는 혁명의 산물이다. 계급들의 역사에서 혁명은 정치적 창조의 행위이며, 입법은 이미 형성된 사회의 정치적 표현이다. 개혁을 위한 활동은 혁명과 무관한 독자적인 힘을 갖지 않는다. 모든 역사적 시기에서 개혁을 위한 활동은 오직 마지막 혁명이 부여한 방향 속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혁명의 추진력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동안에만 지속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각 역사적 시기에서 개혁 활동은 언제나 마지막 혁명이 만들어낸 사회 형태의 틀 안에서만 진행된다. 여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39] 즉, 진정한 개량은 체제 내의 협상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투쟁의 산물이다. 앞서 보았듯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 확대 조치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예방조치로서 이루어졌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줄이는 경우는, 이윤을 줄이지 않을 경우 체제 자체가 흔들릴 위험에 직면했을 때다. 8시간 노동, 사회보장제도, 보통선거권, 여성 참정권, 주 5일제나 최저임금도, 모두 계급투쟁에 따른 결과로 쟁취된 것이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파견법과 기간제법을 폐지하고 싶다면, 그에 준하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싶다면, 그에 준하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때로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할 수 있다. 마르크스 역시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더욱더 확대되는 단결이다.」 즉,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은 항상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진정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으로서의 단결이다. 이를 통해 혁명이라는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힘을 가지는 것이다. 3) 배신적 개량과 진정한 개량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 노동자들은 일정한 개량을 성취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에 기초한 개량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초과착취에 기생하는 개량이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위기가 다시 도래하고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개량을 빼앗겨 왔다. 이제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지면서 심각한 공격에 맞닥뜨리고 있다. 한국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려온 약간의 개량은 투쟁의 성과인 측면도 있지만 비정규직 초과착취를 묵인하고 그것에 기생해 온 측면도 있다. 역시 지속될 수 없는 개량이다. 이런 부류의 개량들이 계급투쟁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투쟁에 기초한 개량은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여는 개량이다. 혁명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배신적 개량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과 투쟁에 입각해 획기적인 개량을 과감하게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혁명으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 6. 국가권력의 문제, 점진적인 이행은 가능하지 않다 1) 파리코뮌, 노동자계급은 기존 국가권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18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수립된 파리코뮌은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이는 단지 ‘정부’ 교체가 아닌, 기존의 국가기구 자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창출한 사건이었다. 배경을 살펴보자. 1848년 2월, 프랑스를 지배하던 루이 필립의 왕정[40]이 혁명으로 붕괴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와 한 대열에서 공화정을 수립했고, 주도적이었던 세력은 프롤레타리아였다. 2월 혁명에서 파리 노동자들은 '사회공화국'을 외쳤다. 노동자계급이 요구한 ‘사회공화국’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노동할 권리,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에 대한 지향을 담은 슬로건이었다. 노동자계급이 공화국을 세운 2월 혁명의 핵심 동력이었음에도, 혁명으로 세워진 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을 배제했다. 맑스 말마따나 노동자계급이 혁명으로 쟁취한 것은 해방을 위한 투쟁의 지반이었을 뿐, 해방 자체는 아니었던 셈이다. 노동자계급이 세운 공화국에 노동자계급의 자리는 없었다. 임시정부 내 노동부서는 무기력했고, 미약한 개혁에조차 ‘사회주의’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나마 임시정부가 노동자계급에게 내준 국민작업장[41] 마저 곧 폐지될 예정이었다. 「노동자 대중은 다음과 같이 외치며 파리 시청으로 행진하였다 : 노동을 조직하라! 별도의 노동부를 설치하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와 공동으로 2월 혁명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 부르주아지와 나란히 그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노동을 조직하라! 그러나 임금노동, 그것이야말로 현존하는 부르주아적 노동조직이다. … 별도의 노동부를 달라! 그렇지만 재무부, 상업부, 공공사업부, 이것들은 부르주아적 노동부처들이지 않은가? 부르주아적 노동부처들과 나란히 서 있는 프롤레타리아적 노동부란, 하나의 무력한 부처, 천진난만한 소망의 부처 … 일 수밖에 없었다. … 국민작업장 … 반쯤은 소박하고 반쯤은 고의적인 파리 부르주아지의 혼동에 의해, 그리고 인위적으로 조장된 프랑스와 유럽의 언론에 의해, 저 노동수용소는 사회주의의 최초의 실현인 것으로 되었고, 그것과 함께 사회주의는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국민작업장은 그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명칭을 통해서, 부르주아 산업과 부르주아 신용과 부르주아 공화국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의 증오란 증오는 모두 이 국민작업장에 쏟아졌다. … 소부르주아들의 온갖 불안과 온갖 불만이 공동의 표적인 이 국민작업장을 향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처지가 날로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되어 갈 때 프롤레타리아 부랑아들이 삼켜버린 액수를 분노에 차서 계산하였다. 일만 하는 척만 하면 국가가 연금을 주는 것, 이것이 사회주의로군! 그들은 이렇게 속으로 투덜거렸다.」 1848년 6월, 국민작업장 폐쇄 방침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파리에서 봉기하자, 부르주아 공화국은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했다.[42] 그리고 이 유혈 진압은 반동의 길을 열었다. 봉기를 진압한 장군, 까베냑은 국민작업장을 공식 해산하고, 노동시간 제한법을 폐지하며, 모든 클럽(토론장)을 폐쇄하고,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등 반동 정책을 전면화했다. 부르주아는 노동자계급의 급진화가 두려워 '질서'를 원했고, 결국에는 공화국마저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모두가 동의할 법한 목표 뒤에는 적대적 계급 사이의 치열한 이해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패배와 함께 반동의 길로 접어들고, 1848년 12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조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는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구호 아래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해체하고, 이듬해 자신을 ‘나폴레옹 3세’로 선포하며 제2제정을 열었다. 이 체제는 산업 부르주아지와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관료적 독재체제였다. 맑스는 이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이름 붙이며 상이한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 속에서, 비대해진 자율적 국가권력이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국가 형태로 분석했다.[43] 제2제정 후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제국적 위신을 높이고 아메리카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멕시코 원정(1861-1867)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라틴 아메리카에 프랑스의 위성국가를 세우고자 군대를 파병했고,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멕시코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이는 현지 민중의 격렬한 무장 저항과 미국의 강경한 반발에 부딪혀 완전히 실패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철수했고, 막시밀리안은 고립된 채 민중군에게 붙잡혀 1867년 처형당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큰 외교적 타격과 굴욕을 입었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는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자 모두와 협정을 맺고 양자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으나, 프랑스는 국제무대에서 고립되었다. 내부적으로도 1866년의 경제 위기와 식량 가격 폭등은 도시 노동자와 하층민의 삶을 파탄에 몰아넣었고, 파리 등 주요 도시에서 파업과 시위가 확산되었다. 특히 파리에서는 제2제정 최초로 파업 진압을 위해 군대가 투입될 정도로 대중의 분노가 높아졌고, 정권은 외교, 경제, 정치 모든 면에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나빠르뜨는 모든 계급들에게 가부장적 은인으로 나타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급에게서 빼앗지 않고서는 그 어떤 계급에게도 줄 수 없다”[44]는 맑스의 말이 집약하듯,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여러모로 인기 없고 취약한 정부였다. 제국의 권위와 통치력은 급속히 흔들렸고, 이를 만회하려는 도박이 바로 전쟁이었다. 1870년 7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한다(보불전쟁).[45]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던 프로이센은 떠오르는 강국이었다. 프랑스는 연전연패 끝에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당했고, 프랑스 제2제국은 붕괴했다. 9월 4일, 온건 공화파들이 주도해 제2제정 종말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제3공화국).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수립된 ‘국민방위정부’였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잡히고 퇴위했지만 프로이센은 파리를 향해 계속 진군했다. 1870년 9월 이후 프로이센은 파리를 포위했고, 파리 노동자 민중은 프로이센 군대에 맞서 장기 방어전에 돌입했다. 두더지와 쥐까지 잡아먹을 정도의 처절한 항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파리의 부르주아들 사이에서는 “비스마르크가 블랑키보다 낫다”는 말이 떠돌았다. 부르주아들은 파리를 떠나기 시작했고, 노동자 민중이 파리 국민방위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1871년 1월 28일, 양국의 강화 협정이 이루어진다. 프로이센이 내건 조건은 가혹했다. 프랑스는 알사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할양하고, 5년 동안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프로이센과의 강화 교섭은 파리 노동자 민중 몰래 진행되었다. 이 강화 협상을 주도한 인물이 ‘아돌프 티에르’였다. 이제 비스마르크와 티에르가 합의한 ‘전후질서’를 공식 추인하고 굴욕적 평화를 프랑스에 관철할 체계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2월 8일 프랑스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총선거는 독일의 침략군이 43개 도를 점령한 가운데서 실시되었다.[46] 비스마르크의 의도에 따라 진행된 선거에서, 반동적 왕당파가 대거 의회로 진출했고, 공화파는 위축되었다. 이렇게 보수파가 장악한 국민의회가 출범했고, 파리는 더욱 고립되었다. 그러나 파리는 무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1871년 3월 18일, 티에르는 파리 노동자 민중에 대한 무장해제에 나섰다. 정부군이 파리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400여 문의 대포를 몰수하려 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수비대 병사들은 무기를 지켜내고 파리 주요 거점을 점거했다.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망쳤고, 파리의 실권은 노동자 민중 손에 들어갔다. 파리코뮌의 출범이었다. “파리의 반동배는 3월 18일의 승리에 전율하였다. 그들에게 그것은 인민의 복수가 마침내 몰려온다는 신호였다. 1848년 6월의 날들부터 1871년 1월 22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손에 살해된 희생자들이 그들의 눈앞에 일어났던 것이다.”[47] 3월 26일에는 파리 20개 행정구별로 주민 대표를 선출하는 코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9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파리코뮌 의회”가 탄생했다. 이어 3월 28일, 붉은 깃발 아래 첫 총회가 열렸다. 파리코뮌은 모든 공직자를 직접 선출했고, 언제라도 소환 가능해짐에 따라 관료제의 특권은 폐지되었다. 상비군은 해체되었고 무장한 민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었으며, 교육은 공공 무상교육으로 전환되었다. 파리코뮌은 기존 국가기구를 인수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원칙에 기초한 권력기구를 창출했다. 단순히 정부의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성격이 바뀐 것이다. 파리코뮌은 다음을 보여주었다. “노동자 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접수하여 이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은 중립적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물질적 조직이다. 경찰, 군대, 관료제, 사법부 등은 노동자계급이 그 지배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행동을 억제하는 억압기구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기존 국가기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진보적 법안’을 통과시키고, ‘공공 정책’을 확대해 나가면 혁명 없이도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면, 이는 파리코뮌의 교훈을 완전히 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코뮌의 경험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고타강령’ 초안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그는 국가의 ‘자유로운 인민국가’라는 표현을 비판하며, “국가는 본질적으로 계급 억압의 도구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 억압기구의 철폐를 목표로 한다”고 단언했다. 노동자계급의 국가, 파리코뮌은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포화 앞에 고립된 채 맞서야 했다. 베르사유에 도피한 티에르 정부는 파리코뮌을 ‘무정부적 폭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프랑스 지배계급에게 파리코뮌은 프로이센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티에르 정부는 파리 진압을 위한 군대를 프로이센에 요청했다. 승전국 지배계급과 패전국 지배계급이 노동자계급 진압으로 하나가 되었다. 5월 중순, 베르사유군은 파리 외곽을 돌파했고,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일주일’이라 불리는 참극이 벌어졌다. 거리마다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파리 노동자 민중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기를 들고 저항하다 학살당했다. 파리코뮌은 실패했다. 단지 군사적 패배 때문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전역의 민중과 연대하지 못했고, 재정적‧군사적으로 고립되었으며, 결정적으로 반동 베르사유 군대에 맞서 선제공격을 주저했다. 그러나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여준 새로운 국가형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남아있다. 2) 칠레의 경험 1970년 9월, 칠레 노동자 민중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옌데는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등 좌파와 중도좌파 정당이 결성한 ‘인민연합’(Unidad Popular, UP) 소속으로 출마하여 토지개혁, 대외 종속 탈피, 기간산업 국유화, 교육·보건 공공성 강화 등 개혁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아옌데 정부는 집권 이후 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던 구리 산업을 비롯해 은행, 석유, 통신, 제약 등 주요 부문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1971년 7월 11일 의회가 만장일치로 의결한 헌법 개정에 기초한 것으로, ‘초과이윤 조항’을 통해 미국 자본에 대한 보상을 최소화했다.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을 내건 아옌데 정부는 이러한 개혁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 채 합법적으로, 즉 기존 헌정질서의 틀 내에서 추진하려 했다. 사실 인민연합정부는 출범부터 의회제도를 비롯한 기존질서 유지를 ‘보장법’으로 약속했다.[48] 현존 정치체제와 사법체제, 교육제도·노동조합·사회조직의 사회주의 지향으로부터의 독립, 출판과 대중매체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독립 등을 서약하며 제도 내에 존재할 것을 다짐하고서야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골격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자본은 아옌데 정부에 극렬한 반격을 개시한다. 칠레 자본가계급은 보수 언론과 정당, 교회, 자본가 단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아옌데 정부를 흔들었다. 특히 1972년 10월에 발생한 '트럭 소유주 연맹'의 대규모 파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파업은 CIA가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기획한 것으로, 물류망을 마비시켜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의회 다수와 사법부는 인민연합 정부의 경제 개입 조치를 '합법성 결여'라 비판하며 사보타주에 나섰고, 1973년 8월 22일에는 하원이 아옌데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미 그 무렵 칠레 군대는 우익 쿠데타 세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칠레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가 정한 틀 내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경제를 마비시키려는 자본의 사보타주와 군부의 쿠데타 위협 속에서, 1972년부터 1973년까지 노동자 민중은 공장과 지역에서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권력기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산업조정위원회(cordones industriales, 직역하면 ‘산업 벨트’)이었다. 코르돈(산업조정위원회)은 작업장과 지역 단위를 잇는 노동자 조직으로 공장점거, 생산통제, 분배 조정, 쿠데타에 맞선 방어조직 형성 등을 수행했다. 유통부문에서는 노동자와 주부, 학생들이 '민중공급위원회'(공급과 물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식량과 필수재의 배급을 자율적으로 조정했다. 산업조정위원회와 민중공급위원회처럼 노동자 민중이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고자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들이 전국으로 확장되고 이것이 정부의 지지, 지원과 결합할 경우, 이것이 ‘이중권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옌데 정부는 이런 조직을 잠재적 권력기구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놀라게하는 성가신 존재들로 취급했다. 1973년 6월,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하자 코르돈 조직은 수십 개의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과 물자 이동을 자체적으로 통제하며 반격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는 이 흐름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화된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했고, 위기 타개를 위해 피노체트를 내무장관으로 기용하는 타협을 선택했다. 이는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쿠데타를 단행했고,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자결했다. 칠레 군부는 대대적 학살을 자행했고,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에서 밀턴 프리드먼에게 학습한 신자유주의 교리로 무장한 경제학자 집단,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가 있었다. 이들은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고삐 풀린 시장 개방,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동권 축소, 복지 철폐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이후 IMF가 세계 곳곳에 강요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원형이었다. 아옌데 정부가 추구한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로운 길’은 무참히 짓밟혔고, 군부와 자본의 연합은 칠레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으로 몰았다. 칠레의 비극은 단지 민중연합의 적들이 악랄해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중립성’에 대한 환상, 부르주아 헌정질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에 대한 집착, 그리고 노동자 민중이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투쟁과 기구에 대한 방기. 이것이야말로 ‘체제 내 사회주의’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혁명이 배제된 사회주의는, 자본이 허용하는 만큼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3) 그리스의 경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이어진 유럽 재정위기는 남유럽 국가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그리스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였다.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구성된 ‘트로이카’는 그리스 정부에 퇴직연령 상향, 연금 삭감, 최저임금 삭감, 단체교섭 제한, 해고 요건 완화, 공공부문 축소 등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그리스 실업률은 30%에 가깝게 치솟았고, 청년실업률은 50%를 넘겼다. 분노한 대중은 기존과는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49] 이런 상황에서 ‘시리자’(SYRIZA)와 같은 급진 좌파 정당들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급진좌파연합’ 이라는 뜻의 시리자는 2004년 여러 좌파정당의 연합체로 결성되었고, 이후 2012년에 하나의 통합 정당으로 재편되었다. 시리자는 긴축정책에 맞선 대중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면서 지지층을 빠르게 넓혀갔다. 시리자는 2012년 5월 1차 선거에서 16.8%, 6월 2차 선거에서 26.9%를 얻어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를 제치고 제2당으로 부상했다. 2009년 선거에서 4.6%를 획득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결국 시리자는 2015년 1월 총선에서 36.3%를 득표하며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트로이카가 강요하는 긴축안에 맞선 대중투쟁이 시리자의 집권 배경이었다. 긴축을 둘러싼 협상이 시작되었다. 트로이카는 강경하게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고, 그 강경함 뒤에는 다른 채무국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7월 9일, 시리자는 굴욕적 긴축안을 트로이카에 제출한다. 2015년 7월 5일 긴축 찬반을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긴축 반대'를 결정하고 단 4일이 지난 뒤였다. 7월 12일, 그리스와 트로이카가 합의한 긴축안은 △연금 삭감 △노동유연화 △해고 공무원 재고용조치 등 구제금융 합의에 위배되는 법률 철회 △500억 유로 규모 국유자산 민영화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대중의 기대를 품고 집권한 시리자는 트로이카의 긴축안 집행자로 전락했다. 시리자의 몰락은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몰락 경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급투쟁의 발전 전망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시리자의 굴복이 남긴 상처는 더 컸다. ᅠ 명백히 드러났듯, 긴축의 중단은 열강의 대리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리자는 트로이카와의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힘에 호소했어야 한다. 또한, 유럽노동자계급의 연대를 구하며 트로이카의 악랄한ᅠ강요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어야 했다. 그 힘과 함께 ‘유로존 탈퇴’라는 도약을 감행하지 않고, ‘긴축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ᅠ 시리자가 부상하던 당시, ‘혁명과 개량의 이분법을 넘어서자’는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는 지금, 시리자의 몰락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7. 왜 다시 혁명을 말하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낡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제도를 바꾸고, 점진적인 개혁으로 사회를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나가자는 생각의 한계는 앞서 살펴본 역사적 경험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 법과 제도에 순응한 채로는 결코 스스로의 해방을 실현할 수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 극우의 부상, 확산하는 전쟁 위기, 기후재앙, 지구적 불평등은 모두 자본주의가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는 신호다. 우리가 다시 혁명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이상적 구호가 아니라,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 씨앗, 혁명의 가능성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벌어지는 대중투쟁 속에 자라고 있다.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이 파업과 광장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직접적인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전체 노동자 민중의 요구로 투쟁의 범위를 확대할 때,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 단결할 때, 우리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에서 목격한다. 그것은 의회나 정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 스스로가 만드는 힘이다. 노동자계급이 사회를 통제하고, 생산과 분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며, 억압과 착취 없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이다. 혁명은 여전히, 아니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참고로 읽어보면 좋을 자료 정성진,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 (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중, 한울 아카데미) 프리드리히 엥겔스, 1891년 사회민주주의당 강령초안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중, 박종철출판사) 칼 마르크스, 프랑스 내전, 박종철출판사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풀무질 ※'관련기사'란에서 기초학습 다른 시리즈를 찾아 읽어보세요. .footnote-ref, .footnote-target { scroll-margin-top: 200px; color: #E60012; text-decoration: none; } .footnote-ref:hover, .footnote-target: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1] 황동하,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 사회민주당의 방어전쟁과 로자 룩셈부르크」, 2014 [2] 트로츠키, 『나의 생애 上』, 범우사, pp.370-371. [3] 제프 일리, 『THE LEFT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1848~2000』, 뿌리와이파리, pp.245-247. [4] 맑스는 1864년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서한을 보내 재선을 축하한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이 중간계급의 권력을 신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제친 것처럼, 아메리카의 노예제 반대 전쟁이 노동자 계급의 권력을 신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 맑스,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5]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 여러 제후국들로 쪼개져 있었다. [6] 독일 사회민주당은 실천적 필요에 의해 탄생했으나, 당 내 이론적 차이는 지양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7] 정성진,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아카데미 [8]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pp.247-248. [9] 수정주의는 노동자의 권력 장악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으나 혁명에는 반대했다. 즉, 점진적인 사회개혁과 선거를 통한 집권이 그들의 노선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은 권력 장악 자체에 반대했다. 물론 오늘날 양자의 큰 차이는 없다. [10] 베른슈타인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블랑키주의적 봉기로 생각했다. ‘블랑키주의’는 소수의 비밀스러운 혁명가 집단이 봉기로 국가권력을 전복하고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다는 이념을 뜻한다. 이런 사고는 19세기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로부터 비롯되었다. [11] 사회민주당의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동조적 입장은 이미 증기선 보조금 논쟁에서 드러난바 있다. 1884년, 독일 제국은 서아프리카의 토고, 카메룬 등의 영토를 식민지로 편입하면서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작했다. 해외 식민지 방어와 통상 보호를 명분으로, 독일 정부는 증기선 구매 예산안을 제국의회에 제출했다.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후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개정)은 이 예산안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특히 항만 도시 함부르크 출신 의원들은 찬성 입장을 보였는데, 증기선 건조와 통상 확대가 노동자 고용 확대와 지역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실용적 이유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당은 증기선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이 논쟁은 식민지 획득 경쟁에 대한 사회주의 정당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대한 정치적 시험대였다. 제국주의 문제를 놓고 사회민주당 내 균열은 커지고 있었다. [12]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한길사, p.59. [13] 아이작 도이처,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pp.293-294. [14] https://en.wikipedia.org/wiki/Hun_speech [15] “황제들과 제국들은 오래된 것이지만 제국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1883년 사망한 마르크스의 저술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제국주의란 단어는 1870년대에 영국에서 처음 정치적 용어로 등장했으며 1870년대의 마지막 무렵까지도 새로운 용어로 간주되었다. 그것이 일반적 용법으로 사용된 것은 1890년대였다.” 에릭 홉스봄, 한길사, 『제국의 시대』, p.159. [16]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bernstein/works/1899/evsoc/ch03-3.htm#n33 [17] “논리적인 비스마르크는 이미 1880년대에 야심에 찬 사회보장계획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선동 기반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으며, 그의 이러한 경로를 오스트리아와 1906~1914년의 영국 자유주의 정부가(연금, 공공노동교환, 의료·실업보험), 그리고 몇 차례에 걸친 주저 끝에 프랑스가(노인연금 지급, 1911년) 뒤따르게 되었다. 매우 흥미롭게도, 최근에 ‘최고의 복지국가’라 불리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당시에는 이러한 경향에 매우 뒤처져 있었고 다른 여러 나라들은 그저 형식적인 태도만을 취하고 있었으며, 카네기와 록펠러와 모건의 미국은 그와 같은 정책들이 전무했다.”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한길사, p.224. [18] 엥겔스, 「1891년 사회민주주의당 강령초안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박종철출판사, pp.347-348. [19] 아이작 도이처,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 필맥, pp.293-294. [20]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6/mass-strike/ch08.htm [21] https://de.wikipedia.org/wiki/Massenstreikdebatte [22] 1905년 12월,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언론인을 가장해 러시아로 잠입해 러시아 대중파업을 직접 관찰했다. [23]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24] “미숙련 노동력의 공장유입과 전쟁이윤에 대한 탐욕스러운 각축은 모든 곳에서 노동조건의 하락을 초래하고, 가장 야만적인 착취방법들을 등장시켰다. 생활비의 증가는 자동적으로 실질임금을 하락시켰다. 경제파업은 이에 대한 대중의 불가피한 대응이었다. 특히 이 투쟁이 개전으로 유보되어 왔기 때문에 그 규모는 폭풍우와도 같았다. 파업은 집회, 정치선언문의 채택, 경찰과의 대치, 그리고 종종 발포와 희생자 발생으로 이어졌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풀무질, pp.74-75. [25] “농민들은 공산품을 입수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는 급속히 가치가 떨어져 가는 지폐를 받고 농산물을 내놓지 않으려 했다. 물건이 심각하게 부족해짐에 따라 임금과 뛰어오르는 생활비 사이의 격차가 커졌다. … 생필품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서 실질임금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수준의 3분의 1정도로 줄어들었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교양인, pp.34-35. [26] 오스카 안바일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지양사, 116p. [27] 오스카 안바일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지양사, 116p. [28] 1905년과 달리,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연합 평의회 형태였다. [29] 페로(M. Ferro), 《1917년 2월 러시아혁명》, 60p, 페로, 《10월혁명》, 183p. 도니 글룩스타인, 『서구의 소비에트』 28쪽에서 재인용. [30] https://www.marxists.org/history/ussr/government/1917/03/01.htm [31] 볼셰비키 역시 ‘다가올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우선 부르주아 혁명을 거친 후, 한참 뒤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다가올 것이었다. 하지만 1917년 4월, 레닌이 돌아오자마자 이 입장을 뒤집는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이 테제는 볼셰비키는 물론, 당시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테제는 레닌의 이름으로만 발표되었다. … 레닌과 함께 이 문서에 서명한 조직, 그룹, 개인은 하나도 없었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 풀무질, p.422. [32]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분열 후 형성된 온건 사회주의 세력. 1917년 당시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의 완성을 주장했다. [33] 이 해협 지대는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다.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3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해협을 차지해 지중해 진출 경로를 확보할 예정이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북아프리카 등 지역을 차지할 예정이었다. [34] 「“전쟁을 끝내라!” … 이 구호는 여성 시위대, 뷔보르그지구 노동자들, 근위병 연대에서 터져나왔다. 3월초 의회의원들이 전선을 순시했을 때, 특히 나이 많은 병사들은 계속 이런 질문을 했다 : “토지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오가고 있습니까?” 의원들은 토지문제는 제헌의회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그러나 여기서 모두가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공공연히 드러내지 못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 “글쎄, 토지는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필요 없지요.” 먼저 평화, 다음에 토지! 이것이야말로 혁명을 일으킨 병사들의 원래 강령이었다.」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上, 풀무질, pp.370-371. [35] 레닌, 「임시정부의 각서」, 1917.4.20.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apr/20f.htm [36] 레닌, 「슬로건에 관하여」, 『지젝이 만난 레닌』, 교양인, pp.102-103. [37] “이즈음 볼셰비키의 운세는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 코르닐로프 사건 이후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는 다수를 확보했다. … 레닌이 4월 테제에서 예견한 대로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의 이행을 정당화시킬 제 조건이 꾸준히 성숙하고 있었다. 레닌의 첫 태도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의 부활이었다.“ E.H.카, 『볼셰비키 혁명사』, 화다, p.111 [38] “소비에트 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소비에트에 권력이 집중되었다면, 볼셰비키당은 소비에트의 다수파가 될 완벽한 기회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자신의 강령에 기초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무장봉기는 필요 없었을 것이며, 정당 간의 권력 이양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4월부터 7월까지 당은 소비에트를 통한 혁명의 평화적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라“ ― 이것이 볼셰비키당 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7월 시기로 인해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中』 , 풀무질, 410p. [39]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0/reform-revolution/ch08.htm [40] 1830년 7월 혁명으로 등장했다는 이유로 ‘7월 왕정’이라고 불렸다. [41] 말하자면 당대의 공공근로 사업장이라고 할 수 있다. 1848년 2월 27일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국민작업장은, 파리 및 다른 도시의 실업노동자들을 위한 공공 구호시설로,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빵과 소금을 받았다. [42] “부르주아 공화제가 승리를 거두었다. 금융 귀족, 산업 부르주아지, 중간층, 소부르주아들, 군대, 기동방위대로 조직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지식인들, 성식자들, 농촌 주민 등이 부르주아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빠리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한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이 승리 후에 3,000명 이상의 폭동 가담자들이 학살당했고, 15,000명이 재판도 없이 추방되었다. 이 패배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무대의 뒷전으로 물러선다.”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43] “강력하고 무제한적인 정부는 이 ‘물질적 질서’를 폭력으로 옹호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모순으로 가득 찬 임무는 그의 정부의 모순들, 즉 이번에는 이 계급 다음 번에는 저 계급을 때로는 획득하려 하고 떄로는 굴복시키려 함으로써 결국 모든 계급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드는 불명확한 암중모색을 설명한다.” - 같은 책 [44] 같은 책 [45]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은, 프로이센 왕가(호엔촐레른 가문)에 속한 레오폴트 후작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프랑스가 반대하면서 격화된 외교 분쟁이었다. 스페인 왕위를 호엔촐레른 가문이 계승할 경우, 프랑스는 남쪽과 동쪽 모두에 적을 두게되는 셈이었다. [46]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까치, 291p. [47] 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4권』, 박종철출판사, p.57 [48] 1970년 9월 4일, 아옌데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당시 칠레 헌법에 따라,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국회가 상위 두 후보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했다. 아옌데의 인준을 위해서는 기독교민주당(PDC)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은 아옌데 정부가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을 요구했다. [49] 기존 그리스 정치판도는 중도우파 신민주주의당(ND)과 중도좌파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 (PASOK)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던 구조였다. [앞선 시리즈 읽기] #2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 [다음 시리즈 읽기] #4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2025-11-20 | 조회 13,609 -
[사회주의 기초학습#2]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자본주의의 출현 우리는 자본주의를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우리는, 자본가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특정한 기능과 역량을 습득해서 어딘가에 취업을 하고, 월급을 받아서 그 돈으로 나의 경제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해 생활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길게 놓고 볼 때, 자본주의 생산양식(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자본주의 생활양식)이 출현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약 2~300만 년이라고 보면, 그 중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선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해 본격적인 식민화와 수탈로 상업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을 시작한 시점으로 보더라도 약 500여 년이고, 산업혁명을 거치며 비약적으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보면 대략 300여 년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출현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1강에서 살펴보았듯, 인류의 생산력 발전과 함께 원시적 공동소유가 사라지고, 국가와 함께 계급사회가 출현했다. 이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사회는 그 구체적 형태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계급사회였다. 그런데 이 계급사회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계급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들이 있다.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생활상을 잠시 살펴보자. <타작>, 김홍도 <길쌈>, 김홍도 <타작>은 당시 조선이 봉건적 신분관계에 기초한 사회였음을, <길쌈>은 아직 상품교환이 전면화되지 않은, 자급자족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이러한 ‘전근대적 생산관계’에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만 형성된다. 자본주의가 제일 먼저 발전한 유럽의 역사를 보면, 큰 틀에서 (1강에서 ‘이중혁명’으로 요약한) 두 가지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 봉건적 생산관계가 점차 사라지고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사회로 탈바꿈했다. 첫째, 경제적 측면에서 상업의 발전과 산업에서의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출현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과 귀금속 등의 자원수탈, 아프리카에서의 노예무역, 동인도회사의 설립(1600)과 인도에 대한 식민지배(1757) 등의 과정을 통해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했다. 몇 백년에 걸쳐 자본주의의 점진적 성장이 이어졌다. 초기엔 유통과정에서의 변화, 즉 시장이 확대되고 거래가 많아지는 상업의 발전이 당시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은 점차적으로 생산과정에서의 변화, 즉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증기기관의 발명이다. 이른바 ‘산업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이 과정은 지난 시기 자본주의가 성장해온 결과이자, 앞으로 더욱 맹렬한 자본주의 발전을 가능케 한 원인이 됐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기계제 대공업의 시대를 열며, 19세기 동안 맹렬한 자본주의 발전을 추동했다. 자본주의가 어마어마한 생산력 발전을 이룩하는 데에는 몇가지 전제를 필요로 했다. 우선 막대한 천연자원을 필요로 했다. 인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수탈이 이를 가능케했다. 또 확대된 생산과정을 수행할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노동력의 공급은 ‘인클로저’ 운동과 같이 기존의 피착취계급의 생존 조건을 파괴함을 통해, 중세의 길드를 무력화시켜 독립수공업자들을 무산계급의 일원으로 편입시킴을 통해, 그리고 노예무역으로 플랜테이션 산업을 위한 노예노동자들을 양산함을 통해 이뤄졌다. 둘째, 부르주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해, 신분제와 같은 봉건적 상부구조를 폐지하고, 자본주의의 질서를 도입하는 과정이 진행됐다. <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 - 장 피에르 위엘(Jean-Pierre Houël) (프랑스 혁명 이전 구 체제의 모순을 표현한 그림. 등에 올라탄 이들은 귀족과 성직자이고, 둘을 업고있는 사람은 농노이다. 1789년 8월에 그려졌다.) 앞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어떻게 몇 백년에 걸쳐 발전해왔는지 설명했다. 봉건적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대체되고 있었지만, 봉건제적 상부구조, 즉 귀족과 성직자의 막대한 특권을 보장하는 신분제적 법률과 문화는 같은 속도로 대체되지 않았다. 여전히 온존한 봉건제적 상부구조는 자본주의 발전으로 탄생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와 충돌했다. 봉건제는 피착취계급이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직업을 선택할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 봉건제의 피착취계급인 농노(Serf)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귀족과 성직자를 위해 평생 봉사하며 살다가 죽어야했다. 이러한 신분적 예속관계는 농노가 부르주아가 도시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자유로운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걸 방해했다. 또 봉건제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막대한 특권을 보장했는데, 이들이 사치스러운 개인적 소비를 위해 막대한 자원을 강탈해간다는 사실은 자유로운 산업과 상업의 발전을 통해 자본의 무제한적 축적을 추구하는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했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유럽의 각 나라에서 부르주아는 새로운 계급으로 성장하는 만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봉건제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가 봉건귀족과 점진적으로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권력을 잡았다. 이는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해 산업자본주의가 처음 태동한 만큼, 부르주아 계급의 발전도 점진적이고 천천히 진행되어온 역사의 결과였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의 정치권력 장악이 혁명적인 방식을 통해 이뤄졌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바로 그 사건이다. 위 그림에서 보여지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으로, 봉건제적 신분관계를 혁명으로 뒤엎은 상징적 사건이다. 이렇듯 실제 역사는 복잡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왕의 목을 단두대에 걸며 봉건 계급을 혁명적으로 타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봉건 계급이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시대 흐름에 적응해 스스로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으로 탈바꿈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큰 흐름에 있어, 봉건적 질서는 점차 자본주의적 질서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자본주의의 평등하고 불평등한 풍경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제 ‘자유로운 계약관계’를 체결하게 된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고, 노동자는 노동력을 소유한 계급이다. 둘은 서로 ‘임금’과 ‘노동제공’을 등가물로 교환한다. 노동계약관계가 체결되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일을 시킬 권리가 있지만, 대신 임금을 지급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줘야하는 의무가 있지만,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는 강제계약이 아닌 ‘자유계약’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보고 “너 이 회사에 들어가서 일해야 해”라고 감금하거나, 협박하거나, 납치한게 아니다. 형식상 노동계약은 언제나 노동자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다.[1] 그러나 노동자라면 노동경험으로부터 자연스레, 이것은 형식적으로만 자유계약이고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불평등계약이라는 걸 체감한다. 노동계약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약조건은 ‘노동제공과 임금의 교환비율’이다. 다시 말해 ‘일을 얼마나 할지’ ‘댓가를 얼마나 줄지’를 정하는 것이고, 간단히 말하면 ‘임금과 노동시간’의 결정이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대등한 계약이기 위해서는 마치 당근마켓에서 중고물품을 살 때와 같이, 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해 협상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개별 자본가와 노동자의 노동계약 과정에서, 임금과 노동시간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매우 특수한 기술적 능력이 있는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보편적으로 노동자는 그저 자본가가 시키는 대로 순응해야한다. 자본가가 “얼마 줄테니 와서 일해”라고 하면 노동자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할 뿐이고, “우리는 출근시간이 9시까지야”라고 하면 “네 늦지 않게 나갈게요”라 답하고 출근한다.[2] 자본가는 생산수단이 있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이 있는데, 왜 협상에서 양자 간 권력관계가 발생할까? 사회의 다수를 점하는 노동자들은 취업하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야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가 어떤 식으로든 협상을 해보려고,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거나,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자본가는 대개 “당장 그만두라”고 한다. 자본가 입장에서 개별 노동자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이 노동자를 해고해도 노동시장에서 이 노동자의 업무를 대체할 사람을 손쉽게 고용할 수 있다. 반면에 노동자는 취업상태에서 노동계약관계가 단절되면 당장 생존의 위협에 내몰린다.[3] 노동자들이 노동계약관계에서 구조적 약자인 일차적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노동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며,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판매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급이라는 데 있다. "At the end of the day it's another day over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또 하루가 지나가지 With enough in your pocket to last for a week 일주일 먹고 살 정도의 돈을 주머니에 넣고 Pay the landlord, pay the shop 집세 내고, 외상 갚고 Keep on working as long as you're able 몸이 성할 때 일해 Keep on working till you drop 짤릴 때까지 일을 해 Or it's back to the crumbs off the table그렇지 않으면 빵부스러기나 주우며 살아야 할걸"[4]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은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의 상태를 대비해 보여주고 있다. 도시로 밀려든 농민은 노동자가 되었는데, 취업을 하지 못한 노동자는 거리를 방황하며 생존의 벼랑에 내몰려 있다. 반면에 취업을 한 노동자는 관리자가 노골적으로 성추행을 해도, “일할 수 있어 복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이 구조가 고착화되며 노동자들이 이제는 취업을 해 먹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 자본주의 생산관계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오늘날 자본주의의 작동모습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겉으로는 ‘임금’과 ‘노동제공’의 평등한 교환관계에 기초해보이는 자본주의 생산과정이, 실제로는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exploit)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과정인지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의 논의를 따라 설명하려 한다. 이상향을 계획하는 대신 자본주의의 원리를 밝혀낸 마르크스 산업혁명을 전후한 시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빈부 격차와 사회적 대립이 극심하게 벌어졌다. 기존 인류 역사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생산력 발전이 이뤄질 때 자본가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들은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다. 오늘날은 ‘사회주의자’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심각한 생활조건과 자본주의의 폐해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 백가쟁명식 의견을 내고 있었다. (1강에서 살펴보았듯) 대표적으로 생시몽, 푸리에, 오언 같은 이들이 있었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본주의라는 비인간적인 체제를 철폐하고, “효율적이고 공정하고 계획되는” 사회주의라는 이상향을 실현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마르크스도 물론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방법을 택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방법은 예컨대 아래와 같았다. “필요한 모든 것은 이상적인 사회를 계획하고,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을(또는 둘 다를) 그 계획에 끌어들이고, 소규모로 그것을 실험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자상한 분별력에 의지하는 것뿐이라고 그들은(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믿었다. 그리하여 유명한 영국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은 제목만으로도 주제를 짐작할 수 있는 《새로운 도덕적 세계에 관한 책》을 썼다. ... 책의 끝머리에서 오웬은 대영제국의 국왕인 윌리엄 4세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본서는 ... 새로운 도덕적 세계의 근본 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사회를 재건하고 인류의 품성을 재창조하기 위한 새로운 토대를 놓고 있습니다. ... 사회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상상력에서 출발했으며, 세계에 관한 인간의 모든 관례와 사회 제도는 이러한 잘못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 폐하, 폐하가 통치하시는 동안, 온갖 사악한 결과를 낳은 이 제도가 자명한 진리에 토대를 두며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보장하는 다른 제도로 반드시 변하리라 믿습니다.”[5]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한계 또한 유물론적 역사파악을 통해 해석한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활동하던 19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고, 이를 반영하는 노동자의 계급투쟁도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다. 계급투쟁이 미발전된 상태였기에,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노동자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자력 갱생의 능력이 없으므로 기껏해야 외부로부터나 위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신분”으로 보였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미성숙 상태, 미성숙한 계급 상황에 미성숙한 이론들이 조응”했고, “사회적 과제들의 해결은 발전하지 못한 경제적 관계들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산출”됐다. 즉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미발전, 그리고 계급투쟁의 미발전이라는 당시의 역사적 조건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수단을 계급투쟁으로부터 찾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계급투쟁이 들어가야할 자리를 “새롭고도 한층 완전한 사회 질서의 체계를 발명하는 것, 그리고 선전을 통해서, 가능하면 모범적 실험들의 실례를 통해서 그 체계를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하는 것으로 대체했다.[6] 이런 다양한 사회주의자들과 비견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표현했다. (1강에서 살펴보았듯)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위에서 역사를 만든다’는 유물론적 역사관을 정립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바탕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머리로(공상으로)’ 수행했던 과제를,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했다.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은 왜 중요한가? 노예제와 봉건제 시대에 노동하는 인간(노예와 농노)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자신의 노동의 일부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은 너무 명백했다. 노예는 애초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고, 농노는 나흘은 자기 토지에서 일하고 이틀은 영주의 토지에서 일하는 등,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이 분명히 구분됐다. 그러나 노동자는 외견 상 자유롭다. 일을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고, 일하는 댓가로 약정된 임금을 받는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는 외견 상 드러나지 않고 은폐돼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착취를 은폐하고 있는 장막을 찢어버렸다.”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에 대한 착취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밝힌데 있다.[7]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체계적인 착취와 수탈에 기반하고 있고, 이윤 축적을 위해 착취와 수탈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자본의 운동이 차별과 혐오, 공황과 전쟁, 기후재난 등을 끊임없이 불러오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이는 특히 당시에 노동자계급을 향해 일체의 ‘투쟁무용론’을 제기하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일차적으로는 노동자가 투쟁을 통해 착취를 제한하고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끝내는 주체로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의 필요성과 가능성, 그리고 정당성을 입증했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이란 철학적 개념을 사용해 역사의 유물론적 전개과정을 규명해낸 대표적인 책이 『독일 이데올로기』라면,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은 잉여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을 폭로해낸 책이다. 2강에서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파헤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다룰 것인데, 특히 『자본론』 1권에서 마르크스가 전개한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자본론』은 어떤 책인가? 마르크스는 1867년에 독일어로 『자본론』을 처음 발간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아주 상세한 자료조사에 기초하고 있다. (1강에서 확인하였듯이)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뒤집었고’,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생각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구체적이고 귀납적인 방대한 조사로 복잡다단한 현실, 즉 “재료의 상이한 발전형태들을 분석”한 뒤,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해 이를 추상화한 이론, 즉 “이 형태들의 내적 관련”을 규명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선험적 논리구성을 하고서 이에 현실을 껴맞춘 게 아니라, 반대로 구체적인 사실들을 종합한 결과로서 자본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선 모든 것이 상품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본론』은 상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경제적 세포형태”이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이 세포형태에 대해 먼저 탐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론』에서 가장 추상적인 부분으로, 마르크스도 서문에서 “제1장, 특히 상품분석이 들어 있는 절을 이해하기가 가장 힘들 것”이라 했다. 이번 강의 또한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자본론』 제1권은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핵심적 과정인 ‘자본의 생산과정’에 대해 다루고, 제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 제3권은 ‘자본의 총과정의 각종 형태들’을 다룬다. 마르크스가 끝내지 못한 작업을 엥겔스가 마르크스 사후에 편집해 제2권과 제3권을 출판했다. 마르크스는 제4권에서 ‘경제학설사’를 다루고자 했지만, 초고를 작성하는데 그쳤다. 제2권과 제3권을 포함한 『자본론』의 모든 내용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기초학습 과정에 해당하는 이 교육자료에서는 가장 중요한 제1권 중 자본의 생산과정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하며, 나머지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둘 것이다.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본격적으로 들어가보자. 자본주의에서 부는 ‘방대한 상품더미’로 나타난다. “상품은 부의 기본형태다” 『자본론』을 따라 자본주의를 이루는 ‘세포’라 할 수 있는 ‘상품’을 분석해보자. 모든 상품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상품은 인간에게 ‘유용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우리가 소비하는 일상적인 상품들을 떠올려보면, 하나같이 어떤 유용성, 즉 쓸모를 갖고 있다. 이 유용성으로 인해 상품은 보편적으로 ‘사용가치’(use-value)를 갖는다. 어떤 물건의 유용성은, “상품의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기타의 자연적 속성” 때문이다. 예컨대 옷은 인간에게 보온성과 심미성을 제공하고, 자동차는 인간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게 해준다. 사용가치는 “그 유용성을 취득하는 데 인간노동이 많이 드는가 적게 드는가 하고는 관계가 없다.” 예컨대 스마트폰 1개를 만드는 것은 목도리를 하나 만드는 과정에 비해 분명하게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마트폰과 목도리의 쓸모를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 둘의 가치는 질적으로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각 상품이 가지는 사용가치는 질적으로 모두 다르며, 따라서 사용가치 간의 양적 비교는 불가능하다. 둘째,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함께 ‘교환가치’(exchange-value)를 지닌다. 교환가치는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이를 이해할 수 있는데, 모든 상품에는 ‘가격’이 붙기 때문이다. 예컨대 옷은 5만원, 핸드폰은 100만원, 자동차는 1000만원에 판매된다. 그렇다면 옷 20벌 = 핸드폰 1개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렇게 등식을 성립하게 하는, 상품의 내재한 공통의 속성을 ‘교환가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교환가치’는 어떻게 결정될까? 질적으로 서로 다른 물체인 옷과 핸드폰과 자동차 사이에 양적인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 상품들 안에 비교가능한 어떤 ‘공통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통의 무엇’은 “상품의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기타의 자연적 속성일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상품마다 질적으로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들은 각각의 상품이 각각의 유용성, 즉 ‘사용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속성이긴 하나, ‘교환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속성이 아니다. ‘사용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온갖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기타의 자연적 속성’을 무시한다면, 상품에는 오직 하나의 속성만 남는다. 바로 “그것이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이다. 즉 교환가치는 모든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노동생산물’이라는 점에서 기원하며, 그 공통된 속성 덕분에 양적으로 비교가 가능해진다. 좀 더 고찰해보자. 어떤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질적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휴대폰을 조립하는 노동’과 ‘옷을 재봉하는 노동’은 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노동은 언제나 이런 “구체화된 노동” 혹은 “노동생산물에 체현된” 노동으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런 구체적인 노동을 유용노동(useful labor 또는 concrete labor)이라 불렀다. 예컨대 쌀은 쟁기질을 통해, 저고리는 재봉질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쟁기질’과 ‘재봉질’이라는 각각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노동행위는 ‘유용노동’이다. 특정한 사용가치는 특정한 유용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질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유용노동은,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소비이고, 이 의미에서 모두 (공통된) 인간노동이다.” 그래서 “생산활동의 명확한 질, 따라서 노동의 유용한 성격을 무시한다면, 생산활동은 다만 인간노동력의 지출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각각의 구체적 유용노동의 질적 차별성을 제거한,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을 생산적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노동의 속성을 추상노동(abstract labor)이라 불렀다. 바로 이 공통의 요소, “노동의 상이한 구체적 형태”를 제거하고 그 모든 구체적 형태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인간노동”이, 모든 종류의 노동생산물(혹은 상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유일하게 비교가능한 속성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노동생산물에 공통적으로 “응고되어 있는” 이 인간노동의 양을 ‘가치(value)’라고 불렀다.[8] 그리고 가치가 화폐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나는 것이 ‘교환가치’다.[9] ‘사용가치’와 달리 ‘가치’는 “노동의 양”에 의해 양적으로 비교가능하다. “노동의 양은 노동의 계속시간으로 측정하고, 노동의 계속시간은 시간, 일, 주 등을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다. 어려운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을 비교해, 상품의 양적인 교환비율을 정하는 과정은 관념속에만 존재하는 추론이 아니라, 실제로 인류 역사에 걸쳐 늘상 생산자들이 관습적으로, 경험적으로 해오던 행위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농민이라고 상상해보자. 농민은 농사를 지어서 쌀을 수확한다. 그 중에 우리 가족이 먹을 분량을 빼고, 일부 잉여생산물을 갖고 시장에 나가 교환을 한다. 예컨대 한 말의 쌀을 잉여생산물로 가지고 나갔다고 가정하자. 장터에서 한 말의 쌀을 다른 유용한 상품, 예컨대 농사만 짓느라 옷 지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저고리 한 벌을 사려고 한다고 가정하자. 저고리랑 쌀을 교환하려 하는데, 이 때 저고리 한 벌을 사기 위해 얼마만큼의 쌀을 댓가로 줄 것인가, 이것이 교환가치의 문제다. 농민은 손해를 보기 싫기 때문에, 저고리 상인과 흥정하면서 자기가 이 쌀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었는지를 설명한다. 저고리 상인도 마찬가지로 손해를 보기 싫기 때문에 저고리를 만드는데 한땀한땀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이 교환가치의 비율을 정하게 되는 관습적 과정이다. 이 때 생산자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품을 손해보지 않고 교환하기 위해, 나와 상대방이 생산물에 투입한 ‘노동의 양’을 계속 비교한다. 즉 내가 쌀을 생산하는 데 ‘얼마만큼의 노력과 시간을 들였는지’, 그리고 ‘만약 같은 노력과 시간으로 저고리를 만들었다면 몇 개나 만들었을지’를 생각하며 비교한다. 다시 말해, 농민은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투여된 자신의 노동의 양을, 저고리를 만드는 노동의 양과 비교한다. 노동의 양을 서로 비교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상품들 간의 교환비율이 결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교환비율은, 사람마다 다른 개별적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Socially necessary labour time)”, 즉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과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숙련도와 노동강도에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데 드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예컨대 평균적 숙련과 노동강도로 농사를 지을 때 한 말의 쌀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노동시간이 10시간 소요된다고 하자. 그런데 나는 농사를 처음 지어보는 초보농사꾼이라, 실수도 많이하고 새로운 걸 익히는데 시간도 오래걸려 50시간을 투여해 한 말의 쌀을 지었다고 하자. 내가 50시간을 투여했다고 해도, 시장에 나간 나의 한 말의 쌀은 50시간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쌀을 구매하려는 자는 10시간 분의 가치로 판매하는 다른 쌀을 구입할 수 있으니, 나에게 50시간 어치의 가치를 주며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교환이 이뤄질 때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따져 교환이 이뤄진다. 다시 말해 어떤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한가지 짚고 가자면 ‘사용가치’를 지니는 물건이라고 해서, 즉 유용한 물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교환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공기 중 산소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엄청난 유용성을 지니고 있지만, 가치가 없고 따라서 가격도 없다. 산소의 유용성을 우리가 소비하는데 노동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 만약 기후위기와 환경파괴가 지금보다 더 심각해져서, 산소를 획득하기 위해선 공기여과장치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 산소가 인간노동의 투입 없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성이 아니게 되면, 그 때부터 산소는 ‘상품’이 될 것이다. 또 어떤 생산자가 오로지 자신의 자급자족을 위해 생산한 경우, 즉 시장을 매개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소비하기 위해 생산한 물건 또한 ‘교환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예컨대 가사노동은 “자신이 수행되는 바로 그 사적영역 안에서 ‘생산적 소비’로 행해진다.” 그래서 “가사노동은 교환가치는 되지 못하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10] ” 화폐의 등장과 일반화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용가치와 달리 교환가치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돌려가며 만지면서 조사해 보더라도 그것이 (교환)가치를 가진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교환가치는 “순수히 사회적인 것”이고, “오직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환가치는 현실에서는 ‘화폐’를 매개해 표현된다. 예컨대 옷과 핸드폰의 교환가치는, 옷은 5만원, 핸드폰은 100만원이란 형태로 표현된다. 마르크스는 원시적 상품거래에서 출발한 단순한 가치형태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화폐형태로 발전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를 축약해 설명해보겠다. 아까 우리는 조선시대 농민의 삶을 상상했는데, 그 때 1말의 쌀이 1벌의 저고리와 교환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를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단순한, 개별적 또는 우연적 가치형태(simple form of value) 1말의 쌀 = 1벌의 저고리 이러한 표현을 통해 쌀이라는 상품은 저고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 저고리와 비교할 수 없다면, 쌀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방도가 없었지만, 이제 “상품 A(쌀)는 ... 사용가치 B(저고리)를 자기 자신의 가치의 표현재료로 삼는다.” 그런데 농민인 나는 쌀을 저고리하고만 교환하지 않는다. 점차 상품거래가 발전하면서, 이제 농민은 시장에 나가 쌀을 계란, 고등어, 금 등등 다양한 상품과 교환할 수 있다. 이걸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총체적인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Expanded form of value) 1말의 쌀 = 1벌의 저고리 = 30개의 계란 = 5손의 고등어 = 1돈의 금 = 기타 등등 이 관계를 그대로 뒤집어서 표현해보자. ●일반적 가치형태(General form of value)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말의 쌀 1돈의 금 기타 등등 이 때 쌀은 “일반적 등가물(universal equivalent)”의 성격을 가진다. 즉 온갖 상품들이 쌀을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재료로 삼고 있으며, 온갖 상품들을 비교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교환을 거듭할수록, 교환을 빨리, 용이하게, 편리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물품의 가치를 하나의 상품으로서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그래서 다양한 여러 상품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 상품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바로 그 상품이 ‘화폐’가 된다.[11] 그런데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사회에서 귀금속이 화폐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는 무게만 측정하면 되고, 어느 부분을 떼어내도 질이 동일하다는, 귀금속이 가진 고유한 질적 특성 때문이다.[12] 그래서 예컨대 1말의 쌀이 1돈의 금과 교환된다고 가정하고, 화폐의 자리를 금에게 넘겨주면, 아래와 같은 수식이 나온다. ●화폐 형태(Money form of value)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돈의 금 1말의 쌀 기타 등등 여기서 1돈의 금을, 금본위제[13]에서 10만원이라는 명칭으로 표현한다면, 이 다양한 물품들은 10만원이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가격’을 가지게 된다. 1벌의 저고리 30개의 계란 5손의 고등어 = 100,000원 1말의 쌀 기타 등등 이렇듯 가장 초보적인 교환관계를 드러내는 ‘단순한 가치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해 ‘화폐형태’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화폐가 일반적 등가물로서 특수한 기능을 하게 되면서, 화폐에 대한 ‘물신(fetishism)’이 자라난다.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 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인데, 마치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여기서 마치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계약론과 유사하게, 어떤 상품을 화폐로 사용할 것인지를 “인간의 보편적 찬성 아래에서 자의적으로 지어낸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화폐가 된 물건(주로 금이나 은 등의 귀금속)은 화폐이기 이전에 노동생산물이고 상품이었다.[14] 상품과 화폐는 우리가 조선시대를 예로 들었듯이, 아직 상품생산이 전면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부터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상품유통의 발전 초기에는 “사용가치의 잉여분만이 화폐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급자족적 생산을 하고 남은 잉여물을 상품으로 내놓으며, 다른 상품을 사기 위해 화폐를 잠깐 활용하고, 곧바로 다른 상품을 취득한다. 그런데 상품생산과 유통이 점차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자급자족적 생산을 하기보다 더 많은 상품을 시장에서 구매하게 되고, 여러 상품을 언제든 필요할 때 구매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화폐를 늘 수중에 지니고 있을 필요성이 늘어난다. “상품생산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상품생산자는 누구나 사회가 제공하는 담보(즉 화폐)를 확보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유통의 확대에 따라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사회적 형태의 부인 화폐의 권력이 증대한다” 화폐는 갈수록 일반화된다. 상품마다 서로 다른 생산기간의 차이를 조율하기 위해 ‘신용화폐’가 등장하고, 지대나 조세 등도 현물납부로부터 화폐지불로 변한다. 특정한 지불결제일이 생겨나고, 국가수준을 넘어 ‘세계화폐’가 (처음에는 금와 은으로) 등장한다. 화폐의 확대와 함께 점점 유용한 상품을 소비하려는 욕구보다, 화폐를 많이 보유하려는 욕구가 늘어난다. 왜냐하면 “(화폐를 포함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이 물질적 부의 모든 요소를 어느 정도 지배하는가를 나타내며, 따라서 그 상품소유자의 사회적 부의 크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폐를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려 하고, “근면과 절약과 탐욕이 그의 주된 덕목”이 된다.[15]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 지금까지 상품에 내재한 속성(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그리고 상품생산과 유통의 발전에 따라 화폐가 등장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 과정에 우리는 부분적 상품교환이 이뤄지던 조선시대의 농민을 상상했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는 아직 고찰하지 않았으며, 이제 자본주의가 탄생하는 출발점에 서있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 그리고 상품유통의 발달된 형태인 상업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을 이룬다.”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때로부터 자본의 근대사가 시작된다.” 자본은 “언제나 처음에는 화폐의 형태로” 무대에 등장한다. 앞서서 고찰한 화폐가 ‘상품을 구매하려는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했다면, 자본으로 변화한 화폐는 이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16] ‘상품’은 더 많은 화폐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도식화해 상품유통의 형태가 ‘상품(C)-화폐(M)-상품(C)에서 화폐(M)-상품(C)-화폐(M)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C-M-C’에서 나의 목적은 어떤 유용성을 소비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근대사회의 농사꾼인 내가 쌀(C)을 시장에 팔아 10만원(M)을 얻어 저고리(C)를 살 때, 내 목적은 저고리를 입는 것(사용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업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상업자본가가 된 나의 목적은 이제 더 많은 화폐를 갖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나는 내가 가진 초기자본 10만원(M)을 갖고 쌀(C)을 사서 11만원(M’)에 판매하려고 한다. 바로 이 증가분,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surplus-value)”라고 부른다. 이 잉여가치 증식이라는 속성이, “이 가치(즉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 운동의 의식적 대표자인 화폐소유자는 자본가가 된다.” 자본가는 “끊임없이 화폐를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더 많은 화폐의 획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상품유통 과정에서의 ‘구두쇠’와는 다른 존재가 된다. 구두쇠가 집안 금고에 화폐를 안전히 모아두는 동안,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투자해 상품으로 바꾸며 화폐의 증식을 꾀한다. “부에 대한 무한한 탐욕, 정열적인 교환가치 추구는 자본가와 구두쇠에게 공통되지만, 구두쇠는 얼빠진 자본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자본가는 합리적인 구두쇠다. 구두쇠는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냄으로써 교환가치의 쉴 새 없는 증식을 추구하지만, 더 영리한 자본가는 화폐를 끊임없이 유통에 투입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한다.” 이윤의 비밀(1): 상품은 각각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잉여가치(이윤) 창출의 비밀에 대해 탐구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 운동의 핵심인 잉여가치는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즉 유통과정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발생한다. 앞서 우리는 16세기 무렵부터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상업자본가들의 욕망(더 많은 화폐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에 대해 얘기했다. 이와 함께 이들의 이윤축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인 중상주의 이론이 발전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자본의 최초의 해설자”라 불렀다. 이들은 상인자본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이유(즉 M이 C를 거쳐 M보다 많은 M’가 되는 이유)에 대해, ‘상품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현실에서는 독점의 영향이나, 사기를 치는 등 다양한 사유들로 인해 상품을 그 가치(또는 자연적인 가격)보다 비싸게 팔아먹는 일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상품교환법칙의 위반”인 특수한 사례일 뿐, 일반적 법칙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중상주의 관점은 개인의 관점에서 부의 증대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 전체의 부의 증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누군가 교활하게도 어떤 물건을 실제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파는 데 성공했다 치자. 그러면 바로 그만큼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돼있다. 이는 가치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비율을 바꿀 순 있지만, 사회 전체의 총가치는 하나도 증대시킬 수는 없다.[18] 그리고 상품소유자인 판매자는 다른 관계에선 곧 구매자이며, 구매자는 다른 관계에서 곧 판매자다.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상품을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팔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도 나에게 어떤 상품을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팔 수 있다. 마르크스가 볼 때 이러한 이론을 철저하게 주장하려면, “판매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따라서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급이 있다고 가정”해야한다. 그런데 이는 공납같이 전근대적인 방식, 즉 서로 자유롭지 않은 신분관계에서나 가능하다.[19] 즉 강압에 의한 수탈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윤의 일반적 본성을 설명하려면” “이윤은 상품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데서, 요컨대 상품에 실현된 노동량에 비례하여 판매하는 데서 생긴다는 정리로부터 출발해야한다.” 다시 말해, ‘상품이 각각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는 것은 유통과정에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윤이 실현되는 순간, 즉 자본가가 최종적으로 이윤을 획득하는 순간은 상품을 판매해 돈을 거둬들였을 때다. 즉 상품(C)이 화폐(M’)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윤(잉여가치)이 처음 ‘탄생’하는 순간은 그곳에 있지 않다. 마르크스는 그 모순을 이렇게 표현한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사서 그 가치대로 팔아야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에 던져 넣은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나비로 성장하는 것, 즉 완전한 자본가로 되는 것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20]”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생산과정에 있다. 이에 대해 잠시 뒤에 살펴보자. 이윤의 비밀(2) : 노동력 상품의 고유한 특성 첫 번째 비밀에서 우리는 이윤창출이 유통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아님을 확인했다. 다음으로 더 중요한, 이윤창출의 핵심적인 두 번째 비밀은, 바로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재료로 구매하는 ‘노동력’이란 상품의 고유한 특성에 있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속성에 대해 좀 더 깊이 분석해보자. 앞서 우리는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했다. ‘노동력’ 또한 상품으로 거래될 때, 고유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무엇일까? 물을 사용하면? 마심으로써 인간을 생존하게 한다. 옷을 사용하면? 입음으로써 보온성을 제공한다. 자동차를 사용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력을 사용하면? ‘노동’을 할 수 있다. 노동력은 인간의 노동을 담은 그릇이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의 신체 속에 있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통해 가치(교환가치)를 생산해내는 능력”이다. 앞서 살펴본대로, 모든 상품은 그 속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량만큼의 가치(교환가치)를 지니고, 이에 따라 양적으로 비교되고 교환될 수 있다. ‘노동력’이란 상품은, 그것을 사용할 때 새로운 가치(교환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상품이다. 이 점에서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과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노동력의 ‘사용가치’가 ‘노동제공을 통해 교환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면,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무엇일까?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상품의 교환가치를 규정하는 일반적 법칙이 적용된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상품의 생산을 위해 투입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을 뜻한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량(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란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이란 무슨 말일까? 한 마디로 노동자가 먹고 자고 내일 다시 노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노동력의 발휘인 노동에는 인간의 근육, 신경, 뇌 등의 일정한 양이 지출되는데, 그것은 다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노동력의 소유자가 오늘의 노동을 끝마친다면, 그는 내일도 오늘과 동일한 힘과 건강을 가지고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생활수단의 총량은 노동하는 개인을 정상적인 생활상태로 유지하는 데 충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그 노동자가 필요로 하는 소비수단과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죽은 뒤 태어난 새로운 노동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 즉 노동자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래야 노동자가 늙어서 죽어도, 노동력의 동일한 양이 유지될테니 말이다. 또 복잡하여 훈련과 숙련이 요구되는 노동의 경우, 필요한 기능을 익히기 위한 훈련비용과 교육비용도 노동력의 가치에 포함된다. 바로 이 노동력의 사용가치(‘노동제공’)와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 사이의 불일치가, 잉여가치 착취의 핵심적인 비밀이다. 여기서 잠시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한가지 특징을 짚고 넘어가자. 바로 노동력의 가치를 이루는 생활수단의 총액이라는 건,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영양분을 섭취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입거나 집이 필요하다는, 인간이 생명체이기에 발생하는 자연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수준과 발전단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음식물, 의복, 난방, 주택 등과 같은 그의 자연적 욕구는 한 나라의 기후나 기타 자연적 특성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필수적인 욕구의 범위나 그 충족 방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체로 한 나라의 문화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계급이 어떤 조건에서 또 어떤 관습과 기대를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는 달리 노동력의 가치규정에는 역사적, 도덕적(정신적) 요소가 포함된다.[21]” 이것은 이미 현실에서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한국노총, 민주노총, 통계청 등 여러 기관에서 노동자들의 ‘실질 생계비’를 다양한 방식으로 추산하고 있다. 노동자가 하루에 평균적으로 필요한 영양소의 양에 근거한 식료품비, 의료비, 교통비, 통신비, 문화생활비 등 ‘노동자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각종 상품의 양을 통계적 방식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적절한 노동력의 가치)가 얼마냐’라는 물음에 절대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력 가치의 최저치는 있지만 최대치는 없으며, 그 적정수준은 역사적, 도덕적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주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입장에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아이도 낳아 제대로 기를 수 있어야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각하는 ‘적정한 임금수준’에는 늘 간극이 있으며, 이 때 적정한 임금수준을 결정하는 건 결국 계급 간 힘의 관계이다. 잉여가치(이윤)[17]는 생산과정에서 어떻게 창출되는가? 지금까지 노동력이란 상품의 고유한 특징을 고찰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잉여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본이 노동력을 소비해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 즉 ‘생산과정’으로 들어가보자. “...우리는 화폐소유자, 노동력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영역을 벗어나 이 두 사람을 따라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 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22]” 생산과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제빵업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어느 제빵 자본가가 빵을 만들어서 팔아 돈을 벌려고 한다. 자본가는 먼저 자신의 자본(M)을 사용해, 시장에서 세 가지 재료(C)를 구매해야한다. 실제로는 빵을 만드는데 아주 여러가지 생산요소가 필요하지만, 단순화하여 노동대상(원료)을 대표해 ‘밀가루’, 노동수단(기계)을 대표해 ‘오븐’, 그리고 이 둘을 이용해서 실제로 빵을 만드는 노동자의 ‘노동력’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치자. 빵을 30개 만드는데 원료인 밀가루는 10kg가 필요하다고 하자. 밀가루 10kg의 가치는 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다.[23] 그렇게 환원한 밀가루 10kg의 가치가 사회적 노동시간 12시간이라고 가정하자. 이하 계산 상 편의를 위해, 1노동시간이 1만원의 화폐적 가치로 표현된다고 가정하겠다. 즉 밀가루 10kg의 가치는 12만원이다. 빵을 만드는데 오븐이 사용된다. 빵을 굽기 위해 오븐을 사용하면서, 오븐이 일정부분 마모된다. 이 오븐의 감가상각비가, 빵 30개를 굽는다고 할 때 사회적 노동시간 10시간에 해당된다고 가정하자.[24] 우리는 ‘법칙의 교란’을 제거한 정상적 상태에서 이윤의 창출을 고찰하려 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밀가루를 12시간보다 싸게 살 수는 없다. 밀가루 판매자가 손해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가루를 비싸게 살 이유도 없다. 밀가루를 정상가격으로 파는 다른 사람에게서 구입하면 되기 때문이다. 오븐도 같은 이유로 그것의 정상가격으로만 구매할 수 있다. 다음으로 빵을 만드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하루 임금, 다시 말해 ‘노동자가 노동을 하고서 먹고 자고 자신을 재생산해 다음날에도 출근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비용’, 즉 ‘노동력의 가치’가 (이 예시 속 세계에서 당시 계급투쟁의 역관계를 반영해) 4시간으로 형성돼있다고 하자. 밀가루와 오븐을 구매한 자본가는 제빵노동자를 4만원의 하루 임금을 주고 고용한다. 자본가가 지출한 비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밀가루 10Kg(12노동시간) + 오븐 감가상각비(10노동시간) + 제빵노동자의 하루임금(4노동시간) = 26만원(26노동시간) 그리고 자본가는 빵 30개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에게 일을 시킨다. 주어진 평균적 숙련도로 기계를 작동시켜 원료를 가공해 빵을 만든다고 할 때, 빵 30개를 만드는데에는 8시간이 든다고 하자. 오늘 8시간의 노동을 통해 ‘빵 30개’라는 사용가치가 생산됐고, ‘빵 30개’에는 이를 만드는데 투여된 사회적 노동시간 만큼의 ‘가치’가 포함돼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밀가루 10Kg(과거의 12노동시간) + 오븐 감가상각비(과거의 10노동시간) + 노동자의 제빵노동(현재의 8노동시간) = 빵 30개(30노동시간) 생산과정을 거치며 자본가는 30만원 어치에 해당하는 상품(빵)을 갖게 되었다. 자본가가 이렇게 만든 빵 30개를 본래 그 가치대로 판매하면, 자본가는 30노동시간에 해당하는 화폐, 즉 30만원을 손에 쥐게 된다. 처음에 자본가가 투자한 자본은 26만원이었는데, 이제 자본가는 30만원을 손에 쥐었으니 4만원의 이윤을 얻게 된다. 잠깐,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 비밀의 핵심은, ‘노동력의 가치’(노동력의 교환가치)와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창출되는 가치’(노동력의 사용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밀가루와 오븐이 빵에다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이전’하기만 한 것과 달리,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임금으로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지출된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노동자의 생명을 24시간 유지하기 위해서 4시간 만큼의 임금이 필요하다는 사정은, 결코 노동자가 4시간을 넘어 일하는 것을, 심지어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자본론』의 원문을 조금 더 같이 읽어보자. “...노동력에 포함되어 있는 과거 노동(past labour)과, 노동력이 제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노동(living labour)은, 다시 말해 노동력의 매일의 유지비[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의 매일의 지출[노동력을 사용함으로서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가치의 양]은 그 크기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양이다.” “...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노동력]의 독특한 사용가치[가치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였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교환의 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노동력의 판매자는 [다른 모든 상품의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실현하면서 그 사용가치를 넘겨준다. 그는 사용가치를 넘겨주지 않고서는 교환가치를 받을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 노동 그 자체는, 팔린 기름의 사용가치가 기름장수의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판매자의 것이 아니다. 화폐소유자는 이미 노동력의 하루 가치를 지불했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하루 사용, 하루의 노동은 그의 것이다. 노동력은 하루 종일 활동하고 노동할 수 있는데도, 노동력을 하루 동안 유지하는 데는 1/2 노동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정,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 사용이 창조하는 가치가 노동력의 하루 가치의 2배가 된다는 사정은, 구매자에게는 물론 특별한 행운이기는 하지만, 결코 판매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25]”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다른 모든 종류의 상품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며, 그로 인해 잉여가치 창조의 원천이 된다. 다른 상품은 모두 그것이 자본으로 투입됐을 때,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에 ‘이전’할 수 있을 뿐이지만, 노동력 상품은 그것이 자본으로 투입됐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즉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이라 부르고, 그 밖의 기계나 원료 등을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이라 불렀다. 이렇듯 노동자가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필요노동시간을 넘어 잉여노동을 하고, 그로 인해 생산된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전유하는 것이 ‘착취(exploit)’다. 그리고 앞선 예에서 노동자는 4만원을 받고 8시간 노동을 통해 8만원의 가치를 생산했는데, 따라서 자본가가 노동자가 창출한 총가치(8시간) 중 잉여가치로 가져가는 몫이 4시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투여한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 중 4시간은 노동자의 임금을 재생산하기 위해 쓴 시간이고, 나머지 4시간은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 쓴 시간이다. 마르크스는 나의 노동력(임금)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 자본가의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을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비율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 또는 ‘잉여가치율’을 계산할 수 있다. 이 경우 잉여가치율(=착취율)은 4시간(잉여노동시간)/4시간(필요노동시간) = 100%이다.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필요노동시간을 넘어 노동을 시킴으로서 획득한 이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에서 완성된 상품을 판매해 화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면 ‘이윤’이 된다.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 노동시간 연장 지금까지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와 노동력의 사용가치(노동제공을 통해 만들어낸 가치) 사이의 차이에 의한 착취의 원리를 설명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금까지 아주 단순화한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자본주의 생산의 풍경은, 이렇게 단순화한 예시만큼 목가적이지 않다. 자본주의의 풍경은, 자본가는 26만원을 투자해 30만원을 얻어 4만원을 벌고, 노동자도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수준’인 임금 4만원을 받아서, 열심히 일하면서 일가족이 생계유지가 가능한, 그런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다. “자본가가 인격화한 자본인 한, 그의 활동 동기는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인류에게 무자비하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제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사회 생산력의 발전과, 또 [각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로운 발달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조건의 창조에 박차를 가한다. ...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한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그리고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각 개별 자본가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써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그는 누진적 축적에 의해서만 자기 자본을 확대할 수 있다."[26]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들이다!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27]” 자본은 안정적으로 소소하게 벌면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본은 서로 경쟁하며, 경쟁에서 도태되는 순간 자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자본가들은 돈이 생기면 다시 투자를 해서 기업규모를 키우고, 다시 경쟁에서 이겨서 다른 기업을 잡아먹으며 몸집을 무한히 불려야한다. 이윤의 축적이 지상목표가 된 자본, 그리고 그 인격화된 존재인 자본가에게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을 활용한다. 무엇보다 먼저 직관적으로 활용하는 건, 임금은 더 주지 않으며 노동자가 더 오래 일하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노동 시간의 연장으로 만들어진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했다. 앞선 제빵 자본의 사례에서, 4만원의 임금을 주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시키면 4만원의 잉여가치가 발생하지만, 같은 임금을 주고 하루 10시간 노동을 시키면 6만원의 잉여가치가 발생한다. 간단히 말해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장시간 노동 강요이다.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로 노동자를 쥐어짜려는 시도는 오늘날까지 자본주의 역사의 모든 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아직 조직된 저항에 나서지 못하는 곳에서, 자본의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노동자의 생명력을 완전히 파괴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28] 『자본론』에는 마르크스가 영국의 공장감독관 보고서에서 인용한 자료들이 나오는데, 그 중 당시 아동 노동 상황에 대한 자료를 몇가지 읽어보자. “이 공장주들 중 일부는 12세 내지 15세의 소년 5명을 금요일 오전 6시부터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4시까지 식사시간과 한밤중의 한 시간의 수면시간 이외에는 조금도 휴식을 주지 않고 혹사시켰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그런데 이 아동들은 ‘넝마 구덩이’ 속에서 30시간을 쉴 새 없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곳은 모직 누더기를 찢는 곳으로, 그 안의 공기는 성인노동자라도 계속 손수건으로 입을 가려 폐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티끌과 털 부스러기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고인들은 ...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즉 그들은 크나큰 자비심을 베풀어 이 불쌍한 아동들에게 4시간의 수면을 허용하려 했으나, 이 완고한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침대에 누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퀘이커 교도들은 £20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이 도시의 주민들 중 레이스 제조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영국의 다른 곳 또는 문명세계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할 정도의 궁핍과 고통이 지배하고 있다 ... 9세부터 10세까지의 아이들이 새벽 2,3,4시에 그들의 불결한 잠자리에서 끌려나와 겨우 입에 풀칠만이라도 하기 위해 밤 10,11,12시까지 노동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데, 그들의 팔다리는 말라비틀어지고 신체는 작아지며 얼굴은 창백해지고, 그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목석처럼 무감각상태로 굳어져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 성인남자의 노동시간을 하루 18시간으로 제한해 달라고 청원할 목적으로 공청회를 열고 있는 이런 도시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아홉 살 되는 윌리엄 우드가 ”노동하기 시작한 것은 만 7세 10개월 되던 때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릇 만드는 틀을 날랐다.“ ...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저녁 9시쯤에 일을 끝마치곤 했다. ”저는 1주에 6일 동안 날마다 저녁 9시까지 일합니다. 나는 최근 7,8주일 동안 그렇게 해왔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15시간 노동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릇 만드는 틀을 운반하며 물레를 돌립니다. 내가 일하러 오는 것은 아침 6시인데, 4시에 올 때도 있습니다. 나는 어젯밤 밤을 새워 오늘 아침 6시까지 일했습니다. 그저께 밤부터 자지 못했습니다. 어젯밤은 나와 함께 8, 9명의 다른 소년들도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오늘 아침에도 모두 왔습니다. 나는 1주일에 3실링 6페니를 받고 있습니다. 밤을 새워 일해도 그 이상은 받지 못합니다. 지난 주일에 나는 이틀 밤을 새워 일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자본론』 집필을 위해 연구하던 1850년대 무렵에 나온 보고서의 내용들이다. 175년 전 영국 노동자들은 일곱 살 때부터 하루 15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와 같은 살인적인 노동강도는 노동자의 생명력을 극심하게 갉아먹었고, 노동인구의 정상적 유지가 불가능할 수준에 이르렀다.[29] 그런데 이것은 1850년대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은 노동운동의 저항이 분쇄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절대적 잉여가치의 무제한적 증대를 꾀한다. <자본>에 적힌 보고서와 비슷한 이야기를 사실 우리는 가까운 과거, 가까운 장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평화시장은 약 2만명의 젊은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는 그 중 약 90%가 14세에서 20세 사이의 여성노동자들이며, 의류판매점들과 소규모 봉제공장들이 뒤섞여 있는 4층 짜리 미로로 이루어진 작은 지역이었다. 노동자들은 햇빛이 들지 않고, 환기도 되지 않으며 천장이 1.2m 혹은 1.5m 이하인 비좁은 다락방에서 일했다. 하루 평균 14시간 일하도록 강요받았고, 한달 임금은 평균 3천원(1970년 기준) 미만이었다. 견습공이 전체 노동자의 반수 이상이었고, 그들의 임금은 정규미싱사의 1/5수준 (한달 3천원)에 불과했다. 견습공의 평균연령은 15세였으며, 저임금으로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30]” “국제상사는 작업시간이 아침 7시 5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인데 이것은 형식상의 시간일 뿐이며 책임 작업량이라 하여 목표달성을 못하면 아침조출과 연장근무가 허다하다. 철야만도 일주일에 2~5번 정도를 해야 하는 데 가을에서 봄에 이르는 시기에는 월간 15회 이상의 철야를 강행하는 형편이다. 관리자들의 온갖 폭언도 가관이다. 하루에도 집합이 2~6번 정도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욕설과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어쩌다 몸이 아파 결근이라도 하게 되면 사무실에 불려가 폭행, 구타, 폭언 등의 수모를 당한다. (『민주노동』 제4호에 실린 글을 이태호 1986b, 125면에서 재인용)[31]” “작업장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냄새다. 원단 더미에서 풍기는 포르말린 냄새가 익숙하게, 그러나 매번 아리게 코를 찌른다. 밖이 환한데도 작업장은 침침하다. 눈앞에 매달린 백열전등이 날카로운 빛을 뿜는다. 이 빛에 익숙해진 사람은 밝은 햇살 아래 눈을 뜨지 못한다. 작업대에 몸을 굽히고 있는 열세 살짜리 시다들의 눈은 핏물이 든 것처럼 빨갛다. 재봉대와 시다판들로 꽉 찬 다락방에서 사이사이 끼어 앉은 여공들이 실밥을 뜯고 자크를 단다. 옷감에서 피어오르는 먼지 때문에 어두운 다락방은 더 어두워 보인다. 재봉틀 소리 사이로 기침소리가 발작처럼 울린다. 퇴근 시간까지 이들은 종일 닭장 같은 곳에서 재봉틀을 밟아대는 것이다. 나이 어린 시다들은 재봉일을 하는 틈틈이 미싱사의 잔심부름까지 해야 한다. 이들은 천정이 낮은 탓에 허리조차 똑바로 펴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십 번씩 다락방을 오간다. 우리 작업장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열세 살 영희가 다락방에서 내려온다. 사다리를 잡은 하얀 팔뚝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위태롭다.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먼지구덩이 속에서 애쓰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32]”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주의가 득세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좌익운동과 자주적 노동운동이 완전히 파괴됐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조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본은 120년 전과 같은 무제한적인 착취를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질문해보자면, 이것이 1850년과 1970년 과거의 이야기이기만 할까? 1990년대부터 섬유산업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의 나라로 이전했다. 오늘날 방글라데시 섬유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실태에 관한 기사는 노동운동이 저항을 하지 못하는, 혹은 저항이 약한 곳에서 언제든지 자본은 인간의 생명력을 완전히 갉아먹을 때까지 노동시간을 연장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방글라데시에서 Lidl, H&M, Gap을 위해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과도한 초과 근무를 하고 있으며, 일부는 하루에 15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고 BBC가 월요일에 조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슈퍼마켓 리들(Lidl)을 위해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이 한밤중에 공장에 갇혀 있는 모습을 몰래 촬영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 다음 날 오전 2시 30분까지 공장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소매업체인 갭(Gap)과 H&M을 위한 의류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근무일이 오전 7시에 시작되어 오후 10시 30분에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초과 근무 시간이 근로자의 급여 명세서에 표시되지는 않았습니다.[33]” “방글라데시의 지역 뉴스 사이트(Textile Today, Apparel Resources)에 최근 게재된 기사들에 따르면, 4월 13일에 발표된 노동고용부(Ministry of Labour and Employment)가 공문을 통해, 의류 수출 공장에서 직원들이 하루에 2시간의 초과 근무를 추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총 4시간의 합법적인 초과 근무 시간을 허용합니다. 새로운 초과근무 규정은 4월 17일부터 시행되었으며, 6개월 동안 유지될 예정입니다. 즉, 이제 공장에서 근로자가 하루 12시간, 주 6일, 주당 총 72시간 일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지침이 발표되기 전에는 합법적 한도가 하루 10시간, 주당 총 60시간이었습니다.[34]” “공장 소유주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안전 문제, 환기, 위생에 관한 부분을 간과합니다. 초과 근무 수당을 지급하지 않거나, 부상 시 도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감 기한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노동자들을 강하게 몰아붙입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중 일부는 대량 주문을 하고 '대량 주문이기 때문에 생산 라인을 확장하고 수익을 개선하라'고 말하는 브랜드 소매업체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2~3센트 차이로도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지만, 이런 회사들은 [노동권과 안전] 준수를 비용 산정에 반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 이 문장들은 마치 150여 년 전에 쓰인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직접 가져온 것 같습니다. 글로벌 상품 체인에 의해 설정된 가혹한 조건 때문에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노동자가 일하기 가장 힘든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023년 1월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 동안 다국적 의류 회사들이 하청업체를 압박하여 비용을 절감했고, 그 결과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 더욱 열악해졌습니다.[35]” 같은 국가 내에서도, 노동자를 분열시키는데 성공한 자본은 어떤 노동자에겐 주 40시간 5일제 노동과 연차휴가를 보장하지만, 어떤 노동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아래는 2019년 한국의 어느 냉장고 생산공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수기다. “결국 탄력근로제를 실시한다고 한다. ... 그날 오후, 발 빠른 친구들이 9~11월 계획표를 알려줬다. 기가 찬다. 이렇게 일하라고? 진심으로? 9월에 추석 연휴인 목, 금, 토요일만 쉬고 모두 출근이다. 평일은 잔업이 일주일에 2~4일이 기본으로 들어간다. 주말에도 출근한다. 10월에도 마찬가지다. 공휴일과 18일과 27일을 제외하고 전부 일주일에 2~4일 모두 잔업에 주말 출근이다. 그러다가 11월 3일부터 일이 없다. 평일 잔업 없이 금, 토, 일요일 출근을 안 한다. 월급이 반의 반토막이 나겠지. 고정적으로 소비해야 하는 주거비, 식비 등을 제때 내려면 똥줄이 좀 탈 것 같다. 그보다 내가 무사히 11월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다. 내가 버텨낼 수 있을까? 겁이 너무 많이 난다. ... 산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다른 라인에서 일어나도 소름 끼치게 무서운데, 이번에는 내가 있는 건물의 내가 보이는 기계에서 일어났다. ... 더 깊게 알라고 하지 말라는 순간 ‘심각한 산재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장 난 줄 모르고 설비에 들어가서 작동시키려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모든 손가락이 잘렸고, 봉합이 잘 안 되었으며 앞으로 손가락을 예전처럼 쓸 수 없을 거라고 진단받았단다. ... 이튿날 아침조회 때 들어 보니 사고 원인을 모른단다. 사고가 일어난 시간에 설비나 파악할 수 있는 기계들이 갑자기 꺼져서 원인 확인이 어렵고 아마 작업자의 변칙이 가장 큰 원인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작업자는 회사에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단다. 그 시점에서 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서 아무도 책임 안 져주고 돈이나 쥐어주고 산재 신청도 어렵고. 본인 안전은 본인이 책임지는 겁니다. 오늘 하루도 안전한 작업 하시고.[36]” 오늘날 한국에서 윤석열이 주 80시간 노동제를 꺼내들고, 이재명은 반도체특별법으로 주52시간 제외를 얘기한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계급의 전쟁은 아마 자본주의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늘 진행형일 것이다. 상대적 잉여가치 증대: 기술혁신 자본가는 늘 호시탐탐 노동시간의 연장을 꾀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첫째, 노동자의 육체적 한계에 부딪친다. 노동자를 기계처럼 하루 24시간 가동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면 노동자는 재생산이 불가능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가는 필히 계급투쟁의 저항에 부딪친다. 노동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순순히 자본가의 노동시간 연장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에 더해, 즉 노동시간을 무조건 늘리는 것 외에, 잉여가치를 늘릴 수 있는 다른 방식을 고민하게 된다. 수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필요노동시간에 대한 잉여노동시간의 비중을 늘리는 것으로, 마르크스는 이를 ‘상대적 잉여가치 증대’라고 불렀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건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와 마찬가지의 한계에 부딪친다. 최소한의 생존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임금을 하락시키면 노동자가 굶어죽기 때문에 체제가 유지될 수 없으며, 더군다나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 노동자는 최소한의 생존 그 이상의 권리를 쟁취해왔기 때문에, 그 도덕적, 역사적 권리를 무시하고 낮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면 노동자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는 노동강도를 높여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양을 생산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임금으로 지급해야하는 양은 정해져있으므로, 생산량이 늘어나는 만큼 잉여노동시간의 상대적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본질적으로 같은 한계에 부딪친다. 먼저 노동자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가 있다. 일정 수준까지는 노동강도를 높여 노동자의 에너지를 더 빨리 고갈시킴으로써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겠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노동자가 극심한 노동강도를 따라갈 수 없어 (불량률이 늘어나고, 품질이 떨어지고, 사고가 발생하는 등) 생산성이 저하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삶의 에너지를 더 빨리 소모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노동자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다. 임금을 줄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이는 건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정해진 생산조건 아래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강도를 높이는 방식이란 점에서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노동시간 증대)와 유사하다. 그런데 착취도 증가 외에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는 중요한 방법이 있다. 바로 주어진 생산조건 자체를 바꾸는 것, 즉 기술혁신이다. 기술혁신은 질적으로 다른 생산성 향상을 가능케하여, 단지 노동자에 대한 착취율을 늘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개별 자본가에게 부여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찬양하는 이데올로그들은 기술혁신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특히 1차 산업혁명기에 수공업에서 매뉴팩처로, 기계제 대공업으로 이동하면서 만들어낸 생산성 증대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의 시작 이후 생산력 발전 수준은 그 이전의 모든 시기를 압도한다. “서기 1000년에서 1500년, 중세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년에 0.12%씩 증가했다. 이 말은 서기 1500년에 살던 사람들은 서기 1000년에 살던 사람들보다 수입이 82%밖에 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연평균 성장률이 11퍼센트인 중국이 2002년에서 2008년까지 6년 동안 경험한 성장 수준이라고 말하면 큰 그림을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즉 물질적 발달 정도만 놓고 보면 현재 중국의 1년은 중세 서유럽의 83년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겠다. ... 아시아와 동유럽(러시아 포함) 국가들에 비하면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가히 일취월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머지 지역은 그 속도가 3분의 1인 0.04%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500~1820년 사이 서유럽의 1인당 소득 성장률은 여전히 0.14%에 지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면에서 1000~1500년 기간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 1820년경부터 자본주의는 비상을 시작했다. ... 이 50년 동안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퍼센트 성장을 보였다. ... 1500년에서 1820년 사이에 0.14% 성장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경제에 터보 엔진을 달고 고속 주행을 한 셈이었다.[37]” “(자동식 뮬 방추는) 약 366파운드의 면화가 면사로 전환되는 데 불과 150노동시간 또는 15개의 10시간 노동일을 흡수한다. 물레로는 [손방적공이 13온스의 면사를 60시간에 생산한다면] 동일한 양의 면화는 2,700개의 10시간 노동일 또는 27,000노동시간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종래의 목판 날염법(손에 의한 날염법)을 기계에 의한 날염이 쫒아낸 곳에서는, 단 한 대의 기계가 1명의 성인노동자[또는 소년공]의 협조로 1시간에 이전에는 200명의 성인노동자가 하던 것과 같은 양의 4색 날염직을 날염한다. 위트니가 1793년에 조면기를 발명하기 전에는 1파운드의 면화에서 씨를 뽑는 데 평균 1노동일이 걸렸다. 그의 발명 덕택으로 흑인여자 1명이 하루에 100파운드의 면화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 동력으로 소, 증기, 물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기계에 원료를 넣는 사람으로 몇 명의 소년과 소녀가 필요할 뿐이다. 소가 움직이는 기계 16대는 이전에 하루 평균 750명이 하던 작업을 한다.[38]” 기술혁신에 성공한 개별 자본은 일시적으로 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획득한다. 기술혁신에 성공한 자본가는 경쟁하는 다른 자본가에 비해 같은 상품을 훨씬 더 적은 노동시간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기술혁신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아직 상품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이전의 기술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시장가격도 이에 따라 형성돼있다. 따라서 시장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할 경우 자본가는, 기술혁신으로 자신이 절약한 노동시간만큼 ‘특별이윤’을 얻을 수 있다. 또는 보다 현실에 가깝게는 시장가격보다 좀 더 낮은 가격에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특별이윤을 획득함과 함께 시장점유율을 확대하고 다른 경쟁자본을 제압할 수 있다.[39] 우리가 아까 살펴본 제빵업의 예를 다시 살펴보자. 예컨대 과거에는 빵 30개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노동시간 8시간이 요구됐는데, 어떤 자본가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빵 30개를 만들 때 필요한 노동시간이 4시간으로 단축되면 어떻게 될까? 달리 말하면 8노동시간 동안 이제는 예전보다 2배의 빵, 즉 60개의 빵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제빵기술의 혁신과 무관하게 밀가루 10kg과 오븐의 감가상각비는 변동없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하자. 빵 30개를 만드는데 밀가루는 12만원, 오븐의 감가상각비는 10만원이 든다. 8노동시간을 투여해 빵 60개를 만들기 위해선 밀가루는 24만원, 오븐 감가상각비로는 20만원을 투여해야할 것이다. 노동자에겐 이전과 동일하게 8시간 노동을 시키며, 필요노동시간인 4노동시간 분의 임금을 지급한다.[40] 이 때 자본가가 지출하는 금액은 아래와 같다. 밀가루 20KG(24만원) + 오븐 감가상각비(20만원) + 노동자임금(4만원) = 48만원 이 때 자본가가 생산하는 빵 60개에 대상화된 가치는 다음과 같다. 밀가루 20KG(24만원) + 오븐 감가상각비(20만원) + 노동자의 제빵노동(8만원) = 52만원 즉 자본가는 이제 약 0.86노동시간(52노동시간/빵60개)을 들여 빵 1개를 생산할 수 있다. 기술혁신 이전에 빵 1개의 교환가치는 1노동시간(1만원)이었는데, 기술혁신의 결과로 이 자본가가 만든 빵 1개는 0.86노동시간(0.86만원)의 교환가치를 지니게 됐다. 그런데 아직 기술혁신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빵 1개는 시장에서 1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이 자본가가 시장가격(1만원)으로 빵을 판매하면, 빵 1개당 0.14만원의 특별이윤을 얻는 셈이다. 실제로는 예컨대 0.95만원 정도에 빵을 판매해서, 경쟁 자본가의 시장점유율을 빼앗아오면서, 개당 0.09만원의 특별이윤도 챙기는 선택을 할 것이다. 도식적인 예를 들어서 특별이윤을 쉽게 설명했다. 이것은 실제 현실을 매우 단순화한 설명이라, 사실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특히 비현실적인 부분은 오븐의 가치인데, 기술혁신은 일반적으로 기계의 개량과 발전으로 나타나고, 이는 더욱 복잡한 기계의 사용으로, 즉 기계(이 경우 오븐)의 상대적 가치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뒤에 설명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연결된다. 그런데 기술혁신으로 얻어진 이런 특별이윤은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니다. 경쟁하는 다른 자본가들도 살아남기 위해 비슷한 기술혁신을 연구하고 도입하게 되며, 따라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기술이 보편화된다. 신기술이 보편화되면 기존에 개별 자본가가 얻던 ‘특별이윤’은 사라진다. 그리고 높아진 노동생산성으로 인해 같은 노동시간 동안 더 많은 상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상품 하나에 대상화된 노동시간은 줄어든다. 즉 상품의 가치가 하락한다. 예컨대 앞선 제빵 사례에서는 빵 1개 당 가치가 1만원에서 0.86만원으로 하락한다. 상품(특히 일반적 생활수단)의 가치하락은 임금의 상대적 비중을 줄이는 효과를 낳는다. 예컨대 빵 1개가 1만원이던 때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빵 4개에 해당하는 임금을 줘야했다면, (즉 노동자의 시장임금이 4만원이었다면), 빵 1개의 가치가 0.86만원으로 줄어들게 되면,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동일한 양의 생활수단을 지급하더라도 이는 3.44만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혁신을 통해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하락시키지 않고서도 잉여가치율을 높일 수 있다. 또 기술혁신은 같은 양의 생산을, 또는 심지어 더 많은 양의 생산을 더 적은 노동력으로, 또 더 단순한 노동으로 가능케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숙련노동자를 미숙련노동자로, 더 적은 수의 노동자로 대체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변자본 비율을 낮추며 산업예비군(실업자)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산업예비군의 증대는 노동자들 간 경쟁을 강화해 임금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41] 이렇듯 기술혁신은 개별 자본가에게 획득하는 ‘특별이윤’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착취율(잉여가치율)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복잡한 영향을 다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기술혁신을 통해서 착취율 증대, 특별이윤 획득, 시장지배력 증대 등 자본가가 경쟁에서 무수히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기술혁신이 낳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평균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경향 기술혁신이 여러 측면에서 자본가를 아주 행복하게 한다는 점, 그래서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기술혁신을 맹렬히 추구하게 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회세력이 되듯이, 끊임없는 이윤의 축적을 위해 추구하는 기술혁신, 즉 생산성의 증대는 자본가계급을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끌고 들어간다. 기술혁신은 기계의 개량과 발전으로 나타나며, 이전과 비교해 매우 적은 노동력의 투입으로 훨씬 더 많은 생산을 가능케한다. 이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고도화’로, 즉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기계의 사용으로 나타난다. 또한 동일한 노동으로 훨씬 더 많은 양을 생산하기 때문에, 같은 노동량 대비 원료투입량도 늘리게 된다. 기술적 구성이 고도화된다는 것, 즉 기계가 복잡하고 다양해지며, 같은 시간 대비 원료투입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자본의 총 투자액 중 불변자본(원료와 기계)의 상대적 비중이 가변자본에 비해 늘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불변자본의 비중이 가변자본에 비해 늘어나는 것을 ‘가치 구성의 고도화’라 불렀으며, ‘가치 구성의 고도화’가 ‘기술적 구성의 고도화’를 반영하여 나타날 때,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The rising trend of the organic composition of capital)’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윤축적의 관점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피할 수 없는 저주와 같다.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 총 투자액 중 가변자본의 비중이 줄어들게 되는데, 투자액 중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부분은 오직 가변자본 뿐이다. 불변자본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이전할 뿐이다. 따라서 착취율이 동일하다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총 투자액 대비 이윤의 비율, 즉 이윤율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42] 이것을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회적 관점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저주가 아니다.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이전에 비해 동일한 양의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량이 현저히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측면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인류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행하는 필요노동시간이 단축되고, 더 많은 시간을 자유로운 여가와 활동에 투여할 수 있다는 뜻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의 저하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축적을 위한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는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은 아주 긴 시기를 놓고 보지 않으면 분명하게 관찰되지 않는다. 자본이 다양한 층위에서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하려는 필사적인 분투를 하기 때문이다. <자본>에서는 이러한 상쇄요인을 ▲노동착취도의 증가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인하 ▲불변자본 요소들의 저렴화 ▲상대적 과잉인구 ▲대외무역 ▲주식자본의 증가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상쇄요인을 위와 같이 분류하긴 했지만, 사실 다양한 상쇄요인에 대해 『자본론』에 충분히 자세하게 서술돼있진 않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하려는 자본의 주요한 방법은 자본주의 위기의 심화 정도, 착취와 수탈의 결합방식,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역량의 성숙 정도 등 다른 요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평균이윤율 저하경향과, 이에 저항하려는 자본의 분투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큰 역사적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각 시대별로 자본주의가 어떻게 평균이윤율 저하에 저항하며 자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분투해왔는지, 그리고 위기해소를 위한 자본의 분투가 어떻게 또 다른 위기 혹은 인류적 재앙을 만들어왔는지, 그럼에도 결국에는 평균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이 어떻게 관철돼 왔는지에 대해 이번 교육자료에서는 대략적으로만 설명하고자 한다. 이후 9강과 10강 ‘자본주의 역사 꿰뚫어보기’에서 정치적, 사회적 측면을 포괄해 보다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자유경쟁과 부르주아 혁명의 시대(1776~1871년) 식민지 약탈과 노예노동에 기초한 상업자본주의, 그리고 공장제 수공업의 시대를 거쳐, 1700년대 후반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한 산업 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1776년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이 일반화되고, 미국의 독립혁명이 시작된 해이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약 10년 앞둔 해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발간된 해이기도 하다. 이때로부터 100여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일부와 동부해안 중심의 북미대륙 일부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기계제 대공업에 기초한 산업 자본주의가 발전돼 나갔다. 축적된 자본들은 아직 중소규모를 벗어나지 못했고, 산업마다 자본 간의 경쟁이 자유로이 펼쳐졌다. 국가는 경제에 개입하지 않은 채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만을 담당했다. 이 당시 서유럽에선 공황이 반복해 나타났는데, 이는 자유경쟁이 지배하는 무정부적 상태에서 주기적으로 벌어진 생산과잉의 결과였다. 그 이전까지 공황은 예컨대 가뭄이 들어 흉작이 드는 등 보통 자연적 재해에 의한 생산의 결핍으로 인해 나타났다. 그러나 기계제 대공업이 본격화된 19세기부터 공황은 생산의 위축이 아니라 생산의 ‘과잉’ 때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은 왜 발생하는가? 간단히 설명하면 시장에서 판매가 실현되기 전까지는 생산물이 판매될지를 알 수 없다라는 시장의 무정부성과, 경쟁자본을 무너뜨리고 시장점유율 확대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경쟁적 속성이 결합한 결과이다. 과잉생산, 과잉축적이 누적되면 소비와 생산의 격차로 인해 판매되지 않는 재고가 쌓인다. 재고가 쌓이니 자본가는 추가적인 생산을 중단하게 되고, 생산이 위축되면서 필요없는 노동력이 해고된다. 실업자가 늘어나며 소비력은 더욱 떨어지고, 이는 판매부진을 악화시킨다. 과잉생산에서 출발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결국 기업이 파산하는 공황으로까지 나아간다. 19세기에 주기적으로 발발했던 공황에 대해 엥겔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최초의 전반적 공황이 발발한 1825년 이래로 상공업계 전체는, 즉 모든 문명 민족들과 그 부속물을 이루고 있는 다소 미개한 민족들의 생산과 교환은 대체로 십 년에 한 번씩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 교류는 정체되고, 시장은 포만 상태가 되고, 생산물은 팔리지 않아서 산더미같이 쌓이게 되고, 현금은 볼 수 없게 되고, 신용은 소멸되고, 공장은 조용히 서 있게 되고, 근로 대중은 생활 수단을 너무 많이 생산한 탓에 생활 수단이 부족하게 되고, 파산이 속출하게 되고, 강제 경매가 속출하게 된다. 마침내 산처럼 쌓여 있던 상품들이 대폭 혹은 소폭 인하되어 팔려 나가게 될 때까지, 생산과 교환이 점차 원래의 걸음을 하게 될 때까지, 이렇게 정체는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생산력들과 생산물들은 대량으로 허비되고 파괴된다. 이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져서 속보로 변하고, 이 산업상의 속보는 구보로 넘어가고, 이 구보는 다시 더욱 속력을 높여 공업, 상업, 신용, 투기의 장을 마구 내달리는 본격적인 장애물 경마의 질주로 변하며, 그러다가 마침내 목숨을 건 도약 끝에 – 파산의 구덩이에 다시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우리는 1825년 이래로 이러한 과정을 꼭 다섯 번 경험하였으며, 이 순간(1877년) 여섯 번째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황의 성격은 매우 뚜렷해서, 푸리에는 최초의 공황을 모든 공황에 타당하게도 이렇게 부를 정도였다 : crise pléthorique. 즉 여분에서 오는 공황.[43]” 그런데 이 당시의 공황은 매우 파괴적이었지만, 동시에 한계기업을 파산시키고 임금을 하락시키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자본의 이윤율을 급격히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공황의 주기적 격렬성은 역설적으로 성장기 자본주의가 가진 활력의 표현이었다. 공황을 거쳐 살아남은 자본은 파산한 자본의 불변자본을 싼 값에 인수하고, 늘어난 산업예비군 덕택에 착취율을 높이며 새로운 호황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당시 공황은 자본주의의 위기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 위기의 해결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황이 무한히 도돌이표로 반복되는 건 아니었다. 10년 주기의 공황을 거칠 때마다, 자본은 경쟁자본을 먹어치우며, 독점자본으로 변모해갔기 때문이다. 주기적 공황을 거치며 자본주의는 점차 ‘자유경쟁시대’에서 ‘독점과 제국주의’의 시대로 변화해갔다. 독점과 제국주의 전면화의 시대(1871~1914년) “...따라서 독점의 역사를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860~70년대: 자유경쟁의 발전이 가장 높이, 정점에 도달한 단계. 독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맹아에 불과하다. (2) 1873년 공황 이후: 카르텔들은 장기간 발전했지만 아직 예외적이다. 그것들은 아직 견고하지 않으며, 일시적 현상이다. (3) 19세기 끝무렵의 호경기 및 1900~3년의 공황: 카르텔들은 모든 경제활동의 기초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44]” 18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집적과 집중의 결과로 등장한 독점자본이 특정 산업을 지배하게 되고, 나아가 이러한 독점자본이 은행자본과 융합돼 금융독점체를 형성하면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독점자본주의 시대가 열렸다. 독점자본의 등장은 석유, 철강, 전기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2차 산업혁명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으며, 후발주자인 독일과 미국이 영국을 급격히 따라잡는 통로가 되었다. 주요 선진국들 사이에서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와 같은 독점체가 발전했고, 독점체들은 큰 영향력을 갖고 국가기구를 직접 좌지우지했다. 자유무역을 장려하며 야경국가에 머무르던 각 국은 이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보호관세 등 자본의 집중과 독점의 형성을 촉진하는 정책들을 펼쳤다. 이 시기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기 위한 주요한 해법은 식민지로의 자본 수출이었다. 국내에서 성장할 대로 성장한 독점자본은 국내투자만으로는 만족할 만한 이윤을 거둘 수 없었다. 이러한 ‘잉여자본’을 식민지에 투자하게 되면, 훨씬 더 높은 이윤을 거둘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산업의 발전단계가 낮은 식민지에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훨씬 낮았고, 노동력의 가격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적 억압을 통해 다양한 수탈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전보다 훨씬 맹렬한 속도로 식민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러시아 6대 강국이 확보한 식민지의 인구는 1876년 2억 7,380만 명에서 1914년 5억 2,340만 명으로 늘었다. 1914년 무렵에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사실상 나머지 세계 전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제국주의 정책은 독점자본의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해법임과 동시에, 식민지 쟁탈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전면전이라는 새로운 위기의 출발점이었다. 식민지를 나눠먹던 40년 간 ‘평화’를 유지했던 유럽대륙은, 지구를 거의 다 나눠먹은 시점부터 더 이상 평화를 유지할 수 없었다. “1876년에 그랬던 것처럼, 유럽 열강들이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10분의 1을 그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을 때는 식민정책은 토지를 비독점적으로, 말하자면 ‘선착순’으로 차지하는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10년 무렵 아프리카의 10분의 9가 정복되고 전세계가 분할되었을 때, 독점적인 식민지 보유의 시대가, 따라서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을 위한 특히 첨예한 투쟁의 시대가 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45]” 독점자본의 전횡과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패권대결은 뒤이은 ‘세계전쟁과 대공황’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세계전쟁과 대공황, 노동자혁명의 시대(1914~1945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재분할 쟁탈전은 몇 차례 국지전과 첨예한 전쟁 위기를 거친 끝에 마침내 1914년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세계전쟁을 불러일으켰다. 1918년까지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을 희생시켰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11년 만에, 누적된 경제적 모순들 위에 금융투기의 파괴적 결과가 덧붙여지면서 1929년 세계대공황이 시작됐다. 세계 대공황에 대응하는 자본의 해법은 케인스주의였다. 과잉생산과 과잉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심각하게 벌어진 상황에서, 케인스주의 정책은 정부의 재정확장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효수요를 증대시켰고, 이를 통해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여나갔다. 1933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효수요 확장 정책으로 대공황이 어느정도 수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다시 급격한 침체가 더욱 가파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소비가 활성화되자 유효수요 확장분 이상으로 생산이 확장되면서 생산과 소비의 간극이 더 벌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막대한 생산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이 택한 해결책은 전쟁이었다. 전쟁은 어마어마한 인위적 소비와 거대한 생산능력 파괴를 뜻했다. 전쟁은 군비경제로 어마어마한 유효수요를 창출했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생산력 파괴를 일으켰다. 자본주의는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5,000만 명을 희생시키는 대량학살과 대량파괴를 통해 대공황에서 벗어나 ‘청춘의 몸으로 회생하여’ 다시 축적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전후호황과 개량주의의 시대(1945~1980년) 자본주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25년 간 안정된 성장을 이어갔다. 이 때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핵심 정책은 다시 케인스주의를 통한 유효수요 확장이었다. 유효수요 확장은 한편으로는 임금인상을 허용하고, 복지제도를 도입하는 등 노동자의 구매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 체제에서 대규모 군비경쟁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맹렬한 자본의 확대재생산으로 인해 1970년대에 다시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에 따른 이윤율 저하 경향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유효수요 확장 정책 자체의 모순은 심각한 불황과 물가상승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 위기는 왜 스태그플레이션이란 형태로 나타났을까? 첫째로 유효수요 확장정책의 한계가 불황을 낳았다. 유효수요 확장정책은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줄이는데 그 목표가 있으나, 1930년대의 경험과 유사하게, 시간이 지나며 생산과잉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유효수요 확장으로 소비를 늘릴 때마다, 자본가들은 늘어난 소비수준에 생산을 맞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수준을 더욱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결국 생산과 소비의 간극은 정부 재정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벌어졌다. 더욱 심각한 형태의 생산과잉이 1970년대 극심한 불황으로 연결됐다. 둘째로 유효수요 확장 정책을 위해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의 한계가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전후호황기 초반에는 자본가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재정확장을 위한 재원을 조달했다. 이는 러시아혁명 이후 계급투쟁의 역관계 변화를 반영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자본가에게 세금을 매기는 대신, 화폐발행량을 확대하는 것으로 주요 재원 조달방안이 대체됐다. 특히 미국은 196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전쟁을 치르며 막대한 양의 달러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달러의 가치를 급격히 하락시켰고, 그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시행한 금태환 폐지는 달러의 가치 하락을 전 세계 화폐의 가치하락으로 확산시켰다. 거기에 오일쇼크라는 공급충격 사건까지 겹쳐, 높은 인플레이션이 불황과 동시에 나타나게 되었다. 전후호황을 통해 빠르게 성장한 자본주의는 다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에 부딪혔고, 케인스식 유효수요 확장 정책은 더 이상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노동자계급의 패배와 함께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라는 새로운 해법으로 대체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의 시대 (1980~2022) 1970년대 노동자계급의 세계적 반란을 잠재운 자본가계급은 1980년대 이후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로 압축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란 정리해고, 임금삭감, 비정규직화, 복지축소, 노조무력화, 자본가감세, 규제완화, 기간산업사유화 등의 세부정책을 포괄하는 것으로, 착취를 최대한 강화하고 자본가에게 온갖 특혜를 줌으로써 자본의 이윤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데 그 목표가 있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중후반 칠레 군사정권의 실험을 거쳐,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의 보수주의 정권에 의해 본격화하여 1990년대 전 세계로 확산됐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개별 기업이 이윤율을 회복할수록 노동자는 더 가난해진다. 이는 생산과 소비의 간극을 심화시켜 다시 이윤율 회복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에 세계화와 금융화가 덧붙여졌다. 세계화는 ‘생산’과 ‘시장’ 양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시장의 세계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가속되다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함께 전면화했다. 1980년대 중국의 시장경제 전환, 1989~1991년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는 스탈린주의 진영을 소멸시키며 세계를 단일 공급망, 단일 시장으로 통합시켰다. 시장의 세계화는 시장을 획기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간극 확대를 완화했다. 중국산 저렴한 수입품으로 선진국 노동자들이 하락한 임금으로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임금하락이 노동자투쟁으로 연결되는 고리도 차단했다. 한편 생산의 세계화는 생산의 거점 전체 또는 일부를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이동시켰다. 저개발국으로의 공장이동은 임금비용을 획기적으로 하락시켰고, 선진국에서 노조를 무력화하는 주요한 전략이 됐다. 미국, 서유럽, 일본에 집중돼있던 공장들은 남미, 동유럽, 동아시아로 빠져나가고, 최종귀착지인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세계 자본주의는 중국의 생산과 미국의 소비라는 양대 축으로 재편됐다. 금융화를 설명하기 위해 금융자본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금융자본은 본래 산업자본에 대한 대부나 주식투자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나 배당의 형태로 나눠받음으로써 수익을 얻는 자본의 한 부류이다. 금융자본은 잉여가치를 직접 생산하지 않지만, 사회의 유휴자본을 수집해 산업자본에게 공급함으로써 산업자본의 가치증식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이자나 배당을 분배받는다. 그런데 주가가 지속적으로 폭등한다면, 금융자본은 이자나 배당보다 주식 매매차익으로 훨씬 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 금융자본은 투기적 불로소득에 대한 환상으로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 상층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고금리대출을 통해서도 수익을 올리며, 이후 실질가치를 크게 벗어난 주가가 폭락할 때는 시세차익을 실현하고 개미들에게 손실을 전가한다. 이것이 금융수탈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는 자본이 이러한 금융수탈을 광범위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금융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임금하락과 고용감소에 대한 보완책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로 감소한 선진국의 소비를 주식부동산 거품과 막대한 신용대출을 통해 인위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금융수탈은 시세차익으로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할 수 있지만, 매우 큰 부작용이 있다. 주식가격이 폭락할 때 많은 사람들이 파산하고, 그 충격으로 은행들까지 파산하며 경제 전반이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 1929년 10월 대공황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 그래서 1930년대 대공황을 수습하면서 미국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여러 가지 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런 규제들을 1999년에 대대적으로 풀어버렸다. 금융수탈의 수단은 주식과 부동산은 물론 기업, 외환, 원자재, 선물, 암호화폐로 확대됐다. 금융부문이 비대하게 팽창했고, 쓸만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자본은 가공할 수익률을 제공하는 금융부문에서 새로운 활기를 찾았다. 자본은 점점 더 생산적 투자처가 아니라 금융수탈에 몰두하게 됐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주식시장 거품이 2000년에 닷컴버블로 터졌고, 이후 주식시장에서 옮겨간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2008년 금융위기로 폭발했다. 파생상품을 매개로 미국과 세계 금융기관 다수가 부동산 부실채권과 연결돼있었기에, 파산의 파급효과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008년 9월 5대 투자은행과 최대보험사가 줄줄이 파산 또는 파산국면에 접어들었고,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전면에 부상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사건으로, 금융수탈의 최종결과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집행하던 자본가계급은 천문학적인 구제금융을 금융기관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소비시장이 빠르게 위축됐다. 경기부양을 위해 각국 정부가 엄청난 재정을 투여했다. 주요국 중앙은행은 대규모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정책을 장기간 실시했다. 이를 통해 2008년 금융위기가 폭발적인 대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은 차단했다. 그러나 대신 대불황이 닥쳤다. 2008년부터 2019년까지 12년 동안 세계 경제의 평균 성장률이 2.5%를 기록했다. 극심한 투자기피 현상이 벌어졌다. 대불황은 모순의 해소가 아니라, 모순의 축적과 악화를 통해 대규모 폭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세계화는 리쇼어링, 보호주의, 패권대결로 역전됐고, 금융화는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폭등으로 더욱 거대한 금융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 강력한 충격을 안기며, 신자유주의 시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시대, ‘위기와 전쟁과 혁명의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이전 시대 동안 축적된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위기가 격렬하게 분출할 시대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전 시대 동안 축적된 모순들로부터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충돌과 전쟁이 일상화할 시대다. 나아가 경제위기와 전쟁이 서로 맞물리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과 인류를 끝없는 고통 속으로 몰고 들어갈 시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전진할 것이며 나아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노동자혁명의 전망이 다시 한번 미래의 막연한 전망이 아니라 눈앞의 구체적인 과제이자 가능성으로 떠오르게 될 시대다.[46]”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하여는 11강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평균이윤율 저하경향 지금까지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한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에 자본이 어떤 주된 전략을 택하며 저항해왔는지를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자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따르면 평균이윤율 저하경향이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에스떼반 에쎄끼엘 마이또는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869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스웨덴, 네덜란드 여섯 개 핵심 국가의 이윤율 평균치를 실제로 계산한 것이다. 그 결과를 보면, 1870년 무렵 40%대에서 출발했던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하락을 거듭한 결과 2010년 무렵 10% 근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짧은 기간을 놓고 보자면 등락을 거듭했지만, 긴 시간을 놓고 보자면 이윤율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그대로 이윤율 저하는 ‘경향적으로’ 관철됐다.[47] ---------------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 그리고 경제적 측면에서 오늘날까지 자본주의의 큰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오늘 배운 자본주의 착취의 비밀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어느 책에서 재밌게 읽은 짧은 농담을 통해 짚어보려 한다. 아래의 질문에 답해보자. 질문: “백열전구 하나를 갈아 끼우는 데 자본가가 몇 명 필요할까?” 정답: “한 명(또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들은 노동자를 고용해 전구를 갈아 끼우게 한다.”라고 대답한 학생은 F학점을 받고 이 강좌를 재수강한다. 이번에는 절대 페이지를 건너뛰면 안 된다. “한 명도 필요 없다.”라고 대답한 학생은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일을 하는 데도 자본가는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우등생 표창과 함께 졸업하고 이제 나가서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된다.[48]” 자본주의 생산의 비밀이 폭로하는 진실은 이러하다.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계급이다.” 자본주의가 발전시켜온 생산력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자본가는 1명도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의 혁명적 의의가 담겨있다. 그러나, 1강에서도 언급하였듯, 자본주의는 절대 자동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직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반복되는 위기와 전쟁을 중단시키고 자본가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올 때만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 이것이 ‘3강: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에서 다룰 문제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자료 카를 마르크스. (1997). 임금 노동과 자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카를 마르크스. (1997). 임금, 가격, 이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3. 카를 마르크스. (2015). 자본론 (김수행, Trans.). 비봉출판사.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프리드리히 엥겔스. (1997). 잉글랜드 노동 계급의 처지(발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김경민. (2023). 미르의 공장 일지. 숨쉬는책공장. 양준석, & 백종성. (2023). 자본주의 시대전환과 한국 노동운동. 거인의발걸음. ※'관련기사'란에서 기초학습 다른 시리즈를 찾아 읽어보세요. .footnote-ref, .footnote-target { scroll-margin-top: 200px; color: #E60012; text-decoration: none; } .footnote-ref:hover, .footnote-target: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1] 강제에 의한 노동관계는 자본주의적 규율에서도 금지하고 있다. 법률의 존재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제노동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근로기준법 제7조(강제 근로의 금지) 사용자는 폭행, 협박, 감금, 그 밖에 정신상 또는 신체상의 자유를 부당하게 구속하는 수단으로써 근로자의 자유의사에 어긋나는 근로를 강요하지 못한다.’ ‘ILO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 제1조 1. 이 협약을 비준하는 국제노동기구 회원국은 가능한 한 조속히 모든 형태의 강제 또는 의무 노동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약속한다. ... 제2조 1. 이 협약의 목적상 강제 또는 의무 노동은 어떤 사람이 처벌의 위협하에서 강요받았거나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모든 노동이나 서비스를 의미한다.’ [2] 노동계약이 형식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불평등계약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본론의 한 구절은 이렇게 묘사한다:“노동력의 매매가 진행되는 유통분야 또는 상품교환분야는 사실상 천부인권(innate rights of man)의 참다운 낙원이다. 여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벤담(공리주의)이다. 자유! 왜냐하면 하나의 상품, 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로운 인격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공동의지가 하나의 공통된 법적 표현을 얻은 최종 결과다. 평등!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등가물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것만을 마음대로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 이득, 사적 이익 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공익,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이제 이 분야를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32p. [3] “그들은” (12시간 이상 일하기 보다는) “차라리 더 적은 임금을 받고 10시간 일하는 쪽을 훨씬 더 좋아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들 중에는 많은 사람이 실업상태에 있기 때문에(방적공들 가운데는 어쩔 수 없이 실이나 잇는 노동자가 되어 아주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만약 그들이 노동시간의 연장을 거부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즉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선택은 더 장시간 노동하느냐 아니면 해고되느냐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387p. [4] Hooper, T. (Director). (2012). At The End Of The Day. (2012), Les Miserables[Film]. Relativity Media, Working Title Films, and Cameron Mackintosh. [5]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276p. [6] 엥겔스는 이러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을 비판했으나, 동시에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사회적 모순과 부정의, 불평등을 직시하고 바꾸려고 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진정성에 대해서 “우리는 오히려, 환상적 껍질 아래 도처에서 분출하고 있으나 저 속물들은 보지 못하는 천재적 사상의 맹아와 천재적 사상을 보고 기쁨을 느낀다.”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엥겔스. (1997).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 [7] 리오 휴버먼. (2000).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책벌레. [8] 여기서 잠시 ‘가치’라는 표현이 불러오는 한가지 오해에 대해 짚고 가려한다.“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생산적’ 또는 ‘가치’라는 표현은 도덕적 가치판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어떤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노동이 쓸모없는 노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사실 마르크스는 무역과 금융의 비생산적인, 즉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속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자본 순환에 필수적이지만 잉여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따라서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누구도 『자본론』의 저자가 자본주의에서 무역과 금융(이들 부문은 가사노동과 달리 확실히 엄청난 수익을 창출한다)의 필수 역할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Celeste murillo, & Andrea d’atri. (2023). 생산과 재생산: 자본주의는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 빵과장미의 도전, 138p. [9] 이 글에서 우리는 가치와 교환가치라는 말 사이에 큰 구별을 두지 않을 것이다. [10] Celeste murillo, & Andrea d’atri. (2023). 생산과 재생산: 자본주의는 여성을 이중으로 억압한다. 빵과장미의 도전, 138p. [11]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 등가형태로 여겨지는 특수한 상품종류(이 경우에는 쌀)는 이제 화폐상품으로 된다. 다시 말해 화폐로 기능한다. 상품세계 안에서 일반적 등가물로 일하는 것이 그 상품의 독특한 사회적 기능으로 되며, 그 상품이 그 일을 사회적으로 독점하게 된다. 제2형태에서 아마포의 특수한 등가물로 기능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그리고 제3형태에서 자기들의 상대적 가치를 공통적으로 아마포로 표현하고 있던 상품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상품이 이 특권적 지위를 역사적으로 차지했다. 그것은 금이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89p. [12]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면, 예컨대 고등어를 화폐로 사용할 수 있을까? 고등어는 고등어마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균일하지 않다. 게다가 고등어는 귀금속과 달리 금방 부패한다. 고등어를 화폐로 사용한다면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거래비용이 발생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고등어 화폐’는 비역사적인 상상으로나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13] “통화의 표준 단위가 일정한 무게의 금으로 정해져 있거나 또는 일정량의 금 가치에 연계되어 있는 화폐 제도. 금본위제의 초기 형태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금화로 발행하여 시장에 실제로 유통시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금속화폐는 운반의 불편성, 도난의 위험성 등 단점이 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자 금지금본위제가 나타났는데, 중앙은행이 금화 대신 금화의 가치와 같은 가치의 지폐와 보조화폐를 발행하는 제도이다. 중앙은행이 발행한 지폐인 은행권을 금으로 교환하는 것을 금태환이라 하고, 이 은행권을 태환 화폐라고 한다.-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각 국은 전비 조달을 위해 통화를 증발하였고 금태환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영국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하게 되었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각국은 경쟁적으로 자국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평가절하를 하기 시작했고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기획재정부. (2020, November 3). 금본위제. 시사경제용어사전. https://www.moef.go.kr/sisa/dictionary/detail?idx=666) [14] 미국이 금태환 폐지를 선언한지 50년 넘게 지난 오늘날의 현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마르크스가 “지폐의 발행은 실제로 유통될 금량(또는 은량)을 지폐가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범위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보건대, 금본위제, 금태환제가 폐지된 상황에 대해 가정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금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상징(예컨대 토큰이나 지폐)으로 어떻게 대체될 수 있는가’에 대해 마르크스가 설명한 아래의 구절은 오늘날 미국이 어떻게 금태환제를 폐지한 뒤에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화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화폐의 상징(예컨대 지폐)은 자신의 객관적인 사회적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지폐는 이 정당성을 강제통용력에서 얻고 있다. 이런 국가적 강제는 한 공동체의 국내 유통 분야에서만 유효하다”. 이 중 뒷 문장은 오늘날의 현실과는 다르다. 역사는 미국과 같이 세계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국가가 존재하는 경우 이러한 ‘국가적 강제’가 ‘국내 유통’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허나 앞 문장은 오늘날에도 사실이다. 오늘날 달러의 ‘사회적 정당성’은 순전히 미국이란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독보적인 지위에 따른 신용이란 점은 명확하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가 “지폐가 자기의 한도[즉 실제로 유통했을 같은 명칭의 금화의 양]를 초과한다면, 지폐의 신용이 일반적으로 손상될 위험”이 있다고 한 것은 옳다. 달러는 금본위제 폐지 후 오로지 미국의 패권이라는 ‘신용’에 의존하고 있고, 2008년 금융위기처럼 달러의 지위가 흔들릴 때마다 금본위제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강화된다. 오늘날 점차 심화하는 미중 간 패권대결과 다극화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화된다면, 그래서 ‘국가적 강제’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50년 간 이어져 온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는 무너질 수 있다. [15] “금은 놀라운 물건이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물건을 지배할 수 있다. 금은 영혼을 천국으로 가게 할 수도 있다.” (콜럼버스, 『자메이카로부터의 편지』)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171p. [16] “단순상품유통[구매를 위한 판매]은 유통의 외부에 있는 최종목적[사용가치의 취득, 욕구의 충족]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왜냐하면 가치의 증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 운동의 내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198p. [17] 이 글에서는 잉여가치(surplus-value)와 이윤(profit)을 엄밀히 구별할 필요성이 없으므로, 개념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18] “상품소유자 A는 대단히 교활해서 자기 동료인 B 또는 C를 속일 수 있지만, B나 C는 아무리 해도 보복할 수가 없다고 하자. A는 B에게 40원의 가치가 있는 포도주를 팔고 그 대신 50원의 가치가 있는 곡물을 얻었다고 하자. A는 자기의 40원을 50원으로 전환시켰다. 적은 화폐를 많은 화폐로 만들었으며, 자기 상품을 자본으로 전환시켰다.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 A의 수중에는 40원어치의 포도주가 있었고, B의 수중에는 50원어치의 곡물이 있어, 총가치는 90원이었다. 교환 뒤에도 총가치는 동일한 90원으로 변함이 없다. 유통 중의 가치는 한 푼도 증가하지 않았으나 A와 B 사이에 그 가치의 분배는 변했다. 한 쪽에는 잉여가치로 나타나는 것이 다른 쪽에는 가치손실로 되며, 한 쪽에는 플러스로 되는 것이 다른 쪽에는 마이너스로 된다. 이와 동일한 변동은 A가 [교환이라는 위장된 형태에 의거하지 않고] B로부터 10원을 직접 훔쳤다 하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유통 중의 가치총액은 그 분배상의 어떤 변화에 의해서도 증가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 일국의 자본가계급 전체가 서로를 속여서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14p. [19] 마르크스는 소아시아 도시들이 고대 로마에 매년 화폐공납을 바치고, 로마는 이 화폐로 소아시아의 상품을 구매했던 사례를 든다. 이런 경우 진실은 로마가 소아시아의 생산물을 댓가없이 수탈하는 것에 불과하다. [20]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18p. [21]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26p. [22]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32p. [23] 밀가루의 생산과정은 원료(밀), 기계(제분기), 노동력의 조합으로 추상화하여 설명할 수 있다. 밀의 생산과정은 원료(밀의 종자), 기계(호미나 낫 등), 노동력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제분기 또한 제분기를 만들기 위한 원료(철 등), 기계(금속성형기), 노동력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앞선 단계의 원료와 기계에 대한 분석을 이어가면, 인간 노동이 들어가지 않는 어떤 자연적 원료로부터, 최초로 인간 노동을 투여해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순간으로 소급할 수 있다. 즉 어떤 생산과정에 사용되는 노동대상(밀가루 등)과 노동수단(오븐 등)은 소급하면 노동이 투여되지 않은 자연적 원료와 이에 더해진 과거의 노동의 합으로 환원할 수 있다. 따라서 밀가루와 오븐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동안 사용된 모든 과거의 사회적 노동량의 합이다. [24] 밀가루 같은 원료는 일반적으로 생산과정에서 빵이 되며 사라진다. 반면 오븐과 같은 기계는 한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조금씩 내구도가 닳아, 언젠가 못쓰게 된다. 이런 경우 오븐은 그 사용으로 인해 잃어버린 내구도만큼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한다. 예컨대 어떤 오븐을 평균적으로 1만 번 돌리면 망가진다고 하고, 오븐의 가치는 1만 시간의 노동량과 같다고 하자. 빵 30개를 만들려면 오븐을 10번 돌려야한다. 이 경우 빵 30개를 만들 때 오븐은 자신이 가진 가치의 10/10000(즉 0.1%) 만큼을 빵에 이전하며, 이 경우 10시간(1만 시간*0.1%)의 가치를 빵에 이전한다.“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은,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증식과정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는 사실이다. 기계는 마멸에 의해 평균적으로 상실하는 가치 이상으로는 결코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23p. [25]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258p. [26]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807p. [27]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812p. [28] “자기 주위에 있는 노동자 세대의 고난을 부인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자본은, 인류는 장차 퇴화할 것이라든가 인류는 결국 사멸해버릴 것이라는 예상에 의해서는 그 실천적 활동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태양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예상에 의해서는 자본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이것이 모든 자본가와 모든 자본주의국의 표어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사회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 퇴화, 조기사망, 과도노동의 고통 등에 관한 불평에 대해 자본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쾌락(이윤)을 증가시켜 주는데 어째서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가 하고 대답한다. 사태를 전체적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은 개별 자본가의 선의나 악의 때문은 아니다. 자유경쟁 아래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들이 개별 자본가에 대해 외부적인 강제법칙으로 작용한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상. 비봉출판사. 365p. [29] 『자본론』 1권의 제 10장 ‘노동일’부터 제15장 ‘기계와 대공업’까지 당시 자본주의의 추악한 현실에 대한 노동자의 증언과 사례들, 그리고 비용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이것이 ‘불가피함’을 주장하는 자본가들의 뻔뻔한 증언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30] 구해근. (2002).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112p. [31] 구해근. (2002).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85p. [32] 조영래. (2009).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재단). (정찬일. (2019). 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책과함께, 392p.에서 재인용) [33] Sarah butler. (2013, September 23). Workers for Lidl, H&M and Gap in Bangladesh Work 15-Hour Shifts. The Guardian. https://www.theguardian.com/fashion/2013/sep/23/workers-in-bangladesh-long-hours [34] Guy stuart. (2022, June 9). Excess Work Hours, Part One. Global Worker Dialouge. https://workerdiaries.org/excess-work-hours-part-one/ [35] Tricontinental: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 (Ed.). (2023, April 20). The Death of over a Thousand Garment Workers in Bangladesh: The Sixteenth Newsletter (2023). Tricontinental. https://workerdiaries.org/excess-work-hours-part-one/ [36] 김경민. (2023). 미르의 공장 일지. 숨쉬는책공장. [37] 장하준. (2014).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부키, 57p. [38]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29p. [39] “기계가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감소시키거나 [아동노동과 여성노동의 사용, 성인 남성노동자의 노동력 가치감소 등에 의해], 또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을 싸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노동력을 싸게 하는 것에 의해서뿐 아니라, 기계가 처음에 아직 산발적으로 도입될 때는, 기계 소유자가 고용한 노동은 강화된 그리고 더 효율적인 노동으로 전환되어 생산물의 개별 가치를 그것의 사회적 가치보다 싸게 함으로써, 자본가가 하루의 생산물 가치 중 더 작은 부분으로 하루의 노동력 가치를 보상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다. 그러므로 기계의 사용이 일종의 독점상태에 있는 이 과도기에 이윤은 엄청나게 크며, 자본가는 이 ‘첫사랑의 시기’를 가능한 한 노동일을 연장함으로써 철저히 이용하려고 한다. 많은 이윤은 더 많은 이윤에 대한 갈망을 격화시킨다.” -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49p. [40] 기술혁신이 보편화되면 생필품인 빵의 가치가 낮아지고, 이에 따라 필요노동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 예시는 특별이윤을 설명하기 위함이므로, 편의를 위해 필요노동시간이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41] “기계는 아동과 여성을 대량으로 노동자계급에 추가함으로써, 성인 남성노동자가 매뉴팩처 시기 전체를 통해 자본의 독재에 대항했던 반항을 드디어 타파하게 된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44p.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부분적으로는 노동자계급 중 종전에 자본가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층들을 자본가에 복종시킴으로써, 또 부분적으로는 기계가 쫒아낸 노동자들을 하는 일 없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과잉노동인구를 생산한다.” 마르크스. (2015). 자본론 1 - 하. 비봉출판사, 551p. [42] 예컨대 1000만원 중 500만원은 불변자본, 500만원은 가변자본에 투하되었고 착취율이 100%라면 생산을 통해 자본이 얻는 이윤은 500만원으로 이윤율은 50%(잉여가치 500만원 / 총투자액 1000만원)이다. 반면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1000만원 중 900만원이 불변자본에 투하되고 100만원만 가변자본으로 투하될 경우, 착취율이 동일할 때 자본이 얻는 이윤은 100만원으로 이윤율은 10% (잉여가치 100만원 / 총투자액 1000만원)에 불과하다. [43] 엥겔스. (1997).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 [44]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35p. [45]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2018).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206p. [46] 양준석, & 백종성. (2023). 자본주의 시대전환과 한국 노동운동. 거인의발걸음. [47] Esteban Ezequiel Maito. (2014). The Historical Transience of Capital The Downward Trend in the Rate of Profit since XIX Century. [48] 버텔 올먼. (2012). 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 모멘토. [앞선 시리즈 읽기] #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다음 시리즈 읽기] #3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2025-11-17 | 조회 16,215 -
[정세집담회] 트럼프 경제약탈과 노동자계급의 대응방향트럼프 2기가 시작되고 전세계를 상대로 한 약탈적 행보를 노골적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젤렌스키에게 큰 망신을 주며 우크라이나 광물협정을 체결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막무가내로 관세를 부과하고서는 관세협상에서 무리한 투자를 강요하고,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을 군사력으로 위협하며 제국주의적 개입의사를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 UAW 숀 페인 위원장은 '미국의 일자리를 되살린다'며 트럼프의 관세정책을 지지했습니다. 이에 발맞춰 금속노조는 트럼프의 경제약탈에 맞서 자국산업을 보호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경제약탈에 맞서 '자국산업을 보호하자'는 민족주의적 논리로는 트럼프의 약탈적 행위를 막을 수 없을 뿐더러, 점점 전쟁을 향해 치달아가는 반동적인 제국주의 패권대결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트럼프의 약탈적 행보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민족주의가 아니라 노동자 국제주의 관점으로 약탈적 행보에 맞선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발표자료를 아래 첨부파일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2025-10-31 | 조회 7,732 -
[발제자료] [정세집담회] 기후정의 계급투쟁의 경과와 전망"사기" - 취임 첫날 다시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트럼프 정부의 기후변화에 대한 규정입니다. 폭염과 폭우, 일상이 된 기후재난에도 자본주의는 기꺼이 이윤을 위해 파국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대안은 기후정의 계급투쟁에 있습니다. 바로 지금, 자본의 이윤을 위한 생산을 노동자 민중의 필요충족을 위한 생산으로 재편하기 위한 투쟁을 확대해야 합니다. 이미 세계 곳곳 노동자 민중이 그 사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번 정세집담회에서 우리는 기후정의 계급투쟁의 흐름을 짚고, 앞으로의 전망과 과제를 토론합니다. - 일시: 9월 19일(금) 저녁 7시 - 장소: 강북노동자복지관(서울 마포구 환일길 13) 205호 ※온라인 Zoom 참가 병행 - 주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정책선전위원회 ※아래 첨부파일에서 발제자료를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2025-09-19 | 조회 9,084 -
[정세집담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이 글은 8월 29일(금) 진행된 '정세집담회: 러시아 소수민족 입장에서 바라본 러-우전쟁'에 발제문으로 제출되었던 글이다. 이 링크를 통해 영어번역본을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푸틴은 3일 안에 우크라이나를 복속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일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자포리자와 헤르손 주도 대부분 점령했다. 그러나 수도인 키이우까지 직선로로 점령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몇 차례 반격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2022년 11월 헤르손 시를 탈환하고, 2023년 자포리자 주 로보티네를 확보하는 등 일부 성과가 있었지만 제한적이었다. 2024년 8월에는 러시아 쿠르스크 주에 공세를 펼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내진 못했다. 결과적으로 현재 러시아가 도네츠크, 루한스크 지역 대부분을, 그리고 자포리자와 헤르손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상태에서 전선이 고착화됐다. 얼마 전 트럼프가 푸틴과 젤렌스키를 각각 만나며, 휴전과 평화협정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대결이라는 전략적 목표에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여되는 비용을 줄이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러시아에게 미국이 너무 많은 양보를 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 푸틴에게 각각 더 많은 것을 양보할 것을 요구하며 갈지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고, 언제 실제로 휴전과 평화협정이 진행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이 전쟁을 수행하고 관여하고 있는 어떤 주체도,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민중의 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반동적인 전쟁에 대해 사회주의를향한전진의 이전 조직 중 하나인 노동해방투쟁연대는 2022년 3월 1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즉각 중단하라! 미국과 유럽연합은 NATO를 해체하라! 모든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패권대결·전쟁책동·억압침탈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구호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이 구호를 둘러싼 몇가지 측면들에 대해 이 글을 통해 다루고자 한다. [사진: Viacheslav Ratynskyi / the Collection of war.ukraine.ua] 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반동적인 제국주의 침략일 뿐이다. 푸틴과 레닌은 정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에 의해 오랫동안 민족억압을 겪어왔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권 보장이라는 올바른 입장을 가졌다. 레닌은 당시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주변 민족들의 민족자결권과, 그들의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퇴할 권리”에 대해서 얘기했다. 푸틴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선포하며 이를 비난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는지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아래는 레닌이 1917년 6월에 쓴 글로, 제정러시아의 민족억압의 역사적 맥락 위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노동자민중의 단결을 위해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권을 지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자라면 누구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서 자유롭게 분리할 권리를 부인할 수 없다. 이 권리를 조건 없이 인정해야만 우크라이나인과 대(大)러시아인의 자유로운 연합, 한 국가 안에서 두 민족의 자발적인 결합을 옹호할 수 있다. 이 권리를 조건 없이 인정해야만 차르가 다스리던 저주받은 과거를, 언어·영토·성격·역사에서 매우 가까운 두 민족이 모든 점에서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완전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청산할 수 있다. 저주받은 차르 체제는 대(大)러시아인을 우크라이나 인민에 대한 사형 집행자로 만들었고, 우크라이나 어린이가 모국어로 말하고 공부하는 것을 금지시킨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했다.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진정으로 민주적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 그들 스스로를 위해, 러시아의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우크라이나 노동자와 농민에게서 형제적 신뢰를 다시 얻어야 한다. 그런 신뢰를 다시 얻는 것은 자유롭게 분리할 권리를 포함해서 우크라이나의 모든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작은 국가의 존재를 선호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나라의” 자본가들과 다른 모든 나라의 자본가들에 맞서는 세계 노동자들의 가장 긴밀한 연합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결합이 자발적인 것이 되게 하기 위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부르주아지를 조금도 잠시도 신뢰하지 않는 러시아 노동자는 이제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리할 권리를 지지한다. 자신의 우정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그들을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동등한 동맹이자 형제로 대우함으로써 그들의 우정을 얻고자 분투하면서."[1]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는 연설에서 레닌의 이러한 입장을 아래와 같이 비난했다. "현대의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사실상 1917년 혁명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레닌과 그의 동지들은 이 일을 러시아에 몹시 무례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러시아 고유의 역사적 영토를 러시아로부터 분리, 강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러시아와 러시아 민족들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레닌의 국가 건설 원칙들은 단순한 과오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것이었습니다."[2] 푸틴의 요지는, 레닌이 이끈 러시아혁명 이후 노동자국가가 민족자결권 원칙을 고수하고, 소비에트 헌법에 이를 명시한 것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써 러시아 민족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푸틴은 레닌의 노동자 국제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에 뒤이은 대러시아 민족주의의 계승자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 러시아인들을 파시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밖에 없다는 푸틴의 수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한 달 전 ‘독일 민족의 보호를 위해’ 독일의 팽창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던 히틀러의 수사와도 판박이다. “1000만이 넘는 독일인이, 우리나라 국경에 인접하고 있는 두 나라에 살고 있다.… 독일로부터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해서, 권리의 박탈, 즉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일반적인 여러 권리가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국경 연변에 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서는 도저히 그 정치적・정신적 자유를 획득할 처지에 있지 못한, 이들 독일 민족을 보호하는 것은 독일의 큰 관심사에 속하는 것이다.”[3] 스탈린이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우크라이나 민족억압을 부활시켰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는 스탈린 반혁명으로 등장한 국가자본주의 소련의 유산 위에 존재한다. 그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러시아 노동자국가는 1920년대 초중반까지, 레닌이 정식화한 민족자결권에 입각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자율성과 민족적 요구들을 존중했다. "1923년 소련 전체에 ‘토착화’ 정책이 도입되어 각 공화국의 민족, 문화에 따른 시책이 종용되었다. 그야말로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정책이기도 했다. … 1922년 정부 직원의 35퍼센트, 공산당원의 23퍼센트였던 우크라이나인 비율이 1926년부터 1927년에는 각각 54퍼센트, 52퍼센트로 상승했다. … 우크라이나어 사용도 장려됐다. 정부 직원 가운데 우크라이나어를 하지 못하는 직원은 우크라이나어 코스를 이수하여 1년 내에 습득하지 못하면 해고됐다. 정부 문서, 간행물의 우크라이나어 작성으로 1922년에 20퍼센트였던 우크라이나어 문서가 1927년에는 70퍼센트로 상승했다.. 또한 당의 업무도 우크라이나어로 이루어졌다. … 학교 교육에서도 우크라이나어화가 이루어졌다. 1929년에는 일반 교육의 80퍼센트, 대학 교육의 30퍼센트가 우크라이나어만으로 이루어졌다. 신문과 서적의 우크라이나어화도 추진되어 전체 출판물 가운데 우크라이나어 출판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1922년 27퍼센트에서 1927년 50퍼센트 이상이 됐다. … 역사학자이자 중앙 라다의 대통령이었던 흐루셰브스키도 귀국하여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으로서 우크라이나사 연구에 착수했다. … 종교면에서도 우크라니아화가 나타났다. 우크라이나의 정교도는 예전부터 모스크바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 1920년에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가 설립되어 1921년에는 키예프 및 전 우크라이나 부주교가 임명됐다. 독립 정교회의 의식에는 교회 슬라브어가 아닌 우크라이나어가 사용됐다."[4]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련 공산당에서 스탈린이 권력을 쥐고, 1930년대 일국사회주의론에 기반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민족억압이 체계적으로 부활했다. 그 참혹한 결과 중 하나는 1932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었다. 스탈린은 민족 억압과 대기근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가혹한 숙청으로 진압했다. "우크라이나화는 1930년대 전반까지 계속됐으나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단속이 시작됐다. 원칙적으로는 완고하지만 전술에는 유연했던 레닌이 1924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트로츠키(1879~1940), 지노비예프(1883~1936) 등 라이벌을 추방하고 1927년에 스탈린(1879~1953)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 전환점이 됐다. … 앞서 기술한 것처럼 스탈린은 오히려 농민을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여긴 때가 있어, 농민을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거친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그 수단이 된 것이 1928년에 시작되어 1929년부터 강제화된 ‘농업 집단화’다. … 농민들은 저항했다. 어쩔 수 없이 집단 농장에 들어가게 된 농민들은 기르던 가축을 도살하여 식용으로 삼거나 팔아버렸다. 1928년에서 1932년 사이에 우크라이나는 가축의 절반을 잃었다. 그러나 당과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집단화를 추진했다. 저항하는 이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 우크라이나에서 이 집단화는 1930년과 1931년에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에서 집단화된 농가 비율은 1928년 3.4퍼센트에서 1935년에는 91.3퍼센트에 달했다. … 집단화는 스탈린과 당 지배의 영속화에는 이바지했을언정 우크라이나에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가 바로 1932년~1933년에 일어난 대기근이다. 1930년 우크라이나의 곡물 생산은 2100만 톤으로 비교적 양호했고 정부 조달량은 760만 톤이었다. 이 조달량은 이미 1920년대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1931년은 흉작으로 전년 대비 65퍼센트인 1400만 톤에 그쳤지만 조달량은 달라지지 않았다. 1932년에도 생산량은 1400만 톤으로 전년과 같은 흉작이었다. 이러한 수확량 감소는 집단화에 의한 혼란이 주된 원인이었다. … 농민들은 이러한 조달 방식에 저항했지만, 모스크바의 당과 정부는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당 활동가는 농가에서 곡물을 압수할 법적 권리를 가졌다. 도시의 당 활동가 무리는 농가로 찾아가 집집마다 돌며 마루를 부수면서까지 곡물을 찾아냈다. 굶지 않은 이는 음식물을 숨긴 것으로 간주했다. 음식물을 감춘 이는 사회주의 재산을 절도한 것으로 간주하여 사형에 처하는 법률이 제정됐다. 이로써 기근은 1933년 봄이 되어 절정에 달했다. 기근은 소련 안에서도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지역에서 발생했다. 도시 주민이 아니라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이 굶주리고 곡물 생산이 적은 러시아 중심부가 아니라 곡창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이 발생한 몹시 비정상적인 사태였다. 농민들은 빵이 없어서 쥐, 나무껍질, 잎사귀까지 먹었다.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다수 전해진다. 마을 전체가 절멸한 곳도 있었다. 흐루쇼프의 회상록에는 한 대의 열차가 굶어 죽은 사람들의 사체를 가득 싣고 키예프 역으로 들어왔는데, 폴타바에서 키예프까지 계속해서 사체를 실었기 때문이라는 일화가 실려 있다. … 이 기근으로 발생한 아사자의 수는 소련 정부가 감추고 있었던 탓에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느 학자는 300만 명에서 600만 명 사이로 추계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의 공식 견해와 쿠치마 대통령(1938~)의 머리말이 실린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든 것』(1998)에 따르면 이 기근으로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는 350만 명이 아사했고 출산율 저하를 포함한 인구 감소는 500만 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북캅카스에 거주한 우크라이나인 약 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북캅카스 출신이자 외가 쪽이 우크라이나계로 추정되는 고르바초프(1931~)에 따르면 자신의 마을에서도 이 기근으로 3분의 1이 사망했다고 한다. … 이 기근의 첫 번째 특징은 강제적인 집단화와 곡물 조달로 인해 발생한 인위적인 기근이며 필연성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기근은 유대인에 의한 홀로코스트에 필적할 만한 제노사이드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두 번째 특징은 러시아 자체는 이 기근을 거의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약화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자행했다는 설이 제기됐다. 그 증거로 “민족 문제는 농민 문제를 말한다”라는 스탈린의 발언과 1930년 『프라우다』지의 “우크라이나의 집단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개인 소유 농가의 농업)의 기반을 파괴하는 특별한 임무를 갖는다”라는 구절을 들었다. 세 번째 특징은 이 기근이 소련에서는 가능한 한 감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1986년에 이르러서도 소련 관제의 우크라이나사는 ‘지독한 식량 문제가 있었다’고만 서술했을 뿐 기근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스탈린의 권력 장악으로 우크라이나 자치에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했고 우크라이나인들이 농업 집단화와 곡물 조달에 저항하자 그 흐름은 더욱 강화됐다. 1920년대에 활약한 인텔리 문화인에 대한 공격도 시작됐다. 1931년에는 흐루셰브스키 아카데미의 역사 부문도 폐쇄됐다. 그는 러시아로 추방되어 1934년 캅카스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1932년 즈음부터는 공산당원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소련 전체의 대숙청은 1936년부터 1938년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우크라이나에 한해서는 몇 년 앞서 시작된 셈이 된다. … 스탈린은 1933년에 발생한 기근의 책임을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에게 전가했다. 1933년에는 교육의 우크라이나화를 촉진한 고참 볼셰비키이자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교육 코미사르(각료)였던 스크리프니크(1872~1933)를 자살로 내몰았다. 그 밖에 우크라이나화를 추진한 유력 당원들이 자살하거나 유형을 당하는 등 홀연히 사라졌다. 1933년부터 1934년에 걸쳐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10만 명의 당원을 잃었다고 한다. … 1936년부터 1938년에는 숙청의 대상이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한 소련인 전체로 확대됐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각료 17명도 체포된 후 처형됐고 류브첸코 수상(1897~1937)은 자살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원의 37퍼센트에 해당되는 17만 명이 숙청됐다. 이로써 우크라이나의 공산당은 괴멸 상태에 빠졌다. 1930년대 말에는 각 공화국의 자치가 대부분 완전히 사멸됐다. … 소련 전체의 교육과 문화는 일률화, 러시아화됐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러시아어 교육이 필수가 됐다. 우크라이나어의 알파벳, 어휘, 문법은 러시아어와 가까워졌다. 우크라이나인도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작가의 문학을 읽도록 장려됐다. 신문과 잡지에서도 우크라이나어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이로써 1920년대에 꽃피웠던 우크라이나 문화는 이 시기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5]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대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일정한 유화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 우크라이나는 소련 붕괴 때까지 지속적으로 스탈린 반혁명 이후 국가자본주의가 된 소련 아래에서 지속적인 민족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소련의 관료적 명령경제 체제는 우크라이나의 산업과 농업 생산을 정체시켰고,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고르바초프 취임 후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1390년대의 대기근과 숙청 등의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며, 소련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분노가 터져나왔다. "브레즈네프, 셰르비츠키 시대의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어의 사용이 장려되고 우크라이나어의 사용에는 간섭이 뒤따랐다. ... 그 결과 1969년부터 1980년에 걸쳐 우크라이나어 신문의 비율은 46퍼센트에서 19퍼센트로 줄었고, 1958년부터 198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어로 출판된 책은 60퍼센트에서 24퍼센트까지 감소했다. … 경제 상황을 보면 흐루쇼프 시대에는 미국을 넘어서겠다는 목표가 있어 여전히 의욕적인 면이 있었지만 경제 성장률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정체 상태에 빠졌다. 제5차 5개년 계획(1951~1955) 동안의 우크라이나 공업의 연간 성장률은 13.5퍼센트였지만 30년 후의 제11차 5개년 계획(1981~1985) 동안에는 3.5퍼센트로 떨어졌다.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심각한 에너지 부족이 일어났고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드네프르강에 거대한 댐이 연달아 건설되면서 드네프르강은 연이어진 인공 호수처럼 변해버렸다. …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련의 농업 전체가 정체됐다. 브레즈네프 시대 후반에는 소련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게 일반화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에는 관료 통제에 의한 비효율, 이윤 동기 및 경쟁 부재에 의한 노동 의욕의 감퇴 등이 있었다. 이 점은 반대로 이윤 동기가 작용했던 주택에 부속된 자영 채소밭의 높은 생산성으로 증명된다. 1970년, 우크라이나에서 전체 농지의 몇 퍼센트에 불과했던 자영 채소밭은 농가 수입의 36퍼센트를 차지했다.[6] … 우크라이나에서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이 처음으로 고조된 계기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폭발 사고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북쪽 방면으로 약 1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제4호 원자로가 폭발했다. 192톤의 핵연료 중 4퍼센트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어 히로시마형 원자폭탄 500발분의 방사능이 확산됐다. 사고 자체로도 사상 초유의 재난이었지만 사태를 한층 더 악화시킨 것은 소련의 은폐 구조였다.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획득한 지 1년 남짓 됐고 글라스노스트도 아직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던 탓에 사고는 28일까지 감춰져 있었다. 이 때문에 좀 더 빨리 공표하여 필요한 조처를 취했다면 구할 수 있었던 많은 생명을 잃었고 몇만 명의 사람은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소련은 생산지상주의로 그동안 환경 문제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문제가 일어나도 감추기만 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제1중화학 공업지대라고 자랑했지만 실상은 공장과 광산이 배출하는 오염물질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는 소련 유수의 오염지대가 되어 주민들의 건강 문제가 심각해졌다. 글라스노스트가 정착해가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불만이 터져나왔다. 긴 시간 터부시됐던 역사의 ‘공백’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일어난 대기근이 공공연하게 논의됐고 1930년부터 1940년대에 보안 경찰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의 대규모 무덤이 발견됐다."[7] 소련의 무기력 아래 1989년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이 시작됐고,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의회인 ‘최고회의’(베르호우나 라다)의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4분의 1 의석을 획득했다. 1990년 7월 16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주권 선언을 했고, 1991년 8월 24일 거의 만장일치로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이후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에서 90.2퍼센트의 찬성으로 독립을 확정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 부패한 관료 지배계급(올리가르히)을 물려받았는데, 이 유산은 오늘날까지 우크라이나 민중을 억압하고 있다. 2004년 오렌지혁명, 2014년 유로마이단 운동에서 ‘부패 청산’은 우크라이나 민중의 공통된 구호였다.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과정은 ‘친러'와 '친서방’ 지배계급 세력 간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지는 진자 운동을 반복해왔는데, 부패는 ‘친러’와 ‘친서방’을 가리지 않았다. ‘부패 척결’을 내걸고 2019년에 당선된 젤렌스키도 현재 부패스캔들에 연루돼있고, 2025년 7월에는 젤렌스키의 반부패기관 통제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러시아의 침공은 우크라이나에서 극우 파시즘을 강화할 뿐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네오나치’가 성장하고 있다며, 이를 침공의 근거로 삼았다. 그런데 실제 우크라이나에서는 극우 파시즘이 성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회학자이자 ‘Lefteast’의 편집자인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프랑스 사회주의 잡지 <연속혁명>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의 극우의 상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프랑스의 극우, 주로 르펜의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은 우크라이나에서 논의되는 운동들보다 훨씬 덜 극단적이다. 르펜의 정당은 아마 나치 상징을 사용하지 않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시 정권과의 협력에 대해 더 정교한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세계대전 시기 파시스트들로부터) 정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와 다르다. 당신이 언급한 스테판 반데라(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연합한 극우 성향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는 공개적으로 미화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특히 아조프 대원들에 의해 와펜 SS(나치 민병대의 일종)가 미화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극우의 극단주의 수준은 서구 극우보다 훨씬 높다. 최근 그들은 서부 우크라이나 최대 도시인 리비우에서 ‘네이션 유로파’라는 국제 회의를 개최했는데, 여기에 독일의 드리테 베그, 이탈리아의 카사 파운도 등 여러 유럽 국가의 유사 네오나치 단체들을 초청했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스보보다(Svoboda) 정당을 비롯해 아조프/국민군(National Corps)의 주요 인사 등 주요 극우 조직들이 모두 참여했다. 이들 우크라이나 정당, 조직, 군사 부대는 일반적으로 단순히 '극우'로 불리지만, 서구의 주류 극우 정당보다는 훨씬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서구 단체들과 국제적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참고로, 이 회의에 참여한 우크라이나 군사 부대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군사 정보국(HUR)과 연계되어 있다. … 의회 지위를 추구하는 서구의 주요 극우 정당들과 달리, 우크라이나 극우의 힘은 항상 거리 동원 능력과 폭력의 위협에 있었다. 중요한 점은, 2012년 선거에서 극우 스보보다당이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한 차례를 제외하면, (서부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방 의회에서는 훨씬 더 큰 대표성을 확보하고 최대 파벌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선거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주된 권력 원천은 과두 정당이나 취약한 자유주의 정당들과 달리, 의회 밖에서의 동원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전후 유럽의 파시스트 운동 계열에 속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OUN)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치적 전통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 이제 아조프여단은 전쟁의 영웅으로서 매우 합법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들은 특별한 미디어 관심을 누리며 자신들을 엘리트 부대로 포지셔닝하고, 미디어가 이를 확언해주고 있다. 아조프 연대 소속 연사들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또한 2022년 이전에 그들을 네오나치라고 부르던 과거를 쉽게 잊어버린 서방 언론들 덕에, 그들은 일종의 이미지 세탁(White-washing) 효과를 누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명목상의 극우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및 서방 엘리트들이 우크라이나 극우와 민족주의를 미화하는 데 공모한 점도 고려해야 한다. … 미국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역사학자 마르타 하브리슈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정책, 우크라이나 극우에 대해 비판적으로 글을 쓰며 계속해서 수천 건의 위협, 특히 살해 위협과 강간 위협을 받고 있다. 당신의 의견으로는 아조프가 우크라이나 극우의 주력 세력인가? 그들은 마리우폴과 바흐무트 전투로 인해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극우 세력의 재편 과정에서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는가? 오히려 그들은 확장되었다. 현재 국가수비대 내 제3돌격여단과 아조프여단 두 여단, 그리고 군사정보부에 소속된 특수부대 크라켄까지 보유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미디어 노출도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그들의 세탁된 정당성도 확장되었기에, 그들은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그들은 비정치화되지 않았다."[8] 푸틴이 얘기하지 않는 것은, 러시아의 반복된 침공과 군사적 위협이 우크라이나에서 파시즘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번 전쟁을 거치며 아조프여단 등 우크라이나의 극우는 ‘전쟁영웅’ 칭호를 얻고, 영향력을 더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우크라이나에서 파시즘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 반동적 전쟁을 지금 당장 중단시켜야한다. 정리하자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파시스트’를 빌미삼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이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야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스탈린 반혁명 이후 오랜시간 이어져온 국가자본주의 소련의 민족억압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에서 극우 민족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꼬여버린 역사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선 무엇보다 오늘날에도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자결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한다. 제국주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우크라이나의 파시즘을 강화하는 반동적 침략전쟁일 뿐이다. 2. 서방제국주의와 NATO가 우크라이나를 구원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떤 역사적 배경 위에서 벌어진 것이며, 어째서 제국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침략전쟁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사태의 다른 측면인, NATO와 서방 제국주의의 위선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러시아의 반동적인 군사적 대응을 만든 건 NATO의 동진정책이었다. 1990년에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통일 독일에 나토군을 주둔시키며 “NATO는 동쪽으로 1인치도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공문구에 불과했고, NATO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회원구을 받으며 동진을 이어왔다. 나토는 독일 통일 당시 ‘1인치도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란 미국 국무장관의 선언과 반대로, 빠른 속도로 러시아 국경을 향해 가입국을 확대해왔다. 1999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NATO에 가입했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는 2002년 공식 가입 초청을 받았으며 2년 후 가입 절차를 완료했다.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는 2009년 가입했으며, 마케도니아는 2020년에 가입했다. 러시아와의 거대한 물리적 경계선인 우크라이나는 2008년 NATO 가입 과정인 Membership Action Plan(MAP)을 신청했으며, 유로마이단 이후인 2014년 가입 의사를 공식 목표화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연설에서도 제임스 베이커의 말을 인용하며, NATO의 지속적인 동진 위협을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실제로 NATO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동진을 거듭했고, 러시아를 상대로 한 군사적 위협을 증대시켜왔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정당화될 순 없으나, NATO의 지속적인 동진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푸틴의 반동적 반응을 낳은 것은 분명하다. [1997년 이후 나토의 확장을 보여주는 지도] 나토는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핑계삼아 끊임없이 자기 세력을 확장해왔다. 그러나 독일 사회주의자 내대니얼 플래킨이 지적하듯, 이런 위협은 의도적으로 과장돼있다. "현재 나토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무기를 공급하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민주당 내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미국 의회는 추가 무기 지원으로 400억 달러를 승인했다. 독일 자본가들은 군대에 추가로 1000억 유로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된다. … 물론 현실은 부패한 러시아 정권의 군대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에서 겨우 조각을 뜯어내는 데도 힘겨워한다는 점이다. 나토의 새로운 군국주의는 방어와 무관하다. 제국주의 패권을 공고히 하고 중국과의 더 큰 대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신형 무기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새로운 제국주의 모험에 사용될 것이다. 1914년에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다. 독일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야만적인 국가였던 러시아의 독재 정권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장군들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이 전쟁이 독일 노동계급이 누리는 제한된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차르는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 조직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독일 장군들은 노동자들의 파업권, 집회권, 심지어 의견 표현권마저 박탈했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계엄 상태를 정당화한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소책자에서 러시아가 독일을 정복하려 한다는 주장의 터무니없음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차르가 유럽이나 달을 병합하려 한다고 가정하는 게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오늘날 푸틴이 폴란드를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으며, 미국 국민을 위협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노동자 계급에게 가장 큰 위협은 지구상 어디든 죽음의 비를 내릴 수 있는 무적의 수단을 가진 나토 군대에서 온다."[9] NATO는 미국과 유럽의 팽창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제국주의 전쟁 기계다. 나토는 회원국을 잠재적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방어적’ 동맹이라는 수사를 내세운다. 그러나 나토는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인도적 지원’과 ‘민간인 보호’등을 명목으로 적극적인 ‘공격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코소보 전쟁, 2001~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11년 리비아 내전 개입이다. “나토 역사상 최초의 합동 공격 작전은 199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서 세르비아군을 상대로 벌인 침공이었다. 이는 구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지역 내 독립 전쟁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토가 모든 군사력을 쏟아부은 것은 1999년 코소보 전쟁 때였다. 13개국에서 파견된 600대의 전투기가 코소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폭격했으며, 이로 인해 2,500명에서 5,7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했으며, 우라늄 폭탄 사용으로 인한 막대한 물질적·환경적 피해가 발생했다. 나토 개입의 명분은 코소보에서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범죄를 자행한 세르비아군의 인종청소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코소보 알바니아인의 정당한 자결권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발칸 반도라는 러시아의 영향권에 나토의 존재감을 확대할 친미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10]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9·11 테러 배후 조직의 지도자 빈 라덴이 그곳에 은신 중이라는 구실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지역 내 이익은 무슬림 국가인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아랍 세계까지 포함하는 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 핵심 지역을 장악하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지정학적 우위를 제공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 지역에서의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국 기업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년간 지속되었으며, NATO 군대의 굴욕적인 철수와 함께 탈레반 정부 손에 나라가 넘어가며 종결되었다. 전쟁의 결과로 인구는 황폐화되었으며 — 현재 인구 평균 연령은 18세이다. 전쟁은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남겼고, 전면적인 내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또 다른 결과는 나토 회원국들 내부에서 이슬람교도 인구에 대한 외국인 혐오 정책과 차별이 확산된 것이다. … 2011년 5개월 동안 북아프리카 국가 리비아에 대해 NATO는 공습과 군사 개입을 단행했다. 3월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 보호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표결했으며, 20개국이 넘는 국가들이 무기 지원 또는 직접적 개입을 통해 참여했다. 나토의 행동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혁명적 과정 속에서 해당 지역에서 공세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42년간 리비아 대통령을 지낸 무아마르 카다피는 아랍의 봄 운동의 결과로 축출된 지역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집권 당시 소비에트와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그의 정부는 수년간 쇠퇴해 왔다. 미국과 유럽은 군사적 개입 외에도 반군 단체에 무기와 훈련을 지원하며 자금을 제공했다. 2011년 10월 11일, 카다피는 미국이 지원하는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이로 인해 리비아 내부에 권력 분열을 초래하는 내전이 발발해 두 개의 정부가 생겨났다. 당시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이에 대해 웃으며 “우리는 왔고, 보았고, 그가 죽었다”고 발언했다. 나토(NATO)는 이러한 봉기를 '인도적 지원'이 아닌 서방 이익에 유리한 새 정부를 세워 영토 통제권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았다. 리비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기근과 분쟁을 피해 도피하는 난민 통제에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막대한 가스·석유 매장량으로 지역 지정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군사 작전을 주도했으며 석유 거래로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리비아는 여전히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나토군은 이 지역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리비아인들의 권리는 유린되었고, 기아와 완전한 파괴로 인해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11] 서방 제국주의는 우크라이나에게 굴종과 광물을 요구한다. 올해 2월 트럼프는 젤렌스키와의 회담에서 노골적으로 젤렌스키에게 모욕을 주었다. 출입기자와 부통령 J.D.밴스는 젤렌스키에게 정장을 입고 오지 않았다느니, 미국에 대해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았다느니 무례한 말을 쏟아냈고,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너는 (협상할) 카드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미국에 대한 굴종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젤렌스키는 이날 화난 표정으로 광물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회담장을 빠져나갔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결국 광물협정을 통해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50%씩 출자해 ‘미국, 우크라이나 투자 재건펀드’를 만들어, 우크라이나의 광물과 에너지 자원 투자에 관여할 수 있게 됐다. 10년 간 광물산업 투자를 통해 얻은 순이익은 반반씩 나누되, 우크라이나의 재건을 위해 쓰기로 한다는 단서조항이 있지만, 실제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광물산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려면 10년 이상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광물협정에 따라 앞으로 많은 이익을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래에 미국의 미래 군사지원을 펀드 기여금으로 간주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의 광물을 탐내는 것은 중국과의 경쟁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는 흑연, 티타늄, 리튬과 같은 필수 희귀 광물이 대량 매장돼 있다. 미국이 중국과의 미래 산업(AI,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천연자원이다. 트럼프는 중국으로부터 자유롭고, 미국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천연자원 공급망을 확보하려고 한다. 중국은 이미 몇 십년 간 남미와 아프리카에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핵심광물에 대한 통제권을 늘려왔다. 오늘날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고, 천연자원의 가공산업에서는 거의 90%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관세를 부과한 지 며칠 후 중국 정부가 흑연과 텅스텐을 포함한 20개 이상의 핵심 광물에 대한 수출 규제로 반격한 것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중국의 천연자원에 대한 우위가 얼마나 중요한 위협인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트럼프는 미국의 NATO 방위비 분담금을 줄이기 위해 유럽 동맹국들에게 줄기차게 방위비 인상을 요구해왔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방위비 지원에서도, 유럽의 동맹국들이 더 많은 몫을 부담해야한다고 강조해왔다. 또한 얼마 전 8월 18일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진행한 회담에서 젤렌스키는 트럼프에게 미국산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하겠다고 약속해야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을 노리는 건 단지 트럼프의 미국만이 아니다. 전통적인 유럽의 동맹국들도 전쟁이 길어지고 방위비 부담이 커질수록, 우크라이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국의 이익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다.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프랑스 군무장관은 얼마 전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광물 협정 체결이 임박하자, 노골적으로 자신들도 광물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발언했다. ("프랑스 방위산업도 특정 원자재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우크라이나의 안보비용을 분담하는 자신들의 ‘지분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아래 한 EU정책자문가의 사설은 EU가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개입을 해야만 더 많은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이번 주 초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차지하고, 미국이 천연자원을 얻으며, 유럽이 평화유지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 궁극적으로 EU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군사적 지원 확대 노력은 EU가 제공할 수 있는 가능한 안보 보장 협상과 병행되어야 한다. 후자는 우크라이나가 경제 회복과 재건을 위한 신뢰할 수 있고 강력한 유럽의 지원을 바탕으로 할 때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우크라이나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EU가 모든 차원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의지를 더 많이 표명할수록, 향후 어떤 협상 테이블에서도 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신뢰성을 더 확보할 수 있다."[12] 우크라이나 경제는 이미 3년 반의 전쟁으로 파탄난 상태다. 우크라이나의 GDP는 2022년 28.8% 감소한 후, 국제원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2023년 5.5%, 2024년 2.9% 증가했다. 국제원조 없이는 현재 우크라이나 경제의 지속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러시아의 공세가 시작된 첫 달,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채를 판매하고 화폐를 발행하며 적자를 메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해 연말 기준 우크라이나의 경제 규모는 거의 3분의 1 규모로 축소되었으며, 물가는 25% 이상 치솟았다. ... 전쟁 전 우크라이나의 발전량 중 절반 이상이 러시아에 의해 파괴되거나 점령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에너지부는 2022년 10월~2024년 9월 기준 러시아가 자국 에너지 인프라를 1000번 이상 공격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 우크라이나 경제의 또 다른 큰 문제는 3분의 1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력이다.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 국외로 떠난 피난민, 계속되는 동원이 그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 게다가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국민 거의 4분의 1이 피난민이 되었다. UN에 따르면 해외에 거주 중인 우크라이나 난민은 현재 약 700만 명 수준이며(그중 6300만 명이 유럽에 거주한다) 국내 실향민 또한 460만 명이나 된다."[13]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광물자원에 대해 미국과 유럽이 어느정도의 지분권을 갖고 나눠먹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그들의 수사와 달리, 미국과 유럽이 방위비의 댓가로 우크라이나 노동자민중에게 심각한 경제적 종속을 불러올 청구서를 내밀 것은 분명하다. 또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호자 행세를 하는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가자지구에서 진행중인 집단 학살에 공모하는 바로 그 세력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수탈의 자유를 제공하는 댓가로 얻어지는 NATO의 안보보장은 과연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제공할 수 있는가? NATO 내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친러 성향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들이 하는 말 중 이런 얘기가 있다.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면 NATO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고, 이는 NATO와 러시아의 전면전이라는 더 큰 전쟁을 낳을 수 있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리한 근거를 취사선택하는 것일 뿐이지만, 이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혹은 NATO 동맹국들의 안보지원은 러시아와의 전쟁위협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며, 절대로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다. 제국주의 패권대결의 총체성 속에서 러우전쟁을 바라봐야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어떤 좌파들은 이 전쟁을 제국주의 세력 간의 대리전이 아니라, 러시아의 침략에 맞선 우크라이나가 민족해방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NATO의 무기지원을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자본주의의 총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독일 사회주의자 나다니엘 플라킨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황을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와 세르비아 전쟁에 비유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게오르크 루카치는 1967년 레닌 사상에 관한 연구의 후기에서 레닌주의의 핵심 범주로 “총체성”을 강조하였다: “혁명적 실천을 지향하는 계급의식을 올바르게 가리키는 것은 바로 총체성이다. 총체성을 향한 지향 없이는 역사적으로 진실한 실천은 존재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 중 누구도 총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전쟁을 미국 헤게모니 쇠퇴기 속 강대국 간 고조되는 긴장의 일부가 아닌, 두 불평등한 국가 간의 갈등으로 보길 원한다. 즉, 그들은 우리가 세계적 제국주의의 총체성으로부터 분리된, 임의로 정의된 전쟁의 일부만을 보길 바라는 것이다. … 여기서 LIT-CI[14]의 입장은 특히 기이하다. 그들은 “나토가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묻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 상황에서는 러시아를 방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약하고 종속적인 국가(러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나토의 침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나토의 패배를 지지할 것이다.” 따라서 미군이 러시아군을 향해 발포한다면, LIT-CI는 180도 입장을 바꿀 것이다: 그들은 젤렌스키 지지를 중단하고 즉시 러시아군 편에 설 것이다. 문제는 물론 우크라이나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원”과 직접적인 제국주의 개입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LIT-CI의 두 입장, 즉 우크라이나 지원이나 가상의 러시아 지원 모두 잘못되었다. 이는 세계 정세의 총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극히 기계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동의하듯, 제1차 세계대전은 일련의 고립된 민족해방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 간의 세계적 갈등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부르주아지의 패배를 위해 싸워야 했다. 이는 “조국”이 파괴 위협에 직면했을 때조차 “국방”에 용감히 반대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예산에 반대한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을 칭송했다. 이 입장은 전체적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나토 국가들의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야 한다. 강대국 간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새로운 갈등과 전쟁이 발생할 것이며, 각 제국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침략을 ‘민주주의’와 ‘자결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 할 것이다. 이는 항상 전쟁 선전의 언어였다. 사회주의자들은 독립적인 입장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는 우크라이나에도 적용된다.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독립적인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여, 나토와 러시아 제국주의 양측으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키는 전망을 가지고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반동적 전쟁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길이다."[15] 3. 위기와 전쟁의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열었다. 이미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가 상당히 약화되었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은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이 시대에 위기에 빠진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의 위기를 상대국에게 전가하기 위해 치열한 정치군사적 다툼을 벌인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학살과 중동의 전쟁위기,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군사행동과 개입강화, 유럽에서 극우파시즘의 부상과 군비인상, 동아시아에서 북중러-한미일 진영의 강화는 세계 자본주의 위기의 표현들이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위기의 표현이자 위기를 심화시키는 또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 전쟁 장기화로 러시아는 중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가 됐고,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올해 전승절 행사에서 러시아는 중국과의 동맹을 과시했고, 9월 3일에 열릴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는 푸틴과 김정은, 시진핑이 한 자리에 모일 예정이다. 한편 얼마 전인 6월 나토 회원국들이 2035년까지 국방비를 자국 국내총생산의 5%까지 늘린다는 합의를 통과시켰는데, 이는 유럽 각 국에서 기존 국방비를 2~3배 이상 인상해야함을 의미한다.[16] 국방비 지출이 늘어나는 만큼 사회복지를 위한 공공재정은 줄어들 것이며, 기후위기 대응 또한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다. 미국의 주도 아래 이뤄진 NATO의 동진정책과 러시아의 팽창적 야욕이 만나 벌어진 이 반동적인 전쟁으로 수많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노동자민중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잔혹한 행위를 하고, 죽고 죽여야 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7만여명에서 15만여명[17], 러시아에서는 최소 18만여명에서 25만여 명까지 사망했다고 추정되고 있다.[18] 발제 2에서도 강조되듯, 러시아에서 징집돼 사망한 이들 중 불비례한 숫자가 소수민족과 가난한 주변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나왔다.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NATO가 가져다줄 수 없다. 러시아도 가져다줄 수 없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노동자민중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노동자민중의 국제연대와 단결을 통해 반동적 전쟁을 끝내고 각국의 군사적 팽창 시도를 저지하여 노동자혁명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다. 운동의 실마리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주변국에서 전쟁을 멈추고 나토와 푸틴 양측 모두와 독립된 노동자의 운동을 조직할 실마리가 얼마나 있는가? 전쟁 초창기인 2022년 4월에, 러시아 군을 지원하던 벨라루스에서 철도노동자들이 고의적 사보타지를 통해 러시아 군사장비 수송을 막고 손상시켰다.[19]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철도노동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며 나토의 무기수송을 반대하는 파업에 돌입해 2주간 무기수송을 지연시켰다.[20] 안타깝게도 이러한 저항이 보다 폭넓은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행동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이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역할해야할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러시아에서는 2022년 9월에 평화운동단체가 주도한 반전시위로 1300여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난 7월 젤렌스키 정부의 반부패기관 통제법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직 그 이상의 대중적인 반전운동의 소식은 포착하지 못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벨라루스 철도노동자들은 친러 벨라루스 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쪽에서 나토의 군사개입, 러시아의 침공을 반대한 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탄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에 기반한 탄압도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LGBT는 서구가 퍼뜨린 극단주의 이데올로기’라며 성소수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어린이들에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증오심을 가르치고 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에선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고 극우파시즘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제 중학교 시절부터 자동소총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애국심과 파란색, 흰색, 빨간색 깃발에 대한 사랑, 그리고 레닌에 대한 증오를 가르친다. 우크라이나에 자결권을 부여한 이가 바로 레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우크라이나인을 증오하도록 가르친다. 오늘 그들을 증오하도록 가르쳐 내일 무의미한 전투에서 마을마다, 킬로미터마다 완전히 황폐화된 동부 우크라이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을 죽일 수 있도록 말이다.[21] 예를 들어, 오데사처럼 압도적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도시에서도 우크라이나 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심지어 선택 과목으로도 없다. 그곳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80~90%가 부모와 러시아어로 대화할 것이다. 최근 제출된 법안은 교실 내 교사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에 학생들 간의 사적인 대화에서도 러시아어 사용을 금지할 수 있다. 이 법안은 이미 교육부 장관의 승인을 받았다."[22] 한편 우크라이나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노동계급의 현재 조직화 정도에 대한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했다. "현재 상황에서 노동계급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노동운동은 전쟁 이전부터 이미 취약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정치적 파업은 1993년 돈바스 광부들이 벌인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돈바스의 자치권과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파업조차 소위 '붉은 이사들'이라 불리는 소비에트 기업 경영진들의 이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소비에트 붕괴 직후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파업을 정부로부터 특정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결국 파업은 조기 선거와 정부 교체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진정한 대규모 파업은 없었습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소규모 파업만 목격해왔는데, 이는 대개 특정 기업에 국한되거나 기껏해야 경제의 일부 분야에 그쳤으며, 정치화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참고로,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정치적 파업을 시작하지 못한 점이 정부에 대한 영향력 부족으로 인해 폭력적 격화로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시위자들에게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시위의 폭력적 전략을 추진할 기회가 열렸습니다. 따라서, 맞습니다, 이 전면적 침공 이후 파업은 금지되었습니다. 발생한 파업들은 아마도 비공식적 파업일 것입니다."[23] 그의 분석이 맞다면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 자신을 조직화해야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있다. 여기서 국가자본주의 소련의 유산은 우크라이나에서 극우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 모두에 맞설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대안을 만드는 과정을 한층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이셴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른바 ‘좌파’로 분류되는 정치세력의 주류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으로, 러시아의 침공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보다 훨씬 수가 적은(전성기 때에도 1/100 정도 되는), 서구의 민주사회주의 및 자유주의 좌파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전쟁 발발 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지하고 군에 자원입대 하는 등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잔혹한 징병제가 시행되고, 또 다수의 우크라이나 민중이 전쟁 지속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24], 이들은 전쟁에 대한 입장을 조심스럽게 재검토하고 있다. 이셴코가 분류하는 마지막 부류의 좌파에 대해 이셴코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우크라이나 좌파의 세 번째 세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25]인데, 내가 “신소비에트 부흥”이라 부르는 현상의 일부로, 많은 구소련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크루즈키(kruzhki)’—문자 그대로 '동아리'를 의미—로 조직되며, 단순한 마르크스-레닌주의 독서 모임을 넘어선 원시적 정치 조직이다. 러시아에서 훨씬 더 대중적이어서 수십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도 한다. 러시아, 벨라루스, 중앙아시아에서 크루즈키는 소련에서 단 하루도 살지 않았지만 자국 사회·정치 현실에 비판적인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포괄하며,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그 현실을 다루는 수단을 찾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도 이 단체들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확장되었다. 탈공산화, 반러시아 민족주의 및 반공주의 정서 고조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단체들은 거의 창립 초기부터 정부에 반대하는 동시에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을 취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100년 전 붕괴하는 러시아 제국에서처럼 사회 혁명이 과연 가능한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단체는 창립 초기부터 강제 징병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국제주의를 호소하며, 우크라이나 국가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다."[26]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 밖의 구소련 국가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이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흐름은 ‘친서방’ 노선도 ‘친러’ 노선도 구소련 국가의 노동자민중들에게 자유와 빵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물음의 반영일 것이다. 이미 여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민중들이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 전쟁에 반대했고, 그 결과로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다. 아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행위에 맞선 투쟁이 대중적으로 폭발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 방향이 틀렸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노동자민중이 쇼비니즘 이데올로기에 짓눌리고 탄압받고 있는 상황은, 이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고, 직접적인 탄압에서 좀 더 자유로운 전 세계 각 국의 노동자들이 더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함을 의미한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한 한국 사회주의자의 일차적 과제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에 지속적으로 155mm 포탄 60만 발을 보내며 간접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왔다. WP는 2023년 12월 “한국이 미국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보낸 포탄이 모든 유럽 국가의 공급량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북조선은 지난 2025년 4월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 군대를 파병했음을 공식 승인했다. 북한이 2024년 한 해에만 포탄 900만 발을 공급했다는 보도도 있다.[27] 러우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보내진 탄약과 군인이 서로 맞붙고 있는 셈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고조로 강화되었고 앞으로도 강화될 미중패권대결은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끊임없이 고조시키고 있고, 이것이 열전으로 비화한다면 한반도에서의 대리전으로 나타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군사개입을 중단시키고, 북한의 전쟁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노동자민중과의 연대일 뿐 아니라 한반도에 닥칠 전쟁을 막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갈 길은 아직 요원하다. 이재명이 8월 25일 트럼프를 만나 MAGA가 적힌 모자와 MASGA딜[28]을 상징하는 거북선을 선물하는 등 엄청난 아부를 하고 돌아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피스메이커를 하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열심히 지원하겠다”, “미리 일본과 만나서 대통령께서 걱정하는 (위안부) 문제를 다 정리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인 입장을 더는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국방비를 늘리겠다.” 이재명이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한 발언들이다. 정상회담의 모든 의제는 제국주의 열강투쟁에 관한 것이었고, 이재명은 모든 대목에서 ‘한국은 미국의 동맹’임을 호소했다. 이로써 이재명은 자신에 대한 ‘오해’, 즉 친중·친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불식시켰고, “함께 갑시다”라는 주한미군 슬로건까지 인용하며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서의 한국을 강조했다. 이에 더해 한국 자본가들은 대미 추가 투자 1,500억 달러를 약속하며 패권 유지를 위해 제조업 부흥을 꾀하는 트럼프를 기쁘게 했다. 물론 이는, 한국이 이미 약속한 대미 투자 3,500억 달러와 마찬가지로 국책금융기관 대출과 지급보증으로 충당될 것으로 예상되어 한국 자본가들에게도 손해가 아니다. 미국에게 이번 회담은, 열강투쟁 격화 속에서 ‘한국은 누구 편인가’를 묻는 자리였다. 그리고 미국은, 이재명 정부 국정과제에 담긴 ‘국익 중심 실용외교’는 그저 수사일뿐, 한국은 확실한 미국편임을 확인했다. 이에 중국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즉각 경고했다. “한국이 반도체, 공급망, 대만해협, 남중국해 등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해 미국의 명령을 따른다면 자국 운명을 위험한 수레에 묶는 것과 다름없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핵을 영원히 내려놓지 않으려는 우리의 입장은 절대불변”, “우리의 핵정책이 바뀌자면 세상이 변해야 하고 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환경이 변해야 한다.” 이런 이재명의 외교행보가 ‘현명’하다며 치켜세우는 목소리가 많다.[29] 그러나 이재명이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수장으로서 아무리 현명한 처세술을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이 자본주의란 체스판의 규칙 아래 현명한 선택을 한 것에 불과하다. 이 게임은 한 턴이 지날 때마다 제국주의 패권대결의 논리를 따라 더 큰 전쟁과 위기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게임을 멀찍이 지켜볼 수 있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죽음과 비극을 눈앞에서 지켜봐야하는 체스판 위의 말이다. 이 체스판을 뒤집지 않고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이재명 정부의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에 맞선 투쟁으로부터 출발하자. 올바른 관점을 분명히 세우고, 노동자 국제연대를 전방위적으로 확대해나가자. ------ .footnote-ref, .footnote-target { scroll-margin-top: 200px; color: #E60012; text-decoration: none; } .footnote-ref:hover, .footnote-target: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1] Lenin, 1917.06.15., The Ukraine, Pravda No.82.,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jun/28.htm [2] 통일시대, 2022, 「푸틴대통령의 2월 21일 연설 전문」, https://www.tongil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703 [3] 배진영, 2018, 「평화만을 추구하다 전쟁 불러들인 네빌 체임벌린」, 월간조선, 2018년 6월,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806100042 [4] 구로카와 유지, 2022, 유럽 최후의 대국 - 우크라이나의 역사, 안선주 역, 2022, 글항아리, 제7장 [5] 같은 책. [6] 같은 책. [7] 같은 책, 8장. [8] Philippe Alcoy & Sasha Yaropolskaya, 2024, “There Is No Enthusiasm in Ukraine”: Interview with Volodymyr Ishchenko,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there-is-no-enthusiasm-in-ukraine-interview-with-volodymyr-ishchenko/ [9] Nathaniel Flakin, 2022, Reading Rosa Luxemburg’s ‘Junius Pamphlet’ in Times of War,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reading-rosa-luxemburgs-junius-pamphlet-in-times-of-war/ [10] Josefina L. Martínez and Diego Lotito, 2022, NATO and Imperialist Military Expansionism, Left Voice, Originally published in Spanish on May 21, 2022 in Ideas de Izquierda., Translated by B.C. Daurelle, https://www.leftvoice.org/nato-and-imperialist-military-expansionism/ [11] Claudia Ferri, 2022, Three Interventions That Show NATO’s Imperialist Role, Left Voice, First published on March 1 in Spanish in La Izquierda Diario., https://www.leftvoice.org/three-interventions-that-show-natos-imperialist-role/ [12] Julian Bergmann, 2025, Opinion: Amid US fallout, time for the EU to step up assistance to Ukraine, Devex, https://www.devex.com/news/opinion-amid-us-fallout-time-for-the-eu-to-step-up-assistance-to-ukraine-109458 [13] 아나스타샤 자누다, 2025, 「우크라이나 경제는 앞으로도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까?」, BBC 코리아,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p9x9eeyxxyo [14] 국제노동자연맹 제4인터내셔널(LIT-CI)은 모레노-트로츠키주의 조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토의 무기지원을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5] Nathaniel Flakin, 2023, Ukraine Is Not Vietnam,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ukraine-is-not-vietnam/ [16] 2024년 나토 방위비 분담금의 평균은 GDP의 2.2%이다. [17] UALosses 프로젝트는 사상자를 이름별로 기록했고, 이에 따라 2025년 8월 7일 기준으로 우크라이나군 전사자 73,920명과 실종자 75,253명을 집계했다. [18] BBC News Russian과 Mediazona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2025년 8월 초 기준 189,051명에서 273,073명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19] Marius Rautenberg, 2022, Belarus Rail Workers Sabotage Russia’s Attack on Ukraine: Building an Independent Position on the War, Left Voice, First published in German on April 4 in Klasse Gegen Klasse, https://www.leftvoice.org/belarus-rail-workers-sabotage-russias-attack-on-ukraine-how-an-independent-position-on-the-war-can-be-built/ [20] Simon Zinnstein, 2022, Greek Railroad Workers Block Delivery of U.S. Tanks to Ukraine, Left Voice, First published in German on April 3 in Klasse Gegen Klasse, https://www.leftvoice.org/greek-railroad-workers-block-delivery-of-u-s-tanks-to-ukraine/ [21] Sasha Yaropolskaya, 2025, Sasha Yaropolskaya: “The Only Possible Response to the War in Ukraine Is Internationalist”,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sasha-yaropolskaya-the-only-possible-response-to-the-war-in-ukraine-is-internationalist/ [22] Philippe Alcoy & Sasha Yaropolskaya, 2024, “There Is No Enthusiasm in Ukraine”: Interview with Volodymyr Ishchenko, Left Voice, https://www.leftvoice.org/there-is-no-enthusiasm-in-ukraine-interview-with-volodymyr-ishchenko/ [23] 같은 기사. [24] “‘승리할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는 여론은 눈에 띄게 줄었다. 2022년에는 73%에 달했던 결사항전 여론이 2023년 63%, 작년 38%로 줄었고, 올해는 24%까지 떨어졌다.”, 이영경, 2025, 「전쟁에 지친 우크라 “결사항전보다 종전”···결사항전 여론 73→24%」,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article/202508072004001 [25]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스탈린주의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여기서 이셴코가 언급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소련에 살아본 경험이 없지만, 그 유산인 자신의 나라(러시아, 벨라루스, 중앙아시아 등)에서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본다는 점에서 정통 스탈린주의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어보인다. 다만 그 비판의 근거를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자장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고, 중국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마오주의를 차용하는 중국의 젊은 마오주의자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26] 같은 기사. [27] 박현주, 2025, 「“북한이 포탄 900만발 보내자…러시아는 판치르 넘겨줬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0069 [28]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의 줄임말로,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통상 협상 과정에서 제안한 전략적 협력 구상이다. [29] 심지어 조선일보조차 “불협화음 없이 무난하게 첫 단추를 잘 꿴 셈”이라고 평가했다.2025-09-01 | 조회 8,853 -
[3차 정세집담회 자료집] 러시아 소수민족 입장에서 바라본 러-우전쟁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욕 아래 펼쳐진 반동적 전쟁으로 인해, 각국의 노동자민중은 서로를 죽이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전쟁에서는 특히, 부랴티야 공화국 같은 가난한 ‘소수 민족’ 출신 군인들이 더욱 더 전쟁터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반동적 침략행위에 맞선 투쟁은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억압에 맞선 투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사회주의자의 시선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둘러싼 상황을 해석하고, 나아가 러시아 내에서 억압받아온 소수민족의 역사, 그리고 더욱 빈곤과 전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청: https://forms.gle/jhyhdDtYkeYw4yBa9 일시: 8월 29일(금) 저녁 7시 장소: 민주노총 15층 회의실(서울 중구 정동길 3) ※온라인 Zoom 참가 병행 발제: =양동민(사회주의를향한전진): 러-우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 =Sonia(팔레스타인 학생 공동행동): 러시아 내 소수민족 역사와 러-우전쟁에서의 상황 주최: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정책선전위원회 ※발제자료는 아래에 첨부돼있습니다. 각 발제의 한/영 버전을 모두 업로드할 예정입니다.2025-08-29 | 조회 11,500 -
[정세집담회] 세계적인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편집자 주: 아래 글은 7월 25일(금) 진행된 '[정세집담회] 세계적인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발제문으로 제출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극우 정권이 세계를 휘젓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을 틀어쥔 트럼프 2기 정권은 야만적인 이민자 단속, 노골적인 부자감세와 복지축소, 무법 무도한 관세 전쟁과 이란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밀레이 정권은 보건·교육·과학 등 공공부문에 대한 대규모 예산 삭감과 민영화를 자행하고 있다. 물론 극우세력은 단번에 파시즘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루 극우 정권에 대한 환멸은 노동자당 룰라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실패는 이재명 민주당 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이든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밀레이 정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 역시 키르치네르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윤석열 국힘 정권이 문재인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 덕분에 등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근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이 서로에 대한 환멸을 토대로 정권을 주고받고 있다. 극우 세력은 파시즘의 공포를 안기지만 그렇게 진화하기에는 아직 대중동원 능력이 부족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은 인간의 얼굴을 앞세우지만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가중시킬 뿐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는 단순히 제자리를 맴돌지 않는다. 극우세력이 파시즘을 향해 성장해 가는 추세 또한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노동자·민중은 어떻게 깨부술 수 있을까? 극우 정권에 맞서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또한 ‘민주’ 정권에 맞서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세계적인 상황을 종합하면서, 윤석열 정권에 맞선 투쟁을 되돌아보고 이재명 정권에 맞선 투쟁의 방향을 모색한다. :root{ --sj-red:#c81d25; --sj-border:#e5e7eb; --sj-soft:#fafafa; } /* ───────── 기본 테이블 설정 ───────── */ table{ width:100%; border-collapse:collapse; table-layout:auto !important; /* 내용 기반 자동 너비 */ margin:0 auto !important; /* 표 자체 가운데 */ border:0 !important; /* 사이트 기본 보더 무력화 */ font-size:inherit !important; /* 본문 폰트 크기 상속 */ line-height:inherit !important; /* 본문 줄간격 상속 */ } colgroup col{ width:auto !important; } th[width], td[width]{ width:auto !important; } /* ───────── 셀 공통 ───────── */ th, td{ border:1px solid var(--sj-border,#e5e7eb); padding:10px; text-align:center !important; vertical-align:middle !important; word-break:keep-all; font-size:inherit !important; line-height:inherit !important; } th *, td *{ text-align:center !important; margin-left:auto !important; margin-right:auto !important; font-size:inherit !important; line-height:inherit !important; } td p{ margin:0; } td a{ color:inherit !important; text-decoration:inherit; } /* ───────── 1행 = 캡션 대체 ───────── */ tbo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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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대국을 틀어쥔 트럼프 2기 정권은 야만적인 이민자 단속, 노골적인 부자감세와 복지축소, 무법 무도한 관세 전쟁과 이란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밀레이 정권은 보건·교육·과학 등 공공부문에 대한 대규모 예산 삭감과 민영화를 자행하고 있다. 물론 극우 세력은 단번에 파시즘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루 극우 정권에 대한 환멸은 노동자당 룰라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실패는 이재명 민주당 정권의 등장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이든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밀레이 정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 역시 키르치네르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윤석열 국힘 정권이 문재인 민주당 정권에 대한 환멸 덕분에 등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국의 정권 변화> 중도우파 우파 중도우파 극우파 오바마 (민주당) 2009~2017 트럼프 (공화당) 2017~2021 바이든 (민주당) 2021~2025 트럼프 (공화당) 2025~2029 <아르헨티나의 정권 변화> 중도좌파 중도좌파 우파 중도좌파 극우파 키르치네르(남) (정의당) 2003~2007 키르치네르(여) (정의당) 2007~2015 마크리 (공화당) 2015~2019 페르난데스 (정의당) 2019~2023 밀레이 (자유지상당) 2023~2027 <브라질의 정권 변화> 중도좌파 중도좌파 우파 극우파 중도좌파 룰라 (노동자당) 2003~2010 후세프 (노동자당) 2011~2016 테메르 (민주운동당) 2016~2018 보우소나루 (사회자유당) 2019~2022 룰라 (노동자당) 2023~2026 <한국의 정권 변화> 우파 우파 중도우파 극우파 중도우파 이명박 (한나라당) 2008~2013 박근혜 (새누리당) 2013~2016 문재인 (민주당) 2017~2022 윤석열 (국민의힘) 2022~2024 이재명 (민주당) 2025~2030 최근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이 서로에 대한 환멸을 토대로 정권을 주고받고 있다. 극우 세력은 파시즘의 공포를 안기지만 그렇게 진화하기에는 아직 대중동원 능력이 부족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은 인간의 얼굴을 앞세우지만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가중시킬 뿐이다. 그런데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는 단순히 제자리를 맴돌지 않는다. 극우 세력이 파시즘을 향해 성장해 가는 추세 또한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노동자·민중은 어떻게 깨부술 수 있을까? 극우 정권에 맞서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또한 ‘민주’ 정권에 맞서서는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 세계적인 상황을 종합하면서, 윤석열 정권에 맞선 투쟁을 되돌아보고 이재명 정권에 맞선 투쟁의 방향을 모색해 보자. 1) 부르주아 민주주의 오늘날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경향 속에서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이 정권을 주고받고 있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그 대응방향을 올바로 수립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극우·파시즘을 그 개념적 정의에서부터 역사적 맥락까지 정확히 이해하는 게 필수적이다. 개념적으로 극우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적인 부정이라면, 파시즘은 전면적인 부정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정치형태로서, 자본가계급에게 실질적인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보장하되 외형상 사회구성원 전반에게 민주적 권리를 부여하는 정치형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는 보편적 참정권(보통선거권), 민주적 기본권(사상·표현·결사·집회의 자유), 노동3권(노동조합·교섭·파업), 사회적 기본권(적정노동·적정임금·산업안전·사회보험) 등을 들 수 있다. 2)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기본 정치형태가 아니다 흔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기본 정치형태로 인식되고 그렇게 주장된다. 그러한 인식과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존재해 왔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와 그 정치형태에 대한 중대한 오해다. 자본주의 역사와 현실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기본 정치형태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출발하지도 않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17~18세기, 영국·미국·프랑스 등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공화정의 형태로 자본주의 정치체제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 정치형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성인 남성 인구의 10%도 안 되는 자산가들(자본가+지주)만이 투표권을 갖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였다. 유럽과 북미에서 시작된 자본주의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전반으로 확장되면서 지구를 뒤덮는 체제가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수의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을 식민지·반식민지로 지배했다. 식민지·반식민지 자본주의에 적용된 정치형태 역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제국주의 권력의 직·간접 통치는 피억압 인민에게 민주적 권리를 박탈하는 다양한 유형의 전제적·권위주의적 정치형태로 나타났다. 세계 주요국의 보통선거권 도입년도를 살펴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보통선거권조차 대부분의 국가에서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형태로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별/성별 보통선거권 도입년도 <성인 남성 보통선거권 도입년도> <성인 여성 보통선거권 도입년도> 그리스 1844 뉴질랜드 1893 (피선거권1919) 프랑스 1848 (군인1945) 호주 1902 덴마크 1849 핀란드 1906 아르헨티나 1853 노르웨이 1913 미국 1856 (흑인1965) 덴마크 1915 스페인 1869 (단절1939~75) 러시아 1917 독일 1871 네덜란드 1917 뉴질랜드 1879 헝가리 1918 칠레 1888 (문맹1970) 폴란드 1918 브라질 1891 독일 1919 노르웨이 1898 스웨덴 1919 호주 1901 (원주민1965) 미국 1920 핀란드 1906 캐나다 1920 이란 1906 아일랜드 1923 스웨덴 1909 영국 1928 이탈리아 1912 스리랑카 1931 러시아 1917 브라질 1932 네덜란드 1917 스페인 1933 (단절1939~75) 멕시코 1917 태국 1933 폴란드 1918 필리핀 1937 헝가리 1918 레바논 1943 아일랜드 1918 프랑스 1944 영국 1918 이탈리아 1945 루마니아 1918 일본 1945 캐나다 1920 (원주민1960) 한국 1948 일본 1925 루마니아 1948 스리랑카 1931 칠레 1949 태국 1933 인도 1950 필리핀 1935 그리스 1952 레바논 1943 아르헨티나 1952 중국 1947 중국 1953 한국 1948 멕시코 1953 인도 1950 인도네시아 1955 파키스탄 1951 파키스탄 1956 인도네시아 1955 말레이시아 1957 말레이시아 1956 이란 1963 쿠웨이트 1962 포르투갈 1974 포르투갈 1974 페루 1979 페루 1979 미얀마 1990 미얀마 1990 남아공 1994 남아공 1994 쿠웨이트 2005 사우디 2005 부탄 2008 부탄 2008 사우디 2015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다수적 정치형태가 아니다. 한 국제연구기관이 발표한 <세계 민주주의 현황 2024 (Global Democracy Index 2024)>에 따르면, 세계 167개국 가운데 ‘온전한 민주주의’는 25개국(인구비중 6.6%), ‘결함 있는 민주주의’는 46개국(인구비중 38.4%)이다. 둘을 합쳐도 71개국(국가비중 42.5%, 인구비중 45.0%)에 불과하다. :root{ --sj-red:#c81d25; --sj-border:#e5e7eb; --sj-soft:#fafafa; --sj-ink:#111827; --sj-muted:#6b7280; } /* 공통 타이틀 */ .gd-title{ text-align:center; color:var(--sj-red); font-weight: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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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정치체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중국의 산업화가 권위주의 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자신들이 심각하게 오판했음을 깨달아야 했고, 미·중 패권대결을 전면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3)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투쟁의 성과물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왜 자본주의의 기본 정치형태가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에게 최선의 정치질서는 자본가들이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전횡할 수 있는 전제적 또는 과두지배적 정치형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기업에서 자본가들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을 보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치 영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도입한다는 것, 즉 사회구성원 전반에게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하지 않다면 굳이 하고 싶지 않은) 피곤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왜 어떻게 도입되었을까? 노동자계급의 엄청난 저항과 투쟁 때문이었다. 자본가계급이 왕과 귀족의 봉건제 정치질서를 타도할 때 주장했던 ‘자유와 평등’을 진정으로 실현하라고,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에게도 자유와 평등을 달라고 줄기차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여명기인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계급은 보통선거권, 노동조합 결성권과 파업권, 흑인노예 해방, 8시간 노동제, 여성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투쟁을 벌였다. 총파업과 봉기 수준의 투쟁도 수없이 많았다. 그 결과물이 보통선거권 도입에서부터 시작된 부르주아 민주주의였다. 4)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보장한다 그런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확고히 보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정치형태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사회의 대다수인 노동자·민중에게 보통선거권을 비롯한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사회의 극소수에 불과한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확고히 보장할 수 있을까? 첫째, 자본가계급은 지배계급으로서 압도적인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갖고 있으며, 이를 언론·학교·종교 등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가계급은 군대·경찰·사법·행정 등 폭력적 국가기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인적 네트워크, 관료적 재생산 체계 등을 통해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로는 자본주의 국가기구 가운데 매우 제한된 부분만을 바꿀 수 있으며, 자본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거대한 관료집단이 국가기구의 대부분을 주민에 의해 선출되거나 통제받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넷째,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자본가권력의 수호를 명시적·암묵적으로 전제하며, 만일 주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이것을 위협할 경우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와 폭력적 국가기구 모두 선출된 권력을 제압하고 심지어 전복하기 위해 합법성을 개의치 않고 전면전에 나서기 때문이다. 다섯째,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지역 단위 선거제도는 일반적으로 작업장을 토대로 형성되는 노동자계급의 힘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대중은 지역 단위 공간에서는 원자화되는 경향이 있고, 결국 부르주아 정치인들 가운데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일개 시민으로 전락한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혁명이 실패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멘셰비키와 1918~19년 독일혁명에서 사회민주당은 노동자혁명으로 전진하는 대신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멘셰비키는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별로 발전하지 않았기에 노동자혁명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의 개량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러시아의 멘셰비키는 실패했다. 소비에트가 볼셰비키 주도로 10월 노동자혁명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노동자권력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를 통해 작업장에 토대를 두면서도 세계혁명의 시야를 갖고 전국적으로 결집했다.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병사들 역시 소비에트를 통해 병영을 토대로 전국적으로 결집했다.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소비에트의 대표자들을 직접 선출하고 수시로 소환했다.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들과 무기를 장악한 병사들은 장교들이 지배하던 반동적 군대를 노동자·민중의 군대로 대체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제국주의 전쟁을 중단시키고, 피억압 민족에게 민족자결권을 보장했으며,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했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해방을 위한 조치들을 도입했으며, 산업을 국유화하고 계획경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멘셰비키와 달리 독일 사회민주당은 성공했다. 노동자혁명을 추구하던 세력들과 각 지역의 레테(독일판 소비에트)들을 극우 자유군단과 손잡고 하나하나 분쇄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도 이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노동자혁명을 분쇄한 뒤, 사회민주당 주도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됐다. 이 과정에서 원래 노동자혁명을 위한 투쟁 주체로서 노동자권력의 근간이 되고자 했던 노동자평의회(레테)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노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현장 협의기구로 변질되어 박제됐다. 6)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혁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는 노동자투쟁의 오랜 성과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리 및 노동조합·노동자정당 같은 노동자조직의 형태로 응축돼 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권력을 확고하게 보장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단 정립되고 나면, 대체로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유지를 선호한다.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권력 보장이라는 핵심 이익이 관철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제도적 개량이라는 환상을 잘 관리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전진하지 못하도록 묶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운동이 혁명을 향해 전진하는 것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 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보수주의(우파)와 자유주의(중도우파)라는 두 축의 경쟁과 대립을 활용하는 것이다. 보수주의가 노골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한다면, 자유주의는 외견상 개량을 앞세우면서 실제로는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한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끝없이 정권을 주고받으면서 노동자·민중을 적당히 분할하고 그 쳇바퀴 속으로 노동자·민중의 희망과 전망을 가두는 것, 바로 그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통해 노동자혁명을 가로막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7) 파시즘은 사활적 위기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했다 그런데 1920년대 이탈리아와 1930년대 독일에서 자본주의 위기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파시즘에 의존했다. 노동자혁명 직전까지 치달은 계급투쟁을 완전히 잠재우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억압을 획기적으로 강화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사활적 위기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이 때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 응축된 노동자투쟁의 성과들에 대한 전면 부정,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리의 전면 박탈과 노동조합·노동자정당 등 모든 노동자조직에 대한 전면 파괴를 뜻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위기가 폭발적으로 전개되면서 노동자혁명을 가로막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능이 매우 취약해지자, 자본가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가차 없이 버리고 파시즘이라는 정반대의 정치형태를 채택하고서 노동자혁명의 가능성을 진압한 것이었다. 독일의 나치당과 같은 파시즘 정당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과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나치당도 선거에 나섰고 선거를 통해서 집권했지만, 나치당의 중심에는 선거조직이 아니라 수십만 명의 무장 돌격대가 있었다. 나치당의 주된 기반은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대중이었고, 무장 돌격대의 근간은 갈 곳 없는 퇴역군인들이었다. 나치당은 독일이 처한 위기의 근원으로 유태인과 노동자운동을 지목하고 무장 돌격대의 조직적 폭력을 동원하여 노동자 집회와 노동조합 회관 등을 의도적으로 공격했다. 자신들이야말로 노동자운동을 제압하고 독일 자본주의를 구원할 유일한 대안임을 자본가계급과 소부르주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결국 자본가계급은 파시즘을 체제의 구원자로 선택했고, 생존의 희망을 찾아 절규하던 소부르주아 대중은 파시즘의 포로가 되어 노동자운동을 분쇄하는 망치로 활용되었다. 8)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북미에서는 전후호황을 토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만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진영 간의 세계제패를 향한 전면전이었는데, 독일·이탈리아·일본의 파시즘 진영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더 중요한 결과는 어마어마한 대량파괴와 대량살상을 통해 자본주의를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탈출시켰다는 점이었다. 과잉축적·과잉생산과 이윤율 하락이라는 누적된 모순을 상당 정도 털어낸 자본주의는 일시적으로 청년의 몸으로 돌아가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전후호황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이를 토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는 한동안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이 시기를 거치며 노동자 정치세력 가운데 개량주의를 뜻하는 중도좌파와 자본가 정치세력 가운데 자유주의를 뜻하는 중도우파가 ‘복지국가 자본주의’라는 전망을 공유하며 매우 가까워졌다. 과거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의 개량을 통해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했던 개량주의 세력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사실상 ‘복지국가 자본주의’로 대체했고, 노동자 정치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국민적(=몰계급적) 정치세력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에 개량주의(중도좌파)가 자유주의(중도우파)로 거의 수렴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는 ‘보수주의-자유주의’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 쌍이 ‘보수주의-개량주의’로 대체되었다. 9) 제3세계의 군사파시즘은 친미질서 구축과 국가주도 자본축적을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걸친 이른바 제3세계의 상황은 유럽·북미 지역과 많이 달랐다. 제국주의 강대국의 식민지·반식민지였던 제3세계 나라들은 세계적인 민족해방 투쟁의 성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속속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오랜 착취와 수탈 때문에 대부분 극심한 저개발 상태에 갇혀 있었다. 식민지·반식민지 시절의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토착 지배자들로 대체됐을 뿐, 기존의 전제적·권위주의적 정치형태가 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3세계 나라들 가운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립된 나라는 매우 드물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국력이 쇠퇴한 영국과 프랑스를 대신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제3세계 전반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력을 구축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재정렬한 자본주의 진영은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과 냉전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수많은 제3세계 나라들에서 강고한 친미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친미반공 쿠데타를 사주했다. 때로는 토착 군부가 먼저 쿠데타에 나서 미국의 지원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등장한 제3세계의 군사정권들은 대체로 군사파시즘의 정치형태를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의 군사파시즘은 1930년대 고전적인 파시즘과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전면 부정, 즉 노동자권리의 박탈과 노동자운동의 말살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하지만 고전적인 파시즘이 자본주의를 사활적 위기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혁명적 노동자운동을 진압하고 착취·억압을 획기적으로 강화한 것과 달리, 제3세계의 군사파시즘은 저개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가주도 자본축적을 위해 허약한 노동자운동조차 진압하며 착취·억압의 극대화를 추구했다. 또한 고전적인 파시즘이 몰락한 소부르주아 대중을 광적으로 동원하면서 무장 돌격대라는 물리력을 활용한 반면, 군사파시즘은 대중의 광적인 동원을 생략한 채 군부의 물리력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1961~1987년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한국의 군사파시즘은 이와 같은 제3세계 군사파시즘의 한 전형이었다. 10) 냉전 해체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 노동자·민중을 사회경제적으로 공격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197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가 다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면서, 유효수요를 확장하는 케인스주의 국가개입으로 경제위기를 예방·극복할 수 있다는 신화가 처참하게 깨졌다. 정리해고·비정규직화·임금삭감·복지축소 등으로 노동자를 공격하고 규제완화·감세·민영화 등으로 자본가에게 특혜를 줌으로써 자본의 이윤율을 노골적으로 제고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자본주의 위기를 타개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부상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처음 실행에 옮긴 것은 1970년대 칠레의 군사파시즘과 1980년대 영국·미국의 우파 정권이었다. 그런데 소련·동구의 몰락과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냉전이 해체되고 199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가 세계화와 결합되어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을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전면화한 것은 대부분 중도좌파·중도우파의 중도주의 정권들이었다. <1970~80년대 최초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실행한 정권들> 정권수반 소속정당 정권의 성격 칠레 피노체트 (1974~1990) 군부 군사파시즘 영국 대처 (1979~1990) 보수당 우파 미국 레이건 (1981~1989) 공화당 우파 <냉전해체 이후 1990~2000년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전면화한 정권들> 정권수반 소속정당 정권의 성격 미국 클린턴 (1993~2001) 민주당 중도우파 영국 블레어 (1997~2007) 노동당 중도좌파 프랑스 조스팽 (1997~2002) 사회당 중도좌파 독일 슈뢰더 (1998~2005) 사회민주당 중도좌파 칠레 타글레 (1994~2000) 에스코바르 (2000~2006) 기독민주당 무소속 (구 사회당) 중도우파 중도좌파 아르헨티나 메넴 (1989~1999) 데라루아 (1999~2001) 정의당 급진시민연합 중도우파 중도우파 브라질 카르도주 (1995~2002) 사회민주당 중도좌파 남아공 음베키 (1999~2008) ANC (공산당) 중도좌파 한국 김대중 (1998~2003) 민주당 중도우파 1990년대 중후반에 세계적으로 우파 정권과 군사파시즘이 퇴조하고 중도주의 정권이 대세가 된 것은 한편으로 냉전 해체라는 세계적인 지형변화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1970~80년대 우파 정권과 군사파시즘에 맞선 세계적인 저항과 투쟁들이 ‘절반의 승리’에 그친 까닭이었다. 그런데 민주화와 개량을 약속했던 중도주의 정권들은 (한국의 김대중 정권이 잘 보여주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재건하거나 도입하긴 했지만 사회경제적 개량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정반대였다. 중도주의 정권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민중을 사회경제적으로 거칠게 공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후호황 시기와 달리 자본주의가 다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고, 그런 자본주의를 구할 방법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애초에 자본가 정치세력이었던 중도우파(자유주의)는 물론이요, 노동자 정치세력에서 출발했던 중도좌파(개량주의) 또한 노동자·민중의 삶과 권리보다 자본주의의 위기 탈출을 우선시했다. 20세기 초 혁명 없이 개량의 축적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노선에서 출발했던 개량주의(사회민주주의)는, 20세기 중반 전후호황 시기를 거치며 사회주의 대신 개량 그 자체(복지국가 자본주의)를 목표로 하는 노선으로 바뀌었는데,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집행하면서 이제 개량마저 포기하고 기존의 개량조차 박탈하는 ‘개량 없는 개량주의’가 되었다. 11) 신개량주의의 파산 이후 최근 10여 년 극우 세력의 세계적인 약진 2008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모순을 폭발시켰다. 금융기관의 연쇄파산을 막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퍼부었다. 그 과정에서 폭증한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 공공부문과 사회복지를 대폭 삭감하는 가혹한 긴축정책이 펼쳐졌다. 이미 정리해고·비정규직화·임금삭감·복지축소라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휩쓸고 지나간 상황에서, 또한 선진국에서는 세계화에 따른 공장이동으로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 위에 덧붙여진 가혹한 긴축정책은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삶을 파탄냈다.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고통은 변화를 향한 강력한 정치적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부터 긴축정책까지 책임이 있는 기존의 집권블록(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 바깥에서 새로운 대안들이 생겨나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먼저 대중의 주목을 끈 것은 집권블록 왼쪽에서 등장한 이른바 신개량주의였다. 기존의 개량주의가 개량마저 포기하고 박탈하는 것에 맞서 개량이라는 목표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독일의 좌파당, 프랑스의 불복프랑스,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영국 노동당의 코빈, 미국 민주당의 샌더스 등이 이 범주에 포괄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연성 좌파정권 물결을 뜻하는 핑크타이드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개량주의는 노동자계급이 아닌 고학력 지식인층이라는 소부르주아 대중을 기반으로 했고, 자본주의 철폐를 추구하지 않는 등 이념적 지향도 매우 소심했다. 게다가 신개량주의의 대표격이던 그리스의 시리자가 2015년 집권한 뒤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의 압력에 굴복하여 긴축정책을 전면적으로 실행하면서, 세계적 차원에서 신개량주의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이후 지난 10여 년 세계 정치를 뒤흔든 것은 집권블록의 오른쪽에서 등장한 극우 세력이었다. 2016년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결정적인 신호였다.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의 핵심 구호는 보호주의와 이민자 추방이었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 기후위기 부정, 부정선거 음모론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말도 안 되는 거짓 대안을 내밀면서도, 많은 나라에서 극우 세력은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노동자·민중들 속에서 상당한 기반을 구축해 왔고, 희망을 잃어버린 청년들 속에서도 기반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최근 유럽 주요국에서 약진하는 극우 정당들> 대표 극우정당 현황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형제들 (FdI) 22년 9월 총선 1위(26.0%)로 집권: 멜로니(총리) 스웨덴 민주당 (SD) 22년 9월 총선 2위(20.5%) 스페인 목소리 (Vox) 23년 7월 총선 3위(12.4%) 네덜란드 자유당 (PVV) 23년 11월 총선 1위(23.5%): 연정배제 프랑스 국민연합 (RN) 24년 6월 총선 1차 1위(33.2%), 2차 3위(의석) 독일 독일을 위한 대안 (AfD) 25년 2월 총선 2위(20.8%) 영국 개혁당 (Reform UK) 25년 6월 여론조사 1위(29%) 12)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권력 주고받기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독일 나치당 같은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진 결과물이며, 몰락하는 대중의 광적인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극우 세력이 위기와 고통의 주범이라고 지목하는 대상은 외국, 이민자, 자유무역, 세계화, 국제기구, 좌파, 주류 언론, 기성 정치인 등 상당히 혼란스럽다. 나라마다 편차도 크다. 노동자운동을 핵심적으로 겨냥했던 고전적인 파시즘과 크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노동자운동이 상당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점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한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과 달리 무장 돌격대를 체계적으로 구축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위기 전개가 국가의 총력 개입 때문에 1930년대 대공황과 달리 대불황이라는 슬로우모션의 형태를 띠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자본주의 위기에 따른 노동자·민중의 고통이 극심하지만 일거에 파산하는 대신 장기화된 불안정에 시달리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갈 곳 없는 퇴역군인들이 별로 없다는 점도 중요한 변수다. 극우 세력이 아직까지는 노동자운동을 핵심적으로 겨냥하지 않는 점과도 연결돼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의 극우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부정하고 위협하는 지점까지는 나아가지만, 정권을 잡아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끝장내지 못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로 집권했다가 그 선거로 정권을 잃고 다시 그 선거로 정권을 되찾는다. 극우 정권이든, 그와 정권을 주고받는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의 ‘민주’ 정권이든, 그들이 시행하는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화와 관련해서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신자유주의와 긴축의 결합이 결국 그들 모두의 핵심 정책이다. 당연히 노동자·민중의 고통은 해결될 수 없고, 따라서 강한 환멸이 뒤따른다. 상대적으로 극우 정권에게는 파시즘 가능성에 대한 반발이 집중된다면, ‘민주’ 정권에게는 사회경제적 박탈에 대한 분노가 집중된다. 과거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 중도좌파-중도우파와 우파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정권을 주고받던 것과 매우 비슷하게 이제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와 극우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며 정권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쳇바퀴는 극우 세력에게 걸맞지 않다. 극우 세력은 ‘화끈한 해결’을 대중에게 약속했고, 실제로도 뭐가 됐든 화끈하게 저질러보려고 한다. 그러나 고전적인 파시즘 세력에게 ‘화끈한 해결’을 가능하게 했던 무장 돌격대가 오늘날의 극우 세력에게는 없다. 여기서 친위쿠데타를 통한 군사파시즘 도입이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위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밑자락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활용하면서 말이다. 2021년 1월 미국의 의사당 폭동을 사주할 때 트럼프는 군부를 동원하지 못했다. 하지만 2023년 1월 브라질에서의 폭동은 쿠데타 요구 시위와 노골적으로 결합됐으며, 실제로 보우소나루-국방부장관-해군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단행하려 했으나 육군총사령관의 거부로 실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25년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친위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으며, 특히 6월 로스엔젤레스의 이민자단속 항의시위에 주방위군과 해병대가 투입됐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친위쿠데타 자락 깔기로 인식했다. 2024년 한국에서 발생한 12·3 친위쿠데타도 이러한 세계적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2023년 브라질의 친위쿠데타도 2024년 한국의 친위쿠데타도 실패했다. 트럼프가 친위쿠데타에 나설 경우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2025년 6월 로스엔젤레스 군대 투입 직후 미국에서 500만 명이 반트럼프 시위에 나설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세계적으로 극우 세력이 파시즘으로 진화할 방안을 찾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친위쿠데타가 여의치 않으면, 극우 세력은 무장 돌격대를 부활시킬 방법이라도 찾아내려 할 수 있다.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권력 주고받기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민주’ 정권이 노동자·민중의 고통을 강화하는 만큼 극우 세력을 더욱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파시즘으로 진화하려는 극우 세력의 시도가 점점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13)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주고받기,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오늘날 극우 정권은 물론이요, 중도좌파-중도우파-우파의 ‘민주’ 정권 또한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안에서의 소소한 개량조차 제시하지 않으며 기왕에 주어진 작은 개량마저 박탈한다. 천문학적인 국가부채로 대표되는 극심한 자본주의 위기 앞에서, 신자유주의(정리해고·비정규직화·임금삭감·복지축소)와 긴축(공공부문·사회복지 삭감)을 결합한 정책 말고는 자본주의를 지탱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본가계급에게는 규제완화·감세·민영화의 특혜와 주식·부동산·디지털화폐 같은 금융수탈 기회가 끝없이 제공된다. 노동자계급은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 모두에 맞서, 또는 극우 세력과 ‘민주’ 세력 모두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희망은 노동자운동이 계급투쟁의 주체로 강력하게 발전하는 것이고 이를 중심으로 억압·차별받는 민중들이 폭넓게 결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민중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확고하게 견지하지 못하고 중도좌파·중도우파에게 계속해서 헛된 희망을 보내고 있다. 최근 미국 민주당 뉴욕시장 예비선거에서 조란 맘다니의 ‘돌풍’은 그런 헛된 희망이 전개되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다. 조란 맘다니는 (많은 한계가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진지하게 개량을 주장함으로써 청년 세대를 비롯한 노동자·민중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맘다니의 선거 캠페인은 그동안 노동자·민중의 삶을 파괴한 한 주역이었던 민주당의 틀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 조란 맘다니의 돌풍은 과거 샌더스 현상이 그러했듯이 민주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환멸을 새로운 희망으로 갈아치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 뒤 민주당 주류에 의해 체계적으로 진압당할 것이다. 그와 같은 돌풍은 민주당과 독립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전개될 때에만 진정한 태풍이 될 수 있다. 극우나 파시즘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운동이 중도좌파[1]·중도우파의 자본가세력과 연대·연합하는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또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다. 인민전선에 찬성하는 이들은 ‘더 많은 세력을 모을수록 극우·파시즘에 맞선 투쟁역량이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추구하는 방향과 자본가계급이 추구하는 방향은 정반대다. 노동자운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응축된 노동자의 권리와 조직을 방어하고 개량을 쟁취하며 자본주의 철폐로 전진하기 위해 극우·파시즘에 맞서 투쟁한다. 하지만 중도좌파·중도우파의 자본가세력은 자본주의 체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사수하면서 자신들이 착취와 억압의 주역으로 올라서기 위해 극우·파시즘에 반대한다. 이렇게 정반대의 지향을 가진 세력이 인민전선에 함께 모이면 투쟁역량은 오히려 약화된다. 중도좌파·중도우파의 자본가세력을 두렵게 할 정도의 폭발적인 투쟁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도록 노동자계급에게 족쇄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극우·파시즘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을 경우 이것을 제압할 유일한 힘은 노동자계급의 폭발적인 투쟁에서 나오는데, 인민전선은 그것을 정면으로 가로막는 것이다. 아직 극우·파시즘이 강하지 못할 경우에는 인민전선이 승리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등장하는 (중도좌파·중도우파가 중심이거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인민전선 정부는 1930년대 중후반 프랑스에서 보여주었듯이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추가로 공격함으로써 극우·파시즘이 더욱 강성해지고 결국 승리하도록 길을 닦게 된다. 2024년 프랑스의 불복프랑스(신개량주의)와 좌파들은 극우 국민전선의 약진에 맞서 집권시 신자유주의·긴축을 집행했던 사회당(중도좌파)과 신인민전선을 결성하고 총선에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극우 국민전선의 약진을 분쇄할 진정한 대안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역량을 건설하는 데서는 철저히 실패하고 있다. 모든 자본가세력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확고하게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그것은 소중한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자본주의 역사는 혁명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생략하고 소소한 개량을 축적함으로써 사회주의를 건설하거나 아니면 복지국가라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오늘날의 극심한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등장한 신개량주의는 개량주의가 100년에 걸쳐 전개한 진화의 과정을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압축해서 되풀이했다. 자본주의를 철폐하겠다는 혁명적 투쟁만이 이 극심한 위기의 시대에 개량을 지켜내고 조금이나마 개량을 확대함으로써 노동자·민중의 삶과 권리를 지켜낼 유일한 방법이다.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 모두에 맞서 혁명적 계급투쟁의 기세로 노동자운동을 강력하게 발전시키면서 이를 중심으로 억압·차별받는 민중들을 폭넓게 결집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의 힘을 기반으로 노동자정부를 건설해 낼 길이 열릴 것이다. 노동자정부는 자본주의 질서에 정면 도전하면서 사회적 필요를 위해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을 완전히 새롭게 조직해 나갈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권력을 아래로부터 구축하고 전면적인 민주적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껍데기뿐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대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해 낼 것이다. 이토록 발전한 사회적 생산력이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끝없는 고통으로 귀결되게 하는 계급적 착취를 철폐하고 또한 모든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일소함으로써 모두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다. 노동자운동은 자본주의 위기가 극심해진 결과 극우 정권과 ‘민주’ 정권의 권력 주고받기가 통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대체해 가고 있는 현 정세의 심각성[2]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총력전으로 임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구원자가 되고자 하는 극우 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거나 무장 돌격대 부활을 획책할 경우 노동자운동은 전면전으로 맞서야 한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응축된 노동자의 권리와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서다. 나아가 그러한 방어 투쟁으로부터 획득한 힘을 갖고 개량을 쟁취하고 자본주의 철폐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다.[3]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극우 세력의 파시즘적 시도에 맞선 투쟁 속에서 노동자운동은 ‘민주’ 세력과 철저히 독립성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에 맞선 투쟁 과정을 반성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노총 전반은 물론이요, 대부분의 노동자 정치세력 또한 ‘총파업으로 윤석열을 끝장내자’는 전면전의 기조를 일관되게 가져가지 못했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민주당과의 독립성 견지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한계와 오류를 짚어내면서 비판적 평가를 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극우에 맞선 투쟁은 민주당을 이롭게 할 뿐’이라며 친위쿠데타에 맞선 투쟁을 폄하·기피했는데, 이것은 인민전선에 대한 정당한 경계를 반영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동자운동의 사활이 걸린 투쟁을 회피했다는 점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당분간 이재명 정권에 맞선 투쟁이 한국 노동자운동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과거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집행하고 생존권을 공격한 김대중·노무현 정권, 문재인 정권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운동은 많은 한계와 오류를 노정했다. 그 결과 민주당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과 환멸이 민주당 정권을 집어삼킬 때 노동자운동은 그 대안이 되어 도약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당 정권의 침몰에 함께 휩쓸려 들어갔다. 다시 한 번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훨씬 더 강력해진 극우 정권의 등장을 보게 될 것이다. 민주노총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을 임명하고, 투쟁사업장을 하나둘 정리해 가고 있는 이재명 정권은 머지않아 이른바 ‘사회적 대화’를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나설 것이다. 노조법 2·3조 개정조차 그에 연동할 수 있다. 약간의 떡고물을 건네는 대신 노동자 스스로 구조조정에 동의하라고 강력한 압력을 가할 것이다. 설령 ‘사회적 합의’로 묶어세우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민주노총을 최대한 혼란에 빠뜨리고 소심한 요구 속에 가두는 것이 이재명 정권의 목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무엇을 목표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결국 노동자운동에게 제기되는 핵심은 이것이다. 소심한 요구를 둘러싸고 샅바싸움을 하며 이재명 정권을 견인한다면서 그 부속품으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전면적인 요구를 내걸고 이재명 정권에 맞선 대대적인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극심한 자본주의 위기를 헤쳐 나갈 노동자·민중의 진정한 대안으로 부상할 것인가? -------- .footnote-ref, .footnote-target { scroll-margin-top: 200px; color: #E60012; text-decoration: none; } .footnote-ref:hover, .footnote-target: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1] 중도좌파(개량주의)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100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 20세기 말 자본가 정치세력의 일부로 재편됐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같은 이념을 가진 개량주의 세력이 아직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음으로 인해 노동자 정치세력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범국민적(=몰계급적=소부르주아적) 정치세력으로 변질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2] 현 정세의 다른 측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 대량학살,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스라엘·미국-이란 전쟁, 세계 각국의 경쟁적인 군비확장으로 표현되고 있는, 대량파괴와 대량학살의 대규모 전쟁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다. 사회의 지속가능성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 위기와 사회재생산 위기도 현 정세의 또 다른 측면이다. [3]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높게 솟구치는 상황에서 노동자투쟁의 목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제한하는 것은 노동자혁명을 가로막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 역량을 지켜내고 성장시켜 가는 과정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확산시켜 내기 위한 투쟁이 매우 필수적이고 중요하다.2025-08-12 | 조회 9,189 -
[사회주의 기초학습#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는 착취와 차별, 억압을 일소하고,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상이었다. 인간해방 세상을 꿈꾸며 투쟁하려는 이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도,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계급투쟁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짜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기 어렵다. 역사의 굴절로 인해, 스스로가 '사회주의'라 주장하는 가짜 사회주의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편에는 반혁명으로 노동자국가를 파괴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된 소련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 칭한 스탈린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중국특색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등 다양한 스탈린주의의 변종은 억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포장하면서, 사회주의를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자기해방 사상에서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수사적 도구로 바꿔버렸다.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찬성하고 노동자혁명을 파괴한 개량주의자들이 있다. 오늘날 전통적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지배계급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사회주의'와 뒤섞어버린다.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다시 불러왔다. 위기와 전쟁에 맞선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지만, 계급투쟁의 사상인 사회주의에 대한 정돈된 지식을 얻기는 너무나 어렵다. 위기와 전쟁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뒤엎기 위해,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의 혼란을 걷어내고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함께 배우고, 함께 세상을 바꾸는 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해 '사회주의 기초학습' 시리즈를 연재한다. 인간의 생존 방식과 계급의 발생 2019년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야생 호랑이가 민가로 내려와 사람을 공격했다. 그러자 주민 십수 명이 대나무 장대를 들고 쫓아가 호랑이를 잡아 죽였다. 총이 아니라 고작 막대기로 말이다. 물론 이는 인도에서 현행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다. 법을 떠나 맹수가 인간을 공격한 까닭은 인간이 무분별한 개발로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뉴스는 사람이라는 생물 종(種)의 생존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력으로 따지면 사람은 범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한 존재지만, 집단적 협력을 통해 다른 종(種)을 사냥하며 생존경쟁에서 우위에 선 것이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어느 강연에서 인류 문명의 진정한 증거는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대퇴골은 골반과 무릎 사이의 넙다리뼈로, 대퇴골이 부러지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즉 치유된 대퇴골은 누군가 부상을 입은 사람을 돌보고 협력했다는 증거다. 인류 역사는 바로 이 집단적 협력으로부터 태동한다. 인류는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정한 사회조직을 형성해야 했다. 인류 최초의 사회조직은 혈족이다. 인류학, 고고학의 연구 성과들은 혈족에 기반한 사회가 평등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인류가 유랑 생활 대신 정주 생활을 시작하고, 인구 증가로 사회집단의 규모가 커진 이후에도 평등한 사회체제는 한동안 지속됐다. 튀르키예의 차탈회위크는 중앙아나톨리아 지역에 있는 신석기시대 초기 도시 유적이다. 대략 기원전 7500년에서 기원전 5700년 사이에 존재했다. 인구 규모는 5,000~7,000명, 전성기에는 1만 명까지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사회적 혹은 경제적 서열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개별적 부의 축적, 사유재산의 증거도 없으며, 유물에도 성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잉여생산물이 출현하고, 분배해야 하는 부의 규모가 증대하면서 인류 사회에는 계급이 발생하고 여성 차별이 시작된다. 잉여생산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는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타인의 노동에 의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연구에 따르면 계급의 발생과 여성 차별의 시작은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경로만을 보인 것은 아니다. 여성 억압의 기원에 대해 누군가는 정주 생활에서 아이를 더 많이 출산하는 집단의 생존 확률이 높았으므로 여성을 생산 업무에서 점차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랑생활을 하던 수렵‧채집 경제의 시대에는 여성이 한 명의 유아기 아이만 양육하도록 출산을 억제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른 학자는 주요 농업 도구가 쟁기로 대체되고 농사에 관개시설을 활용하는 등 근력이 요구되는 중농업이 발전하면서 남성이 주도적 지위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본다. 어쨌건 계급과 여성 차별의 발생을 동시대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이다. 처음에는 평등한 관계 위에 공동체의 집단노동을 이끌었던 지혜로운 지도자는, 이제 잉여생산물을 통제하고 세습하는 특권 계급으로 등장하게 된다. 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폴리네시아 [1] 사회를 톺아보며 인간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발전 형태를 보이는지를 설명한다. 폴리네시아 지역은 사회공동체 간에 교류가 드물고, 현격할 정도로 자연환경의 차이를 보이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제국에서부터 단순한 촌락에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회상을 보인다. 사회 간 발달 수준의 차이는 식량, 가축의 생산, 기후 등 자연환경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추장사회의 추장이 지배계급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추장사회에서 가장 뚜렷한 경제적 특징은 무리나 부족처럼 오로지 호혜적인 교환에만 의존하는 형태(A가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B도 자신에게 가치가 비슷한 선물을 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B에게 어떤 선물을 주는 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 간단한 예를 들자면 어떤 추장이 수확기에 그 추장사회의 모든 농경민에게서 밀을 거둬들인 후 모두에게 잔치를 베풀어 빵을 먹이거나 그 밀을 저장해두었다가 수확기와 수확기 사이에 조금씩 다시 나눠주는 식이다. 평민들에게서 받은 물품 중 많은 양을 그들에게 재분배하지 않고 추장의 계보나 기능인들이 차지하고 소비한다면 그 같은 재분배는 공물이 되며 이것은 추장사회에서 처음 나타난 조세의 선행 형태였다. 추장들은 평민에게서 물품만 거둔 것이 아니라 공공 토목공사를 위한 노동력도 징발했다. …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들에서는 추장의 지위가 세습적이라는 점 이외에는 추장사회가 실질적으로 대인이 있는 부족사회와 비슷했다. 추장의 오두막집도 다른 오두막집과 똑같았고 관료나 공공 토목공사도 없었다. 추장은 거둬들인 물품 대부분을 평민들에게 재분배했고 토지는 공동체 전체가 관리했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에서도 가장 큰 섬(하와이, 타히티, 퉁가 등)에서는 장식품만 보아도 추장을 금방 식별할 수 있었고 공공 토목공사는 노동력을 대량 동원해 진행되었다. 공물은 대부분 추장이 차지했고 토지도 모두 추장이 관리했다.” 이처럼 잉여생산물의 규모가 커질수록, 과거 공동체의 재산을 관리할 뿐이던 추장은 이제 잉여생산물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지배계급으로 변신하게 된다. 국가의 출현과 평등을 향한 투쟁 2~300만 년에 이르는 인류의 장구한 역사를 선사(先史) 시대와 역사(歷史) 시대로 구분하는 기준점은 국가의 등장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5,500여 년 전에, 중국과 안데스에서 2,000여 년 전에 최초의 국가가 출현했다. 잉여생산물과 공동체의 집단노동을 통제하는 지배계급은 이제 훨씬 복잡한 사회조직인 국가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유지해 나간다. 재래드 다이아몬드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생산물을 빼앗아 생활하는 정치를 ‘도둑정치’라 불렀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네 가지 공통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첫째, 대중을 무장해제하고 엘리트 계급을 무장한다. 둘째, 거둬들인 공물을 대중이 좋아하는 곳에 재분배한다. 셋째,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폭력을 억제함으로써 치안을 확보한다. 넷째, 도둑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구성한다. 이런 식으로 지배 질서의 정당성을 확보해 나간 국가 체계에선 점차 기존의 평등주의적 사회관계가 소멸해 간다. 물론 초기 국가에선 아직도 평등했던 부족사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옛날 부여의 습속에 가뭄이 들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리고, 혹 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三國志』)는 기록은 과거 평등했던 농업공동체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왕이란 공동체의 농업경제를 지휘하는 지도자이므로, 지도력의 부족으로 농사에 실패했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될수록 이제 계급 질서는 확고해진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고대광실(高大廣室)에서 비단옷을 입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지만, 누군가는 오두막에서 태어나 헐벗은 채 주린 배를 채우자면 쉬지 않고 중노동에 종사해야 한다. 고대의 철학이나 종교는 바로 이 계급적 격차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고대 국가로 자리 잡던 한반도의 삼국이 앞다퉈 불교를 수용한 이유가 이것이다. 불교는 현세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불평등한 이유를 전세의 업(業)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윤회(輪廻) 사상을 통해 피지배계급도 현세의 괴로움을 내세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배계급의 입맛에 맞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종교와 이데올로기로도 계급 적대의 적나라한 모순을 감출 수 없는 국면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민중들 속에서 지배계급에 맞서 평등을 주창하며 사회를 뒤엎으려 했던 시도는 수없이 반복되었다. 기원전 209년 진(秦)나라에서 농민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은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라고 외쳤다. 신성한 혈통을 들먹이며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려던 지배계급에 맞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던가?”라며 맞선 것이다. 1198년 고려에서 노비 반란을 주동했던 만적 또한 이 말을 그대로 반복했는데(“將相寧有種乎!”), 이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위 구호가 민중들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기나긴 인류 역사에서 계급과 국가가 출현한 시기는 찰나에 불과하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계급사회는 결코 인류의 본성이 아니었기에, 계급사회의 역사 내내 인류는 평등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보여왔다. 미륵신앙과 같은 종교적 형태, 정감록과 같은 주술적 형태로 평등사회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됐던 일이다. 이중혁명(산업혁명, 부르주아혁명)과 자본주의 역사 속 계급사회는 다양한 발전 형태를 취하게 된다. 우리가 이 학습 과정에서 다루는 계급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며, 우리가 주장하는 사회주의 역시 바로 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운동을 가리킨다. 망이‧망소이, 만적, 동학농민군의 운동은 평등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로소 등장한 것이므로, 이제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했던 이 과정을 과감히 요약하자면 이른바 이중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 산업혁명과 부르주아혁명이 그것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GDP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던 중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했다. 이것은 우연이 결합한 역설적 현상이다. 청나라는 1741년 약 1억 4,300만 명이던 인구가 1851년 약 4억 3,200만 명으로 세 배나 증가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다스렸던 강건성세(康乾盛世, 1661~1795년)가 이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 증가는 역설적으로 부정적 효과를 초래했는데, 생산과정에서 생산기술의 혁신보다는 노동력의 추가 투입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기술 발전과 혁신 없이 노동생산성이 정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 17~18세기 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 신대륙에서의 대규모 귀금속 유입 등이 불러온 상업의 거대한 발전, 토지 소유를 집중시키며 농민을 토지에서 쫓아냈던 인클로저 운동, 가내공업의 전국적 발전 등이 연달아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전근대 농업경제에서 근대 자본주의 경제로의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 =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지극히 파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G. D. H. 콜이 지적했듯이 “산업혁명이란 오랜 경제발전 과정의 결과”를 말한다.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넓은 시장이 새로 생기고 임금노동력이 이용 가능해졌을 때) 필연적으로 위대한 기술의 발명”이 이어졌다. 증기기관, 철도 등 “수많은 위대한 발명은 시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높은 이윤을 올릴 수 있는 생산이 유망해지자 많은 사람이 상품 생산량을 늘리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 몰두했기에 탄생”한 것이었다.[3] 다른 한편, 자본주의가 굴러가자면 자유롭게 자기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존재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자유롭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다. 하나는 일체의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 질서로 묶인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자유롭게 자기 의사에 따라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동자계급은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직접 생산자계급이던 농민층이 전화한 것인데, 이들이 노동자계급이 되자면 기존의 신분 질서가 타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민중을 봉건 체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 역사적 대사건은 바로 18세기의 프랑스대혁명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자본가계급은 봉건제의 지배계급인 대토지 소유자들의 지배 질서를 분쇄했고, 이들에게 속박돼 있던 민중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이어진 일련의 부르주아혁명 과정에서, 자본가계급은 민중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 자신들이 만들 세상은 천부인권, 자유와 평등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일 것이라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자본가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계의 실상은 그들의 약속과 달랐다. 그들이 얘기하던 인권의 핵심은 소유권이었으며, 자유와 평등은 철저하게 그들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란 것이 곧바로 드러났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갈리는 세상이건만 ‘기회의 평등’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고 떠들어대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중혁명 직후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삶에 대해선 수많은 사료가 남아있다. 노동자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던 악랄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계약의 자유’라는 허울 아래 거리낌 없이 행해졌다. 지금도 말을 못 잇게 하는 대목은 참혹했던 아동노동의 실태다. 다음은 영국 의회에 제출됐던 공장감독관의 보고서다. “그들 공장주 가운데 일부는 12~15세의 소년 5명을 금요일 오전 6시부터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4시까지 식사시간과 심야에 1시간의 수면시간만 주고 하나도 쉬게 하지 않은 채 일을 시켰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넝마 구덩이’라고불러도 좋을 만한 굴 속에서 휴식 없이 30시간의 노동을해야 했는데, 그곳은 양모 헝겊 조각을 해체하는 곳이어서 공기 중에 양모 보푸라기와 먼지 등이 가득차있기 때문에 성인 노동자라도 자신의 폐를 보호하기 위해서 늘 수건을 입에 대고 있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 자신들은 넓은 자비심으로 불쌍한 아이들에게 4시간의 수면을 허락했으나 아이들은 한사코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장감독관 보고서, 1860년 10월 31일 “9세 소년 윌리엄 우드는 “노동을 시작한 것이 7세 10개월부터였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에 “틀을 운반하는”(틀 속에 들어 있는 완성된 물건을 건조실까지 운반하고 빈 틀을 갖고 다시 돌아온다)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평일에는 매일 아침 6시에 와서 밤 9시쯤 일을 마친다. “나는 평일에는 매일 밤 9시까지 노동을 합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 7, 8주 동안은 그랬습니다.” 이처럼 7세 어린이에게 15시간의 노동이 부여되고 있다!”— 아동노동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863년 “이 산업(성냥 제조업)의 노동자 절반은 13세 미만의 어린이와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 … 1863년 화이트 위원이 심문한 증인 가운데 270명은 18세 미만이었고, 40명은 10세 미만이었으며, 10명은 겨우 8세, 그리고 5명은 겨우 6세였다. … 만일 단테가 이러한 공장들을 보았더라면, 그가 상상한 참혹하기 짝이 없는 지옥의 모습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동노동조사위원회 제1차 보고서, 1863년 자본주의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의 조류들 노동자들이 비참한 노동조건에 신음하는 동안 자본가계급은 이를 외면한 채 대공업이 창출한 막대한 부를 독점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어린 시절 그저 재미있게 읽었을 『셜록 홈즈』 시리즈나 『80일 간의 세계일주』 같은 19세기 소설을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이 생명력을 소진하는 대가로, 부르주아 계급은 천연덕스럽게 근대 문명이 발전시킨 기술을 향유하며 인생을 만끽했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초기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했고 평등주의적 지향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의 끔찍한 불평등을 넘어서려는 운동을 통틀어 사회주의라 부를 수 있다. 엥겔스가 말했듯이 “현대 사회주의는 내용으로 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유산자와 무산자, 임금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계급 대립을,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에서 지배적인 무정부 상태를 목도한 산물”[4]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자들 중 엥겔스가 높게 평가했던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 영국의 오언이다. (푸리에는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여성해방의 정도가 전반적 해방의 자연적 척도”라는 역사적인 명제를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프랑스의 프루동 역시 초기 사회주의자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오언(Robert Owen)의 활동만 잠깐 소개하기로 하자. 오언은 1800년부터 1829년까지 뉴래너크 방적 공장을 통해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인물이다. 뉴래너크는 하루에 10.5시간밖에 노동하지 않았으며(동시대 방적 공장의 노동시간은 13~14시간이었다), 휴업 기간에도 임금 전액이 지불됐다. 오언은 2천 명 남짓한 뉴래너크 노동자들에게 집을 싼값으로 빌려줬고, 질병과 사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는 의료혜택이 가도록 배려했다. 저축은행을 설립해 노동자들의 저금을 관리했으며, 생활용품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노동자들에게 염가에 판매했다. 그럼에도 이 기업은 가치가 배 이상 증가하며 투자자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뉴래너크의 성공에 고무된 오언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기 전 재산을 들여 ‘커뮤니티(Community)’라고 부른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했으나 이 실험은 처참하게 실패하며 막을 내린다. 오언의 이러한 시도는 전태일이 구상했던 모범업체 ‘태일피복’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전태일 열사는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하는 모범업체를 운영해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언의 실패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개별 자본가의 자선 계획만으로는 구원될 수 없는 체제다. 개별 자본가들은 서로 간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역사 속으로 도태되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언류의 초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미성숙한 발전과 미성숙한 계급 상황을 반영한 머릿속 개똥철학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들에겐 “사회적 활동 대신에 그들의 개인적 발명 활동이, 해방의 역사적 조건들 대신에 환상적 조건들이,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조직화 대신에 [그들에 의해] 특별히 고안된 사회조직”이 해결책이다. 따라서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모든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 채 “부르주아의 박애적 심성과 돈 주머니에 호소”할 뿐이다.[5]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불평등이,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격하고 여기에 주목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투쟁은 가혹한 탄압 앞에 패배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지금은 자본가들도 헌법으로 보장하는 노동3권이 자본주의 초기에는 모조리 불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파업이 ‘되지도 않을 일에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일’이라며 노동자들을 훈계하려 들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난하는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경제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 영국의 오웬주의자들)은 다음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단결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 당신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다. 당신들의 임금은 언제나 요구된 일손들과 공급된 일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당신들이 결국 단결을 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 당신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역시 노동자들일 것이며 고용주들은 항상 고용주들일 것이다.”[6]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달랐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낼 가능성과 희망을 보았다.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며, 투쟁을 통해 단련되는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힘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원동력이다. “사람들은 질문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수단이 전혀 무익하다는 것이 명약관화한 그러한 경우들에도 파업을 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서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에 맞서서 그리고 이러한 임금 삭감의 필연성에 맞서서 저항해야만 하기 때문이며, 인간으로서 노동자들은 상황에 자신들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자신들에게, 인간들에게 맞추어져야 한다고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7]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 그리고 오늘 교육의 주제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러한 혁명적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던 것일까? 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기존의 초기 사회주의 사상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자신들의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부를 만큼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일까? 위에서 말했듯이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를 넘어서려는 모든 운동을 가리키지만, 현재까지 정치적 실체를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이라면 그 역사적 연원은 오로지 위대한 사상가 마르크스에게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정립한 견해와 학설의 체계를 가리킨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가 19세기의 선진적인 3대 사상 조류를 계승하여 천재적으로 완성한 것이라 평가했다.[8] 이 3대 사상 조류란 독일 고전철학, 영국의 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말한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철학 사상(세계관), 경제학(자본주의 경제 분석), 사회주의 정치 이론(노동자 계급투쟁의 정치)이라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가 진행하는 ‘세상을 변혁하는 사회주의 기초학습’ 12강은 위 세 영역을 짜임새 있게 살펴보게 된다. 먼저 오늘 1강에서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살펴본다. 곧이어 2강 ‘자본주의의 원리 파헤치기’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다루게 되며, 3강 ‘사회주의로 가는 길: 개량인가, 혁명인가?’은 사회주의 정치 이론을 다루게 된다. 이어지는 강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실제 역사와 현실의 복잡한 정세를 분석하고 대응해 나가는 과정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역사와 전략’, ‘한국노동자운동사 (1), (2)’, ‘사회주의 바로 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기후위기와 민주적 계획경제’, ‘자본주의 역사 꿰뚫어보기 (1), (2)’, ‘오늘날 세계정세: 위기, 전쟁, 혁명의 시대’,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 노선’이 그것이다. 이제 오늘의 주제에 집중해 보자. 마르크스의 철학과 세계관을 학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철학과 세계관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틀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철학과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진다. 계급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배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즉 아직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은 이유는 피지배계급의 대다수가 지배계급의 사상을 자신들을 위한 사상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 자본주의’라는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본을 위한 자유’가 자신들을 위한 자유라고 착각한다. 계급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사회의 지배적 물질적 힘인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힘”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제 마음대로 처분하는 계급은 이로써 동시에 정신적 생산수단도 제 마음대로 처분하며, 그 결과 정신적 생산수단이 박탈된 계급의 사상들은 이로써 동시에 대체로 지배계급에 종속”되기 마련이다.[9] 따라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학습함으로써 주어진 현실에 대해 지배계급의 관점으로 오염된 그릇된 해석을 넘어 올바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계승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천재적 사상가였다 하여,[10] 마르크스의 언술 하나하나가 금과옥조로서 불가침의 권위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은 그의 방법론을 사용해 우리 시대에 주어진 현실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여 창의적으로 올바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란 마르크스의 개별적 주장 하나하나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혁명적 방법론을 계승하는 것이라던 루카치의 다음 주장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해 마르크스의 개별적 진술들 전부가 사실적으로 부정확하다는 것이 이론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고‒비록 인정할 수는 없지만‒가정하더라도, 진지한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누구나 이 모든 새로운 성과들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고 마르크스의 개별적 주장 모두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성(Orthodoxie)을 한순간이라도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연구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이런저런 주장에 대한 ‘믿음’이나 어떤 ‘신성한’ 책의 해석을 뜻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에서의 정통성이란 오론지 방법에만 관련된다. 정통성은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 속에서 올바른 연구 방법이 발견되었으며, 이 방법은 오직 그 창시자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신(Sinn)에 따라서만 확장‧확대‧심화될 수 있다는 과학적 확신이다. 또한 그것은 그 방법을 극복하거나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천박화‧진부함‧절충주의로 귀착되어 왔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과학적 확신이다.[11]” 헤겔좌파 마르크스와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1818년에 태어났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독창적 견해를 정립한 시기는 1844년 무렵이다. 이전까지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에 속한 철학자였다. 마르크스는 1873년 집필된 『자본』 제1권 제2판의 후기에서 “독일의 식자층 사이에서 큰소리깨나 치는 돼먹지 않게 시건방지고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 헤겔을 마치 ‘죽은 개’처럼 다루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오히려 나는 공개적으로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천명하고 가치론에 관한 장에서는 고의적으로 여러 곳에서 그의 고유한 표현방식들을 따라 사용”했다고 썼다. 이처럼 헤겔 철학은 마르크스 사상의 연원이므로, 그의 사상을 올곧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독일의 상황과 헤겔 철학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에야 독일이 내로라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지만, 19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독일 자본주의는 영국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한참 뒤떨어진 후발 국가였다. 1848년 3월 독일혁명의 패배는 당시 독일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깃발을 내걸었던 3월 혁명의 목표는 봉건주의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자본주의 발전이 더딘 상태였다. 3월 혁명 전야를 묘사하면서 엥겔스는 “독일 부르주아지의 부와 결집도는 프랑스나 영국의 부르주아지의 그것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으며, “독일의 노동자 계급은 그 사회적, 정치적 발전으로 볼 때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 계급에 비해 엄청나게 뒤처진 상태”에 있었다고 평가했다.[12] 이런 상태에서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한편으로는 반동적 봉건 세력과 맞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혁명이 완성될 경우 노동자계급이 주도권을 잡으리라 경계했다. 이쪽도 저쪽도 선택하지 못한 부르주아지의 갈팡질팡이 1848년 혁명의 패배를 낳았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844년 마르크스는 독일의 상태를 두고 “우리의 정치적 현재의 부정조차도 이미 현대 민족들의 역사적 헛간 속에서는 먼지투성이의 사실로서 발견된다”고 썼다. 남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이후의 역사를 모색하는 마당에 독일은 아직 봉건 체제도 청산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직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못했던 탓에(정치적 비판의 자유가 제한돼 있으므로) 독일에서는 봉건 체제에 대한 비판이 철학적 투쟁의 형태로 전개된다. “선진 민족들의 경우에는 현대적 국가 상태와의 실천적 반목인 것이, 이 상태 자체가 부재한 독일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상태의 철학적 반영과의 비판적 반목이다.”[13] 당시 철학적 투쟁의 장(場)이 되었던 것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국가 철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헤겔 철학이다. 헤겔의 다음과 같은 명제는 헤겔 철학이 가장 보수적으로도, 가장 급진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적인 모든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것은 현실적이다.” 먼저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므로, 현존하는 독일의 봉건 체제는 그 나름의 존립 근거와 합리성을 갖춘 게 된다. 정치적 보수주의의 근거인 셈이다. 헤겔 철학을 이렇게 해석했던 것이 헤겔 우파다. 반면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으로 지양(止揚, Aufhebung)되어야 하므로, 헤겔 철학은 공화주의라는 근대 이성의 실현을 위해 분투하는 급진 이념의 밑바탕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헤겔 좌파다. 엥겔스는 “인간의 머릿속에서 이성적인 모든 것은, 비록 현존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과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현실적인 것이 되기로 정해져 있다. … 헤겔 철학의 진정한 의미와 혁명적 성격은,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모든 성과가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확실히 끝장내버린 데 있다”[14]고 썼다. 독일에서의 철학 투쟁은 주요하게는 종교 비판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봉건 체제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종교였기 때문이다. 헤겔 좌파의 상당수는 종교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실천적 필요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유물론 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 마르크스를 비롯한 헤겔 좌파에게 엄청난 열광을 불러일으켰던 저작이 출현한다. 1841년 포이에르바하가 쓴 『기독교의 본질』이 그것이다. 엥겔스는 “누구든 이 책의 해방 효과를 생각해 보려면 이 효과를 몸소 체험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열광했다. 우리는 모든 한순간에 포이에르바하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포에이르바하의 작업이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기초로 해소한 데에 그 요체가 있다”고 평가했다.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로 구성된 신성 가족이란 “세속적 기초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위로 올라가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고정”시킨 것을 뜻한다.[15] 즉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 철학이란 무엇인가? 엥겔스는 철학의 중대한 근본 문제가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자연(외부 세계)에 대한 정신(의식)의 관계이다. 엥겔스는 자연에 대해 정신이 본원적이라고 주장한 철학자들을 관념론자, 반면 자연을 본원적인 것으로 여긴 철학자들을 유물론자라고 구별했다.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에서 주요한 논제인 인식론에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인간의 감각‧경험은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외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점 말이다. 예컨대 18세기 영국의 관념론자 버클리를 보자. 버클리는 외부 세계라는 것은 전혀 실재하지 않으며, 설령 실재한다 해도 인간은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실존하는 모든 것‒우리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오직 정신과 그 속의 관념들뿐이다.” 즉 버클리에게 감각 밖의 외부 사물은 “관념의 집합”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것이란 지각되는 것이므로, 감각과 경험이 사라지면 외부 사물의 실재도 사라진다. 그럼에도 인간의 감각 경험이 질서 정연하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은 신(神) 때문이다. (버클리는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다.) 신은 당신의 경험 계열과 나의 경험 계열을 서로 상관관계가 있도록 함으로써 예측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은 파국을 막기 위해 신으로 도피하게 된다. 그러나 유물론자에게 감각과 경험, 사유의 형식은 그 자체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사유’와 ‘의식’이 외부 존재와 대립해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정한다. 헤겔 역시 받아들였던, 칸트의 오성(悟性)이 가진 논리적 범주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사유와 의식은 인간의 두뇌의 생산물”이며 “인간 자체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이 환경과 함께 발전해 온 자연의 생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감각, 경험, 사유 등의 “원리들은 연구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최종적 결과이다 ; 원리들은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추상되는 것이다 ; 자연과 인간계가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및 역사와 일치하는 한에서만 원리들은 올바른 것으로 된다. 이것이 사태에 대한 단 하나의 유물론적 파악”이다.[16] 좀 뜬구름 잡는 얘기 같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는 세계 축구의 수준에 한참 뒤처져 있었다. 당시 축구 전문가랍시고 누군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매번 강조하는 말이 정신력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기술은 좀 달리지만 투지와 정신력으로 강팀과의 전력 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2년 히딩크의 진단은 달랐다.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괜찮은데 체력이 떨어지고, 이 때문에 경기 고비마다 정신적으로 위축된다는 진단이었다. 이후 히딩크는 혹독한 체력 훈련을 통해 정신력이 물질적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불패의 명장 이순신의 연전연승(連戰連勝)은 오로지 그의 영용한 지도력 때문인가? 물론 이순신 개인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빼놓고 연승의 비결을 말할 순 없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 해안에 최적화된 판옥선과 함포 사격술이 압도적 승리의 토대였다 보는 것이 유물론적 견해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드라마틱한 성장은 한국민들의 근면과 성실성 때문인가? 물론 입신양명을 향한 유교문화의 특성을 간과할 수 없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쇼윈도 자본주의’로서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막대한 경제원조가 토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유물론적 인식이다.[17] 이 밖에도 비슷한 예는 무한히 열거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유물론적 세계관과 관념론적 세계관이 가장 격렬히 충돌하는 공간은 종교의 영역이다. 아무리 진보적 종교라 하더라도, 수미일관한 유물론적 세계관은 결코 종교와 양립할 수 없다.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세력의 태반이 반공 기독교 교인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18] 그러나 이 말이 곧바로 유물론자들은 종교를 탄압의 대상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종교란 그 효용을 다 하는 순간(인간이 자기 소외를 극복하고 종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 사멸할 수밖에 없는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유물론자는 종교를 낳은 물질적 토대를 변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으로 풀어보는 철학사 더 나아가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적대적인 계급사회에서 철학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철학의 두 근본 경향인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으로 나타난다는 것, 이 두 경향은 각각 당대의 진보적인 계급과 반동적인 계급의 이해를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애당초 철학이 계급 적대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서양철학의 연원인 고대 그리스 사회, 동양철학의 연원인 춘추전국시대 모두 국가의 등장 이후 계급 모순을 정당화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한 시기였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해, 여기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조선의 유학(儒學)을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물질적 존재보다 정신적 존재가 근원적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긍정한 최초의 인물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와 대립했던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던 세력이다. 기원전 5세기 소피스트는 하층민을 교육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직업적 교사 집단을 뜻했다. 이들은 체계적인 사상은 없었지만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견지했으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대중 교육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맞서 아테네 명문 귀족의 이익을 대변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란 소피스트들이 흔하게 얘기하는 현상적 진리가 아니라,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여야 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상을 완성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얘기했던 일반 민중의 의견을 ‘독사(doxa)’, 즉 불확실하고 거짓된 판단력으로 폄하했다. 플라톤은 현실에 존재하는 개별 사물은 이데아의 모방(미메시스, mimesis)이거나 이데아의 성질을 나눠 갖는 것(메텍시스, methexis)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은 원래 이데아를 알고 있었으나 신체와 결합하고 경험적인 사물을 접하면서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관념론은 특히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적 자연 철학과 대립했다. 데모크리토스에게 감각적 지각이란 외부 대상(원자들의 미세한 껍질들)이라는 물리적 근거에 의해 설명된다. 하층 민중들의 이해를 대변했던 소피스트나 자연 철학자들과 달리, 플라톤이 철인(哲人)정치라는 엘리트주의를 제창한 것은 그의 철학적 관념론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주자(朱子)의 교의를 받아들인 조선의 성리학 역시 기본적으로 관념론 철학에 해당한다. 성리학은 세계의 근원을 정신적 실체인 리(理)로 보았다. 이에 따라 모든 봉건적 계급 질서는 천리(天理)를 표현한 것이 된다. 이를테면 정도전은 “도(道)란 것은 이(理)이니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기(器)란 것은 물(物)이니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다. 대개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와서 물(物)마다 있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나 그에 해당되지 않음이 없다. 즉 심신(心身)에는 심신의 도가 있어서 가까이는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에서부터 멀리는 천지만물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도가 있지 않음이 없다.”고 했다.[19] 이렇게 봉건 지배 질서를 옹호했던 관념론에 맞서, 유물론적 지향을 보였던 유학자로 특기할 만한 이들은 16세기의 서경덕과 19세기의 최한기다. 서경덕은 “기(氣)를 떠나서는 리(理)가 없다. … 리는 기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가 시작이 없으면 리도 또한 진실로 시작이 없다. 만일 리가 기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하면 리는 기가 시초가 있는 것으로 된다.”[20] 성리학에서 기(氣)는 물질적 존재를 뜻하는데, 이와 같이 서경덕은 리(理)가 기(氣)의 운동 변화를 주재하지 않으며 기에 내재한 합법칙성에 따라 기의 운동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또 최한기는 “대개 천지와 인간 만물의 생성은 모두 기(氣)의 조화(造化)에 말미암는 것인데, 이러한 기에 대해서는 후세로 올수록 열력(閱歷)과 경험으로 점점 밝아졌다.”고 썼다.[21] 이 말에서 드러나듯이 최한기는 19세기 조선에 수용됐던 서양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경덕과 최한기가 조선 봉건사회에서 제한적이나마 진보적 태도를 보였던 것은 이들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선 마르크스 그런데 마르크스 철학은 곧 유물론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사상을 반토막 내는 일이다. 여기에 혁명적 사유 방식인 변증법을 추가해야 한다.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두고 “세계를 하나의 과정으로서, 즉 역사적으로 계속 형성 중인 질료로서 파악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했다. 포이에르바하는 관념 대신 실재하는 자연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지만, 그에게 자연은 비역사적으로 파악된다. 이는 포이에르바하가 당대 자연과학의 최신 발견, 즉 세포, 에너지 전화, 다윈주의 등을 충실히 쫓을 수 없었던 형편 때문이다. 특히 포이에르바하에게 인간이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추상적 인간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가 유물론자인 한 그에게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며, 그가 역사를 고찰하는 한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다”라고 썼다.[22] 마르크스는 달랐다. 도식적으로 얘기해서, 마크르스 철학은 유물론에 헤겔 철학의 혁명적 요소인 변증법을 결합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흔히 정반합(正反合)으로 기억하는 헤겔의 변증법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헤겔 변증법에서 어떤 개념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스스로 지양하며 고차원적인 존재로 발전해 나간다. 지양(止揚, Aufhebung)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보존한다, 유지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중단시킨다, 끝을 낸다는 뜻이다. 운동이 진행되며 어떤 개념의 부정이 이뤄지면, 이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면서 동시에 앞선 개념보다 좀 더 고차적이며 풍부한 개념이 된다. 헤겔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은 마치 같은 내용의 격언을 정확하게 이해는 하면서도 그 의미나 함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의 말은 결코 이 격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의 생생한 힘을 알아차리고 있는 세상물정에 밝은 어른의 정신이 해독하는 정도의 의미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23] 예컨대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누구나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만, 아직 풋사랑을 겪었을 뿐인 젊은이와 수차례 찐사랑과 그 안티테제를 경험한 중년에게 이 말의 깊이는 달리 느껴지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자본』 제1권에서 헤겔의 서술 방식을 그대로 쫓아간다. 상품 속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대립하고(대립물의 통일), 이것이 외화된 ‘단순한 개별적 또는 우연적 가치형태’가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로, 다시 ‘일반적 가치형태’와 ‘화폐형태’로 지양(止揚)해 가는 과정은,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순수존재(純粹存在)와 순수무(純粹無)가 통일된 ‘존재’가 ‘현존재(現存在)’로, 다시 ‘대자적(對自的) 존재’로 전개되는 과정을 그대로 오마주(?)한 것이다. 그런데 헤겔 철학에서 “변증법적 발전, 즉 모든 지그재그 운동과 일시적 퇴보를 거쳐 관철되는 더 낮은 것에서 더 높은 것으로의 진보의 인과적 연관은,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느 경우든 사유하는 각 인간의 뇌와 독립하여 영원히 진행되는 개념의 자기 운동을 복사한 것”[24]이다.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의 운동 과정을 절대정신의 전개 과정이 아니라, 실재하는 외부 세계의 변화 과정으로 인식했다. 엥겔스가 머리로 선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다시 발로 세웠다고 평가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마르크스는 “우리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들은 결코 자의적인 전제들이 아니고, 독단들도 결코 아니며, 오직 상상 속에서만 도외시될 수 있을 현실적 전제들이다. 그것은 현실적 개인들, 그들의 행동 및 그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들 ‒ 기존의 생활 조건들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산출된 생활 조건들”이라고 말했다. 점차 고차원적인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현실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 변증법이었던 것이다. 이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존재의 연원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이란, 외부 세계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인식하는 낡은 사유 방법에 불과하다.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으로 보는 변증법을 통해 근대철학의 중요 문제, 즉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인식주체는 실천을 통해 변화하는 외부 세계를 점진적으로 인식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 증명”한다.[25] 레닌은 유물론 철학의 인식론을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사물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우리 밖에 존재한다. … (2) 현상과 사물 자체 사이에는 결코 어떤 원리적인 차이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 차이는 다만 인식된 것과 아직 인식되지 않은 것 사이에 있을 뿐이다. … (3) 과학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식론에서도 변증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즉 우리의 인식을 어떤 기성의 불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무지(無知)에서 지(知)가 생겨나며 또 어떻게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지식이 더 완전하고 더 정확한 지식으로 되는가를 연구해야 한다.” 변증법은 왜 혁명의 철학인가? 따라서 현재 우리의 인식은 완성된 진리이거나 절대적 진리일 수 없다. 이전 세대로부터 지식이 축적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우리의 상대적 진리는 지속적으로 확장돼 나간다. 일례로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이 재발견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세종이 미닫이문의 격자를 보고 한글 자음을 고안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연구를 통해 한글 자음이 발음기관을 형상한 위대한 표음문자라는 진리를 알고 있다. 고대인들에게 신의 노여움을 뜻하던 낙뢰(落雷)는 그 발생 원리가 이미 과학적으로 해명되었으며, 미래 세대는 이를 조절‧통제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게 될지 모른다. 이처럼 변증법의 시야에서 보자면 ‘진리와 오류’란 제한된 영역과 특정한 단계에서만 통용력을 가진다. 출산이 여성 사망의 제1 원인이며 안전한 피임 방법이 없었던 전근대 사회에서 혼전 순결의 강제는 그 나름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혼전 순결을 들먹이는 것은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판단, 이것이 변증법이다. 레닌이 말한 대로, “추상적인 진리란 없다. 진리란 언제나 구체적인 것이다.”[26] 세계를 끊임없는 변화와 상호 작용 등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의 시야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일반적인 운동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것들의 원조는 역시 헤겔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외부 세계의 운동을 머릿속에서 환상적으로 반영했을 뿐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첫째, 세계는 끊임없이 운동하는데, 그 원인은 내부적 모순, 즉 ‘대립물의 통일’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존재’가 변화할 수 있는 이유는 동시에 그 대립물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존재’한다는 개념에는 그 자체로 ‘무(無)’라는 대립물이 내재하고 있다. 입시 철에는 “시험 잘 보세요”라는 말이 수백만 번 되풀이된다. 그런데 누군가 ‘시험을 잘 본다’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시험을 못 본다’는 대립물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시험을 잘 본다’에 ‘시험을 못 본다’라는 대립물이 내재해 있다는 것은, ‘시험을 잘 본다’가 언제든지 ‘시험을 못 본다’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노동은 자본이 가진 생산수단과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이 결합해 이뤄진다. 자본은 노동력을 사용하는 대가로 임금을 적게 지급하려 하지만,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하는 대가로 생계비인 임금을 더 많이 받길 원한다. 이처럼 양자는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대립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없으면 임금을 받을 수 없으며, 자본가는 노동자가 없으면 이윤을 창출할 수 없다. 이 역시 “대립물의 통일(통일물의 상호 배제하는 대립물들로의 분열과 그것들 간의 상호관계)”이다.[27] 레닌은 “대립물의 통일은 조건적이며, 일시적이며, 덧없고, 상대적”이라고 썼다. 자본이 더 많은 축적을 위해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정리해고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순간, 노동과 자본의 공생관계는 곧바로 파탄이 난다. 평소 ‘기업이 잘 돼야 노동자도 잘 된다’고 생각하던 노동자들이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계급적 운동에 나서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러한 내부 모순, 즉 대립물의 통일에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양질전화다. 자연 세계에서 양질전화의 가장 간단한 예는 물의 상태 변화다. 물을 커피포트에 넣고 전원을 연결해도 바로 물이 끓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지만, 조금씩 물의 온도가 올라가 임계점(끓는점)을 지나게 되면 물(액체)은 끓어올라 수증기(기체)로 변하게 된다. 양적 변화(온도 상승)가 질적 변화(액체에서 기체로의 변화)로 바뀐 것이다. 양질전화는 인간 사회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1권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는 단순 협업이 매뉴팩쳐, 기계제 대공업으로 변화되면서 나타나는 양질전화의 과정이 상세히 묘사된다. 예컨대 1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가가 한 공간에 10명의 노동자를 불러 모은다 하자. 이때의 생산량은 처음에는 1명 노동자 생산량의 10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생기는 절약분, 업무의 계획적 분업 등을 통해 생산량은 10배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협업은 다시 매뉴팩쳐, 기계제 대공업으로 이행하며 기존 생산력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창조해 낸다.[28] 또 하나의 운동 형태는 이른바 ‘부정의 부정’이다. 이는 사물이 지양을 거듭하면서 기존의 장점을 더 높은 수준에서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서 생산방식의 ‘부정의 부정’이 이뤄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최초에는 분산된 노동자가 개별적 생산수단을 소유해 소경영에 나선다. 그러나 이런 협소한 생산 형태로는 분업과 협업, 자연에 대한 대규모 이용 등 사회적 생산력을 활용할 수 없다. 해마다 범람하는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를 조각난 땅뙈기를 부치는 몇 명이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어느 단계에 이르면 개인적으로 분산됐던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적된 생산수단으로 전화해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을 창출한다(첫 번째 부정). 물론 이 자본주의의 전사(前史)는 동시에 대다수 민중에게서 생산수단이 박탈되는 고통스러운 수탈의 과정이지만, 이전보다 생산력을 증대시켰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거대한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체제 역시 고유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차 증대하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은 마침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弔鐘)을 울리게 한다. “이제는 수탈자가 수탈당하게 된다.”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는 폐지되지만, 자본가들이 창출한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은 상실되지 않는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획득물[즉 협업과 토지 공유 및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수단의 공유]을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이와 같이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운동 상태로 보는 변증법의 시야에서는, 특정 단계에서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다고 떠드는 것만큼 한심해 보이는 짓도 없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역사의 종말’을 운운하며 “자유민주주의보다 영속성 있는 정치 시스템은 없다”던 부르주아 정치학자의 시야는 혁명적 변증법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불과 몇십 년 전 ‘자유민주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자신했던 그는 과연 트럼프와 윤석열 일당의 반민주주의적 폭거를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교의를 대변하는 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언제나 그것들을 일시적인 것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변증법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감화를 받지 않고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며 혁명적이기 때문이다.”[29] 마르크스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마르크스 철학의 양대 기둥인 유물론과 변증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마르크스 사상의 위대함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방법론을 인간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데 철두철미하게 적용했다는 점에 있다. 엥겔스가 평가했듯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잉여가치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생산 비밀의 폭로’, 그리고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다.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란 “정치적 갈등들을 경제적 발전에 의해 주어지는 현존하는 사회 계급들 및 계급 분파들의 이해 관계의 투쟁으로까지 소급하는 것, 그리고 차이가 있긴 하지만 개별 정당들이 이와 동일한 계급들 및 계급 분파들의 적절한 정치적 표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30]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한국 정치판의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역사적 연원을 살펴 이들이 대변하려 했던 계급 분파들이 무엇인지, 그들의 정치는 그들이 대변하는 계급 분파들의 이해관계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바로 ‘유물론적 역사 파악’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위해 정립한 개념이 바로 ‘생산력’과 ‘생산관계’다. 먼저 생산력이란 사회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능력으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그 요소로 한다. 어떤 사회라 하더라도 물질적 생산을 위해서는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의 능력(노동력)이 필요하며, 농지와 쟁기에서부터 공장과 조립로봇에 이르기까지 생산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생산수단)이 있어야 한다. 노동력과 생산수단은 당대의 기술 및 지식에 따라 상호 결합하는 형태가 정해진다. 생산관계란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뜻한다. 이를테면 농지와 공장은 누가 소유하고 통제하는지(소유관계),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분배관계), 직접 생산자의 노동을 누가 통제하는지(계급관계) 등을 종합한 개념이다. (다른 곳에서 마르크스는 ‘교류형태’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개념을 이용해 가장 간결하게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정식화한 저작은 1859년 출판된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이다. 이곳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법률관계나 국가 형태는 절대정신의 보편적 발전 때문이 아니라 물질적 생활 관계들의 변화에 기인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대목은 아주 유명하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의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이러한 생산력들의 발전 형태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그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혁된다.”[31] 우선 생산관계(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의 생산력 발전 단계에 조응한다. 오늘날 인간사는 돈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관계도 금전 관계를 매개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돈이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권능을 의미한다. 그러나 화폐 물신주의가 역사 내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역사에서 중국의 화폐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하기 일쑤였다. 먼저 고려시대에는 건원중보, 무문전, 은병 등의 유통이 시도됐다. 그러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첩보 보고서 『고려도경』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ㆍ노소ㆍ관리ㆍ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고,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나 은병(銀鉼)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 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교역은 쌀이나 포목을 사용하고, 기껏 만들어 놓은 화폐는 창고에 처박아 뒀다가 관람용으로나 썼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세종 역시 조선통보(朝鮮通寶)란 동전을 만들어 유통을 시도했으나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조선통보의 유통이 처참히 실패한 탓에, 조선 후기 사대부들 사이에서 조선통보가 기자(箕子) 조선의 유물이란 낭설이 떠돌 지경이었다.) 화폐 유통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하다. 고려, 조선 전기까지 사회적 생산력은 상품유통 경제를 전면화시킬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倭軍)은 얼레빗, 명군(明軍)은 참빗’이란 말이 떠돌았다. 조선 민중에 대한 수탈의 정도가 명군이 더했다는 뜻인데, 명군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중국은 이미 11세기 송나라 수도 개봉의 인구가 최대 100만을 헤아릴 만큼 상품유통 경제가 발전해 있었다. 임진왜란 시점에는 군인들에게 은자(銀子)를 지급하고 현지 시장에서 군량과 군수품을 조달하도록 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에 와 보니 시장이 있어야지! 은을 내밀어도 받질 않으니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이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 사회의 상부구조(법률적 및 정치적 구조)가 들어선다. 조선의 철저한 사농공상(士農工商) 위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 상품유통 경제가 전면화하지 못한 사회, 즉 농업생산이 중심이 된 사회의 상부구조를 의미한다. 공상천예(工商賤隷)란 말에서 드러나듯이 상공인을 농민보다 천대하며, 동시에 농민들의 거주 이전을 제한하며 토지에 묶어뒀던 것은 당대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18세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중국 사대부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직접 흥정하는 장면을 보며 조선의 사신이 놀라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선 비록 선비가 궁핍하여 부릴 심부름꾼 하나 없는 처지라도 자신이 직접 시장판에 감히 나가는 일은 없다. 장터에 나가서 되잖은 장사치들과 물건값을 흥정하는 것을 비루하고 좀스러운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상품경제가 발달한 중국에선 사대부도 살아남자면 이재(理財)에 밝아야 했지만, 농업경제 사회의 안온한 질서에 머물렀던 조선의 선비들은 돈을 만지는 것을 금기시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발전 단계가 지배계급의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조선 역시 후기에 들어서면 생산력의 발전으로 상품경제가 발전하면서(상평통보의 유통, 장시의 발달 등) 과거의 견고하던 사회 질서들이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이 철폐되고, 족보 위조가 성행하며 신분제가 흔들렸던 것이 대표적이다. 만약 구래(舊來)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예컨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동력이 대규모로 출현해야 한다. 또 상품의 전면적 유통을 위해서는 도량형, 화폐단위 등의 지역적 제한이 철폐돼야 한다. 유럽 각국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근본 동인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았던 낡은 사회 질서를 타파할 실천적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유럽 곳곳에서 봉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개화하던 시기를 직접 목격했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는 기존의 생산관계(또는 그것이 표현된 법률적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는 순간,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고 썼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더 높은 단계로의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는 순간을 수없이 목격한다. 예컨대 AI 기술, 플랫폼 공간에서의 수급 매개 등 각종 디지털 기술의 발전, 자동화 로봇 등을 통한 노동생산성의 향상 등은 물질적 풍요와 생태계 보호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물질적 토대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기술의 발전은 오히려 대규모 정리해고를 유발하거나 비정규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를 양산한다. 수요가 긴급한 필수 의약품은 지적재산권에 가로막혀 공급이 제약되며, 기후위기엔 아랑곳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생산이 반복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라면, 기존의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된 현재는 분명하게 사회혁명의 시대다. 스탈린주의적 역사 파악의 오류 중요한 점은 마르크스가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인간의 실천 활동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어디에서도 생산력 발전에 따라 사회혁명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고 쓰지 않았다. 『공산주의당 선언』의 첫머리에 명시돼 있듯이,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는 것으로, 혹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도 끝났다고 썼다. 실제 역사를 돌이켜 보자면, 독점 자본주의가 출현한 20세기 초에 이르면 사회혁명의 토대는 이미 넘치게 무르익었다고 봐야 옳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살고 있다. 물질적 토대의 성숙과는 무관하게 사회혁명은 아직 달성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토대를 떠나 자신이 선택한 조건에서 역사를 창조하지 못한다. 아무리 날고 기는 위인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삶을 시작할 뿐이다. 거꾸로 역사 또한 인간의 주체적‧능동적 실천 없이 절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의 부단한 증대가 자동적으로 체제의 질적 변화를 불러오지 않는단 얘기다. 중국공산당은 현재 중국이 ‘사회주의의 초급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체제가 사회주의란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설명은 더 황당하다. 즉 앞으로 ‘사회주의 시장 경제’와 ‘중국식 현대화’를 통해 생산력이 발전하면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점진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력이 발전하면 사회혁명이 절로 이뤄지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를 왜곡‧변용한 것인데, 그 원조는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1938년 출간된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역사 발전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생산관계의 주요한 다섯 가지 유형은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다 : 원시 공산 체제, 노예 체제, 봉건 체제, 자본 체제, 사회주의.” 좀 더 구체적으로 원시 공산 체제는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된 사회이며, 노예 체제는 “노예 소유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회, 봉건 체제는 “봉건 영주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생산 노동자(봉건영주가 더 이상 죽일 수는 없지만 그가 사거나 팔 수 있는 농노)는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생산 노동자들(개인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자본가가 죽이거나 팔 수 없지만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굶주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 팔고 착취의 멍에를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임금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다. 마지막으로 소련은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로서, 생산관계의 기초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이며 “사람들의 상호관계는 착취로부터 해방된 노동자들의 동지적 협력과 사회주의적 상호 지원”[32]이란 특징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때 스탈린은 역사가 5단계로 발전해 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생산력이라고 보았다. 즉 스탈린에게 새로운 사회의 도래는 생산력 발전에 따른 결과이며, 인류의 역사는 위의 5단계를 차례차례 밟아나가는 단선적(單線的) 발전 과정이다. 이러한 역사 파악에서는 계급투쟁이라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데올로기, 문화적 차이 등 변화무쌍한 역사의 변수 또한 그렇다. 스탈린의 단선적 역사관이 가장 기괴하게 영향을 미친 세력은 한국의 뉴라이트 논자들이다. 예컨대 뉴라이트 논자 이영훈은 전(前) 마르크스주의자(?) 안병직의 제자다. 요즈음 이영훈은 뜬금없이 조선을 노예제사회로 치부하고 있다. 16~17세기 조선 인구의 40%가 노비였다는 것이다. 서구의 자본주의 문명을 추앙하는 뉴라이트 논자들에게 조선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 후진적 체제에 머물러야 하므로 이런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그러나 외거노비의 경우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있었던 점, 사노비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기도 했던 점, 노비도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점, 주인과 사유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인 노비의 기록까지 있었던 점 등을 살피면, 조선의 노비를 그리스의 노예와 동일시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요점은 이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정식화된 단선적 역사관과 생산력 중심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어느 발전된 문명이 외부 환경의 변화나 내부 모순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멸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마르크스에게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은 결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에게 추상적 수준의 법칙은 수많은 구체적 사실에 대한 연구로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법칙은 새로운 구체적 역사 사실에 대한 분석으로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다. (마르크스 역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정체를 말하는 등 적지 않은 오류를 범했다.) 마르크스의 진술 하나하나를 무오류의 교조적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인 행태다. 마르크스의 방법론인 유물론과 변증법은 새로운 지식과 발견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개방적 사유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는 물질적 토대와 인간의 실천적 활동 사이의 관계를 항상 강조했던 혁명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엥겔스에 대한 오해 그런데 이 대목에서 엥겔스에게 덧씌워진 부당한 혐의 하나를 반박해야 할 것 같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자연으로까지 무리하게 확장해 기계적 유물론으로 만들었고, 그것이 스탈린 체제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계승됐다는 혐의 말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 아닌데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논지를 왜곡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엥겔스의 저작을 읽어보면 이런 주장이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오히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생산방식의 ‘부정의 부정’ 법칙을 언급한 대목을 두고 독자들에게 오해를 피하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부정의 부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 부름으로써 이 과정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반대이다. 그는 이 과정이 일부는 이미 실제로 일어났고 일부는 이제 틀림없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다음, 여기에 덧붙여 이 과정을 일정한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전부이다.”[33]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언제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법칙을 길어냈을 뿐, 선험적 법칙에 역사적 사실을 끼워 맞추려 들지 않았다. 엥겔스가 경제결정론에 기울었다는 주장도 부당하다. 거꾸로 만년(晩年)의 엥겔스는 물질적 토대 외에 상부 구조의 다양한 영역, 심지어 우연마저도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사태를 유물론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당신의 시도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무엇보다도, 유물론적 방법을 역사 연구의 실마리로 다루지 않고 역사적 사실들을 재단하는 완성된 관습적인 방식으로 다룰 때 그것은 그 반대물로 전화하고 만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34] “물질적 존재 방식이 제1차적 동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관념의 영역이 다시 물질적 존재 방식에 반작용을, 제2차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35] “유물론적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경제적 처지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투쟁의 결과들―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이 모든 계기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이 상호 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들(즉 그 내적 상호 연관이 너무 멀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연관이 없다고 간주하고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해 갑니다.”[36] “우리가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영역들의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역사적 작용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를 영원히 상호 대립하는 두 극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의 상호 작용을 완전히 망각하는 조잡한 비변증법적 표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신사들은, 역사적 계기가 또 다른, 결국 경제적인 원인들에 의해 일단 생겨나자마자 그 주변 환경에 대해서, 심지어 그것을 낳은 원인들에 대해서까지도 반작용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거의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있습니다.”[37] “정치, 법, 철학, 종교, 문학, 예술 등등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경제적 토대에 대해서 반작용을 가합니다. 경제적 상태가 유일하게 능동적인 원인이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수동적인 결과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 언제나 관철되는 경제적 필연성에 기초한 상호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 일부의 사람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생각하듯이 경제적 상태가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되, 그들을 제약하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존의 사실적 관계들에 기초하여 만듭니다. 비록 여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에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 사실적 관계들 중에서 경제적 관계들이 종국적인 결정적 관계들이며, 경제적 관계들을 추적해야만 이해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38] 그렇다. 경제적 토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판옥선과 함포 사격술이 조선 수군의 근본적 승리 비결이긴 하지만, 이순신 대신 원균이 지휘권을 장악했을 때의 처참한 결과를 반추해 보라. 때로 우리는 한 명의 위인이 역사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장면도 목격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레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사회주의를 향한 변혁 주체, 노동자계급 그런데 누군가 마르크스주의를 경제결정론이라 부당하게 비난한다면, 이것이 그들의 정치가 비유물론적인 것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사안에서 변증법적 상호 작용을 넘치게 강조했지만, 그렇다 하여 무제한적인 상대주의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이들의 변증법은 유물론이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라클라우와 무페를 보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제창자들인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계급성’과 ‘경제결정론’ 중심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혁명의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중심부 권력을 탈취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을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계급에 기반하지 않은 다원화된 정치적 실천의 강조란,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혁명을 수행할 수 없다는 패배 의식을 뜻한다. 이들의 작업이 1980년대 노동자투쟁의 세계적 패배 국면, 즉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속에서 등장했음을 상기하자. 하지만 계급이라는 물질적 토대에 기반하지 않은 ‘헤게모니적 접합’은 대체 어디서 출현할 수 있는 것일까? 계급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데 말이다.[39] 반면 유물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를 향한 변혁 주체로서 오직 노동자계급이 전략적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에게서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공산주의당 선언』에 잘 묘사돼 있다. 마르크스는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중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쇠퇴하고 몰락한다. … 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 소상인, 수공업자 및 농민, 이들 모두는 중간 신분으로서의 자기의 존립을 몰락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부르주아지와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즉 낡은 사회의 최하층의 이 수동적 부패물은 때때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운동에 끌려들어오는 일도 있으나, 그들의 생활 처지 전체로 말미암아 반동적 음모에 매수되는 것을 더 마음 내켜 한다”고 썼다.[40] 프롤레타리아들은 “지금까지의 전유(專有) 양식 전체를 철폐”해야 하는 계급인데,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지켜야 할 자신의 것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주도할 사회혁명이 기존의 사회혁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이다. 부르주아는 혁명을 통해 ‘봉건 지배계급에 의한 지배’를 ‘자본가 계급에 의한 지배’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혁명을 통해 ‘계급에 의한 지배’ 자체를 끝장낼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중심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 마르크스의 이 주장은 오늘날에도 타당할까?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생활 조건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에나 걸맞은 얘기가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박근혜를 끌어내렸던 2017년 촛불 항쟁으로 돌아가 보자.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직전까지 박근혜에 대한 탄핵 지지 여론은 80%를 오르내렸다. 이어진 대선에서 1,340여만 표를 얻은 문재인은 2위 홍준표의 785만 표의 거의 두 배를 득표했다. 정의당의 심상정은 201만 표를 얻어 6.1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촛불 항쟁의 성과를 독식한 민주당은 20년 집권을 운운할 정도로 자신감이 가득했다. 반면 윤석열의 파면 결정을 앞둔 지금의 상황을 보자. 탄핵 사유의 무게로 따지자면 박근혜의 잘못은 윤석열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현재 윤석열에 대한 탄핵 지지 여론은 60%를 오르내리는 정도이며, 이어질 조기 대선에서 윤석열 일당의 결집 양상은 상당할 것으로 예측된다. 왜 이런 퇴보가 일어난 것일까? 2017년 광장의 민주주의가 일터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제아무리 대통령을 끌어내려도, 일터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일상적 해고와 고용 불안, 비정규직 차별, 직장 내 괴롭힘과 성폭력 등이 반복되는 상황에선 ‘민주주의’가 가진 자들이 잘난 척하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해 보이는 것이다. 방향이 무엇이든, 차라리 세상을 화끈하게 뒤엎자는 얘기에 끌리게 된다. 서부지법 난동을 벌인 청년 극우층의 정서는 바로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계급적 불평등의 본질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할 때 벌어지는 자본과 임금노동 사이의 적대다. 이 사회의 어떠한 질서도, 그리고 이 체제를 뛰어넘겠다는 어떠한 사회운동도 결코 이 중심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들은 대한민국 민주헌법 130개 조의 절반은 포기할 수 있겠지만, 이윤의 절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새로운 사회운동도 임금노동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회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할 것인지를 답변하지 않고서는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생산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사회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재화의 생산과 이윤 생산이 통합된 체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직접 생산자계급인 동시에 자본의 이윤을 전적으로 생산하는 계급이란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즉 노동자계급이 계급 적대 자체를 철폐할 수 있는 이유는 자본주의 착취 체제 속의 그들의 위치 때문이며,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다. 실제 사회에는 임금노동에서조차 배제된 수많은 약자들이 있으며, 이들의 처지는 임금 노동자보다 훨씬 열악하다. 그러나 이들은 생산과정에서 밀려난 탓에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킬 물리적 힘을 가지기 힘들다. 더욱이 노동자들은 집단적 노동을 통해 공동의 규율을 획득한다는 점도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의 대규모 기업 내부에는 고도로 체계화된 부서 조직 등이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체계화된 기업 내부에서 타인과 협력하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 나간다. 이것이 기업 내부에서 가능하다면, 전체 사회 차원에서도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최초에 자본가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노동자들을 집결시켰지만, 이제 노동자들은 공동노동 속에서 단결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정신을 배우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서로 연합하려는 노동자들의 최초의 시도들은 항상 단결이라는 형태를 취했다. 대공업은 서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 집결시킨다. 경쟁이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을 갈라 놓는다. 그러나 임금의 유지라는, 고용주에 대항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이해가 그들을 저항, 곧 단결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사상으로 결집시킨다. 그리하여 단결은 항상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지양하고 그럼으로써 자본가들에 대해 전체로서 경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중의 목적을 가진다. 저항의 최초의 목적이 단지 임금의 유지였을 뿐이라 해도 자본가쪽이 억압이라는 하나의 사상으로 결집함에 따라 처음에는 고립되어 있던 단결이 집단을 형성하게 되고, 끊임없이 결합하는 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에게는 연합의 유지가 임금의 유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된다.” 노동자들은 자본에 맞선 투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기업과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선 단결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확대되는 단결을 통해 성별, 고용형태, 업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민주적 원칙들을 체화해 나간다.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거대한 잠재력은 그들의 존재 조건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얘기로도 조금 부족해 보인다. 특히 오늘날 한국처럼 노동자계급의 상층 부문과 하층 부분의 격차가 극심하고, 조직노동자 운동이 평온한 일상에 안주하는 형편에서는 더욱 그래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존재 조건도 자본축적에 따라 특정 산업의 발전과 쇠퇴가 반복되며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존재 조건의 변화,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에 대해서도 우리는 변증법을 사용해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분절 상태가 유별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데,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압도적 다수인 피지배계급을 통치하는 비법은 언제나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대에도 노동자계급이 단일한 하나의 계급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885년 엥겔스도 영국 노동자들이 공업 독점으로 초과이윤을 얻고 있던 영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나누면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썼을 정도다. 현재 한국의 조직노동자 운동이 가지고 있는 보신주의, 비정규직 차별의 논리는 IMF 구조조정 시기 겪은 정리해고의 상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잘 묘사돼 있듯이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하고 평생 일터에서 내몰렸다는 트라우마는, 이후 경제 회복 국면에서 조직노동자 운동이 철저한 조합주의 행태를 보이도록 추동했다. 그러나 세상 만물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트럼프가 벌이는 황당한 짓거리들을 보라. 통상적 방식으로는 안정적 이윤 생산을 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위기 상태를 드러낸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지금, 한국의 조직노동자들만 안온한 상태에 남아있으리라 보기 어렵다. 더 나아가 한국의 국민경제에서 조직노동자 부문이 차지하는 결정적 역할을 고려하면, 이들을 빼놓고서 대안 사회를 얘기한다는 것도 허망한 얘기다. 결국 중요한 것은 능동적 실천이다. 가장 억압받는 청년 노동자들, 미조직 노동자들의 힘으로 조직노동자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노동자계급 단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과제다. 사회주의 운동의 목표와 전술 이는 다음 강좌의 주제가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세 가지만 다뤄보도록 한다. 첫째, 사회주의 운동은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계급지배 질서를 폐지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사회주의자들은 부자 감세 대신 부자의 불로소득을 징발하자고 주장하며, 부동산을 투기의 대상으로 둘 게 아니라 토지 국유화를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기술이 발전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내쫓을 것이 아니라, 전 사회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노동인구를 기술 발전에 따라 합리적으로 재배치하자고 주장한다. 문제는 공동체를 위한 이러한 요구 모두 자본의 이익에는 완전히 상충되며, 자본가들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위 요구를 철저히 탄압한다는 것이다. 바로 국가권력을 통해서다. 윤석열의 내란 사태는 국가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총칼로 지배계급의 질서를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계엄 포고령 1호에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하며, 포고령 위반 시 “처단”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었음을 상기하자.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가계급의 지배 도구인 국가권력을 먼저 장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형성, 부르주아지 지배의 전복,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라고 썼다.[41]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여기서 수준 낮은 오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표현에서 소련, 중국, 북한의 일당독재를 연상하며 반민주적 체제를 떠올리는 것이다. 소련, 중국, 북한이 뭐라 떠들건 간에, 그들의 일당독재는 마르크스주의 본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전혀 무관하다. 전광훈이 제아무리 목사라고 떠들어도, 반동적 장사꾼에 불과한 전광훈과 혁명가 예수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듯이 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부르주아 독재’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김대중 정도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을 정도로 상당한 지사(志士)적 풍모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민주투사로 자임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지배 질서를 뒤엎는 것까지를 용인하는 민주투사는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공공질서의 교란’의 경우에, 그리고 실제로는 피착취계급이 자신의 노예신분을 ‘어기고’ 노예답지 않게 행동하려고 하는 경우에, 아무리 민주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그 헌법에 노동자를 향해 군대를 출동시킬 가능성, 계엄령을 선포할 가능성 등을 부르주아지에게 보장하는 단서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지 않은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42] 즉 계급사회에서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본가계급의 질서에 반대하는 절대다수의 피착취계급을 억압하는 독재라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착취계급을 억압하는 독재인 것이다. 둘째,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일상적 투쟁을 중시한다. 마르크스 당대에 어떤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을 벌이는 것 자체를 백안시했다. 노동자들은 모름지기 임금 노예 신분을 거부하고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적 투쟁에 나서야지, 임금인상 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임금 노예임을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혁명 투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정치적 계급으로 발전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모든 투쟁의 무기는 현실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일련의 투쟁 과정을 거쳐 노동자계급은 정치적 계급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개량 투쟁(경제 투쟁)과 혁명 투쟁(정치 투쟁)을 결합시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노동자계급의 정치 운동은 당연히 자신을 위한 정치권력의 전취를 최종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일정한 지점까지 발전한 노동자계급의 사전 조직이 필요하고, 이 조직은 그들의 경제 투쟁 자체에서 자라납니다. … 이와 같은 방법으로 도처에서 노동자들의 개별화된 경제 운동들로부터 정치 운동, 즉 자신의 이해관계를 일반적인 형태로 또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강제력을 보유하는 형태로 관철하기 위한 계급 운동이 싹트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들이 일정한 사전 조직을 전제로 한다면, 그 운동들은 마찬가지로 다시 이러한 조직의 발전을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이 그 조직으로 볼 때 지배계급의 집단 권력, 즉 정치권력에 맞서 결정적 출정을 감행할 정도로 충분히 전진하지 못한 곳에서는, 그들은 어쨌든 지배계급의 정책에 반대하는 끊임없는 선동(및 적대적인 지향)을 통해 그에 알맞게 훈련되어야 합니다.”[43] 셋째,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철저히 견지한다. 이 말은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자계급의 문제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모든 계급, 계층, 부문에 대한 정치의식을 가진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 계급적 정치의식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가장 억압받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의 투쟁에 가장 노동자계급다운 방식으로 연대하고 투쟁의 최선두에 나서야 한다. 이 시대의 여성 억압을 끝장내기 위해 여성파업을 조직하자는 주장처럼 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어떠한 부르주아 정치세력에도 용해되지 않은 채,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목표를 견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각 계급의 존재 조건 탓에 계급 질서 자체를 철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이며, 계급 질서 자체가 철폐돼야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모든 억압과 차별이 일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란 노동자계급이 협소한 조합주의, 일국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익을 실현해 나가도록 추동하는 정치세력이다. 1887년 엥겔스는 『공산주의당 선언』의 다음 대목이 마르크스와 자신이 40년 넘게 지켜오고 곳곳에서 승리를 이끈 전술이라고 자평했다. “공산주의자들은 …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해관계로부터 분리된 이해관계라고는 갖고 있지 않다. …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다 ;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 …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이 직접 당면한 목적들과 이익들의 달성을 위해서 투쟁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운동의 미래를 대변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기본 원칙들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 알렉스 캘리니코스,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하단의 '관련기사'에서 기초학습 다른 시리즈를 찾아 읽어보세요. --------------------------- [1] 오세아니아의 하위 지역 중 하나다. 아오테아로아, 라파 누이, 하와이를 잇는 이른바 '폴리네시아 삼각형' 안에 1,000개 이상의 섬들이 존재한다. [2] 예를 들자면, 인류 역사 내내 가축화에 성공한 대형 포유류는 5,400여 종 가운데 14종에 불과하다. 이 14종의 13종이 유라시아 대륙에 존재한다. 아즈텍 제국군은 스페인 기병대를 통해 말이란 동물을 처음 목격했다. 오늘날 존속에 성공한 인류 문명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출현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3] G. D. H. 콜,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 [4]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5]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6]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7]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의 처지」,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8] 레닌, 양효식 옮김, 「마르크스」, 『레닌 전집 58』. [9]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0] 마르크스 당대에도 그의 천재성은 유명했던 것 같다. 1852년 엥겔스는 “우리들 중에는 이상한 고정관념, 즉 모든 것을 아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마르크스라는 대부가 있는데도 우리가 억척스럽게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엥겔스, 「엥겔스가 뉴욕의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권. [11]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12] 엥겔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2권. [13]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4]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15]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16]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17] 1945년에서 1965년까지 20년간 한국은 약 120억 달러에 이르는 원조를 받았다. 1950년대에는 원조자금이 한국 정부 예산의 100%에 달할 정도였다. 또 다른 분석에 따르면, 1945년에서 1975년까지 한국이 받은 경제원조와 차관 60억 달러는 미국의 아프리카 대륙 원조 총액 68억 달러에 근접하며 소련의 제3세계 경제원조 총액 76억 달러에 약간 못 미치는 규모였다. 1950년에서 1975년까지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원조 65억 달러는 남미와 아프리카 두 대륙이 받은 원조 총액 32억 달러의 2배에 달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18] 한국 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에서 유물론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마구 처먹는 일, 마구 들이키는 일, 눈요기, 정욕, 교만한 태도, 물욕, 인색, 탐욕, 부당한 이익 추구, 증권 거래소 사기 등 간단히 말해서 속물 자신이 암암리에 하고 있는 모든 추잡한 악덕으로 이해한다 ; 그리고 관념론을 미덕, 일반적 인류애, 대체로 ‘더 나은 세계’ 등에 대한 믿음으로 이해한다.”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19] 정도전, 「佛氏雜辨」, 『三峯集』. “道則理也。 形而上者也。 器則物也。 形而下者也。 蓋道之大原。 出於天。 而無物不有。 無時不然。 卽身心而有身心之道。 近而卽於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20] 서경덕, 『花潭集』. “氣外無理。 理者氣之宰也。 所謂宰。 非自外來而宰之。 指其氣之用事。 能不失所以然之正者而謂之宰。 理不先於氣。 氣無始。 理固無始。 若曰。 理先於氣。 則是氣有始也。 老氏曰。 虛能生氣。 是則氣有始有限也。” [21] 최한기, 『氣測體義』. “蓋天地人物之生。 皆由氣之造化。 而後世之閱歷經驗。 漸明乎氣。” [22] 마르크스‧엥겔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3] 헤겔, 임석진 역, 『대논리학(Ⅰ)』 [24]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25]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6]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27] 레닌, 『철학노트』. [28] 이 과정은 동시에 노동 성격의 질적 변화도 이끌어낸다. 하나의 제품을 완결적으로 생산하던 1명의 자립적 노동자는 매뉴팩쳐와 기계제 대공업 체제에서 세분된 하나의 단순 업무를 담당하는 비자립적 노동자로 전락한다. 매뉴팩쳐 시대에 노동자들이 자기 기능 상실에 맞서 자본에 불복종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29] 마르크스, 『자본』1권 제2판 후기 [30] 엥겔스, 「칼 맑스의 ‘1844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단행본 서설」,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1] 마르크스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사회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상호 행위의 산물입니다. 인간들은 이러저러한 사회 형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산력들의 특정한 발전 상태를 상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에 상응하는 교류 형태 및 소비 형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생산, 교류, 소비의 특정한 발전 단계들을 상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에 상응하는 사회 질서, 그에 상응하는 가족, 신분들 혹은 계급들의 조직, 한마디로 그에 상응하는 시민 사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교환을 수행하는 경제 형태들은 과도적이며 역사적입니다. 새로운 생산력들의 획득과 함께 인간은 그들의 생산 양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생산 양식과 함께 그들은 오직 특정한 생산 양식의 필연적 관계들일 뿐이었던 모든 경제 관계들을 변화시킵니다. … 프루동씨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성에 조응하여 사회적 관계들을 생산하는 바로 그 인간들이 또한 이념들, 범주들, 즉 바로 그러한 사회적 관계들의 추상적, 이념적 표현을 생산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주들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 「맑스가 빠리의 파벨 바실리예비치 안넨코프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32] 이 글이 피의 대숙청이 진행되던 1938년에 발표된 걸 떠올리면 윤석열 뺨치는 망상이 아닐 수 없다. [33] 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34] 엥겔스, 「15. 엥겔스가 베를린의 파울 에른스트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5] 엥겔스, 「16. 엥겔스가 베를린의 콘라트 슈미트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6] 엥겔스, 「19.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7] 엥겔스, 「30. 엥겔스가 베를린의 프란쯔 메링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8] 엥겔스, 「32. 엥겔스가 브레슬라우의 W. 보르기우스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39] 레닌은 노동자투쟁에서조차 경제주의적 자생성에 굴종하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간단한 이유에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며, 더 포괄적으로 발전해 왔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포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40] 당시 중간계급 또는 사회 최하층의 태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유별났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썼다. “혁명을 중도에서 저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중산계급이다. 왜? 중산계급은 만족에 도달한 이익이기 때문이다. 어제 그것은 욕망이었고, 오늘 그것은 충족이고, 내일 그것은 포만이다.” 다음으로 테나르디에 부부에 대한 묘사다. “이 인간들은 졸부가 된 속물과 타락한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저 잡종 계급에 속했는데, 이러한 계급은 소위 중류계급과 하류계급의 중간에 위치하여 후자의 결점을 약간 가지면서 동시에 전자의 거의 모든 결점을 가져, 노동자의 씩씩함과 억척스러움도 없고 부르주아의 공정한 질서도 없다.” [41] 마르크스‧엥겔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42]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43] 마르크스, 「맑스가 뉴욕의 프리드리히 볼테에게」,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4권. [다음 시리즈 읽기] #2 자본주의 원리 파헤치기 .footnote-ref, .footnote-target { scroll-margin-top: 200px; /* 스크롤 위치 보정 */ color: #E60012; /* ✅ 붉은색 번호 적용 */ text-decoration: none; font-weight: normal; /* ✅ 볼드 제거 */ } .footnote-ref:hover, .footnote-target: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마우스 오버 시 강조 */ } .quote-card { background: #fff; border: 1px solid #ddd; padding: 25px; margin: 20px 0; font-family: "Noto Sans KR", Arial, sans-serif; font-size: 1.00em; line-height: 1.8em; color: #333; box-shadow: 0 3px 8px rgba(0,0,0,0.1); border-radius: 6px; } .quote-card .author { display: block; margin-top: 12px; text-align: right; font-size: 0.95em; color: #E60012; font-style: italic; }2025-08-04 | 조회 10,140 -
40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정신은 언제나 노동자를 깨운다!농성인원을 점검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투쟁결의를 모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미싱에서 기름을 빼서, 재단 반에서 찾은 솜에 묻혀 횃불을 밝히고, 방을 뒤져다가 화염병을 만들었다. 모두 자신을 보호할 무기를 하나씩 찾아들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두려움 없이 싸울 것”을 결의했다. 조합원들이 힘들어할 때 간부들과 지도부는 몇 곱절 목소리를 높여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갈수록 허기져서 버틸 힘이 없었다. 모두들 태어나 처음으로 며칠씩 배를 곯고 속옷도 못 갈아입고 씻지도 못했다. (···) 물도 먹을 수 없고 화장실 물을 받아다가 사무실에서 쓰는 가스렌지에 물을 끓였다. 그 때 누군가 물을 끓이기 위해 넣은 옥수수가 퉁퉁 불어 먹어보니 먹을 만하다고 말했다. 많이 힘든 사람부터 먹기로 했다. 자신도 배고파 힘들면서도 동지를 먼저 챙기는 모습은 투쟁에서 만나는 소중한 동지애다. 쓰러지는 친구들이 나타나자 설탕물을 조금씩 타서 먹였다. (김준희, 대우어패럴 전 사무장,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유경순 엮음, 메이데이, 86쪽) 40년 전인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의 한 장면이다. 1985년 6월 24일, 서울 구로공단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연대파업이 시작됐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계급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중심, 변혁운동의 주체임을 각인시켰다. 수많은 선진노동자를 배출시키며 노동자 정치적 발전을 추동했고,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구로공단은 196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조성한 수출산업 공단 제1호 지역이었다. 노동자들은 주로 섬유, 봉제,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했다. 1970년대 한국의 전체 수출액에서 구로공단의 생산품이 약 10%나 차지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성희롱, 성폭력이 극심했다. 구로지역 사업장들의 임금 수준은 1인당 국민소득이 1,988달러, 즉 5인 가족 기준 1가구 평균이 70만 원이었던 그 당시에 월 10만 원 정도였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기본 근무 10시간에 항상 2∼8시간의 잔업, 철야까지 월평균 80여 시간, 심지어 110시간의 초과근무를 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공순이’, ‘공돌이’로 불리는 일하는 기계였을 뿐이었다.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강요받았다. 노동자가 200명이 훨씬 넘었는데 화장실은 남녀 한 칸씩만 있고, 그것도 붙어있는 데다가 문은 판자쪼가리로 안이 다 보이고, 잠그는 고리도 없고, 변은 넘쳐서 발 디딜 곳도 없어서 화장실 가는 게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김현옥, 선일섬유 전 위원장,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유경순 엮음, 메이데이, 18쪽)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투쟁이 아니다 폭압을 이어가던 전두환 정권은 1983년 2월부터 12월까지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제적생 복교, 대학 상주 경찰의 철수, 해직교수 복직 등의 정치적 유화조치를 단계적으로 실행했다. 집권 안정기에 들어섰다는 자신감, 탄압의 효력 감소, 1983년 11월 미국 대통령 레이건 방한을 대비한 분위기 조성 등이 그 이유였다. 군사정권의 유화조치는 민주화 투쟁이 다시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시적으로 활동공간이 열리자, 저임금과 높은 노동강도에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최저생계비 확보와 노동악법 철폐 투쟁에 나섰다. 1983년 ‘민주노동운동자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벌였고 1984년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를 위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1984년 구로공단에도 민주노조가 연이어 결성됐다. 1984년 가리봉전자, 대우어패럴에 이어 효성물산에서도 7월 14일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대우어패럴에 이어 대한마이크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협진, 유니전 등에서 속속 민주노조가 결성됐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배출된 노동자출신 활동가들과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각 사업장에 들어가서 끈질기게 활동한 결과였다. 이 시기 구로공단 민주노조운동의 특징은 다양한 방식의 연대와 의식적 조직화에 있다. 연대 활동은 신생 노조로서 노조 운영을 위한 정보 교환과 자문이 필요하다는 요구에서 노조 간부들 간의 가벼운 교류로 시작됐으나 점차 노조 운동의 방향을 공유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노조 탄압 사례 발표를 통해 여러 노조의 조합원들이 비슷하게 탄압받은 경험을 공유하고 분노하면서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탄압이 한 기업 차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공동 대처 방안을 찾았다. 노조 현판식 같은 기념행사나 문화 행사에 서로 번갈아 참여했다. 탈춤, 꽃꽂이, 연극 등 다양한 공동체 프로그램이 있었다. 숙박 교육에 참여한 조합원들은 공식적인 교육 일정이 끝나면 서로 간에 각자의 회사 이야기나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너희 회사, 우리 회사’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어울리게 됨으로써 노동자들의 일체감은 더욱 높아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공개로 여러 노조의 간부들이 참여하는 지역 소모임을 만들어 학습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을 넓혀가는 지역 활동도 전개했다. 이런 활동이 공동으로 싸울 수 있는 기초이자 토대였다. 소모임과 비공개조직에서 단련된 투사들, 노동자의 대의, 투쟁, 연대를 끊임없이 실어 나르며 선두에서 투쟁하는 선진 투사들이 있었기에 조합원들은 굴종이 아니라 투쟁을 선택할 수 있었다. 노동자 소모임 프로그램의 기본 틀은 다음과 같다. “[1단계 프로그램] 노동자의 현장과 생활에서 출발하는 토론 → 의식화에 초점 (예)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 일을 내 일처럼’ 등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충효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토론과 교양 + 각 사업장 근로조건을 비교하고 토론 [2단계 프로그램]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등의 사회문제를 둘러싼 토론 [3단계 프로그램] 노동운동사 및 정치경제학적 기초교양” 이런 소모임은 4~6명을 기본 단위로 하여 6~7개 정도가 비공개로 추진되었다. 대우어패럴 교선부장 김준희는 가리봉전자, 남성전기, 협진양행 노동자 5명으로 구성된 한 소모임에 참여했다. 소모임에서는 각 공장의 실태와 운동 상황이 토론되고 노동의 역사, 일하는 사람을 위한 경제지식, 어머니 등을 읽고 학습을 했으며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동질감을 형성해 갔다. 지역소모임을 통한 조직과 의식화는 새로운 노동운동가를 양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노조에서도 조합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노조 간의 지역연대 활동에 기초가 됐다.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지난 6월 15일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스튜디오R, 학생사회주의자연대가 함께 개최한 <구로동맹파업 40주년, 역사기행>에 강사로 참여한 대우어패를 전 사무장 강명자 동지는 기숙사가 일찍 소등해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었던 경험, 사업장을 뛰어넘어 연대했던 경험을 얘기하며 노동자들이 열심히 배우려 했고, 일상적으로 연대하려 했기 때문에 동맹파업이 가능했다고 얘기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파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센터 소장도 강사로 참여했는데, 대우어패럴에 골방파(학습 중심)와 고고장파(조직화 중심)가 있었는데 이 둘이 하나로 힘을 모았기에 노동자들의 힘이 세졌다고 했다.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파업의 도화선 동맹파업의 직접적 계기는 구로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이었던 대우어패럴노조 간부 3인의 구속이었다. 6월 22일 오전 11시에 대우어패럴노조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이 연행·구속되고, 간부 8명이 불구속으로 입건됐다. 소식을 듣고 분노한 조합원들은 즉각 작업을 중단했다. 100여 명이 회사 총무과에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며 오후 5시까지 농성을 벌였다. 이후 간부들은 밤을 새워 대책회의를 하고, 이튿날(23일) 대의원 전체가 모여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우어패럴 간부들이 구속되던 날인 토요일 안양에 있는 기독교 원로원에서는 구로공단의 효성물산노조, 선일섬유노조, 가리봉전자노조 간부와 조합원, 구로지역의 활동가와 해고노동자 150여 명이 합동교육을 받고 있었다. 대우어패럴노조 간부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동자들은 대응책을 찾았다. 대우어패럴노조에 대한 탄압은 대우어패럴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노조탄압의 첫 신호이기 때문에 자신들 모두에게 닥쳐올 문제라고 인식했다. 노동자들은 “70년대 선배 노동자들이 치열하게 잘 싸웠지만, 그러나 단위노동조합이 작업장별로 따로따로 싸우다가 1981년, 1982년 전두환 정권의 노조 탄압으로 모두 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함께 연대투쟁으로 대우어패럴노동조합 탄압에 대응할 것을 모색하였다. 동맹파업의 시작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등 3개 노조는 6월 24일 오후 2시에 연대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세진전자·청계피복·선일섬유 노조가 공동으로 발표한 ‘노동조합 탄압저지 결사투쟁선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대우 노동조합 탄압은 80년의 저 무시무시한 노동조합 탄압을 되새기게 한다. 현 정권은 70년대의 민주노조들을 하나씩 차례로 깨부숴버렸다. …80년 이후 5년간 우리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한 치도 허용하지 않는 암담한 현실을 뚫고 일어섰다. 갖은 탄압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가 물러설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번 대우 노조 파괴음모가 모든 민주노조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임금인상조차도 못하는 노동조합으로 비굴하게 살아남을 건가? 가만히 앉아서 민주노조가 차례로 깨져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건가?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다. …민주노조 선진노동자들이여! 함께 일어나 싸우자! 천만 노동자의 동지애로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6월 24일 오전 7시 반, 대우어패럴 조합원 350여 명이 관리자들의 방해를 뚫고 1공장 2층 생산과 작업실에 집결해 ‘우리의 결의문’을 낭독하고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조합원들은 “노조간부 석방하라, 민주노조 탄압마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언론기본법 폐지하라, 노동부장관 물러나라”를 소리 높여 외쳤다. 회사에서는 파업을 미리 예상한 듯 현장출입구에 관리자들이 모두 나와 서 있었고 평소 7시 30분에 열리는 현장 문이 7시 45분이 지나서야 열렸다. 50분에 각 현장별로 실시되는 국민체조가 끝나기를 기다려 각과 부위원장들은 작업대 위로 올라가 위원장이 부당하게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같이 싸우기를 호소했다. 각과 조합원들이 1과 현장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노조사무실에서 대기하던 2공장 조합원들도 합세했다. 밀고 들어오는 도중에 저지하던 관리자와 격돌하여 조합원 전재선이 쇠파이프를 맞고 코를 병원에서 세 바늘 꿰매고 돌아오는 사태도 벌어졌다. 관리자들의 저지를 받아 미처 들어오지 못하고 쫓겨난 조합원도 수십 명이었다. 1과 현장에 모인 인원은 285명이었다. 조합원들은 먼저 미싱과 원단을 쌓아 출입구를 차단하고 대열을 정비한 후에 소리 높여 ‘결단가’를 불러 사기를 올렸다.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오후 2시가 되자 마주보는 건물에 있는 효성물산노조 조합원 400여 명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시각, 가리봉전자 구로공장과 독산공장 500여 명과 선일섬유 노동자들까지 농성을 시작했다. 동맹파업 첫날 4개 노조 조합원 1,300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3개 사업장 사측은 곧바로 물과 전기를 차단해버렸다. 경찰 150여 명은 신일섬유 농성장을 봉쇄했다. 효성물산과 대우어패럴은 서로 마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효성물산의 조합원들이 2층 건물 베란다로 나가 “대우, 힘내라”고 외치기도 했고, 그 소리에 건너편 대우어패럴에서는 “효성 힘내라”고 외치며 투쟁을 전개했다. 효성물산의 조합원들은 취침 시간에도 대우어패럴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모두 난간으로 나가 꽹과리 치면서 안부를 확인하였다. 가리봉전자에서는 사무장 윤혜련이 조합원들을 현장에 다 모이게 한 후 임시총회를 열고 대우어패럴의 노조 탄압을 알리는 선전물을 배포하고 같이 투쟁해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조합원들이 공동 투쟁을 결의하고 바로 파업에 들어가면서 현장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1985년 6월 25일 동아일보 6월 25일 남성전기노조 조합원 300여 명이 오후부터 농성을 시작했다. 세진전자노조 조합원 250여 명도 오후 5시 30분부터 11시까지 회사 운동장에서 지지농성을 했다. 롬코리아도 2층 식당에서 100여 명이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이렇게 연대투쟁은 하루 만에 7개 사업장으로 확산했다. 이날 구로공단과 주변 주택가 곳곳에는 ‘구로지역 20만 노동자여! 다함께 일어나 싸워나가자!’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살포됐다.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연합·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청계피복노조 명의의 유인물의 주요 내용은 “6월 26일 오후 8시 30분 가리봉오거리에 총집결해 ‘전두환 정권의 노동자 탄압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벌이자”라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개별 사업장의 요구를 뛰어넘는 전체 노동자의 요구, 경제적인 요구를 뛰어넘는 정치적인 요구를 제기했다. 1. 정부당국은 대우어패럴노동조합 위원장 김준용 동지를 비롯한 구속자 전원을 즉각 석방하라! 2. 정부당국은 민주노조운동을 짓밟는 모든 악법(집회시위법, 언론기본법, 노동악법 등)을 즉각 철폐하라! 3. 정부당국은 부당해고자 전원을 즉각 복직시켜라! 4. 정부당국은 정책적인 어용노조 설립을 즉각 중단하라! 5. 정부당국은 임금동결정책을 포기하고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라! 6. 민주노동조합 파괴에 앞장서 온 조철권 노동부장관은 즉각 물러가라! 악랄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투쟁의지 정부와 회사의 탄압은 악랄했다.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사업장 주위와 구로공단 요소요소에 배치해 지원 연대를 차단하려 했고 회사 측은 농성장에 대한 단전 단수와 함께 음식물을 일절 들여보내지 않아 노동자들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투쟁해야 했다. 효성물산의 경우, 파업 시작 첫날 밖에서 빵과 음료 등을 넣어주었으나 그다음 날부터 경찰이 이를 막은 데 이어 전기와 수돗물까지 차단했으며 물이 안 나오니 화장실까지 막혀 농성 노동자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우어패럴에서도 회사 측이 단전 단수와 함께 음식물 반입을 막았다. 3일째 되는 날에는 배가 고파 쓰린 배를 움켜쥔 조합원들 사이에 “지나가는 쥐라도 있으면 잡아먹고 싶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에도 노동자들이 계속 파업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이 싸우는 동료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 통탄할만한 농성반대 집회가 있고 나서 밖에 있는 조합원들을 퇴근시키더니 다시는 출근을 시키지 않았다. 그 일로 쟁의부장 박신자 동지가 온몸이 돌아가며 쓰러졌다. 병원에 가야 한다며 밖에 내보내려 했는데 쟁의부장은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 손을 따 달라”고 해서 모든 동료들이 달려들어 따고 주무르고, 농성장이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렇지만 쟁의부장이 보여준 투쟁의지는 다른 동지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김현옥, 선일섬유 전 위원장,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유경순 엮음, 메이데이, 35쪽)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지역으로 계속 번져갔다. 삼성제약 조합원들도 농성과 점심 식사 거부로 지지를 표명했고, 저 멀리 경남 창원에 있는 (주)통일노조도 지지를 표명했고 연대투쟁을 조직했다. 농민운동 단체들도 성명을 발표하여 정권의 노조 탄압을 규탄하고 동맹파업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표명하였다. 6월 27일, 대우어패럴에서는 회사에서 동원한 노동자 300여 명이 노조반대 농성을 했고, 가리봉전자에서는 새벽에 회사 관리자와 구사대들이 식당 문을 두드리고 욕을 하고 각목을 휘두르며 폭력적으로 파업을 방해했다. 6월 28일, 부흥사 조합원도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여 동맹파업을 시작했다. 120여 명이 출근과 동시에 3층 작업장에서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대투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관리직 남성들이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난입해 오후 4시 30분경 해산당하고 말았다. 회사는 해산 이후 공갈, 협박, 폭행으로 80여 명에게 사직서를 쓰게 하고 29일부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남성전자, 세진전자, 롬코리아 등의 지지 농성 투쟁도 이어졌다. 롬코리아는 대우어패럴의 파업을 알게 된 대의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되겠냐”라며 위원장에게 따져서 지지 투쟁을 시작했으며 조합원들은 근무시간이 끝나고 이틀 밤을 새우면서 지지 농성을 벌였다. 한편, 효성물산노조가 회사로부터 보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26일 밤 11시에 농성을 해산했으나 회사는 7월 3일까지 휴업공고를 냈다. 효성물산과 청계피복 조합원 100여 명은 27일 오후에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강제해산을 당했고 물론 청계피복노조 사무장과 효성물산노조위원장 등 7명이 구속되고 말았다. 27일에 농성을 해산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도 농성을 주도했던 노동자들에 대한 보복 폭력이 난무했다. 6월 27일 음식 반입까지 가로막힌 가운데 탈진한 노동자들이 실려 나가고 남은 대우어패럴 농성자는 100명 남짓으로 줄었다. 그런데도 회사는 비조합원 300여 명을 강제 동원해 농성장 앞 운동장에서 4시간 동안 노조를 비방하는 구호를 외쳐대는 등 방해 책동에 열을 올렸다. 6월 29일 오전 8시경 대학생 18명이 빵과 우유, 의약품을 짊어지고 지붕을 타고 넘어 합류했다. 농성장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다급해진 회사는 깡패 500여 명과 사복경찰을 동원해 벽을 뚫고 진입했다. 해산 과정에서 구사대가 각목과 쇠파이프로 농성 노동자들을 폭행했으나 경찰은 이를 묵인하고 방관했다. 6월 29일 7시 즈음. 기상해서 출근 시간에 맞추어 창틀에 매달려 있는데 한일은행 담을 타고 학생들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노동자들이 반가워서 몰려가 환호, 박수로 환영하고 학생대표의 인사말을 들었다. 그러나 채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현장 벽이 부서지면서 관리자, 경비, 반대파들이 돌과 각목을 던지고 소화기를 뿜어대며 급습, 관리자 200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 의자, 발길질 등으로 가릴 것 없이 농성자들을 구타하면서 머리채, 손발 아무데나 휘어잡고 기숙사 쪽으로 끌고 갔다. 회사 측의 폭력을 피해 20여 명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모두 잡혀 남부서로 연행, 회사로 다시 끌려와 기숙사에 갇혔다. 기숙사로 끌려간 농성자들은 한방에 5명씩 갇혀서 1인당 비조합원 3명에게 감시당하면서 갖은 모욕을 당했다. 11시 즈음 의사들이 들어와 진정제를 억지로 먹여서 농성자들은 잠이 들었다. 오후 2시 30분 즈음 이들은 깨어나 죽 한 그릇씩을 먹었다. 관리자들은 수시로 드나들며 “경찰서로 직행시켜야 한다”, “입에다 똥을 처넣어야 한다”는 등의 폭언과 협박을 함부로 했다. 그 이후 회사 측은 농성자들을 한 명씩 총무과에 끌고 가 부모까지 동원하여 강제로 사표를 쓰게 했다. (유경순, 2007, 아름다운 연대 - 들불처럼 타오른 1985년 구로동맹파업, 메이데이) 이처럼 6월 24일부터 4개 사업장으로 시작된 동맹파업은 6일 동안 굶주리면서 싸운 대우어패럴 노동자 80여 명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농성을 풀었다가 신민당사에서 다시 농성을 벌이던 효성물산노조 조합원 36명도 30일 “신민당이 노동운동 탄압과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라는 약속(성명 발표)을 받고 농성을 풀었다. 구로공단에 있는 5개 사업장에서 약 1,400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벌였고, 또 다른 5개 사업장에서 연대투쟁을 벌이는 등, 2,500여 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했다. 투쟁 과정에서 구속 43명, 불구속 입건 38명, 구류 47명, 그리고 2,000여 명이 해고 및 강제사직으로 공장에서 쫓겨났다. 빛나는 의의와 함께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은 경제적 요구를 넘어 국가권력을 상대로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정치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구로동맹파업은 이후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정치투쟁 조직이 출범하는 근거가 되었다. 빛나는 의의와 더불어 우리는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 지금도 겪고 있는 거대한 고통도 잊지 말아야 하고, 그 당시 활동가들의 반성도 눈여겨 돌아봐야 한다. "예전엔 블랙리스트에 걸려서 이 거리를 못 움직였는데, 지금은 돈이 없어서 이 거리를 못 움직여요. 이렇게 투어를 할 때 한번씩 와서 여러분들한테 인사를 하게 되네요. 역사적인 장소 산업민주화와 혁명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여기만 오면 저는 슬퍼요. 제가 아직까지도 우리 대우어패럴 동지들 모임 회장을 맡고 있는데, 친구들과 동생들이 지금까지도 울면서 저한테 전화를 해요. 그때 열여덟 열아홉 되었을 때, 성폭력 당해서 결혼 해가지고도 말 못하고 고통스러워서 하는 동생들이 있어요. 지금까지도 노동조합 했다는 소리를 남편이고 아이들한테 못 한 사람들도 있고요. 실신하고 들쳐 엎는 상황에서도 자기의 소중한 부위를 만지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 성추행이잖아요. 지금 같으면 언론이나 연대싸움을 해서라도 떠들 수가 있는데, 그렇게 못한 게 너무도 한이 돼서 지금도 말 못하고 언니한테만 얘기한다고 울어요.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 슬퍼서 울어요. 사람이 사람답고자 했던 행위가 하나의 인간으로 대접 못 받는 수치를 많이 남긴 거잖아요." (강명자 대우어패럴노조 전 사무장 발언, "지금도 노조했단 말 못한단 얘기 들으면, 슬퍼서 울어요", 연정, 오마이뉴스) 나를 포함해 노동운동에 뛰어든 학출 활동가들이 갖고 있던 지적인 허영과 오만, 가장 옳은 입장이라고 자처했던 독선, 노동자들을 대상화했던 순간들, 비민주성, 패권주의, 자신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상처받은 노동자 동지들의 손을 놓아버린 약하고 무책임한 뒷모습····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부끄러움과 고통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혜경, 전 가리봉전자 부위원장,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 삶을 말하다”, 유경순 엮음, 메이데이, 229쪽) 당시는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선진 투사들이 노동해방사회의 건설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활동한 것은 아니었고, 여러 정치적, 실천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구로동맹파업을 신화적으로 기억해선 안 된다. 의의만이 아니라 한계까지도 곱씹어 전진해 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구로동맹파업의 의의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당장의 실리에 집착하면서 노동자의 대의를 내팽개치는 조합주의, 관료주의에 맞서 구로동맹파업이 보여주었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의 정신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동맹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내 사업장만 살자‘는 조합주의를 넘어, ’옆 사업장이 깨지면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절박함으로 ’함께 싸워야 이긴다‘는 계급적 연대를 선택했다. 물과 전기가 끊긴 공장 안에서도, 밥 한 끼 없이 쓰러져 가는 와중에도 서로를 부축하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웠다. 나의 투쟁과 당신의 투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끝까지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40년 전 구로동맹파업이 남긴 가장 빛나는 유산이자, 오늘의 비정규·미조직·청년·여성 노동자들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바꿀 수 있는 무기다. 구로동맹파업 40주년, 그 정신은 영원히 살아있다.2025-06-26 | 조회 5,0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