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신문 뉴스목록
-
[번역] 빵과 장미: 자본주의 아래서의 젠더와 계급 (0) 들어가며‘빵과장미: 자본주의 아래서의 젠더와 계급’은 아르헨티나의 사회주의 노동자당(PTS) 활동가 안드레아 다트리(Andrea D’Atri)가 쓴 책으로, 혁명적 사회주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출현 이후 여성해방을 향한 계급투쟁의 역사를 총괄한 책이다. 2004년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어로 처음 출간되었고, 현재까지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책이 출간되기 1년 전인 2003년, 저자가 속한 아르헨티나 사회주의 노동자당 활동가들은 ‘낙태 권리를 위한 총회’를 거치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단체 ‘빵과장미’를 창설했다. ‘빵과장미’는 지난 20여년 간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페루,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코스타리카, 멕시코, 미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로 확장됐다. 저자는 ‘빵과장미의 지난 20년의 투쟁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여성 해방에 관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재구성하는 것, 계급 투쟁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자발적 조직화를 촉진하는 것, 전투적인 국제주의적 관점을 발전시키는 것,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여성 운동의 모든 투쟁에서 가장 폭넓은 행동의 단결을 추구하는 것’. 여성해방을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안내서가 되길 바라며, 안드레아 다트리의 저서 ‘빵과장미’를 번역해 연재한다. 번역본은 2020년 출판된 영문판을 기초로 한다. - 편집자 ※목차 0. 들어가며 1. 곡물폭동과 시민권 2. 부르주아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여성 3. 자선과 혁명 사이 4. 제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젠더 5.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국가 속 여성들 6. 베트남에서 파리까지, 브래지어에서 모닥불까지 7. 여성의 차이, 여성들 간의 차이 8. 포스트모더니티,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페미니즘 9. 결론을 향해 0. 들어가며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각자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의 저작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입증해 줄 주석을 달기 위해 필요한 참조문헌을 열심히 찾는다. [...] 바깥세상은 빈곤으로 폭발하고 있다: 여성으로 태어난 수많은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 가시요람을 준비한 사회를 마주한다. — 빅토리아 사우 산체스(Victoria Sau Sánchez) 젠더와 계급을 결합시킨 세계 여성의 날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매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기념한다. 그러나 꽃과 초콜릿 광고는 넘쳐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날의 기원을 모른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세기에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며 조직한 행동에서 시작됐다. 1857년 3월 8일, 뉴욕의 직물공장 노동자들은 진을 빼는 12시간 노동과 비참한 임금에 맞서 파업을 벌이고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반세기 후인 1909년 3월, 140명의 젊은 노동자들이 비인간적 조건 아래 붙잡혀 있던 직물공장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 그리고 같은 해에 3만 명의 뉴욕 직물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비록 경찰에게 진압됐지만, 이 노동자들은 대학생들, 참정권 운동가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사회의 다른 부문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12년 벽두에,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 시에서 “빵과 장미” 파업이 터져 나왔다. 파업에 나선 직물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더불어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요구를 요약하기 위해 “빵과 장미”라는 슬로건을 사용했다. 이 투쟁에서 파업위원회는 여성 노동자들이 더 쉽게 투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육원과 공동 취사장을 설치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은 노동조합 강당에서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왜 어머니와 아버지가 파업을 하는지 토론하는 행사를 열었다. 파업이 시작되고 며칠 뒤, 어린이들을 다른 도시들로 보내기로 했다. 노동자투쟁에 연대하는 가족들이 어린이들을 맡아주기로 했고, 첫 번째 기차로 120명의 어린이가 떠났다. 두 번째 기차가 막 출발하려던 참에, 경찰이 어린이들과 동행하는 여성들에게 탄압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파업이 미국 전역의 신문에 실리고 의회에서도 다뤄지면서, 연대가 확산됐다. 로렌스 파업 2년 전인 1910년 8월, 제2인터내셔널 사회주의자 여성대회가 코펜하겐에서 열렸다. 여기서 독일의 클라라 체트킨[1]은 자본주의 착취에 맞서 최초의 조직된 행동을 전개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3월 ‘세계 여성의 날’ 행사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온 100명의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이 대회에서 여성의 투표권, 일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사회복지, 전 세계 사회주의자 여성들의 관계 구축 방안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은 하루 8시간 노동, 16주의 출산 휴가, 그리고 여러 요구를 위한 투쟁 결의안을 채택했다. 만장일치로 통과된, 역사에 남은 ‘세계 여성의 날’ 결의안을 제출한 것은 독일 대표단이었다. 클라라 체트킨과 케이트 던커가 제출한 결의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적인 정치조직들 및 노동조합들과 합의하여, 특별히 ‘여성의 날’ 행사를 조직하여야 한다. 이 행사는 주로 여성 참정권에 대한 선전을 고취하되, 이 요구는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사회주의적 신념에 입각해 전체 여성의 문제와 연결해서 토론돼야 한다. [‘여성의 날’ 행사는] 국제적 성격을 가져야 하며, 주의 깊게 준비돼야 한다.[2] 이후 몇 년 동안,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많은 나라에서 개최됐다. 하지만 3월 안에서 서로 날짜가 달랐다. 1914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러시아, 스웨덴 사회주의자들이 3월 8일에 행사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 날짜가 ‘세계 여성의 날’로 역사적으로 굳어진 것은 1917년 3월 8일 페트로그라드의 직물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빵, 평화, 자유”를 요구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 시절 러시아 달력으로는 2월 23일이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혁명은 그해 10월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으로 귀결됐다. 우리가 보았듯이, ‘세계 여성의 날’은 계급과 젠더를 결합시켰다. 그런데 이 결합은 한 세기가 더 지난 뒤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페미니스트 운동 안에서 논쟁되고 있다. 억압과 착취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여성억압의 문제는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론적 입장은 우리가 투쟁에서 취하는 입장, 즉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모든 인민의 편에 선다는 입장과 동일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계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변혁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 입각한다. 일부 여성학 전문가들은 “페미니즘 역사를 다룰 때 계급 분석을 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부르주아 페미니즘은 부르주아 사회의 틀 안에서 정치적·법률적·경제적으로 남성과 동등해지고자 하는 부르주아 여성의 의식적 표현이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은 계급 없는 사회의 틀 안에서 사회적 예속의 극복을 제안한다. 추구하는 정치모델이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공산주의든 말이다.[3] 다른 저자들은 여성억압을 분석하는 데서 계급 차이를 강조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비록 모든 여성이 오늘날 거의 모든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동일한 이유로 억압받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억압받는 여성들이 있다.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4]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따라, 착취를 계급들 사이의 관계로 정의한다. 착취란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 노동자대중의 잉여노동을 전유하는 것을 말한다. 착취는 사회의 경제구조에 뿌리를 둔 범주다. 반면에 억압은 문화적·인종적·성적 이유들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예속되는 관계로 정의할 수 있다. 억압이란 범주는 특정한 사회집단을 불리한 위치에 놓기 위해 불균등을 활용하는 걸 말한다. 차이는 한 부문의 다른 부문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전환된다. 여성들은 서로 대립하는 다른 사회계급들에 속한다. 여성은 별도의 계급이 아니라 여러 계급에 걸친 집단을 구성한다. 이 집단 안에서 착취와 억압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된다. 한 사람이 속한 계급은 그가 겪는 억압을 큰 틀에서 결정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몸을 통제할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은 모든 여성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어떤 여성들은 불법적인 의료시술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합병증에 걸릴 위험에 대처하는 데서 더 잘 준비돼 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사회적·교육적 수준 덕분에 위생적 조건에서 낙태를 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여성들은 수술 후 출혈로 또는 감염으로 사망한다. 그녀들은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얼굴을 가진 가부장 질서의 희생양이 된다. 비록 모든 여성이 법률적·교육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차별로 고통당하지만, 실제로는 그녀들 사이에 명확한 계급적 차이가 존재하며, 그래서 차별이 다른 정도와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계급적 차이는 억압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차별을 강요하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에 맞서고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극복할 객관적 가능성 또한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젠더는 여성을 묶고, 계급은 여성을 나눈다 21세기가 열리면서,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 심지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된 것처럼 보인다. 세계 대다수 정부가 젠더 문제를 다양한 제도적 수준에서 국가 기관, 실무진, 공공 정책 의제, 다자간 조직에 편입시킬 정도가 됐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이를테면 “유리천장”이라 불리는 현상의 실체를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학계에서든 기업에서든 여성은 남성과 같은 자격과 실적을 갖고 있는 경우에도 남성과 같은 속도로 지도적 역할로 승격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대륙의 압도적 대다수 나라들에서 여성 임금은 남성 임금 대비 60~70%에 불과하다. 우리는 여성억압이 사회의 모든 계급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은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다양한 계급들 속에서 늘 절반의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이 세계의 피착취 계급과 빈민들 가운데서는 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를 착취와 빈곤으로 몰아넣는 다국적 기업들의 강력한 소유자들 가운데서는 아주 작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의 소수만을 차지한다. 여성은 세계 인구의 50%를 약간 상회하지만, 13억의 빈민 가운데서는 70%를 차지한다. 반대로 세계의 사유재산 가운데 단지 1%만이 여성의 수중에 있다. 우리가 (시간제 노동자든, 월급제 직원이든, 농촌 노동자든, 실업자든 상관없이) 여성 노동자들을 구속하는 이중 삼중의 사슬을 지적할 때, 어떤 계급에 속하든 인류의 절반이 겪고 있는 억압을 감추려고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극소수 자본가 기생충들이 대다수 인류를 착취하는 데 기반하는 체제로부터 모든 여성에 대한 억압이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믿기 때문에, 계급적 전망을 제시한다. 위계질서와 불평등의 영속화는 체제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다양한 분할과 파편화는 가장 비참하게 양분된 위계질서, 즉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음으로써 소수가 그 어느 때보다 엄청난 이윤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 하는 바로 그 위계질서를 지속시킬 수 있게 해준다. 만일 계급이 젠더 억압이 발현되는 다양한 방식을 좌우하지 않는다면, 어떤 여성들은 포브스가 선정하는 억만장자 리스트에 오르고 또 몇몇 여성들은 여러 나라에서 대통령이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동안 6천만 명의 소녀들이 여전히 교육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20세기부터 우리는 여성이 대통령, 총리, 장관, 병사와 장교, 과학자, 예술가와 운동선수, 사업가, 성공적인 전문가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피임약, 미니스커트와 청바지, 남녀공용 패션, 가전제품의 시대였다. 하지만 동시에 전 세계에서 해마다 2천만 명이 비밀 낙태를 하고, 수천 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고 “인종청소”로 살해당하며, 수많은 여성들이 실업 상태에서 빈곤선 아래의 삶을 살아가는 시대이기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므로 30대에 이른 한 여성이 한쪽에서는 남성과 동등한 기반 위에서 반식민지 나라들을 폭격하는 나토 연합군의 장교가 되는 것으로 “그녀의 권리를 행사”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서 에이즈에 걸려 죽을 때, 여성 일반을 위한 발전이나 진보를 말하는 것은 모순적이고 심지어 다소 위선적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여성에 대해 말하면 안 되는가? 여성 사업가와 여성 노동자의 삶은, 제국주의 국가 여성과 반식민지 국가 여성의 삶은,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의 삶은,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의 삶은 정말로 같은가?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영국 여왕과 영국의 여성 실업자를, 또는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가사도우미를, 또는 국제적인 팝스타나 여성 사업가와 멕시코 마낄라[5]의 노동자를 연결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생물학적 환원주의라는 (페미니스트들이 격렬하게 비판해 왔던) 지배적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젠더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전혀 없게 그리고 우리가 밀어붙이려는 변혁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게 추상적인 범주를 사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잘 어울리는 결혼 오늘날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여성이 직면한 문제들을 다른 도구들을 갖고 규명하기 위해 계급에 기반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가부장제에 대한 규탄을 넘어 빈곤 증가와 공공 서비스 축소에 책임이 있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을 규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페미니스트가 제3세계 여성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원은, 공공연하게 반제국주의 입장에 서서, 강대국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모든 “인도적” 개입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6] 우리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자본주의 이전에 출현했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서 특수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는 가부장제를 착취와 현상유지의 필수적인 동맹으로 전환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기반으로,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개척지와 황무지까지 정복하면서,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착취를 자신의 지배 시스템에 도입했다. 비록 자본주의가 수많은 여성들을 노동시장으로 밀어 넣으면서 여성들을 오로지 사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게 하는 몽매한 믿음을 파괴하긴 했지만, 자본주의가 그렇게 한 이유는 여성에게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자신의 착취를 배로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춘다. 자본주의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산업화의 조건을 창출했고 그리하여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위한 조건을 창출했다. 그러나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진행되지 않는다. 바로 무급 가사노동이 자본가 이윤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무급 가사노동은 자본가들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작업(조리, 세탁, 기분전환 등)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도록 면제해 준다. 집안일은 여성의 “자연스러운” 책무라고 선언하는 가부장제 문화를 장려하고 유지하는 것은, 자본가계급에 의한 이러한 “절도”를 보이지 않게 만들며, 동시에 기본적으로 성인여성과 소녀들의 어깨 위로 떨어진 가사노동 또한 보이지 않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의학적·위생적 조건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냈지만, 자신의 몸을 통제할 권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다. 알약, 자궁 내 장치, 나팔관 결찰술, 합병증 없는 무균 낙태수술의 가능성 같은 피임법의 발전은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녀를 원하는지 언제 원하는지 또 얼마나 많이 원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는다면, 이는 교회가 자본주의 국가와 공모하여 계속해서 이를우리의 삶에 강요하기 때문이다. 비밀 낙태는 의료 관계자, 의학 실험실, 경찰 마피아 등에게는 매우 수익성 있는 사업이 되었다. 쾌락과 재생산의 분리 가능성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위협이 되는 자유를 내포한다. 어머니가 되는 게 여성의 유일한 자기실현 경로라는 데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 재생산이 성생활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데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 성생활이 이성간 성교로만 이해되는 데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우리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의지하는 규범을 위태롭게 한다. 착취 체제는 우리의 몸을 노동력으로만,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 관념에 종속된 몸으로만, 상품들의 세계에서 또 다른 상품으로 전환될 분리되고 소외된 몸으로만 간주한다. 여성의 투쟁과 계급투쟁 자본주의의 출현과 발전은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만 증가시키지 않았다. 착취와 억압의 사슬에 맞선 여성의 저항과 투쟁에서도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 18세기 말 부르주아 혁명과 함께 페미니즘은 하나의 사회운동이자 이론적·이데올로기적·정치적 흐름으로 출현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다양한 형태를 취해 온 페미니즘 운동은 오늘날 다양한 이론적 경향, 가지각색의 실천, 복합적인 조직적 경험의 형태를 갖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지배계급 부르주아지에게 적대적인 강력한 노동자계급의 등장과 함께, 페미니즘은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들에게 강요한 논쟁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핵심적인 관심사인데,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에벌린 리드(Evelyn Reed)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이 문제다. “성 대 성이냐?, 아니면 계급 대 계급이냐?”[7]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계급투쟁이 역사의 추진력이며, 빈민대중과 모든 피억압 부문을 이끄는 노동자계급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임금노예제와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사회혁명의 주체라는 입장을 계속 견지해 왔다. 자본주의의 심장부를 강타하고, 착취와 약탈의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마비시키며, 하위계급들(subaltern classes)을 상대로 전쟁을 펼치는 자본주의 기구들을 파괴함으로써 말이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은 그 대열 속에 수많은 여성들을 포괄하고 있다. 자본은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이 모순을 생산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를 영원히 창출하고 재창출한다. 노동자계급 여성은 착취계급을 완전히 타도하는 이러한 미래의 전투들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미주] [1]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이자 당 여성부의 조직가였다. 그녀는 신문 Die Gleichheit(평등)을 창간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당 지도부가 민족 부르주아들과 결탁하여 전쟁 채권 발행을 찬성했을 때 이에 맞서 싸웠다. [2] International Socialist Conference, Report of the Socialist Party Delegation and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Socialist Congress at Copenhagen, 1910 (Chicago, IL: H.G. Adair, 1910). (이 번역은 독어 원문을 반영해 약간 수정되었다 - 영문판 역주) [3] Mary Nash, “Nuevas dimensiones en la historia de la mujer,” in Mary Nash (Ed.), Presencia y protagonismo: Aspectos de la historia de la mujer (Barcelona: Serbal, 1984), 저자가 직접 번역. [4] Andrée Michel, El feminismo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GREA, 1983), 저자가 직접 번역. [5]’마낄라(Maquila)’ 또는 ‘마낄라도라(Maqiladora)’는 라틴아메리카의 저임금 여성 노동력을 활용해 원재료를 수입해서 조립, 수출하는 외국계 기업 공장을 지칭하는 용어다. (역주) [6] Alizia Stürtze, “Feminismo de clase,” Lahaine, 참조: www.lahaine.org/sturtze/feminismo_clase.htm. [7] 에블린 리드(1905–1979)는 40년 넘게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당원이었다. 에블린은 1930년대 말에 SWP를 알게 되었고, 1939년에 멕시코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망명 중이던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는 1959년부터 1975년까지 SWP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녀의 가장 뛰어난 공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여성 해방에 관한 저술이었다. 이 저술에서 그녀는 역사 유물론을 적용해 계급 사회에서 여성 억압의 기원을 분석하고, 둘의 불가분한 관계를 보여주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2026-07-13 | 조회 31,328 -
[번역] 이중권력: 자기조직화와 총회의 중요성자기조직화는 계급투쟁의 열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에게 이는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의 정치 권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출발점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우리는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학생 봉기가 전 세계를 휩쓰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수개월간 미국과 전 세계의 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것처럼 가자를 위해 시위를 벌였다. 청년들 사이에서 반제국주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꺼이 싸우고 국가에 맞서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보게 되길 진심으로 염원한다. 미국 대학들과 이스라엘 국가의 유착 관계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점거 농성과 직접 행동이 이어지면서, 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방법과 전략을 둘러싸고 공개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편집자 주] 이 글이 쓰여진 것은 2024년 6월이라 시기적으로 오늘날 정세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자기조직화와 총회의 개념과 그 중요성에 대한 논의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번역해 게재한다. 의식의 발전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투쟁 과정과 다양한 자기조직화 형태가 나타났다. “자기조직화”는 곧 민주적 총회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총회에서 투쟁의 다음 단계를 민주적으로 결정한다. 총회는 자기조직화의 표현 방식이다. 자기조직화란 관료적 지도부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의식적 조직화다. 자기조직화는 최근의 계급투쟁 과정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2019년 칠레의 방어 위원회나, 2024년 아르헨티나에서 이른바 옴니버스 법안에 항의하기 위해 등장한 동네 총회가 그 예다. 미국에서도 1919년 시애틀과 같이 대중적 분노가 첨예해진 순간에 자기조직화가 발전했다. 미국에서 우리는 바이든 행정부의 절대적 지지 아래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끔찍한 학살에 직면해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스라엘을 위해 무기, 미사일, 경제적·기술적·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바이든 행정부는 공화당과 극우 트럼프 진영을 포함한 양당 체제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에 맞서서, 학살을 끝내고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고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제국의 심장부에서 폭발했다. 이 운동은 7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형태와 단계를 거치며 이어져 왔다. 봄철에 대학 캠퍼스를 휩쓴 점거 농성 물결 이후 현재 운동은 갈림길에 서 있으며, 지난 수개월의 경험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팔레스타인 운동은 총회의 형태를 띤 자기조직화가 결여되어 있다. 이는 운동을 이끄는 주요 경향 전반에 해당되는 사실이며, 이들은 매우 다양한 전략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뉴욕시의 ‘우리 생애 안에(Within Our Lifetime)’, 사회주의해방당(Party for Socialism and Liberation), ‘팔레스타인 정의를 위한 학생들(Students for Justice in Palestine)’, ‘평화를 위한 유대인의 목소리(Jewish Voice for Peace)’ 등이 포함된다. 이들의 조직화는 “포퓰리즘적”, “마오주의적”, “스탈린주의적”, “탈식민적” 입장 등을 준거점으로 삼는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노동자·학생의 총회와 자기조직화를 추동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점거 농성은 작고 선출되지 않은, 게다가 많은 경우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지도부가 조직했고, 그들이 대부분의 핵심 사안을 결정했다. 이는 거리 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시위는 수십만 명을 학살에 맞선 투쟁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다수는 매일같이 행진하면서도 그 행진에서 내세우는 요구나 더 광범위한 운동의 강령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발언권을 가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정책을 바꾸거나 휴전 등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를 압박하는 것이 조직들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민주당과 연계된 NGO 같은 다른 관료들과 협력한다. 그들은 “보안 우려” 때문에, 혹은 선별된 학생 집단이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토론을 위한 민주적 공간이 발전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가로막는다. 이 때문에 운동은 관료화되고, 자신의 삶과 미래를 걸고 거리로 나선 수천 명의 학생들에게서 숙의적 의사 결정의 권리를 박탈한다. (*다음 글도 함께 읽어 보길 권한다: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총회를 운영하는 것은 노동자와 학생이 힘을 합쳐 싸우고, 조직하고, 운동을 확장하고, 토론하고, 나아갈 길을 표결하는 방법을 결정하고 의견을 내는 데 필수적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우파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의 초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투쟁이 수십 개의 “거리 총회”를 낳았다. 이 총회에 학생, 노동자, 연금 생활자들이 모여서 어떻게 반격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지 결정한다. 그 외에 학생들이 숙의하고 표결하는 대학 총회라든가, 정부 정책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떻게 투쟁을 전진시킬지 토론하기 위해 모인 여성과 퀴어들의 총회도 있다. 이 총회들은 집회, 규탄, 대학 행사 등 밀레이 정부에 맞서 취할 조치들을 토론하고 표결한다. 총회를 비롯해서 계급투쟁 국면에 생겨나는 자기조직화 기구들은 특정 전술 및 행동에 대해서뿐 아니라 운동의 정치적·전략적 전망에 대해서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표결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이 물음들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어떤 길이 가장 성공적인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어떻게 계속 나아갈지 함께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한정된 소수의 핵심 인물이 이런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우리는 운동에 관계된 모든 이들의 생각을 알아 둘 필요가 있고, 이것이야말로 더 많은 사람을 투쟁에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노동조합, 학생운동, 노동계급은 전쟁 체제를 멈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만의 수단을 사용하는 운동,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의 대중운동, 학살을 끝내려면 바로 이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총회, 자기조직화, “직접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이를 쟁취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총회는 모두가 함께 모여 다음 단계를 결정하는 “우리의”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점거 농성 지도부의 한계 중 하나는 민주적 조직화를 중심 과제로 삼아 학생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점거 농성은 확장되기 어려웠고 학생들은 탄압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했다. 우리는 운동을 확장해서 운동이 더 큰 힘을 얻고 민주적 방식으로 결정된 독자적 행동을 통해 제국주의 전쟁 체제를 정말로 무너뜨리고 승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운동이 성공하려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더 많은 사람이 운동의 과제를 분담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동시에, 더 많은 사람이 운동의 다음 단계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운동을 가장 단단하게 보호하는 것은 참여가 제한된 의사 결정이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민주주의다(이는 우리의 단결도 강화한다). 운동의 전략을 논의할 우리만의 공간이 생기면 이곳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 입장을 밝힐 수 있고 우리 스스로 최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닫힌 문 뒤에서 혹은 협상 테이블에서 결정이 이루어지면 더 쉽게 포섭이 발생한다. 모든 입장이 공개되면 투쟁하는 우리가 직접 결정할 수 있다. 우리의 총회는 정치 단체, 사회 단체, 노동자 단체를 비롯해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공개적으로 대표하는, 집단적이고 숙의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건물 점거가 민주적 표결로 결정되었다면 경찰이 시위대를 탄압하거나 강제 해산시키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여러 도시 혹은 전국에 걸쳐서 서로 다른 점거지와 캠프 사이에 조율이 이루어졌다면 훨씬 더 큰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경찰이 점거 농성을 해산하겠다고 위협할 때 여러 점거지들이 서로를 돕고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료적인 점거 농성 지도부가 이런 경험을 가로막았고, 점거 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가자 학살로부터 주의가 분산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총회와 자기조직화라는 방법을 제안한다. 우리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노동자와 학생이 가능한 한 폭넓게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같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의식적이고 항구적인 실천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뉴욕시립대학교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학 노동자들은 어떤 조치를 취할지 결정하는 세 차례의 총회에 참여하여 거수로 표결했다. 이것은 모든 대학과 노동자들이 따를 만한 본보기다. 중앙 집중화된 의사 결정에 맞선 투쟁은 학생운동 부문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더 광범위한 노동운동을 비롯해 팔레스타인 운동의 다른 부문들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휴전”을 요구하는 노조의 성명을 물론 환영하지만, 학살에 맞선 투쟁에 노동자운동이 더 크게 개입하려 할 때는 물론이고 작업장의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한 노동자 투쟁의 성공을 앞두고도 노동운동 관료들이 방해가 된 사례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의 지도력은 총회와 자기조직화의 발전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예를 들어 전미자동차노조(UAW)는 자신들의 요구 상당수를 쟁취한 역사적 투쟁을 벌였지만, 평조합원들 사이에 진정한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은채 한계를 지녔다. 팔레스타인 운동에 노조가 개입하는 것에 관해서도 똑같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노조 지도부는 학살을 끝내기 위한 집회나 행동을 추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스라엘 국가를 떠받치는 체제를 지지한다. UAW 위원장 숀 페인(Shawn Fain)이 “학살자 바이든(Genocide Joe)”을 지지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노동운동 지도부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미국의 노조 조합원들은 학살에 맞서고 운동을 지지하는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힘을 이용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에 대한 미국의 공모를 끝장내려면, 예를 들어 노동자들을 규율하고 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반노동 법률에 반기를 들려면,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 조직화가 필요하다. 정치적 기획들 자기조직화는 계급투쟁의 열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에게 이는 지배계급과 그 공모자들로부터 독립된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의 정치 권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출발점이다. 자기조직화는 노동자와 학생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숙의하는 정치적 주체가 되기 위한 토대다. 숙의적·민주적 총회를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의 운동을 확장하여 더 많은 부문을 끌어들이고 우리의 요구를 위해 함께 싸우게 만드는 열쇠일 뿐 아니라,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위해 싸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학살은 자본주의 체제가 전 세계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을 점점 더 비참하게 만들 뿐임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노동 대중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학살이다. 제국주의 정부들은 이 정도 규모로 학살을 자행하기 위해 전 세계 대중의 등 뒤에서 공작을 벌였다. 양당 체제, 즉 공화당과 민주당의 이해관계는 우리의 이해관계가 아니다. 미국에서는 서로 다른 정치적 기획들이 경쟁한다. 한쪽에는 이스라엘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 바이든과 민주당이 있다. 자국 패권에 대한 도전을 무력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정부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주민과 싸우기” 위해 국경순찰대 동원 정책을 실시하는 바로 그 정당 말이다. 트럼프와 공화당도 자기 적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이스라엘 국가와 집단학살을 지지한다. 그는 국경을 닫고 이민자들을 억압하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더 많은 보호주의 정책을 수립할 생각이다. 개선되지 않는 경제 상황은 트럼프의 대선 승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바로 이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으로 임금 가치가 하락한 “제도권” 노동자 운동의 지지를 얻기 위해 다툼이 벌어진다. 바이든은 구매력 하락 때문에 그들의 지지를 상당 부분 잃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조건적인 이스라엘 지지로 표를 잃었다. 트럼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현재 위기가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세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와중에, 트럼프와 바이든 중 누구도 자본주의 위기를 해결할 현실성 있는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심각해지는 빈곤과 불안정에 맞설 대안이 필요한 미국의 수백만 노동 대중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본주의 정부들의 취약점은 제3의 기획, 즉 다른 종류의 사회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 정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팔레스타인 운동 지도자들의 포퓰리즘적, 스탈린주의적, 마오주의적 정치는 결국 친바이든 정책에 적응해 버리고, 이 길이 자신들의 요구를 달성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대안이 필요하다. 자본가 계급과 독립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제3의 정당, 노동자 정당의 발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우리 운동의 자기조직화 안에서 시작된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라는 말을 끊임없이 듣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대학과 노조의 총회들처럼 우리 스스로 민주적 결정을 내릴 공간을 건설한다는 전망을 품고서, 우리는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계급 정당 건설의 일환으로 더 큰 노동자·학생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수 있다. 다시 한번 기억하자. 발언하고 표결하는 민주적 총회와 자기조직화는, 우리 노동자와 학생이 사회의 부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진전시키는 전위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멈추고 운영하고 바꿀 수 있다. 노동계급의 자기조직화는 이 체제를 무너뜨릴 힘을 모으는 첫걸음, 사회의 모든 것을 생산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함께 모여 단결할 때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어디서든 자기조직화를 시작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인종, 신념, 피부색을 가지고 우리를 분열시키려 한다. 우리는 이 장벽들을 허물고 진정한 이중권력과 자기조직화를 위해 싸우고자 한다. 2024년 6월 14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글을 번역함. 글쓴이: Marcos Nok and Mi Ka 번역: 강성윤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2026-06-08 | 조회 18,140 -
[번역] 마르크스주의, 트랜스 해방, 그리고 젠더의 사회적 구성새로운 세대의 퀴어 활동가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트랜스 및 퀴어 해방을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는가? 2020년은 미국 역사상 트랜스젠더 살해 사건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미국 전역의 주 정부들은 현재 트랜스 청소년의 권리를 대폭 축소할지 여부를 논의 중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배계급 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세력은 “트랜스젠더 문제”에 대해 손만 비비며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퀴어 활동가 청년층은 점점 더 부상하고 있다. 이들 청년들—그중 다수가 트랜스젠더이다—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특히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요구를 운동의 의제로 포함시키도록 이끌었다. 이를 위해 브룩클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흑인 트랜스젠더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진보적인 본능과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태동하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퀴어 활동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불신한다. 이는 주로 수십 년에 걸친 자본주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방 캠페인의 결과다. 활동가들의 살해나 투옥 같은 극단적인 사례부터, 퀴어 권리의 일부 진전과 같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특정 요구를 신자유주의에 편입시킨 방식에 이르기까지, 자본가 계급은 오랫동안 이데올로기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지지자들을 스탈린주의와 연관시키며,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 투쟁을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분리시키려 해왔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비방 캠페인은 — 주로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실패와 결합되어, 많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마르크스가 단지 자신의 경험 바깥을 바라볼 수 없었던 이성애자, 백인, 유럽인, 시스젠더 남성에 불과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의심하는 이들은 동성애 해방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의 역사적 실패와 트랜스 해방 문제에서 일부 단체들의 현재의 실패를 모두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트랜스 해방 지지를 반대하고자 일부 소위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이 사용하는 논리를 분석해 보면,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히려 그들은 정체성과 욕망의 해방을 반대하는, 인종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억압적인 자본주의 국가 편에 서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 되는 철학적 원칙을 거부한 반동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가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며, 우리는 그들로부터 마르크스를 구출하고, 마르크스주의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유일하게 진정한 해방 전략이라 주장해야 한다. 트랜스혐오적 “좌파”의 실패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왜곡을 반박하기 위해, 유감스럽게도 그들 중 일부와 논쟁을 벌여야 한다. 20세기 이래 자칭 좌파 내에서 게이 및 트랜스 해방을 반대하는 가장 큰 세력은 스탈린주의였다. 스탈린과 그의 동맹자들은 동성애 합법화와 같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사회적 성취를 배신했다.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는 보수적인 사회적 세력이 되어, 노동계급의 전체 부문이 제기한 요구들을 진정한 사회주의를 방해하는 소부르주아적 혼란으로 치부해버렸다. 이는 러시아, 쿠바, 그리고 20세기 수많은 변형된 노동자 국가들*에서의 반퀴어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미국과 그 밖의 지역에서 공산당 내 퀴어 당원들을 제명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이러한 사회적 보수주의는 오늘날에도 많은 스탈린주의 분파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기사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심각한 정치적 문제들로 가득 찬 영국 공산당은, 2019년에 “‘성별 유동성’이라는 반동적 악몽”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는데, 이 글은 트랜스젠더들과 우리의 동맹들이 “성별의 물질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그들이 성(sex)과 젠더(gender)가 동의어라고 주장한다(두 개념은 동의어가 아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1] 이것이 반反-트랜스 “좌파” 대다수의 주된 논리다. 하지만 트랜스혐오적인 “좌파”는 스탈린주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트랜스 해방을 가치 있는 투쟁으로 인정하지 않는 다양한 절충적인 성향의 집단들도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트랜스해방투쟁이 다른 투쟁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킨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모든 억압을 무시하고 착취에만 집중하는 계급 환원주의적 전략을 함의한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을 표방하는 블로그 Freer Lives와 같은 다른 이들은 더 나아가 트랜스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고 주장한다. Freer Lives가 2020년에 발표한 “모든 좌파는 여성 권리에 관하여 J.K. 롤링을 지지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주장했듯이, 젠더 이데올로기의 성차별주의에 맞서 여성을 옹호하는 롤링의 입장은, 실제로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 새로운 성차별주의를 이용해 여성 억압을 유지하려 해온 자본가 계급과 그 엘리트 하수인들의 이익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좌파-자유주의자들(left-liberals)과 극좌파들은 바리케이드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 안타깝게도, 퀴어성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보수주의는 20세기 일부 트로츠키주의 정당들 속으로도 스며들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 중에는 게이 해방 운동에 동참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의 제4인터내셔널 내 최대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스톤월 사건 전후로 급속히 성장하던 게이 권리 운동에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퀴어 민중들에 대해 매우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카스트로가 이끄는 관료 체제에 무조건적인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SWP는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퀴어임을 드러낸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6년, CWI(또 다른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당원들은 팸플릿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진지한 사회주의자들은 “게이 해방”이 노동 운동에 독립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조금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 반대를 증명하기 위해 때때로 제시되는 온갖 기이한 이론과 감성적인 주장들은 순수한 학생 정치에 여전히 만연한 극심한 혼란과 전망 부재의 증상일 뿐이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퀴어 정체성에 대한 “이론적” 반대가 퀴어 민중들의 삶과 퀴어 해방 운동에 대한 정치적·물질적 반대로 빠르게 변화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노동계급 내 퀴어 구성원들과 정치적 경향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분열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왜냐하면 노동계급 내 퀴어 구성원들은 마르크스주의 정당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워줄 것이라고 항상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매우 명확해야 한다. 퀴어 및 트랜스 노동자에 대한 지지는 어떤 사회주의 단체에게 있어서도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요소여야 한다. 그러나 퀴어 및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러한 노선의 문제는 단순히 억압받는 집단의 해방 투쟁을 거부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이 입장은 또한 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 모두에 대한 중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즉, 트랜스젠더 해방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세력들은 부르주아 도덕에 적응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마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을 취하는 집단들은 사회 통제를 유지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편에 서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신체와 욕망이 온전히 발전하는 것을 계속 부정하는 사회의 가장 우익적인 세력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이 집단들은 사실상 퀴어 해방 운동을 신자유주의에 넘겨주어, 운동이 포섭되도록 방치하고 국가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론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소위 좌파 집단들은 모든 좌파 정치의 근본적 목표인 인간 해방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서 반동 세력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우리의 동지가 아니며, 좌파들 속에서 패배시키고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측면에서만 그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젠더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젠더는, 이 트랜스혐오자들이 주장하듯이, 생물학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현대적 형태에서, 젠더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현대적 형성에 이르게 된 역사적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존 디에밀리오(John D’Emilio)가 『자본주의와 게이 정체성』(Capitalism and Gay Identity)에서 쓴 바와 같이, 게이와 레즈비언은 항상 존재해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의 산물이며,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했다. 그들의 출현은 자본주의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20세기 후반에 수많은 남성과 여성이 스스로를 게이(gay)라고 칭하고, 비슷한 성향의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하며, 그 정체성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더 구체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 체제 덕분이었다.[2] 디에밀리오(D’Emilio)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부상이 정체성(identity)의 발명에 물질적 조건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생산이 가정 밖—공장 및 여타 작업장—으로 점점 더 이동함에 따라, 사람들은 가족 밖에서 삶을 꾸릴 자유를 점점 더 많이 얻게 되었다. 이것이 정체성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그 이전에는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남성이 있을 수는 있었지만, ‘게이’라는 정치적·개인적 범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젠더의 경우에도 유사한 과정을 볼 수 있다. 젠더화된 관계는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지만, 현재 이해되는 바와 같은 젠더의 구체화는 자본주의의 부상과 함께 일어났다. 많은 전(前)자본주의 문화는 성별에 대해 비이분법적인(nonbinary)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원주민 문화에서 특별히 말살됐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자본주의 생산 체계에서 매우 특정한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바로 전형적인 무급 재생산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핵가족에 대한 현대적 이해가 등장했으며, 이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를 재확인하고 강화했다. 핵가족이라는 매우 귀중한 자본주의적 도구를 보호하기 위해, 이 이성애규범적 가족 단위에 도전하는 젠더 표현들은 억압당하고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실제로 젠더 구조는 항상 지배와 폭력의 기반 위에 있었다.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에서 쓴 바와 같이, [어머니]의 전복은 여성 성별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성은 가정에서도 지휘권을 장악했고, 여성은 격하되어 노예 상태로 전락했으며, 남성의 정욕의 노예이자 단순히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여성의 이러한 격하된 지위는 … 점차 완화되고 미화되었으며, 때로는 더 온화한 형태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결코 폐지된 적은 없었다. 젠더의 형성 젠더 비규범성에 대한 억압은 문화의 거의 모든 요소에 스며들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헤게모니적 이해를 형성했다. 이 과정은 “젠더 규율”(disciplining gender)이라고 불려왔다.[3] 이를 통해 우리는 젠더가 결코 생물학적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학적 범주이다. 영국 공산당의 횡설수설로 돌아가 보자면, 그들은 앞서 인용한 같은 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트랜스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은 성별이) 일종의 의학적 음모라고 주장한다. 즉, 출생 시 의사들이 모여서 의논한 뒤 당신에게 “젠더 역할(gender role)을 할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산부 여러분: 20주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 여러분은 아기가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레드 파이트백’(Red Fightback)은 이렇게 말한다.)[4] 그건 전부 의학적 음모일 뿐이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 그들이 아기를 검사하고 말한다, 남자아이라고, 또는 여자아이라고 —그것도 전부 의학적 음모다! 이런 것들(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남성과 여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 모르겠는가?? 간성(인터섹스) 아기들의 존재는 차치하고라도 — 그들은 자신들 주장의 전체적인 유사과학적 근거를 무너뜨릴까 봐 이 문제를 신중하게 회피하고 있지만 — 아기가 태어날 때 우리가 그들에게 정체성과 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공상적인 입장이다. 갓 태어난 ‘남아’에게는 파란 담요를, ‘여아’에게는 분홍 담요를 사준다. 최근 잇따른 지독한 젠더-리빌(성별공개) 파티 사례만 봐도,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이의 젠더에 얼마나 큰 의미가 부여되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의학적 음모는 아니다 — 비록 우리가 간성인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아기의 동의 없이 규범적인 신체상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의학적 음모이지만 — 오히려 출생 전부터 자아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사회정치적 맥락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칭 마르크스주의 단체가, 사회가 아이들에게 출생 시 젠더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현대 사회 전체를 외면하는 것이며,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게다가 젠더를 구성하는 요소의 상당 부분은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소위 ‘젠더 표지(gender markers)’에 있다. 예를 들어, 드레스는 여성적이고 정장은 남성적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역사적으로 변하지 않는 상수는 아니다. 비교적 최근의 역사 속에서 하이힐이 남성의 것으로 여겨지거나 소년들이 종종 드레스를 입던 시절도 있었다. 시아라 크레민이 저서 『남성화된 여성: 크로스드레싱의 변증법』(Man-Made Woman: The Dialectics of Cross-Dressing)에서 설명하듯이, 서구화되거나 유럽적인 여성적 스타일의 즐거움은 그 무엇보다도 미학적이다. 우리는 차려입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비단 같은 원단, 반짝이는 것들, 그리고 생생한 색상을 즐긴다. 역사의 우연이 파란색을 남성적인 상징으로 만들었다. 남성에게 있어 면 양말은 좋고, 팬티스타킹은 나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비합리성이 제2의 본성이 되었다.[5] 무엇이 여성에게는 하이힐이, 남성에게는 부츠가 어울리도록 만들었을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젠더는 사회적 지위와 다양한 젠더 표지들로 구성되며, 크레민의 말대로 “역사의 우연”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젠더 자체가 사회적 구성물인 반면, 젠더화(gendering) 행위 자체는 매우 물질적인 과정이다. 특정 방식으로 젠더화된다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매우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젠더화에 저항하는 것은 종종 사회적 고립과 심지어 폭력에 직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은 트랜스 경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젠더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별화된 범주들의 집합이자, 억압과 종종 폭력까지 수반하는 매우 실체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이다. 이는 두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첫째, 젠더화 과정이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개별화된 관점에서는 트랜스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는 해방이 개인 단위의 과정(person-by-person process)이라고 주장하는 이 글 후반부에서 논의할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젠더화는 그 어떤 개인적인 행동이나 개인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에, 해방은 반드시 집단적인 반자본주의 투쟁(mass anti-capitalist struggle)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 “젠더의 물질적 현실”을 거부하는 것은 트랜스젠더들이 아니라, 오히려 젠더에 대한 비역사적인 생물학적 정의를 고수하며 젠더의 역사적 현실과 젠더화의 물질적 현실을 모두 거부하는 바로 이 “젠더 비판적 좌파들”이다. 영국 공산당과 그 일당이 음모론으로 치부하려는 것은 사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장 쉽게 관찰되고 기록된 사회적 통제 과정 중 하나이다. 변증법적 젠더 이 혁명가 행세를 하는 트랜스혐오자들은 젠더의 역사적 현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인된 정치적 입장과 반동적인 정서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고집스럽게 찾으려 하면서 변증법 자체도 거부한다. 젠더가 생물학적으로 정해져 있어, 결코 변하지 않거나 새로운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비변증법적이다. 이는 출생 시 부여받은, 삶의 물질적 현실과 무관하게 결코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체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위에서부터(*역주: 신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로부터) 내려받은 존재라는 관점을 거부한다. 이러한 반反-트랜스 가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려면, 젠더는 변할 수 없다는 그들의 노선에 동의해야만 한다. 하지만 설령 젠더가 생물학적이라는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이 젠더가 변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눈과 머리카락은 (대부분의)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염색하거나 컬러 렌즈를 착용할 수도 있다(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들이 “머리카락 색깔의 물질적 현실”을 거부하는 것인가? 태어날 때 사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가 사고로 한쪽을 잃은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물질적 현실을 배반하는 것인가? 변화하는 조건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생물학적으로 미리 정해진 속성들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설령 젠더를 생물학적 성별(Sex)과 동의어로 보는 과학적으로 부정확한 정의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렇다면 간성인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간성인 영아들에게 그들의 동의 없이 성별의 규범적 범주에 맞추기 위해 수술을 시행하는 의사들은, 이 간성인 아이들의 물질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부르주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젠더 거부 행위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는 이 사회주의자들은, 왜 이러한 비동의적 성전환 수술에 대해서는 똑같이 분노하지 않는가? 이 모든 주장은 과학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젠더는 물질적 조건이나 개인의 신체적 속성을 초월하는 무엇이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정의하는 더 높은 차원의, 일종의 도덕적 진리여야 한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반反변증법적이며, 따라서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이다. 엥겔스가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반뒤링에서 썼듯이, 우리는 따라서 도덕 세계에도 역사와 민족 간의 차이를 초월하는 영구적인 원리들이 있다는 구실을 들어, 어떤 도덕적 교리를 영구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히 불변하는 윤리 법칙으로서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우리는 반대로, 모든 도덕 이론은 궁극적으로 당시 사회의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가 지금까지 계급 대립 속에서 움직여 왔듯이, 도덕은 언제나 계급의 도덕이었다. 그것은 지배 계급의 지배와 이익을 정당화해 왔거나, 억압받는 계급이 충분히 강력해진 이후로는 이러한 지배에 대한 피억압자의 분노와 미래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 지식의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도덕에서도 전반적으로 진보가 있었다는 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교리를 “영원하고, 궁극적이며, 영원히 불변하는 윤리법”으로 믿는 것은 지배 계급의 도덕, 즉 노동계급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데 이용되는 도덕에 대한 묵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위 “젠더 이데올로기”에 맞선 전사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부르주아 도덕에 좌파적인 위장을 제공해 주고 있다. 트랜스 마르크스주의의 향방은?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일부 세력이 퀴어와 트랜스 해방 투쟁을 항상 지지해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반反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은 것일까? 우리 퀴어와 트랜스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해방과 양립할 수 없는 이론으로 치부하고 버려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호한 ‘아니오’이다. 우선, 마르크스주의 운동과 퀴어 해방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퀴어 해방이라는 과제가 제시되었을 때 많은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이 이를 강력히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퀴어라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한 것은 초기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렇게 하기 수십 년 전에 볼셰비키는 러시아에서 동성애를 합법화했다. 그리고 현재도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결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좌파의 상당 부분의 퇴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동성애자 해방 전선 전 멤버였던 마르셀로 베니테스(Marcelo Benítez)가, ‘레프트 보이스(Left Voice)’의 아르헨티나 자매 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지적한 바 있다. 1970년대 퀴어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경험을 회고하며 그는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좌파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 좌파 내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퀴어 문제와 관련하여 좌파 일부 세력의 실패를 바라볼 때 매우 비판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패를 마르크스주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스탈린주의자 및 기타 집단이 퀴어 해방 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부재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에게 해방을 위한 필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현재 운동 내의 잘못된 지도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도구도 제공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한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칭호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기보다는, 우리는 그들을 트랜스 배제적 급진 페미니스트들, 심지어 종교적 우파의 일부보다 나을 바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거부해야 한다. 영국 공산당은 그들의 모든 주장과 구호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정의한 방식의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왜곡자들은 이론적·정치적 영향력이나 지도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저술하고 레닌과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트랜스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명확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랜스 여성이자 레프트보이스의 브라질 자매 단체 회원인 버지니아 기첼(본 호의 다른 기사에서 인터뷰됨)의 말을 인용하자면, 분명히, [책 트랜스젠더 마르크스주의의 출간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완전한 해방에 관심이 없으며 트랜스 해방 논의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백인, 유럽인, 이성애자, 시스젠더 마르크스에 대한 관점에 반박한다. 혹은 마르크스가 여성 해방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단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시장 진입뿐이었다는 관점에도 반박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실현은 삶의 모든 영역을 변혁하려는 시도의 정점이었으며, 러시아는 임신중단을 합법화하고 동성애를 비범죄화하며 공공 구내식당, 세탁소, 어린이집을 보장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혁명기 러시아에서 벌어진 혁명과 반혁명의 과정은 또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인 레온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연속혁명론’의 과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있어 21세기를 위한 마르크스주의의 모습이다… 즉, 계급 투쟁은 권력 장악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격화된다는 결론이다. 혁명은 해방의 과정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작할 뿐이라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개인적 해방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사상이나, 혁명이 자동적으로 해방을 가져올 것이니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계급 환원주의 단체들의 뻔한 주장보다 훨씬 더 명확한 트랜스 해방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서만 우리는 이 전략을 트랜스 해방 과제에 어떻게 적용할지, 그리고 트랜스 해방 운동의 주도권을 위해 어떻게 투쟁할지 발견할 수 있다. 트랜스 해방 운동 지도부의 실패 조직화된 좌파의 상당 부분이 퀴어 해방 운동에 대한 주도권과 관심을 포기한 상황에서, 현재 이 운동의 지도부는 불균형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이들은 계급 정치를 거부하고, 대신 정체성 중심적(identitarian)이고 개인주의적인 정치를 채택한다. 이 중 한 부류는 케이틀린 제너나 피트 부티지지 같은 인물들을 대두시키는 대표성 정치(representational politics)에 매몰되어 있다. 이런 인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화하여 퀴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를 은폐한다. 또 다른 부류는 선거 정치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어, 트랜스 억압을 지속시키는 국가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 이 세력은 진보 성향의 인사나 퀴어 및 트랜스젠더 인사들이 의회에 충분히 당선되기만 하면, 그들이 트랜스젠더 억압을 종식시킬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트랜스젠더 억압은 이 글의 다른 부분에서 다룬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의 일부다. 이를 고려할 때, 트랜스젠더 억압은 단순히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므로 국가가 이를 종식시킬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반反트랜스 법안의 폐지와 트랜스 커뮤니티를 위한 중요한 개량을 위해 싸워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싸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타협책을 자본주의의 현실을 바꾸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트랜스 활동가들에게 민주당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권유하는 것에서부터 동화(assimilation)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에 이르기까지, 퀴어 운동의 이러한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일관되게 급진성을 약화시키는 세력이 되어 왔다. 트랜스 해방 운동의 또 다른 부류는 접근 방식은 더 급진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마찬가지로 개량주의적이다. 보통 스스로를 급진주의자라고 칭하는 이 세력은, 마르크스주의와 모든 총체적·보편적 이데올로기의 가치를 모두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퀴어 이론의 영향을 받은 전략을 따르는데, 이는 결국 해방 투쟁을 개인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다시 말해, 이 전략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세상을 바꾸는 수단으로 본다. 이 전략의 핵심은, 트랜스혐오를 극복하는 길은 먼저 자신의 내면화된 편견을 인식하고 변화시킨 다음,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돕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전략을 신봉하는 이들은 또한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동성 결혼 합법화와 같은 성과는 단지 동화주의에 불과하며, 현 체제 내에서 결혼이 주는 실질적 혜택과 무관하게 “체제”에 굴복하는 것일 뿐이므로, 어떤 개량도 싸워 얻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전략은 체제에 어떻게 “저항”하거나 싸울지에 대한 많은 길을 제시하지만, 궁극적인 승리와 퀴어 해방으로 향하는 길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아무런 진전도 없이 영원히 저항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틀 안에서, 중간적인 “승리”조차도 승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로부터 얻은 것은 무엇이든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트랜스젠더들이 심각한 억압에 직면하는 것은 단지 트랜스혐오자들 때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그들을 착취하고 비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트랜스젠더들의 물질적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는 물질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대표성(representation)은 물질적 해결책이 아니다. 아무리 선의가 가득한 트랜스젠더라 해도 혼자서 자본주의 체제를 내부에서 바꿀 수는 없다. 실제로 “권력 구조를 내부에서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거의 전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는 흑인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끝내지 못했고, 여성 부통령이 성차별을 끝내지 못했으며, 게이 CEO들이 동성애 혐오를 끝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또다시 그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야 하는가? “우리는 대표성 정치가 과거에 실패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본의 홍보 담당자들은 우리가 이렇게 믿게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입니다. 이제 트랜스 CEO가 더 많아지면 실제로 뭔가 달라질 것입니다.” 더 많은 트랜스 CEO를 고용하고 더 많은 트랜스 정치인을 선출함으로써 체제가 스스로 바로잡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패배가 확실한 내기이며, 현재 많은 주에서 역사적인 수준의 억압에 직면해 있는 트랜스 아이들을 버리는 행위다. 이는 매일 살해당하는 트랜스 여성들(대부분이 흑인 및 유색인종(brown)이다)을 버리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세상에 억지로 적응해야 하는 트랜스 성노동자들과 논바이너리 사람들을 버리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말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 인내심이 희생자를 낳는다는 것을 이미 목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치를 단순히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은 조직화되어 있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군데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종식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퀴어 이론은 승리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거부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트랜스 및 퀴어 해방을 위한 투쟁에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을 채택해야 한다. 트랜스 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트랜스젠더와 다른 특별하게 억압받는 집단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뿐임을 인식한다. 이는 어떤 도덕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다. (거의 모든 퀴어들이 알고 있듯이, 노동계급 구성원들도 신념은 매우 반동적일 수 있다.) 이는 오직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전략적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은 노동계급, 오직 노동계급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경제 전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므로, 오직 그들만이 경제를 멈출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는,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이 트랜스 억압의 모든 사례도 즉각적으로 종식시킬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연속혁명 이론이 보여주듯이, 사회주의의 수립은 트랜스 해방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계급”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한다. 오랫동안 노동계급은 안전모를 쓴 시스이성애자 백인 남성이라는 이미지로 그려져 왔다. 물론 그 남성들도 노동계급이지만, 웨이터와 성노동자, 교사, 택배 기사, 개인 비서, 그리고 온갖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 즉 우리가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이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 역시 노동계급이다. 게다가 미국의 노동계급은 인종적 측면은 물론 젠더와 성적지향의 측면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다. 트랜스젠더와 퀴어의 압도적 다수는 노동계급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가 “노동계급이 특히 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백인 구세주들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을 구하러 날아와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이 스스로 일어나,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의미다. 이 점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사례 중 하나는 아르헨티나의 마디그라프(Madygraf) 공장에서 시스젠더 노동자들이 트랜스젠더 동료의 더 나은 근무 조건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던 사건이다. 그 파업은 마디그라프에서 진행 중이던 운동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으며, 결국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공장은 노동자 소유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공상적인 환상을 품고, 언젠가 노동계급이 트랜스포괄적인 혁명적 강령을 가지고 깨어날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트랜스 해방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가장 시급한 필요 중 하나를 매우 명확히 인식해야한다. 바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지도력(leadership)이다. 이러한 지도력은 노동계급과 특히 억압받는 이들로부터 건설되어야 하는 전위당(vanguard party) 형태를 띠며, 이 당은 혁명의 순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스스로를 준비해야 한다. 트로츠키의 말처럼, 혁명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된 당만이 수행할 수 있는 준비 작업이 승패를 가를 것이다. 물론 이는 당연히 전위당의 당원들이 혁명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손가락만 비비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 투쟁에 참여하며, 끊임없이 반자본주의적 관점을 위해 싸우고, 운동이 억압받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해야 한다. 트랜스 해방을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이다. 오직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 사회의 도래만이 트랜스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우리가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다. 2021년 6월 6일 Left Voice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시빌 데이비스 번역: 돌멩 [1] 성(sex)은 태어날 때 부여받는 생물학적 특성이다. 이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을 대략 네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다: 음경이 있는 사람, 질이 있는 사람, 둘 다 있는 사람, 그리고 둘 다 없는 사람이다. 반면 젠더(gender)는 개인적 정체성, 사회적 관계, 외모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더 복잡한 사회정치적 과정이다. 젠더를 결정하는 과정이 이토록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이 될 수 있는 젠더의 수는 사실상 무한하다. [2] John D’Emilio, “Capitalism and Gay Identity,” in Powers of Desire: The Politics of Sexuality, ed. Ann Barr Snitow, Christine Stansell, and Sharon Thompson (New York: Aakar Books, 2009), 100–113. [3] John M. Sloop, Disciplining Gender: Rhetorics of Sex Identity in Contemporary U.S. Culture (Amhers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2004.) [4] 역주: 영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을 표방하던 레드 파이트백은 2020년에 『마르크스주의와 트랜스 해방: 영국 좌파 내 트랜스혐오에 맞서다』라는 책을 썼다. 저자가 인용한 영국공산당의 구절은 레드 파이트백의 주장을 ‘의학적 음모’를 주장하는 것이라며 비꼬고 있다. 레드 파이트백은 현재는 조직 내부 균열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5] Ciara Cremin, Man Made Woman: The Dialectics of Cross-Dressing (London: Pluto Press, 2017).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2026-05-25 | 조회 16,535 -
[사회주의 기초학습#12]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노선착취 당하는 모든 노동자가 날카로운 계급의식을 가진다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며 정세에 따라 진동한다. 때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나게 퇴보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일부로서의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노동자계급’ 그 자체는 구분된다. 특정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 운동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끄는 의식적 집단이 바로 당이다. [목차] 1. 노동자계급에게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한가 1) 노동조합 투쟁,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노동 2)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 3) 전 계급의 단결에 기초한 대중권력기관, 노동자평의회 4)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 이유, 계급의식의 불균등성 5)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정당 2. 전위정당에 대한 이해 1) 누가 당원인가? -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규약 1조 논쟁 2) 당과 대중의 관계 3)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조직 4)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비판 3.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 1) 노동자계급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 - 칠레와 그리스의 경험이 말하는 것 2)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으로서의 노동자 혁명 3) 노동자계급 국제주의 – 국적이 아니라 계급으로 단결하자 4) 노동자계급 공동전선 추동 5)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 1. 노동자계급에게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한가 1) 노동조합 투쟁,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노동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본가계급은 착취강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자본가계급은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고자 가능한 한 임금을 줄이고,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를 늘리고, 더 많은 노동자를 기계설비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지속한다. 많은 경우, 조직되어 있지 않은 다수의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가의 착취 강화시도는 생존을 위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 곧 계급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투쟁은 단지 경제적 문제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1838년부터 10여 년간 이어진 영국노동자들의 인민헌장 제정운동, 프랑스 노동자들의 1848년 2월혁명과 6월 봉기, 그리고 1871년 파리코뮌,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독일혁명, 1936년 스페인혁명, 1968년 프랑스 5월혁명, 1987년 한국 노동자대투쟁 등등. 자본주의의 역사는 거대한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와의 적대적 이해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 즉 계급의식을 형성한다.[1] 노동자계급은 이런 각성과 함께 계급조직을 건설해왔다. 계급투쟁의 경험이 조직이라는 물질적 형태로 축적되지 않는다면, 그 성과는 자본의 반격과 함께 형체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중 노동조합은 가장 보편적인 계급조직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철폐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조합의 작동 원리는 자본주의적 임노동관계, 즉 노동력 상품화를 전제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자본가에게 판매해야 생존할 수 있다. 노동조합의 본질적 기능은 노동력 상품을 자본가에게 더 높은 가격, 즉 더 높은 임금에 판매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노동력 상품을 (자본가의 의도에 비해) 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노동조합이 노동력을 ‘집단적으로’[2] 판매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노동조합 활동인 ‘단체’교섭(collective bargaining)의 본질은, 조합원집단의 노동력 판매 조건을 둘러싼 자본가와의 흥정[3]과 투쟁이다. 미조직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개별로 판매해야 하나, 조직노동자는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은,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뜨려 더 많은 이윤을 쌓으려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조합원의 생존권을 방어한다. 이렇듯 노동조합은 착취가 이루어지는 조건을 개선하고, 착취의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에게 줄 수 있는 성과는 자본의 안정적인 이윤축적과 직결되어 있다. 전반적인 이윤축적의 위기가 도래하거나, 한 자본이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 뒤처져 지불능력이 부족할 경우, 노동자는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높은 값에는커녕 노동력 재생산비용 이하로 판매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그렇기에 불황이 도래하면 상당수 노동조합은 임금삭감, 노동조건 후퇴, 해고를 용인하기도 한다. 호황기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더 많은 임금과 복지를 요구하며 불황기에 겪은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요구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적어도 일상적 시기에는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회사가 있어야 근로자도 있다’는 인식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단지 자본가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노동력을 팔아야 생존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상황, 또한 혁명적 노동자조직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계급의 상황에 기인한다. 앞서 설명했듯, 노동조합은 착취의 원인인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와 ‘노동력 상품화’ 그 자체에는 맞서 싸우지 않는다. 그저 자본가의 공격에 맞서 방어하고 또 방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투쟁을 ‘시시포스의 노동’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조합은 바로 이윤의 공격에 대항하려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된 방어,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경제가 가지고 있는 임금률을 아래로 억누르는 경향에 직면하여 노동자 계급을 보호하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노동조합의 과제는 자신의 조직을 통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시장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은 중산계층이 프롤레타리아화되면서 끊임없이 노동시장에 새로운 상품을 제공하기 때문에 계속 파괴된다. 둘째, 노동조합의 목적은 노동자 계급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 즉 사회적 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몫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몫은 노동 생산성이 향상함에 따라서 자연적인 과정처럼 숙명적으로 계속 낮아진다. … 노동조합을 통한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들로 인해 일종의 시시포스 노동으로 바뀐다.[4] 2)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 통상 자신의 활동을 소속 ‘조합원’의 권익 실현에 한정한다는 점 역시 노동조합의 주요한 특징이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수많은 업종과 고용형태로 분리되어 있기에, 특정 노동자의 당면 이해와 전체 노동자들의 장기적 이해는 때때로 충돌한다. ‘조합원’의 이해를 우선하는 노동조합의 동학상,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는 종종 노동조합의 투쟁 과제에서 배제된다.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하고 파괴하기까지 하는 정규직 이기주의, 여성노동자 차별을 구조화하는 성별임금 이데올로기,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등이 그 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체 노동자계급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형성되기도 한다. 특정 산업의 호황과 해당 산업 노동조합이 보유한 교섭력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집단, 소위 ‘노동귀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다.[5] 이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윤율 저하에 따라 자본주의의 위기가 만성화한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을 더욱 가혹하게 공격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이윤축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에서 신자유주의로 이행하며 케인즈주의 계급타협 체제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이 나라의 조건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대다수 노동자계급이 생존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극히 일부 노동자들이 고임금과 기업복지를 누리며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한 미조직 대중의 반동적 정서를 강화한다. 앞서 말한 대로 미조직 대중은 자신의 노동력을 개별로 판매해야 하는 처지다. 지배계급은 미조직 대중의 분노를 십분 활용해 조직노동자운동을 탄압한다. 노동조합은 이런 한계들을 가진다. 이렇듯 노동조합은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조직이나, 그 자체만으로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이익을 위한 투쟁을 조직할 수 없다. 특정한 조직은 특정한 의식을 낳는다. 혁명조직은 혁명적 의식을, 조합조직은 조합적 의식을 낳는다. 단기적이고 부문적인 이해관계에 종속된 노동자 의식,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노동자 의식을 ‘조합주의’라고 한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에게는 조합주의를 넘어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할 조직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하고 실현하며,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권력기관 그 자체로서 노동자계급을 지배계급으로 조직할 전체 노동자계급의 투쟁조직이 바로 노동자평의회다. 또한 노동자평의회가 창출되기까지 노동조합을 포함한 계급조직 안에서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이끌고, 노동자평의회 내부의 한 경향으로서 활동하며, 노동자평의회를 노동자 권력으로 이끄는 의식적 지도조직이 바로 사회주의 노동자당이다. 3) 전 계급의 단결에 기초한 대중권력기관, 노동자평의회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폐지가 필수적이다. 사적소유는 자본가들의 개별적 생산수단 소유에서, 주식회사나 국유기업 같은 집단적 소유까지 다양한 형식을 취하지만,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과 노동과정에 대한 지배력을 독점한다는 점은 다양한 형식을 관통해 동일하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폐지, 즉 사회적으로 연합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며, 따라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쟁취하는 것은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서 핵심적인 토대다. 이 토대는 개별 기업이나 특정 산업부문, 일부 지역에서 마련될 수 없다. 전국적이고 전면적인, 모든 산업에 걸친 변혁이 이뤄져야 생산수단 사적소유를 폐지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일관되게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폐지하고 노동자계급의 공동체적 소유를 전면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힐 자본가계급의 공공연한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여전히 남아 있을 노동자계급 내 의식 편차를 극복하고 다른 피억압 민중과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노동자계급은 국가권력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재생산하는 선거, 그 선거로 만들어지는 의회를 바탕으로 노동자 권력을 세울 수는 없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남긴 억압적, 관료적 국가기구를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할 수 없다. 기존의 국가 질서는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을 유지하고 혁명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회혁명에 나선 노동자들은 낡은 억압적, 관료적 국가기구를 해체하고, 작업장에 바탕을 둔 대중적, 민주적 평의회 권력기구를 새롭게 창조해내야 한다.[6] 4)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 이유, 계급의식의 불균등성 착취 당하는 모든 노동자가 날카로운 계급의식을 가진다면 자본주의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할 것이고, 전투적 임금·단체협상 투쟁은 물론 계급적 연대투쟁에 나설 것이며,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을 통해 국가권력 장악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7]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며 정세에 따라 진동한다. 때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나게 퇴보하기도 한다. 10% 남짓한 한국 노동조합 조직률이 드러내듯, 일상적 시기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노동조합에서 투쟁하는 노동자조차 소수일 수밖에 없다. 일상적 시기에 다수 노동자는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단결을 막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능력주의, 성차별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이 물질적 힘으로서 존재하는 이유, 노동자계급의 다수가 가장 보편적인 계급조직인 노동조합으로조차 조직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사회의 정신적 힘도 지배한다”는 맑스의 말마따나, 피지배계급을 분열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유포할 수 있다는 것이 지배계급의 힘이다. 운동의 퇴조기에는 많은 노동자가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린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당은 일상적 시기와 운동의 퇴조기에도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끌고자 노력한다. 당의 입장이 당장 큰 반향을 얻기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당은 대중 속에서 호흡하며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하고, 정세에 대한 대응방향을 제시하며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야 한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다. 투쟁하지 않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자연히 투쟁대열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경제위기가 저절로 계급투쟁 격화를 낳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일부로서의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노동자계급’ 그 자체는 구분된다.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부분이다 :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8] 위 글에서 추론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자 계급에게는 다수의 당이 존재한다. 하나의 계급에게는 하나의 당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9] 둘째, ‘공산당’은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대립되는 당은 아니지만 구별되는 당이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일부’이다. 셋째,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대변한다. 즉, 특정 프롤레타리아의 단기적 이해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주의자들은 양자가 충돌할 경우 단호하게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대변한다. 넷째, 공산주의자들은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는 점에서 선진적 집단이다. 이렇듯 특정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 운동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끄는 의식적 집단이 바로 당이다. 앞서 살폈듯,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조차 자신이 속한 산업과 고용형태에서 유래하는 부문적 이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당의 주요 과제는 대중의 계급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한 투쟁,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추동하는 투쟁이다. 당은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을 이끈다. 5) 노동자평의회와 사회주의 정당 그렇다면 앞서 살핀 노동자평의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필요한가? 그렇다.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은 노동자평의회 내에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평의회, 두 조직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평의회는 대중의 권력기관이며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 평의회 내에서 다른 정치적 경향과 경쟁하며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고자 분투한다. 러시아혁명 당시를 살펴보자. 혁명의 과정 속에서 당(볼셰비키)과 평의회(소비에트)의 관계는 매우 역동적이며, 사건의 흐름은 노동자평의회가 대중의 요구를 왜곡하고 굴절시키는 경우도 얼마든지 드러낸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자본가들의 권력기관, 임시정부는 즉각 전쟁을 끝내라는 대중의 요구를 결코 수용하지 않았으나, 소비에트는 10월 혁명 직전까지도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는 당면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못 박은 소비에트 다수파의 정치적 입장에 근거했다. 각 당파는 소비에트에 대한 정치력 영향력을 분점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를 제외한 정치세력은 소비에트를 그저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했다. 그랬기에 소비에트를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가 곧 소비에트가 권력기관이 될 수 있느냐, 혁명이 전진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혁명 초기 소비에트에 대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1917년 4월, 전쟁 중인 독일과 즉각 종전협상을 요구하는 대중투쟁이 정치적 위기로 번지자,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내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임시정부 장관으로 임명해 소비에트를 통제한다. 6월, 임시정부는 ‘전쟁 종식’이라는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충실하게 협조하던 소비에트 지도부의 입장으로, 즉각 종전을 원하는 대중의 정서는 소비에트와 더욱 멀어진다. 7월에는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들, 크론슈타트 수병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일으킨 봉기로 임시정부-소비에트-대중 사이의 균열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도 소비에트 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에 대거 입각해 자유주의자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며 볼셰비키를 불법화한다. 자본가의 권력기관인 임시정부와 노동자의 권력기관인 소비에트가, 서로 대립하기는커녕 화해하고 융합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볼셰비키를 불법화한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볼셰비키는 민주적 소비에트 권력의 가능성을 놓지 않았다. “이 새로운 혁명에서 소비에트가 나타날 수도 있다. 아니,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는 현재의 소비에트, 즉 부르주아와 협력하는 기관이 아니라, 부르주아에 대당하는 혁명적 투쟁기관일 것이다. 그때에도 물론 우리는 소비에트를 모범으로 삼아 국가 전체를 건설하는 노선을 지지할 것이다. 일반적인 소비에트가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반혁명 또 현재의 소비에트의 배신과 싸우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10] 볼셰비키의 불법화 이후에도 볼셰비키는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넓혀 갔고, 결국 10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현실로 만들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은 난관 속에서도 노동자평의회를 권력의 주체로 세우려는 볼셰비키의 지도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듯 사회주의 정당만으로도, 노동자평의회 만으로도 혁명은 불가능하다. 양자의 유기적 결합이 혁명을 가능케한다. 2. 전위정당에 대한 이해 1) 누가 당원인가? -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규약 1조 논쟁 전위정당 개념은 이념적으로는 대중의 ‘자생성’에 대비해 당의 ‘의식성’을 강조한 1902년 레닌의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처음 제기되었고, 이념과 조직적 측면을 포함한 총체적 제기는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2차 당대회에서 벌어진 규약 1조, 즉 <당원 자격에 관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1903년 2차 당대회 당시 레닌이 제출한 규약 1조 초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물질적 수단으로 당을 지지하며, 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하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마르토프가 제출한 초안은 다음과 같다.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물질적 수단으로 당을 지지하며, 당의 한 기구의 지도 아래 정기적으로 당을 지원하는 사람이다.” 레닌에게 당원은 당기구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었으며, 마르토프에게 당원은 당을 돕는 사람이었다. 전자는 당원 자격을 당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제한하자는 주장이고, 후자는 지지자도 당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서 살폈듯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 일부, 즉 ‘전위’[11]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모든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적 노동자를 조직대상으로 삼는다. “당 조직으로 공인된 조직의 성원만을 당원으로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특정의 당 조직에 ‘직접’ 가입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당 조직이 아니지만 당과 관련된 조직 속에서 여전히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에의 참가와 활동으로부터 제외한다는 의미로서 방기한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반대로 참된 사회민주주의자로 이루어진 우리의 당 조직이 강고하게 되면 될수록, 또 당내의 동요와 불안정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당에 의해 지도되는 노동자 대중의 분자들에 대한 당의 영향력은 더욱 넓어질 것이며, 더욱 다면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더욱 성공적으로 될 것이다. 요컨대 노동자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계급 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급의 당이다. 그러므로 계급의 거의 전체가 (그리고 전시나 내란 시에는 완전히 계급 전체가) 당의 지도하에 행동해야 하며, 가능한 한 긴밀하게 우리 당에 동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에서 계급 전체가 또는 거의 전체가 그들의 전위나 사회민주당의 의식성과 적극성의 수준까지 고양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마닐로프주의거나 ‘추수주의’인 것이다. 현명한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자본주의하에서는 노동조합 조직조차도 모든 또는 거의 모든 노동대중을 망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전위와 전위에 이끌리는 모든 대중과의 차이를 망각하고, 광범한 층을 점차로 선진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전위의 항상적 임무를 망각하는 것은 단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며, 우리 임무의 위대성을 외면하는 것이며, 우리 임무를 축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에 동조하는 자와 당에 소속하는 자의 차이, 자각된 적극적인 자와 원조하는 자의 차이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이와 같은 외면이고 망각이다.”[12] 레닌의 강조점은 명확하다. ‘당’은 ‘계급의 당’이지만, 계급 그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당은 계급 전체를 망라할 수 없으며, 그러려고 해서도 안된다. 당은 계급의 의식적이고 선진적인 부분이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당은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부침 속에서도 중핵을 보존하고 확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권력으로 이끄는 투쟁조직이어야 한다. 혹자는 ‘전위당’의 필요가 러시아 전제정의 혹독한 공안탄압에서 기인했으며, 오늘날 전위당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위 인용문에서 레닌은 ‘러시아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과 계급조직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13] 전위는 정세적으로 끊임없이 진동하는 계급을, 단기적인 경제적 이해를 넘어 권력의 주체로 형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노동자계급의 선진층이며, 이 선진 부위의 축적과 단결이 곧 당의 건설이다.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할 당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당의 성격은 당연히 전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전위’를 무엇인가 신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사실 ‘당원은 당기구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라는 레닌의 주장은 매우 소탈한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에 따라 당원 자격을 한정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이는 음모주의, 엘리트주의와 하등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전위정당은 종종 음모가 집단, 직업적 혁명가들만 가입할 수 있는 집단, 엘리트주의적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레닌 자신이 한 번도 당원 자격을 음모에 능한 직업적 혁명가들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음에도 이런 오해는 널리 퍼져있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논쟁 당시 레닌에 따르면, 당을 구성하는 범주는 다음과 같다. 당 조직은 오직 직업적 활동가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극히 제한되고 비밀스러운 조직으로부터 매우 광범하고 자유로운 느슨한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 모든 등급, 모든 색채의 다양한 조직이 필요하다. … 마르토프 동지의 정식 초안이 당과 조직 간의 관계에 대해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음에 반해, 나는 대회가 소집되기 1년 전에 이미 어떤 조직이 당에 가입해야 하고 어떤 조직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지적하였다. … 1) 혁명가의 조직, 2) 가능한 한 다양하고 광범한 노동자 조직 (나는 이 말을 노동자계급에 한정하고 있지만 다른 계급의 일정한 분자도 일정한 조건에서는 여기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이 두 범주가 당을 구성한다. 다음으로 3) 당에 동조하는 노동자 조직, 4) 당에 동조하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당의 지도와 통제 하에 있는 노동자 조직, 5) 적어도 계급투쟁의 대발현의 시기에 부분적으로 사회민주당의 지도에 복종하는 노동자계급의 미조직 분자. … 마르토프 동지의 견해를 보면 당의 경계가 완전히 불분명하다. … 이러한 느슨함으로부터 어떠한 이로움이 생기는가? ‘명칭’이 널리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 해악은, 계급과 당의 혼동이라는 조직 해체의 사상을 가져오는 것이다.[14] 레닌은 ‘혁명가의 조직’만으로 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사고를 명시적으로 부정하며, ‘가능한 한 다양하고 광범한 노동자 조직’도 당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즉, ‘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당은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서, 노동자계급과 가장 넓은 접촉면을 유지하며,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추동하고 조직하는 과정에서 종국적 승리로 이끌고자 분투한다. 전위당은 대중 속에서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 이렇듯 전위당의 본래적 의미, 그 어디에도 엘리트주의와 음모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의문은 남는다. ‘대중 속에서 활동하더라도, 전위당은 당원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므로, 결국 사회주의 정당은 늘 소수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운동의 침체기와 일상적 시기에 사회주의 정당은 소수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 철폐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정치의 대중화는, 그 본질상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대중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와 계급투쟁 확대를 그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벌어지는 파업을 비롯한 노동자투쟁 확대는 급진적 노동자들의 비약적 확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이후의 공세기에, 레닌은 혁명이 배출한 급진적 노동자들을 당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위험을 과장하지 말자, 동지들.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자기 이름을 확립했고, 하나의 경향을 만들어냈으며,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 간부들을 형성해 냈다. 그리고 이제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실천으로, 명확히 인식된 목표를 위해, 순수한 사회민주주의 정신으로, 일관되고 집단적으로 싸울 준비와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으니, 우리 당 소속 노동자나 중앙위원회의 초청으로 내일 당에 가입할 노동자 백에 아흔아홉은 사회민주주의자일 것임을 의심하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며, 사회민주주의가 지난 10년 넘게 기울인 활동은 이러한 자발성을 의식성으로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허수아비를 때리지 말자, 동지들! 모든 살아 있고 성장하는 정당에는 언제나 불안정, 동요, 흔들림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영향받을 수 있으며, 굳건하고 확고한 사회민주주의 중핵의 영향에 따를 것이다.[15] 2) 당과 대중의 관계 계급투쟁 확대는 전위와 대중의 간격을 급격히 좁힌다. 격화하는 계급투쟁 속에서 대중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해 집단적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사회주의 정치가 급진화된 노동자 대중 속으로 뻗어나갈 계기를 형성한다. 이것이 사회주의 대중화의 조건이다. 물론 위기가 사회주의 대중화 자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위기에 조응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선도할 사회주의 정당의 주체적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은 일상적 시기에 준비된다. 해당 준비의 핵심은 혁명적 강령, 노동자계급과의 일상적 결합, 그리고 당원의 주체화를 추동할 당내 민주주의다.[16] 당은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일원이어야 한다. 당원은 당의 제반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당론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적 시기에 살아있는 당이 아니라면, 그 당은 혁명적 시기에도 살아있을 수 없다. 전위는 대중과 호흡하며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노력하며, 성공과 실패 속에서 스스로를 교정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를 반추하며, 레온 트로츠키는 당과 대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대중은 사회재구성에 관한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 다만, 구체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격렬한 감정으로 혁명에 돌입할 뿐이다. 계급대중의 지도적 부위만이 정치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혁명의 시험과 대중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 지도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 있듯이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에 뒤처졌다. 공장위원회는 대중에게 뒤처졌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에 뒤처졌다. 더욱이 지방은 수도에 뒤처졌다. 이것이 혁명의 불가피한 역동성이다. … 볼셰비키 역시 혁명의 역동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졌다. … 대중은 균일하지 않을뿐더러 손을 데이고 소스라치게 놀라자빠진 다음에야 혁명의 불길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볼셰비키는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대중의 각성 과정을 가속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에 역사는 이들의 참을성에 보답해 주었다.”[17] 트로츠키의 서술은 대중의 자발성과 당의 의식적 지도 사이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전위는 대중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방향을 부여하는 피스톤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역동성은 언제나 대중으로부터 솟아나며, 당은 이를 선도하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한다. 살아있는 당은 바로 이 흐름을 이해하고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갱신할 수 있는 조직이다. 당은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을 결합해, 대중의 경험을 의식적 전술로 만들며, 이를 통해 전위와 대중의 간극을 실천으로 메운다. 혁명적 강령, 노동자계급 속에서 활동하는 실천적 당원,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는 민주집중제, 이 총체가 ‘인민의 호민관’으로서의 당을, 또한 혁명을 가능케 한다. 3)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조직 사회주의 정당은 기초조직을 노동현장에 둔다. 노동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생산과 착취가 일어나는 공간,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현장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조직하고, 지원하며, 개입하고, 이끈다. 노동현장에 존재하는 당의 기초조직, 노동현장에 뿌리박은 ‘당의 한 기구’, 이를 ‘현장분회’라고 부른다. 현장분회는 생산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며, 사회주의 정당의 이념과 강령을 알리며 대중을 조직한다. 이를 통해 일터에 당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터의 투쟁과 전체 노동자투쟁을 잇는 선전·선동을 수행한다. 앞서 살폈듯 노동조합은 조합원에 대한 분배의 확대를 중심 목표로 활동하며, 이는 때로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노동현장에서 전개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독립적인 당의 기구가 생산현장에 존재해야 한다. 즉, 사회주의 정당의 당원은 그저 당원증을 가진 노동조합원이 아니라, 일터에 포진한 사회주의 정치활동가를 지향한다. 현장분회는 대규모 제조업 생산현장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소규모 공장이 모인 공단, 서비스 노동 등 당원의 구체적 노동형태에 따라 지역적 형태 등 유연한 조직형태에 기반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기본조직은 ‘지역구’다. 지역구 단위로 선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의 목적은 의회진출이며, 이에 중요한 것은 선거에 필요한 재정과 표의 확보다. 그렇기에 대다수 진보정당은 선거 단위에 조응해 당원을 편재한다. 양자의 차이는 현장분회가 노동자를 ‘계급’이라는 집단으로 조직하고자 하는 데 반해, 지역구 체제는 노동자계급을 자본주의 선거제도 아래 ‘유권자’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지역구 체제 아래 진보정당에 속한 노동자들은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편재되고, 해당 노동자들 또한 시민적 정체성으로 지역구민을 만나며 당의 득표 확대를 위해 활동한다. 진보정당의 당원은 동료 노동자들에게 국가와 자본에 맞선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노동자 정치운동가로서가 아니라, 최대한 온건한 모습을 요구받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정체화되는 것이다. 선거 중심 활동과 조직체계는 사회민주주의 진보정당에 내재한 국민정당화 경향[18]을 증폭시킨다. 사회민주주의 진보정당은 애초 노동자계급정당으로 출발했더라도, 결국 전 국민을 조직대상으로 삼는 국민정당으로 귀결해왔다. 그 동학은 다음과 같다. 선거에서는 투쟁하는 노동자도 1표,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도 1표, 교수와 변호사도 1표, 자본가도 1표를 행사한다. 그렇기에 투쟁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선거에서 1/N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 중심 활동과 선거대응에 초점을 맞춘 조직체계 아래, 노동자계급은 당의 핵심 주체가 아니라 일부가 될 수 있을뿐이다. 이렇듯 현장정치활동이 존재하지 않는 통상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구조상, 노동자는 일터 바깥에서만 당원이 될 수 있으며, 그것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러할 뿐이다. 이에 따라 일터의 투쟁은 오로지 노동조합에 맡겨지며, 정당의 활동은 현장투쟁과의 결합력을 잃고 의석 확대를 위한 표와 재정의 조직화로 축소된다. 한국에서 이런 모델, 즉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을 하고 진보정당은 정치투쟁을 한다는 역할분담론은 ‘양날개론’으로 제시되어 왔다. 4)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비판 운동진영에 이른바 ‘양날개론’이 처음 제시된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며,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역시 이런 모델에 근거했다.[19] 그렇다면 노동조합의 경제투쟁과 진보정당의 정치투쟁이라는 역할분담론은 어떤 문제를 가지는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양날개론은 그 자체로 오류다. 정치투쟁은 진보정당이, 경제투쟁은 산별노조가 한다는 역할분담론에 따라, 정치의 공간과 경제의 공간은 무 자르듯 분할된다. ‘현장’은 ‘노동조합 임단협투쟁’을 하는 곳으로, ‘의회’는 더욱 중요하고 거시적인 ‘정치’가 행해지는 것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분리될 경우, 경제투쟁은 그야말로 조합주의적 이해관계에 한정된다. 노동조합 밖에서 사회적 격변이 벌어지건 말건 노동조합은 소속 조합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면 그만이다. 또한 양날개론 역할분담론에 따라 정치는 현장의 외부, 까마득히 먼 의회에서 직업정치인들이 하는 것이 된다. 정치가 이렇게 정의되는 순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임무는 전적으로 진보정당의 의회진출 확대에 맞추어진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정치’는 진보정당 후원사업과 투표 조직으로 한정되며 노동현장 안에서의 정치활동은 텅 비게된다. 이는 정치운동과 노조운동 양자 모두의 후퇴를 결과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그 자체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융합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경제투쟁인가, 정치투쟁인가? 1996-97 총파업 투쟁은 경제투쟁인가, 정치투쟁인가? 모든 거대한 계급투쟁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뒤섞이며 상호 발전한다. 또한 양날개론은 필연적으로 관료주의와 노동자정치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양날개론자들에게 ‘정당’이란 의회에 진출하기 위한 도구이며, ‘정치’란 의회에서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양날개론자들에게 현장투쟁은 고될 뿐 별 성과가 없는 것이며,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임무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인적·재정적 자원을 진보정당으로 동원하는 것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첩경으로 놓인다. ‘진보정당에 의한 노동조합의 안정적 동원’[20]이 목적이 되는 순간, 노동조합 내에는 ‘묻지마 단결’이 최우선 과제로 놓인다. 노동조합 내 다양한 정치적 경향의 존재에 ‘분열’이라는 딱지가 붙고, 정치적 소수파를 노동조합 밖으로 내모는 행위가 단결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논쟁과 토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합원의 정치의식 발전은 봉쇄된다. 정치의 목적이 선거와 의회진출로 놓임에 따라, 당은 계급투쟁이 배출한 전투적 노동자들이 아니라 선거기술자, 출세주의자로 채워진다. 심지어 ‘진보정당도 의석확대를 위해 자본가정당의 정치기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정당도 협상에 능해야한다’는 투의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교훈처럼 유포된다. 이를 통해 당은 노동자계급의 통제를 벗어나며, ‘국민정당’으로 귀결한다. 이러한 한국 양날개론의 원형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서 유래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의 정치투쟁과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이라는 역할분담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병행 행동”(parallel action)을 하며 “동등한 권위”를 지닌다는 이론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라는 환상에 기초해 있다. 이 시기에는 사회민주당의 정치투쟁이 의회투쟁으로만 소모되어버리는 듯 보인다. 그러나 노동조합 투쟁과 마찬가지로 의회투쟁도, 부르주아 사회 질서라는 토대 위에서만 수행되는 투쟁이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경제개혁 작업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본질상 정치개혁 작업이다. … 최종 목표는 의회투쟁이나 노동조합 투쟁 그 너머에 있다. …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동등한 권위”라는 이론은 단순한 이론적 오해나 혼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표현이다. 이 경향은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의회투쟁으로 축소시키고,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소부르주아적 개혁정당으로 바꾸려 한다. …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 조직을 정당에 흡수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운동 전체와 그 일부인 노동조합 간의 실제 관계에 상응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간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21] 3. 사회주의 정당의 노선 1) 노동자계급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 - 칠레와 그리스의 경험이 말하는 것 곳곳에서 제국주의 전쟁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조차 극우세력이 발호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이윤율 저하에 따른 자본의 이윤축적 위기가 있다. 일반화한 저출생 문제가 드러내듯 현 시기 자본주의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다. 자본가계급은 체제를 지배할 능력이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22] 그러나 문제는 어떤 지배계급도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지향하건 평화적 이행을 지향하건, 지배계급은 평화적 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지배계급의 조직된 폭력, 국가권력이다. 칠레와 그리스의 사례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맞선 결정적 투쟁 없이 이행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레닌이 말했듯, 혁명의 문제는 곧 국가권력의 문제다. (1) 1973년 칠레의 경험 1970년 9월, 칠레 노동자 민중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옌데는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등 좌파와 중도좌파 정당이 결성한 ‘인민연합’(Unidad Popular, UP) 소속으로 출마하여 토지개혁, 대외 종속 탈피, 기간산업 국유화, 교육·보건 공공성 강화 등 개혁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아옌데 정부는 집권 이후 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던 구리 산업을 비롯해 은행, 석유, 통신, 제약 등 주요 부문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1971년 7월 11일 의회가 만장일치로 의결한 헌법 개정에 기초한 것으로, ‘초과이윤 조항’을 통해 미국 자본에 대한 보상을 최소화했다.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을 내건 아옌데 정부는 이러한 개혁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한 채 합법적으로, 즉 기존 헌정질서의 틀 내에서 추진하려 했다. 사실 인민연합정부는 출범부터 의회제도를 비롯한 기존질서 유지를 ‘보장법’으로 약속했다.[23] 현존 정치체제와 사법체제, 교육제도·노동조합·사회조직의 사회주의 지향으로부터의 독립, 출판과 대중매체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독립 등을 서약하며 제도 내에 존재할 것을 다짐하고서야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골격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자본은 아옌데 정부에 극렬한 반격을 개시한다. 칠레 자본가계급은 보수 언론과 정당, 교회, 자본가 단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아옌데 정부를 흔들었다. 특히 1972년 10월에 발생한 '트럭 소유주 연맹'의 대규모 파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파업은 CIA가 수백만 달러를 투입해 기획한 것으로, 물류망을 마비시켜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의회 다수와 사법부는 인민연합 정부의 경제 개입 조치를 '합법성 결여'라 비판하며 사보타주에 나섰고, 1973년 8월 22일에는 하원이 아옌데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미 그 무렵 칠레 군대는 우익 쿠데타 세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칠레 노동자 민중은 자본주의가 정한 틀 내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경제를 마비시키려는 자본의 사보타주와 군부의 쿠데타 위협 속에서, 1972년부터 1973년까지 노동자 민중은 공장과 지역에서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권력기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산업조정위원회(cordones industriales, 직역하면 ‘산업 벨트’)이었다. 산업코르돈(산업조정위원회)은 작업장과 지역 단위를 잇는 노동자 조직으로 공장점거, 생산통제, 분배 조정, 쿠데타에 맞선 방어조직 형성 등을 수행했다. 유통부문에서는 노동자와 주부, 학생들이 '민중공급위원회'(공급과 물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식량과 필수재의 배급을 자율적으로 조정했다. 산업조정위원회와 민중공급위원회처럼 노동자 민중이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고자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들이 전국으로 확장되고 이것이 정부의 지지, 지원과 결합할 경우, 이것이 ‘이중권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옌데 정부는 이런 조직을 잠재적 권력기구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놀라게하는 성가신 존재들로 취급했다. 1973년 6월,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하자 산업코르돈은 수십 개의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과 물자 이동을 자체적으로 통제하며 반격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는 이 흐름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화된 기업을 자본가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했고, 위기 타개를 위해 피노체트를 내무장관으로 기용하는 타협을 선택했다. 이는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쿠데타를 단행했고,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자결했다. 칠레 군부는 대대적 학살을 자행했고,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경제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에서 밀턴 프리드먼에게 학습한 신자유주의 교리로 무장한 경제학자 집단,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가 있었다. 이들은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고삐 풀린 시장 개방,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동권 축소, 복지 철폐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이후 IMF가 세계 곳곳에 강요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원형이었다. 아옌데 정부가 추구한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로운 길’은 무참히 짓밟혔고, 군부와 자본의 연합은 칠레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으로 몰았다. 칠레의 비극은 단지 민중연합의 적들이 악랄해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 국가기구의 ‘중립성’에 대한 환상, 부르주아 헌정질서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에 대한 집착, 그리고 노동자 민중이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투쟁과 기구에 대한 방기. 이것이야말로 ‘체제 내 사회주의’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혁명이 배제된 사회주의는, 자본이 허용하는 만큼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2) 2015년 그리스의 경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이어진 유럽 재정위기는 남유럽 국가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안겨줬다. 그리스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중 하나였다.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구성된 ‘트로이카’는 그리스 정부에 퇴직연령 상향, 연금 삭감, 최저임금 삭감, 단체교섭 제한, 해고 요건 완화, 공공부문 축소 등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그리스 실업률은 30%에 가깝게 치솟았고, 청년실업률은 50%를 넘겼다. 분노한 대중은 기존과는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24] 이런 상황에서 ‘시리자’(SYRIZA)와 같은 급진 좌파 정당들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급진좌파연합’ 이라는 뜻의 시리자는 2004년 여러 좌파정당의 연합체로 결성되었고, 이후 2012년에 하나의 통합 정당으로 재편되었다. 시리자는 긴축정책에 맞선 대중운동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면서 지지층을 빠르게 넓혀갔다. 시리자는 2012년 5월 1차 선거에서 16.8%, 6월 2차 선거에서 26.9%를 얻어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를 제치고 제2당으로 부상했다. 2009년 선거에서 4.6%를 획득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결국 시리자는 2015년 1월 총선에서 36.3%를 득표하며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트로이카가 강요하는 긴축안에 맞선 대중투쟁이 시리자의 집권 배경이었다. 긴축을 둘러싼 협상이 시작되었다. 트로이카는 강경하게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고, 그 강경함 뒤에는 다른 채무국에 대한 경고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7월 9일, 시리자는 굴욕적 긴축안을 트로이카에 제출한다. 2015년 7월 5일 긴축 찬반을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긴축 반대'를 결정하고 단 4일이 지난 뒤였다. 7월 12일, 그리스와 트로이카가 합의한 긴축안은 △연금 삭감 △노동유연화 △해고 공무원 재고용조치 등 구제금융 합의에 위배되는 법률 철회 △500억 유로 규모 국유자산 민영화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중의 기대를 품고 집권한 시리자는 트로이카의 긴축안 집행자로 전락했다. 시리자의 몰락은 통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정당의 몰락 경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급투쟁의 발전 전망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시리자의 굴복이 남긴 상처는 더 컸다. ᅠ 명백히 드러났듯, 긴축의 중단은 열강의 대리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입씨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리자는 트로이카와의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와 그리스 노동자 민중의 힘에 호소했어야 한다. 또한, 유럽노동자계급의 연대를 구하며 트로이카의 악랄한ᅠ강요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어야 했다. 그 힘과 함께 ‘유로존 탈퇴’라는 도약을 감행하지 않고, ‘긴축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시리자가 부상하던 당시, ‘혁명과 개량의 이분법을 넘어서자’는 말장난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도 많았다. 자본주의 위기가 심화하는 지금, 시리자의 몰락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맞선 결정적 계급투쟁 없이 이행은 불가능하다. 2)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으로서의 노동자 혁명 사회주의 혁명은 한 유형의 착취자를 좀 더 진보적인 다른 유형의 착취자로 대체하는 지난날의 혁명이 아니라, 모든 착취자의 손아귀에서 생산수단을 빼앗아 전체 사회의 공동 소유물로 만들고 생산자들 자신이 운영함으로써 계급 그 자체를 철폐하는 혁명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전면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노동자계급의 주도권과 능동성에 바탕을 두어야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이렇듯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며 자신의 억눌린 잠재력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혁명이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는 데 착수하고 그러한 전복에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아니다. 둘째, 또한, 혁명이 중앙정부가 부르주아 정치권력을 집행하는 수단인 대의제도와 행정조직을 제거하는 데 착수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혁명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셋째, 민중봉기가 자신을 공산주의자라 부르는 자들(또한, 실제로 신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권력을 쥐여준다고 해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혁명은,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의 깊은 곳에서 발전하는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의 생산적 힘을 해방하는 정도만큼만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이다.”[25] 노동자계급의 힘을 해방하는 과정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할 때, ‘평의회’는 단지 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평의회는 혁명의 발발, 확산, 승리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는 투쟁기구일 뿐만 아니라 혁명 이후에도 노동자권력의 핵심을 구성한다. 역사적 계급투쟁은 평의회 형태의 권력을 창출해왔다.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평의회), 1918-19년 독일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병사평의회, 1919-1920 이탈리아의 ‘붉은 2년’ 당시 금속산업 노동자들이 주축으로 건설한 공장평의회, 1972-73년 칠레 인민연합 정부 당시 산업코르돈(산업벨트, 산업조정위원회), 1979년 팔레비 왕조를 타도한 이란혁명 과정에서 나타난 쇼라(평의회), 1980-81년 폴란드 국가자본주의에 맞선 ‘연대노조’ 등이다. 계급투쟁 격화와 노동자계급의 자기권력으로서의 평의회 형성이라는 흐름은 한국에서도 드러난다. ‘민주노조’는 고유명사다.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은 국제 노동운동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역동적인 것이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생산현장에 기반해 사업장 모든 노동자를 조직했다는 점에서 △총회 민주주의 등 아래로부터의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생산현장 점거파업으로 자본가의 소유·경영권에 균열을 내며 이를 일상의 ‘현장권력 쟁취투쟁’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사업장 담장을 넘어 연대투쟁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의회적인 것이었다. 주체들이 그것을 노동조합이라 불렀건, 평의회라 불렀건 간에 말이다. 이는 서구 노동조합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19세기 말 영국·독일 등 서유럽 노동조합들이 구성한 노동조합은 숙련노동자 중심의 직종·직능별 조합체제였다. 이는 특정 노동자 부문의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에는 기여했지만, 비숙련 노동자와 여성노동자 등을 배제하며 전체 노동자의 단결과 계급적 연대를 제약했다. 이후 서유럽 노동조합들은 산업별 체계로 전환했으나, 이는 생산현장에 기초한 투쟁기관이 아니라 상층 중심의 관료적 협상체계였다. 반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조합은 단지 임금교섭의 수단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자본의 독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계급의 투쟁기관이었다. 이런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적 지향을 집약하는 구호가 바로 ‘노동해방’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하며 노동자계급을 이끈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대리자가 아니다. ‘전지전능한 유일당’은 더더욱 아니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운동의 역사적 과정을 안내하고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혁명적 상황을 낳는 것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노동자대중의 운동을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의 에너지를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빼앗아 노동자 자신의 권력으로 대체한다는 궁극적 목표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대중의 에너지가 모이고, 그 에너지가 혁명의 기관차를 움직일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을 찾게 안내하고 앞장서 이끄는 것이 진정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역할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이러한 자주적 운동을 가로막는 온갖 유형의 관료주의적 질서와 통제, 억압에 맞서 투쟁하면서 노동자 스스로의 운동, 즉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 노동자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당이다.[26] 3) 노동자계급 국제주의 – 국적이 아니라 계급으로 단결하자 사회주의 혁명은 근본적으로 세계혁명의 성격을 지닌다. 자본주의 자체가 생산과 분배를 국제적으로 실행하는 세계체제인 한, 이로부터 단절한 채 한 나라에서 노동자계급 해방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곳에서 혁명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회 위기가 표면화한다는 것은 곧 지구적인 차원에서 위기가 누적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위기만이 아니라 기후 위기 같은 재난 상황 역시 일국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범위에서 다가오고 있다. 또한 어느 나라에서 노동자혁명이 일어나든, 반드시 세계 자본가계급이 연합해 이 혁명을 진압하려 정치적, 군사적으로 간섭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경쟁이 초래하는 낭비와 자연 파괴를 막기 위해 전 지구 차원에서 의식적, 계획적으로 생산과 분배를 조직해야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혁명의 시작은 일국적일지라도, 세계혁명의 전망 아래 여러 나라로 확산하며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협력을 성취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구현하는 것은 단지 고귀한 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필수적인 과제다.[27] 20세기 식민지 재분할과 대공황 극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차례 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인류를 절멸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대만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대결, 그리고 팔레스타인 학살은 또 다른 세계대전의 전조다. 지금,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속에서 제국주의 전쟁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2차대전 직후 세계 GDP의 50%에 달하던 미국 GDP 규모는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35%로 줄어들었고, 이제는 세계 GDP의 24-25% 가량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부상했으며[28] 브릭스를 축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균열하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서 군비지출 확대는 당연한 일이다. 2025년 4월 28일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24년 세계 각국 군사비 지출은 2023년보다 총 9.4% 증가했다. 미국 군사비 지출 5.7% 증가, 중국 7% 증가, 러시아 38% 증가, 독일 28% 증가. 일본 21% 증가. 열강은 직접 전쟁을 치르고 있거나, 대리전에 참여하고 있거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자유무역 시대 종말과 보호주의 전면화, 급증하는 군비, 우크라이나를 무대로 장기화하는 대리전. 이런 열강투쟁을 조건으로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극우세력 득세가 다시 열강투쟁 격화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노동자계급 국제주의는 자본주의 태동 이래 변함없는 과제였지만, 다시 세계대전의 위기 앞에 놓인 오늘날 그 중요성은 그야말로 막중하다. 오늘의 한국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 연대투쟁 주요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보호주의 관세전쟁과 함께 확산하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에 맞선 투쟁. 둘째, 군비증강,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무기수출 확대 등 군사화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셋째,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연대투쟁, 넷째, 이주노동자 탄압과 이주민 혐오조장에 맞선 투쟁이 그것이다. 첫째, 보호주의 관세전쟁이 촉발한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야 한다. 이윤축적의 위기 앞에 국가와 자본가계급은 끊임없이 애국주의를 부추긴다. “한국 산업을 살리자”는 선동 뒤에는 보호주의 심화에 따른 경제위기를 명분으로 한 착취강화 시도가 담겨있음은 물론, 자본가들 사이의 투쟁에 노동자계급을 동원하며 ‘타국 노동자계급을 억압해야만 한국 노동자계급이 생존할 수 있다’는 분열 조장이 담겨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국가와 자본의 애국주의 선동에 맞서 세계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해를 내세운다.[29] 둘째, 제국주의 전쟁과 군비증강, 전쟁산업 확대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세계 곳곳에 전운이 깔린 지금, 각국 지배계급은 급격한 군비 확대에 나서고 있다. 2023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해도 유럽 각국 방위비는 나토 가이드라인인 2% 이하였다. 최근 방위비를 5%까지 올리겠다는 유럽 각국의 결의는 노동권에 대한 전면 공격과 복지 축소를 동반한다. 전쟁산업 확대 역시 노동자계급의 투쟁 대상이다. ‘K-방산’은 한국을 제국주의 열강의 보급기지로 만들고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한반도 전쟁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미 한국은 모든 유럽 국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했으며[30], 마스가(MASGA,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산업 노동자들을 미 해군력 증강의 도구로 만들고 있다. 셋째,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국제연대를 확대해야 한다. 이스라엘 지배계급이 서방 제국주의의 지원과 묵인 아래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학살에 맞선 투쟁은 이미 세계정세의 핵심축이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9월 팔레스타인 연대총파업으로 길을 보여주었듯, 한국 노동자계급 역시 일터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을 확대해야 한다. 넷째, 이주노동자 탄압과 강제추방에 맞서는 연대가 필요하다. 9월 4일 미국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에서 이루어진 한국노동자 대규모 체포 구금사태에 분노했다면,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이주노동자 단속 추방에도 분노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이주민에 대한 혐오선동, 이주노동자 단속 추방에 맞서 지역과 사업장 모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구심으로 서야한다. 4) 노동자계급 공동전선 추동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불균등하다. 산업, 고용형태, 지역, 조직화 수준의 차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경험과 의식을 가진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을 추동하기 위해 공동전선(United Front)에 주목한다. 공동전선은 자본가계급의 공격에 맞선 투쟁,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투쟁, 소수자 차별에 맞선 투쟁 등에 있어 광범하게 적용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공동전선 속에서 △공동전선이 내건 요구의 쟁취 △대중의 계급의식 고양 △투쟁조직 확대를 추동한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 확대를 도모한다. 공동전선 내에는 투쟁하는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량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도 있을 수 있고, 개량주의 정당 자체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대중의 공동행동 속에서 대중의 혁명적 능력을 확대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 진지를 확대하며, 사회주의자 노선과 개량주의 노선의 차이를 실천적으로 드러내어 혁명적 정치세력을 확대하는 과정 없이 혁명은 불가능하다. 공동전선의 필요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1930년대 초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과정이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하의 독일 자본주의는 심각한 경제위기와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대공황의 충격 속에서 실업자는 1932년 2월 600만 명에 달했고, 중간계급이 몰락하면서 나치당이 급부상했다. 이 시기 노동자계급은 독일공산당(KPD)과 사회민주당(SPD)으로 나뉘어 있었고, 공산당은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가 채택한 ‘사회파시즘론’에 따라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부르주아 지배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사회민주당이 저지른 역사적 배신[31]이 이러한 인식을 강화시켰다. ‘사회민주주의 주적론’에 따라 독일공산당은 당원들에게 “사회파시스트를 공장과 노조에서 몰아내자”고 선동했고, 1931년 프로이센 사회민주당 주정부 해산을 위한 국민투표에 나치와 함께 참여했으며(소위 적색 국민투표), 1년 뒤 나치세력에 의해 프로이센 주정부가 해산될 때 공산당은 이를 기뻐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회파시즘론이 파시즘 부상과 나치 집권의 길을 열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총리에 임명되고 나치가 정권을 장악했다. 나치는 집권 직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동시에 불법화했고, 독일 노동조합총연맹을 해체했다. 단결하지 못한 독일 노동자운동은 파시즘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공동전선을 구성할 수 있었다면 나치를 막을 수 있었다.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 마지막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32]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산 득표는 나치보다 많았다. 정당 득표수 비율 나치당 11,737,021 33.1% 사회민주당 7,247,901 20.4% 공산당 5,980,239 16.9% 중앙당 4,230,545 11.9% 국민당 2,959,053 8.3% 바이에른인민당 1,094,597 3.1% 기타 - 6.3% 이러한 공동전선은 단순한 전술적 연합이 아니라, 공동투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양하고 혁명적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교다. 바로 그러하기에, 사회주의자들은 공동투쟁 속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 논쟁할 권리를 보유해야 하며, ‘대중투쟁강령’은 이러한 실천의 매개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은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다. 개량주의 정당들은 선거와 의회주의를 통해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민주노총 상층의 노조 관료들은 민주당에 의존해 노동자투쟁을 통제하고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대중투쟁강령을 매개로 한 공동전선의 적극적 운용은 필수적이다. 개량주의 정당과 노조 관료들이 장악한 현실 속에서도 노동조합은 여전히 중요하며, 노동자평의회 정신에 입각한 공동전선은 노동조합운동의 민주적·전투적·계급적 재편에 있어 핵심적 과제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평의회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하며, 또한 다양한 노동자 투쟁조직 내에서 활동하며 노동조합운동의 평의회적 발전을 추동한다. 중요한 것은 공동전선과 인민전선의 차이다. 공동전선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피지배계급의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전술이다. 즉, 공동전선은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전제하며 이에 지배계급 분파와의 공조를 배제한다. 그러하기에 공동전선은 자본가 정당과의 연합을 포괄하는 인민전선(Popular Front)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른바 ‘민주대연합’은 자유주의 정당과 민주당을 포괄하는 전형적인 인민전선으로, 노동자계급을 자본가 정당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시킨다. 인민전선은 노동자운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는 지배계급의 수단일 뿐이다. 5)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 모든 혁명은 억압받는 민중의 혁명이다. 그러나 그 혁명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계급이 민중을 이끄는가, 어떤 계급이 혁명을 주도하는가다. 노동자계급이 주도적으로 제반 사회적 의제에 개입하며 해당 의제의 계급적 본질을 드러내고, 피억압 민중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대열로 이끌 때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이것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노동자가 이런저런 민중의 투쟁에 단지 연대하는 것으로, 노동자의 요구와 다종다기한 민중의 요구를 기계적으로 조합하고 절충하는 것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는 사회적 억압 자체가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산물이며, 따라서 계급투쟁의 영역임을 실천으로 드러낼 때 형성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 아래 고통받는 여성의 해방은 기업과 정부에서 여성 고위직을 늘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별분업과 여성노동에 대한 체계적 저평가는, 자본에 맞선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단결 투쟁을 통해서만 해소된다. 해방은 착취자와 억압자의 성별을 바꾸는 과정이 아니다. 기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일상이 된 기후재난은 ‘탄소배출권 거래제’, ‘탄소세’와 같이 탄소에 시장가격을 매기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윤을 위한 기후파국을 불사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기후위기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청년취업난은 중장년층 노동자 퇴출로 해결되지 않는다. 청년실업은 노동시간을 단축으로 일자리를 나누고, 이윤이 아니라 공공복리를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이 모든 투쟁이 자본가계급에 대한 투쟁과 직결되어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에 대한 총체적 투쟁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헤게모니를 형성할 수 있다. 만약 노동자들이 조각조각 쪼개져 모두 단기적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있다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 형성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떤 강력한 노동조합이 소속 조합원들의 단기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잔업과 특근을 늘리고, 조합원 자녀에 대한 우선 채용을 요구하며, 기후파국이 오건말건 탄소 다배출 공정 확대를 요구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노동조합은 결코 전체 운동을 주도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사회 각 부문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보편적 관점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이다. 노동자계급이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기후정의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계급 적대’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 운동의 목표 쟁취를 위해 계급투쟁이라는 투쟁 수단을 제시할 때, 그 투쟁들은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겨누는 변혁적 실천으로 발전한다. 바로 그렇기에 노동자 ‘계급’의 관점으로 세상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과정, ‘계급’의 관점으로 제반 투쟁에 대한 총체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은 협소한 단기적 이익을 넘어, 피억압 민중 전체의 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내걸 때 비로소 사회변혁의 주도 세력으로 올라설 수 있다. 그것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이며, 그 헤게모니 형성을 주도하는 구심이 사회주의 정당이다. ----- [1] “개인들은 다른 한 계급에 맞서 공동의 투쟁을 수행해야 하는 한에서만 하나의 계급을 이룬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경쟁자로서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다.” - 칽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1845-46년. [2]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임금에 대한 시장결정 메커니즘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항상 개별적인 노동시장 참여자여야 한다. [3] 노동조합 관료층의 존재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 조건에 대한 흥정이라는 노동조합의 기능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자주성·민주성·연대성·투쟁성·변혁지향성을 강화해 노동조합을 노동자계급의 투쟁기관으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4]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1899년. [5] 노동귀족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엥겔스의 다음 언급을 보자. “노동조합들은, 자본이 노동자계급을 붙잡아 매는 속박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자유롭게 하는 데 성공했는가? … 노동조합들이 그렇게 해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도하지조차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영국에서도 다른 모든 공업국에서도 노동조합은 자본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 노동조합들이라는 저항 수단이 없다면, 노동자는 임금 제도의 기준에 따르면 자신의 몫인 것조차 받지 못한다.” - 엥겔스, 「임금제도」, 1881년. [6]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7] 경험과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런 관점이 틀렸다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런 진화론적 낙관론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한 2인터내셔널의 파산이었다. [8]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7년. [9] 따라서 스탈린주의 ‘유일당’ 이론은 맑스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일당 이론은 그 자체로 노동자 민주주와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10] 레닌, 「슬로건에 관하여」, 1917년 7월. [11] 전위(vanguard)는 본래 군사 용어로, 선두 부대를 뜻한다. [12] 레닌, 『일보전인 이보후퇴』, 1904년. [13] 물론, 레닌은 러시아의 극심한 공안탄압을 들어 전위당의 필요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조건에 더해 ‘러시아 상황’을 함께 들어 이루어진 논증이었다. 즉, 러시아의 구체적 상황에서 더더욱 당은 전위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4] 레닌, 『일보전인 이보후퇴』, 1904년. [15] 레닌, 「당의 재편」, 1905년. [16]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 1917년에 모든 수준의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조직 안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론과 전술상의 쟁점을 둘러싸고 자유롭고 활기찬 토론과 논쟁이 계속 벌어졌다. 다수파와 의견이 다른 지도자들이 자유롭게 자기 견해를 위해 싸웠으며, 이 싸움에서 레닌이 패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이 급변하는 와중에 이들이 각 기구 나름의 특정한 지지층에 알맞은 전술과 호소를 재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수의 새로운 당원이 충원되었으며 이들도 볼셰비키의 행동 방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1976년. [17]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1930년. [18] 숱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 유로코뮤니즘 정당들이 국민정당화되어갔다. 독일 사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고, 기간산업 국유화 강령 등을 폐기하며 스스로를 국민정당으로 선언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3년 ‘역사적 타협’을 선언하며 기독교민주당과의 협력에 나섰다. 영국 노동당 역시 1950년대 중반 국민정당화를 택했다. 1978-79년 노동당 정부의 임금인상률 제한에 맞선 노동자 총파업(불만의 겨울)으로 인한 노동당 정부 몰락 이후, 대처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프랑스 사회당과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집권 이후 민영화와 긴축으로 전환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1980년대 이후 복지 축소를 주도했다. [19] 민주노총은 1995년 출범부터 산별노조 건설을 내걸었고, 1996-97 총파업 이후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본격적인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의 양날개론 모델에 근거했다. [20] 이것이 과거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의 본질이었다. [21]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 8장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1906년. [22]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노예들에게서 노예 상태에서의 생존조차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노예들에 의해 부르주아지가 부양되는 대신에 부르주아지가 노예를 부양해야 하는 그런 처지에 노예를 빠뜨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지배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23] 1970년 9월 4일, 아옌데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당시 칠레 헌법에 따라,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국회가 상위 두 후보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했다. 아옌데의 인준을 위해서는 기독교민주당(PDC)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은 아옌데 정부가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을 요구했다. [24] 기존 그리스 정치 판도는 중도우파 신민주주의당(ND)과 중도좌파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 (PASOK)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던 구조였다. [25] 그람시, 「두 혁명」, 『신질서』 1920년 7월 3일자. [26]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27] 사회주의를향한전진, 「기본강령」 [28] 최근 중국의 경제위기로 미·중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으나, 이는 상당 부분 착시다. 첫째,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고, 중국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달러 기준으로 본 미국 경제 규모는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중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된다. 둘째, 최근 3년 사이 위안화 가치는 달러보다 15%가량 하락했다. 이에 따라 같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달러 기준으로 본 중국 산출량은 15% 과소평가 된다. 2024년 기준으로 미국의 명목 GDP는 28조 달러, 중국은 18조 달러이나, 세계은행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에서는 이미 2014년 중국 경제가 미국 경제를 앞질렀다. [29] “공산주의자들은 …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 -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1847년. [30]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이 선택지를 제시했다. 한국법은 교전지역 무기수출을 금지한다. 미 국방부는 한국을 설득할 수 있다면, 41일 안에 155mm 포탄 약 33만 발을 항공과 해상으로 수송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 한국 측은 간접지원이라면 수용 가능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연초부터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은 모든 유럽 국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국가가 되었다.” - 2023.12. 04. 워싱턴포스트 [31]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9년 로자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하고 독일혁명을 진압한 주역이었다. 1932년 파시즘 부당 당시 독일 공산당의 지도자인 에른스트 텔만은 공동전선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틀러-파시즘’에 대한 기회주의자들의 과대평가보다 더 재앙적인 것은 없다”, “우리의 전략은 공격의 주요 방향을 사민주의에 돌리는 것이다.” (텔만,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연설, 1932년 2월), “트로츠키는 진심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리프크네히트와 로자의 살인자들과 … 공동행동을 하자고 한다. 트로츠키는 여러 글에서 독일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 사이의 협상을 요구함으로써 노동계급을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했다.” (텔만, 코민테른집행위원회 12차 전원회의 폐회 연설, 1932년 9월), [32] https://en.wikipedia.org/wiki/November_1932_German_federal_election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2026-05-11 | 조회 20,991 -
[한노운사 연재 16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와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은 한국 사회 전반에 계급투쟁의 격랑을 몰고 왔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광범한 계급적 자각을 낳았다. 노동조합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불온하게 간주되던 사회에서 광범한 노동자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구호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은 민주노동당을 탄생, 성장시켰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배로 귀결시키고, 민주노조운동을 후퇴와 위기로 내몰았던 똑같은 요인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도 작용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은 제대로 뻗어나가지 못했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민주노동당 창당에 담긴 이중적 성격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민주노동당의 등장은 한국전쟁 이래 극히 우경화된 한국 정치의 지형 속에서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창당 무렵에 이미 1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한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진보적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노동자들 속에 상당한 기반을 확보한 정당’으로 등장했다.[1] 민주노동당 이전에도 한국 정치에 진보정당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에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일정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던 진보당이 있었다. 그러나 진보당은 노동자들 속에서 뚜렷한 기반을 갖지는 못했으며,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통해 당수 조봉암이 1959년에 간첩죄로 사형당하면서 붕괴했다.[2] 1990년 11월에 출범한 민중당은 진보적 이념을 내걸긴 했지만 민주노조운동으로 결집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지지 기반을 확장하지 못했으며, 1992년 3월 총선에서 저조한 득표로 법적 해산을 당하면서 해체됐다. 민중당의 좌절은 한편으로 당시 전체 민중운동의 다수파인 민족해방파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거부하고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일관함으로써 야기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표방한 개량주의 노선 때문이기도 했다. 민중당은 저급한 출세주의에 빠진 당권파를 중심으로 소련 붕괴 이전부터 공공연히 개량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변혁적 지향으로 꿈틀대던 전노협으로부터 심한 반발과 견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민주노조로 결집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뚜렷한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없었다. 1950년대 진보당과 1990년대 초반 민중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좌절의 역사와 달리, 민주노동당은 그 출발부터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민주노동당 창당이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정에 의해 추진됐다는 사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7년 7월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세우고 향후 진보정당 창당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1. 민주노총은 제 민주세력과 함께 1997년 대선에 국민후보를 추대, 이를 위한 선거대책기구를 구성하고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키로 결의한다. 2. 민주노총은 대중적 합의를 바탕으로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고 각계각층의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세력과 함께 하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3] 1997년 8월 민주노총은 전국연합·진보정치연합 등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9월에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면서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총동원했지만,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총 조합원 수보다도 적은 30만 표(1.2%)를 얻는데 그쳤다. 그런데 득표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말 심각했던 것은 선거운동의 내용이었다. 권영길 후보의 선거운동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몰계급적 애국주의였다. 국민승리21이 내세운 국민후보 권영길의 핵심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노동자는 간 데 없고 그 자리를 온통 ‘국민’과 ‘국가’가 채운 것이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표방하고 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정치적 표현이었던 이 몰계급적 애국주의는, 마침 IMF 외환위기 앞에서 자본가들이 ‘국가의 생존’을 명분으로 노동자 생존권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퍼부으려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사상적 무장해제를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매우 심각한 노선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음과 동시에 IMF 외환위기가 가시화하던 1997년 12월초에 민주노총이 먼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제안하고 나선 것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직후 구성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1998년 2월초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했던 것도 바로 이 몰계급적 애국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몰계급적 애국주의가 지배하는 선거운동에 당연히 현장으로부터 많은 반발이 올라왔다. 특히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슬로건의 등장은 현장의 반발에 불을 붙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선거운동 거부를 선언하고 길거리에 나붙은 ‘일어나라 코리아!’ 현수막을 제거하러 다니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998년 5월에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국민승리21을 확대 재편하여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고 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다시 한 번 결의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에 대한 현장의 반발에 덧붙여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했다가 불신임당한 것 때문에,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상당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울산을 중심으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상황이 다시 반전됐다. 1만 명의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자본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현대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울산 지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에게 대거 표를 몰아줌으로써 2명의 구청장과 8명의 시·구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은 후보들이 공직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것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의 사건이었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 한국 정치의 척박한 구조 속에서도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었다. 여기에 ‘정리해고 반대’를 선거운동 전면에 내걸었고 또 그래서 승리했다는 점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가 야기한 현장의 반발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을 모태로 한 진보정당 건설은 여전히 창당 동력을 충분히 결집시키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에 다시 민주노총이 1999년 4월 중앙위원회를 통해 ‘진보정당 창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4월 18일과 6월 13일 두 차례 민주노총·전국빈민연합·국민승리21 등을 중심으로 진보정당 창당 추진대회가 개최됨으로써, 비로소 국민승리21을 넘어선 창당 주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제 순풍을 타게 된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이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을 거쳐,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창당에는 개량주의 세력이 창당을 주도했다는 하나의 측면과 1996~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다는 또 하나의 측면이 모순적으로 결합돼 있었다. ◎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한 민주노동당 창당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을 주도한 것은 명확히 개량주의 세력이었다. 1997년 결성된 국민승리21을 통해 결집한 이들은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 대표적인 세력은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세력이었다.[4] 권영길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는 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에서 심각한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총파업 투쟁의 실질적인 준비와 공세적인 돌입을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총파업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투쟁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림으로써 역사적인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수백 명의 국회의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던 총파업의 힘을 스스로 무너뜨려 놓고서, 그들은 겨우 “단 한 석의 국회의원”을 거론하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총파업 이후 권영길 위원장은 국민적 인기를 누리는 유명 스타가 되었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총파업이 보여준 위력은 언론과 여론의 시선을 한동안 민주노총에 집중시켰다. 게다가 늘 국민 여론을 고려하며 투쟁의 수위를 낮추고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는 권영길 위원장의 ‘유연한’ 지도력은 부르주아 언론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부르주아 언론은 연일 그를 최고의 노동운동 지도자라고 칭송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대단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권영길로 대표되는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는 노동자투쟁을 이끌 지도력은 없었지만 정치적 감각과 판단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 그들은 총파업을 거치며 급격히 높아진 노동자들의 정치의식과 부르주아 언론의 환대를 잘 활용하여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총파업 실패로 인한 대중의 허탈감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이러한 사태 전개를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며 진정추 세력이 온 몸을 던져 뛰어들었다. 진정추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이 주도하는 꼬마 민주당에까지 합류해 들어갔다가 총선 이후 파탄지경에 빠져 있었다. 1991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조직이었던 한사노창준위를 건설했다가 소련 붕괴 직후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던 이들은 1992년의 진정추와 1995년의 진보정치연합(진정련)을 거치면서 점점 더 우경화돼 1996년 총선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조차 견지하지 못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품안에 뛰어든 것이었다. 우경화를 거듭하며 노동자계급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이들은, 그러나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힘을 목도하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민중후보 운동부터 시작해서 민중당·한국노동당·진정추·진정련·개혁신당·민주당을 거치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확보한 그들의 뛰어난 정치기술은,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을 선언한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에게도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두 세력 간에 강고한 정치적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개량주의 세력 전반이 민주노동당 창당에 적극 참여하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형성된 그들의 개량주의적 환상은 IMF 외환위기 아래 파상적으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서도 오히려 더욱 고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개량주의자들은 여전히 정권과 자본에 맞선 치열하고 공세적인 노동자투쟁이 아니라 제도적 타협에 의한 점진적 개량을 간절히 소망했고, 그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그런 제도적 타협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5] 국민승리21, 국민후보, ‘일어나라 코리아’ 등으로 대표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 애국주의는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한 개량주의 세력이 가진 사상과 노선의 실체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정확히 따져 보자면 사회민주주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너무나 사랑했던 ‘국민’이라는 용어는 원래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줄임말로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민족을 포섭하여 대동아 전쟁으로 내몰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이처럼 국민이라는 용어에 담긴 친일성과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지속됐고, 그래서 1995년 8월 김영삼 정권이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며 1941년부터 사용돼 온 ‘국민학교’라는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 바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95년 11월 출범한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가 표방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나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국민승리’ ‘국민후보’ 등의 용어는 몰계급적일 뿐만 아니라 진보적 민족주의보다도 못한 지극히 후진적이고 보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개량주의 세력의 창당 열망과 주도력만으로는 민주노동당은 결코 창당에 이르지 못했거나 창당했더라도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원에 힘입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 개량주의 세력의 개량주의적·사회민주주의적·애국주의적 환상은 IMF 외환위기라는 객관적 조건과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에, 만일 그러한 노선만으로 일관되게 나아갔다면 얼마 못가서 노동자들 속에서 차갑게 외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성장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 속에서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며 창당될 수 있었던 것은 1996~97년 총파업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정치의식은 주로 노동자계급의 정체성과 잠재력에 대한 자각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지향은 불투명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후반에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정치의식은 1990년대 초반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갖고 있었던 정치의식, 즉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는 구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변혁적 지향성이 강했던 그 정치의식보다는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변혁적’ 정치의식이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 위주로 형성되었던 것과 달리, 1990년대 후반의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형성된 것이었다.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확산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1996~97년 총파업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에 맞선 1996~97년 총파업은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대중적 각성의 기회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너무 초보적이었던 탓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경험이 거의 유실돼 버렸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일정하게 성장해 온데다가 한 달 가까이 조직적인 총파업이 갖는 위력을 경험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에 포괄되지 않은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광범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김대중이 이끄는 보수야당이 노동법 재개정 협상에서 애초의 날치기 노동법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보수야당의 계급적 실체에 대한 광범한 각성을 불러왔다. 또한 이후 IMF 외환위기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맞닥뜨린 것은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단결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계급적 방어본능을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계급적 자각은 있으나 변혁적 지향은 갖추지 못한 이 정치의식, 과학적 신념보다는 계급적 본능이 주도하는 이 정치의식은 양면적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변혁적 지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개량주의적 환상에 이끌려 다닐 위험성을 갖고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실천적 검증을 통해 노동자계급에게 도움이 되는 길과 해악이 되는 길을 뚜렷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계급적 직관력을 발휘할 가능성 또한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양면적인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이 선거에서 집단투표에 나서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어떤 정치적 방향으로 이끌리는가에 따라 집단투표가 최대의 실천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대중적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게 할 수도 있는 양면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쨌든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계급적 정치의식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의 출현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열망으로 모아졌다.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용어는 바로 그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 열망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해방파로 하여금 더 이상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노골적으로는 지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열망을 가장 먼저 위력적으로 표출시킨 것은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이 내세운 후보들에게 그 면면과 실체를 따지지 않고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울산지역 노동자들이었다. 1998년 무렵의 선거에서 노동자 대중이 폭발적인 열기로 진보 정치세력을 지지했던 것은 무엇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신뢰, 그리고 민주노조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한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IMF 경제공황이 몰고 온 생존권 위협에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도 상당한 작용을 했지만, “정리해고 저지”로 요약되는 민주노조운동과 진보 정치세력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절박한 위기의식이 진보정치에 대한 폭발적 지지로 연결되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의 선거들에서 수많은 노동자대중은 나름대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누가 특별히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가족과 주변의 이웃·친지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러 다녔다. 현장의 분위기는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압도적 지지로 자연스럽게 결집되었고, 온갖 수로를 통해 작동하는 밑바닥 노동자들의 설득구조는 지역의 분위기 또한 확연히 휘어잡았다.[6] 이처럼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 세력의 주도성과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 성장이라는 양 측면이 서로 모순적으로 결합하고 작용하는 과정을 거치며 창당에 이르게 됐다. 2)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 IMF 외환위기 이후 극심한 사회 양극화로 표현된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는 짧은 시간 동안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을 차례로 만들어 냈다.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결집하고 분출시킬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갈망은 민주노동당의 눈부신 약진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없음을 알아챈 노동자·민중의 실망은 다시 민주노동당을 빠르게 추락시켜 버렸다. ◎ 민주노동당의 약진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부터 시작됐다. 창당 직후 치러진 2000년 4·13 총선에서는 울산 북구와 창원을 선거구에서 접전을 벌이기도 했고, 2001년까지 치러진 각종 보궐선거들에서 이따금 선전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좀처럼 뚜렷하게 가시화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2명의 구청장을 포함한 45명의 당선자를 냈다. 특히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134만여 표(8.1%)를 얻은 것은 약진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1997년에 이어 다시 출마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막판 대접전 속에서도 96만 표(3.9%)를 얻으면서 1997년 대통령 선거 때의 30만 표(1.2%)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확인하며 약진의 흐름을 이어갔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이 최고조에 오른 것은 2004년 4·11 총선 때였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277만 표(13.0%)를 얻으며 단번에 제3당으로 튀어 올랐다. 울산 북구와 창원을 2개의 선거구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내고 8명을 비례대표에 당선시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로 국회의원을 배출한, 그것도 한꺼번에 10명이나 배출한 노동자정당이 됐다. 총선에서의 약진은 민주노동당의 주가를 한껏 끌어올렸고, 총선 직후 몇 달 동안은 여론조사 지지율이 20%를 넘어서기까지 했다. 바야흐로 민주노동당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었다. ◎ 민주노동당의 추락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승수 의원이 선거법 위반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치러지게 된 2005년 10·26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정갑득 후보를 내세운 민주노동당은 당력을 총집중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전국 최고의 아성인 울산 북구에서 당력을 총집중하고도 1천 800여 표(3.6%) 차이로 결국 패배한 것은 2004년 4·11 총선 이후 한껏 들떠 있던 민주노동당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10·26 재선거 패배로 충격에 빠진 민주노동당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를 포함한 최고위원회가 총사퇴해야 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이 이제 구조적인 위기에 빠져 들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5·31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일방적인 후퇴만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당선자 수가 2002년의 45명에서 81명으로 늘었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210만여 표(12.1%)를 얻으며 2004년 총선 때에 비해 약간 후퇴하는 정도를 기록했다. 그러나 수치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선거였다. 서울·경기·인천의 광역의원 선거구 234곳에서 한나라당이 100% 당선되는 등,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상상하기 힘든 참패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대승이 너무나 뚜렷이 대비되는 선거였다. 특히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장악했던 것을 놓고 보면 겨우 2년 사이에 한국 정치 지형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선거였다. 5·31 지방선거 결과는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심판이었다.[7] 특히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게 엄청난 기대와 지지를 보내 주었으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참혹한 결과를 안긴 데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사회 양극화를 초래한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판은 민주노동당 같은 노동자 정당의 약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본가정당이며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귀결됐다.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즉 어느 때보다 노동자정당의 정치적 기반이 강력하게 확대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아래 치러진 선거에서, 또한 계급적 문제를 주된 이슈로 하여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지형 변화가 일어난 선거에서,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성장에 결정적인 제동이 걸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게다가 선거 결과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의미는 더욱 심각했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취약했던 여러 지역에서 2002~04년의 전반적 약진이 뒤늦게 반영된 것과 달리, 민주노동당의 가장 강력한 기반인 울산에서는 8년 동안 장악했던 북구·동구 두 곳의 구청장 선거에서 모두 패배하는 등 오히려 노동자들의 지지가 축소됐다. 즉 약진했던 과거와 추락하는 미래의 모순적인 결합이 외관상의 현상유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더욱 가속됐다. 세 번째 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300만 표를 운운하던 목표치와 달리 71만 표(3.0%)를 얻는 데 그침으로써 2002년 대통령 선거의 96만 표(3.9%)보다 오히려 후퇴했다. 그런데 저조한 득표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선거를 치르면서 노동자정치의 최소 원칙마저 저버린 점이었다. 9월 20일 권영길 후보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방문해서 중앙회 임원들과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간담회를 진행했다. 여기서 권영길 후보는 “중소기업인 여러분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 왔으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중소기업이 동지적 관계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은 중소기업 자본가들의 동지이면서 동시에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10월 15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에 보내는 공식 사과문을 김선동 사무총장을 통해 전달했다. 2006년 9월 11일 한국노총이 ‘노사관계 로드맵’ 노사정 야합에 참여한 것을 놓고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은 이제 노동자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사과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사과는 한국노총이 정책연대 대상후보에 민주노동당을 포함시키는 전제 조건으로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한국노총이 10월 8일자로 사과요구 공문을 보내 16일까지 회신하라고 하자 15일 직접 찾아가서 사과 공문을 전달했다. 한마디로 말해 ‘표’를 얻으려고 민주노동당은 어용 한국노총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민주노동당의 2007년 대선 참패는 그 본질을 스스로 만천하에 까발리는 기폭제가 됐다. 대선 참패 이후 민주노동당은 시끌벅적한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한 데 대한 어떤 진지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똑같이 배신한 자주파(민족주의)와 평등파(사회민주주의) 사이에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만이 계속됐을 뿐이었다.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의 길을 걸음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했던 것은 자주파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대선 참패 이후 목소리를 높인 평등파 또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도했던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대선 참패 이후 평등파가 민주노동당을 집단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했지만, 노골적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창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자주파와 평등파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었다. 대선 참패와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도 마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희망인 듯 행세했다. 그것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을 거치며 성장해 온 노동자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민주노동당이 상당 부분 흡수해 낸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거나 지지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200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오거나 지지를 거둬들였다. 10년 가까이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대안인 것처럼 행세하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 민주노동당은 왜 추락했나?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를 불러온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승리와 이명박의 집권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이 약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추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실망, 즉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자신들의 요구를 앞장서 결집하고 분출시킬 의지와 능력을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게 된 노동자·민중의 실망 때문이었다. 그러한 노동자·민중의 실망은 민주노동당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민족주의 노선의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한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개량주의 세력의 주도로 창당되고 그 주도권이 날로 강화된 민주노동당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내는 역할을 철저히 거부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1996년 이후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의 핵심이 정리해고·비정규직 제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비정규직 제도의 철폐를 내건 역동적인 대중정치투쟁을 조직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온갖 개량주의·의회주의 환상 속에 가두어 버렸고, 광범한 노동자들의 성장하는 계급적 정치의식을 그저 선거에서의 집단투표로 제한시켜 버림으로써 그 진정한 분출과 성장을 오히려 가로막았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민중에게 극심한 사회 양극화를 앞장서 해결할 신선한 정치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그러한 기대는 지지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연결됐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적·의회주의적 접근은 오히려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를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무능함만을 노동자·민중에게 보여주게 됐고, 심지어는 자본가 정치세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극심한 배신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부유세, 무상의료·무상교육,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등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제출했던 나름의 대안적 전망들은 한때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뒷받침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핵심의제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거나 또는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누더기가 돼 버렸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킬 때,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성공적으로 쟁점화했다. 민주노동당이 내건 무상의료·무상교육은 광범한 노동자·민중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노동자·민중이 경쟁력과 효율성의 논리에 밀려 삶이 파괴당했다. 그보다 더 많은 노동자·민중이 최소한의 생존조건도 보장되지 않는 ‘불가피한 희생자’로 내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상의료·무상교육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희망으로 다가왔다. 무상의료·무상교육의 재원을 마련하겠다며 부유세를 내건 것도 큰 호응을 받았다. 어차피 노동자·민중이 더 낼 수 있는 돈도 없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삶이 파괴될 때, 가진 자들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는 한국 정치의 향방을 가르는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던진 이 쟁점을 감당할 능력이 전혀 안 됐다.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노선 그 자체가 근본적인 걸림돌이었다. 민주노동당에게는 지지율을 올리고 그래서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게 최고의 가치였다. 그런 민주노동당에게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가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자본가계급이 보수언론을 동원해서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에 붉은 이미지를 덧씌우며 집요하게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온건한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를 쓰던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급진적 성격을 최대한 제거해 나갔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는 여의주 없는 용이 되고 말았다. 자본의 이윤추구를 절대시하는 자본주의 원리에 정면 도전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를 도입할 방법은 없었다. 구체화의 과정에서 그 내용이 현저히 약화되자, 무상의료·무상교육과 부유세 자체가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정치적 쟁점으로서의 긴장감 또한 사라졌다. 핵심 쟁점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정치는 정처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5~06년을 거치며 한국 정치는 일찍이 겪지 못했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과 긴장이 계속되자, 광범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거대하게 축적됐다. 그 분노는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폭발했다. 노동자·민중은 삶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노무현 정권에게 물었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서울·인천·경기의 수도권 세 지역에서 지역구 광역의원을 단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한국 정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참패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면서 노동자·민중이 선택한 새로운 희망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이었다. 노동자·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가장 철저하게 맞서는 대안이 아니라, 그 아류로 인식됐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범으로서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왜 5·31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병행되지 않은 채 한나라당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된 것일까? 그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민주노동당 스스로에게 있다.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 앞에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대안 주체로 다가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을 스스로 애써 부정하기까지 한 까닭이다. … 민주노동당이 선거 기간 중 발표한 ‘진보개혁세력 대표주자 교체론’은 그 전형적 사례다.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대다수 노동자·민중을 삶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누적된 대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려 하는 이 심각한 정세에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열린우리당에 맞선 대중적 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할 진보정당이 오히려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범주를 통해 “민주노동당은 결국 열린우리당과 한 묶음”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천명한 것이다.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이 전격 등장하는 과정이 상징하듯이, 사회경제적 문제를 담아내지 못하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와 개혁은 현 시점의 한국 정치에서 이미 주된 쟁점이 아니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를 일정하게 비판한다 하더라도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낡은 규정과 어법 속에 빠져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결코 사회 양극화 속에 절망하고 있는 노동자·민중과 진정어린 상호소통을 확장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체성 혼란이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2004년 12월에도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둘러싸고 ‘열린우리당 2중대’ 논란이 벌어졌으며, 국회에서 비정규직법을 둘러싼 치열한 대치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열린우리당과의 공조가 수차례 거듭되어 왔기 때문이다. … 2002~04년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가능케 했던 … 대중적 약속들이 그동안 민주노동당 내에서 어떻게 취급되어 왔는가? 부유세와 무상의료·무상교육은 어느덧 당의 핵심 의제에서 사실상 사라져 버렸고,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은 비정규직 법안 처리 공방 속에서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반쯤 누더기가 되어버린 것이 냉정한 현실 아닌가! 중간층 눈치 보기와 물타기로 점철된 정책의 구체화 과정, 아래로부터 대중 동력을 형성해 오는 집요한 노력의 부재, 아니 그 이전에 대중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 자체의 결여 등등. 그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든, 이전에 민주노동당이 가장 그럴싸하게 내걸었던 대중적 약속들은 그간의 과정을 거치며 사실상 공수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8] 05년에는 비정규직 법 민주노동당 수정안, 그리고 06년에는 로드맵 열우당 수정안 야합. 단병호 의원이 국회에서 원칙을 훼손했던 사례들이다.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날짜가 둘 다 똑같이 12월 8일이다. 05년 비정규직 법 민주노동당 수정안의 경우,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법 개악 저지 투쟁에서 전선을 교란시켰다. 당시에 사유제한을 확대한 수정안은 추후 개악 시에는 결과적으로 개악에 일정정도 동참한 꼴이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투쟁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주체들의 사기를 꺾게 되어, 결국 그 어떤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06년 이번 로드맵 야합의 경우에는, 전선을 교란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로드맵 법안 통과에 실질적으로 동의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계급과 야합이 있었다. 그 결과 06년 투쟁을 패배했어도 아주 굴욕적으로 패배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단병호 의원은 노동자정당에서 국회에 파견한 노동자의원으로서 의회에서 자본가계급과 투쟁하기보다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고 말았다. 의회주의에 철저히 물들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9] 결국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에게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허상만을 제시할 뿐 노동자들을 당당한 투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던 민주노동당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울부짖는 노동자들을 자본가들의 총공세에 맞서 현장과 거리에서의 직접적인 정치투쟁 전선으로 이끌어 내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관료들을 기반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에 철저히 매몰되면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의 2중대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를 앞장서 모아내고 분출하는 주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노무현 정권과 한 묶음으로 노동자·민중에게 심판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3) 역사적 가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으로 뒷받침된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 정당으로 고착된 것은, 창당 초기부터 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한 때문이었다. 이것은 악순환을 낳았다.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성격이 노골화할수록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타협적·관료적 인물들이 출세의 욕망을 품고 물밀 듯이 민주노동당으로 밀려들어 갔다. 반면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점점 더 민주노동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노동당은 개량주의 정당으로 빠르게 고착돼 갔다.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초기부터 다수가 민주노동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개량주의 주도세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하도록 활용할 방안에 대한 전망 부재 때문이었다.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사실상 참여하지 않으면서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에 기여할 길은 애초부터 없었을까? 개량주의 세력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아,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민주노동당으로 모여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한 대중적 열망’을 틀어쥘 길은 없었을까? 민주노동당이 역사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보다 앞선 지점에서 문제가 바로잡혀야 했다. 만일 전투적·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이 1990년대 초중반 민주노조운동 내부 노선투쟁에서 승리하고 주도권을 장악했다면,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의의를 해명하면서 올바로 활용할 전망을 세울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수 있다. 1996~97년 총파업은 훨씬 더 성공적인 투쟁이 될 수 있었고, 민주노동당은 제대로 된 노동자계급정당으로 형성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 시기에는 매우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주도권이 전투적·변혁적 세력에게서 타협·개량주의 세력에게로 이동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소련 붕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몰고 온 극심한 사상적 혼란이 놓여 있었다. 그 시절 거대한 청산주의 물결을 거부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 사회주의자들은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근본에서부터 하나씩 다시 세워가야 했다. 또한 선진노동자들은 총체적 전망과 연결되지 못한 막막함 속에서도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포기하지 않으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4) 대안 지도력으로 서지 못한 사회주의 세력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게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던 한국의 자본가들에게 적지 않은 양보를 강제해 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자본가들은 노동자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 퍼부으면서도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력에 밀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충격적으로 위기에 내몰리면서부터 자본가들의 태도는 완연히 바뀌었다. 자본가들이 정리해고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신자유주의 대공세를 펼치자, 노동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매우 치열하게 투쟁으로 맞섰다. 정리해고 법제화에 맞섰던 1996-97년 총파업, 정리해고에 맞섰던 1998년 현대차·만도기계 파업, 1999년 한라중공업 파업, 2001년 대우차·효성·태광 파업, 발전소를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민영화)에 맞섰던 2002년 발전 파업은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이 주를 이뤘던 그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당면한 공세를 물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세상을 향한 거침없는 전진을 노래하고 희망했다. 그러나 그 투쟁들은 줄줄이 패배했다. 노동자들은 생존과 권리를 지키려는 강렬한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지도부의 투항과 배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투쟁 전열이 무너지면서 결국 패배하는 양상이 거듭해서 되풀이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퍼부어진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는 노동자들에게, 특히 그 지도부에게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시야, 대담한 전망과 자신감을 요구했다. 나라와 기업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논리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맞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어떤 경우에도 내줄 수 없으며 더 이상 당신들이 우리의 생존권을 책임질 수 없다면 이제 노동자가 나라와 기업을 이끌고 가겠다는 대담한 의지와 자신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절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는 전반적으로 엄혹한 사태를 헤치고 나갈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결국 노동자들의 열망을 책임지지 못하고 자본가들에게 투항하며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가 펼쳐진 이 시기는 만일 노동자들이 전열을 추슬러 총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면 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운동의 거대한 성장과 사회변혁을 향한 힘찬 전진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시기였다. 노동자들은 역사적인 1996~97년 총파업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몇 차례 역동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러한 역동적 가능성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고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지도력에 갇혀 거듭되는 투항적 배신에 좌절하며 패배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의 역동적인 가능성이 힘차게 뻗어나가려면 타협·개량주의 지도력과 달리 전투적·변혁적 전망과 기세를 극대화한 대안 지도력을 중심으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강고한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렇게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냄으로써 타협·개량주의 지도력을 대체하는 대안 지도력으로 스스로 서는 것이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에게 주어진 객관적 과제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수십만 조합원들도 상당한 능동성과 건강한 활력을 갖고 있었다.[10] 또한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력적인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구축해 낼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노동법 개악과 구조조정·정리해고의 공격을 퍼부으며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총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이 현장과 거리에서 펼치는 직접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정리해고·임금삭감·비정규직화 저지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단호하게 지켜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정리해고제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나누기 △손배·가압류 폐지 △무상의료·무상교육·부유세 등으로 반격을 전개하여 사회변혁을 향해 역동적으로 전진해 나가는 길도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이러한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내지 못했다.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오류와 한계를 비판하는 데서는 날카로웠지만, 그러한 비판을 넘어 스스로를 대안 지도력으로 세워 내지는 못했다. 현장조직 운동을 중심으로 일부 선진노동자들 속에 어느 정도 전투적·변혁적 기세를 불어넣을 수는 있었지만, 타협·개량주의 지도부의 투항적 배신에 분노하는 선진노동자들이 그러한 계급적 본능을 체계적인 사상과 노선으로 발전시켜 내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또한 일부 선진노동자들을 넘어서서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직접 다가가며 공세적인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의 필요성과 전망을 강력하고 끈질기게 제시해 낼 필요가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 시기에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내지 못함으로써,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계급 운동의 객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부분적인 퇴보를 포함한 전반적인 정체를 피할 수 없었다.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에게 사상적·실천적 전망을 열어주는 데서도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현장파의 운동적 몰락에도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개량주의 세력의 든든한 근거지가 되어 노동자운동 전반을 정체와 후퇴로 내모는 민주노동당에 대당할 만한 대안 정당이나 정치조직을 세워내지도 못했다. 물론 1990년대 초반을 강타한 청산주의의 물결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그 후 어렵게 몇 년을 헤쳐오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노동자정치투쟁 전선을 앞장서 구축해 낸다는 것은 사실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가장 현명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회주의 세력 전반이 통일된 대응력을 갖춤으로써 잠재적인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는 것도 꼭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 세력이 가진 이러저러한 편향과 결함들도 통일된 흐름 속에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상호 보완되면서 풍부한 요소를 가진 장점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은 공개 영역과 비공개 영역 모두에서 다양한 그룹으로 분열된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고, 따라서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 다만 2000년대 초반 이후 매우 척박한 조건을 뚫고 비정규직 운동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현장활동가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냈다. 한국 노동자운동이 정규직 운동의 패퇴에 따른 극심한 위기를 딛고 비정규직 운동을 중심으로 재건돼 나갈 수 있도록 소중한 초석을 놓은 셈이었다. ※한국노동자운동사 4부(2008~2017, 고난과 재건)와 5부(2017~2024, 폭풍 속의 표류)는 몇 달 간의 휴지기 이후 이어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1]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는 창당 이후 꾸준히 늘다가 2004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늘어나 8만여 명에까지 이르렀다. [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경찰과 군이 정권의 의도에 따라 조봉암 등을 체포해 사형에 이르게 했다”는 조사결과를 의결하고, 조봉암과 유가족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 구제와 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해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3] 민주노총, 1997/07/24, 제6차 임시대의원대회 결의사항. [4]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초기 4년 동안,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를 대표하는 권영길은 당 대표를 역임했고, 진정추 세력을 대표하는 노회찬은 부대표와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실권을 행사했다. [5] 그러나 현실은 자본주의 위기가 깊어짐에 따라 자본가들이 개량주의자들과 타협할 의사와 능력이 더욱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은 자본과의 타협을 추구했지만 ‘개량의 떡고물’조차 얻어올 게 없었으며, 그들에게 강요된 것은 자본가들의 공세를 합리화해 주는 ‘개량 없는’ 개량주의일 뿐이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2000년대를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6] 양준석, 2006/06/20,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왜 ‘계급투표’에 실패했는가?」 [7]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피습 사건과 같은 우연적 요소들이 사태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 측면도 있었지만, 5·31 지방선거가 드러낸 정치적 의미의 핵심은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심판이었다. [8] 양준석, 2006/06/20,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은 왜 ‘계급투표’에 실패했는가?」 [9] 노동해방실천연대, 2007/01/26, 「민주노동당, 노동자 배신 정당으로 전락할 것인가」, 『해방』 20호. [10] 몇 년 동안 구조조정에 맞선 강력한 투쟁들이 펼쳐졌지만 결국 지도부의 배신으로 패퇴하고 나자,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심각한 수동성과 보수화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1996~97년 총파업으로부터 몇 년 동안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보여준 능동성과 활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2026-05-05 | 조회 23,602 -
[한노운사 연재 15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한국 자본주의가 1990년대 중반을 분기점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자 자본가들은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리해고 도입과 비정규직 확산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공세를 전면화했다. 그로부터 몇 년 만에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절반을 훌쩍 넘어서게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정리해고 도입을 막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확산과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억압·차별의 심화를 방치했다. 이는 민주노조운동에도 심각한 위기와 퇴보로 되돌아갔다. 대기업 정규직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민주노조운동’은 가장 착취당하고 억압받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비정규직들을 외면한 채 어느 정도 살 만한 소수만을 위하는 ‘집단이기주의’ 운동으로 사회적으로 취급받게 됐고, 스스로도 그렇게 빠져들었다.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대표성 상실과 사회적 정당성 약화는 조직력 약화로 이어졌다.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데 따른 패배주의와, 비정규직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결합하면서 대기업 정규직 속에는 보수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해졌다.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기반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민주노조운동’의 약화는 대기업 정규직에도 자본의 더 강화된 공세를 가능케 했고, 이는 ‘민주노조운동’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2005년 10월 20일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비리사태에 따른 민주노총 집행부 총사퇴 기자회견이 열린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기자회견장에서 피켓시위를 벌이던 반대파 조합원이 기자회견장에서 밀려나와 부숴진 피켓과 함께 복도에 서 있다. © 시민의신문 양계탁 1)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돼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노동자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됐다. 비정규직이 최저생활로 내쫓기며 ‘빈곤화’하는 동안, 대기업 정규직은 ‘개량화’하는 역설적인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분할은 경제적 분할을 넘어 사회적 분할로 발전했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가 자본주의 체제에 고통스럽게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쉽사리 사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기업 정규직들은 대체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장과 쇠락이라는 경험을 집단적으로 함께 했다. 1987년 이후 한동안 대기업 정규직들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나아가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공유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시기 대규모 정리해고 공세 앞에서 한편으로 민주노조가 갖는 힘의 한계를 절감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도자들의 배신에 절망하거나 길들여졌다. 대기업 정규직들의 의식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대기업 정규직들의 뇌리 깊숙이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본이 무자비한 공세로 나오는데 노동자들이 아무리 노동조합으로 단결하고 투쟁하더라도 이겨낼 수 없다’는 패배적인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혔다. 하지만 대기업 정규직들은 자본의 대규모 정리해고 공세에 맞서 만만치 않은 저항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상적 구조조정의 시기로 넘어온 이후 자본의 공세는 주로 비정규직에 집중됐으며, 정규직에 대한 공세는 임금과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노동강도를 높이는 형태로 펼쳐졌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음으로써 일정한 여유자금까지 굴릴 수 있게 된 다수 대기업 정규직들은 2000년대 초반 이후 금융자본이 주도한 부동산·주식 거품 팽창에 합류하면서 덩달아 명목상 자산가치가 급등했다. 처음에는 주식에 손대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중에는 거품이 워낙 팽창한 탓에 부동산과 주식에 뛰어들어 번 돈이 임금 소득과 엇비슷한 경우도 그리 드물지만은 않게 됐다.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갑자기 많은 돈을 만지게 되자 씀씀이가 크게 늘어났고 그럴수록 물질적 과시욕과 더 많은 소비에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은 대기업 정규직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을 바라보며 연민이나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상대적으로 나은 노동조건과 소비능력을 가진 자신에 대한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IMF 외환위기의 충격적인 경험을 잊지 못하는 대기업 정규직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위협 앞에 다시 서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떨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다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은 정리해고 당할 가능성을 줄이고 정리해고 당하기 전까지 최대한 벌어두기 위하여 회사가 잘 나가고 우리 부서에 보다 많은 일감을 끌어올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노사협조주의’와 ‘물량지상주의’에 빠져들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정규직들의 의식은 과거의 상당히 선명했던 노동자 의식과 매우 다르게 뒤죽박죽 완전히 헝클어져 버렸다. 나날이 강화되는 노동 강도는 그들의 삶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지만, 갈수록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내모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한 때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어느 정도 형성됐던 정규직의 계급의식은 ‘해 봤지만 안 되더라’는 패배주의, ‘돈 쓰는 재미’에 허우적거리는 소비주의, ‘비정규직에 비하자면 이게 어디냐’는 배부른 노예의 심리, ‘벌 수 있을 때 악착같이 벌어야 한다’는 초조함 따위에 갉아 먹히며 왜곡과 타락, 나아가 해체의 과정을 밟아갔다. IMF 외환위기 이후 1500만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 850만에 이른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구성을 가졌다.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일한 젊은 노동자들, 정규직으로 있다가 비정규직으로 밀려난 나이든 노동자들, 정년퇴직 이후에 다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늙은 노동자들, 가사노동의 부담까지 이중으로 안고 사는 여성 노동자들, 학비나 용돈을 마련하려는 학생 노동자들, 높은 학력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지식인 노동자들, 소규모 자영업을 하다 몰락한 노동자들, 농사를 짓다 망한 노동자들, 머나먼 한국으로 돈 벌러 온 이주 노동자들 등등. 그 고용형태 또한 가지각색이었지만, 비정규직은 늘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대다수 비정규직의 임금은 법정 최저임금을 넘나들거나 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걸쳤다. 노동 강도 또한 매우 높았다. 갈수록 인간 이하의 삶으로 내몰리지만,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놓여 있는 비참한 조건이 곧 선명한 노동자 의식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비정규직은 대체로 1987년 이후 펼쳐진 민주노조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대다수 비정규직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만들어 내는 힘을 최소한의 수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다. 이질적인 사회적 구성과 불안한 고용 그리고 작업장의 분산 등은 초보적인 단결마저 더욱 어렵게 했다. 그래서 비정규직은 초보적인 노동자 의식조차 쉽사리 세우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현실은 비정규직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규직을 ‘마녀사냥’하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 융단폭격 속에서, 상당수 비정규직은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의 책임이 자본주의 체제나 자본가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정규직에게 있다고 여겼다.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는 비정규직이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의 형성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노동계급의 단결’을 실현하려는 정신은 심각하게 퇴행하여 대중운동 자체가 사업장·고용형태 등 갖가지 울타리 속에 갇힌 채 분열되어 있다. 외형적으로는 산별연맹을 넘어 산별노조 건설이 대세로 되는 시대지만,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80년대 후반 대중적으로 실현되었던 계급적 연대의 수준은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기아·현대자동차노조 일부 타락한 간부들의 취업비리와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사건이 겹쳐져,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난파선처럼 방향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연대, 투쟁의 정신이 심각하게 후퇴한 현실의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비정규직노동자투쟁은 심각한 고립과 박탈의 장벽에 부딪혀야 했고 자본과 정권에 의해 각개격파 당해야 했다.[1]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는 갖고 있되 대중적 힘은 아직 갖고 있지 못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조합 건설과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설계하여 법과 제도로 옭아매고 있는 비정규직들 속에서 노동조합의 뿌리를 내려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대다수가 정규직에 대한 부러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힌 채 자본주의 본질을 꿰뚫는 계급의식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비정규직 운동은 스스로 큰 힘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정규직 운동의 한계를 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으로도 서지 못했다. 2) 현대차노조의 위기 현대차노조는 1995년 양봉수 열사 분신투쟁을 계기로 민주노조를 재건하여 1996~97년의 노개투 총파업에서 핵심 투쟁동력으로 역할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여기에 1999년 현대자동차서비스와 현대정공 자동차생산부문의 현대자동차 통합을 계기로, 현대자동차서비스노조와 현대정공노조까지 통합되면서 더욱 덩치가 커졌다. 현대차노조는 조합원 수가 3만에서 4~5만으로 늘었고, 울산공장·아산공장·전주공장의 생산직·사무직에 판매·정비·연구 분야까지 다양한 직군들을 망라하게 됐다. 단일 자동차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울산공장을 주된 기반으로 하면서도 ‘한라에서 설악까지’라는 노보 이름처럼 전국적 조직망을 갖게 됐다.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조 재건 이후 199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임금·단체협약·고용을 둘러싸고 파업을 전개했다.[2] 현대차노조의 파업은 노조의 조직력과 컨베이어 작업의 특성이 결부되면서 거대한 공장의 생산을 확실히 중단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또한 5~6천 명에서 1~2만 명 정도가 모이는 자체 조합원 집회를 수시로 개최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가 가진 투쟁력은, 민주노총 산하 제조업 단위노조 대다수의 투쟁력이 부실해진 상황과 맞물리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돋보였다. 따라서 그 시기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전개하는 다양한 총파업에서 핵심 동력 역할을 했다. 현대차노조의 중심적 위치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였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밀집 거주하는 울산 북구는, 민주노총의 후원을 받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을 절반 이상 휩쓸었다.[3] 그러나 2000년대 중반 현대차노조는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직면했다. ‘현대차의 내부 상황을 들여다보면 현대중공업 못지않게 무너졌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현장 노동운동이 거의 초토화되고 수십 명의 고립된 활동가들만이 남은 채 노동조합 자체가 완전한 노사협조주의로 전락한 현대중공업의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의 중심 사업장으로 여전히 역할하고 있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가진 현대자동차의 노동운동은,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 중공업 못지않게 다 무너졌다”는 탄식을 근거 없는 비관주의로만 몰아붙이기에는 사태의 전개가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전·현직 노조간부들이 채용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고, 조합원의 2/3가 노조간부들의 ‘빨간 조끼’를 특권과 관료주의의 부정적인 상징으로 인식하며, 비정규직과 현장 활동가들에 대한 관리자·경비들의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 전개는 현대자동차노조가 겪고 있는 ‘위기’의 폭과 깊이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노조가 만만치 않은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노조 스스로가 혁신위원회 구성에 나설 만큼 이미 ‘공식적이고 공공연한’ 사실이다.[4] ◎ 위기의 근원 - 1998년의 패배와 대안의 부재 1998년 이전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여러 차례 ‘가장 전투적인 노선과 세력’을 선택했다. 그 시기에는 ‘전투적이고 계급적일수록 대중적인’ 상황이 흔하게 벌어졌다. 조합원들은 기존 집행부의 직권조인, 노사협조주의, 투쟁회피를 단호하게 비판하며 점점 더 전투적인 세력을 집행부로 밀어 올렸다. 상당한 명망을 가진 이들도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하면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도중에 조합원들이 어용 집행부를 다시 선택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민주 집행부의 투쟁회피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1995년 어용 집행부 아래서 벌어진 양봉수 분신과 비공인파업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의 마음에는 민주노조가 더 굳세게 뿌리내렸다.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과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는 민주노조를 통해 세상과 삶을 바꿔내겠다는 열망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1998년의 패배는 조합원들의 의식에 큰 타격을 가했다. 조합원들은 1998년의 패배를 ‘노동조합은 앞으로도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열심히 잘 싸웠는데도 패배했는데, 앞으로는 패배의 경험 때문에 그만한 투쟁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패배가 더욱 불가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노조로 단결한다면 세상을 바꿔내고 우리의 삶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깨져 나갔다. 이제 민주노조를 믿을 수 없다면, 각자가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된 조합원들은 머지않아 회사가 다시 정리해고의 칼날을 겨누기까지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노동조합에게 바라는 것은 과거와 같은 ‘민주노조를 통한 위대한 투쟁과 변화’가 아니라 (어떤 방법을 써서든) 당장 한 푼이라도 더 벌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이 이렇게 냉소적인 태도를 굳히게 된 데에는 패배의 상처를 극복할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가들이 현대차노조 안에 사실상 부재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의 패배는 정리해고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지도부가 배신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만일 현대차노조 안에서 전투적·변혁적 활동가들이 1998년의 노조 지도부가 가졌던 투항적 노선을 단호하게 비판하면서 강고한 계급적 단결투쟁의 건설이라는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고 일관되게 실천해 나갔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현대차노조 안에도 전투적·변혁적 지향을 가진 활동가들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다. 1995년 현장조직 민투위로 결집한 이들 현장파 활동가들은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과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을 아래로부터 주도했다.[5] 그러나 2001년 민투위 집행부는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대반격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었던 7·5 총파업에 불참하여 사실상 무산시킴으로써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를 정면으로 배신했다. 2004~05년의 민투위 집행부는 비정규직 노조가 100여 명의 해고자를 내며 처절한 투쟁을 이어가는 데도 사실상 외면했는데, 역시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에 대한 정면 배신이었다.[6] 민투위 활동가들은 왜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실천하지 못했을까? 그 핵심 원인은 사상적으로 견결하게 단련되고 무장하지 못한 점에 있었다.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전투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투항적이고 타협적인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과 노동조합 집행부를 맡아 정권과 자본의 십자포화를 뚫고 전투적·변혁적 노선을 관철해 나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민투위 활동가들은 비판적 현장활동에는 능숙했지만, 계급적 단결투쟁을 과감하고 단호하게 이끌고 나갈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 물론 민주노조에 큰 희망을 걸었던 조합원들에게 결정적인 좌절감을 안긴 책임이 현장파 활동가들에게만 있지는 않았다. 중앙파 집행부는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 투항적 노선을 고집함으로써 자멸적 패배를 초래했다. 국민파 집행부는 2000년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을 주도했고, 한겨레신문 광고비 대납 사건을 일으켰다.[7] 그런 점에서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에게 ‘1998년의 패배’란 1998년 정리해고 저지투쟁에서의 패배를 정점으로 하되, 1996~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 1998년 2월 민주노총의 정리해고 노사정 합의, 2000년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과 광고비 대납 사건, 2001년 현대차노조의 7·5 총파업 불참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진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패배였다. 조합원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또 하나의 변수는 회사의 집요하고 치밀한 이데올로기 공세였다. 회사는 1998년 투쟁 이후 다양한 사내 언론 매체를 구축하고 일상적 이데올로기 공세를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회사가 펼친 이데올로기 공세의 핵심은 고용불안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국내외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회사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선전은 수시로 되풀이되는 단골 메뉴였다. 조합원들이 갖게 된 두려움, 즉 회사가 어려워지면 머지않아 또 정리해고가 올 것이고 그 때는 노조가 더 형편없이 막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회사는 십분 활용했다. 회사가 어렵다는 분위기가 확산될수록 조합원들은 고용불안에 시달렸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겠다는 심리 상태로 빠져들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는 창사 이래 최대 매출, 최대 순익의 기록을 거듭 갈아치우면서 초국적 자본으로 도약[8]하고 있었지만, ‘회사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집요한 선전은 조합원들 사이에서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회사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종업원 의식을 강화하고 계급적 단결투쟁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고용이 안정되려면 회사가 잘 나가야 하니, 회사의 경쟁력을 위해 조합원이 양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현대차의 울타리를 벗어난 연대투쟁이나 총파업 참여는 조합원(종업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남의 일 관여’나 ‘정치투쟁’일 뿐이라고 규정하면서 회사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고용불안을 초래할 것이라고 공격했다. 비정규직 투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사내하청을 집요하게 ‘다른 회사 사람’으로 규정하며 정규직 사이에서 단결과 연대 의식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 위기의 양태 -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채 물량확보에 몰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빠져든 ‘일상적인 고용불안’ 정서는 ‘물량을 확보해야만 고용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대다수 활동가들 역시 조합원들의 고용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물량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활동가들이 점점 더 물량확보 투쟁과 신차확보 투쟁에 집중하면서 ‘물량이 곧 고용’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확대재생산 됐다. 당장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임금을 중요시하게 된 조합원들은 1998년 이전과 달리 잔업과 특근을 선호하게 됐다. 조합원들은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기 위해’ 최대한의 잔업과 특근을 원했다. 잔업과 특근을 할 만큼 충분한 물량이 있는 한 자신이 ‘잘릴’ 염려는 없다고 위안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잔업과 특근을 원했다. 요즘 … 어느 사업부 할 것 없이 … 빨간 날짜는 빈틈없이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한 달 특근이 5~8개는 우습게 넘고 있다. … 현장의 대·소위원들도 특근에 있어 어떠한 큰 사안이나 큰 명분 없이 특근거부가 조직되는 것은 예전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원칙적 문제제기에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근을 희망하는 현장의 요구 또한 만만치 않아 현장의 대소위원들의 입장이 곤란한 지경까지 온 것이다.[9] 대의원대회에서 일요 특근을 안 하기로 결의했지만 일부 공장에 특근이 이루어지면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이 조직력 훼손을 우려할 만큼 심각한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 조합원들은 특정사업부나 부서의 특근 소식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집행부나 대의원, 활동가를 대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심지어는 급여수준은 노동조합 지침에 따르는 정도에 반비례한다는 자조적인 비난이 … 고개를 들고 있고, 특근하지 말자는 대의원에게 ‘왜 우리만 희생양이 되어야 하냐’고 따지는 조합원도 많다고 한다.[10] 계속되는 철야 특근은 시급제 노동자들의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갉아먹어 이제는 ‘내 철야 내가 하는데 노동조합이 뭔 상관이냐’, ‘너거 마음대로 철야 거부하냐’는 등의 반발 때문에 현장의 간부와 노동조합은 철야를 함부로 제한하지 못한다.[11] 2003년 주5일제(주40시간제)가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연간 3,000시간에 육박하는 노동시간이 2000년대 초중반 내내 현대차에서 계속됐다. 주야맞교대를 하면서 주당 60~7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대차에서만 매년 10명을 넘나드는 과로사가 계속 발생했다. 지금 전 공장이 철야 특근으로 밤을 새고 있다. … 각 사업부별 공장장에게 경쟁 심리를 조장하여 생산량 달성에 순위를 매겨 미달성 사업부 공장장은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 집행부에서는 각 사업부 특성에 맡겨 사업부 대의원회에서 알아서 하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건강권을 포기하고 과로에 목숨을 걸도록 하는 아주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노동조합이 이렇게 휴일 특근 철야를 부추기는 양상은 절대 바람직하지 못하다. 01년 울산공장에서는 총 19명의 과로사가 발생하였다. … 올해도 벌써 7명의 조합원이 과로사로 목숨을 잃었다.[12] 물량확보에 대한 조합원의 몰두는 생산계획 달성이라는 자본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했다. 현대차 자본은 생산계획 달성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는데, 생산계획은 생산설비가 허용하는 최대치로 설정됐다. 이런 사측의 생산계획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아가 더 많이 생산할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신규인원 충원, 노동시간 단축, 휴식시간 확보, 노동강도 저하 같은 요구들은 제대로 제기될 수 없었다. 노조가 물량확보에 몰두하면서, ‘투쟁’을 하면서도 잔업·특근을 계속하거나 회사의 생산계획을 모두 달성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나타났다. 역으로 회사는 잔업·특근을 시혜적으로 베풀거나 또는 뺏어버림으로써 물량을 갖고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작년 12월 회사 측은 3공장 대의원회에 8개의 토·일 철야생산을 요청하였고, 성탄절도 철야생산을 요청하였다. … 올해 1월에는 내수시장 위축으로 철야생산을 할 수 없다고 한다. … 문제는 갑작스레 철야생산이 없어지다 보니 현장조합원들이 고용불안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 현장조합원들은 물량감소로 또다시 고용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한다. … 현장에서는 ‘일 없을 때는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13] 작년 3공장 조합원들은 주말에도 …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했다. 또한 일이 많을 때 한 푼이라도 벌어놔야, 나중에 일거리가 없고 회사에서 내팽개치더라도 최소한의 준비를 위해 죽을 둥 일을 했다. 사측은 조합원들의 불안한 심리와 주말 특근에 맞춰진 생활임금을 이용하여 생산물량이 없다는 핑계로 17대 대의원들을 시험하면서 현장을 사측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 하고 있다. … 조합원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사측이 물량을 조절할 경우 파업 한 번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 이대로라면 사측에 의하여 눈치도 채지 못하고 현장권력이 잠식당할 것만 같다.[14] 4공장 조합원들이 … 수개월째 8+10 근무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 4공장 고용안정대책위가 구성되어 단협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한 바 있다. … 4공장 물량부족 사건의 발단을 보면, 지난 2000년 그레이스 차종을 기아 광주공장으로 이관할 당시 사측은 … 신규모델 투입을 약속했으나 일방적으로 신차 개발을 취소하였고, 02년에는 수출물량을 … 일방적으로 터키로 이관했다. … 사측이 이 문제에 대해 진정 책임지는 자세라면 8+10의 근무형태가 계속 이어져서는 안 된다. … 사측은 … 타 사업부에 대해 … ‘4공장을 봐라. 일이 있을 때 특근 등 열심히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15] 지난주 3공장 대의원회는 치열한 논쟁 끝에 철야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 잔업을 끊은 사업부 대표가 고소고발 되고 강병태 소위원이 해고가 결정되었음에도 철야를 강행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 철야는 재고비축 철야로서 … 투쟁해야 할 시기에 철야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할 수 없다.[16]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2공장에 대해 10-10 근무에 철야를 강요하던 사측이 갑자기 4월 생산계획 설명회에서는 … 재고가 쌓여 8-8근무를 시킬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이는 사측의 고도화된 술수로 조합원의 생존권을 유린하는 작태이자 기만행위이다. … 이는 사측이 … 전반적인 물량 축소를 통해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불파 문제를 비롯한 모듈 협상과 CM카 조기투입을 위한 각종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얄팍한 술수이다.[17] 사측은 안전사고로 인한 라인 정지에 대한 어떠한 면책합의도 없다며, 5명의 대·소위원들이 고소고발, 손해배상,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5공장 전체 조합원들에 대해 잔업과 특근을 취소하겠다며 협박했다.[18] 노조가 물량에 몰두하며 생산에 적극 협조한 것은 회사에 큰 이득을 안겨 주었지만, 회사의 욕심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회사가 보기에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의 임금은 너무 높았다. 회사는 노조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공간으로 생산을 최대한 이동시키고자 했다. 사내하청을 확대하거나, 사외에서 제작되는 모듈의 비율을 확대하는 게 그 방안이었는데, 비정규직 노조가 2003년에 출범한 이후로는 모듈외주화 확대가 주된 방안이 됐다.[19] 회사는 각 사업부에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비율을 점점 높여 나갔다. 회사는 각 사업부에 신차를 배정해서 물량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그와 같은 일상적 구조조정을 관철시켰다. 신차가 투입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확대에 맞선 투쟁이 사업부별로 진행됐지만, 회사의 의도가 거의 그대로 관철됐다. 회사는 종종 복수의 사업부에 동일한 물량 배정을 약속함으로써 사업부 간 물량경쟁을 유도했는데, 노조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여 더욱 용이하게 구조조정을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신차 JM카 투입을 앞두고 사측의 일방적 합의사항 파기로 인해 2공장 대의원회가 2주째 천막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회사가 JM카 생산을 2공장 물량으로 합의해 놓고, 뒤로는 5공장에 20만대 생산설비 체제를 갖추는 식으로 이중 합의를 통해 물량을 가지고 노노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는 그동안 물량 이관이 있을 때마다 해당 사업부에 선 물량보장 후 약속파기를 하는 수법으로 장난을 쳐왔다. 이것은 2공장 트라제, 3공장 라비타, 4공장 그레이스 물량이전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20] 모듈외주화로 현대차에서 일감이 빠져 나간 곳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를 중심으로 철저히 수직계열화 돼 있는 소규모 부품하청업체이거나 또는 비정규직으로만 구성된 현대모비스 모듈조립공장이었다. 이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법정 최저임금에 턱걸이하는 수준이었으며, 열악한 근로조건과 높은 노동강도 때문에 6개월 근속이면 왕고참 취급을 받을 정도로 유동성이 심했다. 동일한 물량을 놓고 현대차 안에서 정규직이 작업하는 경우와 부품하청업체에서 비정규직이 작업하는 경우를 비교하면, 노무비가 두세 배 정도 차이가 났다. 그러나 모듈외주화 확대에 대한 현대차노조의 대응은 사실상 무대책이었다. 신차투입 협상이 시작될 때마다 ‘모듈외주화 저지’의 목소리들이 쏟아지지만, 머지않아 결국 현재의 고용을 (그것도 대개 사내하청을 제외한 정규직만의 고용을) 보장받는 선에서 회사의 모듈외주화 계획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며 타결됐다. 그리곤 무관심이었다. 모듈외주화로 빠져 나간 일감이 어떤 조건의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자신들의 미래와 어떤 상관이 있을 것인지 최소한의 관심도 없었다. 이미 절반 가까운 물량이 모듈 작업으로 처리되는 상황에서, ‘모듈외주화 저지’만으로 사태에 대처할 수는 없었다. 모듈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정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내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현대차 내부의 노동조건과 유사한 수준까지 개선될 수 있게 하는데, 현대차노조는 누구보다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달려들어야 했다. 그러나 2000년 무렵 현대차에서 모듈화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뒤 자본은 생산과정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갔지만, 모듈공정 노동자 조직화 등에 대한 현대차노조의 대응은 거의 아무 것도 진전된 게 없었다. 현대차노조 전반이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채 눈앞의 물량확보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규직 임금의 60%밖에 받지 못하는 사내하청, 강제적인 단가인하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키며, 현대자동차 자본은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계급적 전망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사내하청의 임금 인상을 생색내기 수준에서 건드렸을 뿐, 부품하청업체 노동자들이 강요당하던 초과착취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현대차노조의 계급적 전망 상실은 사회적 고립의 위기로 돌아왔다. 특히 총자본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넘어 광범한 노동자·민중으로부터 고립돼 가는 위기였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2000년대 초반을 경과하면서부터 명절에 고향 가는 발걸음이 예전 같지 않아졌다. 고향에 가서 친척·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결코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현대차노조가 정권과 자본의 무수한 탄압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선봉에서 투쟁하는 존재로 간주됐기에 고향의 친척·친구들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투쟁의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현대차노조의 권리 향상은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 향상과 별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난까지 받게 됐다. 예전에는 선봉 투사로 추켜세우던 고향의 친척·친구들이 이제는 보수언론의 논리들을 줄줄 읊어대며 냉소적인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이 가까운 친지들에게까지 느끼게 된 ‘사회적 고립’은 일차적으로 ‘현대차노조를 비롯한 대기업 노조의 이기적인 행동이 경제를 망친다’는 보수언론의 집중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안 먹히던 이데올로기 공세가 먹히게 된 이유가 있었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양극화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IMF 외환위기 이후 갈수록 벌어졌다. 실업과 개인파산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물론 그러한 양극화를 불러온 것은 일차적으로 자본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 또한 그러한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역할을 요구받았다. 자본가계급은 보수언론을 앞세워 중소영세 비정규직을 위해 대기업 노조가 양보하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가계급에게만 좋은 일이기에 민주노조운동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방향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이 가야 할 길은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함께 내걸고 제대로 투쟁하는 것이었다. 현대차노조가 1998년의 패배를 올바로 극복하고자 했다면 그와 같은 계급적 단결투쟁에서 전망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현대차노조는, 다른 대기업 노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이 조직한 수많은 총파업의 핵심 동력이었으며 그러한 총파업에는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요구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파업에 임할 뿐 실제 총파업 요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합원들을 진지하게 설득해 나가지 않았기에 총파업에 참여한 조합원의 대다수가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퇴근했다. 이것은 대다수 조합원이 강렬한 의지를 갖고 지역 집회와 가두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1996~97년 총파업과 매우 달랐다. 11월 30일 비정규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모든 것은 예상했던 바대로 진행되었다.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던 자본가 정당들은 이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는 아주 조용했고, 형제처럼 평온했다. 법안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에 공지되었던 것 그대로였다. 부르주아 언론의 기만적인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법안 통과시 총파업 투쟁을 경고했던 민주노총 지도부의 대응도 예상했던 바대로 진행되었다. ‘엄포용 기자회견’이 있고, 몇몇 사업장이 시한부 파업에 돌입했다. 현대차, 기아차 등 그나마 현장조직력이 살아 있다고 하는 극소수 사업장이 이른바 ‘정치파업’에 돌입한다. 그러나 파업의 열기는 낮고 그것마저도 생산타격과는 거리가 멀다. 한두 번의 시한부 투쟁이 끝나자 총파업 투쟁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일부 비정규직 노조들이 분노에 찬 투쟁을 펼치지만, 그 힘은 아직 대단히 제한적이다. … 이런 상황이 민주노총의 꼭대기에 있는 조준호 국민파 기회주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 현대차, 기아차와 같은 핵심 대공장 집행부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이 아니다. … 그 원인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다. 조직 노동자들 속에서, 특히 조직 노동자의 중핵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식’이 실종되어 있다. 다수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헌신하고, 바로 이 단결의 확대 여부에 입각해 투쟁의 성패를 판단하는 노동자계급의 정신으로 이들이 무장해있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이룩할 구심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비정규직 법안 통과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공세 앞에서도 한국 노동운동이 결코 현 상황 이상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조금씩 움터 나오는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에서 실종된 구심을 대체할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 또한 장담할 수 없다. … 97년 노개투 총파업의 패배,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대량의 정리해고에 무너져 내리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의식의 퇴행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 단사 내의 이익, 혹은 일부 부서의 이익과 같은 조합주의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이익에만 갇혀버린 운동은 백년 천년이 지나도, 아무리 거대한 탄압이 휘몰아쳐도, 아무리 전국적이고 계급적인 쟁점이 부상하더라도 결코 노동계급적 운동으로 전진하지 못한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정신이 실종된 운동은 그 본성상 지속적인 분열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단사 내의 단결에만 머물지만, 이어지는 시기에는 단사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되고, 다음으로는 정규직 내에서 부서별, 직종별 분열로 나아가며, 최종적으로는 개별화된 상태로 이행한다. … 당장 실제로 전개할 수 있는 투쟁의 범위와 무관하게,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나서는 정신이 ‘노동자계급의 단결 정신’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의해서만 현재의 상황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당장 힘이 부쳐서 커다란 투쟁으로 전진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서 단 4시간짜리 부분파업 심지어는 총회투쟁에 머물지라도, 여기에 합류하는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정신이 무엇인가에 의해 그 투쟁의 성격은 달라진다. 노동자대중이 자기 투쟁을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부로 간주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노동자투쟁들을 전체 노동자계급 투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숭고한 책임감을 발전시킬 수 있을 때에만 노동운동은 비로소 계급적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은 노동대중의 한복판에서 실천하면서 노동대중의 삶과 정신을 장악해가는 현장 활동가들의 계급적 의식이 없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다. … 모든 분열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대중이 사고하고 투쟁하며 매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일관되게 지도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바로 그러한 행동의 모범을 모든 삶에서 실천해나가는 노동자의식으로 무장한 활동가들 없이는 이 상황을 결코 타개할 수 없다.[21] 현대차노조 집행부가 집중한 것은 자체 임금·단체협약 투쟁이었고, 실제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몰두한 것은 물량확보였다. 당연하게도 광범한 노동자·민중에게 현대차노조는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실질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됐고, 따라서 현대차노조의 ‘강력한’ 투쟁은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이라는 보수언론의 공격이 그대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 위기의 고착 - 노조의 관료화와 부실화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노조 활동가들 전반은 관료주의적 타성에 깊이 빠져들었다. 현대차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해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들은 아예 손을 대려고 하질 않았다. 노사 간의 교섭구조를 통한 해결 가능성 여부가 실질적인 활동의 기준이 되어 버리자, 암묵적으로 자본이 설정한 반경 안으로 활동의 폭이 철저히 갇혀 버렸다.[22]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듯이, 정체된 노동조합 내부에 관료주의적 특권이 만연하고 심지어 부패와 비리마저 스며드는 것은 필연적인 경과였다. 현대차노조는 사회적으로 ‘그들만의 배부른’ 투쟁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았지만, 정작 조합원들로부터도 갈수록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화살은 일차적으로 노조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 나아가 부패와 비리에 대한 질타로 모아졌다. 특히 2005년 전·현직 노조 간부들이 채용비리로 줄줄이 구속되자, 노조간부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23]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노동조합이 투쟁을 통해 확보한 권리나 투쟁의 상징물이라 하더라도 노조간부들이 전용해 온 것들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근무시간 중 대의원 활동에 대한 근태 인정, 전·현직 주요 노조간부들의 개인차량 사내 출입, 노조간부들이 착용해 온 ‘빨간 조끼’ 등이 특히 문제가 됐다.[24] 지금 노동조합 간부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각종 선거에서 표를 구걸하고 당선만 되면 임기 동안 회사와 조합원 사이를 오가며 …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해결한다. 노동조합의 각종 의결기구에서 의결된 사항이 마치 누가 보고라도 한 듯 금방 정보가 회사 측에 누출되고 … 빨간 조끼만 입으면 정문은 아무 때나 통과할 수 있도록 회사 측은 방치하고 있고 … 조합원들도 이젠 활동가를 존경하지 않는다.[25] 언제부터인가 대의원은 야간 근무를 하지 않고 특혜를 누리는 자리로 전락하고 있다. … 모 사업부는 … 대의원 당선되고 장갑 끼는 것 못 봤다는 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다.[26] 윤리강령 제정으로 대의원들의 특혜를 차단하고 현장활동을 혁신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대의원 야간 근무하기, 회사와 술 안 마시기, 각종 회의결과 조합원 보고하기 등 하나씩 바꾸어야 한다.[27] 대의원들은 선거 때에만 투사가 되고 … 당선되면 작업장에도 투쟁 현장에도 보이지 않는다. … 기본적인 근태 문제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 각종 합의를 소위원, 조합원의 참여 속에서 합의하고 합의서는 공개해야 한다.[28] 노조 간부들의 특권과 관료주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질타는 조합원들의 근본적 요구를 해결하는 데 노조가 상당히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하다고 여기는 가슴 깊은 실망감과 연결돼 있었다. 이를테면 조합원들은 잠재적인 고용불안으로 연결되는 해외공장 건설이나 모듈화 확대 등에 대해 노조가 뾰족한 대책 없이 끝없이 밀리고 있다고 여겼다. 수천 명에 달하는 근골격계 환자가 발생하고 1년에 10여명이 과로사로 죽어 나가는 데도 주5일제 도입 이후에도 주당 실질노동시간이 60~70시간에 달하는 것, 40대 이상의 조합원이 절반을 넘어섰는데도 생명을 갉아먹는 야간노동이 주야맞교대를 통해 계속되는 것에도 불만이 컸다. 현장에서의 선전문과 노동조합의 목소리는 점점 조합원들이 실리만 원한다라고 하면서 … 조합원들이 가지는 서글픔과 비참한 마음을 모르고 조합원들을 돈만 밝히는 실리주의자로 왜곡하고 있다. … 조합원들을 과로사로 내몰고 특근으로 내몬 것은 활동가들의 지도력 부재와 미래가 없는 정체된 활동 때문이다. 조합원들이 돈만 밝히는 실리주의자가 아니라 활동가들이 나태해진 것이다.[29] 조합원들이 ‘고용안정’에 매몰되면서 스스로 발목을 잡히자, 회사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의식을 더욱 부추기고 이용해, 물량조절·물량이동·외주화 등의 ‘생산유연화’와 비정규직화 등의 ‘고용유연화’를 가속시켰다. 이를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했다. 물론 생산유연화와 고용유연화에 맞선 투쟁이 없지 않았다. 일상적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이 여기저기서 이어졌고, 비정규직도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은 고용불안에 매몰된 노조의 전체 상황을 바꿔내지 못했고, 따라서 고립돼 각개격파됐다. 회사의 자신감이 커질수록 회사의 의도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을 대하는 회사의 태도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자신감을 갖게 된 회사는 생산 우선주의를 앞세워 목표한 생산량에 타격을 주는 행위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현장투쟁을 수행한 활동가들을 징계하거나 해고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고소고발 및 손배가압류를 걸었다. 또한 경비대를 동원하고 첨단장비를 이용해 활동가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소지품 검사 등을 통해 일상적 통제를 하고 나아가 물리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활동가들을 위축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4공장에서 노동조합 사찰 문건 및 노동조합 활동 개입에 대한 문건이 발견됐다. … 전 사업부에서 과장급 이상이 선무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다. … 조합원 사찰내용은 충격적이다. 누구랑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었다. ‘가정방문 해서 협조 확약’, ‘경비 지원하면 협조 의사’, ‘가정방문 했으나 불투명’, ‘등산 함께 간 뒤 협조 확약’ 등의 사례들은 부당노동행위를 조직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30] 아산공장은 노동조합 간부와 하청지회 간부들에 대한 미행, 감시, 사찰 업무를 보는 경비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 또한 출퇴근시 정문과 쪽문에 검사대를 설치하고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 … 더 나아가 식당입구에 사측의 무인카메라가 24시간 작동되고 있다. … 노동조합 간부들의 식당 홍보 투쟁에서 하청지회의 중식투쟁, 일상적으로 식사하는 조합원까지 사측의 감시사찰 대상이었던 것이다.[31] 최근 1,2,3,4,5공장에 지원실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지원실장으로 발령받은 자들의 면면이 기가 막힌다. 판매본부에서 노동조합 탄압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졸지에 임원으로 승진되어 전진배치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무술유단자와 폭력전과자까지 있다. 지원팀은 현장을 탄압하고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사찰하던 곳이었다. 그런 지원팀을 지원실로 강화하여 본격적인 현장탄압을 시작하려는 것이다.[32] 또한 회사는 관리자들을 동원해 조합원들을 개별 접촉하여 인간관계를 쌓아 나갔다. 관리자들은 회식자리와 향우회·동호회 등을 적극 활용했다. 이렇게 확보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회사는 노조의 선거나 총회에 개입했다. 이러한 개입은 실제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회사 관리자들이 요즘 들어 부쩍 현장조합원들과 친한 척 하면서 현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을 돌고 있다. … 회사 관리자들은 불파 투쟁과 05년 임단투에서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현장을 누비고 있는데 정작 노동조합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 모두들 현장이 힘들다 하고 현장이 어용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의 원인은 사측 관리자들이 밤낮을 설치며 현장을 뒤집고 다닌 탓일 것이다.[33] ◎ 2007년 성과금 공방 2007년 1월, 회사의 성과금 미지급을 계기로 현대차 노사 간에 전례 없는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끝없는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노조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켜 보고자 한 회사의 도발이었다. 노조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들이 드러났지만, 현대차노조 조합원들은 강력한 단결력을 발휘하며 노조를 지켜냈다. 그러나 노조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2006년 7월 26일, 현대차 노사가 임금협약을 타결하면서 연말 성과금을 생산목표 달성과 연계하여 ‘목표 달성시 150%, 95% 이상시 100%, 90% 이상시 50%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식 발표와 달리 노사협상 과정에서 회사가 ‘합의서 내용은 대외용이고 성과금은 생산실적과 상관없이 150%를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34] 12월 28일, 회사가 생산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며 연말 성과금을 100%만 지급하겠다고 노조에 전달했고, 29일 실제로 100%만 지급했다.[35] 연말 성과금의 생산성 연동을 관철함으로써 ‘생산성 연동임금제’로 가는 길을 확실히 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노조 집행부가 ‘조합원 선물비리’로 조기 사퇴하게 된 어수선한 노조 상황을 틈탄 기습이기도 했다. 2007년 1월 3일 노조간부 80여 명이 회사의 울산공장 시무식장에서 분말소화기를 분사하며 행사를 방해했다. 노조는 성과금 특별교섭을 요구하며 잔업거부에 들어갔다. 4일 회사는 노조의 성과금 특별교섭을 거부하고, 시무식 폭력사태와 관련해 노조간부 22명을 고소했다. 노조는 즉각 본관로비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5일 노조가 성과금 보충교섭을 요구했지만, 8일 회사가 보충교섭을 거부하고 노조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노조는 10일 노조간부 1천 5백 명이 양재동 현대차 본사 상경투쟁을 벌인 뒤, 12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15일부터 파업 돌입’을 결의했다. 그런데 15일 오전 노조의 파업돌입을 몇 시간 앞두고 전직 노조 위원장이 배임수재 혐의로 검찰에 긴급체포 됐다. 2003년 7월 하순 임단협 협상을 잘 진행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회사 부회장에게서 2억 원을 받은 혐의였다. 현대차 비자금 조성 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은 부회장이 검찰에게 정보를 넘긴 것인데, 돈을 건넨 회사 임원은 공소시효가 만료됐지만 돈을 받은 노조 위원장은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 노조 위원장은 2003년 당시 노조 사무국장이어서 같이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노조의 파업을 와해시켜 보려는 회사의 치명적인 노림수였다. 그러나 15일 현대차노조는 주간조와 야간조 모두 4시간 파업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회사의 의도를 읽어낸 조합원들은 ‘어쨌거나 노조는 지켜내야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똘똘 뭉쳐 평소보다 더 강한 기세로 파업에 합류했다. 16일 노사협상이 시작됐다. 17일 주간조가 6시간 파업을 벌인 뒤, 오후에 노사가 합의에 이르렀다. 노조가 생산목표 미달분 만회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회사가 50% 성과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2006년 성과금 50% 지급문제로 불거진 현대자동차 노사대결은 한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부르주아 언론의 맹폭격 앞에서 현자 노동조합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다행히도 노동조합이 와해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했던 현자 노동자들의 분투에 의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인 현대차에서도 현중과 같은 일이 전개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현대차 노동조합이 겨우 위기를 넘겼지만,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자 노동조합의 도덕적 권위가 전체 노동자 앞에서 무너짐으로써 한국 노동운동이 거대한 상처를 입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노사협조주의 노선, 그리고 조합주의 노선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우선 현자를 비롯한 대개의 대기업 사업장들에서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생산 성과와 연동된 특별성과금 관행’을 지적해야 한다. ‘타결장려금’과 함께 이것은 노사협조주의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도구다. 사실상 임금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기본급이나 정기상여금이 아니라 생산 성과와 연동된 특별성과금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생산에 협력해야만 한다. 관행적으로 전부를 지급해왔다는 사실이 이러한 본질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분명히 드러났지만, 특별성과금 형태의 임금구조는 언제든지 자본이 명분을 가지고 노동자의 임금을 도둑질할 수 있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회사의 번영이 노동자의 더 나은 조건 획득과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노동자들 속에서 조장한다. 만약 이러한 노사협조주의적 발상이 만들어낸 특별성과금 따위의 임금구조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자본이 ‘성과미달’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를 갈취하려는 짓거리 따위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노동자들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근거, 즉 정당한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합법적 대가라는 관점에서 공세적으로 투쟁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구두합의’와 같은 ‘비공식적인 밀실협상의 전통’을 거론해야 한다. 모든 합의내용은 조합원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이 합의는 명백히 ‘서면합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 법률적 구속력이 없고, 언제든지 손바닥 뒤집듯이 철회할 수 있는 구두합의는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무로 돌릴 수 있으며, 자본이 필요한 시기에는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구두합의는 밀실협상의 관행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노사협조주의적 약점과 함께 이번 공방전을 좌우했던 결정적인 요소로 지적해야 할 부분은 바로 ‘계급적 관점’이다. 현대차노조가 전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던 것(즉 다수의 노동자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 심지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연대에 나섰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도 진심어린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던 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운동이 이제껏 취했던 조합주의 노선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이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신감에도 영향을 미쳐, 겉보기와는 달리 이번 공방전 내내 현대차 노동자들은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고 충분히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오직 이번 공방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린다면 노조 파괴로 연결되고, 이것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기에 현대차 노동자들은 투쟁에 힘을 실었던 것이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 도덕적 주도권을 확실히 움켜쥐지 못하는 것, 그것도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인 현대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이 전체 노동자로부터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의혹의 눈초리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거대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만약 현대차 노동조합이 다르게 행동해왔고 다른 쟁점으로 전투를 치렀을 경우를 가정한다면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차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졌을 때, 그리고 올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해 울산공장에서 고용불안 공격이 덮쳤을 때, 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이 전면적인 총파업을 전개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를 대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정규직 개악법안에 맞서 전체 노동자의 요구를 내건 단호한 총파업투쟁을 지속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만약 노사협조주의적인 특별성과금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급으로 임금인상을 확고히 쟁취하고,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투쟁사업장 연대기금으로 내고자 했다면, 그런데 이것에 대해 자본이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것은 모든 자본가 언론의 주둥아리를 닫게 만들었을 것이다.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 노동조합의 투쟁을 통해 한국 노동운동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부심은 얼마나 높았을 것이며, 여기에 연대하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얼마나 숭고한 의무감에 불탔을 것인가! 그 대신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구심이 다수 노동자의 의혹에 찬 눈초리와 마주치고, 한줌 착취자들의 언론과 정부에 의해 마구 난도질당하면서 고립되는 이 참혹한 현실만큼 비참한 현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현대차의 노사협조주의적 지도부는 50%의 특별상여금 지급, 그것도 생산 차질분을 전부 만회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얻어진 그 성과 앞에 승리라고 박수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잊고 있는 것은 그 표면적인 성과의 뒷면에서 한국 노동자계급 전체가 입은 거대한 피해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강요할 것이다. 현대차 자본이 위기에 직면해 더욱 포악해지고, 그래서 공장을 상당히 오랜 시간 정지시키더라도 경찰과 검찰, 정부의 힘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공격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상황이 도래하게 될 때, 이 같은 고립은 현대차 노동자들을 덮치는 재앙의 진원지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직 썩어문드러진 조합주의 지도자들만이 이것을 승리 혹은 무승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아직 충분히 투쟁할 수 있는 여력이 있고, 아직 노동조합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으며, 게다가 전직 위원장이 수억 원을 받아 처먹는 통탄할 만한 사건에 직면해서도 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파업지침을 사수하는 현대차 노동자대중을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전면전을 치르도록 몰아붙이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범죄행위가 지속된다면 아무리 강철 같은 노동대중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분쇄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의 선봉장이 다수의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다수 노동대중이 노동운동의 선봉장에 대한 정부의 공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 비통한 현실이 지속된다면 한국 노동운동이 약 20년간 쌓아올린 성과의 마지막 한 부분까지 결국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36] 3) 산별노조 전환과 1사1조직 타협·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곧이어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은 심각하게 후퇴했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던 자주성·민주성·전투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2000년대 초반 이후 민주노조운동 안에서 매우 약화됐다.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후퇴는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심각한 수준의 관료화와 타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단위노조부터 상급단체까지 광범하게 포진한 노조관료들은 위기의 총체성을 인정하고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진솔한 노력 없이 끝없는 이전투구와 관성적 대응에 머물렀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핵심 방안이라고 노조관료들이 오랜 시간 주장했던 것은 이른바 ‘산별노조 전환’이었다. 몇 년 동안 거듭된 시도 끝에 2006년 6월 금속산업에서 현대차·기아차·대우차 등 핵심 대기업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 투표가 성공함으로써, 산별노조 전환은 큰 고비를 넘게 됐다.[37] 그러나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산별노조 전환’ 논리 속에는 민주노조운동이 대기업 정규직만의 노동조합을 넘어서서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괄해 나가야 한다는 정당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에는 그 의미를 전혀 살릴 수 없는 온갖 함정들, 나아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함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은 대기업 정규직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전혀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협소한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금속산업의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는 규모가 큰 대기업의 경우 지역지부에 속하지 않고 별도의 기업지부를 구성하도록 인정함으로써 조합원들을 통일된 기준으로 편제하는 것도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조직형태를 갖게 됐다.[38] 말이 산별노조 전환이지 실제로는 기업별노조 체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한 사업장 안에 있는 같은 산별노조 조합원인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산별노조 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당연시됐다. 많은 경우 한 사업장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하나의 조직체계로 통합하는 것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당 사업장의 비정규직 다수가 여전히 미조직 상태인데도 그냥 방치됐다. 그러니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임금과 단체협약에서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도전은 거의 시도조차 되지 못했다. 같은 사업장 안에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조차 극복하려 하지 않는 노동조합이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조직해 나간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해 전진하는 진정한 의미의 산별노조 건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기업별노조들을 형식적으로 묶어놓고서 ‘산별노조’라는 허울을 내거는 우스꽝스런 조직을 만들어냈을 뿐이었다. 2006년 금속산업 대기업 노조들의 산별노조 전환으로 거대 산별노조가 된 금속노조는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산별노조가 됐다. 금속노조는 2006년 12월 통합대의원대회에서 한 사업장 안의 모든 조합원을 직종이나 고용형태 등을 가리지 않고 단일한 조직체계로 통합한다는 ‘1사1조직’을 조직편제 원칙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1사1조직의 추진과정은 ‘산별노조’로서 금속노조가 가진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물론 일부 사업장에서는 1사1조직을 통해 사내 비정규직을 새롭게 조직하는 모범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금속노조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 지부들에서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대의원대회는 2007년 1월과 6월, 2008년 10월 세 번에 걸쳐 1사1조직 규칙개정을 모두 부결시켰다. 2007년 1월 현대차지부의 임시대의원대회는 비정규직 3주체(울산·아산·전주)가 1사1조직 관련 단일안을 만들지 못하고 △비정규직의 별도 집행기구를 두는 안 △비정규직을 정규직과 같은 선거구로 편제하는 안 △확대운영위원회로 위임하는 안 등 복수안을 가져오자 ‘비정규직 3주체의 단일안을 가져오라’며 세 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2007년 6월 임시대의원대회는 가입대상 중 2·3차 사내하청 포함 여부, 판매부문 딜러와 정비부문 그린서비스 종사자 포함 여부 등을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부결시켰다. 2008년 10월 임시대의원대회는 비정규직의 별도 집행기구 없이 정규직과 같은 선거구로 편제하는 안이 상정됐지만, 가입대상 범위에 대한 질의, 준비부족과 선거권·피선거권 부여에 따른 혼란 등을 우려하는 반대발언이 이어진 끝에 또다시 부결시켰다. 이와 달리 기아차지부는 2008년 4월 1사1조직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그 실내용은 계급적 단결이라는 산별노조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아차지부에서 1사1조직의 실제 의미는 정규직 노조의 통제권 밖에서 독자적인 투쟁을 이어가던 사내하청 노조를 무력화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기아차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가 2003년부터 시작됐다. 다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메인라인보다 서브라인에 집중돼 있는 사업장 특성에 따라 활동 초점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보다 업체투쟁과 임단투에 집중됐다. 2003년 4월 기아차 화성공장의 비정규직 활동가 4명과 정규직 활동가 2명이 ‘노동해방을 위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현장투쟁단’을 결성하고, 업체별 회원조직화에 나섰다. 회원조직화의 기제는 고용·노동조건과 관련된 다양한 업체별 사안들을 둘러싼 업체투쟁이었다. 2003년에는 기광, 성원실업, 신성물류에서, 2004년에는 세화실업, 보성에서 업체투쟁이 조직됐다. 2년 동안 현장투쟁단은 5개 업체 350여 명을 회원으로 조직했다. 2005년 6월 4일 현장투쟁단을 토대로 금속노조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가 설립됐다. 450여 명으로 출발한 조합원 수가 설립 직후 19개 업체 1천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임단투에 들어간 비정규직지회는 여러 차례 독자파업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기아차노조의 임투가 종결되자 9월 28일 400여 명의 용역깡패가 비정규직지회 파업을 공격했다. 회사의 파업파괴 공작에 맞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이 전개됐고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오히려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10월 7일 노동탄압 분쇄와 원하청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기아차노조의 파업찬반투표가 부결됐다. 회사의 분열 공세와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을 부담스러워 하는 기아차노조의 태도 때문이었다.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은 하강세를 타기 시작했다. 20일 비정규직지회의 핵심동력이던 신성물류를 시작으로 7개 업체에 도급계약 해지가 공고됐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노조를 탈퇴하기 시작됐다. 25일 비정규직지회 간부들과 선봉대 20여 명이 조립1공장을 기습점거하고 파업을 전개했으나 기아차노조가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을 ‘일방적인 투쟁’이라며 비판했다. 투쟁력이 고갈된 비정규직지회는 기아차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하청업체들과 집단교섭을 체결했다. 2006년, 비정규직지회는 원청 사용자성 쟁취를 내걸고 임단투를 준비했다. 7월 20일 이후 주2회 이상 독자파업으로 생산을 타격하며 사측을 압박했다.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조합원 수가 1천 30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아차노조가 2005년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지회의 독자파업과 투쟁 장기화에 불만을 표시했다. 어쨌든 정규직노조의 중재로 9월 18~19일 비정규직지회, 기아차노조, 기아차가 참여한 교섭테이블이 열렸고, 비정규직지회는 회의록 형태의 고용보장합의서를 얻어냈다. 2005년과 2006년의 임단투를 거치며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는 비정규직지회의 주체성과 독자적 전술구사를 둘러싼 기아차노조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긴장과 갈등이 점차 깊어졌다. 회사는 비정규직지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정규직에게 고용불안 이데올로기 공세를 폈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로 전환한 금속노조 기아차지부가 2007년 2월 비정규직지회와 통합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4월 30일부터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상대로 개별적으로 직가입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에 대해 지회의 투쟁을 통제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사내하청의 개별 가입 방식으로 비정규직지회가 기아차지부에 흡수될 경우 비정규직지회가 가진 기존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봤다. 5월 29일 금속노조 중앙집행위원회가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을 포함하는 직가입 사업을 중단하라고 결정했으나, 기아차지부는 개별 직가입을 이어갔다. 6월 12일 비정규직지회가 총회를 열어 ‘지회의 자주적 요구안 수립 보장, 현장파업권 인정, 2‧3차 하청 가입 보장, 지회의 자주적 조직체계 인정, 지부단위에서 비정규할당제 30% 보장’을 조건으로 하는 계급적 조직통합안을 결의하고 기아차지부에 제안했다. 그러나 기아차지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정규직지회는 독자 임단투를 전개하는 동시에 기아차지부의 일방적 직가입 추진에 항의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기아차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8월 23일 비정규직지회가 도장공장 점거파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점거파업 9일째인 31일, 기아차지부의 어용 성향 조합원들이 구사대로 돌변해 비정규직지회의 파업현장에 난입하여 비정규직지회와 현장조직의 천막을 불태우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8·31 사태 이후 긴장은 극에 달하고 현장은 얼어붙었다. 기아차지부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크게 경직됐고, 활동가들의 연대도 위축됐다. 비정규직지회는 금속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기아차지부와 ‘선통합 후논의’에 합의했다. 2008년 4월 기아차지부, 5월 비정규직지회 대의원대회에서 각각 규칙개정이 통과되면서 1사1조직 통합이 완료됐다. 기아자동차지부는 1사1조직으로의 전환은 이루어냈으나 그 과정에서 정규직지부와 비정규직지회 간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 1사1조직화가 강한 자체 투쟁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사내하청 단위에 대한 통제기제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조직통합 전 기아자동차비정규직지회는 독자파업을 통해 원청사의 생산에 타격을 줄 정도의 상당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1사1조직 논의가 지속되는 내내 사내하청 단위의 독자적인 조직과 쟁의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정규직 노조의 강도 높은 개별가입 캠페인과 1사1조직으로의 전환 드라이브 하에서 결국 조직통합은 지회해체 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개별적인 지부가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기에 1사1조직화 자체의 일정한 의의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아자동차의 사례는 “지회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깨”고 “단체행동권을 제한하”며 “비지회만으로 라인 못 세우게 하기 위해서” 정규직 노조가 조직통합을 주도했다는 혐의를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39] 20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추락이 계속됐지만, 민주노조운동을 재건해 내려는 노력 또한 지속됐다. 특히 계급적 전망을 상실한 대기업 정규직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려는 정규직 활동가들이 전국의 여러 사업장에서 나타났다. 관료화된 ‘민주노조운동’의 실상을 폭로하고 상층 노조관료들에 도전하며 노동자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여러 노력들도 나타났다.[40]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안타깝게도 ‘민주노조운동’ 전반의 위기와 추락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다음 편 보기 [1]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2005/10/16, 「출범선언문」. [2] 현대차노조는 1987년 노조설립 이후 2008년까지 1994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업을 전개했다. 2009~11년 무파업을 기록한 뒤, 2012~17년 연속해서 파업을 전개했고, 2018~24년 다시 무파업을 기록했다. [3]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울산 동구, 창원공단의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창원(을)도 노동자들의 지지 기반이 상당한 지역이었지만 울산 북구만큼은 아니었다. [4] 양준석, 2005/08/27, 「현대자동차노조의 노동운동 내 위상과 현재적 과제」. [5] 민투위 활동가들은 다수가 1998년 구조조정에서 정리해고·무급휴직 대상자가 됨으로써 1998년 투쟁 패배 이후 1년 남짓 현장을 떠나 있어야 했지만, 복귀 이후 빠르게 현장 기반을 재건했다. [6] 민투위는 산별노조 전환 뒤인 2007~09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집행부를 다시 배출하는데, 이번에는 ‘실질임금 삭감, 노동강도 강화, 고용 불안 없는’ 주간연속2교대를 실현하겠다는 공약과 달리 노동자의 권리를 대폭 하락시키는 주간연속2교대 도입을 합의함으로써 끝내 정규직마저 배신했다. [7] 2000년 생산이 회복됨에 따라 노조가 유리해진 국면에서, 노조 집행부가 1998년의 구조조정을 되돌리는 단호한 투쟁에 나서는 대신 고용불안 논리에 따라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에 앞장선 것은 조합원들의 ‘일상화된 고용불안’ 정서를 더욱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8] 현대차는 1997년 튀르키예 공장, 1998년 인도 공장, 2002년 중국 베이징 공장, 2005년 미국 앨라배마 공장, 2007년 체코 공장을 속속 준공하며, 세계 곳곳으로 생산 기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후에도 현대차는 2010년 러시아 공장, 2012년 브라질 공장, 2017년 베트남 공장, 2022년 인도네시아 공장 등을 준공하며 해외 생산거점을 계속해서 확대시켰다. 현대차는 해외 생산거점 확대 과정에서 부품하청업체들의 중국 동반 진출을 독려하기 위해 2005년 납품물량의 40%를 중국에서 역수입해 공급하라는 ‘바이백’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9]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2/09/04, <자주노동자> 신문. [10] 현대차 실천하는노동자회, 2003/02/26, <실노회> 신문. [11]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3/10/22, <자주노동자> 신문. [12]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2/08/14, <노동자의길> 신문. [13]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4/01/27, <자주노동자> 신문. [14]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4/04/14, <노동자의길> 신문. [15]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4/09/08, <민노투> 신문. [16]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길> 신문. [17]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5/04/20, <민노투> 신문. [18] 현대차노조 5공장 대의원회, 2005/07/05, <5공장 대의원회> 유인물. [19] 모듈이란 작은 부품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은 조립단위를 말한다. 이를테면 칵핏모듈은 인판넬, 계기판, 오디오, 공조시스템, 스위치, 에어백 등을 하나로 묶어 구성된 조립단위다. 과거에는 각각의 부품이 완성차 조립라인에서 조립됐지만, 모듈외주화가 되면 사외 부품사가 조립한 모듈을 공급받기 때문에 완성차 조립라인의 작업량이 그만큼 줄어든다. [20]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연대, 2003/04/29, <민노투> 신문. [21] 최영익,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22] 현대차노조의 활동이 자본이 설정한 반경 안으로 갇혀 버렸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경영권 세습에 대한 무대응이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현대차 그룹은 정몽구에서 정의선으로 경영권 부자세습을 준비했다. 2001년 물류업체 글로비스(정의선 지분 60%)를 설립하고, 2002년 건설업체 엠코(글로비스 지분 60%)를 설립하여 현대차 일감을 떼거지로 몰아주었다. 글로비스 등의 회사 가치 극대화로 주식 가격이 몇십 배로 폭등하면서, 정의선은 경영권 세습에 필요한 비용을 손쉽게 확보해 나갔다. 그런데 이것을 문제 삼는 현대차노조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현대차 그룹의 경영권 세습은 소액주주의 권리 침해라는 측면에서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일정한 공격을 받기는 했을지언정, 정작 현대차노조로부터는 사실상 어떤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 2006년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 문제로 구속됐을 때도 노조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23] 일부 노조간부들이 회사의 생산직 채용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채용희망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채용비리’는 2005년 1월 기아차에서부터 불거져 5월에는 현대차로 번졌다. 10월에는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로부터 수천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나 구속되고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24] 2000년대 중반 현대차노조에서는 ‘빨간 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는 노조간부들이 조합원들 사이에서 ‘빨조’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지칭됐다. 원래 노조간부들이 일상적으로 빨간 조끼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은 민주노조의 힘과 투쟁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빨간 조끼를 착용한 노조간부들이 온갖 특권과 향응을 게걸스럽게 빨아먹는다며 비아냥대는 의미의 ‘빨조’로 불리게 됐던 것이다. [25] 현대차 실천하는노동자회, 2003/02/26, <실노회> 신문. [26]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2005/04/13, <공동소위원회> 유인물. [27]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5/06/02, <자주노동자회> 유인물. [28] 현대차노조 공동소위원회, 2005/06/08, <공동소위원회> 유인물. [29]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3/11/05, <자주노동자> 신문. [30] 현대차노조 4공장 소위원회, 2003/08/21, <4공장 소위원회> 유인물. [31] 현대차 자주노동자회, 2004/05/04, <자주노동자> 신문. [32]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 길> 신문. [33] 현대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2005/03/22, <노동자의 길> 신문. [34] 현대차는 1991년 이후 생산목표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성과금을 지급했고, 생산실적과 연동한 성과금 지급 합의는 2006년이 처음이었다. [35] 현대차는 2006년 161만 8천 268대를 생산하여, 생산목표인 164만 7천대의 98.3%를 달성했다. [36] 최영익,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37] 대표적으로 2006년 6월 28~29일 실시된 현대차노조의 산별노조 전환투표는 71.5% 찬성으로 3분의 2를 넘겨 가결됐다. 2003년 6월에 실시된 1차 산별노조 전환투표는 62.1% 찬성에 그쳤었다. [38] 기업지부는 처음에 3년 동안만 시행하는 한시적 조치로 도입됐지만, 2009년과 2011년 두 차례 연장된 끝에 기본 조직체계로 굳어졌다. [39] 김보성, 2011, 「자동차업종 사내하청 조직화투쟁의 쟁점과 평가」 [40] 이러한 노력은 민주노총 위원장 직선제와 대의원대회 비정규직 할당제 도입 등 제도혁신 운동으로도 나타났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2026-04-27 | 조회 27,801 -
[번역] 우파에 맞서서 승리하는 법: 밀레이에 맞선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에서 얻은 교훈싸움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아르헨티나의 병원 노동자들, 교사들, 대학 교직원과 학생들은 자기 조직화, 계급적 독립성, 현장 조직화를 무기 삼아 긴축 프로그램과 예산 삭감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맞이한 트럼프는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노동 계급을 공격 중이며, 특히 이민자 공동체, 성소수자, 유색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많은 이들이 반격에 나서지만, 흔히 그렇듯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의견이 갈린다. 아르헨티나에서 좌파 투쟁가들과 정치 활동가들이 축적해 온 경험은 미국에서 투쟁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왜 아르헨티나를 주목해야 하는가? 한편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급진적 자유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우파 정부의 실험이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다.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움직임은 중심부 국가들의 우파가 정책을 쇄신하는 데 영감을 제공하곤 했다. 이를테면 1970년대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추진한 프로그램은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의 초기 실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 조직화와 저항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는 곳 또한 주변부 국가들이다. 특히 아르헨티나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혁명적 좌파연합 중 하나가 존재하며, 계급투쟁과 사회운동의 역사가 풍부하기 때문에 집단적 저항의 기억, 노동계급의 투쟁방법에 대한 신뢰, 직접행동이라는 전통을 남겨 놓았다. 밀레이, 부르주아 야당, 좌파 먼저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주요 정치 행위자들을 개괄해 보자. 정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한 하비에르 밀레이는 매우 연극적인 인물이다. 논쟁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였던 그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옹호하면서 분노를 폭발시키는 모습으로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밀레이는 자신을 정치적 아웃사이더로 브랜딩했지만, 그의 인기가 높아진 데는 미디어 재벌 에두아르도 에우르네키안의 힘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나아가 2023년 대선 승리는 낡은 정치 브로커들과 극도로 실용주의적이고 원칙 없는 권력 협상을 벌인 결과였다. 그럼에도 밀레이의 담론과 정책이 워낙 기이했고 지난 20년간 나라를 지배해 온 두 연합(키르치네르주의와 “변화를 위한 연합(Juntos por el Cambio)”)에 맞서는 “아웃사이더”를 자임했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후에도 반기득권 수사의 혜택을 계속 누렸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그의 경제 노선은 본질적으로 정부 긴축, 규제 완화, 자본가계급 특혜 정책의 새로운 판본이며, 노동자조직 악마화와 노동자투쟁 탄압을 수반한다. 밀레이와 그를 지지하는 운동을 낳은 국내적인 토양이 분명히 있지만, 이것이 일국에 국한된 현상은 결코 아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도널드 트럼프,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로 이어지는 전 지구적 우파 정부 물결의 일부다. 하비에르 밀레이는 이스라엘 정부와 가자에서 벌어지는 집단 학살의 확고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밀레이에 대항하는 부르주아 야당으로는 중도 및 중도좌파 정치인들을 포괄하는 잡탕과 같은 페론주의 연합, 그리고 “변화를 위한 연합”의 중도우파 잔여 세력이 있다. 후자는 두 정당으로 분열되었는데,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며 중산층 기반인 급진시민연합(UCR)과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의 공화주의제안(PRO)이다. 밀레이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바로 이 두 주류 정당을 맹공격함으로써 담론을 형성했다. 이들은 곧 “정치 카스트”였다. 그러나 밀레이는 결선 투표를 며칠 앞두고 마크리와의 거래를 통해 내각의 몇 자리를 내주고 마크리 지지자들의 표를 확보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2023년 PRO의 대선 후보였던 파트리시아 불리치로, 이후 밀레이 정부 치안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페론주의는 빅텐트 조직으로, 후안 D. 페론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개발주의를 느슨하게 계승한 정치 이념을 내세운다. 키르치네르주의는 세기 전환기 이후 페론주의 내에서 지배적 분파로 자리 잡은 중도좌파 정치 기획으로, 처음에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그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이끌었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 집권했으며 2019~2023년에는 더 광범위한 (비키르치네르주의) 페론주의 연합의 일부로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키르치네르주의는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심각했던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딛고 부상했다. 그 위기는 2001년 민중 봉기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축출되며 막을 내렸다. 이런 배경 때문에 키르치네르주의는 대중운동과 전투적 노동계급에 많은 부분에서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정치적 지지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포괄적 복지 정책과 일정 수준의 경제적 재분배를 실시했으며, 사회운동과 인권 단체를 포섭했다. 키르치네르주의의 핵심 과제는 국가 제도의 정당성을 회복하여 사회 질서를 복원하고 자본 축적을 위한 조건을 재설정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임기 말인 2015년에, 그리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와 키르치네르 행정부 시기인 2019~2023년에는 더더욱, 빈곤율이 치솟았고 인플레이션율도 폭등했으며, 이들의 정치 기획에 대한 환멸감이 모든 사회 계층에 깊숙이 침투했다. 밀레이의 집권을 이해하려면 키르치네르주의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아울러 2015~2019년 마크리의 과도기 정권이 (미온적으로나마)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시도하고 단편적 긴축(마크리는 충격 요법에 대비되는 “점진주의”를 내세웠다)을 실시하여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를 부양하려다 실패한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반자본주의 좌파는 대다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중요도와 대중적 인지도를 자랑한다. 2011년 창설 이래 좌파노동자전선(FIT-U)은 민중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FIT-U는 현재 연방 의회에서 5석, 주 의회 및 지방 의회에서 수십 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노동계급의 계급적 독립성을 바탕으로 쟁취한 것이다. 이 같은 계급 독립 정치는 좌파전선 원내 교섭 단체가 밀레이 정부의 모든 조치에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반대한 유일한 교섭 단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나아가 소속 의원 전원이 교사 수준의 소득만 자신이 갖고, 나머지 세비는 노동자 투쟁과 사회적 투쟁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했다. 좌파전선의 유명 인사들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언제나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전 대선 후보이자 연방 의원인 니콜라스 델 카뇨와 미리암 브레그만은 모두 좌파노동자전선 소속 사회주의노동자당(PTS) 당원으로, 의회에서 정부의 탄압을 끊임없이 고발하는 동시에 현장 투쟁에 연대한다. 이들이 노동운동가들, 연금 삭감에 항의하는 퇴직자들, 병원 해체에 맞서는 의료 노동자들과 함께 최루액을 맞고 후추 스프레이를 맞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좌파노동자전선의 활동 무대는 의회로 국한되지 않는다. 소속 활동가들은 전국 수백 개 노조 지부에서 지도자나 조직가로 활동하고, 수십 개 대학에서 조직을 이끌며, 강력한 여성운동 조직에서도 가장 전투적인 대열에 속해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고 특히나 노동운동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좌파노동자전선 주요 단위인 PTS 활동의 핵심이다. 행위함으로써, 또 행위하지 않음으로써 아르헨티나의 정치 상황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내 행위자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노조 관료들이다.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축에 속했으며, 400만 명에 달하는 조합원(전체 노동인구의 약 25퍼센트, 공식 고용 노동자의 거의 40퍼센트)을 자랑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조는 통상 페론주의 성향의 관료적 분파가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정치인과도 기꺼이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노동조합 총연맹이 두 개 있다. 가장 크고 가장 관료적인 CGT, 그리고 CGT에서 갈라져 나온 전투적이고 (약간이나마 더) 민주적인 CTA다. 이 상급 노동 조직들은 국가 경제를 마비시킬 힘을 갖고 있지만, 지도부는 (종종 용역 깡패까지 동원하면서) 조합원의 참여와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가로막고, 파업 조직을 회피할 구실을 늘 궁리한다. 마지막으로, 정부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외부 행위자를 빼놓으면 전체 구도가 완성되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이다. IMF는 역사적으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유 시장 및 긴축 정책을 밀어붙이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IMF는 “최후의 대부자”, 말하자면 국채 매입자를 찾지 못하는 나라에 신용이라는 생명줄을 제공하는 지위 덕분에 공공 정책에 대해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IMF 대출에는 통상 “조건부 이행 사항”이 붙는데, 여기에는 대개 재정 적자 축소 또는 해소, 사회 지출 삭감, 자유 무역 장벽 최소화 등의 요구가 포함된다. 중간 선거를 앞둔 밀레이 정부 밀레이 정부는 임기 초부터 자랑할 만한 핵심 성과를 하나 거두었는데, 바로 인플레이션을 잡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권 안정의 주된 토대다.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은 지난 10년간 아르헨티나를 짓눌러 온 문제였다. 마크리 집권기(2015~2019년)에 연 40퍼센트였던 물가상승률은 2023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임기 마지막 해 200퍼센트를 돌파하며 치솟았다. 이례적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은 이토록 불안정한 경제 환경에서 국내외 자본의 투자를 가로막아 재계를 위축시켰을 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거대한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임금은 물가를 따라가지 못했고, 가격을 예측할 수 없는 노동자 가정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역대 정부가 가격 통제를 시도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하비에르 밀레이는 취임하자마자 가격을 자유화하고, 과열된 경기를 식히기 위한 친시장 정책과 여러 조치를 통과시켰다. 포퓰리즘적 “아웃사이더” 담론을 내세웠지만 그의 경제 정책은 교과서적인 신자유주의 충격 요법 그 자체였다. 집권 첫 주에 정부는 자국 통화를 50퍼센트 평가 절하하고 가격을 자유화했으며, 이로 인해 실질임금이 급락했다. 공공 지출 총액을 29퍼센트 삭감했고, 연방 정부의 주요 감축 조치는 13개 부처 폐지(또는 “차관급”으로 격하), 모든 공공 인프라 사업 동결, 보건·교육·과학 분야 지출 대폭 삭감 등을 포함했다. 2025년 6월까지 정부는 공무원 5만 명을 해고했다(취임 당시 공무원은 총 20만 5천 명이었다). 물가는 초기에 급등한 이후 안정되었고, 인플레이션은 2023년 12월 월 약 25퍼센트에서 1년 뒤 월 2.5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했다. 경기 냉각 정책에는 필연적으로 침체의 위험이 따르는데, 아르헨티나는 사회적·경제적 상황자체가 이미 참담했다. 2025년 상반기에 부분적으로 회복되기는 했으나 밀레이 집권 첫 해 경제 활동은 3.5퍼센트 감소했고, 2023년 11월부터 2024년 8월 사이에 거의 14만 개의 일자리(민간 부문 전체 고용의 2.2퍼센트)가 증발했다. 초기 정책들이 시행된 직후 빈곤율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이후 감소하기는 했으나 이미 높았던 2023년 빈곤율 언저리에서 고착되었다. 2025년 6월 기준으로 실업률은 최근 4년 중 최고치인 7.9퍼센트까지 올라섰고, 비공식 고용을 비롯한 각종 불안정 노동은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이전의 0.41에서 0.47로 뛰어올랐다. 여러 논평가들은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정부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민중의 묵묵한 인내가, 특히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인 이들의 바로 그 인내가 역대 정권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드러내는 또 하나의 척도가 되었다. 눈에 띄게 나빠진 경제 여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밀레이에게 자신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기회와 더 많은 시간을 기꺼이 주려 했다. 밀레이의 목표는 판을 엎고 다시 투자를 끌어모아 대폭 경제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구상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새로 짜는 것, 말하자면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고 임금을 깎아내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착취와 이윤 창출의 기회를 늘리고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먼저 아르헨티나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 그리고 과거 투쟁으로 쟁취한 것을 지키려는 의지에 결정적 패배를 안겨야 한다. 대부분의 전국 단위 노조가 관료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해도, 지도부는 여전히 지지 기반을 이루는 목소리들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장 조합원들의 핵심적인 권리가 박탈당하면 조직적 운동에 나서라는 거대한 압력이 지도부에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5년 들어 밀레이 정부는 정권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여러 스캔들에 맞닥뜨렸다. 첫 번째는 리브라($Libra) 스캔들로, 하비에르 밀레이 본인이 소셜 미디어 X에서 해당 암호 화폐를 홍보한 뒤 투기꾼들이 투자 회수 사기를 통해 2억 5천만 달러를 챙긴 사건이다. 이어서 마약 유통업자들의 뇌물과 연루된 부패 사건이 터졌는데, 음성 녹음에는 하비에르의 여동생이자 대통령 최측근 자문인 카리나 밀레이가 직접 연루되어 있다. 가장 최근에는 밀레이의 정당인 자유전진(La Libertad Avanza)의 간판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중간선거 첫 번째 후보였던 호세 루이스 에스페르트가 마약 사건에 휘말려 선거운동 도중 후보직을 사퇴했고, 연방 판사에 의해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되었다. 경제는 도약하지 못하고, 국제수지 적자와 결부된 모순이 심화되면서 단기 및 중기 경제 전망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재무부가 200억 달러를 구제금융으로 제공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발표는 밀레이에게 단기적이기는 하지만 절실한 생명줄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또 다시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밀레이가 선거에서 승리해야만 대출을 승인하겠다고 못 박았다. 좌파전선의 전 의원이자 전국 지도자인 미리암 브레그만이 비난했듯이, 이 합의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이 심화된다는 의미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정부는 강경한 태세를 유지하면서 타협 불가 이미지를 내세우려 한다. 그러나 밀레이 취임 이후 계급투쟁의 윤곽을 드러낸 중요한 운동이 몇 차례 있었다. 두 차례의 총파업, 교육을 지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 성소수자의 권리와 공공 의료를 위한 대규모 시위, 운수·교사·공무원 파업, 그리고 주요 도시 전역에서 열린 대중 집회가 그것이다. 이 모든 투쟁 가운데 지금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세 가지가 있다. 정부를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거나, 정부에 맞서 싸우는 방법에 관해 중요한 시사점이 있는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반격하다 아르헨티나에서 공립대학들의 권위는 상당하다. 등록금이 전액 무료임에도 공립대학 학위는 대부분의 경우 사립대학 학위보다 높이 평가된다. 2024년 10월 정부는 공립대학을 겨냥했다. 이것이 첫 번째 공격은 아니었다. 밀레이가 취임 직후 내놓은 2024년 예산안에서 연방 정부가 전국적으로 직접 지원하는 국립대학 재정이 대폭 삭감되었다. 페소화 기준 예산은 2023년 수준에서 동결되었지만, 연간 288퍼센트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거의 70퍼센트 삭감과 다르지 않았다. 2024년 4월, 50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공립대학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는 지난 20년간 가장 큰 대중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0월에 대통령은 한술 더 떠서 의회가 통과시킨 고등교육 긴급 재정지원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하나둘 시작된 대학 점거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운동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학생들은 전국 30개 국립대학에서 80곳 이상의 건물 점거를 조직했고, 교원 및 비교원 직원의 임금 인상과 대학 예산 전반의 증액을 요구했다. 노동조합과 대학생 연합은 두 차례의 전국 파업과 주요 도시에서의 대규모 행진을 조직했다. 이 강력한 운동 앞에서 정부는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밀레이는 공립대학에 등록금을 부과하겠다는 암묵적 위협을 교묘하게 내비쳤으나, 충돌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공립대학 무상 원칙을 폐기하지 않겠다고 직접 나서서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 운동에 불을 붙이고 힘을 실어 준 것은 수십만 명의 학생, 교사, 교수, 대학 직원들로 이루어진 풀뿌리 조직이었다. 이들은 건물을 점거하고 민주적 토론과 의사 결정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각 학교의 활동가 수백 명이 총회에 모여서 토론하고 다음 행동을 표결로 정했다. 좌파 일각에서는 이 같은 사례를 이상화하거나 저절로 생긴 현상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좌파 정치 활동가들은 이러한 자기 조직화 기구들을 구축하고, 발전시키고, 쟁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좌파노동자전선 소속 PTS 당원들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해 쉼 없이 싸웠다. 이 투쟁 국면에서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낸 조직과 기관으로는 전국대학간위원회(CIN, 전국 대학 총장 협의체), 대학 노조 연합(Frente Sindical Universitario), 그리고 학생운동 대표들이 있었다. CIN의 구성원은 대부분 오래된 두 부르주아 정당(페론주의와 급진시민연합)에 소속된 총장들로, 직접 행동을 만류하거나 약화시키려 했고 학부 건물 점거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일부 학교에서는 원격 수업으로 전환하여 운동을 고립시키려 했고 관심을 오로지 의회에서의 예산 협상으로 집중시키려 했다. 대학 노조 지도부도 투쟁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두 차례의 매우 성공적인 파업과 전국 행진 이후 정부가 약세를 보이던 시점에 그들은 세 번째 전국 교육 행진 소집을 거부했다. 학생 조합은 당연히 학생들의 도덕적 열기와 투쟁 의지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많은 점거 현장에 참여하고 점거를 이끌었다. 이를테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철학부 학생 조합 사무총장인 루카 본판테는 CIN의 타협적 노선을 거듭 규탄하면서, 지속적인 직접 행동과 전국적 학생운동 조율을 촉구했다. 그러나 전국 조직과 다수의 주·지방 조직에서 학생 조합 지도부는 대부분 급진시민연합과 페론주의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점거를 적극적으로 말리면서 초점을 2025년 대학 예산을 둘러싼 의회 논의로 돌리려 했다. 학생들과 대학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역할은 의원들의 토론과 표결을 지켜보는 수동적 구경꾼에 불과했다. 이 투쟁의 핵심 교훈은 직접 행동과 자기 조직화야말로 대학 운동의 진정한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노조와 학생 조합의 관료들은, 제도적 경로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든 아니면 자신들의 손을 벗어날지도 모르는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든 간에, 운동의 급진적인 칼날을 무디게 하고 가로막기만 했다. 게다가 주류 부르주아 정당 성향을 가진 조직들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거스를 수 없을 때만 행동에 동참하고, 그 와중에도 운동을 해체하고 고립시키고 잠재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며, 투쟁의 현장과 동떨어진 의회 논의로 대화의 장을 옮기기 위해 애썼다. 꼼짝도 하지 않는 병원 교육과 더불어 의료 부문 또한 밀레이 행정부 출범 초부터 공격 대상이었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병원 예산은 최대 54퍼센트까지 삭감되었다. 고등 교육을 공격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밀레이 행정부는 더 작고 만만해 보이는 표적을 겨냥했다. 바로 연방 정부 관할로 운영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정신건강 병원이었다. 보나파르트 병원은 아르헨티나에서 유일하게 정신질환과 중독에 대해 여러 분야의 통합 치료를 수행하는 전문 병원이다. 이 공격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기관에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작업은 아르헨티나의 어떤 의료 시설과도 다르다. 의사, 사회복지사, 치료사, 사회과학자, 음악치료사 등이 협력해서 정신건강 환자에게 총체적 치료법을 제공한다. 인권 활동가이자 오월광장어머니회 소속인 라우라 보나파르트의 이름을 딴 이 병원은 진보적이고 평등한 의료의 상징이다. 2024년 10월 4일 금요일, 병원 노동자들은 입원 병동과 응급실을 폐쇄하라는 정부 공문을 받았다. 몇 시간 뒤, 이 조치들은 다음 주 월요일에 실행될 병원 최종 폐쇄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소식이 여러 경로를 통해 들려 왔다. 공무원 노조(ATE)가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곧이어 총회에서 자신들의 몸으로 병원을 지키기로 표결했다. 점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팔짱 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최대한 관심을 끌어야만 했다. 정부는 평화로운 시위에도 물리력을 행사할 의지가 있음을 이미 충분히 입증했다. 보나파르트 노동자들은 언제든 폭력적으로 진압당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병원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지체 없이 바로 그날 거리로 나가 전단을 돌리며 지역 사회의 지지를 호소했다. 숨 가쁜 속도로 다음 날인 토요일 저녁 연대 음악회를 조직했고, 여러 밴드가 투쟁에 연대하며 무대에 올랐다. 환자들과 인근 지역 및 그 너머 주민들의 뜨거운 지지가 쏟아지며 조직화에 힘이 실렸다. 10월 7일 월요일에는 병원을 “껴안는” 연대 집회에 수백 명이 모였고, 기자회견에는 국회의원, 인권 활동가, 노조 지도자들이 함께했다. 맨 처음 회의를 소집한 것은 노조 현장위원회였지만, 현장 조합원들이 스스로 나서서 병원을 조직하고, 각기 다른 과제(언론 대응, 연대, 환자 돌봄 등)를 조율할 위원회를 꾸리고, 투쟁 전략을 결정했으며, 노조 공식 지도부는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신 건강 전문가 훌리에타 슈발리에의 회고에 따르면, 병원 직원이자 조합원으로 지낸 11년 중에 어떤 행동을 할지 “직접 투표로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용 형태, 조합원 여부, 소속 부서와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가 총회에 모여 매 결정마다 거수로 표결했다. 투쟁 첫 2주 동안 총회는 거의 매일 열렸다. 훌리에타는 자신들이 보건 부문 안팎에서 투쟁하는 다른 노동자 집단들과 빠르게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된 과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포사다스 병원, 가라한 병원, 철도 노동자, 공항 노동자 등이 연대의 대상이었다.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대학 투쟁에도 주의를 기울여 의과 대학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싸우는 부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이러한 연대는 곧 결실을 맺었고, 보나파르트 병원은 정부에 맞선 대중 행동과 저항의 진원지가 되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병원을 계속 운영하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임박한 폐쇄 위험은 넘겼지만 정부가 병원 “구조조정”을 고집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구조조정은 병원을 서서히 고사시키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병원 존치를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은 정부의 명백한 패배였고, 보나파르트 병원은 전국적으로 밀레이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보나파르트 병원 직원들을 대표하는 두 노조의 지도부는 단결, 결집, 민주적 의사 결정을 요구하는 현장 조합원들의 목소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조 대표들이 정부 당국과 만나 모든 일자리와 부서를 포함한 병원 존치 합의에 서명하면서 정부와 함께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데 동의해 버렸다. 구조조정이란 통상 해고와 부분 폐쇄를 포함하는 긴축의 완곡한 표현이다. 이후 병원 총회는 어떠한 형태의 구조조정에도 반대한다고 표결했고, 이는 현장 조합원들이 자기 지도부보다 더 왼쪽에 서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간 좌파>와의 인터뷰에서 보나파르트 병원 핵심 조직가 중 한 명인 하비에르 리오스는 이 투쟁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정부를 후퇴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현장 조합원의 힘, 지역 사회와의 유대 구축, 병원의 벽(과 인력) 너머로 확산된 광범위한 능동적 저항 운동 덕분이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투쟁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기금을 모으고, 서로의 현장에 달려가고, 가장 넓은 의미의 노동계급 연대를 체현하는 운동이 만들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사들이 파업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 파업은 누가 우리의 동지이며 누가 우리의 적인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파업은 5월에 시작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최대 공립 교사 노조인 수테바(SUTEBA)가 정부와의 잠정 합의안을 발표하고 표결에 부친 뒤였다. 잠정 합의안은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소수의 교사를 대표하는 노조인 FEB가 파업을 소집하도록 추동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정부는 현재 중도 좌파 경제학자 악셀 키실로프가 이끌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정부의 경제부 장관이었던 그는 현재 페론주의 내 지배적 분파인 키르치네르주의의 주도권을 두고 크리스티나와 다투고 있다. 지난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중간 선거에서 키실로프의 후보들이 밀레이 측 대리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힌 뒤 야당 내에서 그의 입지가 높아졌다. 키실로프는 밀레이에 대한 저항의 선봉을 자처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밀레이의 경제 노선에 맞서는 “방패” 역할을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FEB가 파업을 선언하자마자 키실로프는 파업에 참여하는 교사들에 대해 결근을 이유로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위협은 파업을 무력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키실로프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분명히 드러냈다. 수테바 지도부는 언제나 그렇듯 보수적 역할을 맡았고, 조합원의 극히 일부에게만 의견을 물었으면서도 잠정 합의안이 압도적 다수의 동의로 통과되었다고 둘러댔다. 수테바 내 좌파 분파인 물티콜로르가 파업에 합류하겠다고 선언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내 최대 지구의 조합원 압도적 다수가 파업 호소에 응했다. 이러한 결과는 놀랍지 않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들은 생계를 위해 두 곳, 심지어 세 곳의 일자리를 가진 경우가 허다하다. 수테바가 협상한 임금 인상은 고작 4퍼센트(수개월 후 7퍼센트로 상향)였고, 2025년 물가상승률이 (작년보다 나아진 수치임에도) 27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이 인상분은 사실상 감소한 소득분을 메우기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이는 이미 빈약한 임금을 또다시 깎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활비를 감안하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실제로 전국에서 교사 임금이 가장 낮은 세 개 주 가운데 하나다. 교사들에 대한 키실로프의 적대 행위는 그가 가진 정치적 입장의 민낯을 드러낸다. 키실로프는 겉보기에는 밀레이의 노골적 신자유주의와 매우 다르지만, 여러 근본 요소와 목표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 전투적 수사를 내세우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경제 정책은 밀레이와 마찬가지로 국내외 투자를 끌어들이는 것에 기초한다. 이를 위해 키실로프는 관광업, 제조업, 광업 부문에서의 대규모 자본 투자에 대해 향후 30년간 파격적인 세금 감면을 제공하는 등 여러 경제적 특혜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노선이 IMF 및 기타 국제 금융 기구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종속에 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고용주들에게 밀레이의 집권은 공세에 나서라는 신호였다. 그들은 노동운동가를 해고하고, 더 낮은 임금으로 협상하고, 노동 강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진행 중인 수많은 노동자투쟁에 대한 주 정부의 답변은 “강제 조정” 조치였다. 말하자면 노동자에게는 업무 복귀를, 고용주에게는 괴롭힘, 불법해고, 임금삭감 중단을 강제하는 조치다. 문제는,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을 위험 때문에 이 조치에 따라야 하는 반면, 고용주들은 아무런 제재 없이 이를 무시할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강제 조정은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투쟁을 무력화하는 몽둥이 구실을 할 뿐이다. 다시 말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키실로프 행정부는 밀레이의 정책에 대한 그 어떤 “방패”도 되어 주지 않는다. 진보적 수사로 포장되었을 뿐, 자본 투자에 보상하고 저임금을 유지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를 규율하는 정책의 온건한 판본이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교사들은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키실로프의 임금 삭감이 위법하다는 법원 판결에 힘입어, 물티콜로르와 반대파 지부들은 정부와 로베르토 바라델 예하 수테바 지도부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물티콜로르 지도자이자 전 연방 의원인 나탈리아 곤살레스 셀리그라의 발언에 따르면, 수테바 지도부는 “사실상 키실로프 행정부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이 사례가 무엇보다 잘 보여 주는 것은, 수사가 아무리 좌파적이어도 부르주아 정치인은 자본주의 게임의 규칙 안에서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좌파는 시장과 노동자를 중재하겠다고,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겠다고 약속하는 국가 관리자에게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경험이 입증하듯, 시장의 압력 하에서는 투자와 기업 이윤을 촉진하려는 충동이 민중의 안녕보다 언제나 우선한다. 이 사례에서도 역시 노조 관료층은 운동을 잠재우는 역할을 맡고 있다. 미국 좌파를 위한 전망과 교훈 우파 정부의 공세에 맞서려면 정치적 차이를 잠시 잊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듣는다. “지금은 전략을 논할 때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킬 때”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권위주의 정부의 파렴치한 공격에 맞서서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운동을 능동적 저항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이 차이를 숨기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강력한 좌파야말로 극우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이 글에서 다룬 사례들은 좌파 활동가들이 밀레이에 맞선 싸움을 선도하는 모습을 가득 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철학부 학생 조합 사무총장 루카 본판테는 PTS 당원이며, 보나파르트 병원의 하비에르 리오스, 교사 활동가이자 전 의원인 나탈리아 곤살레스 셀리그라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혁명적 활동가들은 투쟁 현장에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동료 노동자, 학생, 사회운동 활동가를 조직하며, 노동계급의 힘을 강화하는 타협 없는 강령을 제시하고, 자기 조직화 기구 건설을 추동한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방어적 투쟁에 힘과 예리한 칼날을 부여한다. 이것이 수십 년에 걸친 끈질긴 조직화의 결실이라는 점도 강조할 만하다. PTS는 1990년대에 혹독한 시절을 겪었다. 활동가는 전국에 수백 명뿐이었고 대중적 인지도는 미미했다. 그러나 혁명 정당, 전투적 정당을 건설한다는 전략적 목표가 1988년 창당 이래 모든 투쟁과 모든 전술적 결정에 방향을 제시했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아르헨티나 좌파 대부분이 키르치네르주의를 지지하거나 그쪽에 합류했지만, PTS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한 소수 조직 가운데 하나였고 이들 대부분은 현재 좌파전선에 통합되어 있다. PTS가 지금 이 투쟁들에 내부적으로 개입하면서 급진적 목소리를 내고 사회주의적·반제국주의적 강령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원칙에 입각한 조직화와 당 건설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다. 좌파전선은 IMF를 비롯한 전 지구적 금융 기구들과 제국주의적 종속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단절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유일한 전국적 세력이다. 이 투쟁들이 밀레이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자기 조직화 기구를 만들어 민주적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하고, 노조 및 여타 운동의 관료적 지도부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들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현장 조합원의 힘을 키우고 지역 사회와 강한 유대를 맺음으로써 정부의 공격에 맞선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진보적 수사와 소소한 양보를 제시하면서 시장의 지배를 유지하고 재정 균형을 위해 필요할 경우 노동자를 규율하는 차악의 정부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미국 좌파는 이러한 경험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실천이 재현된다면 트럼프에 저항하는 운동을 더욱 강화하는 동시에, 두 자본주의 정당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좌파의 토대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전국 단위 노조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민국(ICE)에 의한 이주민(또는 이주민처럼 보이는) 노동자 납치와 공포 조성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연방 공무원에 대한 대규모 해고와 노조가 교섭으로 쟁취한 권리의 박탈에 맞서 단호한 투쟁을 조직하는 데도 실패했다. 노조 관료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노조 내부에 반대파와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은 오늘날 절박한 과제다. 오늘날 미국 좌파에게 특히 어려운 과제는 조란 맘다니 현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이다.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맘다니의 선거운동은 뉴욕 시 노동계급과 좌파 전반에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기성 정치권과 보수 정치인들에게는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맘다니의 공약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보적이며, 뉴욕 시 노동계급 가정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 것이다. 좌파는 노동계급의 권리를 확장하고 자본의 힘을 억제하는 조치들을 지지할 수 있고 또 지지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대중운동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맘다니 개인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내고 그의 캠프에 결집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그가 11월에 당선되더라도, 취임 직후 시내 대기업을 만족시키라는 즉각적 압력에 직면할 것이고 자기 공약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뉴욕 시의 정치 브로커들이나 재계 엘리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그들의 부와 이익에 위협이 된다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민주당에서 출마한 좌파 성향의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 이를테면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같은 정치인들의 전례를 보면, 그들이 현 상태에 도전하거나, 시장의 명령에서 벗어나거나, 독립적인 노동계급 정치 조직의 발판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은 사라질 것이다. Left Voice에 2025년 10월 26일 발행된 기사를 번역함. 저자: Remo Erdosain 번역: 강성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2026-04-27 | 조회 26,864 -
[번역] 마르크스주의, 스탈린주의, 퀴어혐오수십 년간,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대립에만 천착할 뿐 여성이나 유색 인종, LGBTQ+에 대한 억압 같은 다른 형태의 억압은 무시한다는 주장이 마치 상식처럼 통용되어 왔다. 실제로 스탈린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이르는, 그리고 오늘날 미국민주적사회주의자들(DSA)까지 포함하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수한 억압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노동자계급 중 상층에만 유리한 경제주의 전략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성적·젠더적 억압에 대한 스탈린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의 반동적 입장은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이는 분명하다. 오히려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10월 혁명을 통해 LGBTQ+ 차별의 물적·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길을 선도했다. 반동적 일탈이 발생한 시점은 정당과 조직들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혁명적 전망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세계와 타협하려 했을 때였다. 이 같은 역사적 통찰은, 특히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의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퀴어 인권을 향한 새로운 공격이 거세지는 오늘날, 해방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 분명히 알려 줄 수 있다. 볼셰비키의 전진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양대 핵심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는 게이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목욕탕 같은 사교 공간이 생겨났고, 언어 코드(예컨대 ‘뚀뜨끼(tetki)’라는 단어는 대략 ‘아줌마’로 번역되는데, 게이 당사자와 비당사자 모두가 게이를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와 복장 코드의 요소들, 그리고 적어도 사적 공간에서는 크로스 드레싱도 존재했다. 역사가 댄 힐리는 혁명기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 시기 동성애의 역사를 다룬 저작 『혁명기 러시아의 동성애적 욕망』에서 이렇게 적는다. “제정 러시아나 소련의 이러한 동성애 하위문화가 해외에서 수입되거나 공산주의의 실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이성애 중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쇼비니즘에 다름 아니다.”[1] 한편으로 남성 간 성행위는 러시아 정교회 규율상 불법이었다. 1917년까지 합의에 의한 “남색”은 시베리아 유형감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위협이 일관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1917년 차르 체제의 법전이 폐지되면서 동성애는 사실상 비범죄화되었고, 1922년 새로운 법전이 채택된 후 신생 소비에트 국가의 공식 법률 문서에서 “남색”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18세기 혁명기 프랑스에 이어 세계 최초로 동성애를 합법화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동성애를 범죄화한 제국 시대의 악명 높은 175조가 여전히 효력을 유지했고 파시즘 하에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이 이를 최종 폐지한 것은 1994년에 이르러서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동성애를 비범죄화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다른 여성과 연애 또는 성적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러시아에서 공적 영역에 진입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고, 따라서 응집력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어려웠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사료도 적은데, 여성 간 성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어서 이를테면 법원 기록 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들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전통적 이성애 가족을 넘어서는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10월 혁명 이후 내전기의 군사적 분위기 속에서 많은 여성이 남성적인 스타일을 선택했는데, 한편으로는 혁명에 충성하고 혁명을 수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자 여성이 다른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한 코드이기도 했다. ‘트랜스섹슈얼리티’와의 경계는 종종 모호했다. 1923년 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 실시한 섹슈얼리티에 관한 설문에는 이런 응답이 있었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 거세하고 남성 분비샘을 이식하는 과학적 방법이 발견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2] 1920년대에 실제로 이 같은 수술이 시행되었지만, 의료 기술이 아직 초보적이었던 탓에 성공 여부는 의문이었다. 의학적 개입과 별도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변경할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 적절한 신분증을 발급받고, 원래 이름을 남성형으로 개명하고, 복장과 외모를 바꾸었다. 이와 더불어 동성애와 젠더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과학적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당시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생물학자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콜초프(Nikolai Konstantinovich Koltsov)는 이렇게 단언했다. “물론 하나의 ‘중간 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한 수의 중간 성들이 존재할 뿐이다.”[3] 예브게니 표도로비치 M.은 17세이던 1915년에 남성 정체성을 취하기 시작했다. 혁명기에 그는 공문서상의 이름을 변경하고 비밀경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2년 예브게니는 새로운 신분증을 가지고 사료에 S.로 기록된 어떤 여성과 결혼했다. 정체성 변경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이 부부를 “자연에 반하는 범죄”로 기소한 지방 법원 소송은 기각되었고 혼인은 유지되었다. 법원은 이 결합이 상호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합법이며 배우자의 젠더 정체성은 무관하다고 판결했다. 이 부부는 S.가 직장 동료와의 관계로 낳은 아이와 함께 수년간 가족으로 함께 살았다.[4] 혁명적 각성과 전통적 규범 거부라는 대의는 볼셰비키 엘리트들의 전유뮬이 아니었고, 예브게니 같은 사람들에게도 전례 없는 수준의 자기 결정권을 주었다. 부르주아 역사학계는 볼셰비키가 차르 체제의 법전을 폐지하면서 동성애를 합법화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시몬 카를린스키는 10월 혁명이 1905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에서 성취한 동성애 인권을 되돌리고 부정했다고 주장하면서, 최초의 “남색” 비범죄화는 곁가지 정도로 취급했다.[5] 그러나 힐리는 1991년 소비에트 문서고 개방과 함께 접근 가능해진 법무인민위원부의 기록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명확한 결론에 도달한다: 이 문서들이 남색 조항을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성인들 간의 합의에 따른 행위를 비범죄화하겠다는 원칙적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 같은 의도는 1918년 사회주의 형법을 기초하려 한 최초의 시도부터 1922년 법안의 최종 채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표명되었다.[6] 남성 동성애를 비범죄화함으로써 볼셰비키는 노동 운동의 오랜 전통 위에 자리 잡았다. 이를테면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은 의회에서 동성애 해방을 요구한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그보다 3년 앞서서 사회주의자들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기도 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동성애가 “자연”에서 일탈한 것이라는 관념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동성애는 오히려 “굳건히 유지되어 온 허구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성과 남성 간의 유사한 계약이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할 합리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7] 동성애 합법화를 요구한 것은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내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행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1923년 모스크바 사회위생연구소 소장 그리고리 바트키스(Grigorii Batkis) 박사가 집필한 소책자 「러시아의 성 혁명(The Sexual Revolution in Russia)」은 혁명 직후 몇 년간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을 엿보게 해 준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 소비에트 법제는 누구도 해를 입지 않고 누구의 이익도 침해되지 않는 한에서는 성적 문제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절대적 불개입을 선언한다. 유럽 법제에서 공공 도덕을 해치는 범죄로 규정된 동성애, 남색, 그 밖의 다양한 성적 만족의 형태들에 관련해서, 소비에트 법제는 이를 소위 “자연적” 성교와 정확히 동일하게 취급한다. 모든 형태의 성교는 사적인 문제다.[8] 물론 신생 소비에트 연방에서 모든 편견이 하루 만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편견은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친 차르 체제의 후진성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더욱이 볼셰비키의 합법화 정책이 소비에트 연방 전역으로 확대된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1926년에 제정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법전은 여전히 동성애를 금지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었다.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유럽 쪽 러시아에서는 동성애를 소수의 선천적 특성으로 이해했다면, 주변부에서는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파악했다. 힐리는 이를 “소비에트 연방이 스스로 표방한 성적 전위주의와 변방 지역에서의 실제 정책 사이의 모순”이라고 부른다.[9] 게다가 1920년대 동안 도시 중심부의 무도회장과 집회장 이용은 점점 줄었는데, 이는 보통 사적 영역으로의 후퇴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같은 해석은 동성애자 남성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중요한 공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과 모순된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6년 동성애를 긍정하는 최초의 커밍아웃 소설 『날개』를 쓴 작가 미하일 쿠즈민(Mikhail Kuzmin)은 혁명에 동조하여 페트로그라드 예술가 협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커밍아웃한 게이였던 게오르기 치체린(Georgy Chicherin)과 친분이 있었는데, 치체린은 1918년부터 1930년까지 소비에트 외무부 장관에 상응하는 직책인 외무인민위원을 지냈다. 레닌의 몇몇 발언은 볼셰비키가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해 고루한 입장을 취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1915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이네사 아르망(Inessa Armand)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레닌은 “사랑의 자유”라는 소책자 문구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개진했다.[10] 여러 줄에 걸쳐서 그는 이 문구가 물질적 계산, 종교적 편견, “법과 법원과 경찰의 족쇄”로부터의 자유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며, “연애의 진지한 요소”로부터의 자유 혹은 “출산”으로부터의 자유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부르주아적 요구라고 주장했다. 힐리 또한 이 구절들(그리고 레닌 사후에 클라라 체트킨이 레닌의 말이라며 전한 유사한 발언들[11])을 보건대, 성생활에서 “개인적 비정상성”을 지닌 이들은 그것을 사적 영역에 두고 혁명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진의였을 수도 있다고 추론한다.[12] 셰리 울프는 『섹슈얼리티와 사회주의』에서 이러한 “레닌 사상에 대한 다소 작위적인 독해”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그것이 레닌을 금주하는 금욕주의자로 묘사하는 냉전기 희화화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13] 실제로 아르망에게 보낸 레닌의 편지들은 스탈린 치하인 1939년에야 비로소 출간되었는데, 힐리가 각주에 적은 내용에 따르면 이는 “1930년대 가족 정책의 변화는 레닌주의에서 기원했다”고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14] 스탈린주의 반동 볼셰비키의 기대와는 달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혁명적 분위기가 유럽을 휩쓸면서 사회주의 국가가 잇따라 출현하는 일은 1923년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 세력에 포위된 상황, 세계 대전에 이어 내전을 겪으면서 수년간 지속된 물질적 궁핍, 그 결과로 소비에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대적으로 위축된 현실 속에서 행정의 전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관료제가 뿌리내렸고, 이 관료제는 국가의 고립 상태를 “일국 사회주의”라는 이론적 지위로까지 격상시키려 했다. 관료 집단에게는 자본주의 서방과 공존하며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 이익이었고 이는 노동력 수요 증가와 맞물렸으며, 출생률을 끌어올리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공공 보육 시설, 세탁소, 국영 식당을 설립해 가족의 사회적 재생산 기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서 가족을 철폐하려던 노력은, 전통적 가족 규범과 젠더 규범을 공고화하는 시도로 바뀌었다. 1938년 축출되기 전까지 소비에트 사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한 아론 솔츠(Aron Solz)는 한 노조 기관지에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녀는 저 위대하고 명예로운 자연적 의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생명을 낳는다.”[15] 1934년, 문화 예술 영역에서 스탈린의 대변인이었던 작가 막심 고리키는 동성애 재범죄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는 동성애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와 “과도하게 문명화된” 서방의 퇴폐를 대비시켰다. 그에 따르면 서방의 퇴폐와 동성애는 파시즘을 낳은 토양이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의 악명 높은 선언에서 절정에 달했다. “동성애자들을 없애라. 그러면 파시즘이 사라질 것이다.”[16] 1922년 동성애 비범죄화가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모든 형태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폭넓은 노력의 일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의 반동적 개혁 역시 동성애 박해에서 멈추지 않았다. 성매매도 다시 범죄화되었고 임신중지는 금지되었으며 당 중앙위원회의 여성부는 해체되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이 같은 금지 정책들을 “경찰의 권력을 쥔 사제의 철학”이라 묘사했다.[17] 이러한 모성 숭배로의 전환에 이어서 실재하는 정치적 반대파, 그리고 상상 속의 반대파에 대해서까지 잔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빵과 장미』에서 안드레아 다트리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여성 정치와 관련하여 갓 탄생한 노동자 국가의 초기 법령들과 이후 관료제가 내놓은 개탄스러운 조치들 사이에는 명백한 단절이 있다. 관료 집단에게 “혁명은 반혁명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다.[18]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강제 이주, 투옥, 고문, 살해를 통해 이 같은 파열이 심화되었다. 혁명적 내용이 탈각된 코민테른의 도움으로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은 1920년대 중반부터 자신들의 반동적 이데올로기를 전 세계 공산당에 이식했다. 혁명기 쿠바에서는 공산당 관료 집단이 게이 남성들을 체포·투옥하고 HIV 감염인들을 국영 요양소에 강제 수용했으며, 1980년 마리엘 보트리프트(Mariel Boatlift)를 통해 수천 명의 퀴어를 추방했다. 동성애를 범죄화한 모든 조항이 법전에서 삭제된 것은 1986년이 되어서였다. 중국에서는 마오의 사후에야 공식적으로 동성애가 금지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를 추구한 남성들은 “난동죄”로 기소될 수 있었고, 마오와 그의 동맹 세력이 촉발한 이른바 문화 대혁명 시기에 특히 그러했다. 이로써 전 세계 공산당들은 이후 수십 년간 좌파 전체에 강력한 보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생겨난 좌파 내의 퀴어 적대는 오랫동안 스탈린주의 조직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역시 스톤월 항쟁을 전후한 시기, 즉 급진화된 성소수자 해방 운동이 태동하던 바로 그 시점에 동성애자와 트랜스를 조직에서 “비공식적으로” 배제했다. SWP 청년 조직은 성소수자 배제 정책을 심지어 공개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지만, 이는 실행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조직은 1975년 소책자를 통해 미국 내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했지만, 카스트로 정권이 공개적인 동성애 표현을 금지하고 있던 당시 쿠바에까지 이를 요구하는 것은 “문화 제국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9년 쿠바 혁명 이전까지 쿠바에서 동성애는 합법이었다. 쿠바인들이 유독 보수적이라거나 심지어 모두가 이성애자라는 생각은 당시에도 인종주의적 고정 관념일 뿐이었다. 이 같은 입장을 취한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SWP만이 아니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활동으로 1984년 영국 광부 대파업에 연대하고 영화 『프라이드(Pride)』에 영향을 준 레이 굿스피드(Ray Goodspeed)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자기 조직의 태도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속해 있던 ’밀리턴트(Militant)’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부르주아적 관심사로 간주했고, 노동자들이 그런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 간부들뿐이었고, 정작 노동자계급 사람들은 딱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SWP는 트로츠키주의의 혁명적 유산을 계승한다고 자임하면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공공연하게 반동적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SWP의 일탈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정치 방법론으로부터 이탈한 귀결이었다. 이러한 이탈은 “객관주의”의 심화, 즉 계급의 정치적 전위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상대화하고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태도로 나타났다. SWP는 당시 미국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분에 자리 잡고 있던 후진적 의식을 이행기적 요구로 끌어올리기는커녕 보수주의에 영합했다. 이 조직이 쿠바에 무비판적이었던 탓에, 쿠바 혁명의 성취에 대한 옹호와, 동성애자를 박해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억압한 관료 집단에 대한 옹호가 뒤섞여 버렸다. 유산 1917년 이후 볼셰비키의 동성애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모순은 젊은 소비에트 국가가 처해 있던 물질적 결핍과 국제적 고립이라는 맥락을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엄청난 파괴를 딛고 이루어진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시도를 전례 없이 유리한 위치에 놓을 것이다. 이를테면 신생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하려는 시도가 좌초할 수밖에 없었고 이성애 규범적 가족을 철폐하려는 기획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러한 기획을 뒷받침할 경제적 조건은 오늘날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월하다. 젠더 억압과 성적(sexual)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동성애 합법화는 성 해방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였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제도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를 조직하는 마르크스주의의 힘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레닌이 1902년에 썼듯이, 이러한 운동은 “어느 계급이 영향을 받든 간에 모든 폭정, 억압, 폭력, 학대에 응답하도록 훈련된” 운동이다.[19] 오늘날 미국에서는 성소수자들이 쟁취한 것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투쟁은 전 세계 자본가들의 자칭 “민주주의”가 이제껏 성취해 온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인정과 자유를 퀴어와 함께 쟁취할 수 있다. Left Voice에 2022년 7월 17일 게재된 글을 번역함. 저자: Marco Blechschmidt, Niko Weber 번역: 강성윤 [1] Dan Healey, _Homosexual Desire in Revolutionary Russia: The Regulation of Sexual and Gender Dissent_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2001), 48. [2] 같은 책, 63. [3] 같은 책, 166. [4] 같은 책, 68–72. [5] Simon Karlinsky, “Russia’s Literature and Culture: The Impact of the October Revolution,” in _Hidden from History: Reclaiming the Gay and Lesbian Past_, edited by Martin Bauml Duberman, Martha Vicinus, and George Chauncey Jr., 357 (New York, 1989). [6] Healey, _Homosexual Desire_, 116. [7] Eduard Bernstein, “The Judgement of Abnormal Sexual Intercourse,” _Die Neue Zeit_ 13/2 (1895), 228-233. [8] Sherry Wolf, _Sexuality and Socialism: History, Politics, and Theory of LGBT Liberation_ (Chicago 2009), 91. [9] Healey, _Homosexual Desire_, 162. [10] V. I. Lenin to Inessa Armand, January 17, 1915, in _Lenin Collected Works_, vol. 35, (Moscow, 1976), 180–81. [11] Clara Zetkin, _Reminiscences of Lenin_ (New York, 1934). [12] Healey, _Homosexual Desire_, 113. [13] Wolf, _Sexuality and Socialism_, 93. [14] Healey, _Homosexual Desire_, 301. [15] Victoria I. Sakevich and Boris P. Denisov, _Birth Control in Russia: Overcoming the State System Resistance_(Moscow, 2014), 9. [16] Healey, _Homosexual Desire_, 189–90. [17] Leon Trotsky, _The Revolution Betrayed: What Is the Soviet Union and Where Is it Going?_ (New York, 1937). [18] Andrea D’Atri, _Bread and Roses. Gender and Class under Capitalism_ (London 2021), 96. [19] V. I. Lenin, _What Is to Be Done? Burning Questions of our Movement_, in _Lenin’s Collected Works_, vol. 5 (Moscow, 1961),347–30.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2026-04-23 | 조회 22,814 -
[한노운사 연재 14회]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비정규직은 악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노조를 결성하고 투쟁에 나섰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예열기를 거친 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비정규직 투쟁이 본격적으로 분출했다. 수백, 수천, 때때로 수만 단위의 대중투쟁이 곳곳에서 끈질기게 펼쳐졌다.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이데올로기 전선에서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를 갖고 상당한 대치전선을 형성해 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둘러싼 정치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요구들을 집약하여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제출했다. 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과 손잡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허울 아래 기간제법을 제정하고 파견법을 개악했다. 민주노총은 수차례의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진정한 투쟁동력을 건설해내지는 못했다. 이전 편 보기 3부 패배와 퇴보 (1998-2008) [시대배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 [2] 민주노조운동의 후퇴와 비정규직 확산 [3]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대결 [4]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5]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과 민주노동당 1) 1999~2002년 비정규직 투쟁 비정규직이 빠르게 늘던 1990년대 후반부터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시작됐다. 1999~2001년 사이에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학습지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방송사 비정규직, 한국통신 계약직, 캐리어 사내하청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투쟁에 나섰다. 이 시기에는 아직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공론화되지 못했고, 운동 주체들의 준비 또한 많이 부족했다. 정규직 노조운동은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반하는 태도들을 곳곳에서 서슴없이 드러냈다. 비정규직 주체들은 활동가들의 역량도 부족했고 대중적으로도 아직 자기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들은 대다수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1999년 3월 사내하청 대량해고에 맞서 급하게 결성된 한라중공업사내하청노조는 최초로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였다. 사내하청 대량해고는 정규직에 대한 대량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8월 10일부터 72일간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가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전개했다. 사내하청 노조는 정규직 노조의 파업에 연대하며 사내하청 노조의 요구(노조간부 현장출입, 고소고발·손배 취하, 사내하청 직영화 등)를 파업 요구로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규직 노조의 파업이 9월 7일부터 점거파업으로 발전했지만, 사내하청 노조는 정규직 노조의 만류로 점거파업에 합류하지 못했다. 옥쇄파업을 진행하면서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매일 야간집회와 조합원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현장노동자를 단련시켰지만, 하청이나 비정규직 문제는 한 번도 다루지 않았다. …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가 중심이 된 한라중공업 파업지지와 경찰투입 저지를 위한 목포역 천막농성 기자회견문과 민주노총 기자회견문에 ‘하청노조의 활동보장과 하청의 직영화’라는 문구가 들어갔을 뿐이고, 현장 안에서 개최된 민주노총 집회 때 했던 한 번의 발언만이 하청노조가 한라중공업노조 파업투쟁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유일한 경우였다.[1] 1999년 11월 재능교육 학습지교사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재능교육교사노조는 설립 후 3주 만에 1천2백여 명을 조직해서 32일간 파업을 전개함으로써, 비정규직의 대중적 조직화가 가능함을 확인한 첫 사례가 됐다. 2000년 7월에는 특수고용 노동자 최초로 단체협약을 쟁취했다.[2] 2000년 4월 부산지역일반노조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슬로건 아래 결성됐다. 기존 산별노조의 한계를 넘어서서 업종·사업장·고용형태에 상관없이 지역을 기반으로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을 표방했다. 2001년에는 창원, 진주, 서울 등에도 일반노조 설립이 이어졌다. 우리에게 노동조합은 그림의 떡이었다. 중소 영세·하청기업 노동자 및 임시·계약직, 파견·용역노동자에게 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노조는 이제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3] KBS 등 방송사의 파견노동자들이 파견법 시행 2주년을 앞둔 2000년 5월 해고예고통보를 받고 방송사비정규노조를 결성했다. 방송사들은 2년마다 파견노동자를 교체했지만, 노조가 끈질기게 싸운 결과 2004년 KBS의 운전직 파견노동자를 KBS 자회사에 직접고용하게 했다. 방송사비정규노조의 투쟁은 파견법의 실태를 폭로하고 파견법 철폐의 요구를 대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 6월 롯데호텔노조가 ‘일방중재조항 폐지, 임금 인상, 계약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김대중 정권은 술을 마신 전경들을 투입해 롯데호텔 농성장을 강제진압 했는데, 임산부에게까지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74일 동안 파업을 이어간 롯데호텔노조는 ‘3년 이상 근속한 계약직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역시 2000년 6월 물류센터의 파견노동자를 조직한 이랜드노조가 ‘불법도급전환 반대, 임금 인상, 근무조건 개선,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2001년까지 265일 동안 파업을 이어간 이랜드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끈질긴 연대투쟁을 통해 ‘3년 이상 근속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2000년 9월 전국건설운송노조가 설립돼 레미콘 노동자 2천8백 명이 가입했다. 2001년 4월부터 12월까지 여의도에 레미콘 차량 수백 대를 집결시켜 놓고 노조 인정 및 단체협약 체결, 매주 일요일 휴무 등을 요구하며 전면파업을 전개했다. 파업을 통해 사업장마다 상당한 운송비 인상의 성과를 거뒀지만, 수십억의 손배가압류를 짊어져야 했다. 2000년 11월 ㈜SK의 저유소에서 인력파견업체 인사이트코리아 소속으로 2년 동안 일해 온 노동자들이 ‘계약직으로 신규채용’하겠다는 SK측 제의를 거부했다가 해고되자 노조를 결성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인사이트코리아 노동자들은 끈질긴 투쟁 끝에 2003년 대법원에서 위장도급이기에 실제로는 ㈜SK가 직접 고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을 통해 승리했다. 1998년부터 정규직 1만여 명을 강제 명예퇴직으로 내몬 한국통신은 2000년 6월부터 11월까지 전국의 계약직 7천 명 전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오랫동안 정규직이 될 희망을 안고 저임금과 차별을 견뎌 온 계약직 노동자들은 2000년 6월 한국통신계약직노조를 설립한 뒤, 12월 13일부터 원직복직과 임금 현실화를 내걸고 파업투쟁에 나섰다. 정규직으로 구성된 한국통신노조가 18일부터 강제 명예퇴직 철회와 민영화 중단을 요구하며 사흘 동안 파업에 나섰을 때 계약직 노조는 당연히 연대투쟁을 기대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연대를 거부했다. 계약직 노조는 28일 한국통신 본사 2층 로비를 점거했다. 2001년 1월 16일에는 한강철교 고공농성에 나섰다. 2월 1일에는 정규직화 쟁취로 파업의 목표를 올렸다. 3월 9일 새벽 목동전화국을 점거했다. 5월 8일 114를 담당하는 정규직들이 분사화에 맞서 파업에 돌입했다. 계약직 노조는 각 지역에서 114를 담당하는 계약직들을 조직했다. 6월 11일 114를 담당하는 계약직도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16일 114 정규직들은 집단적 전환배치와 징계 최소화를 조건으로 분사화를 수용하면서 파업을 끝냈다. 공동투쟁을 해왔던 계약직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었고, 합의안에 114 계약직들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8월 28일 계약직 노조는 국회 의원회관 옥상에서 기습농성을 벌였다. 10월 28일에는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해서 ‘한국통신 계약직 문제 해결하라’고 절규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2002년 5월 12일, 노조 해산을 조건으로 도급업체 취업 알선을 수용하며 517일간의 투쟁을 마무리했다. 2001년 캐리어사내하청노조는 사내하청 600명 가운데 450명을 조직한 뒤 정규직 전환을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애초 사내하청 노조의 조직화를 적극 지원했던 정규직 노조는 회사가 자본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하자 고용불안 위기의식에 빠져 태도를 정반대로 뒤집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4월 26일 투쟁하는 사내하청들을 정규직들이 회사 밖으로 내쫓았다. 5월 1일에는 농성중인 사내하청들에게 정규직 구사대가 심각한 폭력을 행사했다. 캐리어는 구사대 폭력, 파견법 위반, 블랙리스트 작성 등으로 사회적 질타를 받게 되자 7월에 사내하청 74명의 정규직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규직화 명단에서 노조활동 적극 가담자 30여 명을 제외하고 하청업체 관리자를 포함하는 등 사내하청 노조를 부정하는 성격의 조치였다. 비정규직 노조운동을 태동시켰던 치열한 투쟁들이 2001년까지 대부분 패배한 가운데 2002년에는 이렇다 할 투쟁들이 거의 진행되지 않는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2002년은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는 시기였다. 특히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 공간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논란이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의제로 등장했다. 비록 조직적인 저항이 잠시 주춤해졌지만,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과 극심한 차별·억압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가 밑바닥부터 들끓고 있었다. 많은 비정규직 활동가들은 지난 투쟁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끌어내고 새로운 대중적 분출을 준비하면서 여러 비정규직 현장에서 수면 아래의 조직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2년에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겉으로는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사회적 조건 성숙이나 주체적 준비라는 측면에서 속으로는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2) 2003~07년 비정규직 투쟁 2003년 이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한국 사회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조업과 건설업을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새로 비정규직 노조들이 결성됐고 대중적인 투쟁들이 펼쳐졌다. 새롭게 등장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그 규모와 범위, 파급력에서 이전 시기를 훨씬 뛰어넘었다. 새로운 주체들이 나타나자 그동안 힘겹게 조직을 유지해 왔던, 주로 특수고용과 공공부문의 직접고용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기존의 비정규직 노조들도 새롭게 활기를 띠었다. 지입제 차주로서 화물차를 운행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2002년 전국운송하역노조 산하 화물연대를 결성한 뒤 2003년 5월 도로비 인하, 유가 인하, 지입제와 다단계 알선 폐지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화물연대 파업은 전국의 물류시스템을 마비시키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노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화물연대는 하반기에도 다시 파업에 나섰지만 노무현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패배했다. 2003년 11월 노무현 정권이 화물연대 파업에 대처할 방안으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에 업무개시명령 제도 도입 안을 제출하자 여야 합의로 신속히 법제화됐다.[4] 2003년에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울산공장, 금호타이어,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 사내하청 노조들이 속속 건설됐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과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등에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의 분신자결은 그가 남긴 생생한 유서와 함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어차피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럽지 않다. 노동자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현대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부패, 착취, 비리. 직영 노동자들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대하는 행패와 멸시. 고위관리직 이사부터 하위관리직 팀장 반장까지 안 썩은 곳이 없고 상납이라는 추악한 고리에 향락접대에 연결 안 된 ××들 없다. 윗물이 그러하다 보니 협력업체 총무경리까지 노동자임금 도둑질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현실 피해자는 하청노동자다. 상납되는 검은 돈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를 빨고 돈 잔치를 하고 있고, 향락 접대비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땀과 피로 술 퍼마시고 ××하는 것이다. … 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이고 하청 비정규에게 생색만 내는 노동법이다. 현대 어용 노동조합은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이고 노동자는 하나다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열악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떡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 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손가락이나 빨아라라는 차별경영을 비통한 마음으로 당하면서 또 한 번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 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했다. … 현대 ××공장 사내 복지시설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다. 그 많은 복지시설은 직영노동자만 사용한다. 직영노동자 탈의실과 하청노동자 탈의실에서부터 소외감을 갖는다. 하청노동자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한여름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그늘 찾아 헤맨다. 한겨울 점심시간 쉴 곳이 없어 바람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직영노동자는 시설 잘되어있는 건물내부에 휴식을 취한다. 이렇듯 직영노동자에 비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을 받는다. 직영노동조합 단체협약을 보면 백가지도 넘는 복지혜택, 문화의료혜택, 자녀교육혜택, 주거혜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해진 시급, 일급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90%가 불법파견근로현장에 투입되다 보면 직영노동자에게 작업지시 받는다. 작업하기 더럽고 어렵고 힘든 곳은 하청노동자에게 투입시킨다. 이토록 비인간적이고 불합리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현대 ××공장 현실이다. 직영노동자 몇백명 중에 한두 사람은 인간적인 사고와 공동체의식, 인격적으로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 측은지심 시각으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직영노동자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리고 하청 비정규직 현실이 변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현대 ××공장 외부 일반적인 사람들, … 이 나라 지도자들, 법을 집행하는 고급공무원들, 노동자 바람박이를 해줘야할 노동부 공무원들도 몰라서 안하고 알아도 안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이 이렇다 하여 나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이 나라가 요만큼이나 민주화가 된 것은, 세상이 쥐꼬리만큼 변하게 된 것은, 이 사회 구조를 아파하고 정직한 노동의 대가가 안 주어지는 이 현실에 약자가 보호받아야 되는 법이 외면한 현실에 … 그럼에도 약해지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모순된 현실을 개선하고자 개혁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식 남겨두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고통스럽게 떠나버린 열사들이 있었기에 쥐꼬리만큼이나마 이 사회가 노동자의 환경이 변한 것이다. 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 나의 한 몸 불태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악질 협력업체 사장 박진용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발붙일 곳 없어야 한다. 부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5] 2004년 노동부로부터 1만여 공정 전체 불법파견 판정을 끌어낸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며 전면적인 투쟁에 나섰다. 1월 울산공장의 파업과 잔업거부 투쟁으로 100여명이 해고당하고 납치·폭행과 구속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도 울산·아산·전주를 합쳐 3천여 명의 조합원을 조직하여 9월까지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장기간의 대중적 투쟁을 펼쳤다. 2005년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 1천여 명은 정규직 노조의 임단협 투쟁이 마무리된 뒤에도 몇 차례 독자파업을 벌인 끝에 사내하청 노조로서는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해 냈다. 현대하이스코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 뒤 폐업을 빌미로 대량해고가 자행되자 집단 크레인 농성과 지역연대를 통해 해고자 전원복직, 72억 손해배상 청구 철회, 비정규직 노조활동 보장을 쟁취했다.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을 이유로 집단해고를 당한 뒤에도 불법파견 판정을 얻어내며 강고한 장외 파업투쟁을 벌였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동희오토, 기륭전자, GM창원공장 등에서도 사내하청 노조가 속속 결성되어 투쟁에 나섰다. 2004년 노조를 건설한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 1천여 명이 2005년 단체협약 체결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 맞서 원청 SK자본을 상대로 전투적인 가두시위, 고공 점거농성, 집단 상경투쟁 등 강고한 파업투쟁을 76일 동안 벌였다.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탄압을 이겨냈고, 노동조합은 뿌리를 내렸다. 울산건설플랜트노조는 울산 지역 석유화학 단지의 여천, 온산, 용연 공단 등지의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배관, 용접, 제관, 비계, 기계, 계전, 보온 등의 직종을 가지고 주로 정유공장과 석유화학 공장, 발전소나 제철소, 조선소 등 국가기관 사업 설비의 건설과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일을 한다. 대부분의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은 30년이 넘게 산업 역군으로 불리며 이 나라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일해 왔다. 그렇지만 이들의 근무 조건은 아직도 30년 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새벽밥을 먹고 현장에 오면 탈의실조차 없어 도로에서 옷을 갈아입고, 쇳가루와 시멘트, 가루가 날리는 난장에서 비가와도 피할 곳 없이 밥을 먹고 일했다. 그것도 자기 돈 내서 먹는 도시락이다. 하루 일 마치고도 땀에 젖은 몸 씻을 샤워장은 고사하고 세면장 하나 없이 살았다. 세면장은커녕 화장실마저도 제대로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근로계약서를 본 사람도 제대로 없고, 퇴직금을 제대로 받아본 이도 드물었다. 근로기준법상의 주휴나 연차, 휴가, 각종 수당 등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간혹 작업 중에 사고로 다치거나 죽게 되어도 제대로 된 산재 보상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 계속되는 단체 협상 요구를 무시하고, 업체들은 오히려 사찰과 해고, 노조 탈퇴서 등을 요구하면서 노동조합의 활동을 막고 있었다. 2005년 들어 노동조합은 업체들의 교섭 해태에 대응하기 위해 총파업을 결의하게 된다. 그러나 총파업 첫날부터 조합원에 대한 홍보 활동조차 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회사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완전 무장한 전투 경찰들이었다. 전투 경찰의 비호 아래 업체들은 파업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대체인력을 투입시키고 있었다. 대체인력 투입에 항의하는 조합원을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 계속되는 대체인력 투입과 이를 오히려 보호하고 있는 공권력의 폭력에 나날이 긴장감은 높아갔다. 법에 정해진 노동자의 정당한 단체 행동권마저 가로막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분노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리고 파업 대오로 모여드는 조합원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파업이 계속될수록 조합원들의 눈빛과 각오도 결연해져 갔다. … 플랜트 노동자들의 요구는 교섭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섭 대상인 업체는 자신들이 교섭 대상이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지도해야 할 노동부와 시청은 플랜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국내 거대 그룹인 SK의 압력과 건설노조를 무력화하려는 폭력적 공권력에 있었다. … 공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은 더욱 강한 단결력으로 파업 대오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권력은 초반부터 물리력을 통한 파업 와해 작전을 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노골적인 폭력으로 노동조합을 죽이려 들었다. … 계속되는 SK의 교섭 해태와 본질을 왜곡하는 언론의 호도 속에 파업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SK 본사 앞으로 두 차례에 걸친 상경 투쟁을 진행하며 SK의 노동 탄압을 알려내고 있던 노동조합은 마침내 서울 마포 SK건설 타워크레인에 점거 농성을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전국적인 여론 형성을 위한 결단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1일 울산 SK 공장 내 베셀 타워를 다시 점거하게 된다. … 연이은 4월 1일 남부서 폭력 사태, 4월 8일 전 조합원에 대한 시청 폭력 연행, 4월 28일 노동부 앞 폭력 진압, 그리고 5월 5일 남부서에서의 가대위에 대한 폭력 행위까지 노동조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탄압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장을 하고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 5월 17일 단위 노조의 어려운 한계 속에서도 울산 플랜트 노동자들의 파업을 엄호하기 위해 현장의 작업을 멈추고 달려온 여수와 포항, 전남동부경남서부 플랜트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연대는 지역과 단위노조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질적인 연대파업을 만들어냈다.[6]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2004년 건설운송노조 산하 덤프연대를 결성하여 2005년 최대 1만여 명이 참여한 파업투쟁을 세 차례나 벌였다. 산업인력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정규직 전환 및 차별 시정을 요구하며 66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철도공사의 자회사에 고용돼있던 KTX 승무원들이 2005년 철도노조에 가입한 뒤 2006년 3월부터 철도공사 직접고용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철도공사, 국회, 국가인권위원회, 서울시장 후보 선거사무소들에 대한 점거농성, 서울역 단식농성, 서울역 고공농성 등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이어나간 KTX 승무원들은 2008년 9월 서울역 연좌시위를 마지막으로 대중투쟁을 마무리하고 법률투쟁으로 전환했다.[7] 대구경북건설노조는 2006년 적정임금 지급,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 상습 임금체불 근절 등을 요구하며 6월부터 35일간 파업을 벌였다. 포항건설노조는 주5일제 시행과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를 요구하며 7월부터 83일간 파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포스코의 대체인력 투입에 반발하며 8일 동안 포스코 본사 점거농성을 벌였다. 2007년 7월 1일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이랜드그룹이 계약직의 외주화를 추진하자, 그에 맞서 이랜드일반노조가 6월 30일 홈에버 상암점 점거를 시작으로 510일간 파업을 이어나갔다. 같은 이랜드그룹에 맞선 뉴코아노조는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면서 이랜드·뉴코아 공동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는 원청과의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8월말 9일간의 공장점거 파업을 전개했다. 비정규직 노조들은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전비연)라는 전국 조직으로 결집하여 단위노조의 투쟁을 넘어 사회정치적 투쟁에 나섰다. 비정규직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노조를 유지하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 자체의 문제점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비정규직 노조 간 ‘품앗이 투쟁’이 차츰 목적의식적으로 법제도적 탄압 돌파를 위한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조직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해갔다. 이런 노력으로 2000년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서울지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가 구성되었고, 2002년 민주노총에 특수고용대책회의가 구성되었다. … 2003년 8월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 구성을 위한 첫모임이 진행되었다. … 2003년 9월 27일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가 발족했고, 첫 번째 주요 사업으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2003년 10월 26일 열린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당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본부장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이렇게 하여 노동법상 근로자성 인정을 공동요구로 하는 특수고용 노조, 원청의 사용자책임 인정을 공동요구로 하는 간접고용 노조, 올바른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공동요구로 하는 공공부문 노조 등 법제도 개선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비정규직노조 연대운동의 질서가 형성되고,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4년 1월 30~31일 열린 비정규직 간부수련회를 통해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준)이 출범하였다.[8] 전비연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2004년 9월 열린우리당 점거농성, 11월 국회 타워크레인 점거농성 등 ‘비정규직 관련 개악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 쟁취를 위한 투쟁’을 앞장서 이끌면서, 2004년 11월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관련 총파업에 나서도록 끌어내는 등 사회적 영향력과 운동적 위상을 빠른 속도로 강화해 나갔다. 2005년 10월 16일, 6만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비정규직 노조들의 연대체인 ‘전국비정규직노동조합연대회의’가 정식 발족했다. 전비연은 2006년 8월 25일 사내하청노조 공동 파업을 조직하는 등 비정규직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3) 2003~06년 현대차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3년, 현대차에서 비정규직이 스스로 노조를 설립했다. 발단은 3월 19일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월차를 쓰려고 했다가 하청업체 관리자에게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공격당하는 식칼테러를 당한 사건이었다. 같은 업체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비공인파업으로 아산공장이 중단됐고, 28일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아산공장사내하청지회가 결성됐다. 아산공장의 불길은 생산의 주력인 울산공장으로 넘어왔다. 4월 28일 울산공장의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이라는 유인물을 뿌리면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주체적 단결을 호소한 게 출발점이 됐다. 세계 초일류 기업, 그러나 기계만도 못한 하청 노동자! 세계 초일류 기업을 자처하고 나선 현대자동차는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하며 눈부신 질주를 하고 있다. 그러나 몇 십억의 흑자를 내는 현대자동차 내에는 언제 짤릴지 모르는 고용불안과 비인간적 대우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하청 노동자들이 있다. 하청이기 때문에 법에 다 나와 있는 노동자의 권리조차도 무시된다. 연차 사용은 그저 꿈이나 꿀 수 있는 것이고 월차 하나 쓰는데도 아쉬운 소리에 온갖 눈치 봐야 한다. 똑같은 공정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직영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안전장비를 지급받지 못한다. 작업 중에 다쳐도 쉽게 산재신청을 내야겠다는 하청 노동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업체와 싸워 산재를 신청했다 하더라도 미운 털 박혀 해고 대상이 되거나 어디 구석으로 전환배치되기 십상이다. 하다못해 기계도 고장나면 기름칠하고 보수하는데 우리 하청 노동자는 쓰다가 고장나면 버리는 소모품과 다름없는 취급을 당한다. 명절에는 그저 불효자가 되어 고향길에 오르고, 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공정에서 뼈 빠지게 일해도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40%도 되지 않는다. 2·3차 업체 하청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석면을 다루는 공정에서 일을 하더라도 환풍시설 하나, 몸을 씻을 시설 하나 없다. 딱 최저생계비만큼 지급되는 임금은 근속연수가 2년이 되어도 인상될 줄 모르며, 일년 전에 지급한다던 안전화는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다. 말만 만근이지 만근수당은 어느새 철야만근수당이 되어 정취를 하더라도 철야를 하지 않으면 지급되지 않는다. 법에도 나와 있다는 취업규칙은 구경조차 한 일이 없다. 왜 우리가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가? 명절 때면 고향에서 만난 선후배나 어르신들이 “어디에 다니냐”고 물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저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에 다닙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하청 노동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이 적당한 말로 얼버무리거나 그도 아니면 현대자동차에 다닌다고 할 것이다. 왜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는 걸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비참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우리 하청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은 로또복권 당첨률에 맞먹는 본청의 신규사원 채용공고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으로,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 바꾸어 낼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여, 이제 우리도 인간임을 선언하자! 하청노동자에게 가해지는 부당함, 죄인 아닌 죄인으로 숨죽이고 고개 숙이며 살아온 많은 날들. 이러한 굴레들은 그저 앉아서 기다린다고 바뀌지 않는다. 하청 노동자 스스로 우리의 권익확보와 노조건설의 일념으로 일어설 때만 우리는 당당한 인간으로,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은 힘이 없다. 그러나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싸워 나간다면 하청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부당함에도 맞설 수 있다. 아산 하청 노동자들은 당당하게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지난 3월 19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는 월차 한 번 쓰겠다던 하청 노동자에게 폭행이 가해지더니 급기야는 발목을 칼로 긋는 천인공노할 식칼테러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단순히 어느 또라이같은 관리자의 행패가 아님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아산의 하청 노동자들은 월차라도 한 번 쓰려면 병원 진단서에 시말서·반성문에 온갖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하청’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한 권리들도 행사하지 못한 채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세화산업 노동자들은 동료에게 가해진 테러에 분노하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만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모두들 일손을 놓고 우리도 인간이라며 목청을 돋구어 부당함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나의 업체에서 끊긴 컨베이어는 서서히 멈추어 갔고 아산공장 전체 가동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3월 28일 이 하나하나의 힘들이 모이고 모여 ‘아산 하청 노조’(금속노조 현대아산사내하청지회)가 만들어졌다. 사측에서는 온갖 협박, 공갈로 하청노조를 말살하려 하지만 아산의 하청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피와 땀으로 만든 노동조합을 지켜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 아산에서의 하청노조 건설은 우리 하청 노동자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아산 하청 노동자들이 보여준 그 희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자! … 비정규직도 인간이라고 우리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숨죽여 기다려 왔는가! 바로 지금이야말로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떨쳐 일어설 때이다. 앞장서 나서는 것은 늘 외롭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동료들의 눈빛 속에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길들을 보라! 87년 희생을 각오하고 앞장서 투쟁하는 자들이 있음으로써 오늘날의 정규직 노조가 설 수 있었다. 우리의 힘을 모아 하청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이제 더 이상 하청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님을, 기계에 속한 부품이 아님을 당당하게 보여주자![9] 5월 2일, 8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투쟁위원회’(비투위)를 결성했다. 비투위 결성 두 달 만인 7월 8일, 127명의 발기인이 모여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조합’을 설립했다. 설립총회를 마친 비정규직노조는 일부 정규직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합원 가입을 받았는데, 24시간 만에 약 500여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노조 건설에 나선 비정규직에게 현대차노조가 준 선물은 비정규직 노조 건설이 “현자노조 결정에 반하는 사항”이므로 “심각한 우려와 함께 … 재고해 줄 것을 강력 희망하며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노조홍보물의 배포였다.[10] 현대차노조의 입장이 현장에 알려지자 비정규직노조 가입 흐름은 바로 중단됐다. 현대차노조가 내세운 명분은 노조 규약을 개정해서 비정규직이 현대차노조에 ‘직가입’할 수 있게 하겠으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정규직의 독자노조 결성을 방해하는 데 무게가 실린 무책임한 약속이었다. 실제로 비정규직노조는 현대차 단일노조 건설을 추구하는 한시적인 노조임을 규약에 명시하여, 비정규직노조 건설이 ‘직가입’과 상충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반대로 현대차노조는 2006년 6월 산별노조 전환 전까지 ‘직가입’을 위한 규약 개정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산별노조로 전환한 뒤에도 금속노조의 공식 방침인 ‘1사1조직’에 따른 조직편제(비정규직지회와의 통합)를 세 차례나 부결시켰다.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의 독자적인 대규모 조직화를 두려워했다. 언제든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 있으려면, 비정규직이 무기력하게 미조직 상태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차에서는 신차 투입으로 사업부 차원에서 맨아워 협상을 할 때마다 거의 매번 수십에서 수백 명의 사내하청이 정규직 노사의 합의에 의해 정리해고 당해야 했다.[11] 이런 일이 사내하청 대규모 투입 이후 사업부를 번갈아 가며 1년에 한두 차례씩 꾸준히 발생했으며, 심지어 2010년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 이후인 2011년에도 발생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비정규직노조는 2004년 불법파견 진정을 주요 사업의 하나로 추진했다. 2003년 12월 금속연맹 정기대의원대회에서 2004년 상반기 주력사업으로 결의된 ‘릴레이식 불법파견 진정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을 진정한 이후 이를 입증하기 위해 현장 자료들을 광범하게 수집, 제출하는 등 치열한 노력을 펼쳤다. 현대차노조도 나중에 불법파견 진정에 합류했다. 비정규직노조가 제기한 불법파견 판정이 유력해지자 회사는 다시 한 번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현장에서 제거하려는 계략에 나섰다. 2004년 7월 회사와 5공장 대의원회는 42개 공정을 직영화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고용보장 또한 합의했지만, 회사는 이를 악용했다. 42명 정리해고자 명단에 안기호 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활동가들을 다수 포함시킨 것이다. 7월 23~24일 결국 정리해고가 단행되자, 해고당한 조합원 11명은 7월 27일부터 산타모 식당 앞에서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불법파견 판정을 눈앞에 두고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제거하려는 회사의 계략임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규직 활동가들도 이 투쟁에 점점 공감하고 나섰다. … 기나긴 추석휴가를 무사히 돌파해 냄으로써, 5공장 비정규직 해고자들의 투쟁은 승기를 잡았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투쟁은 어느덧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시선을 모으는 투쟁이 되었다. 10월 5일에는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직접 지지 방문에 나서기도 했다. 마침내 10월 7일, 회사와 현대차노조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면서 5공장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비정규직노조 안기호 위원장의 단식투쟁이 38일차에 이른 날이었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불법파견 판정 앞에서 비정규직노조의 주력을 지켜냈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만일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통용됐다면, 회사는 이후 불법파견 해법이랍시고 소수 공정의 정규직화를 내걸고 수시로 비정규직 노조간부들을 정리해고하는 탄압을 자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5공장 비정규직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회사가 더 이상 그런 술책을 쓸 수 없게 차단해 냈다는 의미가 있었다.[12] 결국 12월 16일, 노동부가 현대차 울산공장 101개 업체 7천 175명, 아산공장 12개 업체 1천 109명, 전주공장 12개 업체 950명 등 현대차 국내 생산공장 세 곳 모두에서 125개 업체 9천 234명이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다.[13] 거대 자본인 ‘현대’가 현대자동차 산하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전원 불법파견 형태로 고용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 이번 판정결과는 민주노총에서 주장해온 제조업 사내하청은 곧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것이며, 현대자동차가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노동자 1만여 명을 불법적인 파견근로 형태로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초과착취와 차별을 자행해왔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 민주노총은 지난 1998년 이른바 ‘파견법’이 시행된 이후 현장에서 도급을 위장한 무수한 불법파견이 발생하고 있다고 제기해왔다. 우리는 그동안 이를 모르쇠 해오던 행정관청이 뒤늦게 불법의 확인과 시정에 나서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행여 이러한 노동부의 움직임이 파견업종 전면 확대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파견법 개정안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 파견업종 전면 확대와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정부의 비정규 관련 법안은 즉시 폐기되어야 한다. … 민주노총은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현대자동차는 이미 법적인 지위는 사실상 정규직이고, 현대자동차의 노동자인, 불법파견으로 판정 난 전원을 즉각 직접고용·정규직화 하라![14]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2005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해나감으로써 비정규직 조직화의 물꼬를 새롭게 트고자 했다.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화를 내걸고 1월 18일부터 파업농성을 벌이며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다. 1월 18일 5공장 원·하청 노동자 200여 명이 출근투쟁에 참여했다. 출근투쟁을 마친 비정규직 대오는 의장52부 대흥기업·평원산업 탈의실로 이동하여 파업동참을 설득했다. 의장52부 비정규직들은 이미 그 전날 방문 때부터 파업에 합류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도장5부 50여 명, 의장52부 50여 명, 의장51부 중심의 기존 선봉대 20여 명 등 총 120여 명이 파업을 결행하기로 결의가 모아졌다. 탈의실에서 농성투쟁이 시작됐다. 처음에 합류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원·하청 관리자의 탄압을 뚫고 속속 결합하면서 파업대오는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비정규직 150여 명이 전격 파업에 들어가자 52라인은 가다서다 하다가 10시경 완전히 멈춰 섰다. … 5공장이 전격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공장 비정규직들은 20일로 예정됐던 잔업거부를 이틀 앞당겨 18일부터 바로 돌입했다. 1·2·3공장을 망라해서 주간조 420명이 잔업거부에 동참했다. 잔업시간에 1·2·3공장 라인 또한 끊어졌다. 오후 6시 5공장 정문 앞에서 잔업을 거부한 비정규직 대오들이 집결하여 집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대오는 5공장 농성장으로 합류하여 전체 결의대회를 가졌다.[15] 18일 오전 8시부터 5공장 의장부 업체 탈의실에서 시작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 80~90명으로 시작된 파업결의대회가, 원하청 관리자의 탄압을 뚫고 속속 결합하는 주간조 동지들로 결국 150여 대오로 불어났을 때, “우리 비정규직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투쟁의지로 탈의실 전체가 후끈 달아올랐다. 곧이어 150여 노동자들은 4개 조로 나뉘어 이번 파업투쟁의 규율을 스스로 정하고 파업투쟁 승리를 위한 실천방침 토론을 전개했다. 각자 자신의 조에 명칭을 정했는데, 이름하여 ‘불사조’, ‘사생결단조’, ‘무적탱크조’, ‘천하무적조’! “바지사장 찢어놓고 우리 권리 우리가 찾자!” “빡씨게 싸워서 우리 모두 승리하자! 무임승차 하지말자!” “눈치 보지 말자! 싸울 땐 싸우자! 정정당당하자!” 각자 특색 있는 구호로 무장하고 조별 깃발을 제작하며 ‘이런 게 바로 노동자들의 힘이구나!’ 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규직 대소위원들 또한 5공장 비정규직 동지들의 투쟁에 지지엄호를 결정하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5공장 파업을 선봉으로 전 공장으로 확산시키고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기필코 전원 정규직화 쟁취하자!![16] 그러나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을 외면했다. 대체인력 투입을 용인하여 비정규직 파업이 무력화되는 것을 방치했고, 관리자·경비들이 수백 명씩 공장 안에 몰려다니며 비정규직에게 집단 폭행을 하는 것도 방치했다. 현대차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일시적으로 관계를 개선하고 원하청 연대회의를 결성하여 6월에 공동의 조직화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울산·아산·전주 비정규직노조들의 조합원수가 울산 2천 명 등 전체 3천 명 수준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8월에 비정규직노조가 투쟁에 나섰을 때 현대차노조는 다시 회사의 폭력적 탄압을 방치했다. 2005년 1월 비정규직노조가 5공장 농성투쟁을 시작한 직후부터 회사는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해 왔다. 3월부터는 정규직에게까지 폭력적 노무관리를 확대해 왔다. 회사의 폭력은 너무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면 잠시 주춤해졌지만, 얼마 못 가서 바로 재개되는 양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회사가 전례 없이 폭력적 노무관리를 전개하자, 정규직 현장 활동가들은 이를 강력히 규탄했다. 다양한 단위에서 출근투쟁을 조직했고, 천막농성을 전개했다. 본관 앞 열사광장에 농성천막 6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런데 회사의 폭력은 8월 25일 비정규직노조의 파업 직전에 극점에 이르렀다. 비정규직노조 파업의 기세를 꺾기 위한 의도된 폭력이었다. 8월 24일 밤 9시부터 25일 새벽 7시까지 3공장의 2차 하청업체 현대세신과 신한·계림 조합원들 그리고 노조간부들에게 회사는 관리자들을 통해 집단폭행·성추행·납치 등 일련의 폭력을 자행했다. 회사는 그 와중에 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을 납치하여 집단폭행하고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회사의 극악한 폭력은 다시 한 번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17] 마침내 불법파견 철폐 투쟁 과정에서 해고당한 비정규직(류기혁)이 자결하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졌으나, 그 상황에서조차 현대차노조는 열사니 아니니 하는 논쟁을 일으키며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연대를 거부했다.[18] 비정규직노조는 100명 이상의 해고자가 발생한 2005년 투쟁에서 아무 성과를 얻지 못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2006년에도 투쟁을 이어갔다. 비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 철폐와 단체협약 쟁취를 내걸고 독자적인 임단협 투쟁에 나서 생산라인을 멈춰 세우는 파업을 여러 차례 펼쳤다. 그러나 중재를 하겠다고 나선 현대차노조는 비정규직노조 지도부가 투쟁을 유보한 채 스스로 요구안을 대폭 삭감하고 결국 알맹이 없는 합의에 이르도록 유도했다.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이 강력 반발했고, 비정규직노조 위원장의 사퇴와 비상대책위 구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비정규직노조 비대위가 재파업을 추진하자 현대차노조가 이를 주저앉히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허리가 꺾인 비정규직노조의 파업은 성사되지 못했다.[19] 2005년의 불법파견 철폐투쟁과 2006년의 독자 임단투가 모두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2007년 1월 검찰이 현대차의 불법파견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20] 많은 조합원들이 노조를 떠나 다시 500명 수준으로 돌아갔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대중투쟁 동력을 상실한 가운데 최소한의 집행력도 유지하기 어려운, 깊은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비정규직은 1987년 이전 노동조합이 없던 시절 노동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그런 비정규직이 급격히 증가하여 노동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2000년대 초반은 민주노조운동에게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한편에는 노동조합의 문호를 비정규직에게 과감히 개방하는 길, 다시 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위해 기존의 민주노조운동이 역량을 집중하여 적극 지원하고 엄호하는 길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기존 조합원의 지위를 지키는 데 몰두하는 길, 다시 말해 비정규직에 대한 자본의 초과착취에 눈감는 또는 심지어 협력하고 담합하는 길이 있었다. 불행히도 후자의 길이 더 일반적인 양상으로 전개됐다. 현대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자의 길을 열고자 하는 흐름이 없지는 않았지만, 후자의 힘에 크게 밀렸다. 다만 그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노동자 총단결의 길을 열고자 하는 흐름은 비록 세가 밀리긴 했지만 끊임없이 노력했고 도전했다. 덕분에 노동조합은 일방적으로 후자의 길만을 걷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정규직노조는 늘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노골적으로 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함께 피땀 흘리고 눈물 적시는 공동의 투쟁 주체이지는 못했다. 2003년부터 본격화된 현대차 비정규직의 단결과 투쟁은 바로 그런 조건 위에서 전개됐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하루를 사측의 협박과 조롱 속에서 보내야 했던 류기혁의 모습은 대량해고, 징계,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각종 폭력에 직면해야 했던 비정규직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다. 한 때 민주노조운동 전반에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그 시절 현대차 비정규직의 투쟁은 결국 패배했다. 류기혁의 죽음은 그 고통스런 패배의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비정규직노조는 점점 사그라졌고 100명에 가까운 해고자를 남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21] 현대차에서 비정규직 운동은 정규직 운동의 15년 역사를 이어받지 못한 채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수의 비정규직은 초보적인 계급의식도 갖추지 못한 채 한 발 떨어져 눈치만 살폈다. 비정규직 운동은 비정규직의 절실한 염원을 담아내긴 했지만, 정규직의 한계를 딛고 넘어설 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다. 계급적 단결의 대의를 저버린 정규직의 모습이 튀어나올 때마다 비정규직은 결정적으로 흔들렸고, 결국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4) 2004~06년 비정규직 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싼 대결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비정규직 입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을 둘러싸고 치열한 계급 간 정치투쟁이 전개됐다. 한편에는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비정규직 권리보장과 전체 노동자의 온전한 노동3권을 요구하는 민주노총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자본가들을 대표하여 비정규직 확산과 전체 노동자의 노동권 약화를 도모하는 노무현 정권이 있었다. 2003년 노무현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노사관계제도 개선’을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5월 노동부가 노사관계학자 15명을 위촉해서 ‘노사관계제도 선진화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연구위원회는 9월 중간보고와 12월 최종보고를 통해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을 내놓았다.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동관계법 전반에 걸친 34개 과제로 구성됐는데, △노동자 파업권 약화 △사용자 대항권 강화 △정리해고 요건 완화 △부당해고 금전보상 허용 등이 그 요지였다. 9월 중간보고가 나오자 노사정위원회가 10월부터 민주노총의 불참 속에 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했다.[22] 그러나 2004년 4월 한국노총 지도부가 자신들이 지지한 녹색사민당의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논의가 중단됐다. ◎ 2004년 비정규직 입법 전선의 형성 2004년 2월 출범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노사정 대화를 통한 사회적 교섭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다만 이수호 집행부는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면서 △노사정 대등 운영 △기구의 독립성과 합의사항 이행 △산업·업종별 협의 틀 마련을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6월 4일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의 대표자가 참여하는 1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7월 6일 2차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노사정위원회 개편방안에 대해 △노사정위원회 성격 △논의의제 △명칭 △참여주체 △업종별 협의회 등 5개 핵심 쟁점을 놓고 집중 논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편 7월 12일, 민주노총은 △상시업무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사용 제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 △파견법 폐지와 불법파견 근절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등을 요지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민주노동당[23]을 통해 국회에 제출했다. 이번 입법안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비정규노동자 문제 해결을 위해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 사용의 억제와, 부당한 차별의 철폐, 권리보장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 … 1) 상시업무 정규직화와 비정규직 사용제한 … 2003년 현재 전체 노동자의 55.4%에 이르는 782만명이 비정규직임 …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 … 따라서 비정규직 고용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함. 이를 위해서는 ‘상시적으로 필요한 업무’는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경우에만 비정규직을 사용하도록 제한해야 함. 즉, △출산·육아 또는 질병·부상 등으로 발생한 결원을 대체할 경우 △계절적 사업의 경우 △일시적, 임시적 고용의 필요성이 있는 경우 등으로 비정규직(임시직) 고용의 이유를 근로기준법에 명문화 함. [근로기준법 제23조(근로계약기간) 개정] 2) 동일노동 동일임금 보장과 최저임금 현실화 … 2003년 현재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51%임. 다른 노동조건의 차별은 더욱 심해 퇴직금, 상여금, 연장근로수당 등이 적용되는 비정규직은 10~16%에 불과함. 나아가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의 경우도 30% 미만의 비정규직만 적용되고 있음. 비정규직이 당하는 이러한 부당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절실함. 구체적으로는 △근로형태의 차이를 이유로 고용 및 근로조건상 차별대우 금지 △동일 사업(사업장) 내의 동일가치 노동에 대하여 동일임금 지급 등을 명문화함. [근로기준법 제5조(균등처우) 개정] 3) 파견법 폐지와 불법파견 근절 … 1998년에 제정된 파견법에 따라 그 이전까지 불법이었던 파견용역업체나 도급업체 등에 의한 중간착취를 합법화하고, 도급·사내하청 등의 이름으로 불법파견을 양산하고 있음. 또한 사용자들이 노동법상 사용자의 책임을 결정권한이 없는 파견업체에 떠넘겨 회피함으로써 파견업체(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노동법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음. 따라서 파견제를 폐지하고 불법파견을 근절하고 사용사업주가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되어야 함. 이를 위해서 △현행 파견법의 폐지 △불법파견 시 해당 노동자 직접고용 △파견과 도급의 구분 기준 강화 △사용사업자의 노동법상 사용자 책임 명시함.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폐지 및 직업안정법 개정] 4)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 …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이 인정되지 않거나,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사용자들이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협약을 부정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음. 임금·노동조건의 보호와 단결권·단체교섭권·쟁의권 등 노동3권이 부정되어 열악한 노동조건과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 … 따라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의 ‘근로자 정의’ 규정에서 독립사업장 형태의 노동자를 추가해 명문으로 규정함. 아울러 … 노조활동 등을 이유로 한 ‘도급계약 해지’를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함.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개정][24] 7월 중순, 노동위원회가 서울지하철, 도시철도, 인천지하철, LG정유 등에 잇따라 직권중재를 결정하면서 파업을 불법으로 내몰았다. 21일,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이 “직권중재와 구속 위협에 처해 있는 조합원들과 이라크 파병강행을 막아내지 못한 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삭발을 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30일 민주노총은 8월 6일로 예정됐던 3차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무기한 유보하자”고 각 단위에 통보했다. 8월 17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천정배가 노사정위원회를 방문해 “노사정위에서 결정된 사안은 국민적 합의로 인식해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25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조속히 재개하고 9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을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31일 열린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의 상정 시기를 2005년 1월 정기대의원대회로 연기했다. 한편, 2004년 9월 10일 노무현 정권이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이름 아래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기간제법 제정안은 기간제 노동자를 3년 이내의 범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파견법 개정안은 파견 기간을 초과한 파견노동자는 직접 고용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기존 ‘고용의제’ 조항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고용의무’로 완화하는 내용이었다. 기간제 근로자 사용기간을 3년 이내로 제한하고, 3년을 초과하여 사용할 경우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기간 만료만을 이유로 고용종료 금지 … 파견기간을 기간제 근로 사용기간에 맞추어 최장 2년에서 최장 3년으로 연장 … 현행 고용의제 규정을 고용의무 방식으로 전환하되 불법파견에 대해서도 고용의무 적용[25] 16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전비연) 대표자 15명이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장실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전비연 대표자들은 노무현 정권이 제출한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비정규직 확산법안’이라고 규정했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법안을 반대하며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에 들어간 것은,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내걸고 실제로는 비정규직을 대폭 확대하려던 노무현 정권의 위선적 구상에 상당한 타격을 안겼다. 1주일 동안 점거농성을 이어간 전비연 대표자들은 ‘비정규직 확산법안 철회와 비정규직 권리입법 쟁취’를 주장하며 △파견법 철폐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비정규직 사용제한과 상시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 △특수고용 노동자에게 노동법·노동3권 보장 △원청 사용자성 인정 △이주노동자 노동허가제 실시를 5대 입법요구로 내걸었다. 전비연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21일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 철폐를 위해 11월 하순에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심상치 않다. 11월 노동계 총파업을 앞둔 지금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10월 10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양대노총 위원장은 분노로 치를 떨며 ‘결사투쟁’을 외쳤다. 바로 다음날,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총파업은 실정법 위반이다.” 이대로 가면 노사정 대타협은 고사하고 ‘대파국’이 불을 보듯 뻔하다. 으레 그렇듯이 경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날린 건 정부였다. 그런데 그 ‘한방’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9월 10일 노동부가 발표한 소위 ‘비정규보호법안’이 그것이다. 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파견근로의 규제를 사실상 모두 풀어버리고 기간제 근로의 독소조항들도 가득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안은 순식간에 노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양대노총은 “말이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지 비정규직을 일상화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 하겠다는 의도”라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타협’을 말하던 이들의 입은 얼어붙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법안의 문구 하나 하나가 정부의 의지를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출범 당시부터 사회적 교섭을 강조해왔다. “노무현 정부에게는 최상의 노동계 파트너”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올 초부터 정부의 잇따른 직권중재와 파업에 대한 강경대응이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급기야 8월 31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다시 참석키로 한 중앙집행위의 결정을 뒤집는 일이 벌어졌다. 올 10월 노사정위 복귀가 점쳐지던 이수호 체제는 불과 몇 달 사이 총파업을 결의하는 ‘초강성노조’가 됐다. 사실 9월 초만 하더라도 정부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복귀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유화 제스처’가 나올 것으로 기대됐었다. 하지만 이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비정규법안으로 퇴로마저 차단당한 것이다.[26] 11월 26일,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되는 데 맞서 민주노총이 6시간 총파업을 전개했다. 전국에서 15만 7천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민주노총은 법안 통과 강행시 12월 2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전비연은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비정규직 확산법안을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12월 2일로 예정했던 총파업을 유보했다. 전비연의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도 종료됐다. ◎ 2005년 사회적 교섭과 어설픈 타협안 2005년 1월 20일,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는 예정대로 정기대의원대회에 ‘사회적 교섭방침’ 안건을 상정했다. 1998년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해 준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게다가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은 당연하게도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대의원대회는 결국 유회됐다. 이수호 집행부는 2월 1일 대의원대회를 재소집해 같은 안건을 다뤘다. 격렬한 논쟁 끝에 토론을 종결하고 표결을 선언한 순간, 대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 담합 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가 단상을 점거하고 시너를 뿌렸다. 소화기 분말 가루가 자욱하게 분사됐고, 철제의자가 날아다녔다. 몸싸움도 벌어졌다. 언론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폭력으로 얼룩졌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3월 15일 대의원대회를 다시 소집했다. 이번에는 개회를 선언하기도 전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수호 집행부가 배치한 질서유지대와 전노투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교섭 반대파가 집단 몸싸움을 벌였다. ‘사회적 교섭 폐기’, ‘총파업 조직’, ‘이수호 위원장 사퇴’ 같은 구호들이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결국 이수호 집행부는 대의원대회를 생략한 채 3월 1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노사정 교섭 추진을 결정했다. 1. 대대무산에 대하여 - 대의원대회를 물리력으로 무산시키려는 행동은 어떠한 명분과 정당성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행위이다. 민주노총의 지도집행력 회복을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 2. 중집 결정사항 1)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하여 총파업에 돌입한다. 비정규 개악안 저지와 권리보장 입법쟁취를 위한 4.1 총파업 및 투쟁에 총력 집중한다. 2) 위원장의 책임 하에 비정규관련 노·사·정 교섭틀을 확보하고 전조직적 논의와 의견수렴을 통해 지도집행력을 회복한다. 3) 위원장의 책임 하에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해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최우선과제로 논의한다. 노사정교섭방침과 관련하여는 추후 적절한 시점에 대의원대회를 소집하여 승인여부를 결정한다.[27] 4월 1일, 민주노총이 비정규 개악안 폐기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전개했다. 13만 조합원이 참여했다. 그리고 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매개로 노사정 교섭이 재개됐다. 노·사·정 대표자회의 결정사항 1. 노사정은 오늘부터 시작된 국회 환노위 주관의 대화가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한다. 2. 앞으로 실무대화 진행은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원장이 주관한다. 3. 국회 환노위는 노사정 대화를 최대한 존중한다. 2005년 4월 6일 국회환경노동위원장 이경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용득,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수호,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이수영,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용성, 노동부장관 김대환[28] 이런 상황에서 4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 대해 의견서를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는 노무현 정권이 발표한 비정규직 확산법안과 민주노총이 제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환영의 뜻과 함께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특히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관련해 의미 있는 의견을 내온 국가인권위원회가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에 대한 의견서를 내놓았다. 우리는 이번 의견서가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대하여 핵심적이고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환영한다. 이번 의견서는 △임시계약직의 사유제한으로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사용을 제한하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으로 차별을 폐지하라는 것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중간착취와 불법파견을 낳고 있는 파견제의 폐지안을 내지 않은 점이나 정부가 안을 제출하지 않은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권 보장에 대한 언급이 없는 등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안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런 권고안의 방향과는 사뭇 다르다. ‘보호’를 위한 법안이라는 겉 표현과는 달리, △임시계약직(기간제) 사용 사유의 무제한 허용 △파견 비정규직의 전면 허용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규정 없는 실효성 없는 차별해소 방안 △비정규직 노동3권 외면 등을 기조로 하고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박탈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번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이 현재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입법안 논의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비정규노동자의 진정한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29] 이렇듯 ‘환영’과 ‘기대’의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민주노총은 자신의 입법요구를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 수준으로 사실상 축소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가 배제한 파견법 폐지와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권 보장은, 이후 민주노총의 요구에서 사실상 사라졌다.[30] 6월까지 진행된 노사정대표자 교섭은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결됐다. 8월 26일, 금속연맹이 불법파견 정규직화, 성실교섭,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며 6시간 정치총파업을 단행했다. 9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10월 6일,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경총이 노사정 교섭의 불씨를 다시 살려 보려고 ‘노사 대토론회’를 사상 처음으로 열었다.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발생한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으나, 최근 수년간 불균형 성장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부문과 내수부문, 성장산업과 사양산업 등 경제전반에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노동시장 영역에서도 정규직-비정규직간 격차 확대 등으로 실업자와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고통이 심화되는 등 구조적인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과거 수십 년 간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노사관계 영역에서도 ‘관 주도’의 관행과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가운데 사회적 대화 영역에서 노사 간의 자율적이고 직접적인 노력은 전무한 형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성숙도와 기업 및 노동운동의 성장과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사 모두에게 하나의 숙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특히 이 같은 주체적 측면의 취약성은 최근 노-정 관계가 깊은 갈등 국면에 빠지면서 사회통합의 주체 구실을 해야 할 노사정이 오히려 갈등과 대립의 문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올해 6월 이후 사회적 대화가 전면 중단되는 등 안타까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양대노총과 경총은 생산과 대화의 실질적인 핵심 주체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반성적으로 재인식하면서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과제들을 놓고 노(勞)와 사(使)가 직접 만나 해법을 찾아보자는 데 뜻을 같이 했고, 이 같은 취지에서 <노사 대토론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31] 그런데 6일, 민주노총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이 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로부터 5천만 원 금품을 수수한 게 드러나 긴급체포돼 7일 구속됐다. 이수호 위원장은 11일 ‘하반기 투쟁을 책임진 뒤 조기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으나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비판과 질타가 줄을 잇자 20일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민주노총은 전재환 금속연맹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 체제로 전환됐다. 11월 10일, 열린우리당 초청 노사대표자 간담회를 시작으로 민주노총·한국노총과 경총 사이에서 실무급 노사교섭이 진행됐다. 30일 마지막 노사교섭까지 결렬된 날, 한국노총이 정부 법안의 골격을 수용하는 최종안을 발표했다. 1안) 기간제 근로를 1년간 사용한 이후에 갱신되는 1년간은 사용사유를 제한하여 기간제 근로를 2년으로 제한하고 계속 근로기간이 2년을 초과하여 지속된 경우에는 즉시 고용의무를 부과함. 2안) 기간제 근로 계약이 반복갱신된 기간을 포함하여 계속근로기간이 2년을 초과하여 지속된 경우 그 근로 계약은 기간을 정하지 않은 무기근로계약으로 간주함.[32]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과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 확산법안에서 기간제 관련 핵심 쟁점은 ‘사용사유 제한’이냐, ‘사용기간 제한’이냐에 있었다. 민주노총은 엄격히 제한된 경우에만 기간제 사용을 허용하자는 것이었고, 노무현 정권은 보편적인 기간제 사용을 허용하되 사용기간을 3년 이내로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두 입장은 비정규직의 대대적 확산을 차단할 것이냐 아니면 촉진할 것이냐 하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고, 따라서 노·사·정의 사회적 교섭으로는 결코 좁혀질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노총이 내놓은 1안은 민주노총이 주장하는 사용사유 제한에 입각하되 그 적용을 첫 번째 1년에는 하지 않고 두 번째 1년에만 하자는 것이었다. 2안은 정부가 주장하는 사용기간 제한에 입각하되 그 시기를 3년에서 2년으로 단축하자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의 최종안은 형식적으로는 민주노총 안과 정부 안을 절충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정부 안의 손을 들어주면서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기 위한 안이었다. 1안은 사용사유 제한의 취지를 전혀 살릴 수 없는데다가 현실적이지도 않은 안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2월 1일, 녹색연합,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함께하는시민행동의 7개 시민단체가 ‘기간제 고용을 2년 한도로 허용하고 2년 후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비정규직법안 핵심쟁점에 대한 7개 시민단체 조정안’으로 발표했다. 한국노총 최종안의 2안과 같은 것이었다. 역시 민주노총을 고립시키기 위한 행보였다. 지난 1년 동안 민주노총은 투쟁동력을 단호하게 건설해 내는 대신 합리적 타협을 기대하며 사회적 교섭에 매달렸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맞닥뜨린 것은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민주노총의 고립이었다.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민주노총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고려하여 조속한 입법화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그 내용 역시 올바른 원칙하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입법 원칙 및 방향을 밝힌다. 1. 정부의 기간제 법안 폐기 및 기간제 엄격 사유제한 … 2.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 … 3. 파견법 철폐 및 불법파견 정규직화 … 4.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 노동3권의 보장 … 5. 간접고용에서 원청의 사용자책임 인정 … 지금 한국노총이 제안하는 수정안은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문제의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현 국면에서 민주노총과의 합의 없이 수정안을 제출하는 것은 공조파기를 의미한다. … 민주노총은 이번 국회에서 비정규권리보장입법을 반드시 쟁취하기 위해 12월 1일부터 진행되는 총파업을 포함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33] 12월 1일과 2일, 민주노총은 노사교섭 결렬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단행했다. 1일에는 6만 명, 2일에는 2만 명이 참여했다. 5일부터 7일까지는 확대간부 파업을 하면서 3천 명의 상경대오를 조직하여 국회·경총·전경련 앞에서 ‘비정규 악법 국회통과 저지 및 비정규 입법 쟁취를 위한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8일, 다시 총파업을 단행해 6만7천 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 논의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기간제 사용사유를 기존 4개에서 10개로 대폭 확대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1. 출산 육아 또는 질병 부상 등으로 인해 발생한 결원을 대체할 경우 2. 계절적 사업의 경우 3. 사업의 완료 또는 특정한 업무의 완성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4. 그 밖에 일시적·임시적 고용의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5. 휴직·파견 등으로 결원이 발생해 당해 근로자가 복귀할 때까지 그 업무를 대신할 필요가 있는 경우 6. 학업·직업훈련 등을 이수함에 따라 그 이수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 7. 전문적 지식·기술의 활용이 필요한 경우와 정부의 복지정책·실업대책 등에 의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우 8. 수출 주문의 예외적 급증이 발생한 경우 9. 기업의 일시적 업무량이 증가한 경우 10. 안전조치를 위한 긴급한 작업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34]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 제출은 민주노총 지도부와 긴밀히 교감한 결과였으며, 한국노총과 사전 조율을 거친 것이었다.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을 둘러싸고 막바지 교섭이 진행 중이다. 민주노총은 그동안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항으로 기간제 사용시 사유제한과 불법파견 고용의제 등을 계속 주장해왔다. 이번에 입법을 하기 위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8일 오전 8시 30분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의 초청으로 양대노총 위원장은 간담회를 갖고 사용사유 제한에 대해 논의하였다. 민주노동당은 사용사유 제한의 원칙은 지키되 그 범위를 10가지로 제한하는 수정안을 제안하였다. 한국노총은 이에 환영의 의사를 표하였고 민주노총 역시 민주노동당과 양노총의 동일한 입장으로 제시되는 것이 현 시기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제 정치권에서 답할 차례이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어렵게 의견을 단일화해서 제안한 만큼 비정규직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한다면 당리당략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민생을 위한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35] 사회적 교섭 테이블에서 궁지에 몰린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하겠다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총파업은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초라한 수준이었다. 국회라는 교섭 테이블에 다시 돌아온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수정안을 통해 어설픈 타협안을 내밀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의지박약과 무기력을 자인하는 어설픈 타협안은, 노무현 정권도 자본가들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민주노총의 어설픈 타협안은 그동안 주장해 온 사용사유 제한의 정당성을 스스로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권의 사용기간 제한(보편적인 기간제 사용) 입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8일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단병호 의원의 협조 아래 한국노총 등의 수정안을 반영한 정부 안을 통과시켰다. 비정규직법이 국회에서 심의 중인 가운데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수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수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이들은 지난 15일 토론회를 연 데 이어 18일 중앙위에서 결의문 채택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기간제 노동과 관련해서는 당초 근기법 개정을 통한 엄격한 비정규직 사유제한 도입 등 비정규직 철폐안을 제출했으나 법안 심사과정에서 정부가 제출한 기간제법 형식에 따른 일부 조항 의결에 참여했고, 사유제한의 폭도 기존 4가지에서 10가지로 확대하는 등 양보했다고 지적했다. 또 당초 파견법 폐지를 내건 민주노동당이 환노위 법안심의 과정에서 사실상 파견법 존치를 전제로 불법파견 적발시 고용의제 확보 등을 제시했다고 비판했다.[36] 이제 비정규직 확산법안(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사위원회, 본회의를 속속 통과하며 입법 처리를 완료할 수순만 남아 있었다. ◎ 2006년 비정규직 확산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 2006년 2월 21일 민주노총 조준호 보궐 집행부가 당선됐다. 그런데 그 직후인 27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경위권을 발동한 가운데 환경노동위원회를 개최하여 비정규직 확산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총의 허를 찌른 기습처리였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28일 10만3천 명이 참여했다. <비정규법안의 문제점> 1. 날치기 과정 :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야합하여 통과시킴 - 2. 22.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 야4당은 국회에서 원내대표회담을 열고 비정규직법 처리를 차기 임시국회로 미루기로 합의함 -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밀실에서 야합하여 2. 27.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를 전격적으로 개최하여 통과시킴 - 사상 유례가 없는 환노위 질서유지권을 발동하고 항의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강행하였음 - 환노위 국회의원인 단병호 의원마저도 국회 경위를 동원하여 자리에서 끌어내고는 이를 임의로 무효표로 처리함 2. 기간제 비정규직의 무제한 사용·확대를 초래하는 내용의 법안이 통과 … - 결국, 이제 2년 이내의 계약직은 우리 사회에서 상징적이고 정상적인 고용형태가 될 것임 3. 파견노동이 사실상 전면 확대하고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법안이 통과됨 … -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법안임. 즉, 불법파견을 해도 2년까지는 봐주고 반드시 2년이 지나야 고용의제도 아니고 고용의무를 지도록 하였음. 고용의무는 안 따르면 그만이고 과태료 3000만원만 내면 되도록 해버렸음. 사용자들은 마음 놓고 불법파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 … 4. 오히려 차별을 용인하고 실효성 없는 차별시정절차를 담고 있을 뿐임[37] 민주노총은 3월 2일에도 총파업을 이어가 18만 명이 참여했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의 조합원이 참여한 총파업이었다. 3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비정규직 법안의 후속 처리를 4월 임시국회로 연기했다. 민주노총 총파업도 4월로 유보됐다. 3월 15일, 4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재개돼 노사관계 로드맵을 논의했다.[38]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법안 재논의와 장기투쟁사업장 문제해결 등을 전제조건으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참했다.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강행처리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폐기, 무상교육·무상의료 쟁취, 한미FTA 협상 중단을 내걸고 산하 연맹별 순환파업을 전개했다. 특히 14일 금속연맹 총파업에는 12만 조합원이 참여했다. 21일, 국회 법사위원회가 비정규직 법안을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단행해 10만5천 명이 참여했다. 법사위원회의 비정규직 법안 처리가 27일로 연기되자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유보했다. 대신 국회 법사위에서 비정규직 법안이 처리되면 그 다음날부터 무기한 전면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27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관계 악화 때문에 법사위원회가 열리지 못했다. 대신 5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려 노사정위원회 명칭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로 개정하는 등의 노사정위원회 개편방안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첫 번째 합의사항으로서 노동위원회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5월 16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 조준호 집행부가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 문제를 논의에 부쳤다. 격론 끝에 23일 속개된 중앙집행위원회는 집행부가 제출한 사업계획에서 “노사정대표자회의 참여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의 반노동자성을 폭로하고, 노사관계 민주화 방안과 특수고용 노동기본권 등을 쟁점화 한다”는 부분을 삭제했다. 금속, 공무원, 공공, 전교조, 사무금융 등 대규모 연맹들이 줄줄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에 대해 반대 또는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냈기 때문이다. 대신 민주노총 중집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를 위한 6월 21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6월 13일 열린 중앙위원회는, 6월 21일 총파업이 각 산별연맹의 자체 일정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함을 확인했다. 그러자 노사정대표자회의 불참 방침을 전면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고 찬반 논쟁 끝에 19일 중집에 결정을 위임했다. 19일 열린 중집은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10분 만에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결정하기까지 노무현 정권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참여를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내보내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복귀하자마자 노사관계 로드맵 논의가 빠르게 진행됐다. 21일 실무회의를 거쳐 7월 6일 6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7월 12일, 민주노총이 한미FTA 협상 저지,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 특수고용 노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9만4천 명이 참여했다. 21일, 민주노총이 노무현 정권의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응하여 대안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의 4대 방향, 8대 핵심요구안’을 제출했다. 민주적 노사관계의 4대 방향 1. 국제적 노동기준의 보장 … 2. 비정규 노동자와 산별노조의 노동기본권 보장 … 3. 노사자치의 보장 … 4. 고용안정의 보장 … 8대 핵심요구안 요지 1. 공무원·교수·교사의 노동3권 보장 … 2. 비정규 노동자 노동3권 보장 … 3. 산별교섭 보장과 산별협약의 제도화 … 4. 복수노조하 자율교섭 보장 … 5. 직권중재조항 폐지와 긴급조정제도 요건 강화 … 6. 손배가압류 및 업무방해죄 적용 금지 … 7.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조항 폐지 … 8. 고용안정 보장[39] 8월 10일, 8차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날까지 전체 논의과제 40개 가운데 23개에 대해 의견일치를 봤고, 나머지 17개는 9월 4일까지 논의하기로 했다. 26일, 9차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복수노조와 노조 전임자 문제가 처음으로 다뤄졌다. 9월 2일, 한국노총과 경총이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5년 유예하자고 사전 합의하여 의견을 냈다. 9월 11일, 민주노총을 제외하고 한국노총, 경총, 대한상의, 노동부, 노사정위원회 대표자들이 긴급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열어 이른바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3년 유예 △필수공익사업장에 직권중재를 폐지하되 필수유지업무제도 운용 및 쟁의기간 대체인력의 채용·하도급 허용 △필수공익사업장 확대(혈액공급, 항공, 폐․하수처리, 증기·온수공급업) △부당해고 벌칙조항 삭제 △정리해고 사전통보기간을 60일에서 50일로 단축 등이었다. 단호하게 투쟁동력을 건설하는 대신 노사정 교섭을 통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해 온 민주노총은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11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동양증권 빌딩 21층 노사정위원회. 한국노총과 정부, 사용자단체가 수십 명의 기자들 앞에서 로드맵에 대한 노사정 합의 결과를 발표하며 서로 손을 굳게 잡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은 시간 동양증권 빌딩 앞에는 2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마이크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맥 빠진 구호와 힘없는 투쟁가가 건물 안팎을 가득 메운 경찰들 사이로 맥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사정 합의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금속연맹과 금속노조 간부들 30여 명이 회의를 중단하고 달려왔지만 초라한 풍경은 그대로였다. “한국노총과 자본의 야합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투쟁해 나가겠다”는 연설자들의 외침은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는 89%, 1천3백만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선택권을 또 다시 유린하고, 정리해고 사전 통보기간을 단축해 해고를 쉽게 만들고, 필수공익사업장 확대와 대체근로 인정으로 파업을 어렵게 만드는 법안과 노조간부 임금을 맞바꾼 ‘희대의 야합’이 벌어진 날, 그 많은 민주노총 간부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 한국노총 야합보다 더 절망스런 일이 민주노총의 무기력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주 한국노총과 사용자단체에게 ‘5년 유예 합의’라는 뒤통수를 맞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주말에 벌어진 노사정의 ‘음모’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고, 이날 오후 2시 매우 ‘형식적인 집회’를 잡아놓았을 뿐이었다. … “천만노동자 팔아먹은 밀실야합 박살내자” 민주노총 간부들이 길을 가로막으며 ‘노사정야합’을 규탄했고, 일부 간부들은 이용득 위원장 앞에 드러누워 “나를 밟고 가라”고 외쳤지만, 한국노총 간부들과 이용득 위원장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정부가 지어준 한국노총 건물로 들어갔다. 민주노총이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전국노동자대회를 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면, 최소한 가까운 지역의 간부들을 비상소집해 노사정 야합을 막는 투쟁을 했다면, 한국노총처럼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 농성을 벌이면서 ‘야합’에 대비했다면 한국노총이 ‘부끄러운 합의’를 하고도 떳떳하게 걸어 나오는 사태를 목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탈하고 참담하고 부끄러운 9월 11일이었다.[40] 11월 15일, 민주노총이 노동법 개악 저지와 노사관계 민주화 입법 쟁취, 비정규 권리보장 입법 쟁취, 한미FTA 협상 저지, 산재보험법 전면 개혁을 내걸고 총파업을 벌였다. 13만 8천 명이 참여했다. 22일에도 총파업을 벌여서 14만 4천 명이 참여했다. 29일, 국회 법사위원회가 비정규직 법안을 강행 처리하려 하자 민주노총이 다시 총파업에 나섰다. 16만이 참여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법안 처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법사위원회를 점거했다. 30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를 열어 기간제법 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동당이 농성 중인 법사위원회를 건너뛰어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해 표결 처리한 것이었다. 30일에도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이어갔다. 12만 2천 명이 참여했다. 이번에 날치기 통과된 비정규법은 △임시계약직(기간제) 사용 사유의 무제한 허용 △파견 비정규직의 전면 허용 △실효성 없는 차별해소 방안 △비정규직 노동3권 외면 등을 기조로 하고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하고 차별해소 효과는 미미할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박탈하는 법이다. 정부와 양당은 이제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화하여 빈곤과 고용불안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번 비정규악법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줄기찬 개정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고 곧 국회에서 심의에 들어갈 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한 총력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것이다.[41] 12월 6일, 민주노총이 노동법 개악저지와 날치기 비정규법 전면무효를 내걸고 총파업에 들어갔다. 15만 명이 참여했다. 7일과 8일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다루는 데 맞서 1박 2일 전 간부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법안은 통과됐다. 노무현 정부와 보수양당은 우리가 주장한 민주적 노사관계방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고 노동법개악을 자행하였다. 1500만 노동자의 간절한 염원을 저버리고 오늘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강행처리했다. 지난 11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비정규 확산법 날치기통과에 이어 또 다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으로 노동법을 개악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제도는 법적으로 완비된 것과 다름없다. 비정규악법으로 비정규노동자를 무제한 확산시키는 길을 열었으며 노동법 개악으로 정규직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가속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번 통과된 노동법 개악안은 복수노조를 3년 동안 금지하여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을 침해하고, 비정규노동자의 교섭권확보를 봉쇄하였으며, 부당해고의 벌칙조항을 삭제하고, 정리해고 통보일을 60일에서 50일로 축소하여 부당해고를 남발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혈액공급과 항공운수를 포함하여 필수공익사업장을 확대하고, 필수공익사업장의 직권중재제도를 폐지하는 대신에 파업참가자 1/2에 대하여 대체근로를 허용하여 파업권을 제한하였으며, 결국 필수공익사업장노동자의 노동유연화 장치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사용자들의 전횡과 독단이 무소불위로 자행될 것이며 노동자들의 권리는 심각하게 무력화될 것이다. 또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조항을 노사자율로 하자는 상식적이고 보편타당한 우리의 주장을 무시하고 3년 동안만 유예하였으며, 공무원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산별교섭 제도화와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문제도 추후 논의하는 것으로 정리하여 이후 노사관계의 갈등과 혼란이 극심해질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 우리는 이번에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노동법 개악안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며, 본회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투쟁을 진행할 것이며 비정규악법철폐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해 나갈 것이다.[42] 그런데 8일 민주노총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전 간부 상경투쟁을 진행하던 바로 그 시각에,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단병호 의원은 법안 처리에 협력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 항의하면서 국회 진격투쟁에 돌입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국회 환노위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환노위에서 로드맵 법안 처리에 합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 의원인 우원식 법안소위장은 “오늘 합의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여야 노동계가 최초로 합의해서 통과시킨 것이다. 오늘 합의는 끝없이 벌어지는 (노사)갈등을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른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법안 통과에 맞서 노동자투쟁을 조직하는 선봉에 서기는커녕, 비정규직 법안 이상으로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악법인 로드맵 법안을 암묵적으로 추인해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한다고 하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힘을 얼마만큼 싹둑 잘라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민주노동당은 “반대를 명확히 하되 일부 완화된 수정안이 통과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하에 환노위 통과를 인정했다. 이것은 애초부터 노동자의 투쟁을 조직해서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는 노선 대신 ‘일부 완화된 수정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실리주의적 투항노선을 민주노동당이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노동자들을 선거 때 표를 던지는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의회주의 노선의 필연적인 결정판이다. 물론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단독 범죄는 아니다. 민주노총의 노조관료들이 공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보건의료산업노조 지도부는 노조의 합법적 쟁의권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 ‘파업참가자의 50%까지 대체근로 허용, 정리해고제 사전통보기간 현행 60일에서 50일로 단축, 필수공익사업장 항공사 포함 등’의 독소 조항들이 담긴 로드맵 법안 통과를 ‘양해’하도록 민주노동당 지도부에 종용했다. 결국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관료들 사이의 분업구조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조합 관료층은 노동자의 힘을 조직하는 대신 의회주의 정당의 국회의원들에게 의지하고, 이 의회주의 정당의 이른바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자본가 정당들과의 밀실협약과 거래에 의지하여 노동자의 절박한 생존권과 권리들을 헌납하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분업구조가 나타난 것이다. … 노동자의 힘의 원천인 단결투쟁력을 파괴하거나 그것을 아주 제한적 수준(이른바 교섭을 위한 압력 수단)에만 묶어둔 채 모든 것을 교섭장에서의 자본과의 협상에만 의존하는 노조관료층의 노선을 민주노동당은 의회 차원에서 확대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 이제 막 등장해서, 기껏해야 국회의원 몇 명 정도 배출한 것에 지나지 않은 민주노동당이 벌써부터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미래에 그들이 취할 모습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결집시키는 그릇인 노동자의 정치적 성장은 가로막힐 뿐만 아니라 해체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민주노동당의 성장가능성을 제거해버린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한국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무참히 매장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43] 11일, 민주노총 조준호 위원장이 노동법 개악안 저지를 위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12일부터 14일까지 연맹별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전개하고, 본회의가 예정된 15일에는 민주노총 차원의 총파업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12일부터 14일까지 연맹별 간부상경투쟁 정도가 진행됐고, 15일 총파업도 연기됐다. 민주노총은 다시 19일부터 22일까지 연맹별 간부상경투쟁을 진행했다. 민주노총의 무기력한 투쟁을 비웃듯이, 22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늘 국회 본회의에서 노동법 개악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지난 8일 상임위에서 강행처리한 노동법 개악안을 법사위 통과와 함께 본 회의까지 초고속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동안 한나라당이 개방형 이사제 폐지를 위해 사학법 재개정 주장으로 국회파행을 유도하는 몽니를 부리다가 가까스로 본회의를 열기로 합의한 결과가 노동법 개악안과 파병연장안을 처리하는 것이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희망을 염원하는 지금 또 다시 보수양당의 반노동 만행은 우리 사회를 절망에 빠뜨리고 있다. 사용자의 불법적 노조파괴와 노동탄압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를 통제할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측의 불법횡포를 합법화해주려는 부정의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 국회의 자화상이다. 노무현 신자유주의 노동착취 정부는 거대 재벌들과 외국자본의 배만 불리고 노동자는 사지로 내몰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도 안 되는 정규직을 눈엣가시처럼 못 마땅히 여기며 어떻게든 비정규직화 시키고 비정규직노동자의 차별과 빈곤을 고착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를 때려죽이고도 5개월이 지나도록 책임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인면수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보수 정치판은 정치모리배 속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며 민생은 안중에도 없고 빈곤과 차별, 속박과 불안으로 온 사회가 멍들어 가는 속에서 부패정치만 일삼고 노동악법만 생산하고 있다.[44] 비정규직 확산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를 위해, 그리고 노사관계 로드맵 저지와 민주적 노사관계 쟁취를 위해 1996~97년 총파업 이후 최대 규모로 전개됐던 민주노총의 2004~06년 총파업은 결국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동안 민주노총은 열 번이 훨씬 넘는 총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확산법과 노사관계 로드맵의 통과를 끝내 막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형식적으로는 많은 총파업을 했지만, 1996~97년 총파업과 달리 실제로는 위력적인 총파업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파업을 하는 시늉만 했을 뿐, 악법을 꼭 막아내고 노동자의 요구를 반드시 쟁취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총파업을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왜 그렇게 됐을까? 첫째, 민주노총의 중핵인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이 단위사업장 차원의 임금·단체협약에만 함몰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광범한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서도 노동법의 변화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형식적으로 파업에 임할 뿐 절실하게 조합원들을 설득해 나가지 않았고, 따라서 파업참여 조합원의 대다수는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퇴근했다. 둘째, 총연맹으로서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입법과 노동법 개정에 대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단호한 투쟁에 근거한 해법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추구한 해법은 노무현 정권과의 ‘적절한 타협’이었다.[45] 총파업은 협상의 수단일 뿐이었기에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나 국회 상황에 따라 걸핏하면 유보됐다. 산하 노조들을 독려하여 위력적인 총파업을 건설함으로써 노동자의 요구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민주노총 지도부는 갖고 있지 않았다. 2004년 9월 노무현 정부가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입법예고한 후 민주노총은 2006년 한 해에만 총파업 돌입 총 14회, 연인원 181만4천368명이 참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하지만 96~97년 총파업 투쟁 이후 최대라는 2006년 총파업 투쟁은 정부 법안의 골자를 바꾸지도 못했고, 비정규직 고용에 관한 민주노총 소속 노조의 태도를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 2000년대 이후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자신의 임금을 방어하거나 혹은 개선할 수 있었지만, 90%의 미조직 노동자들과의 격차가 확대되는 것은 사실상 방관했다. 그 결과 임금과 고용을 방어하는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이, 정권과 자본에 의해 집단이기주의로 몰렸는데도 뾰족한 대책이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46] 비정규직 보호입법이 국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2004~06년 동안만 보더라도,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투쟁, 울산플랜트노조의 투쟁, 완성차 사내하청노조들의 투쟁, 덤프연대의 투쟁 등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폭발하였으나 이것과 권리입법 쟁취투쟁이 결합되지 못했다. 2005년 ‘비정규직 보호입법’과 ‘사회적 교섭’이 논란이 되는 와중에도 비정규직 노조들은 92명의 구속자, 1362명의 해고자(계약만료통보로 인한 해고 제외), 1498억 원의 손해배상·가압류(하이스코의 72억원 제외) 등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기본권 문제를 쟁점으로 만들고 권리입법투쟁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조조차도 권리입법 투쟁에 매진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비정규직노조 대표자 수준에서는 정세에 대한 공유나 어느 정도의 공동실천이 이루어졌으나, 대표자를 넘어 해당 노조에까지 긴장감이 형성되지는 못했다. 단위 사업장의 현안을 놓고서는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권리입법투쟁에 있어서는 그만큼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유지 자체가 어렵고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비정규직노조의 조건을 고려한다 하여도, 비정규직 노조마저도 자신의 현안과 권리입법 투쟁을 별개의 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47] 5) 2007~08년 이랜드일반노조의 계약직 정규직화 투쟁 2006년 말에 제정된 기간제법은 2007년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당했다.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 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제 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는 기간제법 제4조 2항 때문이었다. 기간제법 시행을 앞둔 자본가들의 대응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대세를 이룬 대응방안은 계약직이 수행하던 업무를 용역·도급 등의 간접고용으로 대체(외주화)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계약직이 용역·도급으로 전환되기도 했고, 아예 새로운 노동자로 대체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2년 이상 경력자를 포함해 많은 계약직이 해고당했다. 이와 관련 경총은 2007년 5월 「비정규 인력의 합리적 활용과 법적 대응방안」이라는 문서를 통해 “비정규 인력이 담당하는 업무를 도급화해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직군분리를 통한 무기계약직 도입이었다. 기간제법 제정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는 동안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는 사실상 정규직을 뜻하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무기계약직이라는 새로운 직군을 도입해서 (기간제법의 차별금지 조항을 비껴갈 수 있는) ‘합리적 차별’의 근거를 마련했다. 통상 무기계약직은 임금과 처우는 계약직과 같고 고용만 보장되는 것으로 설계됐다. 그 무기계약직조차 2년 이상 일한 계약직 가운데 소수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기간제법 시행을 하루 앞둔 6월 30일,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이 계약직 정규직화와 고용보장을 핵심 요구로 내걸고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7월 20일까지 이어진 이 점거농성은 사회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언론보도가 집중됐고, 노동자·민중의 지지와 연대가 쏟아졌다. 특히 2006년 말 비정규직 확산법안의 통과를 막아내지 못하고서 의기소침해 있던 민주노총이 이 투쟁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달라붙었다. 1980년 이랜드라는 패션브랜드로 시작하여 급성장을 거듭한 이랜드그룹은 2006년 프랑스계 대형할인매장 까르푸를 인수하여 홈에버로 이름을 바꾸면서 뉴코아·홈에버·2001아울렛 등을 거느린 거대 유통그룹이 됐다. 까르푸가 이랜드그룹으로 인수합병되면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가 통합하여 2006년 12월 이랜드일반노조를 결성했다. 이랜드그룹에는 뉴코아노조가 또 있었지만, 역사와 조건의 차이 때문에 노조를 통합하지는 않고 공동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랜드일반노조로 통합된 이랜드노조와 까르푸노조는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계약직에게도 문호를 열고 계약직의 노동조건 개선과 정규직화를 위해 투쟁해 온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2006년 까르푸 매각과 비정규직법 개악을 겪고 2007년 기간제법 시행이 다가오자 계약직들이 고용불안을 느끼고 노조에 대거 가입했다. 이랜드그룹은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산하 기업들에서 1천여 명의 계약직을 해고하고 용역으로 전환했다. 한편 홈에버가 6월 15일 “3천여 명의 비정규직 중 2년 이상 된 1천여 명을 직무급제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는데, 직무급제 정규직은 무기계약직을 뜻했다. 그런데 까르푸 시절 노조가 쟁취한 단체협약에는 “18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은 계약기간 만료 때 계약을 해지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즉 18개월 이상이면 자동으로 무기계약직이 되는 것인데, 2년 이상 경력자를 채용 절차를 거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회사 방침에 대해 “노조파업을 무력화시키고 노동자를 분열시키기 위한 악질 사기극”이라고 비판했다.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는 기간제법 시행을 앞둔 이랜드그룹의 계약직 대량해고와 외주화(아웃소싱), 분리직군제 도입에 맞서 공동투쟁을 시작했다. 두 노조는 6월 10일, 17일, 23일 공동파업을 전개했다. 특히 23일에는 이랜드그룹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기록하는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했다. 1층은 이랜드일반노조가, 2층은 뉴코아노조가 계산대를 점거하고 고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24일에는 뉴코아 강남점에서 매장 진입을 시도했다. 26일에는 뉴코아 야탑점과 홈에버 야탑점, 27일에는 뉴코아 일산점과 홈에버 일산점에서 파업을 벌였다. 뉴코아노조는 조합원 대다수가 정규직이었지만, 이랜드일반노조는 조합원 다수가 고용불안에 쫓겨 막 노조에 가입한 계약직들이었다. 파업도 집회도 처음이었다. 아직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기간제법의 시행을 하루 앞둔 30일 오후 12시 30분,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노조의 핵심 요구는 3개월 이상 근무자 고용보장, 2년 이상 근무자 정규직 전환, 사내도급 중단, 민형사징계 면제 등 네 가지였다. 매장을 점거하고 앉은 여성노동자들은 “우리가 언제 그런 법을 만들어 달랬다고 비정규직법을 만들어서 우리를 길거리로 내쫓냐”고 분노했다. …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기혼이었다. 특히, 캐셔들 가운데는 40대 이상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이혼하거나 사별해서, 또는 홀로 벌어서 생활하는 여성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한 달 일해 받는 80만 원이 유일한 생계비였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계약을 중단하고 퇴사시키면서 생계를 위협받고 있었다.[48] 오후 4시, 민주노총·민주노동당·학생 등 연대대오 100여 명이 결합했다. 오후 9시, 뉴코아 강남점의 킴스클럽을 봉쇄하다 온 뉴코아노조 조합원 700여 명이 합류했다. 애초 이랜드일반노조 지도부의 계획은 1박2일 점거농성이었다. 그러나 점거 첫날부터 조합원들은 ‘힘들게 들어왔는데 이대로 나갈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지도부는 고심하다가 분회토론과 전체 토론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분회 토론과 전체 토론에서는 ‘무기한 점거’ 의견이 쏟아졌다. 결국 조합원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무기한 점거농성을 결정했다. 조합원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조합원들은 이후 경찰병력에 의해 끌려나오기까지 21일 동안 힘차게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투쟁 주체는 다수가 당시 ‘아줌마’, ‘주부사원’으로 불리던 40대 전후의 기혼 여성노동자들이었다. … 이들 대부분은 510일 투쟁 이전에는 노조활동의 경험이 없었고, 작업장 안에서도 일에 쫓겨 몇몇 자신의 주변 동료 이외의 사람들과는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 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관리자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해 왔다. 그런데 월드컵점 점거농성장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와 결의로 지도부의 1박2일 계획을 전복시켜서 진행한 20일 투쟁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매장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거대한 매장이 여성노동자들이 손을 놓는 순간 멈춰 섰고, 스스로가 꾸려 나가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다양한 연대세력들을 만났고 이들의 발언과 여러 강의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이해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같이 일했던 동료인 여성노동자들을 알아갔다는 것이다. 교대해서 집에 가면 냉장고를 털어 농성하는 동료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바리바리 싸왔다. 농성장에서는 자발적으로 나선 이들이 매끼 수백 명의 밥과 국을 하면서도, 그것이 동료들을 위한 투쟁이라며 기꺼이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으로 수십 끼를 같이 먹으며 이들은 ‘식구’가 되어 갔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밤이 있었다. 20일 밤을 계산대 사이사이에 모여 서로 살아온 이야기와 현실 문제, 현장 문제와 위축되어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 등 수년을 같이 일해도 나누지 못했던 삶과 현장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서로에게 ‘또 다른 나’를 발견했고, 진한 동료애로 서로를 껴안을 수 있었다. 이들은 ‘여성’으로 그리고 ‘노동자’로 일과 가사노동·돌봄노동을 병행해야 하는 조건에 있는 동료들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49] 7월 8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그리고 민주노총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매출타격투쟁을 벌였다. 전국적으로 5천여 명이 연대투쟁에 나서면서, 애초 계획한 12개를 넘어 20개 매장에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회사는 점거농성이 벌어지면 매장을 닫는 것으로 대응했다. 뉴코아노조는 이날 회사와 경찰의 대응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틈을 활용하여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11일부터 20일까지를 전국 불매운동 1차 집중시기로 정하고 80만 조합원에게 뉴코아 아울렛, 뉴코아 백화점, 킴스클럽, 홈에버, 2001아울렛 등 이랜드그룹 5개사에 대한 불매운동에 참여할 것을 지침으로 내렸다. 13일, CBS가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농성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비정규직 파업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의견은 31.9%, 사업주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은 24.4%였다. 정부와 사업주의 책임이라는 의견이 절반을 넘어 55.3%에 이른 반면 노조에 책임이 있다는 의견은 23.2%였다. 16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랜드 불매운동에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연합 등 57개 시민사회단체가 합류했다. 20일, 경찰병력이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의 농성장을 침탈해서 농성자들을 모두 연행했다. 점거농성을 시작한 지 월드컵점은 21일, 강남점은 13일만이었다. 9시 50분, 조합원들이 앉은 곳을 제외한 전 매장 안에 들어온 경찰이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경찰의 방송 소리에 모두 입에 호루라기를 꺼내 물고 불어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호를 외쳤다. “일하게 해달라는데 공권력투입 웬 말이냐.” “비정규직도 사람이다. 노무현 정권 물러나라.” … 국회의원들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김경욱 위원장을 가운데 두고 경찰의 강제연행에 항의했다. … 경찰은 5~6명씩 달려들어 남성조합원들을 먼저 연행하기 시작했고, 여경들은 여성조합원들을 한 명씩 끌어냈다. 조합원들은 뿔뿔이 끌려 나가기 직전 “경찰 조사 받고 나오는 대로 다시 싸우자”고 서로의 손을 움켜쥐었다. … 연행 시작 1시간도 채 못 된 10시 55분, 강제해산을 위한 경찰의 진압작전은 위원장의 연행으로 종료됐다. 위원장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조합원과 마지막 포옹을 하고 경찰에 검거됐다.[50] 이날 민주노총은 농성장 공권력 침탈에 항의하며 전국 12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에서 항의투쟁을 전개했다. 각 매장마다 수백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항의투쟁에 동참해서 산발적인 매장 진입과 점거, 결의대회,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다. 21일, 민주노총이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2차 매출제로투쟁을 벌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전국 33개 매장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을 했고, 다른 28개 매장에서도 1인 시위와 불매운동을 벌였다. 22일, 이랜드일반노조가 홈에버 중동점을 기습 점거했다가 철수했다. 20일 연행됐다 석방된 조합원들까지 3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23일에는 뉴코아 강남점 앞 시위, 24일에는 홈에버 월드컵점 타격투쟁이 전개됐다. 27일,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비정규 노동자 대량해고 이랜드규탄 민주노총 총력결의대회’가 열렸다. 3천여 명이 참여했다. 집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매장 진입을 시도하다 이를 가로막는 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월드컵점의 셔터가 20일 공권력 투입 이후 처음으로 다시 내려졌다. 29일, 뉴코아노조와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뉴코아 강남점을 다시 점거하고 점거농성을 이어갔다. 31일 새벽, 경찰이 투입돼 농성 조합원들을 모두 연행했다. 이날 민주노총은 이랜드-뉴코아 투쟁과 관련해서 긴급 산별대표자회의를 열고 투쟁수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8월 13일부터 문제해결 때까지 1천여 명의 ‘이랜드 타격투쟁 중앙선봉대’를 운영하기로 했다. 18일에는 5만여 명이 참가하는 노동자대회를 전국동시다발로 개최하고 21일에는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단일 안건으로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8월 5일, 민주노총이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3차 매출타격투쟁을 벌였다. 전국 12개 매장에서 타격투쟁이 전개됐는데, 홈에버 전주점을 200여 명의 조합원이 일시 점거했다. 노동자의힘, 다함께, 문화연대, 민교협, 인권단체연석회의, 이윤보다인간을 등 노동사회단체들이 ‘비정규직법 폐기와 뉴코아-이랜드투쟁 승리’를 위해 세종로 소공원에서 시국농성에 돌입했다. 9일, 민주노동당이 당의 사활을 걸고 이랜드사태 해결, 비정규악법 재개정 및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보장을 위한 투쟁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16일, 민주노총의 1천인 선봉대 발대식이 홈에버 목동점에서 열렸다. 700여 명이 참석했다. 17일, 민주노총 선봉대 400여 명이 비정규악법 전면 재개정과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 구속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를 향했으나 광화문 인근에서 경찰에게 저지당했다. 18일, 민주노총이 전국동시다발 노동자대회를 열어 전국 11개 지역에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 12곳을 봉쇄했다. 서울역에 모인 3천 명은 둘로 나뉘어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을 봉쇄했다. 전국적으로 9천 7백 명이 참여했다. 21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은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조합원들의 투쟁에 전 조직 역량을 모으기로 했다. 우선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조합원 800여 명에게 1인당 월 50만원씩의 생계비를 9월부터 12월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이에 필요한 월 4억 원의 투쟁기금은 민주노총과 산하조직의 모금 등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또한 추석 직전인 9월 15일부터 21일까지를 집중타격투쟁 기간으로 잡고 단위노조 대의원 이상 2만여 명이 참석하는 전국동시다발 매장봉쇄투쟁을 진행하기로 했다. 특히 9월 18일과 19일은 전 간부가 서울로 상경해 수도권 12개 매장을 전면 봉쇄하는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민주노총 80만 조합원의 힘으로 860만 비정규 문제를 해결하자! 오늘 우리는 80만 조합원의 대표자격으로서 이랜드 투쟁의 승리를 위한 총력투쟁에 나설 것을 힘차게 결의하였다. 이랜드 문제는 이 땅 860만 비정규직 문제 그 자체이다. 우리는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이랜드 투쟁의 승리를 위해 강력한 지지연대투쟁에 나서 비정규직 완전철폐를 위한 승리의 대항쟁에 불을 지펴 갈 것이다. 오늘의 결의를 시작으로 지난 두 달여간 보여 왔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정신 그 이상의 투쟁력을 발휘하여 승부를 내야 할 때다. 지금부터 9월말까지 한 달 간의 기간이 이랜드 투쟁의 최대 승부처이며 분수령이다. 바로 이 기간에 투쟁에 최대 집중하여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악덕기업이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도록 바로 우리 손으로 바꿔나가자. 이에 우리는 이랜드 투쟁의 완전승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이랜드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지역별 매장봉쇄투쟁을 비롯한 모든 투쟁에 전조직적으로 나설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전조직적인 이랜드 불매운동을 확산하며 전 국민적인 불매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9월말 추석 전 매출봉쇄 집중투쟁, 불매운동 강화, 이랜드 투쟁기금 조성 등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가맹산하조직, 단위노조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수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이랜드뿐만 아니라 비정규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연대투쟁을 조직하고 860만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 하나, 우리는 이랜드 지지투쟁에 머물지 않고 하반기 비정규법 전면 재개정 쟁취투쟁을 전개하며, 노무현정권의 비정규정책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정책 폐기를 위해 강력한 하반기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한다.[51] 22일, 전북 농민들이 쌀 27가마를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에 전달했다. 29일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쌀 50여 포대를 두 노조에 전달했다. 24일, 이랜드일반노조, 뉴코아노조, 철도노조 KTX 승무원지부,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의 조합원 1천여 명이 기륭전자 정문 앞에 모여 ‘비정규 여성노동자 공동투쟁 연대결의대회’를 가졌다. 25일, 민주노총이 전국 11개 이랜드계열 유통매장에서 6차 매출제로투쟁을 벌였다. 26일,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250여 명이 홈에버 월드컵점을 기습 점거했다가 철수했다. 31일, 민주노총이 16일부터 활동한 1천인 선봉대의 해산식을 가졌다. 매일 두 곳씩 이랜드계열 매장의 봉쇄를 목표로 했던 선봉대 활동은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선봉대 1천 명을 각 연맹별로 할당했지만, 실제로 선봉대에 참여한 숫자는 평균 478명에 그쳤다. 각 연맹에서는 연맹 간부들을 선봉대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현장 조합원들 속으로는 전혀 파고들지 못했다. 민주노총 1천인 선봉대가 운영되는 동안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의 파업참여 조합원은 평균 494명이었다. 9월 3~4일, 민주노총이 중앙집행위원회를 갖고 이랜드계열 전국 유통매장에 대한 추석기간 집중타격투쟁을 12일과 13일, 15일과 16일 두 차례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8일, 민주노총과 이랜드-뉴코아 노조가 국회 앞에서 1천3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집회를 가진 뒤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으로 이동해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이랜드그룹은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을 앞두고 교섭에 나섰는데, 뉴코아에 대해서는 외주화 철회 등의 진전된 안을 낸 반면 홈에버에 대해서는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두 노조를 분리하려는 술책을 썼다. 결국 11일 두 노조는 각각 노조 총회를 갖고 교섭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뉴코아노조는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이 예정된 12일부터 14일까지 매장타격투쟁을 유보하고 교섭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면 이랜드일반노조는 매장타격투쟁에 집중하기로 했다. 뉴코아노조의 교섭 타결 가능성이 회자되면서 민주노총의 추석기간 집중투쟁 동력은 크게 이완됐다. 12일부터 14일까지 이랜드일반노조는 민주노총과 함께 매장타격투쟁을 전개했다. 12일에는 중계점, 13일에는 일산점·중동점·병점점, 14일에는 목동점과 시흥점에 집중했다. 그 기간 교섭에 집중하기로 했던 뉴코아노조는 타결에 이르지 못했다. 15일, 민주노총이 1박2일로 예정된 이랜드-뉴코아 2차 집중타격 상경투쟁 일정을 시작했다. 여의도에 1천여 명이 모여 결의대회를 가진 뒤 홈에버 월드컵점으로 이동해 봉쇄투쟁을 전개했다. 16일 새벽 1시,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200여 명이 홈에버 면목점을 기습 점거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연대 대오 100여 명이 농성현장에 합류했다. 새벽 4시경 경찰병력이 투입돼 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대오를 이끌던 홍윤경 직무대행이 맨 먼저 끌려 나왔다. 홍윤경 직무대행은 연행되기 직전 “경찰의 군홧발이 여성노동자를 짓밟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짓밟혀 쓰러지지 않는다”고 외쳤다. … 뒤이어 조합원들이 줄줄이 전투경찰들과 긴급히 투입된 100여 명의 여경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연행됐다. 경찰 투입 20여 분만에 상황은 끝났다. 조합원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깔고 앉았던 박스만이 남아 있었다.[52] 추석 대목은 이랜드그룹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이랜드계열 전국유통매장에 대한 추석기간 집중타격투쟁은 결정적인 승부처였다. 만일 민주노총이 8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한 대로 9월 15일부터 21일까지 2만여 명이 참석하는 전국동시다발 매장봉쇄투쟁을 전개했다면 이랜드 자본에게는 엄청난 압박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민주노총은 전혀 총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이랜드그룹이 흘리는 교섭타결 가능성에 현혹돼서, 또는 스스로 한 대의원대회 결의조차 우습게 여기는 잘못된 관행에 빠져서 투쟁동력 건설을 방기했다. 실제로 진행된 집중타격투쟁은 애초의 결의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랜드 자본을 전혀 압박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민주노총은 8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지금부터 9월말까지 한 달 간의 기간이 이랜드 투쟁의 최대 승부처”라면서 “지난 두 달여간 보여 왔던 계급적 단결과 연대정신 그 이상의 투쟁력을 발휘하여 승부를 내야 할 때”라고 했다. 따라서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가맹산하조직, 단위노조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사수해 나갈 것을 힘차게 결의”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와 전혀 달랐다. 민주노총 스스로 “이 땅 860만 비정규직 문제 그 자체”라고 했던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패배로 몰고 간 결정적인 지점이었다. 이후에도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의 파업투쟁은 계속 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승부처를 놓치고 난 뒤, 두 노조의 투쟁은 하염없는 장기전으로 빠져들었다. 민주노총의 연대 동력은 크게 가라앉았다.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승리의 전망을 놓쳐버린 힘든 싸움이었지만,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들은 2008년 11월 13일까지 총 510일 동안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 나갔다. 여성노동자들은 아이들을 챙기고 가사노동을 하면서 또 나이 든 부모의 병간호를 맡아 하면서도 510일을 견디고 저항했다. 남편과 갈등하거나 시부모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노동자’인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의 현장으로 나왔다. 더욱이 가장으로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기에 투쟁이 길어지자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투쟁의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식의 세대, 다음 세대까지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여성노동자들은 월드컵점 점거농성에서 쌓인 ‘동료애’를 바탕으로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동료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긴 투쟁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노동자로서 안정된 조건에서 일하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를 하던 동료들을 끌고 간 이랜드자본과 정부의 탄압에 분노했다. 즉, 동료애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처럼 여성노동자들이 강하고 질기게 510일을 거리에서 저항하게 했던 힘이었다.[53] 2008년 8월 29일 뉴코아노조가 파업 434일 만에 회사와 합의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계약만료된 계약직 36명의 재고용, 노조간부 18명의 해고 수용, 노조간부 대상 손해배상소송 철회(노조와 민주노총 등 연대단위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소송은 유지), 2010년까지 무파업이 요지였다. 노조 간부를 포함해 조합원 대부분이 정규직인 뉴코아노조가 500일 가까이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벌였던 ‘아름다운 투쟁’은 결국 뉴코아 사측의 완승으로 끝난 셈이다. 이번 합의로 뉴코아 노사의 극단적 갈등은 종료됐지만, 같은 이랜드그룹의 홈에버를 상대로 아직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이랜드일반노조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 뉴코아노조가 이 같은 합의안에 도장을 찍은 배경과 관련해 경제적 문제 등의 현실적 어려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더 연대가 붙기도 어렵고 사회적 이슈로 주목 받는 것도 한계가 온 상황에서 시간만 보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노동계 관계자는 “정규직인 뉴코아 간부들이 오랜 파업에서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과 각종 손배소로 인해 아파트까지 가압류되는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며 “그런 환경들이 노조 간부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으로 내몬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파업 중인 노동자에 대한 수십억 대의 손해배상 소송이 노조를 무릎 꿇게 한 셈이다.[54] 11월 13일 이랜드일반노조도 회사와 합의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끝까지 투쟁한 조합원 180여 명의 현장 복귀, 16개월 이상 근무한 계약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노조간부 12명의 해고를 노조와 당사자가 수용한다는 참혹한 내용이 포함됐다. 총회 때 찬반투표를 했는데, 전 반대했죠. … 투쟁이 패배할 수는 있는데, 사직서를 받는 대신에 돈을 받는 거잖아요? … 투쟁을 마무리하면서 실력이 안 되면 해고자들을 복직 못 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머지 조합원들이 현장에 복직해서 추후를 도모할 수는 있잖아요? 그렇게라도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그걸 넘어서서 사직서를 받는 방식은 아예 해고자들을 내치는 거잖아요. 회사는 “해고자들을 잘라내라. 이 강성들을”, 거기에 동의해 준 거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사직서 쓰는 차원이 아니죠. 그런데도 통과됐죠. 조합원들이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는 게 중요했어요. “이후를 도모하자” 이런 것도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무조건 끝내자” … 합의 없이 투쟁을 마무리하고 싶으면 비해고자들을 복귀 전술을 쓰고 해고자들은 남아서 이 비해고자들이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고, 조직을 복원하는 데 활동가로서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런 전술을 쓸 수 있는데, 이 전술을 안 쓰고 임금인상을 받아 복직자들한테 명분을 준다는 의미죠. 대신에 … 해고자를 내친다는 거예요. … (서형태, 병점)[55] 다음 편 보기 [1] 김기일(비정규직전국모임 대표), 1999,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 한라중공업 파업투쟁」, 『민주노동과 대안』 12월호. [2] 대법원은 일찍이 1996년 4월 판결을 통해 학습지교사의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을 부정했다. 학습지교사의 노동조합법상 노동자성은 오랜 투쟁과 법적 다툼 끝에 2018년 6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인정됐다. [3]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2000/04/01, 「창립결의문」. [4]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은 2022년 11월 윤석열 정권에 의해 처음 발동됐다. [5] 박일수(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2004/02/14, 「유서」 [6] 울산건설플랜트 노조, 2005, <2005 울산건설플랜트 파업투쟁 때려! - 76일간의 파업일지>(영상) [7] KTX 승무원들은 2010년 1심과 2011년 2심에서 ‘철도공사와 직접 근로관계가 인정된다’고 하여 승리했으나 2015년 대법원이 직접 근로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최종 패소했다. 그런데 2018년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KTX 대법 판결이 박근혜 정권 청와대와 대법원이 협조한 사례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2018년 철도공사가 철도노조와 KTX 해고 승무원 복직을 합의했다. [8]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191~192쪽. [9] 안기호(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2003/04/28,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 [10] 현대차노조, 2003/07/08, 「비정규직 독자노조 추진에 대한 우리의 입장 -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상무집행위원 일동」, <중앙쟁대위 속보>. 2002~03년 현대차노조는 ‘중앙파’인 민노투 집행부가 이끌었다. 한편 2003년 7월 하순 현대차노조 위원장이 사측에게 파업중단 요청과 함께 2억 원을 받은 사실이 2007년 1월 사측에 의해 폭로됐다. 그가 사측에게 돈을 받은 시점은 정규직 노조의 방해를 딛고 비정규직 노조가 설립된 지 불과 보름 정도 뒤였다. 뇌물 수수 사실이 폭로되면서 구속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1] 맨아워(Man-Hour)는 한 사람이 한 시간에 하는 일의 양이다. 완성차 조립공정에 신차가 들어오면 전체 작업공정이 달라지는데, 이에 따라 맨아워 조정이 이뤄진다. 통상 자본은 신차 투입을 계기로 자동화, 외주모듈화, 노동강도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작업에 투입되는 노동자의 숫자를 줄이려고 했다. 맨아워 협의에 임한 정규직 대의원들이 줄어드는 작업자의 수를 사측과 합의하면, 사측은 그 수만큼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 [12]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3] 이 때 생산공정 비정규직의 8~90%를 차지하는 1차 하청 전체가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현대차에는 이들 말고도 생산공정에 2·3차 하청이 존재했으며, 그밖에도 식당·청소·통근버스·조경·경비 등 다양한 분야에 사내하청이 존재했다. [14] 민주노총, 2004/12/09,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전원 불법파견 확인... 즉각 정규직화 해야」. [15]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6]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2005/01/18, 「생산을 멈춘 5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현장」, <현자비정규직노조>. [17]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18] 2004~05년 현대차노조는 다시 ‘현장파’인 민투위 집행부가 이끌었다. 민투위 집행부는 2001년에 7·5 총파업에 불참한 데 이어 2004~05년에는 비정규직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을 배신했다. [19] 2006년 현대차노조는 ‘중앙파’인 민노회 집행부가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차에서 국민파·중앙파·현장파는 번갈아 가며 비정규직을 배신했다. [20] 이후 2005년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지위를 확인해 달라며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도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은 자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2010년 7월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21] 서영호·양봉수 열사회, 2025, 『현대차 열사·희생자 백서』, 류기혁 편. [22] 노무현 정권은 정권 초기인 2003년 3월,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역임한 김금수를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민주노총을 노사정위원회에 다시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참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안에는 사회적 교섭에 찬성하는 세력이 많았지만, 1998년 2·6 정리해고 도입 합의 같은 쓰라린 경험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쉽사리 밀어붙일 수 없었다. [23]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노총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켰다. 진보정당에서 국회의원 당선자가 나온 것은 1961년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처음이었다. [24] 민주노총·민주노동당, 2004/07/07, 「비정규 노동자 보호와 권리보장을 위한 입법안 주요 요지」. [25] 노동부, 2004/09/16, 「비정규직 입법안의 주요 내용」. [26] 박권일, 2004/11/15, 「노무현은 왜 비정규직을 버렸나」, <월간 말>. [27] 민주노총, 2005/03/17, 「[보도] 민주노총 중집 결정사항에 대하여」. [28] 민주노총, 2005/04/06, 「[보도] 노·사·정, 정당 대표자회의 결정사항」. [29] 민주노총, 2005/04/14, 「[논평] 비정규입법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을 환영한다」. [30] 특히 노무현 정권의 파견법 개정안이 파견기간 초과시 ‘고용의제’를 ‘고용의무’로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던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공식 입장(권리보장 입법안)으로는 파견법 폐지를 주장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파견법 개악을 반대하는 수준, 즉 기존 파견법의 ‘고용의제’를 방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31] 민주노총, 2005/10/05, 「[보도자료] 사상 첫 ‘노사 대토론회’ 개최」. [32] 한국노총, 2005/11/30, 「비정규직 관련법 제·개정을 위한 최종안」. [33] 민주노총, 2005/11/30, 「[기자회견] 노사교섭 결렬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34]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이 2005년 12월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제출한 수정안. 1번부터 4번까지는 2004년 7월 제출한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에 담긴 내용이고, 5번부터 10번까지가 새로 추가된 내용이었다. [35] 민주노총, 2005/12/08, 「[논평] 이제 정치권이 답할 차례이다」. [36] 매일노동뉴스, 2005/12/19, 「민주노동당, ‘비정규직법 수정안’ 놓고 논란」. [37] 민주노총, 2006/02/28, 「[보도자료] 비정규법안의 문제점과 총파업의 정당성」. [38] 노사관계 로드맵은 2003년 12월 최종보고가 제출된 이후 2년 넘게 사회적 교섭에서 논의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은 2006년 1월 당정 협의를 통해 노사관계 로드맵을 24개 과제로 압축한 뒤, 4월 임시국회 상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39] 민주노총, 2006/07/21, 「민주적 노사관계 구축의 4대 방향, 8대 핵심요구안」. [40] 박점규, 2006/09/12, 「한국노총 야합보다 더 절망스런 민주노총의 무기력」, <레디앙>. [41] 민주노총, 2006/11/30, 「[성명] 보수양당의 반노동 비정규악법 날치기처리는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이다」. [42] 민주노총, 2006/12/08, 「[성명] 노동자의 기본권을 무력화하는 노동법 개악안 통과를 규탄한다」. [43] 노동해방연대, 2007/02/01, 「한발 한발, 그러나 고지를 향해 똑바로!」, 『노동해방』 53호. [44] 민주노총, 2006/12/22, 「[기자회견문] 1500만 노동자는 보수양당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45] 김대중 정권 시절을 거치는 동안 자주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던 ‘민주노조운동’은 노무현 정권 시절 동안 자주성을 더욱 상실했다. 김금수·박태주·김영대 등 노무현 정권에는 민주노총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진 노동운동 출신 인사들이 포진한 까닭이기도 했지만, 정부 측 인사들의 일상적인 개입과 영향력 행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민주노총의 주체적 상태 때문이기도 했다. [46] 윤애림, 2015/01/29, 「2015년 민주노총 총파업은 2006년과 어떻게 다른가」, <매일노동뉴스>. [47] 윤애림, 2016, 「2000년대 비정규직 연대운동과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의 권리입법 투쟁을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2권 1호, 224쪽. [48]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296~298쪽. [49]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18~20쪽. [50]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398~399쪽. [51] 민주노총, 2007/08/21, 「제41차 임시대의원대회 결의문」. [52]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514쪽. [53]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1권, 봄날의박씨, 18~20쪽. [54] 프레시안, 2008/08/31, 「‘434일 만의 타결’ 뉴코아 노사, 이면 합의 있었다」. [55] 유경순, 2020, 『2007~2008년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 510일』 2권, 봄날의박씨, 392~393쪽. 병점 분회장이던 서형태는 애초 사직서 제출자 12명에 포함됐지만 이를 거부하고 유일한 해고자로 남았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2026-04-19 | 조회 27,354 -
[번역] 퀴어 억압은 자본주의의 심장에 새겨져 있다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 구조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사회주의만이 퀴어 해방, 나아가 모두의 성적 해방을 위한 토대를 만들 수 있다. 2004년에는 미국인의 60퍼센트가 동성 결혼에 반대했다. 지금[2019년]은 61퍼센트가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후보 중 한 명은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었고, 오늘날 젊은 세대의 절반 이상은 자신을 비이성애자로 정체화한다. 굉장한 변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 권력의 최상부에 올라선 이들과 여전히 억압으로부터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이들의 격차는 엄청나게 크다. 퀴어가 CEO가 되고 권력의 중심에 진입하는 바로 그 나라에서, 흑인 트랜스 소녀는 생존을 위한 성노동에 내몰리고 레즈비언은 ‘교정’이라는 이름으로 강간당하며 트랜스 여성 록사나 에르난데스는 이민자 구금시설에서 목숨을 잃는다. LGBTQ+ 억압의 위력은 여전히 무시무시하며, 트랜스, 유색인, 빈곤층에게 특히나 강력하다. 우리가 쟁취한 권리와 소수의 특권은 다수의 비참한 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 모순을 앞에 두고서 LGBTQ+ 해방은 사다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새로운 권리를 하나씩 쟁취할 때마다 퀴어는 해방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LGBTQ+ 억압은 사회 구조 자체에 각인되어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깨부수지 않는 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 노동 착취에 기반한 체제인 자본주의는 광범위한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열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LGBTQ+ 정체성 자체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자유, 해방, 정의라는 자신의 약속을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행할 수 없다. 퀴어에게 가해지는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 모두의 산물이며, 특히 노동 소외와 핵가족이 요구하는 경직된 젠더 역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LGBTQ+ 해방, 더 나아가 넓은 의미의 성적 해방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억압은 이 체제 안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새겨져 있다. 반면에 사회주의는 LGBTQ+ 억압을 종식시킬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구성 어떤 인권 옹호자들은 LGBTQ+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존 디에밀리오는 이 같은 입장을 “영원한 동성애자라는 신화”라고 부르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동성 간 욕망과 젠더 유동성은 역사 전반에 걸쳐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존재해 왔지만, 그것의 사회적 역할과 수용 정도는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달랐다. 어떤 문화에서는 동성 간의 성적 관계가 의례적 역할을 수행했고, 다른 문화에서는 논바이너리적 존재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이전 유럽 사회에도 “크로스 드레싱 금지법”과 수많은 남색(Sodomy) 금지법이 존재했지만, 봉건제 하에서는 공고한 LGBTQ+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범죄화된 행위가 있을 뿐이었다. 디에밀리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노동 체제야말로 “20세기 후반의 수많은 남성과 여성이 스스로를 게이라 부르고, 자신들이 유사한 남녀 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하며, 그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를 되돌아보며 전혀 다른 맥락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LGBTQ+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에서 감추어진 것들(Hidden from History)』 서론에서 주장하듯이,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동성애자 역할은 근대에 발전한 것인데,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의 동성애자 역할은 아니다.” 역사적 고찰의 대상은 퀴어 정체성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근대적 가족의 형성, 근대적 젠더 역할, 이성애라는 개념 자체 역시 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구성물들을 낳는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젠더·섹슈얼리티·가족·사랑이 조직되는 방식은 상당 부분 인간의 생산 관계에 기반한다. 우리가 먹을 것을 확보하고, 공동체를 조직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쏟는 방식을 결정하는 그 관계 말이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은 생산의 발전과 가부장적 가족의 발전을 연결하고, 사유 재산이야말로 남성에 대한 여성 종속에 기반한 가족 단위를 만들어 낸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엥겔스가 부정확한 인류학 연구를 바탕으로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흐름에 대한 전반적 성찰은 옳다. 가정 대신 작업장이 생산의 장이 되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가족 관계를 탄생시킨다. 가족에게 필요한 재화가 한때는 가정에서 생산되었지만, 이제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 구매된다. 가정은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단위로, 노동자를 먹이고 입히며 아이들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길러내는 장소로 남는다. 한편 남성은 원자화된 임금 노동자가 되어, 고향을 떠나 어디서든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게 되었다. 가부장제는 이 배치 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여성은 임금 노동이라는 짐을 지든 아니든 간에 가정 내 무급 노동을 떠맡는다. 이 사적 소유와 노동력 판매 체제로부터 근대 민주주의가 출현했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 노동 시장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며 누구에게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가 있다는 관념도 생겨났다. 존 디에밀리오가 주장하듯 자본주의의 선택 개념은 가족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트너십은 점차 욕망과 친화성이라는 근대적 이상에 기초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선택”과 “자유”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자본주의 역사 전반에 걸쳐 “만인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 의미하는 것은 곧 법에 새겨진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트랜스 혐오였고, 이것은 국가의 억압 기구에 의해 강화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학교, 가족, 교회 같은 사회 제도에 의해 제한되며, 이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허용 가능한” 성적·젠더 규범을 주입하려 한다. 선택의 자유는 경찰, 감옥, 법률 같은 억압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기구에 의해서도 제한되며, 자본주의의 경직되고 잔혹한 경쟁 구조 안에 가두어져 있다. 사회적 낙인과 억압 또한 자유를 제약한다. 식민주의는 젠더와 성적 역할을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강제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원주민 공동체에 이식되었고 토지는 약탈당했으며 원주민은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되었다. 식민자들은 군대를 동원해 논바이너리 구성원들을 표적 공격하고, 원주민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제하고, 기숙 학교에서 원주민에게 규범적 성별 역할을 주입하는 등 집단 학살에 준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삶에서 선택할 권리에 관한 자본주의적 관념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성 파트너십이라든가 출생 시 지정된 것과 다른 젠더를 “선택”할 가능성을 열었다. 존 디에밀리오의 주장에 따르면, “가구에서 경제적 자립을 박탈하고 섹슈얼리티와 출산의 분리를 촉진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일부 남성과 여성이 동성에 대한 성애적·감정적 끌림을 중심으로 개인의 삶을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수전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는 디에밀리오가 자본주의 체제의 “동성애자”에 대해 묘사한 것과 동일한 과정이 트랜스 구성원들에게도 적용되었다고 『트랜스젠더의 역사(Transgender History)』에서 주장한다. 사람들이 공동체 바깥으로 이주할 자유를 갖게 되면서 출생 시 지정되지 않은 젠더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진하는 과정에서 피억압자들은 자본주의가 약속한 평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불평등을 나타내는 명백한 법률적 지표 상당수는 피억압 민중의 운동으로 타파되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여성과 유색 인종은 법 앞의 평등을 거의 완전히 쟁취해 냈다. 그러나 법적 평등이 곧 삶의 평등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구조 속에 새겨진 억압을 유지하면서도 형식적 평등은 기꺼이 양보하는 경우가 많다.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 혐오가 바로 그렇다.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성적 비참함 자본주의에서 가족 단위는 선행하는 가부장적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은 이성애 규범적 젠더 역할에 기초하는데 이 역할은 “과학”과 “생물학”을 근거로 삼는다고 여겨진다. 여성은 요리, 청소, 육아, 빨래 같은 재생산 노동에 맞는 생물학적 성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무급 가사 노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자본주의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데 필수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성별 역할, 특히 가족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급 육아와 가사 노동에 막대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비용을 직접 지불해야 한다면 이윤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어머니이자 돌봄 제공자가 될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동성 커플, 출산하지 않는 여성, 전업주부 아버지, 그 외의 비전통적 본보기들까지 우리 사회에 반례가 넘치도록 있는데도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자본주의 태동기부터 흑인 여성은 흑인 남성과 나란히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노동에 내몰렸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이 이데올로기는 지속되어 왔다. 오히려 이 사실은 흑인을 병리화하는 데 이용되어, 제도적 인종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배상을 요구하는 대신 핵가족을 통해 흑인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여성 해방 운동과 LGBTQ+ 권리 운동 이후 가족과 젠더 역할이 좀 더 유동적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스–이성애 규범적 가족 모델은 여전히 건재하며 퀴어 억압을 재생산하고 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낭만적 가족 파트너십이 사랑을 바탕으로 선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생활비를 나누어 지불할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는 막대한 경제적 유인이 존재하여, 운 좋으면 지루하고 최악의 경우 폭력적인 관계에 매이게 된다. 이는 동일 노동에 더 적은 임금을 받는 여성에게, 특히 유색 인종 여성과 노동자 계급 여성에게 더욱 절박한 현실이다. 이 구조는 각 가족이 사회 전체의 최선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최선을 위해 행위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복무한다. 자본주의는 가족의 경제적 필요와 더불어 낭만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퍼뜨린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올바른” 젠더 역할이 주입되며, 우리는 사랑하는 파트너가 자본주의의 소외를 치료하여 우리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세뇌당하는데, 이것은 특히 여성을 겨냥한 메시지다. 전통적 가족 단위는 소외되고 고립된 세계 한가운데에서 지지의 공간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일부일처제가 강제하는 성적 비참함의 단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 성 연구자 빌헬름 라이히는 『성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결혼 제도의 모순은 결혼의 성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이 충돌하며 비롯된다…완전히 충족된 성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결혼 도덕의 조건(평생 오직 한 명의 파트너)에 복종할 가능성은 낮으므로, 즉 성-경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성적 욕구의 고질적인 억압, 특히 여성에 의한 억압이다. 가족은 우리의 성적 욕망과 충돌하는 필수적 경제 단위다. 라이히의 설명처럼 가족 구조는 욕망을 억압하기 위한 구조이며, 여기에 나는 동성 간 욕망 및 젠더 탐색에 대한 억압을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모범적인 “전통적” 가족이란 노동자 계급 대다수에게 신기루에 가깝다. 노동자 계급은 물려줄 사유 재산이 없고, 노동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여성에게는 경직된 성별 역할을 강제할 수 없으며, 너무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거나 동생들의 부모 역할을 떠맡아야 하는 노동자 계급 아이들에게는 “순수한 어린 시절”이 없다. 대량 투옥, 추방, 서구 제국주의가 강제한 이주로 인해 해체된 가족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부유한 여성은 관리자 역할을 하면서 다른 여성들(대개 흑인, 갈색 피부, 이민자 여성)을 조직해 가정 내 가사 노동을 맡긴다. 여성 해방 운동이 전개되고 (남성의) 가족 임금이 해체되면서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데, 이것이 자본가의 이윤 추구와 결합하면서 전통적 가족 단위는 무너지고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가 핵가족 구조에 의해 떠받쳐지는 동시에 핵가족 구조를 파괴한다는 모순은 “가족 수호” 이데올로기가 출현하는 조건이 되는데, 이 같은 이데올로기는 대개 가짜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반한다. 정치인들은 부모에게(보통 어머니 또는 흑인 아버지에게) 자녀와 더 긴 시간 함께하지 않는다고 훈계하고, 우파는 가족의 해체를 애도한다. 국가는 총기 난사, 부실한 교육, 아동 비만 증가 등 모든 사회적 병폐의 원인을 가족의 붕괴로 돌린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가족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도, 자본주의적 경제 조건은 언제나 가족을 잠식했으며 현재의 사회적 재생산 위기 또한 자본주의 위기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LGBTQ+ 억압과 부르주아 가족 LGBTQ+는 가부장적 가족 단위의 근간을 이루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틀렸음을 그 자체로 입증한다. 직업을 가진 여성들, 입양, 체외 수정 등의 사례가 이미 생물학적 결정론의 기만성을 입증하지만, LGBTQ+는 “전통적 가족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우파에 의해 특별히 표적이 되어 왔다. 그리고 어떤 차원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LGBTQ+는 출생 시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이 반드시 여성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여성인 사람이 반드시 남성에게 끌리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자녀를 보살피는 어머니일 필요도 없고, 집안을 돌보도록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존재도 아니다. 바로 이 불편한 사실들 때문에 자본주의에게는 LGBTQ+를 억압하고 주변화하면서 우리가 “정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수많은 제도들은 전통적 가족 및 젠더 모형에 특히 깊이 빠져 있고, 일부 동성 커플을 주변부에 받아들인 것만으로는 이 모형이 유의미하게 대체되지 않았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의류 매장의 아동용품 코너를 걷기만 해도 젠더 역할 고정 관념이 여전히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가족 단위가 중요하다고 설교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동성 관계는 죄악이다. 학교 역시 젠더 규범을 떠받치는 데 일조한다. 이를테면 학교가 정의한 남아와 여아 구분에 따라 화장실 앞에 줄을 서도록 요구하며, 많은 학교는 트랜스 아동들이 자신의 젠더에 맞는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류에 편입한 LGBTQ+ 구성원들은 가족을 파괴하지 않았다. 게이와 레즈비언 정체성이 부분적으로 정상화되었지만, 동성 간 욕망과 젠더 탐색을 억압하는 체계는 여전히 굳건하다. 물론 이 정상화는 게이 크루즈, 프라이드 깃발, 레인보우 아디다스 스니커즈에 이르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틈새 시장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정상화는 근저의 시스-이성애-가부장적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만 허락된다. 말하자면 가족 단위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로 기능하는 한에서, 두 남성의 결혼도 허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선택적 정상화는, 경찰에 저항하는 스톤월의 뿌리로부터 급진적 퀴어 운동의 노골적 섹슈얼리티와 이성애 규범성 거부에 이르기까지 LGBTQ+ 운동의 가장 전복적인 측면들을 길들이면서 작동했다. 정상화는 또한 퀴어들의 사교를 위한 비상품화된 공간을 파괴하면서 진행되었다. 뉴욕의 더 피어스(The Piers)처럼 주로 유색 인종 퀴어들이 어울리고 유혹하고 섹스하던 장소들 말이다. 피어스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주로 유색 인종 퀴어가 모이던 공공 공간은 경찰의 단속과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자 장 니콜라가 주장했듯, “부르주아지가 게이에게 이성애자와의 형식적 평등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심지어 동성 커플을 제도화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해도—그럼으로써 게이 정체성의 환상은 강화된다—실질적 평등을 확립하기란 무한히 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사회 유기체 전체 내에 동성애적 구성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 텐데, 이는 남성적 지위와 남성성에 대한 너무나 급진적인 도전이어서 가족과 부르주아 문화 전체의 근본적 격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LGBTQ+의 욕망과 젠더를 사회에 온전히 통합하려면, 일부 사회적 태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 자체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만드는 성적 비참함 그러나 LGBTQ+ 억압은 자본주의적 사회 재생산의 일부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에 새겨진 성적 비참함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체제는 자기 몸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해 시장에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절대다수에 대한 착취에 의존한다. 이것이 인구 대다수의 소외와 성적 비참함의 물적 토대다.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설명하듯이, “노동은 노동자에게 외적이다. 즉,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속에서 자기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소모시키고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이것이 소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 창의성, 생각을 부정하고 억누르고 무시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노동자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회복 불가능한 방식으로 소진시키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무엇보다 가장 고되고 소외된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은 흔히 미등록 이주민과 유색 인종이다. 젠더적·성적 비참함은 이 같은 일상의 물적 조건에서 파생된다. 즉, 하루의 대부분을 바치는 소외된 노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외는 작업장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외는 우리의 삶과 정신 전체를 지배하며, 섹슈얼리티 안으로까지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시간 부족 문제가 있다. 일하고, 쉬고, 아이를 돌보고, 성적 관계든 아니든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쾌락을 부정하면서 소외된 노동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고, 퇴근 후에 기진맥진한 몇 시간 동안 그 소외를 깨고 자기 자신이나 타인과 의미 있는 유대를 쌓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노동 시장은 우리 몸을 망가뜨리고 시간을 잠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기구는 특정한 젠더 표현과 수행을 노동 시장의 요구와 결부시키며, 이를 생산적 시민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간단한 예시를 하나 들면, 다음 두 광고의 시간 차는 불과 10년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1943년 J. 하워드 밀러가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여성 노동자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걸 여자도 열 수 있다고요?”는 1953년 알코아 알루미늄의 광고다. 첫 번째 광고는 수많은 남성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상황에서 산업 노동에 여성이 필요했던 역사적 시기를 반영한다. 두 번째 광고는 저가 상품의 대량 생산에 기반한 새로운 경제의 산물로, 노동 시장에서 축출된 여성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불과 10년 사이에 여성은 근육을 자랑하던 존재에서 케첩 병도 열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위해서 불평 없이 희생하는 남성 가장이라는 구성물은 자본주의에 막대한 이윤을 안겨 주었다. 이를테면 앨런 시어스(Alan Sears)가 『몸의 정치(Body Politics)』에서 설명하듯, 20세기 초 포드는 “부양 가족을 먹여 살리는 능력과 힘들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노동을 견디는 능력에 기반한 남성적 자부심”을 고취했다. 인종화된 젠더 구성물 역시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친다. 흑인 남성을 범죄자로, 흑인 여성을 강인한 존재로 구성함으로써 교도소 체제 안팎에서 극도로 착취당하는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젠더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종종 LGBTQ+에 대한 사회적 징벌, 때로는 물리적 징벌을 의미했다. 이 경직되고 사회적으로 강요된 젠더 역할은 개인적 표현이나 탐색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특히 여성, LGBTQ+, 여성이자 LGBTQ+인 우리에 대해서 젠더적·성적으로 억압하는 체제의 일부다. 자본주의 특유의 자유와 억압의 혼합물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성적 비참함의 체계를 만들어 낸다. 1960년대 후반 장 니콜라는 “동성애자”에 대한 낙인이 퀴어를 노동 시장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하며, 이 원리가 “동성애적” 욕망을 스스로 억누르는 “이성애자”로 정체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규율 효과를 갖는다고 썼다. 결국 사회가 규정한 협소한 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류 노동 시장에서 주변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도 젠더 비순응적인 사람들은, 심지어 일부 게이나 레즈비언까지도, 특정 직종에서 배제되고 승진을 거부당하며 직장에서 계속 차별받는다.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는 많은 이들은 일자리에서 완전히 거부당하는데, 수많은 유색 인종 트랜스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유색 인종 트랜스는 흔히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의 산업 예비군으로 남는다. 이 사실은 모든 이의 욕망을 규율한다. 광범위한 젠더적·성적 경험이 인구 대다수에게 차단되고, 계속해서 LGBTQ+를 주변화함으로써 이러한 경험이 수치심과 비밀의 영역으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사회주의와 성적 해방 LGBTQ+ 억압은 핵가족 단위와 근대 노동의 소외를 통해 강요되는 일반화된 비참함과 깊이 연관된다. 일부 게이 남성이(그리고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레즈비언이) 기업과 정치의 영역에서 사다리를 오른다 해도, LGBTQ+ 주변화는 자본주의의 생산·재생산 관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점진적인 권리 축적만으로는 LGBTQ+ 해방에 불충분하다. 아무리 많은 법이 통과되더라도 LGBTQ+ 억압은, 더 넓게는 섹슈얼리티의 억압은, 이 체제 안에서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LGBTQ+ 해방을 위해서는 가족의 해체와 소외된 생산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해체가 모두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퀴어 해방의 필수 조건이다.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족의 종식을 사회주의 정치의 중요한 부분으로 제시했다. 사회주의가 사랑이나 로맨스의 종말을 요구한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정치적 단위로서의 가족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구의 생존도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좌우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가족의 종식이란 곧 파트너 없이도, 혹은 해로운 파트너를 떠나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물적 안전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볼셰비키는 온 힘을 다해 이 문제에 매달렸다. 그들은 새로운 물적 토대 위에 새로운 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가족이 국가처럼 차츰 소멸하기를 기대했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당이 스탈린화되기 이전까지의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가족 구조를 구식으로 만들겠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그들은 진부한 가사 노동을 개인의 손에서 거두어 (이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손에 맡기고자 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정치는 여성에 대해서든 LGBTQ+에 대해서든 볼셰비키의 정치와는 전혀 달랐다. 가족의 종식에 관해 쓴 니콜라이 크릴렌코(Nikolai Krylenko) 같은 이론가들은 체포되어 살해되었고, “남색”과 성노동은 범죄화되었다. 스탈린 정부는 전통적 성별 역할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1944년 스탈린은 “모성 영예 훈장(Order of Maternal Glory)”을 제정해 출산한 자녀 수에 따라 여성을 서열화했다. 볼셰비키당 내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의 지도자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이러한 비판은 제4인터내셔널의 형성 과정에서 명확히 표현되었다. 트로츠키는 『이행 강령』에서 이렇게 쓴다. 기회주의 조직들은 본성상 노동 계급의 상층부에 관심을 집중하며, 따라서 청년과 여성 노동자를 무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쇠퇴는 임금 노동자이자 가정주부인 여성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제4인터내셔널의 각 부문은 노동 계급의 가장 착취받는 층에게서, 즉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지지 기반을 찾아야 한다. 트로츠키는 가족의 종식과 가사 노동 사회화를 인간 해방의 필수 조건으로 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초기 볼셰비키들을 이어 주는 고리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예컨대 누군가에게 저녁을 만들어 주는 일이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자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젠더 역할과 어쩌면 젠더 그 자체마저 물적 토대를 상실한다. 젠더 역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사라지면서 다수의 젠더, 젠더의 부재, 유동하는 젠더, 이 유동성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생산 노동이 재조직되는 과정 또한 성적 소외의 종식에 기여할 것이다. 기술은 우리 모두가 더 적은 시간 일하면서도 모든 이에게 충분할 만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한다. 현재 실업 상태거나 수감 중이거나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를 고려하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하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더 이상 직장에서 질식당하지 않는 우리의 시간과 창조적 잠재력을 해방시킬 것이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이 같은 미래를 구상했다. “필요 노동에 전용되어야 하는 본능적 에너지의 양은 (노동 자체가 완전히 기계화되고 합리화되어) 매우 적어질 것이므로, 외부적 힘에 의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광범위한 억압적 제약과 변형이 붕괴할 것이다. … 생의 본능인 에로스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방될 것이다.” 단축되고 덜 고된 노동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연결되었다고 느끼게 만들 것이며, 휴식하고 유혹하고 섹스할 시간을 줄 것이다. 완전한 성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코 구경하지 못할 이윤을 위한 임금 노동의 폭정으로부터 우리의 시간이 해방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욕망 위에 세워진 사회는, 무의미한 노동 대신 하루 대부분을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에 쓸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모든 기술을 사용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하듯이 공산주의는 구속 없이 이것저것 해 볼 자유를 약속한다.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돌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쓰지만, 사냥꾼이나 어부나 목동이나 비평가가 되지는 않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이 자유는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도 적용되어, 낮에는 부치 다이크, 밤에는 드래그 퀸, 주말에는 도미나트릭스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와 함께 젠더 역할이 불필요해지고 자유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가능성, 우리의 젠더적·성적 해방의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사랑과 섹슈얼리티를 핵가족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우리는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볼셰비키 지도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날개 달린 에로스에 길을(Make Way for the Winged Eros)』에서 이 발상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기심이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사랑의 토대 위에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는 동지애와 연대라는 원칙 위에 건설되고 있다. 연대란 공동의 이익에 대한 자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집단의 구성원들을 잇는 지적·정서적 유대에도 달려 있다. 연대와 협력 위에 사회 체제를 건설하려면 사람들이 사랑과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노동자 계급의 모든 구성원이 같은 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의 고통과 필요에 응답하고, 타인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고무하고자 한다. 이 모든 ‘따뜻한 감정들’—섬세함, 연민, 공감, 호응하는 마음—의 원천은 하나다. 이 감정들은 협소한 성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사랑의 여러 측면이다. 사랑과 욕망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이 미래 각본에서, 우리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작동할까?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정체성들을 위한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될까? 아니면 이름 따위는 전혀 필요 없게 되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전망했듯이 “모든 인간이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인간적으로 다르며, 완전히 자유로운 그런 세계”에서 살게 될까? 레프트보이스(Left Voice)에 2019년 7월 5일 게재된 기사를 번역함. 글쓴이: Tatiana Cozzarelli 번역: 강성윤 /* 스크롤 여백만 주고, 화면에는 안 보이게 */ .ftn-target { display: inline-block; /* 줄바꿈 안 생김 */ width: 0; height: 0; scroll-margin-top: 200px; }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 name="_ftn1", name="_ftn2", name="_ftnref1" ... 전부 대상 document.querySelectorAll('a[name^="_ftn"]').forEach(function(a) { var idValue = a.getAttribute("name"); // 이미 같은 id의 요소가 있으면 또 만들지 않음 if (!document.getElementById(idValue)) { var span = document.createElement("span"); span.id = idValue; span.className = "ftn-target"; a.parentNode.insertBefore(span, a); } }); }); /* 본문 각주 번호 + 아래쪽 각주 번호 색 지정 */ a[href^="#_ftn"] sup, a[href^="#_ftnref"] sup { color: #BF202D; } /* 밑줄이 보기 싫으면 */ a[href^="#_ftn"], a[href^="#_ftnref"] { text-decoration: none; } /* 마우스 올렸을 때 살짝만 강조하고 싶으면 (선택) */ a[href^="#_ftn"]:hover, a[href^="#_ftnref"]:hover { text-decoration: underline; } /* 페이지 전체가 오른쪽으로 넘치지 않게 */ html, body { max-width: 100%; overflow-x: hidden; } /* 본문 영역 폭 강제 고정 + 긴 단어/문장도 줄바꿈 */ #bo_v_con, .bo_v_con, .cke_editable, article { max-width: 100%; overflow-wrap: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 구형 브라우저용 */ } /* 워드에서 붙은 이미지/표가 화면 밖으로 안 나가게 */ #bo_v_con img, #bo_v_con table, .bo_v_con img, .bo_v_con table, .cke_editable img, .cke_editable table, article img, article table { max-width: 100% !important; height: auto; } /* 워드가 p, span에 폭을 박아놓은 경우 강제로 해제 */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bo_v_con p[style*="width"], .bo_v_con span[style*="width"], .cke_editable p[style*="width"], .cke_editable span[style*="width"], article p[style*="width"], article span[style*="width"] { width: auto !important; max-width: 100% !important; } /* 기본 blockquote 스타일 */ blockquote { border-left: 4px solid #c0392b; /* 사이트 분위기와 맞는 붉은 계열 */ padding: 12px 18px; margin: 20px 0; background: #fafafa; font-style: normal; color: #333; line-height: 1.6; } /* blockquote 안의 p 태그 정렬 */ blockquote p { margin: 0 0 10px 0; text-align: justify; } /* 마지막 p 태그 여백 제거 */ blockquote p:last-child { margin-bottom: 0; } /* 본문 안 링크 스타일 */ #gpt-article a { color: #cc0000 !important; text-decoration: none !important; } #gpt-article a:hover { color: #990000 !important; } // https://로 시작하는 링크만 target="_blank" 적용 document.addEventListener("DOMContentLoaded", function () { const links = document.querySelectorAll('#gpt-article a[href^="https://"]'); links.forEach(link => { link.setAttribute("target", "_blank"); link.setAttribute("rel", "noopener noreferrer"); }); });2026-04-19 | 조회 22,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