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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약점을 알고 있다!” 노동자를 노예로 만드는 고용허가제 - 미봉책으로 생색만 내려는 이재명 정부스리랑카 이주노동자 지게차 학대 사건 사진: 전남이주노동자네트워크 “니 약점을 알고 있다. 베트남으로 가든지, 불법으로 일하든지. 알아서 해라. 사업장 변경은 해줄 수 없다.” 최근 내가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법률지원센터 소금꽃나무에 사업장 변경 상담을 하러 온 한 베트남 노동자가 사장의 말을 녹취해서 들려줬다. 이 노동자는 사업장 변경 횟수 세 번을 다 썼다. 임금이 한두 달씩 밀리고, 이 노동자에게만 지문인식기를 못 쓰게 하는 괴롭힘도 있어 노동자 책임이 아닌 사유로 사업장 변경을 허가해 달라고 했다. 내가 직접 사장과 통화도 했는데 사장은 이 노동자가 일을 잘 못하는 데다 자기가 키우는 텃밭에 음식물 쓰레기를 잘못 버렸다고 했다. 이 사장의 말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놀라긴 했지만, 이 사례는 심각한 사례 축에 끼지도 못한다. 신발로 맞다 사업장 변경을 요구했더니 사장이 뜨거운 커피를 얼굴에 부어 충격을 받은 네팔 노동자의 사건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사장은 이주노동자를 업무 방해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링크) 현대판 노예제도 최근 전남 나주의 벽돌 공장에서 스리랑카 이주노동자가 지게차 화물에 묶인 채 학대를 당한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정부가 고용허가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 스리랑카 노동자가 몇 개월 동안 신고를 못 한 이유는 나쁜 일터를 떠날 자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직장을 옮기려면 사장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고용허가제는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파괴했다.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안 되고, 네팔 가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안 되었습니다. 제 계좌에 320만 원이 있습니다. 이 돈은 제 아내와 여동생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2017년 충북 충주의 한 공장에서 일했던 네팔 이주노동자 케샤브 슈레스터는 이런 말을 남기며 목숨을 끊었다. 그는 12시간 맞교대 근무하면서 불면증, 우울증을 겪었다. 회사를 옮겨달라고 요청했고, 그게 어려우면 네팔에서 치료를 받고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모두 거부당했다. 고용허가제(E-9) 노동자는 입국 후 3년 동안 최대 3회만 허용된다. 이후 사업주의 재고용 허가 요청이 있는 경우 1년 10개월간 그 기간을 연장받을 수 있는데 이 기간에는 2회까지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다. 변경 사유는 근로계약 종료나 사업장 휴·폐업, 사용자에 의한 부당 처우, 성폭력, 임금체불 등 아주 일부의 경우에만 인정된다. 이마저도 대부분 노동자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업장 변경 승인을 받아도 90일 안에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강제 출국 대상이 된다. 현대판 노예제도라 부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케샤브 슈레스타가 남긴 유서 사진: 청주청년이주민인권모임 이주민들레 미봉책으로 생색내기 최근 이재명 정부가 언론을 통해 흘리고 있는 개선안은 고용 기간 3년 이후 혹은 4년 10개월 이후에야 사업장 변경 제약을 완화하는 것이다. 3년 동안 죽으라 착취당하다 사장에게 1년 10개월 동안 재고용 허가를 받은 노동자 또는 그렇게 해서 총 4년 10개월(3년+1년 10개월)을 일하다가 귀국한 후, 소위 '성실 근로자'로 재입국한 노동자에게만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주겠다는 생각이다. 애초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3년 혹은 4년 10개월 후로 미루며, 3년 혹은 4년 10개월 후를 위해 자본가에게 더 철저히 순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안을 마치 그럴듯한 개선안으로 포장하려 한다. 2021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내놓은 연구용역 보고서도 ‘1년 이후 사업장 변경 자유화 안’을 제시했는데, 그에도 훨씬 못 미친다. 또한 이 개선안은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을 고용 기간에 따라 갈가리 찢어 놓는다. 또한 정부는 예외적으로 인정되는 사업장 변경 사유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정주노동자들의 권리도 수없이 짓밟는 노동부와 법원을 상대로 이주노동자가 예외 사유를 스스로 입증하기란 어렵다.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주에게 사업장 변경 제한 사유에 대해 입증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횟수 문제도 중요하다. 앞에서 베트남 노동자에게 “니 약점을 알고 있다”고 얘기한 사장은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변경 횟수가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횟수 제한이 남아 있는 한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 주장이 카운트(변경 횟수)에 포함되느냐, 안 되냐를 신경 쓰게 되어 권리를 주장하기 힘들다. 아직 정부의 개선안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얘기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개선안은 일시적 미봉책으로 생색내기에 다름없다. 변경 사유와 변경 횟수를 말하기 전에 사업장 변경을 가로막는 제도 자체가 문제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고용허가제는 평소에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자본가들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준다. 이주노동자는 먼저 사표를 제출할 수 없으니, 사업장을 박차고 나올 자유가 없으니, 자본가들은 사업장의 노동 현실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야만적 인권 침해는 새로운 일이 전혀 아니다. 2004년 8월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이래 이주노동자들은 살려 달라는 외침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은 당연한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동정의 대상으로 남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나날이 확산하고 있다. 극심한 경제위기 앞에서 ‘외부의 적’을 만들어 자기 살길을 찾으려는 퇴행적인 정서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일시적인 미봉책은 이주노동자들을 지옥 같은 현실에 다시 매이게 할 뿐이다. 고용허가제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엄격히 금지하는 '강제노동'인데, 지금까지 수많은 정부는 고용허가제 자체는 그대로 두고 사유나 횟수만 조금씩 건드려왔다. 윤석열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권역 이동 금지’라는 억압까지 추가했다. 매일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 폭로되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주노동자들과 단결해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들의 힘이 아직 너무나 부족하고, 이중 삼중의 억압 아래 놓여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 조직화도 너무나 더뎠기에 현실이 바뀌지 않았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를 낮춘다고 투쟁 동력이 만들어지거나 이주노동자들의 주체적 조직화가 빨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주노동자들도 고용허가제 자체가 고통의 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시 한번 고용허가제가 회피할 수 없는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지금, 이제는 미봉책이 아니라 근본 대안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고용허가제 완전 철폐, 사업장 이동의 자유 쟁취, 이주노동자 포함한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 적용을 소리 높여 외치자. 9월 21일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 참여자를 조직하자. 현장에서부터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고, 이주노동자들이 권리의 주체로 일어설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지원과 연대를 조직하자. 계급적 연대, 사회적 연대의 깃발 아래 고용허가제 철폐 투쟁을 확산시키자. "강제노동 철폐! 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 - 2024년 전국이주노동자대회 사진: 이주노조2025-07-30 | 조회 7,428 -
독일 좌파당은 자본주의에 넌더리 난 청년들을 언제까지 붙들 수 있을까?베를린에서 열린 좌파당 선거 파티. 가운데 있는 인물이 좌파당 공동대표 하이디 라이히네크다 사진: Jens Gyarmaty 예상을 뛰어넘은 좌파당의 선전이 말하는 것 지난 2월 독일 총선에서 좌파당(Die Linke)이 이변을 연출하면서 큰 관심이 모아졌다. 좌파당은 전 총선 에서의 4.9%에서 3.9%를 추가 득표해 8.8%(64석)를 차지했으며, 베를린 4개 지역과 튀링겐, 작센까지 모두 6개 선거구에서 승리했다. 특히 18~24세 유권자에게서 약 25%를 득표했는데, 이는 이전 선거에 비해 17% 상승한 결과였다. 지난해 12월까지 좌파당의 지지율이 3%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또 좌파당의 유명 정치인이었던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2023년 연방의원 16명과 함께 탈당한 뒤 치러진 선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상징적인 반등이었다. 반면, 사민당은 9.3% 감소한 16.4%를 득표해 전후 역사상 최악의 결과를 기록했고, 녹색당도 3.1% 감소한 11.6%에 그쳤다. 기사/기민당 연합은 28.5%로 제1당이,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은 20.8%로 2위를 차지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독일 사회가 우경화되는 가운데, 좌파당이 좌측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좌파당의 선전은 2007년 창당 이후 근 20년 만에 거둔 중요한 성과였다. 창당 당시 10만 명 이상이던 당원은 축소되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3분의 2 이상이 법정 정년을 넘겼지만, 최근 선거에서는 400만 명 이상이 좌파당에 투표했고 6만 명 이상이 당에 가입해 당원 수가 두 배로 늘었다. 평균 연령도 낮아지고 여성과 퀴어 당원도 증가했다. 서독 지역에서도 지지가 확대됐다. 좌파당이 선전한 핵심 이유는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다른 길을 찾는 청년, 여성, 퀴어 등 사회 집단을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방화벽’을 기민/기사당연합이 무너트린 사건이 좌파당이 선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 나치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역사적 인식 속에서, 나치 옹호와 이민자 혐오 논란을 일으켜 온 극우 AfD와의 협력을 일체 거부하는 합의를 유지해 왔고, 이 합의를 ‘방화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총선 전 기민/기사당 연합이 AfD와 함께 이민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전 사회적인 논란을 촉발시켰다. 수도 베를린에서만 최소 16만 명이 거리로 나와 “우리가 방화벽이다”를 외치며 저항했고, 각 정당들도 규탄 입장을 냈다. 그런데도 메르츠 기민/기사당연합 대표는 “우리가 제안한 정책이 옳다면, 누가 이를 지지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주로 10~20대의 청년 세대가 방화벽 논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좌파당이 청년세대 지지율을 높이는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민주주의냐, 파시즘이냐”의 문제였고, “우리 세대의 미래를 누가 지킬 것인가”에 대한 절박한 질문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그들에게 좌파당 공동대표이자 연방의원인 하이디 라이히네크가 기민/기사당연합을 향해 “파시즘 부활의 길을 닦고 있다”라고 퍼부은 열변은 청년세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가령 그의 영상은 틱톡에서만 3천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좌파당 외 다른 정당들도 이민 반대 결의안에 반대했지만, 사민당과 녹색당은 기민/기사당과의 연정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들과 난민 정책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자라바겐크네히트당 역시 이민 반대 법안을 지지했다.1) 결국 그들의 유권자들은 좌파당으로 대거 이동했다. 1)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이미 앙겔라 메르켈 총리 시절부터 정부의 난민 환영 정책을 비판하며 이른바 ‘워크주의(Wokism)’에 반대하는 ‘좌파 보수주의’라는 이름의 인종주의를 구축해왔다. '워크(woke)'는 애초 미국 흑인 인권운동에서 비롯된 용어로, 인종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각성을 뜻했으나, 최근 우파들을 중심으로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하고 비꼬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방화벽이다 (Wir sind die Brandmauer) 사진: Julius Liebing 이외에도 좌파당은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청년 세대가 겪는 생계와 주거 부담을 반영한 공약을 내놓았다. 실제로 독일 경제위기는 심각하며 이는 누구보다도 청년세대의 현실과 미래를 억누르고 있다. 지난 3년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야기된 에너지 위기 속에서 독일의 전기세와 유류비는 4년 전 대비 40% 이상, 천연가스 가격은 90% 이상 올랐으며, 임대료는 10년 전에 비해 30% 이상 상승했다. 2021년 2월 기준 100유로의 가치는 현재 약 84유로에 불과하다. 독일 국민의 83%가 경제 상황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는 2022년의 39%와 비교해 크게 증가한 수치이며, 독일대안당(AfD) 지지자들의 경우 그 비율이 96%에 달한다. 청년세대는 이 같은 경제위기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2023년에 발행된 독일청년빈곤보고서에 따르면, 18-24세 청년 25%가 빈곤위험군에 속해 있으며, 현장실습생 40%와 학생 3분의 2가 ‘소득 대비 주거비 부담이 과도한 수준(소득의 40% 이상)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교육기관 '헤르티스쿨'의 동향조사(2022)에 따르면 청년층의 주요 불안 요인으로 임대료, 인플레이션, 기후위기, 노후 빈곤 등을 꼽고 있으며, 특히 14-29세 인구의 71%가 인플레이션, 64%가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 55%가 기후변화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좌파당은 경제 문제가 당파적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좌파당은 기층의 다수를 대변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선거 슬로건으로 “모두는 지배하고자 하지만,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우리는 함께 위에 있는 그들에 맞서 싸운다”와 같은 구호를 채택했다. 또 “임대료가 높으면 집주인이 행복하고, 생활비가 높으면 기업이 돈을 번다”, “마을이 물에 잠기면 부자들은 요트에 올라탈 것이다”, “난방비가 너무 비싸면 누군가는 큰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등의 구호도 내걸었다. 공약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임대료 상한제 및 동결, 주4일제 도입 및 15유로로의 최저임금 인상, 실업급여 2배 인상 등을 내걸었다. 이뿐만 아니라 좌파당은 보수적인 가부장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극우나 기민/기사당연합에 맞서 성평등 정책을 강조하며 청년 여성과 퀴어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었다. 좌파당은 임신중지 비범죄화, 모든 성별 인정, 성별 확정 치료 접근권 향상, 퀴어 노동조합 지원 등 진보적 사회정책을 지지했다. 바겐크네이트가 트랜스젠더 권리를 지지하는 법안에 반대하자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여성 유권자의 11%(남성 7%)가 좌파당을 지지했고, 특히 18-24세 여성의 지지율은 35%에 달했다. 이외에도 좌파당은 15,000회에 달하는 가가호호 방문 선거운동으로 유권자 설득에 성공했다. 신입 당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선거운동에 활력을 더했다. 반자본주의 계급투쟁보다 개량주의 노선 고수 이렇게 좌파당은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기층 민중과 청년 세대, 사회적 약자를 말하며 새롭게 도약했다. 하지만 좌파당이 이들의 열망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실 좌파당의 공약은 탈계급적이며 그 수준도 독일 노동자 민중이 겪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한 수준이다. 가령 좌파당은 주거위기 해결을 위해 6년 간 임대료를 동결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이미 폭등한 임대료에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 몇 년 전 베를린에서 3천 채 이상을 소유한 부동산대기업 ‘도이체 보넨’에 대한 몰수 주민투표 가결을 고려하면, 좌파당은 이보다도 훨씬 미약한 공약으로 자본주의의 소방수 역할을 자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좌파당은 문제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위기 심화로 야기된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자본주의 변혁 전략이 필요하지만, 좌파당은 계급투쟁을 중심에 둔 변혁 전략은 사실상 포기하고, 제도 내 개량주의 노선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기사/기민당연합이 AfD와 함께 추진한 이민 반대 결의안은 자본주의 위기로 인한 불만을 이주민에게 전가하는 수단이었지만, 좌파당은 인종차별철폐를 위한 입장을 명확히 하고 계급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탈계급적인 인종차별 반대 담론에만 치우쳐 있다. 좌파당은 애초 독일식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장본인이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사민당에서 탈당한 ‘노동·사회 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과 동독의 공산당이었던 ‘민주사회주의당(PDS)’이 통합해 만든 정당이다. 노동·사회 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은 슈뢰더의 신자유주의에는 반대했으나 사민주의의 개량주의 노선을 추종했고, 민주사회주의당은 스탈린주의의 한계 속에 있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좌파당은 계급 투쟁을 추동하는 정당이 아니라 개량주의 노선의 선거정당으로서 역할했으며, 그 한계는 반복돼 왔다. 대표적으로 좌파당의 뿌리 중 하나인 민주사회주의당이 베를린 시정부에서 사민/녹색당과 연정할 당시인 2003년에는, 대학·버스·청소 부문 노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공공부문 임금 삭감과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동독 공공주택 수십만 채를 헐값에 민간에 매각해 주거 위기를 초래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또 최근 좌파당은 이민 반대 결의안에는 반대했지만, 그동안 독일 제국주의 정책에는 타협해 왔다는 점도 지적돼야 한다. 좌파당은 최근 메르츠 정부가 계획하는 ‘국가부채 제동장치(Schuldenbremse)’ 완화 개혁안에 대해, ‘국방비로만 배타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이러한 개혁에 ‘열려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신규 차입으로 독일 재무장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용인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튀링겐주 전 총리이자 2025년 2월 직접 선출된 의원 6명 중 1명인 보도 라멜로프는 새 총리와 근본적으로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애초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독일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지지하며, 튀링겐주 총리로서 이미 난민 수천 명을 추방한 이력이 있다. 자본주의 자체에 도전하지 않는 ‘좌파’의 한계를 뛰어넘는 계급적 실천 필요 좌파당의 부상은 낯선 경험이 아니다. 2008년 세계 공황 후 이미 전 세계적으로 좌파가 부상한 바 있다.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 영국 제레미 코빈, 미국 버니 샌더스와 민주적사회주의자(DSA) 등 ‘좌파’들은 자본주의에 염증 난 수많은 청년 세대를 끌어모았고, 시리자나 포데모스는 집권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 역시 알고 있다. 노동자계급과 유리된 그들은 자본가계급과 싸우기는커녕 투항했고, 오히려 그 집행자가 된 사례도 있었다. 좌파당 역시 반자본주의적, 반제국주의적 노동자계급 투쟁을 조직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개량할 수도 없다. 이미 좌파당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그러한 도전을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좌파당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학살 규탄 시위를 7월 진행한다고 밝혔으나, 하마스에 대한 ‘당내 의견이 합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기했다. 팔레스타인 학살은 심화하는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적 침략이며, 전쟁위기 확산의 중요 계기라는 점에서, 집회 연기 결정은 좌파당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좌파당 역시 자본주의에 넌더리 난 청년들의 마음을 언제까지 붙들 수 있을지 의문을 남긴다. 다수의 청년이 다른 길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계급투쟁과 좌파당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자본주의의 폐허 위에서 청년들의 열망이 진짜 해방으로 이어지기 위해 지금 필요한 건, 더 급진적이고, 더 단호한 계급투쟁이다.2025-07-19 | 조회 4,470 -
[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4[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3 아랍 민족주의에서 정치적 이슬람으로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은 중동의 지정학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제국주의의 침투와 함께 1950년대 이후 계급투쟁과 정치적 위기로 분출한 사회적 긴장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시기에 새로운 탈식민 정부들이 다양한 형태의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등장했다. 이라크의 파이잘 1세 국왕,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 이를 대표했다. ‘아랍 민족주의 운동(Arab Nationalist Movement)’,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Arab Socialist Ba'ath Party, 약칭 바트당)’과 같은 조직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이들 지도세력은 주도적 지위에 있었다. 클라우디아 시나티는 “정치적 이슬람,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슬람주의 부상은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거둔 승리에 그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 전쟁 이후, 1950년대에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쿠데타로 (역자: 제국주의에 기생하거나 협력하던) 토착 지배세력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탈식민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에 접어들었다. 1967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 대한 선제공격을 개시했다. 시온주의 군대는 단 6일 만에 세 국가를 패배시키고 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는 물론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까지 점령했다. 이 사건의 충격은 너무나 커서, 나세르가 침공 당일 밤 사임할 정도였다. (역자: 나세르 사임을 반대하는) 수백만 규모의 집회가 나세르의 권력을 유지시켰지만, 나세르주의적 민족주의는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 1970년 나세르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사다트는 경제 개방과 광범위한 민영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 정책은 많은 사람들, 특히 나세르 치하의 호황기 동안 농촌에서 대도시로 대거 이주해 도시 외곽에 정착한 빈민층 대중에게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다. 6일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이 패배하며 만들어진 세력균형에 따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결국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1)에 서명했다. 이집트는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을 인정한 최초의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부분의 아랍 국가에서 구 민족주의 정부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스탈린주의의 변종들과 다른 세속주의 그룹 등 좌익 민족주의 조직들을 일시적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통적 민족주의의 위기 앞에서, 점점 더 정치화된 이슬람주의 조직들이 아랍 청년층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시나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1978년 9월 17일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에 의해 조인된 협정으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중재 및 입회하에 체결되었다. 조인된 두 주요 협정 중 하나인 중동 평화협정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적 주권과 영토 인정, 양국 간 적대관계 청산 및 관계 정상화, 시나이 반도에서의 이스라엘 완전 철수,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해당 협정에 정작 당사자 기구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1978년 12월, 1979년 12월 유엔총회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PLO의 참여가 배제된 것, 협정 내용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권, 자결권, 민족 독립, 주권에 부합하지 않음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결의안을 의결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며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집트는 1979년 아랍연맹에서 퇴출되었다. (역자주) ...기존 이슬람주의 조직과 신생 이슬람주의 조직들은... 이집트와 알제리 등의 국가에서 도시 빈민층을 이룬 실업 청년들과,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확대되었지만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시기에 형성된 대학생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강화되었다. 전통적 조직에 비해, 이 단체들은 종교적 담론과 행동 방식을 급진화했다... 2006년 1월 의회 선거에서 파타(Fatah)를 제치고 승리한 하마스의 대중적 부상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붕괴를, 그리고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및 이스라엘 국가와 추진하던 화해 정책의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신호다. 자브라 니콜라는 아랍 민족주의의 역할로부터 연속혁명의 전체적 동학에 대한 자신의 전망과 부합하는 교훈을 도출했다. 그는 “중동 혁명에 관한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48년 정착민 식민주의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고향에서 쫓아내면서 탄생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웃 아랍 국가로 흩어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랍 국가에서 받았던 사회적 처우를 드러낸다. 아랍 정권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되찾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세르가 집권했을 때, 대중이 아니라 국가 기구들로 이스라엘에 대항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집트인들과 다른 아랍 대중은 물론 팔레스타인인들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1967년 6월 아랍 군대의 패배는 심각한 타격이었으며 아랍 대중은 이에 동요했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대중은 제국주의와 시온주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투쟁에 있어 나세르주의 지도부에 희망을 걸었으나, 이 참패로 나세르주의 지도부가 제국주의에 맞서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이끌 능력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 결과 그들 정권은 흔들렸고, 그들의 파산에 눈뜨기 시작한 대중에 의해 전복될 위험을 느꼈다. 1978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 악수하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오른쪽), 중재자로 참여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가운데) 출처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동 전역에서 일어난 이슬람주의 조직의 부흥과 정치화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서 뒤늦게 나타났으며, 그 결과 고유한 특징을 갖게 되었다. 달 피토(Dal Fitto)는 하마스의 등장을, 아랍 부르주아들의 잇따른 배신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열망을 전달할 수 있었던 소부르주아 지도부의 출현으로 설명한다. 종교적 소부르주아(하마스, 이슬람 지하드)는 무슬림형제단의 영향을 받아 이집트에서 유입된 '혁명적 이슬람' 전략에 따라 움직였다. 이들은 1979년 레자 팔레비의 친제국주의 정권을 전복하고 호메이니의 비호 아래 신정체제를 구축한 이란 시아파 정치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호메이니는 혁명에 참여했던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집단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주도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된 직후, 여성에 대한 히잡 착용 의무조치가 강제되자 같은 해 3월 8일 여성의날 벌어진 반정부 시위. 1979년 팔레비 왕정을 타도한 이란 혁명에 앞서, 이란 노동자계급은 1978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란 전역을 마비시키는 총파업을 펼쳤다. 총파업 조직 과정에서 노동자평의회 성격을 지닌 ‘쇼라’가 등장한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모두 민족해방운동의 일부를 이끌며 광범위한 사회적, 정치적 유권자 기반을 갖춘 조직이다. 시나티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파타(Fatah)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파벌의 통제 하에 범민족적 팔레스타인 투쟁을 주도해왔다. 이슬람주의와는 거리가 먼 운동의 급진적 부위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과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 같은 마르크스주의 계열 단체를 통해 표현되었다. 세속주의 지도부가 주도해온 이 흐름은 1987년 제1차 인티파다 과정에서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무슬림형제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영토에 정착해 이슬람 저항 운동, 즉 하마스를 창립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1987년 난민 캠프와 도시 지역의 가난한 청년들이 주도해 팔레스타인 영토 전역으로 확산된 제1차 인티파다 속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등장했다. 시나티는 “하마스의 특징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의 증오심에 종교적 논리를 부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진실한 사람들(true people)의 체현, 즉 ‘부패한’ 세속 엘리트에 맞서는 순수하고 신실한 ‘움마’2)의 체현으로 내세우고, 이로 하여금 신앙심 깊은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이후 몇 년간 하마스의 사회적 기반은 2001년 아리엘 샤론이 이스라엘 대통령에 당선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며 군사 봉쇄가 강화될 때까지 가자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2) ‘أمة’ 이슬람 교단이나 공동체를 의미하며, 종교적 체계와 규율에 기초한 모든 무슬림의 초국가적 공동체를 가리킨다. (역자주) 1988년 1월 서안지구에서 촬영된 제1차 인티파다 당시 사진 (인티파다는 아랍어로 ‘봉기’를 의미) 2000년 10월 29일 제2차 인티파다 당시 가자지구에 진입한 이스라엘군 전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파리스 오데. 2000년 당시 파리스 오데는 만 14세였으며, 같은 해 11월 8일 가자 북부 카르니 교차로에서 이스라군을 상대로 저항을 이어가다 사망한다. (출처 : AP통신) 샤론이 이끄는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영토로 진격하였고, 야세르 아라파트를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시켰다. 아라파트의 후계자로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된 마흐무드 압바스는, 상황이 팔레스타인 대중에게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지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시온주의 점령군 및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하마스가 2006년 가자지구 선거에서 승리한 배경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 클라우디아 시나티는 2009년 자신의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마스는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을 유지하면서 아랍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쇠퇴를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하마스의 일련의 선거 공약과 이스라엘 점령에 맞선 저항의 지속을 넘어,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에 종교 국가(confessional state)를 세우겠다는 전략은 반동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정당한 민족적 열망에 대한 진보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종교적 도덕을 절대적 가치이자 법으로 삼는 것은 기본적인 민주적 자유를 공격하며 사회적 억압의 도구를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서구 사회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사회에도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있으며, 종교가 착취자의 지배 유지에 봉사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스라엘 국가를 종교 국가(religious state)로 대체하려는 하마스의 전망은 아랍인, 무슬림, 유대인 대중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다. 이란식 종교 국가는 권위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계급 모순으로 분열된 자본주의 국가이기도 하다. 소위 ‘팔레스타인 대의’3)에 종속되지 않는 노선은 무엇보다 일관된 반제국주의·반시온주의 노선을 요구한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대의’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진지로 삼으며 자국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착취하고, 많은 경우 청년, 여성, 성소수자, 좌파를 탄압하는 아랍 부르주아지와도 독립적인 노선을 요구한다. 3) 필자는 여기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왜곡된 ‘팔레스타인 대의’를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편집자 주) 아랍 민족주의의 다양한 정당과 인물들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적 저항운동의 일부인 이슬람주의 조직들(하마스, 헤즈볼라 등)과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나 지역 내 제국주의의 구조적 이해관계를 건드리지 않고서, 시온주의의 압제를 종식시키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022년 12월 14일 가자기구 도심에서 열린 하마스 창립 35주년 기념 집회 (출처 : Quds News Network) 아랍의 봄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의)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경찰이 자신의 물건을 압수하고 모욕을 주며 수레를 뒤집어엎자 이에 항의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수만 명의 튀니지인들이 부아지지를 기리며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부과되고 2008년 대불황으로 악화된 굶주림와 고통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 사이 부아지지는 병원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대중은 1987년부터 국가를 통치해온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권에 분노를 쏟아냈다. 2011년 1월 4일 부아지지는 사망했고, 벤 알리는 불과 열흘 뒤인 1월 14일 대중의 힘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튀니지 반란은 (아랍)지역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집트에서는 수백만 명이 호스니 무바라크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왔고, 리비아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리아에서는 바하르 알 아사드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고, 알제리와 예멘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저마다의 특수성이 있었지만, 이들 정부는 공통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주의적 아랍 민족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부르주아 민족주의 강령을 내걸고 집권했다. 1970년대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겪은 이후, 이들 정부는 신자유주의로 전환하여 점점 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미국의 명령을 집행했다. 물론 아랍의 봄 기간에 대규모 반란을 겪은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이질적이며, 경제적 구조도 불균등하고 다채롭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추세가 이들을 공통분모로 엮고 있으며, 아랍의 봄은 이 지역 전체에 걸친 '문제의 통일성'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2008년 경제위기는 식량 가격 상승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북아프리카 전역에 식량 위기를 초래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아랍의 봄에 앞서 도시 빈민층 주도로 빵 폭동4)이 벌어졌다.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발발하기 전, 이집트 노동계급은 마할라알쿠브라(Mahalla el Kubra)와 같은 중요한 노동자 중심지에서 노동력의 재편 과정을 겪는 동시에 저임금에 맞선 투쟁을 경험했다. 4) 2008년 경제위기 여파로 곡물가격이 급등해 식량위기가 이집트 전역에 확산된다. 국영 빵집에서 판매하는 빵 크기와 양이 줄고, 정부는 1인당 빵 구매량에 상한선을 설정한다(인구 절반가량이 빈곤층인 이집트는 국영 빵집에서 빵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국영 빵집 대기열을 두고 발생한 충돌이 유혈사태로 번지고, 국영 제빵업자들이 정부와 경찰에 건낼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밀가루를 암시장에 팔아치우는 지경에 이른다. 국영 제빵업자들이 파업하자 무라바크 정권은 긴급조치로 군대를 동원해 빵을 굽게 한다. 식량위기와 저임금이 촉발한 분노로, 이집트 노동자계급과 반체제운동 진영은 2008년 4월 6일 예정된 마할라알쿠브라 섬유 노동자 수천 명의 파업에 호응하며 총파업을 조직한다. 그러나 파업 당일 경찰이 도시를 원천봉쇄하고, 주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며 총파업은 무산된다. SNS 매개로 총파업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4월 6일 청년운동’은 2011년 이집트 혁명에서 주요 세력으로 부상한다. “아랍의 봄” 동안 계급투쟁 과정은 그 깊이, 대중의 참여 정도 등에서 서로 다른 수위로 전개된다. 요컨대, 각국의 계급투쟁 동학은 상이했다. (각국의 투쟁은) 잔혹한 독재 정권에 대한 반란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제국주의에 이용되었다.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이 반란을 제국주의적 목적에 더 이상 복무하지 않는 협력자들을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으며, 리비아와 시리아에서는 카다피와 아사드에 대해 군사 개입까지 단행했다. 예를 들어 리비아에서 카다피 독재에 대한 반란은 민중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대중의 자기조직화에 기반한 독립적 지도부를 갖추지 못한 가운데, 제국주의 세력은 이를 이용해 나토를 통해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일으켰다. 카다피 처형 이후 리비아는 제국주의에 더 크게 종속되었다. 트로츠키주의 분파(Trotskyist Fraction)로서 우리는 2013년 “혁명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운동을 위한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리비아와 같은 공개적인 내전(open civil war) 사례에서, 독재자들에 맞선 군사적 투쟁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분리할 수 없으며, 내전의 과정을 어떤 계급이 주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도 부차화될 수 없다. 정치적 문제를 군사적 문제에 종속시키는 관점은 나토 개입으로 이루어진 카다피 축출을 ‘대중운동의 승리'로 해석하게 만든다. 이는 미국과 다른 강대국이 반독재 시류에 편승해, 민주화운동이 '연속적(permanent)’ 동력을 얻는 것을 막음으로써 정권 교체 후 새로운 동맹을 확보하고자 하던 시기에 발생했다. 즉, 그들은 운동이 부르주아와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투쟁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시리아의 경우, '반군'에 대한 정치적 유보 없이 그들 편에 서거나, 미국의 동맹국들이 유지하는 친제국주의적 반군 지도부로부터 독립적인 전략의 제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급진화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더 심오하고 발전된 과정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뒤를 이은 무슬림 형제단의 온건 이슬람주의 정부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웠다. 노동자계급과 대중의 활동은 무슬림형제단 정부의 약점과 결부되며 체제 전체를 위협했다. 결국 부르주아 야당 주요 지도부의 지지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결과 미국의 이익에 전적으로 종속된 권위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운동을 위한 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튀니지의 엔나흐다당과 이집트의 자유정의당 등 집권한 모든 이슬람주의 조직은 종교적 광신, 후견주의적 포퓰리즘(clientelistic populism),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혼합하여 설교하는 부르주아 세력이다.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부르주아지나 그 대표자와 동맹을 맺는 대신, 노동자계급적이고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정책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집트 운동에서 드러난 동학은 대중의 삶의 조건과 관련된 요구에 연속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는 민주적 혁명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제국주의적 억압을 종식하지 않고는 이러한 요구가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혁명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첫 번째 구조적 민주주의 문제이며,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이를 끝까지 이끌 수 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계급투쟁의 순환은 중동 전역의 아랍 프롤레타리아를 하나로 묶는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단결을 보여주었다. 이 단결은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유대뿐만 아니라 착취와 제국주의적 억압, 계급투쟁을 함께 겪어온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동시에 아랍 부르주아, 그리고 아랍 부르주아와 ‘반제국주의’ 투쟁의 이름으로 협력하는 조직들이 거대한 장애물로 작용했음을 드러냈다. 이 아랍 국가들은 자국 노동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외세 제국주의로부터 양보를 얻기 위한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출처 : AFP 통신2025-07-14 | 조회 4,768 -
[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3[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 자브라 니콜라와 팔레스타인의 연속혁명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 초기부터 참여한 팔레스타인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하면서, 이 지역 노동자계급이 해방을 위한 투쟁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을 규명했다. 자브라 니콜라는 1912년 하이파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초반인 1930년대 초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일찍부터 스탈린주의 정책을 비판했고, 좌익반대파1)의 기치 아래 당내에서 계속 활동하던 소규모 반대파 트로츠키주의 그룹에 가까워졌다. 이 그룹은 이후 1940년에 유대인 트로츠키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요청으로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과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1) (편집자 주) 좌익반대파는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소련 공산당 내에서 레온 트로츠키가 주도한 정치적 경향으로,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국제적 혁명 전략을 강조하며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당내 집권파(트로이카)에 맞서 싸웠다. 1927년 말, 주요 지도부가 당에서 축출되고 트로츠키는 추방당했다. 이후 1930년 국제좌익반대파(ILO)를 거쳐 1938년 제4인터내셔널 건설로 이어졌다. 니콜라는 제4인터내셔널 운동에 합류한 후, 아랍 혁명의 과제에 대한 전략적 대응을 수립하기 위해,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의 인식틀과 연속혁명 이론을 통해 팔레스타인 분쟁(palestinian conflict)을 이해하는 이론적 과제를 수행했다. 1944년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통치 당시 자브라 니콜라의 모습, 사진은 니콜라의 기자증 니콜라는 비록 미완성이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아랍 국가와 아시아적 생산양식’ 서문에서, 중동의 사회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동의 사회구조는 발전중인 내재적 역사 경향과 야만적 제국주의의 침투라는 거대한 외재적 힘이 충돌한 결과로, 팔레스타인의 경우 내재적 역사경향이 시온주의 식민화와 충돌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현재 중동 전역의 아랍 사회는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위기는 종종 1967년의 패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 위기는 이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고 발전해 왔으며, 전쟁은 이 위기의 증상에 불과했다. 패배는 위기를 더 심화시키고, 선명하게 만들며, 드러냈을 뿐이다. 이 ‘위기’는 단지 경제 발전의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발전국들의 경제위기가 아니다. 이 ‘위기’는 단지 제국주의에 지배 받는 국가들의 정치적 위기도 아니다. 즉,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져, 여전히 재정적·군사적으로 유지·지원받아 잠재적 저항국들에 대한 채찍 역할을 하도록 의도된 식민주의적·팽창주의적 이웃 국가의 영구적 위협에 직면한 국가들이 겪는 단순한 정치위기도 아니다. 이 ‘위기’는 주로 이들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위기다. 이는 단순한 저발전의 경제위기도, 정치위기도 아닌, 전 세계적인 사회 위기이며, 이는 전통 아랍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역사적 산물일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오랜,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관계의 산물이다. 이 위기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기반과, 그 위에 강제 부과된 외국 상부구조 사이 모순의 표현이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확보한 영토(짙은 청록색이 전쟁 이전, 연한 청록색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 쿠웨이트, 레바논을 상대로 6일만에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점령한다. 니콜라는 아랍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극심한 지배 - 팔레스타인의 경우 제국주의 거점인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와 결합된 - 와 지역 부르주아지의 약점과 종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멍에로부터 팔레스타인과 아랍의 해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나 '민족 혁명'의 틀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토착 지배계급은 제국주의 세력에 전적으로 의존적이거나, 제국주의 세력 앞에서 극도로 약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에게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의 주체는 농민과 동맹을 맺은 아랍 노동자계급이었다. 그는 “중동 혁명에 관한 테제 Theses on the Revolution in the Middle Ea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랍의 혁명은 ‘민주주의 Democratic’ 민족혁명이나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연속혁명으로만 가능하다. 노동자계급이 빈농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적 조치를 시행하지 않는 한, 대중의 긴박한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민족적 민주주의 과제도, 급속한 산업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 니콜라의 저술 전반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아랍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설명하려는 매우 분명한 시도를 볼 수 있으며, 제국주의가 강요한 국경을 넘어선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잠재적인 강력한 단결에 대한 깊은 이해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매우 진지한 시도도 엿볼 수 있다. 제국주의의 중동 침투가 불균등 결합발전에 따라 다양한 사회구조를 만들어낸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회와 그 사회경제적 구조도 이스라엘 국가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달 피토(Dal Fitto) 는 니콜라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신생 시온주의 사회는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의 다양한 계급과 충돌했다. 시온주의는 유럽에서 자본, 기술적 해법, 근대적 지식을 가져왔다. (대개 시온주의 기금의 지원을 받은) 유대 자본은 단순히 토지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봉건적 요소를 점차 대체했고, 시온주의 법규는 아랍인에게 토지를 재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재정적, 경제적 우위를 갖게 된 시온주의 자본주의 경제는 아랍 자본가계급의 형성을 차단했다. 아랍 농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추방하며 이들과 충돌한 시온주의는, 유대인 경제 부문에서 (강력한 팔레스타인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 또한 막았다. 아랍 부문의 자본주의 발전이 지연되고 방해받았기 때문에 농민들은(아랍 지식인들 또한) 영국 위임통치 행정부와 공공 서비스 분야를 제외하면 일자리를 찾기가 극도로 어려웠다. 시리아와 매우 유사한 조건에서 발전해 오던 아랍 팔레스타인의 사회경제적 구조는 시온주의 식민화로 완전히 왜곡되었다. 이러한 왜곡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좌) 1967년 6월 7일, 예루살렘 바위의 돔으로 진격하는 이스라엘군 (우) 제3차 중동전쟁의 결과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점령과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엔조 달 피토는 니콜라의 사상을 해석한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토지를 취득하고, 때로는 그 가치 이상으로 비싸게 토지를 구입하며, 연속적인 이민 물결로 유입된 유대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필요는 산업 부문에서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 고용과, 아랍인에 대한 토지 판매 금지에 기반한 인종차별적 정책을 정당화했다. 이 정책은 농업 경제의 봉건적 구조를 약화시키는 한편, 일부 유대인 대기업들이 아랍인 노동자 고용을 금지함으로써 아랍인의 프롤레타리아화도 저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건제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발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강력한 아랍 정치 지도세력의 형성을 가로막았다. 니콜라가 보기에, 시온주의 식민화의 '왜곡'으로 인해, 명확히 구분된 계급사회로의 발전이 차단된 것은 팔레스타인 정치적 상부구조 구성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경제적 왜곡은 정치적 영역에도 반영되었다.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트, 농민은 정상적인 발전 경로를 밟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한 역량을 갖춘 정당과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아랍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지도력은, 시온주의자들에게 토지를 팔아넘기며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청산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 거래로 막대한 재정적 이익을 얻은 지주들의 손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니콜라가 보기에, 연속혁명의 논리를 적용할 때, 정착민 식민주의의 멍에 아래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구조의 취약성은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과 농민들이 민족해방 투쟁을 (아랍) 지역 차원으로 확대하여,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아래 아랍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을 필수적으로 만들었다. 만약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이 자국 자본가계급의 족쇄를, 또한 많은 경우 독재 정부의 족쇄를 벗어 던진다면, 아랍 노동자계급의 '국경 없는' 연대야 말로 팔레스타인 대의에 물질적,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의 분석은 급진적 민주주의 투쟁(즉, 팔레스타인 해방 문제)의 열기 속에서 만들어진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반제국주의 동맹이라는 전략적 전망, 명백히 국제주의적인 전망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그는 이러한 단결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연결시키며 그 전망을 확고히 견지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그의 구상은, 항상 제국주의에 묶인, 또한 제국주의에 따른 착취와 억압에 묶인 부르주아 민족국가의 한계를 넘어 민족해방 문제를 창의적으로 사고함으로써, 국가적 틀을 초월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구상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대치시켰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아부 고쉬(Abu Ghosh)에 모여 집회를 연 팔레스타인 노동자들 "5월 1일, 노동자들과 투사들에게 영광을!", 팔레스타인 노동총연맹, 1969년 레바논에서 발행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아랍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 동맹의 중요성에 대한 니콜라의 이해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그의 관점(연속혁명의 관점)을 팔레스타인 공산당으로부터 분리시켰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은 그 기원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좌파에 (당시에도 현재에도) 가해진 엄청난 민족주의적 압력에 굴복해왔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압력은 지역 내 반혁명 세력으로서 시온주의에 근거하며, 정도는 다르지만 아랍 민족주의나 근본주의 지도부로 구성된 반시온주의 저항세력으로부터도 기원한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해방의 전망도, 팔레스타인과 아랍 대중 해방의 전망도 제시하지 않는다. 니콜라에게 시온주의 국가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이었다. 시온주의 국가는 다른 정착민 식민주의 국가와 달리 고도로 발달된 내부 계급 층위를 특징으로 하며, 명확히 구분된 프롤레타리아트, 중산층, 부르주아지가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 이스라엘은 국경 내에 거주하며 무권리 상태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아랍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제국주의 국가의 무기로 무장한 군대와, 팔레스타인 주민을 폭력으로 위협하고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기 위해 조직된 무장 민간인에 의해 강압적으로 존속하고 있다. 니콜라는 군사화된 이스라엘 사회의 파시즘적 특징과 시온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이해했다. 하지만 달 피토가 설명하듯,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세력이다.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트는) 제국주의의 후견을 주변 아랍 세계와의 협력과 통합으로 대체한다면 얻을 것이 많다. 따라서 계급 분석은 아랍 팔레스타인 계급 구조의 단일한 내부 분화가 아니라, 중동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부문 간 이해관계의 연대에 주목해야 한다. 니콜라가 볼 때, 계급 분석은 잠재적으로 이스라엘을 내부로부터 파괴할 수 있는, 이스라엘 국가 내부의 긴장을 밝혀내야 했다. 그러나 니콜라는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에 대한 투쟁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프롤레타리아 간의 잠재적 동맹을 조건으로 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가 식민지 국가의 사회적 기반이며, 그 안에서 발전하는 모든 혁명적 정치는 팔레스타인 민족자결권을 위한 투쟁을, 또한 이스라엘 노동계급과 시온주의의 완전한 단절을 수반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더욱이, 니콜라에게 팔레스타인 해방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잠재적 동맹의 출현에 종속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은 먼저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기 위한 아랍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단결을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을 구축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아랍) 지역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억압 민족이다.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의 전초기지이자, 아랍 혁명에 대해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역할을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한 아랍 사회주의 혁명의 의미는 시온주의의 패배와 시온주의 국가의 전체 구조의 파괴, 중동에서 제국주의 지배와 영향력의 청산, 팔레스타인의 권리 회복을 의미한다. 1963년 니콜라는 1962년 이스라엘 공산당과 결별하며 등장한 반시온주의 단체인 마츠펜(Matzpen)에 합류했다. 니콜라는 이 단체의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강령적 접근에 연속적(permanent) 성격을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니콜라의 영향 아래, 이 젊은 조직은 시온주의 식민지화와 이스라엘 국가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책임에 대해 심도 있는 평가를 내렸다. 창립 초기에 마츠펜은 팔레스타인 연속혁명의 고유한 특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또한 강령에서는 식민국가의 구조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시온주의와 단절해야 할 필요성, 시온주의적 세뇌에 맞선 투쟁에 기초한 아랍과 유대인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을 강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적 주체로써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세력 간의 필수적인 지역적 동맹을 강조했다. 이는 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사회주의 사회 건설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 규정이 니콜라나 마츠펜의 정치적 관점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2) 2) 우리는 니콜라의 이론적 관점과 마츠펜의 혁명적 조직으로서의 궤적 모두에 대해, 몇몇 지점에서 견해차가 있다. 마츠펜의 경우, 두 국가 해법에 명확히 반대하지 않는 등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강령에 있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그들의 정치적 관점과 강령, 특히 니콜라의 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전략적 나침반으로서 연속혁명 이론의 재확인이다. 유엔이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을 선언한 지 반세기가 넘었다. 그 이후 아랍 세계에서 여러 시기에 계급투쟁의 영웅적 사례들이 발생했고, 항상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배경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배신한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새로운 근본주의 지도부의 등장을 통해, 니콜라의 사상과 연속혁명 이론은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입증되었다.2025-07-01 | 조회 4,974 -
[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2[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전편 읽기]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 팔레스타인 공산주의 운동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급격히 확산시켰다. 수십만 명의 노동자와 급진적 청년들이 국제적 혁명 사상 아래 결집하였고, 수백 개의 새로운 공산당이 탄생했다. 1919년 볼셰비키당의 지도 하에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다. 1920년,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지도자로 있던 제3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반식민 ·민족해방 투쟁을 극히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루었다. 레닌은 1920년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서 전 세계의 공산당이 “(식민지에서의) 혁명운동 전반을 물질적·정신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 지지는 “성직자, 기독교 선교사 및 이와 유사한 요소들의 반동적이고 중세적인 영향력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운동을 현지 반동세력의 강화 시도와 결합하려는 범이슬람주의와 유사한 경향에 맞선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1920년 볼셰비키는 제2차 코민테른 대회의 일환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 동방인민대회(Congress of the Peoples of the East)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이란,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인도 및 기타 아시아, 중동 국가에서 2,85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대회의 회의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학자 피에르 브루에의 연구에 따르면 회의 결의안 중 하나는 “동방 민중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프랑스, 영국,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반식민 투쟁에 나설 붉은 군대(Red Army)와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1) 1) Broué, Pierre. Histoire de l’Internationale communiste (1919-1943). Éditions Fayard. 1997 동방인민대회는 영국 제국주의가 시온주의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아랍인과 유대인을 분열시켰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아랍인들을 몰아냈다. 그러고는 아랍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바로 그 유대인 정착민들을 적대하도록 아랍인들을 선동해 모든 공동체 사이에 불화와 적대감, 증오를 심어 양측의 관계를 약화시켰다. 이는 (영국이) 이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역사학자 랜 그린스타인(Ran Greenstein)의 설명에 따르면, 동방인민대회의 일반적 입장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시온주의를 규탄하며, 제국주의와 협력하는 아랍 및 유대 세력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동방인민대회는 터키, 이란, 이집트, 인도,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공산당이 설립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20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동방인민대회 팔레스타인공산당은 1924년 유대인 반시온주의 운동가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공산당의 전략적 노선은 영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고 아랍과 유대인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 것으로, 이는 첫 세 차례의 코민테른 대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한편, 시온주의 점령에서 비롯되는 긴장이 아랍 대중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유대인 노동자와 지식인에 대해 점점 더 적대적 태도를 드러내면서,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정책은 갈수록 당시 흐름과 충돌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은 식민지와 팔레스타인 문제 전반에 대해 제3인터내셔널의 정치적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제국주의의 압제와 점증하는 시온주의 식민화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문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새롭고도 중요한 이론적 문제를 제기했다. 신생 팔레스타인공산당의 노선은 미숙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1920년대 내내 전개된 좌익반대파와 스탈린 주도로 나날이 강해지는 소련 관료집단의 정치투쟁으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창당 초기부터, 팔레스타인공산당은 급진화된 유대인 청년층 일부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팔레스타인 아랍 대중 사이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공산당은 1920년대 말부터 ‘아랍화’2) 정책이라는 굴곡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한창 스탈린주의화되어가던 코민테른에 의해 추진되었다. 2) (역자주) 팔레스타인공산당이 거쳐온 '아랍화'는 창당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전신은 1919년 설립된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Jewish Socialist Workers Party)'이었는데, 전 세계 유대인 좌파노동자연맹인 ‘시온의 노동자들’(Poalei Zion)에 속하던 이 당은 좌파 시온주의 경향에 의해 주도되었다.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이 코민테른 가입을 신청하자, 코민테른 지도부는 가입 조건으로 '아랍화' 정책을 주문한다. 아랍화는 당내 주류였던 좌파 시온주의와의 단절로,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당에 아랍인 당원을 조직·포함하도록 하고, 시온주의적 공동체 및 조직에 기반해온 기존 조직화 범위를 전체 아랍 민중으로 확장하고, 당이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과 유대인을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명칭을 변경하는 조치를 포함했다. 시온주의 경향과 반시온주의 경향 간의 격렬한 당내 대립 하에 1921년 3차 당대회를 거치며 유대사회주의노동자당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대표하는 공산당의 유대민족 지부를 의미하는 '팔레스타인공산당유대공산당지부(Jewish Communist Party — Poalei Zion, section of the Palestine Communist Party)로 명칭을 변경한다. 그러나 이는 아랍인 당원과 아랍 민족 지부가 부재한 상태에서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유대사회주의노동당이 시온주의 경향과 반시온주의 경향으로 분열하며 1923년 팔레스타인공산당이 설립되었고, 당 지도부가 아랍화 정책을 수용하며 코민테른 지도부는 1924년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승인한다. 공산당의 첫 아랍인 당원 가입은 1924년에 이루어졌으며, 존속 기간 내내 전체 당원수가 1,000명을 넘지 못했다. 영국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팔레스타인공산당원 중 아랍인은 1930년에도 26명에 불과했다. 스탈린 집권 이후 제3인터내셔널 아래 아랍화 정책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 이전의 '초좌파' 노선, 7차 대회 이후의 인민전선 노선 사이에서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7차 대회 이전, 코민테른은 팔레스타인공산당에 '노동자·농민의 정부' 구호와 함께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에 맞서 투쟁하라고 지시하였으나, 7차 대회 이후 팔레스타인공산당은 '반제국주의 인민전선' 노선에 따라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그린스타인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공산당의 유대인 반시온주의 운동가들은 당내 유대계 주변부의 친시온주의적 편견에 적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수사적으로는 시온주의를 거부하고 영국의 위임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이와 동시에 ‘이슈브 Yishuv’로 알려진 유대인 정착지를 “이민을 통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공동체라며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은, 나크바(Nakba) 이전 진행된 가장 중요한 유대인 집단이주 중 하나와 맞물려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심해지는 반유대주의를 피해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각자의 식민주의적 목표를 가진 영국과 시온주의 자본가들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 난민 대다수는, 가혹한 이민 할당제3)와 강대국들의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예컨대, 미국은 유대인 난민 수십만 명의 입국을 막고 팔레스타인으로 피난가도록 압박했다. 3) (역자주) 당시 미국은 이민 할당제를 운용하여 출신 국가에 배당된 할당량(쿼터)에 따라 이민 비자를 신청순대로 발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 지역 전체,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농민 대중의 불안이 고조되었다. 유대인 식민화에 반대하는 자생적 반란이 여러 촌락 공동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야파에서 시작된 유대인 시위대 간 충돌이 팔레스타인 전역 아랍인-유대인 유혈사태로 파급된 1921년 야파 사태. 팔레스타인공산당은 식민에 맞선 아랍 민중의 저항과 충돌에 대해 답해야만 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소위 ‘아랍화’ 정책은, 혁명가들이 아랍의 전위적 집단, 특히 농촌에서 봉기하던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혁명적 전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랍화 정책은 근본적으로 1927년 중국 혁명 당시 스탈린주의가 수립한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anti-imperialist united front”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으며, 각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겠다고 자처하는 부르주아 혹은 소부르주아 지도부와의 정치적 동맹을 만들어냈다. 이 정책의 이론적 배경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민족해방 투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 원칙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이 정책은 소련이 관료화 과정을 겪는 동안 코민테른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스탈린에게 있어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투쟁은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을 생각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의 문제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민족해방 투쟁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국민국가의 설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투쟁을 주도하는 것은 민족 자본가의 한 부문이며, 그러한 세력이 없다면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스르지 않는 강령을 가진 소부르주아 지도부가 이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탈린이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아랍화' 정책을 추진한 동기는 아랍 지역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 아랍 대중들 사이에서 더 큰 유기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던 것이 아니라,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 및 '반제국주의' 아랍 국가들과 기회주의적 협정을 맺어 세계 질서 내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있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젊은 팔레스타인공산당은 한편으로는 영국과 점증하는 시온주의의 지배에 맞선 아랍 지도부의 민족주의적 압력에 굴복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온주의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청년층과 급진적 유대 지식인층의 초기 민족주의 정서에 굴복했다. 1929년, 식민 지배와 점증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이주가 만들어낸 긴장은 전국적인 충돌로 분출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노동자들의 대투쟁과 '대반란'의 서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공산당이 배포한 포스터. 히브리어로 '파시즘을 분쇄할 영웅적 붉은 군대 만세!', '소련 인민과 반파시스트 세계 전체의 지도자 스탈린 만세!' 라고 적혀 있다. 랜 그린필드는 이러한 (당내) 입장 차이가 계급투쟁의 압력과 아랍 대중 사이에서 증가하는 불만에 의해 어떻게 더욱 공고해졌는지 설명한다. 당은 아랍 대중에 대한 노선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민족 갈등의 심화, 특히 1936~39년 아랍 반란은 당원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는 1937년 자율적인 '유대인 분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반란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은 반대 방향, 즉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로 인해 1930년대 당이 아랍 민족투쟁 편에 섰을 때 당과 가까워졌던 아랍 지식인과 운동가들은 소외되었다. “당이 각자의 (민족:역자) 공동체에게 각자의 정치적 언어로 대화하고, 각자의 민족 감정에 호소하는” 상황에 따라, 민족주의적 긴장이 당 내부에 반영되었다. 스탈린주의 정책의 이 명백한 '변화'는 궁극적으로 시온주의 정착민들의 팔레스타인 식민지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47년 유엔 총회는 소련과 영국 및 미국 제국주의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결의했다. 팔레스타인공산당의 '아랍화'를 권고하고 아랍 민족주의 지도부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식민지화를 위해 제국주의 열강과 협정을 맺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역사학자 가브리엘 고로데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련의 입장은 특히 놀랍다. 시온주의 체제에 대한 일관된 부정적 태도, 1929년 및 1936년 아랍 반란 당시 크렘린이 이슈브(Yishuv)를 영국 제국주의의 동맹이자 도구로 비난하며 취한 명시적인 친아랍 노선을 고려하면 말이다. 시오니즘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에서 열렬한 지지로 소련의 태도가 변화한 것은 종종 1941년 6월 21일 독일의 소련 침공과 관련되어 설명된다. 모스크바가 세계 유대인 및 팔레스타인의 이슈브와 맺은 유대 관계는, 러시아의 전쟁 노력에 세계 유대인 공동체의 지원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투쟁에서 최대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방세계에서 광범위한 동맹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음을 시사한다. 히틀러가 스탈린과 체결한 협정을 파기한 제2차 세계대전의 역동4) 앞에서, 관료화된 코민테른은 민족해방 문제에 대한 180도 입장 선회를 “소련 방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 이는 실제로는 소련의 영향권을 보장받기 위해,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확장을 억제하는 대가로 제국주의와 협정을 맺는 행위와 다름 없었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이 정책을 이론적으로 포장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정면 부정이었다. 이는 소련 관료의 이익 증진을 대가로 한 피억압 민중의 투쟁에 대한 배신을 의미했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스탈린주의 소련은 민족해방의 경로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이라는 계급 화해 정책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근본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거부하는 논리를 팔레스타인 정책에 적용했다. 이 점은 스탈린주의 노선이 아랍 국가의 부르주아계급과 협정을 지향한 데서 명확히 드러났다. 4) (역자주)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2년 만에 파기하고 1941년 소련을 침공한 사건 1949년 5월 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에 스탈린 초상화가 걸린 트럭이 행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억압은 세계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제국주의는 현대 세계질서를 조직하고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한 시대다. 이 시기에 경제, 정치, 군사, 이데올로기적 권력은 제국주의 국민국가가 대표하고 옹호하는 기업들 수중에 집중된다. 그 결과 국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토지, 자연의 착취는 전 세계로 확장되며, 이는 모두 이윤 추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것이다. 에스테반 메르카탄테(Esteban Mercatante)는 “세계 무질서 시대의 제국주의(Imperialism in Times of World Disorder)”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과 갈등, 그리고 초국적 기업과 세계 금융자본의 지구 약탈은 결코 서로 대립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들은 현대 제국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동시에 접근해야 하는 두 가지 차원이다. 제국주의 이론을 정교화하기 위해 두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정립된 제국주의 이론은, 세계 자본과 가장 강력한 국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행동한 결과 세계 경제가 위계적 총체로 형성되었는다는 점을 설명한다. 제국주의는 정책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제국주의가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이며, 역사발전의 결과, 혹은 그 발전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러시아 볼셰비키당과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이 역사적 시기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으며, 이 단계의 자본주의는 위기, 전쟁, 혁명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반동적 시기를 나타낸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기본적 특성에서 비롯된 긴장의 첫 번째 큰 표현이었다. 이 기본적 특성이란,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금융자본으로의 융합, 자본수출을 끊임없이 지속하려는 강박적 욕구, 그리고 정치적·경제적 힘이 불균등한 국가들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국주의 기업에게 수탈당하며 제국주의 정부에 의해 억압받는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알제리, 시리아 등 식민지 및 반식민지로 나뉘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많은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영국이 세계적 패권을 상실하자,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국을 대신할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하려 시도하였다. 미국과 나치 독일은 그러한 국가 중 하나였다. 공식적인 역사는 항상 제2차 세계대전을 민주주의와 파시즘, 인권과 나치즘의 대결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실상은 세계 주요 강대국들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수립을 촉진하고, 시장을 재편하고, 대규모 파괴와 살상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을 통제하고자 저지른 전 세계적 학살이다. 트로츠키는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사상」에서 레닌에게 경의를 표하며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시장, 원자재 공급원, 세력권 등을 장악하고자 하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침략자들에 맞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등의 이념으로 위장한다. 이러한 이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다. 모든 사회주의자의 의무는 이를 지지하는 대신, 오히려 인민 앞에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다. 1915년 3월, 레닌은 다음과 같이 남겼다. “어느 집단이 먼저 군사적 타격을 가했느냐 또는 먼저 전쟁을 선포했느냐의 문제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술을 결정하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 “조국 방어, 적의 침략 격퇴, 방어 전쟁 수행 등에 관한 문구는 양측 모두가 인민을 완전히 기만하는 것이다.” 레닌은 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십년 간”, “세 강도(영국, 러시아, 프랑스 부르주아지와 정부)가 독일을 약탈하기 위해 무장했다. 세 강도가 주문한 새 칼을 얻기 전에 두 강도(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공격을 시작한 것이 놀라운 일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45년 8월, 미국이 서명 하나로 원자폭탄을 투하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하고 226,000명을 살해한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 트루먼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에 홀로코스트 생존자 10만 명을 수용하도록 촉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제국주의가, 쇠퇴하는 대영제국의 과제를 이어받아 유대인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다시 추진하겠다는 명확한 신호였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으로) 팔레스타인 영토의 56%를 시온주의 국가에 할당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전체 팔레스타인 사유지의 약 7%만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나크바(Nakba)’, 즉 시온주의 민병대와 신생 이스라엘군이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그들의 집과 땅에서 폭력적으로 추방했을 때, 미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주도한 목적이 유대인에게 홀로코스트의 배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했다. 홀로코스트는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전쟁에 참가할 때까지 의도적으로 묵인되어온 비극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자신들의 지난 행보를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위해 팔레스타인 인구의 약 4분의 3을 폭력적으로 추방하는 데 자금을 지원하고 지시함으로써 정당화한 것이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초기 정착기인 신 이슈브(New Yishuv) 시대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삽화 '어린 정원사들', 1960년대 유대민족기금(JNF) 발행 1948년 나크바로 인해 집과 터전을 잃고 피난길에 오른 팔레스타인인 아동과 여성들 시온주의 국가(Zionist state)는 그 기원부터 제국주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시온주의 국가는 ‘정착민 식민주의’, 즉 집단학살과 인종청소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정착민 식민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며, 실행한다.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5) 아래 한 세기 간의 지배가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산물이다. 5) (역자주) 라틴어로 "미국에 의한 평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며 형성된 세계 질서를 의미,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 로마제국의 최전성기인 1~2세기에 걸쳐 지속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상대적 안정기)’에서 차용된 용어. 시온주의 국가는 그 식민주의적 확장을 가능하게 한 세계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제국주의적 괴물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두 가지 다른 미래를 제시했다.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제국주의의 대학살을 국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할 가능성,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이 전쟁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전진한다면, 이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지도력의 타락을 막을 터였다. 에밀리오 알바몬테와 마티아스 마이에요는 「“부르주아 복고”의 한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이 두 가지 변수 중 어느 것도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완전히 처벌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후 지구의 3분의 1에서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퇴보로 이어지는 조건을 제거하지도 못했다. 붉은 군대의 손에 나치즘이 패배하면서 스탈린주의는 새로운 위신을 얻었고, 스탈린주의는 이 위신을 이용해 전후 혁명에 제동을 걸었다(얄타 및 포츠담 협정). 스탈린주의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배신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식민지와 반(半)식민지에서의 혁명은 억제할 수 없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주요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력은 중요한 모순을 안은 채 확립된 것이었다. 소련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공로가 아니라, 나치를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의 겨울로 몰아넣은 프롤레타리아 군대인 ‘붉은 군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바로 이 특정한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은 유엔의 공모와 스탈린주의의 지지를 받아, 이스라엘 국가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위한 거점으로서 인위적으로 관철해냈다. 나크바는 시온주의의 식민주의적 특성을 집약하는 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 중동에서 자신의 이익을 확장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의 중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두 국가 해법’을 옹호하는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의 일부 세력은, 시온주의 국가의 기원이 드러내는 본질적 측면, 즉 시온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해방과 모순된다는 사실을 누락한다. 토지 강탈, 공동체 전체의 추방, 잔혹한 군대와 정착민 무장집단에 의한 인종청소 없이 이스라엘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제국주의 없이는 이스라엘 국가도 없다.2025-06-14 | 조회 5,012 -
[번역] 팔레스타인 해방과 연속혁명 1[편집자 주] 2023년 10월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중을 대량학살하고 있다. 히메나 베르가라의 이 글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입각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계급적·국제주의적 전략을 제시한다. 본 번역은 글의 분량상 총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히메나 베르가라, 2024년 4월 19일 시온주의의 억압에 맞선 투쟁은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의 중심에 있다. 요르단 강에서 지중해까지,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자유롭고 사회주의적인 노동자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투쟁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다. 뉴욕 팔레스타인 연대시위 사진: Eduardo Munoz / Reuters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의 방향을 집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가자지구와 그 주변 지역의 아랍 대중은 물론, 미국 등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피어나기 시작한 집단학살에 반대하는 전 세계 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 과제에서 필수적인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사회적 힘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힘들은 아랍 세계의 이 지역(팔레스타인)을 세계적 위기, 즉 지구적 제국주의의 새로운 위기의 진원지로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잔혹한 식민 프로젝트의 비극은,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쇠퇴가 낳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결과를 표현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극은 제국주의·인종주의·식민주의에 아래로부터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영웅적 저항이 자신을 대변한다고 느끼는 전 세계의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결집하는 외침이 되었다. 이스라엘 국가(The state of Israel)는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에 이르는 모든 곳에서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적인 괴물 같은 국제 극우세력을 대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해방은 전 세계 곳곳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수십억 민중에게 이롭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향한 승리의 길을 찾으려면 국제적, 지역적(regional), 국지적(local) 차원에서 거대한 사회적 힘들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대량학살의 맥락이 어떤 계급적 역학을 나타내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절박한 자결권 쟁취투쟁과 이 지역 사회주의 혁명을 결합하며,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구분할 수 있는 해방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중동 전역의 민중이 단결하여 제국주의의 멍에와 자국 자본가·권위주의 정권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이스라엘 노동자계급이 시온주의 및 식민정책과 단절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위한 투쟁과 이 지역의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연관성은 레온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에 분명히 새겨져 있다. 이 이론을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 가장 체계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아마도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브라 니콜라(Jabra Nicola)일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시온주의 국가를 계급적,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였으며, 지역의 계급 역학을 분석하여 팔레스타인 주변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역사학자 호세피나 L. 마르티네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트로츠키는 생전에 자신의 연속혁명 이론이 세 가지 개념을 통합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첫째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이다. 둘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이행기로서의 혁명 그 자체이며, 이 이행기는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여 사회가 평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경제, 기술, 과학, 가족, 도덕, 일상생활의 혁명”을 수반한다. 셋째는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차원의 상호작용이야말로 오늘날 이 이론에 지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글은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전략적 관점을 정교화하기 위해 이 일련의 개념들의 타당성과 연관성을 입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레온 트로츠키, 자브라 니콜라, 그리고 일란 파페(Ilan Pappé), 우사마 막디시(Ussama Makdisi), 란 그린스타인(Ran Greenstein), 재커리 록맨(Zachary Lockman), 가브리엘 고도레스키(Gabriel Godorezky),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 같은 역사가들의 논의를 바탕에 둔다. 우리는 연속혁명 이론의 기본 원리를 교조적으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세계 제국주의 위기를 배경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최근 역사와 현재 상황에 비추어 연속혁명 이론의 구체화를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트로츠키 연속혁명론의 핵심을 이루는 세 가지 개념을 활용해 팔레스타인 역사의 근본적인 순간을 탐색하고 혁명적 좌파의 사상과 강령의 역사를 복원할 것이다. 우리는 이를, 특히 팔레스타인의 사회주의적 미래는 물론, 보다 일반적으로는 아랍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구상을 철저히 거부해 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지도자들의 사상과 대조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일란 파페의 설명처럼, 팔레스타인은 1948년 나크바 이전에도 결코 빈 땅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은 빌라드 알 샴(‘북쪽의 땅’ Bilad al-Sham), 즉 당시 레반트 지역의 일부로 번성했던 땅이다. 풍요로운 농업, 작은 마을들과 역사적인 도시들은 시온주의자들이 도래하기 직전까지 50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지탱하고 있었다.1) 1) Pappé, Ilan. Ten Myths About Israel. Verso Books, 2017. (국역: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틈새책방, 2024)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의 적지 않은 인구 중 유대인 비중은 미미했다. 오늘날 흔히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여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람 대다수는 많게는 1,000명이 거주하는 촌락에 속한 농민들이었다. 새로 생겨난 도시들에는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해안가와 고지대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20세기 초가 되면 제국주의의 침투로 초기 형태의 팔레스타인 도시 노동자계급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파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 기록물을 인용하여 19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구조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시온주의가 부상하기 전의 유대인 비율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약 2~5% 수준이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1878년에는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총 46만 2,465명이 살았다. 이 중 40만 3,795명(87%)은 이슬람교도였고, 4만 3,659명(10%)이 기독교인, 1만 5,011명(3%)은 유대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기 전, 오스만 제국은 자신의 지배와 제국 자체에 대한 더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발전시켰다. 19세기 중후반에는 ‘터키인’이 “오스만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이르렀고, 이는 팔레스타인의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과 정치적 소속감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우사마 막디시(Ussama Makdisi)가 “오스만 오리엔탈리즘”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스만 제국에 봉사하던 지식인들은 제국 내 터키인들을 아랍인, 특히 팔레스타인인 등 다른 민족 집단과 차별하고자 인종적 서열체계를 개발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민족주의 정서는 팔레스타인과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부르주아 혁명과 이전 식민지의 재편 아래 지정학을 재구성하던 강력한 개념인 ‘국민국가’(the nation)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중동 각지에서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을 독려했다. 이는 중동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영국 제국주의의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영국은 아랍 민중에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자결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로 인해 중동 전역에서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었다. 다른 한편, 영국은 전쟁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할지를 프랑스 및 다른 열강과 비밀리에 거래하며 이 지역 주민들을 새로운 제국주의 압제자들의 지배 아래로 몰아넣었다.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러한 초기 단계의 민족자결 사상은 발전하거나 실현될 수 없었다. 영국은 당시 중동 지역에서 프랑스 다음으로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중동 지역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국 내 시온주의 세력과도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20세기 초 30여 년간 이루어진 제국주의의 초기 개입은 팔레스타인의 복잡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엔조 달 피토(Enzo Dal Fitto)는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자 자브라 니콜라의 연구를 토대로 이러한 동학을 설명한다. 1917년부터 1939년 사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이루어진 시온주의 경제 부문의 발전은 아랍 봉건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적 부르주아계급의 형성을 저지하여 해당 지역의 경제적 발전 조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역사 발전은 정체되었고, 반제국주의 세력의 역사적 활력도 고갈되었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장악하기 전,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는 영국 시온주의 지도자 월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 영국 정부가 유대인 디아스포라2)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2) (편집자 주) 세계 곳곳에 사는 유대인 집단 1917년 11월 2일,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한 1918년 영국 정부는 국제 열강과 국제연맹과 함께 이 지역의 경계를 재협상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보다 명확히 정의된 지리적 공간을 창출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경계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새로운 유대인 정착민 중 누가 팔레스타인을 통치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일란 파페에 따르면,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재편함으로써 시온주의자들이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이스라엘의 땅)을 지리적으로 개념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땅에서는 유대인만이 땅과 자원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서사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빈 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은 역사적 분쟁의 대상이 된 땅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다모클레스의 칼날3)처럼 다가오는 신흥 열강에 맞서, 새로운 제국주의적 열망을 품고 세계를 자신의 상상대로 재구축하고자 했던 구 식민 열강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재편” 과정의 다음 단계인 제2차 세계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예행연습이었다. 3) (편집자 주) 고대 그리스의 일화로, 권력과 영광 뒤에 도사린 위험과 불안을 상징한다. 본문에서는 항상 팔레스타인에 드리워진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을 뜻한다. 시온주의자들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식민화는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구화되고, 물질적으로 지원되었다. 영국 자체는 쇠퇴하는 제국이었지만,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중동에서의 서방 제국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 분할의 일환으로 1923년 국제연맹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 저항은 영국 점령 기간 동안, 특히 1929년부터 1939년 사이에 더욱 확산되고 강화되었다. 이 반란의 절정은 1936년 총파업으로 나타났다. 아랍 노동자계급이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노동조건 개선과 민족 독립이 주요 요구였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대반란(The Great Revolt)”으로 알려진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 동안, 농촌의 농민 대중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농민들은 유대인 정착민과 영국의 점증하는 침탈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역사학자 재커리 록맨(Zachary Lockman)은 「동지와 적」(Comrades and Eenemi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6년 4월 15일, 샤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Izz al-Din al-Qassam)’이 창립한 게릴라 부대원들이 나블루스 인근에서 차량과 버스를 습격해 유대인 승객 2명을 살해했다. 이틀 후 우익 유대인 준군사 조직이 아랍인 2명을 살해하며 보복했다. 아랍인들의 시위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점차 광범위한 반식민주의 및 반시온주의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폭력을 억제하고 아래로부터의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 아랍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재빨리 전국적인 총파업을 촉구했다. 파업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모든 주요 도시에서 투쟁을 주도하기 위해 새로운 “민족위원회”(national committees)가 생겨났다. 깜짝 놀란 엘리트 정치인들은 대중적 저항의 물결에 편승하고자 파업 요구를 지지하는 한편, 아민 알후사이니(Amin al-Husayni)를 위원장으로 모든 주요 정당을 대표하는 새로운 아랍고등위원회(AHC)를 구성했다. 총파업은 1936년 10월까지 6개월간 계속되어 역사상 가장 긴 총파업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영국 통치와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아랍 민족주의 반란의 첫 단계로, 1939년 여름에야 끝이 났다.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야파에서 영국 경찰이 시위 중인 아랍 군중을 해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노동자계급의 대반란 참여는 지역 노동운동 역사상 가장 전투적인 장(章) 중 하나일 것이다. 록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팔레스타인 도시의 아랍 인구 대부분이 총파업에 참여했으며, 도시 노동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산 시드키 알다자니(Hasan Sidqi al-Dajani)의 운전사노조는 아랍의 자동차 운송을 마비시켰고, 야파항구 노동자들은 항구를 폐쇄했다. 파업을 지속하기 위해 전국위원회는 부유한 팔레스타인인들과 주변 국가의 동조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모금했고, 야파부두 노동자를 포함해 파업으로 휴업중인 사람들에게 파업 수당을 분배했다. 이 반란은 탄압에 의해, 그리고 ‘히스타드루트’(Histadrut, 1920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설립된 이스라엘 최대 노동조합연맹)가 이끄는 유대인 노조 지도부의 의식적인 행동에 의해 진압되었다. 히스타드루트는 시온주의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식민점령을 옹호했다. 한편, 과거 대지주로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팔레스타인 가문들은 반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운동의 지도부로 자리 잡았으며, 점령 세력과의 협조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영국과 시온주의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빼앗겼지만, 시온주의 세력으로부터 상당한 보상과 막대한 혜택을 받아 당시 식민체제의 부유층을 형성했다. 이 가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시절 수십 년 간 이 지역을 관리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이 땅을 점령했을 때도 점령군을 위해 계속 일했다. 팔레스타인 대중의 고통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들 가문은 주로 압드 알카디르 알후사이니(Abd al-Qadir al-Husayni)가 이끄는 아랍-팔레스타인 당(Arab-Palestinian Party)과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엔조 달 피토(Enzo Dal Fitto)는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지도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썼다: 그들의 부는 시온주의자들의 점령에 의존했기에, 그들의 반대는 그저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 그들은 아랍의 반시온주의 의식 형성을 지연시켰으며, 밸푸어 선언 역시 늦게서야 규탄했다. 알-카삼 저항과, 이후의 아랍 저항운동을 고무하고 강화한 시리아의 거대한 총파업 여파에 압도된 그들은, 1936년 “대반란”에 참여했다. 대반란은 거대한 파업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납세 거부와 같은 시민불복종 행동과 반란 민병대 결성을 동반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시온주의 민병대의 지원을 받은 영국 식민지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유럽 파시즘의 확산과 히틀러의 집권, 동유럽에서 발생한 수많은 유대인 학살(포그롬, Pogrom), 그리고 유럽에 내재하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 따라 유대인 이민이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아랍 경제가 폐쇄되면서, 시온주의 세력의 경제는 유럽에서 대규모로 유입된 유대 자본에 힘입어 그 영향력을 강화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영국은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받은 필 위원회(Peel commission)를 설립했다. 위원회의 임무는 이 지역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라고 권고하는 것이었으며, 그 분할의 목적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랍과 유대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해 영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서는 계급투쟁을 차단하는 데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다. 세계적 대재앙을 목전에 둔 영국의 정책은, 해당 지역 정부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아랍의 봉기를 방지하려는 목적에 따라, 그리고 새로운 유대인 정착민들의 유입과 잠재적인 유대 국가 설립으로 지역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욕망에 따라 수립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될 무렵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국제 사회주의 혁명이 패배한 상황에서, 이 전쟁은 결국 팔레스타인을 짓누를 새로운 압제자의 형태와 성격을 결정짓는 계기였다.2025-06-08 | 조회 3,915 -
관세전쟁과 열강투쟁4월 9일, 트럼프 정부는 상호관세 발효 13시간 만에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에 대해 90일간 관세부과 유예를 발표했다. 미국은 호기롭게 발표한 고율 관세 시행을 유보하며 취약함을 드러냈으나,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관세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그 맥락은 무엇이며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관세전쟁, 흔들리는 제국의 노골적 강제력 행사 4월 2일, 도널드 트럼프가 발표한 ‘상호관세’에 상호적인 것은 그 이름뿐이다. 베트남의 경우를 보자. 베트남의 최혜국 관세율, 즉 베트남이 같은 WTO 회원국들에 부여하는 관세율은 9.4%다. 상호관세가 이름처럼 ‘상호적’이라면, 미국이 베트남에 부과하는 세율도 9.4%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발표한 세율은 무려 46%다. 한국 상호 관세율 25%가 계산된 방식은 어떠한가? 2024년 미국이 한국과의 상품무역에서 기록한 적자(660억 달러)를 미국의 한국 상품 수입액(1,315억 달러)으로 나누면 50.2%가 나온다. 이 50.2%가 미국이 주장하는 공정한 관세율이다. 미국은 한국에 50.2% 관세를 매겨야 하나, ‘관대하게도’ 절반으로 깎아 25%만 매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미국은 각국 상호관세율을 해당 국가의 △대미 관세 △비관세 장벽 △환율 조작까지 고려한 잠정관세율에서 할인한 수치라고 설명했으나, 실제 관세율 산정 방식은 ‘엑셀 돌리기’에 불과하며 합리적 근거는 전무하다.1) 1)실제 적용된 산식은 다음과 같다. (해당국과의 무역적자 / 해당국으로부터의 상품수입액) ÷ 2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었다. 2차 대전 후 자본주의 황금기가 끝난 1970년대, 이윤율 저하에 직면한 미국 자본은 해외로 진출해 더 값싼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는 한편, 각국에 시장 개방을 압박했다. 이어 소련-동구권 붕괴와 중국의 자유무역질서 편입에 따라 자본주의 단일 시장이 형성되었다. 세계화의 전성기, 이제 ‘열강투쟁’과 ‘제국주의 전쟁’은 역사 속 이야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 오른편에서는 ‘맥도날드가 들어선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2), 왼편에서는 열강이 충돌하는 ‘제국주의’ 시대는 가고, 전 세계를 단일 질서로 포섭하는 ‘제국’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화의 호시절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과 브릭스 국가들이 부상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호주의 확대는 ‘열강투쟁 격화’라는 분명한 경향을 드러냈다. 2)소위 ‘골든 아치’ 이론. 골든 아치는 맥도날드의 ‘M’ 로고다. 미국의 지위는 예전 같지 않다. 2차대전 직후 세계 GDP의 50%에 달하던 미국 GDP 규모는 1985년 플라자합의 당시 35%로 줄어들었고, 이제는 세계 GDP의 24-25% 가량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부상했다. 최근 중국의 경제위기로 미·중 경제력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인식이 있으나, 이는 상당 부분 착시에 근거한다. 첫째,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고, 중국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달러 기준으로 본 미국 경제 규모는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중국은 실제보다 과소평가된다. 둘째, 최근 3년 사이 위안화 가치는 달러보다 15%가량 하락했다. 이에 따라 같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달러 기준으로 본 중국 산출량은 15% 과소평가 된다. 2024년 기준으로 미국의 명목 GDP는 28조 달러, 중국은 18조 달러이나, 세계은행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에서는 이미 2014년 중국 경제가 미국 경제를 앞질렀다. 구매력 평가 기준 GDP 순위 (2025, IMF)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2기는 1기 당시보다 훨씬 더 확장된 관세전쟁을 촉발했다. 트럼프 1기 관세전쟁 대상은 중국이었다. 트럼프 2기 관세전쟁 대상은 미국의 동맹국을 포함한 전 세계다. 자신이 만든 자유무역 체제를 노골적으로 뒤집으며 ‘내가 본 손해를 보상하라’고 강요하는 미국의 행보는, 흔들리는 패권국 지위를 노골적 수탈로 만회하려는 시도다. 트럼프는 상호관세를 발표한 4월 2일을 ‘미국 해방의 날’이라고 불렀다. 제국주의 국가가 노골적 수탈을 개시하겠다고 선언한 날의 이름 치고는 매우 뻔뻔하다. 관세는 경제전략이자 군사전략이다 2기 트럼프는 ‘스티븐 미란’이라는 인물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최근 화제인 ‘국제 무역체제 재구조화를 위한 사용자 가이드’, 일명 ‘미란 보고서’를 작성한 당사자다. 미란은 미국의 지속적 무역적자는 강한 달러 때문이라고 짚으며 이는 달러의 기축통화 기능과 연동된다고 주장한다. 즉, 무역적자가 지속되면 달러 가치가 하락하고, 수출이 늘어나 무역적자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국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비축하고 있기에, 달러 강세는 필연적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는 무역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미란 보고서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관세를 주요 수단으로 제시하며3), 다음의 안보·무역 기준들로 각국 관세율을 산정하자고 한다. (미란 보고서, 23p) 3)관세에 따르는 수입물가 상승의 경우, 무역 상대국의 환율 평가절하가 미국의 수입물가 상승을 상쇄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 해당국이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 미국이 그들에게 부과하는 수준과 비슷한 관세를 적용하는가? - 외환보유고를 과도하게 축적해 자국 통화를 인위적으로 평가절하한 이력이 있는가? - 미국 기업이 해당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가, 외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 접근하는 수준과 유사한가? - 미국의 지식재산권을 존중하는가? - 해당국이 중국으로부터 제품을 수입한 후 미국에 재수출하는 방식으로 관세를 회피하고 있는가? - 나토 국방예산 분담금을 전액 납부하고 있는가? - 중국, 러시아, 이란 등과의 국제 분쟁에서 어느 편에 서 있는가? - 제재 대상 국가 또는 기업과의 거래, 혹은 그들에 대한 제재 회피를 방조하는가? - 다양한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작전을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 미국의 적대 세력(테러리스트, 사이버 범죄자 등)을 자국 내에서 보호하거나 수용하는가? - 국제 무대에서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반미적인 외교 행보를 하는가? 위 기준들에서 드러나듯 미국의 관세전쟁은 단지 미국 세수를 늘리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이러한 체계는 국가 안보와 무역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구현할 수 있다. … 미국의 방위 우산 안에 들어오고자 한다면, 공정무역 체계 안에도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미란 보고서 23p). 관세는 무역과 안보를 직결시키고 세계 자본주의 자체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구축하는 지렛대다. 미국은 경제와 안보를 하나로 묶으며 ‘당신은 누구 편인가’를 묻는 한편, ‘나의 편이 되고 싶다면, 수탈을 수용하라’고 강요한다. 관세전쟁에는 실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마라라고 합의’, 미국의 우산 아래 머물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하라 관세전쟁을 촉발한 미국은 무역·금융·안보를 통합한 ‘안보구역’ 구축에 나서고 있다. 소위 ‘마라라고 합의’다. 100년 만기 채권 구입4) 등 미국이 제안하는 조치를 따르지 않는 국가에는 더 높은 관세를 부과하거나, 미국이 제공하는 방위우산에서 배제하겠다고 압박한다. 각국은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제공하는 달러-금융 시스템과 안보체제에 편입하는 각국이 부담해야 하는 정당한 대가일 뿐이다. 다음을 보자. 4)미란 보고서는 각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100년 만기 채권’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보고서 자체에 100년 만기 채권이 ‘무이자’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세간은 해당 채권이 무이자일 가능성까지 내다본다. "오늘날의 경제와 1980년대의 경제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미국의 총부채는 GDP 대비 120%를 초과하는 반면, 플라자합의 당시에는 약 40% 수준이었다. 이는 198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채권시장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 다음과 같은 ‘마라라고 합의(Mar-a-Lago Accord)’를 제안한다: 1. 안보구역은 공공재이며, 그 안에 속한 국가는 미국 국채를 매입해 안보구역에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2. 안보구역은 자본재이며, 단기 국채가 아닌 100년 만기 채권으로 조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안보구역에는 철조망이 있다. 당신이 단기채권을 장기채권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관세가 당신을 안보구역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미란 보고서, 28p) 미란 보고서는 미국이 전 세계를 위해 손해를 보는 것처럼 묘사하나, 현실은 정반대다. 그간 미국이 막대한 무역적자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특권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이 특권 덕분에 미국은 수입대금을 지불할 때 자국 통화를 마음껏 발행하고, 상대 흑자국들은 그 달러를 다시 미국 국채에 투자해왔다. 즉, 미국은 달러로 세계 각국의 실물가치를 흡수해 온 것이며, 이것이 미국이 세계 패권을 유지하는 동학이었다. ‘안보구역 건설에는 돈이 필요하다. 100년 뒤에 돌려줄 테니, 일단 돈을 내놓아라’, 미란 보고서가 제시하는 마라라고 합의는 1971년 달러 금태환 중지, 1985년 플라자합의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위기에 대한 패권적 해결책일 뿐이다. 미국은 사적 이익을 공공의 이익으로 포장하나, 그 명분은 트럼프의 그린란드·캐나다·파나마운하 편입 압박만큼이나 허약하다.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를 이끄는 헤게모니 국가가 아니라, 그저 보다 강한 일개 패권국으로서 힘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위기는 그만큼 깊고 넓다. 세계 자본주의 균열 심화 4월 9일, 트럼프 정부는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에 대해 90일간 관세부과 유예를 발표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금융시장 발작이다. 금융자산은 한 달 전부터 하락하기 시작했으나, 4월 2일 상호관세 발표 후 주식시장은 폭락했고, 이보다 더 중요하게 국채 투매에 따른 국채 가격 폭락과 그에 따르는 국채금리(수익률) 상승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투자자들은 안전자산인 미 국채로 몰려 국채 가격이 상승한다(=국채금리 하락). 그러나 이번에는 미 국채 투매가 벌어졌다. 며칠 사이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이 3.85%에서 4.5%로 급등했고,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0.54% 급등해 4.92%를 기록했다. 채권자들이 그만큼 많은 국채 물량을 투매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지적한 대로, 이는 미국 금융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 국채금리 급등은 왜 문제인가? 첫째, 막대한 빚을 진 미국 정부에게 국채금리 급등은 치명적이다. 미국 전체 국가부채는 약 36.2조 달러(약 5경원)에 달하며, 이 중 2025년에 갚아야 할 부채만 9.2조 달러(약 1경 3천조 원)로, 전체 빚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금리 인상기, 미국은 이자 부담을 줄이고자 단기채권 발행을 늘렸고, 이에 만기 1년 이하 부채는 전체 부채의 22%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채금리가 급등하면, 미국 정부는 더 높은 금리로 새로운 빚을 낼 수밖에 없고, 이는 정부의 부채 부담을 훨씬 키운다. 둘째, 국채금리 급등으로 미국 은행과 기업이 잇따라 파산 위기에 빠질 수 있다. 2023년 3월, 뱅크런에 이은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드러내듯, 미국 은행과 기업은 상당한 자산을 국채로 보유한다. 국채금리가 급등하면 국채 가격은 크게 떨어지기에, 국채금리 급등은 은행과 기업이 보유한 자산평가액 급감을 뜻한다. 멀쩡하던 기업이 갑자기 유동성 위기에 몰려 연쇄적으로 파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국채금리는 시장금리의 기준이 되기에, 주택담보대출을 비롯한 각급 대출금리도 덩달아 오르게 된다. 4월 2일 이후 나타난 채권자들의 미국채 투매는 중요한 징후다. 미국의 의도는 그대로 관철되지 않으며, 그 후폭풍은 미국 주도 세계체제에 대한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는 중국과 브릭스의 팽창에 날개를 달 것이다. 중국은 미국에 대응해 대미 관세를 125%로 인상했고, 희토류 수출 통제에 나섰으며, 브릭스 국가들은 물론 남미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 나아가 미국의 전통적 우방들에도 손짓하고 있다. 균열하는 세계 속에서, 중국은 자유무역을 역설하며 동맹을 강화할 좋은 명분을 얻은 것이다. 당장 2025년 3월 30일 한·중·일 경제통상장관들이 5년 만에 3자 회담을 열어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세 국가는 △공급망 협력 강화 △수출통제에 대한 소통 강화 △‘높은 수준’의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위한 협력을 논의했다. 4월 9일에는 중남미·카리브 국가공동체(CELAC) 30개 회원국이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을 규탄했다. 트럼프 관세 발표 이후 5년 만에 열린 한중일 경제통상장관회의 현시점에서 트럼프가 관세 전쟁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인지, 봉합할 것인지는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관세전쟁을 촉발한 트럼프와 미국 정부조차 그 결과를 알지 못하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다만 확실한 것은 미국의 패권적 행보가 세계 자본주의의 균열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 각국은 각자의 이익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 양상은 명분과 이념으로 무장한 두 거대 진영 사이의 대결이라기보다, 거대 열강과 지역 패권국들의 합종연횡에 가까울 것이다. 국경이 아니라 계급을 기준으로 단결하자 3월 26일, 전미자동차노조(UAW)는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 지지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노동자계급 공동체를 황폐화한 자유무역 재앙을 끝내고자 나선 트럼프 행정부에 갈채를 보냅니다”(숀 페인 UAW 위원장). UAW는 해당 성명에서 △미국 내 생산 확대 △공장폐쇄와 저임금 국가로의 일자리 이전 금지 △미국산 부품 사용 확대 등을 요구했다. 그야말로 반동적인 입장이다. 트럼프가 이민자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하고, 수십만 연방 공무원 노동자를 해고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UAW와 숀 페인 논리대로라면, 미국 노동자들과 한국 노동자들은 트럼프 정부와 세계 자본가들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할 동지이기는커녕, 철천지원수일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관세로 산업과 일자리를 미국으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구축된 글로벌 공급망 해체가 이루어질 것인지도 미지수일뿐더러, 일부 산업이 미국으로 회귀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위기의 미국 자본을 위한 것일 뿐, 노동자의 임금·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극소수 노동자가 그 수혜자가 될 수는 있으나, 전체 노동자들은 감소한 생산에 따르는 고용 감소, 수입물가 인상이라는 더 큰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자본은 관세 비용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할 것이며, 노동자 민중은 물가상승과 실질임금 삭감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기에 UAW의 입장은 전 세계 노동자들은 물론 미국 노동자들의 입장 또한 대표하지 못한다. 2025년 4월 5일, 미국 전역의 1,400개 도시에서 약 60만 명이 참여한 동시다발 시위가 벌어졌다. 이번 시위는 그간 이어져온 연금과 공공의료보험 등 사회보장제도 수호, 공공부문 해고반대 시위의 연장선에 있으며, 관세정책에 대한 비판 역시 참가자들의 주요 목소리였다. 4월 5일 시위 사진: Oregon Public Broadcasting 고율 관세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를 더 많이 분할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열강투쟁의 결과이자, 이를 더욱 강화하는 촉매다. 노동자들이 국제주의적 관점으로 단결하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착취와 실업의 고통을 타국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한 노동자 내부의 투쟁뿐이다. 자본가들의 전쟁에 노동자가 앞장서서는 안 된다. 심화하는 보호주의 속에서, 한국 자본은 수출 감소를 만회하고자 노동자들의 고용, 임금, 노동조건을 공격할 것이다. 반도체특별법에서 드러나듯 국가는 자본에는 특혜를, 노동자에게는 노동시간 연장을 비롯한 착취 강화에 나설 것이다. 한국 노동자들은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구조조정에 맞서는 한편, 세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관세전쟁 뒤로 실제 전쟁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지금, 노동자의 국제연대는 더욱 절실하다.2025-04-19 | 조회 4,460 -
[번역] 민주당은 공허한 말들로 트럼프를 이길 수 없었다 — 그러나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은 이길 수 있다[편집자 주] 윤석열 친위쿠데타 이후 극우세력의 준동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극우세력의 (재)집권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그런 한국 상황은 미국에서 트럼프의 재집권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미국 의사당을 공격했을 때, 트럼프의 재집권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을 지난 이후 트럼프는 버젓이 재집권했고, 의사당을 공격한 폭도들을 사면했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왜 그리고 어떻게 재집권할 수 있었는가?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반면교사를 얻기 위해, 레프트보이스의 관련 기사를 시일이 좀 지났지만 번역해서 싣는다. 히메나 베르가라(Jimena Vergara)와 시빌 데이비스(Sybil Davis) 2024년 11월 6일 대승을 거둔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가 매우 반동적인 의제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투쟁할 준비가 된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극우를 멈춰 세울 수 있다. 선거일 밤이 다가오면서,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이겼는지 알기까지 며칠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주요 경합 주를 모두 제패하고 선거인단 및 일반 투표에서 모두 승리했다. 공화당은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장악할 게 확실시되고 있다. 몇 달 동안 선거 운동을 벌인 끝에, 미래가 드러났다: 우리는 공화당이 대통령, 의회, 대법원을 모두 장악하는 보수적 삼권 분립에 직면해 있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우경화 현상이 나타났다. 파란(민주당) 주와 빨간(공화당) 주, 도시와 작은 마을에서 모두 트럼프의 득표율이 증가했다. 뉴욕과 같은 확실한 파란 주에서도 해리스는 1988년 이후 어떤 민주당 후보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동시에 트럼프는 투표율이 약간 낮아졌기에 2020년 바이든보다 적은 표로 승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당파 투표율이 민주당 지지자 투표율보다 높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주당 후보에 대한 열정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우경화 현상을 경제 위기, 신자유주의의 위기, 그리고 민주당 위기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선거를 몇 달 남겨놓고 해리스를 후보로 내세운 민주당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 줄 게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트럼프의 압승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민중들에게 큰 위협이다.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주에서 이미 목격한 바와 같이, 극우파는 이 힘을 이용해 이민자, 노동자 권리, 재생산 권리, 트랜스젠더 권리, 그리고 다른 민주적 권리에 대한 공격을 가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일 이후 어느 정도 절망감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지만, 우리는 트럼프와 그의 극우 동맹에 맞서 절망을 행동으로 바꾸고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전환돼 버렸던) 트럼프 첫 임기 때의 저항을 넘어 우파에 대항하는 진정한 운동, 즉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유권자 성향의 변화 유권자 인구 통계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쪽으로 이동한 정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특히 젊은 남성, 흑인 남성, 라틴계 사이에서 지지 기반을 넓혔다(이 중 40%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했다). 30세 미만의 남성은 2020년 15% 포인트의 격차로 바이든을 지지하다가 13% 포인트의 격차로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는 공화당을 대학에 다니지 않은 노동자계급 유권자의 당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그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했다. 선거를 앞두고 성별 투표성향 차이에 대한 논의가 많았지만, 백인 여성의 다수가 트럼프를 세 번 연속 지지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실제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해리스는 전체 여성 속에서 10% 차이로 승리했지만, 2020년 바이든이 트럼프에게 14% 차이로 승리했던 것보다는 낮은 수치다. 반면, 트럼프는 전체 남성에서 바이든 때와 같은 차이로 승리했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이 임신중지권에 대한 지지를 승리의 비책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주리주와 몬태나주 등 여러 주에서 임신중지권을 보호하기 위한 주민투표가 통과됐지만, 동시에 트럼프가 다수 득표를 했다. 플로리다주를 비롯한 다른 많은 주에서는 임신중지권 지지율이 트럼프 지지율보다 높았다. 이 사실은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투쟁을 무기로 활용하는 것이 해리스의 여성 지지율을 높이는 데서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민주당이 임신중지권을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전국적 운동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임신중지권 확보에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못했다. 민주당은 임신중지권 이슈에 의존하여 2022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돌풍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민주당에 불리하게 바뀌었다. 트럼프가 임신중지권에 대한 공화당의 공식 입장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임신중지권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 변경은 매우 교활했다. 트럼프는 임신중지권을 “주(州)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움으로써,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임신중지권을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일부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트럼프가 임신중지권 반대 세력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임신중지권에 관한 한 트럼프가 다른 공화당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재생산 권리를 공격해 온 당의 수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임신중지권을 실제로 보호하기 위해 민주당이 국가 차원에서 한 일이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가 해리스와의 토론에서 지적했듯이, 해리스가 서명하겠다고 약속한 임신중지권 복원은 민주당원들이 조직하기를 꺼려하는 상당한 계급투쟁 없이는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트럼프가 승리한 결과는 미국인의 다수(주민의 55%)가 이민을 억제하기를 원한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것은 미국 태생과 일부 이민 노동자 모두의 경제적 불안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을 반동적인 입장으로 표출했다. 트럼프는 이민자들에게 가장 가혹한 입장을 가진 후보였다. “지금 당장 대량 추방”은 트럼프 집회에서 외치는 주요 구호가 되었다. 해리스가 이민 문제에 관해 오른쪽으로 멀리 이동했지만, 트럼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트럼프는 모든 것을 이민자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정치경력을 쌓았기 때문이다. 해리스가 실패한 이유의 일부는 2020년 바이든 선거운동에서 친이민 정책을 펴려고 노력했다는 모순과 관련이 있다. 그때 민주당은 NGO들과 협력하여 이민자 권리 운동을 민주당으로 유입시키려고 노력했었다. 그 후, 바이든은 이민자에게 가혹한 탄압을 퍼부었는데, NGO들의 지도부가 방향을 상실하고 운동을 무력화하도록 성공적으로 이끈 뒤였기 때문에 바이든 정부에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 그러한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반이민 감정이 고조되었고, 트럼프는 이민자들을 노동자계급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를 뒤집어씌울 유용한 희생양으로 강력히 활용했다.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데 있어, 민주당은 트럼프가 선거운동의 기둥으로 삼은 이슈들에 대해서만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선거 결과는 그들이 트럼프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당으로 나서는 데서도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자코뱅>이 펜실베니아주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조사대상이 된 모든 정치적 메시지 중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메시지가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민주당원들이 민주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거나 또는 직접 공격하고 있으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라”고 메시지를 내는 것은 상당수 유권자에게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정부 기관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으며, 민주당원들이 매달리는 규범을 보호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민주당의 위기 다수의 유권자들은 경제를 이번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보았다.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다수는 트럼프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바이든은 코로나19 봉쇄 이후 경제를 안정시키고 반도체과학법 같은 몇 가지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일반 미국인의 경제 상황은 물가인상 때문에, 특히 식료품 같은 일반 소비재 가격의 상승과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해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런 상황을 놓고, 민주당은 경제가 실제로는 잘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트럼프와 공화당은 강하게 비난했다. 바이든의 2020년 선거 캠페인은 샌더스의 지지 기반을 민주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샌더스와 협상해야 했다. 바이든은 학자금 대출 탕감, 노조조직화 보호법 추진, 노조 제조업 일자리 귀환 등 일부 진보적인 정책으로 통치했다. 이에 비해 2024년 해리스의 공약은 초점이 없었고, 노동자계급보다는 중간계급을 겨냥했다. 해리스는 월스트리트 억만장자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일부가 트럼프와 손을 잡게 되었고, 노동자계급과 민주당의 역사적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번 선거는 2008년부터 성장해 온 정치적 현상, 즉 노동자계급의 일부가 민주당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의 결과를 보여준다. 2016년에는 트럼프가 일부 러스트벨트 주에서 승리했지만, 이번에는 ‘블루 월’(민주당 우세 주들을 연결한 벽)이 무너졌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확고하게 공화당 지지자가 되면서, 정치에서 새로운 “학위 격차”를 만들어 냈다. 민주당은 노동자계급 및 사회운동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비록 바이든이 노동자들에게 호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말이다.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치와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표하지 않는 정치에 지친 노동자들은 더 이상 민주당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보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역동적인 운동은 이 점을 반영했다. 시온주의를 완전히 수용한 민주당은 팔레스타인 운동에게 사소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전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 운동 대표에게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집회에서 아랍계 미국인을 쫓아냈다. 그 결과, 해리스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지지자 없음’ 운동이 등장해 많은 아랍계 미국인들이 그녀에게 투표하기를 거부했다. 일부 아랍계 미국인들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민주당은 2020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이끌었던 것과 달리 팔레스타인 운동을 투표함으로 이끌지 못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과 민권 운동으로 청년들이 급진화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젊은 활동가들과 민주당 간의 단절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진보의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해리스를 지지하지 않았던 라시다 탈리브가 자신의 선거구에서 해리스보다 더 많은 표를 얻어 당선된 사실은 적극적인 팔레스타인 지지 입장이 갖는 대중성을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활동가 기반을 멀리한 것은 해리스가 패배하게 한 이유의 일부였다. 유권자들의 경제적 두려움 앞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값비싼 전쟁에서 미국을 빼내겠다고 약속했다. 반면에 민주당은 세계 질서에서 미국의 역할에 관한 매파적 수사를 두 배로 늘렸다. 공화당 지지기반 내 중도층을 공략하기 위해, 해리스는 이라크 전쟁의 주모자 중 한 명이자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자의 딸인 리즈 체니와 손을 잡았고, 트럼프는 미국을 값비싼 “영원한 전쟁”에서 빼내려는 후보로 자신을 그렸다. 해리스가 트럼프에게 패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앞으로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분명히 실수를 저질렀고, 트럼프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해리스는 “기쁨”, “자유”, “코코넛 나무” 같은 공허한 말들로 가득 찬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이민자 권리, 기후 변화, 군대, 트랜스젠더 권리 등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공화당원인 체니 같은 이들과 함께 하는 해리스의 “빅 텐트”는, 해리스를 초당파적 기득권 세력의 수호자로, 반면 트럼프를 그 거부자로 그려지게 했다. 요컨대, 오른쪽으로의 이동은 해리스에게 완전한 실패를 의미했다. 집권한 신우파 트럼프는 승리 연설에서 자신이 다가오는 임기 동안 대통령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권한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트럼프의 지지 연합은 다양한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경제적 포퓰리즘을 원하는 노동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고한 극우파 이데올로그들이 있다. 임신중지권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에 불만을 가진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임신중지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서로 알력다툼을 벌일 MAGA 운동의 다양한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다. 트럼프는 2016년과 2020년에 확보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거대자본들로부터 지지받고 있다. 트럼프가 이례적인 대통령 후보였고 자본의 중요한 부문이 해리스를 지지하고 기부했지만, 일론 머스크와 같은 일부 거대자본가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제국주의 부르주아지 사이에 분열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안톤 재거는 <신좌파평론>에 이렇게 썼다. “두 정당의 사회적 구조는 2010년대 미국 정치 경제의 지각변동을 반영하고 있다. 녹색 재산업화라는 방향과 국내외 화석연료 생산이라는 방향 사이에서 갈등이 존재한다. 인플레이션과 싸운다는 방향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서 달러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 제공이라는 방향 사이에서도 갈등이 존재한다. 이 복잡한 상황을 중심으로 두 블록이 응집되었다. 한편으로는,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계급을 넘어선 탄소집약연합이 형성되었는데, 공화당의 기존 신보수주의 지지자들을 제거하는 대신 주변부 블루칼라 노동자들, 농촌의 소부르주아, 교외의 중간 관리자, 부동산 자본가, 암호화폐 상인, 실리콘 밸리의 우파, 1980년대 자유방임주의의 맹공격에서 살아남은 철강 생산자들을 끌어들였다. 레이건이 결성한 연합과 달리, 트럼프의 연합은 백인 대학 졸업생이 부족하지만 학위가 없는 백인들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트럼프의 연합은 미국의 헌법이 가진 반다수결주의적 특성 덕분에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투표자 억제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 그 동원력은 이제 트럼프를 이용하여 주정부 기금에 대한 접근을 보장받고자 하는 포드 같은 기술 재벌에 의해 완화되고 있으며, 일부 노동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공동 결정제도 및 단체 임금협상에 관심이 있는 당내 새로운 수정주의 우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할 때,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은 더욱 극단적인 권위주의적 특징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정부다. 이를테면 법무부에 대한 통제 강화와 행정부의 권력 강화 시도가 있을 것이다. 자본의 더 큰 부문에 점점 더 호소력을 발휘하는 의제를 내세울 것이다. 이 의제는 금융 규제 완화, 국가와 교회의 분리 축소, 보호 무역주의, 그리고 민주적 권리 공격에 기반을 둘 것이다. 강력한 이민자 혐오 정책을 갖고 반이민 민병대를 부추기는 정부가 될 것이다. 이 정부는 “대 이스라엘”이라는 대량 학살 프로젝트를 계속 지원할 것이다. 가장 먼저 트럼프를 축하한 세계의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가 네타냐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정부는 국제 동맹국들과 재협상을 시도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꿀 것이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는 반전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그는 대신 중국과의 대결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화와 국경 군대 배치 등을 통해 미국 사회를 재편하고자 한다. 트럼프는 극단적 제국주의자로서 통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맞서 싸우려면 전 세계 노동자 자매형제들과 연대하여 싸우는 강력한 노동자계급 국제주의가 필요하다. 억압에 대한 모든 위협과 함께, 트럼프는 미래의 국내 계급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단계 주류 분석가와 정치인들은 계급투쟁을 고려하지 않는다. 최근 <에즈라 클라인 쇼>에서 게리 거스틀은 신자유주의의 구질서가 사라졌지만 아직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낡은 것이 죽어가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람시의 유기적 위기 개념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클라인과 거스틀이 놓치고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상황을 규정하고 급격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변화하는 상황은 선거를 통해 표현되었지만, 거리, 학교, 직장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은 계급투쟁의 배제는 논리적으로 트럼프가 반인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치를 반대 없이 강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이러한 조치를 방해하고 중단시킬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노동자계급의 행동에 달려 있다. 트럼프의 복귀 앞에서, 민주당은 노동조합 및 사회운동 관료들과 공모하여 광범위한 인민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스스로를 재구성하려고 할 것이다. <자코뱅>과 DSA는 민주당을 노동자계급과 좌파에 더 가깝게 재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2016년과 2020년 샌더스 차단이 보여주었듯이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한 신우파가 등장하는 상황에서 좌파가 방향을 잃게 하는 데 일조했다. 민주당은 자본과 자본주의 체제에 묶여 있기 때문에 트럼프와 극우파에 맞서는 데 필요한 투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가 우경화를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요소도 있다. 민주당과 결별하고 좌파로 향하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운동은 아직 사회운동의 무덤으로 이끌려 가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정권과 대학 내 동맹세력은 이를 억압하기 위해 더욱 가혹한 전술을 사용해야만 했다. 집단학살이 계속되면서, 이 운동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마도 트럼프가 주도하는 탄압적인 조치에 맞선 더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하면서 말이다.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공격 이후 오랜 동면으로부터 다시 깨어나는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새로운 노조들이 결성되고, 투쟁적인 파업들이 진행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노조를 단순한 생계유지 이상의 것을 위한 투쟁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좋은 징조이며, 상황을 분석할 때 함께 고려해야 한다. 관료들이 이런 투쟁을 막으려 할 것이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노동조합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트럼프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노동자계급과 사회운동에 있다. 우리가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계급투쟁을 함께 조직할 수 있다면, 트럼프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급투쟁이 유기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격동의 시기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시기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낡은 것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계급투쟁은, 만일 우리가 조직해 낸다면, 새로운 무언가의 산파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파에 대항하는 공동전선만이 아니라 우리의 투쟁을 하나로 묶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사회주의 강령을 가진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정당이 필요하다. (원문) https://www.leftvoice.org/the-democrats-couldnt-beat-trump-with-hot-air-and-coconut-trees-an-organized-working-class-can/2025-02-06 | 조회 5,911 -
윤석열을 끌어내리고 이주민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힘을 모으자!사진=민주노총 전북본부 제공 지난 11월 8일 미등록 이주아동 출신 32살 노동자 강태완씨가 전북 김제의 특장차 생산업체 에이치알이앤아이(HR E&I)에서 10t짜리 건설기계 장비와 굴착기 사이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어머니는 경찰에게 붙잡힐까 두려워 주검이 안치된 병원 밖을 맴돌며 울었다. 너무나 비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바늘구멍은 뚫었지만, 빛은 없었다 강태완씨는 1998년, 6살에 몽골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23년간 이주아동, 이주청년으로 살았다. 그는 체류자격이 없다는 불안감을 안고 청소년기를 버텨왔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언제든 강제출국될 수 있다. ‘재학생 강제퇴거 유예’ 지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진학도 취업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강태완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간 비자 없이 이삿짐센터와 공장에서 일하며 버텨왔다. 2021년 몽골로 자진출국한 후 2022년 단기 체류 비자로 한국에 다시 들어온 강씨는 구체신청을 거쳐 유학(D-2) 체류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기간에 겪은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다. 몽골 정부는 유학비자는 한국에 가서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한국 정부는 몽골에서 유학비자를 받아와야 한다고 했다. 여러 활동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유학비자를 얻고 전문대를 나온 강태완씨는 김제의 HR E&I에 취업했다. 정부와 지자체가 ‘지정된 인구감소 지역에서 5년 이상 거주’하면 취업비자를 건너뛰고 곧바로 거주비자를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역특화형 비자(F2R)로, ‘5년 거주 의무’라는 족쇄가 있는 비자이지만 강태완씨는 이제야 제대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입사 8개월 만에 중대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자본은 이윤축적을 위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전 세계 노동자민중을 착취해 왔다. 자본이동의 자유에 비하면 노동자들은 이동의 자유가 너무나 좁다. 이주민들은 개별 국가들이 설치한 높은 장벽과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정주 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 강태완씨도 힘겹게 이 높은 장벽과 좁은 관문, 즉 ‘바늘 구멍’을 뚫었다. 그런데 애초에 이렇게 높은 장벽과 좁은 관문이 왜 필요한가? 이러한 정부의 이주(노동) 정책은 오로지 자본가들의 편의를 위해서 도입됐다. 그렇기에, 정부는 이들에 대한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덕지덕지 갖다 붙였다. 고용허가제 안의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대표적인 예다. 바닥 향한 경쟁 막아내자 법무부의 미등록 이주아동 조건부 구체대책이 2025년 3월에 끝난다. 강태완씨는 사고가 나기 몇 달 전 구제 대책을 끝내지 말라는 캠페인 지지 영상을 촬영했다. 15년 이상 체류, 중·고교 재학, 고등학교 졸업 등 일정한 요건을 충족할 경우 임시체류자격(G-1 비자)를 부여하는 제도다. 모든 미등록 이주아동의 차별 없는 삶을 위해서는 구제대책의 상시화만이 아니라 ‘체류기간, 공교육 이수’라는 족쇄도 없어져야 한다. 유족 측은 브레이크 기능도 없는 장비를 경사로에서 후진시키면서 뒤에 고소차들까지 줄지어 세워둔 것을 끼임 사고의 중요한 원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사측은 사고의 원인을 태완씨에게 돌리며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재발방치 대책과 산재처리 협조 요구도 묵살하고 있다. 이주운동 단체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 12월 5일 HR E&I 본사 앞 규탄집회와 원광대병원 앞 추모제를 열었다. 이주민과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바꾸지 않고서는 선주민과 정주노동자의 열악한 현실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열악한 현실이 노동자 민중을 바닥 향한 경쟁으로 내모는 강력한 압력이기 때문이다. 모든 미등록 이주아동의 합법화, 모든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을 위해 힘을 모으자.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노동허가제를 쟁취하자.2024-12-06 | 조회 2,034 -
[기고] 법은 달라도, 부품 취급은 똑같네[편집자 주] 일본자본 닛토덴코의 먹튀폐업에 맞서 고공농성을 300일 넘게 전개하고 있는 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이 일본 본사에 책임을 묻기 위해 원정투쟁을 떠난다. 수많은 외투자본이 한국에 들어와 노동자를 착취하다가 민주노조가 결성되면 공장을 일방적으로 청산하고 먹튀한 역사를 반복해왔다. 일국을 넘어선 공장폐쇄 결정 앞에 많은 민주노조가 무너져왔다. 그래서 외투자본의 먹튀에 맞선 투쟁은 국제적일 수밖에 없다. 기고자는 먹튀폐업에 맞서는 옵티칼하이테크지회의 일본원정투쟁을 기록해 전하려 한다. 일본원정투쟁 이틀 차, 첫날은 비행기, 기차, 지하철을 타고 꽤 먼 길을 오느라 하루를 다 썼다. 지난밤, 자려는데 느낌이 왔다. ‘내일 재밌는 일이 생길 거 같아.’ 조금 신이 난 채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다같이 아침 먹고, 비타민과 홍삼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나왔다. 종이비행기로 날린 항의 오늘은 ‘수도권지역 유니온네트워크 일일 행동’의 날이다. 일본의 일반노조 동지들이 닛토덴코의 도쿄 본사 방문을 시작으로, 수도권 투쟁 사업장들을 돌며 연대하는 날이다. 일정표를 보니까,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하는 ‘차별 없는 서울 대행진’이랑 비슷했다. (이지영 사무장이 보안에게 '항의서한 받을 사람을 데려와'라며 따지고 있다.) 시나가와역에서 약 70명의 동지를 만나 닛토덴코 영업 본사로 갔다. 도쿄 시나가와역에서 약 5분 거리였다. 아주 높은 빌딩의 26층이었다. 밖에서 간단히 상황 설명 후 약 20명이 26층으로 올라갔다. 가보니, ‘아! 여기구나’ 싶었다. 옵티칼 조합원들이 본사를 찾아갔다가 항상 보안에게 막히는 곳이었다. 이번에도 보안 셋이서 로봇같은 얼굴로 막고 있었다. 이지영 사무장님은 “이번에 우리가 온 게 10번째에요! 해결될 때까지 계속 올 거라고요!”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일본 동지들이 순식간에 이곳저곳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가 거세졌다. “동지들이 ‘비켜라!’, ‘담당자 나와라!’라고 말하고 있어요” 통역을 담당해준 사코다상이 설명해주었다. 우린 다같이 “다카사키 히데오 나와라!”를 외쳤다. 약 20분간 소리를 지르며 싸웠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앞엔 닛토덴코가 고용한 것도 아닌, 건물 경비 용역이 3명에서 4명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닛토덴코 직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항의서한을 그 자리에서 지원모임 대표 동지가 읽었고, 이지영 동지가 그걸 종이비행기로 접었다. 슝- 종이비행기를 던지고 나왔다. 일본 동지들은 닛토덴코는 다른 일본 기업에 비교해도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나쁘다고 했다. 일본 동지들은 이지영 동지에게 종이비행기가 너무 좋았다며, 다음엔 항의서한을 훨씬 더 많이 뽑아서 가져오자고, 다같이 비행기를 던지자고 했다. 우린 닛토덴코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 전까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매일 찾아갈 거다. 필요하다면 26층 전체가 종이비행기로 가득 찰 만큼 잔뜩 접어갈 거다. (닛토덴코 항의행동 후 나와서 지회 깃발을 몸에 두른 이지영 사무장) 와, 일본은 법이 좋네 이제부터 우리가 연대할 차례였다. 처음 간 곳은 ‘가이치 학원’이란 사학재단이었다. 초/중/고/대학교를 모두 가진 사립재단은 선생님의 임금을 떼어먹고 있었다. 일본은 법적으로 한 달에 최대 60시간까지 야근을 할 수 있는데, 투쟁 당사자는 60시간 야근을 하고도 수당을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수업 준비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도 수당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코다상은 우리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은 근로기준법이죠? 일본은 노동기준법이에요. 일본은 국적이나 사업장 규모와 상관없이 모두 노동기준법을 적용받아요. 만약 ‘불법체류자’라도 법적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도 일본에도 ‘빨갱이’가 노조를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사업장에 노조를 만들기 어려워요. 그래서 저 선생님은 혼자서도 가입할 수 있는 지역 일반노조에 들어온 거에요. 이런 식으로 사업장에서 혼자 투쟁하는 경우가 일본에 많아요. 일본은 일반노조가 아주 중요해요.” (한 동지가 가마치 사학재단의 부교장에게 항의서한을 주며, 수당을 지급하라고 말하고 있다.) 흥미로웠다. 5인 미만 사업장에도 법적으로 ‘노동’기준법이 전부 적용된다니. 일본은 법이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당사자가 주장하는 수업 준비 시간과 야근에 대한 수당은 모두 법적으로 주어야 하는 것인데, 사립재단이 대놓고 위법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니까 사코다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이랑 비교하니까 재밌죠? 근데 한국보다 못한 것도 많아요. 그래서 국제연대가 중요해요. 서로가 서로한테 도움이 되는 게 국제연대에요.” 화려한 표현은 아니지만, 와닿는 말이었다. 이지영 사무장님은 여기선 내가 발언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이훈입니다. 한국에도 여기와 같은 곳이 있습니다. 강원대학교입니다. 강원대학교는 한국어 교원(외국인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육노동자)에게 수업 준비 시간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법원까지 판결이 났는데도 여전히 수당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린 돈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이런 돈을 줘도 너는 일할 수밖에 없잖아’라며 우릴 무시하는 그 태도가 분노스러운 겁니다.” 일본 동지들이 굉장히 기뻐하며 발언을 들어주었다. 끝나고 우린 당사자에게 가서 “We support your fight”라며 약간 틀렸을지도 모를 문법으로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가마치 학교 앞에서 일반노조의 이주노동자 조합원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있다.) 부품 취급하는 건 똑같네 다음으로 간 곳은 JA라는 일본농업협회중앙회였다. 외국인 파견노동자가 포크레인을 운전하다가 산재를 당했다고 했다. 당시 포크레인으로 1톤 정도의 쌀을 옮기고 있었는데, 포크레인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쌀이 쏟아지면서 노동자를 덮쳤다. 해당 노동자는 어깨를 다쳐서 산업재해 10급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파견업체는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를 탓하며 그를 해고했다. 배/보상금도 없었다. 원청인 농협중앙회는 아예 교섭에 나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원래 무거운 걸 들라고 만들어진 게 포크레인인데, 그게 어떻게 1톤에 무너질 수가 있나. 노동환경이 너무 안 좋았던 게 분명한 상황”이라며 화를 냈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의 기여 성과는 이미 수치로 드러났는데도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원통함을 표현했다. 한국제강 생각이 났다. 1톤이 넘는 철판을 들어 올려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을 하던 하청노동자였다. 들어 올린 끈이 끊어지면서 철판이 노동자의 다리를 덮쳤고 과다출혈로 운명을 달리했다. 원청 한국제강의 사장은 판결로 1년 징역형이 나오자, 형량이 과도하게 크다며 항소했었다. 비슷하다. (한 일본 동지가, 파견노동자의 상황과 전반적인 일본 노동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린 모두 다르고, 전부 똑같다 국제연대란 뭘까. 고작 하루 일본을 돌아다닌 내가 무얼 알겠나 싶지만, 그럼에도 생각해본다. 아마도 국제연대의 시작은 ‘아, 여기도 이래?’라는 공감과 놀라움의 시작이 아닐까. 일본과 한국은 법, 언어, 분위기가 모두 다르지만, 핵심은 같다. 노동자는 무시당하고 있었다. 법적으로 권리가 있음에도 무시당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법, 언어, 분위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거 같다. 우리 모두가 무시당하고 있고, 우리는 그걸 참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국제연대의 중요한 시작점이 아닐까. (닛토덴코 본사 건물 앞에서 이지영 사무장, 이훈, 배태선 교육국장이 지회 깃발을 들고 서있다.)2024-11-14 | 조회 1,919
